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아포칼립시스, ἀποκάλυψις )


계시(아포칼룹시스, ἀποκάλυψις )

요한계시록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해석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이비 이단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더 나아가 잘못된 종말론에 빠져 반사회적이고 비밀스러운 종파가 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에 나타난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에 현혹되어, ‘인 맞음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요한계시록을 학습하고 과거시험 보듯이 시험보는 신천지 교인들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요한계시록 말씀이 얼마나 그들을 세뇌하였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요한계시록이라는 책 제목은 계시록 1:1이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계시 혹은 묵시라는 말은 헬라어 ἀποκάλυψις (아포칼립시스)에서 온 말이다.

구약 헬라어 성경에는 명사 ἀποκάλυψις (아포칼립시스)는 전혀 나오지 않고, 다만 외경 집회서에 단 한 번 나온다.
하지만 동사 아포칼립토(ἀποκαλύπτω)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었다(창 8:13),
율법이 금하는 하체를 드러내다(성적 방종)를 지칭하는데 이 헬라어가 쓰였다(출 20:26; 레 18:6, 8, 9; 20:11; 신 27:20). 
언급하다(룻 4:4), 드러내다(삿 5:2), 나타나다(삼하 3:7)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일반적 뜻과 함께, 신적 계시나 현현에 대해서 히브리어 גלה(가라)의 번역어로서 아포칼립토(ἀποκαλύπτω)가 사용되었다(삼하 9:15).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시가 드러나다의 의미로서 이 단어는 ‘묵시록’ 장르에 속하는 다니엘서에 등장한다.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ἀπεκαλύφθη , revealed 부정과거 수동태),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라”(2:19)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ἀποκαλύπτω),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2:22).

다니엘서는 ἀποκαλύπτω(아포칼립토)라는 용어를 하나님의 신적이고 비밀스러운 계시행위에 적용하여 특별히 사용한다.
다니엘서 7장부터 나타나는 환상들은 신구약 중간시대에 있었던 헬라 왕조의 유대교 박해상황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말의 희망을 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은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신앙의 핍박 상황에서 역사의 종말을 계시록의 저자가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으로 전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묵시문학은 신구약 중간시대나 기독교 신앙 박해 시대에서 저자 미상의 책들로 많이 출현하였다.

요한계시록에서 동사 아포칼립토(ἀποκαλύπτω)는 한 번도 나오지 않고, 다만 명사 ἀποκάλυψις(아포칼립시스)가 1:1에 나타날 뿐이다.

환상과 관련된 계시(아포칼립시스)가 나오는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은 박해의 상황을 전제하고 있고, 특별히 순교자를 칭송하며, 신앙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한다.

순교자는 궁창의 별처럼 빛나고(단 12:3), 주님과 함께 천년 통치하는 첫째 부활의 참여자가 된다(계 20:6).

이 책들은 미래적 사건이나 종말의 때를 알리려는 의도가 담겨 있지 않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종말의 때, 혹은 메시아의 나라의 시기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분명한 거부와 부정을 강조하고 있다(눅 19:11; 행 1:7).

요한계시록을 ‘때와 시기’에 관한 책으로 해석하려 한다면,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인, 나팔, 대접의 환상 시리즈는 이미 선포된 예수의 종말 예언(막 13장)에 대한 반복과 강화일 뿐이며, 요한계시록의 요한은 ‘선지자 전승’에 속한 종으로서(계 22:9), 재앙과 종말, 회복과 구원에 대한 구약성경의 이야기와 선지서의 예언에 나오는 이미지와 상징을 사용하여, 자신이 처한 로마제국 상황에 적용하고 해석할 뿐이다.

때와 시기를 특정하는 시한부 종말론으로 해석할 수 없는 책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숫자는 결코 문자적 의미가 없고 상징적일 뿐이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신적 권위로 로마와 황제를 우상숭배하는 시대적 조류에 반응하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해 칭찬과 책망을 하고 있다.

밧모 섬에 유배당하여 주의 날에 교회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선지자 요한은(계1:10),  환상 가운데 보게 되는 하늘의 예배에 울려 퍼지는 승전가를 듣기도 하고 종말의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계시는 편지형식으로 교회에 전해지고, 애굽의 군사들이 홍해에 수장된 후에 모세가 승리의 노래를 부른 것처럼, 모세의 노래는 이제 어린 양 예수의 노래가 되고, 교회의 새 노래, 즉 승전가가 된다(계 15:3).

요한계시록은 결코 ‘때와 시기'에 대한 묵시가 아니다.
애굽과 바벨론처럼 로마제국도 하나님의 역사 앞에 무너지는 제국이 될 것이며, 종말은 땅을 망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되고, 성도들에게는 구원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는 책이다.
모든 사이비 이단의 요한계시록의 묵시해석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을 사용할 때(갈 1:12),
그 계시(ἀποκάλυψις )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칭한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를 이방에 전하도록 그에게 계시로 나타나셨다(ἀποκαλύπτω, 갈 1:16) 고 말한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고(롬 1:17), 믿음의 때를 계시한다(갈 3:23)고 선포한다.

계시라는 용어에서 그리스도의 다시 나타나심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라는 묵시적 종말을 이야기하지만(고전 1:7; 살후 1:7)바울에게서 계시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주려는 계시인 것이다.

‘때와 시기’에 대한 계시는 없다.
주님의 말씀처럼,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행 1:7). 
때와 시기의 묵시를 말하면 다 가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