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은 신구약 성경에 모두 4회 나온다.(이사야 65:17, 66:12, 베드로후서 3:13, 요한계시록 21:1)


이사야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Behold, I will create new heavens and a new earth. The former things will not be remembered, nor will they come to mind.


이사야 66:2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For this is what the LORD says: "I will extend peace to her like a river, and the wealth of nations like a flooding stream; you will nurse and be carried on her arm and dandled on her knees.


베드로후서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을 바라보도다.
But in keeping with his promise we are looking forward to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the home of righteousness.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Then I saw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for the first heaven and the first earth had passed away, and there was no longer any sea.


이사야 65:17
요한계시록 21:1

이사야 65:1

כִּֽי־ הִנְנִ֥י בֹורֵ֛א שָׁמַ֥יִם חֲדָשִׁ֖ים וָאָ֣רֶץ חֲדָשָׁ֑ה וְלֹ֤א תִזָּכַ֙רְנָה֙ הָרִ֣אשֹׁנֹ֔ות וְלֹ֥א תַעֲלֶ֖ינָה עַל־ לֵֽב׃ 

(음역) 키-히네 보레 샤마임 하다쉼 봐예레츠. 하다샤 베ㄹ로 티짜카르나 하리쇼노트 베ㄹ로 타알레나 (알-렙...)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사역)

요한계시록 21:1 

Καὶ εἶδον 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ῆν καινήν· ὁ γὰρ πρῶτος οὐρανὸς καὶ ἡ πρώτη γῆ ἀπῆλθαν, καὶ ἡ θάλασσα οὐκ ἔστιν ἔτι.

(음역) 카이 에이돈 우라논 카이논 카이 겐 카이넨. 호 가르 프로토스 우라노스 카이 헤 프로테 게 아펠ㅌ한, 카이 헤 ㅌ할라사 우크 에스틴 에티. 


이사야 65장과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차이  

두 성구는 표면상 아주 비슷하거나 거의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서는 '내가'(하나님이) 창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전의 땅과 하늘은 기억나거나 생각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땅은 새로 창조하시기보다 이미 어디엔가 존재해온 것이 새로 나타나 있는 것을 기자(사도 요한)가 비로소 바라보고 있다고 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비록 기존해왔지만, 낡은 옛 하늘과 옛 땅이 아니다! 
태초에 창조된 첫(옛) 하늘과 첫 땅(즉 창세기에서 기록된 천지 창조 때의)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이 첫 것이 사라진 뒤에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 65장의 새 하늘, 새 땅과 요한계시록 21장의 새 하늘, 새 땅은 명칭만 같을 뿐, 적어도 개념상 어렴풋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을 계속 읽어가면, 그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예샤야후서 65장의 이 새 하늘, 새 땅에서는 죽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20절이 그렇게 말해 준다.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와 제 명대로 다 살지 못한 채 죽는 노인이 없다고 했으니, 바꿔 말하면 넉넉히 살다 죽는 사람들은 있다는 얘기가 된다. 
즉 불사는 아니라
는 말이다.

거기서는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불러준다고 하니까, 백 살 넘어 죽는 사람은 있다는 얘기가 되고, 백 살이 채 못 되어 죽는 사람들은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이니, 바꿔 말하면 저주를 받았든 어떻든 이 새 하늘 새 땅에서는 그런 조기사망자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받아야지, 상징적으로 받으면 안 된다!

바로 그 점이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의 모든 것은 수적 개념을 초월하여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의 정체’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논쟁의 핵심은 과연 새 예루살렘이 마지막에 나아가게 될 천국을 그리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신부’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종말에 누릴 축복을 그리고 있는가에 있다.

‘계시록’의 의미인 ‘밝혀진 또는 열린’ 등의 개념과 대조적으로 아직도 요한계시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고 감춰진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런 익숙지 않음이 때로 불안한 세상에 편승해 ‘연약한 자들’을 유혹하는 이단의 잘못된 해석에 희생 제물이 되기도 한다. 때로 지나친 문자주의적 해석에 근거한 나머지 중동 지역의 국지전을 ‘아마겟돈 전쟁’으로 예견하는 정도까지 이르러 결과적으로 종말론에 대한 회의를 낳게 만들기도 한다.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이해도 이런 안개 속에 싸여 있는 듯한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 보인다. 새 예루살렘은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마지막 환상에 속하는 부분(21:1~22:5)이다. 사람들은 「내가 본 천국」 등의 책이 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이해는 본문의 가르침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 부정확한 성경 해석이 근거 없는 ‘믿음’으로 이끌며 그 믿음이 확산될 경우에 매우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올바른 성경 해석에 근거한 믿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해석과 함께 그 안에 담겨 있는 가르침이 현대 교회를 향해 주는 메시지를 논하기 전에, 이 부분이 안고 있는 두 가지 이슈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첫째, 마지막 때에 주어지는 ‘새로운 세상’의 정체에 관한 질문이다. 요점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속성이 ‘갱신된 세상’(renewed world)인가 아니면 ‘새롭게 창조된 세상’(replaced world)인지에 관한 논쟁이다. 현재 세상과 연결하는 견해는 연속성(continuity)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다른 견해는 비연속성(discontinuity)에 무게를 두고 있다.

둘째, ‘새 예루살렘의 정체’에 관한 것으로 논쟁의 핵심은 과연 새 예루살렘이 천국을 그리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신부’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종말에 누릴 축복을 그리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더해 어느 한 쪽으로 치중하기보다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에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21:1~22:5)

이 부분을 해석하기 위해 ‘문맥’의 중요성과 함께 비유적 또는 상징적 표현의 당위성을 이해해야 한다. 문맥에 대해선 근접한 문맥과 넓은 문맥을 모두 염두에 둬야 한다. 먼저 근접한 문맥으로, 17장 1절에서 22장 5절까지 소위 ‘두 도시’(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의 이야기로 알려진 부분을 살펴봐야 한다. 다음에 넓은 문맥으로, 요한계시록의 시작에서 이 부분에 이르기까지의 전개와 나아가 구약과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 발전해 온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을 고려해야 한다.

비유적 또는 상징적 표현의 당위성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과 연관해 생각할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의 내용은 ‘초월적 현실’(transcendental reality)을 다루고 있다. 특히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모든 것들의 완성이라는 면에서, 또 초월성이라는 면에서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 초월적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비유와 상징적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마치 문명의 이기에 관한 경험이 전혀 없는 정글 속사람들에게 전자 오븐이나 휴대전화기를 설명하려고 한다면, 그들이 갖고 있는 언어와 경험의 경계가 표현의 한계를 결정하게 되듯이 말이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21장 18절과 21절에 나오는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든가, ‘더 이상 바다가 없는 가운데(21:1) 존재하는 샘’(21:6)이라든가, ‘강’(22:1) 등은 상징적 또는 비유적 해석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저자 요한은 이 책의 독자들에게 친숙한 상징과 모델들을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에서 찾고 있으며 그것을 기초로 자신만의 요소들을 더해 자신이 본 초월적인 현실을 전하고 있다.

(1) 새 창조(21:1~8)

먼저 이 단락이 속한 문맥에 관해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단락은 음녀 바벨론의 멸망(17:1~19:10)과 신부로 표현된 새 예루살렘의 축복(21:9~22:5) 사이에 놓여 있는 ‘종말의 종말’을 구성하는 연속의 사건들(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아마겟돈 전쟁, 천년왕국, 마지막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19:11~21:9)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부분을 통해 악의 세력의 철저한 제거 과정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이 거하는 땅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늘이 서로 연결돼 둘이 하나가 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에 더해 21장 9절부터 시작되는 새 예루살렘에 관한 두 가지 커다란 요소를 소개함으로써 동시에 새로운 단락(21:9~22:5)의 서론 부분 역할도 감당하고 있다.

본문에서 중요한 점은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분명하게 보여준 악을 철저히 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더해 더 이상 악이 거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질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새 창조’에 관한 약속(사 65:17~18)의 성취일 뿐 아니라,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롬 8:21)되는 순간이다. 특별히 저자 요한은 21장 1절에서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표현을 더함으로써 짐승이 나온 곳(13:1)이고 죽은 사람들의 장소(20:13)이며 세상의 우상 숭배적 상업 활동의 무대(18:10~19)일 뿐 아니라, 세 부분으로 나눠진 옛 세상의 일부(8:8~9, 14:7)의 부재를 통해 악의 부재와 그 악이 편만했던 옛 세상의 지나감을 강조한다.

저자는 새로운 세상을 언급한 후 초점을 새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있다. 마치 새 예루살렘이 새로운 세상의 축소판(microcosm)인 양 새 예루살렘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묘사한다. 구약의 약속인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사 2:1~5, 18:7)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세상을 다스리신다(사 24:23). 또 에덴동산과 같은 곳(겔 36:35)이고 백성들과 함께 영원히 거할 곳(겔 37:26~27)이며, 생명의 물이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올 것(슥 14:8) 등 선지서 속의 시온과 예루살렘에 관한 수많은 기대와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새 예루살렘을 보면 어떤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으며, 어떤 축복을 누릴 것인지 소망할 수 있게 만든다. 
새 예루살렘은 두 가지 커다란 특징으로 소개되고 있다. 3절에서 말씀하듯,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과 4절에서 말씀하듯, 세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전혀 다른 현실을 그려주고 있다. 이 두 가지에 대해 다음 단락(9~27)이 3절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고, 그 다음 단락(22:1~5)이 4절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1~5)

새로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새롭게 된다(5절). 그렇다고 모든 것들이 현재 세상과 연속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입을 ‘영광의 몸’(빌 3:21)은 현재 우리의 몸과 다르지만, 둘 사이에 연속성이 배제되지 않은 새로움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참고 눅 24:39, 롬 8:11).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처소인 새로운 세상의 ‘새로움’은 위의 경우와 조금 다르다. 다시 말해, ‘이미 새로워진 하나님의 백성’(고후 5:17)과 ‘새 하늘과 새 땅’ 간의 ‘새로움’에 차이가 있다.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이 함께 거할 곳이기에 옛 세상과의 연속성을 배제해 버린다.

그곳은 특별하기에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고 현재의 삶에 근거해 결정된다. 요한계시록에서 반복해 말하고 있듯이, 오직 세상의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힘이나 스스로의 의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12장 11절 등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이긴 자들’이 들어간다. 요한계시록이 교회를 향해 씌어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말씀에서 담고 있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8절에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목록이 나온다. 여기에는 세상의 유혹과 핍박에 이기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그런 행동을 하거나 거짓 교리를 전하는 이단들이 포함된다. 2~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의 문제들과 연결해 생각할 때 이해가 된다. 열매를 찾아볼 수 없는 자,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며 따르는 자, 세상과 타협함으로써 세상과 구분 되지 않는 자 등 간단히 말해 ‘알맹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들을 향해 경고하고있는 것이다.

(2) 지성소로서 새 예루살렘(21:9~27)

새 예루살렘이 2절의 ‘신부와 같이’라는 직유적 표현에서 9절의 ‘신부’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바뀐다. 하지만 여기에 근거해 새 예루살렘이 신부이고 신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의 정체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 특히 15장 2절(‘유리 바다 같은 것’에서 ‘유리 바다’로)이나 21장 11절(‘벽옥같이’)과 18절(‘벽옥’)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의미의 변화를 감지할 수 없는 예들은 위의 결론을 지지하고 있다.

결국 문법적으로 다른 두 표현일지라도 기능면에서 차이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차이를 단순히 저자 요한의 스타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저자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며 새 예루살렘의 두 주인공인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고 있다는 근거는 다음에서 볼 수 있듯이,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 자체에 있다.

새 예루살렘이 지성소라는 사실을 전개해 나가는데 있어서 저자 요한은 세 가지 요소에 초점을 맞춰 외부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듯이 소개하고 있다. 먼저 11~14절에서 외부적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 후 16~17절에서 외적인 구조에 관해 표현하고, 마지막으로 새 예루살렘의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요소에 대해 22~23절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구성 요소들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 묘사의 특징을 들자면, 열둘이라는 숫자의 만연함이라고 할 수 있다. 열두 문과 열두 지파의 이름(12절), 성벽의 열두 기초석 및 그들에 기록된 열두 사도들의 이름 (14절), 열두 진주문(21절) 등을 포함해 성벽의 가로 세로 길이가 12,000(=12x103) 스다이온에, 성벽의 두께는 144(=12x12) 규빗이라고 말하고 있다. 열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숫자다. 새 예루살렘의 묘사에서 열둘이라는 숫자의 강조는 그곳에 들어가는 새로운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정체에 관해 구약의 공동체와 신약의 공동체를 모두 언급하기보다 예수님의 피로써 구원 받은(예 1:5, 5:9, 7:14), 그리고 그분의 피로써 사탄을 이긴(12:11) 사람들을 언급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시 말해, 사도들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영적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다.

구조를 논하며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가로 세로 높이가 동일한 정육면체 모양의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의 모델(왕상 6:20, 대하 3:8)을 근거로 해서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있다. 독특한 점이 있다면, 거대한 크기(한 면이 2,400㎞인 정육면체)에 비해 성벽의 두께는 상대적으로 초라한 144큐빗(약 65m)으로 표현돼 있다는 것이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숫자들을 보며 숫자 자체에 문자적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오히려 그 숫자에 포함된 하나님 백성들의 상징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나아가 규모의 거대함에 더해 정육면체 형태의 지성소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결국 마지막 세상의 모습으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과 영원히 거할 지성소 중의 지성소로 묘사되고 있다.

예루살렘 성의 아름다움은 다양한 보석을 통해 특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곳의 길은 이 땅의 금의 모습이 아니라 ‘유리 같은 정금’이며, 성벽과 기초석과 문은 온갖 보석으로 치장이 돼 있다. 물론 보석의 일부(벽옥, 홍보석, 녹보석)는 하늘의 보좌를 논하며(4:3) 등장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와 있는 다른 보석들은 헬라어에서 실제로 어떤 보석을 의도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열된 보석들과 동일한 리스트를 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결국 보석들에 관한 결론을 외부에서 찾기보다 책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특별히 음녀 바벨론을 논하며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다’(17:4. cf. 18:4)는 표현과 의도된 대조를 놓쳐선 안 된다. 스스로 온갖 악행과 불의로 얻은 것들로 치장한 음녀 바벨론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한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새 예루살렘의 대조를 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적 특성을 언급함에서 새 예루살렘은 ‘성전’이 없는 성이라고 말하고 있다(22절). 물론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예루살렘 성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성전의 부재를 의미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은 성과 성전의 구분을 없애 버린, 성 자체가 성전이며 지성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표현을 쓰고 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새 예루살렘에서 ‘성전’이라는 것이다(22절). 마치 ‘새 예루살렘’이 단순히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를 나타내고 있듯이, ‘성전’도 단순히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백성들의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상호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믿는 사람들의 모든 소망함의 성취된 모습을 그리고 있다.

(3) 새로운 에덴으로서 새 예루살렘(22:1~5)

바로 앞 단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표현된 새 예루살렘을 그리고 있다면, 이 단락에선 그들이 거하는 장소에 초점을 맞춘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새 예루살렘의 중심이 보좌이며 그와 함께 언급된 생명나무의 존재다. 보좌의 중심됨은 4장에 그려진 하늘의 성전을 통해 이미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새 예루살렘의 중심에도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그런데 그 보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것만이 아니라 어린양의 것이며(3절),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원천이며(1절), 다시는 저주가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3절).

연이어 보여주는 것은 정원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닌 파라다이스의 모습을 지닌 새 예루살렘이다. 그 정원에선 다른 나무보다 생명나무가 중심이 되고 그곳에 거하는 거민 들이라면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나 소성함을 얻으며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에덴의 회복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곳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는 이 세상과 달리(출 33:20), 하나님의 얼굴을 목도하며 살게 된다. 또 하나님께서 에덴을 지으시고 의도하셨던 뜻을 온전히 이루며 살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을 온전히 섬기며(3절) 그곳에서 다스리게 된다(5절). 물론 여기서 무엇을 다스릴지에 관해서는 말해 주고 있지 않는다. 새 예루살렘을 논하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요한계시록 저자의 의도를 고려해 볼 때, 이런 생략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창세기에 기록된 처음 창조의 세상을 볼 때, 새롭게 창조될 세상에서 다스릴 대상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는 일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만드시고 명령하시며 기대하신 일이었다. 이런 다스림은 천년 왕국(어떤 견해를 갖고 있든지 상관없이) 동안의 통치(20:6)와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통치’라는 특성을 갖는다(5절). 다시 말해 단순히 에덴의 회복을 뛰어넘는 것이며, 나아가 에덴에서의 원래 목적(예배)이 이뤄지는 곳임과 동시에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다스림을 통해 온전히 제사장과 왕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현대 교회를 향해 새 예루살렘이 주는 메시지

새 예루살렘의 도래는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그 순간을 가르치고 고대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온전히 성취되는 순간일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바람과 소망의 온전한 완성이기도 하다.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변화된’ 백성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것이며, 다시 얻은 에덴동산이 아닌 그 이상의 파라다이스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예배하며 허락하신 것을 영원히 다스리는 역할을 감당하며 살게 된다. 현재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 나라에 국한된 성전이, 마지막 때에는 지성소로 그리고 파라다이스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이런 가르침이 현대 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자.

현대 사회를 논하며 사회를 주관하고 있는 두 개의 정신 사조로 흔히 물질주의(materialism)와 자아도취(narcissism)를 지목한다. 교회조차 알게 모르게 이런 사조에 밀려 표류하고 있는 것이 현대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지적이기도 하다. 만약 그들의 평가가 사실이라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 그 중에서도 새 예루살렘에 관한 가르침이 주는 메시지는 매우 명료하다.

첫째, 물질주의의 위험과 함께 물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물질주의와 연결돼 있는 것이 물량주의이고 물량주의와 연결돼 있는 것이 외적 성장주의이며, 성장주의와 연결돼 있는 것이 세상적 개념의 성공제일주의이다. 이런 것들을 향한 새 예루살렘이 주는 메시지는 세상에서의 가치가 천국에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의 연속성을 가지는 ‘사람’인가를 묻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체가 다음 세상과의 연속성이 없는 ‘물질’인가의 근본적 질문을 하며 평가하도록 만들고 있다.

현재의 시각으로 아무리 가치가 있는 것일지라도 궁극적으로 모두 없어질 것이며, 또한 그곳에 절대 갖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추구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 16:9)는 가르침을 주신다. 물질이 아니라 사람의 소중함을 강조하시는 메시지다. 「내가 본 천국」에서 주장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상의 온갖 보화를 통해 묘사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써 나타나는 영광의 결과이지, 결코 천국의 모습과 동일시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외적인 아름다움이 천국을 사모하는 이유가 된다면, 물질주의에 젖은 우리의 모습을 방증(傍證)하는 것이 분명하며 이에 더욱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둘째, 자아도취의 위험함을 깨닫도록 요구하고 있다. 자아도취와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있다. 주기도문을 보아도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 정체성이 정해지는 개인임을 기억해야 한다. 새 예루살렘의 묘사를 보며 다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뿐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온전한 교제의 완성된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개인 종교가 아니라 공동체 종교이며,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믿는 사람들 모두 함께 새 예루살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의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는 말씀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공동체로서 교회를 바라봐야 한다. 이런 관계는 단순히 교회 안에서 성도들간의 관계에 국한된 것일 뿐 아니라 교회와 교회 간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사이에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 하나됨의 목적이 전도와 선교에 있음(요 17:21, 23)을 말씀하신다. 따라서 협력하며 동역하는 모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도들 간에 또는 지역 교회들 간에 존재하는 갈등과 반목은 온전한 교제가 이뤄지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통해 회복을 향한 노력으로 변화돼야 한다.

셋째, 천국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은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본다고 한다. 「내가 본 천국」과 같은 책에서 ‘신비로운 경험’에 근거해 주장하는 천국의 모습을 들어 보면, 천국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며 그것에 근거한 바른 믿음을 갖고 살아갈 때 제대로 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 이 땅에서 가치 있는 것들로 가득한 곳이 천국이라기보다, 세상의 가치로선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곳이 새 예루살렘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온전히 회복된 에덴 이상의 지성소적 파라다이스로 인간의 모든 필요와 소망이 채워지는 곳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온전히 성취되는 곳임을 기억해야 한다.

넷째, 진정한 예배의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히 하고 있다. 에베소서 2장 21~22절을 보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교회가 이미 성전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교회와 새 예루살렘간의 연속성은 가장 강하게 나타나 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예배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 축복이기에 현재의 예배를 하나님 중심으로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현대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 중심의 틀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누가 예배의 중심이 돼야 하는지에 대해 돌아보며 예배를 통해 마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으로의 초대 및 만남이 이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교회에서 신앙 훈련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교인이 아니라 ‘이기는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로서 삶을 살 수 있는 이기는 자들로 만들기 위해 부단한 훈련과 점검을 해야 한다. 특히 ‘성도들의 옳은 행실’(19:8) 등을 강조하는 요한계시록을 염두에 두고 한국 교회를 향한 외부에서 들려오는 최근의 비판적 평가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 음녀 바벨론의 특성들로 만연된 세상에 둘러싸여 많은 도전과 시험 속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이끌리며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을 향한 도전이 새 예루살렘이 주는 메시지이다. 

오직 행함있는 믿음으로

어느 곳에 있더라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우리의 사는 모습 속에 드러나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통해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한 시대다. 새 예루살렘이 현대 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리 모두를 향해 이기는 사람들이 될 것을 도전하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는 말씀을 순간마다 기억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기는 자들’의 대열에 설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의 모든 것은 새롭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것이 현재 세상과의 연속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몸과는 다르나 연속성이 배제되지 않은 새로움을 얻을 것이 분명하다. 

‘성전’은 단순히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의 백성들의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존재로 나타나 있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믿는 이들의 모든 소망함의 성취된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이기는 자들, 곧 그리스도의 참 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사진은 초대교회의 하나인 사데교회의 유적과 어느 지하교회의 입구 모습.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또 다른 성경 속의 말씀을 통해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한 시대이다. 새 예루살렘이 우리 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리 모두를 향해 이기는 자들이 될 것을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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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새 하늘과 새 땅'

-이사야 65장과 계시록 21장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은 신구약 성경에 모두 4회 나온다. 예샤야후(이사야)서 65장 17절과 66장 22절, 페트로B서(벧후) 3장 13절, 요한계시록 21장 1절 등이다. 이 가운데 예샤야후 66'22와 페트로B 3'13은 각각 따로 특기할 만한, 또는 서로 대조할 만한 어떤 뚜렷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예샤 65'17과 요계 21'1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보인다. 한 번 비교해 보자.

먼저 예샤야후서 65장에 나타나는 해당 부분의 히브리어 원문을 보겠다:

예샤야후 65'1

כִּֽי־ הִנְנִ֥י בֹורֵ֛א שָׁמַ֥יִם חֲדָשִׁ֖ים וָאָ֣רֶץ חֲדָשָׁ֑ה וְלֹ֤א תִזָּכַ֙רְנָה֙ הָרִ֣אשֹׁנֹ֔ות וְלֹ֥א תַעֲלֶ֖ינָה עַל־ לֵֽב׃ 

(음역) 키-히네 보레 샤마임 하다쉼 봐예레츠. 하다샤 베ㄹ로 티짜카르나 하리쇼노트 베ㄹ로 타알레나 (알-렙...)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사역)

다음은 계시록 21'1의 그리스어 원문이다.

Καὶ εἶδον 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ῆν καινήν· ὁ γὰρ πρῶτος οὐρανὸς καὶ ἡ πρώτη γῆ ἀπῆλθαν, καὶ ἡ θάλασσα οὐκ ἔστιν ἔτι.

(음역) 카이 에이돈 우라논 카이논 카이 겐 카이넨. 호 가르 프로토스 우라노스 카이 헤 프로테 게 아펠ㅌ한, 카이 헤 ㅌ할라사 우크 에스틴 에티.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첫 하늘과 첫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있지 않았다."

둘의 큰 차이

위 두 성구는 표면상 아주 비슷하거나 거의 같은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전자는 '내가'(하나님이) 창조하신다고 밝히셨다. 그래서 이전의 땅과 하늘은 기억나거나 생각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거기 비해 후자인 이 계시록의 새 하늘과 땅은 새로 창조하시기보다 이미 어디엔가 존재해온 것이 새로 나타나 있는 것을 기자(사도 요한)가 비로소 바라보고 있다. 비록 기존해왔지만, 낡은 옛 하늘과 옛 땅이 아니다! 태초에 창조된 첫(옛) 하늘과 첫 땅(즉 창세기에서 기록된 천지 창조 때의)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이 첫 것이 사라진 뒤에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예샤 65장의 새 하늘, 새 땅과 요계 21장의 새 하늘, 새 땅은 명칭만 같을 뿐, 적어도 개념상 어렴풋이 서로 다른 존재임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본문을 계속 읽어 나가다보면, 둘의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예샤야후서 65장의 이 새 하늘, 새 땅에서는 죽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20절이 그렇게 말해 준다.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와 제 명대로 다 살지 못한 채 죽는 노인이 없다고 했으니, 바꿔 말하면 넉넉히 살다 죽는 사람들은 있다는 얘기가 된다. 
즉 불사는 아니라
는 말이다.

거기서는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불러준다고 하니까, 백 살 넘어 죽는 사람은 있다는 얘기가 되고, 백 살이 채 못 되어 죽는 사람들은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이니, 바꿔 말하면 저주를 받았든 어떻든 이 새 하늘 새 땅에서는 그런 조기사망자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받아야지, 상징적으로 받으면 안 된다!

바로 그 점이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의 모든 것은 수적 개념을 초월하여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하고 누리기 

다음으로 예샤야후서(65'21,22)의 이 새 하늘 새 땅의 거주자들은 자기가 살 집을 짓고 살고, 포도나무 등 과실수를 심어 그 열매를 먹을 것이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평소 지상사회에서 당했던 것처럼 자신이 지은 집과 거둔 농산물을 남에게 뺏기거나 넘겨주게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처지는 옛 하늘, 옛 땅에서 수시로 벌어지고 겪던 일이다(참고: 전도서 2'18,21; 6'2).

이 거주자들의 수명은 나무의 수명과도 같이 길고, 자신이 일한 대로 길이길이 누릴 것이라고 했다. 즉(23절) 헛수고를 하거나 앗기지 않은 채, 하나님의 복된 이들로서 또한 그 후예로서 대대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점들이 옛 하늘 아래, 옛 땅에서 살던 삶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들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한가? 그것은 바로 계시록 20장에 나타난 천년왕국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예샤야후 65장의 새 하늘, 새 땅과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은 분명히 서로 구분되지만, 전자의 새 하늘 새 땅은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과 같다는 점을 말이다.

이 왕국에서는 사람의 수명이 나무의 수명과 같다는 말씀이 이를 입증해 준다. 세계에서 가장 장수해온 나무의 수명은 무려 약 5000년이나 된다(강털소나무-Bristlecone pine tree가 그렇다. https://en.wikipedia.org/wiki/Bristlecone_pine )! 반 만 년 동안 지구촌의 삶을 지켜 봐 왔다는 얘기다. 그처럼, 사람이 1000년을 산다는 것이 이 천년왕국에서는 거의 평균적인 이야기다.

천년왕국에서의 수명

돌이켜 보자. 인류 초기 시대에 인류의 조상들의 수명은 거의 1000년씩이었다. 첫 사람 아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큰 죄를 짓고도 무려 930세를 살았다. 특히 아담에게 (순교자인 둘째 아들 아벨 대신) 주신 착한 아들 셑(셋)의 후손 중 머투쉘라(므두셀라)는 인류의 최장수자로서 969세를 누렸다!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지 않는가? 아무튼 당시 인류의 수명이 보통 800~950년 안팎이었다(참고: 창세기 5'3~32). 지구촌 홍수 당시 방주를 지은 의인인 노아 역시 950세를 향유(享有)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명백한 사실은 천년왕국은 어디까지나 천년왕국이지, 만년왕국이거나 무한하고 영원한 왕국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한하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인류의 최장수명은 1000세를 넘을 수 없다. 길어봤자 천 살이다.

과연 이 천년왕국의 행복한 시민들은 누구이며 천 년동안 무엇을 할까? 그들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하나님 말씀 때문에 목벰을 당한 영혼들, 그리고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로 이들이 크리스토(그리스도)님과 함께 천 년 간 통치를 하게 된다. 이들의 삶은 곧 첫째 부활에 속한다. 이들은 또 하나님과 크리스토님의 사제(제사장)들로서 천 년 간 온통 즐거움과 기쁨으로 섬기게 된다! 

반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죽은 나머지 사람들은 천 년이 다 차기까지 살지 못하고 있다. 즉 심판 때까지 부활이 없는 것이다. 

천년왕국 시민들에게 한 가지 더 좋은 것은 마귀의 유혹이 없고 따라서 죄 없는 삶을 누린다는 점이다. 그 지긋지긋한 죄 말이다. 어찌 그게 가능할까? 천 년 동안 사탄은 무저갱(無底坑)에 던져져 갇혀 있다가, 천 년이 다 차고 나면 잠시 놓여나와,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서 싸움을 붙이게 된다. 이들은 성도들의 진영과 주님이 사랑하시는 성을 포위하지만,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다 태워져 버리고, 마귀는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진다. 사탄의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거기 함께 하여 길이길이 괴로움을 받게 된다.

그 후엔 심판의 부활이 전개된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영들은 심판을 받아 사망 및 쉐올(Sheol)과 함께 불 못에 던져진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궁극적인 영원한 새 하늘 새 땅

그러나 거룩한 이들은 최후의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샬렘에서 길이 영복(永福)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계시록 21-22장 참조). 할렐루야!

간이 지배하고 지배받는 헌 하늘, 헌 땅의 유한한 곳이 아니라, 정말 하늘의 무한하고 영원한 곳이기 때문이다. 
거기는 생명수 강물이 있고, 그 좌우 강가에 자라면서 열매를 맺어 만국을 치료하는 생명나무들이 있고, 다시는 저주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궁극적인 새 하늘 새 땅에는 밤도 없고, 등불과 햇빛도 필요가 없다! 그 하늘 성엔 어린양의 피에 자기 겉옷을 빤 복된 성도들만 들어가며, 개들과 점술가들, 음행자들, 살인자들, 우상숭배자들, 거짓말쟁이들은 들어가지 못한다(요계 22'14-15).



이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의 발산으로 창조됐고, 그 천지만물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고 있었으며,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순복하며, 그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하고, 찬양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상태에서,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힘을 쌓아서, 다른 존재들을 밟아 버리는, 그런 상태로 떨어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그것을 재통일! 에나케팔라이오! 재통일하시기로 하신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발산적인 그 영광을, 효과적인 영광으로 충만히 드러내고, 그 분께 순종하며, 그분을 자랑하며, 그분을 찬양하는 상태로, 회복시키기로 한 거란 말이죠. 그게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인 거예요.

그래서 이사야서에 보면, 그렇게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의 그 하모니를,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도 물리지 않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공존하고, 이렇게 표현을 한 거예요. 다시 회복되는 거란 말이죠. 그게 그 통일이!

그런데 그 만물이 인간의 타락으로 또 저주를 받으면 안 되죠? 원래 그렇게 만들어 놨는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게 확 왜곡되어 버린 거 아닙니까? 이제는 인간이 타락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절대 타락할 수 없는 인간을 새롭게 창조해 내시기로 한 거예요. 그게 이제 구원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격 안에서, 이제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며, 우리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여러분의 이성(理性) 안에서 가르치시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래서 여러분이 이제는, 이 이성(理性)을 갖고 배워서, ‘나는 이제 절대 타락하면 안 돼! 타락하면 이렇게 엄청난 고통 속으로 또 들어가는 거니까, 나는 절대 타락하면 안 돼!’라는 것을, 이 땅에서 배우고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하나도 안 하고, 그냥 자기 소원이나 들어달라고 그러고, 문제나 해결해 달라고 그러고, 기적이나 일으켜 달라고 그러니까, 이게 어찌 기독교이겠느냐? 제가 그렇게 통분하는 거예요. 오히려 그런 것들은, 여러분의 거룩을 막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그렇게 새로운 사람들을 창조해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거예요. 그리고는 어떤 한 무리를 창조해내셔서,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렇게 새롭게 통일이 되어서, 하나로 통일이 되어서,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그 충만하신 영광을 반사해내는, 그런 자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교회 안에서 상징적으로 이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교회가 예수님을 머리로 한 몸으로 묶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태초의 천지만물이었다니깐요. 그걸 하나님께 구원받은 교회들이, 이 땅에서 상징적으로 모형으로 보여주고 오라!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왜 그렇게 싸우냐 말이에요? 도대체!! 뭘 하다가는 거냐 말이에요? 우리가 뭘 하다가? 기독교가 그 거라니깐요 에나케팔라이오! 재통일된,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이 땅에서 보여주고 가는 거예요. 모형으로! 그래서 자꾸 죽는 거예요. 진짜 교회들은, 자꾸 죽는 거예요. 자꾸 낮아지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거 열심히 연습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그런 타락한 옛 하늘과 옛 땅의 질서와 원리에서 벗어나서, 자신이 낮추어지고, 자신이 비워지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하나님나라의 질서와 원리 안에서, 살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애초에 의도된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러한 존재들을 생육시키고 번성케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방법과 수단으로 쓰이는 거예요. 그래,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많이 이제 나타나야 돼요. 그게 아담에게 주어졌던, 애초의 목적이었단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거룩하게 사시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런데 은이빨, 금이빨로 만들고 앉아 있고, 거품 물고 쓰러지게 하고, 이게 뭐냐 말이에요? 도대체!! 그게 어디서 나온 기독교냐 말이에요? 도대체 그게!! ‘아픈 데 손 얹으세요! 주님이 병 낫게 해주실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거룩과, 이 창조의 목적으로 만물이 돌아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병 안 낫게 해주면, ‘하나님 미워!’ 그럴 거예요? 그 사망조차도 극복이 안 된 거예요. 지금 자기의 숨이 끊어지는 걸, 아직도 괴로워하고 무서워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하나님나라의 질서와 원리 안에서 살게 되는 그 곳을,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이사야서 43장 7절 보세요.

(이사야 43:7)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여러분을 왜 만들었다고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었다니깐요. 그러니까 기고만장하지 마시란 말이에요. 너무 건방떨지 마시란 말이에요. 우리는 그냥 하나님만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분을 알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영생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아들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영생이!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너무 모르니까, 겁 없이 자꾸 뭘 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 앞에서! ‘이거 줘! 저거 줘! 안 주면 미워할 거야!’ 이게 기독교가 되어 버린 거예요. 에베소서 1장 11절 보세요.

(에베소서 1:11-12)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나오죠? 이게 효과적 영광이란 말이에요. 여러분을 구원하신 건, 여러분을 행복하고, 잘 먹고 잘 살게 만들어 주려고가 아니라, 원래 태초에 지어진 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그 영광을 받아, 반사할 수 있는 그런 자로 만드는 거예요. 찬송하는 자로 만드는 것! 그게 목적이란 말입니다. 그게 안 나오면, 회개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에베소서 1장 14절 보세요.

(에베소서 1:14)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구속하신 이유가 뭐라고요? 그에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이 땅에서, 그의 영광을 찬미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자로, 그렇게 차곡차곡 지어져 가는 거예요. 지어져 가는 거예요. 그게 ‘성화(聖化)’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갈라디아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게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랑과 온유와, 희락과 화평과 절제, 긍휼, 자비 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서 나오는 거! 그게 찬양이라니깐요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라니깐요. 발산적 영광에 반응해서, 효과적 영광을 내놓는 거! 이것이 찬양인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인 거예요. 여러분!

진짜 그 하나님을 알고, 우리의 신분을 진짜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하자는 거예요. 열심히 배우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그래서 이 땅에 것에서 눈을 돌리자는 거예요. 하늘의 것으로!

어떤 사람이 풀빵을 팔고 있었는데, 아주 잘 됐어요. 그런데 그 옆에, 똑같은 풀빵 장수가 또 왔어! 그런데 얘는, 나보다 한 개씩 더 주고, 맛도 더 좋아요. 그래서 손님들이 전부 그리로 몰려갔어요. 어떻게 됐겠습니까? 멱살 잡고 싸웠죠. ‘골목이 여기 하나야? 왜 하필 여기 와서, 여기 와서 풀빵을 팔아?’ 상대방이 뭐라 그랬겠어요? ‘이 골목이 네 꺼야?’ 그래서 결국 결판을 못 짓고, ‘그냥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히, 열심히 일해서, 공정한 경쟁을 하자!’ 그렇게 결론을 맺었어요.

그리고 잘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또 왔어! 풀빵 장수가! 그래 간판을 딱 걸고 왔는데, ‘우리 풀빵은 저 두 집 풀빵과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빠다도 미제만 쓰고, 밀가루도 국산만 쓰고, 앙꼬도 두 배씩 넣어줍니다.’ 이렇게 써놓은 거예요. 열 받죠? 그래서 셋이 인제 멱살 잡고 싸웠어요.

그런데 갑자기 검은색 세단이, 승용차가 딱 골목을 들어오더니, 그중에 한 사람에게, ‘청와대에서 나왔습니다. 당신이 다음 주부로, 우리나라에 국무총리로 임명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쳐보세요. 이거 실제 있었던 일 아니에요. (하하하) 제가 이야기하면 전부 사실로 믿어서! 제가 이런 걸 생각해 내느라고 머리가 빠져요. 그 사람이 그 이야기를 듣고, ‘그래, 그건 그 거고, 잠깐만 있어봐! 내가 이 풀빵 장수들을 요절을 내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내가 그 이야기 들을게.’ 그러겠습니까?

이제는, 자기의 품위를 지켜야 하는 존재가 된 거예요. 국무총리가 됐다 말입니다. 그 사람은? 곧 손을 털겠죠. ‘아! 창피하게 이게 무슨 꼴이야? 딴 사람들 앞에서! 국무총리인데! 얘! 너 이리로 와봐! 이 풀빵 리아카 너 가져! 이 연탄불 이거 너 가져! 그리고 싸우지들 좀 마. 그리고 싸우지 마.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그렇게 싸우니?’ 그럴 거란 말이죠, 그죠?

그런데 여러분은,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분들이라면서요? 여러분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왕노릇 하시는 분들이라며요?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딸들이라면서요? 그런데 여전히 풀빵 리아커 갖고 싸우고 있는 거예요. 지금요! 그러니까 ‘내가 다시 올 때에, 그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그러는 거예요. 주님이! ‘내가 믿음을 보겠느냐?’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이 보기에도 믿음이 있습니까? 이 땅에! 뭔 믿음이 이래요? 여전히 풀빵 리아커 갖고 싸우고 있는 이게, 믿음이란 말입니까?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는, 정말 살아야 할 삶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자신이 새로운 창조물이 됐다면, 이제 그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받아, 충만하게 받아! 어떻게 받아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잖아요? 그죠? 받아서, 그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거예요. 그리고 원래의 창조의 목적대로, 다른 자들이 그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목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도록, 기여하는 삶을 사시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걸 성화라고 하는 것이고, 그게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기독교인 것입니다.

여러분! 새 하늘과 새 땅에, 정말 들어가고 싶으세요? 오늘부터 그 나라의 삶을 사십시오. 그래야 들어갈 수 있어요. 기도하겠습니다.


죽은 자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누가복음 7장 11-17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에 지나가시다 한 죽은자를 메고 나오는 것을 보시고 죽은 자의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서 일어나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2. 발해야 할 빛

본문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말라기 4장2절에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78-79절에는 "돋는 해가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9절에는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는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상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본문에 네 빛이 이르렀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의의 태양으로 세상에 내려 오셔서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복음의 빛, 의의 빛, 선한 빛, 사랑의 빛을 비취시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한 성도들도 그스도와 같은 빛을 발해야 한다는 말씀인줄 압니다.

① 복음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4절에 "이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 했고 6절에는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상 말씀이 복음의 빛을 증명합니다.
복음이라 하면 기쁜 소식을 말하는데 이 기쁜 소식은 빛에 속합니다. 그러기에 기쁜 소식이 있어 마음이 기쁠 때에 얼굴이 밝아지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빛으로 오셨으므로 천국 복음을 전하러 가시는 곳 마다 병든 자의 고침이 되시고 약한 자의 강함이 되시며 고통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시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으시고 슬픈 자에게 위로가 되시고 죽은 자의 부활이 되셨으니 (마4:21-24 , 요 11:43-44) 이것이 바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의 빛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이러한 기쁜 일들이 나타나게 될 때 복음의 빛을 발하는 것이 됩니다.

② 의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잠언 4장 8절에 "의인의 길은 돋는 햇빛 같이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3절에는 "그 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의인들의 생활은 빛을 발하게 되는데 켜서 비취는 정도의 작은 빛이 아니고 온 세계를 비취는 해와 같은 큰 빛으로서 넓게 그리고 멀리 발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 의인 세 사람은 노아,다니엘, 욥 (겔 14:14) 입니다. 그 의인들의 생활은 과연 넓고 멀리 비취었으니 그들의 사적은 성경에 담겨 온 세계에 알려질 뿐만 아니라 수 천년을 두고 전해 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정의로운 생활을 할 때 빛을 발하게 됩니다.

③ 선한 빛을 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4-16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9절에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을 보아 성도의 착한 행실이 빛을 발하는 것이 되는데 이 착한 행실이란 남을 괴롭게 하지 않고 남을 이롭게 하되 마음과 말과 몸과 물질로 도와 주는 행활입니다. 이러한 생활로 빛을 발한 사람은 누가복음 10장 33-36절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 인입니다. 지금도 성들은 선한 생활로 빛을 발해야 합니다.

④ 사랑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8-10절에 "다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 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데 있는 자요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인 동시 사랑의 종교입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세상적이요 정욕적인 사랑 즉 댓가를 바라고 하는 조건적인 사랑을 말함이 아니요 다만 예수님을 본받아 댓가를 바라지 아니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는 정도였습니다.(행 20:24) 이것이 바로 愛人 如己의 사랑이었습니다.
역대 성인들 즉 성푸랜시스, 썬다싱, 슈바이쳐 등도 애인 여기의 사랑을 실천한 것으로 빛을 발한 자들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특별한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하셨습니다.
로마서 12장 20절에는 바울 사도가 원수를 사랑하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하면 그 머리에 숯불을 놓는 것 같으리라" 고했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사랑을 실천한 것으로 빛을 발한 자들은 다윗과 한국에 손양원 목사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따라다니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주어 졌는데도 죽이지 않고 증거물을 보이는 것으로 회개하게 하였고 (삼상 24:1-19) 세계의 자랑 거리가 되는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 손양원 목사님을 보라 ! 자기의 사랑하는 혈육인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고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아들로 받아드리지 안했던가 이렇게 원수를 사랑하는 특별한 사랑의 실천으로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고로 우리 성도들은 자는 잠에서, 병든 자는 병에서 , 죽은 자는 죽음에서 일어나 복음의 빛, 의의 빛, 선의 빛, 사랑의 빛을 발하되 제일 먼저 가정에 발하여 가정의 반목, 질시, 불행을 몰아내고 생명과 평화만이 넘치는 즐겁고 밝은 가정을 만들고 나아가서는 사회에 발하여 사회의 시기, 질투, 음난, 도적, 살인, 사기, 횡령, 강도, 절도, 우상숭배 등을 몰아내고 밝은 사회를 만들 때 하늘의 뜻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나라 즉 천국의 모형을 보여 온 세계에 이 빛을 발하게 될 때에 여름 밤에 전기 불 빛을 보고 봉접이 수 없이 날아오는 것과 같이 우리나라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일어나 빛을 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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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토) 이사야 63-6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하늘과 새 땅(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Behold, I will create new heavens and a new earth. The former things will not be remembered, nor will they come to mind.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용어가 신구약 성경에서 사용된 것은 4구절입니다.

이사야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Behold, I will create new heavens and a new earth. The former things will not be remembered, nor will they come to mind.

이사야 66:2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As the new heavens and the new earth that I make will endure before me," declares the LORD, "so will your name and descendants endure.

베드로후서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을 바라보도다.
But in keeping with his promise we are looking forward to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the home of righteousness.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Then I saw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for the first heaven and the first earth had passed away, and there was no longer any sea.

4구절 중에서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하는 구절은 이사야 65:17요한계시록 21:1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66:22베드로후서 3:13은 뚜렷한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65:17과 요한계시록 21:1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 개의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주제를 정하고 살펴보겠습니다(이사야 65:17, 요한계시록 21:1).

두 구절의 차이를 찾기 위하여 원문을 소개합니다.

이사야 65:1   

כִּֽי־ הִנְנִ֥י בֹורֵ֛א שָׁמַ֥יִם חֲדָשִׁ֖ים וָאָ֣רֶץ חֲדָשָׁ֑ה וְלֹ֤א תִזָּכַ֙רְנָה֙ הָרִ֣אשֹׁנֹ֔ות וְלֹ֥א תַעֲלֶ֖ינָה עַל־ לֵֽב׃ 

(음역) 키-히네 보레 샤마임 하다쉼 봐예레츠. 하다샤 베ㄹ로 티짜카르나 하리쇼노트 베ㄹ로 타알레나 (알-렙...)

(사역)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사역)

요한계시록 21:1   

Καὶ εἶδον 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ῆν καινήν· ὁ γὰρ πρῶτος οὐρανὸς καὶ ἡ πρώτη γῆ ἀπῆλθαν, καὶ ἡ θάλασσα οὐκ ἔστιν ἔτι.

(음역) 카이 에이돈 우라논 카이논 카이 겐 카이넨. 호 가르 프로토스 우라노스 카이 헤 프로테 게 아펠ㅌ한, 카이 헤 ㅌ할라사 우크 에스틴 에티. 

(사역)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첫 하늘과 첫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있지 않았다."

이사야 65:1과 요한계시록 21:1의 차이

구약 이사야서 65:1에서는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샤마임 하다쉼 봐 예레츠>

새한글 성경 / 
(하나님)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 것들은 기억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 요한계시록 21:1에서는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우라논 카이논 카이 겐 카이넨>

새한글 성경 / 또 나는 보았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었습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져 버리고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다도 더는 없습니다. 

구약 이사야서 65:1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약 요한계시록 21:1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합니다.

두 구절에서 차이가 무엇입니까?
창조한다과 보았다라는 동사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에서의 새 하늘 새 땅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강조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미 만들어진(창조 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사야서와 요한계시록에서의 차이

두 성구는 표면상 아주 비슷하거나 거의 같은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내가'(하나님이) 창조하신다고 밝히셨다. 
그래서 이전의 땅과 하늘은 기억나거나 생각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땅은 새로 창조하시기보다 이미 어디엔가 존재해온 것이 새로 나타나 있는 것을 기자(사도 요한)가 비로소 바라보고 있다. 

비록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옛 하늘과 옛 땅이 아니다. 
태초에 창조된 첫(옛) 하늘과 첫 땅(즉 창세기에서 기록된 천지 창조 때의)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이 첫 것이 사라진 뒤에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65장의 새 하늘, 새 땅과 요한계시록 21장의 새 하늘, 새 땅은 명칭만 같을 뿐, 적어도 개념상 서로 다른 것임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본문을 계속 읽어 나가다보면, 둘의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사야 65장의 이 새 하늘, 새 땅에서는 죽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이사야 65:20).

"거기는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새한글 성경 / 거기에서는 며칠밖에 못 사는 젖먹이가 더는 없을 것이다. 자기 살날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100세에 죽는 사람을 소년이라 하고, 100세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은 저주받았다 할 것이다.

20절이 그렇게 말해 준다.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와 제 명대로 다 살지 못한 채 죽는 노인이 없다고 했으니, 바꿔 말하면 넉넉히 살다 죽는 사람들은 있다는 얘기가 된다. 즉 불사는 아니라는 말이다.

거기서는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불러준다고 하니까, 백 살 넘어 죽는 사람은 있다는 얘기가 되고, 백 살이 채 못 되어 죽는 사람들은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이니, 바꿔 말하면 저주를 받았든 어떻든 이 새 하늘 새 땅에서는 그런 조기사망자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받아야지, 상징적으로 받으면 안 됩니다. 

바로 그 점이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의 모든 것은 수적 개념을 초월하여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하고 누리기 

이사야 65:21-22 /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 
                             그들의 건축한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


이 새 하늘 새 땅의 거주자들은 자기가 살 집을 짓고 살고, 포도나무 등 과실수를 심어 그 열매를 먹을 것이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평소 지상사회에서 당했던 것처럼 자신이 지은 집과 거둔 농산물을 남에게 뺏기거나 넘겨주게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처지는 옛 하늘, 옛 땅에서 수시로 벌어지고 겪던 일이다(참고 / 전도서 2:18, 21. 6:2).

전도서 2:18, 21
내가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전도서 6:2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이 거주자들의 수명은 나무의 수명과도 같이 길고, 자신이 일한 대로 길이길이 누릴 것이라고 했다. 
즉(23절) 헛수고를 하거나 앗기지 않은 채, 하나님의 복된 이들로서 또한 그 후예로서 대대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점들이 옛 하늘 아래, 옛 땅에서 살던 삶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들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한가? 
그것은 바로 계시록 20장에 나타난 천년왕국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이사야 65장의 새 하늘, 새 땅과 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은 분명히 서로 구분되지만, 전자의 새 하늘 새 땅은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과 같다는 점을 말이다.

이 왕국에서는 사람의 수명이 나무의 수명과 같다는 말씀이 이를 입증해 준다. 
세계에서 가장 장수해온 나무의 수명은 무려 약 5000년이나 된다(강털소나무-Bristlecone pine tree가 그렇다. 
https://en.wikipedia.org/wiki/Bristlecone_pine 

반 만 년 동안 지구촌의 삶을 지켜 봐 왔다는 얘기다. 
그처럼, 사람이 1000년을 산다는 것이 이 천년왕국에서는 거의 평균적인 이야기다.

천년왕국에서의 수명

돌이켜 보자. 인류 초기 시대에 인류의 조상들의 수명은 거의 1000년씩이었다. 첫 사람 아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큰 죄를 짓고도 무려 930세를 살았다. 특히 아담에게 (순교자인 둘째 아들 아벨 대신) 주신 착한 아들 셑(셋)의 후손 중 머투쉘라(므두셀라)는 인류의 최장수자로서 969세를 누렸다!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지 않는가? 아무튼 당시 인류의 수명이 보통 800~950년 안팎이었다(참고: 창세기 5'3~32). 지구촌 홍수 당시 방주를 지은 의인인 노아 역시 950세를 향유(享有)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명백한 사실은 천년왕국은 어디까지나 천년왕국이지, 만년왕국이거나 무한하고 영원한 왕국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한하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인류의 최장수명은 1000세를 넘을 수 없다. 길어봤자 천 살이다.

과연 이 천년왕국의 행복한 시민들은 누구이며 천 년동안 무엇을 할까? 그들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하나님 말씀 때문에 목벰을 당한 영혼들, 그리고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로 이들이 크리스토(그리스도)님과 함께 천 년 간 통치를 하게 된다. 이들의 삶은 곧 첫째 부활에 속한다. 이들은 또 하나님과 크리스토님의 사제(제사장)들로서 천 년 간 온통 즐거움과 기쁨으로 섬기게 된다! 

반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죽은 나머지 사람들은 천 년이 다 차기까지 살지 못하고 있다. 즉 심판 때까지 부활이 없는 것이다. 

천년왕국 시민들에게 한 가지 더 좋은 것은 마귀의 유혹이 없고 따라서 죄 없는 삶을 누린다는 점이다. 그 지긋지긋한 죄 말이다. 어찌 그게 가능할까? 천 년 동안 사탄은 무저갱(無底坑)에 던져져 갇혀 있다가, 천 년이 다 차고 나면 잠시 놓여나와,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서 싸움을 붙이게 된다. 이들은 성도들의 진영과 주님이 사랑하시는 성을 포위하지만,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다 태워져 버리고, 마귀는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진다. 사탄의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거기 함께 하여 길이길이 괴로움을 받게 된다.

그 후엔 심판의 부활이 전개된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영들은 심판을 받아 사망 및 쉐올(Sheol)과 함께 불 못에 던져진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궁극적인 영원한 새 하늘 새 땅

그러나 거룩한 이들은 최후의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샬렘에서 길이 영복(永福)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계시록 21-22장 참조). 

간이 지배하고 지배받는 헌 하늘, 헌 땅의 유한한 곳이 아니라, 정말 하늘의 무한하고 영원한 곳이기 때문이다. 
거기는 생명수 강물이 있고, 그 좌우 강가에 자라면서 열매를 맺어 만국을 치료하는 생명나무들이 있고, 다시는 저주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궁극적인 새 하늘 새 땅에는 밤도 없고, 등불과 햇빛도 필요가 없다. 
그 하늘 성엔 어린양의 피에 자기 겉옷을 빤 복된 성도들만 들어가며, 개들과 점술가들, 음행자들, 살인자들, 우상숭배자들, 거짓말쟁이들은 들어가지 못한다(요한계시록 22: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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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늘과 새땅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천국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은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의 자세한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말의 사건들 이후에 지금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신자들의 영원히 처소는 새 땅이 될 것입니다. 
새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입니다. 
바로 이 새 땅에 새로운 예루살렘, 즉, 하늘의 도성이 자리를 잡게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땅 위에 진주 문들과 금 길이 있게 될 것입니다.

천국(새 땅)은 우리가 영광스럽게 된 육체를 가지고 거하게 될 물리적인 장소입니다(고전 15:35-58). 
“구름 속”에 있는 천국의 개념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공중을 떠다니게 되는 영들이 될 것”이라는 사상 또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신자들이 경험하게 될 천국은 우리가 거하게 될 새롭고 완전한 행성일 것입니다. 
새 땅에는 죄, 악, 질병, 고통, 죽음이 없을 것입니다. 
새 땅은 지금의 지구와 비슷하든지, 아니면 아마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가 재창조되어 죄의 저주가 없는 새 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새 하늘은 어떻습니까? 
고대의 사고에서는, ‘천국’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역뿐만 아니라 하늘과 우주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21장 1절이 새 하늘을 언급할 때, 그것은 온 우주(새 땅, 새 하늘, 새 우주)가 새로 창조될 것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하나님의 하늘 역시 물리적이든 영적이든,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에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재창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새 하늘에 접근할 수 있을까요? 
가능할 지 모르지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천국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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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1장 : 새 하늘과 새 땅

관찰 : 본문 읽기 (요한계시록 21:1-27)

요한계시록 21장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을 다룹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과 영원한 왕국을 상징합니다.

1. 새 하늘과 새 땅 (21:1-8)

  1.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21:1-2)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또 내가 보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거처 (21:3-4)
    •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 모든 눈물을 그들의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
  3.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 (21:5-6)
    •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기록하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라 하시고.
    •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리니.
  4. 성도들의 상급과 불신자들의 운명 (21:7-8)
    •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2. 새 예루살렘의 환상 (21:9-27)

  1. 신부의 모습 (21:9-11)
    •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광채가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2. 성의 성벽과 문 (21:12-14)
    • 크고 높은 성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지기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에 이름이 쓰여 있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 그 성에 성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3. 성의 크기와 재료 (21:15-21)
    •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타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 그 성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 그 성벽은 벽옥으로 되어 있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황옥수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둘째는 자수정이라.
    •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진주요. 그 성의 길은 정금이니 맑은 유리 같더라.
  4.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21:22-27)
    • 성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 그 성은 해나 달의 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 성문들은 낮에 도무지 닫히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주요 구절 / 요한계시록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들의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

해석 / 새 하늘과 새 땅의 의미

1. 새 하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1. 새로운 시작 : 처음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새로운 창조가 시작됩니다.
  2. 하나님의 장막 :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완전한 회복 : 사망과 슬픔이 없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됩니다.

2.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백성들의 영원한 거처를 상징합니다.

  1. 하나님의 영광 :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합니다.
  2. 완전한 성 : 성의 크기와 재료는 완전함과 영광을 나타냅니다.
  3. 성전이 없음 : 하나님과 어린 양이 직접 성전이 됩니다.
  4. 영원한 빛 :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을 비추어 밤이 없습니다.

3. 성도들의 상급과 불신자들의 운명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상급을 주시고,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십니다.

  1. 성도의 상급 :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며, 그의 아들이 됩니다.
  2. 불신자의 심판 : 불신자들은 불못에 던져져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

적용 / 새 하늘과 새 땅의 교훈을 실천하기

1.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기대하기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기대하며 그의 나라를 소망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임재 소망 :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며 그의 영광을 소망해야 합니다.
  2. 영원한 삶 소망 : 우리는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하나님과 함께 거할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2. 성도로서의 삶을 실천하기

우리는 성도로서의 삶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1. 성도의 삶 : 우리는 성도로서의 삶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2. 옳은 행실 : 우리는 옳은 행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심판을 경외하기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외하며 그의 공의를 인정해야 합니다.

  1. 심판의 두려움 :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그의 공의를 인정해야 합니다.
  2. 공의의 찬양 : 하나님의 공의를 찬양하며 그의 심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결론

요한계시록 21장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과 영원한 왕국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기대하며 그의 나라를 소망하고, 성도로서의 삶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외하며 그의 공의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본이 되시며, 그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의 삶을 조정하고 성장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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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요한계시록  21:1-8)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전 1:9-10). 매우 공감되는 말이다. 새 것은 금세 헌 것이 되고, 삶은 이미 있던 것의 재탕, 이미 한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5절).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약속하셨다(벧전 1:4). 

미국 CCM 밴드 머시미의 리더 바트 밀라드는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이란 잘 알려진 노래로 하나님과 함께할 천국을 단지 상상할 뿐이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세상을 단지 상상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성경의 마지막 계시를 통하여 우리가 바라는 천국의 윤곽을 보여주시고, 우리가 사모하는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볼 수 있게 하셨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기를 구한다. 천국을 더욱 사모하도록, 그래서 세상에 미련을 두게 만드는 온갖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자가 되게 하시기를 바란다.

1. 새 하늘과 새 땅의 특징(1-4절)

먼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천국의 수도인 새 예루살렘 도성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모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요한이 직접 본 장면, 직접 들은 음성에 따른 것이다(“또 내가…보니”, “또 내가 보매”, “내가 들으니”, 1, 2, 3절). 세상엔 천국을 보고 들었다는 수많은 거짓 증언이 존재하고 인기를 끌지만, 정작 진실로 천국을 보고 들은 사도의 유일한 증언에 주목하는 자는 드물다. 온전히 신뢰할 수 있고 바랄 수 있는 천국의 비밀이 여기 있다.

천국의 구체적인 특징은 9절부터 다음 장 5절까지 묘사된다. 이를 요약한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천국의 주요한 특징은 바로 ‘새롭다’는 것이다. 하늘, 땅, 예루살렘 등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그런데 새롭게 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① 완전히 창조한다 : 

창조를 ’정화’로 보는 사람이 있다. 
타락한 피조세계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고치시는 것이다(불). 또 다른 해석은 ‘새 창조’이다. 옛 세계를 완전히 제거하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사용된 “(new)”의 의미는 ‘가치나 매력에서 우월하다’, ‘옛것보다 낫다’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진 상태, 새롭게 창조된 세상에 바다해와 달이 없는 것을 볼때(23절), 하나님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실 것이다. 기존과 유사성을 갖지만, 완전히 다른 질서와 체계를 가진다.

② 완전히 아름답다 : 

천국의 거룩한 성의 이름은 새 예루살렘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지으신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죄로 인해 바벨론, 로마에게 차례로 함락당하고, 천년 왕국 때 이 땅에 재건되었다가, 영원한 천국에서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영원히 세워진다. 요한은 그 모습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라고 말했다. 크고 웅장하고 견고하고 아름답고 정결한 성으로 영원히 있을 것이다(21:9-22:5). 

③ 완전히 선하다 : 

바다는 하나님 백성을 실족시키는 악의 무리가 출몰하는 곳으로 생각되었던 장소다(계 13:1, 짐승). 하나님은 악의 세력을 모두 불못에 영원히 가두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출몰지 자체를 없애버리신다. 악이 발현할 수도 없고, 악을 발견할 수도 없는 선한 세상을 창조하신다. 선한 세상은 죄도 없고 죄의 결과도 찾아볼 수 없다. 처음 하늘과 땅은 죄로 인해 저주받아 고통과 슬픔과 질병과 사망을 낳았다. 하지만, 새롭게 창조하실 세상엔 다시는 사망, 애통하는 것, 곡하는 것, 아픈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다(4절).

④ 완전히 친밀하다 :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는 ‘새로움’은 선하고 아름다운 만물의 새로움이지만, 그리스도인이 가장 큰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바라봐야 할 ‘새로움’은 하나님과 우리의 완전히 친밀한 관계에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운 광경에 사로잡힌 요한에게 또렷이 들린 하나님의 말씀, 보좌에서큰 음성이 이를 말해줬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3절). 

천국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곳이다. 
과거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광야 장막에서 함께 거하셨다. 
지금 하나님은 자기 백성 교회와 성령으로 함께 거하신다. 
그러나 천국에서 하나님은 완전히 새로운 친밀함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실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사실 하나님 없이는 천국도 없다.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5절: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나님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시고 하늘에서 내려보내 주신다(2절: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영원히 심판하시고 그동안 선을 위해 수고하며 흘렸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신다(4절). 천국은 바로 이 하나님께서 현현으로 자기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 백성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시는 친밀함을 영원히 공유하시는 선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살면서 아쉬운 것이 있을 때만 천국을 생각한다. 집이 없을 때, 아름다운 처소를 바라고, 아프고 슬플 때, 고통과 슬픔이 없는 천국을 생각한다. 괴로울 때 위로와 안식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죄로 넘어질 때, 악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다른 종교 신자들도 바라는 것들이 아닌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히 11:1). 당신이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무언가인가? 아니면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그분 자체인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싶어 천국을 기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윗처럼 자기 영혼에게 하나님만 바랄 것을 요구하라.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2. 새 하늘과 새 땅의 임금(5-6절)

영원한 세상에서 무엇이 새롭게 되는지 살펴봤다면 이제 누가 새롭게 하는지 살펴볼 차례다. 앞서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시고 때가 됐을 때 내려주신다고 했다.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임금으로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

먼저, 그분은 보좌에 앉으셨다(보좌에 앉으신 이, 5절). 보좌는 다스리고 통치하고 심판하는 모든 권세가 있는 왕의 자리다. 그분은 이미 모든 악을 심판하셨고, 이제는 자기 백성과 함께 만물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체시다. 하나님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고 선포하셨다. 거기에다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고 확증하셨다. 반드시 계획하신 그대로 이루신다는 분명한 열심과 의지가 표명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기록하라”고 명령하심으로 변하지 않는 그분의 계획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증하셨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처음 드러난 것이 아니다. 본문이 기록되기 8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예언하셨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사 65:17-18). 그러면서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뜻을 이루리라’ 하였노라”라고 하셨다(사 46:10).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신다는 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주관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본문에서는 이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라고 표현했다(6절). 역사의 시작과 끝,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엡 1:11). 그분이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이루었도다”라고 선언하셨다(직설법 완료). 사람이 하는 일은 아무리 오랜 계획과 많은 노력과 막강한 자원으로 시작해도 쉽게 변경되고 지체되고 폐기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미래에 이루겠다고 선포하신 계획은 이미 완료된 것처럼 정하신 때와 정하신 방식대로 한 치의 오류 없이 성취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으면서도 종말을 불신하는 사람이 있다. 베드로는 말세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조롱하며 정욕대로 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경고했다(벧후 3). 그들은 말씀하신 그대로 천지가 창조되었음을 믿고(창 1), 말씀대로 홍수가 나서 땅이 심판받았음을 믿고(창 6), 지금 보고 있는 하늘과 땅이 말씀으로 붙들려 있다는 것을 믿었지만(히 1:3), 그 말씀대로 처음 만물이 불태워지고 새로운 만물이 창조될 것을 믿지는 않았다.

당신은 믿는가? 하늘과 땅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진실로 믿는 자는 곧 불타버릴 곳에 삶을 투자하지 않는다. 새롭고 영원한 곳에 삶을 투자한다. 썩고 더럽혀지고 쇠하게 될 유업을 바라지 않는다. 영원하고 변함이 없는 유업을 바란다. 당신도 그러한가?

3.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7-8절)

마지막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받게 될 자가 누구인지 살펴보자.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계시록은 하나님 반대편에 선 자들, 마귀를 따르는 자들,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 심판받을 것이며,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의 최종 운명이 둘째 사망이라고 가르쳤다. 

본문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음행하는 자들, 점술가들, 우상 숭배자들,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이라 했다(8절). 

두려워하는 자들”은 환난과 핍박 등 믿음을 시험하는 일을 만나면 두려워 자기 안위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를 가리킨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어떤 사실을 불신하는 자가 아니라 신실하지 않은 자를 의미한다. 여러 가지 유혹에 빠져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깨는 자다. 
흉악한 자들”은 ‘가증한 자들’을 말하며 뒤에 나오는 우상 숭배자들과 같이 하나님 아닌 다른 대상을 경배하는 자들인데, 특별히 여기와 로마서에서만 사용되는 동사가 사용되어 황제 숭배를 허용한 자들과 관련이 있다. 
점술가들” 또한 하나님의 뜻이 아닌 미신적인 뜻을 좇는다는 면에서 일종의 우상숭배자와 같다. 
살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죽이는 일에 가담한 자들이고(특별히 대환난 기간에), “음행하는 자들”과 “거짓말하는…자들”은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사람들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만 믿는 일에 불충한 자들,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지 않고, 충성스럽게 따르지 않는 이들이다. 

반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으로 받는 백성은 “이기는 자”다(7절). 그들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바라고, 믿는 일에 반하는 모든 것과 치열하게 싸워 이기는 자다. 그들은 땅의 지체를 죽이고(골 3:5), 마귀를 대적하고(약 4:7),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요일 2:15). 육신의 정욕에 질 때도 있지만,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기 위해 싸운다. 그들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열렬히 사랑하여 목마른 자다.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6절).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성도에게 편지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렇게 소망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보기 원한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참모습을 본 자들이 그곳에 초막을 짓고 영원히 살기 원했던 것처럼, 그분의 영광스러운 참모습을 보면 우리는 영원히 매료되어 기쁨과 만족을 얻고 친밀한 사랑을 나눌 것이다. 요한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이 당신의 삶을 지금 깨끗하게 하는가? 당신은 누구를 사모하고 무엇을 바라며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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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 새 땅(new earth)은 왜 필요할까?

🌍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땅은 왜 필요할까?

천국, 낙원, 셋째 하늘은 서로 다른 장소일까요? 아니면 같은 곳을 가리키는 표현일까요? 

천국(heaven)은 여러 개의 다른 장소라기보다는, 상급에 따라 배치와 위치가 달라지는 하나의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렇기에 천국, 낙원, 셋째 하늘은 본질적으로 같은 장소이며, 영광과 권세에 따라 중심과 변두리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즉, 최상위 상급을 받은 자들은 중심부에 거주하고, 상급이 적은 자들은 변두리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계 21:5)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1)

새 하늘과 새 땅, 듣기만 해도 마음이 설레며 상상초월하는 신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가 종료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십니다.

  • 현재의 천국(heaven): 죽은 성도의 영혼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 새 하늘(new heaven): 부활한 몸을 입고 들어가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들어갈 새 하늘이 있다면, 굳이 새 땅은 왜 필요할까요?

왜 새 땅이 필요한가?

현재의 땅은 인간이 천국과 지옥을 선택할 수 있는 시험의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선택과 심판이 끝난 이후에는 다시 땅이 필요하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새 하늘과 함께 새 땅도 창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창조의 회복과 완성

하나님은 처음부터 하늘만이 아닌 땅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그 모델입니다. 비록 인간의 죄로 인해 땅은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이 땅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회복을 계획하셨습니다.

새 땅은 이 창조의 완성이며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지 영혼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몸과 영혼이 통합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구원의 최종 모습은 영혼이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몸이 물리적인 공간에서 사는 것을 포함합니다.

2️⃣ 왕 같은 제사장들의 통치 영역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상급에 따라 권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이며, 각기 행성이나 영역을 맡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눅 19:17)

"다시 밤이 없겠고...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계 22:5)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계 5:10)

이 말씀들에서 알 수 있듯, 하나님은 왕이 다스릴 실질적인 영역을 주십니다. 그 공간이 바로 *새 땅*입니다.

3️⃣ 새 예루살렘성과 천국의 본부

"또 내가 보니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2)

새 예루살렘성은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거주하는 영원한 천국의 본부이자 행성들을 통제하는 중심 도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영적인 상징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사하여 내려온 실제적 공간입니다.
하늘과 땅이 완전히 하나로 통합되는 것,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4️⃣ 우주적 통치 질서

계시록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이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계 21:24)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계 21:26)

각 나라의 왕들, 곧 행성과 은하를 맡은 자들이 새 예루살렘을 출입하며 통치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처음 우주에도 셀 수 없는 행성과 은하가 존재했듯,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자는 은하계를, 어떤 자는 행성 여러 개를, 또 어떤 자는 도시나 지역을 맡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상급과 충성의 결과입니다.

5️⃣ 부활의 영광과 영원한 차이

바울은 더 좋은 부활을 바라보며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그것을 발견한 후,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 13:44)

천국은 평등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구원받지만, 모두가 왕은 아닙니다.

일반 백성으로 살 수 있음도 영광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자들은 그에 걸맞은 왕권과 기업과 영역을 받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순히 새로운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완성, 왕권의 실현, 하늘과 땅의 연합, 구속받은 자들의 영광스러운 삶의 터전입니다. 
그곳은 영생을 보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영혼으로만 끝내지 않으시고, 부활한 몸으로, 실제 공간에서, 주와 함께 왕 노릇 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새 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심판의 의미(요한계시록 20:4a)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심판의 의미(요한계시록 20:4a)

요한계시록에서 "심판"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들을 검색한 결과 모두 14구절 입니다.
먼저 각 구절들을 소개합니다.


요한계시록 6: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요한계시록 11: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4: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6:5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요한계시록 16: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7: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요한계시록 18: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요한계시록 18:10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18: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요한계시록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요한계시록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요한계시록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심판이란 단어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먼저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20장 4절에서 보좌에 앉은 자들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심판의 권세를 다른 누구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 여러 번역을 참조합니다.

(한글개역성경)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현대인의 성경) 나는 또 여러 보좌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심판하는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공동번역) 나는 또 많은 높은 좌석과 그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심판할 권한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새번역) 내가 또 보좌들을 보니, 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글 번역 성경으로는 심판의 의미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영어 번역을 참조 합니다.

(NIV) I saw thrones on which were seated those who had been given authority to judge.
(KJV) And I saw thrones, and they sat upon them, and judgment was given unto them:
(NASB) Then I saw thrones, and they sat on them, and judgment was given to them.

영어 성경으로 살펴보면 "심판"이란 단어가 "판단"이란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헬라어 성경에서 사용한 단어들을 정리합니다.

20장 4절 내용 중에 “보좌에 앉은 자들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 크리마(κρίμα)(2917) judgment(판단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선택되었다(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왕 같은 제사장은 세상에서 선과 악을 판단(심판)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판단을 심판으로 번역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6: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 심판하다(κρίνεις) 2919
- 크리노(κρίνω)(2919) to judge, decide 

이때 심판은 판결하여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7: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 심판(κρίμα) 2917. punishment(처벌, 형벌)

따라서 요한계시록에서 심판이란 단어가 마지막 심판 날에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하는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는 형벌이라는 것과 고난의 세상에서 성경적인 판단을 하므로서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시대적인 배경

요한 계시록의 시대적인 배경

요한 계시록은 요한 당시에 소아시아에 퍼져있던 일곱 교회에 보낸 회람 서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1세기를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레니우스는 요한계시록이 81-96년에 있었던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말기에 쓰여 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도미티안은 ‘황제숭배’를 이슈로 제기한 최초의 황제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을 가장 먼저 박해한 황제는 네로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로마 시의 화재범으로 몰아 사나운 짐승과 불에 태우고, 참수형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네로 뒤에도 몇 몇 황제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박해는 로마에 인접한 지역에서만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로마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사람들은 로마 공화정 말기와 로마 제국의 초기에 로마의 정신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가 세계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하고 이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로마의 정신’은 점차적으로 ‘황제의 인격’을 숭배하는 곳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로마 제국은 영국에서 유프라테스, 그리고 다뉴브 강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이 광대한 영토를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해서 ‘가이사 숭배 사상’ 즉 ‘황제숭배 사상’을 이용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로마 제국에 속한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민족의 종교를 없애버리고 황제숭배를 절대 신앙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단지 로마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황제를 중심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당국은 1년에 한 번씩만 황제를 위해 소량의 향을 태우고 ‘가이사는 주님이다!’ 라고 말만 하면 다른 종교를 갖는 것을 묵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제국에 속한 사람들은 이와 같은 황제 숭배 예식을 실시한 후에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 숭배가 아시아 지역에 파급되면서 유일신을 섬기는 교회와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만 주님이라고 고백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황제라 해도 인간을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되자 로마 당국은 그때부터 기독교인들을 불충한 백성으로 보게 되었으며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인들을 요주의 대상으로 지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황제들에게 조직적인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를 주라 부르기를 거부하다가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순교자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만 갔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가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로마 당국의 질풍과 같은 대 박해를 견디기는 어려운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교회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한 마음으로 주님께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들은 세속화와 사치와 타락에 빠져서 영적인 힘을 완전히 상실한 무능력한 교회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들은 한쪽으로는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세상과 거짓 종교와 타협하여 적당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점차적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고 영적, 윤리적으로 타락해갔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가던 1세기의 아시아 교회들에게 요한을 통해서 이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당시의 교회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붙들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모습을 통해서 세상의 박해가 아무리 강해도 그들이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박해 앞에서 방황하는 교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의 주관자이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황제로 인해 당황하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교회를 박해하는 황제의 배후에 사단이 조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모습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싸움이 영적인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서 결국 최후에 사단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도들에게 승리의 확신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을 향해서 세상이나 거짓 교훈에 타협하지 말고 계속해서 정결한 신앙을 지키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첫 사랑을 상실하고, 윤리적 영적으로 부패해 가던 당시의 교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였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 이러한 부패 요소들과 싸워 이길 것을 권면하셨던 것입니다.


동방의 한 나라(요한계시록 16:12)


요한계시록 16:12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the sixth angel poured out his bowl on the great river Euphrates, and its water was dried up to prepare the way for the kings from the East.

이사야 46:11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From the east I summon a bird of prey; from a far-off land, a man to fulfill my purpose. What I have said, that will I bring about; what I have planned, that will I do.

이사야 55:5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Surely you will summon nations you know not, and nations that do not know you will hasten to you, because of the LORD your God, the Holy One of Israel, for he has endowed you with splendor.


 




이스라엘 학자들도 충격받은 성경의 예언, 대한민국이 지목된 진짜 이유


https://www.youtube.com/watch?v=-KquLu2adHs














세마포(βυσσινοs) 부시노스 buvssinos


세마포 / 요한계시록 15:6(3043), 18:12(1040), 16(1039), 19:8(1039), 14(1039)

15:6 /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3043)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 3043 리논( linŏn) λίν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3043

1. 삼.  2. 심지. 3. 삼베
발음 [ linŏn ]
  • 1.  삼, 삼베.
    • a.  심지, 마 12:20.
    • b.  삼베, 옷, 계 15:6.
    • c.  그물, 어망.
  • 관련 성경 /  (등불의) 심지(마 12:20), 세마포(계 15:6).

* 1039

βύσσινος, η, ον 스트롱번호1039

1. 가는 베로 만든.  2. 가는 베.  3. 가는 베 옷
발음 [ büssinŏs ]
어원  / 1040에서 유래
  • 1.  가는 베로 만든, [명사로] 가는 베, 가는 베 옷, 세마포, 계18:12,16, 19:8,14.
  • 관련 성경  /  세마포의(계 18:16, 19:8,14).


* 1040.  부소스(büssŏs) βύσσος, ου, ἡ 스트롱번호1040

1. 고운 베옷.   2. 세마포.  3. 눅 16:19
발음 [ büssŏs ]
어원  /  히브리어 948에서 유래
  • 1. 고운 베옷, 세 마포, 눅16:19, 계18:12.
  • 관련 성경  /  고운 베옷(눅 16:19), 세마포(계 18:12).

* 히브리어 948 부츠(bûwts)  בּוּץ 스트롱번호948

1. 목화.  2. 섬세한 아마천.
발음 [ bûwts ]
어원  / ‘희다’를 뜻하는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8회 사용
  • 1. 명사 목화, 섬세한 아마천.
  • 관련 성경  /  세마포(대상 4:21, 15:27), 가는 베(대하 2:14, 겔 27:16).

 

성도들에게 허락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옳은 행실을 나타낸다


우리 조상들은 먹고(食) 살기(住) 힘들 때도 의복(衣)은 신경 썼다고 한다.
의식주(衣食住)라는 말의 순서에서 알 수 있다.
남편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에게 사랑과 관심을 준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를 위해 ‘구원의 옷’과 ‘공의의 겉옷’을 입힌다(이사야 61:10).
그리고 신부가 필요로 하는 패물을 제공한다.
가장 먼저 물로 피를 씻기고 다양한 옷과 화려한 왕관을 씌운다.
황후의 지위에 올린다(에스겔 16:9-13).

에스겔서에 나오는 신부처럼(에스겔 16:8-10), 어린 양의 신부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상징하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었다. 빛난다는 것은 영광을 묘사하기 위해 하얗고 빛나는 색을 말한다(마태복음 13:43).
깨끗하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의 특성인 정결, 충성, 신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많은 연구는 세계 어디에나 신랑 쪽에서 신부의 가족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이른바 신붓값 문화를 갖고 있다고 한다.
양가의 관계를 공고히 해두자는 취지다.
신부가 잘 대접받을 것이라는 약조다.
신부의 가족에게 생기는 손실에 대한 대가이기도 하다.
지참금이란 신부가 결혼할 때 살림 밑천으로 친정에서 시집으로 가지고 가는 돈을 말한다.
그런데 제주도에서는 반대로 신랑이 신부 측에 돈을 지불하는 것이 오랜 관습이다.
제주도가 아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어린 양의 신부에게 지참금 이상의 선물을 주신다.

혼인 의복은 보호 사상 이외에 하나님과의 친근한 교제로 해석된다.
퇴폐와 부의 상징인 바벨론, 즉 로마의 세마포와 일부러 대비하고 있다.
어린 양의 신부는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여 정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들이다.
정치적인 입장의 호불호를 떠나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옛날 왕조 시대의 상소문 형식으로 올린 ‘시무 7조’가 민초들의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인간의 본성은 본디 나약하나
이 땅의 백성들은 특히 고난 앞에서 결연했고
인간의 본성은 본디 추악하나
이 땅의 백성들은 특히 역경 앞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였나니...’
다수가 고난 앞에 결연하고, 다수가 역경 앞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믿음의 사람만이 뜻을 세우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을 수 있다.

1.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되다

어린 양의 신부가 입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순교자들이 이 옷을 입었고, 천사들도 그러하다.
이 옷은 대나무 살에 종이를 바른 전통 접부채를 떠오르게 한다.

조선 전기의 문인인 김주(金澍)는 부채를 선물하면서 부채가 담고 있는 의미를 그 부채에 적어서 주었다.
“대나무를 깎아 만든 것은 그 절개(節槪)를 취함이요.
종이를 바른 것은 그 깨끗함을 취함이다(削以竹 取其節也 塗以紙 取其潔也).”
‘우암유집(寓庵遺集)’에 나온다.
대나무를 절개와 의리, 즉 절의(節義)에 비유한다.
가장 큰 특징은 마디이다.
‘마디’를 의미하는 한자가 바로 ‘절’이다.
대나무의 줄기는 곧다.
마디와 마디 사이는 진공상태이다.
대나무의 정체성이다.

교회의 옷은 흰 세마포이다.
이것은 큰 음녀가 입은 자주 빛과 붉은 옷 그리고 세마포 옷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깨끗한 세마포는 하나님의 신부에게 적합하다(겔 16:10).

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띠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이전에 언급된 흰옷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옷은 순결, 거룩, 그리고 명예를 의미한다.
세마포에 해당하는 ‘βυσσινοsbuvssino"’(뷔씨노스)는 제사장과 왕들의 옷을 만드는데 사용한 값진 천이었다.
그것은 빛나고 깨끗한 천이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이었다(레 16:4).
성소에 들어가는 모든 사역자에게 확대되었다.
순결함과 의로운 행동을 상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세마포는 고대 세계에서 사치품이었다.
큰 성, 즉 로마가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바벨론의 사치스러운 세마포 옷과 어린 양의 신부가 입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대비되고 있다.

로마는 최전성기인 ‘5현제(五賢帝) 시대’는 사치향락이 팽배했다.
로마시대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향락에 빠진 로마인을 각성시키기 위해 로마 지배를 거부하고 자유를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는 게르만족을 부각시켜 로마인의 나약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시경’ ‘소남(召南)’편의 ‘행로(行露)’는 송사에 걸려든 여인이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참새 뿔이 없다고 누가 말했나? 쥐 어금니 없다고 누가 말했나?”(誰謂雀無角? 誰謂鼠無牙?) 작각서아(雀角鼠牙)는 참새 뿔과 쥐 어금니다. 참새는 뿔이 없고, 쥐는 앞니뿐이다. 뿔 없는 참새가 지붕을 뚫고, 어금니 없는 쥐가 담을 갉아 구멍을 낸다. 이렇듯 터무니없는 짓을 해도 절개(節槪)를 굽히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신부의 준비에 관한 사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과의 관계로 확대한다. 이 상황에서 강조는 신부가 입게 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이다. 후에, 새 예루살렘의 환상에서는 신부의 예복에 있는 금과 보석들에 더 많은 관심이 주어질 것이다. 어린 양의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하고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이 되었다. ‘허락하였다’는 부정과거 수동태다. 신부의 의로움이나 장점 때문에 옷이 제공된 것이 아니다. 신적수동태다.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이루어짐을 가리킨다. 깨끗한 세마포 또는 흰옷을 입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정결의 과정이다. 또한 혼인식에서 신부에게 합당한 순결이다. 예배와 혼인의 장면들은 부활의 희망을 노래한다.

2.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

신부의 옷만 언급하고 있지만 신부 단장을 가리킨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는 어구도 신부 단장을 가리킨다. 칭의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원인적인 필요조건이다. 옳은 행실은 비원인적인 필요조건이다.

혼인의 이미지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이 그에게 충실할 것을 기대하신다는 의미이다. 신부가 자신의 남편에게 충실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피조물과 맺었던 언약과 하나님이 이루실 평화를 연결시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장가를 간다.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라는 선포로 종결된다(호 2:19-20).

신랑으로서 그리스도와 신부로서의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라는 은유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매우 널리 사용되었다. 흰옷은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의 신분을 가리키는 이미지다. 독자들은 죄는 그들의 옷을 더럽혀서 하나님 앞에 서기에 적합하지 않게 한다고 경고 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은혜를 입어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의 옷을 씻어야 한다. 그와 같이 깨끗하게 하여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된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상징하는 세마포 옷이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의 표시다. 신부에게 옷이 제공된다. 그녀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됨과 충성으로 혼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영화 ‘남한산성’에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무릎 꿇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 입은 옷은 용포가 아니라 항복의 예가 끝나고 청이 준 의복(衣服)을 입었다. 의복 제도는 ‘천자’가 결정해 제후와 신하에게 내리는 것이었기에 상징성이 컸다.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사람이 인생에서 성공하는 비결은 기회가 다가올 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준비한 왕으로 비유하셨다(마 22:1-14). 왕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자는 예복을 입어야 했다.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 두 가지 경우다. 주인에 의해 깨끗한 옷이 공급되었으나 거절한 경우다. 아니면 부주의로 더러워진 것이다. 아무튼 깨끗한 옷의 의미는 그리스도에 대한 회개와 순종을 의미한다. 그 사람은 아마도 ‘웨어러블 로봇 슈트(wearable robot suit)’ 같이 자신의 것으로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옷은 옷을 입듯 몸에 장착하는 기기가 사람이 움직일 때 써야 하는 힘을 줄여준다

옷을 입는 방식은 구원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동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쟁으로 이끄는 옳은 행위(just deeds)와 연결되어 있다.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것은 아마도 요한에 의해 덧붙여진 보충적인 해석일 것이다. ‘옳은 행실’은 복수형이다. 신부의 옷이 끝까지 인내한 자들의 셀 수 없는 신실한 순종의 행위들로 수놓아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옳은 행실의 삶을 사는 것은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롬 1:17).
어린 양과의 혼인식에 들어가기 전에 요구되는 필요한 외적 반응 또는 표시임을 암시한다. 바울의 칭의의 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신랑의 요구에 합당한 반응이다. 변화된 삶이다. 요한의 관심사는 교회 안의 거룩함이다. 신부에게 허락된 것은 세마포가 아니라 의로운 행실들을 옷 입을 수 있는 특권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그렇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옳은 행실을 위해 창조되었다. 옳은 행실은 믿음의 가시적 면과 관련이 있다. 요한계시록은 충성된 사람들의 행위들은 죽음 이후에도 그들을 따른다고 추론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를 인정하기고 기억하신다. 옳은 행실들로 부활 시에 그들을 단장하도록 허락하신다는 사상이다.

교회는 정혼한 처녀처럼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순결과 지조를 지켜야 한다.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고려 말 이방원의 하여가를 되받아친 정몽주의 단심가다. 단심은 붉은 마음이다. 충절과 사랑과 지조를 상징한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혼인 예식을 위해 자신을 준비한 신부들의 행위들이다. 이것은 신자들이 어린 양의 피에 자신들이 예복을 씻는 이미지들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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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베드로전서 1:14-15)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어떤 사람들은 신비한 것들을 참 좋아합니다.
믿음으로 귀신을 좇아내고 믿음으로 병을 고치고 믿음으로 성공을 하고 믿음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성취하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믿음만 있으면 뭐든지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성공담을 듣고 있으면 믿음만 있으면 이 세상은 정말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만 하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어떤 목사님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설교를 하는데 그 목사님 설교를 듣고 있으면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이 세상에서도 엄청난 능력을 발휘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 아멘을 하고 박수를 치는 것을 보면서 야 저분들은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구나 우리와 다른 그 무엇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 미국에 있는 사람이 자기와 전화통화만 했는데 병이 나아버렸다고 자랑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참 형편없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건한 삶을 자랑합니다.
술 담배 안하는 것은 기본이고 노래나 오락이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까지 금하면서 오래 기도하고 금식하고 고행을 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재미를 끊어버리고 심지어 기본적인 가족 관계마저 등 뒤로 하고 작은 실수도 허점도 없이 깨끗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의 어떤 교회는 새벽기도로 성공한 교회라고 말할 정도로 새벽기도에 중점을 많이 둡니다.
그 교회의 새벽기도는 텔레비전에도 자주 방송 됩니다.
수 천, 수만의 사람들이 그 꼭두새벽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모든 일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엄청난 혼란과 차이를 가져오게 할 수 있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에 거룩한 삶을 살라고 말씀을 하셨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을 하고 설교를 해야 할까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우리 보통 성도들의 삶을 생각하면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해서 기적을 일으키거나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그렇게 고행을 하고 선행을 많이 해서 사람들에게라도 칭찬받을만한 일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기적 속에서 사는 것이라면 우리는 방향을 좀 수정을 해야 될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고행이나 선행을 하거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좀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도 모든 일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거룩한 사람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가 거룩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이 그 이유입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의 편지를 받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자녀라고 한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상속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자식은 부모에게서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가집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을 권리를 가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라고 할 때 또 하나는 ‘부모님의 인격이나 성품을 함께 나눈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지신 성품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는 이 세상 사라들과 다른 특별한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신분이라면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그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그들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엄청나게 다른 신분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탄의 종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은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죄인이지만 우리는 의인입니다.
그들의 속에는 사탄이 들어가 있어서 사탄의 종노릇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속에는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역사하시고 계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진노의 대상이고 심판의 대상이고 형벌의 대상이고 멸망의 대상이지만 우리는 사랑을 받는 자들이고 칭찬과 상급을 받을 사람들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아주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열매들을 맺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그 아름다운 성품을 닮아서 그 성품을 나타내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특별한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동화되어서 그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특별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아 뭔가 좀 다르다 좀 특별한 사람들이다 라고 느낄 수 있도록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표시도 없이 똑 같이 세상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특별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2.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본문 말씀에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우리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특별하신 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만큼만 생각하고 아는 것만큼만 행동에 옮기면서 삽니다.
모르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산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면서 왜 우리가 천주교에서 나와서 이렇게 따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옛날 귀신을 섬기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 귀신에게 기도했던 방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 무당에게 앞날을 물어보고 굿을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 종교개혁을 하기 이전의 타락한 교회처럼 오직 믿음으로가 아닌 고행과 선행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칼빈이나 루터 같은 사람들이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목숨을 걸고 개혁을 했는데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개혁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강조한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따라 살지 않고 복음이 아닌 엉뚱한 것을 진리라고 가르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외치는 사람들이 이단처럼 보일정도로 엉뚱한 것들이 복음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바르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줄을 알고 그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들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우리가 진리를 알지 못했을 때는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는 우리 속에 있는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욕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세상의 그 욕심을 버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천당에서 예수 축복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교회에서 쓰는 말 중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축복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복 받아라, 복 받고 살아라, 복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복 복 복 축복에 미친 사람들처럼 복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축복들을 잘 살펴보면 대부분이 이 세상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도 이 세상의 욕심을 따르지 말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무조건 부자가 되는 복만 받기를 원합니다. 무조건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복만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이 욕심에서 나온다고 말씀을 하셨는데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만 버리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데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따라 살다가 보니까 평생을 불행하게 삽니다.

물론 우리가 가져야 할 선한 욕심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싶은 욕심, 진리를 더 바르게 알고 싶은 욕심,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선한 욕심들이 있습니다.
그런 선한 욕심들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한 욕심들을 따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만 행복하기 위해서 살았던 모든 나쁜 욕심들을 버리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욕심을 버리면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오늘 본문 말씀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의 말입니다. 
깨끗한 하나님과 더러운 세상과의 구별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이 세상과는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우리와 너무나 다르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시고 완전한 분이시고 한 점 흠도 없으신 깨끗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것은 세상의 것들과 구별이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성도도 거룩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의 성품을 따라서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사함 받아 의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미 거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거룩한 사람으로 바뀌라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으로서 그 거룩함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라는 말로 해석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복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미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거룩함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내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1) 바른 믿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성공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출세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세상 욕심을 이루기 위한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 줄로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빼고는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바른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무리로 삼아주신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 거룩한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쓰여진 작은 도구들까지도 거룩한 물건으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소도 거룩한 전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바쳐진 예물도 성물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시대 때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우리가 바른 예배 즉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거룩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행 중에 가장 악한 행위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그 의미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장 악한 행위는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예배일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릴 바엔 차라리 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예배의 참된 의미를 알고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실 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가장 중요한 성품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알면서도 이기심 때문에 참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거룩한 사람을 사는 것입니다.

4)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삽니다.
세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출세하는데 그 소망을 두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다가 소망을 두고 삽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것에 욕심을 내지 않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우리의 거룩함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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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거룩’의 우리말 사전적 의미는 “성스럽고 위대하다” 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거룩의 의미는 무엇일까?
거룩을 나타내는 히브리 단어는 ‘코데쉬’ 라고 하는데 이것은 “구별되다” 라고 하는 뜻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이 거룩이란 단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성품’ 을 나타내며 따라서 이것은 우리말 사전적 의미인 ‘성스럽고 위대하다’ 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또 한가지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거룩이란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책임이며, 삶 가운데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

본문가운데 ‘거룩한’ 이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는 ‘하기오스’ 인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단어가 명사적 용법으로 사용되면 ‘성도’라 번역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본래 의미로서의 거룩이란 하나님 자신의 본성과 의지를 나타내며 그분이 취하시는 모든 것은 그분의 거룩함에 종속되어지는 것이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But just as he who called you is holy, so be holy in all you do.’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이 말씀 가운데 놓치치 말아야 할 것은 먼저 영역성경의 말씀처럼 거룩해져야 함은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권고사항이 아니라‘be holy’ 곧 명령형으로 쓰여져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우리는 부분적으로 거룩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in all you do’ 곧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3년 반이나 예수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포기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그들의 행동 양식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던 중 제자들은 스승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을 보고 깊은 절망 가운데 빠졌다.
하지만 예수는 무덤에 머무르지 아니하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다시 그들을 찾아와 주셨다.

그리고 무려 40일 동안이나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셨다.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예루살렘에 함께 모여 기도했으며 정확하게 열흘 후 오순절날 약속대로 성령께서 그들을 찾아오셨고 비로소 그들의 삶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변화된 삶은 굳어있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베드로도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던 바로 그때부터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워나갔으며 또한 주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에 편지를 보내 견고하게 그 교회를 세워나갔다.
인생에서 철저한 패배를 경험했던 베드로가 주안에 한 형제요 자매된 이들에게 지금 이렇게 외치고 있다.

아시아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러분은 이제 언제라도 행동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허리를 동이고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근신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먼저 여러분들의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 또한 주님과 함께 하면서 말과 행동이 앞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대하며 그분이 나를 위해 가지고 오실 하나님의 은혜, 즉 구원을 바라며 기쁨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자녀가 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나쁜 습관들과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생각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별로 부합되지 않기에 먼저 우리의 생각 “my own thoughts”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 “God’s will” 이 무엇인지를 고민합니다.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의 사욕은 대부분 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함을 힘쓰되 우리의 하는 모든 행실에 있어 거룩해야 합니다.
남편을 대함에 있어 거룩해야 합니다.
아내를 대함에 있어 또한 거룩해야 합니다.
부모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하는 자녀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거룩해야 할 뿐 아니라 직장에서나 또는 사업을 하는 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거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그분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고는 그분과 만날 수도, 그리고 교제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단지 저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라 여기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기록하게 하셨던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명령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부르시고 사용하시기를 원했던 모든 것과 사람들이 거룩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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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의 몸의 행실

우리가 세상에 믿음을 보여 주는 유일한 한 가지 방법은 ‘몸의 행실’입니다.
성도는 제 2의 성경이란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2-3
너희는 우리의 마음에 쓰여 있는 우리의 서신으로 모든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서신이니 이것은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육체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서신’으로서 모든 사람이 읽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은 ‘몸의 행위’를 통해 보여 주어야 합니다.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약 2:18)는 말씀대로 믿음은 ‘몸의 행위’를 통해 알고 읽혀집니다.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행실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은 열매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향기로, 빛으로, 열매로, 행실로 밖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 우리의 행실은 복음에 합당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 행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할지니 ..](빌 1:27).
우리는 바른 믿음, 진리에 근거한 정확한 교리적 지식 뿐 아니라 ‘바른 행실’을 가져야 합니다.

• 우리의 행실에 탐욕이 없어야 합니다.
[너희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히 13:5a).
자본주의 사회, 맘몬을 신으로 섬기는 이 시대에 성도들은 물질에 대한 탐욕을 갖지 않음으로써 확연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돈 버는 일에 헌신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이익이 경건인 줄로 알고(딤전 6:5), 주의 복인 줄로 아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의 행실은 ‘복음에 합당한 행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맘몬’을 섬기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우리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딤전 6:8)는 이 말씀은 탐욕에 물든 성도들이 도저히 수용하지 못하는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을 알고 믿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왜 영적 지식이 믿음과 영적 생활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입니까?
바로 육신을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행실은 거룩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갖 행실에서 거룩할지니](벧전 1:15).
거룩함이란 세상과 구별되고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세속적, 향락적, 육신적, 마귀적인 이 세상의 삶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살 때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말씀, 거룩한 믿음, 거룩한 성령을 지닌 성도들이 거룩한 행실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육신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육신이 걸림돌입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 우리의 행실은 정직해야 합니다.
[이방인들 가운데서 너희 행실을 정직하게 하라.](벧전 2:12a).

• 크리스천 자매(아내)들의 행실은 정숙해야 합니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숙한 행실을 그들이 눈여겨보느니라.](벧전 3:2).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의 행실을 봅니다.
불신자들은 성도들의 언어와 행실, 추구하는 가치관을 눈여겨봅니다.
교리와 믿음은 바른 것 같은데 행실은 엉망이라는 말은 수치입니다.

• 우리의 행실은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어](딤전 4:12).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를 때 우리는 거룩한 행실, 선한 행실, 복음에 합당한 행실, 정직한 행실, 본이 되는 행실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지식이 바로 몸의 행실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죄와 율법에서 해방된 성도가 옛 사람의 행위들을 벗지 못해 여전히 예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몸의 행실을 죽이지 못한 이들은 이전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교회를 나오고, 성경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고, 각양 다양한 영적 일들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술, 담배, 도박, 음행, 포르노, 영화, 더러운 잡지, 소설, 유행가 등 옛 생활을 단절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노력은 하지만 잘 안된다고 말합니다.
돈벌이가 되면 잠시 양심을 접어두고, 의(義)를 포기합니다.
구원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육신에 져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육신을 처리하지 못한 성도들은 말만 있고 능력이 없습니다(고전 4:20).
육신적인 일은 하지만 열매가 없습니다.
다양한 은사는 있어도 덕을 세울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