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구조(요한계시록 2:12-13) 라마나욧 공동체와 아둘람 공동체


영적 구조(요한계시록 2:12-13)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도시를 잡고 있는 영을 분별한 후에 도시에 나가 전도를 시작한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지역에서 영적 싸움에 이겨야 한다.
그래야 삶이 평안하다.

5병 2어의 기적을 행한 후에 배를 타고 가실 때 풍랑이 일어났다.
바다 위로 예수님이 걸어오셨다.

바람아 잔잔하라!
파도야 멈추어라!

거라사 지방을 잡고 있던 악령들이 갈릴리 바다를 뒤흔들었다.
군대귀신들린 자가 나타나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소서!
군대귀신들린 사람을 회복시켜주셨다.

우리 집안을 덮고 있는 악한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물러갈지어다!

다니엘을 붙잡고 있는 악한 영은 즉시 물러갈지어다!

바사국 군대가 막고 있을 때 / 바사 국군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 다니엘이 바사국에 머물고 있었다.
바사 국군 / 공중 권세를 잡은 자
땅의 바사와 공중 권세를 잡은 바사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오지 못한다.
미가엘을 내려보내어 통로를 만들어 주었다.
21일이 걸렸다.

라마나욧


라마나욧'은 생소한 용어다.
'라마'는 사무엘의 출생지이자 고향이다.
이곳에 사무엘의 관저가 있었고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벧엘·길갈·미스바 등지를 순회하였다.(삼상7:15~17)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곳에서 사무엘에게 그들의 왕을 선정해 달라고 요청했고,(삼상8:4~55)
이에 따라 첫 번째로 사울을 택해 기름부음을 준 곳이며,(삼상10:1)
이후 다윗을 택해 기름부음을 주었다.(삼상16:13) 

 
사무엘은 사울이 타락하자 결별하고 고향 '라마'로 돌아왔는데(삼상15:34~35)
이때 이곳에 '나욧'을 세워 후학들인 선지자들을 가르쳤다.

'나욧'은 거주지·거처·초원지대라는 뜻으로 지금의 '기숙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무엘은 말년에 사울이 타락하자 훗날을 기약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엘이 '라마'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동안, 하나님의 명에 따라 기름 부어 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미갈의 도움으로 도피한 곳도 '라마'였다.(삼상19:18)
사무엘은 사울의 행태를 고하는 다윗을 '나욧'으로 데리고 가서 말씀으로 교육했다.(삼상19:19)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다는 것을 안 사울은 세 번에 걸쳐 다윗을 잡아오라고 사람들을 보냈으나 그때마다 '라마나욧'에 온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예언하게 된다.(삼상19:21)

이때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거나 선지자적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황홀경 상태로 성령이 임한 현상이다.
이에 사울은 다윗을 잡으러 직접 가는데 그가 '라마나욧'에 도착하자 그에게도 성령이 임했고 사울은 사무엘 앞에서 예언하며 벌거벗고 종일 누워있게 되었다.

이는 성령이 임하여 사울의 죄와 수치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때 다윗은 피신하였다.
 
'라마나욧'은 선지자들을 가르친 말씀 공동체요, 교육기관이다.
또 말씀의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지성을 위해 성령의 은혜가 함께하고 역사하는 영성 훈련장이요, 성령 공동체였다.
아마도 다윗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며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라마나욧' 출신들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두란노서원'을 통해 2년 동안 후학들을 길러내고 그들이 흩어져 가정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순회 전도자가 되어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웠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성경 공부는 말씀을 지식적으로 공부할 뿐 아니라 성령의 조명과 은혜가 충만해야 한다.
오늘 나는 '라마나욧'을 다시 생각한다.

라마나욧이 무슨 뜻인가요?

라마(Ramah)는 사무엘의 고향으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두메산골입니다.
그리고 나욧(Naioth)은 작은 공동체를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사무엘이 고향인 ‘라마에 세운 공동체’라 하여 ‘라마-나욧’이라 일컫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한 일은 라마나욧 이라는 공동체를 세우고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의 질투를 피해 사무엘의 고향 라마로 피신한 다윗도 그 곳에서 함께 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다윗을 쫒아서 라마나욧으로 온 사울 조차도 하나님의 강한 임재 가운데 놓이게 되듯 라마 나욧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어떤 원수가 와도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바로 쓰러지며 예언을 하는 곳입니다.

어떤 적도 하나님의 영광 앞에 찬양하고 경배하게 되는 그런 거룩한 곳입니다.

그 때 라마나욧에 임했던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지금 라마나욧 캠프 통해 우리에게도 임하길 원합니다.

사무엘상 19:18-24

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라마나욧'은 지명과 장소가 합해진 단어입니다.
여기서 라마는 지명으로 사무엘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그와 함께 하면서 사역하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 사울과 결별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과 결별하기 전에 한 말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었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하나님께 불순종했던지, 성경은 그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삼상15:35).
아마도 이 말은 사람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욕이 아닐까 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이런 사울을 버릴 것이라고 선포하고 라마로 돌아간 것입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삼상19:18).

다윗은 사울의 딸이요 자신의 아내였던 미갈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생명을 보존한 후, 사무엘을 만나러 라마나욧으로 찾아 간 것입니다.
물론 사무엘에게 자신을 지켜줄 세상적 권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은 다만 사무엘이 하나님과 깊이 교류하는 참 선지자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를 라마로 이끈 것입니다.
이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그에게 나가는 자를 돌본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삼상19:18)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여기 살았다는 단어에 사무엘은 물론 선지생도들도 다윗을 환영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실 같은 장소에서 몸을 부딪기고 산다는 것은 환영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관계에선 쉽지 않습니다.
다윗은 당시 살아있는 권력 사울 왕의 눈에 난 자이니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반역죄가 되는 것이니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무엘은 물론 그의 제자들도, 인간적인 두려움을 이기고도 남을 정도로, 하나님의 신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라마나욧 이야기는 우리 교회의 역할과 관련해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라마나욧은 사단이 힘쓸 수 없는 곳이요, 죄인의 변화와 회복이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이는 라마나욧이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는 믿음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황혼 녁, 한 농부가 황소 한 마리를 끌고 황톳길을 걸어 귀가하는데, 소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뒤로 황토 먼지가 폭폭 일어났습니다.
그때 마침 붉은 석양 빛이 그 먼지 위에 내려앉자 황토 먼지가 금가루처럼 빛을 냈습니다.
한 사진 작가가 마침 그 장면을 보고 사진에 담아 “먼지도 아름답다!”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더러운 먼지도 빛을 입으니 아름다운 작품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티끌 같은 인생도 빛 되신 주님을 영접하면 밝게 빛을 내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변화되어 세상을 비추는 아름다운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한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여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 이런 공동체가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사무엘의 관저가 있었고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벧엘·길갈·미스바 등지를 순회하였다(삼상 7:15~17).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길갈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
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곳에서 사무엘에게 그들의 왕을 선정해 달라고 요청했고(삼상 8:4~55).

4-5 /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이에 따라 첫 번째로 사울을 택해 기름부음을 준 곳이며(삼상 10: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이후 다윗을 택해 기름부음을 주었다(삼상 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사무엘은 사울이 타락하자 결별하고 고향 '라마'로 돌아왔는데(삼상 15:34~35).

이에 사무엘라마로 가고 사울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사무엘
이 죽는 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이때 이곳에 '나욧'을 세워 후학들인 선지자들을 가르쳤다.
'나욧'은 거주지·거처·초원지대라는 뜻으로 지금의 '기숙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무엘은 말년에 사울이 타락하자 훗날을 기약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엘이 '라마'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동안, 하나님의 명에 따라 기름 부어 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미갈의 도움으로 도피한 곳도 '라마'였다(삼상 19: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사무엘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사무엘은 사울의 행태를 고하는 다윗을 '나욧'으로 데리고 가서 말씀으로 교육했다(삼상 19: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셨던 두 개의 공동체에 주목할 것을 요청하셨다.

그 하나는 선지자 사무엘이 이끌던 라마나욧의 공동체였고,
다른 하나는 반군 지도자 다윗이 이끌던 아둘람 굴의 공동체였다.

전자가 종교적 개혁의 진원지였다면, 후자는 정치적 개혁의 진원지였다.
이 둘은 부패한 종교권력과 교만한 정치권력에 맞서는 체제변혁의 중심이었다.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갱신을 위해서는 총체적 개혁의 진원지로서 기독 청년들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 경우 그 공동체는 라마나욧처럼 종교적 개혁의 진원지여야 하고, 아둘람 굴처럼 정치적 개혁의 진원지여야 한다.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2절)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다는 것을 안 사울은 세 번에 걸쳐 다윗을 잡아오라고 사람들을 보냈으나 그때마다 '라마나욧'에 온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예언하게 된다(삼상 19: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이때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거나 선지자적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황홀경 상태로 성령이 임한 현상이다.
이에 사울은 다윗을 잡으러 직접 가는데 그가 '라마나욧'에 도착하자 그에게도 성령이 임했고 사울은 사무엘 앞에서 예언하며 벌거벗고 종일 누워있게 되었다.
이는 성령이 임하여 사울의 죄와 수치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때 다윗은 피신하였다.

'라마나욧'은 선지자들을 가르친 말씀 공동체요, 교육기관이다.
또 말씀의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지성을 위해 성령의 은혜가 함께하고 역사하는 영성 훈련장이요, 성령 공동체였다.
아마도 다윗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며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라마나욧' 출신들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두란노서원'을 통해 2년 동안 후학들을 길러내고 그들이 흩어져 가정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순회 전도자가 되어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웠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성경 공부는 말씀을 지식적으로 공부할 뿐 아니라 성령의 조명과 은혜가 충만해야 한다. 오늘 나는 '라마나욧'을 다시 생각한다.


아둘람

사무엘상 22: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아둘람(dulam) / 피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