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5-20 파트리스교회
네 생물의 형상(에스겔 1:5, 10. 요한계시록 4:6-7)
네 생물의 형상(에스겔 1:5, 10. 요한계시록 4:6-7)
오늘의 묵상을 위한 말씀으로 "에스겔서"를 읽고 있습니다(10월 31일 토요일 에스겔 1장)
에스겔서를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요한계시록을 읽기 위한 것입니다.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문학 형식 : 유대 묵시 문학
묵시문학의 기능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1. 묵시문학은 위기에 처한 백성들을 위로하고 고무하는 힘을 제공한다.
2. 묵시문학은 기존 질서에 대해서는 강한 저항 의식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다니엘서에서는 "지혜"를 생각하게 합니다.
에스겔서에서는 "환상"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내용 형식 : 환상
환상이란 "눈 앞에 없는 사물의 모습이나 광경이 실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환상은 독특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방법이다(이사야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환상의 내용은 당시 이스라엘의 시대상과 미래에 구속받을 이스라엘의 모습 등 광범위하게 나타났으며 주로 예언자와 선지자들에게 나타났다.
에스겔서 :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의 파괴와 회복
요한계시록 : 로마의 멸망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
에스겔의 환상 : 하늘 보좌(10장)와 예루살렘 성(40-48장)
요한계시록의 환상 : 하늘 보좌(4-5장)와 새 예루살렘(20-22장)
셋째는 상징적 환상 : 네 생물
에스겔 1:5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에스겔 1: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은 네 생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네 생물이란 사람과 사자와 소와 독수리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4:6-7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
사도 요한이 본 환상에서도 네 생물의 모습이었습니다.
네 생물이란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라고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네 생물의 환상과 사도 요한이 보았던 네 생물의 환산은 같은 것들입니다.
이제부터 네 생물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결론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 타나났던 네 생물의 의미는 "오직 복음" 또는 "오직 예수"라고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네 생물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복음을 상징적인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은 "사자" 마가복음은 "황소(송아지)" 누가복음은 "사람(인자)" 요한복음은 "독수리" 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상징을 사용한 이유는 복음서의 내용은 비슷하지만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의 대상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를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왕과 선지자는 반드시 유대 혈통을 계승해야 하므로 마태복음을 시작할 때 먼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혈통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대상은 로마인들에게 메시아를 소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 메시아는 세상의 왕으로 오셨다고 전한다면 로마 당국에서는 반역죄라고 하여 처형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황소(송아지)처럼 죽도록 일만하고 마지막에는 먹거리로 자기 몸을 내준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대상은 헬라인들에게 메시아를 소개한 것입니다.
헬라인들은 이성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더구나 헬라 철학의 특징은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주제로 발전했기 때문에 헬라인들이 좋아하는 사람을 내세워 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대상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소개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메시아는 독수리와 같이 높은 공중에서 먹잇감을 발견하면 즉시 내려와 먹이를 채가는것처럼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내려와서 죄로 말미암아 멸망한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옮겨 갈 것이라고 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네 생물의 환산을 에스겔은 바벨론의 포로가 된 백성들에게 장차 바벨론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깨우쳤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바벨론 포로에서부터 70년이 지난 후에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이전의 모습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소개되었습니다.
48장에서 그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고 불렀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하늘 보좌에 올라갔을 때 네 생물을 목격한 것입니다.
네 생물들이 보좌 주위에 둘러 섰고 눈들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눈들이 가득하다는 것은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 없이 보고 있다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누가 지켜보고 있습니까?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께서 지켜보십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마태복음 17: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요한복음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데살로니가전서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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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빌립보서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마태복음 17: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데살로니가전서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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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구의 비교
지난 10월 31일(토) 부터 오늘의 묵상을 위한 말씀 에스겔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기 전에 에스겔서를 먼저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요한계시록은 22장 404절 12,000단어(영어)로 구성된 말씀입니다.
에스겔서는 48장 1,273절, 39,407단어(영어 )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2장 중에서 9장, 13장, 14장, 16장을 제외하고 전반에 걸쳐 에스겔서가 인용되고 있습니다.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에스겔 1:5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에스겔 1:7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
요한계시록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요한계시록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내용의 비교
네 생물의 형상(에스겔 1:4-14)
* 에스겔서 : 생물(18회)
1:5, 8, 12, 13, 14, 15, 19, 20, 21, 22, 23, 24, 25
3:13
10:15, 17, 20
47:9
* 요한계시록 : 생물(18회)
4:6, 7, 8, 9
5:6, 8, 11, 14
6:1, 3, 5, 6, 7
7:11
14:3
15:7
16:3
19:4
지난 11월 7일(토)부터 에스겔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에스겔은 48장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을 비교할 때 공통점은 환상을 기록하여 전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에스겔은 크게 두 가지 환상을 본다.
첫째는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환상(1장, 10장)
둘째는 "새 예루살렘 성(도시)과 성전"에 대한 환상(40-48장)
사도 요한은 두 개의 환상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하늘 보좌(4-5장)
둘째는 새 예루살렘(20장)
오늘은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소개된 "네 생물"에 대한 주제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우선 네 생물의 모양을 살펴보겠습니다.
에스겔 1:5, 10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요한계시록 4:7-8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네 생물은 장차 오실 자라고 요한계시록에서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네 생물은 장차 오실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가 기록된 시기는 대략 기원전 592~571년 경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은이 기록된 시기는 기원 후 95~96년경 이라고 합니다.
구약 에스겔서와 신약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의 시간차는 대략 700년입니다.
700년 동안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과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비슷합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이 지나도 큰 변화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신약의 사복음서를 상징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메시아를 소개하기 때문에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족보를 먼저 제시하고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마태복음에서 소개되는 메시아는 밀림의 왕 사자라고 합니다. 곧 메시아는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대상으로 메시아를 황소라고 소개합니다.
당시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태복음처럼 메시아를 왕이라고 소개한다면 마치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오해를 하지 않도록 죽도록 일만하는 황소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은 헬라인들을 대상으로 메시아를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을 좋아하고 이성적인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메시아는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소개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메시아를 독수리라고 소개합니다.
독수리는 조류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통찰력을 갖고 공중 높은 곳에서부터 지상의 작은 생물까지도 먹이로 발견되면 즉시 내려와 낚아채기 때문입니다.
네 생물의 모양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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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THE REVELATION
요한계시록은 22장, 404절, 12,000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기록 시기 : 주후 96년경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담은 기록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서 그것을 받아 천사에게 주었고 천사는 요한에게 그것을 표적으로 보여 주었다.
주제 : 하나님이 정하신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요 5:22, 27)
목적 :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최종 목적과 인류와 사탄의 최종 종착지 특별히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최후 상태를 보여 주는 것
내용 : 계시록은 하나님의 백성이 외부의 원수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또 미지근한 성도들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위로와 경고의 메시지로 모든 교회에게 주어졌다. 이 책은 또한 신구약 성경의 진리를 요약하며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의 성취를 보여 주고 특히 창세기와 함께 완전하게 진리의 사이클을 구성한다. 요한은 자기가 본 것들과 지금 있는 것들과 이후에 있을 것을 기록하면서(1:19) 먼저 그리스도의 환상(1장), 교회의 심판(2-3장), 교회의 휴거 이후에 이 땅에 남는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을 향한 7년 환난기(4-19장), 천년왕국(20:1-6),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사탄의 패배(20:7-15),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21-22장)을 차례대로 기록한다. 요한계시록은 22장, 404절, 12,000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 19장(영광의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핵심 절 : “네가 본 것들과 지금 있는 것들과 이후에 있을 것들을 기록할지니”(1:19)
핵심 단어 : 이기다(2:7, 11, 17, 26; 3:5, 12, 21), 세상을 이기는 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이다(요일5:5),
핵심 구: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2:7)
계시록의 그리스도 : 살아 계셔서 승리하시는 주님(1:18),
영적 교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지키라.”(1:3)
에스겔
EZEKIEL
에스겔서는 48장, 1,273절, 39,407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기록 시기: 주전 560년경,
기간 : 22년 이상,
수신자: 포로 생활 초기에 바빌론에 거하던 유다 백성
이름: 에스겔은 ‘하나님이 나를 강하게 한다’를 뜻한다.
에스겔은 제사장의 아들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90회나 그를 ‘사람의 아들’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가리키며 80회나 사용한 귀한 명칭이다. 그는 “주의 손이 내게 임하시니라.”는 표현과 함께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대언자였다.
주제 : 바빌론 포로 생활이 시작되면서 주의 영광이 떠난 것과 이 땅에서 이루어질 천년왕국 때에 그분의 영광이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오는 것
목적 : 슬픔과 시련을 당하는 때에 하나님의 왕국에서 그분과 함께 누릴 영광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를 격려하고 강하게 만드는 것
배경 : 에스겔의 활동 시기는 바빌론 포로 시대 초기인 주전 590-560년경이었다. 에스겔이 바빌론에서 유다의 몰락과 회복에 대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예레미야가 실제로 유다 왕국의 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느고의 군대는 주전 605년경 유프라테스 강가의 갈그미스에서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에게 패하였으며 그 이후에 갈대아 사람들이 중동 지역의 지배자가 되어 유다를 속국으로 삼았다. 사악한 여호야김 왕은 대언자들을 박해하고 유다 민족의 영적 타락을 가져왔으며 폭정을 행하였다. 그는 느부갓네살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느부갓네살이 유다에 이르기 전에 수치스런 죽음을 당하였다.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은 석 달을 다스린 후 예루살렘을 포위한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하였다. 예루살렘을 약탈한 후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은 수천 명의 상류층 사람들을 사로잡아 바빌론으로 잡아갔는데 에스겔은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기 7년 전부터 바빌론에서 하나님의 대언의 메시지를 선포하며 적어도 22년 이상 사역을 수행했다.
내용: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될 것을 대언하는데 이것은 편안히 거하는 자들에게 이집트가 바빌론의 멍에를 끊을 것이라는 헛된 생각을 버릴 것을 촉구하고 결국 그들의 죄들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히 임할 것을 보여 주고자 함이었다. 그는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함을 강력히 대언하였다. 그 후에 그는 메시아의 천년왕국이 유다 땅에서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고 유대인들이 그분의 은혜를 통해 복을 받음을 보여 주는 소망의 메시지를 준다. 그의 대언의 많은 부분은 상징으로 주어졌으며 그는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그것들의 성취를 보여 주었다. 한 마디로 에스겔서는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성전을 떠나는 것과 예루살렘의 멸망과 미래의 천년왕국의 도래를 그리고 있다.
에스겔서는 48장, 1,273절, 39,407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 37장(마른 뼈 환상),
핵심 절 : 이제 제삼십년 사월 곧 그 달 오일 내가 그발 강가에서 포로들 가운데 있을 때에 하늘들이 열리며 하나님의 환상들이 내게 보이니라.”(1:1),
핵심 단어 : 환상,
핵심 구 :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6:7), 이 표현은 60회나 나옴.
에스겔서의 그리스도 :
1. 목자(34:23),
2. 다윗(34:23),
영적 교훈 : “주의 성소를 회복하라.”
요한계시록은 모두 22장 404절로 구성된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중에서 9장, 13장, 14장, 16장을 제외하고 전반에 걸쳐 에스겔서의 본문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스겔서를 상대적으로 많이 수용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본문들과 에스겔서의 본문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에스겔서를 인용한 요한계시록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부분은 심판 예언(겔 1~32장)
둘째 부분은 회복 예언(겔33~48장)
회복예언은 또다시 크게 두 부분으로
새 이스라엘의 회복(겔 33~39장)
새 예루살렘 성전과 새 제사와 새 땅(겔 40~48장)
그 중간에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재앙들이 소개됩니다.
따라서 에스겔서의 구성은 요한계시록과 흡사하다고 하겠습니다.
에스겔서를 어떤 이는 "요한계시록의 축소판"이라고도 부른다.
그만큼 요한계시록(모든 것의 완성)을 이해하는 데 에스겔은 매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에스겔서는 정말 놀라운 예언의 책이자 계시의 책이다.
이와 비슷한 신약의 책이 한 권 더 있는데 그것은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도 에스겔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경 중에서 유일하게 예언의 책이자 계시의 책인 것이다.
먼저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의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놀랍게 거의 비슷하다.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이 먼저 나오고 이어서 중간에 재앙들이 나오고, 마지막에 가서 새 예루살렘 성(성전)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성 면에서 보나 내용면에서 보나 가장 많이 에스겔서를 많이 빼닮은 요한계시록을 에스겔과 서로 비교해보는 것은 대단한 유익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어쩌면 제2이사야서(40~66장)를 신약성경(마태복음~요한계시록)의 축소판이라고 정의한다면,
에스겔서는 "요한계시록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를 요한계시록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에스겔서의 독특한 특징은 무엇인가?
에스겔서는 요한계시록과 비교해 볼 때에 어떤 책인가?
첫째, 예언서(豫言書), 계시서(啓示書)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에스겔서를 잘 알고 있거나 에스겔서를 쓰게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가 시대만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동일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과 하나님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보았기 때문이요,
그것을 책의 맨 앞과 맨 뒤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도 에스겔서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주변의 광경 그리고 하나님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과 성전의 모습을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다.
둘째, 하나님께서 장차 메시야로 보낼 존재가 다름 아닌 "하나님" 이다.
에스겔 3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장차 보내주실 메시야는 다름이 아니라 여호와다.
여호와께서 친히 선한 목자로 오셔서 친히 이스라엘을 다스리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으로 오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메시야로 오실 것임을 에스겔서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셋째,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의 약 700년의 시간차가 있어, 하늘의 광경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비교해 볼 수가 있다.
에스겔서가 쓰여진 시기는 B.C. 592~571년경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A.D. 95~96년경에 쓰였다.
시간차는 대략 700년 이다.
하지만 하늘의 광경이 많이 달라졌다.
에스겔서에는 없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며(예를 들어, "24장로들"),
네 생물의 날개가 2쌍에서 3쌍으로 달라져 있다.
넷째, 같은 것을 묘사하고 있지만 에스겔서에는 없지만 요한계시록에는 있는 것과 에스겔서는 있지만 요한계시록에는 없는 것이 있다.
에스겔서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대재앙을 간단하게 묘사한다.
그것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과 사나운 짐승들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은 3대 7중 재앙으로서 다양하고 많이 커졌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의 재앙은 일곱인과 일곱나팔과 일곱대접 재앙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참고로, 7인은 재앙만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에스겔서에는 자세히 기록되었으나 요한계시록에는 짧게 기록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새 예루살렘 성에 있는 성문의 12지파의 이름들이 요한계시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에스겔서에서 나오고 있고,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에게 땅의 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지에 대해 요한계시록은 언급하지 않지만 에스겔은 언급하고 있으며,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의 직분 중에 제사장과 땅의 왕들이 있는데, 이들이 어떤 자격을 얻어야 그러한 직분을 얻게 되는지 에스겔서가 더 잘 묘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조금 미흡하다고 느끼는 것이 있다면 에스겔서를 통독해보기를 권해 드린다.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 보좌의 환상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에스겔이 환상 중에 올라가 본 하늘에는 한 마디로 궁창과 하나님의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이와 네 생물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음성과 천사들의 날개 부딪히는 소리가 있었다. 에스겔 보았던 하나님의 보좌는 수정같이 맑은 궁창 위에 있었으며, 그 보좌의 모양이 남보석 같았고 그 보좌 위에 사람같은 한 분이 앉아 계셨다(겔 1:26~28). 그분의 허리 위의 모양이나 허리 아래의 모양은 달아오른 금붙이와 같은 광채가 사방으로 나고 있었고, 무지개가 그 보좌에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네 생물들의 머리 위에 수정같이 맑은 궁창(펼쳐진 광활한 공간)이 있었다(겔 1:22).
그런데 에스겔은 보좌를 보기 전에 먼저 본 것은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이었다(겔 1:5~21).
네 생물은 하늘에 있는 그룹천사 형상을 지니고 있었는데(겔 10:15,20), 그들은 꼭 사람의 모습같았다(겔 1:4~13).
그들의 모습은 특이했으니, 각각 사방으로 네 개의 얼굴을 가졌고, 네 개(2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 네 생물의 사면 얼굴모습은 송아지(그룹), 사람, 사자, 독수리의 얼굴이었다(겔 1:10, 10:14).
네 생물들의 밑에는 횃볼같이 타는 바퀴같은 것이 있었고 이 바퀴에 둘러가면서 눈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 생물이 가고자 하면 바퀴가 들려져서 이동하였다(겔 1:15~21).
그리고 날개가 부딪히는 소리는 놀랍게도 "많은 물소리" 같았다(겔 1:24, 3:13).
그리고 네 생물의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모양 같은 것이 있었다(겔 10:21).
그러나 계시록에 나오는 네 생물은 얼굴 모습이 다르다.
각 생물들은 오직 한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개는 늘어나서 6개(3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요한이 그 생물이 모습을 한 쪽면만을 봐서 한 면만이 보여진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당시에는 더이상 4면의 얼굴보다도 한 면의 얼굴만을 가져도 상관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의 네 생물의 날개는 모든 것이 완성된 후이기 때문인지, 그들의 권위가 훨씬 더 올라가 있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네 생물의 날개가 두 쌍에서 세 쌍으로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700년이 지난 후에는 그만큼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것에 대한 보상이 주어진 것 같다.
그러나 확연히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에스겔을 비롯한 다른 구약의 성도들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 있는 24장로들과 거기에서 경배하고 찬양하고 있는 성도들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왜 그런 것일까? 그 이유는 아직 구약의 성도들이 부활체를 입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부활체를 입으신 분이기 때문이다(고전15:20). 그러니까 예수께서 부활체를 입기 전까지 구약의 성도들 중에는 부활체를 입은 자가 아직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영체로서 천국에 있는 낙원에 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부활의 첫열매로서 부활체를 입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게 되었고, 그후에 구약의 성도들은 한꺼번에 부활체를 입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때 구약의 대표 성도들 12명이 12개의 보좌 위에 앉게 되었고(아마도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 등이 앉아 있지 않을까 추정해본다), 그리고 신약의 12사도들(가룟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바울이 앉아있을 것이라고 추정해본다)도 12보좌에 앉게 된다. 그리고 그후로 신약의 성도들은 죽으면 곧바로 부활하여 생명의 부활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뵈옵는다.
그때 에스겔은 보좌로부터 나오는 전능자로부터 큰 음성이 들었다. 이때 “보좌 위에 앉으신 이"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은 꼭 “맑은 물소리”와 같았다(겔43:2). 그런데 전능자의 "맑은 물소리"같은 음성은 “그룹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도 같았으며 “군대가 떠드는 소리”와도 같았다(겔10:5, 1:24).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많은 물소리"와 같은 음성은 “예수님의 음성”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계1:8,21:6,22:13). 더욱이 예수님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처럼 들리기도 했지만(계1:15) “나팔같은 큰 음성”으로 들리기도 했다(계1:10, 4:1). 또한 천국에서 “많은 물소리”의 음성은 “구원받은 백성들의 찬양의 음성”이기도 했다(계19:6).
4. 두루마리 책과 책을 먹는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어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에스겔에게 한 권의 두루마리 책을 건네주신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서 먹으라고 하신다(겔2:8~9). 그런데 두루마리 책은 안팎으로 글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글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겔2:10). 그것은 장차 에스겔이 예언할 계시의 내용이었는데, 그것의 내용은 재앙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입에 넣어준 책은 먹기에는 달기가 꿀 같았다(겔3:3). 비록 재앙의 말이 기록되기는 했어도 그 말씀은 엄연히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도요한도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에 대한 환상을 보았고(계5:1), 또한 작은 두루마리는 자신이 직접 받아서 먹게 된다(계10:2). 먼저, 사도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로부터 어린양이 일곱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 책을 받더니, 그 인봉을 떼는 장면을 보게 된다(계5:1,5,7~8). 그때 두루마치 책에는 "장차 되어질 일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재앙의 내용도 들어 있다. 그렇다. 요한계시록에는 2개의 두루마리 책이 나온다(계5:1, 10:2). 하나는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 책인데(계5:1), 큰 책이었고 봉인되어 있는 책이다. 그리고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6~22장에 나오는 “장차 될 일”을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그리고 펴놓인 채 있는 “작은 두루마리 책”이 하나 더 나온다(계1:2,8~10). 그것은 이미 봉인된 책들이 다 풀어졌고 여섯째 나팔재앙까지 다 떼어진 상태이므로 이제 "작은 두루마리"가 된 것이다. 예수께서 재림을 준비해야 하시기 때문에 힘센 천사에게 그것을 위임한 것이다. 이것은 일곱째 나팔의 재앙이 기록된 책이다. 그런데 이때 사도요한이 받아서 먹었던 "작은 두루마리"도 사실은 에스겔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먹었을 때에는 사도요한의 입에서는 꿀같이 달았다. 하지만 그것이 뱃속에 들어갔을 때에는 쓰게 되었다(계10:9~10). 그것 안에 수많은 재앙들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5. 장차 일어날 재앙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에스겔이 받아서 먹었던 두루마리 책에 기록되어 있는 재앙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된 것이었다(겔2:10). 그리고 그 내용을 살펴보니, 재앙들은 하나님께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과 ‘사나운 짐승’으로 예루살렘을 파멸시키겠다는 것이었다(겔5:16~17, 6:11~13, 7:5~10,15~16).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인의 봉인된 두루마리의 내용도 역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을 담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다 재앙은 아니다. 왜냐하면 첫째인을 뗄 때에 나온 흰 말은 재앙이 아니기 때문이다(계6:8). 아마도 복음전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둘째인으로 인한 붉은 말, 셋째인으로 인한 검은말, 넷째인으로 인한 청황색말의 출현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재앙을 가리키는 것이다(계6:2~8). 그런데 이때 사용된 재앙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땅의 짐승들"에 의한 재앙도 들어있었기 때문이다(계6:8). 여기서 "땅의 짐승들"이란 요한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땅의 짐승들(계13:11)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자 다섯째인이 떼어질 때부터 사람이 죽어가는 재앙이 임하기를 시작하였다. 곧 다섯째인이 떼어지자, 짐승에 의한 순교자 재앙이 발생하였으며(계6:9~11), 여섯째인이 떼어질 때에는 해와 달과 별들로 인한 자연 재앙이 임하여 사람을 해치게 되었다(계6:12~17). 고로, 일곱인은 예수승천이후 재림전까지 지구상에서 일어날 일을 언급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일곱째인은 총7개의 나팔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첫째나팔과 둘째나팔과 셋째나팔과 넷째나팔의 재앙은 지해강천(땅과 바와 강과 하늘)에 있는 생명첵 1/3을 죽이는 재앙이었고(계8:1~13), 다섯째나팔부터는 짐승을 통해 사람을 죽이는 재앙이었다(계9:1~12). 그리고 여섯째나팔은 온 인류가 죽은 아마겟돈전쟁을 예비하는 것이었다(계9:13~21). 그리고 일곱째나팔이 불어지는데, 일곱나팔은 일곱개의 대접재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일곱대접심판은 짐승의 치하에 내리는 재앙들이다(계16:1~21). 이때 첫째와 둘째와 셋째와 넷째대접 재앙은 지해강천(땅과 바다와 강과 하늘)의 생명체 전부를 죽이는 재앙이었고, 다섯째 대접재앙은 짐승의 보좌에 내리는 재앙이었으며, 여섯째 대접재앙은 사탄의 삼위일체(용, 짐승, 거짓선지자)가 모여 인류를 아마겟돈으로 모으는 것이었고, 마지막으로 일곱째 대접재앙은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지는 재앙이었다. 이는 큰 성 바벨론인 음녀가 죽는 재앙을 가리킨다.
6. 에스겔은 어떻게 공간을 초월하여 이동할 수가 있었는가?
이제는 에스겔이 어떻게 공간을 초월하여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보게 되었으며, 여러 장소로 순식간에 이동하여 그곳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았는지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통해서, 에스겔의 영혼을 육체로부터 분리한 뒤 그를 하나님의 보좌에도 데려갔을 뿐만 아니라, 여러 장소에 순식간에 이동시켜 그곳의 사정을 정확히 보게해 주었다. 이러한 예는 겔8:3과 11:1의 경우에 나온다다. 이때 에스겔은 바벨론에 있있지만 순간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여, 때로는 바벨론의 그발강가의 델아빕에 갔다 올 수 있었고(겔3:12,14),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볼 수가 있었다(겔8:3). 그리고 겔11:24의 경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이동하여 그의 영이 바벨론지역에서 포로인들이 일하고 있는 일터로 데려다 주기도 하였다. 영이 빠져나가서 순식간에 이동을 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요한계시록에도 고스란히 나온다. 사도요한의 몸은 밧모섬에 있었지만 그의 영은 몸에서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가서 주님이 보여주시는 계시와 환상을 보고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계1:10, 4:1~2).
나오며
에스겔서는 제1장과 10장에서,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소상히 소개해준다. 그러니 이 책은 구약성경의 책들 가운데에서 몇 안 되는 독특한 계시서에 속한다. 그리고 에스겔이 예언할 때에는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요한처럼, 온갖 재앙이 기록되어 있는 두루마리를 먹고 예언을 한다. 그렇다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4가지였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재앙 뿐 아니라 땅의 짐승들로 인한 사망 재앙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대도 아마도 시기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문제는 온갖 재앙을 받고 있는 자라도 다시 회복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회개"를 통한 방법이다. 이것은 다음 주에 더 소상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에스겔서는 실로 놀라운 책이다. 그저 에스겔37장에 나오는 에스겔골짜기의 마른 뼈 환상만 기억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곳곳에 하늘의 모습과 새 예루살렘 성과 도시에 관한 정보가 빼곡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시퍼의 타락과정에 대한 계시는 이사야 14장과 더불어 에스겔 28장이 백미다. 그 어디에서도 이러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요한계시록 12장과 누가복음 10:18~20의 말씀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정보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스겔서를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원형적인 사건과 그 소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들어가며
에스겔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분이시며 그분이 모든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다. 왜 그런가? 그것은 에스겔이 보았던 것들이 놀랍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B.C.622년에 태어나서, 그의 나이 30세인 593년부터 예언을 시작했는데, 약22년간을 바벨론에서 예연했던 대선지자 가운데 한 명이다. 더욱이 그가 본 하나님 보좌의 환상(겔1,10장)과 또한 그가 보았던 새 예루살렘 성과 성전에 대한 환상(겔40~48장)은 그때로부터 약 700년 뒤인 A.D.95년경에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보았던 환상에 대한 밑그림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에스겔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묵시(계시)를 이해하는데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했을 것이며 또한 정확한 이해도 어려웠을 것이다.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들이 또 다시 요한계시록에도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에스겔서는 작은 요한계시록 내지는 요한계시록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주에 이어서 에스겔서를 전체적으로 복습하되, 에스겔서 9장부터 33장에 나오는 말씀을 요한계시록과 서로 견주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이마에 표를 치는 환상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어느날 에스겔을 불러 그의 영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신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자들을 보여주신다(겔8장). 놀랍게도 거기에는 이스라엘의 장로 70명이 서기관 사반의 아들인 야아사냐와 함께 향로를 들고서 우상에게 향을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성전의 북문에 가보니, 여인들이 앉아 동방태양의 아들인 담무스를 애곡하고 있었고, 또한 성전 안뜰에 가보니, 레위인들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자신의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방태양에게 예배하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이도록 6명의 사람들(천사들)을 파송하신다. 그들의 손에는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들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중의 한 명 곧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그릇을 찬 사람에게 말했다.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겔9:4)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사람에게는 성읍 중에 있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다 죽이되, 이마에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은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 중에서, 결코 우상을 숭배하지 아니하면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자들을 주님이 보호하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심판 중에라도 우상숭배를 멀리하고 그것에 대해 애통해하는 자들을 지켜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일이 요한계시록에도 기록되어 있다(계7장). 그것은 여섯째 인이 떼어지고 일곱째 인이 떼어지기까지 중간계시로 등장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땅과 바다와 각종 나무들을 치기 전에 특정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에게 인을 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즉 어떤 천사가 동쪽에서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올라오더니, 하늘의 네 바람을 주관하는 천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미아 인을 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계7:3)"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곧바로 인침을 시작되었는데, 인을 받은 자들의 숫자를 들으니, 이스라엘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총 144,000명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사람들로서, 각 지파에서 12,000명이 인침을 받은 자들이다(계7:1~8).
그렇다면, 이때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은 144,000명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원받은 자들"을 지칭하는 표현일 수도 있겠고, "신구약의 백성들 가운데 구원받은 자들의 총수"일 수도 있을 것이다(본인은 후자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요한계시록에서 더 자세히 나온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인침을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자들로서 결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성도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요한계시록 14장에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들은 "시온 산에 서 있는 144,000명의 성도들"로서(계14:1), 그들의 이마 위에 어린양의 이름과 어린양되신 그분의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자들이다(계14:1). 다시 말해, 천사들이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친 것은 이들의 이마 위에 하나님과 아들의 이름을 인친 것이다. 이러한 표시는 이제 그들이 완전히 하나님과 어린양의 소유가 되었다는 표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들을 빼앗기지 않으실 것이라고 표시를 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의 인침을 받아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인가? 그것은 요한계시록 14장에 더 자세히 나온다. 이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네 생물들과 24장로들과 더불어 새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자들로서, "땅에서 구속함을 입은 144,000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자에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했으며, 순결을 지킨 처녀들이다. 이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었고, 처음 익은 열매(첫째부활)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입에는 거짓말이 없었으며, 흠이 없는 자들이다(계14:2~5). 그래서 이들은 곧 구약의 구원받은 성도들과 예수승천 이후 개인적으로 구원받아 부활체를 입고 첫째부활에 참여하여 천국에 들어간 자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첫째부활"이란 둘째부활을 전제하는 말로서, 둘째부활이 예수재림직전에 있을 전 우주적인 부활을 가리킨다면, 첫째부활은 예수승천이후 개인적으로 죽어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는 부활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에는 이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표를 받은 자들의 예표가 나오는데, 그들은 빌라델비아 성도들 중에 이기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때 예수께서는 빌라델비아교회의 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기고 있는 자에게는 내가 내 하나님 성전 안에 그를 기둥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면 그가 결코 더이상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의 하나님의 이름과 나의 하나님의 성의 이름 곧 하늘로부터 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사람 위에 장차 기록할 것이다(계3:12. 직역)" 고로 여기서 "인침"이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이상 밖으로 쫓겨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이들은 이 땅에 있을 때부터 빌라델비아 성도들처럼 시험의 때로부터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계3:10).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천사로부터 하나님의 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인침을 흉내내는 자들이 나온다. 그들은 사탄의 3위일체다(계16:13). "사탄"과 "짐승"과 "거짓선지자"도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소유가 되었음을 인치는 행위를 하는데, 이때 짐승이나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의 이마 위에나 혹은 오른손 위에 표를 하는 것이다(계13:15~18). 그런데 이 표는 짐승의 이름이며 짐승의 숫자와 같은 것으로서, 바로 "666"이다(계13:17~18). 고로 "666"이라는 것은 베리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자기의 소유가 되었음을 표시하는 영적인 표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자그마한 칩을 사람의 몸속에 집어넣는 것을 두고서 "666"표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주장하는 이들이 지금도 있다. 아니다. 틀렸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창세이후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채,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들이 짐승에게 경배하고 이 표를 받는다 했다(계13:8). 그렇다면, 베리칩이 나오기 전에는 짐승의 표를 받았던 사람들이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는 말인가? 베리칩론자들은 지금도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3. 음녀는 누구를 가리키며, 그들의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선지자를 통해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음녀"에 비유하였다. 그들의 음행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에스겔 16장과 23장에 적나나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두 자매 중에서 북이스라엘을 "오홀라"라 이름하였고, 남유다는 "오홀리바"라고 칭하였다. 그런데 이들 중에 먼저 북이스라엘이 음녀가 되었음을 말씀하신다. 그녀가 연애한 것은 "애굽사람"과 "앗수르 사람"이었다는 것이다(겔23:5~10). 그리고 남유다의 오홀리바도 연애를 하였는데, 그녀가 연애한 것은 "애굽사람"과 "앗수르사람"과 "갈대아사람(바벨론)"이라고 하였다(겔23:11~21).
여기서 "음녀"라 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이 섬기던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되었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 있을 때부터 애굽의 신을 섬기던 음녀였다. 그들이 애굽에서부터 우상을 숭배하고 살았다는 것은 그들의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왔을 때에 그들이 광야에서 만들어 섬긴 송아지 우상에게서 그 증거가 발견된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한 민족으로 살았으나,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왕 때에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고 만다. 그리하여 북이스라엘은 일찌감찌 우상을 들여오게 되는데, 나중에는 앗수르의 신들을 들여오고 앗수르제국의 왕들을 의지하게 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연애하던 앗수르제국에게 음녀인 그녀를 넘겨버리신다. 그리고 이어서 남유다도 자신을 구원해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를 의지했다가 이어서 바벨론을 의지했다가 그리고 또다시 애굽을 의지했다가 하다가 멸망당하고 만다. 물론 남유다 백성들도 앗수르와 바벨론과 애굽이 섬기던 신들을 들여와 우상숭배를 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남유다도 그들이 의지하였던 제국들에 의해 망하도록 허락하신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반드시 망한다는 것이 음녀의 교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도 오직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야할 성도들이 음녀가 되어버린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계17~18장). 그리고 음녀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 이외의 구원자는 없다. 그렇지만 거짓말장이요 속이는 자인 사탄마귀는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마저도 유혹하여 자신을 따르게 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것은 "사치"와 "향락"이다(계17:4, 18:7). 그래서 순결한 처녀로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만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탄마귀와 귀신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이다. 이들이 주는 것이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음녀에게서 빠져 나오라고 강력하게 권고한다.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사탄이 주는 것으로서, 그것이야말로 우상숭배하는 자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계18:4~5).
4. 두로왕의 타락과 애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에스겔28장은 두로왕의 타락을 언급한다. 두로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주변의 7개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서, 특히 두로는 교만이 하늘을 찔렀던 도시국가의 하나였다. 특히 두로는 지정학적으로 육지에서부터 약 800m 떨어진 섬과 육지를 동시에 갖고 있는 특별한 도시국가였는데, 이중에서 두로의 섬은 공격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섬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두로는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게 되고, 해상국가로 발돋움하게 되는데, 심지어 그들은 먼 육지에 자신의 도시를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니 두로왕의 자존심은 대단했던 것이다. 그러자 어느날 두로왕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도다(겔28:2)"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하나님인 체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두로왕은 자기가 가진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거둬들이고,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무역으로 인해 더 많은 재물을 축적하자 기고만장했기 때문이다. 사람인 주제에 자신을 신이라고 말했던 두로왕의 심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루시퍼의 타락의 과정을 통해서 그의 심판이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렇다면 사탄마귀라 불리던 루시퍼는 어떻게 타락했을까? 그도 두로왕과 마찬가지였다. 피조물인 주제에 자신의 지혜와 영광스러움에 취하여 그만 선을 넘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 하늘의 천사들 중에 최고의 천사로 지음을 받았던 존재였다. 그가 창조될 때에는 자신이 거할 처소도 미리 정해질 정도였으니, 그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거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석으로 단장해 주었으니, 대제사장의 흉패에 들어갈 12가지 보석들 가운데 9개의 보석으로 그를 치장해 주었던 것이다(겔28:13). 그리고 그가 창조되던 날에 그를 위해 소와 비파까지 준비해 주셨다.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장으로 그를 창조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창조되던 날부터 교만이 하늘을 찔렀다. 모든 천사들이 자신을 흠모했기 때문이다. 이사야 14장에 보면 그가 그때 이렇게 속으로 말했던 것이 드러난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사14:13~14)"
그러자 교만한 그를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악한 일을 하는 천사로 쓰시다가 예수께서 탄생하기 직전에 하늘에서 쫓아버린다. 그러자 그는 자기를 따르는 하늘의 천사들 1/3과 더불어 하나님께 대항하였는데,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를 따르는 천사들을 하늘의 군대장관인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을 시켜 하늘에서 쫓아버리신다. 그러한 과정이 요한계시록 12장에 고스란히 나오는다. 그때 하늘에서 쫓겨난 사탄마귀는 용으로 변하였고, 그를 따르던 천사들은 뱀과 전갈과 같은 흉측한 파충류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땅 속으로 쫓겨나게 된다(계12:9). 이때 그들이 쫓겨난 장소는 땅 속 곧 "음부"이며, 음부가 그들의 거처가 된다. 하지만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래도 그들은 음부로부터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미혹하여 음부로 끌고 내려가곤 했는데, 그만 죄없으신 예수님을 죽이는 바람에, 사탄마귀는 자신이 가진 사망권세를 예수님에게 내어주게 되고, 그는 음부 곧 무저갱에 갇히게 된다(계20:1~3). 그러자 그는 음부에서 자신의 2인자와 3인자를 음부의 문들을 통해 세상에 올려보내서 지금까지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잠깐 놓아주시게 되면, 그는 음부에서 풀려나와서 인류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을 할 것이다(계20:7~10). 하지만 흰 말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칼로 대적들을 모두다 멸하실 것인데, 이 때 사탄(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산 채로(천사들이니까)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고, 땅의 왕들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다 전멸당하여 새들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이 아마겟돈전쟁이자, 곡과 마곡의 전쟁의 결말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파숫꾼으로 세워진 에스겔은 어떤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인가?
에스겔 25장부터 32장까지 이스라엘의 주변 7개국의 심판을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에스겔 33장부터 39장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해주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와 더불어 주변의 강대국을 하나님처럼 섬기다가 멸망당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회복하시는 것인가? 첫째, 이스라엘의 파숫꾼을 보내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게 하시고(겔 33장),
둘째, 선한 목자이신 다윗과 같은 왕을 보내 회복하시며(겔 34장), 셋째, 성령을 사람 속에 보내 회복하시고(겔 36장),
넷째, 하나님의 군대를 마련하신 뒤에(겔 37장)
곡과 마곡의 전쟁을 통해 악한 무리들을 처단하심으로 회복하실 것이다(겔38~39장).
이러한 일련의 회복과정의 첫번째 시작은 바로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숫꾼으로 파송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 33장에 나온다.
그런데 에스겔 33장은 사실 에스겔 3장의 확대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약 6년동안 벙어리로 사역하게 하셨지만, 하나님은 그를 불러 이스라엘의 파숫꾼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겔3장). 그때는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던 30세 때의 일이었다(겔3장).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33장에 가서 비로소 이제 정식으로 그를 이스라엘의 파숫꾼으로 삼아 파송하신다.
그렇다면, 파숫꾼이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듣든지 선포하는 것이다(겔 3:11, 27).
그래서 우상숭배로 인하여 마땅히 죽을 자들이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서 회개하게 되면 그들은 살게 될이지만, 만일 그들이 듣지 않으면 그들은 반드시 멸망당할 것인데,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는 그 피값을 묻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다(겔 3:17~21).
그런데 이러한 파숫꾼의 사명이 요한계시록에도 나온다.
그것은 세례요한의 사역을 계승하는 자로서 "두 증인"이라는 상징적인 인물로 나온다(계 11장).
나오며
에스겔서는 거의 요한계시록의 축소판과 같이 보인다.
그런데 실은 요한계시록이 에스겔서의 순서를 그대로 빌려서 차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에스겔서는 하늘의 광경에 대해서 영적인 놀라운 사실들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한 천사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장면이나, 우상숭배를 통해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음녀를 심판하는 장면을 에스겔 9장, 그리고 에스겔 16과 23장을 통해서 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루시퍼의 타락의 과정이 에스겔 28장에서는 요한계시록보다 보다 소상하게 잘 기록되어 있다.
고로 우리는 사탄의 타락의 과정을 요한계시록보다 에스겔서 28장에서 보다 더 명확한 자료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놀라운 계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영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이 두 주인의 하나인 세례요한의 외침으로부터 시작되듯이,
에스겔서에서도 이스라엘의 파숫꾼으로 세워진 에스겔 선지자로부터 시작된다.
우리에게 에스겔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린다.
1. 들어가며
에스겔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부분은 심판 예언(겔 1~32장)
둘째 부분은 회복 예언(겔33~48장)
회복예언은 또다시 크게 두 부분으로
새 이스라엘의 회복(겔 33~39장)
새 예루살렘 성전과 새 제사와 새 땅(겔 40~48장)
요한계시록과 비교해 볼 말씀은 에스겔 33~48장까지로서,
새 이스라엘과 새 예루살렘 성전과 새 제사 그리고 새 땅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신약 전체에 대한 그림을 보게 될 것이고,
마지막 시기에 관한 말씀과 함께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에 관해서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새 이스라엘의 회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새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4~5단계로 이뤄질 것이라고 하셨다.
그 내용은 에스겔 33장부터 39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요한계시록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회개를 외치는 파숫군을 통해서 새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했다(겔 33장).
그렇다면 파숫군의 사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적군이 몰려올 때 경고하여, 성 안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험을 대비하고 방비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지키는 파숫군이 적군이 침입해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그것을 성 사람들에게 전해주지 않아 무슨 일이 발생했다면 파숫군은 그 책임을 면하지 어렵다.
그런데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파숫군에게서 성 사람들의 핏값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파숫군의 사명은 적군의 공격을 미리 알려주는 일이다.
이것은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에는 세례요한이 감당한 사역이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그 뒤로 그는 회개를 외치며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역할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두 증인의 역할과 비슷하다(계 11:1~14).
두 증인은 환난기간에 성도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외치는 일을 하는 자들인데, 성도들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게 만들어주는 일을 한다.
그래서 두 증인의 사역은 곧 두 선지자가 하는 일이요, 두 감감나무로서 성령충만을 받게 하고, 회개하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은 자신의 사역을 감당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능력을 주시어 일을 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때 순교하게 된다.
둘째, 하나님께서 직접 선한 목자로 오셔서 새 이스라엘을 회복하신다고 하셨다(겔 34장).
하나님께서는 이때 이스라엘인 중에 훌륭한 목자들을 세워 새 이스라엘을 치게 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목자는 오히려 양떼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목자가 되시어 양떼들을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가장 전형적인 모델로 제시한 목자는 "다윗"과 같은 목자라고 했다.
한편, 요한계시록에 보면,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환난에 나오는 흰 옷 입은 무리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했고,
그분은 다름 아니라 보좌 가운에 계신 어린양이라고 하였다(계 7:17).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딤전 3:16).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유일하게 오직 다윗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예수님을 소개하는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계 22:16)"이자, "다윗의 뿌리(계 5:5)"로 소개되고 있다.
왜냐하면 목자로 오실 하나님의 표상으로서 가장 가까운 왕이 다윗왕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새 이스라엘 속에 주님의 새 영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게 할 것이라 하셨다(겔 36:26~27).
여기서 "주님의 새 영"이란 장차 믿는 자들 속에 내주하시게 될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회복된 새 이스라엘인은 육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 곧 교회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령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 땅에 보내어진 예수님의 눈들이다(계 5:6).
천국에서 예수께서는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 어린양에게는 일곱 눈들이 있었고 일곱 뿔들이 있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어린양이 진짜 7개의 눈들과 7개의 뿔들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7'은 이 세상에서 완전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땅에 완전하신 어린양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 눈들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소개해준다.
그것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영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의 영이 곧 성령인 것이요, 이 영을 통해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감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탄생하는데 이것을 우리는 "교회"라는 부른다.
넷째,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때부터 부활로 말미암아 하늘 안에 하나님의 군대를 창설하시고, 곡과 마곡의 전쟁 때에 그들을 데리고 오신다고 하셨다(겔 37~39장).
그 군대가 바로 겔 37장에 나오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의 환상이다.
이미 죽어 마른 뼈들 밖에 없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그들을 군대로 불러모은다고 하셨기 때문이다(겔 37장).
이들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천년왕국의 성도"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성도들은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왕노릇한다.
이것을 두고 "천년왕국"이라고 부른다.
1천년 즉 충분하고도 긴 시간동안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이 거기에서 왕노릇하다가 주님의 재림시에 군사가 되어 주님의 뒤를 따라 백마를 타고 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것이다(계 19:11~16).
그런데 곡과 마곡의 전쟁이 일반적으로는 지상의 천년왕국 후에 있을 전쟁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아마겟돈전쟁"과 요한게시록 20장에 나오는 "곡과 마곡의 전쟁"은 동일한 전쟁에 대한 다른 각도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계 20:10).
한편 이때 백마를 타고 오시는 예수께서는 만주의 주이자 만왕의 왕으로 오실 터인데, 아마겟돈전쟁(곡과 마곡의 전쟁)에서 사탄의 세력들을 물치시는 무기는 다름 아닌,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칼"이다.
고로 우리는 아마겟돈전쟁이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직접 말을 타고 칼을 사용하는 전쟁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탄마귀를 대적하여 이기는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편에 서서 예수님과 그의 군대를 대적할 것인지에 대한 묘사를 보면, 에스겔선지자는 예수님의 칼에 의해 죽임당할 사람들의 시체를 처리하는 7개월이나 걸린다고 하였고, 그들의 무기를 처리하는데 7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겔39:11~12, 9).
그리고 그들의 시체를 새들이 와서 배불리게 먹어치울 것이라고 했는데(겔 39:17~20),
요한계시록에 보면 수많은 새들이 그들의 살로 배불릴 것이라고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계 19:21).
여기까지가 새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다.
고로 우리는 새 이스라엘은 육적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새 이스라엘은 교회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렇다. 이 지상에 결코 제3의 성전이 세워지지 않을 것이며, 지상에 천년왕국이 펼쳐지지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믿는 자는 그때 가서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다. 부질없는 논리에 속아 헛된 세월을 보냈다고 말이다.
"새 예루살렘 성전"과 "새 제사"와 "새 땅"에 대한 환상은 무엇이었는가?
에스겔 예언은 이제 "새 예루살렘 성전과 새 제사와 새 땅"에 대한 예언이자 환상이다(겔 40~48장).
그렇다면, 에스겔에 나오는 새롭게 지어질 성전에 관한 예언은 과연 이 땅에 건설될 성전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미 어느 정도 결판이 난 상태다.
왜냐하면 A.D. 90년 유대 랍비들이 겔 40~48장에 나오는 성전에 대해 그것은 지상에는 결코 세워질 수 없는 성전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첫째는 규모면에서 그렇다고 했다.
새롭게 지어질 성전은 비단 성전만을 포함하지 않고 성전을 둘러싼 땅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레위인과 제사장 그리고 왕에게 돌아갈 땅의 크기로 보건데(나중에 살펴볼 것임), 실제적인 사건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이다(겔 45,48장).
둘째는 성전 안에 기명에 있어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전 안에는 법궤(지성소, 내소)와 "일곱금촛대와 분향단과 떡상"이 있어야 하는데, 새롭게 지어질 성전 안에는 이런 것들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빈 나무책상 하나만 놓여있었기 때문이다(겔 41:22).
셋째, 성전의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와 동쪽으로 흘러간다고 했는데, 이런 일은 아직까지도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겔 47장).
그렇지만 에스겔이 보았던 새 성전과 새 제사와 새 땅은 하늘의 성전과 하늘의 제사와 하늘의 땅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는 동물의 피의 희생제사가 결코 드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스겔이 본 성전의 환상에는 번제단도 있으며, 거기에 희생제사를 드릴 제사장의 규례와 예물의 규례와 제사의 시기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놀라운 사실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에 관한 말씀이 그렇다.
에스겔 성전은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와 동쪽으로 흘러 강을 이루며, 이 생명의 물로 인하여 생명체들이 뛰놀게 되고 각종 과실나무들이 자라게 되며, 그 나무들이 달마다 열매를 맺고, 그 나무들의 잎사귀는 약재료로 쓰인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겔47:1~12).
이것은 지상에 있는 성전에서는 없던 일이었고, 또한 지상에 있는 강물도 없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솔로몬 성전의 파괴 이후 제2의 성전(스룹바벨성전)이 세워지는 했지만 그러한 일은 없었고,
지금까지도 이러한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에스겔이 보았던 새 성전에 대한 환상도 영적인 성전인 교회에 관한 예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이신 성령을 받아서 생명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계 22:1~2).
그리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만 존재할 교회는 번제단에서 죽으신 어린양의 속죄를 계속해서 힘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보았던 새 성전에는 번제단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겔이 본 "새 땅"에 대한 환상은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
에스겔은 환상 중에 "새 땅"을 보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새 땅"을 "예물로 드릴 땅"과 "왕의 땅"과 "일반 백성의 땅"으로 나누어 분배하라고 하셨다(겔 45:1~8, 47:13~48:35).
첫째, "예물로 드릴 땅"은 다시 3개의 땅으로 나누어 분배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각각 "레위인의 땅"과 "제사장의 땅"과 "성읍기지의 땅"으로 구분하여 그들에게 분배하라고 하셨다(겔 45:1~8). 먼저 가장 위쪽에 분배할 "레위인의 땅"은 가로가 2만 5천척(13.3km)이요 세로가 1만척(5.32km)이 되게 하라고 하셨고 그것을 레위인에게 주라고 하셨다(겔 48:13~14).
그리고 그 아래의 땅은 "제사장의 땅"으로서, 이 땅도 레위인처럼 똑같이 척량하여 분배하되, 그것 한 가운데 "성전"을 두라고 하셨다. 새 성전의 크기는 가로 세로가 각각 500척으로 하라고 하셨다(겔 48:8~12).
그리고 그 밑의 땅은 "성읍기지의 땅(속된 땅)"으로서, 이 땅은 가로가 2만 5천척이 되게 하고, 세로는 5,000척이 되게 하되, 그 땅 가운데를 각각 가로세로가 각각 5,000척으로 나누어 그것을 성읍(도시)으로 삼으라고 하였다(겔 48:15~20).
좌우에 만척씩은 농사짓는 구역으로 삼되, 그 땅은 일반백성이 거주하는 땅으로 하라고 하셨다.
이때 건설된 성읍을 "여호와 삼마"라고 하라고 하셨으며, 이 성읍에 들어가는 입구들은 각기 네 방향에 3개씩 문을 두는데, 문들의 이름을 이스라엘의 각기 지정된 12지파의 이름으로 지으라고 하셨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제 "왕의 땅"을 분배하라고 하셨다(겔 48:21~22).
왕에게는 이스라엘 땅의 한 중앙에 있는 "예물로 드리는 땅"의 좌우의 모든 영역을 주라고 하셨다.
그래야 왕이 일반백성의 땅을 탐내어 빼앗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셋째, 레위인의 땅의 북쪽은 순차적으로 7지파의 땅으로 분배하라고 하셨고,
성읍기지의 땅 아래는 순차적으로 5지파의 땅으로 분배하라고 하셨다(겔 48:1~7, 23~29).
그런데 성도들의 장차 들어가게 될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과 에스겔이 본 성은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는 것이다.
먼저, 공통점은 천국에서도 신분에 따라 땅의 분배된다는 점이다.
즉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에는 신분이 제사장도 있고 땅의 왕들이라는 신분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천국에서는 일반성도들 중에 최고는 "땅의 왕들"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있으며, 주의 종들은 제사장의 신분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실제로 천국에 들어가보면, 주의 종들이 사는 거주지와 일반 성도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다르다.
그리고 차이점은
첫째로, 천국에서는 성전과 성의 구별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어린양이 친히 성전이 되시기 때문이요, 성이 곧 성전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배를 드리러 오기 전에 성도들은 각기 분배받은 지역의 집에서 살다가 예배드릴 때에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때 성은 성전의 역할을 한다. 여기서 찬양과 경배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것은 미비한 것이기는 한데, 에스겔이 본 새 성의 성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이름들이 각 방향마다 정해져 있지만, 사도요한이 언급한 새 하늘에 있는 새 성이자 성전의 문은 동서남북에 각기 3개씩 있고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까지는 나오나 구체적으로 어느 대문에 어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이 한 곳에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각기 사는 지역과 집이 다르며,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지역과 집을 기업으로 분배받는다는 점이다.
고로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이 땅에서 제사장들로서 그리고 땅의 왕들로서 준비를 잘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분과 천국에서 받을 기업은 영원한 자신의 분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스란히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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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가장 밑바닥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의 환상을 통해 백성들에게 계시를 주었던 선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접촉이 없던 시대에 하나님과 만나는 사람이었고 주님이 주시는 두루마리를 먹은 사람이었습니다.
"에스겔"이란 이름은 “하나님이 힘을 주신다”라는 뜻이다.
에스겔은 주전 597년에 제2차 포로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그발강 근처의 델아빕이라는 곳으로 끌려갔다.
다니엘은 주전 606년에 제1차 포로 이송 때 끌려갔다.
에스겔은 대략 25세쯤 되었다.
바벨론에서 5년동안 지내다가 30세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
이때가 예루살렘 멸망하기 6년전이다.
에스겔의 사명은 이스라엘이 곧 멸망할 것이다.
빨리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 언젠가는 주님께서 다시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우리가 사는 지금 시대를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
나는 특별히 이곳의 영적인 상황을 묵상하면서 지금 이곳은 바로 포로시대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리스도의 영이 눌려 있고 묶여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닌가?
에스겔에는 49회에 걸쳐서 “여호와의 말씀이… 가라사대” 라는 구절이 나온다.
시대적으로 영적으로 빈곤한 시대였으며 개개인의 영성이 메마른 시대이기도 했던 때에 에스겔은 여호와의 말씀을 거의 날마다 생생하게 들으며 살았던 사람이다.
하나님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존이다.
모든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때면, 우리는 어딘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인생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시작해야만 한다.
이것은 성경이 시작하는 시점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에스겔도 신비로운 하나님의 비젼으로부터 시작한다.
1:1 제 삼십 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예언자 에스겔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점은 다른 어떤 예언자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그가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심장이 하나님의 인격과 영광의 계시에 의해 불타오르기를 갈망한다면, 우리는 에스겔을 읽어야만 한다.
에스겔의 환상 - 4가지 생물
세상의 역사는 단지 개개인의 삶의 확장이라고 볼수 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나라가 식민지화되었던 발자국을 추적해 나가며,
왜 이스라엘이 그렇게 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이것은 한 나라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 개인의 이야기라고 할수도 있다.
구약의 책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원칙으로 쓰여졌다.
즉, 국가에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것은 정확하게 우리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과 환경들이 이 책들속에서 그대로 확장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와 이러한 영적 환경은 무언가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에스겔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 보았던 것,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것이 부족하거나 없을 때 우리의 삶은, 우리의 국가는 황폐해지고 멸망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자.
과연 우리의 삶은 현재 어떤 지경에 처해 있는가?
매일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복된 삶을 누리고 있는가?
그분이 주시는 아름다운 계시속에서 날마다 그분의 풍성한 임재를 누리면서 살고 있는가?
우리의 삶에 그분의 임재가 반영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에 부족하거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1:4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이것은 누군가의 관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리만큼 역동적인 장면이다.
그리고나서, 에스겔은 말하기를,
1:5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에스겔은 이 생물들에 대해 묘사한다. 각각은 4가지 얼굴을 갖고 있다.
1: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사람, 독수리, 황소, 사자의 얼굴. 이들 4가지 얼굴들은 모든 방향으로 돈다.
그가 4개의 생물을 본후에, 그는 어떤 바퀴를 보았다.
에스겔은 이 바퀴들이 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머지 것들안에 한 바퀴가. 그가 그것을 볼 때 그는 또한 하늘위를 보았는데, 광채로 빛나며, 그 하늘위로 그의 시선을 더 높이 들었들 때, 그는 보좌를 보았다. 보좌위에 한 사람이 앉았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을 읽는다면, 우리는 요한이 보았던 신비로운 계시들이 에스겔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요한도 4가지 생물을 보았다.
또한, 보좌를 보았으며 보좌위에 한 사람을 보았다. (계 4:2-8)
이것은 상징적인 형태로 표현되어지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장엄함의 계시다.
우리는 이 모든것들을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신비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4가지 생물들이, 즉, 사자, 사람, 황소, 또 독수리, 이 4가지 생물들이 각각 하나님의 4가지 인격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4가지 생물들은 상징적으로 어떤 성질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사자는 “모든 짐승들의 왕”으로서 최상위의 주권을 의미한다.
사람은 지성과 깨달음을 나타낸다.
황소는 언제나 섬김과 희생을 상징한다.
그리고 독수리는 신성함과 모든 생물위에 군림하는 권능을 상징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 4가지 측면의 인격을 골고루 묵상할 필요가 있다.
첫째, 사자
그분은 천상천하의 모든 주권과 통치권을 가지고 계신분이시다. 물론, 우리 한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분은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는 바로 그분의 것이다. 그분의 소유라고 할수 있다. 그분앞에서 우리는 무조건 무릎을 꿇고 경외감으로 경배하며 24장로가 그러했듯이 전능하신 이에게,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에게 우리 자신의 면류관을 던지면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고 고백하고 다시 경배하며 다시 면류관을 던지며 또 고백하고 이러한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그분앞에 조아리는 것을 해야 된다.
둘째, 사람
위와 같은 분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다는 사실을 또한 묵상해야 된다. 온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분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다는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그분의 아름다우신 사랑을 묵상해야 된다. 그리고, 그분이 살았던 발자취와 그분의 말씀을 생생하게 매일 매일 우리의 것으로 만들면서 살아야 된다. ‘영생’이 무엇인가? 영생이라는 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요17:3)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기위해 우리는 매일 몸부림쳐야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안에 거하게 되도록 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알아야 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실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6)
셋째, 황소
그분의 섬김과 희생을 묵상해야 된다. 즉, 십자가를 기억하고 우리 자신이 그분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된다. 우리의 사역이 어떤 상황에 이르렀는가? 우리의 삶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 어떠한 환경일지라도 심지어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질지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연습을 해야 된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있을때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할수 있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십자가를 경험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 임하는 위로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 사랑하기를 연습해야 된다.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호되게 야단쳤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 즉,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시고,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준다. 이것이 주님께서 부인하지 않으시는 참된 영적인 원리인 것이다.
네째, 독수리
그분의 신성함이다.
그분은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아담이 실패한 자리에서 승리한 사람이다.
무슨 말인가? 아담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갔다.
그리고, 모든 인류는 사단의 유혹을 감당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40일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지만 마귀를 물리치심으로 그분의 신성을 드러내셨다.
공생애 기간동안 그분이 행했던 모든 기사와 이적들도 그분의 신성함을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 극적인 것은 그분은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스스로 부활하셔서 지금까지 살아계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위에 언급한 4가지 생물들의 인격은 신약의 4가지 복음서들 가운데에서 정확하게 예수님의 4가지 인격으로 표현되고 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왕으로 처음 나타난다. – 사자, 짐승의 왕, 모든 주권.
예수님은 마가복음에서 종으로 나타난다. – 황소.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사람으로 나타난다. - 인자 그의 깨달음의 인생에서, 통찰력속에서, 지성속에서 사람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독수리로 나타난다. - 그는 그의 신성함 즉 그의 하나님 됨을 나타낸다.
이들 4가지는 예수님의 인격을 반영한다.
이제, 에스겔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의 비젼의 의미심장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cf- 고후 4:6) 이것은 하나님이 그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가 할수 있는만큼 분명하게 보았다.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에스겔은 혼탁하고 어두운 시대에 살면서도 유일하게 하나님과 만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인격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다.
에스겔은 고국을 떠나 머나 먼 타향으로 포로로서 끌려갔지만,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하며 그분으로부터 오는 생명력으로 사라져가는 이스라엘의 불씨에 생명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포로 시대로 바라보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내가 처한 이곳은 영적으로 혼탁하고 어두운 상황이라고 볼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눌려 있어서 교회가 있지만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무슬림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를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분의 영을 주어야 하는가? 그분의 영을 주기 위해서는 나에게 그분의 영이 있어야 된다. 성경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신다고 알고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나를 만나는 무슬림들이 내 안의 성령님을 실제로 느낄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성경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우리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를 만날 때 “저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있구나!” 라는 것이 느껴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전달할까?
고민하기보다는 내가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삶을 사는가를 고민해야 된다는 얘기다.
* 요한계시록 /
성경 마지막 책이자 성경 전체의 결론이며 창조와 타락, 구속과 새창조로 이뤄지는 구속사의 완성인 요한계시록은 많은 상징적 단어들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펴기 두려운 책’으로 인식돼 왔고, 각종 이단들이 그 틈을 파고들어 요한계시록과 기독교 교리를 왜곡해 왔다.
요한계시록 해석, 예언 성취 일어나는 기준으로
1. 과거주의 해석, 모두 과거 일어난 일로 파악
2. 미래주의 해석, 재림 이후 일어날 일로 파악
3. 역사주의 해석, 재림 이전 일어날 일로 파악
4. 상징주의 해석, 선악 투쟁 상징 묘사로 파악
-요한계시록의 주요 해석법들을 소개해 주신다면.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법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으나, 가장 일반적으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가 언제 일어나는가’에 따라 네 가지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네 가지 해석방법은 과거주의, 미래주의, 역사주의, 상징주의 해석법입니다.
첫째, 과거주의 해석법은 요한계시록 예언이 전적으로 또는 주로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이나 주후 5세기 로마제국의 멸망을 통해 과거에 모두 일어났다고 보는 해석 방법입니다.
과거주의 해석법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당시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 상황과 로마 제국 상황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예언의 성취를 과거에 이미 다 이뤄진 것으로만 봄으로써, 요한계시록이 교회사 전체와 예수님의 재림과 이후 종말에 대한 이해를 약화시키는 단점이 있습니다.
둘째, 미래주의 해석법은 요한계시록 4-22장의 내용을 주로 미래, 즉 예수님의 재림과 재림 이후 일어날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미래주의 해석법은 역사적 전천년설적 미래주의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적 미래주의 해석에 따라 세부적 차이가 있지만, 요한계시록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종말에 대한 사건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려는 노력에 도움을 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일방적으로 미래의 종말론적 사건으로 한정함으로써, 요한계시록이 가지는 1세기 당시의 역사적 문맥이나 교회사 전체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키는 단점이 있습니다.
셋째, 역사주의 해석법은 요한계시록을 사도 요한 당시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의 교회사에서 연대기적으로 일어날 역사적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봅니다.
역사주의 해석법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교회사 전체 기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법을 주장하는 사람들마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교회사의 특정 사건과 일치시키는 데 있어서 제각기 다르며, 교회사의 성취된 사건으로 보는 사건들 또한 서구 교회 중심이라는 데 단점이 있습니다.
넷째, 상징주의 해석은 요한계시록을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하나님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 선과 악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책으로 봅니다.
상징주의 해석은 요한이 사용한 상징들을 과거나 미래의 특정 역사적 사건들과 동일시하지 않고 영적 원리를 분명히 말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과거주의나 역사주의나 미래주의 해석의 장점이 상징주의 해석의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네 가지 해석법은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많은 복음주의 요한계시록 해석자들은 네 가지 해석법 중 장점을 종합적으로 취하는 절충주의 해석 또는 종합적 해석법을 취합니다.
이런 종합적 해석법에도 과거주의와 미래주의 해석의 종합, 과거주의와 상징주의의 종합, 미래주의와 상징주의의 종합, 과거주의와 미래주의와 상징주의 종합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저는 이 가운데 상징주의를 가장 기본으로 하면서 1세기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중요시하는 과거주의와, 예수님의 재림과 재림 이후의 종말적 사건을 중요시하는 미래주의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 시대 전체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키는 역사주의의 장점을 모두 취하는 종합적 해석법을 견지합니다. 저와 같은 요한계시록 해석법을 ‘구속사적 상징주의 해석법’이라 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묵시와 예언과 편지 복합 장르
구약 성경, 요한계시록 상징 이해하는 열쇠
그리스-로마 역사·문화·종교 배경도 반영돼
-요한계시록에는 상징적인 단어들이 적지 않습니다.
평신도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글의 성격에 따라, 책의 성격에 따라 해석 방식은 달라집니다.
각 장르는 일반적인 해석 원리가 있는 동시에, 장르의 성격에 맞는 구체적 해석 원리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도입 부분을 통해 살펴보면, 한 종류의 장르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세 종류의 장르에 다 해당되는 매우 특이한 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요한계시록은 묵시(1:1), 예언(1:3, 22:6-7, 22:18-19), 편지(1:4-6)라는 복합 장르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묵시장르적 특성 때문에 요한계시록에는 많은 환상이 등장합니다.
일곱 별, 일곱 촛대,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어린양, 일곱 뿔과 일곱 눈, 두루마리 책, 향이 가득한 금 대접, 흰 옷을 입은 큰 무리,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십사만 사천 명,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 불 못 등 많은 상징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이런 상징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첫째,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이해하려면 구약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은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신약 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 구약을 많이 언급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들을 이해하려면, 기본적으로 구약 성경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 같은 예언서와 창세기, 출애굽기, 시편 등을 잘 알아야 합니다.
또한 구약 성경을 직접 인용하지 않더라도, 요한계시록에는 간접 인용, 즉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단어나 어구, 사건이나 인물, 주제에 대한 수많은 암시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구약 성경의 이런 암시가 얼마나 나오는가 하는 것은 195개, 226개, 278개, 394개, 455개, 493개, 635개, 1,000개 등, 적게는 2백여개에서 많게는 1천여개까지 학자마다 계산이 다양합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모든 장마다 거의 모든 구절마다 구약 성경이 흠뻑 배어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이해하려면 구약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구약 성경에 대한 지식을 깊고 넓게 가져야 합니다.
둘째, 요한계시록의 많은 상징은 1세기 당시의 그리스-로마 문화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잘 이해하려면 1세기 당시 로마제국의 역사적 배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천년왕국 견해 차이별로 종말 관련 학설 달라
1. 역사적 전천년설 : 교회 환난 후 예수 재림, 이후 천년왕국
2.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 7년 환난 후 예수 재림, 이후 천년왕국
3. 후천년설 : 황금시대인 천년왕국 이후 예수 재림
4. 무천년설 : 재림 전후 천년왕국 없어, 상징으로 이해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등 종말에 대한 학설이 다양한데, 각 학설의 장단점을 설명해 주신다면.
“종말론과 관련해 기독교인들 사이에 가장 큰 견해의 차이는 ‘천년왕국’에 있습니다.
‘천년왕국’이란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성도들과 더불어 천 년 동안 통치하는 나라 또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통치하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이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에 있어 역사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이라고 불리는 네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교회의 환난 이후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지상에 문자적인 천년왕국이 있다는 견해입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교회의 환난 이전 성도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이 있으며, 7년 뒤에 그리스도가 성도들과 함께 지상 재림을 하여 문자적으로 천 년 동안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견해입니다.
후천년설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황금 시대인 천년왕국의 끝에 재림하신다는 견해입니다.
후천년주의자에 따라 황금시대인 이 ‘천 년’의 기간을 문자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황금 시대 동안 기독교의 영향력은 세상의 평화와 공의와 경제적인 번영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황금시대가 도래합니다.
무천년설은 예수님의 재림 전이나 후에도 지상에 문자적인 천년왕국이 없다는 견해입니다. 즉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의 천 년을 상징으로 보며, 예수님의 초림(승천)과 재림 사이의 교회 시대의 전 기간에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어 하늘로 간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까지 천상에서 통치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어떤 학설이든 최후 심판, 영원한 지옥, 부활과 천국 공통점
천년왕국 이해 다르다 해서 서로 ‘이단’이라 비난해선 안돼
이런 네 가지 해석 방법에는 차이도 있지만, 기본적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천년왕국설을 믿든지, 궁극적으로 신자와 불신자가 모두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을 받고, 불신자는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고,
신자는 영원한 천국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적 종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육체적인 부활, 최후의 심판, 영원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사실들을 믿기 때문에, 천년왕국의 시기와 장소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해서 서로 이단으로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는 다르지만,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로 인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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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oible/756
난제중의 난제로 꼽히는 에스겔 성전(겔 40-48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많은 해석들이 존재하지만 시원하지가 않습니다.
1. 가시적인 성전 역사
2. 가시적인 성전이 다시 세워질것인가?
복음의 역사를 되짚어본다면 다시금 세워져서는 안되는 것이 성전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가리켜 곧 성전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요2:21).
성전의 실체가 오셨기에 다시 상징으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은 다시 세워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무지가 성전재건을 원합니다.
제1성전은 솔로몬 성전, 제2성전은 스룹바벨 성전, 앞으로 재림을 앞둔 시점에 제3성전이 세워집니다(살후2:4).
어떤 사람들은 천년왕국 때에도 가시적인 성전이 세워질 것이라 단정합니다.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이나 세대주의자들은 성전건축 된다는 견해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이런 주장들로 인하여 무천년주의자들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천년왕국 기간에 성전이 세워진다는 견해는 비성경적입니다.
3. 에스겔 성전
상당수의 학자들은 에스겔 성전(겔40-43장)이 곧 천년왕국에서 세워질 성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확고하게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난제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에스겔 성전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에스겔 성전은 누구에게 주어진 것일까요?
이 성전은 에스겔과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주셨습니다.
이방 바벨론 땅에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단지 주신 형상대로 그림으로 보고, 생각하고, 말씀대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겔43:10)
* ...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행하게 하라(겔43:11)
에스겔 성전은 그대로 지으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성전이 파괴되었기에 단지 그 형상을 보면서 예배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과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합니다.
* ...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에 생각할지어다...(겔40:4)
그러므로 에스겔 성전을 제 3 성전이나 천년왕국 때의 성전으로 설정하고 세우려는 행동은 무의미합니다.
오직 마음에 새겨서 포로기간 동안 은혜가 끊이지 않고 연결되도록 주신 것입니다.
4. 에스겔 성전의 연속성
1) 형상으로서만 존재하는 에스겔 성전(겔40:1-43:17)
에스겔 성전은 가시적인 성전이 끝나감을 보여줍니다.
초림으로 인한 가시적인 성전이 그 기능이 다하고 실체되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폐하여질 것을 미리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된 백성들에게 단지 형상과 그림으로 보고서도 성전의 기능을 다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시금 성전이 재건될 것을 약속한 것이 에스겔 성전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생활 가운데서 모든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성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끝장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마른뼈처럼 앙상하고 볼품 없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가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겔37:11)
2) 포로귀한과 성전재건의 약속(겔43:18-27)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주신 소망은 단지 형상으로서 성전으로만 만족시키지 않았습니다.
다시 성전이 재건될 것을 약속했습니다.
당시 포로된 이스라엘에게 이런 소망은 하나님이 행하지 않고서야 가능성이 희박하게 보였습니다.
에스겔 성전이 단지 형상으로서만 존재했다면 그것이 존귀하고 의미있는 약속이란 것이 포로귀환과 함께
성전이 재건될 것에서 찾게 했습니다.
* ...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는 이러하니라(겔43:18)
3) 하늘의 성전 새 예루살렘 성
형상으로서만 존재하는 에스겔 성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포로귀환 후의 성전재건의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성전재건의 약속은 스룹바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스룹바벨 성전은 주전 516년에 예루살렘에 세워집니다.
솔로몬 성전에 비하여 초라했던 스룹바벨 성전은 하늘 성전으로 연결됩니다.
하늘 성전은 새 예루살렘 성에 있습니다.
에스겔 성전이나 스룹바벨 성전은 하늘 성전의 모형입니다.
에스겔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성전의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에스겔 40장부터 48장까지가 하나의 그림처럼 연결됩니다.
에스겔 성전으로부터 스룹바벨 성전 그리고 하늘 성전으로 연결되면서
성전의 근원되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