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



새 예루살렘의 정체’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논쟁의 핵심은 과연 새 예루살렘이 마지막에 나아가게 될 천국을 그리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신부’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종말에 누릴 축복을 그리고 있는가에 있다.

‘계시록’의 의미인 ‘밝혀진 또는 열린’ 등의 개념과 대조적으로 아직도 요한계시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고 감춰진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런 익숙지 않음이 때로 불안한 세상에 편승해 ‘연약한 자들’을 유혹하는 이단의 잘못된 해석에 희생 제물이 되기도 한다. 때로 지나친 문자주의적 해석에 근거한 나머지 중동 지역의 국지전을 ‘아마겟돈 전쟁’으로 예견하는 정도까지 이르러 결과적으로 종말론에 대한 회의를 낳게 만들기도 한다.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이해도 이런 안개 속에 싸여 있는 듯한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 보인다. 새 예루살렘은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마지막 환상에 속하는 부분(21:1~22:5)이다. 사람들은 「내가 본 천국」 등의 책이 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이해는 본문의 가르침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 부정확한 성경 해석이 근거 없는 ‘믿음’으로 이끌며 그 믿음이 확산될 경우에 매우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올바른 성경 해석에 근거한 믿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해석과 함께 그 안에 담겨 있는 가르침이 현대 교회를 향해 주는 메시지를 논하기 전에, 이 부분이 안고 있는 두 가지 이슈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첫째, 마지막 때에 주어지는 ‘새로운 세상’의 정체에 관한 질문이다. 요점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속성이 ‘갱신된 세상’(renewed world)인가 아니면 ‘새롭게 창조된 세상’(replaced world)인지에 관한 논쟁이다. 현재 세상과 연결하는 견해는 연속성(continuity)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다른 견해는 비연속성(discontinuity)에 무게를 두고 있다.

둘째, ‘새 예루살렘의 정체’에 관한 것으로 논쟁의 핵심은 과연 새 예루살렘이 천국을 그리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신부’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종말에 누릴 축복을 그리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더해 어느 한 쪽으로 치중하기보다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에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21:1~22:5)

이 부분을 해석하기 위해 ‘문맥’의 중요성과 함께 비유적 또는 상징적 표현의 당위성을 이해해야 한다. 문맥에 대해선 근접한 문맥과 넓은 문맥을 모두 염두에 둬야 한다. 먼저 근접한 문맥으로, 17장 1절에서 22장 5절까지 소위 ‘두 도시’(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의 이야기로 알려진 부분을 살펴봐야 한다. 다음에 넓은 문맥으로, 요한계시록의 시작에서 이 부분에 이르기까지의 전개와 나아가 구약과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 발전해 온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을 고려해야 한다.

비유적 또는 상징적 표현의 당위성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과 연관해 생각할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의 내용은 ‘초월적 현실’(transcendental reality)을 다루고 있다. 특히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모든 것들의 완성이라는 면에서, 또 초월성이라는 면에서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 초월적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비유와 상징적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마치 문명의 이기에 관한 경험이 전혀 없는 정글 속사람들에게 전자 오븐이나 휴대전화기를 설명하려고 한다면, 그들이 갖고 있는 언어와 경험의 경계가 표현의 한계를 결정하게 되듯이 말이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21장 18절과 21절에 나오는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든가, ‘더 이상 바다가 없는 가운데(21:1) 존재하는 샘’(21:6)이라든가, ‘강’(22:1) 등은 상징적 또는 비유적 해석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저자 요한은 이 책의 독자들에게 친숙한 상징과 모델들을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에서 찾고 있으며 그것을 기초로 자신만의 요소들을 더해 자신이 본 초월적인 현실을 전하고 있다.

(1) 새 창조(21:1~8)

먼저 이 단락이 속한 문맥에 관해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단락은 음녀 바벨론의 멸망(17:1~19:10)과 신부로 표현된 새 예루살렘의 축복(21:9~22:5) 사이에 놓여 있는 ‘종말의 종말’을 구성하는 연속의 사건들(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아마겟돈 전쟁, 천년왕국, 마지막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19:11~21:9)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부분을 통해 악의 세력의 철저한 제거 과정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이 거하는 땅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늘이 서로 연결돼 둘이 하나가 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에 더해 21장 9절부터 시작되는 새 예루살렘에 관한 두 가지 커다란 요소를 소개함으로써 동시에 새로운 단락(21:9~22:5)의 서론 부분 역할도 감당하고 있다.

본문에서 중요한 점은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분명하게 보여준 악을 철저히 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더해 더 이상 악이 거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질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새 창조’에 관한 약속(사 65:17~18)의 성취일 뿐 아니라,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롬 8:21)되는 순간이다. 특별히 저자 요한은 21장 1절에서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표현을 더함으로써 짐승이 나온 곳(13:1)이고 죽은 사람들의 장소(20:13)이며 세상의 우상 숭배적 상업 활동의 무대(18:10~19)일 뿐 아니라, 세 부분으로 나눠진 옛 세상의 일부(8:8~9, 14:7)의 부재를 통해 악의 부재와 그 악이 편만했던 옛 세상의 지나감을 강조한다.

저자는 새로운 세상을 언급한 후 초점을 새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있다. 마치 새 예루살렘이 새로운 세상의 축소판(microcosm)인 양 새 예루살렘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묘사한다. 구약의 약속인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사 2:1~5, 18:7)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세상을 다스리신다(사 24:23). 또 에덴동산과 같은 곳(겔 36:35)이고 백성들과 함께 영원히 거할 곳(겔 37:26~27)이며, 생명의 물이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올 것(슥 14:8) 등 선지서 속의 시온과 예루살렘에 관한 수많은 기대와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새 예루살렘을 보면 어떤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으며, 어떤 축복을 누릴 것인지 소망할 수 있게 만든다. 
새 예루살렘은 두 가지 커다란 특징으로 소개되고 있다. 3절에서 말씀하듯,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과 4절에서 말씀하듯, 세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전혀 다른 현실을 그려주고 있다. 이 두 가지에 대해 다음 단락(9~27)이 3절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고, 그 다음 단락(22:1~5)이 4절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1~5)

새로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새롭게 된다(5절). 그렇다고 모든 것들이 현재 세상과 연속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입을 ‘영광의 몸’(빌 3:21)은 현재 우리의 몸과 다르지만, 둘 사이에 연속성이 배제되지 않은 새로움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참고 눅 24:39, 롬 8:11).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처소인 새로운 세상의 ‘새로움’은 위의 경우와 조금 다르다. 다시 말해, ‘이미 새로워진 하나님의 백성’(고후 5:17)과 ‘새 하늘과 새 땅’ 간의 ‘새로움’에 차이가 있다.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이 함께 거할 곳이기에 옛 세상과의 연속성을 배제해 버린다.

그곳은 특별하기에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고 현재의 삶에 근거해 결정된다. 요한계시록에서 반복해 말하고 있듯이, 오직 세상의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힘이나 스스로의 의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12장 11절 등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이긴 자들’이 들어간다. 요한계시록이 교회를 향해 씌어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말씀에서 담고 있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8절에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목록이 나온다. 여기에는 세상의 유혹과 핍박에 이기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그런 행동을 하거나 거짓 교리를 전하는 이단들이 포함된다. 2~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의 문제들과 연결해 생각할 때 이해가 된다. 열매를 찾아볼 수 없는 자,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며 따르는 자, 세상과 타협함으로써 세상과 구분 되지 않는 자 등 간단히 말해 ‘알맹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들을 향해 경고하고있는 것이다.

(2) 지성소로서 새 예루살렘(21:9~27)

새 예루살렘이 2절의 ‘신부와 같이’라는 직유적 표현에서 9절의 ‘신부’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바뀐다. 하지만 여기에 근거해 새 예루살렘이 신부이고 신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의 정체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 특히 15장 2절(‘유리 바다 같은 것’에서 ‘유리 바다’로)이나 21장 11절(‘벽옥같이’)과 18절(‘벽옥’)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의미의 변화를 감지할 수 없는 예들은 위의 결론을 지지하고 있다.

결국 문법적으로 다른 두 표현일지라도 기능면에서 차이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차이를 단순히 저자 요한의 스타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저자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며 새 예루살렘의 두 주인공인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고 있다는 근거는 다음에서 볼 수 있듯이,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 자체에 있다.

새 예루살렘이 지성소라는 사실을 전개해 나가는데 있어서 저자 요한은 세 가지 요소에 초점을 맞춰 외부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듯이 소개하고 있다. 먼저 11~14절에서 외부적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 후 16~17절에서 외적인 구조에 관해 표현하고, 마지막으로 새 예루살렘의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요소에 대해 22~23절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구성 요소들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 묘사의 특징을 들자면, 열둘이라는 숫자의 만연함이라고 할 수 있다. 열두 문과 열두 지파의 이름(12절), 성벽의 열두 기초석 및 그들에 기록된 열두 사도들의 이름 (14절), 열두 진주문(21절) 등을 포함해 성벽의 가로 세로 길이가 12,000(=12x103) 스다이온에, 성벽의 두께는 144(=12x12) 규빗이라고 말하고 있다. 열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숫자다. 새 예루살렘의 묘사에서 열둘이라는 숫자의 강조는 그곳에 들어가는 새로운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정체에 관해 구약의 공동체와 신약의 공동체를 모두 언급하기보다 예수님의 피로써 구원 받은(예 1:5, 5:9, 7:14), 그리고 그분의 피로써 사탄을 이긴(12:11) 사람들을 언급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시 말해, 사도들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영적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다.

구조를 논하며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가로 세로 높이가 동일한 정육면체 모양의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의 모델(왕상 6:20, 대하 3:8)을 근거로 해서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있다. 독특한 점이 있다면, 거대한 크기(한 면이 2,400㎞인 정육면체)에 비해 성벽의 두께는 상대적으로 초라한 144큐빗(약 65m)으로 표현돼 있다는 것이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숫자들을 보며 숫자 자체에 문자적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오히려 그 숫자에 포함된 하나님 백성들의 상징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나아가 규모의 거대함에 더해 정육면체 형태의 지성소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결국 마지막 세상의 모습으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과 영원히 거할 지성소 중의 지성소로 묘사되고 있다.

예루살렘 성의 아름다움은 다양한 보석을 통해 특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곳의 길은 이 땅의 금의 모습이 아니라 ‘유리 같은 정금’이며, 성벽과 기초석과 문은 온갖 보석으로 치장이 돼 있다. 물론 보석의 일부(벽옥, 홍보석, 녹보석)는 하늘의 보좌를 논하며(4:3) 등장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와 있는 다른 보석들은 헬라어에서 실제로 어떤 보석을 의도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열된 보석들과 동일한 리스트를 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결국 보석들에 관한 결론을 외부에서 찾기보다 책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특별히 음녀 바벨론을 논하며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다’(17:4. cf. 18:4)는 표현과 의도된 대조를 놓쳐선 안 된다. 스스로 온갖 악행과 불의로 얻은 것들로 치장한 음녀 바벨론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한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새 예루살렘의 대조를 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적 특성을 언급함에서 새 예루살렘은 ‘성전’이 없는 성이라고 말하고 있다(22절). 물론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예루살렘 성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성전의 부재를 의미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은 성과 성전의 구분을 없애 버린, 성 자체가 성전이며 지성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표현을 쓰고 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새 예루살렘에서 ‘성전’이라는 것이다(22절). 마치 ‘새 예루살렘’이 단순히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를 나타내고 있듯이, ‘성전’도 단순히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백성들의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상호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믿는 사람들의 모든 소망함의 성취된 모습을 그리고 있다.

(3) 새로운 에덴으로서 새 예루살렘(22:1~5)

바로 앞 단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표현된 새 예루살렘을 그리고 있다면, 이 단락에선 그들이 거하는 장소에 초점을 맞춘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새 예루살렘의 중심이 보좌이며 그와 함께 언급된 생명나무의 존재다. 보좌의 중심됨은 4장에 그려진 하늘의 성전을 통해 이미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새 예루살렘의 중심에도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그런데 그 보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것만이 아니라 어린양의 것이며(3절),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원천이며(1절), 다시는 저주가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3절).

연이어 보여주는 것은 정원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닌 파라다이스의 모습을 지닌 새 예루살렘이다. 그 정원에선 다른 나무보다 생명나무가 중심이 되고 그곳에 거하는 거민 들이라면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나 소성함을 얻으며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에덴의 회복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곳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는 이 세상과 달리(출 33:20), 하나님의 얼굴을 목도하며 살게 된다. 또 하나님께서 에덴을 지으시고 의도하셨던 뜻을 온전히 이루며 살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을 온전히 섬기며(3절) 그곳에서 다스리게 된다(5절). 물론 여기서 무엇을 다스릴지에 관해서는 말해 주고 있지 않는다. 새 예루살렘을 논하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요한계시록 저자의 의도를 고려해 볼 때, 이런 생략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창세기에 기록된 처음 창조의 세상을 볼 때, 새롭게 창조될 세상에서 다스릴 대상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는 일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만드시고 명령하시며 기대하신 일이었다. 이런 다스림은 천년 왕국(어떤 견해를 갖고 있든지 상관없이) 동안의 통치(20:6)와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통치’라는 특성을 갖는다(5절). 다시 말해 단순히 에덴의 회복을 뛰어넘는 것이며, 나아가 에덴에서의 원래 목적(예배)이 이뤄지는 곳임과 동시에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다스림을 통해 온전히 제사장과 왕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현대 교회를 향해 새 예루살렘이 주는 메시지

새 예루살렘의 도래는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그 순간을 가르치고 고대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온전히 성취되는 순간일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바람과 소망의 온전한 완성이기도 하다.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변화된’ 백성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것이며, 다시 얻은 에덴동산이 아닌 그 이상의 파라다이스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예배하며 허락하신 것을 영원히 다스리는 역할을 감당하며 살게 된다. 현재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 나라에 국한된 성전이, 마지막 때에는 지성소로 그리고 파라다이스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이런 가르침이 현대 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자.

현대 사회를 논하며 사회를 주관하고 있는 두 개의 정신 사조로 흔히 물질주의(materialism)와 자아도취(narcissism)를 지목한다. 교회조차 알게 모르게 이런 사조에 밀려 표류하고 있는 것이 현대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지적이기도 하다. 만약 그들의 평가가 사실이라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 그 중에서도 새 예루살렘에 관한 가르침이 주는 메시지는 매우 명료하다.

첫째, 물질주의의 위험과 함께 물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물질주의와 연결돼 있는 것이 물량주의이고 물량주의와 연결돼 있는 것이 외적 성장주의이며, 성장주의와 연결돼 있는 것이 세상적 개념의 성공제일주의이다. 이런 것들을 향한 새 예루살렘이 주는 메시지는 세상에서의 가치가 천국에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의 연속성을 가지는 ‘사람’인가를 묻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체가 다음 세상과의 연속성이 없는 ‘물질’인가의 근본적 질문을 하며 평가하도록 만들고 있다.

현재의 시각으로 아무리 가치가 있는 것일지라도 궁극적으로 모두 없어질 것이며, 또한 그곳에 절대 갖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추구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 16:9)는 가르침을 주신다. 물질이 아니라 사람의 소중함을 강조하시는 메시지다. 「내가 본 천국」에서 주장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상의 온갖 보화를 통해 묘사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써 나타나는 영광의 결과이지, 결코 천국의 모습과 동일시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외적인 아름다움이 천국을 사모하는 이유가 된다면, 물질주의에 젖은 우리의 모습을 방증(傍證)하는 것이 분명하며 이에 더욱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둘째, 자아도취의 위험함을 깨닫도록 요구하고 있다. 자아도취와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있다. 주기도문을 보아도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 정체성이 정해지는 개인임을 기억해야 한다. 새 예루살렘의 묘사를 보며 다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뿐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온전한 교제의 완성된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개인 종교가 아니라 공동체 종교이며,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믿는 사람들 모두 함께 새 예루살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의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는 말씀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공동체로서 교회를 바라봐야 한다. 이런 관계는 단순히 교회 안에서 성도들간의 관계에 국한된 것일 뿐 아니라 교회와 교회 간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사이에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 하나됨의 목적이 전도와 선교에 있음(요 17:21, 23)을 말씀하신다. 따라서 협력하며 동역하는 모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도들 간에 또는 지역 교회들 간에 존재하는 갈등과 반목은 온전한 교제가 이뤄지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통해 회복을 향한 노력으로 변화돼야 한다.

셋째, 천국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은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본다고 한다. 「내가 본 천국」과 같은 책에서 ‘신비로운 경험’에 근거해 주장하는 천국의 모습을 들어 보면, 천국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며 그것에 근거한 바른 믿음을 갖고 살아갈 때 제대로 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 이 땅에서 가치 있는 것들로 가득한 곳이 천국이라기보다, 세상의 가치로선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곳이 새 예루살렘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온전히 회복된 에덴 이상의 지성소적 파라다이스로 인간의 모든 필요와 소망이 채워지는 곳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온전히 성취되는 곳임을 기억해야 한다.

넷째, 진정한 예배의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히 하고 있다. 에베소서 2장 21~22절을 보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교회가 이미 성전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교회와 새 예루살렘간의 연속성은 가장 강하게 나타나 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예배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 축복이기에 현재의 예배를 하나님 중심으로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현대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 중심의 틀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누가 예배의 중심이 돼야 하는지에 대해 돌아보며 예배를 통해 마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으로의 초대 및 만남이 이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교회에서 신앙 훈련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교인이 아니라 ‘이기는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로서 삶을 살 수 있는 이기는 자들로 만들기 위해 부단한 훈련과 점검을 해야 한다. 특히 ‘성도들의 옳은 행실’(19:8) 등을 강조하는 요한계시록을 염두에 두고 한국 교회를 향한 외부에서 들려오는 최근의 비판적 평가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 음녀 바벨론의 특성들로 만연된 세상에 둘러싸여 많은 도전과 시험 속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이끌리며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을 향한 도전이 새 예루살렘이 주는 메시지이다. 

오직 행함있는 믿음으로

어느 곳에 있더라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우리의 사는 모습 속에 드러나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통해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한 시대다. 새 예루살렘이 현대 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리 모두를 향해 이기는 사람들이 될 것을 도전하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는 말씀을 순간마다 기억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기는 자들’의 대열에 설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의 모든 것은 새롭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것이 현재 세상과의 연속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몸과는 다르나 연속성이 배제되지 않은 새로움을 얻을 것이 분명하다. 

‘성전’은 단순히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의 백성들의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존재로 나타나 있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믿는 이들의 모든 소망함의 성취된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이기는 자들, 곧 그리스도의 참 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사진은 초대교회의 하나인 사데교회의 유적과 어느 지하교회의 입구 모습.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또 다른 성경 속의 말씀을 통해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한 시대이다. 새 예루살렘이 우리 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리 모두를 향해 이기는 자들이 될 것을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