고정관념(固定觀念, a fixed idea)
고정관념의 사전적 의미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마음속에 굳어 있어 변하지 않는 생각.
둘째, 어떤 사람이나 집단의 마음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어서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어떠한 상황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생각.
셋째, 표제 음악에서 어떤 고정된 관념을 나타내는 선율.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 12. 11~1869. 3. 8)는 프랑스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베를리오즈는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작곡가로 유명합니다.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작곡가로 그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고정관념을 깨트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베를리오즈의 작품 ‘환상교향곡’은 그의 대표작입니다.
베를리오즈는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그가 본 악기라고는 작은 피리 한 개가 전부였습니다.
온 마을에 피아노 한 대가 없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17세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한 후 다양한 악기를 접할 수 있게 됐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작곡을 시작했고 좋은 작품을 쓰면서 점점 유명해졌습니다.
성공하고 큰 집도 장만한 베를리오즈는 피아노를 샀습니다.
그러나 그 피아노는 간단한 화음을 확인하는 정도로만 사용됐을 뿐입니다.
제자들이 베를리오즈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피아노를 배우지 않고 작곡가가 될 수 있었습니까?
우리가 아는 작곡가 가운데 피아노를 전혀 못 치는 분은 선생님뿐입니다.”
“나는 피아노를 안 배우면 작곡을 못 한다는 것을 몰랐네.
나는 파리에 와서 처음 피아노를 봤으니 그런 말을 들어본 적조차 없었지!”
때로는 불가능에 대한 지식이 고정관념을 만들고 존재하는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대다수의 교인들은 요한계시록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읽을 수 없고 더구나 해석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고정관념(固定觀念, a fixed idea) 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하셨을 때 어렵기 때문에 아무나 읽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별한 계시를 받은 몇몇 교주들에게만 읽고 해석하도록 계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요한계시록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인하여 잘못된 해석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요한계시록 1:3).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요한계시록 22:7).
* 09-14-2019 아침 묵상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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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固定觀念, a fixed idea)을 깨트리자!
요한계시록에 대한 고정관념은 읽어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읽어도 알 수 없도록 계시하셨을까요?
물론 대답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계시록을 읽지도 못했고 심지어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면서도 교회의 오랜 전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 깊숙이 자리를 잡고 말았습니다.
고정관념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알려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이 정기 건강 검진을 마치고 그 결과를 확인하려고 담당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담당 의사 책상 위에 자신의 정기 검진 결과를 알려주는 진단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얼핏 살펴보니 진단서에 “소부암” 이라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소부암” 이란 단어를 본 순간 “내가 암에 걸렸구나! 암이 너무 심각해 의사가 내게 아무 말도 못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 사람은 절망하고 낙심하여 사람도 만나지 않고 마음을 정리한 후 은둔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몇 달이 지나자 얼굴이 초췌해지더니 몸이 급격히 쇠약해져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려진 사실은 “소부암”이란 암의 일종이 아니라 담당 의사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암에 걸리면 반드시 죽는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정확한 내용도 모르면서 비극적인 결과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종교개혁자 칼빈(칼뱅)도 주석을 하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가 오랫동안 교회 안에 거룩한 전통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정말 개혁자 칼빈(칼뱅)이 요한계시록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주석을 할 수 없었을까요?
칼빈(칼뱅)이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요한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너무 많이 소개되어 교회마다 혼란을 겪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환경에 칼빈(칼뱅)은 또 다른 해석을 제시하므로 더 어지럽고 혼돈케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서를 발표하지 않았다는 것이 최근 요한계시록을 연구한 학자들의 결론입니다.
진실이 감추어진 이야기가 잘못 전달되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읽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복(福)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을 복(福)이란 개념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복(福)은 영생(永生)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복은 영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성경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구약의 예언은 “오실 메시아”라고 합니다. 신약의 예언은 “오신 메시아”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다시 오실 메시아”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목적은 심판(審判)이 아니라 구원(救援)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이란 영생의 자리로 완전히 옮겨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도적같이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이 언제 어디에 오실는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날과 그 시와 그 장소에 대해서 계시를 받았다는 거짓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고 오직 성경에 계시한 말씀대로 믿고 성경대로 주님을 기다리며 이 세상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며 증거 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당당하게 일어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09-16-2019 아침 묵상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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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의 말씀 #.1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요한계시록 1:3)
예언이란 한자어는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맡기는 예언(預言)
둘째는 미리 아는 예언(豫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미리 알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궁금증을 알려주는 것을 “예언(豫言)” 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예언자(豫言者)” 라고 합니다.
반면에 “예언(預言)”이란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예언자(預言者)” 라고 합니다. 또는 선지자(先知者)라고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헬라어 성경에서 살펴보면 “예언(豫言)” 이란 의미 보다는 오히려 “예언(預言)”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의 말씀이란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 대한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지금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로마 정부로부터 핍박과 심지어 순교의 현장으로 끌려갈 수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말씀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바르게 소통하며 진리에 대한 내용을 더 강렬하게 믿고 따르게 하는 깨우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밧모 섬에 갇혀 언제 순교의 현장으로 끌려 나갈지 알 수 없었던 사도 요한에게 진리의 말씀을 계시(啓示)하여 보여주고 들려주므로 현재의 고통스런 상황을 믿음으로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인내를 갖게 하는 소망의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을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로 함께 읽어가며 중요한 말씀을 함께 암송해 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예언(προφητείας) ; προφητεία(prophéteia, 4394).
prophecy, prophecy, prophesying.
the gift of communicating and enforcing revealed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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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을 깨트리는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제주도에 가면 세계적으로 아름답기로 유명한 정원인 ‘분재예술원’이 있습니다. 분재한 나무는 보통 나무보다 3∼4배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그 비결은 분갈이에 있습니다. 2년에 한 번씩 분갈이를 하면서 뿌리를 잘라주면 나무는 자기 몸의 진액을
짜내어 또 뿌리를 내립니다.
그 뿌리가 분 안에 가득 채워지는데 2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또 인정사정 보지 않고 뿌리를 잘라줍니다. 이 뿌리를 ‘고정관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2년 정도 반복된 생활을 하면 고정관념의 틀 속에 갇힌다고 합니다. 고정관념 속에 빠져들면 새로운 것을 보거나 듣기가 어렵습니다. 고정관념은 자기 발전을 위하여 반드시 넘어야 할 벽과 같습니다. 고정관념의 틀을 깨트리는 사람만이 미래의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복(福)이란 주제로 읽어보려고 합니다.
복(福)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두 개의 문자로 구분합니다.
“볼 시(示)”와 “부요할 부(富)” 라고 하겠습니다.
복(福)이란 한자를 분석한 의미는 “부(富)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부(富)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강조하는 부(富)는 “영생(永生)”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최고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영원하지 못한 것은 부(富)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영원한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뿐입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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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전 주석 장쩌민이 30분을 머물려고 그곳에 왔다가 1시간 30분 동안 머물며 “성범영원장의 분재 철학”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 중국 고위 관리들을 그곳에 보냈습니다. 일본 총리를 지낸 나카소네가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탈무드에 소개된 또 다른 예를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이 강에서 낚시로 큰 고기를 잡으면 버리고 작은 고기가 잡히면 바구니에 넣고 있었습니다. 낚시꾼을 지켜보던 행인이 “작은 고기를 잡으면 놓아주고 큰 고기를 잡아 가는데 당신은 왜 반대로 하십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낚시꾼은 “우리 집 프라이팬이 작아 큰 물고기를 구울 수 없어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큰 물고기를 잘라서 프라이팬에 넣으면 됩니다. 그런데 작은 프라이팬에는 반드시 작은 물고기만 사용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고정된 생각은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을 괴롭히는 고정관념은 착각(錯覺), 편견(偏見), 선입견(先入見), 고집(固執), 아집(我執), 흑백논리(黑白論理), 습관(習慣), 전통(傳統)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적 사고에 사로잡혀 삶의 질을 떨어트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유명한 화가 피카소가 어느 날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옆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피카소에게 “당신의 그림은 너무 난해하여 알아볼 수가 없소. 실제를 너무 왜곡하는 것이 아닌가요?” 라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피카소는 “그러면 실제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지요?” 피카소에게 질문했던 사람이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며 “이것이 실제 제 아내의 모습이요” 라고 말하자 피카소가 그 사진을 받아 이리저리 살피더니 “당신 부인은 끔찍하게 작군요, 게다가 납작 하구요! 이 사진은 종이지 실제 당신 부인이 아니잖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일반인들은 외면만 보려했지만 피카소는 사람이나 사물의 외면과 내면을 함께 보고 표현하랴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시작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할머니 발명가’로 알려진 모기업 대표 이씨는 일흔을 넘긴 팔십을 바라보심에도 “견사염색 방법”, “다시마차및 제조방법”을 특허 받았다는 기사가 났었다. 요즘은 “다시마 레몬과자”, “다시마 초코렛과자”, “다시마 엿” 등 여러 식품 아이디어 특허 진행중이시란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하고 4남매를 홀로 키우며 사셨다. 우연히 비단실로 일본옷을 하청받아 짜는 일을 시작하고부터 수백개 아이디어 발명품을 고안해 냈다. ‘어떻게 그런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느냐’란 질문에 ‘지속해서 모든 일에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고정관념 틀을 깨는 사고법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고정관념을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은 무수하다.
첫째, 다양한 정보를 체험하라!
먼저 폭 넓은 지식 혹은 정보를 얻는 것이다. 독서이든 여행이든 많은 직 간접 경험을 쌓아야 한다. 요즘은 많은 지식과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다. 책은 물론 만화책도 돌려가며 읽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배추는 파랗고, 무는 길고 하얗고, 고추는 익으면 빨간 것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배추, 무, 고추, 쌀, 콩 등은 그 모양, 크기, 색, 맛도 다양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서양인은 ‘사랑하는 자식은 여행을 시키라’, 우리 조상들은 ‘말이 나면 제주도로 자식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 하지 않았을까?
둘째 사고와 사고법을 전환하라!
그것이 창조적이든 역 사고 혹은 유연한 사고든 말이다. ‘왜’ 혹은 ‘그러면 타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이 맞을까? 이대로 좋은가?’ 등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셋째 시각에 변화를 주라!
다양한 각도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역 시각을 가져 보는 것이다. 낚시대에 연을 매어 날리는 그림을 보았다. 사람에 따라 “이상한 사람 혹은 기발한 발상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넷째 유사한 것을 따라 시도해 보라!
수영에는 자유영, 배영, 평영, 접영이 있다. 살펴보면 동물들이 물속에서 움직이는 방법을 흉내 낸 것이다. 흉내 내다 보면 새 착상을 얻을 수 있다.
다섯째, 또 다른 새로움에 도전하라!
제19회 멕시코 세계 올림픽 육상대회에서 미국 선수 ‘딕 포스버리’는 높이 뛰기에서 최초로 배면뛰기를 시도하여 정면뛰기 2m의 벽을 훌쩍넘어 2.38m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했었다. 그때까지 정면뛰기가 정석이었지만 그 후 배면뛰기가 정석이 되었다. 새로운 도전이 육상계의 한계를 넘어섰던 것이다. 이 외에 믿음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등이 있다. 더 이상 여군, 여경, 남스타일리스트, 남간호원이란 말이 어색하지가 않다. 고체잉크, 휘는 휴대폰이 나왔다. ‘남자는 강하다. 여자는 약하다’ ’가벼운 것은 약하고 무거운 것은 강하다’란 통념이 못된다. 옛 중국 사마광이 소년 시절 한 아이가 큰 물독에 빠져 익사할 직전이었다. 어른들도 올라가기 힘든 큰 독이라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이때 사마광이 큰 돌을 가져다가 항아리 밑 부분을 깨서 아이는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누가 큰 독을 기어올라 들어갈 것이냐를 생각할 때 사마광은 독을 깰 생각을 했다. 깨고 벗어나려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잘못된 고정관념은 자타를 망하게 한다.
“목이 곧은 자를 향해 회개하고 고침을 받으라” 하나님은 명하신다. 빗나간 고정관념의 아집과 고집을 벗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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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그곳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털끝만큼도 상상하지 못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
이야기만 듣고 신문 기사만 읽어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
너희가 직접 그 안에 들어가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어.”- 네티바 벤예후다(Netiva Ben-Yehuda)
중세 전쟁사를 전공한 유발 하라리는 전쟁을 통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어떻게 변하는지 추적하여 ‘극한의 경험’을 썼다.
“피를 뒤집어쓰고 사지를 늘어뜨린 채 이미 죽음이 목을 조여 오는 듯 쉰 목소리로 살려 달라 외치는 형체를 바라볼 때 비현실적인 느낌이 나를 옥죄었다.” 1914년 일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에른스트 윙거(Ernst Junger)는 고백했다. 전쟁은 인간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고, 인간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며, 세상에 대한 이해도 변화시킨다(Harari, 41/555).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J.R.R. Tolkien)도 1차 세계대전을 참전하였다. 수많은 젊은이가 무의미하게 목숨을 d잃고 가장 친한 친구들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는 전장에서 얻은 전염병으로 18개월 동안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다. 그는 고백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 얼마나 암울한 공포에 뒤덮여 있으며 얼마나 슬픔에 빠져 있는지.”(고명섭, 207)
1세기 교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쟁의 경험은 아니겠지만, 그와 버금갈 정도로 끔찍한 경험들을 하였다. 로마 검투사의 칼날에 살점이 찢겨나가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 형틀에 묶여서 갈고리 채찍으로 수도 없이 맞아 뼈가 허옇게 노출된 사람, 십자가에 매달려 일주일 내내 신음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 그들은 현대인이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그들은 어떻게 신앙을 지켰을까? 유발 하라리는 ‘극한의 경험’이 종교적 계시 경험과 맞닿아 있다고 하였다. 최악의 상황에서 사람은 현실을 뛰어넘는 신비한 경험을 하고, 평생 그것이 가슴에 남아 때로는 트라우마로 고생하고, 때로는 현실을 초월하는 경건을 배운다.
톨킨은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인간의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고명섭, 208). 이러한 경험과 생각에서 톨킨은 판타지 문학에 빠져들었다. 반면 현대인은 실용주의자이다. 계산적이고 합리적이며 예측 가능한 것을 좋아한다. 복음주의자들 역시 실용주의의 함정에 빠져들어, 성경에서 이론(교리)을 도출하여 ‘해야 한다’든지 ‘필요가 있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이야기를 경멸하고 신학과 교리를 설명하는 가르침만 추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고 생명을 바쳐 헌신하게 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은 위대한 이야기꾼이다. 최고의 설득을 쓴 카민 갤로(Carmine Gallo)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최고의 방법은 ‘이야기’라고 하였다. 그는 스티브 잡스가 존 스컬리(John Scully)에게 했던 말로 책을 시작한다. 스컬리는 37살 나이에 펩시콜라의 사장이 되었다. 8년이 지나고, '마케팅의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스컬리는 최고로 촉망받는 CEO가 되었다. 그때, 26살 청년 스티브 잡스는 45살 대기업 회장에게 신생기업 애플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스컬리는 당연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는 실망하지 않았다. 1983년 3월 마침내 스티브 잡스는 스컬리를 설득하였다. 스티브 잡스의 메시지는 간단하지만 힘이 있었다. “남은 평생 설탕물을 팔 건가요. 아니면 저와 함께 세상을 바꿀 건가요?”
오늘날 설교자들의 문제 중 하나는 뻔한 이야기를 뻔한 방법으로 전한다. 어느 교회를 가도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아무런 감동 없이 전한다. 대개 교인들은 졸거나 딴생각하기 일쑤이다. 그나마 귀를 기울여 듣는 성도들도 다음 주가 되면 지난주 설교를 다 잊어버린다. 말씀을 실천하는 교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신학교에서는 감동과 열정을 쏙 빼버린 이론(신학과 교리)만 열심히 가르친다. 마치 회사에서 세일즈맨에게 물건 사용설명서만 열심히 외우게 한 뒤, 물건을 팔라고 내보내는 것과 같다. 그 물건을 사용할 때 누릴 수 있는 행복(설령 그것이 가짜일지라도)을 열성적으로 전달해도 살둥말둥한데 말이다. 이런 회사와 신학교는 매우 유사하다. 신학교는 차갑게 식어버린 교리나 죽어있는 신학만 가르친다. 영혼을 살리는 말씀의 능력, 감동, 흥분, 기쁨은 가르치지 못한다. 그러니 목회 현장의 설교는 언제나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하다. 그렇게 기독교는 점점 죽어가고 있다.
성경은 다양한 이야기 모음집이다. 시, 잠언, 사랑 노래, 역사 이야기, 편지, 묵시 문학 등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중에도 묵시 문학인 요한계시록은 이야기 중의 최고다. 처음 요한계시록을 읽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현대 유행하는 판타지 문학을 생각하면,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해리 포터’ 등은 상상의 세계를 묘사하지만, 누구도 어렵다고 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초대교회의 판타지 문학과 같다.
판타지 문학이나 묵시 문학은 현실 도피적 성향이 있다. 끔찍한 전쟁 경험이나 박해 경험은 현실 세상에 환멸을 느끼게 만든다. 1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경험을 통해 판타지 문학에 심취했던 톨킨은 기독교 신앙 자체가 “도피가 영혼에 유익하다”는 믿음에 근거한 모험 인지도 모른다고 하였다(Yancey, 154).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은 도피를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옥 밖의 자유로운 세상을 그린다고 해서 죄수를 경멸해야 하는가(Yancey, 153)? 얀시는 되묻는다. 톨킨은 ‘판타지라는 도피적인 매체를 이용하여 현실을 넘어선 영혼의 여정을 자연스럽게 그려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성경의 묵시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 보자.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의 부패와 쇠락을 보고 괴로웠다. 어떻게 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잠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깨울 수 있을까? 시스템을 바꾸고, 성전 관리와 경영을 잘하면 될까? 성전(교회)을 고치고, 개혁하고, 갱신하고, 재구성하기 위하여 계획과 전략을 짜면 될까? 온갖 인간의 방법과 생각을 동원했지만, 아무런 소망이 없었다.
그러다 포로로 끌려간 후 (성전이 아니라) 그발 강가에서 놀라운 환상(해답)을 본다. 그는 아주 기괴하게 생긴 네 생물의 형상을 본다. 그 형상은 밧모 섬에 있던 요한이 보았던 형상과 비슷하다. 네 생물은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의 형상이었다(계 4:7, 겔 1:10) 그 후 에스겔은 마른 뼈들만 가득한 골짜기로 간다(겔 37:1-14). 뼈들만 가득한 그곳은 끔찍한 장소다.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한 곳이지만, 에스겔은 환상 속에서 놀라운 희망을 발견한다(Roxburgh, 90-91).
에스겔이나 요한이 보았던 환상은 톨킨이나 C.S. 루이스의 판타지 문학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감동적이고 흥미 있다. 불행한 사실은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서 감동과 흥분과 열정을 잘 발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도 요한은 절망의 환경 속에서 끔찍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환상의 이야기로 이끈다. 그리고 말한다. 세상이 아무리 절망적이고, 끔찍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나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묵시 이야기에서 초대 교인들이 느꼈을 감동과 흥분을 맛보게 된다.
비록 지금 교회의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천상 보좌에 앉아 왕 노릇 할 것이라는 놀라운 환상을 듣는 초대교인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묵시로 전달하는 사도 요한의 뛰는 가슴을 상상해 본다. 나는 점점 소망을 잃어가는 현대 교인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묵시 문학이 가지는 복음과 희망과 영감을 발견하고 맛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 배경락 목사는 기독교 인문학 연구소 강연자로, '곧게 난 길은 하나도 없더라' '성경 속 왕조실록' 등의 저자이다.
그는 일상의 여백 속에 담아내는 묵상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인문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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