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은 신구약 성경에 모두 4회 나온다.(이사야 65:17, 66:12, 베드로후서 3:13, 요한계시록 21:1)


이사야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Behold, I will create new heavens and a new earth. The former things will not be remembered, nor will they come to mind.


이사야 66:2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For this is what the LORD says: "I will extend peace to her like a river, and the wealth of nations like a flooding stream; you will nurse and be carried on her arm and dandled on her knees.


베드로후서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을 바라보도다.
But in keeping with his promise we are looking forward to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the home of righteousness.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Then I saw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for the first heaven and the first earth had passed away, and there was no longer any sea.


이사야 65:17
요한계시록 21:1

이사야 65:1

כִּֽי־ הִנְנִ֥י בֹורֵ֛א שָׁמַ֥יִם חֲדָשִׁ֖ים וָאָ֣רֶץ חֲדָשָׁ֑ה וְלֹ֤א תִזָּכַ֙רְנָה֙ הָרִ֣אשֹׁנֹ֔ות וְלֹ֥א תַעֲלֶ֖ינָה עַל־ לֵֽב׃ 

(음역) 키-히네 보레 샤마임 하다쉼 봐예레츠. 하다샤 베ㄹ로 티짜카르나 하리쇼노트 베ㄹ로 타알레나 (알-렙...)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사역)

요한계시록 21:1 

Καὶ εἶδον 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ῆν καινήν· ὁ γὰρ πρῶτος οὐρανὸς καὶ ἡ πρώτη γῆ ἀπῆλθαν, καὶ ἡ θάλασσα οὐκ ἔστιν ἔτι.

(음역) 카이 에이돈 우라논 카이논 카이 겐 카이넨. 호 가르 프로토스 우라노스 카이 헤 프로테 게 아펠ㅌ한, 카이 헤 ㅌ할라사 우크 에스틴 에티. 


이사야 65장과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차이  

두 성구는 표면상 아주 비슷하거나 거의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서는 '내가'(하나님이) 창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전의 땅과 하늘은 기억나거나 생각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땅은 새로 창조하시기보다 이미 어디엔가 존재해온 것이 새로 나타나 있는 것을 기자(사도 요한)가 비로소 바라보고 있다고 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비록 기존해왔지만, 낡은 옛 하늘과 옛 땅이 아니다! 
태초에 창조된 첫(옛) 하늘과 첫 땅(즉 창세기에서 기록된 천지 창조 때의)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이 첫 것이 사라진 뒤에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 65장의 새 하늘, 새 땅과 요한계시록 21장의 새 하늘, 새 땅은 명칭만 같을 뿐, 적어도 개념상 어렴풋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을 계속 읽어가면, 그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예샤야후서 65장의 이 새 하늘, 새 땅에서는 죽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20절이 그렇게 말해 준다.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와 제 명대로 다 살지 못한 채 죽는 노인이 없다고 했으니, 바꿔 말하면 넉넉히 살다 죽는 사람들은 있다는 얘기가 된다. 
즉 불사는 아니라
는 말이다.

거기서는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불러준다고 하니까, 백 살 넘어 죽는 사람은 있다는 얘기가 되고, 백 살이 채 못 되어 죽는 사람들은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이니, 바꿔 말하면 저주를 받았든 어떻든 이 새 하늘 새 땅에서는 그런 조기사망자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받아야지, 상징적으로 받으면 안 된다!

바로 그 점이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의 모든 것은 수적 개념을 초월하여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의 정체’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논쟁의 핵심은 과연 새 예루살렘이 마지막에 나아가게 될 천국을 그리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신부’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종말에 누릴 축복을 그리고 있는가에 있다.

‘계시록’의 의미인 ‘밝혀진 또는 열린’ 등의 개념과 대조적으로 아직도 요한계시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고 감춰진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런 익숙지 않음이 때로 불안한 세상에 편승해 ‘연약한 자들’을 유혹하는 이단의 잘못된 해석에 희생 제물이 되기도 한다. 때로 지나친 문자주의적 해석에 근거한 나머지 중동 지역의 국지전을 ‘아마겟돈 전쟁’으로 예견하는 정도까지 이르러 결과적으로 종말론에 대한 회의를 낳게 만들기도 한다.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이해도 이런 안개 속에 싸여 있는 듯한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 보인다. 새 예루살렘은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마지막 환상에 속하는 부분(21:1~22:5)이다. 사람들은 「내가 본 천국」 등의 책이 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이해는 본문의 가르침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 부정확한 성경 해석이 근거 없는 ‘믿음’으로 이끌며 그 믿음이 확산될 경우에 매우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올바른 성경 해석에 근거한 믿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해석과 함께 그 안에 담겨 있는 가르침이 현대 교회를 향해 주는 메시지를 논하기 전에, 이 부분이 안고 있는 두 가지 이슈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첫째, 마지막 때에 주어지는 ‘새로운 세상’의 정체에 관한 질문이다. 요점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속성이 ‘갱신된 세상’(renewed world)인가 아니면 ‘새롭게 창조된 세상’(replaced world)인지에 관한 논쟁이다. 현재 세상과 연결하는 견해는 연속성(continuity)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다른 견해는 비연속성(discontinuity)에 무게를 두고 있다.

둘째, ‘새 예루살렘의 정체’에 관한 것으로 논쟁의 핵심은 과연 새 예루살렘이 천국을 그리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신부’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종말에 누릴 축복을 그리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더해 어느 한 쪽으로 치중하기보다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에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21:1~22:5)

이 부분을 해석하기 위해 ‘문맥’의 중요성과 함께 비유적 또는 상징적 표현의 당위성을 이해해야 한다. 문맥에 대해선 근접한 문맥과 넓은 문맥을 모두 염두에 둬야 한다. 먼저 근접한 문맥으로, 17장 1절에서 22장 5절까지 소위 ‘두 도시’(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의 이야기로 알려진 부분을 살펴봐야 한다. 다음에 넓은 문맥으로, 요한계시록의 시작에서 이 부분에 이르기까지의 전개와 나아가 구약과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 발전해 온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을 고려해야 한다.

비유적 또는 상징적 표현의 당위성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과 연관해 생각할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의 내용은 ‘초월적 현실’(transcendental reality)을 다루고 있다. 특히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모든 것들의 완성이라는 면에서, 또 초월성이라는 면에서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 초월적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비유와 상징적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마치 문명의 이기에 관한 경험이 전혀 없는 정글 속사람들에게 전자 오븐이나 휴대전화기를 설명하려고 한다면, 그들이 갖고 있는 언어와 경험의 경계가 표현의 한계를 결정하게 되듯이 말이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21장 18절과 21절에 나오는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든가, ‘더 이상 바다가 없는 가운데(21:1) 존재하는 샘’(21:6)이라든가, ‘강’(22:1) 등은 상징적 또는 비유적 해석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저자 요한은 이 책의 독자들에게 친숙한 상징과 모델들을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에서 찾고 있으며 그것을 기초로 자신만의 요소들을 더해 자신이 본 초월적인 현실을 전하고 있다.

(1) 새 창조(21:1~8)

먼저 이 단락이 속한 문맥에 관해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단락은 음녀 바벨론의 멸망(17:1~19:10)과 신부로 표현된 새 예루살렘의 축복(21:9~22:5) 사이에 놓여 있는 ‘종말의 종말’을 구성하는 연속의 사건들(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아마겟돈 전쟁, 천년왕국, 마지막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19:11~21:9)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부분을 통해 악의 세력의 철저한 제거 과정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이 거하는 땅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늘이 서로 연결돼 둘이 하나가 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에 더해 21장 9절부터 시작되는 새 예루살렘에 관한 두 가지 커다란 요소를 소개함으로써 동시에 새로운 단락(21:9~22:5)의 서론 부분 역할도 감당하고 있다.

본문에서 중요한 점은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분명하게 보여준 악을 철저히 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더해 더 이상 악이 거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질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새 창조’에 관한 약속(사 65:17~18)의 성취일 뿐 아니라,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롬 8:21)되는 순간이다. 특별히 저자 요한은 21장 1절에서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표현을 더함으로써 짐승이 나온 곳(13:1)이고 죽은 사람들의 장소(20:13)이며 세상의 우상 숭배적 상업 활동의 무대(18:10~19)일 뿐 아니라, 세 부분으로 나눠진 옛 세상의 일부(8:8~9, 14:7)의 부재를 통해 악의 부재와 그 악이 편만했던 옛 세상의 지나감을 강조한다.

저자는 새로운 세상을 언급한 후 초점을 새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있다. 마치 새 예루살렘이 새로운 세상의 축소판(microcosm)인 양 새 예루살렘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묘사한다. 구약의 약속인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사 2:1~5, 18:7)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세상을 다스리신다(사 24:23). 또 에덴동산과 같은 곳(겔 36:35)이고 백성들과 함께 영원히 거할 곳(겔 37:26~27)이며, 생명의 물이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올 것(슥 14:8) 등 선지서 속의 시온과 예루살렘에 관한 수많은 기대와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새 예루살렘을 보면 어떤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으며, 어떤 축복을 누릴 것인지 소망할 수 있게 만든다. 
새 예루살렘은 두 가지 커다란 특징으로 소개되고 있다. 3절에서 말씀하듯,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과 4절에서 말씀하듯, 세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전혀 다른 현실을 그려주고 있다. 이 두 가지에 대해 다음 단락(9~27)이 3절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고, 그 다음 단락(22:1~5)이 4절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1~5)

새로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새롭게 된다(5절). 그렇다고 모든 것들이 현재 세상과 연속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입을 ‘영광의 몸’(빌 3:21)은 현재 우리의 몸과 다르지만, 둘 사이에 연속성이 배제되지 않은 새로움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참고 눅 24:39, 롬 8:11).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처소인 새로운 세상의 ‘새로움’은 위의 경우와 조금 다르다. 다시 말해, ‘이미 새로워진 하나님의 백성’(고후 5:17)과 ‘새 하늘과 새 땅’ 간의 ‘새로움’에 차이가 있다.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이 함께 거할 곳이기에 옛 세상과의 연속성을 배제해 버린다.

그곳은 특별하기에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고 현재의 삶에 근거해 결정된다. 요한계시록에서 반복해 말하고 있듯이, 오직 세상의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힘이나 스스로의 의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12장 11절 등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이긴 자들’이 들어간다. 요한계시록이 교회를 향해 씌어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말씀에서 담고 있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8절에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목록이 나온다. 여기에는 세상의 유혹과 핍박에 이기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그런 행동을 하거나 거짓 교리를 전하는 이단들이 포함된다. 2~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의 문제들과 연결해 생각할 때 이해가 된다. 열매를 찾아볼 수 없는 자,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며 따르는 자, 세상과 타협함으로써 세상과 구분 되지 않는 자 등 간단히 말해 ‘알맹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들을 향해 경고하고있는 것이다.

(2) 지성소로서 새 예루살렘(21:9~27)

새 예루살렘이 2절의 ‘신부와 같이’라는 직유적 표현에서 9절의 ‘신부’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바뀐다. 하지만 여기에 근거해 새 예루살렘이 신부이고 신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의 정체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 특히 15장 2절(‘유리 바다 같은 것’에서 ‘유리 바다’로)이나 21장 11절(‘벽옥같이’)과 18절(‘벽옥’)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의미의 변화를 감지할 수 없는 예들은 위의 결론을 지지하고 있다.

결국 문법적으로 다른 두 표현일지라도 기능면에서 차이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차이를 단순히 저자 요한의 스타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저자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며 새 예루살렘의 두 주인공인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고 있다는 근거는 다음에서 볼 수 있듯이,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 자체에 있다.

새 예루살렘이 지성소라는 사실을 전개해 나가는데 있어서 저자 요한은 세 가지 요소에 초점을 맞춰 외부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듯이 소개하고 있다. 먼저 11~14절에서 외부적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 후 16~17절에서 외적인 구조에 관해 표현하고, 마지막으로 새 예루살렘의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요소에 대해 22~23절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구성 요소들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 묘사의 특징을 들자면, 열둘이라는 숫자의 만연함이라고 할 수 있다. 열두 문과 열두 지파의 이름(12절), 성벽의 열두 기초석 및 그들에 기록된 열두 사도들의 이름 (14절), 열두 진주문(21절) 등을 포함해 성벽의 가로 세로 길이가 12,000(=12x103) 스다이온에, 성벽의 두께는 144(=12x12) 규빗이라고 말하고 있다. 열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숫자다. 새 예루살렘의 묘사에서 열둘이라는 숫자의 강조는 그곳에 들어가는 새로운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정체에 관해 구약의 공동체와 신약의 공동체를 모두 언급하기보다 예수님의 피로써 구원 받은(예 1:5, 5:9, 7:14), 그리고 그분의 피로써 사탄을 이긴(12:11) 사람들을 언급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시 말해, 사도들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영적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다.

구조를 논하며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가로 세로 높이가 동일한 정육면체 모양의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의 모델(왕상 6:20, 대하 3:8)을 근거로 해서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있다. 독특한 점이 있다면, 거대한 크기(한 면이 2,400㎞인 정육면체)에 비해 성벽의 두께는 상대적으로 초라한 144큐빗(약 65m)으로 표현돼 있다는 것이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숫자들을 보며 숫자 자체에 문자적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오히려 그 숫자에 포함된 하나님 백성들의 상징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나아가 규모의 거대함에 더해 정육면체 형태의 지성소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결국 마지막 세상의 모습으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과 영원히 거할 지성소 중의 지성소로 묘사되고 있다.

예루살렘 성의 아름다움은 다양한 보석을 통해 특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곳의 길은 이 땅의 금의 모습이 아니라 ‘유리 같은 정금’이며, 성벽과 기초석과 문은 온갖 보석으로 치장이 돼 있다. 물론 보석의 일부(벽옥, 홍보석, 녹보석)는 하늘의 보좌를 논하며(4:3) 등장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와 있는 다른 보석들은 헬라어에서 실제로 어떤 보석을 의도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열된 보석들과 동일한 리스트를 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결국 보석들에 관한 결론을 외부에서 찾기보다 책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특별히 음녀 바벨론을 논하며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다’(17:4. cf. 18:4)는 표현과 의도된 대조를 놓쳐선 안 된다. 스스로 온갖 악행과 불의로 얻은 것들로 치장한 음녀 바벨론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한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새 예루살렘의 대조를 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적 특성을 언급함에서 새 예루살렘은 ‘성전’이 없는 성이라고 말하고 있다(22절). 물론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예루살렘 성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성전의 부재를 의미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은 성과 성전의 구분을 없애 버린, 성 자체가 성전이며 지성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표현을 쓰고 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새 예루살렘에서 ‘성전’이라는 것이다(22절). 마치 ‘새 예루살렘’이 단순히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를 나타내고 있듯이, ‘성전’도 단순히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백성들의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상호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믿는 사람들의 모든 소망함의 성취된 모습을 그리고 있다.

(3) 새로운 에덴으로서 새 예루살렘(22:1~5)

바로 앞 단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표현된 새 예루살렘을 그리고 있다면, 이 단락에선 그들이 거하는 장소에 초점을 맞춘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새 예루살렘의 중심이 보좌이며 그와 함께 언급된 생명나무의 존재다. 보좌의 중심됨은 4장에 그려진 하늘의 성전을 통해 이미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새 예루살렘의 중심에도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그런데 그 보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것만이 아니라 어린양의 것이며(3절),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원천이며(1절), 다시는 저주가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3절).

연이어 보여주는 것은 정원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닌 파라다이스의 모습을 지닌 새 예루살렘이다. 그 정원에선 다른 나무보다 생명나무가 중심이 되고 그곳에 거하는 거민 들이라면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나 소성함을 얻으며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에덴의 회복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곳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는 이 세상과 달리(출 33:20), 하나님의 얼굴을 목도하며 살게 된다. 또 하나님께서 에덴을 지으시고 의도하셨던 뜻을 온전히 이루며 살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을 온전히 섬기며(3절) 그곳에서 다스리게 된다(5절). 물론 여기서 무엇을 다스릴지에 관해서는 말해 주고 있지 않는다. 새 예루살렘을 논하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요한계시록 저자의 의도를 고려해 볼 때, 이런 생략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창세기에 기록된 처음 창조의 세상을 볼 때, 새롭게 창조될 세상에서 다스릴 대상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는 일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만드시고 명령하시며 기대하신 일이었다. 이런 다스림은 천년 왕국(어떤 견해를 갖고 있든지 상관없이) 동안의 통치(20:6)와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통치’라는 특성을 갖는다(5절). 다시 말해 단순히 에덴의 회복을 뛰어넘는 것이며, 나아가 에덴에서의 원래 목적(예배)이 이뤄지는 곳임과 동시에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다스림을 통해 온전히 제사장과 왕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현대 교회를 향해 새 예루살렘이 주는 메시지

새 예루살렘의 도래는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그 순간을 가르치고 고대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온전히 성취되는 순간일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바람과 소망의 온전한 완성이기도 하다.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변화된’ 백성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것이며, 다시 얻은 에덴동산이 아닌 그 이상의 파라다이스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예배하며 허락하신 것을 영원히 다스리는 역할을 감당하며 살게 된다. 현재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 나라에 국한된 성전이, 마지막 때에는 지성소로 그리고 파라다이스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이런 가르침이 현대 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자.

현대 사회를 논하며 사회를 주관하고 있는 두 개의 정신 사조로 흔히 물질주의(materialism)와 자아도취(narcissism)를 지목한다. 교회조차 알게 모르게 이런 사조에 밀려 표류하고 있는 것이 현대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지적이기도 하다. 만약 그들의 평가가 사실이라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 그 중에서도 새 예루살렘에 관한 가르침이 주는 메시지는 매우 명료하다.

첫째, 물질주의의 위험과 함께 물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물질주의와 연결돼 있는 것이 물량주의이고 물량주의와 연결돼 있는 것이 외적 성장주의이며, 성장주의와 연결돼 있는 것이 세상적 개념의 성공제일주의이다. 이런 것들을 향한 새 예루살렘이 주는 메시지는 세상에서의 가치가 천국에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의 연속성을 가지는 ‘사람’인가를 묻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체가 다음 세상과의 연속성이 없는 ‘물질’인가의 근본적 질문을 하며 평가하도록 만들고 있다.

현재의 시각으로 아무리 가치가 있는 것일지라도 궁극적으로 모두 없어질 것이며, 또한 그곳에 절대 갖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추구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 16:9)는 가르침을 주신다. 물질이 아니라 사람의 소중함을 강조하시는 메시지다. 「내가 본 천국」에서 주장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상의 온갖 보화를 통해 묘사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써 나타나는 영광의 결과이지, 결코 천국의 모습과 동일시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외적인 아름다움이 천국을 사모하는 이유가 된다면, 물질주의에 젖은 우리의 모습을 방증(傍證)하는 것이 분명하며 이에 더욱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둘째, 자아도취의 위험함을 깨닫도록 요구하고 있다. 자아도취와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있다. 주기도문을 보아도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 정체성이 정해지는 개인임을 기억해야 한다. 새 예루살렘의 묘사를 보며 다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뿐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온전한 교제의 완성된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개인 종교가 아니라 공동체 종교이며,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믿는 사람들 모두 함께 새 예루살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의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는 말씀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공동체로서 교회를 바라봐야 한다. 이런 관계는 단순히 교회 안에서 성도들간의 관계에 국한된 것일 뿐 아니라 교회와 교회 간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사이에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 하나됨의 목적이 전도와 선교에 있음(요 17:21, 23)을 말씀하신다. 따라서 협력하며 동역하는 모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도들 간에 또는 지역 교회들 간에 존재하는 갈등과 반목은 온전한 교제가 이뤄지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통해 회복을 향한 노력으로 변화돼야 한다.

셋째, 천국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은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본다고 한다. 「내가 본 천국」과 같은 책에서 ‘신비로운 경험’에 근거해 주장하는 천국의 모습을 들어 보면, 천국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며 그것에 근거한 바른 믿음을 갖고 살아갈 때 제대로 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 이 땅에서 가치 있는 것들로 가득한 곳이 천국이라기보다, 세상의 가치로선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곳이 새 예루살렘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온전히 회복된 에덴 이상의 지성소적 파라다이스로 인간의 모든 필요와 소망이 채워지는 곳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온전히 성취되는 곳임을 기억해야 한다.

넷째, 진정한 예배의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히 하고 있다. 에베소서 2장 21~22절을 보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교회가 이미 성전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교회와 새 예루살렘간의 연속성은 가장 강하게 나타나 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예배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 축복이기에 현재의 예배를 하나님 중심으로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현대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 중심의 틀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누가 예배의 중심이 돼야 하는지에 대해 돌아보며 예배를 통해 마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으로의 초대 및 만남이 이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교회에서 신앙 훈련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교인이 아니라 ‘이기는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로서 삶을 살 수 있는 이기는 자들로 만들기 위해 부단한 훈련과 점검을 해야 한다. 특히 ‘성도들의 옳은 행실’(19:8) 등을 강조하는 요한계시록을 염두에 두고 한국 교회를 향한 외부에서 들려오는 최근의 비판적 평가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 음녀 바벨론의 특성들로 만연된 세상에 둘러싸여 많은 도전과 시험 속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이끌리며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을 향한 도전이 새 예루살렘이 주는 메시지이다. 

오직 행함있는 믿음으로

어느 곳에 있더라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우리의 사는 모습 속에 드러나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통해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한 시대다. 새 예루살렘이 현대 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리 모두를 향해 이기는 사람들이 될 것을 도전하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는 말씀을 순간마다 기억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기는 자들’의 대열에 설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의 모든 것은 새롭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것이 현재 세상과의 연속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몸과는 다르나 연속성이 배제되지 않은 새로움을 얻을 것이 분명하다. 

‘성전’은 단순히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의 백성들의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존재로 나타나 있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믿는 이들의 모든 소망함의 성취된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이기는 자들, 곧 그리스도의 참 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사진은 초대교회의 하나인 사데교회의 유적과 어느 지하교회의 입구 모습.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또 다른 성경 속의 말씀을 통해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한 시대이다. 새 예루살렘이 우리 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리 모두를 향해 이기는 자들이 될 것을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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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새 하늘과 새 땅'

-이사야 65장과 계시록 21장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은 신구약 성경에 모두 4회 나온다. 예샤야후(이사야)서 65장 17절과 66장 22절, 페트로B서(벧후) 3장 13절, 요한계시록 21장 1절 등이다. 이 가운데 예샤야후 66'22와 페트로B 3'13은 각각 따로 특기할 만한, 또는 서로 대조할 만한 어떤 뚜렷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예샤 65'17과 요계 21'1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보인다. 한 번 비교해 보자.

먼저 예샤야후서 65장에 나타나는 해당 부분의 히브리어 원문을 보겠다:

예샤야후 65'1

כִּֽי־ הִנְנִ֥י בֹורֵ֛א שָׁמַ֥יִם חֲדָשִׁ֖ים וָאָ֣רֶץ חֲדָשָׁ֑ה וְלֹ֤א תִזָּכַ֙רְנָה֙ הָרִ֣אשֹׁנֹ֔ות וְלֹ֥א תַעֲלֶ֖ינָה עַל־ לֵֽב׃ 

(음역) 키-히네 보레 샤마임 하다쉼 봐예레츠. 하다샤 베ㄹ로 티짜카르나 하리쇼노트 베ㄹ로 타알레나 (알-렙...)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사역)

다음은 계시록 21'1의 그리스어 원문이다.

Καὶ εἶδον 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ῆν καινήν· ὁ γὰρ πρῶτος οὐρανὸς καὶ ἡ πρώτη γῆ ἀπῆλθαν, καὶ ἡ θάλασσα οὐκ ἔστιν ἔτι.

(음역) 카이 에이돈 우라논 카이논 카이 겐 카이넨. 호 가르 프로토스 우라노스 카이 헤 프로테 게 아펠ㅌ한, 카이 헤 ㅌ할라사 우크 에스틴 에티.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첫 하늘과 첫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있지 않았다."

둘의 큰 차이

위 두 성구는 표면상 아주 비슷하거나 거의 같은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전자는 '내가'(하나님이) 창조하신다고 밝히셨다. 그래서 이전의 땅과 하늘은 기억나거나 생각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거기 비해 후자인 이 계시록의 새 하늘과 땅은 새로 창조하시기보다 이미 어디엔가 존재해온 것이 새로 나타나 있는 것을 기자(사도 요한)가 비로소 바라보고 있다. 비록 기존해왔지만, 낡은 옛 하늘과 옛 땅이 아니다! 태초에 창조된 첫(옛) 하늘과 첫 땅(즉 창세기에서 기록된 천지 창조 때의)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이 첫 것이 사라진 뒤에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예샤 65장의 새 하늘, 새 땅과 요계 21장의 새 하늘, 새 땅은 명칭만 같을 뿐, 적어도 개념상 어렴풋이 서로 다른 존재임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본문을 계속 읽어 나가다보면, 둘의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예샤야후서 65장의 이 새 하늘, 새 땅에서는 죽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20절이 그렇게 말해 준다.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와 제 명대로 다 살지 못한 채 죽는 노인이 없다고 했으니, 바꿔 말하면 넉넉히 살다 죽는 사람들은 있다는 얘기가 된다. 
즉 불사는 아니라
는 말이다.

거기서는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불러준다고 하니까, 백 살 넘어 죽는 사람은 있다는 얘기가 되고, 백 살이 채 못 되어 죽는 사람들은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이니, 바꿔 말하면 저주를 받았든 어떻든 이 새 하늘 새 땅에서는 그런 조기사망자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받아야지, 상징적으로 받으면 안 된다!

바로 그 점이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의 모든 것은 수적 개념을 초월하여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하고 누리기 

다음으로 예샤야후서(65'21,22)의 이 새 하늘 새 땅의 거주자들은 자기가 살 집을 짓고 살고, 포도나무 등 과실수를 심어 그 열매를 먹을 것이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평소 지상사회에서 당했던 것처럼 자신이 지은 집과 거둔 농산물을 남에게 뺏기거나 넘겨주게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처지는 옛 하늘, 옛 땅에서 수시로 벌어지고 겪던 일이다(참고: 전도서 2'18,21; 6'2).

이 거주자들의 수명은 나무의 수명과도 같이 길고, 자신이 일한 대로 길이길이 누릴 것이라고 했다. 즉(23절) 헛수고를 하거나 앗기지 않은 채, 하나님의 복된 이들로서 또한 그 후예로서 대대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점들이 옛 하늘 아래, 옛 땅에서 살던 삶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들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한가? 그것은 바로 계시록 20장에 나타난 천년왕국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예샤야후 65장의 새 하늘, 새 땅과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은 분명히 서로 구분되지만, 전자의 새 하늘 새 땅은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과 같다는 점을 말이다.

이 왕국에서는 사람의 수명이 나무의 수명과 같다는 말씀이 이를 입증해 준다. 세계에서 가장 장수해온 나무의 수명은 무려 약 5000년이나 된다(강털소나무-Bristlecone pine tree가 그렇다. https://en.wikipedia.org/wiki/Bristlecone_pine )! 반 만 년 동안 지구촌의 삶을 지켜 봐 왔다는 얘기다. 그처럼, 사람이 1000년을 산다는 것이 이 천년왕국에서는 거의 평균적인 이야기다.

천년왕국에서의 수명

돌이켜 보자. 인류 초기 시대에 인류의 조상들의 수명은 거의 1000년씩이었다. 첫 사람 아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큰 죄를 짓고도 무려 930세를 살았다. 특히 아담에게 (순교자인 둘째 아들 아벨 대신) 주신 착한 아들 셑(셋)의 후손 중 머투쉘라(므두셀라)는 인류의 최장수자로서 969세를 누렸다!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지 않는가? 아무튼 당시 인류의 수명이 보통 800~950년 안팎이었다(참고: 창세기 5'3~32). 지구촌 홍수 당시 방주를 지은 의인인 노아 역시 950세를 향유(享有)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명백한 사실은 천년왕국은 어디까지나 천년왕국이지, 만년왕국이거나 무한하고 영원한 왕국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한하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인류의 최장수명은 1000세를 넘을 수 없다. 길어봤자 천 살이다.

과연 이 천년왕국의 행복한 시민들은 누구이며 천 년동안 무엇을 할까? 그들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하나님 말씀 때문에 목벰을 당한 영혼들, 그리고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로 이들이 크리스토(그리스도)님과 함께 천 년 간 통치를 하게 된다. 이들의 삶은 곧 첫째 부활에 속한다. 이들은 또 하나님과 크리스토님의 사제(제사장)들로서 천 년 간 온통 즐거움과 기쁨으로 섬기게 된다! 

반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죽은 나머지 사람들은 천 년이 다 차기까지 살지 못하고 있다. 즉 심판 때까지 부활이 없는 것이다. 

천년왕국 시민들에게 한 가지 더 좋은 것은 마귀의 유혹이 없고 따라서 죄 없는 삶을 누린다는 점이다. 그 지긋지긋한 죄 말이다. 어찌 그게 가능할까? 천 년 동안 사탄은 무저갱(無底坑)에 던져져 갇혀 있다가, 천 년이 다 차고 나면 잠시 놓여나와,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서 싸움을 붙이게 된다. 이들은 성도들의 진영과 주님이 사랑하시는 성을 포위하지만,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다 태워져 버리고, 마귀는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진다. 사탄의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거기 함께 하여 길이길이 괴로움을 받게 된다.

그 후엔 심판의 부활이 전개된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영들은 심판을 받아 사망 및 쉐올(Sheol)과 함께 불 못에 던져진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궁극적인 영원한 새 하늘 새 땅

그러나 거룩한 이들은 최후의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샬렘에서 길이 영복(永福)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계시록 21-22장 참조). 할렐루야!

간이 지배하고 지배받는 헌 하늘, 헌 땅의 유한한 곳이 아니라, 정말 하늘의 무한하고 영원한 곳이기 때문이다. 
거기는 생명수 강물이 있고, 그 좌우 강가에 자라면서 열매를 맺어 만국을 치료하는 생명나무들이 있고, 다시는 저주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궁극적인 새 하늘 새 땅에는 밤도 없고, 등불과 햇빛도 필요가 없다! 그 하늘 성엔 어린양의 피에 자기 겉옷을 빤 복된 성도들만 들어가며, 개들과 점술가들, 음행자들, 살인자들, 우상숭배자들, 거짓말쟁이들은 들어가지 못한다(요계 22'14-15).



이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의 발산으로 창조됐고, 그 천지만물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고 있었으며,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순복하며, 그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하고, 찬양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상태에서,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힘을 쌓아서, 다른 존재들을 밟아 버리는, 그런 상태로 떨어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그것을 재통일! 에나케팔라이오! 재통일하시기로 하신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발산적인 그 영광을, 효과적인 영광으로 충만히 드러내고, 그 분께 순종하며, 그분을 자랑하며, 그분을 찬양하는 상태로, 회복시키기로 한 거란 말이죠. 그게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인 거예요.

그래서 이사야서에 보면, 그렇게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의 그 하모니를,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도 물리지 않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공존하고, 이렇게 표현을 한 거예요. 다시 회복되는 거란 말이죠. 그게 그 통일이!

그런데 그 만물이 인간의 타락으로 또 저주를 받으면 안 되죠? 원래 그렇게 만들어 놨는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게 확 왜곡되어 버린 거 아닙니까? 이제는 인간이 타락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절대 타락할 수 없는 인간을 새롭게 창조해 내시기로 한 거예요. 그게 이제 구원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격 안에서, 이제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며, 우리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여러분의 이성(理性) 안에서 가르치시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래서 여러분이 이제는, 이 이성(理性)을 갖고 배워서, ‘나는 이제 절대 타락하면 안 돼! 타락하면 이렇게 엄청난 고통 속으로 또 들어가는 거니까, 나는 절대 타락하면 안 돼!’라는 것을, 이 땅에서 배우고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하나도 안 하고, 그냥 자기 소원이나 들어달라고 그러고, 문제나 해결해 달라고 그러고, 기적이나 일으켜 달라고 그러니까, 이게 어찌 기독교이겠느냐? 제가 그렇게 통분하는 거예요. 오히려 그런 것들은, 여러분의 거룩을 막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그렇게 새로운 사람들을 창조해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거예요. 그리고는 어떤 한 무리를 창조해내셔서,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렇게 새롭게 통일이 되어서, 하나로 통일이 되어서,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그 충만하신 영광을 반사해내는, 그런 자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교회 안에서 상징적으로 이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교회가 예수님을 머리로 한 몸으로 묶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태초의 천지만물이었다니깐요. 그걸 하나님께 구원받은 교회들이, 이 땅에서 상징적으로 모형으로 보여주고 오라!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왜 그렇게 싸우냐 말이에요? 도대체!! 뭘 하다가는 거냐 말이에요? 우리가 뭘 하다가? 기독교가 그 거라니깐요 에나케팔라이오! 재통일된,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이 땅에서 보여주고 가는 거예요. 모형으로! 그래서 자꾸 죽는 거예요. 진짜 교회들은, 자꾸 죽는 거예요. 자꾸 낮아지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거 열심히 연습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그런 타락한 옛 하늘과 옛 땅의 질서와 원리에서 벗어나서, 자신이 낮추어지고, 자신이 비워지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하나님나라의 질서와 원리 안에서, 살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애초에 의도된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러한 존재들을 생육시키고 번성케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방법과 수단으로 쓰이는 거예요. 그래,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많이 이제 나타나야 돼요. 그게 아담에게 주어졌던, 애초의 목적이었단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거룩하게 사시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런데 은이빨, 금이빨로 만들고 앉아 있고, 거품 물고 쓰러지게 하고, 이게 뭐냐 말이에요? 도대체!! 그게 어디서 나온 기독교냐 말이에요? 도대체 그게!! ‘아픈 데 손 얹으세요! 주님이 병 낫게 해주실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거룩과, 이 창조의 목적으로 만물이 돌아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병 안 낫게 해주면, ‘하나님 미워!’ 그럴 거예요? 그 사망조차도 극복이 안 된 거예요. 지금 자기의 숨이 끊어지는 걸, 아직도 괴로워하고 무서워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하나님나라의 질서와 원리 안에서 살게 되는 그 곳을,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이사야서 43장 7절 보세요.

(이사야 43:7)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여러분을 왜 만들었다고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었다니깐요. 그러니까 기고만장하지 마시란 말이에요. 너무 건방떨지 마시란 말이에요. 우리는 그냥 하나님만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분을 알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영생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아들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영생이!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너무 모르니까, 겁 없이 자꾸 뭘 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 앞에서! ‘이거 줘! 저거 줘! 안 주면 미워할 거야!’ 이게 기독교가 되어 버린 거예요. 에베소서 1장 11절 보세요.

(에베소서 1:11-12)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나오죠? 이게 효과적 영광이란 말이에요. 여러분을 구원하신 건, 여러분을 행복하고, 잘 먹고 잘 살게 만들어 주려고가 아니라, 원래 태초에 지어진 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그 영광을 받아, 반사할 수 있는 그런 자로 만드는 거예요. 찬송하는 자로 만드는 것! 그게 목적이란 말입니다. 그게 안 나오면, 회개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에베소서 1장 14절 보세요.

(에베소서 1:14)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구속하신 이유가 뭐라고요? 그에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이 땅에서, 그의 영광을 찬미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자로, 그렇게 차곡차곡 지어져 가는 거예요. 지어져 가는 거예요. 그게 ‘성화(聖化)’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갈라디아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게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랑과 온유와, 희락과 화평과 절제, 긍휼, 자비 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서 나오는 거! 그게 찬양이라니깐요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라니깐요. 발산적 영광에 반응해서, 효과적 영광을 내놓는 거! 이것이 찬양인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인 거예요. 여러분!

진짜 그 하나님을 알고, 우리의 신분을 진짜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하자는 거예요. 열심히 배우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그래서 이 땅에 것에서 눈을 돌리자는 거예요. 하늘의 것으로!

어떤 사람이 풀빵을 팔고 있었는데, 아주 잘 됐어요. 그런데 그 옆에, 똑같은 풀빵 장수가 또 왔어! 그런데 얘는, 나보다 한 개씩 더 주고, 맛도 더 좋아요. 그래서 손님들이 전부 그리로 몰려갔어요. 어떻게 됐겠습니까? 멱살 잡고 싸웠죠. ‘골목이 여기 하나야? 왜 하필 여기 와서, 여기 와서 풀빵을 팔아?’ 상대방이 뭐라 그랬겠어요? ‘이 골목이 네 꺼야?’ 그래서 결국 결판을 못 짓고, ‘그냥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히, 열심히 일해서, 공정한 경쟁을 하자!’ 그렇게 결론을 맺었어요.

그리고 잘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또 왔어! 풀빵 장수가! 그래 간판을 딱 걸고 왔는데, ‘우리 풀빵은 저 두 집 풀빵과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빠다도 미제만 쓰고, 밀가루도 국산만 쓰고, 앙꼬도 두 배씩 넣어줍니다.’ 이렇게 써놓은 거예요. 열 받죠? 그래서 셋이 인제 멱살 잡고 싸웠어요.

그런데 갑자기 검은색 세단이, 승용차가 딱 골목을 들어오더니, 그중에 한 사람에게, ‘청와대에서 나왔습니다. 당신이 다음 주부로, 우리나라에 국무총리로 임명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쳐보세요. 이거 실제 있었던 일 아니에요. (하하하) 제가 이야기하면 전부 사실로 믿어서! 제가 이런 걸 생각해 내느라고 머리가 빠져요. 그 사람이 그 이야기를 듣고, ‘그래, 그건 그 거고, 잠깐만 있어봐! 내가 이 풀빵 장수들을 요절을 내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내가 그 이야기 들을게.’ 그러겠습니까?

이제는, 자기의 품위를 지켜야 하는 존재가 된 거예요. 국무총리가 됐다 말입니다. 그 사람은? 곧 손을 털겠죠. ‘아! 창피하게 이게 무슨 꼴이야? 딴 사람들 앞에서! 국무총리인데! 얘! 너 이리로 와봐! 이 풀빵 리아카 너 가져! 이 연탄불 이거 너 가져! 그리고 싸우지들 좀 마. 그리고 싸우지 마.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그렇게 싸우니?’ 그럴 거란 말이죠, 그죠?

그런데 여러분은,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분들이라면서요? 여러분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왕노릇 하시는 분들이라며요?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딸들이라면서요? 그런데 여전히 풀빵 리아커 갖고 싸우고 있는 거예요. 지금요! 그러니까 ‘내가 다시 올 때에, 그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그러는 거예요. 주님이! ‘내가 믿음을 보겠느냐?’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이 보기에도 믿음이 있습니까? 이 땅에! 뭔 믿음이 이래요? 여전히 풀빵 리아커 갖고 싸우고 있는 이게, 믿음이란 말입니까?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는, 정말 살아야 할 삶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자신이 새로운 창조물이 됐다면, 이제 그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받아, 충만하게 받아! 어떻게 받아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잖아요? 그죠? 받아서, 그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거예요. 그리고 원래의 창조의 목적대로, 다른 자들이 그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목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도록, 기여하는 삶을 사시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걸 성화라고 하는 것이고, 그게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기독교인 것입니다.

여러분! 새 하늘과 새 땅에, 정말 들어가고 싶으세요? 오늘부터 그 나라의 삶을 사십시오. 그래야 들어갈 수 있어요. 기도하겠습니다.


죽은 자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누가복음 7장 11-17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에 지나가시다 한 죽은자를 메고 나오는 것을 보시고 죽은 자의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서 일어나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2. 발해야 할 빛

본문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말라기 4장2절에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78-79절에는 "돋는 해가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9절에는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는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상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본문에 네 빛이 이르렀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의의 태양으로 세상에 내려 오셔서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복음의 빛, 의의 빛, 선한 빛, 사랑의 빛을 비취시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한 성도들도 그스도와 같은 빛을 발해야 한다는 말씀인줄 압니다.

① 복음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4절에 "이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 했고 6절에는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상 말씀이 복음의 빛을 증명합니다.
복음이라 하면 기쁜 소식을 말하는데 이 기쁜 소식은 빛에 속합니다. 그러기에 기쁜 소식이 있어 마음이 기쁠 때에 얼굴이 밝아지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빛으로 오셨으므로 천국 복음을 전하러 가시는 곳 마다 병든 자의 고침이 되시고 약한 자의 강함이 되시며 고통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시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으시고 슬픈 자에게 위로가 되시고 죽은 자의 부활이 되셨으니 (마4:21-24 , 요 11:43-44) 이것이 바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의 빛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이러한 기쁜 일들이 나타나게 될 때 복음의 빛을 발하는 것이 됩니다.

② 의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잠언 4장 8절에 "의인의 길은 돋는 햇빛 같이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3절에는 "그 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의인들의 생활은 빛을 발하게 되는데 켜서 비취는 정도의 작은 빛이 아니고 온 세계를 비취는 해와 같은 큰 빛으로서 넓게 그리고 멀리 발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 의인 세 사람은 노아,다니엘, 욥 (겔 14:14) 입니다. 그 의인들의 생활은 과연 넓고 멀리 비취었으니 그들의 사적은 성경에 담겨 온 세계에 알려질 뿐만 아니라 수 천년을 두고 전해 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정의로운 생활을 할 때 빛을 발하게 됩니다.

③ 선한 빛을 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4-16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9절에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을 보아 성도의 착한 행실이 빛을 발하는 것이 되는데 이 착한 행실이란 남을 괴롭게 하지 않고 남을 이롭게 하되 마음과 말과 몸과 물질로 도와 주는 행활입니다. 이러한 생활로 빛을 발한 사람은 누가복음 10장 33-36절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 인입니다. 지금도 성들은 선한 생활로 빛을 발해야 합니다.

④ 사랑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8-10절에 "다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 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데 있는 자요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인 동시 사랑의 종교입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세상적이요 정욕적인 사랑 즉 댓가를 바라고 하는 조건적인 사랑을 말함이 아니요 다만 예수님을 본받아 댓가를 바라지 아니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는 정도였습니다.(행 20:24) 이것이 바로 愛人 如己의 사랑이었습니다.
역대 성인들 즉 성푸랜시스, 썬다싱, 슈바이쳐 등도 애인 여기의 사랑을 실천한 것으로 빛을 발한 자들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특별한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하셨습니다.
로마서 12장 20절에는 바울 사도가 원수를 사랑하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하면 그 머리에 숯불을 놓는 것 같으리라" 고했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사랑을 실천한 것으로 빛을 발한 자들은 다윗과 한국에 손양원 목사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따라다니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주어 졌는데도 죽이지 않고 증거물을 보이는 것으로 회개하게 하였고 (삼상 24:1-19) 세계의 자랑 거리가 되는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 손양원 목사님을 보라 ! 자기의 사랑하는 혈육인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고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아들로 받아드리지 안했던가 이렇게 원수를 사랑하는 특별한 사랑의 실천으로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고로 우리 성도들은 자는 잠에서, 병든 자는 병에서 , 죽은 자는 죽음에서 일어나 복음의 빛, 의의 빛, 선의 빛, 사랑의 빛을 발하되 제일 먼저 가정에 발하여 가정의 반목, 질시, 불행을 몰아내고 생명과 평화만이 넘치는 즐겁고 밝은 가정을 만들고 나아가서는 사회에 발하여 사회의 시기, 질투, 음난, 도적, 살인, 사기, 횡령, 강도, 절도, 우상숭배 등을 몰아내고 밝은 사회를 만들 때 하늘의 뜻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나라 즉 천국의 모형을 보여 온 세계에 이 빛을 발하게 될 때에 여름 밤에 전기 불 빛을 보고 봉접이 수 없이 날아오는 것과 같이 우리나라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일어나 빛을 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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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토) 이사야 63-6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하늘과 새 땅(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Behold, I will create new heavens and a new earth. The former things will not be remembered, nor will they come to mind.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용어가 신구약 성경에서 사용된 것은 4구절입니다.

이사야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Behold, I will create new heavens and a new earth. The former things will not be remembered, nor will they come to mind.

이사야 66:2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As the new heavens and the new earth that I make will endure before me," declares the LORD, "so will your name and descendants endure.

베드로후서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을 바라보도다.
But in keeping with his promise we are looking forward to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the home of righteousness.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Then I saw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for the first heaven and the first earth had passed away, and there was no longer any sea.

4구절 중에서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하는 구절은 이사야 65:17요한계시록 21:1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66:22베드로후서 3:13은 뚜렷한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65:17과 요한계시록 21:1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 개의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주제를 정하고 살펴보겠습니다(이사야 65:17, 요한계시록 21:1).

두 구절의 차이를 찾기 위하여 원문을 소개합니다.

이사야 65:1   

כִּֽי־ הִנְנִ֥י בֹורֵ֛א שָׁמַ֥יִם חֲדָשִׁ֖ים וָאָ֣רֶץ חֲדָשָׁ֑ה וְלֹ֤א תִזָּכַ֙רְנָה֙ הָרִ֣אשֹׁנֹ֔ות וְלֹ֥א תַעֲלֶ֖ינָה עַל־ לֵֽב׃ 

(음역) 키-히네 보레 샤마임 하다쉼 봐예레츠. 하다샤 베ㄹ로 티짜카르나 하리쇼노트 베ㄹ로 타알레나 (알-렙...)

(사역)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사역)

요한계시록 21:1   

Καὶ εἶδον 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ῆν καινήν· ὁ γὰρ πρῶτος οὐρανὸς καὶ ἡ πρώτη γῆ ἀπῆλθαν, καὶ ἡ θάλασσα οὐκ ἔστιν ἔτι.

(음역) 카이 에이돈 우라논 카이논 카이 겐 카이넨. 호 가르 프로토스 우라노스 카이 헤 프로테 게 아펠ㅌ한, 카이 헤 ㅌ할라사 우크 에스틴 에티. 

(사역)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첫 하늘과 첫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있지 않았다."

이사야 65:1과 요한계시록 21:1의 차이

구약 이사야서 65:1에서는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샤마임 하다쉼 봐 예레츠>

새한글 성경 / 
(하나님)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 것들은 기억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 요한계시록 21:1에서는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우라논 카이논 카이 겐 카이넨>

새한글 성경 / 또 나는 보았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었습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져 버리고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다도 더는 없습니다. 

구약 이사야서 65:1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약 요한계시록 21:1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합니다.

두 구절에서 차이가 무엇입니까?
창조한다과 보았다라는 동사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에서의 새 하늘 새 땅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강조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미 만들어진(창조 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사야서와 요한계시록에서의 차이

두 성구는 표면상 아주 비슷하거나 거의 같은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내가'(하나님이) 창조하신다고 밝히셨다. 
그래서 이전의 땅과 하늘은 기억나거나 생각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땅은 새로 창조하시기보다 이미 어디엔가 존재해온 것이 새로 나타나 있는 것을 기자(사도 요한)가 비로소 바라보고 있다. 

비록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옛 하늘과 옛 땅이 아니다. 
태초에 창조된 첫(옛) 하늘과 첫 땅(즉 창세기에서 기록된 천지 창조 때의)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이 첫 것이 사라진 뒤에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65장의 새 하늘, 새 땅과 요한계시록 21장의 새 하늘, 새 땅은 명칭만 같을 뿐, 적어도 개념상 서로 다른 것임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본문을 계속 읽어 나가다보면, 둘의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사야 65장의 이 새 하늘, 새 땅에서는 죽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이사야 65:20).

"거기는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새한글 성경 / 거기에서는 며칠밖에 못 사는 젖먹이가 더는 없을 것이다. 자기 살날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100세에 죽는 사람을 소년이라 하고, 100세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은 저주받았다 할 것이다.

20절이 그렇게 말해 준다.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와 제 명대로 다 살지 못한 채 죽는 노인이 없다고 했으니, 바꿔 말하면 넉넉히 살다 죽는 사람들은 있다는 얘기가 된다. 즉 불사는 아니라는 말이다.

거기서는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불러준다고 하니까, 백 살 넘어 죽는 사람은 있다는 얘기가 되고, 백 살이 채 못 되어 죽는 사람들은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이니, 바꿔 말하면 저주를 받았든 어떻든 이 새 하늘 새 땅에서는 그런 조기사망자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받아야지, 상징적으로 받으면 안 됩니다. 

바로 그 점이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의 모든 것은 수적 개념을 초월하여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하고 누리기 

이사야 65:21-22 /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 
                             그들의 건축한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


이 새 하늘 새 땅의 거주자들은 자기가 살 집을 짓고 살고, 포도나무 등 과실수를 심어 그 열매를 먹을 것이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평소 지상사회에서 당했던 것처럼 자신이 지은 집과 거둔 농산물을 남에게 뺏기거나 넘겨주게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처지는 옛 하늘, 옛 땅에서 수시로 벌어지고 겪던 일이다(참고 / 전도서 2:18, 21. 6:2).

전도서 2:18, 21
내가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전도서 6:2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이 거주자들의 수명은 나무의 수명과도 같이 길고, 자신이 일한 대로 길이길이 누릴 것이라고 했다. 
즉(23절) 헛수고를 하거나 앗기지 않은 채, 하나님의 복된 이들로서 또한 그 후예로서 대대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점들이 옛 하늘 아래, 옛 땅에서 살던 삶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들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한가? 
그것은 바로 계시록 20장에 나타난 천년왕국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이사야 65장의 새 하늘, 새 땅과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은 분명히 서로 구분되지만, 전자의 새 하늘 새 땅은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과 같다는 점을 말이다.

이 왕국에서는 사람의 수명이 나무의 수명과 같다는 말씀이 이를 입증해 준다. 
세계에서 가장 장수해온 나무의 수명은 무려 약 5000년이나 된다(강털소나무-Bristlecone pine tree가 그렇다. 
https://en.wikipedia.org/wiki/Bristlecone_pine 

반 만 년 동안 지구촌의 삶을 지켜 봐 왔다는 얘기다. 
그처럼, 사람이 1000년을 산다는 것이 이 천년왕국에서는 거의 평균적인 이야기다.

천년왕국에서의 수명

돌이켜 보자. 인류 초기 시대에 인류의 조상들의 수명은 거의 1000년씩이었다. 첫 사람 아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큰 죄를 짓고도 무려 930세를 살았다. 특히 아담에게 (순교자인 둘째 아들 아벨 대신) 주신 착한 아들 셑(셋)의 후손 중 머투쉘라(므두셀라)는 인류의 최장수자로서 969세를 누렸다!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지 않는가? 아무튼 당시 인류의 수명이 보통 800~950년 안팎이었다(참고: 창세기 5'3~32). 지구촌 홍수 당시 방주를 지은 의인인 노아 역시 950세를 향유(享有)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명백한 사실은 천년왕국은 어디까지나 천년왕국이지, 만년왕국이거나 무한하고 영원한 왕국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한하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인류의 최장수명은 1000세를 넘을 수 없다. 길어봤자 천 살이다.

과연 이 천년왕국의 행복한 시민들은 누구이며 천 년동안 무엇을 할까? 그들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하나님 말씀 때문에 목벰을 당한 영혼들, 그리고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로 이들이 크리스토(그리스도)님과 함께 천 년 간 통치를 하게 된다. 이들의 삶은 곧 첫째 부활에 속한다. 이들은 또 하나님과 크리스토님의 사제(제사장)들로서 천 년 간 온통 즐거움과 기쁨으로 섬기게 된다! 

반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죽은 나머지 사람들은 천 년이 다 차기까지 살지 못하고 있다. 즉 심판 때까지 부활이 없는 것이다. 

천년왕국 시민들에게 한 가지 더 좋은 것은 마귀의 유혹이 없고 따라서 죄 없는 삶을 누린다는 점이다. 그 지긋지긋한 죄 말이다. 어찌 그게 가능할까? 천 년 동안 사탄은 무저갱(無底坑)에 던져져 갇혀 있다가, 천 년이 다 차고 나면 잠시 놓여나와,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서 싸움을 붙이게 된다. 이들은 성도들의 진영과 주님이 사랑하시는 성을 포위하지만,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다 태워져 버리고, 마귀는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진다. 사탄의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거기 함께 하여 길이길이 괴로움을 받게 된다.

그 후엔 심판의 부활이 전개된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영들은 심판을 받아 사망 및 쉐올(Sheol)과 함께 불 못에 던져진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궁극적인 영원한 새 하늘 새 땅

그러나 거룩한 이들은 최후의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샬렘에서 길이 영복(永福)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계시록 21-22장 참조). 

간이 지배하고 지배받는 헌 하늘, 헌 땅의 유한한 곳이 아니라, 정말 하늘의 무한하고 영원한 곳이기 때문이다. 
거기는 생명수 강물이 있고, 그 좌우 강가에 자라면서 열매를 맺어 만국을 치료하는 생명나무들이 있고, 다시는 저주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궁극적인 새 하늘 새 땅에는 밤도 없고, 등불과 햇빛도 필요가 없다. 
그 하늘 성엔 어린양의 피에 자기 겉옷을 빤 복된 성도들만 들어가며, 개들과 점술가들, 음행자들, 살인자들, 우상숭배자들, 거짓말쟁이들은 들어가지 못한다(요한계시록 22: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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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늘과 새땅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천국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은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의 자세한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말의 사건들 이후에 지금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신자들의 영원히 처소는 새 땅이 될 것입니다. 
새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입니다. 
바로 이 새 땅에 새로운 예루살렘, 즉, 하늘의 도성이 자리를 잡게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땅 위에 진주 문들과 금 길이 있게 될 것입니다.

천국(새 땅)은 우리가 영광스럽게 된 육체를 가지고 거하게 될 물리적인 장소입니다(고전 15:35-58). 
“구름 속”에 있는 천국의 개념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공중을 떠다니게 되는 영들이 될 것”이라는 사상 또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신자들이 경험하게 될 천국은 우리가 거하게 될 새롭고 완전한 행성일 것입니다. 
새 땅에는 죄, 악, 질병, 고통, 죽음이 없을 것입니다. 
새 땅은 지금의 지구와 비슷하든지, 아니면 아마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가 재창조되어 죄의 저주가 없는 새 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새 하늘은 어떻습니까? 
고대의 사고에서는, ‘천국’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역뿐만 아니라 하늘과 우주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21장 1절이 새 하늘을 언급할 때, 그것은 온 우주(새 땅, 새 하늘, 새 우주)가 새로 창조될 것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하나님의 하늘 역시 물리적이든 영적이든,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에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재창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새 하늘에 접근할 수 있을까요? 
가능할 지 모르지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천국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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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1장 : 새 하늘과 새 땅

관찰 : 본문 읽기 (요한계시록 21:1-27)

요한계시록 21장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을 다룹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과 영원한 왕국을 상징합니다.

1. 새 하늘과 새 땅 (21:1-8)

  1.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21:1-2)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또 내가 보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거처 (21:3-4)
    •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 모든 눈물을 그들의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
  3.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 (21:5-6)
    •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기록하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라 하시고.
    •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리니.
  4. 성도들의 상급과 불신자들의 운명 (21:7-8)
    •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2. 새 예루살렘의 환상 (21:9-27)

  1. 신부의 모습 (21:9-11)
    •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광채가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2. 성의 성벽과 문 (21:12-14)
    • 크고 높은 성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지기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에 이름이 쓰여 있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 그 성에 성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3. 성의 크기와 재료 (21:15-21)
    •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타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 그 성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 그 성벽은 벽옥으로 되어 있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황옥수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둘째는 자수정이라.
    •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진주요. 그 성의 길은 정금이니 맑은 유리 같더라.
  4.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21:22-27)
    • 성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 그 성은 해나 달의 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 성문들은 낮에 도무지 닫히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주요 구절 / 요한계시록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들의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

해석 / 새 하늘과 새 땅의 의미

1. 새 하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1. 새로운 시작 : 처음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새로운 창조가 시작됩니다.
  2. 하나님의 장막 :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완전한 회복 : 사망과 슬픔이 없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됩니다.

2.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백성들의 영원한 거처를 상징합니다.

  1. 하나님의 영광 :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합니다.
  2. 완전한 성 : 성의 크기와 재료는 완전함과 영광을 나타냅니다.
  3. 성전이 없음 : 하나님과 어린 양이 직접 성전이 됩니다.
  4. 영원한 빛 :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을 비추어 밤이 없습니다.

3. 성도들의 상급과 불신자들의 운명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상급을 주시고,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십니다.

  1. 성도의 상급 :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며, 그의 아들이 됩니다.
  2. 불신자의 심판 : 불신자들은 불못에 던져져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

적용 / 새 하늘과 새 땅의 교훈을 실천하기

1.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기대하기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기대하며 그의 나라를 소망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임재 소망 :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며 그의 영광을 소망해야 합니다.
  2. 영원한 삶 소망 : 우리는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하나님과 함께 거할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2. 성도로서의 삶을 실천하기

우리는 성도로서의 삶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1. 성도의 삶 : 우리는 성도로서의 삶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2. 옳은 행실 : 우리는 옳은 행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심판을 경외하기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외하며 그의 공의를 인정해야 합니다.

  1. 심판의 두려움 :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그의 공의를 인정해야 합니다.
  2. 공의의 찬양 : 하나님의 공의를 찬양하며 그의 심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결론

요한계시록 21장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과 영원한 왕국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기대하며 그의 나라를 소망하고, 성도로서의 삶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외하며 그의 공의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본이 되시며, 그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의 삶을 조정하고 성장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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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요한계시록  21:1-8)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전 1:9-10). 매우 공감되는 말이다. 새 것은 금세 헌 것이 되고, 삶은 이미 있던 것의 재탕, 이미 한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5절).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약속하셨다(벧전 1:4). 

미국 CCM 밴드 머시미의 리더 바트 밀라드는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이란 잘 알려진 노래로 하나님과 함께할 천국을 단지 상상할 뿐이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세상을 단지 상상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성경의 마지막 계시를 통하여 우리가 바라는 천국의 윤곽을 보여주시고, 우리가 사모하는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볼 수 있게 하셨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기를 구한다. 천국을 더욱 사모하도록, 그래서 세상에 미련을 두게 만드는 온갖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자가 되게 하시기를 바란다.

1. 새 하늘과 새 땅의 특징(1-4절)

먼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천국의 수도인 새 예루살렘 도성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모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요한이 직접 본 장면, 직접 들은 음성에 따른 것이다(“또 내가…보니”, “또 내가 보매”, “내가 들으니”, 1, 2, 3절). 세상엔 천국을 보고 들었다는 수많은 거짓 증언이 존재하고 인기를 끌지만, 정작 진실로 천국을 보고 들은 사도의 유일한 증언에 주목하는 자는 드물다. 온전히 신뢰할 수 있고 바랄 수 있는 천국의 비밀이 여기 있다.

천국의 구체적인 특징은 9절부터 다음 장 5절까지 묘사된다. 이를 요약한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천국의 주요한 특징은 바로 ‘새롭다’는 것이다. 하늘, 땅, 예루살렘 등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그런데 새롭게 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① 완전히 창조한다 : 

창조를 ’정화’로 보는 사람이 있다. 
타락한 피조세계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고치시는 것이다(불). 또 다른 해석은 ‘새 창조’이다. 옛 세계를 완전히 제거하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사용된 “(new)”의 의미는 ‘가치나 매력에서 우월하다’, ‘옛것보다 낫다’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진 상태, 새롭게 창조된 세상에 바다해와 달이 없는 것을 볼때(23절), 하나님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실 것이다. 기존과 유사성을 갖지만, 완전히 다른 질서와 체계를 가진다.

② 완전히 아름답다 : 

천국의 거룩한 성의 이름은 새 예루살렘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지으신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죄로 인해 바벨론, 로마에게 차례로 함락당하고, 천년 왕국 때 이 땅에 재건되었다가, 영원한 천국에서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영원히 세워진다. 요한은 그 모습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라고 말했다. 크고 웅장하고 견고하고 아름답고 정결한 성으로 영원히 있을 것이다(21:9-22:5). 

③ 완전히 선하다 : 

바다는 하나님 백성을 실족시키는 악의 무리가 출몰하는 곳으로 생각되었던 장소다(계 13:1, 짐승). 하나님은 악의 세력을 모두 불못에 영원히 가두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출몰지 자체를 없애버리신다. 악이 발현할 수도 없고, 악을 발견할 수도 없는 선한 세상을 창조하신다. 선한 세상은 죄도 없고 죄의 결과도 찾아볼 수 없다. 처음 하늘과 땅은 죄로 인해 저주받아 고통과 슬픔과 질병과 사망을 낳았다. 하지만, 새롭게 창조하실 세상엔 다시는 사망, 애통하는 것, 곡하는 것, 아픈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다(4절).

④ 완전히 친밀하다 :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는 ‘새로움’은 선하고 아름다운 만물의 새로움이지만, 그리스도인이 가장 큰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바라봐야 할 ‘새로움’은 하나님과 우리의 완전히 친밀한 관계에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운 광경에 사로잡힌 요한에게 또렷이 들린 하나님의 말씀, 보좌에서큰 음성이 이를 말해줬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3절). 

천국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곳이다. 
과거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광야 장막에서 함께 거하셨다. 
지금 하나님은 자기 백성 교회와 성령으로 함께 거하신다. 
그러나 천국에서 하나님은 완전히 새로운 친밀함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실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사실 하나님 없이는 천국도 없다.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5절: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나님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시고 하늘에서 내려보내 주신다(2절: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영원히 심판하시고 그동안 선을 위해 수고하며 흘렸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신다(4절). 천국은 바로 이 하나님께서 현현으로 자기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 백성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시는 친밀함을 영원히 공유하시는 선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살면서 아쉬운 것이 있을 때만 천국을 생각한다. 집이 없을 때, 아름다운 처소를 바라고, 아프고 슬플 때, 고통과 슬픔이 없는 천국을 생각한다. 괴로울 때 위로와 안식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죄로 넘어질 때, 악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다른 종교 신자들도 바라는 것들이 아닌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히 11:1). 당신이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무언가인가? 아니면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그분 자체인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싶어 천국을 기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윗처럼 자기 영혼에게 하나님만 바랄 것을 요구하라.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2. 새 하늘과 새 땅의 임금(5-6절)

영원한 세상에서 무엇이 새롭게 되는지 살펴봤다면 이제 누가 새롭게 하는지 살펴볼 차례다. 앞서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시고 때가 됐을 때 내려주신다고 했다.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임금으로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

먼저, 그분은 보좌에 앉으셨다(보좌에 앉으신 이, 5절). 보좌는 다스리고 통치하고 심판하는 모든 권세가 있는 왕의 자리다. 그분은 이미 모든 악을 심판하셨고, 이제는 자기 백성과 함께 만물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체시다. 하나님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고 선포하셨다. 거기에다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고 확증하셨다. 반드시 계획하신 그대로 이루신다는 분명한 열심과 의지가 표명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기록하라”고 명령하심으로 변하지 않는 그분의 계획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증하셨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처음 드러난 것이 아니다. 본문이 기록되기 8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예언하셨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사 65:17-18). 그러면서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뜻을 이루리라’ 하였노라”라고 하셨다(사 46:10).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신다는 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주관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본문에서는 이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라고 표현했다(6절). 역사의 시작과 끝,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엡 1:11). 그분이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이루었도다”라고 선언하셨다(직설법 완료). 사람이 하는 일은 아무리 오랜 계획과 많은 노력과 막강한 자원으로 시작해도 쉽게 변경되고 지체되고 폐기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미래에 이루겠다고 선포하신 계획은 이미 완료된 것처럼 정하신 때와 정하신 방식대로 한 치의 오류 없이 성취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으면서도 종말을 불신하는 사람이 있다. 베드로는 말세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조롱하며 정욕대로 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경고했다(벧후 3). 그들은 말씀하신 그대로 천지가 창조되었음을 믿고(창 1), 말씀대로 홍수가 나서 땅이 심판받았음을 믿고(창 6), 지금 보고 있는 하늘과 땅이 말씀으로 붙들려 있다는 것을 믿었지만(히 1:3), 그 말씀대로 처음 만물이 불태워지고 새로운 만물이 창조될 것을 믿지는 않았다.

당신은 믿는가? 하늘과 땅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진실로 믿는 자는 곧 불타버릴 곳에 삶을 투자하지 않는다. 새롭고 영원한 곳에 삶을 투자한다. 썩고 더럽혀지고 쇠하게 될 유업을 바라지 않는다. 영원하고 변함이 없는 유업을 바란다. 당신도 그러한가?

3.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7-8절)

마지막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받게 될 자가 누구인지 살펴보자.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계시록은 하나님 반대편에 선 자들, 마귀를 따르는 자들,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 심판받을 것이며,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의 최종 운명이 둘째 사망이라고 가르쳤다. 

본문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음행하는 자들, 점술가들, 우상 숭배자들,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이라 했다(8절). 

두려워하는 자들”은 환난과 핍박 등 믿음을 시험하는 일을 만나면 두려워 자기 안위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를 가리킨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어떤 사실을 불신하는 자가 아니라 신실하지 않은 자를 의미한다. 여러 가지 유혹에 빠져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깨는 자다. 
흉악한 자들”은 ‘가증한 자들’을 말하며 뒤에 나오는 우상 숭배자들과 같이 하나님 아닌 다른 대상을 경배하는 자들인데, 특별히 여기와 로마서에서만 사용되는 동사가 사용되어 황제 숭배를 허용한 자들과 관련이 있다. 
점술가들” 또한 하나님의 뜻이 아닌 미신적인 뜻을 좇는다는 면에서 일종의 우상숭배자와 같다. 
살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죽이는 일에 가담한 자들이고(특별히 대환난 기간에), “음행하는 자들”과 “거짓말하는…자들”은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사람들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만 믿는 일에 불충한 자들,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지 않고, 충성스럽게 따르지 않는 이들이다. 

반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으로 받는 백성은 “이기는 자”다(7절). 그들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바라고, 믿는 일에 반하는 모든 것과 치열하게 싸워 이기는 자다. 그들은 땅의 지체를 죽이고(골 3:5), 마귀를 대적하고(약 4:7),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요일 2:15). 육신의 정욕에 질 때도 있지만,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기 위해 싸운다. 그들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열렬히 사랑하여 목마른 자다.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6절).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성도에게 편지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렇게 소망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보기 원한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참모습을 본 자들이 그곳에 초막을 짓고 영원히 살기 원했던 것처럼, 그분의 영광스러운 참모습을 보면 우리는 영원히 매료되어 기쁨과 만족을 얻고 친밀한 사랑을 나눌 것이다. 요한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이 당신의 삶을 지금 깨끗하게 하는가? 당신은 누구를 사모하고 무엇을 바라며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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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 새 땅(new earth)은 왜 필요할까?

🌍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땅은 왜 필요할까?

천국, 낙원, 셋째 하늘은 서로 다른 장소일까요? 아니면 같은 곳을 가리키는 표현일까요? 

천국(heaven)은 여러 개의 다른 장소라기보다는, 상급에 따라 배치와 위치가 달라지는 하나의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렇기에 천국, 낙원, 셋째 하늘은 본질적으로 같은 장소이며, 영광과 권세에 따라 중심과 변두리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즉, 최상위 상급을 받은 자들은 중심부에 거주하고, 상급이 적은 자들은 변두리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계 21:5)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1)

새 하늘과 새 땅, 듣기만 해도 마음이 설레며 상상초월하는 신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가 종료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십니다.

  • 현재의 천국(heaven): 죽은 성도의 영혼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 새 하늘(new heaven): 부활한 몸을 입고 들어가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들어갈 새 하늘이 있다면, 굳이 새 땅은 왜 필요할까요?

왜 새 땅이 필요한가?

현재의 땅은 인간이 천국과 지옥을 선택할 수 있는 시험의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선택과 심판이 끝난 이후에는 다시 땅이 필요하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새 하늘과 함께 새 땅도 창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창조의 회복과 완성

하나님은 처음부터 하늘만이 아닌 땅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그 모델입니다. 비록 인간의 죄로 인해 땅은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이 땅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회복을 계획하셨습니다.

새 땅은 이 창조의 완성이며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지 영혼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몸과 영혼이 통합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구원의 최종 모습은 영혼이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몸이 물리적인 공간에서 사는 것을 포함합니다.

2️⃣ 왕 같은 제사장들의 통치 영역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상급에 따라 권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이며, 각기 행성이나 영역을 맡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눅 19:17)

"다시 밤이 없겠고...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계 22:5)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계 5:10)

이 말씀들에서 알 수 있듯, 하나님은 왕이 다스릴 실질적인 영역을 주십니다. 그 공간이 바로 *새 땅*입니다.

3️⃣ 새 예루살렘성과 천국의 본부

"또 내가 보니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2)

새 예루살렘성은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거주하는 영원한 천국의 본부이자 행성들을 통제하는 중심 도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영적인 상징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사하여 내려온 실제적 공간입니다.
하늘과 땅이 완전히 하나로 통합되는 것,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4️⃣ 우주적 통치 질서

계시록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이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계 21:24)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계 21:26)

각 나라의 왕들, 곧 행성과 은하를 맡은 자들이 새 예루살렘을 출입하며 통치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처음 우주에도 셀 수 없는 행성과 은하가 존재했듯,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자는 은하계를, 어떤 자는 행성 여러 개를, 또 어떤 자는 도시나 지역을 맡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상급과 충성의 결과입니다.

5️⃣ 부활의 영광과 영원한 차이

바울은 더 좋은 부활을 바라보며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그것을 발견한 후,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 13:44)

천국은 평등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구원받지만, 모두가 왕은 아닙니다.

일반 백성으로 살 수 있음도 영광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자들은 그에 걸맞은 왕권과 기업과 영역을 받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순히 새로운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완성, 왕권의 실현, 하늘과 땅의 연합, 구속받은 자들의 영광스러운 삶의 터전입니다. 
그곳은 영생을 보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영혼으로만 끝내지 않으시고, 부활한 몸으로, 실제 공간에서, 주와 함께 왕 노릇 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새 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