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 클라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네로(Nero)는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37년 12월 15일 ~ 68년 6월 9일, 재위 54년 10월 13일 ~ 68년 6월 9일)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본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bus)이며, 황제가 되어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로 개칭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외종손이자 양자이며 칼리굴라의 외조카이다.

서기 37년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로의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딸인 율리아 아그리피나이다. 그의 출생 당시 로마 제국은 외삼촌인 칼리굴라의 집권기였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서기 49년 어머니인 아그리피나가 숙부(네로의 외종조부)이자 당시 로마 제국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였고,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네로는 서기 54년 양부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인 세 살 차이의 의붓동생 브리타니쿠스[1]를 제치고 황제로 취임하였다. 집권 전반기 그는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세네카와 근위군단 장교 부루스의 보좌를 받아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로마의 신이 황제에게 로마 문화를 발전시키라는 명령을 했다."라는 신념에 따라 로마의 문화와 건축을 발전시켰다. 네로는 자신을 예술가의 지도자로 생각하여 시, 노래, 건축 등 예술을 지원했는데, 지금도 네로 시대 당시 지어진 화려한 건축물이 남아 있다. 그가 폭군으로 낙인 찍힌 것은 로마 대화재 당시 민심 수습책으로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 씌우고 기독교도를 학살하여 기독교의 뿌리 깊은 원한을 산 이유가 크다.
그러나 55년 의붓동생인 브리타니쿠스를 독살(이는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소행이라는 주장도 있다)하였고, 59년에는 정치적으로 간섭해 온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62년에는 아내 옥타비아를 살해하였다.
서기 64년 기름 창고 사고가 원인이 되어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혼란스러워지자, 당시 로마 제국의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씌워 기독교도를 학살함으로써 로마 제국 황제 중 최초의 기독교 박해자로 기록되었다.[2][3]
그는 예술을 사랑하여 2대 제전을 창시하였으나, 정치는 문란하여 68년 친위대까지 반란을 일으켰다.[4]
68년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가 일으킨 내전이 일어나고 이에 각지의 총독들이 동조하여, 마침내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68년 6월 8일 로마를 탈출하여 마지막까지 그의 편에 있던 해방 노예 파온(Phaon)의 별장에서 자살하였다.
“ | 평균 키에 몸 곳곳에는 점이 있었으며, 악취를 풍겼다. 암갈색의 머릿칼에, 매력적이라기보다는 평범한 풍모였다.
눈은 유약해 보이는 파란색이었고, 목은 굵었다. 배가 나왔고, 다리는 매우 가늘었다. |
” |
—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 《12황제 열전》 |
- ↑ 브리타니쿠스는 클라우디우스와 그의 세 번째 아내이자 첫 번째 황후인 메살리나(22년 - 48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 ↑ 성공회 사제이자 신약성서학자인 박태식 신부에 따르면, 네로 황제 당시 화재는 서기 64년에 9일간 일어났다. 로마 시내 14개 구역 중 10개 구역에 일어난 대형 화재였다. 정부의 구호활동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 체제의 안위를 흔들 수 있는 네로 황제 방화설이 수그러들지 않자, 집권세력은 당시 "사악한 미신", "로마 제국에 의해 처형된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는 공격을 받고 있었던 기독교도들을 사회혼란 해결의 희생양으로 삼아 탄압하고 화형으로 살해하였다.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바오로딸.
- ↑ 사도행전에 따르면 네로 황제 전에도 기독교는 헤롯 왕실과 산헤드린 의회에 의해 순교자가 발생하는 탄압을 받았다. 즉, 네로를 최초의 기독교 박해자라고 하는 것은 로마 제국 황제 중 최초라는 뜻으로 중세 역사가들이 기술했다고 여겨진다. 다만, 네로 이전에도 티베리우스가 유대교도와 기독교도에 황제를 신으로 모시는 제사를 지내라고 명령하고 거부하는 이들을 박해했다. 칼리굴라는 이스라엘 성전에 자신의 신상을 세우라고 명령하고 거부하는 이들을 박해했다. 네로의 양아버지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고, 외래미신을 믿는다는 죄목을 붙여 기독교도를 박해했다.
- ↑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도미티아누스 (51년 10월 24일 - 96년 9월 18일)는 로마 제국의 열 한 번째 황제이다.
그는 전임 황제자들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이자, 티투스의 동생이었으며,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재위 기간 그의 권위주의적 성격 방식의 통치는 도미티아누스로 인해 권력이 급격하게 제한당한 원로원과 극도의 불화에 빠트렸다.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와 형의 재위 기간에 크고 작은 형식적 역할을 맡았다.
형이 죽은 후, 도미티아누스는 친위대의 지지로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의 15년간의 통치 기간은 티베리우스 재위 기간 이래로 가장 긴 기간이었다.[1]
생애
형제와의 경쟁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어머니 플라비아 도미틸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는 제9대 로마 황제이었다. 그는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의 지위를 가졌고,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6차례나 집정관을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이 없는 11세 연상인 형 티투스의 뒤를 이을 황제감으로 인정받았다. 79년 6월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은 뒤 그때까지 티투스가 누렸던 것과 똑같은 지위, 특히 호민관의 권력과 일부 임페리움을 누리고 싶어했으나 이를 허락받지 못해 결국 형과 적대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훗날 형의 죽음에도 어느 정도 관여한 듯하다. 황제가 된 뒤에는 귀족들의 미움을 받았다. 트라야누스 시대의 역사가들인 타키투스와 소 플리니우스에게서 받은 혹평을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는 분명 잔인하고 허세를 부렸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군사적·행정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어 로마와 속주(屬州)의 행정관들을 강력히 통제했으며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칭송을 받기까지 했다.
군사정책
그의 군사·외교 정책도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집권초 브리튼 섬과 게르만 지방으로의 진격을 시행했고 국경인 라인-도나우 강변에 리메스(요새 방벽)를 건설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미처 합병시키기도 전에 도나우 강 지역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 로마는 2개의 레기온(군단)과 많은 군사를 잃었다. 이것은 타키투스도 지적했듯이 당시 군지휘관들이 태만하고 성급했기 때문이었지만 로마에서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84년에 군인 봉급을 1/3 정도 올려주는 등 현명하게 처신해 군대 내에서 인기를 그대로 유지했다.
우상화
진짜 문제는 그 자신의 법률상 지위와 의전행사에서의 위상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자주 콘술직을 맡았으며, 85년에는 종신 감찰관이 되어 원로원 의원과 장군들의 행동을 통제했다. 원로원에서는 개선식 의상을 입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경기를 본떠 4년마다 1번씩 개최한 경기를 주재할 때는 그리스풍의 옷과 금관을 착용했으며 동료 심판들은 여러 신들로 둘러싸인 도미티아누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관을 써야 했다. 토미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에 대한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주님이자 하느님'(dominus et deus)이라고 부르게 해서 심한 공격을 받았으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주님이자 하느님이라는 기독교의 케뤼그마에 반대되는 도미티아누스의 황제 우상화에 반대하여 로마제국의 탄압을 받았다.
철권통치
84년에 사촌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를 처형시킨 것은 다른 사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87년에 일어난 일반적인 소요의 전초였다. 89년 1월 1일에는 상 게르마니아 총독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하 게르마니아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황제는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고 나중에는 원로원 의원을 종종 반역죄로 고발했다. 따라서 93년부터 96년은 사상 유례없는 공포정치의 시기로 여겨지게 되었다.
암살
결국 도미티아누스는 96년 9월 18일에 근위대장 2명과 여러 궁정관리, 아내 도미티아 롱기나의 음모로 살해당했다. 그 뒤 곧 제위를 이은 네르바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생전에 남긴 모든 업적을 지워버리는 '기록말살형'에 처했음에도 군대는 이에 반발해 이듬해에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같이 보기
전임 티투스 |
제11대 로마 제국 황제 81년 - 96년 |
후임 네르바 |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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