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4구절) 1:4, 3:1, 4:5, 5:6
요한계시록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 1:4~5).
이 말씀에 나온 ‘일곱 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신 ‘성령’을 일곱 영이라고 지칭하는 것일까? 놀랍게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성령이 하나가 아닌 일곱으로 표시될 수 있었을까?
여호와의 영, 지혜의 영, 통찰의 영, 모략의 영, 용기의 영, 지식의 영,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이렇게 일곱 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일곱이란 하나님의 완전하신 '1'의 숫자이다(창 2:2~3)
성령이 일곱으로 나타나는 최초의 경우를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머물 것이다. 곧 지혜와 통찰의 영, 모략과 용기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에게 머물 것이다”(사 11:2).
여호와의 영, 지혜의 영, 통찰의 영, 모략의 영, 용기의 영, 지식의 영,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이렇게 일곱 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일곱이란 하나님의 완전하신 ‘1’의 숫자이다(창 2:2~3).
‘여호와의 영’이 가진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혜의 영(호크마)’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망라해 요구되는 덕목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죄를 피하는 방면으로 이끄신다.
둘째, ‘통찰의 영(삐나)’은 바르게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릇되고 악한 것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보고 이해하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그분의 뜻하신 바대로 행하게 하신다.
셋째, ‘모략의 영(에차)’은 주로 정책을 결정할 때 필요한 지혜를 정책 결정자에게 제공해주는 참모 역할이다.
넷째, ‘용기의
영(킵보르)’은 용맹한 장수가 가지고 있는 강한 힘을 의미한다. 죄와 사명의 권세 아래 있는 사탄의 권세를 파하는 능력이다.
다섯째, ‘지식의 영(따아트)’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의 선하시며 은혜로우신 뜻을 행하게 하신다. 예를 들면 의와 공평을
행하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며, 불의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여섯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아르아)’은
자기를 세운 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의 자세와 태도를 의미한다. 이 정신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 기쁘시게 하려고 애쓴다.
일곱째, ‘여호와의 영’인 ‘루아흐’는 태초에 여호와께서 불어넣으신 호흡을 의미할 때 쓰였으나, 여기에서는 여호와께서 메시아로
하여금 구원사역을 감당하도록 그에게 주시는 영으로 나타난다. 요한계시록에 나온 ‘일곱 영’은 이사야에서 언급된 ‘일곱 측면의
영’을 살펴볼 때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은 지금도 다방면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신다. 그 안에서 완전한 능력과 섭리적 보호로 함께하신다. 온 인류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졌던 성령이 이제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들에게 함께 하신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주제이기도 하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경험할 여러 시련과 환난이 있다. 그 가운데 성령 안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를 받고, 세상에서 승리를 경험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은 의도된 상징의 방식으로 한 분이신 성령을 일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는 의도된 상징적 형상이나
숫자를 사용해서 성삼위의 세 번째 인격인 성령의 속성과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을 때 비둘기가 성령을 상징했다(마 3:16).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들에게 능력을 부어주실
때 그들은 방언을 말하게 되었는데, 그때 ‘불의 혀’가 성령을 상징했다(행 2:3). 만약 그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120명이었다면 거기에는 120개 성령의 화염이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성령이 여러 다른 방식으로
상징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을 한 분이신 성령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곱 영이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일곱 영”은 요한계시록 1:4, 3:1, 4:5, 5:6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4은 일곱 영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고 언급합니다. 요한계시록 3:1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진”다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4:5은 하나님의 일곱 영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켜진 일곱 개의 등불과 연결시킵니다. 요한계시록 5:6은 일곱 영을 어린 양의 “일곱 눈”과 동일시하고, 이들이 “온 땅에 보내심을 받[았다]”고 진술합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에는 최소 세 가지 가능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성령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특히 요한계시록은 완벽성과 완전함을 언급하는 데 숫자 7을 사용합니다. 만일 “일곱 영”의 “일곱”이 그와 같은 의미라면,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각기 다른 영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완벽하심과 완전하심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일곱의 천사들, 스랍 (seraphim)이나 그룹 (cherubim) 등을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수많은 천사들의 묘사와도 일치합니다 (요한계시록 4:6-9; 5:6-14; 19:4-5).
세 번째 가능한 해석은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라고 말씀하는 이사야 11:2에 근거합니다.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일곱 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 - 지 - 총 - 지 -주 - 재 -모
(1) 주님의 영,
(2) 지혜의 영,
(3) 총명의 영,
(4) 모략의 영,
(5) 재능의 영,
(6) 지식의 영,
(7) 주님을 경외하는 영
성경은 일곱 영들이 구체적으로 누구 혹은 무엇인지 말씀하지 않지만, 첫번째 해석, 즉 일곱 영이 성령이라는 견해가 가장 타당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전체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에 뒤에 나오는, 일곱 영을, 홀로 온전하고, 완전하신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미루어 추측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앞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성부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오고, 또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우리는 금방 보좌 앞에 일곱 영은, 성령(聖靈)이라는 것을 미루어 추측을 할 수가 있죠?
그러니까 일단 일곱이라는 숫자는 덮어 두세요. 그러면 어떻게, 그 일곱 영이,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일곱 영은, 어떤 메시지를 갖고 있기에, 그들이 은혜와 평강을 금방 떠올리게 되었는지, 성경에서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시록 5장 6절로 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 5:6)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합니다. ‘일곱 영은, 일곱 눈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일곱 눈은 구약에 어디에서 보셨죠? 스가랴서 4장 2절로 가겠습니다.
(스가랴 4:2-10)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3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지금 스가랴가 환상을 보고 있는데, 일곱 촛대, 일곱 등잔이 있고, 그 옆에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람나무에서, 금 기름이 계속 흘러 나와서, 그 촛대를 밝히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가랴가 ‘이 환상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5절부터 보겠습니다.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스가랴가 ‘이 환상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니까, 천사가, 그 장면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라고 대답을 해 줍니다.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 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9 스룹바벨의 손이 이전에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시작이 미미하다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라는 뜻입니다. ‘일이 안 될 것 같으냐?’ 이런 뜻이죠?)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으로 보고 기뻐하리라
10절에 보시면, ‘이 일곱 눈은 온 세상을 두루 살피는 여호와의 눈이다.’라고 나오죠? 계시록 5장 6절에는 일곱 눈은 뭐라 그랬습니까? ‘온 세상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영이다.’라고 했죠? 그리고 스가랴서 4장 6절에 보면,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의 신이다.’라고 하죠? 그러니까 일곱 영은,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 전체교회를 일곱 교회라고 계시록은 묘사하고 있어요.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에게 보내진, 온전하신, 완전하신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곱 교회에게 보내지는 성령님을, ‘일곱 영이다.’라고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자, 이 이야기는 스가랴가 본 환상(幻像)입니다. 스가랴에는 총 일곱 개의 환상이 나오는데요, 그중 5번째 환상입니다. 이 스가랴서 4장은 아주 어려운 본문으로 알려져 있죠? 그래서 이 스가랴서 4장만 가지고도, 1년을 설교를 하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여러분들에게 아주 짧은 시간에, 제가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환상은 하늘의 성전(聖殿)! 즉 하나님나라를 묘사하고 있는 환상입니다. 천상에 하나님나라! 성전을 묘사하면서, 그 성전이 지어져 가는 모습을 묘사하기도 하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떻게 묘사되는고 하니, 순금 등대에 일곱 촛대가 있고, 그 양 옆으로 두 그루의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등대로, 감람나무에서 계속 금 기름이 흘러 들어, 그 촛대의 불이 꺼지지 않는 장면이에요. 이 장면을 여러분이 머리에 잘 떠올리고 계세요.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스가랴가 천사에게, 이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묻죠? 천사는, ‘그것은 이런 거야!’라고 설명해주지 않아요. 그러면서 ‘네가 보고 있는 그 모습은,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能)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전을 재건하는 스룹바벨의 이야기로 끌고 가죠? 그러니까 이 장면은, 성령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참 성전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쉬운 말로 하면, 참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참 교회의 모습!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배웠죠? 우리는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교회잖아요? 그렇게 성령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스가랴서 환상에서는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따라와 주세요.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이 나오는데, 스룹바벨은 누굽니까? 제가 새가족양육반에서는 설명을 해 드렸죠?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었죠? 그리고 BC 538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성전재건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돌려 보낼 때, 1차 포로귀환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사람이, 스룹바벨이에요. 성전을 재건하는 임무를 띠고, 이스라엘로 귀환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스룹바벨입니다.
여호와긴이라는 사람이 있죠? 바벨론 포로 때 잡혀간,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열왕기하가 여호야긴의 석방으로 끝이나죠? 바로 그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왕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성전을 재건을 하는 데, 엄청난 방해가 있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BC 520년경부터 사역을 시작했는데요, 당시에는 페르시아의 다리오가, 애굽의 충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군대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불똥이 또 자기들에게 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재건을 방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했죠? 그리고 앗수르가 혼합정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수르로 데리고 갔고, 앗수르 사람들과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땅에 심어 놓았죠? 그래서 피가 섞였습니다. 그래서 남 유대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서, ‘사마리아 인이다. 개만도 못한 사마리아 인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남유대가 포로귀환을 하고 성전을 재건한다고 하니까, 이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들도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이니까, 그 성전재건을 돕겠다하고 나셨다고요. 그랬더니 남유대에서, ‘너희 같은 더러운 자들은, 성전재건에 참여할 수 없다.’하고 거절을 했다고요. 그래서 이 북이스라엘 사람들! 사마리아 사람들이 열이 받아서, 그 성전재건을 오히려 방해를 했습니다. 성전 재건하는 현장에다가, 시체를 갖다 뿌려놓고 그랬다고요.
그리고 요한복음에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리심 산에다가 자기들 마음대로 성전을 지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짓는데, 벽돌이 모자라고, 또 땅에 문제가 있고 해서, 계속해서 이 성전재건이 지연되고 있을 때예요. 그래서 스가랴가 ‘정말 성전이 재건될 수 있을까? 이 성전이 정말 재건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고요. 그때에 스가랴에게, ‘스룹바벨이 재건을 시작한 성전은, 반드시 이루어진다.’하고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전은 결국 BC 516년에 완성이 되죠? 역사적으로도요!
자 이런 역사적 배경을 머릿속에 넣어두시고 같이 가시자구요? 성경에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오죠? 스가랴나 학개, 에스라, 느헤미야 다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성전 재건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성경이 그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나타나는 성전 재건이라는 것은, 옛 성전을 무너뜨리고 새 성전을 지으시는,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을 창조하시는, 즉 교회를 탄생시키는, 여러분의 구원의 모습!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성전을 무너뜨려라! 내가 사흘 안에 성전을 짓겠다!’ 그렇게 말씀하시죠? 바로 그 구원의 모습을, 새 창조의 모습을, 이 성전 재건의 모습에서 우리는, 읽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어떤 방해가 있어도, 우리의 구원은 완성되고야 만다는 것을, 읽어내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장면이에요. 오직 성령으로 될 것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그 일은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가, 스가랴서 4장의 다섯 번째 환상인, 일곱 촛대와 두 감람나무인 것입니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이 환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게 어떻게 은혜와 평강에 메시지가 되는지! 10절에서 분명 이 일곱 촛대를 가리켜,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이다.’라고 이야기하죠? 성령입니다. 그런데 계시록 1장 20절에서는, 일곱 촛대를 다르게 묘사를 하고 있어요. 계시록 1장 20절로 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20)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라고 이야기해요. 일곱 교회는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죠? 바로 여러분을 상징하는 것이, 일곱 촛대라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스가랴서에서는, 얼른 피상적으로 보면, 일곱 촛대는 성령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죠? 이렇게 성경에서 일곱 촛대는, 성령으로도 표현이 되고, 교회로도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와 성령은 어떤 연관이 있기에 이렇게 표현이 되고 있는 것이죠? 눈치 빠르신 분들은 금방 이해를 하실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완성하셨죠?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올라가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성령을 이 땅에 보내셨어요. 그래서 교회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교회인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 참 교회의 모습이죠? 성령이 오셔야, 교회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교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죠? 요한복음 15장 26절로 가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26)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탄생되는 것입니다. 지금 스가랴서의 환상은,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금 기름이 공급되고 있죠? 그 기름은, 성령님이시라고요. 그래서 그 금 기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탄생되고, 성령님으로 유지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오시므로 탄생이 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의 조명(照明)과 인도(引導)와 충만을 받아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묘시하는 것이죠? 그 교회가, 천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이 땅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거든요. 여러분은 이미 불이 붙은 교회라고요.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부어지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는 빛을 발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라고요.
교회라는 것은 이렇게, 성령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유지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촛대에 불이 붙어서, 그것이 촛대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불이 붙어야 비로소 촛대가 되는 것이죠? 교회와 성령은 불가분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곱 촛대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탄생이 되고 빛을 발하게 되는, 교회(敎會)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누누이 설명해드린, 그리스도와의 연합! 유니온 크라이스트(Union Christ)를 떠올리시면, 조금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그럼 성경에 등장하는 그 촛대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한 번 살펴보자구요. 출애굽기 25장 31절로 가겠습니다.
(출애굽기 25:31-40)
31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 밭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32 가지 여섯을 등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그 세 가지는 이편으로 나오고 그 세 가지는 저편으로 나오게 하며
33 이편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밭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편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밭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같게 할지며
34 등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에 잔 넷과 꽃 밭침과 꽃이 있게 하고
35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 한 꽃밭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 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 밭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고
36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하게 하여 전부를 정금으로 쳐 만들고
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38 그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지니
39 등대와 이 모든 기구를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40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
네, 이렇게 등대를 비롯한 성막 전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으로 데리고 가셔서, 모세에게 직접 보여주신, 하나님나라의 모형이라고요. 모세가 하늘나라를 보니까, 그 하늘나라에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어떤 빛을 발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촛대로 묘사를 해 놓은 것인데요, 성막에 놓일 촛대를 만드는데, 촛대를 정금으로 만들어요. 촛대를 정금으로 만들라는 것은, 당시 금은 빛을 상징하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촛대는 지성소 앞에 성소에 위치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보좌 앞이죠? 그렇게 만들어진 촛대에, 불을 밝혀서, 1년 365일 24시간 불이 꺼지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계십니다. 왜 그 촛대에 불이 꺼지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실까요? 레위기 24장 1절로 가겠습니다.
(레위기 24:1-4)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태우기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지며 (절대 꺼뜨리지 말라는 거예요. 감람을 찌어낸 순결한 기름으로 그 불을 밝히는 것이죠? 스가랴의 환상과 흡사합니다. 그죠?)
3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아론더러, 대 제사장인 아론더러, 항상 등잔불을 정리하라고 합니다. 불이 꺼지지 않게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4 그가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의 등잔들을 끊이지 않고 정리할지니라
그럽니다. 여기서도 감람유를 끊임없이 촛대에 부어서,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명령하시죠? 제사장들은 바로 그 일을 했던 거예요. 왜 성막에, 성전에, 제사장들이 그렇게 많아야 하느냐? 바로 이런 일들을 했다고요.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흘러서 불이 꺼지지 않는, 그 스가랴의 환상과 동일하죠?
그러나 그 옛 성전! 성막에는, 제사장들이 감람나무 기름을 부지런히 날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에서의 환상은, 감람나무에서 직접 금 기름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라고요. 옛 언약에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무엇을 해야 합니다. 그렇죠? 새 언약에서는,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있어요.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를 나타내는 거죠?
성막(聖幕)은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모형(模型)입니다. 그 성막 안에 촛대라는 것은, 그 하나님나라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고, 하나님 보좌 앞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서, 빛을 발하는 어떤 무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 무리가 교회(敎會)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교회는, 성령의 기름으로 빛을 발하고 있어요. 그 교회는 성령의 기름으로만,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성령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죠? 그래서 교회는, 일단 불이 붙여지면, 영원히 빛을 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꺼질 수가 없다는 것이죠! 당시 유대인들은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스가랴서의 일곱 촛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들이였으니까요! 그 일곱 촛대에 부어지는 성령을 상징하는 금 기름으로, 촛대에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그 스가랴의 환상을 떠올리면서, 천사가 설명을 해준, 그 환상의 의미를 되새겼을 것이라고요.
어떤 말입니까? 이는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이야기를 떠올렸을 거라고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본연의 삶을, 재확인했을 것입니다. ‘맞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는 교회다! 이렇게 소심하게, 불성실하게, 겁쟁이처럼 살 수는 없다!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야지!’라고 결단(決斷)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게 하시는, 교회라고요. 그런데 정말 여러분의 삶 속에,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삶이, 그 빛이, 비춰지고 있습니까? 그 삶이 나오고 있습니까?
그 불은, 이미 2000년 전 오순절 날에, 성령이 교회에 오심으로 켜졌다고요. 여러분의 심지에, 그 불이 붙어 있습니까? 빛이 나오고 있습니까? 아니라면, 여러분은 가짜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로 가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17-18)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서 ‘주의 영광을 보다’는 구절의 ‘보다’는, ‘카토티조마임’입니다. 이 말은, ‘반영하다, 반사하다, 거울에서처럼 보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카토티조마임’의 이 시제는, 현재형이거든요! 헬라의 현재형은 뭐라 그랬죠? 계속 진행되는 것을 표현하는, 진행형을 나타내는 거라 그랬죠? 우리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빛으로, 반사해 내는 촛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로 갑니다.
(마태복음 5:14-16)
14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내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여기서 ‘말’은 호스(horse)가 아니라, 한 말, 두 말, 이렇게 말(斗)을 재는 그 ‘말’이에요.)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래요. 너희는 빛을 발하면서 살아야 되는 존재다. 그 빛을 발하는 삶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어떻게 돌립니까?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오직 빛을 드러내는 여러분의 삶인 것입니다. 요한1서 1장 5절로 가겠습니다.
(요한1서 1:5-7)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래요. 빛 가운데서 행하면, 빛이신 하나님처럼 빛 가운데 행하면, 너희는 교회다! 아니면? 가짜라는 것이죠. 에베소서 5장 8절로 가겠습니다.
(에베소서 5:8-9)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이 되라!’가 아니에요, ‘빛이다!’라고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성경은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난 교회에게, 빛을 받은 자로서, 빛을 발하며 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빛을 발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하죠?
소요리 문답 1번! 우리 인생의 목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 교회가 이 땅에서 당연히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빛을 발하며 사는 거예요. 무엇이 빛을 발하는 삶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까? 여러분! 부자가 되어서, ‘야!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간증하고 다니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일까요? 그럼 예수를 믿지 않는 빌게이츠는, 지금 누구한테 영광을 돌리는 겁니까?
아니면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이, 우리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일까요? ‘예수를 잘 믿으니까, 저렇게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구나!’ 그러면 하버드와 MIT와 예일에 있는 수많은 불교신자들과, 무신론자들은,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빛을 발하는 교회의 삶은 뭐예요? 이 땅에 빛으로 오셔서, 빛의 삶을 살다가 가신 분이 계시잖아요? 그 삶을 좇아가면 되는 거예요. 그 삶을 닮아 가면 되는 거예요. 그 삶을 흉내 내면 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을 보세요.
(요한복음 8:12)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에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께서 직접 당신을 가리켜, ‘나는 세상에 빛이다!’ 그러신다고요. 그리고 ‘나를 따르는 자는, 절대 어두움에 행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세요. 요한복음 12장 46절로 가겠습니다.
(요한복음 12:46)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
그 빛이 왜 왔다고요? 우리를 빛으로 만들기 위해서! 빛을 비추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불을 붙여서, 빛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어두움에서 건져 내서 빛을 발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그 빛이 이 땅에 오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빛이셨다고요. 교회는 그 빛을 그대로 흉내 내어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살다 가셨나요? 부자로, 권세를 누리면서 ,떵떵거리며 살다가셨나요? 아니에요. 힘들고 어렵지만, 그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다 가셨다니깐요. 요한복음 14장 9절 보세요.
(요한복음 14:9)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죠? 그 말은, 시편에 나오는, ‘아멘! 아멘!’이라는 말입니다. ‘아멘’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보고 듣고, ‘옳습니다! 맞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아멘! 아멘!’하고 말씀을 시작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하늘에서 보신 것과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그대로, ‘아멘! 아멘!’ 하면서 살다 가셨다는 거예요. 살아내고 가셨다는 거예요. 우리도 똑같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입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증인(證人)들이라고요. 그것이 교회에 존재 목적이라고요.
교회는 이 땅에서 수천만 불짜리 건물 짓고, 사람들 모아서 대단한 일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면서,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진정한 부흥이라는 것은, 교회에 맴버들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지어져 가는 것을, 부흥이라고 하는 것이지, 사람들 많이 모으고, 건물 큰거 사는 게 부흥이 아니라고요. 참된 리바이벌(revival)은, 우리가, 이 처치 멤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빛을 발하는 그 하나님의 자녀로, 잘 지어져 가는 것을, ‘부흥이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박국서에서 배웠잖아요?
부흥(復興)이 뭐였습니까? ‘주여 수 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라는 그 부흥이 뭐였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에게 불필요하고 악한 것들은, 오셔서, 어서 오셔서, 완전히 박살내주옵소서!’ 그게 부흥 아니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어? 세상에 저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네! 아니, 저들은 뭔가 다른 나라 사람들 같다. 아니, 도대체 누구를 닮은 것일까? 저들이 믿는 하나님은, 누구기에 저들이 저렇게 사는 것일까?’라는 평가를 드러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의 증인으로, 빛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떻게 만사형통(萬事亨通)! 일사천리(一瀉千里)! 여유만만! 또 뭐 있어요? 화기애애! 그런 것만 있겠습니까? 여러분! 거기에는 핍박(逼迫)과, 고난(苦難)이 따르게 마련이라고요. 여러분! 제가 제일 강조하는 게 뭡니까? 설교 때마다, 가장 강조하는 게 뭐예요? 스피드입니까? 뭡니까?
우리는 이 땅에 눈 두고 사는 사람들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우리는 이 땅에다가 아방궁 짓고, 기둥박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것이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크게 부흥하고 번영을 누리면서 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 땅의 삶에다가 금칠을 하려고 하시냐구요?
이 요한계시록을 받아서 읽던, 초대 교회 사람들은,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힘겨운 핍박과 고난에 겁을 먹고 있었고, 자신감을 잃고 있었고, 자폭하고 싶을 만큼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고요. 그들이 요한 계시록을 받았습니다. 누군가가 앞에서 이 요한계시록을, 감격에 복받쳐, 읽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듣다가, 그 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으로 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감격한 거예요. 그들은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것은, 힘으로 눈으로 되는 게 아니라, 성령에 힘으로 되는 것을, 깨달았을 거라고요. ‘아! 우리는 이렇게 약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시겠구나! 그 스가랴서의, 일곱 촛대 옆에 있는 그 감람나무로부터, 금 기름이 계속해서 공급이 되어서, 그 촛대에 불이 꺼지지 않듯이, 우리는 이렇게 약하지만, 교회는 성령으로 탄생되고 성령으로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끌고 가시겠구나!’ 하고 평강을 얻었던 거예요. 안도의 숨을 쉬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평강(平康)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평강은, 아무 일 없는 그런 상태가 아니에요. 전쟁이 없는 그런 상태가 아니에요. 전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확신! 고통 속에서도 반짝이는, 어떤 소망! 공격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오고 있는데, 내 안에 흔들리지 않는 그 소망 때문에, 내가 기뻐하고, 내가 흔들릴 수 없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평강인 것입니다.
인터넷에, 군대에서 고참들의 횡포를 견대지 못하고, 자살을 한 어떤 병사의 기사 아래에, 이런 다른 이등병의 편지가 올려져 있었습니다. 똑 같은 상황에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살을 했고, 어떤 사람은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저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밥도 이제 먹을 만하고, 잠을 못자는 것도 이제 견딜 만합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게으르고, 저만 생각하며 살았는지, 절실히 느끼고 배웁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얼차려를 주고, 행패를 부리는 고참들을 보면서, 교회에서 배웠던 인간에 죄성(罪性)을 배웁니다. 그리고 결심해 봅니다.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그러나 자신이 없습니다. 저도 힘을 얻게 되면, 얼마든지 약자를 깔볼 수 있는 죄인이니까요. 힘에 벅찬 유격훈련을 받으면서, 제 몸이 얼마나 허약한지 깨달았습니다. 이 허약한 몸으로, 그동안 얼마나 객기를 부리며 살았었는지, 참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힘이 들지만, 배우는 보람이 있네요. 힘이 들어 무너져 버리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만 떠올립니다. 제가 그렇게 무너지면, 어머니가 실망하실 테니까요. 삶이 힘드니까, 어머니가 더욱 보고 싶습니다. 지금 저는 제대할 날만을 기다립니다. 제대할 때까지 많이 배우고, 바른 사람이 되어, 돌아가겠습니다. 제대하면 꼭 어머니께 효도하겠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어머니와 함께 할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이렇게 기쁩니다.
네 똑같은 상황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도저히 못 견디겠다 하고, 목숨을 끊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니야! 이 상황은 나에게 꼭 필요한 거니까 내가 여기서 많이 배우고 사람 되어서 나는 돌아갈 거야! 나는 여기서 뭔가 배우고 돌아가야 해!’ 하고 다른 반응을 보였다고요. 핍박이 끊어지지 않았어요. 공격이 끊어지지 않았어요. 고참들의 횡포가 끊어지지 않았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속에, 그에게는 소망이 있었다고요. 이제 나에게는 곧 제대할 날이 다가올 것이고, 제대를 하면 나를 두 팔 벌려 맞이해주실 그 어머니가 있다는 거예요. 그 어머니와, 영원해 행복하게 살 그날을 소망하면서, 지금 나는 뭔가 배워서, 어머니가 기뻐하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가겠다는 거예요. 그게 평강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교회를 이 땅에 던져 놓으신 것입니까?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거예요. 하늘나라에선 필요 없는, 그러한 악한 것들! 추한 것들! 다 잘라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과 경건을 연습하고 훈련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하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에게 훈련교관을 붙이신다고요. 말도 안 되는 억지! 분 냄! 짜증! 핍박! 횡포! 그런 것으로 우리를 괴롭히게 한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배우는 거예요. 거기서 인내와, 사랑과, 용서와, 온유를 배우는 것입니다. ‘어쩌다 내 삶에, 저런 웬수가 나타나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가?’로 가지 마시구요.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금 뭔가를 가르치고 계시는 구나!’로 가시란 말이에요.
이 자리에는 분명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하하) 그 분들은 기도하세요. 여러분은 지금 죽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들어서 썼던, 수많은 민족과 사람들을 보세요. 형체도 없이 사라졌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관심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기 위해서, 잠시 들어서 썼다가, 그들은 완전히 멸망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회개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유 없는 핍박과 고난을 받으시면, 기뻐하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지금 세심한 관심과, 세심한 배려로, 여러분을 만들고 계시는 거예요. 핍박을 당하시는 여러분!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자기 한 몸 편하기 위해, 남을 괴롭히는 사람들! 핍박을 가하고 있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죽으시면 안 됩니다.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삶 속에, 지금 견디기 힘들고,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그러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까? 그래서 도저히 더 이상은 못 갈 것 같은 좌절에 빠진 분들! 혹시 계십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은, 이미 성령님께서, 테이크 오버(take over)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사시는 이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시라고요. 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으로 데리고 가실까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그런 일을 허락하셨을까요?
이제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옥에 가면, 하나님도 지옥에 따라 오셔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지옥에 못 가요. 우리의 신분은 그렇게 안전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힘든 상황을 허락하셨다면, 지금 우리에게 닥친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들은, 다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데, 필요한 것들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걸 놓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걸 아는 우리가, 어찌 평안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보좌 앞에 일곱 영!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천국으로 향하고 있는, 순례자(巡禮者)들입니다. 나그네들입니다. 여러분! 그 분이 계속해서 우리를 조명하고 계시고, 힘을 주고 계시고,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응원하고 계시다고요. ‘이겨라! 이겨라! 이겨라! 내 새끼들아!’ 감람나무에서는 지금도 계속 금 기름이 흘러나오고 있다고요. 우리는 불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힘내십시오.
초대교회 사람들이, ‘성령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는 말만 듣고도, 그렇게 평강을 얻었다면, 여러분도 동일한 평강 안에 거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이 그 엄청난 방해에도, 기어코, 새 성전을 완성을 해 냈듯이, 하나님나라는 반드시, 속히, 완성이 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고 계신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힘내십시오! 다시 한 번 꼭 마음에 세기세요.
하나님은 완성된 하늘나라의 복을 가지고, 우리에게 역동적으로 오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과, 성령님으로 함께 하고 계시다고요. 두려워 마세요! 평강을 찾으십시오! 은혜와 평강! 그것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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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 1:4~5).
이 말씀에 나온 ‘일곱 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신 ‘성령’을 일곱 영이라고 지칭하는 것일까?
놀랍게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성령이 하나가 아닌 일곱으로 표시될 수 있었을까?
성령이 일곱으로 나타나는 최초의 경우를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머물 것이다. 곧 지혜와 통찰의 영, 모략과 용기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에게 머물 것이다”(사 11:2).
여호와의 영, 지혜의 영, 통찰의 영, 모략의 영, 용기의 영, 지식의 영,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이렇게 일곱 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일곱이란 하나님의 완전하신 ‘1’의 숫자이다(창 2:2~3).
‘여호와의 영’이 가진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혜의 영(호크마)’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망라해 요구되는 덕목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죄를 피하는 방면으로 이끄신다.
둘째, ‘통찰의 영(삐나)’은 바르게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릇되고 악한 것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보고 이해하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그분의 뜻하신 바대로 행하게 하신다.
셋째, ‘모략의 영(에차)’은 주로 정책을 결정할 때 필요한 지혜를 정책 결정자에게 제공해주는 참모 역할이다.
넷째, ‘용기의
영(킵보르)’은 용맹한 장수가 가지고 있는 강한 힘을 의미한다. 죄와 사명의 권세 아래 있는 사탄의 권세를 파하는 능력이다.
다섯째, ‘지식의 영(따아트)’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의 선하시며 은혜로우신 뜻을 행하게 하신다. 예를 들면 의와 공평을
행하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며, 불의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여섯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아르아)’은
자기를 세운 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의 자세와 태도를 의미한다. 이 정신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 기쁘시게 하려고 애쓴다.
일곱째, ‘여호와의 영’인 ‘루아흐’는 태초에 여호와께서 불어넣으신 호흡을 의미할 때 쓰였으나, 여기에서는 여호와께서 메시아로
하여금 구원사역을 감당하도록 그에게 주시는 영으로 나타난다.
요한계시록에 나온 ‘일곱 영’은 이사야에서 언급된 ‘일곱 측면의
영’을 살펴볼 때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은 지금도 다방면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신다. 그 안에서 완전한 능력과 섭리적 보호로 함께하신다. 온 인류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졌던 성령이 이제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들에게 함께 하신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주제이기도 하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경험할 여러 시련과 환난이 있다. 그 가운데 성령 안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를 받고, 세상에서 승리를 경험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은 의도된 상징의 방식으로 한 분이신 성령을 일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는 의도된 상징적 형상이나
숫자를 사용해서 성삼위의 세 번째 인격인 성령의 속성과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을 때 비둘기가 성령을 상징했다(마 3:16).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들에게 능력을 부어주실
때 그들은 방언을 말하게 되었는데, 그때 ‘불의 혀’가 성령을 상징했다(행 2:3). 만약 그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120명이었다면 거기에는 120개 성령의 화염이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성령이 여러 다른 방식으로
상징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을 한 분이신 성령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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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영 - 일곱 눈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의 뒤에 나오는 일곱 영을 홀로 온전하신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미루어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성전 재건”이라는 것은 옛 성전을 무너뜨리고 새 성전을 지으시는,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창조하시는 즉, 교회를 탄생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유지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어, 세상에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네’ ‘저들은 뭔가 다른
나라 사람들 같다’라는 평가를 들어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4-8
4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이 내려 주시고,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 내려 주시고,
5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의 첫 열매이시요(또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맨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씻어') 주셨고,
6 우리로 나라를 이루셔서, 자기의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7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지난주에 우리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전에도 계셔서 그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셨던 그 하나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누릴 그 복을 가지고 역동적으로 우리에게 오고 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이제도, 지금도 우리를 이끌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를 감격케 했습니다. 역동적으로 지금 오고 계신다는 것은 이미 완성된 미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완성된 미래에서 오시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이미 완성된 미래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안전하고 확실한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보좌 앞의 일곱 영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보좌 앞의 일곱 영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은혜와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일곱 영은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 일곱 영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계속해서 공부하겠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일곱이라는 숫자에 전체, 충만, 완전, 완성이라는 특별한 개념을 부여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전체 교회를 굳이 일곱 교회라고 ‘일곱’이라는 숫자를 동원해서 묘사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의 뒤에 나오는 일곱 영을 홀로 온전하신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미루어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앞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성부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오고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우리는 금방 보좌 앞의 일곱 영은 성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일곱’이라는 숫자는 덮어 두세요. 그러면 어떻게 그 일곱 영이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일곱 영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계 5:6)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일곱 영은 일곱 눈이라고 합니다. 일곱 눈은 구약의 어디에서 보셨지요? 스가랴 4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슥 4:2-10)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3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10절에 보시면 ‘이 일곱 눈은 온 세상을 두루 살피는 여호와의 눈이다’라고 나옵니다. 여러분이 조금 전에 읽으셨던 요한 계시록 5장6절에는 ‘일곱 눈은 온 세상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영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둘을 잘 연관 시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읽으신 스가랴서4장의 내용은 스가랴가 본 환상입니다. 스가랴에는 총7개의 환상이 나오는데 그 중 다섯 번째 환상입니다. 이 환상은 하늘의 성전 즉, 하나님 나라를 묘사하고 있는 환상입니다. 천상의 하나님 나라, 성전을 묘사하면서 그 성전이 지어져 가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떻게 설명이 되고 있습니까? 등대에 일곱 촛대가 있고 그 양 옆으로 두 그루의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등대로 감람나무에서 계속 기름이 흘러들어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스가랴가 천사에게 이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천사는 ‘그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을 해주지 않고, 네가 보고 있는 그 모습은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전을 재건하는 스룹바벨의 이야기로 끌고 갑니다. 그러니까 이 모습은 성령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참 성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쉬운 말로 하면 참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이 나오는데 스룹바벨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었지요?. 그리고 BC586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성전 재건을 위해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돌려보낼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그는 왕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성전 재건을 하는데 엄청난 방해가 있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BC520년경부터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페르시아의 다리오가 애굽의 충성을 확인하기 위해 군대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불똥이 또 자기들에게 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북이스라엘(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 재건을 방해를 해 오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스가랴가 ‘정말 성전이 재건 될 수 있을까?’하고 걱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스가랴에게 ‘스룹바벨이 재건을 시작한 성전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고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성전은 결국 BC515년에 완성됩니다.
성경에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오지요? (스가랴나 학개 에스라 느헤미야 다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성전 재건이라는 것은 옛 성전을 무너뜨리고 새 성전을 지으시는,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창조하시는 즉, 교회를 탄생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성전을 무너뜨려라. 내가 사흘 만에 새로 짓겠다’고 하셨지요? 그러므로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가 스가랴서 4장의 다섯 번째 환상인 일곱 촛대와 두 감람나무인 것입니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이 환상을 보겠습니다. 10절에서 분명 이 일곱 촛대를 가리켜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이라고 합니다. 성령입니다. 그런데 계시록1장20절에는 일곱 촛대를 다르게 묘사를 합니다.
(계 1:20)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합니다. 일곱 교회는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바로 여러분을 상징하는 것이 일곱 촛대입니다. 그런데 스가랴서에서는 일곱 촛대는 성령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일곱 촛대는 성령으로 표현도 되고 교회로도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와 성령은 어떤 연관이 있길래 이렇게 표현이 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탄생시키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 성령께서 교회인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 참 교회의 모습이지요?
(요 15:26) 26 내가 아버지께 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 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지금 스가랴서의 환상은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기름이 공급되고 있습니다. 그 기름은 성령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오심으로 탄생이 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의 조명과 인도와 충만을 받아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천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이 땅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부어지는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는 영원히 빛을 발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가 맞습니다. 그러나 왜 성경이 일곱 촛대를 또 성령으로 묘사를 하는지 아세요? 교회는 성령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유지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촛대에 불이 붙어서 그것이 촛대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불이 붙어야 비로소 촛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령은 불가분 떨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곱 촛대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탄생되고 빛을 발하는 교회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가 누누이 설명해 드린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christ)을 떠올리시면 조금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출 25:31-40) “31 순금을 두들겨서 등잔대를 만들어라. 등잔대의 밑받침과 줄기와 등잔과 꽃받침과 꽃을 하나로 이어놓아라. 32 등잔대의 줄기 양쪽에서 곁가지 여섯 개가 나오게 하였는데, 등잔대 한쪽에서 곁가지 세 개, 또 다른 한쪽에서도 곁가지 세 개를 나오게 하여라. 33 등잔대의 각 곁가지는 꽃받침과 꽃잎을 갖춘 감복숭아꽃 모양 잔 세 개를 연결하여 만들고, 그 맞은쪽 곁가지도 꽃받침과 꽃잎을 갖춘 감복숭아꽃 모양 잔 세 개를 연결하여 만들어라. 등잔대의 줄기에서 나온 곁가지 여섯 개를 모두 이와 같이 만들어라. 34 등잔대 줄기는 꽃받침과 꽃잎을 갖춘 감복숭아꽃 모양 잔 네 개를 쌓아 놓은 모양으로 만들어라. 35 그리고 등잔대의 맨 위에 있는 좌우 두 곁가지가 줄기에서 뻗어날 때에는, 밑에서 세 번째에 놓인 꽃받침에서 뻗어나게 하고, 그 아래에 있는 좌우 두 곁가지가 줄기에서 뻗어날 때에는, 밑에서 두 번째에 놓인 꽃받침에서 뻗어나게 하고, 그리고 맨 아래에 있는 좌우 두 곁가지가 줄기에서 뻗어날 때에는, 맨 아래에 놓인 꽃받침에서 뻗어나게 하여, 여섯 곁가지를 줄기와 연결시켜서 한 덩이를 만들어라. 이렇게 등잔대의 줄기에서 좌우로 곁가지가 나오게 하여라. 36 등잔대 줄기의 꽃받침에 연결된 곁가지들은 모두 순금을 두들겨 만들되, 전체를 하나로 이어놓아라. 37 등잔 일곱 개를 만들어서, 그것을 등잔대 위에 올려 놓아, 앞을 밝게 비추도록 하여라. 38 등잔불 집게와 불똥 그릇도 순금으로 만들어라. 39 등잔대와 이 모든 기구를,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어라. 40 이 모든 것을, 내가 이 산에서 너에게 보여 준 모양 그대로 만들도록 하여라.”
여러분께서 성경을 통해 익히 확인하신 것처럼 등대를 비롯한 성막 전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성막에 놓일 촛대를 만드는데 촛대를 정금으로 만듭니다. 촛대를 정금으로 만들라는 것은 당시 금은 빛을 상징하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촛대는 지성소 앞의 성소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이지요. 그 촛대에 불을 밝혀 1년365일 24시간 불이 꺼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절대 불이 꺼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교회는 그렇게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빛으로 존재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레 24:1-4) “1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가져다가 등불을 켜게 하되, 그 등불을 늘 켜 두어라. 3 아론을 시켜 회막 안 증거궤 앞에 쳐 있는 휘장 바깥에 그 등불을 켜 두어,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 앞에 계속 켜 두게 하여라.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길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 4 아론은 주 앞에서, 순금 등잔대 위에 그 등불을 늘 켜 두어야 한다.”
여기서도 감람유를 끊임없이 촛대에 부어서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사장들은 바로 그런 일을 했던 것입니다.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흘러 불이 꺼지지 않는 스가랴의 환상과 동일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옛 성전에서는 제사장들이 감람나무 기름을 부지런히 날라야 했지요. 성막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그 성막 안의 촛대라는 것은, 그 하나님 나라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 빛을 발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인데 그 무리가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성령의 기름으로만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영원히 빛을 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시 구약을 줄줄이 꿰고 있던 유대인들은 ‘보좌 앞의 일곱 영’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스가랴서의 일곱 촛대를 생각했을 것이고 그 일곱 촛대에 부어지는 성령을 상징하는 금 기름으로 촛대에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스가랴의 환상을 떠올리면서 천사가 설명을 해 준 그 환상의 의미를 되새겼을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본연의 삶을 재확인했을 것입니다. ‘맞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는 교회다’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야지’ 하고 결단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회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게 하시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정말 여러분의 삶 속에서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나오고 있습니까? 그 불은 이미 2000년 전 오순 절 날에 성령이 교회에 오심으로 켜졌습니다. 여러분의 심지에 불이 붙어있습니까? 빛이 나오고 있나요?
(고후 3:17-18) “17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여기서 ‘주의 영광을 보다’라는 구절의 ‘보다’는 ‘카톱트리조마이’입니다. 이 말은 ‘반영하다, 반사하다, 거울에서처럼 보다’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카톱트리조마이’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이것은 계속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빛으로 반사해 내는 촛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 5:14-16)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길 수 없다. 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요일 1:5-7) “5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6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7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서 살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엡 5:8-9) “8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9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난 교회에게 빛을 받은 자로서 빛을 발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빛을 발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합니다. 소 요리 문답1번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이 땅에서 당연히 해야 할 것이 빛을 발하며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빛을 발하는 삶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까? 부자 되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도우신다’ 이렇게 간증하고 다니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그럼 예수를 믿지 않는 빌게이츠는 누구한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일까요? 하바드와 MIT의 수많은 불교 신자들과 무신론자들은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빛을 발하는 교회의 삶은 무엇입니까? 보좌 앞의 촛대가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여 빛을 발하듯이 빛으로 오신 분이 살다 가신 그 빛의 삶을 사는 것이 빛을 발하는 삶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요 8:12) “12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 12:46)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빛이셨습니다. 교회는 그 빛을 그대로 흉내 내어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어떻게 살다 가셨나요? 삶으로 하나님을 설명하시고 가셨습니다.
(요 14:9) “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한다는 말이냐?”
우리도 똑같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입으로 하나님을 증거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어, 세상에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네’ ‘저들은 뭔가 다른 나라 사람들 같다’라는 평가를 들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증인으로, 빛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떻게 만사형통, 일사천리, 여유만만 이겠습니까? 거기에는 핍박과 고난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 때, 그렇게 빛으로 살다가 힘이 들 때, 먼저 살다간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을 기억하는 겁니다.
이 요한 계시록을 받아서 읽던 초대 교회 사람들은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힘겨운 핍박과 고난에 겁을 먹고 , 자신감을 잃고 있었던 그들이, 이 요한 계시록을 받아서 읽다가 이 ‘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것은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되는 것임을 깨닫고 ‘우리는 이렇게 약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어 내시겠구나‘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평강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지금 견디기 힘들고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까? 그래서 도저히 더 이상은 못 갈 것 같은 좌절에 빠져 계신 분들 혹시 계십니까? 우리의 삶은 이미 성령님께서 take over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사시는 이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으로 데리고 가실까요? 이제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옥에 가면 하나님도 지옥에 따라오셔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은 그렇게 안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닥친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들은 다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데 필요한 것들이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우리는 보좌 앞의 일곱 영,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천국으로 향하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그 분이 계속해서 우리를 조명하고 계시고 힘을 주고 계시고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응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초대 교회 사람들이 성령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보좌 앞의 일곱 영이라는 말만 듣고도 그렇게 평강을 얻었다면 여러분도 동일한 평강 안에 거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이 그 엄청난 방해에도 기어코 새 성전을 완성을 했듯이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속히 완성이 될 것입니다. 성령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고 계신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힘내십시오. 다시 한 번 꼭 마음에 새기세요. 하나님은 완성된 하늘나라의 복을 가지고 우리에게 역동적으로 오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과 성령님으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두려워 마세요. 평강을 찾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