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한 나라(요한계시록 16:12)


요한계시록 16:12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the sixth angel poured out his bowl on the great river Euphrates, and its water was dried up to prepare the way for the kings from the East.

이사야 46:11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From the east I summon a bird of prey; from a far-off land, a man to fulfill my purpose. What I have said, that will I bring about; what I have planned, that will I do.

이사야 55:5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Surely you will summon nations you know not, and nations that do not know you will hasten to you, because of the LORD your God, the Holy One of Israel, for he has endowed you with splendor.


 




이스라엘 학자들도 충격받은 성경의 예언, 대한민국이 지목된 진짜 이유


https://www.youtube.com/watch?v=-KquLu2adHs














세마포(βυσσινοs) 부시노스 buvssinos


세마포 / 요한계시록 15:6(3043), 18:12(1040), 16(1039), 19:8(1039), 14(1039)

15:6 /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3043)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 3043 리논( linŏn) λίν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3043

1. 삼.  2. 심지. 3. 삼베
발음 [ linŏn ]
  • 1.  삼, 삼베.
    • a.  심지, 마 12:20.
    • b.  삼베, 옷, 계 15:6.
    • c.  그물, 어망.
  • 관련 성경 /  (등불의) 심지(마 12:20), 세마포(계 15:6).

* 1039

βύσσινος, η, ον 스트롱번호1039

1. 가는 베로 만든.  2. 가는 베.  3. 가는 베 옷
발음 [ büssinŏs ]
어원  / 1040에서 유래
  • 1.  가는 베로 만든, [명사로] 가는 베, 가는 베 옷, 세마포, 계18:12,16, 19:8,14.
  • 관련 성경  /  세마포의(계 18:16, 19:8,14).


* 1040.  부소스(büssŏs) βύσσος, ου, ἡ 스트롱번호1040

1. 고운 베옷.   2. 세마포.  3. 눅 16:19
발음 [ büssŏs ]
어원  /  히브리어 948에서 유래
  • 1. 고운 베옷, 세 마포, 눅16:19, 계18:12.
  • 관련 성경  /  고운 베옷(눅 16:19), 세마포(계 18:12).

* 히브리어 948 부츠(bûwts)  בּוּץ 스트롱번호948

1. 목화.  2. 섬세한 아마천.
발음 [ bûwts ]
어원  / ‘희다’를 뜻하는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8회 사용
  • 1. 명사 목화, 섬세한 아마천.
  • 관련 성경  /  세마포(대상 4:21, 15:27), 가는 베(대하 2:14, 겔 27:16).

 

성도들에게 허락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옳은 행실을 나타낸다


우리 조상들은 먹고(食) 살기(住) 힘들 때도 의복(衣)은 신경 썼다고 한다.
의식주(衣食住)라는 말의 순서에서 알 수 있다.
남편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에게 사랑과 관심을 준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를 위해 ‘구원의 옷’과 ‘공의의 겉옷’을 입힌다(이사야 61:10).
그리고 신부가 필요로 하는 패물을 제공한다.
가장 먼저 물로 피를 씻기고 다양한 옷과 화려한 왕관을 씌운다.
황후의 지위에 올린다(에스겔 16:9-13).

에스겔서에 나오는 신부처럼(에스겔 16:8-10), 어린 양의 신부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상징하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었다. 빛난다는 것은 영광을 묘사하기 위해 하얗고 빛나는 색을 말한다(마태복음 13:43).
깨끗하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의 특성인 정결, 충성, 신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많은 연구는 세계 어디에나 신랑 쪽에서 신부의 가족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이른바 신붓값 문화를 갖고 있다고 한다.
양가의 관계를 공고히 해두자는 취지다.
신부가 잘 대접받을 것이라는 약조다.
신부의 가족에게 생기는 손실에 대한 대가이기도 하다.
지참금이란 신부가 결혼할 때 살림 밑천으로 친정에서 시집으로 가지고 가는 돈을 말한다.
그런데 제주도에서는 반대로 신랑이 신부 측에 돈을 지불하는 것이 오랜 관습이다.
제주도가 아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어린 양의 신부에게 지참금 이상의 선물을 주신다.

혼인 의복은 보호 사상 이외에 하나님과의 친근한 교제로 해석된다.
퇴폐와 부의 상징인 바벨론, 즉 로마의 세마포와 일부러 대비하고 있다.
어린 양의 신부는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여 정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들이다.
정치적인 입장의 호불호를 떠나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옛날 왕조 시대의 상소문 형식으로 올린 ‘시무 7조’가 민초들의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인간의 본성은 본디 나약하나
이 땅의 백성들은 특히 고난 앞에서 결연했고
인간의 본성은 본디 추악하나
이 땅의 백성들은 특히 역경 앞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였나니...’
다수가 고난 앞에 결연하고, 다수가 역경 앞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믿음의 사람만이 뜻을 세우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을 수 있다.

1.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되다

어린 양의 신부가 입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순교자들이 이 옷을 입었고, 천사들도 그러하다.
이 옷은 대나무 살에 종이를 바른 전통 접부채를 떠오르게 한다.

조선 전기의 문인인 김주(金澍)는 부채를 선물하면서 부채가 담고 있는 의미를 그 부채에 적어서 주었다.
“대나무를 깎아 만든 것은 그 절개(節槪)를 취함이요.
종이를 바른 것은 그 깨끗함을 취함이다(削以竹 取其節也 塗以紙 取其潔也).”
‘우암유집(寓庵遺集)’에 나온다.
대나무를 절개와 의리, 즉 절의(節義)에 비유한다.
가장 큰 특징은 마디이다.
‘마디’를 의미하는 한자가 바로 ‘절’이다.
대나무의 줄기는 곧다.
마디와 마디 사이는 진공상태이다.
대나무의 정체성이다.

교회의 옷은 흰 세마포이다.
이것은 큰 음녀가 입은 자주 빛과 붉은 옷 그리고 세마포 옷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깨끗한 세마포는 하나님의 신부에게 적합하다(겔 16:10).

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띠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이전에 언급된 흰옷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옷은 순결, 거룩, 그리고 명예를 의미한다.
세마포에 해당하는 ‘βυσσινοsbuvssino"’(뷔씨노스)는 제사장과 왕들의 옷을 만드는데 사용한 값진 천이었다.
그것은 빛나고 깨끗한 천이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이었다(레 16:4).
성소에 들어가는 모든 사역자에게 확대되었다.
순결함과 의로운 행동을 상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세마포는 고대 세계에서 사치품이었다.
큰 성, 즉 로마가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바벨론의 사치스러운 세마포 옷과 어린 양의 신부가 입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대비되고 있다.

로마는 최전성기인 ‘5현제(五賢帝) 시대’는 사치향락이 팽배했다.
로마시대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향락에 빠진 로마인을 각성시키기 위해 로마 지배를 거부하고 자유를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는 게르만족을 부각시켜 로마인의 나약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시경’ ‘소남(召南)’편의 ‘행로(行露)’는 송사에 걸려든 여인이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참새 뿔이 없다고 누가 말했나? 쥐 어금니 없다고 누가 말했나?”(誰謂雀無角? 誰謂鼠無牙?) 작각서아(雀角鼠牙)는 참새 뿔과 쥐 어금니다. 참새는 뿔이 없고, 쥐는 앞니뿐이다. 뿔 없는 참새가 지붕을 뚫고, 어금니 없는 쥐가 담을 갉아 구멍을 낸다. 이렇듯 터무니없는 짓을 해도 절개(節槪)를 굽히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신부의 준비에 관한 사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과의 관계로 확대한다. 이 상황에서 강조는 신부가 입게 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이다. 후에, 새 예루살렘의 환상에서는 신부의 예복에 있는 금과 보석들에 더 많은 관심이 주어질 것이다. 어린 양의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하고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이 되었다. ‘허락하였다’는 부정과거 수동태다. 신부의 의로움이나 장점 때문에 옷이 제공된 것이 아니다. 신적수동태다.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이루어짐을 가리킨다. 깨끗한 세마포 또는 흰옷을 입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정결의 과정이다. 또한 혼인식에서 신부에게 합당한 순결이다. 예배와 혼인의 장면들은 부활의 희망을 노래한다.

2.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

신부의 옷만 언급하고 있지만 신부 단장을 가리킨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는 어구도 신부 단장을 가리킨다. 칭의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원인적인 필요조건이다. 옳은 행실은 비원인적인 필요조건이다.

혼인의 이미지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이 그에게 충실할 것을 기대하신다는 의미이다. 신부가 자신의 남편에게 충실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피조물과 맺었던 언약과 하나님이 이루실 평화를 연결시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장가를 간다.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라는 선포로 종결된다(호 2:19-20).

신랑으로서 그리스도와 신부로서의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라는 은유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매우 널리 사용되었다. 흰옷은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의 신분을 가리키는 이미지다. 독자들은 죄는 그들의 옷을 더럽혀서 하나님 앞에 서기에 적합하지 않게 한다고 경고 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은혜를 입어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의 옷을 씻어야 한다. 그와 같이 깨끗하게 하여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된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상징하는 세마포 옷이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의 표시다. 신부에게 옷이 제공된다. 그녀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됨과 충성으로 혼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영화 ‘남한산성’에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무릎 꿇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 입은 옷은 용포가 아니라 항복의 예가 끝나고 청이 준 의복(衣服)을 입었다. 의복 제도는 ‘천자’가 결정해 제후와 신하에게 내리는 것이었기에 상징성이 컸다.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사람이 인생에서 성공하는 비결은 기회가 다가올 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준비한 왕으로 비유하셨다(마 22:1-14). 왕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자는 예복을 입어야 했다.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 두 가지 경우다. 주인에 의해 깨끗한 옷이 공급되었으나 거절한 경우다. 아니면 부주의로 더러워진 것이다. 아무튼 깨끗한 옷의 의미는 그리스도에 대한 회개와 순종을 의미한다. 그 사람은 아마도 ‘웨어러블 로봇 슈트(wearable robot suit)’ 같이 자신의 것으로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옷은 옷을 입듯 몸에 장착하는 기기가 사람이 움직일 때 써야 하는 힘을 줄여준다

옷을 입는 방식은 구원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동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쟁으로 이끄는 옳은 행위(just deeds)와 연결되어 있다.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것은 아마도 요한에 의해 덧붙여진 보충적인 해석일 것이다. ‘옳은 행실’은 복수형이다. 신부의 옷이 끝까지 인내한 자들의 셀 수 없는 신실한 순종의 행위들로 수놓아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옳은 행실의 삶을 사는 것은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롬 1:17).
어린 양과의 혼인식에 들어가기 전에 요구되는 필요한 외적 반응 또는 표시임을 암시한다. 바울의 칭의의 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신랑의 요구에 합당한 반응이다. 변화된 삶이다. 요한의 관심사는 교회 안의 거룩함이다. 신부에게 허락된 것은 세마포가 아니라 의로운 행실들을 옷 입을 수 있는 특권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그렇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옳은 행실을 위해 창조되었다. 옳은 행실은 믿음의 가시적 면과 관련이 있다. 요한계시록은 충성된 사람들의 행위들은 죽음 이후에도 그들을 따른다고 추론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를 인정하기고 기억하신다. 옳은 행실들로 부활 시에 그들을 단장하도록 허락하신다는 사상이다.

교회는 정혼한 처녀처럼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순결과 지조를 지켜야 한다.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고려 말 이방원의 하여가를 되받아친 정몽주의 단심가다. 단심은 붉은 마음이다. 충절과 사랑과 지조를 상징한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혼인 예식을 위해 자신을 준비한 신부들의 행위들이다. 이것은 신자들이 어린 양의 피에 자신들이 예복을 씻는 이미지들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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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베드로전서 1:14-15)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어떤 사람들은 신비한 것들을 참 좋아합니다.
믿음으로 귀신을 좇아내고 믿음으로 병을 고치고 믿음으로 성공을 하고 믿음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성취하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믿음만 있으면 뭐든지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성공담을 듣고 있으면 믿음만 있으면 이 세상은 정말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만 하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어떤 목사님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설교를 하는데 그 목사님 설교를 듣고 있으면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이 세상에서도 엄청난 능력을 발휘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 아멘을 하고 박수를 치는 것을 보면서 야 저분들은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구나 우리와 다른 그 무엇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 미국에 있는 사람이 자기와 전화통화만 했는데 병이 나아버렸다고 자랑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참 형편없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건한 삶을 자랑합니다.
술 담배 안하는 것은 기본이고 노래나 오락이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까지 금하면서 오래 기도하고 금식하고 고행을 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재미를 끊어버리고 심지어 기본적인 가족 관계마저 등 뒤로 하고 작은 실수도 허점도 없이 깨끗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의 어떤 교회는 새벽기도로 성공한 교회라고 말할 정도로 새벽기도에 중점을 많이 둡니다.
그 교회의 새벽기도는 텔레비전에도 자주 방송 됩니다.
수 천, 수만의 사람들이 그 꼭두새벽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모든 일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엄청난 혼란과 차이를 가져오게 할 수 있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에 거룩한 삶을 살라고 말씀을 하셨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을 하고 설교를 해야 할까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우리 보통 성도들의 삶을 생각하면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해서 기적을 일으키거나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그렇게 고행을 하고 선행을 많이 해서 사람들에게라도 칭찬받을만한 일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기적 속에서 사는 것이라면 우리는 방향을 좀 수정을 해야 될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고행이나 선행을 하거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좀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도 모든 일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거룩한 사람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가 거룩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이 그 이유입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의 편지를 받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자녀라고 한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상속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자식은 부모에게서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가집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을 권리를 가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라고 할 때 또 하나는 ‘부모님의 인격이나 성품을 함께 나눈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지신 성품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는 이 세상 사라들과 다른 특별한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신분이라면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그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그들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엄청나게 다른 신분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탄의 종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은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죄인이지만 우리는 의인입니다.
그들의 속에는 사탄이 들어가 있어서 사탄의 종노릇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속에는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역사하시고 계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진노의 대상이고 심판의 대상이고 형벌의 대상이고 멸망의 대상이지만 우리는 사랑을 받는 자들이고 칭찬과 상급을 받을 사람들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아주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열매들을 맺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그 아름다운 성품을 닮아서 그 성품을 나타내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특별한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동화되어서 그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특별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아 뭔가 좀 다르다 좀 특별한 사람들이다 라고 느낄 수 있도록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표시도 없이 똑 같이 세상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특별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2.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본문 말씀에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우리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특별하신 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만큼만 생각하고 아는 것만큼만 행동에 옮기면서 삽니다.
모르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산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면서 왜 우리가 천주교에서 나와서 이렇게 따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옛날 귀신을 섬기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 귀신에게 기도했던 방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 무당에게 앞날을 물어보고 굿을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 종교개혁을 하기 이전의 타락한 교회처럼 오직 믿음으로가 아닌 고행과 선행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칼빈이나 루터 같은 사람들이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목숨을 걸고 개혁을 했는데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개혁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강조한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따라 살지 않고 복음이 아닌 엉뚱한 것을 진리라고 가르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외치는 사람들이 이단처럼 보일정도로 엉뚱한 것들이 복음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바르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줄을 알고 그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들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우리가 진리를 알지 못했을 때는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는 우리 속에 있는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욕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세상의 그 욕심을 버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천당에서 예수 축복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교회에서 쓰는 말 중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축복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복 받아라, 복 받고 살아라, 복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복 복 복 축복에 미친 사람들처럼 복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축복들을 잘 살펴보면 대부분이 이 세상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도 이 세상의 욕심을 따르지 말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무조건 부자가 되는 복만 받기를 원합니다. 무조건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복만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이 욕심에서 나온다고 말씀을 하셨는데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만 버리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데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따라 살다가 보니까 평생을 불행하게 삽니다.

물론 우리가 가져야 할 선한 욕심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싶은 욕심, 진리를 더 바르게 알고 싶은 욕심,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선한 욕심들이 있습니다.
그런 선한 욕심들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한 욕심들을 따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만 행복하기 위해서 살았던 모든 나쁜 욕심들을 버리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욕심을 버리면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오늘 본문 말씀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의 말입니다. 
깨끗한 하나님과 더러운 세상과의 구별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이 세상과는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우리와 너무나 다르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시고 완전한 분이시고 한 점 흠도 없으신 깨끗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것은 세상의 것들과 구별이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성도도 거룩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의 성품을 따라서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사함 받아 의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미 거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거룩한 사람으로 바뀌라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으로서 그 거룩함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라는 말로 해석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복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미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거룩함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내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1) 바른 믿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성공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출세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세상 욕심을 이루기 위한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 줄로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빼고는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바른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무리로 삼아주신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 거룩한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쓰여진 작은 도구들까지도 거룩한 물건으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소도 거룩한 전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바쳐진 예물도 성물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시대 때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우리가 바른 예배 즉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거룩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행 중에 가장 악한 행위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그 의미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장 악한 행위는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예배일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릴 바엔 차라리 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예배의 참된 의미를 알고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실 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가장 중요한 성품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알면서도 이기심 때문에 참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거룩한 사람을 사는 것입니다.

4)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삽니다.
세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출세하는데 그 소망을 두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다가 소망을 두고 삽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것에 욕심을 내지 않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우리의 거룩함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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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거룩’의 우리말 사전적 의미는 “성스럽고 위대하다” 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거룩의 의미는 무엇일까?
거룩을 나타내는 히브리 단어는 ‘코데쉬’ 라고 하는데 이것은 “구별되다” 라고 하는 뜻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이 거룩이란 단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성품’ 을 나타내며 따라서 이것은 우리말 사전적 의미인 ‘성스럽고 위대하다’ 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또 한가지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거룩이란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책임이며, 삶 가운데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

본문가운데 ‘거룩한’ 이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는 ‘하기오스’ 인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단어가 명사적 용법으로 사용되면 ‘성도’라 번역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본래 의미로서의 거룩이란 하나님 자신의 본성과 의지를 나타내며 그분이 취하시는 모든 것은 그분의 거룩함에 종속되어지는 것이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But just as he who called you is holy, so be holy in all you do.’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이 말씀 가운데 놓치치 말아야 할 것은 먼저 영역성경의 말씀처럼 거룩해져야 함은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권고사항이 아니라‘be holy’ 곧 명령형으로 쓰여져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우리는 부분적으로 거룩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in all you do’ 곧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3년 반이나 예수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포기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그들의 행동 양식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던 중 제자들은 스승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을 보고 깊은 절망 가운데 빠졌다.
하지만 예수는 무덤에 머무르지 아니하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다시 그들을 찾아와 주셨다.

그리고 무려 40일 동안이나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셨다.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예루살렘에 함께 모여 기도했으며 정확하게 열흘 후 오순절날 약속대로 성령께서 그들을 찾아오셨고 비로소 그들의 삶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변화된 삶은 굳어있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베드로도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던 바로 그때부터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워나갔으며 또한 주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에 편지를 보내 견고하게 그 교회를 세워나갔다.
인생에서 철저한 패배를 경험했던 베드로가 주안에 한 형제요 자매된 이들에게 지금 이렇게 외치고 있다.

아시아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러분은 이제 언제라도 행동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허리를 동이고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근신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먼저 여러분들의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 또한 주님과 함께 하면서 말과 행동이 앞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대하며 그분이 나를 위해 가지고 오실 하나님의 은혜, 즉 구원을 바라며 기쁨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자녀가 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나쁜 습관들과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생각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별로 부합되지 않기에 먼저 우리의 생각 “my own thoughts”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 “God’s will” 이 무엇인지를 고민합니다.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의 사욕은 대부분 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함을 힘쓰되 우리의 하는 모든 행실에 있어 거룩해야 합니다.
남편을 대함에 있어 거룩해야 합니다.
아내를 대함에 있어 또한 거룩해야 합니다.
부모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하는 자녀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거룩해야 할 뿐 아니라 직장에서나 또는 사업을 하는 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거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그분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고는 그분과 만날 수도, 그리고 교제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단지 저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라 여기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기록하게 하셨던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명령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부르시고 사용하시기를 원했던 모든 것과 사람들이 거룩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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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의 몸의 행실

우리가 세상에 믿음을 보여 주는 유일한 한 가지 방법은 ‘몸의 행실’입니다.
성도는 제 2의 성경이란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2-3
너희는 우리의 마음에 쓰여 있는 우리의 서신으로 모든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서신이니 이것은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육체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서신’으로서 모든 사람이 읽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은 ‘몸의 행위’를 통해 보여 주어야 합니다.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약 2:18)는 말씀대로 믿음은 ‘몸의 행위’를 통해 알고 읽혀집니다.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행실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은 열매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향기로, 빛으로, 열매로, 행실로 밖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 우리의 행실은 복음에 합당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 행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할지니 ..](빌 1:27).
우리는 바른 믿음, 진리에 근거한 정확한 교리적 지식 뿐 아니라 ‘바른 행실’을 가져야 합니다.

• 우리의 행실에 탐욕이 없어야 합니다.
[너희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히 13:5a).
자본주의 사회, 맘몬을 신으로 섬기는 이 시대에 성도들은 물질에 대한 탐욕을 갖지 않음으로써 확연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돈 버는 일에 헌신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이익이 경건인 줄로 알고(딤전 6:5), 주의 복인 줄로 아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의 행실은 ‘복음에 합당한 행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맘몬’을 섬기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우리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딤전 6:8)는 이 말씀은 탐욕에 물든 성도들이 도저히 수용하지 못하는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을 알고 믿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왜 영적 지식이 믿음과 영적 생활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입니까?
바로 육신을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행실은 거룩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갖 행실에서 거룩할지니](벧전 1:15).
거룩함이란 세상과 구별되고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세속적, 향락적, 육신적, 마귀적인 이 세상의 삶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살 때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말씀, 거룩한 믿음, 거룩한 성령을 지닌 성도들이 거룩한 행실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육신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육신이 걸림돌입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 우리의 행실은 정직해야 합니다.
[이방인들 가운데서 너희 행실을 정직하게 하라.](벧전 2:12a).

• 크리스천 자매(아내)들의 행실은 정숙해야 합니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숙한 행실을 그들이 눈여겨보느니라.](벧전 3:2).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의 행실을 봅니다.
불신자들은 성도들의 언어와 행실, 추구하는 가치관을 눈여겨봅니다.
교리와 믿음은 바른 것 같은데 행실은 엉망이라는 말은 수치입니다.

• 우리의 행실은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어](딤전 4:12).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를 때 우리는 거룩한 행실, 선한 행실, 복음에 합당한 행실, 정직한 행실, 본이 되는 행실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지식이 바로 몸의 행실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죄와 율법에서 해방된 성도가 옛 사람의 행위들을 벗지 못해 여전히 예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몸의 행실을 죽이지 못한 이들은 이전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교회를 나오고, 성경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고, 각양 다양한 영적 일들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술, 담배, 도박, 음행, 포르노, 영화, 더러운 잡지, 소설, 유행가 등 옛 생활을 단절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노력은 하지만 잘 안된다고 말합니다.
돈벌이가 되면 잠시 양심을 접어두고, 의(義)를 포기합니다.
구원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육신에 져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육신을 처리하지 못한 성도들은 말만 있고 능력이 없습니다(고전 4:20).
육신적인 일은 하지만 열매가 없습니다.
다양한 은사는 있어도 덕을 세울 수 없습니다.


 







네로와 도미티안 황제 / 로마 황제 목록


네로 클라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네로(Nero)는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37년 12월 15일 ~ 68년 6월 9일, 재위 54년 10월 13일 ~ 68년 6월 9일)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본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bus)이며, 황제가 되어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로 개칭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외종손이자 양자이며 칼리굴라의 외조카이다.

네로

서기 37년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로의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딸인 율리아 아그리피나이다. 그의 출생 당시 로마 제국은 외삼촌인 칼리굴라의 집권기였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서기 49년 어머니인 아그리피나가 숙부(네로의 외종조부)이자 당시 로마 제국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였고,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네로는 서기 54년 양부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인 세 살 차이의 의붓동생 브리타니쿠스[1]를 제치고 황제로 취임하였다. 집권 전반기 그는 철학자이자 정치가세네카와 근위군단 장교 부루스의 보좌를 받아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로마의 신이 황제에게 로마 문화를 발전시키라는 명령을 했다."라는 신념에 따라 로마의 문화건축을 발전시켰다. 네로는 자신을 예술가의 지도자로 생각하여 , 노래, 건축 등 예술을 지원했는데, 지금도 네로 시대 당시 지어진 화려한 건축물이 남아 있다. 그가 폭군으로 낙인 찍힌 것은 로마 대화재 당시 민심 수습책으로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 씌우고 기독교도를 학살하여 기독교의 뿌리 깊은 원한을 산 이유가 크다.

그러나 55년 의붓동생인 브리타니쿠스를 독살(이는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소행이라는 주장도 있다)하였고, 59년에는 정치적으로 간섭해 온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62년에는 아내 옥타비아를 살해하였다.

서기 64년 기름 창고 사고가 원인이 되어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혼란스러워지자, 당시 로마 제국의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씌워 기독교도를 학살함으로써 로마 제국 황제 중 최초의 기독교 박해자로 기록되었다.[2][3]

65년에는 스승인 세네카에게 자살 명령을 내렸다.

그는 예술을 사랑하여 2대 제전을 창시하였으나, 정치는 문란하여 68년 친위대까지 반란을 일으켰다.[4]

68년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가 일으킨 내전이 일어나고 이에 각지의 총독들이 동조하여, 마침내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68년 6월 8일 로마를 탈출하여 마지막까지 그의 편에 있던 해방 노예 파온(Phaon)의 별장에서 자살하였다.

평균 키에 몸 곳곳에는 점이 있었으며, 악취를 풍겼다. 암갈색의 머릿칼에, 매력적이라기보다는 평범한 풍모였다.

눈은 유약해 보이는 파란색이었고, 목은 굵었다. 배가 나왔고, 다리는 매우 가늘었다.

 

—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 《12황제 열전》

  1. 브리타니쿠스클라우디우스와 그의 세 번째 아내이자 첫 번째 황후인 메살리나(22년 - 48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2. 성공회 사제이자 신약성서학자인 박태식 신부에 따르면, 네로 황제 당시 화재는 서기 64년에 9일간 일어났다. 로마 시내 14개 구역 중 10개 구역에 일어난 대형 화재였다. 정부의 구호활동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 체제의 안위를 흔들 수 있는 네로 황제 방화설이 수그러들지 않자, 집권세력은 당시 "사악한 미신", "로마 제국에 의해 처형된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는 공격을 받고 있었던 기독교도들을 사회혼란 해결의 희생양으로 삼아 탄압하고 화형으로 살해하였다.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바오로딸.
  3. 사도행전에 따르면 네로 황제 전에도 기독교는 헤롯 왕실과 산헤드린 의회에 의해 순교자가 발생하는 탄압을 받았다. 즉, 네로를 최초의 기독교 박해자라고 하는 것은 로마 제국 황제 중 최초라는 뜻으로 중세 역사가들이 기술했다고 여겨진다. 다만, 네로 이전에도 티베리우스유대교도와 기독교도에 황제를 신으로 모시는 제사를 지내라고 명령하고 거부하는 이들을 박해했다. 칼리굴라이스라엘 성전에 자신의 신상을 세우라고 명령하고 거부하는 이들을 박해했다. 네로의 양아버지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고, 외래미신을 믿는다는 죄목을 붙여 기독교도를 박해했다.
  4.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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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아누스 (51년 10월 24일 - 96년 9월 18일)는 로마 제국의 열 한 번째 황제이다.
그는 전임 황제자들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이자, 티투스의 동생이었으며,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재위 기간 그의 권위주의적 성격 방식의 통치는 도미티아누스로 인해 권력이 급격하게 제한당한 원로원과 극도의 불화에 빠트렸다.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와 형의 재위 기간에 크고 작은 형식적 역할을 맡았다.
형이 죽은 후, 도미티아누스는 친위대의 지지로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의 15년간의 통치 기간은 티베리우스 재위 기간 이래로 가장 긴 기간이었다.[1]

생애

형제와의 경쟁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어머니 플라비아 도미틸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는 제9대 로마 황제이었다. 그는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의 지위를 가졌고,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6차례나 집정관을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이 없는 11세 연상인 형 티투스의 뒤를 이을 황제감으로 인정받았다. 79년 6월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은 뒤 그때까지 티투스가 누렸던 것과 똑같은 지위, 특히 호민관의 권력과 일부 임페리움을 누리고 싶어했으나 이를 허락받지 못해 결국 형과 적대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훗날 형의 죽음에도 어느 정도 관여한 듯하다. 황제가 된 뒤에는 귀족들의 미움을 받았다. 트라야누스 시대의 역사가들인 타키투스와 소 플리니우스에게서 받은 혹평을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는 분명 잔인하고 허세를 부렸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군사적·행정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어 로마와 속주(屬州)의 행정관들을 강력히 통제했으며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칭송을 받기까지 했다.

군사정책

그의 군사·외교 정책도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집권초 브리튼 섬과 게르만 지방으로의 진격을 시행했고 국경인 라인-도나우 강변에 리메스(요새 방벽)를 건설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미처 합병시키기도 전에 도나우 강 지역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 로마는 2개의 레기온(군단)과 많은 군사를 잃었다. 이것은 타키투스도 지적했듯이 당시 군지휘관들이 태만하고 성급했기 때문이었지만 로마에서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84년에 군인 봉급을 1/3 정도 올려주는 등 현명하게 처신해 군대 내에서 인기를 그대로 유지했다.

우상화

진짜 문제는 그 자신의 법률상 지위와 의전행사에서의 위상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자주 콘술직을 맡았으며, 85년에는 종신 감찰관이 되어 원로원 의원과 장군들의 행동을 통제했다. 원로원에서는 개선식 의상을 입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경기를 본떠 4년마다 1번씩 개최한 경기를 주재할 때는 그리스풍의 옷과 금관을 착용했으며 동료 심판들은 여러 신들로 둘러싸인 도미티아누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관을 써야 했다. 토미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에 대한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주님이자 하느님'(dominus et deus)이라고 부르게 해서 심한 공격을 받았으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주님이자 하느님이라는 기독교의 케뤼그마에 반대되는 도미티아누스의 황제 우상화에 반대하여 로마제국의 탄압을 받았다.

철권통치

84년에 사촌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를 처형시킨 것은 다른 사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87년에 일어난 일반적인 소요의 전초였다. 89년 1월 1일에는 상 게르마니아 총독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하 게르마니아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황제는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고 나중에는 원로원 의원을 종종 반역죄로 고발했다. 따라서 93년부터 96년은 사상 유례없는 공포정치의 시기로 여겨지게 되었다.

암살

결국 도미티아누스는 96년 9월 18일에 근위대장 2명과 여러 궁정관리, 아내 도미티아 롱기나의 음모로 살해당했다. 그 뒤 곧 제위를 이은 네르바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생전에 남긴 모든 업적을 지워버리는 '기록말살형'에 처했음에도 군대는 이에 반발해 이듬해에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같이 보기

전임
티투스
제11대 로마 제국 황제
81년 - 96년
후임
네르바

각주


cf. 원수정 시기에 15년에 인접한 황제 한 두 명이 있었으며, 15년에 가장 가까웠던 이들에는 클라우디우스, 네로였고, 이 기록은 얼마 안 있어 트라야누스의 재위 기간이 경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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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부활(이긴 자의 부활,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둘째 사망



첫째 부활(the first resurrection) &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


성경에는 첫째 부활(계 20:5-6)둘째 사망(계 2:11. 20:6, 14. 21:8)에 대한 것만 증거합니다.
그런데 왜 둘째 부활과 첫째 사망이란 용어가 자주 사용될까요?

그 이유는 이미 성경에서 첫째 부활이란 표현을 하였기 때문에 그 반대의 현상 "첫째 사망"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첫째 부활"이란 용어를 사용한 두 구절

요한계시록 20:5-6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The rest of the dead did not come to life until the thousand years were ended.) This is the first resurrection.
Blessed and holy are those who have part in the first resurrection. The second death has no power over them, but they will be priests of God and of Christ and will reign with him for a thousand years.

그렇다면 '첫째 사망"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사망'이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미 죽어야 할 운명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2:17
선악알게하나무의 실과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
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둘째 사망
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둘째 사망이란 원죄로 말미암아 첫번째 사망으로 태어난 존재가 심판의 날에 영원한 형벌의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성경에서 "둘째 사망" 이란 용어를 사용한 4구절

요한계시록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요한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요한계시록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결론 /

첫째 부활이란 성도들의 부활을 말합니다(마태복음 27:50-5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무덤 문이 열리며 많은 성도들도 함께 부활했습니다.

마태복음 27:50-53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첫째 부활이란 이긴 자의 부활을 말합니다(요한계시록 2:11)

요한계시록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둘째 사망이란 영원한 저주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요한복음 5:29)

둘째 사망이란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구분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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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0:5-6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The rest of the dead did not come to life until the thousand years were ended.) This is the first resurrection.
Blessed and holy are those who have part in the first resurrection. The second death has no power over them, but they will be priests of God and of Christ and will reign with him for a thousand years.

질문

첫째 부활은 무엇인가요? 둘째 부활은 무엇인가요?

답변

다니엘 12:2은 인류가 마주하게 될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운명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모든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겠지만, 모두 동일한 운명을 마주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의인과 악인에게 있을 서로 다른 부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4-6은 “첫째 부활”을 얘기하고 있으며,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둘째 사망(불못, 요한계시록 20:14)은 이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첫째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로써,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의인들이 부활” (누가복음 14:14) 과 “생명의 부활” (요한복음 5:29)과 일치합니다.

첫째 부활은 여러 단계로 이뤄집니다.
- 첫째 부활은 이긴 자들의 부활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첫 열매”, 고린도전서 15:20), 그 분을 믿는 모든 자들의 부활을 위한 길을 닦으셨습니다.
첫째 부활로, 예루살렘 성도들의 부활이 있었습니다(마태복음 27:51-53).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또한, 앞으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 대환난 말기에 있을 순교자들의 부활(요한계시록 20:4-5)이 첫째 부활에 포함됩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요한계시록 20:12-13에 의하면 둘째 부활은 불못에 던져지기 전 크고 흰 보좌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을 악인들이 그 대상입니다.

  1.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2.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따라서, 둘째 부활은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의 부활이며 둘째 사망과 연결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심판의 부활” (요한복음 5:29)과 일치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사이에 천년 왕국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의로운 자들의 마지막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요한계시록 20:4) 왕 노릇 하는 것이지만,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즉, 사악한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5).

첫째 부활 때에 얼마나 큰 기쁨이 있을까요! 둘째 부활에는 또 얼마나 큰 괴로움이 있을까요! 그러니, 우리에게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큰 책임이 있습니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유다서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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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째부활

무천년주의는 혼란스럽게도 거듭남과 첫째부활을 혼동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은 이미 첫째부활에 참여한 자들로 보며, 거듭남을 통해서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부활입니다.
부활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첫째부활은 재림과 함께 오직 성도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첫째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악인들은 둘째 사망에 참여하는데 바로 불못입니다.
악인들은 의인들의 부활 후에 그들만의 부활에 참여하기에 <둘째부활>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2. 둘째 부활

간혹 어떤 자들은 성도들 사이에도 부활의 시간적 간격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성도들만 첫째부활에 참여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자들은 둘째부활에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모두 첫째부활 때에 부활체로 변화됩니다.
만일 성도들 가운데 첫째부활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거룩하지 않으며 복을 받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 20:6
또한 첫째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면 누구든지 불못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각각 차례대로 (부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 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그 후에는 마지막이니...(고전15:23-24)

 3. 첫째사망

이런 용어는 나오지 않지만 원죄를 지닌 채 태어난 모든 사람은 첫째 사망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첫째사망은 하나님과 단절된 이 땅의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거듭났을 때 첫째사망으로부터 해방됩니다.
누구든지 첫째사망의 상태로 죽으면 둘째사망 즉 악인의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못에 던져지며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계 20:6).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리라(계 20:15) 

4. 둘째 사망

악인들 가운데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불못에 던져지는 사건을 <둘째사망>이라 부릅니다(계 20:15).
악인들이라 함은 불신자들뿐만 아니라 믿다가 타락하여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진 자들도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성도들은 결코 둘째사망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첫째부활과 둘째부활은 부활의 시간적 간격을 지시하며, 성도들과 악인들의 부활 사이의 간격을 의미합니다.
첫째사망과 둘째사망은 모든 사람이 첫째사망의 상태로 태어났지만 거듭남을 통해 성도들은 해방되고, 악인들은 거듭나지 못함으로 둘째사망에게까지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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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부활, 둘째부활, 첫째사망, 둘째사망

1. 둘째 사망, 사람은 두 번 죽는가?
2. 부활은 영적인 부활인가? 육적인 부활인가?
3. 불신자도 부활하는가?
4. 둘째부활이란 무엇이며 언제 부활하는가?
5. 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사이에 간극을 두었을까?
6. 영체(영의 몸)와 부활한 육체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 


 구분

대상 

 견해

결과 

 첫째 사망

 신자 + 불신자

 육체적인 죽음

음부,천국,지옥

 둘째 사망

 불신자

영원한 형벌 

불못 

 첫째 부활

 순교자

7년환란전과 7년환란후 2번에 걸쳐 부활한다

공중휴거시 7년환란후 짐승에게 순교한 자들 

천년간 왕노릇 

 둘째 부활

일반성도와

불신자들 

 천년왕국에 부활한다

일반성도는 새하늘과 새 땅에

불신자는 불못에 들어간다 

 

1. 둘째 사망, 사람은 두 번 죽는가?

 첫째 사망

간극 

둘째 사망 

 육체적 죽음

천년 왕국 

불못 

 

사람이 두 번 죽을 수는 없다

그런데 성경은 두 번 사망을 언급하고 있다

첫번째 사망은 육체적 죽음이고 둘째 사망은 영적 죽음인데 이는 영원한 불못 형벌에 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못에 들어가는 둘째 사망은 특별히 죄가 큰 사람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사람 즉 예수님을 믿지 않은 모든 불신자에게 임하는 징벌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통해 죄를 용서받지 못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20:13~15)

 

2. 부활은 영적인 부활인가? 육적인 부활인가?

 

무천년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부활이 영적인 부활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주장의 근거로 부활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아니스타시스가 신약성경에 42회 나타나는데

이는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되살아남을 가리키지만

영적인 부활을 의미하는 단어가 별도로 없고

육체적 죽음 이후에 누리는 영적인 삶 즉 중간상태의 삶을 묘사하는데 어쩔 수 없이 아니스타스를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여러 이유로 설득력이 없다

첫째, 부활의 첫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명백한 육체적 부활이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드시기도 하시고 공간을 초월하여 나타나시기도 하였다

영은 뼈와 살이 없으나 "보라 나는 있느니라" 말씀하시면서 육체적인 부활임을 증명하셨다

둘째, 사도요한은 성도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0)

부활은 육체적인 것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썩지않는 새로운 형태의 육체다

 

 

3. 불신자도 부활하는가?

 

의인이나 악인이나, 천국에 들어가는 신자나 불못에 들어가는 불신자나  모두 사람은 다 부활한다

그러나 육체의 몸은 영원성이 없기 때문에 부활의 몸은 현재 육체와는 다른 제3의 창조체이다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자들은 심판의 과정을 통해 불못에 들어간다

불못은 사탄과 타락한 천사, 짐승과 거짓선지자들도 들어가는 장소로

한시적인 징벌이 아니라 영원한 징벌임을 감안할때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 5:29)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사도행전 24:15)

 

 

4. 둘째부활이란 무엇이며 언제 부활하는가?

 

 첫째 부활

간극 

둘째 부활 

 순교자

천년 왕국 

일반성도와 불신자

 

첫째부활은 순교자의 부활로 두 부류의 순교자들이 있다

교회시대의 순교자들과 7년환란 때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있다

부활은 두 단계로 일어난다

교회시대의 순교자들은 7년환란 전, 공중강림의 휴거가 일어날 때 부활한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순교한 자들은 예수님의 지상재림때 부활한다

순교자의 부활을 모두 첫째 부활이라 말한다

즉 첫째부활은 천년왕국 전에, 둘째부활은 천년왕국후에 일어난다  

둘째부활은 성경에 언급이 되어 있지 않지만

천년왕국후에 순교자들을 제외한 일반신자와 불신자들이 부활한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부활) 못하더라(계 20:5)

 

5. 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사이에 간극을 두었을까?

첫째부활과 둘째부활 사이에는 1000년의 격차가 있다.
간극이 있는 이유는 순교자들에게 특별한 배려(상급)를 주기 위함인데 천년 왕국의 기간동안 부활한 순교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역활과 왕의 신분으로 활동한다.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교회시대 순교자들)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부활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니 이는 첫째 부활이라(계20:4~5).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리라(계 22:6)​

6. 영체(영의 몸)와 부활한 육체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

​하나님 나라에 거주하는 천사들은 모두 영체들이다.
이들은 낳은 존재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창조한 존재들이다
예수님께서 영체로 존재하시다가 부활한 육체를 가지고 계신 것을 보면 부활한 육체가 결코 영체보다 못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세 종류의 존재 ; 육체, 영체, 부활체 

육체가 제1의 창조물이라면 영체는 제2의 창조물, 부활체는 제3의 창조물이다.
이중에서 제3의 창조물이 가장 우월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영체로도 충분히 영광스런 존재인데 영과 육체의 복합체인 제3의 창조물이 필요했을까?
그것은 인간이 육체로 있었던 기억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가 아닐까한다

예를 들어 영으로 음식을 먹는 것과 육으로 음식을 먹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부활체는 영체와 육체의 장점을 가진 복합체로 천사보다 우월한 존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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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자료(그림)



사도 요한에게 계시가 전달되었습니다.

그것을 기록한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에게 계시를 전달했던 주체는 누구일까요?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계1:1)


계시의 작성자는 성부이고, 그 계시를 열 수 있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며, 요한에게 보여주신 분은 사자(앙겔로스)입니다.

앙겔로스(사자)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일꾼입니다.

주로 천사, 사람(제사장, 선지자), 성령이 그 일을 행합니다.


1. 계시록에서 계시를 알려주는 분은 성령님

요한의 눈을 열어 계시를 보게 하신 분은 성령님입니다.

천사는 열린 계시를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실질적으로 요한의 눈과 귀를 열어 천상의 계시를 알려주는 분은 천사가 아니라 성령님입니다.



 2. 사자(앙겔로스)가 성령으로 해석해야 할 구절들


3. 성경 전체적으로 본 계시의 전달자 -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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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이해의 핵심 - 세 번씩 강조하는 사건들을 주목하자



성부의 오심은 계시록 이해의 핵심이다



성부의 오심에 대한 증언


1. 누가



2. 요한

 1) 장차 오실 성부 하나님



 2) 성부께서 오신 후 생략된 부분 - 장차 오실 이



3. 바울

 1) 성부께서 예수님과 잠자던 성도들을 함께 데려오심



 2) 성부께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심



4. 히브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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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 환난의 정의


2. 심판재앙의 정의


3. 대 환난을 가리키는 구절들


4. 심판재앙을 가리키는 구절들


5. 구별하기 - 대 환난인가, 심판재앙인가?


6. 심판재앙에서 보호 받는 성도들과 고통받는 악인들 비교


7. 교회 즉 모든 성도들의 두 가지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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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지주의


2. 이단으로 끌고 간 영지주의


3. 바울이 말하는 영지주의


4. 영지주의의 다른 이름들


5. 영지주의에 빠진 사람들


6. 영지주의를 대적했던 교회


7. 영지주의로 돌아간 자들에 대한 표현


8. 정죄당한 영지주의


9. 영지주의를 경계한 성경과 초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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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표현했지만(신약에서만 65회)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종"이란 소유로 표현 합니다(구약 516회, 신약 481회) / 요한계시록 39회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1. 계시록을 읽고 알아야 할 하나님의 종들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이 그 종들에게 보이신 계시는 열려 있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그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합니다(계 1:3).
이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종들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도 미혹을 받을까요?

3. 심판재앙에서 보호 받는 하나님의 종들(모든 성도들)


4.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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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인가?

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뿐 아니라 성경전체에 대한 결론이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속경륜의 대장정의 막을 내리는 순간입니다.

요한이 쓴 계시록입니다 없다면 성경은 미완성의 책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여정(신앙, 역사)의 종착역이 표시되지 않은 지도를 들고 길을 나서는 여행객과 같습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계시록은 큰 고난에 대한 위안과 승리의 확신을 주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 요한계시록 배경

사도 요한은 주후 70년 경에 에베소의 목회 사역을 이어받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교회들, 즉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로마 황제 네로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으나 베드로가 약속한 “불시험“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자(주후 81-96년) 박해는 맹렬해졌다.
도미티아누스는 역사의 어떤 페이지에서도 볼 수 없는 냉혹한 살인마였다. 그는 “황제 숭배“를 장려하였으며, 그의 포고문은 “우리의 주시요 하나님이신 도미티아누스가 명령하노니...“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그에게 말하는 모든 사람은 그를 “주시요 하나님“이라고 인사해야 했다. 그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혹독하였으며, 요한을 밧모섬에 유배시킨 것도 그의 명령이었다.
밧모섬은 에게해에 있는 바위 섬으로서 길이가 16km였고 너비는 약 10km였다. 로마는 죄수들이 광산에서 노역했던 그 곳에 유배 주둔지를 두었다. 요한은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친구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고립된 이 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이루고 있는 환상들을 받았으며, 본 서는 주후 95년 경에 기록되었다.

 • 요한계시록 특성


요한계시록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지닌 독특한 책입니다.

 *예언적이다-예언의 책이다(1:3/10:11/19:10/22:7/22:10/22:18-19).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이 책은 단순히 예언적 계획에 관한 계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1장에서는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제사장이자 왕으로서 2-3장에서는 교회를 진단하시는 분으로서, 4-5장에서는 창조의 권리 증서를 받으시는 분으로, 6-19장에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며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분으로서 20-22장에서는 영광과 능력 가운데 통치하시는 분으로서 나타납니다.

 *공개적이다- “계시“라는 말은 “베일을 벗긴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그의 책을 인봉하라는 말을 들었으나(단 12:4), 요한은 “인봉하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22:10). 계시록은 어려운 예언을 모아 놓은 책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단과 죄와 세상의 체제에 대해 최종적으로 승리하실 것에 대하여 합리적이고도 질서있게 벗겨가는 책입니다.

 *상징적이다- “하나님이... 보내어 지시하신“(1:1)이란 말은 이 책이 그 멧세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징표와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어떤것들은 설명되어 있고(1:20/4:5/5:8/12:9) 어떤 것들은 설명되어 있지 않으며(4:4/11:30 어떤 것들은 구약과 관련되어 설명됩니다(2:7/2:17/2:27-28). 이러한 신령한 상징은 이 책을 받아 들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명확했겠으나 그들의 로마 박해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상징들은 실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국기란 그러한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1장 12-16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의 뜻은 아니지만, 각각의 이러한 상징들이 신령한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근거하고 있다- 이 책은 구약 성경들을 계속해서 참고하지 않고는 연구할 수 없는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의 404구절 중에서 278구절은 구약에 대한 관련 구절을 포함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구약에 대한 관련 구절이나 암시가 500개도 넘는다고 집계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시편, 다니엘, 스가랴, 창세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요엘 등이 가장 빈번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숫자로 나타낸다- 성경의 어떤 다른 책에서도 이처럼 상징적인 숫자를 많이 사용한 곳이 없습니다. 이 책에는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촛대 등 일곱이란 숫자가 계속 나옵니다. 또한 일천 이백 육십(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마흔 두달, 11:2-3/12:6/13:5)이라는 숫자와 십 사만 사천의 인맞은 이스라엘자손, 열두별(12:1), 열두 문(21:12), 열두 기초석(21:14) 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주적이다- 요한계시록은 온 세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은 열국, 백성, 무리를 봅니다다(10:11/11:9/17:15 등). 이 책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자기 백성을 위한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 대한 요약입니다.

 *장엄하다- 이 책은 “보좌의 책“이며, 4장으로부터 마지막 장까지 왕과 그의 통치에 관하여 읽게 됩니다. 보좌라는 말이 44회, 왕, 왕국 또는 통치라는 말이 37회, 능력과 권위는 40회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며 우주의 절대 주권자이신 그리스도를 봅니다.

 *동정적이다- 이 책 전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과 땅에 있는 백성에 대한 하늘의 동전을 봅니다.

• 요한계시록 기록 시기


가. 이 사항은 저자 및 해석적 관점과 긴밀한 관련을 가집니다.
나. 가능한 시기
1. 전통적으로 제시되는 저작시기는 도미티안의 통치기간(주후 81-96 년)인데, 그 이유는 이 기간이 박해에 대한 내적 증거에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ㄱ. 이레니우스(유세비우스가 인용한 내용에 의하면)는 이단에 대항하여, 5.30.3 에서 “이것(이
박해)이 매우 오래전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세대인 도미티안의 통치기간이 마쳐질 무렵에 일어난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말합니다
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ㄷ.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
ㄹ.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교회사, iii.23.1
ㅁ. 빅토리누스, 묵시, x.11
ㅂ. 제롬

2. 제 3 세기에 속하는 저자인 에피파니우스는 하엘, 51.12, 32 에서 클라우디우스의 통치기간(주후 41-54 년) 동안 요한이 밧모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후 이 책을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3. 다른 이들은 이 책이 네로의 통치기간(주후 54-68 년)에 기록되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ㄱ. 황제 숭배로 인한 박해의 분명한 증거
ㄴ. 히브리어로 가이사 네로라고 썼을 때 그의 이름이 짐승의 수인 666 에 정확히 일치함
ㄷ. 만일 ‘요한계시록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킨다고 말하면서 그 계시록의 예언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의 말이 정확하다면, 예언인 이 책은 반드시 주후 70 년 이전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 요한계시록 수신자


가. 1:4 에 비추어 볼 때 원래의 수신자들은 로마 제국의 아시아도에 있는 일곱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들은 이 서신을 지닌 자가 여행했을 경로와 관련을 가집니다.

나.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타락한 세계의 조직체로부터 박해를 받는 모든 교회와 신자들과 특별히 관련이 있습니다.

다. 신약의 마지막 책인 이 책은 모든 시대에 속한 모든 신자들에게 예언이 완성됨에 대하여 말합니다.

• 로마의 교회핍박


가. 법적으로 로마의 보호를 받은 유대교에서 분리됨으로써 지역교회가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분리는 주후 70 년대에 공식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얌니아에서 온 랍비들은 당시에 각 지역에 있는 회당에 속한 구성원에게 나사렛 예수를 저주하는 내용인 맹세의 선언을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나. 로마의 자료는 네로(주후 54-68 년)부터 도미티안(주후 81-96 년) 통치시기에 황제숭배가 교회와 커다란 갈등에 놓여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한편, 제국 전체에 걸친 공식적인 박해에 대하여는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계시록의 내용은 로마제국의 동쪽에 있는 여러 도에서 행해진 과열된 황제숭배의 양상을 반영합니다.

• 요한계시록 해석을 위한 조언


해석가가 구속의 주제에 우선순위를 두는 일이 중요하다.

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와 우주적 구원을 이루셨다.

나. 하나님의 구속은 영적이며 물질적인 면을 가진다. 교회가 구원받았지만 안전하지는 않다! 어느 날
교회는 안전하게 될 것이다!

다. 하나님은 ‘타락하여 반역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인류’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 인과 나팔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진노는 구속을 위한 것이다(참조, 9:20-21; 14:6-7; 16:9,11; 21:6b-7; 22:17).

라.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 뿐 아니라 타락한 피조물까지 회복시키신다(참조, 롬 8:18-25). 모든 종류의 악이 제거될 것이다!

잃어버려진 인류를 향해 복음으로 접근하시는 하나님의 반복적인 시도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품을 잘 드러낸다. 대접의 심판은 완강하게 반항하는 악함의 결과이지 하나님께서 사랑이 없으심의 결과가 아니다.

악한 사람들이 거듭하여 회개하기를 거부하기에 하나님께서 그 악에 대해 심판을 행하시며 그것을 격리시키실 뿐이다. 여러 면에서 볼 때, 이 책은 타락하고 화해될 수 없는 인류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정당화 시킨다! 이 책은 복음적인 초청으로 끝맺는다(참조, 22:17).

라. 이 책이 재림시 일어날 일들과 그 때와 방법을 시간적 도표로 제시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결코 안된다. 이 책은 종종 서양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비밀”스러운 내용으로 종종 해석되었다(일곱 교회를 일곱 시대로 봄). 각 세대가 그 시기들을 묵시적 상징으로 이해했다; 각 사람이 상당히 잘못되었다.

•요한계시록 개요

* 핵심 구절 :1:19

 1. 너 본 것/1장
왕이요 제사장으로서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환상

 2. 이제 있는 일/2-3장
일곱 교회들은 오늘날 교회의 영적 상황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도 시대로부터 휴거될 때까지의 교회 역사를 예언적으로 묘사한다.

 3. 장차될 일/4-22장

 교회의 휴거/ 4-5장
요한이 들림받음-어린 양이 그의 하늘 보좌에 앉으신다.
7년 대환란/ 6-13장
(1)환란의 전반부/6-9장
적그리스도의 발흥-유대인과 그의 언약-열방에 임하는 무서운 심판-인맞은 144,000명의 유대인-하나님의 두 증인들의 전파-본토로 돌아온 이스라엘

(2)환란의 중반부/10-14장
더이상 지체하지 않으리라! 적그리스도가 자기의 언약을 파함-성전이 이방인에게 점령됨-두 증인이 살해당하나 되살아남-사단이 하늘에서 내던져짐-짐승이 자기의 무서움을 나타냄

(3)환란의 후반부/15-19장
마지막 일곱 재앙-바벨론의 멸망-아마겟돈 전쟁-그리스도께서 땅으로 돌아오심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20장

 새 하늘과 새 땅/ 21-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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