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포 / 요한계시록 15:6(3043), 18:12(1040), 16(1039), 19:8(1039), 14(1039)
15:6 /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3043)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 3043 리논( linŏn) λίν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3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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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 삼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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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심지, 마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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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삼베, 옷, 계 15:6.
-
c. 그물, 어망.
* 1039
βύσσινος, η, ον
스트롱번호1039
1. 가는 베로 만든. 2. 가는 베. 3. 가는 베 옷
발음
[ büssinŏ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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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는 베로 만든, [명사로] 가는 베, 가는 베 옷, 세마포, 계18:12,16, 19:8,14.
* 1040. 부소스(büssŏs) βύσσος, ου, ἡ
스트롱번호1040
1. 고운 베옷. 2. 세마포. 3. 눅 16:19
발음
[ büssŏs ]
* 히브리어 948 부츠(bûwts) בּוּץ
스트롱번호948
어원 / ‘희다’를 뜻하는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8회 사용
성도들에게 허락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옳은 행실을 나타낸다
우리 조상들은 먹고(食) 살기(住) 힘들 때도 의복(衣)은 신경 썼다고 한다.
의식주(衣食住)라는 말의 순서에서 알
수 있다.
남편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에게 사랑과 관심을 준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를 위해 ‘구원의 옷’과 ‘공의의 겉옷’을
입힌다(이사야 61:10).
그리고 신부가 필요로 하는 패물을 제공한다.
가장 먼저 물로 피를 씻기고 다양한 옷과 화려한 왕관을
씌운다.
황후의 지위에 올린다(에스겔 16:9-13).
에스겔서에 나오는 신부처럼(에스겔 16:8-10), 어린 양의 신부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상징하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었다. 빛난다는 것은 영광을 묘사하기 위해 하얗고 빛나는 색을 말한다(마태복음 13:43).
깨끗하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의 특성인 정결, 충성, 신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많은 연구는 세계 어디에나 신랑 쪽에서 신부의 가족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이른바 신붓값 문화를 갖고 있다고 한다.
양가의 관계를 공고히 해두자는 취지다.
신부가 잘 대접받을 것이라는 약조다.
신부의 가족에게 생기는 손실에 대한 대가이기도 하다.
지참금이란 신부가 결혼할 때 살림 밑천으로 친정에서 시집으로 가지고 가는
돈을 말한다.
그런데 제주도에서는 반대로 신랑이 신부 측에 돈을 지불하는 것이 오랜 관습이다.
제주도가 아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어린 양의 신부에게 지참금 이상의 선물을 주신다.
혼인 의복은 보호 사상 이외에 하나님과의 친근한 교제로 해석된다.
퇴폐와 부의 상징인 바벨론, 즉 로마의 세마포와
일부러 대비하고 있다.
어린 양의 신부는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여 정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들이다.
정치적인 입장의
호불호를 떠나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옛날 왕조 시대의 상소문 형식으로 올린 ‘시무 7조’가 민초들의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인간의 본성은 본디 나약하나
이 땅의 백성들은 특히 고난 앞에서 결연했고
인간의 본성은 본디 추악하나
이 땅의 백성들은
특히 역경 앞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였나니...’
다수가 고난 앞에 결연하고, 다수가 역경 앞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믿음의 사람만이 뜻을 세우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을 수 있다.
1.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되다
어린 양의 신부가 입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순교자들이 이 옷을 입었고, 천사들도 그러하다.
이 옷은
대나무 살에 종이를 바른 전통 접부채를 떠오르게 한다.
조선 전기의 문인인 김주(金澍)는 부채를 선물하면서 부채가 담고 있는
의미를 그 부채에 적어서 주었다.
“대나무를 깎아 만든 것은 그 절개(節槪)를 취함이요.
종이를 바른 것은 그 깨끗함을
취함이다(削以竹 取其節也 塗以紙 取其潔也).”
‘우암유집(寓庵遺集)’에 나온다.
대나무를 절개와 의리, 즉 절의(節義)에
비유한다.
가장 큰 특징은 마디이다.
‘마디’를 의미하는 한자가 바로 ‘절’이다.
대나무의 줄기는 곧다.
마디와 마디 사이는
진공상태이다.
대나무의 정체성이다.
교회의 옷은 흰 세마포이다.
이것은 큰 음녀가 입은 자주 빛과 붉은 옷 그리고 세마포 옷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깨끗한 세마포는 하나님의 신부에게 적합하다(겔 16:10).
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띠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이전에 언급된 흰옷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옷은 순결,
거룩, 그리고 명예를 의미한다.
세마포에 해당하는 ‘βυσσινοsbuvssino"’(뷔씨노스)는 제사장과 왕들의 옷을 만드는데
사용한 값진 천이었다.
그것은 빛나고 깨끗한 천이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이었다(레 16:4).
성소에 들어가는 모든 사역자에게 확대되었다.
순결함과 의로운 행동을 상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세마포는 고대 세계에서
사치품이었다.
큰 성, 즉 로마가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바벨론의 사치스러운 세마포 옷과 어린 양의 신부가 입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대비되고 있다.
로마는 최전성기인 ‘5현제(五賢帝) 시대’는 사치향락이 팽배했다.
로마시대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향락에
빠진 로마인을 각성시키기 위해 로마 지배를 거부하고 자유를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는 게르만족을 부각시켜 로마인의 나약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시경’ ‘소남(召南)’편의 ‘행로(行露)’는 송사에 걸려든 여인이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참새 뿔이 없다고
누가 말했나? 쥐 어금니 없다고 누가 말했나?”(誰謂雀無角? 誰謂鼠無牙?) 작각서아(雀角鼠牙)는 참새 뿔과 쥐 어금니다. 참새는
뿔이 없고, 쥐는 앞니뿐이다. 뿔 없는 참새가 지붕을 뚫고, 어금니 없는 쥐가 담을 갉아 구멍을 낸다. 이렇듯 터무니없는 짓을
해도 절개(節槪)를 굽히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신부의 준비에 관한 사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과의 관계로 확대한다. 이 상황에서 강조는 신부가
입게 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이다. 후에, 새 예루살렘의 환상에서는 신부의 예복에 있는 금과 보석들에 더 많은 관심이 주어질
것이다. 어린 양의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하고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이 되었다. ‘허락하였다’는 부정과거 수동태다. 신부의
의로움이나 장점 때문에 옷이 제공된 것이 아니다. 신적수동태다.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이루어짐을 가리킨다. 깨끗한 세마포 또는
흰옷을 입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정결의 과정이다. 또한 혼인식에서 신부에게 합당한 순결이다. 예배와 혼인의 장면들은
부활의 희망을 노래한다.
2.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
신부의 옷만 언급하고 있지만 신부 단장을 가리킨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는 어구도 신부 단장을 가리킨다. 칭의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원인적인
필요조건이다. 옳은 행실은 비원인적인 필요조건이다.
혼인의 이미지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이 그에게 충실할 것을 기대하신다는 의미이다. 신부가 자신의 남편에게 충실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피조물과 맺었던 언약과 하나님이 이루실 평화를 연결시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장가를
간다.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라는 선포로 종결된다(호
2:19-20).
신랑으로서 그리스도와 신부로서의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라는 은유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매우 널리 사용되었다.
흰옷은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의 신분을 가리키는 이미지다. 독자들은 죄는 그들의 옷을 더럽혀서 하나님 앞에 서기에 적합하지 않게
한다고 경고 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은혜를 입어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의 옷을 씻어야 한다. 그와 같이 깨끗하게
하여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된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상징하는 세마포 옷이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의 표시다. 신부에게 옷이 제공된다. 그녀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됨과 충성으로 혼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영화 ‘남한산성’에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무릎 꿇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 입은 옷은 용포가 아니라 항복의 예가 끝나고 청이 준 의복(衣服)을
입었다. 의복 제도는 ‘천자’가 결정해 제후와 신하에게 내리는 것이었기에 상징성이 컸다.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사람이 인생에서 성공하는 비결은 기회가 다가올 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준비한 왕으로 비유하셨다(마
22:1-14). 왕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자는 예복을 입어야 했다.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 두 가지 경우다. 주인에
의해 깨끗한 옷이 공급되었으나 거절한 경우다. 아니면 부주의로 더러워진 것이다. 아무튼 깨끗한 옷의 의미는 그리스도에 대한 회개와
순종을 의미한다. 그 사람은 아마도 ‘웨어러블 로봇 슈트(wearable robot suit)’ 같이 자신의 것으로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옷은 옷을 입듯 몸에 장착하는 기기가 사람이 움직일 때 써야 하는 힘을 줄여준다
옷을 입는 방식은 구원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동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쟁으로 이끄는 옳은
행위(just deeds)와 연결되어 있다.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것은 아마도 요한에 의해 덧붙여진 보충적인
해석일 것이다. ‘옳은 행실’은 복수형이다. 신부의 옷이 끝까지 인내한 자들의 셀 수 없는 신실한 순종의 행위들로 수놓아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옳은 행실의 삶을 사는 것은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롬 1:17).
어린 양과의 혼인식에 들어가기 전에 요구되는 필요한 외적 반응 또는 표시임을 암시한다. 바울의 칭의의 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신랑의 요구에 합당한 반응이다. 변화된 삶이다. 요한의 관심사는 교회 안의 거룩함이다. 신부에게 허락된 것은 세마포가 아니라
의로운 행실들을 옷 입을 수 있는 특권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그렇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옳은 행실을 위해 창조되었다. 옳은 행실은 믿음의 가시적 면과
관련이 있다. 요한계시록은 충성된 사람들의 행위들은 죽음 이후에도 그들을 따른다고 추론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를 인정하기고
기억하신다. 옳은 행실들로 부활 시에 그들을 단장하도록 허락하신다는 사상이다.
교회는 정혼한 처녀처럼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순결과 지조를 지켜야 한다.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고려 말 이방원의 하여가를 되받아친 정몽주의 단심가다. 단심은 붉은 마음이다. 충절과 사랑과 지조를 상징한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혼인 예식을 위해 자신을 준비한 신부들의 행위들이다. 이것은 신자들이 어린 양의 피에 자신들이 예복을 씻는 이미지들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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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베드로전서 1:14-15)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어떤 사람들은 신비한 것들을 참 좋아합니다.
믿음으로 귀신을 좇아내고 믿음으로 병을 고치고 믿음으로 성공을 하고 믿음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성취하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믿음만 있으면 뭐든지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성공담을 듣고 있으면 믿음만 있으면 이 세상은 정말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만 하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어떤 목사님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설교를 하는데 그 목사님 설교를 듣고 있으면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이 세상에서도 엄청난 능력을 발휘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 아멘을 하고 박수를 치는 것을 보면서 야 저분들은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구나 우리와 다른 그 무엇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 미국에 있는 사람이 자기와 전화통화만 했는데 병이 나아버렸다고 자랑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참 형편없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건한 삶을 자랑합니다.
술 담배 안하는 것은 기본이고 노래나 오락이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까지 금하면서 오래 기도하고 금식하고 고행을 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재미를 끊어버리고 심지어 기본적인 가족 관계마저 등 뒤로 하고 작은 실수도 허점도 없이 깨끗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의 어떤 교회는 새벽기도로 성공한 교회라고 말할 정도로 새벽기도에 중점을 많이 둡니다.
그 교회의 새벽기도는 텔레비전에도 자주 방송 됩니다.
수 천, 수만의 사람들이 그 꼭두새벽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모든 일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엄청난 혼란과 차이를 가져오게 할 수 있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에 거룩한 삶을 살라고 말씀을 하셨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을 하고 설교를 해야 할까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우리
보통 성도들의 삶을 생각하면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해서 기적을 일으키거나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그렇게
고행을 하고 선행을 많이 해서 사람들에게라도 칭찬받을만한 일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기적 속에서 사는 것이라면 우리는 방향을 좀 수정을 해야 될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고행이나 선행을 하거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좀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도 모든 일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거룩한 사람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가 거룩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이 그 이유입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의 편지를 받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자녀라고 한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상속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자식은 부모에게서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가집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을 권리를 가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라고 할 때 또 하나는 ‘부모님의 인격이나 성품을 함께 나눈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지신 성품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는 이 세상 사라들과 다른 특별한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신분이라면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그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그들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엄청나게 다른 신분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탄의 종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은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죄인이지만 우리는 의인입니다.
그들의 속에는 사탄이 들어가 있어서 사탄의 종노릇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속에는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역사하시고 계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진노의 대상이고 심판의 대상이고 형벌의 대상이고 멸망의 대상이지만 우리는 사랑을 받는 자들이고 칭찬과 상급을 받을 사람들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아주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열매들을 맺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그 아름다운 성품을 닮아서 그 성품을 나타내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특별한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동화되어서 그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특별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아 뭔가 좀 다르다 좀 특별한 사람들이다 라고 느낄 수 있도록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표시도 없이 똑 같이 세상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특별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2.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본문 말씀에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우리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특별하신 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만큼만 생각하고 아는 것만큼만 행동에 옮기면서 삽니다.
모르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산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면서 왜 우리가 천주교에서 나와서 이렇게 따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옛날 귀신을 섬기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 귀신에게 기도했던 방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 무당에게 앞날을 물어보고 굿을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 종교개혁을 하기 이전의 타락한 교회처럼 오직 믿음으로가 아닌 고행과 선행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칼빈이나 루터 같은 사람들이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목숨을 걸고 개혁을 했는데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개혁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강조한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따라 살지 않고 복음이 아닌 엉뚱한 것을 진리라고 가르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외치는 사람들이 이단처럼 보일정도로 엉뚱한 것들이 복음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바르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줄을 알고 그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들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우리가 진리를 알지 못했을 때는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는 우리 속에 있는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욕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세상의 그 욕심을 버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천당에서 예수 축복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교회에서 쓰는 말 중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축복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복 받아라, 복 받고 살아라, 복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복 복 복 축복에 미친 사람들처럼 복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축복들을 잘 살펴보면 대부분이 이 세상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도 이 세상의 욕심을 따르지 말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무조건 부자가 되는 복만 받기를 원합니다. 무조건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복만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이 욕심에서 나온다고 말씀을 하셨는데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만 버리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데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따라 살다가 보니까 평생을 불행하게 삽니다.
물론 우리가 가져야 할 선한 욕심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싶은 욕심, 진리를 더 바르게 알고 싶은 욕심,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선한 욕심들이 있습니다.
그런 선한 욕심들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한 욕심들을 따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만 행복하기 위해서 살았던 모든 나쁜 욕심들을 버리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욕심을 버리면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오늘 본문 말씀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의 말입니다.
깨끗한 하나님과 더러운 세상과의 구별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이 세상과는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우리와 너무나 다르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시고 완전한 분이시고 한 점 흠도 없으신 깨끗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것은 세상의 것들과 구별이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성도도 거룩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의 성품을 따라서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사함 받아 의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미 거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거룩한 사람으로 바뀌라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으로서 그 거룩함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라는 말로 해석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복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미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거룩함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내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1) 바른 믿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성공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출세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세상 욕심을 이루기 위한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 줄로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빼고는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바른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무리로 삼아주신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 거룩한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쓰여진 작은 도구들까지도 거룩한 물건으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소도 거룩한 전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바쳐진 예물도 성물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시대 때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우리가 바른 예배 즉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거룩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행 중에 가장 악한 행위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그 의미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장 악한 행위는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예배일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릴 바엔 차라리 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예배의 참된 의미를 알고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실 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가장 중요한 성품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알면서도 이기심 때문에 참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거룩한 사람을 사는 것입니다.
4)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삽니다.
세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출세하는데 그 소망을 두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다가 소망을 두고 삽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것에 욕심을 내지 않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우리의 거룩함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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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거룩’의 우리말 사전적 의미는 “성스럽고 위대하다” 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거룩의 의미는 무엇일까?
거룩을
나타내는 히브리 단어는 ‘코데쉬’ 라고 하는데 이것은 “구별되다” 라고 하는 뜻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이
거룩이란 단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성품’ 을 나타내며 따라서 이것은 우리말 사전적 의미인 ‘성스럽고 위대하다’ 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또 한가지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거룩이란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책임이며, 삶 가운데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
본문가운데 ‘거룩한’ 이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는
‘하기오스’ 인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단어가 명사적 용법으로 사용되면 ‘성도’라 번역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본래 의미로서의 거룩이란 하나님 자신의 본성과 의지를 나타내며 그분이 취하시는 모든 것은 그분의 거룩함에 종속되어지는 것이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But just as he who called
you is holy, so be holy in all you do.’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이 말씀 가운데 놓치치 말아야 할 것은 먼저 영역성경의 말씀처럼 거룩해져야 함은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권고사항이 아니라‘be holy’ 곧 명령형으로 쓰여져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우리는 부분적으로
거룩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in all you do’ 곧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3년 반이나 예수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포기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그들의 행동 양식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던 중 제자들은
스승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을 보고 깊은 절망 가운데 빠졌다.
하지만 예수는 무덤에 머무르지 아니하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다시 그들을 찾아와 주셨다.
그리고 무려 40일 동안이나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셨다.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예루살렘에 함께 모여 기도했으며 정확하게 열흘 후 오순절날 약속대로 성령께서 그들을 찾아오셨고 비로소 그들의 삶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변화된 삶은 굳어있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베드로도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던 바로 그때부터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워나갔으며 또한 주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에 편지를 보내 견고하게 그 교회를 세워나갔다.
인생에서 철저한 패배를 경험했던
베드로가 주안에 한 형제요 자매된 이들에게 지금 이렇게 외치고 있다.
아시아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러분은 이제 언제라도 행동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허리를 동이고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근신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먼저 여러분들의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 또한 주님과 함께 하면서 말과 행동이
앞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대하며 그분이 나를 위해 가지고 오실 하나님의 은혜, 즉
구원을 바라며 기쁨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자녀가 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나쁜 습관들과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생각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별로 부합되지 않기에 먼저 우리의 생각
“my own thoughts”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 “God’s will” 이 무엇인지를 고민합니다.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의 사욕은 대부분 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함을 힘쓰되 우리의 하는 모든 행실에 있어 거룩해야 합니다.
남편을 대함에 있어 거룩해야 합니다.
아내를 대함에 있어
또한 거룩해야 합니다.
부모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하는 자녀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거룩해야 할 뿐 아니라 직장에서나 또는 사업을
하는 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거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그분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고는 그분과 만날 수도, 그리고 교제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단지 저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라 여기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기록하게 하셨던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명령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부르시고
사용하시기를 원했던 모든 것과 사람들이 거룩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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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의 몸의 행실
우리가 세상에 믿음을 보여 주는 유일한 한 가지 방법은 ‘
몸의 행실’입니다.
성도는 제 2의 성경이란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2-3
너희는 우리의 마음에 쓰여 있는 우리의 서신으로 모든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서신이니 이것은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육체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서신’으로서 모든 사람이 읽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은 ‘몸의 행위’를 통해 보여 주어야 합니다.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약 2:18)는 말씀대로 믿음은 ‘몸의 행위’를 통해 알고 읽혀집니다.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행실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은 열매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향기로, 빛으로, 열매로,
행실로 밖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 우리의 행실은 복음에 합당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 행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할지니 ..](빌 1:27).
우리는 바른 믿음, 진리에 근거한 정확한 교리적 지식 뿐 아니라 ‘바른 행실’을 가져야 합니다.
• 우리의 행실에 탐욕이 없어야 합니다.
[너희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히 13:5a).
자본주의 사회, 맘몬을 신으로 섬기는 이 시대에 성도들은 물질에 대한 탐욕을 갖지 않음으로써 확연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돈 버는 일에 헌신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이익이 경건인 줄로 알고(딤전 6:5), 주의 복인 줄로 아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의 행실은 ‘복음에 합당한 행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맘몬’을 섬기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우리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딤전 6:8)는 이 말씀은 탐욕에 물든 성도들이 도저히 수용하지 못하는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을 알고 믿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왜 영적 지식이 믿음과 영적 생활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입니까?
바로 육신을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행실은 거룩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갖 행실에서 거룩할지니](벧전 1:15).
거룩함이란 세상과 구별되고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세속적, 향락적, 육신적, 마귀적인 이 세상의 삶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살 때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말씀, 거룩한 믿음, 거룩한 성령을 지닌 성도들이 거룩한 행실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육신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육신이 걸림돌입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 우리의 행실은 정직해야 합니다.
[이방인들 가운데서 너희 행실을 정직하게 하라.](벧전 2:12a).
• 크리스천 자매(아내)들의 행실은 정숙해야 합니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숙한 행실을 그들이 눈여겨보느니라.](벧전 3:2).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의 행실을 봅니다.
불신자들은 성도들의 언어와 행실, 추구하는 가치관을 눈여겨봅니다.
교리와 믿음은 바른 것
같은데 행실은 엉망이라는 말은 수치입니다.
• 우리의 행실은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어](딤전 4:12).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를 때 우리는 거룩한 행실, 선한 행실, 복음에 합당한 행실, 정직한 행실,
본이 되는 행실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지식이 바로 몸의 행실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죄와 율법에서 해방된 성도가 옛 사람의 행위들을 벗지 못해 여전히 예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몸의 행실을 죽이지 못한 이들은 이전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교회를 나오고, 성경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고, 각양 다양한 영적 일들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술, 담배, 도박, 음행, 포르노, 영화, 더러운 잡지, 소설,
유행가 등 옛 생활을 단절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노력은 하지만 잘 안된다고 말합니다.
돈벌이가 되면 잠시 양심을 접어두고,
의(義)를 포기합니다.
구원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육신에 져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육신을 처리하지 못한 성도들은 말만 있고
능력이 없습니다(고전 4:20).
육신적인 일은 하지만 열매가 없습니다.
다양한 은사는 있어도 덕을 세울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