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수의 의미
- 피타고라스와 피타고라스 학파
수를 말할 때 “게마트리아”를 이해해야 한다.
당시 알파벳이 수를 나타냈다. 이것을 게마트리아라고 한다.
3 1/2
다니엘 ; 종말에 있을 환난 기간
7의 1/2(절반)
한정된 기간이다(완전한 기간이 아니라는 의미)
7
완전 수
6은 완전함에 가깝지만 완전하지 못한 수, 악을 뜻한다.
666
144,000
7:4,
14:3
요한계시록에는 다양한 숫자가 등장한다.
요한계시록 8~9장에는 ‘삼분의 일’이 나온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계 9:15~18)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심판입니다. 그런데 인, 나팔, 대접 심판에 대한 말씀을 읽어보면 심판의 범위가 다릅니다. 인 심판은 4분의 1, 나팔 심판은 3분의 1, 그리고 대접 심판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심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종이 위에 이 내용을 그려본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 물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보입니다.” “심판으로 많은 사람이 죽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그린 그림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세요. 색칠한 부분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색칠한 부분이 아닌 나머지 부분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학생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교수님, 인 심판과 나팔 심판에는 기회가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한 학생을 칭찬해 줬다. “맞습니다. 인 심판과 나팔 심판에선 아직 4분의 3, 3분의 2라고 하는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은 요한계시록의 ‘삼분의 일’을 어떻게 해석할까. 언제나 그렇듯 신천지는 성경을 인용하면서 요한계시록이 신천지에 대한 말씀인 것처럼 해석한다.
교주 이만희는 신천지를 만들기 전 유재열이 이끄는 장막성전에서 활동했다. 신천지는 장막성전이 마귀와 사단에게 속한 목자들에게 속아서 배도했다고 말한다. 장막성전도 사이비 집단이었는데 배도를 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쨌든 그 결과 장막성전 지교회 3분의 1이 배도해 파괴됐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벌어진 이 사건을 요한계시록 나팔 심판, 삼분의 일 심판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왜 신천지는 이런 과도한 해석을 하는 걸까. 그들은 요한계시록이 신천지와 정통교회의 영적 전쟁을 비유로 말씀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 감추어진 예언의 실체가 자칭 약속의 목자인 이만희를 통해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장막성전의 배도’는 신천지가 세상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신도들에게 주입하려는 의도가 들어있다.
삼분의 일에 대한 바른 해석은 뭘까?
요한계시록에서 인 심판은 그 범위가 사 분의 일이었는데, 나팔 심판의 범위는 삼 분의 일이다. 심판의 범위가 확대됐다. 이는 우리에게 무얼 말해주는 걸까.
하나님의 심판은 종말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강해지고, 그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음악 기호로 말하면 크레센도, 즉 ‘점점 강하게’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종말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관망만 해서는 안 된다. 아직 구원의 기회가 있고,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할 사명이 있다. 우리는 심판과 기회라는 눈으로 요한계시록을 균형 있게 바라봐야 한다. 그때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의 해답을 찾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주제 : 예수님에 대한 경배와 찬양
- 신약 성경에서 “할렐루야” 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에서만 사용되었다(19장).
요한계시록 19:1, 3, 4, 6(4회)
* 요한계시록이란 어떤 책인가?
이원론과 결정론을 특징하는 비주류 문학 즉 묵시문학이라고 한다.
이원론 :
시간(현재와 미래, 악의 지배와 선의 지배)
공간(하늘과 땅, 악한 통치자,
행위자(하나님의 대리자와 악의 대리자)
결정론 :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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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의 우주적 종말은 복음의 최종 승리를 일깨워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3347&code=23111413&sid1=mco
예수님은 언제 다시 오실까?
예수님은 정말로 악을 정복하고 승리의 주로 오실까?
왜 속히 오시지 않고 이 세상에 악이 횡행하고 핍박이 가중되도록 놔두실까?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러한 환경 속의 그리스도인에게 ‘하늘 문’의 열쇠를 제공한다.
요한계시록은 입체적인 사건을 평면으로 그린 그림이면서도 평면이 입체로 보이도록 문자와 상징을 융합해 메시지를 전한다. 인간이 파악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시공간적 표현 기법으로 묘사하기 위해 그림 언어 같은 묵시문학 형태를 사용한다. 비유하자면 예언이 말로 전해지는 것이라면 묵시는 그림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비밀스러운 책이 아니며, 어떤 면에서는 가장 쉬운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계 1:1)
여기서 ‘계시’는 ‘뚜껑을 열어서 보여 준다’는 의미인데 우리는 요한을 통해 하늘의 비밀을 문자로 접하는 은총을 누린다.
요한계시록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1. 계시와 환상(1~5장)
2. 환난과 전쟁(6~16장)
3. 심판과 구원(17~22장)
구분해 보면 그 지향점이 분명하다.
현재 상황과 앞으로 전개될 역사의 성격과 방향, 종국에 이르기 전 겪게 될 상황, 역사의 끝을 보여주는 구조다.
이 세 부분은 지상의 교회, 환난의 교회, 천상의 교회로 나눌 수 있다. 넓었다가 점점 좁아지는 ‘나선형 구조’같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집중돼 전개된다. 요한계시록은 특정한 지역이나 민족이 아닌, 우주적 대격변을 제시하면서 복음의 대상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한다. 복음이 지구촌 구석구석 전파돼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하면서, 마지막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로 귀결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신약성서 전체를 마무리한다.
요한계시록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영역을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표현과 전달 방법을 사용했다. 비유적 상징과 문자적 실체를 결합하는데 문자적 의미를 상징으로, 상징적 의미를 문자로 잘못 판단해 그릇된 해석을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이단들의 종말론은 주로 이러한 곡해에서 출발한다. 그중 ‘14만 4000’ 해석이 기승을 부리는데, 문자와 상징을 넘나들며 비뚤어진 해석으로 사람들을 미혹한다.
이 수는 셀 수 없이 ‘많으면서’도 구원받은 ‘제한된’(선택된) 사람들의 범위를 말한다. 선택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구약의 열두 지파(12)와 신약의 열두 지파(12), 그리고 무한대를 의미하는 숫자인 1000을 결합하면 14만 4000이다.
민족적 인종적 문화적 계층적 구별이나 장벽을 초월하는 구원의 개념을 그 속에 내포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제한된 범위’와 ‘그 범위 안의 수는 제한이 없다’는 두 가지 사실을 반영하는 표현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14만 4000’이라는 숫자 상징을 통해 박해 상황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변함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과 ‘변치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굳건한 믿음’을 동시에 강조하면서 승리를 보증한다.
요한계시록은 첩첩산중의 수많은 산봉우리가 안개 속에서 펼쳐지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여준다. 저 멀리 있는 어떤 산봉우리가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 그 시간적인 선후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 존재 자체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시간적 순서보다는 승리로 오시는 주님의 심판을 다양하게 강조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특징이다.
요한계시록은 또 일곱 인봉,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 여러 방법으로 악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주님의 모습을 반복해서 묘사한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일정한 목표 지점으로 역사를 이끄시며 모든 악을 물리치는 장면을 전개하면서 생활 속의 어떤 박해나 환난도 우리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확증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은 복음 전파의 최종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복음이 온 세계에 미치는 승리의 소식임을 일깨워 준다. 지구를 돌아 땅 끝까지 가면 결국 내가 서 있는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땅 끝까지 가는 사명(행 1:8)은 ‘지금 여기서’ 이루어진다. 확정된 미래를 보여주면서 그리스도인에게 힘을 주는 요한계시록은 우주적인 종말의 렌즈로 ‘지금 여기’에 있는 바로 ‘나’에게 초점을 맞춘다. 악은 패망하고 주님은 승리하신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이를 지향하는 공동체가 교회이며 이 소망을 실천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는 분명한 가르침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다양성과 통일성의 보고인 신약성경의 올레길을 완주했다. 굽이굽이 여러 갈래 길을 체험하면서 발견한 보물 같은 은혜와 만나고 나서 비로소 보이는 길! 바로 그 길이다. 역사로 표출된 구속사의 길, 한 개인의 삶 속에 피어난 길, 지금 우리의 길이며 승리의 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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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설교할까?
신천지 예수교 증거 장막 성전(신천지, 이만희교주)의 문제는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진리를
왜곡했다는 점이다. 소위 “비유풀이”나 “자의적 시대 구분” 등만 강조하면서 신자들을 미혹했다. 교회와 목회자들은 신천지의
잘못된 교리를 반박하고 성도를 보호해야 하는 동시에 “빼앗긴 요한계시록”을 되찾아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러나 해석이 어렵고
천년왕국론 등은 네 가지 관점으로 나뉘어 있어 설교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광복 흰돌선교센터 대표, 이필찬 요한계시록연구소
소장, 정성욱 미국 덴버신학교 교수에게 요한계시록에 대해 물었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일까?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의 책”으로, “예수님 재림 직전의 대환난,
재림, 그리고 재림 이후의 천년왕국과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기록”이라며 “무섭고 두려운 내용이 아니라 주님과 주님의 교회가
반드시 승리할 것에 대한 확신과 위로, 용기를 주며 재림을 대망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했다.(정성욱)
“요한계시록은 전체 404절 중 278절이 구약의 인용이다. 또 예수님 십자가 구원을 염두에 둔 ‘어린 양’이란 표현만 31회 나온다.”며 “구약부터 신약의 십자가 신앙, 그리고 재림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을 통합적으로 보게 하고 구속사의 결론까지 보여준다.”고 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 교회가 직면할 대환난과 재림, 지옥 불못 심판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 구원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이필찬)
그럼에도 많은 성도는 요한계시록을 어렵다고 느낀다. 신자들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 예언의 말씀이므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며
“편지로서 발신자인 사도 요한과 수신자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관계 입장에서 읽어야 한다.”고 했다. 이필찬 소장은 요한계시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이며 ‘예언의 말씀’(1:3) ‘편지’(1:4)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요한계시록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로마서가 신학적 논설문이라면, 요한계시록은 미래 사건에 대한 그림책”이라며 “문제는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일반 신자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요한계시록은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이 아니라, 밝고 행복한 종말론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주님의 재림은 밝고 영광스러운 날이며 그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로 행복한 날”이라며 “특히 6장부터 18장까지의 기록은 대환난 시대에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과 심판의 기록이다. 교회는 철저히 보호를 받는다. 계시록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호하실 것이고, 끝내 승리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말했다.
목회자들이 요한계시록 설교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점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약속이다. 바벨론 제국으로 묘사되는
세상과 적그리스도는 철저히 심판을 받을 것이나,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부 된 교회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며 “신자들에게 이 약속을 신뢰하면서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환난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과거 한국교회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데 미온적이거나 금기시했던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장 칼뱅이 요한계시록을
주석으로 저술하지 않았다며 요한계시록 설교를 하지 않는 목회자들이 있다”며 “하지만 저명한 조직신학자 찰스 핫지와 성경신학자
게할더스 보스는 계시가 점진적으로 이해되고 열린다는 계시 이해의 점진성을 주장했다. 설교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이필찬교수)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29052&code=23111211&sid1=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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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95년쯤 사도 요한이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이 계시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이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유의 깊게 봐야 하는 것은 ‘계시’와 ‘구름’이다. 사이비 교주들은 이를 자주 써먹는다.
계시는 한자로 ‘열다’ ‘가르치다’ ‘인도하다’는 뜻을 가진 "열 계(啓)"와 ‘보이다’ ‘가르치다’ ‘알리다’는 의미인 "보일 시(示)"를 쓴다. 그래서 계시는 ‘열어서 보여 준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이란 예수님께서 자신의 뜻을 성도들에게 열어서 보여주신 성경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가톨릭 성경은 요한계시록이라고 하지 않고 요한묵시록이라고 부른다. 묵시란 무엇일까. 묵시(默示)는 ‘은근히 보여주다’는 뜻이다. 은근히 보여주시는 말씀이 요한계시록이라는 말이다.
* 묵시(黙示) : 잠잠 할 묵(黙), 보일 시(示)
직접적(直接的)으로 말이나 행동(行動)을 드러내지 않고 은근(慇懃)히 자기(自己)의 의사(意思)를 나타내 보임.
요한계시록
1장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기록돼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부분의 이단이 구름을 비유라고 말한다. 어떤
이단은 구름을 ‘영’ 또는 ‘천사’라고 해석한다.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 안에 영으로 임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단은 구름이 육체를 비유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들은 초림 때 예수님이 구름으로 비유된 한 사람의 육체를 통해 이 땅에 오셨다고 주장한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수십 명의 ‘재림 예수들’이 하나님이 선택한 한 사람의 육체에 임했다고 가르친다. 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이다.
정통교회는 구름을 어떻게 해석할까. 요한계시록 1장 7절에는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말씀한다. 정통교회의 바른 해석은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단의 주장처럼 인간에 불과한 교주를 절대 지칭하지 않는다.
본문의 “구름을 타고”라는 말씀은 원어로 보면 ‘메타 톤 넵헬론’이다. ‘타고’로 번역된 ‘메타’는 ‘~과 함께’ 또는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요한계시록 1장 7절 “구름을 타고”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구름과 함께” 또는 “구름 가운데”라는 뜻이 된다.
정통교회는 ‘구름 타고 오심’을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이해한다.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있었고 하나님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 임재하셨다. 시내산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능력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또 다른 예가 다니엘서에 있다. 다니엘서 7장에도 구름이 등장한다. 다니엘은 환상 가운데 하늘 구름을 봤다. 다니엘은 세상의 구원자, 즉 메시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예언했다. 여기서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은 영광과 능력으로 임재하는 것을 상징한다. 비유로 인간을 뜻하는 게 절대 아니다.
이단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지엽단말적인 사실에 교리를 꿰맞춘다. 그래서 구름이 무엇을 비유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정통교회는 그렇지 않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에서 강조하는 것은 “구름”이 아니라 “그”다. 바로 예수님께서 영광과 능력으로 재림하심을 강조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 때 부활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영광과 능력 가운데 이 땅에 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영광과 능력으로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최후 승리를 확신하면서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해 나아가야 한다. 구름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말이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56611&code=23111413&sid1=m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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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개론
1. 서론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 1장
2. 일곱 교회 : 2∼3장
3.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 4∼5장
4. 일곱 인의 심판 : 6∼7장
5. 일곱 나팔의 심판 : 8∼9장
6. 열린 책과 두 증인 : 10∼11장
7. 영적 전투 : 12∼14장
8. 일곱 대접 심판 : 15∼16장
9. 큰 성 바벨론의 멸망 : 17∼20장
10.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완성과 결론 : 21∼22장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유기적으로 통일성 있게 해석하고 있다. 때문에 세대주의적이나 시한부 종말론적인 ‘불건전한 요한계시록
해석’에 이미 오염된 이들에게는 해독제로, 앞으로 이단적이거나 불건전한 요한계시록 해석으로 고통 받을 사람들에게는 ‘바른
요한계시록 해석의 백신’이 될 것으로 보인다.
평생아카데미는 요한계시록 강의 외에도 평생 공부하는 목회자를 위한 ‘평공목 독서클럽’,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20년 과정의 ‘예수대학’, 지역 목회자와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평생 아카데미’ 등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과 성경의 다양한 강의와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백금산 목사는 고려대 교육학과와 총신신대원(M.Div, Th.M)을 졸업하고 예수가족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으며, 부흥과개혁사를 통해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해 많은 영적 거인과 좋은 책을 한국교회에 소개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다음은 전편에 이은 백금산 목사와의 요한계시록 관련 인터뷰 내용.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종말론에 관심 일으켜
역사적 전천년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강조
후천년설, 세계 복음화 관심과 노력에 공헌해
무천년설, 영원한 천국과 균형잡힌 역사 관점
- 앞서 설명해 주신 네 가지 천년왕국설의 공헌은 무엇인가요.
“네 가지의 천년왕국설은 나름대로 기독교인의 역사관 형성에 있어 공헌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공헌
종말론 자체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입니다. 20세기에 성경적 종말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급증은 분명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공헌입니다.
둘째, 역사적 전천년설의 공헌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라기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셋째, 후천년설의 공헌
세계 복음화에 대한 관심과 노력입니다.
넷째, 무천년설의 공헌
영원한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강조와 역사에 대한 균형 잡힌 실제적 관점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천년왕국에 대해 어떻게 믿어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천년왕국설에 대한 견해는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 많은 차이를 가져옵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에 따라 우리의 미래관이 달라지고, 미래관의 차이는 오늘의 우리 삶에 큰 차이를 만듭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만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어떤 잘못된 해석도 결국, 잘못된 해석만큼 기독교인의 잘못된 생활을 초래하는 법입니다.
따라서 어떤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가 더 성경적인 바른 해석인지에 대해 비교 분석하고, 가장 최선의 견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자들의 중요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백금산 목사는 세대주의 벗어나 ‘무천년설’ 입장
후천년설과 전천년설, 천국의 일 너무 일찍 적용
재림 전 시대의 징조에 대한 잘못된 견해 심기도
후천년설은 너무 낙관적, 전천년설 너무 비관적
- 목사님은 이 학설들 중 어떤 입장을 취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천년왕국에 대한 제 견해는 ‘무천년설’입니다. 저는 무천년설을 제외한 후천년설과 전천년설의 공통된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후천년설과 전천년설은 영원한 천국에서 일어날 일들을 영원한 천국이 되기 전의 역사의 한 시점에 너무 일찍 적용해 버립니다.
후천년설은 예수님이 재림하기 전 역사의 특정 시점에 적용하며, 전천년설은 예수님이 재림하고 난 후에 적용합니다. 즉 후천년설과 전천년설 둘 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너무 앞당겨서 적용한다는 점에 동일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영원한 천국에서 일어날 일을 앞당겨 적용할 경우, 영원한 천국이 도래하기까지 이 세상에 공존하고 있는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에 대한 균형감각을 상실하여, 일반은총의 가치를 크게 약화시키게 됩니다.
둘째, 후천년설과 전천년설은 예수님의 재림 전 일어날 시대의 징조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게 만듭니다.
후천년설은 예수님이 재림하기까지의 미래에 대해 너무 낙관적 측면만을 강조합니다. 시대의 징조 중 성령의 부으심을 통한 세계 복음화에만 지나친 관심을 가지게 하고, 특히 신법주의적 후천년설의 경우 현재 있는 일반 국가들에 구약의 율법을 적용하려는 기독교 정복주의적 잘못된 ‘지배신학’을 가지게 만듭니다.
반대로 전천년설은 예수님이 재림하기까지의 미래에 대해 너무 비관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즉 시대의 징조 중 박해, 배교, 적그리스도의 등장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바른 자세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함께 있는 무천년설의 실제적인 관점이어야 합니다. 미래는 한편으로는 세계 복음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교회에 대한 박해와 교회의 배교, 적그리스도의 영이 동시에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런 실제적 관점은 성경적일 뿐 아니라, 성경적이기 때문에 현실적이며 실제 일어나고 있는 사실과도 부합합니다.”
예수님, 불신자가 영원히 형벌 받는 장소로 지옥 언급
지옥 형벌, 죄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지옥은 어둡고 불타는 곳… 몸과 영혼 모두 고통받아
-‘지옥이 과연 있느냐’, ‘선하신 하나님이 지옥을 미리 만들어 놓으신 것이냐’는 질문이 요즘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변증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최후의 심판 다음에 인류가 둘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구원받은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되고,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불 못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성경은 최후의 심판 이후 불신자가 불 못에 던져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지옥에 대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자세하게 이야기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불신자가 영원히 형벌을 받는 장소를 “지옥”이라 부르십니다(마 5:29-30, 23:15, 23:33; 막 9:45-47). 둘째, 예수님은 지옥을 ‘불’과 연관시켜 “지옥 불”, “꺼지지 않는 불”, “영원한 불”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셨습니다(마 5:22: 마18:8-9).
셋째, 예수님은 지옥을 “바깥 어두운 곳”이라 표현하시면서 지옥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 하셨습니다(마 8:11-12, 25:30). 넷째, 예수님은 죄인들이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 때는 세상 끝 날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3:40-42, 49-50).
다섯째, 예수님은 지옥을 몸과 영혼이 모두 고통 받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0:28). 여섯째, 예수님은 지옥에는 불신자만
아니라 마귀와 마귀의 부하인 타락한 천사들도 함께 던져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5:41). 일곱째, 예수님은 지옥의 고통은
영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막 9:43-49).
사도들의 가르침도 모두 지옥이 “불”과 “어둠”으로 상징되며, 지옥에서의 고통이 “영원하다”는 것에 강조점을 둡니다.
첫째, 지옥의 형벌은 죄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입니다(롬 2:5). 둘째, 지옥은 “맹렬한 불” 또는 “불 못”,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고 불립니다(히 10:27-31; 계 19:20; 계 20:10, 14-15, 21:8). 셋째, 지옥은 어두운 곳입니다(벧후 1:17; 유 13절). 넷째, 지옥의 고통은 영원합니다(살후 1:7-9; 유 7절, 계 14:9-11).
이처럼 예수님과 사도들이 말한 지옥의 특징에 대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묘사는 “불”과 “어둠”입니다. 지옥은 불타는 곳이며, 어두운 곳입니다. 여기서 이런 “불”과 “어둠”은 문자적이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문자적인 불과 문자적인 어둠으로 해석하면 모순과 혼란이 생깁니다. 지옥이 불인 동시에 어둠일 수는 없습니다. 불과 어둠은 불신자들이 영원히 받을 형벌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는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불과 어둠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지옥은 인간의 몸과 영혼 모두가 고통을 받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불이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자들의 외적인 고통, 육체에 대한 고통을 강조하는 측면이라면, 어둠은 내적인 고통, 영혼에 대한 고통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몸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와 마음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로서 “불”과 “어둠”이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이 말해 주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의 비참함은 참으로 말로 다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지옥에서 영원토록 의식적인 고통을 받는다고 하는 이런 전통적인 ‘지옥 교리’를 부인하는 기독교인도 오늘날 많습니다.
영원한 지옥에 대한 부인은 두 가지의 부류로 나타납니다. 첫째, 보편 구원론자들입니다. 보편 구원론자들은 하나님이 결국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사후에도 구원의 기회를 주어 결국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둘째, 소멸론자 또는 조건적 불멸론자들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신자는 영생을 누리지만(조건적 불멸론),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는 궁극적으로 존재가 없어진다(소멸론)고 생각합니다.
즉 불신자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소멸되는 것이 곧 불신자에 대한 형벌이라는 주장입니다.
불신자가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지옥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인은 지옥에 대한 성경의 계시,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지옥에 대한 성경 가르침에 대해
1.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 알고
2. 죗값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기억
3. 영원한 형벌 구해주신 하나님 감사하는 삶
-그렇다면 우리는 지옥에 대한 성경의 이런 가르침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하며,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기간이 몇십 년밖에 안 되는데,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는 기간이 영원하다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소멸설과 같은 이론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와 심판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죄의 크기는 죄를 짓는 기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대상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생 세금을 조금씩 떼먹은 죄를 지은 사람과, 한순간 왕을 살해하고 반역한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한순간 왕을 살해한 죄의 크기는 한평생 조금씩 세금을 떼먹은 죄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죄입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왕에 대한 반역죄는 가장 크고 무서운 형벌로 다스려집니다.
그런데 죄는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우주 만물의 왕이신 하나님의 왕 되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반란입니다. 존재와 지식과 능력과 거룩함과 공의와 선함과 진실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하나님을 반역한 죄에 대한 처벌은 하나님의 높으심과 위대하심에 비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한하고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우리 죗값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대속적인 죽음의 가치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대표해 인간 대신 죽는 것이 아니고는 다른 방법으로는 처리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 죗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자인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예수님이 나 대신, 우리를 대표해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가 받을 지옥의 고통을 ‘영원히 단번에’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십자가를 지신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크기는 우리가 건짐 받은 지옥의 영원한 형벌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지옥의 영원한 불, 영원한 어둠의 고통과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우주에서 가장 크고 엄청난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식어지는 것은 우리가 건짐 받은 지옥의 형벌과 고통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옥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징주의 기초로 종합적 해석방법 교육
연구와 설교 중간 지점에서 계시록 강의
쉽고 명쾌하게 전체 구조와 주제 선명히
-이번에 진행하시는 요한계시록 강의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이나 책이나 강의마다 요한계시록의 다양한 해석법에 기초한 각각의 특징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 요한계시록 강의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요한계시록의 해석법에 있어 상징주의를 기초로 과거주의, 미래주의, 역사주의 장점을 취하는 종합적 해석방법, 즉 구속사적 상징주의 해석 방법과 무천년설에 입각해 요한계시록을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와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유기적으로 통일성 있게 해석합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이 예언의 절정이자 성경의 결론이라는 관점에서, 요한계시록과 구약의 이사야서,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 같은 중요 예언서와 창세기, 출애굽기, 시편 등 구약 성경 전체와 신약 성경과의 유기적 연속성 속에서 해석해 갑니다.
둘째, 이번 요한계시록 강의는 학문적 요한계시록 주석이나 연구서들과 요한계시록 설교의 중간 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강의한다는 것입니다. 즉 요한계시록 전체 본문을 주제별이 아닌 장별, 단락별로 큰 그림을 그리면서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가에 중점을 둡니다.
셋째, 이번 요한계시록 강의는 무엇보다 이해하기 쉽고 명쾌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전체 구조와 주제를 선명하게 보여주며, 그동안 어렵고 무섭게 여겨졌던 요한계시록을 은혜롭고 감동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요한계시록 공부의 유익
1. 성경 전체적인 이해 잘하게 되고
2. 교회와 세상 바라보는 눈 열리고
3. 이단과 사이비 유혹 빠지지 않고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 신앙생활에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모든 목회자들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을 필수로 공부해야 할 중요한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큰 도움을 받습니다.
첫째, 요한계시록을 잘 알면 성경 전체를 잘 이해하게 됩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드라마입니다. 창세기는 성경의 구속 드라마의 서막이며, 요한계시록은 구속 드라마의 종막입니다. 창세기가 성경 전체의 서론이라면 요한계시록은 성경 전체의 결론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잘 알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를 얻게 됩니다.
둘째, 요한계시록을 잘 알면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열립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와 세상의 본질을 가장 분명하고, 가장 선명하게 제시해 줍니다. 세상의 역사 속에서 교회사가 지금처럼 전개되어 온 의미와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 줍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기독교인으로서 가져야 할 바른 역사관과 세계관의 안경을 제공해 줍니다.
셋째, 요한계시록을 잘 알면 이단과 사이비 집단의 미혹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교회사를 보면 이상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통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이 잘 가르쳐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단과 사이비 집단들이 요한계시록을 더 많이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하면 정통교회 많은 성도들은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알지 못하므로 미혹되기 쉽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아는 것은 자신의 바른 신앙을 위해, 또한 앞으로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단들이나 불건전 집단에 빠지지 않게 하는 중요한 보호막이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거나 가르친 경험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주신다면.
“요한계시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한지 30년 이상 되었습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인 1983년입니다. 당시 한국교회에서 종말론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요한계시록을 잘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중에 있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설서들을 많이 읽고 공부했습니다.
그러던 중 겨울방학 때 고향 교회 친구와 선후배들을 대상으로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까지 약 13시간 동안 앉은 자리에서 쉬지 않고 요한계시록 전체를 구절별로 강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요한계시록 이해는 당시 유행하던 세대주의적 해석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지금은 세대주의적 요한계시록 해석을 완전히 버렸지만, 당시 유행하던 세대주의적 해석은 제가 처음으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공부를 깊이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후 신대원에서 공부하며 체계적으로 성경과 신학을 배웠고, 개혁신학을 계속 개인적으로 공부함으로써 요한계시록에 대한 세대주의적 해석 외에 다른 해석법을 알게 되어, 성경 전체와 요한계시록을 보는 관점이 새롭게 형성되었습니다.
1994년부터 약 5년간 서울신학교에서 요한계시록을 강의한 적도 있고, 1998년 7월 호주 퍼스 지역 한인청년연합회 여름수련회에서 4박 5일 동안 하루 6시간 이상 요한계시록 전체를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에는 요한계시록 공부를 좀 더 대중화시키기 위해 <만화 요한계시록>을 발간했습니다.
이번 평생 아카데미를 통해 요한계시록을 다시 강의하는 이유는 <만화 요한계시록> 발간 이후 최근까지 발간된 요한계시록의 중요 주석과 연구서를 통해 그 내용을 보충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천지, 요한계시록 잘못 해석한 대표 사례
대부분 이단, 요한계시록 근거로 영해 시도
신약에서 ‘상징’ 가장 풍부, 해석 기초 필요
-한국에 유독 요한계시록을 잘못 해석한 이단들이 많은 이유를 어떻게 보는지요.
“이단의 등장이 한국교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단은 교회사 전체를 통해 모든 시대와 많은 장소에서 늘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 시대 동안 이단의 끊임없는 등장은 이미 예수님이 예고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단은 요한계시록만을 잘못 해석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 대한 불건전한 해석과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교리에 대한 잘못된 해석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교회에 가장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신천지 이단은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은 물론, 요한계시록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발생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한국교회에서 발생한 다른 대다수의 이단들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특정 부분들을 아전인수 격으로 잘못 해석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요?
이단들의 성경 해석은 기본적으로 성경의 역사적-문법적-신학적 해석의 기초가 전혀 없기도 하고, 성경을 대부분 아전인수 격으로 영해합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그렇게 영해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비옥한 성경의 밭인 요한계시록’에 두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상징이 가장 풍부하게 나오는데, 바른 해석의 기초 없이는 이런 상징들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성경을 잘 모르거나 성경 해석의 기초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단들의 마구잡이식 해석에 대해 바른 해석인지 틀린 해석인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성경이 되어 왔습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정통 기독교인들에게도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성경입니다.
요한계시록 해석, 예언 성취 일어나는 기준으로
1. 과거주의 해석, 모두 과거 일어난 일로 파악
2. 미래주의 해석, 재림 이후 일어날 일로 파악
3. 역사주의 해석, 재림 이전 일어날 일로 파악
4. 상징주의 해석, 선악 투쟁 상징 묘사로 파악
-요한계시록의 주요 해석법들을 소개해 주신다면.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법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으나, 가장 일반적으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가 언제 일어나는가’에 따라 네 가지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네 가지 해석방법은 과거주의, 미래주의, 역사주의, 상징주의 해석법입니다.
첫째, 과거주의 해석법은 요한계시록 예언이 전적으로 또는 주로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이나 주후 5세기 로마제국의 멸망을 통해 과거에 모두 일어났다고 보는 해석 방법입니다.
과거주의 해석법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당시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 상황과 로마 제국 상황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예언의 성취를 과거에 이미 다 이뤄진 것으로만 봄으로써, 요한계시록이 교회사 전체와 예수님의 재림과 이후 종말에 대한 이해를 약화시키는 단점이 있습니다.
둘째, 미래주의 해석법은 요한계시록 4-22장의 내용을 주로 미래, 즉 예수님의 재림과 재림 이후 일어날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미래주의 해석법은 역사적 전천년설적 미래주의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적 미래주의 해석에 따라 세부적 차이가 있지만, 요한계시록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종말에 대한 사건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려는 노력에 도움을 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일방적으로 미래의 종말론적 사건으로 한정함으로써, 요한계시록이 가지는 1세기 당시의 역사적 문맥이나 교회사 전체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키는 단점이 있습니다.
셋째, 역사주의 해석법은 요한계시록을 사도 요한 당시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의 교회사에서 연대기적으로 일어날 역사적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봅니다.
역사주의 해석법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교회사 전체 기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법을 주장하는 사람들마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교회사의 특정 사건과 일치시키는 데 있어서 제각기 다르며, 교회사의 성취된 사건으로 보는 사건들 또한 서구 교회 중심이라는 데 단점이 있습니다.
넷째, 상징주의 해석은 요한계시록을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하나님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 선과 악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책으로 봅니다.
상징주의 해석은 요한이 사용한 상징들을 과거나 미래의 특정 역사적 사건들과 동일시하지 않고 영적 원리를 분명히 말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과거주의나 역사주의나 미래주의 해석의 장점이 상징주의 해석의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네 가지 해석법은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많은 복음주의 요한계시록 해석자들은 네 가지 해석법 중 장점을 종합적으로 취하는 절충주의 해석 또는 종합적 해석법을 취합니다.
이런 종합적 해석법에도 과거주의와 미래주의 해석의 종합, 과거주의와 상징주의의 종합, 미래주의와 상징주의의 종합, 과거주의와 미래주의와 상징주의 종합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저는 이 가운데 상징주의를 가장 기본으로 하면서 1세기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중요시하는 과거주의와, 예수님의 재림과 재림 이후의 종말적 사건을 중요시하는 미래주의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 시대 전체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키는 역사주의의 장점을 모두 취하는 종합적 해석법을 견지합니다. 저와 같은 요한계시록 해석법을 ‘구속사적 상징주의 해석법’이라 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묵시와 예언과 편지 복합 장르
구약 성경, 요한계시록 상징 이해하는 열쇠
그리스-로마 역사·문화·종교 배경도 반영돼
-요한계시록에는 상징적인 단어들이 적지 않습니다. 평신도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글의 성격에 따라, 책의 성격에 따라 해석 방식은 달라집니다. 각 장르는 일반적인 해석 원리가 있는 동시에, 장르의 성격에 맞는 구체적 해석 원리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도입 부분을 통해 살펴보면, 한 종류의 장르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세 종류의 장르에 다 해당되는 매우 특이한 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요한계시록은 묵시(1:1), 예언(1:3, 22:6-7, 22:18-19), 편지(1:4-6)라는 복합 장르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묵시장르적 특성 때문에 요한계시록에는 많은 환상이 등장합니다. 일곱 별, 일곱 촛대,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어린양, 일곱 뿔과 일곱 눈, 두루마리 책, 향이 가득한 금 대접, 흰 옷을 입은 큰 무리,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십사만 사천 명,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 불 못 등 많은 상징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이런 상징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첫째,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이해하려면 구약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은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신약 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 구약을 많이 언급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들을 이해하려면, 기본적으로 구약 성경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 같은 예언서와 창세기, 출애굽기, 시편 등을 잘 알아야 합니다.
또한 구약 성경을 직접 인용하지 않더라도, 요한계시록에는 간접 인용, 즉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단어나 어구, 사건이나 인물, 주제에 대한 수많은 암시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구약 성경의 이런 암시가 얼마나 나오는가 하는 것은 195개, 226개, 278개, 394개, 455개, 493개, 635개, 1,000개 등, 적게는 2백여개에서 많게는 1천여개까지 학자마다 계산이 다양합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모든 장마다 거의 모든 구절마다 구약 성경이 흠뻑 배어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이해하려면 구약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구약 성경에 대한 지식을 깊고 넓게 가져야 합니다.
둘째, 요한계시록의 많은 상징은 1세기 당시의 그리스-로마 문화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잘 이해하려면 1세기 당시 로마제국의 역사적 배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천년왕국 견해 차이별로 종말 관련 학설 달라
1. 역사적 전천년설: 교회 환난 후 예수 재림, 이후 천년왕국
2.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7년 환난 후 예수 재림, 이후 천년왕국
3. 후천년설: 황금시대인 천년왕국 이후 예수 재림
4. 무천년설: 재림 전후 천년왕국 없어, 상징으로 이해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등 종말에 대한 학설이 다양한데, 각 학설의 장단점을 설명해 주신다면.
“종말론과 관련해 기독교인들 사이에 가장 큰 견해의 차이는 ‘천년왕국’에 있습니다. ‘천년왕국’이란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성도들과 더불어 천 년 동안 통치하는 나라 또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통치하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이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에 있어 역사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이라고 불리는 네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교회의 환난 이후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지상에 문자적인 천년왕국이 있다는 견해입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교회의 환난 이전 성도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이 있으며, 7년 뒤에 그리스도가 성도들과 함께 지상 재림을 하여 문자적으로 천 년 동안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견해입니다.
후천년설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황금 시대인 천년왕국의 끝에 재림하신다는 견해입니다. 후천년주의자에 따라 황금시대인 이 ‘천 년’의 기간을 문자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황금 시대 동안 기독교의 영향력은 세상의 평화와 공의와 경제적인 번영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황금시대가 도래합니다.
무천년설은 예수님의 재림 전이나 후에도 지상에 문자적인 천년왕국이 없다는 견해입니다. 즉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의 천 년을 상징으로 보며, 예수님의 초림(승천)과 재림 사이의 교회 시대의 전 기간에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어 하늘로 간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까지 천상에서 통치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어떤 학설이든 최후 심판, 영원한 지옥, 부활과 천국 공통점
천년왕국 이해 다르다 해서 서로 ‘이단’이라 비난해선 안돼
이런 네 가지 해석 방법에는 차이도 있지만, 기본적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천년왕국설을 믿든지, 궁극적으로 신자와 불신자가 모두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을 받고, 불신자는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고, 신자는 영원한 천국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적 종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육체적인 부활, 최후의 심판, 영원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사실들을 믿기 때문에, 천년왕국의 시기와 장소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해서 서로 이단으로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는 다르지만,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로 인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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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저자는 본문 자체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다(계 1:4, 9, 22:8).
계시록은 교회가 로마에 의하여 박해를 받아 황제 숭배를 강요당하던 시기에 기록되었다.
계시록의 문체가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의 세 서신들의 것과 다른 것이 있지만 묵시 문학의 고유한 성격이나 계시가 환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죄수로 있던 요한의 환경 등을 고려해 볼 때 문체의 차이는 쉽게 이해된다.
2. 주제표
초점 |
서론 |
심판 |
영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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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일곱 |
일곱 인 |
일곱 나팔 |
일곱 징조 |
일곱 재앙 |
일곱 멸망 |
새로운 것 |
본문 |
1-3장 |
4-6장 |
7-9장 |
10-13장 |
14-16장 |
17-19장 |
20-22장 |
주제 |
하늘의 환상심판관 |
땅의 환란 |
오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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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밧모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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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A.D 95-96년경 |
2-1. 인의 순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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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인 |
일곱 나팔 |
일곱 대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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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
3 |
4 |
5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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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의 종류 |
흰말
복음운동 |
붉은말 전쟁 |
검은말 기근 |
흉년과 온역 |
|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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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
3 |
4 |
5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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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석인 우박과 불 |
큰 불붙은 산을 바다에 |
떨어진 별이 물샘에 덮힘 |
일월성신이 침을 받음 |
황충의 재앙 |
유브라데강의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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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
3 |
4 |
5 |
6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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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종기 |
바다가 피가 됨 |
물근원이 피가 됨 |
짐승의 보좌를 침 |
태양의 권세 |
|
대접을 쏟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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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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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
|
3/1 |
3/1 |
3/1 |
|
|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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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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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표
교회 |
예루살렘 및 |
바울의 해외선교 시작 |
교회들이 에베소 주변에 설립 |
로마화재 |
예루살렘 멸망 |
박해기간 |
요한 |
|||
A.D. |
14-30 |
37-41 |
47-52 |
54-56 |
64 |
69-70 |
-79 |
-81 |
-95 |
요 |
로 |
디 |
갈 |
글 |
네 |
리 |
파시안베스 |
디 |
도 |
||
기 |
|
요한 것을 제외한 모든 |
|
요한에 의한 복음서신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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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 |
정확한 이동 연대는 |
소아시아에서 새롭게 주재하며 사역함 |
3. 내용과 주요 사상
1장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
2, 3장은 지금 있는 일들
4-22장은 장차 될 일들을 예언한 것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계시의 중심이다(계 1:1).
계시록은 세상의 악한 음모가 계속 반복 되고 고조될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사단은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려는 주의 뜻에 대항하고 있다.
이 오랜 싸움은 영광스런 백보좌 앞에서 마지막 심판, 새 예루살렘의 도래, 영원한 시작으로 끝이 난다.
부활하시고 영광을 얻으신 주님은 땅위에 있는 교회들을 보살피신다(2, 3장).
주는 예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시며 죽임을 당하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어린양이시다(4, 5장).
장차 땅 위에 임할 칠년 대 환난의 심판도 어린 양의 진노의 표현이다(계 6:16-17).
그리고 주의 재림(계 19:11-21).
성도와 함께 천 년 간 통치 하실 일( 계 20장)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이 계속 이어진다(계 21-22장)
내용분해(대분류)
1. 머리말 1:1-8
2. 과거의 일 1:9-23
3. 현재의 일 각 교회에게 2:1-3:22
4. 미래의 일 4:1-22:5
5. 끝맺는 말 22:6-21
내용분해(소분류)
1. 그리스도의 계시 1:2
2. 기록 목적 1:4
3. 일곱 교회에 인사 1:9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계2:1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 계2:1 에베소 교회에 계2:8 서머나 교회에 계2:12 버가모 교회에 계2:18 두아디라 교회에 계3:1 사데 교회에 계3:7 빌라델비아 교회에 계3:14 라오디게아 교회에○계4:1 하늘 나라의 보좌○계5:1 인봉된 책을 취한 어린양 계5:1 두루마리와 어린 양 계5:7 어린양이 책을 취하다○계6:1 일곱 인의 재앙 계6:1 첫째 인(흰 말을 탄 정복자) 계6:3 둘째 인(전쟁의 적색 말) 계6:5 셋째 인(기근의 검은 말) 계6:7 넷째 인(사망의 청황색 말) 계6:9 다섯째 인(순교자들의 호소)( 계6:12 여섯째 인(어린양의 진노)○계7:1 인침받은 십사만 사천명○계8:1 일곱 번째 인(금 향로) 계8:7 첫째 나팔 재앙 계8:8 둘째 나팔 재앙 계8:10 셋째 나팔 재앙 계8:12 넷째 나팔 재앙 계9:1 다섯째 나팔 재앙 계9:13 여섯째 나팔 재앙○계10:1 천사의 작은 책○계11:1 두 증인○계11:15 일곱 번째 나팔 재앙○계12:1 영적 전쟁에 대한 이상 계12:1 해를 입은 여자 계12:7 하늘에의 전쟁 계12:13 땅 위의 전쟁○계13:1 사악한 짐승에 대한 이상 계13:1 바다에서 나온 짐승 계13:11 땅에서 나온 짐승○계14:1 핍박받는 성도들에 대한 이상 계14:1 어린양과 십사만 사천명 계14:6 세 천사들에 의한 대심판 예고 계14:14 추수 비유○계15:1 일곱 재앙을 준비하는 일곱 천사 계15:1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 계15:5 일곱 대접의 심판을 위한 준비○계16:1 일곱 대접의 재앙이 시작됨○계17:1 붉은 짐승을 탄 음녀가 받을 심판○계18:1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 계18:1 바벨론의 멸망이 선언됨 계18:9 베벨론에 대한 조가 계18:21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이 선언됨○계19:1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계19:1 하나님 찬양 계19:6 어린양의 혼인 잔치 계19:11 백마를 탄 분 계19:17 아마겟돈 전쟁○계20:1 천년 왕국과 최후 심판에 대한 이상 계20:1 천년 왕국 계20:7 곡과 마곡의 전쟁 계20:11 하나님의 보좌에 의한 최후의 심판○계21:1 새 하늘과 땅 새 예루살렘 계21:1 새 하늘과 새 땅 계21:9 새 예루살렘○계22:1 신실한 하나님의 계시 계22:1 생명의 물과 생명 나무 계22:6 예언의 신실성과 긴박성 계22:8 참된 경배의 대상 계22:21 모든 자들에게 축복
1. 요한 계시록의 시대적인 배경
요한계시록은 요한 당시에 소아시아에 퍼져있던 일곱 교회에 보낸 회람 서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1세기를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레니우스는 요한계시록이 81-96년에 있었던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말기에 쓰여 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도미티안은 "황제숭배"를 이슈로 제기한 최초의 황제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을 가장 먼저 박해한 황제는 네로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로마 시의 화재범으로 몰아 사나운 짐승과 불에 태우고, 참수형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네로 뒤에도 몇 몇 황제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박해는 로마에 인접한 지역에서만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로마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사람들은 로마 공화정 말기와 로마 제국의 초기에 "로마의 정신"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가 세계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하고 이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로마의 정신"은 점차적으로 "황제의 인격"을 숭배하는 곳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로마 제국은 영국에서 유프라테스, 그리고 다뉴브 강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이 광대한 영토를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해서 "가이사 숭배 사상" 즉 "황제숭배 사상"을 이용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로마 제국에 속한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민족의 종교를 없애버리고 황제숭배를 절대 신앙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단지 로마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황제를 중심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당국은 1년에 한 번씩만 황제를 위해 소량의 향을 태우고 "가이사는 주님이다!" 라고 말만 하면 다른 종교를 갖는 것을 묵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제국에 속한 사람들은 이와 같은 황제 숭배 예식을 실시한 후에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 숭배가 아시아 지역에 파급되면서 유일신을 섬기는 교회와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만 주님이라고 고백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황제라 해도 인간을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되자 로마 당국은 그때부터 기독교인들을 불충한 백성으로 보게 되었으며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인들을 요주의 대상으로 지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황제들에게 조직적인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를 주라 부르기를 거부하다가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순교자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만 갔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가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로마 당국의 질풍과 같은 대 박해를 견디기는 어려운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교회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한 마음으로 주님께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들은 세속화와 사치와 타락에 빠져서 영적인 힘을 완전히 상실한 무능력한 교회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들은 한쪽으로는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세상과 거짓 종교와 타협하여 적당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점차적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고 영적, 윤리적으로 타락해갔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가던 1세기의 아시아 교회들에게 요한을 통해서 이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당시의 교회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붙들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모습을 통해서 세상의 박해가 아무리 강해도 그들이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박해 앞에서 방황하는 교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의 주관자이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황제로 인해 당황하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교회를 박해하는 황제의 배후에 사단이 조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모습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싸움이 영적인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서 결국 최후에 사단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도들에게 승리의 확신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을 향해서 세상이나 거짓 교훈에 타협하지 말고 계속해서 정결한 신앙을 지키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첫 사랑을 상실하고, 윤리적 영적으로 부패해 가던 당시의 교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였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 이러한 부패 요소들과 싸워 이길 것을 권면하셨던 것입니다.
2. 요한계시록의 해석 방법
그러면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동안 요한 계시록을 해석해 온 방법을 나누어보면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과거주의 학파의 해석(The preter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첫 번째 방법은 요한 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요한이 살던 1세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과거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이 이미 요한이 살던 1세기에 다 성취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 계시의 말씀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말한 천사의 말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들은 이 예언들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기 때문에 요한이 살던 1세기에 모두 다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1세기 당시의 교회와 로마 당국과의 싸움에서 궁극적으로 교회가 승리할 것을 (상징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과거주의적 해석 방법은 당시 상황을 살펴볼 때에 매우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이미 과거에 다 성취된 것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내용을 1세기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해석하면 오늘을 사는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이란 말을 요한 당시로 국한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속히"라는 말은 "반드시"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 16:20, 눅 18:7-8 참조). 그러므로 이 말은 주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과거 1세기 뿐 아니라 모든 시대를 사는 성도들을 위해서도 요긴한 말씀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현재주의(역사주의) 학파의 해석(The historic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두 번째 방법은 계시록에 나오는 예언을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시작해서 재림할 때까지 일어나는 모든 사건으로 보는 방법입니다. 학자들은 이 방법을 '현재주의' 또는 '역사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사건들을 모두 다 현재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연결시키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종종 계시록의 내용을 억지로 역사 사건에 뜯어 맞추는 실수를 범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현재 역사 사건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재앙을 로마를 멸망시킨 야만족이나 모슬렘의 침입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천사가 요한에게 준 작은 책을 루터나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세력을 로마 카톨릭으로 보고, 짐승의 멸망을 로마 카톨릭의 멸망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계시록을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큰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억지로 현실에 적용시키다가 실수하게 되는 단점도 있습니다.
3) 미래주의 학파의 해석(The futur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세 번째 방법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역사의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학자들은 이 사람들이 계시록의 내용을 먼 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 견해를 '미래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초대교회-주님의 재림 때까지 있을 모든 교회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4장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역사의 마지막 때(주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7년 대 환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도 몇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책의 내용이 먼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라면 이 책은 요한 당시에 박해를 받던 성도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주님께서 당시 교회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들을 요한을 통해서 편지로 써주셨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당장 로마의 칼날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중동전쟁의 위협이나 E. C. 공동체의 출현 같은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요한 계시록의 내용이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은 다소 무리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상징주의 학파(영적 해석 학파)의 해석(The allegorical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네 번째 방법은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영적(상징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은 어느 시대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원리를 상징을 통해서 기록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 견해를 "영적인 해석"(또는 "상징주의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계시록에서 선(교회)과 악(사단)의 전쟁 속에서 선(교회)이 승리하는 보편적인 신앙의 원리들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원리는 보편적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단점은 사람들이 성경을 지나치게 자기 주관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5) 그러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종합적 해석)
우리는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네 가지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이러한 네 가지 해석 방법은 모두 다 그 나름대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방법들은 단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요한계시록을 해석해야 합니까? 우리는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방법의 장점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단점을 피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종합형" 또는 네 가지 방법의 "절충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다음의 사항들에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메시지가 요한 당시의 1세기의 교회들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그 내용이 요한이 살던 1세기의 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 지를 충분히 고려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는 그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교회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과거주의자들의 견해를 참고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메시지들이 1차적으로 1세기 교회를 위해 쓴 것이지만, 동시에 이 메시지는 모든 시대의 교회에도 적용되는 메시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1세기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내용을 해석할 때에 전시대를 걸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 그리고 복음과 거짓 종교사이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영적, 또는 상징주의의 견해도 참조하여 해석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한 가지 예언이 두 개 이상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이러한 예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그 당시에 이사야의 아내가 낳은 아들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예언은 처녀 마리아가 낳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이사야의 아들은 모형이었고, 마리아가 낳은 예수 그리스도는 원형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가지 예언이 두 가지 사건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묘사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도 시간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건을 한 사건 안에서 동시에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원근 통시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로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도 묵시적인 예언서이기 때문에 이러한 "원근통시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짐승이 나타나는데, 이 짐승은 당시 교회를 박해하던 로마의 황제, 또는 로마제국에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마지막에 나타날 최후의 적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가지 예언이 두 가지 이상의 사건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1세기의 사건인 동시에 현재와 미래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역시 현재주의나 미래주의의 견해도 참고하게 될 것입니다.
3. 묵시문학과 요한 계시록
1)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학의 유사점
우리가 계시록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 구약 중간기에 유행했던 묵시사상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계시록이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고 또 내용상으로도 그들과 흡사한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Revelation), 또는 '묵시'(Apocalypse)라는 말은 '감취었던 것이 드러난 것'(unveiling)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연극을 시작할 때에 막이 올려지면 그 뒤에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묵시'란 말은 주전 2세기와 주 후 1세기 사이에 씌여진 유대 종교 서적들에 붙여진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책들을 '묵시문서' 또는 단순히 '묵시'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묵시문학 속에는 강력한 이방민족들 사이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이 느껴야 했던 민족적인 위기의식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묵시문학은 소수 민족아 당해야만 하는 핍박과 착취에 대한 내용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묵시 문학은 억압받는 민족의 원한을 갚고 그들을 고통에서 구원해 줄 메시야에 대한 희망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주권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현재에는 악이 득세하고 의인들이 고난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개선될 것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항상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천재지변을 통해 역사에 개입하시고 악을 제거하실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의 결말은 항상 궁극적으로 선이 승리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됩니다. 이러한 묵시 문학은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의 통치를 받을 때마다 항상 주어졌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묵시문학을 통해서 계속되는 이방 세력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이 바로 이러한 묵시 문헌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책들을 통해서 이방 민족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는 자신의 백성이나 교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일시적으로 성도들과 교회가 악한 세력들에 의해 고난을 받으나, 결국에는 메시야를 통해 악한 세력들을 심판 받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마침내 악이 멸망하고 평화가 깃드는 영원한 세계가 임할 것이라는 소망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의 특징은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밧모섬에 있는 요한에게 전해주실 계시를 매우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전달해 주셨습니다. 계시록에는 행동과 직접적인 말씀과, 극적인 용어로 표현된 것과, 그리고 여러 가지 상징과 형상들을 통하여 전달된 계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그림이나 드라마, 그리고 영상 등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에 익숙해졌습니다. 이러한 그림이나 드라마, 또는 영상을 통한 상징들은 저자의 의도를 전달하는데 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록에서 바로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달해 주신 것도 이러한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계시록의 언어는 현대인들에게 더 익숙한 언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계시록을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들을 짐승이나 뿔 등과 같은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짐승들은 그 당시 통치자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요한이 이러한 상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의 통치자들의 멸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당시 교회의 독자들은 계시록에서 사용된 어휘나 상징에 익숙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시록에 나타난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와 멀리 떨어져서 태어난 우리들은 이 책에 사용된 상징이나 어휘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시록을 이해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 요한계시록과 묵시 문학의 차이점
그러나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학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들이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주로 저자들의 이름을 숨기고 과거의 유명한 사람들(에녹이나 에스라와 같은)이 이름을 빌려서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사도 요한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사변적인데 관심이 있으며, 세상의 종말의 때와 징조와 최후의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호기심을 채우기보다는, 당시의 대 박해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요한은 종말의 시기에 관해서는 단순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22:20). 또한 요한계시록은 다른 묵시문헌들과는 달리 사변적인 일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읽거나 듣고, 이 예언에 응답하여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윤리적인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묵시문헌의 요소를 배려하면서도 묵시문헌과 동일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4. 저자 문제
그러면 요한 계시록을 쓴 저자는 누구일까요? 여러분은 "그거야 당연히 사도 요한이 아닙니까?" 라고 대답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요한이 계시록을 썼다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합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①. 요한 계시록은 너무나 많은 히브리적 표현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문법에 있어서도 요한복음이나 요한 서신과 그 내용이 많이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②. 사도 요한이 아닌 다른 요한이 본서를 썼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③. 나이가 80이 된 사도 요한이 이러한 계시를 받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서를 누가 기록했는가에 대한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가 전통적으로 계시록의 저자를 요한으로 간주한 이상, 결정적인 반대 증거가 없는 한 이 견해를 따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저자는 (계 1:1)에서 자신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소개했습니다(1:1, 4).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며(1:1), 예언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22:19). 그는 당시 성도들의 환난에 함께 참여한 자였으며(1:9), 예수를 믿는 신앙 때문에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었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를 받고 이 편지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1:9). 또한 그는 당시에 서 아시아의 도시들에 대해서도 익숙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도시들은 요한이 유배당했던 섬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도시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이 책의 저자로 가장 적합한 사람은 12사도 중 하나였던 사도 요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 외에도 요한복음과 세 편의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요한계시록 개요
*요한계시록 주제 : 예수님의 재림
*요한계시록 중심 구절 :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2:20).
-------------------------------------------------------------가. 1-3장 7교회에 보낸 7편지들
나. 4-8:1 7가지의 인들
다. 8:2-11:19 7가지의 나팔들
라. 12-14:20 7가지의 상징적인 역사들
마. 15-16:21 7가지의 대접의 심판
바. 17:1-18:24 7가지의 바벨론의 심판 메세지
사. 19-22장 7가지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 들
-------------------------------------------------------------가. 7교회에 보낸 7편지들(1-3장)
0. 서론: 편지들의 출처(1:1-20)
1. 에베소 교회(2:1-7)
2. 서머나 교회(2:8-11)
3. 버가모 교회(2:12-17)
4. 두아디라 교회(2:18-29)
5. 사데 교회(3:1-6)
6. 빌라델피아 교회 (3:7-13)
7. 라오디게아 교회 (3:14-22)
나. 7가지의 인들(4:1-8:1)
0. 서론: 인들의 근원(4:1-5:15)
1. 흰 말(6:1-2)
2. 붉은 말(6:3-4)
3. 검은 말(6:5-6)
4. 청황색 말(6:7-8)
5. 제단 아래 죽음 당한 영혼(6:9-11)
6. 우주적 대 혼돈(6:12-17)과 이스라엘의 인 맞은 자, 144,000(7:1-7)
7. 침묵(8:1)
다. 7가지의 나팔들(8:2-11:19)
0. 서론: 재앙의 근원들(8:2-6)
1. 땅의 재앙(8:7)
2. 바다의 재앙(8:8-9)
3. 강의 재앙(8:10-11)
4. 하늘의 재앙(8:12)
5. 황충의 재앙(8:13; 9:1-12)
6. 동쪽에서 나타난 군대(9:13-21)-증인들(10:1-11:14)
7. 하나님의 통치(11:15-19)
라. 7가지의 상징적인 역사들(12:1-14:20)
0. 서론: 두 세력의 나타남(12:1-6)
1. 용(12:7-12)
2. 여자(12:13-17)
3. 바다의 짐승(13:1-10)
4. 거짓 선지자(13:11-18)
5. 144,000(14:1-5)
6. 천사의 외침(14:6-11)
약속(14:12-13)
7. 추수(14:14-20)
마. 7가지의 대접의 심판들(15-16장)
0. 서론: 재앙의 출처(15:1-16:1)
1. 땅의 재앙(16:2)
2. 바다의 재앙(16:3)
3. 강의 재앙(16:4-7)
4. 태양의 재앙(16:8-9)
5. 짐승의 보좌(16:10-11)
6. 동쪽의 군사(16:12-16)
7. 하나님의 통치: 도시의 심판(16:17-21)
바. 7가지의 바벨론의 심판 메세지(17-18장)
0. 서론: 심판의 목적(17:1-6)
1. 천사의 해석(17:7-18)
2. 천사의 심판의 공포(18:1-3)
3. 하늘의 음성(18:4-8)
4. 땅의 왕들의 애통(18:9-10)
5. 땅의 상고들의 애통(18:11-17)
6. 땅의 선장들의 애통(18:18-19)
7. 천사의 마지막 심판의 공포(18:20-24)
사. 7가지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19-22)
1. 마지막의 축하(19:1-10)-
2. 마지막의 전쟁(19:11-21)
3. 마지막의 악의 소멸(20:1-10)
4. 마지막 심판(20:11-15)
5. 마지막(새)하늘과 땅(21:1-8)
6. 마지막 도시(21:9-27)
7. 마지막 천국(22:1-5)
0 결론: 마지막의 격려(22:6-21)
내용 요약
1장 계시의 근원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는 요한이 증거한다(2). 말씀에 대한 약속(3)으로 일곱 교회에 주어지는데(4) 그의 영광을 찬양한다(5-6). 그는 재림하시며(7) 처음과 나중이시다(8). 요한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고" 1)말씀과 2)예수증거를 위해 밧모섬에 있다가(9) 주의 날에 큰 음성으로(10) 일곱 교회에 편지를 적는다(11). 일곱 촛대에(12) 인자같은 이가 금띠와(13), 흰 양털의 머리, 불꽃같은 눈(14), 단련한 주석같은 발, 물소리 같은 목소리(15), 오른손에 일곱별, 입에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해같이 빛나는 얼굴(16) 앞에 요한은 엎드린다(17). (이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신(18) 분(예수님)으로서 요한이 본 것을(19) 기록하시기 원하신다(20).
2-3장 7교회에 대한 편지 7교회에 편지하여-
교회 |
칭 찬 |
책망 및 권면 |
약 속 |
1. 에베소 교회(2:1-7) |
수고와 인내, 악한 자를 용납지 않고, 거짓된 것을 드러 냄(2-3) |
처음사랑을 버림(4)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짐(5-6) |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이(1)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함(7) |
2. 서머나 교회 (2:8-11) |
환난과 궁핍(9)을 받았으나 실상은 부요한 자임 |
책망은 없음 환난속에서 죽도록 충성하기를 원하심(10) |
처음과 나중이시고, 죽었다 살아나신 이(8)가 생명의 면류관(10)을 주심 |
3. 버가모 교회 (2:12-17) |
내 이름을 굳게 잡고 죽임을 당하여도 믿음을 져버리지 않음(13) |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킴(14-15) 회개 하라(16)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 신 이(12)가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17)을 주심 |
4. 두아디라 교회 (2:18-29) |
사랑, 믿음, 섬김, 인내가 더 많아 짐(19) |
이세벨을 용납, 행음(20-24).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25) |
눈이 불꽃, 발이 주석같은 이(18)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철장, 새벽별 |
5. 사데 교회(3:1-6) |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명이 있음(4) |
살았다 하나 죽은 자(2)굳게하라, 회개하라(3-4) |
일곱 영과 별을 가지신 이(1)가 흰 옷과 생명책(5)에 기록 |
6. 빌라델피아 교회 (3:7-13) |
적은 능력으로도 말씀을 지키고 이름을 배반치 않음(8) |
책망은 없음 시험의 때를 면케 하고 면류관을 ꢘ지 못하게 하라(10-11) |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가(7) 성전의 기둥(12)이 되게 하심. |
7. 라오디게아 교회 (3:14-22) |
칭찬은 없음 |
미지근함(15-16)과 영적 자만(착각)과 자랑(18).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19) |
아멘, 충성되고 참된 증인, 창조의 근본이신 이 (14)가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심(21). |
4:1-8::1 7가지의 인들
4장 하늘의 보좌 광경; 하나님의 보좌(1-7), 네 생물의 찬양(8-9), 24장로의 찬양
(사도 요한은) 환상으로 올라 가(1) 하늘 보좌를 보니(2) 앉으신 이는 벽옥과 홍보석같다(3). 보좌에는 24장로들이 흰 옷과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고(4) 일곱 영이 계시다(5). 보좌 앞에는 네 생물이 있고(6)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같고, 여섯날개로 거룩을 찬송드린다(7-8). 그리고 장로들도 돌린다(9-11).
5장 일곱인으로 봉한 책을 떼시는 예수님. ; 합당한 어린양(1-5), 책을 취하시는 분(6-8),
24장로 찬양(9-10), 천사들과 만물의 찬양(11-14)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이 있는데(1) 책을 펴고 인을 떼기 합당한 자가 없다(2-3). 이에 내가 우니(4), 장로 중에서 "다윗의 뿌리"가 떼시리라 한다(5). 인을 뗄 어린양이 책을 취하고(6-7) 금대접을(=성도들의 기도) 24장로가 (드린다)(8). 새노래를 천천 만만 천사가 부르고(9-11),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께, 1)능력, 2)부, 3)지혜, 4)힘, 5)존귀, 6)영광, 7)찬송을 드리고(12) 모든 만물도 찬송, 존귀, 영광, 능력을 돌리니(13) 네 생물은 아멘, 장로들은 경배한다(14).
6-7장 7가지의 인
7가지 인 |
구절 |
나타난 현상 |
의 미 |
1. 첫째 인 |
1-2절 |
흰 말이 있고, 탄 자가 활을 가지고, 면류관을 받고 이기려 함 |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성도. |
2. 둘째 인 |
3-4절 |
붉은 말이 허락을 받아 화평을 제하고, 죽이게 하고 큰 칼을 받는다 |
전쟁의 시작 (마24:7; 단 7:21) |
3. 셋째 인 |
5-6절 |
검은 말이 있고, 탄 자가 저울을 가졌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보리 석되로다" |
기근의 시작(렘 5:10, 참] 레 26:14-39) |
4. 넷째 인 |
7-8절 |
청황색의 말과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따른다. 땅 사분의 일을 검, 흉년, 사망으로 죽인다 |
질병, 온역의 시작 (눅 21:10) |
5. 다섯째 인 |
9-11절 |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신원을 간구하며, 흰 두루마기로 수가 차기 까지 기다리게 한다. |
짐승이 주는 환난 시작과 성도들의 인내 |
6. 여섯째 인 |
12-17절 |
큰 지진.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고, 별이 떨어지고, 산과 섬이 옮기우고, 땅의 임금들은 숨고 어린양의 진노에 숨을 수 없다 한다. |
주의 날의 심판 (마 24:29-30) 이 일 후에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간다(7장) |
7. 일곱째 인 |
8:1 |
|
|
7장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 감
네 천사가 네 모퉁에 바람을 잡아 불지 못하게 하고(1), 외쳐(2) 하나님의 종을 인치기 까지 해하지 말라고 한다(3). 이 수는(4). 각 지파에 12000명씩 열 두 지파 총 144,000이다(5-8).-유다, 르우벤, 갓, 아셀, 납달리, 므낫세, 시므온, 레위,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베냐민. 셀 수 없는 큰 무리가(9) 외쳐 구원은 어린양에게 있다 한다(10). 모든 천사, 보좌 장로들, 네 생물도 경배하고(11) 영광돌린다(12). 이 흰 옷 입은 자는 누구인가(13)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로(14)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게 되며(15) 주리거나, 목마르거나, 해함 받지 않고(16),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여 눈물을 씻겨 주신다(17).
8:2-11:19 7가지의 나팔들
8:2-5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았고(2) 다른 천사는 금 향로를 가지고 와(3) 하나님 앞으로 올라 간다(4). 향로를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 지진이 있다(5).
각 천사의 나팔 |
구절 |
나타난 현상과 특징들 |
1. 첫째 천사의 나팔 |
8:6-7 |
피썩인 우박, 불이 땅에 쏟아짐, 땅의 3분의 1이 타고 수목의 3분의 1도 탄다 |
2. 둘째 천사의 나팔 |
8:8-9 |
불 붙는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움. 바다의 3분의 1이 피가 됨. 바다에 생명 가진 3분의 1이 깨어 짐 |
3. 셋째 천사의 나팔 |
8:10-11 |
큰 별이 하늘에서 3분의 1이 떨어짐. 물들의 3분의 1이 쑥이 되고 사람이 죽음 |
4. 넷째 천사의 나팔 |
8:12-13 |
해, 달, 별 각 각 3분의 1이 어두워짐. 날의 3분의 1이 비침이 없고 밤도 그러함 |
5. 다섯째 천사의 나팔 |
9:1-11 |
땅에 떨어진 별하나가 무저갱 열쇠를 가짐(1) 무저갱을 여니 연기가 올라오고(2) 황충이 나옴(3) 인맞지 않은 사람만 해하고(4) 다섯달 동안 괴롭게 하심(5) 황충은-말같고, 금면류관 비슷한 것 쓰고,얼굴은 사람,머리는 여자 털,이는 사자, 철흉갑, 날개는 병거와 많은 말소리, 꼬리는 쏘는 살이 있음(7-10). 임금은 아바돈, 아볼루온이다(11). 첫째 화는 지난다(12). |
6. 여섯째 천사의 나팔 |
9:13-21 |
금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고, 유브라데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13-14). 사람 3분의 1을 죽이기로 예비된 자(15). 마병수는 2억이다(16). 흉갑이 있고(17), 입에서 불, 연기, 유황이 나와 사람 3분의 1이 죽음(18). 이 재앙으로 죽지 않는 사람은 회개치 않거나 우상숭배함(20-21) |
7. 일곱째 천사의 나팔 |
11:15-19 |
그리스도가 왕노릇하며(15), 24장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의 진노로 멸망시킬 때이다(17-18). 하늘의 성전이 열림 |
10장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의 사건
힘센 천사가(1) 펴인 책을 들고(2) 소리를 외치니 우리가 발하는 소리다(3-4). 바다와 땅을 밟고 선 천사는 외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룬다"(7)고 한다(5-7). 펴 놓인 책을 가지고(8) 먹어 보니 "입에는 꿀같이 나나 배에서는 쓰다"(9-10). 다시 예언하라고 하신다(11).
11장 두 증인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를 척량하라 하신다(1) 성전 밖은 이방인에게 42달 짓밟히고(2) 두 증인이 1260일을 예언한다(3) 이는 주 앞에 두 감람나무와 촛대로(4) 해하려 하면 도리어 죽임을 당한다(5). 권세를 가지고 재앙으로 땅을 치며(6) 증거가 마칠 때 짐승이 무저갱에서 오라와 죽이니(7) 소돔 즉 애굽에 시체가 삼일 반 있고(8-9) 땅에 거하는 자들은 이를 인해 서로 좋아 하나(10) 다시 살아나서(11) 하늘로 올라 간다(12). 이 때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지진으로 7000명이 죽는다(14). 둘째 화는 지나간다(15).
12장 용과 여자(=사단과 교회)
해를 입은 한 여자가 발아래 달이 있고,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쓰고(1), 해산하게 되고(2) 붉은 용은 머리 일곱이요 뿔이 열이며 일곱 면류관이 있다(3). 별 3분의 1을 땅에 던지고 여자의 아이를 삼키고자 하니(4) 아이는 만국을 다스릴 남자다(5). 여자는 도망하여 1260동안 숨는다(6). 하늘에 전쟁이 있어 미가엘과 그의 사자와 용과 그의 사자가 싸워(7) (용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어 쫓긴다(8-9). 하늘에 음성이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 자기 때가 얼마 못된 줄 알고 분내어 내려갔다"(10-12)고 한다. 용은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니(13)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숨어 양육받는다(14). 뱀이 물어 내어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되(15) 땅이 물을 삼키니(16) 여자는 분노하여 여자의 남은 자손(=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모래에 선다(17).
13장 두 짐승들(적그리스도의 비밀)
뿔 열과 머리 일곱, 뿔에는 면류관과 머리에 "참람"된 이름이 있는 짐승이 나오는데(1) 표범 같고, 발은 곰, 입은 사자 같은데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준다.
(2) 머리 하나가 상처를 당하나 다시 낫고
(3)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고
(4) 42달 동한 일할 권세를 받고
(5) 짐승은 입을 벌려 하나님을 훼방하고
(6) 성도들과 싸워 이기며
(7)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한다
(8) 그러나 성도들은 인내와 믿음을 가진다
(10).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은 두 뿔로 용처럼 이야기 한다(11)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고
(12) 큰 이적을 행하고
(13)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든다
(14). 이 우상에게 경배치 않는 자는 다 죽이고
(15) 다 오른손과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6) 표없는 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짐승의 표다
(17). 이 수는 666이다(18).
14장 곡식의 추수와 포도송이 추수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함께 144,000명이 있고(1) 하늘에서 물소리, 큰 뇌성 소리 같은 소리가 내 속에 거문고 소리로 들리며(2) 네 생물과 장로들은 새 노래를 부른다(3).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정절이 있는 여자로(4)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다(5). 천사가 여러 나라 족속과 방언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6)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그에게 영광돌림은 심판이 가까웠다. 그에게 경배하라"(7)고 말한다. 둘째 천사는 "바벨론 음행으로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가 무너졌다"(8)고 한다. 셋째 천사는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여 표를 받으면, 진노의 포도주을 마시고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아 쉼을 얻지 못한다"(9-11)고 한다. 성도들의 인내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 이다(12). 하늘에 음성이 나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13) 하시고 금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흰 구름 위에 앉으사, 예리한 낫을 가지고(14) 천사의 음성을 따라 곡식이 다 익어 낫을 휘둘러 거둔다(15-17). 또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이한 낫을 가진 자를 향하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하자 땅에 포도를 거두매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가 피가 나와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진다(18-20).
15장 일곱 천사와 일곱 재앙의 금 대접.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마지막 재앙이다(1). 불이 섞인 유리 바다에 짐승과 그의 우상과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2) 노래를 부른다(3). "주의 길은 의롭고 참되시니 만국이 경배한다"고 한다(4-5). 하늘에 증거 장막 성전이 열리고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세마포와 가슴에 금띠를 띠고(6) 네 생물 중 하나가 진노의 금 대접 일곱을 천사에게 주고(7) 재앙을 마치기 까지 "성전에 들어 갈 자가 없다"고 한다(8).
16장 일곱 천사와 일곱 대접
일곱 대접 |
성경구절 |
나타난 현상과 재앙 |
첫째 |
16:2 |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에게 난다. |
둘째 |
16:3 |
바다가 죽은 자의 피같이 되고 바다 생물이 죽는다 |
셋째 |
16:4-7 |
강과 물 근원이 피가 되고(4) 천사가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피를 마시게 함이 합당하다"(5-6). 심판하시는 이는 "참되고 의로우시도다"(7). |
넷째 |
16:8-9 |
해에 쏟으니 해가 불로 사람을 태우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회개하여 영광을 돌리지 않은 자들이다(8-9) |
다섯째 |
16:10-11 |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나라가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아파 자기 혀를 깨물고 종기로 인해 하나님을 훼방하고 회개치 않는다(10-11). |
여섯째 |
16:12-16 |
유브라데 강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 동방의 왕의 길이 예비(12).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 입에서 나와(13)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전쟁을 위해 모은다(14). 히브리어로 세 영이 아마겟돈이라는 곳에 왕을 모은다(16). |
일곱째 |
16:17-21 |
큰 음성이 나고 지진이 난다(17-18). 큰 성이 세 갈래로 나뉘고 무너져 큰 성 바벨론은 없어지고 사람들은 박재를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한다 |
물위에 앉은 큰 음녀가 심판을 받음은(1) 땅의 임금과 거하는 자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함이다(2). 성령이 광야로 이끌다. 여자가 붉은 짐승을 타고 몸에는 참란된 이름과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3) 자주, 붉은 빛의 옷과 금, 보석, 진주로 꾸미고 금 잔과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4). 이마는 "비밀과 큰 바벨론,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기록되어 있다(5). 이 여자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를 취한다(6). 천사는 설명하여(7)이 여자는 무저갱에서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 한다(8).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며(9) 일곱 왕이며, 다섯은 망하였으나,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10). 이 짐승이 여덟째 왕이며(11), 열 뿔은 열 왕으로 짐승으로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에 받아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준다(12). 저희가 어린양과 싸우나(14)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이 이긴다. 음녀가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며(15)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망하게 한다(16). 말씀이 응하기 까지 짐승이 하나님 나라를 자기 뜻대로 한다(17). 여자는 땅의 임금을 다스리는 큰 성이다(18).
18장 큰 성 바벨론의 멸망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와(1) "큰 성 바벨론은 무너졌다"고 한다(2).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고 상고들은 사치의 세력을 인해 치부하였다(3). 내 백성은 "거기서 나와 죄에 참예하지 말고 재앙을 받지 말라"(4).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고 불의를 기억하셔셔(5), 준 대로 행위대로 갚아 준다(6). 자신의 영화와 사치하여 "나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하나(7) 하루 동안에 재앙이 이르러 사망, 애통, 흉년으로 불이 살라 지고(8) 음행, 사치하던 왕들이 울고 안타까워한다(9-10). 땅의 상고들은 다시는 그 상품은 사지 않음으로 우는데(11) 이 것들은, 귀금속, 옷, 장식품, 고급향, 식품, 가축과 사람의 영혼들이다(12-13). 바벨론을 인하여 상고들은 울지만(14-19) 하늘의 성도, 사도, 선지자들은 신원하심으로 즐거워 한다(20). 바벨론은 바다에 던져 다시 보이지 않고 그 소리와 복술도 들리지 않는다(21-23). 죽음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성 중에 보였음이다(24).
19장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이 일 후에 허다한 무리의 음성이 나고(1)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그의 심판은 의로우신다"(2). 두 번째로 연기가 올라가고(3) 24장로와 네 생물이 경배하여(4) "하나님을 찬송하라"(5)라 한다. 큰 음성이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이 통치 하시며(6),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7) 아내는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성도의 행실"이다(8)라고 한다. 혼인 잔치에 청함 받은 자는 복이 있고(9),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신다(10). 백마를 탄 자는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며(11), 눈은 불꽃같고(12), 머리는 많은 면류관이 있고, 피 뿌린 옷은 입었는데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13). 하늘의 군대가 백마를 타고 따르며(14) 입에서 검이 나와 만국을 치며 철장으로 다스린다. 옷과 다리에 이름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다(16). 한 천사가 공중에 나와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고기를 먹으라" 하신다(17-18).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산 채로 유황 불붙는 못으로 던지운다(20)(19-21).
20장 천년 왕국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와(1) 용(=옛 뱀, 마귀 사단)을 일천 년 동안 결박하고(2) 인봉하여 그 후에 잠시 놓인다(3). 앉은 자들은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다. 예수를 위해 순교한 자들과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표 받지 않는 자들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한다(4). 나머지 죽은 자들은 살지 못하니 첫째 부활이다(5). 첫째 부활에 천년동안 왕노릇하며(6), 천년 후 사단이 놓여(7) 땅의 사방 백성을 미혹하고 싸움을 붙여(8) 성도들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 불로 소멸하고(9)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에 던지운다(10). 흰 보좌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간데 없고(11) 죽은 자들이 그 보좌 앞에 서서 생명책대로 심판을 받는다(12).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13)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둘째 사망이다(14).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 운다(15).
21장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땅과(1)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2). 하나님의 장막이 함께 있으매 "하나님과 백성은 함께 거한다"(3).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애통, 곡, 아픈 것은 사라진다(4).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생명수로 목마른 자에게 주신다(5-6). 이기는 자는 유업이 되나(7) 두려워 않고, 믿지 않고, 흉악한 자, 살인자, 행음자, 술객, 우상 숭배자, 거짓말 하는자는 불과 유황의 못에 참여한다(8). 일곱 대접을 담은 천사가 와 어린양 아내를 보여 주려고(9) 높은 성, 예루살렘이 보이니(10) 하나님의 영광과 벽옥같이 맑다(11). 성곽은 열 두문, 열 두 천사, 열 두지파의 이름이 있다(12). 동서남북 각 3문씩이고(13), 성은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초석에 있고(14), 말하는 자는 금 갈대를 가졌다(15). 성은 일만 이천 스다디온 장과 곽이다(16). 일백 사십 사 규빗이고(17), 성곽은 벽옥이며 정금으로 유리같다(18). 기초석은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홍마노, 홍보석, 황옥, 녹옥, 담황옥, 비취옥, 청옥, 자정(19-20)이며, 열 두문은 열 두 진주(21)다. 성안에는 성전이 없음은 전능하신 어린양이 성전이심이다(22). 해나 달이 비췸이 쓸데 없고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이 등이 되신다(23). 만국이 그 빛가운데 다니고(24) 문은 닫지 아니한다(25). 만국의 영광과 존귀로 들어오고(26), 속된 것이나 가증된 일,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들어오지 못한다(27).
22장 생명수 강
생명수 강은 하나님 및 어린양의 보좌로 나서(1) 생명나무가 있고, 열 두 실과가 맺힌다(2). 저주가 없고, 보좌가 가운데 있어 그를 섬기고(3) 주 하나님이 영원히 왕노릇 하신다(4-5).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천사를 보내셨으니 말씀대로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6-7). 요한은 천사에게 경배하려 하자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한다(8-9). 예언의 말씀은 인봉하고(10), 불의한 자를 불의를 의로운 자는 의를 행하게 하라(11). 각 사람의 일한 대로 갚아 주시며(12) 시작과 나중이시며(13),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14). 개들과 술객, 행음자, 살인자, 우상 숭배자,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는 밖에 있다(15). 그리스도는 새벽별이시다(16).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여 목마른 자도 오라(17) 초대하시고 예언의 말씀에 추가나, 삭제를 하는 자는 참여함을 못 받는다(18-19). 진실로 예수는 속히 오시며(20) 은혜가 모든 자에게 있다(21).
세상의 마지막 심판과 하나님의 새 창조
바벨론의 심판(17-18장)과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과 특히 천국이 소개(19-22장)되며 요한계시록은 마무리 된다.
*요한 계시록을 이해하는 방법 중에 좋은 방법은 모든 7개의 구조로 크게 이해하고 각 7개의 단락으로 이해하면 쉽게된다.
문제 1) 일곱교회에 주신 말씀을 현대교회에 적용시켜 보자?
힌트)각 교회의 당시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의 장점과 책망받은 것들을
공부해 보자
문제 2) 요한계시록 전체적인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천국(4-22장까지 사건들)을 이해하여야 하겠는가? 예를 들어보자
참고)1) 과거로만 해석하는 과거적 해석파, 2) 현재적인 것으로만 해석하는 현재적 해석파, 3) 미래적인 해석으로만 해석하는 미래적 해석파, 4)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영적인 상징으로만 해석하는 영적해석파등이 있다. 바른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주인 되심과(과거, 현재, 미래) 또한 그의 몸된 교회가 바벨론과 싸움에서 승리하여 영원한 천국에 동참하는 것이다(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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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수요기도회(2016-1-20) 계시록 자료 #.1
요한계시록 전체 구조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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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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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 |
인 |
나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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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입 설명 |
|
대접 |
|
삽입설명 |
천상 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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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계 시 록 선 언 |
일 곱 교 회 |
천 상 보 좌 |
어 린 양 과
인봉 |
인
재 앙
공 개 |
십 사 만 사 천 |
나 팔 을 붐 |
작 은
두 루 마 리 |
두
증 인 |
여 자 와
용 |
두
짐 승 |
십 사 만 사 천 |
대 을
쏟 음 |
음 녀 심 판 |
바 벨 론 심 판 |
아 마 겟 돈 전 쟁 |
천 상 의 천 년 왕 국 |
새 하 늘
새 땅 |
종 말 지 향 신 앙 |
주제표
초점 |
서론 |
심판 |
영광 |
||||
구분 |
일곱 |
일곱 인 |
일곱 나팔 |
일곱 징조 |
일곱 재앙 |
일곱 멸망 |
새로운 것 |
본문 |
1-3장 |
4-6장 |
7-9장 |
10-13장 |
14-16장 |
17-19장 |
20-22장 |
주제 |
하늘의 환상심판관 |
땅의 환란 |
오심 |
||||
장소 |
밧모섬 |
||||||
시간 |
A.D 95-96년경 |
내용과 주요 사상
- 이 책은 그리스도의 계시의 중심이다(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비교 /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계시의 내용은 속히 될 일과 장차 될 일을 동시에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에 속히 될 일과 장차 될 일을 정확하게 구분하며 읽어야만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다고 하겠다.
1장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
2, 3장 ; 지금 있는 일들
4-22장 ; 장차 될 일들을 예언
요한계시록에 대한 개론
요한계시록의 특징을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서신
둘째는 예언
셋째는 환상이라고 하겠습니다.
1. 서신(1:4-5, 22:21)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 캐논 무라토리(The Cannon Muratory)는 서간체로 쓰여 졌다.
- 찰스(Charles)
왜 서신이 필요한가?
방문 시에는 직접 설교를 통하여 가르칠 수 있었으나 방문 할 수 없는 경우 말씀을 전달하려고 서신을 이용하였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자신이 세웠던 교회들을 향하여 말씀을 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때마다 서신을 보냈다.
이때 서신은 읽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그대로 읽어주는 것으로 회중에게 전달되었다. 이것이 서신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보낸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은 편지와 같이 회중들에게 읽어주므로 그 내용이 그대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편지를 읽어준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려고 하므로 오히려 편지의 특징에서 벗어나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편지를 읽어야 할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교부시대가 시작되면서 읽고 해석하고 설교하므로 서신의
의미가 상실되었고 많은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2. 예언
①. 서신서이며 동시에 예언에 해당한다.
예언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을 받은 그대로 알려야 한다.
예를 들면 요나가 받은 예언은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는 말씀이었습니다(요나 1:2).
그러나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배표를 구하여 배에 올랐습니다(요나 1:3).
그러나 요나는 받은 예언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다시스로 떠났습니다. 예언을 외치지 못한 요나에게 닥쳐온 불행은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져졌고 다시 바다의 큰 물고기 뱃속에서부터 육지로 토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주어졌습니다. 요나가 받은 예언은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요나 3:4).
또 다른 예를 찾아본다면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예언은 불로 심판할 것이며 롯과 그의 가족들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는 해석을 하므로 그 자리에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②. 예언은 주로 익명으로 되었으나 계시록은 저자의 이름을 명확하게 소개한다.
③. 환상에 대한 예언(1:3, 22:7, 10, 18-19).
④. 예언의 말씀으로 잘 해석된 편지 형식으로 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회중에게 읽어주므로 가르침이 되는 말씀이었다.
⑤.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다(1:3).
유대인들이 믿지 않으므로 이방인 중심으로 구성된 교부 시대에 계시록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읽고 해석하고 설교를 하므로 마치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었다.
환상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환상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환상은 그림입니다. 그림 중에서도 정확하게 묘사하는 인물화 또는 정물화가 아니라 추상화에 속합니다. 추상화는 그림을 그린 사람이 아니면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추상화를 그린 사람의 의도와 설명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요한계시록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보여주신 계시라고 합니다.
잠언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 계시는 죄를 짓지 못하게 합니다.
에베소서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 계시는 통찰력을 제공합니다(하나님을 알게 한다).
3.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
①. 과거적 해석
1614년 예수회의 사제 알카이저(Alcazar)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개혁자들은 적그리스도가 교황일 것이라는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하였다. 이에 대하여 천주교회의 입장은 로마의 핍박으로 시작하여 콘스탄틴 황제 때 모두 성취되었다는 과거적 해석으로 대응하였다.
②. 미래적 해석
1685년 예수회의 사제 프란시스 리베라(Fransis Rivera)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적그리스도가
교황이 아니라 과거적 사건이라고 천주교회가 해석하므로 개혁자들은 예언은 대부분 미래적 현상이 중심이기 때문에 잘못된 해석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교황이 아니라 미래에 나타날 어느 사람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개신교 학자 존
다비(John Darby)는 ‘장차 될 일’ 이란 구절을 근거로 미래적 해석원리로 삼았다(1:19). 이때부터 요한계시록의 해석
원리는 미래의 틀이 가장 좋은 해석의 원리라고 받아드렸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이란 해석이 소개되면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동조하여 스코필드(C Scofield)가 스코필드 성경에서 이 해석의 원리를 소개하면서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세대주의 해석 원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칠일 동안 하셨으므로 세상의 역사도 여기에 맞춰야 한다고 하여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되었다.
예를
들면 베드로후서 3장 8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하셨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에서 창조의 7일을 7천년으로 계산하여 여기에 모든 세상 역사를 맞추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2000년은 세상의 종말이 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유는 제임스 어셔
감독이 구약의 연대를 연구한 결과 4004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맞추므로 시한부 종말론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장림 사건(1992년 12월 28일 재림)이라고 하겠다.
대재앙을 당하지 않고 주님이 공중 재림할 때에 휴거한다는 매혹적인 해석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해석을 따르면 교회시대는 3장에서 끝나고 이 후에 성도들은 모두 휴거된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메시아닉 주이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의 예언에 따라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이때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③. 역사적 해석 - 문자적 해석
계시록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시까지의 역사에 대한 예언이라고
전제한다. 이 예언은 역사 속에서 일어날 교회에 대한 것과 함께 이방인을 심판하는 내용이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은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일어난다고 해석한다.
역사적 해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많은 충돌을 일으켰다.
일곱 인과 나팔과 대접은 순서대로 진행되어 일어난다고 한다.
④. 상징적 해석 - 영적 측면을 강조하는 해석(무천년설)
왈부드(J Walvoord)는 상징적인 내용은 대부분 구체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징적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은 해석된 내용을 또다시 자기의 주관적인 해석을 한다.
예를 들면 천년왕국에서 역사적으로 천년은 없고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천년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을 따르면 신약시대 전체를 대환난 기간의 3년 반으로 계산하여 초림과 재림의 기간이 천년이라고 해석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이 제시한 것까지만 해석하고 성경에서 제시하지 않은 것은 억지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억지로 해석하려고 이것과 저것을 조합하여 맞추므로 더 혼란스럽고 이상한 교리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번 주간에 요한계시록을 읽어가며 ‘짐승’이란 단어를 잘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성경 전체에서 짐승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대략 249구절 입니다. 구약에서 201구절, 신약에서는 48구절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구절 수는 33구절입니다. 그만큼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이란 단어가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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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수요기도회(2016-1-27) 계시록 자료 #.2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받은 계시(환상)에 근거하여 기록한 예언서이며 동시에 서신서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을
회람서신이라고 합니다. 회람서신이란 일곱 교회에서 서신을 읽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편지를 읽을 때에 편지를 해석하지 않듯이
요한계시록은 읽기만 하면 이해가 가능하도록 편지를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들이 서로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편지를 읽기 보다는 해석하려고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으므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한편 예언이란 그 내용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예언을 해석하면 엉뚱한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계시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보여주신 것으로 그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짐승에 대한 이해
짐승 |
249구절 |
구약 |
201구절 |
신약 |
48구절 |
||
요한계시록 |
33구절 |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계시록 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요한계시록 17:11,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짐승은 여덟째 왕이라고 분명하게 해석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숫자의 의미
666 - 사람의 수
666에 대해서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과 암호라고 해석하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상징일 경우 이는 6이 100배, 10배, 1배 있는 것으로 완전한 불완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의 수, 세상적인 수, 마귀적인 수라 생각한다.
암호일 경우 이를 한 인간의 암호로 보고 그 인간의 이름을 지칭하기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본다. 상징보다 암호가 본문의 맥락에 합당한 견해이다. 저자는 자신이 666을 한 인간의 수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66은 누구일까?
1. 네로
2. 테이탄(헬라의 신화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거대한 신)
3. 로마(라틴)
4. 도미시안
네로를 포함한 모든 로마 황제들은 ‘카이사르’ 라고 하였다. 그래서 네로 황제를 의미하는 라틴어 “Nero Caesar”를
그리스어로 음역하면 “Nerōn Kaisar”가 된다. 이것을 다시 아람어로 음역하면 “נרון קסר”가 되는데, 이를
게마트리아 방식에 따라 숫자로 바꾸어 모두 더하면 그 값은 아래와 같이 666이 된다.
Resh(ר) |
Samech (ס) |
Qof(ק) |
Noon(נ) |
Vav(ו) |
Resh(ר) |
Noon(נ) |
합계 |
200 |
60 |
100 |
50 |
6 |
200 |
50 |
666 |
무함마드
어떤 학자들은 그리스어 단어인 ‘Maometis’에서 짐승의 숫자가 발견된다고 주장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회칙 《Quia Maior》에서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를 계시록의 짐승과 동일시한 바 있었다. 라마의 주교 찰스 웜슬레이는 Maometis를 짐승의 숫자로 풀이한 대표적인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디미우스 지가베누스와 요안네스 조나라스, 게오르기오스 케드레노스 등의 그리스 역사학자들이 무함마드를 Maometis 또는 Moametis라고 불렀던 역사적 사실을 지적하면서[20][21] Maometis를 게마트리아 방식으로 아래와 같이 숫자로 풀이해보면 666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M |
A |
O |
M |
E |
T |
I |
S |
합계 |
40 |
1 |
70 |
40 |
5 |
300 |
10 |
200 |
666 |
루터파의 창시자로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도 이름이 666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종교개혁 시기에 프로테스탄트에서 교황과 로마 가톨릭교회를 원색적으로 비난하자 가톨릭 신학자 페트루스 본구스는 종교개혁의 주창자인 마르틴 루터의 이름이 짐승의 숫자인 666으로 산출된다면서 이를 루터가 바로 그리스도의 적임을 확증하는 증거로 내세웠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라틴어 문자에서 처음 아홉 문자는 1을 중복하고(1부터 9), 그다음 아홉 문자는 10을 중복하고(10부터 90), 나머지 네 문자는 100을 중복한다(100부터 400). 참고로 라틴어 문자는 영어 알파벳과는 달리 J가 I와 같고, U가 V와 같으며, W는 U의 곱 내지는 VV로 대신하며, Y도 없기 때문에 총 22개밖에 없다. 이 원칙에 따라 마르틴 루터의 라틴어 음역인 ‘Martin Lutera’의 문자들을 하나하나 숫자로 환산한 다음, 이를 모두 더하면 그 값은 666이 된다.
M |
A |
R |
T |
I |
N |
L |
U |
T |
E |
R |
A |
합계 |
30 |
1 |
80 |
100 |
9 |
40 |
20 |
200 |
100 |
5 |
80 |
1 |
666 |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좋은 선물 중의 하나는 ‘언어’이다. 인간만이 언어로 대화하고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 아프리카 오지나 남미정글에는 현대문명과는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있다. 남녀노소 모두 완전히 벗은 몸으로 사는 부족들도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도 자기들의 언어로서 훌륭하게 의사소통하는 것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적어도 6천 종류 이상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그런데 모든 언어는 표현 방법이 똑같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당신은 커피를 좋아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한국 사람은 커피를좋아하는 경우 ‘아니요’ 라고 대답한다. 부정(否定)으로 물었으니까 부정으로 대답하면 ‘긍정’이 되어서 커피를 좋아한다는 말이 된다. 대단히 논리적인 언어 사용법이다. 반면에 영어에서는 커피를 좋아한다면 yes라고 대답한다. No라고 대답하면 싫어한다는 뜻이 된다. 질문의 형태와는 관계없이 대답이 긍정이면 ‘예’이고, 그렇지않으면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언어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변하게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영어에‘게이(gay)’라는 말이 있다. ‘유쾌하다, 쾌활하다’는 뜻이다. 미국에 가서 ‘그는 쾌활한 사람이다’라는 뜻으로 ‘그는 게이이다’라고 말하면 의도치 않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오늘날 영어에서 ‘게이’는 동성연애자(특히 남성)를 의미한다. 또 ‘드러그(drug)’는 약이라는 뜻이다. 과거에는 약방을 drugstore라고 했다. 요즈음 미국에 가서 ‘드러그(약)를 어디서 살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가는 경찰서 신세를 질 수도 있다. 오늘날 ‘드러그’는 주로 마약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언어는 표현법이나 수사법에서도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그 커피는 맛이 있었고 그리고 (and) 뜨거웠다’는 표현이다. 우리는 그런 표현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냥 ‘맛있는 뜨거운 커피였다’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된 히브리어나 희랍어에서는 ‘그리고(and)’ 라는 접속사를 사용해서 한 가지 사실을 표현하는 어법을 많이 사용한다. 이런 어법을 ‘중언법(重言法, hendiadys)’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본다.
창세기 3:16에는 불순종한 여자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히브리 원문을 보면, “내가 ‘너의 임신과 너의 고통’을 더하리니…” 라고 되어있다. 임신과 고통이 별개의 두 가지가 아니라, 둘이 합해져서 하나의 뜻을 나타내는 중언법이 사용된 것이다. 그 뜻은 ‘임신(출산)하는 고통’이다.
사무엘이 죽었을 때 그를 장사하는 장면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온 이스라엘 사람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삼상 28:3). 원문을 보면 ‘라마에 그리고(and) 그의 고향에’ 장사했다고 쓰여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흔히 쓰는 ‘중언법’적 표현이지만 우리말로는 어색한 표현이다. 그래서 ‘그의 고향 라마’라고 옳게 번역한 것이다.
또 스바냐 1:16에는 ‘나팔과(and) 경고’라는 말씀이 있다. ‘나팔을 불어경고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서 중언법적 표현이 제대로번역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게마트리아(Gematria)
히브리어의 알파벳이 나타내는 숫자로써 그 단어가 지닌 뜻을 풀어 성서를 해석하는 이러한 방법을 게마트리아(Gematria)라고 한다. 유대교의 랍비들 특히 중세의 카발라주의자들이 많이 사용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모두 22자인데 처음 10자는 차례로 1부터 10까지의 수를 나타내고, 다음의 8자는 차례로 20부터 90까지의
10단위 숫자를 나타내며, 나머지 4자는 차례로 100부터 400까지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철자를 보고 숫자를 계산하여
뜻을 알아내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엘리에젤’(창 15:2)은 아브라함의 종 318명을 가리킨다고 해석 합니다(창 14:14).
요한의 계시록 13장 18절에 짐승의 숫자는 666인데, 이 숫자는 ‘네로황제’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그 철자의 숫자를 합한 것과 같다.
숫자의 의미
1 |
연합, 하나님의 나라 |
2 |
동행, 사역, 언약, 성취, 증인 |
3 |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존재 의식, 질적인 완전 수 |
4 |
땅의 피조물의 존재 |
5 |
고통, 순교, 환란 |
6 |
노동, 벌, 죽음 |
7 |
단식, 생명, 영원, 영적인 완전 수 |
8 |
부활, 영원 |
9 |
미완성, 불완전, 부족수 |
10 |
땅의 만족 수, 땅의 충만 수, 하나님이 만족 하는 인내의 시간, 서수적인 완전 수 |
12 |
완전통치의 상징 수 |
유대인의 수 개념에서 연대적 완전수는 3, 7, 10, 12를 곱한 수를 말합니다.
1년은 360일, 7년은 2,520일(3☓7☓10,☓12)
▶ (곱하기) : 충만, 번성
☞ 3×4=12(충만, 번성)
☞ 7×7=49(무한)
☞ 12×12=144(하늘과 땅을 합한 천국의 크기)
☞ 12×1000=12,000(택한 백성의 수)
☞ 12×12×1,000=144,000(택함 받은 자의 수) (144×1,000=천국백성)
▶ +(더하기) : 존재
☞ 7+7=14(언약의 성취, 예수님의 족보 14대, 14대, 14대)
☞ 3+4=7(하늘과 땅의 존재, 전체, 전부)
☞ 7+1=8(부활, 영원)
☞ 12 + 12 = 24 : 성도들의 대표 (신․구약 대표)
이들의 이름을 히브리음역으로나, 헬라어음역으로 표기한 후 수치로 대입하면 다 666이 된다. 이들 중에 테이탄설은 요한이 갑자기
헬라신화를 인용했다는 의아심을 불러일으킴으로 부적절하다고 보며, 로마설도 사람이 아니라 그는 국가이고 또 신약 어디에도 로마를
라틴이라고 표기한 곳이 없기 때문에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네로설이거나 도미티안설이다.
계시록이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시기에 기록되었다면 이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서론에서 보았던 것처럼 당시의 박해는 거국적 이었다기 보다는 아직까지는 지엽적인 것이었기에 네로의 박해시가 이닌가? 하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었다.
666(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이것이 상징인지 아니면 어떤 한 인간의 암호인지 논의가 되어왔다. 상징일 경우 이는 6이 100배, 10배, 1배 있는 것으로 완전한 불완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의 수, 세상적인 수, 마귀적인 수라 생각한다.
암호일 경우 이를 한 인간의 암호로 보고 그 인간의 이름을 지칭하기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본다. 상징보다 암호가 본문의 맥락에 합당한 견해이다. 저자는 자신이 666을 한 인간의 수 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66은 누구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다.
a) 네로라는 설,
b) 테이탄(헬라의 신화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거대한 신)이라는 설,
c)로마설('라틴'이라는 말을 수치로 계산했을 경우),
d)도미시안 설 등이다.
이들의
이름을 히브리음역으로나, 헬라어음역으로 표기한 후 수치로 대입하면 다 666이 된다. 이들 중에 테이탄설은 요한이 갑자기
헬라신화를 인용했다는 의아심을 불러일으킴으로 부적절하다고 보며, 로마설도 사람이 아니라 그는 국가이고 또 신약 어디에도 로마를
라틴이라고 표기한 곳이 없기 때문에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네로설이거나 도미티안설이다.
계시록이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시기에 기록되었다면 이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서론에서 보았던 것처럼 당시의 박해는 거국적 이었다기 보다는 아직까지는 지엽적인 것이었기에 네로의 박해시가 이닌가? 하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었다.
하팍스레고메나(Hapaxlegomena)
‘짐승의 수’이면서 ‘사람의 수’인 ‘666’은 요한계시록 13장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단어이다. 즉 성경 안에 직접적으로
비교 가능한 본문이 없다. 솔로몬의 세입금 중수 ‘666’(대하 9:13; 왕상 10:14)이라는 구절이 있으나 이것은 ‘666 금
달란트’라 ‘인간의 수 666’과는 다른 개념이다. 이렇게 성경에 단 한번 등장하는 독특한 단어를
하팍스레고메나(Hapaxlegomena)라고 한다. 하팍스레고메나는 비교 가능 구절이 없는 관계로 해석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런 단어의 경우 단어 자체의 본 의미를 따져보고 이 구절과 관련된 앞뒤 문장의 전후 관계를 잘 분석하여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666도 단순히 666만을 따로 떼어 해석하면 위험하고 계시록 13장 전체의 맥락과 틀 안에서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 계시록 13장은 두 짐승에 관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바다에서 나온 첫 번째 짐승(1-10절)
첫 번째 짐승은 바다에서 나왔으며 그 짐승의 얼굴 모습은 뿔이 열이고 머리는 일곱을 가진 짐승이었다. 이들 짐승의 열
뿔에는 10개의 면류관이 있었으며 머리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있었다. 짐승의 전반적 생김새는 표범과 비슷하고 발은 곰의
발을 닮았으며 입은 사자의 입을 닮았다고 했다(1-2절).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첫 번째 짐승은 다음과 같은 10 가지 권세가 있었다(3-8절).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 짐승은 용으로부터 용의 능력과 왕좌와 큰 권세를 받았다(4절).
2. 짐승은 머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죽은 듯 하다가 살아났다(3절).
3. 온 세상 사람들이 놀라 그 짐승을 따랐으며 사람들은 그에게 권세를 준 용을 경배했다(4절).
4. 온 세상 사람들은 용뿐만 아니라 짐승도 경배하기 시작한다(4절).
5. 온 세상 사람들은 짐승을 경배할 뿐 아니라 찬양했다(4절).
6. 온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짐승과 같은 이가 없고 짐승과 맞서 싸울 존재도 없었다(5절).
7. 짐승은 교만한 말을 서슴지 않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장막과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는 말을 함부로 하였다(6절).
8. 짐승은 42달 활동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6절).
9.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허락되었고 온 세상 모든 민족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
10. 세상이 창조 된 이후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땅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그 짐승에게 경배할 것이다.
이와
같은 아주 구체적인 설명에 따라 첫 번째 짐승의 권세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짐승에 대한 이와 같은 우주적 권세와 경배는
어린 양에 대한 우주적 권세와 병행을 이룬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계 2:28; 3:21). 그리스도에 맞서는 이 같은
악령의 대응을 기독론적 패러디(Christological parody)라고 부른다.
짐승의 때에 대해 하나님은 몇 가지 경고를 하신다(9-10절).
1. 짐승의 때에 대해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야 한다.
2. 짐승의 때에 잡혀갈 사람은 잡혀가고 칼로 죽임을 당할 자들은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3. 짐승의 때에 성도들에게는 인내하는 믿음이 필요할 것이다.
땅에서 나온 두 번째 짐승(11-18절)
두 번째 짐승은 땅에서 올라왔다(11절). 두 번째 짐승은 새끼 양처럼 두 뿔을 가졌고 용처럼 말을 했다. 성경은 두 번째 짐승의 권세(활동)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12-15절).
1. 첫 번째 짐승이 지녔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처음(첫 번째) 짐승 앞에서 행사할 것이다.
2.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가 살아 난 첫 번째 짐승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
3. 큰 기적을 행하고 심지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할 것이다.
4. 첫 번째 짐승이 하던 기적을 그대로 행하고 땅에 사는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5. 첫 번째 짐승을 향한 우상 숭배를 노골화할 것이다.
6. 능력을 받아 첫 번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을 하게 하고 그 짐승의 우상에 경배치 않으면 다 죽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666)를 받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짐승이었다(16-18절). 빈부귀천, 남녀노소, 종이나 자유자나 예외 없이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할 것이고, 표는 강제적 매매의 수단이 될 것이고,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일 것이다. 성경은 이런 때일수록 지혜가 필요하니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 짐승의 숫자를 세어보라고 했다. 이 짐승의 수는 사람의 숫자로 666이다.
베리칩이 666인가?
베리칩은 좁쌀보다 약간 큰 작은 칩으로 팔이나 신체의 특정 부위에 주입하여 의학적 성과를 얻으려는 칩을 말한다. 근데
이것이 왜 앞에서 설명한 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666이라는 것일까? 요한계시록은 직역을 하면 잘 풀리지 않는 많은 상징이 있는
책이다. 벌콥(L. Berkhof)의 말대로 요한계시록은 결코 사도행전 식으로 해석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해석학의 기본이
필요하다. 계시록 13장도 그 상징의 내용을 잘 해석해야 한다. 베리칩이 “666”인가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짐승의 표가
등장하려면 반드시 먼저 짐승이 등장해야 함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대단히 상징적이기는 하나 분명 대단한 능력과 권세를 가진
바다에서 올라온 처음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이 등장해야 한다. 아직 요한계시록 13장의 구절과 일치하는 구체적 두
짐승은 세상에 나타나거나 등장한 적이 없다. 짐승의 표는 이 짐승이 나타난 후 짐승의 통치수단에 의해 만들어진 강제적 정책의
산물로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베리칩이 666과 일치하려면 이 정책의 주체가 되는 짐승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고 그 표가 강제적
매매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한때 666이 분명하다고 큰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었던 “컴퓨터 바코드 666 소동”은 매매 수단과 관련이라도 있었다. 물론 이
소동은 엉터리로 판명이 났다. 하지만 베리칩은 바코드 소동과 달리 강제적 매매 수단과는 관련이 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베리칩을 666이라 보는 것은 13장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동안 13장의 짐승에 비유되는 유사(類似) 짐승은 참 많았다. 로마 제국, 네로, 칼리굴라, 교황, 니므롯, 솔로몬, 느브갓네살(단 3:6) 등을 666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심지어 반 개신교측에서는 마르틴 루터나 개신교를 666으로 보는 주장까지 있었다. 이런 식으로 666을 보면 짐승 우상에게 경배치 않으면 모두 다 죽였다는 점에서 도미티안 황제, 일제식민지 시대의 강제적 신사참배제도, 김일성 우상화도 모두 666의 후보자들이 될 수 있다. 이들 모두는 두 짐승과 관련하여 해석할 때 유사성을 가지기는 하나 두 짐승의 “그림자” 정도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래서 요한은 666을 푸는 데는 지혜와 총명이 필요하다고 지속적으로 충고하고 있다(18절).
히브리어와 헬라어에는 우리말에는 없는 숫자값(numerical value)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게마트리아”(gematria)라고 한다. 하나님은 37, 예수님은 888(37☓3☓8), 짐승의 수는 666, 사단의 나라는 276과 관련된다. 이 게마트리아로 666을 푸는 방식이 있다. 게마트리아로 살펴보면 위에서 살펴 본 많은 인물이나 사건들이 666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게마트리아로 666을 풀 때에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13장 전체(전후) 문맥과 조화하고 일치하는 666인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전체 문맥 가운데 살펴보면 대부분의 “666” 후보들은 “666”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게마트리아가 신비한 도구이기는 하나 게마트리아를 절대적 성경 해석 방법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계시록 13장의 “666”이 출현하려면 반드시 이적과 능력을 가진 두 짐승의 등장이 먼저임을 기억해야 한다. “666”은 그 다음 나타나는 온 세상 사람들의 강제적 매매 수단과 관련된 표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13장의 내용과 일치하는 구체적 짐승의 출현도 아직 없었고 매매 수단이 아닌 일부 최첨단 의료용으로 알려진 베리칩이 계시록 13장이 말하는 666이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베리칩을 666이라 주장하는 분들이 베리칩을 받느냐 안 받느냐에 따라 구원 여부가 달려 있다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불안이나 공포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시는 의와 평강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베리칩 공포와 불안"에 떨다가 베리칩이 아닌 정말 666이 나타날 때는 그만 사단에게 속아버리는 참사가 벌어지지 않을 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베리칩을 구원여부의 기준으로 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세대주의적 극단적 종말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열심 있는 것은 좋으나 좌우 분간을 하지 못하고 신비주의적이고 극단적이고 긴급한 종말론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신자들의 열심을 이끌어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것은 신앙을 열심으로 착각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으며 하나님께 열심을 다한다는 착각 속에서 실은 마귀에게 이용당해 버리는 누(累)를 범할 수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한다. 마귀가 그리스도인들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것도 아니고 괜히 겁먹을 존재는 아니나, 모세의 시체에 대해 논쟁했을 때 천사장 미가엘도 마귀를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을 정도로 마귀는 그리 간단한 존재가 아니다. 바르게 깨닫고 열심을 다해야지 분별을 못하고 열심을 내다가는 사단에게 이용당하는 도구가 되기 십상인데 작금의 한국 교회에 이런 불안을 동반한 신비주의가 만연된 것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제자 베드로도 '사단'이라고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것처럼 사단의 꾀에 속지 말아야 한다(막 8:33).
베리칩이 "666"이 아니라는 성경적 증거
첫째, 666이전에 반드시 등장해야 할 계시록 13장에 나타난 두 짐승에 해당할만한 인물이나 사건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짐승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상징성을 가지는 지에 대해서는 지혜로운 검토와 해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베리칩이 666이라는 생뚱한 주장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
둘째, 두 짐승이 나타난 후 두 번째 짐승이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666)를 받게 하는데(16-18절) 베리칩을 666이라 할 경우 두 번째 짐승에 해당하는 실체가 불분명할 뿐더러 베리칩 소동은 13장이 묘사하고 있는 두 번째 짐승과 정황상 내용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셋째, 계시록 13장은 빈부귀천, 남녀노소, 종이나 자유자나 예외 없이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한다고 하였으나 그 비싼 베리칩을 식량도 부족한 북한이나 아프리카 같은 빈국의 노인이나 어린이들에게 무엇 때문에 어떻게 신체에 강제로 투여 한다는 것인지 베리칩은 이 구절과 전혀 맞지 않는다. 더구나 말기 암에 걸려 흙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는 환자에게 베리칩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같은 일은 권의주의적 세계 종교 통일이나 정치 통일이 가능해진 다음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세계 종교나 정치가 통일 된다는 것은 작금의 정황상 요원한 일일뿐이다.
넷째, 표는 강제적 매매의 수단이 된다고 하였으나 화폐가 있고 카드가 넘쳐나는 시대에 베리칩이 어떻게 모든 남녀노소, 모든 빈부귀천, 종교인들의 강제적 매매 수단과 관련 된다는 것인지 허황된 주장일 뿐이다.
다섯째,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라고 하였으나 베리칩은 짐승의 이름도 아니고 짐승의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가 아니다. 단지 바코드 소동과 유사할 뿐이다.
여섯째, 짐승이 출현하였을 때 지혜가 필요하니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 짐승의 숫자를 세어보라고 하였는데, 먼저 이 짐승은 (1)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가 살아 난 첫 번째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짐승이요 (2) 큰 기적을 행하고 심지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하는 짐승이요 (3) 첫 번째 짐승이 하던 기적을 그대로 행하고 땅에 사는 사람들을 속이는 짐승이요 (4) 첫 번째 짐승을 향한 우상 숭배를 노골화하는 짐승이요 (5) 능력을 받아 첫 번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을 하게하고 그 짐승의 우상에 경배치 않으면 다 죽이는 권세를 가진 짐승이다. 그런데 이런 두 번째 짐승은 첫 번째 짐승에 해당하는 짐승도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짐승 이후에나 나타나는 666을 베리칩으로 상정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이다.
일곱째, 짐승의 수는 사람의 숫자로 “666”이라 하였는데 베리칩이 사람의 숫자 "666"이라는 의미와 연관성이 없다.
여덟째, 성령의 은혜는 그리스도 믿음 안에서 주시는 영원한 구원과 참 평강이다. "베리칩"을 가지고 구원 상실과 신앙적 불안감과 긴박한 세대주의적 시한부종말론으로 사람들을 겁주고 인위적 열심을 이끌어내려는 것은 아주 비성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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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는 수학적 분석이 가능한 언어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22개가 있는데 각 알파벳마다 고유한 숫자 값이 있다. 즉 알파벳이 곧 숫자다. 히브리어뿐만 아니라 헬라어, 라틴어 등도 각 글자가 숫자값을 가지는데 이런 것을 알파뉴메릭 시스템(alphanumeric system)이라 한다.
진리는 본질적 진리(essential truth)와 비본질적 진리(non essential truth)로 구분합니다. 본질적 진리는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불변적 진리를 말합니다. 반면에 비본질적 진리는 어느 교단, 어느 교회에 다녔느냐 하는 것과 같은 가변적 진리를 말합니다.
본질적인 진리를 위해서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고, 비본질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서로 화합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짐승의 수(666)’와 같은 단어를 하팍스레고메나(Hapaxlegomena) 라고 합니다.
하팍스레고메나는 성경에 단 한번 사용된 단어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단어를 해석할 때는 항상 두 가지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문맥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둘째는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짐승의 수라고 알려진 것들은 ‘네로, 히틀러, EEC(EC, EU, 현재 27개국), 바코드’ 라고 하였고 최근에는 ‘베리칩(Veri Chip)’ 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666은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는 것’ 이라고 합니다(계 14:9, 11).
성경의 흐름은 구속사라고 하며, 구속사란 어린 양의 피와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친다면 베리칩이 예수 보다 더 월등하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가르침을 과연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행 16:31, 4:12, 요일 5:11-12, 요 8:32, 3:16, 5:24.)
○테무라(Temura) : 철자 재배열 방법
테무라는 ‘교환’이란 뜻으로, 야훼 같은 신비한 이름이나 히브리어, 그리스어 알파벳 문자를 보다 복잡한 법칙에 따른 철자를 상호 치환과 결합 등을 통해 그 상징적 의미를 읽어내는 신비수학.
즉, 한글로 ‘공’ 글자를 뒤집으면 ‘운’ 이라는 글자가 나오는 것처럼 자모(字母)의 배열을 바꿈으로써 한 낱말을 다른 낱말로 바꾸고, 그 바꾼 말을 해석하는 방법을 말한다.
한 예로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neo는 one(단 한명)이 세상을 구한다라는 뜻에서 철자를?재배열하여 작명되었고,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루브르 박물관장 소니에르는 죽으면서 사건의 단서를 남길 때 테무라 방법을 사용했다.
한편 유대인들의 1년은 360일로, 7년은 2,520일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2,520이 수리적으로 4대 숫자(3, 7, 10, 12)를 곱한 수로 ‘연대적 완전수’라고 말한다. 즉 질적인 완전수 3과 영적인 완전수 7, 서수적인 완전수 10, 완전통치의 상징인 12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위대하며 기초가 되는 족장은 아브라함의 개명을 두고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세상의 수인 네 개의 문자로 되어 있던 아브람을 은혜의 수인 5수로 만들기 위해 하나의 글자를 삽입해 아브라함으로 개명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아브라함의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상징하게 한다고 말한다.
TIP. 타르굼(targguma)
“타르굼”은 번역, 해석이란 뜻으로, 히브리어 성경(구약성경)을 아람어로 의역 또는 알기 쉽게 말을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유대인 타르굼은 기원전 5세기경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인 아람어 밖에 모르는 바벨론 세대들을 교육하기 위해 작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내용이 느헤미야 8장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학사 에스라가 히브리어로 된 율법을 읽고 난 후, 레위인들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당시 일상 언어인 아람어로 번역해 설명하면서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타르굼으로는 온겔로스 타르굼, 차명 요르단 타르굼, 네오피티 타르굼 등이 있다. 수많은 타르굼 가운데 “온켈로스의 타르굼”은 다른 타르굼에 비해 다소 직역에 가깝지만, 유대교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번역본이다.
온전한 수로서 절대를 상징(17:13, 17). 그러므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
1/2 - 불안정과 일시성을 상징(8장 1절의 반시는 긴장된 한 순간을 의미).
1/3 - 8:7-12, 9:11
1의 파열된 수로서 전체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특히 나팔 재앙의 피해면적이 부분임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어 있다(8:7-12, 9:11).
1/4 - 6:8
1의 파열된 수로 보다 적은 일부분을 가리킨다. 넷째 인의 피해면적이 나팔재앙의 피해면적보다 더 부분적임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6:8)
2 - 9:12, 11:3,10, 12:14, 13:11, 19:20. 11:3, 4. 신 17:6, 19:15
실제 수이면서(9:12, 11:3,10, 12:14, 13:11, 19:20) 상징적인 수이다(11:3, 4). 증인의 완전함을 나타낸다. 2는 구약에서 증인의 숫자이다(신 17:6, 19:15) 예수께서 제자 파송 때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심, 변모 때에 모세와 엘리야의 나타남, 빈 무덤에서의 두 천사, 승천할 때의 두 천사 등은 이를 암시한다.
3 - 6:6, 8:13. 9:18, 16:13,19, 21:13
수량을 나타내면서(6:6, 8:13) 하늘의 수 신적인 수를 암시한다(9:18, 16:13,19, 21:13). 삼위 하나님.
3과 1/2 - 11:9, 11. 12:14,
요한계시록에서 '삼일 반'(11:9, 11) "한 때, 두 때, 반 때,"(12:14)로 나타나며 한이레의 절반 즉 완전의 파열, 불안정한 때, 짧은 기간을 말한다. 이는 다니엘서의 "두 이레의 절반"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기서는 "삼년 반"을 상징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제한된 환난기간을 상징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숫자가 요한계시록에서 문자적일 수 없음은 저자가 이를 42개월(11:2, 13:5), 1260일(11:3, 12:6)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42개월 혹은 1260일이 문자적일 수 없음은 저자가 이를 열흘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2:10)
4 -
수량을 나타내면서도(4:6, 5:6, 6:1), 땅의 수, 가시적인 피조물을 상징하는데 쓰였다. 네 생물(4:6) 땅의 네 모퉁이, 땅의 사방의 바람(7:1), 네 천사(7:2), 네 뿔(9:13), 사방(20:8)등
5 -
문자적이면서(9:5, 17:10), 10의 절반으로 상징성이 있다. 세상 만수 10의 파열은 제한된 재앙의 기간을 나타낸다.
6 -
신적인 완전수 일곱에 하나 부족한 수로서 불완전을 상징한다.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가 있다고 했는데(4:8) 이는 실제 모습을 가리키면서(사 6:2)동시에 피조물임을 가리킨다.
7 -
문자적이면서(1:4, 5:1), 완전을 상징한다. 일곱 영(1:4), 일곱 등불(4:5), 일곱 뿔,일곱 눈(4:6), 일곱 무리(10:4), 일곱 머리(12:3), 일곱 면류관(12:3),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 7은 3+4, 즉 천지 합수로서 신적인 세계의 한 세트 혹은 한 싸이클 이다.
8 -
일곱을 한 '싸이클'로 볼 때, 여덟은 다음 사이클의 첫 수이므로, 이는 새로운 국면의 시작을 의미한다. 17:1절의 "여덟째 왕"은 문자적인 "여덟째 왕"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의 박해를 시작하는 왕임을 나타낸다.
10 -
세상의 만수로서, 세상에서는 10을 한 주기의 끝으로 본다. 제한된 완벽함을 상징한다. 열흘 동안의 환난(2:10), 열 뿔(12:3, 13:1, 17:7), 열 면류관(17:3), 열 왕(17:12) 등
12 -
천지 승수로서(3☓4=12) 완전수,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이다. 전체 혹은 완전함을 상징한다. 구약에서 12는 이스라엘의 12지파이고, 신약에서 12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숫자이다. 그리하여 본서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과 관계된 사실들과 관련되어 나온다. "열두 별"(12:1), 열두 문, 열두 천사(12:12), 열두 기초석, 열두 사도, 열두 사도 , 열두 이름(21:14), 열두 문, 열두 진주(21:21), 열두 실과(22:2).
24 -
12+12로서, 구약과 신약을 통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나타내는 완전수이다. 이십사 보좌(4:4), 이십사 장로(4:10, 5:8, 11:16등)
42 -
'삼일 반' 혹은 '한 때, 두 때, 반 때'를 개월 수로 나타낸 수이다. 묵시문학의 시간법은 1일을 1년으로 계산하고(민 14:34, 겔 4:6), 1월을 30일로 계산한다(창7:11-8:4). 그리하여 삼일 반은 3년 6개월, 즉 42개월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당하는 시간을 가리킨다.
144 - 21:17
12☓12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포용할 만한 크기를 나타내는 숫자이다. 21장 17절에서는 성도들의 성 즉 새 예루살렘 성곽의 높이가 144규빗 이라 했다. 완전을 상징하는 표시이다.
666(13:18)
이것이 상징인지 아니면 어떤 한 인간의 암호인지 논의가 되어왔다. 상징일 경우 이는 6이 100배, 10배, 1배 있는 것으로 완전한 불완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의 수, 세상적인 수, 마귀적인 수라 생각한다.
암호일 경우 이를 한 인간의 암호로 보고 그 인간의 이름을 지칭하기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본다. 상징보다 암호가 본문의 맥락에 합당한 견해이다. 저자는 자신이 666을 한 인간의 수 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66은 누구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다.
a) 네로라는 설,
b) 테이탄(헬라의 신화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거대한 신)이라는 설,
c)로마설('라틴'이라는 말을 수치로 계산했을 경우),
d)도미시안 설 등이다.
이들의
이름을 히브리음역으로나, 헬라어음역으로 표기한 후 수치로 대입하면 다 666이 된다. 이들 중에 테이탄설은 요한이 갑자기
헬라신화를 인용했다는 의아심을 불러일으킴으로 부적절하다고 보며, 로마설도 사람이 아니라 그는 국가이고 또 신약 어디에도 로마를
라틴이라고 표기한 곳이 없기 때문에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네로설이거나 도미티안설이다.
계시록이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시기에 기록되었다면 이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서론에서 보았던 것처럼 당시의 박해는 거국적 이었다기 보다는 아직까지는 지엽적인 것이었기에 네로의 박해시가 이닌가? 하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었다.
한국 신화에 나타난 바다의 의미
신화는 공간이 주요하게 기능하는 서사이다.
인물의 자질이나 능력, 행위의 방향과 결과 등이 모두 공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서사 전개 역시 철저히 공간적으로 형성되며, 주인공들의 공간 이동 과정에서 이야기의 핵심 가치와 이념이 형상화된다. 한국
신화에서 신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장 대표적인 세계는 하늘이다. 신성함의 출처이자 지상의 인간이 모방해야 할 대상인 하늘은 인간
존재의 수직 축 방향의 위쪽에 위치한다. 지상의 인간의 수평축 방향에 있는 바다 역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제공하는 신화적 공간이다. 이 바다세계를 하늘과 인간세계와의 관계처럼 단선적인 ‘성(聖): 속(俗)’의 대립체계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인간세계와 구별되는 신이 한 세계 내지 신물과 이인이 존재하는 세계로 볼 수 있다. <송당본풀이>나
<심청무가>에 나타나는 용궁을 통해 바다세계의 신이 성이 잘 드러난다. 또한 바다는 세계를 구획하는 경계공간이
되거나, 인간과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매개공간이 되기도 한다. <가락국신화>와 <삼성신화>에 등장하는
신성한 존재의 배우자들을 통해서 그 같은 바다의 의미가 확인된다. 마지막으로 바다는 죽음과 추방을 의미하기도 하며 동시에 재생과
부활의 상징적 공간이 되기도 한다. <탈해신화>나 <송당본풀이>, <칠성본풀이>,
<심청무가>의 주인공들은 바다로 이동함으로써 기존의 삶이 부정되고 죽음을 맞지만 동시에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웃음소리가 나는 집에는
행복이 와서 들여다보고,
고함소리가 나는 집에는
불행이 와서 들여다본다.
받는 기쁨은 짧고
주는 기쁨은 길다.
늘 기쁘게 사는 사람은
주는 기쁨을 가진 사람이다.
어떤 이는 가난과 싸우고
어떤 이는 재물과 싸운다.
가난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많으나
재물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적다.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넘어졌다 일어나 다시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느낌 없는 책 읽으나 마나,
깨달음 없는 종교 믿으나 마나,
진실 없는 친구 사귀나 마나,
자기희생 없는 사랑 하나마나.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잡는 이는
똑똑한 사람이고,
비뚤어진 마음 그대로 사는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누구나 다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성인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스스로 과욕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돈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낮이 즐겁고,
육체로 결혼한 사람은 밤이 즐겁다.
그러나 마음으로 결혼한 사람은 밤낮이 즐겁다.
먹이가 있는 곳에는
틀림없이 적이 있고,
여광이 있는 곳에는
틀림없이 상처가 있다.
남편의 사랑이 클수록
아내의 소망은 작아지고,
아내의 사랑이 클수록
남편의 번뇌는 작아진다.
부부는 쇠사슬에 함께 묶인 죄인이다.
때문에 발을 맞춰 걷지 않으면 안 된다.
3주 관찰,
3달 사랑,
3년 싸움,
30년 동안 서로 참는다.
그리고 그동안 태어난 아이들이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미인은 눈을 즐겁게 하고,
아내는 마음을 즐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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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나팔, 대접, 화에 대한 도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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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인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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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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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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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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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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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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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인 |
일곱 나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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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인 |
첫째 나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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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나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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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나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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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나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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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나팔(첫째 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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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나팔(둘째 화) |
일곱 대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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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나팔(셋째 화) |
첫째 대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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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대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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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대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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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대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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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대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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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대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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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대접 |
1장의 개요
요한계시록 1장은 사도 요한이 ‘네가 본 것’을 기록한 계시록의 서론이다(1:19).
1장에서는
계시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과 그 계시를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준다. 이 계시가 참되고 진실하다는 근거는 계시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이 계시를 주신 이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데 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일에 두 가지
명심해야 할 일이 있다.
하나는 요한계시록의 내용 전부가 주의 재림 시에 실현될 종말적인 사건의 계시이기 때문에 인류의 종말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사실과,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주님의 계시를 통해서 주 재림에 관한 계시를 모두 증거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시대이건 이 계시 외에 다른 계시를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라도 흔들리면 요한계시록의 올바른 연구나 해석은 헤어 나올 길 없는 깊은 함정에 빠지거나 미궁에서 맴돌
수밖에 없게 된다. 1992년을 전후하여 기승을 부렸던 ‘시한부 종말론’의 경우, 이 두 가지 모두를 무시 한데서 초래된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종말에 성경에 계시된 계시 외에도 기도하는 종들에게 더 완벽한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고 주장한다.
인(印)의 역사는 요한계시록 6장에 등장한다.
인의 계시는 다른 계시처럼 독립적인 계시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종말
사건의 총론적 계시로 보여 주고 있다는데 특색이 있다. 이처럼 종말 사건의 총론적 계시가 6장에서 전개된다. 8장에서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이 7인의 사건이 7나팔로 전개되는 환난의 모습으로 보여 주신다.
나팔의 역사는 환난의 역사이다.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8장에서 보여 주시고, 다섯째부터 일곱째까지는 9장과 16장에서 보여 주신다.
대접의 역사는 종말적인 최종적 심판으로 보여 주신다. 이 일곱 대접 심판은 일곱째 나팔 사건을 의미한다.
화의 역사는 첫째부터 셋째까지 나온다. 화는 나팔과 연결 되어 나오는 계시인데 다섯째 나팔이 첫째 화, 여섯째 나팔이 둘째 화,
일곱째 나팔이 셋째 화가 된다. 이같은 서로간의 관계를 맥을 따라 이해한다면 요한계시록 해석에 크나 큰 도움이 된다.
다니엘서는 바벨론으로부터 페르시아, 헬라와 로마 제국을 거쳐 현재의 세계 질서가 이루어지고 마침내는 지구의 종말이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세계 역사의 대 파노라마를 예언하였다.
신약 성경의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 출생 이후부터 세계사와 교회사에 나타난 선악의 대쟁투와 특별히 세계 역사의 마지막에 나타날 사건들을 정확하게 예언하였다.
다니엘서가 바벨론 시대부터 그리스도 재림까지의 세계 역사의 흥망성쇠와 마지막 때에 생길 일을 기록하고 그 예언을 마지막 때까지 인봉하고 간수하라(단 12:4)고 한 반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고 하였다.
뉴욕나사렛교회
요한계시록 강해 도표 자료(2016-3-30)
교회 |
현재명 |
지명의 뜻 |
그리스도 |
특징 |
에베소 |
셀주크 |
인내 |
오른 손에 일곱별을 쥐고 |
정통적인 교회 |
서머나 2:8-11 |
이즈미르 |
몰약성 |
처음과 나중, |
가난하나 |
버가모 2:12-17 |
베르가마 |
높여졌다 |
좌우에 |
우상 숭배한 |
두아디라 2:18-29 |
아키사르 |
희생 |
하나님의 아들 |
악한 |
사데 3:1-6 |
살리히리 |
남은물건 |
하나님의 일곱 영과 |
살았다는 이름만 가진 교회 |
빌라델비아 3:7-13 |
알라세히르 |
형제우애 |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 |
연약하지만 |
라오디게아 3:14-22 |
라오디케아 |
의인 |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 |
부요하나 |
하나님은 지금도 신령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과 순종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기뻐하시며,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 형식적 예배보다 순종이 우선이다(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십니다(8(상))." 여기에서 말하는 악인은 악을 행하고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에 거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드리는 제사를 미워하십니다. 사랑과 순종이 없이 형식적인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며,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믿음이 없이 드린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선지자 사무엘도 사울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며,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순종이 없는 예배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배를 가증히 여기시며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직한 자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8(하))." 여기에서 '정직한 자의 기도'는 중심에서 나오는 순종과 헌신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형식적인 종교 예식보다 사랑과 순종이 낫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삼상 15:22; 사 1:11; 렘 6:20; 호 5:6; 암 5:22; 마 6:5,6).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진실한 사랑과 그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기뻐하시며,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며,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은 죄를 범하면 변명하지 않고 자기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를 받아주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정결하게 해주십니다.
적용질문: (창 4:3-7, 히 11:4)을 읽고 아벨의 제사가 열납되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되지 못한 이유를 말해보자. 우리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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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22
말세와 요한계시록
건전한 종말론적 신앙은 신자가 이 땅에 살면서 복음 전파와 그리스도의 형상 회복의 두 가지 소명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이다.
제3성전 건축설.
베리 칩(RFID) 소동.
블러드 문(Blood Moon. 피 빛 달) 현상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의 등장.
토라 뿌리 운동.
최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주요한 종말론적 현상들이다.
종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끊임이 없다. 미래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사람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좀 잠잠하다 싶으면 또 다시 새로운 종말론적 현상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달아오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열기가 식어간다.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의 긴장은 어느 때보다 팽팽하여 잠시도 숨 쉴 틈을 주지 않기 때문에 종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수시로 달아오르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는 냉전체계에서 벗어나서 문화충돌, 종교충돌, 인종충돌로 인해 갈등과 전쟁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세계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빈부 차이가 현저하여 전 세계 70억의 인구 중에 극빈층이 1/3을 점유하고 있다. 더군다나 라니냐와 엘 니뇨로 인한 기상이변으로 인해 홍수와 가뭄과 지진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현상은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마 24장 참조). 따라서 신자라면 우리가 사는 현세가 말세 그 중에서도 말세지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말세지말 이다, 말세가 가까웠다고 하면서 종말론적 현상들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지만 정작 말세를 당한 신자들이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안내는 드문 편이다.
기껏해야 일부 사교 단체에서 휴거의 날짜를 거짓 예언하여 추종자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요한계시록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악의 세력이 미치는 않는 어느 곳으로 피신하여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식량 등을 준비한다든가, 적그리스도가 아직 나타난 것도 아닌데 베리 칩을 받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메시아닉 쥬의 등장과 토라 뿌리 운동으로 인해 다시 한 번 교계에 조용한 파문이 일고 있다.
종말론에 대한 곱상치 않은 시선
그러나 종말론에 대한 대부분의 교인들의 시선은 곱상치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나름대로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 여태까지의 개인이나 우주의 종말에 관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열매가 좋지 않았다.
오래 전 한국에서는 다미회가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여 한 동안 교계를 시끄럽게 했고 미국에서도 심심찮게 종말론을 잘못 이해한 사이비 집단들이 집단 자살과 같은 끔찍한 일을 자행해왔고 수시로 시한부 종말론을 남발하여 ‘양 치기 소년과 늑대 이야기처럼’ 식상한 소재가 되어버려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말론에 대해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하기 쉽다.
둘째, 아직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얼마 전부터 데이빗 차라는 얼굴 없는 사람이 등장하여 수십 년 전에 유행했던 각종 설(說)과 ‘카더라(~라고 하더라) 내용’을 담은 도서들의 재탕을 출판하여 고전적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그는 특히 세계 정부와 666의 출현 및 프리메이슨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모 기독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고, 비록 거대한 음모가 있고, 이들이 주인 노릇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 때의 미혹에 더 이상 속지 말라는 것이 그의 말의 요지다. 음모론이든, 프리메이슨이든, 그들의 행동과 음모론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할 린지의 휴거를 통해 한국 교계에도 대중화하기 시작한 종말론(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핵심은 신자들이 재림 예수와 공중에서 만나는 휴거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영향으로 종말론에 대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을 마치 ‘휴거’(rapture)라는 절정을 향해 진행되는 한편의 파노라마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계 정부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지구상에 환란이 시작되기 전에 신자는 모두 공중으로 휴거 되어 예수님과 함께 ‘구름 극장’에서 편안히 앉아서 지상에서 벌어지는 소름 끼치는 7년 환난을 유유자적하게 관망하다가, 환난이 끝난 후 예수님과 함께 지상 재림하여 문자적으로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의할 때, 신자는 모두 휴거 될 것이므로 지상에서 일어나는 환난은 신자들과 상관이 없다는 잘못된 안도감을 주고 있다.
필자도 초기에는 할 린지의 휴거를 몇 번이나 읽어 보고 종말에 관한 영화도 보고 대부분이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이 지은 각종 도서나 차트를 보면서 종말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된 것이 너무나 기쁘고 동시에 소명감도 느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전파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신학교에 다니고 또한 성경을 자세히 읽고 묵상하면서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성경의 여러 부분과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따르는 많은 성령 운동가들도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한 ‘선교적 사명’은 강조하지만 신자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세워지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선교적 사명은 신자 각자가 그리스도의 형상 회복을 위한 전초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도 12제자들에게 단순한 전도가 아니라 전도한 후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지키게 하라는 ‘전도와 성화’의 포괄적인 명령을 내리셨다(마 28:18-20).
한국에는 선교 초기에 당시 미국에서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선교사들이 소개한 바람에 초기에는 교파를 가릴 것 없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C. I. 스코필드라는 평신도 변호사가 세대주의적 관점에서 스코필드 주석 성경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당시 정규 신학교 과정을 거치지 못한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의 교과서가 되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세대주의의 기적 중지론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종말론을 포함한 나머지 대부분의 세대주의 신학은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아직도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따르고 있다.
셋째, 한국 교회에서는 어느 틈엔가 천국 상급에 대한 설교나 가르침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신자는 다음의 구절들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늘 마음속으로 ‘내가 죽은 후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어떤 심판 이것은 구원 여부가 아닌 상급 심판을 받을까’를 염두에 두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0-15).
일부에서는 구원 자체가 ‘상급’이므로 ‘구체적 상급들’은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은 성경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물론 하나님이나 예수님 자체가 우리에게 가장 큰 상급이지만 ‘믿음의 행위’에 대한 상급은 사람마다 분명히 다르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고백만 하고 구원 받은 강도와 평생 예수를 위해서 살면서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과
천국 가는 신분은 동일하지만 상급은 전혀 다르다. 강도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지만 바울은 많은 상급을 받았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신자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신앙생활도 잘 하면서 성공도 하고 부요하게 살고 큰 사역도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자기 영광, 세상 영광에 빠져서 천국 상급을 까먹는 경우도 많다. 특히 큰 사역을 한 목회자들 중에서 세상에 살면서 사람 영광, 세상 영광을 너무 많이 받아서 상급을 다 까먹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도 많다.
왜 한국 교회에서 천국 상급에 대한 설교나 가르침이 사라졌을까?
교회의 세속화와 성령 운동의 잘못된 여파도 있다고 본다. ‘잘 살아보세’라는 경제 개발운동과 더불어 오순절 운동의 건강·축복 복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비판은 하면서도 너도 나도 따르게 되었다. 또한 성령 운동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already)을 강조하면서 눈에 보이는 ‘능력’과 ‘축복’을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not yet)인 ‘고난’과 ‘회개’는 물론 ‘천국 상급’에 대한 언급은 인기 없는 주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후자를 더 강조한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기 때문이다(고후 4:18).
마지막으로, 계시록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계시록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계시록의 해석이 너무나 다양하여 어떤 종말론이 확실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실로 한국은 ‘계시록 춘추전국 시대’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교계는 20세기 초에 한국에 건너 온 선교사들의 영향과 할 린지를 통해 대중화 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 환난 및 천년 왕국 이전 재림)을 주로 세대주의자들과 오순절 계통 교인들이 따르고,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 Pre-millennialism. 환난 후 및 천년 왕국 이전 재림)은 많은 장로교인들이 따르고 있다. 그러다가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출신들이 학계에 대거 등장하면서, 어거스틴 이래로 루터,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이 '문자적 천년왕국'을 부인하는 무천년설(Amillennialism)(또는 성령 강림을 통해 실현된 천년왕국설(Realized Millenialism)이라고 부르기도 함)이 보수 장로교의 대표적인 종말론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성령 운동의 대부인 피터 와그너는 한때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였는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도미니언’ (Dominion. 정복. 창 1:28이 말하는 문화명령의 실천)과 사회를 변혁하는 ‘7대 산(영역)’을 강조하면서 보수적 후천년설(Historic Post-millennialism)을 지지하는 쪽으로 바꾸어졌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진다고 가정하지만 후천년설은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지다가 마침내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고, 유대인이 회복되고, 유례 없는 영적 번영을 누리는 천년 왕국이 도래하며, 이후 잠시의 배교를 겪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주장한다.
후천년설은 원래 세상은 진보한다는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청교도인 존 오웬, 조나선 에드워즈 및 찰스 핫지와 같은 개혁주의자들이 주창해 왔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세대주의 신학과 함께 20세기 초기에 인기를 끌면서 미국을 휩쓸었고 한국도 그 영향을 받아서 지금도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종말론이 되고 있다.
참고로 골수 기적중지론자인 미국의 존 맥아더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이다. 그는 기적중지론을 주창하기 위해서는 개혁주의자 행세를 하다가 종말론에 대해서는 개혁주의의 언약 신학(Covenant Theology)과 대척점에 있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주창하고 있다. 대부분의 개혁주의자들이 역사적 전천년설이 아니면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것과 대조된다.
또한, 맥아더는 7년 환난 중에 베리칩을 받더라도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극성파들의 주장을 부인한다. 참고로, 한국의 대부분의 장로 교단은 존 맥아더와 동일한 견해를 제시한다.
‘정치는 싫지만 내가 투표를 하지 않으면 더 나쁜 사람에게 휘둘리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장로교 대국인 한국에서 장로교는 칼뱅이 요한계시록 주석을 쓰지 않아서인지 절대 다수인 장로교에서 종말론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인 시한부 종말론이나 극단적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휘둘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한부 종말론이나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활개를 칠 때마다, 미국의 출판계에서 대중적 차원의 세대주의적 관점의 종말론적 자료는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데 비해, 장로교적 관점은 ‘그런 것이 신학적으로 틀렸다’고 지적만 할 뿐 사람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대중적 출판물들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손 쉽게 접할 수 있는 도서나 세미나나 유튜브(YouTube)를 통한 자료를 통해 관심과 스릴을 제공하는 잘못되거나 극단적인 종말론에 평신도는 물론 목회자들도 쉽게 물드는 것이다.
더군다나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에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유사한 견해를 가진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기 시작하고, 김종철 감독의 다큐 물인 『제3성전』이 세대주의 전천년설과 유사한 종말론을 암시하면서 한국 교계에 다시 한번 종말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는 여느 개신교처럼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유대인으로서 주로 유대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만, 메시아닉 쥬의 구약적 율법의 회복에 호감을 가진 비 유대인들 중 한국 교인들도 동참하고 있다. (‘메시아닉 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필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종말론과 계시록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으며, 부족하나마 나름대로 이런 문헌과 저런 기록을 통해 종말론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으며, 건전한 종말론을 위해서는 종말에 대한 다양한 해석법을 공부하여 객관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계시록의 해석 관점
종말론과 계시록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계시록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해야 한다. 계시록의 해석이 상당히 복잡한 것 같지만 해석의 몇 가지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면 생각했던 것보다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상징과 비유와 숫자가 많은 계시록의 특정한 개별 구절의 해석이 쉽다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한 구절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의 해석을 어렵게 보는 이유는, 계시록을 구성하는 전체적인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어떤 책이든 그 책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그 책의 기록 특징을 살펴봐야 한다. 계시록의 기록의 특성을 중심으로 한 일반적인 해석 원칙은 다음과 같다.
계시록은 예언서이다(계 1:3; 22:6, 18)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forth-telling)과 앞으로 이루어 질 일(fore-telling)을 기록한 것이다. 여느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예언서인 계시록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며 동시에 앞으로 될 일을 기록한 책이다.
계시록은 서신서이다
계시록은 신약 성경의 서신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서언, 본문, 결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계시록은 서신서이기 때문에, 교회 시대의 어느 특정한 한 세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 시대 전체를 위한 책이다.
따라서 계시록 4장 이후는 교회의 휴거 이후 이 땅에서 일어나는 7년 대환란을 묘사한다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계시록의 말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 이외의 6교회와 계시록 5-22장까지는 신자들과는 상관이 없는 내용이 되고 만다.
그 결과 기록 당시 로마 당국의 핍박을 받은 신자들, 일본의 전제주의나 공산주의 치하에서 신앙으로 인해 핍박 받은 한국의 신자들, 지금도 적 그리스도와 같은 지도자나 제도에 의해 고통 받는 북한의 신자들, 기독교를 노골적으로 대적하고 핍박하는 이슬람 국가의 신자들과 계시록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다만 앞으로 다가 올 ‘7년 환난’이라는 가상의 기간 동안 신자들이 핍박 받는 것에만 적용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이런 해석은 다음에 언급하는 미래 해석법의 전형적인 오류라고 하겠다.
계시록은 묵시 문학의 형태를 지닌다
묵시 문학이란 주전 200년에서 주후 100년 사이에 성행하던 유대인의 문학 형식이다. 묵시문학의 특징은 유명한 성경 인물의 실명을 사용하여, 세상의 종말을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묵시문학은 현재의 인간 역사(history)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강조하며, 두 개의 엄청난 초자연적인 세력―주로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을 기록하여, 악하고 불의한 현 세대와 의롭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내용들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마치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모처에 재림하신다는 식의 주장은 삼가 해야 한다. 계시록의 핵심은 비록 신자들이 현세에서는 사탄의 공격으로 고통을 받지만 종말에는 하나님이 악한 세대를 멸하시고 의롭고 영화로운 세대를 만드신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계시록은 예언서이자 서신서이며 묵시 문학의 형태를 취했다는 원칙을 고려할 때, 계시록은 핍박과 고통과 환란에 처한 신자들에게, 비록 잠시 악이 성행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승리하신다는 소망을 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로마 제국의 핍박을 받은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일제 치하에서 고통을 받은 한국의 신자들은 물론 지금도 도처에서 핍박과 환란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가장 위로와 소망을 주는 책이 계시록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이런 다양한 관점이 아니라 한 두 가지 관점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그 뜻이 왜곡되거나 과장될 공산이 크다고 하겠다.
계시록의 여러 가지 해석방법
계시록을 해석하는 전통적인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계시록에 대한 해석법이 다양하기 때문에 해석자가 이 네 가지 중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종말론에 대한 견해가 달라질 수 있다. 이는 마치 어떤 색깔의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는가에 따라 사물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미리 지적하지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나 이에서 파생되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절대 다수가 미래 해석법을 취하면서, 극단적이고 경직적 문자적 성경 해석에 의해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이분법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교회’와 ‘유대인’의 구원을 구분하지 않는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대체신학(Replacement theology)이라고 비판하는데, 교부들이나 개혁주의자들 중에서도 로마서9-11장에 근거하여 교회의 구원과 달리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계시록을 해석하는 대표적인 해석 방법은 다음과 같다.
과거 해석법
계시록의 내용이 초대교회 당시에 모두 이루어졌다는 해석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로 하는 주장이다.
이런 방법으로 해석하면,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의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의 핍박에서 구원된다는 소망을 주는 책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계시록 13장의 짐승은 로마제국으로, 로마 황제 숭배를 촉구하는 사교의 제사장을 거짓 선지자로 이해한다.
당시 연약한 교회는 로마제국의 위협으로 인해 박멸 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요한은 이런 위협에 처한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곧 구원하실 것이므로 끝까지 신앙을 지키라고 기록한 책으로 이해한다.
역사 해석법
계시록을 초대교회부터 대종말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시대 전체에 대한 기록으로 이해한다. 이는 종교개혁가들이 주로 한 주장인데 계시록의 해석을 유럽의 역사와 대비하여 해석한다. 이 해석의 주요 특징은, 천주교 가톨릭 교회는 짐승이고 교황은 거짓 선지자라고 해석한다.
이상주의 해석법
역사적인 해석법이 계시록의 기록과 구체적인 역사를 대비시켰다면, 이상주의 해석법은 계시록의 특정한 사건들을 상징적으로 이해하여 교회시대 전체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이라는 일반적 원칙에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핍박은 어느 한 특정한 시대나 한 사건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시대 전체에 걸쳐 교회를 핍박하는 적대적인 세력 전체를 상징한다. (예, 짐승은 로마 제국, 천주교, 히틀러의 3제국, 공산주의. 이슬람 국가 등).
미래 해석법
할 린지를 위시한 세대주의자들이나 오순절주의자들이 주로 하는 주장이다. 특히 세대주의 전천년주의자들은 계시록의 7교회는 초대교회(에베소교회)와 말세의 교회(라오디게아교회)를 시간 순서로 기록한 것이며, 4장 이후는 교회가 휴거된 이후 일어나는 7년 대환란을 기록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주장대로 한다면 계시록은 초대교회의 핍박 받은 신자들이나 일제 시대에 고통 받은 한국인 순교자들은 물론 지금도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국가에서 핍박을 받는 신자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책이 되고 만다. 계시록이 교회 시대의 신자들 전체를 대상으로 기록된 서신서라는 사실에 위배된다.
이 주장의 주요 특징은 ‘교회’와 ‘이스라엘’을 날카롭게 구분하여, 구약에 기록된 미래적인 예언은 교회와는 상관없는 이스라엘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여 이것이 천년왕국에서 문자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계시록 해석의 대원칙이 네(요한)가 본 것과 (과거)과 이제 있는 일과(요한의 현재) 장차 될 일(요한 이후의 장차) 임을 감안한다면, 계시록의 대부분을 대종말의 미래 사건으로만 해석하는 미래 해석법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종합 해석법
계시록은 과거 해석법, 역사 해석법, 이상주의 해석법 및 미래 해석법 전체의 종합적인 원칙 하에 해석되어야 한다. 계시록은 초대교회 신자들은 물론 교회시대―유럽은 물론 전세계의 교회―전체를 통해 모든 신자와 교회를 핍박하는 모든 세력들에게 적용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7 교회는 시간 순서가 아니라 교회 시대 전체를 대표하는 교회이다. 7 교회는 요한 당시에 실제로 존재한 교회이며, 오늘날의 교회 또한 7 교회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즉 오늘날의 교회 중에서도 에베소 교회, 사데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첫사랑과 뜨거움을 잃어버리고 신앙의 형식주의, 관념주의, 전통주의에 젖은 소위 말하는 '죽은 정통의 교회’가 있고, 또한 버가모나 두아디라교회와 같은 ‘이단성 있는 교회’도 있다. 예수님은 죽은 정통의 교회나 이단성 있는 교회를 똑같이 칭찬하시고 똑같이 책망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물론 빌라델비아 교회나 서머나 교회같이 칭만만 받는 교회도 있다.
시간 순서냐, 주제별 순서냐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시간 순서로 해석할 것인가, 동일한 사건의 반복으로 해석할 것인가?
*세상의 역사관과 기독교적 역사관
세상의 역사관은 순환론적이고 반복적인 역사관이지만 기독교의 역사관은 창조와 진행과 대종말을 향해 진행되는 일직선적 역사관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역사관에 반복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 만사가 대종말을 향해 일직선으로 진행되지만 대부분의 종말론적 사건들이 반복되면서 종말을 향해 진행된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질병과 핍박과 환란과 같은 종말론적 현상들은 예수님의 초림 이래로 지금까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꾸준하게 반복되면서 진행되어 왔고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세대주의적 천년설은 직선법 역사관을 강조하면서 이런 현상들이 마치 대종말의 때에만 일어나는 것처럼 주장한다.
미래 해석법은 계시록의 사건을 시간 순서에 따라 해석하기 때문에 계시록 4장 이후는 (휴거 당한) 신자들과는 상관이 없는 내용이 되고 만다. 계시록의 4장에서 20장까지는 이 땅에 남은 불신자들에게 임한 7년 대환난을 묘사한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록은 시간 순서가 아니라 동일한 사건의 반복을 기록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계시록은 전체적으로 7개의 동일한 사건의 반복을 기록한 책인데, 초기부분은 초대교회에 대한 기록이 많고 후반에 갈수록 대종말에 관한 기록이 많다. 이런 기록법을 "점진적 병행법"(Progressive Parallelism)이라고 한다.
즉 계시록의 1-3장, 4-7장, 8-11장, 12-14장, 15-16장, 17-19장, 20-22장은 모두 동일하게 초대교회와 종말의 사건을 기록하는데, 초기의 장들은 초대교회 시대의 사건을 보다 자세히 기록하고 후기의 장들은 종말의 사건을 보다 자세히 기록한다. 계시록의 큰 사건 하나 하나가, 비록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이 성행하여 신자들이 핍박과 고통을 받지만 종말에는 의인이 반드시 승리하고 악인은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계시록은 일부에서 말하듯 휴거에 동참한 신자들은, 불신자들이 지상에서 7년 동안 대환난의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예수님과 함께 구름 극장에 앉아 유유자적하는 신앙생활을 그린 것이 아니라, 교회 시대 전체를 통해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적대적인 세력의 핍박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절개를 버리지 않은 신자들이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는 소망과 위로의 책이요 찬양의 책이다. 신약에서 유독 계시록에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자주 기록된 이유이다(계 4:8-11; 5:9-14; 7:9-12; 11:16-18; 15:2-4; 19:1-8).
"할렐루야 구원과 능력과 영광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 .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는도다"(계 19:1, 6). *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23
요한계시록과 천년왕국
-재림 전 천년왕국이냐, 재림 후 천년왕국이냐-
종말론은 육신을 가진 성도들이 천국을 사모하는 것과 동시에 이 땅에 살면서 가장 관심을 가지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종말론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고 이단들이 가장 많이 오용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중에서도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대중적으로 가장 보편화된 종말론이다.
언제가 세상의 종말인가?
지난 글에서 이미 밝혔듯이 예수님이 초림하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 하신 후 모든 육체-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이래로 종말은 시작되었다. 성령을 부어주심은 종말론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행 2:17).
종말론적인 현상(들)인 전쟁과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과 핍박은 예수님의 초림 이래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로마 시대에 기독교를 가장 극심하게 핍박한 네로 황제(A.D. 54-68)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A.D. 8-96), 서기 79년 폼페이 시를 초토화한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 유럽 인구의 삼분지 일에 해당되는 2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흑사병(1347년 시작), 가히 아마겟돈 전쟁이나 곡과 마곡의 전쟁이라 할만한 제1,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그런데 극단적 종말론자들은 이런 사건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는다. 과거에 일어난 이런 재앙들에 대한 관심은 없고 마치 예수님의 재림 즈음에 일어나는 현상들만 종말론적 현상인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예수님은 종말에는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겠지만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고 말씀하셨다.
여러 가지 천년왕국설
천년 왕국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다.
천년 왕국설은 계시록 20:1-6의 ‘천 년’을 문자적으로 보느냐 상징적으로 보느냐, 천년 왕국 이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느냐, 이후에 재림하시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로 갈라진다. 천년 왕국이란 현세와 내세 사이의 과도기적 세상으로 그리스도와 성도가 통치하는 이상적인 세상을 말한다(사 11:6-9, 65:18-25, 겔 37:24, 슥 8:12, 14:17-19, 암 9:13).
•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
후천년설은 세상이 진보하고, 개선되다가 마침내 지상 낙원이 된다는 주장이다.
-자유주의적 후천년설
예수는 하나님이나 우주의 주인이 아니라 ‘도덕적 모범’이며, 세상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가 쌓이면서 점점 좋아지다가 마침내 지상 낙원인 천년 왕국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또는 보수주의적 후천년설
영적 부흥과 세상의 진보로 인해 문자적 천년 왕국을 누리다가, 잠시 후 짧은 배교의 시기 즉 선악 간의 극심한 전쟁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그리스도의 재림, 성도의 부활, 최후의 백보좌 심판으로 세상의 역사는 마무리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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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의 점진적 향상. 복음의 확산으로 인해 세상에는 악의 영향이 점차적으로 감소된다.
(2) 천년 왕국. 복음의 세계 전파로 인류 대부분이 신자가 되는 이상적 사회를 이룬다.
(3) 대배교와 대환난. 천년 왕국이 끝날 즈음에 결박되었던 사탄이 잠시 놓임을 받아서(계 20:3) 참 신자가 되지 못한 자들을 하수인 삼아 이 세상을 어지럽힌다. 이를 칠 년 아마겟돈 전쟁, 곡과 마곡의 전쟁으로 표현한다.
(4) 예수님의 재림. 대환난의 절정기에 재림하신다.
(5) 성도들의 대부활. 모든 성도들이 부활한다.
(6) 대심판(백보좌 심판). 악인들에 대한 공의의 심판으로 영원한 형벌이 주어진다.
(7) 새하늘과 새땅. 대심판 후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후천년설(後千年說) 평가
자유쥬의적 후천년설은 일반 역사와 조화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지나친 인본주의적 사고와 낙관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편 보수적 후천년설은 계몽주의와 이성주의와 과학주의가 팽배하던 시기에 많은 청교도들과 개혁주의자들(John Owen, Jonathan Edwards, Charles Hodge, Benjamin Warfield 등)이 영적 부흥과 사탄의 세력의 점진적 약화로 인한 낙관적인 미래를 꿈꾸면서 후천년설을 주창해왔다. 그러나 제1차 대전으로 인해 비관적 미래관이 팽배해지자 인기가 시들해졌다.
그런데 최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고, 일터 사역을 통한 ‘7대 산(영역)’의 정복을 통해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론을 지향하는 성령 운동의 대부인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이전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버리고 보수적 후천년주의자가 되었다.
•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그리스도가 재림 하신 후 문자적 천년 왕국이 실현되어 그리스도와 더불어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천년 동안 왕노릇 한다는 견해이다.
전천년설에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역사적 전천년설이 있다.
- 세대주의적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
세대주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7단계의 세대’로 구분하고 그 마지막에 천년 왕국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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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공중 재림은 모든 사람이 보는 지상 재림 이전에 성도들만을 위한 비밀스런 재림이다.
(2) 성도의 부활과 변화 및 휴거. 이미 죽은 성도는 부활하고, 살아서 재림을 맞은 성도는 순간적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에게로 들림을 받는다. 세대주의자들 중에서도 휴거에 대한 4가지 다른 견해가 있지만 환난 전 휴거설이 가장 대중적이다.
(3) 어린양의 혼인 잔치. 공중으로 휴거된 성도들과 그리스도가 함께 잔치를 벌인다. (2)(3)(4)는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4) 복음의 재전파와 이스라엘의 회심. 한편 지상에서는 휴거되지 못한 자들에 대한 복음 전파와 이스라엘의 대 회심이 일어난다.
(5) 대환난과 적그리스도의 출현. 7년 동안 지상에 대환란이 일어난다. 비교적 온건한 전3년 반의 환란기에는 복음 전파와 이스라엘의 대회심이, 극심한 후 3년 반의 대환난기에는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세계 정부의 출현으로 인한 대환난이 일어난다.
(6)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7년 대환난이 끝난후, 휴거되었던 성도들과 함께 지상으로 재림하신다. 이때 그리스도는 대환난 때 죽은 성도들을 부활시키고 아마겟돈 전쟁을 통해 적그리스도를 멸망시키고 사탄을 천년 동안 감금한다.
(7) 천년 왕국 건설. 성전 제사가 회복되지만 구원을 위한 제사가 아닌 기념을 위한 제사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환난 기간 중 회심한 유대인이 주체가 되어 천년 동안 다스린다.
(8) 사탄의 일시적 석방. 천년 왕국 마지막 즈음에 결박되었던 사탄이 잠시 풀려남으로써 혼란과 무질서가 있다.
(9) 곡과 마곡의 전쟁. 사탄의 사주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문자적 의미의 대전쟁이 일어난다.
(10) 사탄의 멸망. 사탄이 결국 불못에 던져지며 영원토록 이곳에 머문다.
(11) 악인의 부활과 대심판. 성도의 부활보다 천년 늦게 사망의 부활을 통해 지상에서 지은 범죄에 대해 심판 받는다.
(12) 새하늘과 새땅. 악이 완전히 제거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리스도의의로 힘 입은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
*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평가
상징과 암시가 많은 계시록을 단순하게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호기심은 충족시킬 수 있으나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만든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과 천년 왕국 사상은 원래 구약과 신약의 중간 시대에 유대교(Judaism)가 묵시적 문학을 통해 내세운 주장이다. 유대인들은 현세와 내세를 구분하면서, 내세는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어 이스라엘 국가가 재건되는 황금 시대를 누린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초대 교회의 많은 교부들도 유대교의 전천년설과 지상 왕국설(천년 왕국)을 수용했다(Justin Martyr, Irenaeus, Tertullian 등). 그러나 반(反) 유대주의가 심해지면서 어거스틴(Augustine)은 무천년설로 돌아섰다. 그러다가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다시 세대주의 신학과 결합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1830년대에 영국의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1)가 주창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평신도 변호사인 C.I. 스코필드(C.I. Scofield)가 『스코필드 주석성경』을 통해 대중화시킨 주장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흠집 투성이인 이 주장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20세기초에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성행하면서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때에 근본주의 신학과 함께 전천년설의 종말론을 가르치는 스코필드의 주석성경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가 되어 전 미국에 급속히 전파되기 시작했다.
근본주의 신학(Fundamentalism)이란 20세기초 유럽과 미국에서 급격하게 확산되어 가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기 위해, 보수 장로교, 침례교 및 기타 교파들이 1878-1897년에 걸쳐 개최된 미국의 나이아가라 성경 컨퍼런스(Niagara Bible Conference)에서 채택한 5가지 근본 교리 즉 성경의 무오류성,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 예수님의 육체 부활 및 그리스도의 재림에 기초한 신학을 말하며 이런 교리를 지지하는 사람을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s)라고 부른다.
또한 20세기 초에 오순절 운동이 시작되면서 정규 신학과정을 거치지 못한 오순절주의자들이 스코필드 주석성경을 통해 신학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세대주의의 기적중지론은 무시했지만 종말론은 물론 다른 신학은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군다나 1960년대의 중동 전쟁을 계기로 온 세상이 제3차 대전 발발의 두려움으로 인해 불안해하고 있을 때, 철저한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근거한 할 린지(Hal Linsey)의 The Late, Great Planet Earth와 『휴거』(Rapture)가 종교분야 서적으로는 드물게 New York Times의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천 만 부가 팔리면서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가장 인기있는 종말론이 되었다.
이후 휴거, 7년 환란, 666, 세계 정부를 통해 세상을 지배하는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강조하는 세대주의 종말론은 세상에서 종말론적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고개를 내밀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몇 년 전만 해도 팀 라헤이(Tim Lahaye)와 제리 젠킨스가 1995년부터 공동 저술한 ‘레프트 비하인드’(Left Behind. 휴거되지 못하고 남겨짐)는 12개의 제목으로 저술되었는데 누적 판매 수가 6500만부가 팔릴 정도로 또 다시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할 린지의 저서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세대주의적 천년설에 근거한 저술들이 어지간하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기 때문에, 많은 세대주의자들이 걸핏하면 종말론적 현상들-블러드 문, 베리 칩 등-관련 저서를 출판하여 돈 방석에 앉고 있다. 한때 미국에서 블러드 문(Blood moon)에 대한 저서들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자 여기저기서 재탕 삼탕의 책들이 출판되어 양식 있는 자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데이빗 차의 이런 류의 저서들이 꽤나 많이 팔린 것 같다. 이런 류의 책들은 마치 탐정 소설이나 엽기적 소설처럼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잘 팔리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종말론에 대한 건전한 성경적 지식을 갖고, 종말론적 삶을 살면서 자신의 삶이나 내면을 살피기 보다는 매스컴을 타는 각종 종말론적 현상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신의 내면 정화를 정당화하려는 성향이 다분한 것 같다.
그러나 필자도 수십 년 동안 종말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열풍을 관찰해 왔지만, 종말론적 현상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갖고 휴거의 시점을 연구해 본 들, 본인 자신의 삶의 변화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건전한 종말론은 종말론적 현상(들)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달란트 비유에서처럼(마 25:14-30) 이 땅에 사는 동안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핍박과 환란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이지(마 24:9-13), 센세이셔널한 종말론적 현상이나 시한부 종말론에 부화뇌동하여 정상적인 삶을 내팽개치고 교회에 모여 기도만 하거나 환란의 불똥이 튀지 않는 모처로 피신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건전한 종말론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면서(살후 3:6-15), 불신자를 전도하고 주님 만날 것을 사모하면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정결하게 단장하는 일에 매진하게 한다(살전 4:3-6; 5:23; 요일 3:2-3; 벧전 1:13-16 등).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치명적인 약점은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 내용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제이 아담스(Jay Adams)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사팔뜨기 눈을 하면 동일한 물체가 두 개로 보이듯,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을 단어가 다르면 개념도 다른 것처럼 해석하여, 이스라엘과 교회가 다르고, 여호와의 아내와(호 2:2) 어린양의 신부가(요 3:29; 계 19:6-8) 다르고, 여호와의 날과(사 13:6,9; 겔 13:5,30:3; 암 5:18,20 등) 그리스도의 날이(고전 1:8; 빌 1:10; 2:16) 다르고, 예수님의 공중 재림(마 24:31; 살전 4:17; 고전 1:7 등)과 지상 재림이 다르다는 희한한 해석을 하게 된다.
물론 성경은 문맥에 따라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을 병행해야 하지만 세대주의는 특히 구약 성경의 예언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은 신약의 ‘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모두 혈통적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한다. 그것도 예언의 시점에서 가까운 과거가 아니라 멀리 있는 대종말의 ‘천년 왕국’에만 해당되는 예언으로 해석한다.
그 결과 신약의 교회 시대는 구약의 예언과는 상관이 없는 (괄호 안의 시대)이므로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때에 교회가 휴거되고 난 후 혈통적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기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대로 하면 교회는 벌써 휴거 되었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휴거된 이후 7년 환난 기간 중에 유대인들이 본격적으로 회심하기 시작하는데, 교회가 휴거되기 전인 1960~1970년대부터 유대인들이 대거 회심하면서 메시아닉 쥬가 탄생된 것과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와 이스라엘에 대한 평행적 이분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일자 일부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교회 시대’에 ‘적용’되었거나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지만 천년 왕국 시대의 유대인을 통해서 완전히 성취된다는 점진적 세대주의(Progressive Dispensationalism) 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예언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14; 28-29).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분이 없어졌다.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5-16).
히 12장이 말하는 시온 산과 하늘의 예루살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확대된 개념이다.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3).
신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이다(엡 2:16; 롬 12:5; 고전 12:27; 엡 1:23).
*숫자의 ‘문자적 해석’의 결함
세대주의는 성경의 숫자를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성경 시대 전체를 7천 년으로 간주하여 6000년은 이미 지났으므로 교회가 곧 휴거하고 지상에서 7년 환란이 끝난 후 문자적인 1000년 왕국이 도래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말하는 천년 왕국은 ‘부활하여 썩지 않는 몸을 가진 성도’와 구원은 받았지만 ‘자연적 육체를 가진 유대인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불완전한 세상을 다스리는데 유대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시한부 종말론이 극성을 부리는 이유는 성경의 숫자를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이 생각하는 시점과 꿰 맞추다 보니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지만 아직도 인터넷이나 유투브(You Tube)에 휴거 날짜를 제시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때와 시는 예수님도 모르신다는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있는 신자들에게 그 날은 도적같이 돌발적으로 불현듯 임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때는 모르지만 반드시 일어날 일로 기대하고 있었던 일로 받아들이게 된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4-6). 그러므로 성경의 숫자 해석에는 각별한 유의가 필요하다.
세대주의자들은 역사적 숫자와 묵시적 숫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문자적으로 해석하니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된 70년은 역사적 숫자, 문자적 숫자이지만 다니엘이 말하는 7이레, 62이레 및 한 때 두 때 반 때 즉 ‘3때 반’을 한 때를 일 년으로 가정하여 3년 반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계시록에 나오는 14만4000명도 문자적 숫자로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은 이단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해석이다.
미래에 대한 예언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많은 문제를 유발한다.
예를 들어, 1970년대에 각광을 받은 휴거의 저자인 할 린지는 당시 매스컴의 관심을 끌었던 유럽 연합(EU)이 성경이 말하는 열 뿔이며-현재 회원국은 10개 국이 아니라 28개 국이다- 회원국의 우두머리가 유대인인 적그리스도이며, 당시 미·소 냉전 상태가 곧 아마겟돈 전쟁의 전조이며, 이스라엘이 1948년에 독립한 후 ‘이 세대’-40년으로 해석-안에 주님이 오신다고 해석하여 1988년에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인기 있는 성경 교사인 해롤드 캠핑(Harold Camping)도 수시로 휴거 날짜를 예언했다가 무위가 되어 버린 사례가 빈번하지만 휴거 날짜에 대한 예언은 끊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모월모일 모처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왕복 항공 티켓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행동들인가?
이단과 사이비들만이 이런 오류투성이의 예언을 남발하는 것이 아니다. 할 린지, 해롤드 캠핑, 심지어는 척 스미스(Chuck Smith) 같은 보수적인 목회자들도 휴거 날짜를 잘못 예언하여 사람들을 혼란 속으로 빠뜨리고 있다. 성경의 숫자를 지나치게 경직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오류가 시정되지 않는 한 이런 소동은 과거는 물론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 or Classic Pre-millennialism)
세대주의 전천년설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환란 후에 재림하신다. 또한 세대주의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을 구분치 않고 두 가지 사건을 단회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때 휴거되어 그리스도를 환대한 후 곧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지상 재림하여 천년 동안 왕노릇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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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 배교, 대 환난.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졌을 때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성도에게 큰 어려움이 닥친다.
(2) 그리스도의 재림. 대환난의 절정에 지상 재림이 이루어진다.
(3) 죽은 성도의 부활. 죽은 후 천상에서 영혼의 상태로 있었던 성도들이 그리스도 공중 재림과 더불어 부활한다(계 20:5,6).
(4) 성도의 휴거. 부활한 성도와 변화된 성도들이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살전 4:16,17). (2)(3)(4)는 시차가 없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5) 사탄의 결박. 사탄이 그리스도에 의해 아마겟돈 전쟁에 패함으로 이렇게 된다(계 20:2,3).
(6) 천년 왕국. 죄의 근원이었던 사탄이 결박되고 이 땅에는 그리스도의 통치로 평화와 공의가 이루어진다.
(7) 곡과 마곡의 전쟁. 천년 왕국 마지막에 사탄이 잠시 풀려난 후, 곡과 마곡을 하수인 삼아 그리스도의 나라를 대적한다(계 20:8,9).
(8) 사탄의 멸망. 사탄은 다시 결박되며 영원한 유황불에 던져진다(계 20:2,3).
(9) 악인의 부활과 대심판. 심판을 위한 부활에 이어 영원한 고통 속에 처해진다.
(10) 새 하늘과 새 땅. 악인의 심판과는 반대로 구원받은 자는 영원한 고통 속에 처해진다.
*역사적 전천년설 평가
세대주의와는 달리 성경을 일관되게 해석했다는 특성이 장점일수 있다. 일제의 고난 가운데서 한국의 신자들이 가장 위로를 받은 것도 천년 왕국에 대한 소망이었고 아직도 한국의 많은 장로교인이나 보수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부활한 몸으로 변한 천년 왕국 시기에도 여전히 악인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세대주의 전천년설과 마찬가지로 문자적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자들의 결정적 약점이다(J.A. Bengel, J.P, Lange, G. E. Ladd 등). 어떻게 해서 죄가 없는 상태에서 천년 왕국에서 지낸 성도의 후손들이 천년 왕국의 마지막에 사탄의 유혹을 받아 다시 죄인이 된다는 말인가? 계시록 20장의 ‘천 년’이란 단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이런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