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 자료(시작일 02-07-2024 / 수


요한계시록 강해 #. 1

요한계시록 1:7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문제 제기)
이단 교회에서는 계시록에 대한 관심이 너무 열정적이어서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서 교회의 질서를 무너트립니다.
그 좋은 예가 다미선교회가 1992년 10월 21일 자정에 예수님께 공중 재림을 한다고 모두 모여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진 후에 다시 어떻게 주장합니까?
영적인 것으로 영적으로 주님은 공중 재림 하셨다고 합니다.
아직도 그 여파가 또다시 계시록을 사용하여 교회와 신앙을 흔들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편지(서신서)라고 합니다.
밧모섬에서 환상으로 계시를 받은 계시록을 편지로 일곱 교회에 보낼 때 당시 교회와 성도들이 알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만 로마 정부의 가혹한 핍박과 탄압이 극에 달한 때에 구약을 인용하여 초대교회 성도들만 알 수 있는 내용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한계시록이 어렵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기 전에 먼저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기록했습니다.
요한일서와 이서 그리고 삼서의 내용의 핵심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진리를 생명을 빛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사

      샬롬(shâlôwm) שָׁלוֹם
      - 평화, 일치, 조화, 친교, 안전함, 온전함, 안전한, 온전한

    마라나타(Maranatha) מרנא תא
     Μαραναθα. Our Lord has come,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6:22.  요한계시록 22:20


카타콤(catacomb) : 지하묘지, 동굴 




*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 다니엘 7:13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낸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하나님의 심판(11, 12절)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구절로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예시된다.

인자 같은 이(케바르 에나쉬. כְּבַר אֱנָשׁ)(1247. 바르,  606 에나쉬
- '벤 아담'()과 동일어인 이 말이 구약에서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에 쓰여진 용례는 이곳밖에는 없다.
곧 본 구절의 '인자'는 '구름을 타고'(계 1:7)란 말과 결합해 메시야적 호칭으로 쓰여졌는 바,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 구절을 자신에 대한 예언으로 인정하신 바 있다(마 24:30; 26:64; 막 13:26).
이에 따라 14절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임하셨고 그의 재림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자는 전우주적 통치적(권세와 영광과 나라)을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위탁은 그의 흠없음(사 53:9)과 속죄 사역(사 53:5, 6), 그리고 부활을 통한 인류의 심판자의 자격을 입증하셨던(행 17:31; 롬 2:16) 사실에 의거한 것이다.

one like the son of
1247. 바르(bar) בַּר 스트롱번호 1247

1. 아들. 2. 손자
발음 [ bar ]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4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아들, 잠 31:2, 시 2:12
2. 명사, 남성 손자, 스 5:1.


man
606. 에나쉬( ’ĕnâsh) אֱנָשׁ 스트롱번호 606
발음 [ ’ĕnâsh ]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5회 사용

참고 정보 / 문법설명
582와 동일, 강조형 אָנָשָׁא, 단 2:38, אֱנָשָׁא, 단 5:21, אֱנוֹשָׁא, 단 4:13, 복수, בְּנֵי אֱנָשָׁא, 단 4:14, 사람, 사람들, 단 4:29, 30.

이것은 예수께서 친히 확증하신 바며(마 24:30; 26:64) 사도 바울에 의해 입증된 재림의 모습이다(살전 4:17).
여기서 재림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구름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의 위엄을 나타내는 초자연적 현상인 듯하다(Morris, Lenski, Johnson).

*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 스가랴 12:10의 예언을 반영한 것이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공개성을 나타낸다.
현재는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실로 인식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는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눈으로 확연히 보게 될 것이다(Ladd).

한편 '그를 찌른 자들'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Moffatt, Plummer, Johnson, Ladd).

그리스도는 이런한 자들에게도 자신의 재림을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박해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재림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주적 주권을 소유한 분으로서 온 세상을 공의롭게 심판하실 심판주이심을 시사한다(Mounce, Lenski).

*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 본문은 심판의 보편성을 나타낸다.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회개치 못한 다들의 비참한 상태를 나타낸다.
본문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회개치 않은 불신자들이 당할 두려움을 극명하게 시사한다(Morris, Mounce, Ironside).

* 그러하리라 아멘

- '그러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나이'(ναί )는 동의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히브리어 '아멘'(אָמֵן )과 같다.
요한은 동의어인 '그러하리라'와 '아멘'을 이중적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종말적인 재림의 확실성을 강조한다(Greijdanus, Morris, Mounce).

אָמֵן 스트롱번호 543

1. 확고한. 2. 참으로
발음 [ ’âmên ]

어원 / 53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0회 사용

뜻풀이부

1. 형용사 확고한, 성실한[비유적으로 사용될 경우].
2. 부사 참으로, 진실로.
3. 부사 아멘, 렘 28:6, 시 41:14(13).


* 그러하리라(나이)  ναί 스트롱번호 3483

1. 예.   2. 옳습니다. 3. 맞습니다
발음 [ nai ]

* 아멘  ἀμήν 스트롱번호 281

1. ‘굳건한’. 2. 고전 14:16. 3. 마 5:18
발음 [ amēn ]
어원 / 히브리어 543에서 유래

* 히브리어 543. אָמֵן

1. 확고한.   2. 참으로
발음 [ ’âmên ]
어원 / 53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0회 사용

재림(再臨) / 두 재, 임할 림


 1. 다시 옴
 2. 기독교(基督敎)에서 때가 이르면 다시 인간(人間)을 심판(審判)하러 예수(Jesus)가 이 세상(世上)에 나타난다고 하는 말.

* 인터넷 한글 성경에서 "재림"이란 단어를 검색한 결과 단 한 구절도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에 "강림"이란 단어를 검색한 결과 39구절로 나타났다.
  (구약에서는 23회, 신약에서는 16회)

강림(降臨) / 내릴 강, 임할 림

 1. 신(神)이 하늘에서 속세(俗世)로 내려옴.

"강림"이란 말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의미이고 "재림"은 두번째 다시 오신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강림이란 말은 예수님이 두번째 다시 오시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신학적인 표현이나 또 목사님들의 설교에 강림이란 말을 잘 사용하지 않고 재림이란 말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강림이란 말은 예수님의 초림과 구분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서입니다.
즉 예수님의 초림도 강림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림이라 하면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일로 이해하게 되며 또 그렇게 받아드립니다.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성경에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일을 강림이란 말로 표현하였으며 이 같은 주님의 강림은 주님이 이 세상에 두번째 나타나시는 일, 즉 재림이 되시기 때문에 강림이란 이 낱말은 주님의 두번째 나타나시는 사건을 의미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일을 "강림"이라고 표현하나 "재림"이라고 표현하나 같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 개역 성경에서 "강림"이라고 번역된 말은 모두 헬라어 "파루시아"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보통 "주의 강림"이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파루시아"라는 말은 "출현, 임재, 나타남, 현존, 도래" 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주의 강림이란 말은 "주님께서 나타나심(오심)"을 의미합니다.

παρου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952

1. 현존.  2. 오심.  3. 고후 7:6, 7
발음 [ parŏusia ]
어원  / 3918의 현재분사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현존, 임재, 고후 10:10.
2. 오심, 강림, 내림.
  a. [인간에 대해서] 고후 7:6, 7, 빌 1:26.
  b. [특수한 전문 술어로서 그리스도가 세상 마지막에 임하시는 일을 가리킴] 재림, 마 24:3, 살전 4:15, 약 5:7.
  c. [적그리스도의 출현] 살후 2:9.


* 그러나 때로 다른 성경(표준새번역-고전 15:23, 벧후 1:16)성경에서 이 말은 "재림"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탄생을 주님의 첫 번째 강림으로 보고, 마지막에 오시는 것을 주님의 두 번째 강림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주의 강림과, 주의 재림은 그 의미가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같은 뜻을 가진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새번역)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베드로후서 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새번역)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권능재림을 알려 드린 것은, 교묘하게 꾸민 신화를 따라서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위엄을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공중 강림과 지상 재림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예수님의 재림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를 바울의 종말론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구분하면 공중강림과 지상재림입니다.

​교회시대 - 공중강림(휴거) - 7년 환난 - 지상재림

예수님의 재림을 구분하여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이라 부르지만 데살로니가전서를 볼 때 공중재림은 공중강림이라 불러야 맞습니다.
데살로니가전후를 읽어 보면 주의 강림으로 되어 있습니다.

강림과 재림은 구분되어 불러야 할 것입니다.
대게 재림이라 부르지만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재림이라는 단어 보다 강림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데살로니가전서1:10)"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데살로니가전서2:19)"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전서3:13)"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데살로니가전서4:16)"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전서5:23)"

데살로니가전서는 5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장부터 5장까지 예수님의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입니다.

강림과 재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강림은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임하시는 것입니다.

재림은 예수께서 지상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공중강림이란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시어 믿는 자들을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하시는 것입니다.

공중강림을 성도들에게는 휴거가 되은 것입니다.

휴거는 구원받는 사람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것을 뜻합니다.

​지상재림은 예수께서 이스라엘 감람산으로 지상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공중강림과 지상재림의 차이가 있습니다.

​공중강림은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믿는 자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 외에는 볼 수 없습니다.

​지상재림은 예수께서 이스라엘 감람산으로 임하실 때

​예수께서 공개적으로 각인의 눈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태복음 24:30)"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요한계시록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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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성부, 성령, 성자를 우리는 삼위일체로 고백을 합니다.
사도요한만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도 이런 내용으로 인사말을 합니다.

베드로전서 1:1~2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일하심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며 복음 때문에 인하여 흩어진 나그네들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소식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기서는 성자와 성부와 성령의 차례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사말을 다른 말로는 송영이라고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찬송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서신에서 이런 삼위일체의 내용이 하나님께 영광이며 교회에는 은혜와 평강의 소식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일하심이 어떠한지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로 죄에서 해방된 자들은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고 믿게 됩니다.
이 말씀을 믿게 된 자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소식이 기쁨의 소식입니다.
초대교회 때 예수님을 믿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게 핍박 중에 이런 인사는 은혜와 평강이 주어질 뿐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분이 속히 오시리라는 말씀이 설렘이 됩니다.

설렘이라고 하니 어떤 정리전문가가 한 말이 생각이 납니다.
집안의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할 때에 설렘이 없는 물건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죄에서 해방된 사람이라면 오늘 읽은 말씀으로도 충분히 감사가 되고 설렘이 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겁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자들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함을 믿는 사람들입니다(고후 4:18).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났기에 위에 있는 것을 찾게 됩니다(골 3:1~5).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4절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알파와 오메가와 전능한 자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란 처음과 끝이라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1:6과 22:13절에서도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과 끝이란 이 역사 속에서만 있는 말입니다.
영원에는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에서 영원의 세계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세계입니다(시 90:2).
그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라는 역사를 창조하셨습니다(창 1:1, 유 1:25).
그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장차 오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장차 오실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입니까? 성령 하나님입니까? 성자 하나님입니까?
이렇게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요한계시록의 인사말이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다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타락한 이후의 인간이라 이런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사람만 모여도 의견의 일치가 안 됩니다.
일치가 되는 경우는 공동의 적이 나타났을 때에 잠시 일치가 됩니다.
그런데 공동의 적이 한 편을 들어버리면 한 때 같은 편이었던 자가 또 원수가 됩니다.
이런 우리가 삼위일체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성령의 역사로 말씀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종교와 철학에서 신을 말합니다.
그런 신을 크게 대별해 보면 내재론 적인 신과 초월적인 신이 있습니다.
만유에 내재하는 신이라면 범신론이 됩니다.
초월적이라고만 하면 세상과 관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만이 관계하시고 소통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내재하시고 초월하십니다.

“성부이신 하나님은 성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안을 향하여’ 관계하시어 이 세상 속에 ‘내주’하시며, 동시에 성령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밖을 향하여’ 관계하시어 이 세상을 ‘초월’해 계신다(송영의 삼위일체론 69P).”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은 따로 일하시지 않으시고 언제나 함께 일하십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4절과 8절에서 하나님이 오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시 오시는 그 하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데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시는 그 분은 사람들에게 찔리신 그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4절과 8절의 표현은 다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시는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의 손에 찔리신 하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님은 지금 영광 중에 계십니다.

우선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과 각인의 눈이 그를 찌른다는 말씀을 먼저 찾아보겠습니다. 계시록의 거의 모든 내용이 다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취되었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시내산에 오심도 강림이며 이 땅에 아기로 오심도 강림입니다.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시고 보내신다는 성령님의 오심도 강림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처럼 이 역사를 마감하시면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도 강림이지만 구별하기 위하여 재림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에도 오셨고 지금도 오시고 앞으로도 오시는 하나님입니다.

다니엘 7:13~14절입니다. “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 있는 중에 이 환상을 봅니다. 이 예언의 성취는 언제 이루어지는 겁니까?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인가 같은 이가 하나님께 인도되어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얻게 됩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이 되고 재림으로 완성이 됩니다.

누가복음 1:31~33절입니다.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천사가 마리아에게 알려준 예수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합니다. 이 나라는 세상의 힘과 권력으로 만들어내는 나라가 아니라 그 아들의 피로 세우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의 피로 자기 백성을 해방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겁니다(계1:4~6).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사도요한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핍박을 받고 이방인들에게도 핍박을 받습니다. 요한 자신도 지금 밧모섬에 유배 중에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내용이 요한 계시록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서 다스리고 계심을 보여주십니다. 십자가로 무엇을 승리하셨는지 밝히 보여주심으로 지금 환난과 핍박 중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위로와 소망으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 오신다는 소식이 이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입니다.

여기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고는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를 가리는 모습으로 구름가운데 임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구름이 하늘에 있는 구름과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나타내는 표현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24:15~18절입니다. “15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시는데 그곳은 구름이 가리고 있습니다.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맹렬한 불과 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구름이 가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견디지 못합니다(출19장).

마태복음 17:1~8절입니다.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받는 장면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장면과 겹쳐집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시내 산에서 들어서 전한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누구를 증거 하기 위한 말씀입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선지자 엘리야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이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습니다. 구름 속에서 들리는 음성이 이는 내 사랑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 두려워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보니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나타나실 때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경계를 정하라고 합니다. 경계를 뚫고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시내산의 강림을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두려운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루어내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한 아기로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셨다고 하신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십니다.

사도행전 1:8~11절입니다.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을 정명석이라는 이단의 교주를 추종하는 어떤 사람이 그가 구름을 타고 온자라고 합니다. 성추행으로 감옥살이 하고 작년인가 나온 사람인데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니 구름을 해석하기를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이라는 말을 합니다. 히브리서 12:1절의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란 히브리서 11장에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단 교주 주변에 구름 때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을 보고 그가 재림의 주라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이단들의 집단 모임을 보면 교주를 중심으로 그들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중앙 집중화 합니다. 히틀러의 집회나 북한의 집회나 다를 바 없는 모습들이 이단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을 타고 올라가신 주님께서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보는 하늘의 구름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을 찾아보니 빽빽한 구름으로 불과 연기로 표현하며 빛나는 구름으로 말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의 임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에 그 영광의 나타남 속에서 각인이 그를 볼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장의 말씀처럼 재림 하실 것이지만 그 전에 성령의 강림이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함으로 성령의 보증을 받은 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갔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다시 봅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은 다니엘서와 출애굽기와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 분을 각인이 볼 것이며 그를 찌른 자들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뜻을 살펴봐야 합니다.

스가랴 12:10절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1)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오늘 본문 7절과 스가랴 본문의 차이점을 보아야합니다. 스가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초림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서 마음에 찔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찔리신 그 예수를 보고서 애통을 하는데 독자를 잃고 애통하듯이 애통한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전합니다. 이 복음을 전하자 그들이 찔림을 받아 ‘어찌할꼬!’ 합니다. 그때 예수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묵시적으로는 십자가에서 완성된 일입니다. 구약의 모든 믿는 자들은 십자가로 완성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죽은 자들 곧 옥에 있는 영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가 선포되었을 때에 그들은 애곡함이 마땅합니다(벧전3:19).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창으로 찌른 자는 로마 병사 한명입니다. 그런데 그 찌른 자들도 본다는 말씀은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이 증거 한 그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자들이 됩니다. 대제사장도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신성모독이라고 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합니다(마26:64~68, 막14:62~65).

사울이 예수님을 믿는 자를 잡으려고 가다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 시에 누가 애곡을 하겠습니까? 그를 찌른 자들이란 땅에 있는 모든 족속입니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란 하늘에 속한 자들과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땅에 속한 자들은 땅의 말만 듣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오신 분의 말씀을 듣는 자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만 듣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의 땅의 말이 들립니까? 하늘의 말이 들립니까?

요한복음 3:31~36절입니다.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십자가 지신 그 아들의 말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의 말을 믿지 않는 자는 진노가 임하는데 이들이 바로 땅에 속한 자라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47~54절입니다.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ㄷ)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마지막 나팔소리와 함께 일어날 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리면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그 주님께서 재림하셔 자기 백성을 하늘로 이끌어갑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절입니다.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2)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곧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만 오셨고 예수님은 재림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중에 죽는 자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들이 부활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또는 부활이 지나갔다는 자들도 나옵니다.
심지어 고린도교회에서는 부활이 없다는 자들도 나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주 안에서 자던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주께 붙은 자들이 홀연히 변화하여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휴거되어 항상 주와 함께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대주의 종말론 자들은 휴거되어 7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하는 동안 지상에서는 대 환난이 있고 그곳에서 순교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 환난이 끝난 후에 공중에 휴거된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땅에서 천년왕국이 시작이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석을 하게 된 이유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해석을 합니다.
시간과 공간도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질 피조물입니다.
창조주가 자기 뜻을 다 이루시고 마감하실 때에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나팔이 불리고 주님의 재림의 순간은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성경의 기록이 본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다고 수평적인 차례대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시간을 빼 버리면 수직으로 세워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수평적 순서가 아니라 수직적으로 십자가에서 단번에 일어난 일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전하여지고 그 복음을 믿는 자들은 이미 묵시적으로 그리스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 자들이 됩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순서상 먼저 나타나는 것이며 그 때에 땅에서 살아있는 예수 믿는 자들은 몇 사람 안 되지만 홀연히 변화되어 구름 속에 이끌려 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한 자들 곧 땅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그 찌른 자를 보고 애곡하는 겁니다.
이때 애곡하는 자들은 믿지 않은 모든 자들이 애곡합니다.
십자가에 죽은 그 예수를 거리끼고 어리석다고 믿지 않았는데 그 분이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심이 드러나기에 믿는 자들은 구름 가운데로 이끌려 들어가서 그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애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애통하며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이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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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재림과 지상재림’, 그럼 예수재림 두 번?
이단들에 의해 오용되는 성경구절 /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즉 재림은 모든 믿는 자들의 공통된 소망이다.
주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성경구절은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구절이 아마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하)일 것이다.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고전 16:22)란 용어도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는 의미로 잘 알려졌다.

문제는 일부 이단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으로 분류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재림이 두 번 일어난다는 말이다.
어떤 이단측에서는 ‘공중재림과 지상강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재림과 강림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재림 두 번’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고자 헬라어까지 사용하여 자신들의 교리를 강조하지만 용어상의 차이는 없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불과하다.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을 구분하는 이들의 주장은 대체로 이렇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먼저 공중에 재림하여 7년을 머물게 된다고 한다.
그 때의 공중의 장소를 대기권 시작점으로 말하는 이도 있다.
예수님께서 공중재림할 때 예수님을 믿었던 이들이 그곳으로 끌어올려(흔히 ‘휴거’라고 말한다)가 예수님을 맞이한다고 한다.
예수님과 함께 7년을 공중에서 머물게 되는데 그 때 지상에서는 소위 ‘7년 대환란’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지근한 신앙인들은 지상에 남겨지게 된다.
그들은 7년 대환란의 극심한 고통의 때를 참고 견디어야 한다.
7년 후 예수님의 지상재림 때까지다.
배도하면 끝장이다.

지난 1992년 한국사회는 시한부종말설로 몸살을 앓았다.
‘92년 10월 28일 예수재림’설 때문이다.
이 때 대부분의 시한부종말설의 기본 스토리(story)가 위와 같은 내용이다.
당시 시한부종말론자들은 ‘미련하게 7년 대환란을 겪지 말고, 10월 28일 재림을 믿자’고 설득하기도 했다.

과연 예수님의 재림이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일까?
소위 ‘이중재림’을 주장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데살로니가전서 4:16~17이다.
그 구절이 이중재림을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개역개정).




위 본문을 있는 그대로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믿음을 가지고 죽은 이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공중으로 끌어올려짐을 당해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다.
헬라어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 NASB 성경도 크게 다르지 않게 기록해 놓았다.
의역에 좀 더 많이 기울어진 공동번역이나 그 중간적인 번역 원칙을 가지고 있는 NIV도 비슷하다. 참고해 보면 아래와 같다.

“For the Lord Himself will descend from heaven with a shout, with the voice of [the] archangel, and with the trumpet of God; and the dead in Christ shall rise first. Then we who are alive and remain shall be caught up together with them in the clouds to meet the Lord in the air, and thus we shall always be with the Lord”(살전 4:16~17, NASB).

“명령이 떨어지고, 대천사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 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 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살전 4:16~17, 공동번역).

“For the Lord himself will come down from heaven, with a loud command, with the voice of the archangel and with the trumpet call of God, and the dead in Christ will rise first. After that, we who are still alive and are left will be caught up together with them in the clouds to meet the Lord in the air. And so we will be with the Lord forever”(살전 4:16~17, NIV).

문제는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말은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그곳에서 7년 동안 머무른다는 의미가 전혀 없다. 만약 위 성경구절(특히 밑줄 친 부분)에 ‘공중 머무름’의 의미를 넣으려고 하는 순간에 보다 심각한 문제가 발생된다. 그 다음 문장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하).

영문 표현을 보면 ‘always’나 ‘forever’가 들어있다. 계속해서 또는 영원히 그 공중에서 머물러 있겠다는 의미와 곧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어 공중에서 ‘항상’, ‘언제나’,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는 것은 다른 성경구절들의 내용과 상충된다.

공중재림을 입증하려고 몇몇 성경구절을 더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사도행전 1:11과 요 14:3이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 개역성경).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위 두 구절이 공중재림, 특히 공중 머무름을 입증하는 것이라면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을 언급하고 있는 사도행전 1:11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공중에서 7년 동안 머물다가 감을 본 것이라 해야 한다. 그래야 ‘본 그대로 오시시라’는 구절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복음 14:3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위해 마련할 처소가 공중에서 7년간 머무를 장소라고 해석되어져야 한다. 과연 위 두 구절을 그렇게 이해해도 되는가.

살전 4:16~17은 예수님의 공중재림과 지상재림, 즉 이중재림을 말해주는 구절로 사용될 수 없다. 이는 같은 성경인 살전 5:2의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이라는 내용과 어긋난다. 예수님의 재림이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골 3:4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는 예수님 재림 때 그의 자녀들이 ‘모두 함께’ 영광 안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구절과 연결을 지을 수 있다.

이필찬 교수(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는 이를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본문(살전 4:16-17)에서 성도들이 공중으로 끌어올림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지 공중으로 끌어올림을 받은 후 어느 일정 기간 동안 공중에 존재한다는 것을 본문은 말하고 있지 않다”(이필찬,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리스도인의 삶 - <그 말씀> 2000년 8월호, 도서출판 두란노, p.87).



 

다시 말해 예수님이 재림할 때 그의 자녀들이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는 것은 맞지만, 그곳에 머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공중에서 영접한 후에 곧바로 이 땅으로 강림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도적과 같이 이른다’(살전 5:2)는 것과 ‘모두 함께 영접’(골 3:4)한다는 구절 등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F.F 부르스는 살전 4:16~17의 강조점을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4:17 하)에 두었다(F.F 부르스, 데살로니가전후서 - <WBC>, 솔로몬, 2000, 194).
‘공중’이라는 의미가 그 구절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한다.
‘함께 있음’을 축복의 절정을 나타내는 것이라 강조했다.
즉, 이중재림이라는 없는 의미를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존 스토트도 ‘공중’을 어느 특정한 ‘지역’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존 스토트, 데살로니가전후서 강해 - BST 시리즈, IVP, 2007, p. 140).

예수님의 재림은 이중적인 게 아니다.
한 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살전 4:16-17 역시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계 1:7과 연결시켜 보면, 예수님의 재림 시에 모든 이들이 그 사건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뿐 아니라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 중 소망의 표현이다.
어느 것 하나도 이중재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곱 영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4구절) 1:4, 3:1, 4:5, 5:6
요한계시록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 1:4~5). 

이 말씀에 나온 ‘일곱 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신 ‘성령’을 일곱 영이라고 지칭하는 것일까? 놀랍게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성령이 하나가 아닌 일곱으로 표시될 수 있었을까?

여호와의 영, 지혜의 영, 통찰의 영, 모략의 영, 용기의 영, 지식의 영,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이렇게 일곱 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일곱이란 하나님의 완전하신 '1'의 숫자이다(창 2:2~3)

성령이 일곱으로 나타나는 최초의 경우를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머물 것이다. 곧 지혜와 통찰의 영, 모략과 용기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에게 머물 것이다”(사 11:2).

여호와의 영, 지혜의 영, 통찰의 영, 모략의 영, 용기의 영, 지식의 영,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이렇게 일곱 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일곱이란 하나님의 완전하신 ‘1’의 숫자이다(창 2:2~3). 

‘여호와의 영’이 가진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혜의 영(호크마)’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망라해 요구되는 덕목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죄를 피하는 방면으로 이끄신다.

둘째, ‘통찰의 영(삐나)’은 바르게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릇되고 악한 것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보고 이해하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그분의 뜻하신 바대로 행하게 하신다. 

셋째, ‘모략의 영(에차)’은 주로 정책을 결정할 때 필요한 지혜를 정책 결정자에게 제공해주는 참모 역할이다.

넷째, ‘용기의 영(킵보르)’은 용맹한 장수가 가지고 있는 강한 힘을 의미한다. 죄와 사명의 권세 아래 있는 사탄의 권세를 파하는 능력이다.

다섯째, ‘지식의 영(따아트)’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의 선하시며 은혜로우신 뜻을 행하게 하신다. 예를 들면 의와 공평을 행하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며, 불의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여섯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아르아)’은 자기를 세운 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의 자세와 태도를 의미한다. 이 정신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 기쁘시게 하려고 애쓴다. 

일곱째, ‘여호와의 영’인 ‘루아흐’는 태초에 여호와께서 불어넣으신 호흡을 의미할 때 쓰였으나, 여기에서는 여호와께서 메시아로 하여금 구원사역을 감당하도록 그에게 주시는 영으로 나타난다. 요한계시록에 나온 ‘일곱 영’은 이사야에서 언급된 ‘일곱 측면의 영’을 살펴볼 때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은 지금도 다방면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신다. 그 안에서 완전한 능력과 섭리적 보호로 함께하신다. 온 인류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졌던 성령이 이제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들에게 함께 하신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주제이기도 하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경험할 여러 시련과 환난이 있다. 그 가운데 성령 안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를 받고, 세상에서 승리를 경험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은 의도된 상징의 방식으로 한 분이신 성령을 일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는 의도된 상징적 형상이나 숫자를 사용해서 성삼위의 세 번째 인격인 성령의 속성과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을 때 비둘기가 성령을 상징했다(마 3:16).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들에게 능력을 부어주실 때 그들은 방언을 말하게 되었는데, 그때 ‘불의 혀’가 성령을 상징했다(행 2:3). 만약 그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120명이었다면 거기에는 120개 성령의 화염이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성령이 여러 다른 방식으로 상징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을 한 분이신 성령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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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곱 영이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일곱 영”은 요한계시록 1:4, 3:1, 4:5, 5:6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4은 일곱 영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고 언급합니다. 요한계시록 3:1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진”다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4:5은 하나님의 일곱 영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켜진 일곱 개의 등불과 연결시킵니다. 요한계시록 5:6은 일곱 영을 어린 양의 “일곱 눈”과 동일시하고, 이들이 “온 땅에 보내심을 받[았다]”고 진술합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에는 최소 세 가지 가능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성령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특히 요한계시록은 완벽성과 완전함을 언급하는 데 숫자 7을 사용합니다. 만일 “일곱 영”의 “일곱”이 그와 같은 의미라면,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각기 다른 영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완벽하심과 완전하심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일곱의 천사들, 스랍 (seraphim)이나 그룹 (cherubim) 등을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수많은 천사들의 묘사와도 일치합니다 (요한계시록 4:6-9; 5:6-14; 19:4-5).

세 번째 가능한 해석은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라고 말씀하는 이사야 11:2에 근거합니다.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일곱 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 - 지 - 총 - 지 -주 - 재 -모

(1) 주님의 영,
(2) 지혜의 영,
(3) 총명의 영,
(4) 모략의 영,
(5) 재능의 영,
(6) 지식의 영,
(7) 주님을 경외하는 영

성경은 일곱 영들이 구체적으로 누구 혹은 무엇인지 말씀하지 않지만, 첫번째 해석, 즉 일곱 영이 성령이라는 견해가 가장 타당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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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영은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 일곱 영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계속해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일곱이라는 숫자에, 전체! 충만! 완전! 완성이라는 특별한 계념을 부여한다고 했죠? 그래서 전체 교회를, 굳이 일곱 교회라고, 일곱이라는 숫자를 동원해서, 묘사를 하는 것이라고, 우리를 배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전체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에 뒤에 나오는, 일곱 영을, 홀로 온전하고, 완전하신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미루어 추측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앞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성부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오고, 또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우리는 금방 보좌 앞에 일곱 영은, 성령(聖靈)이라는 것을 미루어 추측을 할 수가 있죠?

그러니까 일단 일곱이라는 숫자는 덮어 두세요. 그러면 어떻게, 그 일곱 영이,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일곱 영은, 어떤 메시지를 갖고 있기에, 그들이 은혜와 평강을 금방 떠올리게 되었는지, 성경에서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시록 5장 6절로 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 5:6)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합니다. ‘일곱 영은, 일곱 눈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일곱 눈은 구약에 어디에서 보셨죠? 스가랴서 4장 2절로 가겠습니다.

(스가랴 4:2-10)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3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지금 스가랴가 환상을 보고 있는데, 일곱 촛대, 일곱 등잔이 있고, 그 옆에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람나무에서, 금 기름이 계속 흘러 나와서, 그 촛대를 밝히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가랴가 ‘이 환상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5절부터 보겠습니다.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스가랴가 ‘이 환상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니까, 천사가, 그 장면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라고 대답을 해 줍니다.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 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9 스룹바벨의 손이 이전에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시작이 미미하다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라는 뜻입니다. ‘일이 안 될 것 같으냐?’ 이런 뜻이죠?)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으로 보고 기뻐하리라

10절에 보시면, ‘이 일곱 눈은 온 세상을 두루 살피는 여호와의 눈이다.’라고 나오죠? 계시록 5장 6절에는 일곱 눈은 뭐라 그랬습니까? ‘온 세상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영이다.’라고 했죠? 그리고 스가랴서 4장 6절에 보면,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의 신이다.’라고 하죠? 그러니까 일곱 영은,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 전체교회를 일곱 교회라고 계시록은 묘사하고 있어요.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에게 보내진, 온전하신, 완전하신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곱 교회에게 보내지는 성령님을, ‘일곱 영이다.’라고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자, 이 이야기는 스가랴가 본 환상(幻像)입니다. 스가랴에는 총 일곱 개의 환상이 나오는데요, 그중 5번째 환상입니다. 이 스가랴서 4장은 아주 어려운 본문으로 알려져 있죠? 그래서 이 스가랴서 4장만 가지고도, 1년을 설교를 하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여러분들에게 아주 짧은 시간에, 제가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환상은 하늘의 성전(聖殿)! 즉 하나님나라를 묘사하고 있는 환상입니다. 천상에 하나님나라! 성전을 묘사하면서, 그 성전이 지어져 가는 모습을 묘사하기도 하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떻게 묘사되는고 하니, 순금 등대에 일곱 촛대가 있고, 그 양 옆으로 두 그루의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등대로, 감람나무에서 계속 금 기름이 흘러 들어, 그 촛대의 불이 꺼지지 않는 장면이에요. 이 장면을 여러분이 머리에 잘 떠올리고 계세요.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스가랴가 천사에게, 이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묻죠? 천사는, ‘그것은 이런 거야!’라고 설명해주지 않아요. 그러면서 ‘네가 보고 있는 그 모습은,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能)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전을 재건하는 스룹바벨의 이야기로 끌고 가죠? 그러니까 이 장면은, 성령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참 성전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쉬운 말로 하면, 참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참 교회의 모습!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배웠죠? 우리는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교회잖아요? 그렇게 성령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스가랴서 환상에서는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따라와 주세요.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이 나오는데, 스룹바벨은 누굽니까? 제가 새가족양육반에서는 설명을 해 드렸죠?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었죠? 그리고 BC 538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성전재건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돌려 보낼 때, 1차 포로귀환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사람이, 스룹바벨이에요. 성전을 재건하는 임무를 띠고, 이스라엘로 귀환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스룹바벨입니다.

여호와긴이라는 사람이 있죠? 바벨론 포로 때 잡혀간,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열왕기하가 여호야긴의 석방으로 끝이나죠? 바로 그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왕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성전을 재건을 하는 데, 엄청난 방해가 있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BC 520년경부터 사역을 시작했는데요, 당시에는 페르시아의 다리오가, 애굽의 충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군대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불똥이 또 자기들에게 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재건을 방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했죠? 그리고 앗수르가 혼합정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수르로 데리고 갔고, 앗수르 사람들과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땅에 심어 놓았죠? 그래서 피가 섞였습니다. 그래서 남 유대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서, ‘사마리아 인이다. 개만도 못한 사마리아 인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남유대가 포로귀환을 하고 성전을 재건한다고 하니까, 이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들도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이니까, 그 성전재건을 돕겠다하고 나셨다고요. 그랬더니 남유대에서, ‘너희 같은 더러운 자들은, 성전재건에 참여할 수 없다.’하고 거절을 했다고요. 그래서 이 북이스라엘 사람들! 사마리아 사람들이 열이 받아서, 그 성전재건을 오히려 방해를 했습니다. 성전 재건하는 현장에다가, 시체를 갖다 뿌려놓고 그랬다고요.

그리고 요한복음에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리심 산에다가 자기들 마음대로 성전을 지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짓는데, 벽돌이 모자라고, 또 땅에 문제가 있고 해서, 계속해서 이 성전재건이 지연되고 있을 때예요. 그래서 스가랴가 ‘정말 성전이 재건될 수 있을까? 이 성전이 정말 재건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고요. 그때에 스가랴에게, ‘스룹바벨이 재건을 시작한 성전은, 반드시 이루어진다.’하고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전은 결국 BC 516년에 완성이 되죠? 역사적으로도요!

자 이런 역사적 배경을 머릿속에 넣어두시고 같이 가시자구요? 성경에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오죠? 스가랴나 학개, 에스라, 느헤미야 다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성전 재건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성경이 그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나타나는 성전 재건이라는 것은, 옛 성전을 무너뜨리고 새 성전을 지으시는,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을 창조하시는, 즉 교회를 탄생시키는, 여러분의 구원의 모습!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성전을 무너뜨려라! 내가 사흘 안에 성전을 짓겠다!’ 그렇게 말씀하시죠? 바로 그 구원의 모습을, 새 창조의 모습을, 이 성전 재건의 모습에서 우리는, 읽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어떤 방해가 있어도, 우리의 구원은 완성되고야 만다는 것을, 읽어내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장면이에요. 오직 성령으로 될 것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그 일은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가, 스가랴서 4장의 다섯 번째 환상인, 일곱 촛대와 두 감람나무인 것입니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이 환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게 어떻게 은혜와 평강에 메시지가 되는지! 10절에서 분명 이 일곱 촛대를 가리켜,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이다.’라고 이야기하죠? 성령입니다. 그런데 계시록 1장 20절에서는, 일곱 촛대를 다르게 묘사를 하고 있어요. 계시록 1장 20절로 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20)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라고 이야기해요. 일곱 교회는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죠? 바로 여러분을 상징하는 것이, 일곱 촛대라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스가랴서에서는, 얼른 피상적으로 보면, 일곱 촛대는 성령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죠? 이렇게 성경에서 일곱 촛대는, 성령으로도 표현이 되고, 교회로도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와 성령은 어떤 연관이 있기에 이렇게 표현이 되고 있는 것이죠? 눈치 빠르신 분들은 금방 이해를 하실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완성하셨죠?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올라가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성령을 이 땅에 보내셨어요. 그래서 교회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교회인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 참 교회의 모습이죠? 성령이 오셔야, 교회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교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죠? 요한복음 15장 26절로 가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26)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탄생되는 것입니다. 지금 스가랴서의 환상은,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금 기름이 공급되고 있죠? 그 기름은, 성령님이시라고요. 그래서 그 금 기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탄생되고, 성령님으로 유지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오시므로 탄생이 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의 조명(照明)과 인도(引導)와 충만을 받아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묘시하는 것이죠? 그 교회가, 천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이 땅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거든요. 여러분은 이미 불이 붙은 교회라고요.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부어지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는 빛을 발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라고요.

교회라는 것은 이렇게, 성령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유지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촛대에 불이 붙어서, 그것이 촛대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불이 붙어야 비로소 촛대가 되는 것이죠? 교회와 성령은 불가분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곱 촛대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탄생이 되고 빛을 발하게 되는, 교회(敎會)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누누이 설명해드린, 그리스도와의 연합! 유니온 크라이스트(Union Christ)를 떠올리시면, 조금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그럼 성경에 등장하는 그 촛대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한 번 살펴보자구요. 출애굽기 25장 31절로 가겠습니다.

(출애굽기 25:31-40)

31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 밭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32 가지 여섯을 등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그 세 가지는 이편으로 나오고 그 세 가지는 저편으로 나오게 하며

33 이편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밭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편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밭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같게 할지며

34 등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에 잔 넷과 꽃 밭침과 꽃이 있게 하고

35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 한 꽃밭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 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 밭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고

36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하게 하여 전부를 정금으로 쳐 만들고

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38 그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지니

39 등대와 이 모든 기구를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40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

네, 이렇게 등대를 비롯한 성막 전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으로 데리고 가셔서, 모세에게 직접 보여주신, 하나님나라의 모형이라고요. 모세가 하늘나라를 보니까, 그 하늘나라에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어떤 빛을 발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촛대로 묘사를 해 놓은 것인데요, 성막에 놓일 촛대를 만드는데, 촛대를 정금으로 만들어요. 촛대를 정금으로 만들라는 것은, 당시 금은 빛을 상징하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촛대는 지성소 앞에 성소에 위치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보좌 앞이죠? 그렇게 만들어진 촛대에, 불을 밝혀서, 1년 365일 24시간 불이 꺼지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계십니다. 왜 그 촛대에 불이 꺼지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실까요? 레위기 24장 1절로 가겠습니다.

(레위기 24:1-4)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태우기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지며 (절대 꺼뜨리지 말라는 거예요. 감람을 찌어낸 순결한 기름으로 그 불을 밝히는 것이죠? 스가랴의 환상과 흡사합니다. 그죠?)

3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아론더러, 대 제사장인 아론더러, 항상 등잔불을 정리하라고 합니다. 불이 꺼지지 않게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4 그가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의 등잔들을 끊이지 않고 정리할지니라

그럽니다. 여기서도 감람유를 끊임없이 촛대에 부어서,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명령하시죠? 제사장들은 바로 그 일을 했던 거예요. 왜 성막에, 성전에, 제사장들이 그렇게 많아야 하느냐? 바로 이런 일들을 했다고요.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흘러서 불이 꺼지지 않는, 그 스가랴의 환상과 동일하죠?

그러나 그 옛 성전! 성막에는, 제사장들이 감람나무 기름을 부지런히 날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에서의 환상은, 감람나무에서 직접 금 기름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라고요. 옛 언약에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무엇을 해야 합니다. 그렇죠? 새 언약에서는,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있어요.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를 나타내는 거죠?

성막(聖幕)은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모형(模型)입니다. 그 성막 안에 촛대라는 것은, 그 하나님나라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고, 하나님 보좌 앞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서, 빛을 발하는 어떤 무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 무리가 교회(敎會)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교회는, 성령의 기름으로 빛을 발하고 있어요. 그 교회는 성령의 기름으로만,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성령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죠? 그래서 교회는, 일단 불이 붙여지면, 영원히 빛을 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꺼질 수가 없다는 것이죠! 당시 유대인들은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스가랴서의 일곱 촛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들이였으니까요! 그 일곱 촛대에 부어지는 성령을 상징하는 금 기름으로, 촛대에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그 스가랴의 환상을 떠올리면서, 천사가 설명을 해준, 그 환상의 의미를 되새겼을 것이라고요.

어떤 말입니까? 이는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이야기를 떠올렸을 거라고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본연의 삶을, 재확인했을 것입니다. ‘맞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는 교회다! 이렇게 소심하게, 불성실하게, 겁쟁이처럼 살 수는 없다!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야지!’라고 결단(決斷)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게 하시는, 교회라고요. 그런데 정말 여러분의 삶 속에,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삶이, 그 빛이, 비춰지고 있습니까? 그 삶이 나오고 있습니까?

그 불은, 이미 2000년 전 오순절 날에, 성령이 교회에 오심으로 켜졌다고요. 여러분의 심지에, 그 불이 붙어 있습니까? 빛이 나오고 있습니까? 아니라면, 여러분은 가짜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로 가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17-18)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서 ‘주의 영광을 보다’는 구절의 ‘보다’는, ‘카토티조마임’입니다. 이 말은, ‘반영하다, 반사하다, 거울에서처럼 보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카토티조마임’의 이 시제는, 현재형이거든요! 헬라의 현재형은 뭐라 그랬죠? 계속 진행되는 것을 표현하는, 진행형을 나타내는 거라 그랬죠? 우리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빛으로, 반사해 내는 촛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로 갑니다.

(마태복음 5:14-16)

14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내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여기서 ‘말’은 호스(horse)가 아니라, 한 말, 두 말, 이렇게 말(斗)을 재는 그 ‘말’이에요.)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래요. 너희는 빛을 발하면서 살아야 되는 존재다. 그 빛을 발하는 삶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어떻게 돌립니까?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오직 빛을 드러내는 여러분의 삶인 것입니다. 요한1서 1장 5절로 가겠습니다.

(요한1서 1:5-7)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래요. 빛 가운데서 행하면, 빛이신 하나님처럼 빛 가운데 행하면, 너희는 교회다! 아니면? 가짜라는 것이죠. 에베소서 5장 8절로 가겠습니다.

(에베소서 5:8-9)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이 되라!’가 아니에요, ‘빛이다!’라고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성경은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난 교회에게, 빛을 받은 자로서, 빛을 발하며 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빛을 발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하죠?

소요리 문답 1번! 우리 인생의 목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 교회가 이 땅에서 당연히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빛을 발하며 사는 거예요. 무엇이 빛을 발하는 삶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까? 여러분! 부자가 되어서, ‘야!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간증하고 다니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일까요? 그럼 예수를 믿지 않는 빌게이츠는, 지금 누구한테 영광을 돌리는 겁니까?

아니면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이, 우리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일까요? ‘예수를 잘 믿으니까, 저렇게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구나!’ 그러면 하버드와 MIT와 예일에 있는 수많은 불교신자들과, 무신론자들은,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빛을 발하는 교회의 삶은 뭐예요? 이 땅에 빛으로 오셔서, 빛의 삶을 살다가 가신 분이 계시잖아요? 그 삶을 좇아가면 되는 거예요. 그 삶을 닮아 가면 되는 거예요. 그 삶을 흉내 내면 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을 보세요.

(요한복음 8:12)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에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께서 직접 당신을 가리켜, ‘나는 세상에 빛이다!’ 그러신다고요. 그리고 ‘나를 따르는 자는, 절대 어두움에 행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세요. 요한복음 12장 46절로 가겠습니다.

(요한복음 12:46)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

그 빛이 왜 왔다고요? 우리를 빛으로 만들기 위해서! 빛을 비추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불을 붙여서, 빛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어두움에서 건져 내서 빛을 발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그 빛이 이 땅에 오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빛이셨다고요. 교회는 그 빛을 그대로 흉내 내어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살다 가셨나요? 부자로, 권세를 누리면서 ,떵떵거리며 살다가셨나요? 아니에요. 힘들고 어렵지만, 그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다 가셨다니깐요. 요한복음 14장 9절 보세요.

(요한복음 14:9)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죠? 그 말은, 시편에 나오는, ‘아멘! 아멘!’이라는 말입니다. ‘아멘’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보고 듣고, ‘옳습니다! 맞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아멘! 아멘!’하고 말씀을 시작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하늘에서 보신 것과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그대로, ‘아멘! 아멘!’ 하면서 살다 가셨다는 거예요. 살아내고 가셨다는 거예요. 우리도 똑같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입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증인(證人)들이라고요. 그것이 교회에 존재 목적이라고요.

교회는 이 땅에서 수천만 불짜리 건물 짓고, 사람들 모아서 대단한 일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면서,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진정한 부흥이라는 것은, 교회에 맴버들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지어져 가는 것을, 부흥이라고 하는 것이지, 사람들 많이 모으고, 건물 큰거 사는 게 부흥이 아니라고요. 참된 리바이벌(revival)은, 우리가, 이 처치 멤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빛을 발하는 그 하나님의 자녀로, 잘 지어져 가는 것을, ‘부흥이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박국서에서 배웠잖아요?

부흥(復興)이 뭐였습니까? ‘주여 수 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라는 그 부흥이 뭐였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에게 불필요하고 악한 것들은, 오셔서, 어서 오셔서, 완전히 박살내주옵소서!’ 그게 부흥 아니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어? 세상에 저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네! 아니, 저들은 뭔가 다른 나라 사람들 같다. 아니, 도대체 누구를 닮은 것일까? 저들이 믿는 하나님은, 누구기에 저들이 저렇게 사는 것일까?’라는 평가를 드러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의 증인으로, 빛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떻게 만사형통(萬事亨通)! 일사천리(一瀉千里)! 여유만만! 또 뭐 있어요? 화기애애! 그런 것만 있겠습니까? 여러분! 거기에는 핍박(逼迫)과, 고난(苦難)이 따르게 마련이라고요. 여러분! 제가 제일 강조하는 게 뭡니까? 설교 때마다, 가장 강조하는 게 뭐예요? 스피드입니까? 뭡니까?

우리는 이 땅에 눈 두고 사는 사람들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우리는 이 땅에다가 아방궁 짓고, 기둥박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것이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크게 부흥하고 번영을 누리면서 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 땅의 삶에다가 금칠을 하려고 하시냐구요?

이 요한계시록을 받아서 읽던, 초대 교회 사람들은,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힘겨운 핍박과 고난에 겁을 먹고 있었고, 자신감을 잃고 있었고, 자폭하고 싶을 만큼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고요. 그들이 요한 계시록을 받았습니다. 누군가가 앞에서 이 요한계시록을, 감격에 복받쳐, 읽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듣다가, 그 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으로 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감격한 거예요. 그들은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것은, 힘으로 눈으로 되는 게 아니라, 성령에 힘으로 되는 것을, 깨달았을 거라고요. ‘아! 우리는 이렇게 약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시겠구나! 그 스가랴서의, 일곱 촛대 옆에 있는 그 감람나무로부터, 금 기름이 계속해서 공급이 되어서, 그 촛대에 불이 꺼지지 않듯이, 우리는 이렇게 약하지만, 교회는 성령으로 탄생되고 성령으로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끌고 가시겠구나!’ 하고 평강을 얻었던 거예요. 안도의 숨을 쉬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평강(平康)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평강은, 아무 일 없는 그런 상태가 아니에요. 전쟁이 없는 그런 상태가 아니에요. 전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확신! 고통 속에서도 반짝이는, 어떤 소망! 공격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오고 있는데, 내 안에 흔들리지 않는 그 소망 때문에, 내가 기뻐하고, 내가 흔들릴 수 없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평강인 것입니다.

인터넷에, 군대에서 고참들의 횡포를 견대지 못하고, 자살을 한 어떤 병사의 기사 아래에, 이런 다른 이등병의 편지가 올려져 있었습니다. 똑 같은 상황에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살을 했고, 어떤 사람은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저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밥도 이제 먹을 만하고, 잠을 못자는 것도 이제 견딜 만합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게으르고, 저만 생각하며 살았는지, 절실히 느끼고 배웁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얼차려를 주고, 행패를 부리는 고참들을 보면서, 교회에서 배웠던 인간에 죄성(罪性)을 배웁니다. 그리고 결심해 봅니다.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그러나 자신이 없습니다. 저도 힘을 얻게 되면, 얼마든지 약자를 깔볼 수 있는 죄인이니까요. 힘에 벅찬 유격훈련을 받으면서, 제 몸이 얼마나 허약한지 깨달았습니다. 이 허약한 몸으로, 그동안 얼마나 객기를 부리며 살았었는지, 참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힘이 들지만, 배우는 보람이 있네요. 힘이 들어 무너져 버리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만 떠올립니다. 제가 그렇게 무너지면, 어머니가 실망하실 테니까요. 삶이 힘드니까, 어머니가 더욱 보고 싶습니다. 지금 저는 제대할 날만을 기다립니다. 제대할 때까지 많이 배우고, 바른 사람이 되어, 돌아가겠습니다. 제대하면 꼭 어머니께 효도하겠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어머니와 함께 할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이렇게 기쁩니다.

네 똑같은 상황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도저히 못 견디겠다 하고, 목숨을 끊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니야! 이 상황은 나에게 꼭 필요한 거니까 내가 여기서 많이 배우고 사람 되어서 나는 돌아갈 거야! 나는 여기서 뭔가 배우고 돌아가야 해!’ 하고 다른 반응을 보였다고요. 핍박이 끊어지지 않았어요. 공격이 끊어지지 않았어요. 고참들의 횡포가 끊어지지 않았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속에, 그에게는 소망이 있었다고요. 이제 나에게는 곧 제대할 날이 다가올 것이고, 제대를 하면 나를 두 팔 벌려 맞이해주실 그 어머니가 있다는 거예요. 그 어머니와, 영원해 행복하게 살 그날을 소망하면서, 지금 나는 뭔가 배워서, 어머니가 기뻐하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가겠다는 거예요. 그게 평강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교회를 이 땅에 던져 놓으신 것입니까?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거예요. 하늘나라에선 필요 없는, 그러한 악한 것들! 추한 것들! 다 잘라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과 경건을 연습하고 훈련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하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에게 훈련교관을 붙이신다고요. 말도 안 되는 억지! 분 냄! 짜증! 핍박! 횡포! 그런 것으로 우리를 괴롭히게 한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배우는 거예요. 거기서 인내와, 사랑과, 용서와, 온유를 배우는 것입니다. ‘어쩌다 내 삶에, 저런 웬수가 나타나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가?’로 가지 마시구요.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금 뭔가를 가르치고 계시는 구나!’로 가시란 말이에요.

이 자리에는 분명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하하) 그 분들은 기도하세요. 여러분은 지금 죽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들어서 썼던, 수많은 민족과 사람들을 보세요. 형체도 없이 사라졌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관심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기 위해서, 잠시 들어서 썼다가, 그들은 완전히 멸망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회개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유 없는 핍박과 고난을 받으시면, 기뻐하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지금 세심한 관심과, 세심한 배려로, 여러분을 만들고 계시는 거예요. 핍박을 당하시는 여러분!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자기 한 몸 편하기 위해, 남을 괴롭히는 사람들! 핍박을 가하고 있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죽으시면 안 됩니다.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삶 속에, 지금 견디기 힘들고,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그러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까? 그래서 도저히 더 이상은 못 갈 것 같은 좌절에 빠진 분들! 혹시 계십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은, 이미 성령님께서, 테이크 오버(take over)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사시는 이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시라고요. 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으로 데리고 가실까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그런 일을 허락하셨을까요?

이제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옥에 가면, 하나님도 지옥에 따라 오셔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지옥에 못 가요. 우리의 신분은 그렇게 안전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힘든 상황을 허락하셨다면, 지금 우리에게 닥친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들은, 다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데, 필요한 것들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걸 놓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걸 아는 우리가, 어찌 평안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보좌 앞에 일곱 영!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천국으로 향하고 있는, 순례자(巡禮者)들입니다. 나그네들입니다. 여러분! 그 분이 계속해서 우리를 조명하고 계시고, 힘을 주고 계시고,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응원하고 계시다고요. ‘이겨라! 이겨라! 이겨라! 내 새끼들아!’ 감람나무에서는 지금도 계속 금 기름이 흘러나오고 있다고요. 우리는 불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힘내십시오.

초대교회 사람들이, ‘성령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는 말만 듣고도, 그렇게 평강을 얻었다면, 여러분도 동일한 평강 안에 거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이 그 엄청난 방해에도, 기어코, 새 성전을 완성을 해 냈듯이, 하나님나라는 반드시, 속히, 완성이 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고 계신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힘내십시오! 다시 한 번 꼭 마음에 세기세요.

하나님은 완성된 하늘나라의 복을 가지고, 우리에게 역동적으로 오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과, 성령님으로 함께 하고 계시다고요. 두려워 마세요! 평강을 찾으십시오! 은혜와 평강! 그것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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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 1:4~5).

이 말씀에 나온 ‘일곱 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신 ‘성령’을 일곱 영이라고 지칭하는 것일까?
놀랍게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성령이 하나가 아닌 일곱으로 표시될 수 있었을까? 

성령이 일곱으로 나타나는 최초의 경우를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머물 것이다. 곧 지혜와 통찰의 영, 모략과 용기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에게 머물 것이다”(사 11:2).

여호와의 영, 지혜의 영, 통찰의 영, 모략의 영, 용기의 영, 지식의 영,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이렇게 일곱 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일곱이란 하나님의 완전하신 ‘1’의 숫자이다(창 2:2~3). 

‘여호와의 영’이 가진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혜의 영(호크마)’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망라해 요구되는 덕목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죄를 피하는 방면으로 이끄신다.

둘째, ‘통찰의 영(삐나)’은 바르게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릇되고 악한 것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보고 이해하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그분의 뜻하신 바대로 행하게 하신다. 

셋째, ‘모략의 영(에차)’은 주로 정책을 결정할 때 필요한 지혜를 정책 결정자에게 제공해주는 참모 역할이다.

넷째, ‘용기의 영(킵보르)’은 용맹한 장수가 가지고 있는 강한 힘을 의미한다. 죄와 사명의 권세 아래 있는 사탄의 권세를 파하는 능력이다.

다섯째, ‘지식의 영(따아트)’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의 선하시며 은혜로우신 뜻을 행하게 하신다. 예를 들면 의와 공평을 행하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며, 불의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여섯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아르아)’은 자기를 세운 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의 자세와 태도를 의미한다. 이 정신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 기쁘시게 하려고 애쓴다. 

일곱째, ‘여호와의 영’인 ‘루아흐’는 태초에 여호와께서 불어넣으신 호흡을 의미할 때 쓰였으나, 여기에서는 여호와께서 메시아로 하여금 구원사역을 감당하도록 그에게 주시는 영으로 나타난다.

요한계시록에 나온 ‘일곱 영’은 이사야에서 언급된 ‘일곱 측면의 영’을 살펴볼 때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은 지금도 다방면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신다. 그 안에서 완전한 능력과 섭리적 보호로 함께하신다. 온 인류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졌던 성령이 이제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들에게 함께 하신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주제이기도 하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경험할 여러 시련과 환난이 있다. 그 가운데 성령 안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를 받고, 세상에서 승리를 경험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은 의도된 상징의 방식으로 한 분이신 성령을 일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는 의도된 상징적 형상이나 숫자를 사용해서 성삼위의 세 번째 인격인 성령의 속성과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을 때 비둘기가 성령을 상징했다(마 3:16).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들에게 능력을 부어주실 때 그들은 방언을 말하게 되었는데, 그때 ‘불의 혀’가 성령을 상징했다(행 2:3). 만약 그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120명이었다면 거기에는 120개 성령의 화염이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성령이 여러 다른 방식으로 상징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을 한 분이신 성령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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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영 - 일곱 눈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의 뒤에 나오는 일곱 영을 홀로 온전하신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미루어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성전 재건”이라는 것은 옛 성전을 무너뜨리고 새 성전을 지으시는,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창조하시는 즉, 교회를 탄생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유지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어, 세상에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네’ ‘저들은 뭔가 다른 나라 사람들 같다’라는 평가를 들어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4-8
4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이 내려 주시고,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 내려 주시고,
5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의 첫 열매이시요(또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맨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씻어') 주셨고,
6 우리로 나라를 이루셔서, 자기의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7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지난주에 우리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전에도 계셔서 그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셨던 그 하나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누릴 그 복을 가지고 역동적으로 우리에게 오고 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이제도, 지금도 우리를 이끌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를 감격케 했습니다. 역동적으로 지금 오고 계신다는 것은 이미 완성된 미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완성된 미래에서 오시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이미 완성된 미래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안전하고 확실한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보좌 앞의 일곱 영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보좌 앞의 일곱 영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은혜와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일곱 영은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 일곱 영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계속해서 공부하겠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일곱이라는 숫자에 전체, 충만, 완전, 완성이라는 특별한 개념을 부여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전체 교회를 굳이 일곱 교회라고 ‘일곱’이라는 숫자를 동원해서 묘사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의 뒤에 나오는 일곱 영을 홀로 온전하신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미루어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앞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성부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오고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우리는 금방 보좌 앞의 일곱 영은 성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일곱’이라는 숫자는 덮어 두세요. 그러면 어떻게 그 일곱 영이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일곱 영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계 5:6)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일곱 영은 일곱 눈이라고 합니다. 일곱 눈은 구약의 어디에서 보셨지요? 스가랴 4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슥 4:2-10)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3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10절에 보시면 ‘이 일곱 눈은 온 세상을 두루 살피는 여호와의 눈이다’라고 나옵니다. 여러분이 조금 전에 읽으셨던 요한 계시록 5장6절에는 ‘일곱 눈은 온 세상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영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둘을 잘 연관 시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읽으신 스가랴서4장의 내용은 스가랴가 본 환상입니다. 스가랴에는 총7개의 환상이 나오는데 그 중 다섯 번째 환상입니다. 이 환상은 하늘의 성전 즉, 하나님 나라를 묘사하고 있는 환상입니다. 천상의 하나님 나라, 성전을 묘사하면서 그 성전이 지어져 가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떻게 설명이 되고 있습니까? 등대에 일곱 촛대가 있고 그 양 옆으로 두 그루의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등대로 감람나무에서 계속 기름이 흘러들어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스가랴가 천사에게 이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천사는 ‘그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을 해주지 않고, 네가 보고 있는 그 모습은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전을 재건하는 스룹바벨의 이야기로 끌고 갑니다. 그러니까 이 모습은 성령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참 성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쉬운 말로 하면 참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이 나오는데 스룹바벨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었지요?. 그리고 BC586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성전 재건을 위해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돌려보낼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그는 왕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성전 재건을 하는데 엄청난 방해가 있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BC520년경부터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페르시아의 다리오가 애굽의 충성을 확인하기 위해 군대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불똥이 또 자기들에게 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북이스라엘(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 재건을 방해를 해 오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스가랴가 ‘정말 성전이 재건 될 수 있을까?’하고 걱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스가랴에게 ‘스룹바벨이 재건을 시작한 성전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고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성전은 결국 BC515년에 완성됩니다.

성경에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오지요? (스가랴나 학개 에스라 느헤미야 다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성전 재건이라는 것은 옛 성전을 무너뜨리고 새 성전을 지으시는,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창조하시는 즉, 교회를 탄생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성전을 무너뜨려라. 내가 사흘 만에 새로 짓겠다’고 하셨지요? 그러므로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가 스가랴서 4장의 다섯 번째 환상인 일곱 촛대와 두 감람나무인 것입니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이 환상을 보겠습니다. 10절에서 분명 이 일곱 촛대를 가리켜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이라고 합니다. 성령입니다. 그런데 계시록1장20절에는 일곱 촛대를 다르게 묘사를 합니다.

(계 1:20)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합니다. 일곱 교회는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바로 여러분을 상징하는 것이 일곱 촛대입니다. 그런데 스가랴서에서는 일곱 촛대는 성령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일곱 촛대는 성령으로 표현도 되고 교회로도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와 성령은 어떤 연관이 있길래 이렇게 표현이 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탄생시키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 성령께서 교회인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 참 교회의 모습이지요?

(요 15:26) 26 내가 아버지께 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 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지금 스가랴서의 환상은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기름이 공급되고 있습니다. 그 기름은 성령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오심으로 탄생이 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의 조명과 인도와 충만을 받아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천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이 땅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부어지는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는 영원히 빛을 발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가 맞습니다. 그러나 왜 성경이 일곱 촛대를 또 성령으로 묘사를 하는지 아세요? 교회는 성령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유지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촛대에 불이 붙어서 그것이 촛대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불이 붙어야 비로소 촛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령은 불가분 떨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곱 촛대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탄생되고 빛을 발하는 교회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가 누누이 설명해 드린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christ)을 떠올리시면 조금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출 25:31-40) “31 순금을 두들겨서 등잔대를 만들어라. 등잔대의 밑받침과 줄기와 등잔과 꽃받침과 꽃을 하나로 이어놓아라. 32 등잔대의 줄기 양쪽에서 곁가지 여섯 개가 나오게 하였는데, 등잔대 한쪽에서 곁가지 세 개, 또 다른 한쪽에서도 곁가지 세 개를 나오게 하여라. 33 등잔대의 각 곁가지는 꽃받침과 꽃잎을 갖춘 감복숭아꽃 모양 잔 세 개를 연결하여 만들고, 그 맞은쪽 곁가지도 꽃받침과 꽃잎을 갖춘 감복숭아꽃 모양 잔 세 개를 연결하여 만들어라. 등잔대의 줄기에서 나온 곁가지 여섯 개를 모두 이와 같이 만들어라. 34 등잔대 줄기는 꽃받침과 꽃잎을 갖춘 감복숭아꽃 모양 잔 네 개를 쌓아 놓은 모양으로 만들어라. 35 그리고 등잔대의 맨 위에 있는 좌우 두 곁가지가 줄기에서 뻗어날 때에는, 밑에서 세 번째에 놓인 꽃받침에서 뻗어나게 하고, 그 아래에 있는 좌우 두 곁가지가 줄기에서 뻗어날 때에는, 밑에서 두 번째에 놓인 꽃받침에서 뻗어나게 하고, 그리고 맨 아래에 있는 좌우 두 곁가지가 줄기에서 뻗어날 때에는, 맨 아래에 놓인 꽃받침에서 뻗어나게 하여, 여섯 곁가지를 줄기와 연결시켜서 한 덩이를 만들어라. 이렇게 등잔대의 줄기에서 좌우로 곁가지가 나오게 하여라. 36 등잔대 줄기의 꽃받침에 연결된 곁가지들은 모두 순금을 두들겨 만들되, 전체를 하나로 이어놓아라. 37 등잔 일곱 개를 만들어서, 그것을 등잔대 위에 올려 놓아, 앞을 밝게 비추도록 하여라. 38 등잔불 집게와 불똥 그릇도 순금으로 만들어라. 39 등잔대와 이 모든 기구를,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어라. 40 이 모든 것을, 내가 이 산에서 너에게 보여 준 모양 그대로 만들도록 하여라.”

여러분께서 성경을 통해 익히 확인하신 것처럼 등대를 비롯한 성막 전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성막에 놓일 촛대를 만드는데 촛대를 정금으로 만듭니다. 촛대를 정금으로 만들라는 것은 당시 금은 빛을 상징하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촛대는 지성소 앞의 성소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이지요. 그 촛대에 불을 밝혀 1년365일 24시간 불이 꺼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절대 불이 꺼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교회는 그렇게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빛으로 존재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레 24:1-4) “1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가져다가 등불을 켜게 하되, 그 등불을 늘 켜 두어라. 3 아론을 시켜 회막 안 증거궤 앞에 쳐 있는 휘장 바깥에 그 등불을 켜 두어,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 앞에 계속 켜 두게 하여라.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길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 4 아론은 주 앞에서, 순금 등잔대 위에 그 등불을 늘 켜 두어야 한다.”

여기서도 감람유를 끊임없이 촛대에 부어서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사장들은 바로 그런 일을 했던 것입니다.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흘러 불이 꺼지지 않는 스가랴의 환상과 동일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옛 성전에서는 제사장들이 감람나무 기름을 부지런히 날라야 했지요. 성막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그 성막 안의 촛대라는 것은, 그 하나님 나라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 빛을 발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인데 그 무리가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성령의 기름으로만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영원히 빛을 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시 구약을 줄줄이 꿰고 있던 유대인들은 ‘보좌 앞의 일곱 영’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스가랴서의 일곱 촛대를 생각했을 것이고 그 일곱 촛대에 부어지는 성령을 상징하는 금 기름으로 촛대에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스가랴의 환상을 떠올리면서 천사가 설명을 해 준 그 환상의 의미를 되새겼을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본연의 삶을 재확인했을 것입니다. ‘맞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는 교회다’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야지’ 하고 결단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회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게 하시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정말 여러분의 삶 속에서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나오고 있습니까? 그 불은 이미 2000년 전 오순 절 날에 성령이 교회에 오심으로 켜졌습니다. 여러분의 심지에 불이 붙어있습니까? 빛이 나오고 있나요?

(고후 3:17-18) “17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여기서 ‘주의 영광을 보다’라는 구절의 ‘보다’는 ‘카톱트리조마이’입니다. 이 말은 ‘반영하다, 반사하다, 거울에서처럼 보다’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카톱트리조마이’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이것은 계속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빛으로 반사해 내는 촛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 5:14-16)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길 수 없다. 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요일 1:5-7) “5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6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7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서 살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엡 5:8-9) “8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9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난 교회에게 빛을 받은 자로서 빛을 발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빛을 발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합니다. 소 요리 문답1번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이 땅에서 당연히 해야 할 것이 빛을 발하며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빛을 발하는 삶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까? 부자 되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도우신다’ 이렇게 간증하고 다니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그럼 예수를 믿지 않는 빌게이츠는 누구한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일까요? 하바드와 MIT의 수많은 불교 신자들과 무신론자들은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빛을 발하는 교회의 삶은 무엇입니까? 보좌 앞의 촛대가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여 빛을 발하듯이 빛으로 오신 분이 살다 가신 그 빛의 삶을 사는 것이 빛을 발하는 삶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요 8:12) “12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 12:46)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빛이셨습니다. 교회는 그 빛을 그대로 흉내 내어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어떻게 살다 가셨나요? 삶으로 하나님을 설명하시고 가셨습니다.

(요 14:9) “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한다는 말이냐?”

우리도 똑같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입으로 하나님을 증거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어, 세상에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네’ ‘저들은 뭔가 다른 나라 사람들 같다’라는 평가를 들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증인으로, 빛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떻게 만사형통, 일사천리, 여유만만 이겠습니까? 거기에는 핍박과 고난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 때, 그렇게 빛으로 살다가 힘이 들 때, 먼저 살다간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을 기억하는 겁니다.

이 요한 계시록을 받아서 읽던 초대 교회 사람들은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힘겨운 핍박과 고난에 겁을 먹고 , 자신감을 잃고 있었던 그들이, 이 요한 계시록을 받아서 읽다가 이 ‘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것은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되는 것임을 깨닫고 ‘우리는 이렇게 약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어 내시겠구나‘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평강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지금 견디기 힘들고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까? 그래서 도저히 더 이상은 못 갈 것 같은 좌절에 빠져 계신 분들 혹시 계십니까? 우리의 삶은 이미 성령님께서 take over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사시는 이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으로 데리고 가실까요? 이제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옥에 가면 하나님도 지옥에 따라오셔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은 그렇게 안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닥친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들은 다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데 필요한 것들이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우리는 보좌 앞의 일곱 영,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천국으로 향하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그 분이 계속해서 우리를 조명하고 계시고 힘을 주고 계시고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응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초대 교회 사람들이 성령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보좌 앞의 일곱 영이라는 말만 듣고도 그렇게 평강을 얻었다면 여러분도 동일한 평강 안에 거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이 그 엄청난 방해에도 기어코 새 성전을 완성을 했듯이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속히 완성이 될 것입니다. 성령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고 계신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힘내십시오. 다시 한 번 꼭 마음에 새기세요. 하나님은 완성된 하늘나라의 복을 가지고 우리에게 역동적으로 오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과 성령님으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두려워 마세요. 평강을 찾으십시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일곱 가지 복을 중심으로) 12 /13 / 2023(수) -



‘축복’과 ‘복’을 동의어로 쓸 수 있는가?

 

한국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어휘의 실제적인 의미와는 달리 잘못 쓰고 있는 말 중의 하나가 ‘복’과 ‘축복’을 동일시 내지 혼동해서 쓰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말은 엄밀히 고찰해 보면 우리말 성경상으로도 분명히 구별해서 달리 쓰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2:3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기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 하신 본문 중에서 ‘축복’(복을 비는 것)과 ‘복을 내리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서 쓰고 있으며, 이러한 구별은 우리말 성경 전체에 일관되고 있다.
이러한 구별은 같은 한자를 쓰는 중국어 성경에서도 일관되고 있다.

이러한 우리말 성경과 중국어 성경과는 달리, 같은 한자를 쓰는 일본어에서는 복을 비는 행위와, 하나님이 복을 내리는 것을 다 같이 ‘祝福’(축복, ‘슈쿠후쿠’)을 쓰고 있어 두 경우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복을 비는 것은 인간 간의 행위이고, 복을 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행위라는 점에서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하나님, 이 가정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할 때, 하나님이 다른 어떤 초월자를 대하여 어떤 가정에 복을 빌어 달라고 빈다는 뜻이 되는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언어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인 소산이므로 비록 잘못된 말이라도 절대 다수의 언중(言衆)이 오래 사용하는 경우에는 그 말이 통용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고, 마침내는 그것을 수용하는 것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같이 “악어(惡語)가 양어(良語)를 구축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12-13-2023(수) 파트리스교회 온라인 성서강좌 # 제3강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Ⅰ(요한계시록 1:3)



한자의 구성 원리, 육서 (六書)

한글 자음은 소리를 내는 구강구조를 본떠 만들고 모음은 천지인(天地人) 사상에 입각하여 창제하였다.
그리고 글자는 초성, 중성, 종성을 결합하였다.

한자는 표의문자(表意文字)의 특성상 그 구성 원리가 전혀 딴판이다.
개괄적으로 본다면 한자는 뜻을 나타내는 의부(義部)와 소리를 나타내는 음부(音部)를 결합하여 하나의 한자를 구성하며 이와 같은 구성이 전체 한자에서 80%를 차지한다.

한자가 형성되는 과정을 따라가보자.

해(日), 달(月), 산(山) 등은 전부 그림 문자이다.
모든 한자는 그림에서 출발하였다.
해를 본뜬 글자가 날 일(日)이 되었듯, 옛날 사람들은 몸을 치장하기 위해 문신을 하였는데 문신의 모양을 본뜻 글자가 글월 문(文)이다.

​이와 같이 사물을 본떠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글자화한 것을 '문(文)'이라 불렀다.
이것은 우리말 ‘그리다’, ‘그림’, ‘글’이 모두 같은 어근 '그리다'인 점을 생각해 보면, 그림에서 글자가 탄생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며 특히 한자가 상형문자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사물이나 동작, 생각 등을 전부 그림으로 그리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몇 가지 글월 문(文)을 합쳐 제3의 글자를 만들게 되는데 이렇게 탄생한 글자를 '자(字)'라고 불렀다.
글월 문 (文) 이 자식을 낳았다고 하여 집 면(宀) 자 아래 아들 자(子)를 덧붙여 글자 자(字)를 만들었다.
그리고 글월 문(文)과 글자 자(字)를 합쳐 글자 전체를 '문자(文字)'라 부르게 되었다.

문(文)이나 자(字)와 같이 한자가 만들어진 원리를 조자(造字) 원리라고 한다.
문(文)의 조자(造字) 원리는 다시 상형(象形), 지사(指事)로 나누어진다.
자(字)의 조자(造字) 원리는 회의(會意), 형성(形聲)으로 나누어진다.

한편, 한자의 3요소인 모양, 소리, 뜻 중에서 한자의 모양을 유지한 체 소리나 뜻이 다르게 사용되는 용례도 부지기수인데 이와 같은 한자의 사용에 관한 원리를 운용(運用) 원리라고 한다.
전주(轉注), 가차(假借) 등의 원리가 이에 속한다. 하나하나 살펴 보기로 하자.

[한자의 구성 원리 : 육서(六書)]

구 분

특성

육서(六書)

한자의 조자(造字) 원리

문(文)

상형(象形), 지사(指事)

자(字)

회의(會意), 형성(形聲)

한자의 운용(運用) 원리

전용(轉用)

전주(轉注), 가차(假借)

상형(象形) 한자는 日, 月, 山과 같이 사물의 모양(形)을 본떠(象) 만든 한자이다.
한자의 기본형(Stem)이기 때문에 많은 상형자가 부수로 사용된다.
그래서 상형 글자의 본래 모습인 그림을 이해하는 것은 재미도 있고 기억하기도 편리하여 한자 공부의 가성비(價性比)를 획기적으로 높인다.

지사(指事) 한자는 一, 二, 上, 下와 같이 추상적인 개념(事)을 가리켜(指) 기호로 나타낸 글자이다.
일부 지사자가 부수로 사용된다.
부수는 상형자(象形字)와 지사자(指事字) 중에서 나온다는 점을 기억하자.

회의(會意) 한자는 이미 만들어진 둘 이상의 한자의 뜻(意)을 모아(會) 하나의 새로운 한자를 만든 경우이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담의 모양을 본뜬 둘러쌀 위(口)와 사람 인(人)을 합친 죄수 수(囚),
그리고 나무 목(木)을 두 개 합친 수풀 림(林), 세 개 합친 수풀 삼(森) 등이 회의자의 사례이다.

형성(形聲) 한자는 뜻(形)을 나타내는 부분과 소리(聲)를 나타내는 부분을 결합하여 새로운 한자를 만든 경우이다.
나무 목(木)과 매양 매(每)를 합쳐 매화 매(梅), 말씀 언(言)과 이룰 성(成)을 합쳐 성실할 성(誠)을 만든 것 등이 형성자의 경우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한자의 80%가 형성자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형성(形聲)은 한자 구성 원리의 핵심이다.

한자를 새롭게 만들지는 않고 전용(轉用) 하는 경우도 있다.
전주(轉注)는 이미 만들어진 글자를 굴리고(轉) 물을 대듯이(注) 하여 본래의 뜻에서 유사한 새로운 용례를 만든 경우이다.
말씀 설(設)은 ‘기쁠 열’, ‘유세할 세’로 전용되고, 즐길락(樂)은 ‘음악 악’, ‘좋아할 요’로 전용된다.
뜻이 바뀔 때 음도 바뀌는 경우도 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가차(假借)는 소리가 같거나 모양이 비슷한 글자를 빌려(假借) 서 전용하는 경우이다.
외국어의 표기에 자주 쓰인다.
비구니(比丘尼), 불타(佛陀), 보리수(菩提樹)는 인도어 소리와 가까운 한자를 사용하여 표기한 예이다.
또한, 프랑스를 불란서(佛蘭西), 코카콜라를 코카콜라(可口可樂)이라고 하는 것도 가차의 원리를 따른 예이다.
可口可樂를 굳이 ‘입맛에 맞아 즐길만하다’라고 풀이하지 않고 단지 중국 발음으로 읽으면 코카콜라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일곱 가지 복

일곱 부류의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진술이 나타난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1:3)

읽을 독(讀) : 읽는다 - 이해한다
들을 청(聽) : 듣는다 - 받아들인다
지킬 수(守) : 지킨다 - 다스린다 

- 지키다(5083) 테레오(tērĕō) τηρέω    

1. 지켜보다,  2. 지키다, 3. 유지하다
발음 [ tērĕō ]
어원 / 미완료 ἐτήρουν, 미래 τηρήσω, 제1부정과거 ἐτήρησα, 완료 τετήρηκα, 미완료 수동태 ἐτηρούμην, 완료수동태 τετήρημαι,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τηρήθην, τηρός ‘감시’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지켜보다, 감시하다, 파수하다, 마 28: 4, 행 12:5.
  • 2. 지키다, 간직하다, 보존하다, 보호하다, 요 2:10, 행 25:21, 고전 7:37, 딤전 6:14, 벧전 1:4.
  • 3. 유지하다, 붙들다, 엡 4:3, 딤후 4:7,  유 1:6.
  • 4. 보호하다, 요 17:15, 계 3:10.
  • 5. 준수하다, 준행하다, 지키다, 유의하다, 마 23:3, 요 14:15, 계 12:17, 22:7.

본서에는 일곱 부류의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진술이 나타난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1:3)
2. 주 안에서 죽는 자(14:13)
3. 깨어 옷을 지키는 자(16:15 )
4.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된 자(19:9)
5. 첫 부활에 참여한 자(20:6)
6.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22:7)
7. 두루마리를 빠는 자(22:14)

본절에 나타난 사람은 일곱 부류의 복 있는 사람중 첫번째에 해당된다.

이 예언의 말씀을...복이 있나니.

'이 예언의 말씀'은 본서가 예언서임을 나타내는 것으로(10:11; 22:6,7,10,18,19) 본서의 말씀이 예언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영적, 윤리적 권면과 권고를 포함한 현재적 경고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Johnson).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과 관련하여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이 있음을 기술한다.

읽는 자(호 아나기노스콘. ο αναγινωσκων)
'호 아나기노스콘'(ο αναγινωσκων)은 관사 있는 단수 분사로 초대교회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성경을 읽던 자를 나타낸다.

듣는 자들(호이 아쿠온테스. οι ακουοντες )

지키는 자들(테룬테스. τηρουντες)

두 부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모두 복수로 예언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행하는 회중들을 나타낸다(눅 4:16; 행 13:15, 21; 골 4:16, Johnson, Zahn, Robertson).

요한은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통해서는(느 8:2, 3; 눅 4:16; 행 13:15; 살전 5:27)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때가 가까움이라.

- 본문은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이다.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스'(καιρος)는 보편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χρόνος)와는 달리 결정적인 섭리를 나타내는 종말론적 시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승천한 이후부터 다시 오실 재림의 때까지는 인간 편에서 볼 때 항상 임박한 긴장(緊張)의 시간이며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마 24:3-51; 요 21:22, Jo- hnson, Mou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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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2023(수) 파트리스교회 온라인 성서강좌 # 제4강

첫번째 복 /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두번째 복 /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Then I heard a voice from heaven say, "Write: Blessed are the dead who die in the Lord from now on." "Yes," says the Spirit, "they will rest from their labor, for their deeds will follow them."

2. 주 안에서 죽는 자(14:13)

ἀποθνήσκω 스트롱번호 599

1. 죽다.  2. 사람의 죽음.  3. 동물과 식물의 죽음
발음 [ apŏthnēskō ]
어원  / 미완료 ἀπέθνῃσκον, 미래 ἀποθα- νοῦμαι, 제2부정과거 ἀπέθανον, 575와 2348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죽다.
  1. [문자적인 뜻]
    a. 사람의 죽음, 마 9:24, 22:24,27, 26: 35, 막 5:35, 39, 9:26, 눅 8:42,52, 요 19:7, 행 25:11, 롬 6:10, 7:2, 빌 1:21, 히 9:27,
    θανάτῳ ἀ., 요 12:33, 18:32, 특히 예수의 죽음, 롬 5:8, 14:15, 고전 15:3, 고후 5:14.
    b. 동물과 식물의 죽음, 마 8:32, 요 12: 24, 고전 15:36, 유 1:12.

  2. [상징적인 뜻]
    a.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상실, 요 6:50, 58, 8:21, 24, 11:26, 롬 7:9, 10, 8:13, 계 3:2.
    b. 그리스도와 함께 한 신비한 죽음, 롬 6:8, 골 3:3.
    c. 여격 명사와 함께 사용되어 그것으로부터의 분리됨을 나타내는 경우.
      ㉠ [율법] 갈 2:19.
      ㉡ [죄] 롬 6:2.
      ㉢ [여격 대신 속격으로] 골 2:20.

II. 죽으려고 하다, 죽음에 직면하다, 죽을 것으로 되다, 고전 15:31, 고후 6:9, 히 7:8.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s.

죽을 사(死)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죽을사변(歹(=歺) ☞ 뼈, 죽음)部는 뼈가 산산이 흩어지는 일을 나타냄.
즉 사람이 죽어 영혼(靈魂)과 육체의 생명력이 흩어져 목숨이 다하여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狀態)로 변하니( ☞ 匕) 「죽음」을 뜻함.
死(사)의 오른쪽을 본디는 人(인)이라 썼는데 나중에 匕(비)라 쓴 것은 化(화) ☞ 변하다→뼈로 변화하다란 기분을 나타내기 위하여서임.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본절은 본서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복 중 두번째 복에 해당한다.
이것은 내용상 12절과 연결되어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지켜 인내할 때 순교를 각오하였음을 의미한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믿음을 지켜 순교하였다면 그들에게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이 보장되어 있기에 그들은 복 있는 자들이다(Mounce).

본절의 '자금 이후로'는 두 가지 해석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

1. '자금 이후로'가 무엇을 수식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1). 혹자는 '죽는'을 수식한다고 주장한다(Charles, Plummer).
  (2). 혹자는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를 수식한다고 주장한다(Mounce).

두 가지 견해 중 문맥상 뜻을 분명히 해주는 것으로 보아 전자가 타당하다.

2. '자금 이후로'에서 '자금'이 어느 때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1).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때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ffatt).
  (2). 혹자는 성도들이 죽는 순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ckwith).
  (3). 혹자는 사도 요한이 본 환상, 즉 최후의 심판 때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lford).

세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저희 행한 일이 따름이라'에서 성도들이 행한 '일'(에르가)은 핍박에 대한 '인내'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예수께 대한 '믿음'(12절)을 가리킨다.

이러한 그들의 일은 수고와 동일한 것으로 그들이 사단의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 지치도록 인내하고 믿음을 지켰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수고를 통해서 믿음을 지켰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수고를 통해서 믿음을 지킨 그들은 죽은 후에 온전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

죽음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27).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가장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죄의 형벌이다(롬 6:23). 형벌로서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공론(公論) 영역에서 죽음을 다루지 않는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불가항력이라며 서로 쉬쉬할 뿐이다. 죽음에 대한 담론은 금기가 되었다. 현대는 철저히 삶의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죽음’하고 발화되는 순간, 불행과 음울(陰鬱)이 우리 주변을 감싸온다고 여긴다. 죽음이 풍문이 되고 만 것은 일상성이 우리네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단 채 나날의 일상에 매몰된 우리에게 모두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전혀 실감 나지 않는다.

‘죽는 자들’에 해당하는 ‘οἱ νεκροὶ’(호이 네크로이)는 죽을 자가 아니라 죽은 자다. 네크로스는 ‘죽은 사람’이다. 산 자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네크로스에 대한 신약성경의 용법은 헬라의 용법 그리고 구약성경의 용법과는 다르다. 신약성경에서 죽음의 상태가 더 이상 인간의 최후 상태가 아니다. 죽음은 ‘주 안에서’ 보아야 한다. ‘주 안에서’는 바울 서신에서 자주 나오는 정형어구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한번 나온다.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되고, 그렇지 않는 자의 죽음은 형벌이다. 주 안에서 죽은 자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은 것처럼, 마지막에 일으킴을 받거나(고전 15:35), 일어날 것이다(막 12:25).

황제 숭배 강요와 그에 동반되는 사형 선고의 위협은 믿는 자들의 충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시험이 될 것이다. 광범위한 순교를 가져올 수 있다. 순교는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순교자가 복되다. 동시에 이 복은 순교자에게 제한될 수 없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되다. 배교의 대가는 영원한 고통이다. 충성으로 인한 고난은 잠깐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킨다. 고난은 잠깐이나 영광은 영원하다. 현대사회에서는 오히려 ‘죽음(death)’ 자체보다 ‘죽어감(dying)’이 더 두렵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유명하고 유능한 사람이라도 질병과 죽음 앞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주 안에서 죽는 것’은 끝까지 충성됨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사는 것이다.
The Murder of St Peter the Martyr ,Giovanni Bellini(1430-1516), 1509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

우리가 끊임없이 진입하고 있는 ‘지금’이라는 시간은 이중적이다.
지금은 과거이며 동시에 미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 대통령 부인 엘리너가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Today is a gift. That’s why we call it ‘The Present’.”
“어제는 역사였고 내일은 미스터리지만, 오늘 만큼은 선물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오늘을 ‘The Present’라고 부르는 이유다.”

베스트셀러 작가 Spencer Johnson은 저서 ‘The Present’에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은 현재의 순간, 지금”이라 했다.

‘지금 이후로’는 두 가지를 해석할 수 있다.
시간상 한 시점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지금’이 될 것이다.
대안적인 번역이다.

‘확실히’(assuredly)다.
그럴 경우, 그 진술은 단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확실히 복이 있다’는 강조가 된다.
마태복음에서는 ‘곧, 짧은 시간에’를 의미한다.
단순히 ‘이제부터’가 아니라 지속되어질 상태 혹은 상황의 시작을 말할 때 사용된다.
‘십자가의 때 이후로’ 혹은 ‘틀림없이’로 보다 더 잘 해석할 수 있다.

박우현 시인은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라는 시에서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이라고 썼다.

지금 이후로 죽는 충성된 신자들은 복이 있다.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당하는 보다 활발한 핍박으로의 전환을 표시해 준다.
요한은 짐승과 연관된 임박한 핍박의 강렬함을 예상한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예수님에게 충성을 지키는 자들은 참으로 복을 받을 것이다. 최상의 죽음은 어떤 것일까. 예기치 않은 죽음, 별안간 맞는 죽음이라는 말이 있다. 기다리고 예비하는 죽음이 차선(次善)이다. 오래 두고 두려워하며 버티는 죽음은 최악이다.
공자는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랴’(未知生 焉知死)고 했다.

옛날 로마에서는 개선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인 ‘Memento mori’를 외치게 했다고 한다.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요한 당시로부터 역사가 끝날 때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됨을 유지하다 죽는 모든 성도에게 해당된다. 이전에 죽었지만 복을 받지 못할 다른 성도들과 구별하여, 복을 받기 시작할 고난 속에 있는 어떤 집단을 암시할 수 있다. 복된 쉼이 시작되는 때가 바로 죽음의 순간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이전에 죽은 자들도 이 복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순교자들이 이미 쉼을 얻고 있다. 흰옷을 받았다. 쉼은은 ‘흰 옷’을 준다는 것과 더불어 시련 중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사후의 상이다. 지금 이후로 시험의 때가 이미 시작되었다. 교회는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일에 대비해야 한다. 박해를 통해 시험을 거쳐야 한다. 지금 당장 믿음을 지키겠노라 결정해야 한다.

2. 복 되도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여

옛 어른들 말씀이 ‘생사대사(生死大事)요, 무상신속(無常迅速)’이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이 죽는 일이다.
파라오들은 시체를 없애버리지 않았다.
미라를 만들었다.
죽은 자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보존하는 장례법을 발전시켰다.
신자들이 죽음에 직면해서도 인내한다면, 그들은 ‘복이 있을’ 것이다.
죽음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사라질 것이다.
그 때에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고전 15:52; 빌 3:20, 21).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순교자와 자연적 원인으로 죽은 사람을 포함한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강조다.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강조가 아니다.
다른 원인으로 죽은 자들도 순교자들처럼 복을 받을 것이다.

실낙원의 저자인 John Milton은 “죽음은 영원한 세계를 여는 열쇠다”라고 말하였다.
성경학자인 Edward J. Young은 “죽음은 인생의 면류관이다”라고 말하였다.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주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왜 복이 있는가. 원인이 복이 되는가.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의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 자들은 복되다.
‘주 안에서’는 영역의 주격이다.
이 성도들이 복이 있는 이유다.
주 안에서 죽은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사후의 세계가 없다고 하면 죽는 것으로 끝난다.
죽은 자에게 복이 되려면 사후세계가 있어야 한다.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포럼은 미국인들의 74%가 하나님의 나라 존재를 믿는 것으로 집계했다.
또 로이터입소스가 23개 국가 1만 8829명을 조사한 결과 51%가 사후 세계의 존재를 확신한다고 답했다.

“나는 가야하고, 당신들은 남아야 하는데, 누가 더 좋은 곳으로 가는지는 오직 신(神)만이 아신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기 전에 한 말이다.

인간은 삶과 죽음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죽음에 대해 아는 것 세 가지 

1. 누구나 반드시 한 번 죽는다.
2. 혼자 죽는다.
3.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죽음은 두렵다.
대면하고 싶지 않다.
죽음이 보내는 시선을 피하려고만 한다.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도 세 가지 

1. 언제 죽을지 모른다.
2. 어떻게 죽을지도 모른다.
3. 어디에서 죽을지 장소를 알지 못한다.

죽음은 그래서 허무하다.
생각할수록 공허한 일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이다. 순교냐 고종명이냐, 사고사냐. 방법이 아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나 죽고, 어디서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죽음을 자신의 일이 아닌 듯 여긴다.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주 안에 사는 자도 죽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 어떻게 죽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사느냐도 아니다. 주 안에서 순교할 수 있고, 주 안에서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고종명할 수 있다. 죽음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니다. 주 안에서가 관건이다. 앞으로 어떤 환난과 핍박이 있어도 주 안에 사는 자는 주 안에서 죽을 수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승리다.
순교 역시 승리다.
그리스도인이 이긴다.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함은 순교를 낳을 수 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승리자다.
이긴 자다.
안식에 들어가기에 복되다.
여러 명의 순교자가 발생했다.
핍박은 이미 과거사다.
이 말씀은 임박한 일련의 순교들에 관한 예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린 양에게 충성한다면, 그들은 지금 고난을 당하지만 이후에 영원한 안식의 복을 받을 것이다.
인내하라는 열망은 심판에 대한 경고뿐만 아니라, 상을 받게 된다는 약속에 의해서도 동기부여를 받는다.

‘복이 있도다’에 해당하는 ‘Μακάριοι’(마카리오이)에 해당하는 자는 새 예루살렘에서 생명의 약속을 받는 모든 구원받은 자들에게 주어진다.
대안으로 ‘지금 이후로’를 ‘확실히’로 읽는 것이다.
복 받은 자들이 확실히 쉼을 얻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약속과 경고의 장면들 사이의 상호 작용은 충성되게 남아 있으라는 마지막 권고로 절정에 도달한다.
성도들은 비록 죽임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는 그의 인내로 죽음 이후에 상을 받으셨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럴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의 대표자가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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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2023(수) 파트리스교회 온라인 성서강좌 # 제5강

깨어 옷을 지키는 자의 복(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도적 같이 오리니(요한계시록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깨어 자기 옷을

요한계시록 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마태복음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3. 깨어 옷을 지키는 자(16:15 ).

깨어(1127)

γρηγορέω 스트롱번호1127

1. 깨어 있다,  2. 마 24:43,  3. 정신차리고 있다
발음 [ grēgŏreʹ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γρήγορα, 145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깨어 있다, 경성하다.
  • a. [문자적으로] 마24:43, 26:38,40, 막13:34, 14:34,37, 눅12:37,39.
  • b. [상징적으로] 정신차리고 있다, 지켜보고 있다, 마24:42, 25:13, 26:41, 막13:35,37, 14:38, 행20:31, 고전16:13, 살전5:6,10, 벧전5:8, 골4:2, 계3:2,3, 16:15.


지키는(5083)

- 지키다(5083) 테레오(tērĕō) τηρέω    

1. 지켜보다,  2. 지키다, 3. 유지하다
발음 [ tērĕō ]
어원 / 미완료 ἐτήρουν, 미래 τηρήσω, 제1부정과거 ἐτήρησα, 완료 τετήρηκα, 미완료 수동태 ἐτηρούμην, 완료수동태 τετήρημαι,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τηρήθην, τηρός ‘감시’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지켜보다, 감시하다, 파수하다, 마 28: 4, 행 12:5.
  • 2. 지키다, 간직하다, 보존하다, 보호하다, 요 2:10, 행 25:21, 고전 7:37, 딤전 6:14, 벧전 1:4.
  • 3. 유지하다, 붙들다, 엡 4:3, 딤후 4:7,  유 1:6.
  • 4. 보호하다, 요 17:15, 계 3:10.
  • 5. 준수하다, 준행하다, 지키다, 유의하다, 마 23:3, 요 14:15, 계 12:17, 22:7.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본절은 마태복음 24:42-44과 병행된다.

계속적으로 귀신의 영이 미혹하여 전쟁 준비를 시키는 과정에 본절이 삽입되어 있는 것은 마지막 대전쟁이 임박할 때 성도들이 극적인 위기 상황을 맞이하기 때문에 위로와 격려를 하기 위함이다.

결국 이 경고의 의미는 어린양을 따르는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만 함을 권면하는 것이다(마 24:43. 살전 5:2).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적 같이'오신다는 경고는 사데 교회(3:2-4)와 라오디게아 교회에도(3:18) 주어졌던 것이다.
이 경고는 두 교회의 우상 숭배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야함을 강조한다(Johnson).

한편 본절에서의 '복'은 본서 전체에서 나타나는 일곱 가지 복가운데 세번째 복에 해당된다(1:3; 14:13; 19:9; 20:6; 22:7, 14).

본절은 성도들이 마지막 때에 있을 사단의 기만과 핍박 가운데서도 넘어지지 아니하고 늘 깨어 있어 충성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 주실 것을 시사한다.

존 콜리어의 <레이디 고다이바>, 1898 캔버스에 유채 142.2 ×183 cm, 영국 코벤트리, 허버트 박물관

앳돼 보이는 한 여인이 말을 타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림이 있습니다. 
영국 화가인 존 콜리어(John Maler Collier, 1850-1934)의 이 그림은 라파엘전파 화가의 그림답게 무척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과연 이 여인은 무슨 이유로 이런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을까요? 
그림의 제작시기가 1898년인 것으로 보아 세기말 증상이 팽배하던 그 시절의 어떤 사회현상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그림의 주인공은 고다이바(Godiva)는 11세기인 1040-80년경 영국 워릭셔 주(州) 코번트리(Coventry)에 살았던 ‘전설적인’ 앵글로색슨족 귀부인이랍니다. 
아주 오래된 기록에는 고드기푸(Godgifu)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고다이바의 남편은 코번트리 지방을 다스리던 레오프릭(Leofric)백작이었는데, 그는 중세 영주가 가진 막강한 권한을 남용하고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못된 귀족이었나 봅니다. 
레오프릭의 영지에 사는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스럽게 살아야했습니다. 
이렇게 영주의 폭정에 굶주리는 농민들을 동정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영주의 부인인 고다이바였습니다.

고다이바는 틈만 나면 남편인 레오프릭 백작에게 농민들에게 부과하는 무거운 세금을 경감하고 괴롭히지 말라고 충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부인이 끈질기게 간청하자 화가 난 레오프릭 백작은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 
네가 정말 농민들을 걱정한다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시장거리를 알몸으로 말을 타고 지나가면 그 청을 들어주겠다.’며 조롱을 했습니다.

이런 조건을 걸면 다시는 잔소리를 못할 줄 알고 터무니없는 조건을 제시한 것입니다.

에드윈 랜시어의 <레이디 고다이바의 기도> 1865 캔버스에 유채 143 x 112 cm, 영국 코벤트리, 허버트 박물관
그림출처 :https://www.artuk.org/discover/artworks/lady-godivas-prayer-55030

지금도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또는 대의를 위해 알몸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11세기 상황에서, 그것도 영주의 부인의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고다이바는 농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단을 하고 거리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레오프릭 백작의 영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고다이바가 말을 타고 시간에 외출도 안하고 창문도 열지 않기로 하고, 커튼으로 창문을 가려 내다보지 않기로 했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다이바 부인의 사랑과 희생정신에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고다이바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말을 타고 거리에 나서 결국 농민들의 세금을 줄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귀부인이 농민들을 위해 나신으로 말을 탄 여인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여인의 마음에 감동을 받아 그 정신을 기리고 지금도 그녀를 "레이디 고다이바(Lady Godiva, 레이디 고다이버)"라고 부릅니다.

이런 이야기에는 꼭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 레오프릭 백작과 코번트리 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인의 선행에 감동을 받은 레오프릭 백작은 그날이후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인과 함께 수도원을 설립하였는데, 이 수도원이 코번트리를 그 일대의 교통과 교역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코번트리는 15세기에는 모직물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때 도시가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어 지금도 교육 도시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코번트리 시에는 오늘 날의 코번트리 시가 있게 한 “레이디 고다이바”를 기념하는 상징물과 행사들이 있습니다. 
코번트리의 대성당 앞에는 말을 탄 <레이디 고다이바 동상(Statue of Lady Godiva, Coventry)>이 있습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해마다 고다이바 축제(Godiva Festival)를 하면서 당시 그녀의 모습대로 말을 타고 시내를 지나가는 ‘고다이바 행진(Lady Godiva Procession)’을 하고 있습니다. 

11세기와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사람들이 창문도 닫지 않고, 코번트리 시민들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이 있습니다.


윌리엄 레이드 딕의 <레이디 고다이바 동상>, 영국 코벤트리 시, 브로드 게이트
(그림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odiva_statue_Broadgate_Oct_2011.jpg)

두 번째는 숭고한 희생정신이 빛나는 고다이바와 함께 기록되는 ‘못된 놈'도 하나 있습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감히 이 아름다운 여인의 ‘알몸순례’를 볼 수 없었고, 또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광경을 훔쳐 본 놈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고을 양복 재단사인 ‘톰 브라운’이란 자(者)였습니다. 이 소문이 사람들에게 퍼졌습니다.


피핑톰 나무 모형, 영국 코벤트리 시, 브로드 게이트
사진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eeping_Tom_-_geograph.org.uk_-_288615.jpg

그 후 톰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 후 몰래 훔쳐보는 놈을 서양에서는 '피핑 톰(peeping Tom)’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엿보기 좋아하는 사람, 호색가 그리고 '관음증 환자'를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코번트리 시민들은 지금도 이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나 봅니다. 
코번트리 시의 한 건물에는 지금도 매시간 정시가 되면 ‘레이디 고다이바’가 말을 타고 지나가는 장면을 훔쳐보려고 뻐꾸기처럼 얼굴을 내미는 ‘피핑톰’을 보여주는 시계(Lady Godiva Clock in Broadgate, Coventry)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레이디 고다이바 시계, 영국 코벤트리 시, 브로드 게이트
사진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ile:Lady_Godiva_clock_-Broadgate_-Coventry-21July2008.jpg

세계적인 초콜릿 업체인 고디바 초콜릿(Godiva Chocolatier)은 원래 1926년에 벨기에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이 회사의 창업자인 조셉 드랍스(Joseph Draps)의 부인이 고다이바의 뜻을 받들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초콜릿을 만들자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2007년 터키 자본으로 넘어간 이 업체는 전 세계적으로 1만여 개의 판매 업소가 있다고 합니다. 
소위 스토리텔링 마케팅(storytelling marketing)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하겠죠?

마지막으로 '고다이바이즘(godiva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반적 관행이나 상식, 불의한 힘의 역학에 불응하고 대담한 역의 논리로 난관을 뚫고 나가는 정치"를 일컬어 고다이바이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갑질’운운하는 기사를 보면서 분노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돈이나 권력이 있다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의 '고다이바의 정신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창세기 3:21
가죽옷

지어(아사)

- '만들다'는 뜻외에 '지정하다'는 뜻도 지닌다(24:14 ; 시 104:19).
따라서 이는
1.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하실 때처럼 직접 옷을 만드신 것일 수도 있고
2.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시하시고 또한 영감을 주셔 그들이 옷을 만들어 입도록 하신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 동물을 잡아 인간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의미가 있다.

1. 이것은 인간 죄를 속하기 위한 첫번째 희생이자 구약 속죄 제사의 원형이다(레 4:13-221)
2. 이는 장차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예표하는 원시적 사건이다(롬 3:25).



요한계시록 19:13

피 뿌린 옷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
그리스도께서 입고 계시는 '피 뿌린 옷'에 묻은 '피'에 대해서는 네 가지 견해가 있다.

1. 순교의 피(Caird)
2. 그리스도와 대적자들의 피(Swete)
3. 그리스도께서 어린양으로서 흘리신 피(Morris, Johnson)
4. 대적자와의 싸움에서 대적자들이 흘린 피가 그리스도의 옷에 묻은 것(Ladd, Mounce, Beasley-Murray)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세번째 견해의 경우 본서에서 그리스도와 관련되 피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대속의 피를 가리키고 있으며(1:5; 5:9; 7:14; 12:11)
'입었는데'(페리베블레메노스)가 완료 시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온전히 이루신 승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19, 20절).

네번째 견해의 경우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15절)가 나타내듯이 그리스도께서 대적자들을 마치 포도주틀에 넣어 짜듯이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에서 또다시 그리스도의 이름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칭호는 요한복음과 연결된 것으로 중재자 되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셔서 세상에 거하신 중재자이시며(요 1:1, 14; 요일 1:1) 본절에 진술된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과정인 재림을 통해 대적자들을 멸망시키시고 그 백성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는 우주적인 중재자이시다(Beasley-Murray, Mounce).


요한계시록 19:8
세마포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음녀의 복장 즉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한 자주 빛과 붉은 빛 옷'과 대조를 이룬다(17:4; 18:16).
여기서 '빛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람프론'()은 영광과 광채를 묘사하며(마 13:43)
'깨끗한'의 헬라어 '카다론'()은 정결과 충성 그리고 신실함을 나타낸다(21:18, 21, Johnson).
어린양의 아내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는 이 세마포는 오직 남편되신 어린양의 피로 정결케 되었다(7:14, Ladd).
한편 '옳은 행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마타'()는 문자적으로 '법령' 혹은 '옳은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복수이다.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법령'이라 다의미로 받아들여 믿는 자들을 의롭다 칭해주시는 칭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이견해에 따르면 복수가 나타내는 것을 믿는 자들 개개인이라고 한다.
2. 믿는 자들의 옳은 행동이라고 주장한다(Mounce, Johnson, Ladd).

두 가지 견해중 후자가 타당하다.
본절의 '디카이오마타'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의 반응으로서 수많은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해 인내로써 충성과 신실함을 지켜온 것을 시사한다.
즉 이것은 남편되신 어린양에 대한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유지한 사실을 가리킨다(14:12).


성경 속의 옷과 의복

의복사를 살펴도 옷은 의미심장한 상징적 의미와 실용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크게 몸을 보호하는 역할과 신분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의복은 옷을 입은 사람의 명예와 존재를 의미한다.
옷을 입히고 벗기는 의미는 그 사람의 신분을 회복시키거나 박탈하는 의미다.
또한 의복의 종류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다.
성경에서는 좀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게 사용된다.

예를 들어 '빛의 갑옷'이나 '의의 옷' 등은 의복이 갖는 상징성을 그대로 차용하여 만든 것이다.

태초의 사람과 타락

의복이 처음 소개되는 곳은 타락 직후다.
사람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사람들은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
무엇으로도 가릴 필요가 없었다.
타락 전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 창세기 2:25 /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하지만 먹지 말라던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이들의 눈이 밝아져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운 곳을 가렸다.
하나님은 그들이 가리는 것을 책망하지 않고 무화과 잎이 아닌 가죽으로 대신한다.
죄인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긍휼히 엿보이는 대목이다.

  • 창세기 3:7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세기 3:21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옷의 값어치

신구약을 막론하고 옷은 가난한 자들의 최고로 소중한 물건이었다.
의복을 벗긴다는 것은 최악에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모욕이고 수치이다.
성경은 아무리 빚을 쳐서 옷을 빼앗겨도 저녁이 되면 돌려줘야 한다고 율법으로 정한다.
밤이 되면 기온에 떨어져 옷이 없으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 옷은 이불을 대신했다.

  • 출애굽기 22:26 /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 신명기 24:13 /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 역대하 28:15 /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 온 것 중에서 옷을 가져다가 벗은 자들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게 하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들은 모두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의 형제에게 돌려준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 누가복음 6:29 /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탈취물의 하나로서의 의복

옷은 중요한 탈취물 중의 하나였다.
가죽옷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은 아간이 여리고 성에서 시날산의 가죽옷을 훔친 사건이다.

  • 여호수아 7:21 /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
  • 출애굽기 3:22 /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 여호수아  22:8 /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 하매

의복을 갈아입음 : 징계와 회복

리브가는 이삭의 축복을 빼앗기 위해 에서의 옷을 자신이 사랑하는 야곱에게 입힌다.
이삭은 야곱으로 알아보고 축복한다.
옷을 바꿔치기하는 것은 곧 사람을 바꾸는 상징적 의미로 해석된다.

  • 창세기 27:15 / 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 예레미야 52:33 / 그 죄수의 의복을 갈아 입혔고 그의 평생 동안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 미가 2:8 / 근래에 내 백성이 원수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에서 겉옷을 벗기며

시편은 의봇을 벗김으로 종말적 의미를 부여한다.

  • 시편  102:26 /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 히브리서  1:12 /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새로운 시작의 의미로 옷을 갈아입음

  • 사무엘하 12:20 /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도덕적 행위로써의 의복

  • 이사야  63:3 /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권위의 상징인 의복

  • 이사야  63:1 /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

풍요로움의 상징인 의복

  • 열왕기상 10:5 /  상의 식물과 그의 신하들의 좌석과 그의 시종들이 시립한 것과 그들의 관복과 술 관원들과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크게 감동되어

선물로서의 의복

  • 역대하 9:24 /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 그릇과 금 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 해마다 정한 수가 있었더라

인간의 최소한 생존을 위한 도구

  • 마태복음  6:25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직무: 제사장의 의복

제사장들은 직무를 행할 때 반드시 제사장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 에스겔  42:14 /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바로 바깥뜰로 가지 못하고 수종드는 그 의복을 그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고 백성의 뜰로 나갈 것이니라 하더라

갑옷을 입는다는 표현은 전쟁을 행한다는 뜻이며,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나이를 뜻한다. 이 또한 직무와 연관된다.

  • 열왕기하 3:21 / 모압의 모든 사람은 왕들이 올라와서 자기를 치려 한다 함을 듣고 갑옷 입을 만한 자로부터 그 이상이 다 모여 그 경계에 서 있더라

절망과 애통의 옷

거친 베옷을 입을 때는 슬픔과 애통을 뜻한다. 베옷을 벗을 때는 회개의 시간, 고통의 시간이 끝이 났다는 의미다.

  • 시편  30:11 /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 마태복음 11:21 /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 요한계시록 11:3 /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과부의 옷

과부의 옷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투명하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49제가 아닌가 싶다.
남편이 죽고나서 일정한기간동안 과부의 옷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며 베옷일 확률이 높다.
슬픔과 애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 창세기 38:14 /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 창세기 38:19 /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 신명기 24:17 /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찢어진 옷

옷을 찟는 행위는 슬픔의 표현이다.

  • 레위기 13:45 /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민수기 14:6 /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 여호수아  7:6 /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 사무엘상 4:12 /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나와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 사무엘하 13:19 / 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으니라

기타 옷과 의복 관련 성구

이사야  61:3 /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61:10 /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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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스타인메츠라는 사람은 왜소증(난쟁이)에 끔찍한 기형이었지만, 육체적으로 부족한 것을 정신적인 것으로 보충하여, 전기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그를 고용하여 미시건의 디어본이라는 곳에서 포드사의 첫 번째 공장을 가동시킬 기계를 조립하게 했습니다.
그 일로 스타인메츠는 포드 자동차 회사에 큰 이익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기계가 가동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포드는 여러 명의 기술자를 불러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아무도 문제가 무엇인지 발견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포드는 마침내 스타인메츠에게 와서 손을 좀 봐 달라고 요청을 하게 됐습니다.
스타인메츠는 여기저기 만지작거리고 단추도 눌러 보고 한 지 몇 시간 만에 기계를 완벽하게 고쳐놓았고, 공장은 다시 힘차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포드사는 스타인메츠로부터 10,000달러의 청구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부자였지만, 헨리 포드는 그저 조금 일한 것에 대해 그런 거액을 지불하기가 망설여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쓴 편지와 함께 그 청구서를 스타인메츠에게 되돌려 보냈습니다.

“찰리, 잠시 동안 몇 개의 부품을 만지작거린 값으로 10,000달러를 달라는 것은 너무 터무니없는 듯하네.”

그러자 스타인메츠로부터 다시 작성한 새 청구서와 함께 다음과 같은 편지가 전해져 왔습니다.

“헨리, 모터를 만지작거린 값은 10달러이고, 어디를 손봐야 되는지 아는 것에 대한 값이 9,990달러라네.”

곧 있으면 선거철이 돌아오게 됩니다.
선거철만 되면 모든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은 청렴결백하고 자신만이 어려운 국가경제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잔다르크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라는 걸 각인 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됩니다.
하지만 더 이상 국민들은 그런 정치인들의 단기적이고 계산적인 모습들에 속지 않습니다.

또, 국민들은 선거철에만 나타나 국민들에게 고개숙이고 어려운 국정을 일으켜 세울 영웅인 마냥 행동하는 정치인이 아닌 진정 국민들의 경제를 걱정하며 소매 걷어 붙이고 땀흘려 일할 진정한 정치인을 원하고 있습니다.

헨리포드와 찰리 스타인메츠의 일화에서 처럼, 정확히 어디를 손봐야 이 어려운 경제를 해쳐나갈 수 있는 지 아는 찰리 스타인메츠와 같은 정치인을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구조

1장 / 서론
2-3장 / 일곱 교회
4-5장 / 하늘 보좌
6-16장 / 인, 나팔, 대접
 * 12-14장 / 붉은 용, 바다에서 올라온다
17-18장 / 큰 음녀(바벨론)
19장 / 백마를 탄 예수, 어린 양의 혼인 잔치
20-22장 /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01-10-2024수) 파트리스교회 온라인 성서강좌 # 제6강


4.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된 자(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Then the angel said to me, "Write: 'Blessed are those who are invited to the wedding supper of the Lamb!' " And he added, "These are the true words of God."



청함을 입은(2564)

καλέω 스트롱번호2564

1. 부르다.  2. ㉠ ~라고 부르다. 3. 초대하다
발음 [ kalĕō ]

뜻풀이부

  • 1. 부르다.
    • a. ㉠ ~라고 부르다, 이름하다, 일컫다, 마21:13, 눅20:44, 롬9:25, 약2:23. ㉡ 이름을 주다, 명명하다, 눅1:59. ㉢ [수동] 이름을 받다, 이름을 가지다, 일컬음을 받다, 눅1:60, 행1:19. ㉣ ~라고 한다, 마2:23, 눅1:32, 고전15:9, 히3:13.
    • b. 초대하다, 마22:3, 눅14:8, 고전10:27.
    • c. 불러모으다, 마20:8, 22:3, 25:14, 눅19:13.
    • d. 부르다, 마2:15, 행3:11, 히11:8.
    • e. 호출하다, 마4:21, 막1:20, 행4:18, 24:2.
  • 2. [비유적] 부르다, 마9:13, 막2:17, 롬4:17, 고전1:9, 벧전5:10.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 '청함을 입은 자들'의 헬라어 '케클레레노니'는 '칼레오' '부르다'의 완료 수동태로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을 때만 가능함을 시사한다(17:14; 마 22:3; 눅 14:17).

혹자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을 앞절의 아내와 구분하여 앞절의 '아내'는 교회 혹은 순교자를 가리키며 본절의 '청함을 입은 자'는 구약 시대와 천년왕국 시대의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Walvoord, Charles) '아내'와 '청함을 입은 자들'은 동일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 타당하다(Beasley - Murray, Ladd, Mounce).

한편 본문의 '복'은 본서에 나타난 일곱 개의 복 중에서 네번째에 해당된다(1:3; 14:13; 16:15; 20:6; 22:7, 14).

이 복은 인내로써 어린양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은 자들의 멸망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로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영광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 '이것은'은 17:1-19:8까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큰 음녀의 종말과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참여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대한 예언을 의미한다(Johnson, Beasley - Murray).

한편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는 천사가 전하여준 17:1-19:8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보증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22:6에서도 나타나 본서의 내용이 매우 중요하며 확실한 사실일을 강조한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란 무엇인가요?

요한계시록 19:7-10에서 요한은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리는 천상의 군중들을 보고 그들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축제, 말 그대로 “혼인 잔치”가 곧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혼인 잔치의 개념은 그리스도 시기의 혼인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좀 더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당시의 혼인 풍습에는 세 가지 주요 과정이 있었습니다.

첫째, 정혼
신랑 신부 부모가 혼인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신랑 당사자나 신랑의 부모는 신부나 신부 부모에게 지참금을 지불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의 약혼과 마찬가지인 정혼 기한이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한 것을 알았을 당시 요셉과 마리아도 이 정혼 기한에 속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18, 누가복음 2:5).

둘째, 신랑을 맞이하라
보통 일년 후 신랑이 자기 친구들을 동반하고 자정에 신부 집에 찾아가면서 거리에 횃불 행진을 벌이는 행사입니다.
신부는 이 행사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처녀들과 함께 준비합니다.
그들이 모두 이 행진에 참여하고 신랑의 집에서 행사가 마무리됩니다.
이 관습은 마태복음 25:1-13의 열 처녀 비유의 바탕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셋째, 연회
요한복음 2:1-2에 나온 가나의 혼인 잔치로 알 수 있는, 며칠간 이어지곤 했던 혼인 잔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요한의 환상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세 번째 절차인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과 그의 아내 (교회)의 혼인 잔치입니다.
이는 이미 앞의 두 단계가 끝났음을 함축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각 개인이 그리스도를 구원자로서 믿음으로써 완수되었습니다.
신랑의 부모 (아버지 하나님)가 지불하는 지참금은 신부를 위해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땅의 교회는 그리스도와 “약혼”을 한 것이고, 비유에 나온 지혜로운 처녀들처럼 모든 믿는 자들은 신랑이 올 때 (재림)를 위해 준비하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당신의 신부를 데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교회의 휴거를 상징합니다.

혼인 잔치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입니다.
휴거와 그리스도의 재림 (이 땅에서의 환난 중) 사이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베풀어진다는 것이 우리가 보는 관점입니다.

혼인 잔치에는 그리스도의 아내인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도 함께 합니다.
이 “다른 자들”은 구약 성경의 성도들을 포함합니다.
그들이 아직 부활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영혼/영은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쓰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요한계시록 19:9).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스러운 축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오기 전에 ‘장차 될 일’에 해당하는 대재앙이 기록된 18장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았고, 오늘부터는 예수님의 재림과 사탄 세력의 멸망, 최후의 심판 그리고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사건에 대한 묵시를 살펴보게 됩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한 찬송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찬송은 세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 첫 번째 찬송은 1-2절의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찬송’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모든 대재앙은 악한 자들에게는 심판이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하는 의로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우리의 선택됨의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무섭고 두려운 심판의 책이 아니라 회복의 책이요, 복음의 책입니다.

먼저, 1절에 ‘이 일 후에’라는 말은 ‘큰 성 바벨론이 멸망한 후에’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허다한 무리’는 18:20의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 곧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하나님 나라의 교회를 지칭합니다.

‘할렐루야’는 ‘너희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라’ 라는 뜻인데, ‘할렐’이라는 말은 ‘찬송하라’는 뜻이고, ‘루’는 ‘너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뜻합니다.

‘할렐루야’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는 ‘시편’에서만, 신약성경에서는 ‘요한계시록’에만 등장합니다.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이 있은 후 하늘에서 수많은 군중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내용이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라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한 찬송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다 편견이나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과 지혜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정의와 공의로 판결하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좌측이든 우측이든 한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결코 불완전한 판결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완전한 판결과 심판을 하시는 분이시자 의로우셔서 공평한 판단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악에 대한 심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한 심판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심판을 하시든지 그 심판의 의로움과 정당성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들은 겉으로 드러난 겉모습만을 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숨겨진 그 폐부까지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을 받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시편 73편).
심지어 하나님의 판단과 심판에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잘 믿는 나에게 이럴 수는 없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을 허락하시지?” 라는 말을 종종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불평 속에는 하나님보다는 자신이 더 의롭고 더 옳다는 교만한 생각이 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어진 환경에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믿음으로 예수님이 가신 좁은 길로 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당장 먹을 것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고 적그리스도가 주는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끝까지 기다리고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내하다보면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교만한 세상을 공의로서 심판하시고 우리의 인내의 모든 일들을 대신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오늘 본문의 허다한 무리들처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앞에서 ‘할렐루야’를 크게 외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결과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숨겨진 죄를 찾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 마음속에 혹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내 마음대로 판단하거나, 그를 통해 불순종하는 마음은 없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혹, 작은 것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회개하고, 지금 주어진 삶의 환경 속에서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두 번째 찬송은 4절의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의 찬송입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과 온 세상 만물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4절의 찬송은 3절의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는 말씀에 대한 ‘화답송’ 입니다.
3절에서의 ‘연기’는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의 연기인데,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완전한 멸망의 연기입니다.
그 멸망의 연기를 보며 허다한 무리뿐만 아니라 천상천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움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찬송이 울려 퍼지자 5절에 보좌에서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여기에서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음성은 감격에 찬 천사나 이십사 장로나 네 생물 가운데 하나의 음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감격에 찬 찬송은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에도 꼭 필요합니다.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두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서로 섬기며 세우는 것이야 말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가는 첫걸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큰 자냐?’ ‘작은 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는가?’하는 것이고, 이어서 그 경외함으로 ‘그가 얼마나 겸손하게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환경과 여건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세 번째 찬송은 6-8절의 ‘허다한 무리의 음성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우렛소리와도 같은’ 찬송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여기에서 ‘어린 양의 혼인’은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질 ‘어린양 되신 예수님과 교회 사이의 연합’을 말합니다.
이 혼인 잔치 때에는 성도들이 하늘로 들려 올려져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우리 성도들의 구원을 혼인에 많이 비유하는데, 이스라엘에는 구약시대로부터 남녀가 혼인을 하기 위해서는 세단계의 절차를 가져야 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정혼이었습니다.
그들은 혼인식을 하기 전에 정혼식을 치루었습니다.
한번 정혼을 하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꿀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은 결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혼이었습니다.
그리고 정혼을 하게 되면 반드시 신랑 집에서는 신부 집에 지참금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정혼 후 혼인 약속 날까지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리고 와서 잔치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혼인잔치입니다.
오늘 본문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의 혼인 잔치에 우리의 구원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혼인 과정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구원의 여정과 매우 흡사합니다.
여러분 성경 에베소서 1:4에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영원한 신부로 삼기로 창세 전에 이미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우리의 정혼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부로 삼으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 흘리신 피가 바로 신랑 지참금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초림에서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은 혼인 찬치를 기다리는 신부의 기다림의 때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다림의 때에 신부는 좋은 신부가 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과의 혼인 잔치에 합당한 신부가 되기 위해 믿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들은 혼인잔치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처럼 언제든지 혼인잔치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날을 준비한 자만이 그날이 최고의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와 성도들은 혼인 잔치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준비는 어떤 노력이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성도들의 옳은 행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우리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옳은 행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앞에 죄를 고백하여 죄 사함을 받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선한 행실은 바로 이러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삶의 열매들을 뜻하고, 이러한 믿음의 옳은 행실이 바로 세마포 예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옳은 행실을 많이 한 성도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예복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성도는 예복이 없으므로 혼인식에 참석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장차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온 삶에 따라 상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 얼마나 큰 권세를 가지고 살았는지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가 있는지를 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아무 공로 없이 구원 받은데 감사하며,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에 더욱 힘쓰시기를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움에도 내 마음속에 혹,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내 마음대로 판단하거나, 불순종하는 마음은 없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혹, 작은 것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회개하고, 지금 주어진 삶의 환경 속에서 믿음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2. 구원 받은 감격에 찬 찬송은 우리 교회 공동체에 꼭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큰 자나 작은 자나 모두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서로 섬기며 사랑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3. 우리들은 옳은 행실로써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준비해야 하는데, 우리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옳은 행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앞에 죄를 고백하여 죄 사함을 받는 일입니다.
믿음의 선한 삶으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예복을 준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 속에서 "할렐루야" 하나님을 뜨겁게 찬송하기를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거대한 악의 세력 앞에서 주눅 들고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장차 우리에게 빛나는 세마포 예복을 입혀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영안을 열고 사탄마귀의 궤계를 분별하여 악을 물리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는 복되고 아름답다

한·중·일 모두 주로 결혼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결혼이란 말보다 ‘혼인(婚姻), 가취(嫁娶), 혼가(婚嫁), 혼례(婚禮), 성혼(成婚), 혼취(婚娶), 가약(佳約)’ 등의 다양한 용어를 더 자주 사용했다.
음은 다르지만, 뜻이 같은 단어가 많았다.
결혼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겼다는 증거가 된다.
혼인의 비유적 표현은 음녀와 음행으로 암시되어 있던 자들과 반대되는 긍정적인 관계를 환기시킨다.
이상적인 혼인은 상호 간의 동의와 애정에 근거를 둔 평생의 협력관계이다.
결혼에서 ‘맺을 결(結)’ 자는 이왕 맺을 일이라면 ‘길(吉)하게 맺으라’는 뜻이다.
‘혼인할 혼(婚)’ 자에 ‘저물 혼(昏)’ 자다.
어둑어둑해질 때 혼례를 올렸다.
이때 양가 모친 앞에 있는 촛불을 켜는 ‘점초’ 또는 점촉(點燭) 의식이 필요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종말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묘사하기 위해 혼인 잔치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잔치 이미지는 부활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준다.
사람들에게 흰옷을 입을 수 있게 한다. 어린 양과 함께 기쁨을 누리게 한다.

구약에서 종말의 잔치 이미지가 특별히 혼인 잔치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기쁨과 구원이 연결된다.
슬픔과 압박 그리고 수치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혼인의 이미지를 사용했던 선지자들의 전승과 같은 전승들과 연결될 수 있게 한다.

‘혼인 잔치’ 주제는 요한계시록 19장에만 나온다.
다가오는 메시야 시대에 의해 잘 알려진 표상이었다.
메시야 잔치는 유대 사상의 통상적인 주제다.

이사야 25:6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님은 화려한 잔치를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사망은 멸하신다.
자기 백성의 눈물과 수치를 제하실 것이다(사 25:8).
요한 전승에서, 선지자 요한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신부를 취하는 혼인 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묘사한다(요 3:29).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제공함으로 예수님은 암시적으로 신랑의 역할을 주장한다(요 2:1-11).

1.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를 보면,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길들이다’는 단어를 설명해 준다.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지.” 익숙함에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잔치에 초청받는 것이 그렇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잔치’는 혼인 비유에 표현된 친근한 교제 사상을 강조한다.
잔치는 친밀한 식탁 교제의 장이다.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과 식사하는 장면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복 된 까닭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교제의 즐기는 상이기 때문이다.
잔치집의 먹을 게 얼마나 많으냐가 관건이 아니다.
음식이 풍성하다고 더 행복해졌다는 증거는 없다.
선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행복감이 더 커진다는 믿음은 잘못이다.

심리학자 Barry Schwartz는 ‘선택의 역설’이라는 개념으로 선택의 폭이 넓어진 만큼 행복이 줄어든다고 말한다.
음식을 선택하는 폭이 넓은 것보다 혼인 잔치의 주인공과 얼마나 가까운 지가 더 중요하다.
들러리도 행사업체도 하객도 아닌 신부라면 모든 게 달라진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신랑이 누구인가.
신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다.
성경적으로, 왕의 혼인 잔치에서 신랑은 말을 타고 허리춤에 칼을 차고 진리와 공의를 행하는 승리한 인물로 묘사된다.
다음 장면에서 이 이미지가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혼인은 일반적으로 기쁨이 그 특징이다.
고대 문헌들은 신랑신부들의 기쁨을 고무시키기 위한 혼인 하객들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 천사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에 대해 말할 때 이 비유적 표현은 신부로부터 손님들로 그 대상이 변경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신부이며, 손님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손님이다.
이중적인 상징이 차용되어 있다.
그 신부와 청함을 받은 손님들이 하나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양의 신부이면서 영원한 손님이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라는 어구는 이례적(unusual)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전치사구가 정관사와 그 관사의 지배를 받는 실명사 사이에 나오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혼인 잔치의 초청, 즉 청첩장은 구두나 글로 주어진다(마 22:1-10).

초대의 글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테모르디스는 그의 집에서 내일 열리는 그의 딸의 혼인식 잔치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또는 “혼인식에 당신과 함께 식사하기 위해 당신을 초대합니다.”
우리나라 직장인들 사이에서 청첩장을 받을 때 머리가 복잡해진다고 한다.
청첩장을 보내면 축의금을 마련해 가야 한다.
요즘의 교통 사정을 감안하면 거의 반나절 이상을 소비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부담스럽게 생각하면서 예식장에 간다.
일종의 세금 고지서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받은 축하금은 언제든 돌려줘야 할 빚인 셈’이란 것이다.
그래서 아주 절친한 사이가 아니면 ‘안 주고 안 받으면 되지’라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친분에 대한 회신율’이 60%에 불과하다고 한다.

2. 복 되도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여!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손님으로 청함을 받는다.
누가 초대장을 보냈는가?
결혼관계를 이루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주도권이 강조된 단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호의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다.
잔치는 은혜로운 것이다.
초대장이 있으면 참석할 수 있다.
축의금이 아니다.
은혜다.
공로나 선행이 아니다.

바울 서신에 있는 선택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으로 언급된다. ‘청함을 받은’이라는 단어가 ‘택하심을 받은’과 거의 동의어라는 사실이 확증한다. 하나님은 신부에게 혼인 예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혼인 잔치에 참석하기를 바라는 자들을 ‘초청하신다.’ 하나님의 초청이다. 단체가 아닌 개인적이다. 교회 공동체보다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이 자신의 것으로 부르신다. 택하신 자들이 초청에 응한다. 저자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 것과 백마 탄 자에 의해서 패배한 원수들의 시체로 잔치를 벌이도록 새를 초대하는 것과 대비시킨다. 성도들은 교회로서 신부이면서 초청받은 손님이다. 둘 다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와 긴밀한 교제를 묘사한다. 전자는 교회 공동체에 초점을 맞춰져 있다. 후자는 교회를 이루는 개개인 신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은유의 결합은 이미지에 풍성함을 더하기 위하여 고대 세계에서는 흔히 사용되었다. 여전히 하나님은 통제하시는 분이다.

혼인 잔치에 참여하리라는 약속은 흔하게 나타나는 문학적 형태다.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는 하나의 지복(beatitude)이라 할 수 있다.
일곱 복 중의 네 번째다.
선언된 ‘복 되도다’는 법적인 상황에서 의롭다고 인정함 또는 상 받음이라는 사상과 관련이 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복 되도다’라고 선언할 수 있다. 악과 사망의 최종 멸망과 함께 임하게 될 풍성한 생명을 예견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다. 어떤 말은 ‘선언’하는 행위로서 세상을 바꾼다. “피청구인 대통령을 파면한다”라는 헌법재판관의 말 한마디는 살아 있는 권력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말은 곧 행위다. 행위가 모여서 세상을 주조한다. 다만 말이 행위가 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그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말하는 이의 자격이다. ‘복 되도다’을 선언하는 이가 전능하신 이가 아니라 유한한 인간이라면 가짜라고 말할 것이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다. 왜 복이 있는가. 통상적인 관례를 생각해 보자. 결혼식장에서 복을 비는 자는 하객들이다. 신랑과 신랑의 행복을 기원한다. 요즘은 예식장이지만 그 때는 손님들이 신부를 신랑의 집으로 데려가는 횃불 행렬에 참여한다. 혼인은 신부의 집으로 가는 행렬로 시작된다. 뒤이어 이 행렬은 혼인 잔치를 위해 신랑의 집으로 돌아왔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약혼한 교회는, 이제 그의 하늘 신랑이 신부를 위해 오고, 함께 하늘로 돌아가 영원토록 혼인 잔치를 하는 그 재림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일반적 사회적 관례에서, 혼인 예식에는 잔치와 신부가 신랑의 집으로 하는 행진이 포함된다. 가는 길에, 사람들은 신랑·신부에게 복을 외친다. ‘복 되도다’에 해당하는 ‘Μακαριοι’(마카리오이)를 외친다. 그들이 행복하고 번성하며 아이들을 많이 갖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대상이 바뀐다. 신랑신부가 아닌 손님들이다. 손님들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혼인 잔치에 단지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손님이면서 그들은 어린 양의 신부이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이다. 생명과 평강이 영원히 주어지기 때문이다.

예배자들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신부의 새 예루살렘의 환상을 예견하는 다가올 혼인 잔치를 내다본다.
그 후에 한 천사가 혼인 잔치에 초대 받은 자들에게 복을 선포한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의미한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가장 빛나던 순간이 있다.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꼽는다. 삶이 꽃이 되는 순간이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 것은 이보다 더 복되고 아름답다.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의 통해 사랑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속죄적 고난을 통해 사랑을 느꼈다. 이 희생은 그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그리고 그가 신부인 자기 백성들에게 ‘충실과 진실’이 될 것임을 보여 준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고후 11:2).

에베소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엡 5: 32-33).

주님은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열 처녀에 비유하셨습니다.
천국에서 찬양의 소리가 들리며 고백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되었으니.” (계 19:7). 어린 양의 혼인이 이르렀기에 그 아내가 예비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 ...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계 21:9) 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휴거가 된 후에 지상에서는 칠년 대환난의 기간을 지내게 됩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교회를 공중으로 부르신 후에 칠년간 거하시며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여시게 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마치면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지상으로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공중에서 성도들은 두 가지의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10).

 

우리는 심판이라고 하면 믿지 않는 자가 백보좌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서 자신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의 심판입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20:14). 백보좌 심판은 천년 왕국이 끝난 후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도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을 가르칩니다. 로마서와 고린도 전후서 에서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서 자신들의 삶과 사역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증거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는 죄에 대하여 진노하는 심판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선행과 사역과 믿음의 수고에 대하여 격려하시는 은혜의 심판이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는 시기는 휴거가 일어난 후에 공중에서 있게 됩니다.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눅 14:14). 주님께서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전도의 수고를 갚아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의 부활의 때는 주님께서 공중재림 하실 때입니다. 주님은 주님이 오실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칭찬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 4:5). 주님이 오시는 날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인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롬 14:10,11).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서 각자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직접 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판단하거나 업신여기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길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은 성도의 삶에서 축적된 업적이 그리스도 앞에서 시험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 3:12-15).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의 공력이 시험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터 위에 금이나 은같이 보석 같이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면 그 공력이 그대로 있어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허무한 것을 추구하였다면 불에 타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은 불 가운데서 구원받은 빈손들고 천국가는 모습입니다.

 

심판대는 헬라어로 베마(bema) 라고 합니다.
베마는 통치자나 재판관이 다스리기 위하여 앉는 높은 자리이기도 합니다. 또한 베마는 고대 운동 경기에서 승리한 자가 상을 받기 위하여 서는 단입니다. 그러면, 경기의 주관자가 높은 단인 베마로 선수를 불러서 면류관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베마입니다. 즉, 우리가 믿음의 여정을 달려온 것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주님이 상급대로 부르는 곳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4-25). 운동장에서 달려가는 자들이 상을 얻기 위하여 달려가듯이, 우리도 주님이 주시는 상급과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죄를 심판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수고와 경주에 대하여 주님이 격려하시며 면류관을 주시는 자리입니다. 이는 졸업식에서 우수 학생들에게 상장을 주며 격려하듯이, 최선의 삶을 살아간 믿음의 성도들을 위로하시며 격려하시는 자리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상급을 주실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주시는 면류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5).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은 자신을 절제하며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생명의 면류관은 시험을 참고 인정받은 자에게 주어집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을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약 1:12). 또한 의의 면류관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주님을 섬기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8). 영광의 면류관은 주님이 맡기신 양무리의 본이 되며 목양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벧전 5:4). 우리는 기쁨의 면류관을 기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쁨의 면류관은 전도의 열매를 맺은 자에게 주시는 상급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살전 2:19-20).

 

우리가 주님의 심판대에서 영원한 면류관을 얻는 순간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얻는 것보다 더욱 값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은 영원하며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면류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신 상급을 얻은 후에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2. 성도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석하게 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되었으니.” (계 19:7).

 

휴거 이후에 공중으로 들림받은 성도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서 주님을 섬긴 공력에 대한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과 같은 공력이 나타나지만, 어떤 사람은 불가운데서 구원받은 초라한 구원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상급을 받고 난 후에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되어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의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계 19:9). 우리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것은 큰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후에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2-3).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유대 사회의 혼인 제도를 빗대어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 약혼은 당사자의 부모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신랑측은 신부를 취하기 위하여 지참금과 같은 댓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사자간에 약혼이 성립이 됩니다. 당시에 약혼은 곧 결혼을 의미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정혼하였을 때에 이미 결혼한 것과 같은 효력을 지닙니다. 신부는 자신의 집에서 단장하며 신랑을 기다리게 됩니다. 신랑은 약혼한지 대략 일년이 지난 후에 예고없이 신부의 집에 찾아갑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신랑을 맞이하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하며 예비한 신부만이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신부는 언젠가는 자신을 데리러 올 줄을 알고 신랑을 위하여 자신을 단장하며 기다립니다.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시간은 중요합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방탕하거나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은 불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고후 11:2)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정결한 처녀와 같이 자신의 순결을 지킴으로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 25:13) 라고 하셨습니다. 신랑은 대략 일년이 지난 후에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데리러 옵니다. 그러면, 신부는 신랑을 따라 집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신랑의 집이나 아버지 집에서 주최하는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혼인 잔치는 대략 칠일동안 열리게 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삼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우리와 약혼한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으로 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천사들의 나팔 소리로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신부인 우리를 데리고 하늘로 오르시고 그곳에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공중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마치면 주님은 우리와 함께 지상으로 재림하시게 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요한계시록 19:11-12). 그리스도께서 백마를 타시고 지상으로 재림하시는 모습입니다. 주님이 지상 재림하시기 전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성도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19:7-8).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석한 성도들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습니다.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영어의 킹제임스에서는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가된 의인 것입니다. 즉, 성도가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웰 목사님은 세마포는 속옷과 겉옷이 있는데, 속옷은 그리스도가 전가한 의의 옷이며 겉옷은 성도의 선한 행실로 주님이 주신 옷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음을 상징하는 옷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의 선한 행실로서 주님이 입혀 주시는 옷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게 될 때에 불의 시험을 통과하여 금과 은의 값진 삶을 산 사람들에게는 화려한 세마포 옷으로 입힐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운데서 구원만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평범한 세마포 옷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자들은 누구인가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이 중심에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참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신랑의 친구들이 참석하여 기뻐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계 3:29). 신랑의 친구는 구약의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침례요한도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침례요한을 친구라 표현하십니다. 구약의 성도는 교회와 같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교회 시대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성도들은 신랑의 친구의 자격으로 참석하여 혼인 잔치를 축하합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도 침례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천국에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들이 누리는 특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마 11:11). 교회 시대에 주님의 신부된 성도들이 천국에서 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막 2:19-20). 혼인집 손님들은 구약의 성도들입니다. 이제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고 나면 신랑을 빼앗길 것이며 그 날에 금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이후에 공중에서 일어날 두 사건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신부 삼으셔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상급을 주실 것이며,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큰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누리는 특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8)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기에 주님의 부름을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4)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부름의 상과 면류관을 위하여 달려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라(계19장)

현세의 심판은 요한계시록 18장까지 끝나고 19장 하반부부터는 재림과 천년 왕국 등 새 세상이 전개된다.
따라서 19장 전반부는 새 세상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여섯째, 일곱째 환상이 나타난다.

 ■ 여섯째 환상 : 바벨론 멸망에 대한 하늘의 찬송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계19:4-5)

18장에서는 바벨론 멸망에 대하여 왕과 상인들과 뱃사람들이 애통한바 있다. 이에 반해 여기서는 구원받은 많은 하늘의 무리와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은 물론 보좌로부터 바벨론 멸망에 대해 찬미하고 있다.

그들의 찬미는 ‘아멘 할렐루야’이다. 할렐루야는 신약에서는 오직 여기 19장에서 4회 나오는데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멘 할렐루야’는 ‘진실로 그러하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이다.

일찍이 9세기 초에 제작된 성(聖) 메다드복음서의 삽화인 <어린 양에게 경배>에는 네 기둥 사이로 보이는 건물에 붉은 휘장이 걸려있는데 이는 멸망한 바벨론이다. 그 위에는 보좌의 어린 양 좌우에 서있는 24장로와 그 아래의 네 생물(사람, 송아지, 사자. 독수리)이 바벨론 멸망을 찬미하며 어린 양에게 경배하고 있다.


■ 일곱째 환상 :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계19:9-10)

요한계시록의 네번째 복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나타나는 중요한 말이다. 혼인은 구약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신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화와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 앞으로 영원한 천국에서 얻을 기쁨과 축복을 상징하는 하나의 표상이다. 따라서 이를 문자 그대로 실제 혼인 잔치가 거행되거나 잔치음식을 먹고 즐기는 것은 아니다.

11세기 초에 제작된 밤베르크묵시록의 삽화인 <바벨론 멸망에 대한 찬미>에서 상층부에는 네 생물이 호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며 천사들의 나팔에 따라 아래쪽의 24 장로들이 바벨론 멸망을 찬미하고 있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천사가 요한에게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며 기록하라 한다. 요한이 기록하고 너무나 기뻐서 엎드려 천사에게 경배하려 하니 천사가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경배할 대상은 예수의 한 종에 불과한 천사나 선지자들이 아니라 계시를 주신 예수님이심을 지금도 우리 성도들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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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7-2024수) 파트리스교회 온라인 성서강좌 # 제7강

5. 첫 부활에 참여한 자(20:6)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참여(3313) 메로스 μέρος, ους, τό 스트롱번호 3313

1. 눅 11:36. 2. 몫
발음 [ mĕrŏs ]

뜻풀이부

1.  [전체에 대조되는 부분] [일반적으로] 눅 11:36, 15:12, 요 19:23, 행 5:2, 계 16:19(갈래), 지체, 엡 4:16, 지방, 마 2:22, 막 8:10, 행 2:10, 편, 쪽, 요 21:6, 조각, 눅 24:42, 당, 파, 당파, 행 23:6, 9, 일, 경우, 사건, 고후 3:10, 9:3.
2. 몫, 계 20:6(참예하는), 22:19(참예함을), 자리, 마 24:51, 눅 12:46, 요 13:8, 계 21:8(참예하리니).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들은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복이 있으며 거룩한 자들이다(Beasley-Murray).
본절은 그들이 복이 있는 근거에 대한 진술이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둘째 사망'은 모든 사람이 직면하는 육체의 사망을 가리키는 첫째 사망과 대조되는 개념
둘째 부활에 참여하는 불신자들이 맞게되는 사망이다.

이것은 불못에 던지우는 심판을 가리킨다(14, 15절; 21:8).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복이 있는 것은 둘째 부활과 전혀 상관이 없어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둘째 사망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성전에서 봉사하면서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제하는 자들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권리를 소유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교제를 나누는 자들이다.

>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왕권을 소유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통치하게 된다(4절).


첫째 부활은 무엇인가요?
둘째 부활은 무엇인가요?

다니엘 12:2은 인류가 마주하게 될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운명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모든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겠지만, 모두 동일한 운명을 마주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의인과 악인에게 있을 서로 다른 부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4-6은 “첫째 부활”을 얘기하고 있으며,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둘째 사망(불못, 요한계시록 20:14)은 이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첫째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로써,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의인들이 부활” (누가복음 14:14) 과 “생명의 부활” (요한복음 5:29)과 일치합니다.

누가복음 14: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첫째 부활은 여러 단계로 이뤄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첫 열매”, 고린도전서 15:20), 그 분을 믿는 모든 자들의 부활을 위한 길을 닦으셨습니다.
첫째 부활로, 예루살렘 성도들의 부활이 있었습니다(마태복음 27:52-53).
또한, 앞으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 (데살로니가전서 4:16), 그리고 대환난 말기에 있을 순교자들의 부활(요한계시록 20:4)이 첫째 부활에 포함됩니다.

요한계시록 20:12-13에 의하면 둘째 부활은 불못에 던져지기 전 크고 흰 보좌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을 악인들이 그 대상입니다.
따라서, 둘째 부활은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의 부활이며 둘째 사망과 연결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심판의 부활” (요한복음 5:29)과 일치합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사이에 천년 왕국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의로운 자들의 마지막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요한계시록 20:4) 왕 노릇 하는 것이지만,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즉, 사악한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5).

첫째 부활 때에 얼마나 큰 기쁨이 있을까요! 둘째 부활에는 또 얼마나 큰 괴로움이 있을까요!
그러니, 우리에게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큰 책임이 있습니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유다서1:23).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

1. 둘째 부활과 첫째 사망이 있는가? 

요한계시록 20장 5절과 6절에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것으로 인해 둘째 부활이 있는 것인가?
첫째 사망이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과 함께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의 정확한 개념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등장한다. 

2. 둘째 사망이란? 

6절에 나타난 둘째 사망은 자연스럽게 첫째 사망이 있음을 확인해 준다.
첫째 사망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선 둘째 사망을 언급하면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복이 있어서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즉 믿음의 사람들이 당하지 않는 사망이다.
이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두고 한 말이며, 영원한 형벌에 대한 표기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첫째 사망은 땅에서의 육체적 죽음이고, 둘째 사망을 지옥에 떨어지는 영원한 형벌에 대한 표현이 확실하다(히 9:27)
 

3. 첫째 부활이란? 

5절과 6절에 ‘첫째 부활’이 있다고 하였으니 ‘둘째 부활’이 있는 것인가?
즉 부활이 다단계로 나타나는가 하는 질문이다.

실제적인 ‘부활’에 대해서는 데살로니가전서 4:13~18에 잘 설명되어 있다.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16절을 보면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강림) 있고, 강림과 함께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죽은 자들의 부활), 재림 때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끌어 올림을 받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신령한 영적 몸으로 바뀌어).
그러므로 성도들의 두 번 부활이 있을 수 없다.

마태복음 24:31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즉 단번에 성도들을 재림 예수님 앞으로 끌어모으신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에게 둘째 부활이란 것이 없다.
그런데도 첫째 부활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만한 본문이 있다.

고린도전서 15:22~24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3절에서 삶을 얻는 대상을 구별하여 설명한다.
첫째는 예수님의 부활이고,
두 번째는 강림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고,
세 번째는 24절 대로 최후 심판 때를 두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설명하면서, 두 번째에 삶을 얻는 대상이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라고 명확히 그 경계선을 그음으로, 두 번째 삶을 얻는 대상은 모든 성도인 것이 분명하고, 그렇지 않은 대상은 여기서 제외된다.
그러면 세 번째에서 언급하는 삶을 얻는 대상은 그리스도 밖에 사람들이고, 불신자들과 악의 세력들인 것이 확실하다.

혹 이러한 입장에서 요한계시록 20장 6절의 첫째 부활의 개념을 이해한다면, 성도들의 부활이 다단계에 걸쳐서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니고, 불신자 역시 동시에 부활 되어 심판을 받으나, 고린도전서 15장 24절에의 설명을 참고한다면 불신자의 부활을 구분하여, 모든 성도의 부활을 첫째 부활이라고 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접근할 수 있다.

4.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의 비교 

요한계시록 20장에 등장하는 천년왕국과 관련하여, 전천년설은 20장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주장이고, 무천년설은 전체 내용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이는 주장이다.

전천년설을 받아들이면, 부활과 예수님의 강림을 두 번에 걸쳐서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이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어긋나기에 절대적인 주장이 될 수 없다.

무천년설은 전천년설을 고려할 때 나타나는 문제를 안고, 상징적으로 받아들여 해석하는 것인데 이 경우 20장의 내용을 두고 상징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성경적 절대적 당위성을 가지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 서로 존중하며 조심스럽게 각자의 입장을 정하여야 한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의 복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요한계시록 19장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양은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이 이십니다.
신부는 예수님이 주인 되신 교회이며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가 동일한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에서 모든 교회에 공통된 말씀은 두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교회
둘째는 예수 이름으로 승리하는 교회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신 교회는 반드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신 교회는 반드시 예수 이름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 몇 가지 중요한 용어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첫째는 첫째 부활(復活)
둘째는 둘째 사망(死亡)
셋째는 천년왕국(千年王國)

먼저 이러한 용어들을 정리하기 전에 구원에 대한 믿음을 성경적으로 확실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믿음입니까? 아니면 행위입니까?
믿음에 의한 것을 구속론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행위에 의한 것을 도덕론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속론적(救贖論的, redemptional)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속론적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께 죄 값으로 지불되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론적 구원이란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신앙입니다. 

도덕론적(道德論的, ethical) 구원이란 무엇인가?

도덕론적 구원이란 믿음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위(行爲)가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도덕론적 구원이란 모든 종교에 적용되는 보편적 속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즈음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하는 것은 다른 종교를 무시하고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기독교를 편협한 종교라고 하기 때문에 종교다원화주의와 같은 사상이 유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진리는 변질 될 수 없으므로 오직 예수의 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구원에 대한 혼돈과 갈등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구속론적 구원인가 아니면 도덕론적 구원인가를 서로 혼합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느냐? 라는 질문은 마치 구원을 도덕론적 구원의 근거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한번 받은 구원은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은 구속론적 구원의 근거에 의하여 사람이 선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기 때문에 사람의 행위가 구원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속론적 구원을 근거로 오늘의 말씀을 살펴보면 첫째부활과 둘째사망과 천년왕국이란 개념을 잘 몰라도 분명히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과 천년 왕국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부활(復活)이란 무엇인가?(요한계시록 20:5-6)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첫째 부활에 관한 성구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부활이란 용어를 20장 5절과 6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5∼6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이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왕 노릇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둘째 사망의 해는 무엇일까요?
둘째 사망(死亡)이란 용어가 2:11, 20:6, 14, 21:8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에서 ‘둘째 사망’이란 불못에 던져지는 것을 말합니다.
불못이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을 말합니다(21:8).
불못에 던져지는 것들은 사망과 음부(20:14) 그리고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않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숭배자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21:8).

흔히 ‘지옥(地獄)’을 마치 “유황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전에서 정의하는 지옥(地獄)이란 “아주 괴롭거나 더없이 참담한 환경이나 형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현실에서 악한 일을 한 사람이 죽어서간다고 하는 세계.” “큰 죄를 짓고 죽은 사람이 그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악마와 함께 영원히 벌을 받는다고 하는 곳.” 이라고 합니다.

첫째 부활이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예수님께서 재림의 심판주로 오셨을 때 유황불 못에 던져지는 것은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첫째 사망은 육신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무엇인가?

‘천년(千年)’이란 단어가 한글개역성경에서 9번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시편에서 1회(90:4), 전도서에서 1회(6:6).
신약에서는 베드로후서에서 1회(3:8), 요한계시록에서 6회(20:2, 3, 4, 5, 6, 7)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천년(千年)’에 관한 말씀들을 중심으로 과연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용어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를 소개하려고 한다.

2절, 일천년 동안(a thousand years) - χίλια ἔτη.  

3절, 천년이 차도록(till the thousand years)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4절, 천년 동안(a thousand years) - χίλια ἔτη.      

5절, 그 천년이 차기까지(until the thousand years)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6절, 천년 동안(a thousand years)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7절, 천년이 차매(the thousand years are expired)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 τὰ /  ὁ, ἡ, τό. 3588. ho, hé, to. the  
* χίλιοι. 5507. chilioi, a thousand     
* ἔτος. 2094. etos. a year    


분명한 사실은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는 ‘천년왕국’이란 용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학교와 교회 그리고 성도들이 ‘천년왕국’을 언급하고 마치 머지않아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처럼 믿고 기다리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이란 용어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년’이란 ‘상징적인 수’로 사용한 것이다.
상징이란 증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요한계시록 20:2∼3,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이 말씀에서 ‘용’ ‘옛 뱀’은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다. 사단과 마귀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한 것처럼 ‘천년’이란 단어 또한 상징으로 사용한 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을 마치 천년동안 지속되는 어느 특정한 기간이라고 해석하므로 ‘천년왕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는 말씀은 천년이라는 기간과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왕 노릇하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이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택하신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은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질 미래의 사건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이루어진 과거의 사건이었으며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이고 또한 장차 미래에도 확실하게 증거 될 것입니다.
따라서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것은 미래에만 이루어질 사건이 아닙니다.

과거에 실현된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며 미래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천년동안이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지금도 지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말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요한계시록에는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용어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 의해서 자주 천년왕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어왔기에 대부분의 교인들은 마치 ‘천년왕국(千年王國)’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은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깨우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 왔다 하고.

* 천국(ἡ βασιλεία) - βασιλεία, 932. basileia.
kingdom, sovereignty, royal power  

천국은 하늘 왕국 즉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하늘의 왕국은 이미 이 땅에 임했습니까?
아직 임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하늘 왕국은 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왕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분명하게 하늘 왕국은 완성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늘 왕국이란 하나님이 다스리는 왕국을 말합니다.
하늘 왕국이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아미 임했습니다.

다니엘 2: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마태복음 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스가랴 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이사야 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시편 46:9∼10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성경은 하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늘의 예루살렘 강하 사건(계 21:1~5)을 통해 본 하늘의 의미를 발표하고 “하늘은 더 이상 피안의 세계로서 이 세상과는 이질적인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이 세상과 통일돼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공간이 된다.”며 “새 예루살렘 강하 사건은 이러한 새 창조의 정황을 교회론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그림 언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새 예루살렘 강하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이 통합되는 새 창조의 환경에 대한 묘사라는 것이다.
이 소장은 “새 예루살렘은 장소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인 성도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성경에서 일관성 있게 사용되고 있다”며 “이는 24장로(계 4), 14만 4000(계 7:1~8),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17)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요한계시록에서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 공동체는 지상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띠지만 동시에 하늘에서 승리한 공동체로 존재하는 이중적 특징을 지닌다”며 “이 땅은 우리가 버리고 떠나야 할 소멸의 결과를 기다리는 대상이 절대 아니다.
하늘은 언제나 땅과의 통일을 이루도록 존재한다(엡 1:10).
하늘과 땅을 통합돼 온 우주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지혜(세인트앤드루대) 박사도 ‘히브리서 12장 25~29절의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위한 하늘의 진동’을 주제로 발표하고 “해당 본문은 창조 세계가 진동해 멸망할 것이라는 마지막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의 창조세계와 하늘의 세계를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할 영원한 처소로 준비시킬 것임을 전하는 약속의 메시지”라고 밝혔다.

이 박사는 “종말 상태에 대한 전통적 경향은 죽어서 하늘로 가는 데 집중돼 왔지만 이는 땅의 환경문제나 세상의 사회적·구조적 불의를 무관심하게 만든 불균형적 신앙 모습을 촉발했다”고 지적했다.


천년왕국(千年王國)

성경에서 중요한 주제 두 가지를 소개한다면 구원과 왕국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 구원만 강조하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읽어볼 때 왕국을 건설하고 그곳에 구원받은 백성들을 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에베소서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하신 은혜는 왕국 안에서 구속하신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으로 에덴동산(왕국)에 거주할 수 없도록 쫓아내셨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사탄이 지배하는 곳에서 왕국을 다스릴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기원전 606년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후 다른 나라와 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비록 약속의 땅에 거하면서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기원전 4년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32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한글 번역에서 살펴보면 마치 천년이란 기간이 채워져 지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천년설 - 천년이 있기 전에 재림이 있다.
후천년설 - 천년이 지나고 재림이 있다.
무천년설 - 천년은 상징적인 수가 되어 천년은 없다.

* 천년의 기준에 의해서 시기가 다를지라도 중요한 것은 재림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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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한 실업가로 세계 최대의 백화점을 운영하며 나중에 체신부 장관까지 역임한 존 워너메이커는 성경을 사랑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다.

“저는 오늘까지 무려 30,026일을 살아오면서 투자하는 것마다 많은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 가장 위대한 투자는 열두 살 때 2달러 50센트(3,000원 정도)를 주고 빨간 가죽 성경을 산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낡은 성경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명문 예일대학 총장을 지낸 W. L. 펠프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학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교육이 없는 대학 교육보다는 대학 교육이 없는 성경 교육이 인간을 더 고귀하게 만듭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지혜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을 의지하여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사납던 개도 며칠만 먹지 못하면 기운이 없어지고 무기력하게 죽어 간다.
그런데 거북이는 50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영의 양식을 먹지 않고 살아가는 교인을 가리켜 ‘거북이 교인’이라고 한다.
성경 말씀을 먹지 않고 살아가는 거북이 교인은 겉모양은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새롭게 하며,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우리가 바로 살기 위해서는 성경 사랑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01-24-2024(수) 파트리스교회 온라인 성서강좌 # 제8강


6.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22:7)
- 지키다(5083) 테레오(tērĕō) τηρέω    

1. 지켜보다,  2. 지키다, 3. 유지하다
발음 [ tērĕō ]
어원 / 미완료 ἐτήρουν, 미래 τηρήσω, 제1부정과거 ἐτήρησα, 완료 τετήρηκα, 미완료 수동태 ἐτηρούμην, 완료수동태 τετήρημαι,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τηρήθην, τηρός ‘감시’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지켜보다, 감시하다, 파수하다, 마 28: 4, 행 12:5.
  • 2. 지키다, 간직하다, 보존하다, 보호하다, 요 2:10, 행 25:21, 고전 7:37, 딤전 6:14, 벧전 1:4.
  • 3. 유지하다, 붙들다, 엡 4:3, 딤후 4:7,  유 1:6.
  • 4. 보호하다, 요 17:15, 계 3:10.
  • 5. 준수하다, 준행하다, 지키다, 유의하다, 마 23:3, 요 14:15, 계 12:17,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 '내가 속히 오리니'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반복이다(2;16; 3:11).
본절의 '속히'는 앞절의 '속히'와 동일한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지체하지 않으시고 오실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후반절에서 언급할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 대한 최대의 응답이다.
한편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은 본서에 언급된 일곱 가지 복 중 여섯째 복이다.
이것은 첫째 복을 언급하고 있는 1:3의 반복으로 예언의 말씀을 곧게 붙잡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고난 가운데 인내하여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이다.


복(마카리오스.  makariŏs)  μακάριος, ία, ιον 스트롱번호 3107

1. 복된.  2. 행 26:2. 3. 마 5:3
발음 [ makariŏs ]

뜻풀이부

I. 복된, 축복된, 행운의, 행복한.
 1. [사람에 대해서]
  a. [종교적 느낌없이] 행 26:2, 고전 7:40.
  b. [종교적 의미로서] 마 5:3, 요 13:17, 약 1:25, 벧전 3:14.


사도행전 26:2. 아그립바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마타리온) 여기옵나이다.

고린도전서 7: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요한복음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야고보서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베드로전서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2. [하나님에 대한 것] 딤전 1:11, 6:15.

디모데전서 1: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디모데전서 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3. [비인격적 존재에 대해서] 마 13:16, 눅 10:23, 행 20:35, 딛 2:13.

마태복음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 10: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사도행전 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디도서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요한계시록은 1:1에 기록된 대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기록되었기에 예언서로 분류가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낸 서신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시작하는 말씀’과 ‘본론’과 ‘끝맺는 말씀’으로 나누어집니다(1:1-11, 1:9-22:5, 22:6-21).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부터 시작되는 끝맺는 말씀은 말씀을 하는 주체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6-11절에 환상을 보여주던 ‘천사의 말씀’, 그 다음은 12-17절에 모든 계시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고 18-20절에 계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첫 번째 끝맺는 말인 ‘천사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먼저 6절에 천사는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이 말’은 지금까지 한 예언의 말씀을 뜻합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신뢰하고 믿을 수 있다는 의미이고, ‘참되다’는 말은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는 이러한 표현이 반복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선포된 예언과 환상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이 이해 할 수 없는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고 참되니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지 않으면 반드시 돌이킬 수 없는 멸망 앞에 서게 될 것이니 하나님께서 계시 하신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모든 말씀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만, 특히 ‘이는 참되고 신실하니’ 라는 말씀이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강조하는 말씀을 읽을 때에는 더욱 깊은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말씀을 이해하지도, 지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강조하는 그만큼 큰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본문에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 곧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종’ 곧 신약시대의 종들에게도 계시하시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시대의 계시와 신약시대의 계시는 서로 다른 계시가 아니라 동일한 계시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이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다면 신약시대의 예언은 이 땅에 다시 오실 재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모든 예언의 말씀이 다 이루어 졌듯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예언도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창 21:1, 신 26:19, 수 11:23, 왕하 15:12, 24:13, 렘 40:3).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고 조롱하던 자들이 어떻게 멸망했는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19장, 왕하 7장).
그러므로 여러분, 성경을 믿되 그 모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철저하게 말씀을 따라 살아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복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7절 함께 읽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축복 가운데 여섯 번째 축복으로 그 내용은 첫 번째 복인 1:3과 같습니다(계 1:3, 14:13, 16:15, 19:9, 20:6, 22:7, 14).
말씀을 읽고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켜 행할 때’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은 그 말씀을 지켜 행하기 위함인데, 만일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올바로 행하려면 먼저 아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복의 선포인 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되, 정확하고 바르게 알도록 힘과 노력을 쏟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지 삶에서 실천을 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를 통한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믿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도 드러내고 상급도 넘치게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요 15:8).

 

3. 이어지는 8절과 9절에 사도 요한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준 천사에게 경배하려다 천사에게 제지를 당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와 동일한 실수를 19:10에서도 저질렀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천사들의 영광에 압도당한 요한이 본능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한의 태도에서 인간의 피조물적인 본성을 보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된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 대신 다른 섬김의 대상을 찾았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우상숭배를 강력하게 금하고 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에 빠지게 되면 여지없이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은 반드시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역으로,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자체가 이미 그가 죄에 속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룟유다가 그러했듯이 예수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제자로 인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알곡을 가장한 가라지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만을 사랑하십니까?
그러시다면 여러분은 성도입니다.

그리고 요한이 절을 하려고 할 때 천사가 즉시 그것을 거부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죄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오늘 새벽에도 말씀드렸듯이 계시를 전해준 천사나, 이를 전달받은 사도 요한이나, 이를 듣고 지키는 우리 성도들 사이에는 어떠한 구별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하는 계시나 환상이 아무리 위대하고 놀라운 것일지라도 전달하는 그 사람까지 위대하고 놀라운 것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계시를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시의 중요도에 따라 전달자의 지위까지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놀라운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그가 위대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았다고 그것 때문에 그의 지위까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큰 은사를 받을수록 그는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맙니다.
세상에서 가장 온유하다고 인정받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한다는 모세가 순간적으로 교만에 빠져 므리바에서 화를 내며 바위를 두 번 친 사건이 바로 그것의 상징 아니겠습니까?
그는 그 일로 인해 가나안 땅을 밟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민 20:11-12).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큰 헌신을 했을 때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큰 일을 했을 때 무엇보다도 겸손을 유지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모든 은사는 오직 성도와 교회를 세우고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골 1:28).
그래서 은사를 받은 모든 사람은 교회와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사를 많이 받을수록 더욱 겸손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사나 직분은 달라도 지위는 같으며, 받은 은혜가 달라도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같은 형제요 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골 3:11).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 베푸는 자나 받는 자, 모두가 다 서로를 섬김의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장차 임할 천국을 미리 맛보게 될 것입니다.

 

4. 그리고 마지막으로 10절에 천사는 사도 요한에게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 심판과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으므로 지금까지 보인 계시의 말씀을 숨김없이 세상에 널리 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1절에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의 삶을 지적하고 바르게 인도할 시간조차 없을 만큼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오직 스스로의 삶을 경건으로 단련하여 구원에 합당한 거룩함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긴박한 가를 분명히 깨닫고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며 언제든지 이 땅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천국을 바라보기보다는 땅에 속한 것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짐으로써 오히려 이 땅을 떠나기 어렵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든 성도들은 비록 몸은 땅에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본향인 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히 11:13).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우리 성도들의 삶을 나그네의 삶이라고 말합니다(벧전 1:17, 2:11).
여러분,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받은 사명을 위해 현재의 삶에 충실하되, 언제든지 이 땅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만이 장차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지체없이 천국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마 24:31).

오늘, 예수님의 심판과 재림이 언제 이르든지 맞이할수 있는 준비를 함으로써 능히 모든 심판을 이기고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받는 지혜롭고 복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7. 두루마기를 빠는 자(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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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1-2024(수) 파트리스교회 온라인 성서강좌 # 제9강

7. 두루마기를 빠는 자(22:14)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두루마기(4749) 스톨래(stŏlē)  στολή, ῆς, ἡ   

1. 길게 끌리는 옷.  2. 누가복음 15:22.  3. 마가복음 12:38
발음 [ stŏlē ]
어원 / 472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길게 끌리는 옷, 눅 15:22, 막 12:38, 16:5, 계 6:11.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본절에 나타난 사람은 일곱 부류의 복 있는 사람중 첫번째에 해당된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 본문은 본서에 나타난 일곱 가지 복 중 마지막 복에 대한 묘사이다(7절; 1;3; 14:13; 16:15; 19:9; 20:6).
두루마기를 빠는 상징은 이미 7:14에서 언급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옷을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하는 것을 나타낸다.
두루마기를 씻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영생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공유하는 것이다.

7:14에서 부정 과거 시제가 사용되어 역사적인 십자가 상의 구속 사역에 참여함을 시사한 반면 본문의 '빠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뤼논테스'(*)는 현재 시제로 지속저인 행위를 나타낸다.

즉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요 13:10)
핍박과 환난 가운데 서도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며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해야 함을 시사한다(요일 1:7, Morris, Ladd, Mounce).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 본문은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 복에 대한 묘사이다.

여기서 '생명 나무'는 영생에의 참여를 나타내며 '성에 들어갈 권세'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의 참여를 가리킨다.

즉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에게만 충성하여 그의 고난과 죽음에 기꺼이 동참하는 자들, 즉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새 예루살렘 성에 속하여 영생을 누리게 된다.      

잠언 28:20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민수기 12: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요한계시록 6: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흰 두루마기 : 희고 긴옷, 흰 예복, 흰 옷
      * 순교자에게 주시는 옷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 '흰 두루마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톨레 류케'(*)는 '비품을 마련하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스텔로'(*)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옷들을 차려 입는 것'을 의미한다(3:4; 4:4; 7:9,13; 19:14; 막12:38).
하나님께서 순교자들에게 흰 두르마기를 주시는 것은 영생과 승리를 보장하심을 시사한다(Mounce, Johnson, Walvoord).

두루마기(4749) 스토래(stŏlē) στολή, ῆς, ἡ 

1. 길게 끌리는 옷.  2. 눅15:22. 3. 막12:38
발음 [ stŏlē ]
어원 / 472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길게 끌리는 옷, 눅 15:22, 막 12:38, 16:5, 계 6:11.


흰(3022) 류코스(lĕukŏs)  λευκός, ἡ, όν  

1. 빛나는.   2. 흰.  3. 마 5:36
발음 [ lĕukŏs ]
어원  / λύκη ‘빛나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빛나는, 밝은, 광채가 나는, 찬란한, 마 17:2.
2.  흰, 하얀.
    • a.
      [머리칼] 마5:36, 계1:14.
    • b.
      [염소 가죽].
    • c.
      [수정] 계2:17.
    • d.
      [양털] 계1:14.
    • e.
      [상징적인 흰 말] 계6:2, 19:11.
    • f.
      [상징적인 괴물].
    • g.
      [구름] 계14:14.
    • h.
      [돌].
    • i.
      [의자].
    • j.
      [추수할 때가 된 들판] 요4:35.
    • k.
      [산].
    • l.
      [바위].
    • m.
      [보좌] 계20:11.
    • n.
      ⑭ [옷] 막9:3, 16:5, 행1:10, 계3:5,18, 4:4, 6:11, 7:9,13.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 '잠시 동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티 크로논 미크론'(*)은 시간의 연속을 나타내는 목적격으로 동일한 사건의 연장 속에서의 휴식을 의미한다.
이는 복수를 신원하는 순교자들의 울부짖음으로부터의 휴식을 나타낸다(14:13).
한편 '쉬되'에 대하여 혹자들은 '잠시 동안'과 연결지어 '탄원하기를 쉬었다'는 의미라고 주장하며(Bengel, Bousset), 혹자는 천상계의 축복 가운데 쉼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lford, Morris, Swtet, Plummer).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천상에서의 '잠시 동안'이란 시간의 개념이 인간들에게는 영원과 같은 긴 시간이 될 수 있으며(20:3),
의로운 자들의 쉼은 자연히 천상에서의 축복이기 때문이다(14:13, Johnson).

한편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이들 모두가 동일인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순교한 자들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Mounce, Alford).
2. 순교치 않은 일반 성도들과 순교한 신자들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한 듯하다.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 '차기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어떤 사본에는 '플레로도신'(*, '완성되었다')으로 되어 있어 미래부정을 의미하는 부정 과거 가정법으로 해석된다(*, P).
2. '가득차게 될 것'이란 의미로 '가득 채워질 때까지', 혹은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을 다하기까지'를 의미한다.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본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교자들의 수가 채워져야 종말이 온다는 숫적 개념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교회가 더 많은 순교를 각오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함을 시사한다(7:14; 롬11:25, Ladd. Johnson).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흰 옷 : 희고 긴옷, 흰 예복, 흰 옷
    * 신부로 단장한 성도들의 옷    

흰옷(스톨래 류카스) 4749.  3022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은 앞서 언급된 십사만 사천과 본절 하반절에서 언급되는 '셀 수 없는 무리'를 연결하는 표현이다(5:9 주석 참조).
이렇게 요한이 중복적 으로 표현한 것은 144,000이라는 숫자가 영적인 의미의 수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구원의 문이 모든 민족에게 열려져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Morris).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 본문이 누구를 의미하는가에 대하여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큰 무리'가 십 사만 사천이라는 수로 상징된 자들과 동일인이라고 해석한다(Beckwith, Morris, Eller).
2. 십 사만 사천과 구별하여 십 사만 사천은 유대인을 가리키고 본문은 큰 환난 가운데서 구원받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Lamp).
3. 큰 환난 때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순교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Kiddle, Moffatt).
세 가지 견해중 첫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 '흰 옷'은 정결과 승리를 상징하는 옷으로(3:4 주석 참조)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구속받았음을 나타낸다.
'종려 가지'는 일반적으로 승리나 기쁨의 상징으로 사용된다(요 12:13, Trench, Vicent, Alford).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흰 옷을 입은 허다한 무리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구속 하심에 대해 기쁨으로 찬양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흰 두루마기 : 희고 긴옷, 흰 예복, 흰 옷
        * 순교자에게 주시는 옷  

      흰 옷 : 희고 긴옷, 흰 예복, 흰 옷
        * 신부로 단장한 성도들의 옷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 '장로 중에 하나'는 본서 가운데 나타나는 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들이 아니라 어떤 천상적인 존재인 듯하다(4:4 주석 참조, Johnson). 한편 '응답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크리데'(*)는 '아포크리노마이'(*,'대답하다')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응답한 사실을 나타낸다. 이는 예언서에서 흔히 등장하는 문답 형식으로(렘 1:11;겔 37:3;슥 4:2, 4, 5) 질문없이 스스로 해석하고 답하는 히브리어 중복성(Hebrew redundancy)을 나타낸다(Sw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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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복의 기원이 되는 말씀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에 충만하라, 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생육하고(6509) 파라(pârâh) פָּרָה 

1. 맺다.  2. 열매를 맺다. 3. 번창하다
발음 [ pârâh ]
구약 성경 / 29회 사용

뜻풀이부

1. 원형 맺다.
  a. 원형 열매를 맺다, 신 29:17(18), 시 128:3, 사 11:1, [은유적으로] 사 45:8.
  b. 원형 번창하다, 많이 낳다[사람이나 동물에 사용], 창 1:22, 출 1:7, 23:30.
  c. 원형 히필형 : 결실이 풍성하다, 창 41:52, 증산하다, 창 17:6, 20, 48:4, 레 26:9.


번성하여(7235) 라바(râbâh) רָבָה 

1. 증가하다.  2. 확대되다. 3. 위대해지다
발음 [ râbâh ]
구약 성경 / 176회 사용

뜻풀이부

1. 원형 증가하다, 창 1:22, 28, 9:1, 7, 출 1:20, 많아지다, 시 139:18
2. 원형
  a.원형 확대되다, 능가하다, 삼상 14:30, 번성하다, 신 30:16, 성장하다, 창 21:20.
  b. 원형 위대해지다, 창 43:34, 욥 33:12, 잠 29:2.
  c. 원형 피엘형 רִבָּה
  d. 원형 증가하다, 늘어나다, 삿 9:29, 시 44:13(12)
  e. 원형 성장하다, 애 2:22, 겔 19:2.
  f. 원형 히필형 הִרְבָּה, 미완료형 יַרְבֶּה, 부정사 절대형 הַרְבָּה, 부정사 연계형  הַרְבּוֹת
  g. 원형 많게 하다, 창 3:16, 사 23:16.
    ㉠ [부사로] 많이, 출 36:5, 삼상 1:12, 왕하 21:6, 시 78:38, 암 4:4.
   ㉡ 많이 주다, 출 30:15.
   ㉢ 많이 지우다, 부담시키다, 창 34:12.
   ㉣ 많이 산출하다, 만들다, 레 11:42, 대상 7:4, 4:27, 8:40, 23:11
  h. 원형 위대하게 만들다, 대상 4:10, 시 18:36(35), 욥 34:37.


충만하라(4390)  마래(mâlêʼ) מָלֵא 
1. 타동사 채우다.  2. 창세기 1:22. 3. 출애굽기 16:32
발음 [ mâlêʼ ]

구약 성경  / 250회 사용

뜻풀이부

1. 원형 타동사 채우다, 가득하게 하다, 메우다, 만족시키다.
  a. 원형 [빈 공간에] 창 1:22, 28, 9:1, 출 40:34, 왕상 8:10,11, 렘 51:11.
  b. 원형 [한 장소를 어떤 것으로] 출 16:32, 렘 16:18, 19:4, 겔 8:17, 28:16, 30:11.
  c. 원형 [채울 대상의 목적격이 뒤따른 경우] 에 7:5, 욥 36:17
2. 원형 자동사: 차다, 충만하다, 가득하다, 창 6:13, 삿 16:27, 욥 32:18, 시 10:7, 26:10, 33:5, 48:11(10), 65:10(9), 사 11:9.
  a. 원형 [앙갚음을 하는 것에 대해 사용] 출 15:9.
  b. 원형 성취되다, 완성되다, 때가 차다, 창 25:24, 29:21, 레 8:33, 12:4,6, 렘 25:34, 애 4:18.
  c. 원형
  d. 원형 니팔형: 차다, 충만하다, 가득하다, 무장되다, 창 6:11, 출 1:7, 7:25, 삼하 23:7, 왕상 7:14, 왕하 3:17, 욥 15:32, 전 6:7, 겔 32:6,
     합 2:14.
  e. 원형 피엘형 מִלָּא ,מִלֵּא 렘51:34, 부정사 מַלֹּאות ,מַלֵּא, 미래형 יִמַלֵּא, 욥8:21, 채우다, 가득하게 하다, 메우다
  f. 원형 채워지는 것의 목적격이 수반되는 경우 ㉠ 위임하다, 넘겨주다, 출28:41, 29:9,레21:10. ㉡ 여호와께 제물을 바치다[‘손을 채우다’], 대상 29:5, 대하 13:9, 29:31. ㉢ 차다[때가], 끝나다, 창29:27, 욥39:2, 단9:2. ㉣ 채우다, 완성하다, 충족시키다, 출23:26, 삼상18:27. ㉤ 영혼을 채우다, 만족시키다, 흡족하게 하다, 충족시키다, 욥38:39, 잠6:30. ㉥ 이행하다, 이루다.㉠ [약속을] 왕상8:15.㉡ [맹세, 서약] 시20:6.㉢ [예언] 왕상2:27. ㉦ 어떤 것을 완전하게 하다, 어떤 일을철저하게 수행하다, 렘4:5
  g. 원형 채우고자 하는 것의 목적격이 수반되는 경우: 퍼붓다, 놓다, 채우다, 삽입하다, 끼워넣다, 두다, 출28:17, 31:5,35:33, 대상12:15, 사65:11.
  h. 원형 채워지는 것과 채우는 것의 목적격이 동시에 수반되는 경우: ~을 ~로 채우다, 출35:35, 욥3:15, 22:18, 사 33:5.
  i. 원형 푸알분사형 מְמֻלָּאִים: 채워진, 가득찬, 아 5:14

정복하라(3533) 카바쉬(kâbash)  כָּבַשׁ   

1. 발로 밟다.  2. 복종시키다. 3. 창세기 1:28.
발음 [ kâbash ]
구약 성경 / 14회 사용

뜻풀이부

1. 원형 발로 밟다, 짓밟다, 발로 뭉개다, 미 7:19
2. 원형 복종시키다, 종속시키다, 강요하다, 속박하다, 정복하다.
  a. 원형 [짐승에 대해] 창 1:28.
  b. 원형 [적이나 노예나 적국에 대해] 민 32:22, 29, 대하 28:10, 렘 34:11, 느 5:5.
3. 원형 폭행을 가하다, 폭행하다, 강간하다[여자를], 에 7:8.
  a. 원형 피엘형 : 복종시키다, 강요하다, 정복하다, 종속시키다, 삼하 8:11.
  b. 원형 니팔형
  c. 원형 복종하다, 강요되다, 정복되다, 민 32:22, 29, 수 18:1
  d. 원형 폭행당하다, 강간당하다, 느 5:5


다스리라(7287) 라다(râdâh)  רָדָה 

1. 짓밟다.  2. 정복하다. 3. 소유
발음 [ râdâh ]
구약 성경  /  25회 사용

뜻풀이부

1. 원형 짓밟다, 밟다, 욜 4:13, [בְּ를 수반하여] 사람을 짓밟다, 시 49:15(14)
2. 원형 정복하다, 통치하다[בְּ를 수반하여], 창 1:28, 레 26:17, 시 68:28(27), 사 14:6, 겔 34:4, [황폐하게 하는 불에 사용되어] 애 1:13.
3. 원형 [비유적으로] 소유, 취하다, 삿 14:9.

* 복을 주시며(וַיְבָרֶךְ - 와예바레크)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에게 복을 주신 것과(22절)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복을 주셨다. 22절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우리 삶의 모든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잘 되도록 인도하시는 것으로 주로 성공, 번영, 다산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셨는데 거기에 더 나아가 다른 존재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한까지 주셨다.

* 정복하라...다스리라(וְכִבְשֻׁהָ וּרְדוּ - 웨키베슈하 우레두)

여기서 '정복하다'(카바쉬)는 '발로 밟다'(슥 9:15; 미 7:19), '복종케 하다'(민 32:22)라는 뜻으로 이 세상의 여러 곳을 다니며 그 곳을 자신의 발로 밟고 삶의 터전으로 삼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다스리다'(라다)는 26절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절대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명령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것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역할을 부여받은 청지기이자 대리 통치자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세상을 잘 관리하고 개발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하고 아름답게 다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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ποιέω 스트롱번호 4160

1. 하다,  2. 제조하다, 3. 행하다
발음 [ pŏiĕō ]

뜻풀이부

  • I. [능동]
    • 1. 하다, 만들다.
      • a. [외적 사물에 대하여] 제조하다, 산출하다, 만들다, 행9:39, 요18:18, 창조하시다, 행7:50, 히1:2, 12:27.
      • b. 행하다, 이루다, 일으키다, 완수하다, 이루다, 준비하다, 요7:21, 8:39, 딤후4:5, 계2:5.
      • c. [이적을] 행하다, 수행하다, 마7:22, 행19:11, 계13:13.
      • d. [상태, 조건을] 이루다, 가져오다, 만들다, 세우다, 일으키다, 롬16:17, 고전10:13, 엡2:15, 약3:18.
      • e. 베풀다, 눅14:12, 요12:2.
      • f. 지키다, 마26:18, 히11:28.
      • g. 내다, 산출하다, 맺다, 마3:10, 눅3:8, 약3:12.
    • 2. [대격+부정사로 표시된 경우]
      • a. ~하도록 만들다, ~하도록 하다, ~ 하게 하다, 마5:32, 막1:17, 눅5:34, 요6:10, 행17:26.
      • b. ~을~이 되게 하다, ~을~으로 만들다, 마4:19, 막11:17, 눅19:46.
    • 3. 지키다, 실행하다, 마7:21, 막3:35, 요4:34, 갈5:3, 계13:12.
      • a. [도덕, 윤리를] 실행하다, 실천하다, 요3:21, 롬3:12.
      • b.범하다, 요8:34, 고후11:7, 벧전2:22.
    • 4. [특수한 표현들]
      • a. 가지다, 얻다, 요4:1, 눅12:33, 16:9.
      • b. 생각하다, 상상하다, 마12:33.
      • c. 지내다, 유하다, 행15:33, 18:23, 20:3, 고후11:25, 약4:13.
    • 5. 행하다, 행동하다, 나아가다, 마12:12, 고전7:37.
    • 6. [단독적으로] 일하다, 활동하다, 마20:12, 계13:5.
  • II. [중간태] 자신을 위하여 ~을 하다, 만들다.
    • 1. [대개의 경우는 단순한 동사 개념을 둘러 말하는 역할을 한다] 행25:17, 빌1:4, 롬13:14.
    • 2. [이중 목적어를 가진 경우] 벧후1:10.


πλύνω 스트롱번호 4150

1. 씻다,  2. 빨다, 3. 눅 5:2
발음 [ plünō ]

뜻풀이부
1. 씻다, 빨다, 눅 5:2, 계 7:14,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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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參考 資料)











이 예언의 말씀을...복이 있나니.

'이 예언의 말씀'은 본서가 예언서임을 나타내는 것으로(10:11;  22:6, 7, 10, 18, 19) 본서의 말씀이 예언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영적, 윤리적 권면과 권고를 포함한 현재적 경고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Johnson).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과 관련하여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이 있음을 기술한다.

읽는 자('호 아나기노스콘)

관사 있는 단수 분사로 초대교회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성경을 읽던 자를 나타낸다.

듣는 자들(호이아쿠온테스)
지키는 자들(테룬테스).

이 두 부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모두 복수로 예언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행하는 회중들을 나타낸다(눅 4:16; 행 13:15, 21; 골 4:16, Johnson, Zahn, Robertson).
요한은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통해서는(느 8:2, 3; 눅 4:16; 행 13:15; 살전 5:27)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이다.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스'는 보편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결정적인 섭리를 나타내는 종말론적 시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승천한 이후부터 다시 오실 재림의 때까지는 인간 편에서 볼 때 항상 임박한 긴장(緊張)의 시간이며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마 24:3-51; 요 21:22, Jo- hnson, Mou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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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가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왜 요한계시록을 ‘복으로 읽어야 하는가?’
그 이유를 먼저 소개합니다.

성경을 산(山)에 비유하면 성경에는 구약이라는 산과 신약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구약이란 산에는 39종류의 나무들이 있고, 신약에는 27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나무들이 우거진 것을 삼림(森林)이라고 합니다.
삼림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수풀 삼(森)’ 자에는 나무(木)가 세 개 있습니다.
또한 ‘수풀 림(林)’ 자에는 나무(木)가 두 개 있습니다.
따라서 삼림이란 성경에는 66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6번째 종류의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삼림에 있는 나무로 읽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요한계시록을 삼림의 나무로 읽거나 해석하지 않고 마치 거대한 산맥(山脈)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요한계시록은 읽는 것도 어렵고 이해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이해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요한계시록을 삼림에 있는 다양한 나무 중 하나라 생각해 봅니다.
다양한 나무들 중에서 공통적인 요소들을 찾는다면 첫 번째가 복(福)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22장 404절로 구성되었는데 복에 관한 말씀이 7번 소개됩니다.
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복과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복의 관계를 찾는다면 삼림에 속한 나무로서 요한계시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福)’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볼 시(示)’ ‘부유할 부(富)’자가 결합한 것으로 복이란 한자의 의미는 “부유한 것을 어떻게 보느냐?” 또는 “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하겠습니다.

저희가 200년 7월 4일에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으로 가족들이 입국했습니다.
그 당시 플러싱에 '다쓰죽' 이란 모임이 한인사회에 있었는데 다쓰죽의 회원이 되려면 승용차의 기준을 Benz라고 합니다.
또한 다쓰죽의 의미는 내가 번 돈은 내가 다 쓰고 죽겠다는 모임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한인 이민자들의 삶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富)를 돈으로 비유하면 ‘돈을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가 형성됩니다.
자본주의는 자기 능력에 따라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 사회를 말합니다.
사회주의는 능력에 따라 수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수입을 모두 합산하여 사람 수대로 배분하여 똑같이 나누는 사회를 말합니다.

공산주의는 돈과 수입만 균등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에 계급이 없다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유지하려면 작은 그룹을 만들고 그 그룹을 대표하는 지도자를 선발합니다.
이렇게 지도자 위에 또 다른 지도자를 세워 나가면 마지막에는 수령이란 최고의 지도자가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수령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공산주의라고 하겠습니다.

복에 대한 견해를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외형적인 복(外形的 福) - 세속적 복

외형적인 복을 세속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부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려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Benz라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독일 교회 초청으로 Benz를 생산하는 도시를 방문했을 때 놀란 것은 Benz를 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을 안내하는 독일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독일 사람들도 Benz 가격이 너무 비싸서 잘 타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파트의 가족들의 수에 맞는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것을 좋아합니다. 옷과 가방 심지어 신발에도 명품이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배가 서울에서 여러 동문들을 만났는데 대부분 50평 아파트에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데 뉴욕으로 돌아와서 자기의 삶을 둘러보며 나는 그동안 미국 생활 40년을 헛살았구나! 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삶이 모두 세속적인 복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이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둘째는 내면적인 복(內面的 福) - 신령한 복, 영적 복

내면적인 복을 신령한 복 또는 영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생각하기를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자 그리고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할 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시며 어리석은 부자를 깨우쳤습니다(누가복음 12:16∼20).

내면적인 복에 대한 교훈을 어느 부자에 대한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어리석은 이유는 내면적인 복이 외면적인 복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복에 대한 두 개의 단어는 ‘베라카(1293. berakah, בְּרָכָה)’ ‘에세르(835. esher, אֶשֶׁר)’ 라고 합니다.

베라카의 복신명기 28:1∼2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베라카’ 라는 복은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할 때 복을 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라카’ 라는 복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에세르의 복시편 1:1∼3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에세르(esher, אֶשֶׁר)’의 복을 시편에서 ‘아쉬레이(אַ֥שְֽׁרֵי)’ 라고 합니다.
아쉬레이(אַ֥שְֽׁרֵי־)는 에세르(אֶשֶׁר)의 복수형입니다.
아쉬레이의 복은 시냇가에서 심은 나무를 말합니다.
이때 시냇가는 복수형으로 하나의 시내가 마르면 또 다른 마르지 않은 시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자연적으로 뿌리를 내린 나무가 아니라 반드시 심은 나무를 말합니다.
복이란 나무가 마르지 않는 시냇가에 심겨진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복을 시편 133:3에서 찾아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구약에서 복(1293. berakah, בְּרָכָה)이란 곧 영생(永生)을 말합니다.
영생의 복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의 복을 요한계시록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복’ 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일곱 구절입니다(1:3, 14:13, 16:15, 19:9, 20:6, 22:7, 22:14).

일곱 구절에 소개된 복에 대한 말씀을 찾는 것이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예언의 그 말씀(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the  words of the prophecy)’ 이라고 합니다.
예언의 말씀이란 성경 전체에 소개된 예언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만 예언하는 제한된 말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이란 곧 요한계시록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언의 말씀이란 주제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5구절입니다(1:3, 22:7, 10, 18, 19).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도 예언의 말씀이란 구절은 오직 요한계시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요한계시록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예언의 말씀이 강조하는 내용은 ‘속히 오리라’ ‘가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속히’ 라는 단어가 8구절에 소개 됩니다(1:1, 2:16, 3:11, 11:14, 22:6, 7, 12, 20).

속히 - tachos(τάχος), tachu(ταχύ) 
- (영적 의미) 반드시
- (시간적 의미) 빨리  

1. 1:1, 속히 될 일 - τάχει, quickness, 5034. tachos(τάχος) 
2. 2:16, 속히 임하여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3. 3:11, 속히 임하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4. 11:14, 속히 이르는도다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5. 22:6, 속히 될 일 - τάχει. quickness, 5034. tachos(τάχος)  
6. 22:7, 속히 오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7. 22:12, 속히 오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8. 22:20, 속히 오리라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예언의 말씀이 강조하는 내용은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은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움이니라.

때가 가깝다는 것을 ‘마지막 때’ 라고 합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의 특징을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때’ 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따라서 오늘날을 마지막 시대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자다가 깰 때는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진 때를 말합니다.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어리석은 예언

18세기에 영국 복음주의 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은 요한 웨슬리(John Wesley)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입니다. 조지 휫필드는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영국과 미국을 13번 왕래하면서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는데, 어느 날그의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너무나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살려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죽고 말았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같은 유명한 설교자일지라도 때로는 자기 생각과 판단에 따라 예언하면 틀린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그 충격으로 인하여 6개월 동안 설교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기도하다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언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면 안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성경의 한 부분으로 마지막 이루어질 것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무섭다거나 공포 분위기를 제공하는 말씀이 아니라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하고 격려하므로 이기도록 돕는 말씀으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Ⅱ(요한계시록 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성경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복은 ‘영생(永生)’입니다.
영생이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죽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부활의 때에 다시 살아날 줄 믿는다고 고백했던 마르다에게 분부하신 말씀입니다.   


영생이란?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유토피아(Utopia)라는 저서를 남긴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 2. 7~1535. 7. 6)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왕에게 항복하라고 그를 졸랐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꽃 같은 나이에 당신과 우리 가족에게 가장 비극적인 불행을 가져오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모어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최소한 20년은 사실 거예요.”
그러자 그는 소리쳤습니다.
“이 땅에서의 20년밖에 안 되는 삶을 위하여, 내가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고통에 나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소?”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이란 제목으로 두 번째 설교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소개했던 설교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산(山)에 비유할 때 구약이란 산에는 39종류의 나무가 자라고 있고, 신약이란 산에는 27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많이 우거진 곳을 삼림(森林)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다양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삼림(森林)과 같습니다.
삼림(森林)이란 한자에는 수풀 삼(森)자에 나무 목(木)자가 세 개 사용되었고,
수풀 림(林)자에는 나무 목(木)자가 두 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이란 삼림에 속한  요한계시록은 삼림의 나무들 중에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요한계시록을 삼림 속에 있는 나무라고 해석하지 않고 많은 높은 산들이 줄지어 있는 산맥(山脈)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결과 산맥(山脈)은 아주 높고 험준한 곳이기에 요한계시록을 특별한 은사를 받은 교주만이 해석할 수 있다고 강조되었으며 심지어 특정한 교파에 가입해야만 마지막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삼림(山脈)의 한 나무처럼 성경의 줄기에 따라 한 주제로 읽을 때 요한계시록은 어렵고 난해한 말씀이 아니라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약속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로 읽는 첫 번째 방법은 ‘복(福)’이란 주제로 읽는 것입니다.

복(福)이란 한자는 볼 시(示)와 부요할 부(富)가 결합한 단어로
“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또는 “부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부(富)’의 기준을 “돈” “자동차” “집”과 같은 외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세속적인 복”과 “내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신령한 복”으로 구분합니다.

구약에서 복이란 두 단어 ‘베라카(신명기 28:1∼2)’와 ‘에제르(시편 23:1∼3)’는 “순종의 복”을 말합니다.
순종하는 약속의 백성들은 뛰어난 민족이 될 것이며 마치 마르지 않는 시냇가(복수)에 심어진 나무처럼 그 뿌리가 마르지 않는 물가에 심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복은 영생(永生)입니다(시편 133:3).
영생의 복은 예수를 믿음으로 얻습니다(요한복음 3:16).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3).

예언의 말씀이란 그 예언의 그 말씀(요한계시록 1:3, 22:7, 10, 18, 19)을 말합니다.

예언의 말씀의 내용은 ‘속히 오리라! 가감하지 말라!’고 합니다.
‘속히(1:1, 2:16, 3:11, 11:14, 22:6, 7, 12, 20)’ 라는 말은 시간적인 의미보다는 영적 의미로 “반드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두 번째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1장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으로 소개된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특징을 세 가지 모습 즉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생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을 누리기 위해서 예언의 말씀 속히 오시리라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위한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읽는 자, 둘째는 듣는 자들, 셋째는 지키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첫째, 읽는 자(아나기노스콘, ἀναγινώσκων)

본문에서 ‘읽는 자’는 두루마리의 말씀을 회당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전문적으로 읽는 낭독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경을 읽는 자를 말합니다. 성경을 문자로만 읽는 것이 아닙니다.

1. 확실하게 아는 것(to know certainly)
2. 다시 아는 것(know again)
3. 인식하는 것(recognize), 알아차리는 것(discern)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각종 상징과 숫자들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입니다. 만일 상징과 숫자들과 인과 나팔과 대접의 의미는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결론을 모르거나 지나쳐 버린다면 큰 실수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해외여행이 한창일 때 가이드가 신신당부하기를 많은 관광객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항상 가이드가 들고 있는 깃발을 보고 따라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에게 이번 여행이 어떠했느냐? 하고 물었을 때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외국 땅에서 가이드가 들고 다니는 깃발만 보도 따라다녔기 때문에 아무 것도 기억이 없다고 했다는 우스개 이야기처럼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가 상징과 숫자와 인과 나팔과 대접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잃어버린다면 그 결과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며(창 1:1), 창조한 세상을 심판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22:20).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성경에서 예언의 결론은 '마라나타'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믿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복으로 읽는다는 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믿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듣는 자(아쿠온테스, ἀκούοντες)

본문에서 듣는 자는 문법적으로 복수형입니다. 읽는 자는 한 사람이지만 듣는 사람은 여러 사람입니다. 회당의 예배는 성인 남자 10명 이상이 모였을 때에 예배가 시작되었으므로 최소한 10명 이상이 듣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1. 이해하는 것(to understanding)
2. 가르칠 수 있는 것(to teaching)

교육심리학에서는 죄(罪)에 대한 정의가 아주 새롭습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을 모르면서 특히 요한계시록을 모르면서 읽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의 진리를 알았으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씀 처럼 다시 오실 심판의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깨우쳐야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

알면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는 것은 내 안에 머물지만 행하는 것은 내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을 안다고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겠습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달은 후에는 아직도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 무렵 함께 유하려고 어느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그 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을 눈이 밝아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주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님이 보이기 시작하면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말씀은 실천하기 위하여 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많은 말씀들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로 가르치실 때 사용하셨던 ‘들으라’ 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들으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이미 증거 된 가르침들 즉 구약의 말씀에 대해서 실천하기 위해서 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마가복음 4:3∼9).

셋째, 지키는 자(테룬테스, τηροῦντες) 

테룬테스(τηροῦντες)는 테레오(τηρέω)의 복수형으로 ‘지키는 것’ 그리고 ‘감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키는 자는 물론 예언의 말씀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감시해야 합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잘못 전달되거나 가르치는 것을 감시하고 그와 같은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도록 생명을 사랑하고 영혼을 감시하는 책임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에 무당(巫堂)의 수가 대략 30만 명이라고 하며 무당에 의해서 창출되는 년 간 금액이 무려 6조원이라고 합니다. 교인의 수가 1,200만 목사의 수가 6만이라고 하는데 교인들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어떻게 한국사회가 이렇게 무당의 수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을까요?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책임을 교회가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약속하신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한계시록은 읽고 듣고 지키므로 복을 누립니다. 해석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들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7에서 지키는 것에 대한 복을 강조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지킨다는 말은 실천한다는 뜻도 있지만 그 말씀을 변질되지 않도록 없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이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영생의 복을 누리기 위하여 그 예언의 그 말씀 곧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합니다.

티벳 사람들의 종교는 라마 불교라고 합니다. 티벳 사람들은 라마 불교의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를 모른다고 합니다. 티벳의 불자들이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 사원 주위에 ‘마니차(摩尼車་)’ 라는 불교 도구를 만들어 놓습니다. ‘마니차’란 원통형 모양으로 표면에는 ‘만트라’가 새겨져 있고, 내부에는 롤로 경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마니차의 크기는 다양하여 손에 쥘 수 있는 크기부터 큰 것은 몇 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둥근 원통 마니차를 손으로 돌리면 한 번 읽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라는 마니차를 한번 돌리면 창세기를 한 번 읽는 것입니다. 두 번 돌리면 두 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니차를 돌리기만 하기 때문에 경전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도로에서 자동차 뒤에 성경 찬송을 얹어놓고 다니는 운전자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찬송을 마치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소원하는 부적과 같이 사용한다면 이런 것도 기독교식 마니차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지 않고 듣지도 않으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永生)의 복(福)을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복이란 주제로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영원한 삶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Ⅲ(요한계시록 14: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Ⅲ(요한계시록 14:13)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복(福)”이란 ‘볼 시(示)’와 ‘부요할 부(富)’
- 부(돈, 재물, 부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신명기의 복 - 베라카(28:1∼2)
시편의 복 - 에제르(1:1∼3) ☞ (복수형) 아쉬레이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약속된 복은 '순종'입니다.
순종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민족이 될 것이며,
마치 마르지 않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주로 물질적인 것을 기준으로 복을 결정한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다.

마태복음 5:3∼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요한계시록에서 증거 하는 일곱 가지 복

1st.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의 복(1:3)
2nd. 주 안에서 죽는 자의 복(14:13)
3rd. 자기의 옷을 지키는 자의 복(16:15)
4th.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자의 복(19:9)
5th.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의 복(20:6) 
6th.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22:7)
7th. 예수의 피로 두루마기를 빠는 자의 복(22:14)

모든 복의 기초는 영생(永生)입니다(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들어야 할 소리와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들어야 할 소리를 ‘하늘의 소리’라고 한다면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땅의 소리’라고 하겠습니다.

최초로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가 충돌한 사건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2:16∼17)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사탄(뱀)은 여자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창세기 3:1b∼6).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이때 여자가 사탄(뱀)에게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사탄(뱀)은 여자에게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라고 여자의 말에 더욱 강한 부정적인 생각을 강요합니다.

이때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는 순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고, 심지어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나타났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가 충돌했을 때 여자는 땅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 아담은 여자로부터 “내가 먼저 먹었는데 이렇게 죽지 않았어요.” 라는 땅의 소리를 듣습니다. 아담은 여자가 들려주는 땅의 소리를 듣고 그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류가 받은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고 주리셨을 때 다시 사탄이 찾아와서 땅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사탄은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돌을 빵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며 땅의 소리로 유혹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 이라고 또다시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를 함께 들려주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또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사탄이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땅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둘째 아담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우렸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땅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좋으냐? 돈만 있으면 마음대로 편리하게 먹을 수 있고 다닐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쉴 수 있고 이런 세상을 구경 못한 옛날 사람들이 참 불행하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땅의 소리는 세상을 즐기려고 합니다. 반면에 하늘의 소리는 하나님을 즐기려고 합니다.

오늘 요한계시록의 말씀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여기서 주 안에서(in christ) 죽는 자들을 헬라어 성경에서 “호이 네크로이 호이 엔 쿠리오 아포드네스콘테스(οἱ νεκροὶ οἱ ἐν Κυρίῳ ἀποθνῄσκοντες)” 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문맥상으로 볼 때는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성도들과 순교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기는 성도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계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그러나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누구일까요?

첫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두 강도들이 함께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때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다른 한 강도는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는다는 믿음을 갖고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해도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입니다(마태복음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둘째,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후에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빌레몬서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오네시모는 태어날 때부터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빌레몬이란 주인의 집에서 종으로 살아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며 자기 삶을 정리하고 주인처럼 살아보려고 주인집에서 몰래 귀중한 물건을 들고 도망쳤습니다. 오네시모가 도망하여 세상을 나름대로 잘 살아보려고 했지만 그만 붙잡혀서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네시모가 갇힌 감옥에 사도 바울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서 어떻게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듣게 됩니다. 놀랍게도 오네시모의 주인이 빌레몬이란 사실을 알고 오네시모가 감방에서 나갈 때 편지 한 장을 써서 오네시모에게 주며 이것을 갖고 빌레몬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당시 종이 주인집에서 물건을 훔쳐 도망하다가 붙잡힐 경우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주인 빌레몬에게 이제부터는 너희 집의 종이 아니라 형제로 인정하고 만일 오네시모가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사도 바울이 모두 갚아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렇게 오네시모는 예수를 영접한 후에 그의 삶은 빌레몬과 동등한 믿음의 형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죄의 종으로 붙잡혀 죽음의 노예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동안에 우리가 힘써야 할 삶은 주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즐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행동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야고보서 2:17, 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리고 성경에서는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을 가리켜 잠을 자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은 잠에서 깨어날 사람입니다(요한복음 11:10)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은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왜냐하면 베다니 마을에서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을 만큼 소문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제자들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나사로가 잠자는 것이라면 그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나사라고 죽었으나 그는 잠을 자고 있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 안에서
- 디아 투 이에수(διὰ τοῦ Ἰησοῦ) through Jesus

예수 안에서 라고 번역된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라는 뜻입니다.

에스커위드(Askwith)라는 신학자는 '예수로 말미암아' 라는 것을 "예수를 믿다가 죽은 자들과 부활하신 예수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구약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주 안에서 죽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철저하게 자기 사랑을 버리고 이웃 사랑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살았던 사람들을 성령께서 위로하십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주 안에서 죽는 신앙의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에 대한 공식적인 메시아 선언이 드러난 후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실예)

주 안에서 죽는다는 말씀의 의미

단순하게 교회에 다니거나 예수 믿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 보면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한 13장에 보면 강한 권력과 권세를 가진 짐승이 등장합니다. 짐승이 갖고 있는 강력한 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짐승을 따라갑니다. 만일 이 짐승을 따르지 않는다면 삶이 고달프고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사로잡힐 수 있고, 칼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북한에서 먹을 것이 없어 중국으로 무작정 건너와 어느 교회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먹으며 예수를 영접한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젊은이가 예수를 영접한 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북한에 들어가서 공안에 붙잡혔습니다. 젊은이를 신문하던 공안에게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를 설명했습니다.

북한이 이처럼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이렇게 세습하며 그들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자 공안은 젊은이의 이야기에 동의하면서도 젊은이가 북한에서 가장 싫어하는 기독교 사상을 고집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살려주려고 수용소보다는 임시보호소와 같은 곳으로 보내려고 할 때 젊은이는 아닙니다. 수용소로 보내주시면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죽겠습니다. 결국 수용소로 보내진 젊은이가 얼마 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면 젊은이가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아직도 북한 땅에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했답니다.

이런 젊은이의 삶이 주 안에서 수고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Ⅳ(요한계시록 16: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Ⅳ(요한계시록 16:15)

- 자기 옷을 지키는 자의 복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Behold, I come like a thief! Blessed is he who stays awake and keeps his clothes with him, so that he may not go naked and be shamefully exposed. 

믿음(信)이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다!”

광복 74주년 기념 주일을 맞이하며 오늘의 시대를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국가관이 마구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국회의원은 애국가를 부르지 말자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대통령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설마 하며 동영상을 관심을 갖고 동영상을 보는데 대통령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태극기에 경례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라도 믿음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선다면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성도가 있고 교회가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조국을 긍휼히 여길 것입니다.

의식주(衣食住. 옷 衣, 밥 食, 살 住)란 “사람이 생활하는 데 기본이 되는 옷과 음식과 집”을 말합니다. 왜 사람은 옷과 밥과 집이 필요할까요?

첫 사람 아담은 옷과 음식과 집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상을 “에덴”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에 에덴에서 쫓겨나므로 그때부터는 옷과 음식과 집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이 세상에서는 옷과 음식과 집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을 어떻게 얻고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은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일곱 가지 복에 대한 말씀 중에서 세 번째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일곱 가지 복에 대한 말씀을 함께 기억하려고 코팅 복사하여 주보와 함께 나눠드렸습니다(Laminate). 다음 주일부터 일곱 개의 성구를 암기하신 교우들에게는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함께 나눴던 성구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지키다(테레오, τηρέω. 5083. téreó)는 단어는 단순히 지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다(to watch over)' 또는 '경계하다(to guard)'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복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수고를 그치고 안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슬퍼하기 때문에 죽은 후에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는 죽은 조상에게 음식을 차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후손들은 하루 세 끼씩 식사를 하면서 조상들을 위한다며 일 년에 단 한 차례 제사를 드리며 음식을 차려주는 것이 과연 효도하는 것일까요?

기독교 신앙은 죽은 후에 슬퍼하며 효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에 더 잘 모시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소개할 말씀 요한계시록 16장 15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정상적인 사람은 옷을 벗고 다니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여 각 가정을 심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예정된 모든 가정들을 심방하며 마지막 한 가정이 남았습니다. 그 집에 도착하였을 때 집안에서는 분명히 누군가 있는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을 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심방을 왔다가 돌아간다는 표시로 요한계시록 3장 20절이란 성구를 적은 메모를 남기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며칠 후 목사님이 사무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에 지난 번 심방 때에 남겨둔 메모가 사무실에 붙어 있었는데 그 메모지 아래에 창세기 3장 10절이란 성구가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에 그들은 벗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죄를 지은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옷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옷, 흰 옷, 피 뿌린 옷, 세마포, 붉은 옷, 두루마기”와 같이 다양하게 소개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히마티온, 스톨래, 리논, 부시논 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옷이란 몸을 보호하는 기능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로 사용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옷의 의미는 기능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4∼5절을 찾겠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사데 교회를 향한 말씀 중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 몇 사람이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라고 합니다.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의미를 요한계시록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옳은 행실(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요한계시록 7:13∼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옷의 기능적인 의미만 생각한다면 구태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과 가죽옷의 차이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하나님의 방법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의 결과이므로 죄를 감추려고 옷을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옷이란 죄를 감추기 위하여 인간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을까요? 가죽옷을 만들려면 반드시 짐승을 죽여야 합니다. 짐승을 죽이려면 피가 흘러나옵니다. 성경에서 피가 상징하는 것은 생명과 용서라고 합니다.

첫째는 피는 생명(신명기 12:23)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노아 홍수 사건 후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홍수 이전에는 사람들의 식물은 오직 채소 위주의 식단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후에 살아있는 동물을 식물로 주시면서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창 9:4).

둘째는 피는 용서(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가죽옷이란 죄를 지은 사람이 흘려야 할 피를 짐승이 대신 피를 흘림으로 죄를 지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가죽옷으로 약속한 용서의 은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어야 할 옷을 구원의 옷과 의의 옷이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구원의 옷이란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만들어 입었던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과 같이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서 입혀주셨던 가죽옷 즉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해결 받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의 옷과 의의 옷으로 계시된 약속은 오랫동안 짐승의 희생 제사로 그 약속을 지켜왔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마지막에는 홍포를 입은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홍포를 입으셨던 예수님

요셉은 어려서부터 채색옷을 입고 자랐습니다.
사사 시대에 미디안 왕들은 자섹 옷을 입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었습니다.
벨사살 왕은 다니엘에게 자색 옷을 입혀 줄 것이라고 여러 차례 약속했습니다.

서양 속담에 “자주색에서 태어났다(Born in the purple)” 이란 말은 고귀한 혈통, 부유한 가문에서 탄생했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요즈음 말로는 ‘금수저’ 라고 하겠습니다. 
고대에는 색깔 있는 옷 특히 자주색으로 염색한 옷은 그 엄청난 가격과 염색과정의 어려움 때문에 최고급 옷감으로 인정되었고 곧 권위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자주색 옷을 입혔습니다. 만왕의 왕이라고 존경한 것이 아니라 조롱하려고 입힌 것입니다. 그러나 조롱의 옷은 결국 영광스런 세마포 흰옷으로 드러났습니다.

가죽옷을 구원의 옷과 의의 옷으로 완성하시려고 십자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서 옷에 대한 신앙의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깨어' 라는 헬라 단어는 '그래고레오' 라고 합니다.
'그래고레오'란 '잠들지 않고 지켜보는 것'을 말합니다(awake).
'그래고레오'란 '관심을 갖고 주시하는 것'을 말합니다(watch).

왜 깨어 있어야 합니까?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적이 오는 날짜를 통보하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대만의 장개석 총통은 “예수님은 간첩과 같이 오신다!”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도적같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잠들지 않고 지켜보고 있어야 합니다. 관심을 갖고 주시해야 합니다.

자기 옷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의 옷은 어느 교주가 어느 교단이 어느 교회가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 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허락하십니다.

요한계시록 7장은 하나님의 인을 맞은 144,000에 대한 말씀입니다.

7장 10절에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요한계시록 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가죽옷은 구원의 옷으로 의의 겉옷으로 이어져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세마포 즉 옳은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 옳은 행실은 부자 청년과 같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모두 지켰기 때문에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부족한 것 즉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후에 얻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도적 같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도적같이 온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그 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깨어 있으라고 하셨을까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42∼43a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기도하므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누가복은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깨어 있는 자에게 약속된 것은 무엇일까요?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왜 깨어 있어야 할까요?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요한계시록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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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3:4, 7:14, 19:16 ) - 히마티온
- ἱμάτια, στολὰς, ἱμάτιον   

흰 옷(3:4∼5, 3:18, 4:4, 7:9, 7:13∼14, cf 행 1:10) - 스톨래

피 뿌린 옷(19:13) - 히마티온(ἱμάτιον)

세마포(15:6, 18:12, 18:16, 19:8, 19:14) - 리논

붉은 옷(18:16) - βύσσινον.

두루마기(6:11, 22:14) - 스톨래

헬라어에 의한 옷의 분류(히마티온, 스톨래, 리논)

헬라어

장절

히마티온

3:4, 3:18, 4:4, 19:13,

스톨래

7:9, 7:13, 7:14,

리논

19:14(βύσσινον) 


3:4(옷) ἱμάτια, 2440. himation
3:4(흰 옷) λευκοῖς, 3022. leukos 
3:18(흰 옷) ἱμάτια λευκὰ, 2440. 3022

4:4(흰 옷) ἱματίοις λευκοῖς, 2440. 3022 

6:11(흰 두루마기) στολὴ λευκή 4749. 3022

7:9(흰 옷) στολὰς λευκάς, 4749. 3022
- στολή, 4749. stolé    
7:13(흰 옷) στολὰς τὰς λευκὰς. 4749. 3588. 3022 
7:14(옷) στολὰς, στολή, 4749. stolé   
- ἐλεύκαναν.  λευκαίνω  3021. leukainó(to make white)

15:6(세마포) λίνον. λίνον 3043. linon 

18:12(세마포) βυσσίνου. 1039 
18:16(세마포) βύσσινον. 1039 
18:16(붉은 옷) κόκκινον,  κόκκινος 2847. kokkinos      

19:8(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βύσσινον, 1039. bussinos 
19:13(피 뿌린 옷) ἱμάτιον, 2440. himation   
19:14(희고 깨끗한 세마포) βύσσινος, 1039. bussinos 

옷에 대한 세속적인 기능과 성경적인 기능은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족장 시대에 요셉은 어려서부터 채색옷을 입고 자랐습니다. 채색옷이란 물론 가장 좋은 옷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셉 시대에는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녀에게 구별하여 입혀주는 옷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사사 시대에는 미디안 왕들이 자색옷을 입었습니다.

사사기 8:26,
기드온의 청한 바 금귀고리 중수가 금 일천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새 달 형상의 장식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의 입었던 자색 의복과 그 약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모르드개는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었습니다.

에스더 8:15,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면류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왕의 앞에서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에스겔 23:6,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방백과 감독이요 준수한 소년, 말 타는 자들이라.

 

다니엘에게 벨사살 왕이 몇 번이나 약속합니다. 자주옷을 입히겠다는 것입니다. 즉 자주옷은 권력과 성공의 상징이었습니다.

다니엘 5:7,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참조 / 다니엘 5:16, 29,

자색옷의 의미를 설명하는 서구사회에서 사용하는 문장을 소개합니다.

‘Born in the purple.’

문자 그대로 하면 “자주색에서 태어났다.” 라는 뜻인데 고귀한 혈통, 부유한 가문에서 탄생했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요즈음 말로는 ‘금수저’ 라고 하겠습니다. 

고대에는 색깔 있는 옷 특히 자주색으로 염색한 옷은 그 엄청난 가격과 염색과정의 어려움 때문에 최고급 옷감으로 인정되었고 곧 권위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지중해 전역과 그 주변에선 자주색과 붉은 색은 권력과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도 자주색 옷을 입었다, 입힌다함은 왕권이나 최고의 권력과 부유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음식을 대신하였고 약대털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연인이란 세속사회와 단절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에쎄네파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에쎄네파에 속한 사람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완전히 중립을 지키려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로마 군병들에 의해서 홍포를 입었습니다. 홍포란 당시 황제들이 입는 지배자의 옷을 말합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셨다고 말했기 때문에 홍포를 입힌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도 자색옷을 입었습니다.

누가복음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때에 예수님을 모독하기 위해 입힌 옷도 황제권을 상징하는 자주색 옷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5: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로마시대 때 자주색은 황제 자주(imperial purple)라고 해 오직 황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색이었습니다.

황실 자주색 옷은 기원전 16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이 티레 지방 특산 소라고둥으로 염색을 했다고 해서 티레 자주(Tyrian purple)라고도 불렸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염료를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헤라클레스였는대, 헤라클레스는 조개를 씹어 먹은 자기 개의 주둥이가 자주색으로 물든 것을 보고 염료 물질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도적 같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도적같이 온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그 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깨어 있으라고 하셨을까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42∼43a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기도하므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누가복은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깨어 있는 자에게 약속된 것은 무엇일까요?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왜 깨어 있어야 할까요?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요한계시록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도입 이야기)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여 각 가정을 심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예정된 모든 가정들을 심방하고 마지막 한 가정이 남았습니다.
그 집에 도착하였을 때 집안에서는 분명히 누군가 있었는데도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을 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심방 왔다가 돌아간다는 표시로 요한계시록 3장 20절이란 성구를 적어놓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 주간에 주일 예배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지난 번 심방 때에 왔다가 돌아갔다는 표시로 적어준 메모지가 사무실에 붙어 있었는데 그 메모지 아래에 창세기 3장 10절이란 성구가 적혀있었습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옷에 대한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옷에 대한 명칭이 다양합니다.
교복(校服), 제복(制服), 군복(軍服), 예복(禮服), 법복(法服), 아동복(兒童服), 여성복(女性服), 우주복(宇宙服) 등과 같이 사용합니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Ⅴ(요한계시록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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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19:9) 


-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 자의 복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어린 양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양(羊)입니다.

☞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어린 양의 신부는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 신부(νύμφην) - 눔패(νύμφη), 3565. numphé. a bride, a young woman     

* 아내(γυναῖκα) - 구내(γυνή), 1135. guné. a woman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의 아내는 교회를 말합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 22절을 읽겠습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6, 27절을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새 예루살렘은 교회를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 교회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새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들입니다. 따라서 어린 양의 아내는 교회이며 그 교회는 예수님만을 믿고 예수님만을 살아가는 성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묵시문학으로 기록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면 혼인에 대한 유대인의 풍속을 알아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의미를 신앙적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개역한글 성경 요한계시록에 '아내'라는 단어가 19장 7절(구네, γυνή)과 21장 9절(눔패, νύμφη) 두 번 소개됩니다.

요한계시록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 아내(γυνὴ) - γυνή, 1135. guné

현대인의 성경, 새번역 성경,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모두 '신부' 라고 번역합니다.

구네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에게 여자여(γύναι)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말했을 때 '여자여!' 라는 단어를 '구나이' 라고 합니다. 이때 '구나이'는 아내가 아니라 '부인이여!' 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 아내(νύμφην) - νύμφη, 3565. numphé, 젊은 아내, 부인

유대인의 결혼 절차
- 유대인의 결혼 풍속은 정혼(定婚)과 결혼(結婚)과 동거(同居)라는 삼단계로 진행됩니다.

첫 번째 단계, 정혼(定婚)

남자가 여자의 집에 증인과 함께 세 가지 예물을 갖고 찾아갑니다. 세 가지 예물이란 서약서와 포도주와 은금을 말합니다. 먼저 남자가 여자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딸과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청혼을 합니다. 이때 아버지가 딸에게 청혼을 받아드리겠느냐? 하고 묻습니다. 딸이 청혼을 받아드리면 포도주 한 잔을 따라주고 딸이 반잔을 마신 후에 청혼 서약서 위에 포도주 몇 방울을 떨어트린 후 나머지 잔을 남자가 마신 후에 은금을 딸의 아버지에게 드립니다.

이때 신부의 아버지는 뿔 나팔을 불어 온 동네에 정혼을 알리며 아버지가 딸과 남자에게 축복합니다. 이것을 정혼(定婚)이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 마태복음 1장 18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정혼(μνηστευθείσης) - μνηστεύω. 3423. mnésteuó,
to espouse(옹호하다, 지지하다), betroth(정혼하다)  
  
* 동거(συνελθεῖν) - συνέρχομαι. 4905. sunerchomai,
to come together(함께하다), to accompany(동행하다)       

두 번째 단계는 결혼(結婚)

정혼의 단계를 마치면 여자는 친정집에서 신부 수업을 받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로부터 1년 동안 신랑 수업을 받으며 신부와 함께 기거할 집을 짓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던 말씀에 해당합니다(요한복음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집(οἰκίᾳ) -  οἰκία, 3614. oikia.  a house, dwelling      
* 거할 곳(μοναὶ) -  μονή,  3438. moné. an abiding, an abode    
* 처소(τόπον) - τόπος, 5117. topos.  a place      

세 번째 단계는 동거(同居)

신랑이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신랑 수업을 받으며 신부와 함께 거주할 집을 짓고 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제는 신부를 데려올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면 아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이제 가서 신부를 데려오라'고 하면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을 찾아갑니다. 신부를 데리러 가는 날은 아들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가 결정하므로 아들 즉 신랑도 모릅니다(마태복음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오직 아버지만이 아시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고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친구들과 신부의 집에 갈 때 동네 입구에서 큰 소리로 신랑의 친구들을 신부의 집을 향해 신랑을 맞이하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신부를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돌아오면 두 번째 결혼 계약을 합니다. 이때 계약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을 약속하며 신랑이 신부에게 징표를 줍니다. 그리고 첫 날밤을 지냅니다. 첫날밤을 지낸 후 아침에 신랑은 문을 열고 '신부는 순결하였다!' 라고 외치면 일주일 동안 혼인잔치가 시작됩니다.

가나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부족했다는 것은 가장 즐겁고 기쁜 날 함께 마실 포도주가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포도주는 피의 언약을 상징합니다.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혼인 언약이 없다는 것으로 신랑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끊어진 언약 관계를 회복시키셨다는 것이며 이것을 표적(表迹) 이라고 합니다. 표적은 기적(奇蹟)과 다른 것으로 기적은 단순히 놀라운 사건이지만 표적은 놀라운 사건 속에 감추어진 구속의 진리와 은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맥을 살펴보면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라는 말씀은 아직 혼인 잔치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아내" 라고 부르는 것은 정혼 단계에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각각 각자의 집에서 신랑 수업과 신부 수업을 잘 받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신랑의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혼인 기약이 이르렀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내를 데려오라고 말할 때 비로써 세마포를 입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를 입게 하였다는 말씀은 드디어 신랑이 아버지로부터 신부를 데려올 그 날을 알려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말하기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기록하라고 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라고 합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다는 것이 참된 말씀입니다.

어느 교주와 교파와 교회에 등록하고 받아주는 것이 복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어린 양 혼인 잔치가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라는 찬송의 가사를 작사했던 존 뉴턴 목사님의 간증을 기억하십니까?

어느 날 존 뉴턴 목사님이 천국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면서 평소에 궁금했던 세 가지 질문이 있었는데 첫째는 세상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성도들의 모습을 천국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둘째는 신앙생활을 저런 식으로 한다면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고 염려했던 사람들에 대한 모습 그리고 세 번째는 과연 나와 같은 죄인을 천국에서 받아주실까 하는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기에 세 가지 의문에 대해서 확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확인한 후 세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성도들을 천국에서 만나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앙생활을 저렇게 하면 안 될 텐데 하고 염려했던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나와 같은 죄인의 이름도 천국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 혼인 잔치란 어린 양이신 부활하여 승천하였던 예수님께서 신랑으로 다시 오실 때 주를 믿던 성도들이 신부로서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리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가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사람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 확증하며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없음을 어느 누구도 판단할 수 없지만 내가 내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시험하고 확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정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입니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확실하게 갖고 있습니까? 그것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던 나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셨고 일찍부터 예수님을 믿고 섬김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고 그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만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마태복음 22:1∼13,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예복(禮服, ἔνδυμα γάμου)을 준비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2:11∼12,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 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 예복(禮服, ἔνδυμα γάμου) 
- ἔνδυμα. 1742. enduma.  apparel
- γάμος. 1062. gamos. a wedding 
   
예복(禮服)이란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입는 옷을 말합니다(ἔνδυμα γάμου).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세마포(βύσσινος)를 말합니다.

세마포를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세마포(βύσσινον) - βύσσινος. 1039. bussinos,  fine linen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부자 청년처럼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옷(στολὰς) - στολή. 4749. stolé,  equipment(장비), apparel(의류) 

예복이란 일상생활을 위하여 입는 옷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참여할 때 반드시 검증해야 할 옷으로 의복(衣服)이 아니라 행실(行實)을 말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어느 교주도 교파도 교회도 옳다고 인정받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양의 피 십자가 보혈을 내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신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요약합니다.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만 청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의 일에 얽매여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참여한 사람들 중에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입으로는 믿고 마음으로 믿지 못한 사람은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으셨습니까?
초청장을 받았으면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으로 내게 맡겨진 믿음의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여 모두가 잔치 자리에서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 찬송 162장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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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Ⅵ(요한계시록 20:6)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Ⅵ(요한계시록 20:6)


-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의 복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요한계시록 19장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양은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이 이십니다. 신부는 예수님이 주인 되신 교회이며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가 동일한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에서 모든 교회에 공통된 말씀은 두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교회
둘째는 예수 이름으로 승리하는 교회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신 교회는 반드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신 교회는 반드시 예수 이름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 몇 가지 중요한 용어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첫째는 첫째 부활(復活)
둘째는 둘째 사망(死亡)
셋째는 천년왕국(千年王國)

먼저 이러한 용어들을 정리하기 전에 구원에 대한 믿음을 성경적으로 확실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믿음입니까? 아니면 행위입니까?
믿음에 의한 것을 구속론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행위에 의한 것을 도덕론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속론적(救贖論的, redemptional)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속론적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께 죄 값으로 지불되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론적 구원이란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신앙입니다. 

도덕론적(道德論的, ethical) 구원이란 무엇인가?

도덕론적 구원이란 믿음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위(行爲)가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도덕론적 구원이란 모든 종교에 적용되는 보편적 속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즈음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하는 것은 다른 종교를 무시하고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기독교를 편협한 종교라고 하기 때문에 종교다원화주의와 같은 사상이 유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진리는 변질 될 수 없으므로 오직 예수의 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구원에 대한 혼돈과 갈등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구속론적 구원인가 아니면 도덕론적 구원인가를 서로 혼합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느냐? 라는 질문은 마치 구원을 도덕론적 구원의 근거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한번 받은 구원은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은 구속론적 구원의 근거에 의하여 사람이 선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기 때문에 사람의 행위가 구원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속론적 구원을 근거로 오늘의 말씀을 살펴보면 첫째부활과 둘째사망과 천년왕국이란 개념을 잘 몰라도 분명히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과 천년 왕국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부활(復活)이란 무엇인가?

첫째 부활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첫째 부활에 관한 성구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부활이란 용어를 20장 5절과 6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5∼6,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이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둘째 사망의 해는 무엇일까요?
둘째 사망(死亡)이란 용어가 2:11, 20:6, 14, 21:18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에서 ‘둘째 사망’이란 불못에 던져지는 것을 말합니다.
불못이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을 말합니다(21:8).
불못에 던져지는 것들은 사망과 음부(20:14) 그리고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않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숭배자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21:8).

흔히 ‘지옥(地獄)’을 마치 “유황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전에서 정의하는 지옥(地獄)이란 “아주 괴롭거나 더없이 참담한 환경이나 형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현실에서 악한 일을 한 사람이 죽어서간다고 하는 세계.” “큰 죄를 짓고 죽은 사람이 그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악마와 함께 영원히 벌을 받는다고 하는 곳.” 이라고 합니다.

첫째 부활이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예수님께서 재림의 심판주로 오셨을 때 유황불 못에 던져지는 것은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첫째 사망은 육신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무엇인가?

‘천년(千年)’이란 단어가 한글개역성경에서 9번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시편에서 1회(90:4), 전도서에서 1회(6:6).
신약에서는 베드로후서에서 1회(3:8), 요한계시록에서 6회(20:2, 3, 4, 5, 6, 7)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천년(千年)’에 관한 말씀들을 중심으로 과연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용어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를 소개하려고 한다.

2절, 일천년 동안(a thousand years) - χίλια ἔτη.  

3절, 천년이 차도록(till the thousand years)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4절, 천년 동안(a thousand years) - χίλια ἔτη.      

5절, 그 천년이 차기까지(until the thousand years)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6절, 천년 동안(a thousand years)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7절, 천년이 차매(the thousand years are expired)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 τὰ /  ὁ, ἡ, τό. 3588. ho, hé, to. the  
* χίλιοι. 5507. chilioi, a thousand     
* ἔτος. 2094. etos. a year    


분명한 사실은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는 ‘천년왕국’이란 용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학교와 교회 그리고 성도들이 ‘천년왕국’을 언급하고 마치 머지않아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처럼 믿고 기다리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이란 용어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년’이란 ‘상징적인 수’로 사용한 것이다.
상징이란 증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요한계시록 20:2∼3,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이 말씀에서 ‘용’ ‘옛 뱀’은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다. 사단과 마귀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한 것처럼 ‘천년’이란 단어 또한 상징으로 사용한 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을 마치 천년동안 지속되는 어느 특정한 기간이라고 해석하므로 ‘천년왕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는 말씀은 천년이라는 기간과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왕 노릇하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이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택하신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은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질 미래의 사건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이루어진 과거의 사건이었으며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이고 또한 장차 미래에도 확실하게 증거 될 것입니다. 따라서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것은 미래에만 이루어질 사건이 아닙니다.

과거에 실현된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며 미래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천년동안이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지금도 지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말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요한계시록에는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용어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 의해서 자주 천년왕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어왔기에 대부분의 교인들은 마치 ‘천년왕국(千年王國)’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은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깨우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 왔다 하고.

* 천국(ἡ βασιλεία) - βασιλεία, 932. basileia.
kingdom, sovereignty, royal power  

천국은 하늘 왕국 즉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하늘의 왕국은 이미 이 땅에 임했습니까?
아직 임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하늘 왕국은 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왕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분명하게 하늘 왕국은 완성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늘 왕국이란 하나님이 다스리는 왕국을 말합니다.
하늘 왕국이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아미 임했습니다.

다니엘 2: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마태복음 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스가랴 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이사야 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시편 46:9∼10,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성경은 하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늘의 예루살렘 강하 사건(계 21:1~5)을 통해 본 하늘의 의미를 발표하고 “하늘은 더 이상 피안의 세계로서 이 세상과는 이질적인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이 세상과 통일돼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공간이 된다.”며 “새 예루살렘 강하 사건은 이러한 새 창조의 정황을 교회론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그림 언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새 예루살렘 강하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이 통합되는 새 창조의 환경에 대한 묘사라는 것이다. 이 소장은 “새 예루살렘은 장소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인 성도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성경에서 일관성 있게 사용되고 있다”며 “이는 24장로(계 4), 14만 4000(계 7:1~8),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17)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요한계시록에서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 공동체는 지상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띠지만 동시에 하늘에서 승리한 공동체로 존재하는 이중적 특징을 지닌다”며 “이 땅은 우리가 버리고 떠나야 할 소멸의 결과를 기다리는 대상이 절대 아니다. 하늘은 언제나 땅과의 통일을 이루도록 존재한다(엡 1:10). 하늘과 땅을 통합돼 온 우주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지혜(세인트앤드루대) 박사도 ‘히브리서 12장 25~29절의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위한 하늘의 진동’을 주제로 발표하고 “해당 본문은 창조 세계가 진동해 멸망할 것이라는 마지막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의 창조세계와 하늘의 세계를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할 영원한 처소로 준비시킬 것임을 전하는 약속의 메시지”라고 밝혔다. 이 박사는 “종말 상태에 대한 전통적 경향은 죽어서 하늘로 가는 데 집중돼 왔지만 이는 땅의 환경문제나 세상의 사회적·구조적 불의를 무관심하게 만든 불균형적 신앙 모습을 촉발했다”고 지적했다.


천년왕국(千年王國)

성경에서 중요한 주제 두 가지를 소개한다면 구원과 왕국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 구원만 강조하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읽어볼 때 왕국을 건설하고 그곳에 구원받은 백성들을 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에베소서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하신 은혜는 왕국 안에서 구속하신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으로 에덴동산(왕국)에 거주할 수 없도록 쫓아내셨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사탄이 지배하는 곳에서 왕국을 다스릴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기원전 606년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후 다른 나라와 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비록 약속의 땅에 거하면서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기원전 4년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32,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한글 번역에서 살펴보면 마치 천년이란 기간이 채워져 지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천년설 - 천년이 있기 전에 재림이 있다.
후천년설 - 천년이 지나고 재림이 있다.
무천년설 - 천년은 상징적인 수가 되어 천년은 없다.

* 천년의 기준에 의해서 시기가 다를지라도 중요한 것은 재림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Ⅶ(요한계시록 22:7)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Ⅶ(요한계시록 22:7)


-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오늘의 시대

커넥트 그래픽 시대(Connect Graphic Era)
네트워크 시대(Network Era)

왜 오늘의 시대를 왜 커넥트 그래픽 시대 또는 네트워크 시대라고 할까요? 그 이유는 지구촌 인구가 2019년 7월말 기준으로 77억 1천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facebook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22억 명이며, youtube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19억 명이라고 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휴대전화(Cell Phone)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41억 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구촌 전체 인구에 의한 비율은 대략 54%에 해당합니다.

요즈음 데이케어센터에서는 어르신들에게 휴대전화 사용하는 방법을 교육합니다. 왜 교육이 필요할까요? 쉽고 편리하게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성경으로 주신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읽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육(敎育)이 필요합니다.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

2004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려고 세계 각처에서 인도양 해변을 찾았던 사람들이 인도양 쓰나미 사건으로 23만 명이 순식간에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11살 된 소녀 "틸리 스미스"가 100명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틸리 스미스"가 100여명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2주일 전 학교에서 지리 시간에 받은 교육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틸리 스미스가 받은 교육은 "바닷물이 맥주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즉시 높은 곳으로 대피하라는" 교육이었습니다.

바닷물이 끓어오르는 현상을 "조충현상(Cross Swell)"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바다 밑의 지층이 지진으로 갈라지면서 그 틈으로 바닷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다 수면은 수평을 맞추려고 바닷물이 흔들리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개혁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치 마지막 시대에 어느 특별한 사람만이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 들을 수 없었던 요한계시록에 대한 신비한 해석을 가르치는 잘못된 교리와 교회에 미혹된 성도들이 교회를 떠났고 심지어 시한부종말론에 심취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방법은 "복(福)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왜 복으로 요한계시록을 읽어야 합니까? 성경에서 강조하는 복은 영생(永生)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복(福)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볼 시(示)' 자와 '부요할 부(富)' 자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한자의 복(福)이란 부(富)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복(福)에 대한 관점이 세상 사람들과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복(福)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이 일곱 번 소개됩니다. 그 말씀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 복(福)에 대한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1장 3절에서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22장 7절에서도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키는" 것은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1:3, 지키는(τηροῦντες) 5083 keeping
22:7, 지키는(τηρῶν) 5083 keeping
* τηρέω. 5083. téreó, to watch over, to guard 

예언의 말씀은 번역은 같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1:3, 예언의 말씀 -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22:7, 이 책의 예언의 말씀 -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τοῦ βιβλίου


1장에서 예언의 말씀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로 받은 예언의 말씀을 말합니다. 반면에 22장에 예언의 말씀은 좁은 의미로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 즉 “요한계시록이란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 이라고 한다면 넓은 의미로는 “성경 전체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 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전체의 예언이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은 ‘오실 메시아’
신약의 예언은 ‘오신 메시아’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다시 오실 메시아’ 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이란 한자는 “예언(預言)”과 “예언(豫言)”입니다.

“예언(預言)”이란 “말씀을 맡은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맡은 사람을 “예언자(預言者)” 라고 부릅니다.

“예언(豫言)”이란 “미리 아는 것”을 말합니다. 미리 아는 사람을 “선지자(先知者)” 라고 부릅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말씀을 맡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말씀을 맡았습니까?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속히”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에 8번 소개됩니다(1:1, 2:16, 3:11, 11:14, 22:6, 7, 12, 20). 그런데 22장에서 4번 사용되었습니다.

1:3, 속히(τάχει) 
22:7, 속히(ταχύ) 
* 속히(ταχύ) 5035. tachu, quickly   

“속히” 라는 단어를 “빠르게” 라는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2천 년 전부터 오신다고 하셨는데 아직까지도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속히” 라는 단어는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반드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속히” 라는 단어의 의미는 “반드시” “틀림없이” “꼭”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의미

성경을 해석할 때 좁은 범위에서 찾는 것보다는 넓은 범위에서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성경 전체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예언의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에서 예언의 말씀은 “오실 메시아”
신약에서 예언의 말씀은 “오신 메시아”
요한계시록에서 예언의 말씀은 “다시 오실 메시아” 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예언의 말씀의 핵심은 “복음(福音)”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어떻게 예언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을까?

첫째, 순종하는 것(신명기 30: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초월해야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후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요셉은 정혼의 약속을 소리 소문 없이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의 사자가 꿈속에 나타나서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마태복음 1:20).

그 순간 요셉은 인간의 경험과 생각과 방법을 모두 버렸습니다. 이런 자세가 곧 순종하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가감(加減) 없이 지키는 것(요한계시록 22:18∼19)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가감(加減)이란 한자의 의미는 “더할 가(加)”와 “뻴 감(減)”으로 “더하거나 빼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의 말씀 즉 요한계시록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어느 것 하나라도 더하거나 제하는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유투브(youtube)에 십일조를 바치면 지옥에 간다는 내용이 자주 소개됩니다.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계명이므로 은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어느 것 하나 더하거나 제하면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4: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加減)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12:3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加減)하지 말찌니라.

마태복음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스무고개라는 게임에서 19개는 모두 정확하게 맞추었는데 마지막 한 개를 맞추지 못했다면 그것은 전부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는 내용이 어렵다 보니 추측으로 대충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일지라도 그 결론은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에 대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예수의 복음입니다. 계시록을 예수의 복음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역사적 종말론을 소홀히 해서도 방종의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셋째, 말씀을 묵상하는 것(시편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히브리어로 ‘묵상(黙想)’은 ‘정신을 모아 잠잠히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모아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대해서 잠잠히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편 119:148,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으로 말씀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셔서 반드시 깨닫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요한이서 1: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최고의 덕목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낳아 기르는 부모님이 가장 기쁠 때는 자식이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하나님만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길을 따라 다 같이 승리합시다!

첫째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
둘째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
셋째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 정리한다면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자!” 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승리하셔서 약속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Ⅶ(요한계시록 22:7)


-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오늘의 시대

커넥트 그래픽 시대(Connect Graphic Era)
네트워크 시대(Network Era)

왜 오늘의 시대를 왜 커넥트 그래픽 시대 또는 네트워크 시대라고 할까요? 그 이유는 지구촌 인구가 2019년 7월말 기준으로 77억 1천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facebook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22억 명이며, youtube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19억 명이라고 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휴대전화(Cell Phone)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41억 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구촌 전체 인구에 의한 비율은 대략 54%에 해당합니다.

요즈음 데이케어센터에서는 어르신들에게 휴대전화 사용하는 방법을 교육합니다. 왜 교육이 필요할까요? 쉽고 편리하게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성경으로 주신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읽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육(敎育)이 필요합니다.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

2004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려고 세계 각처에서 인도양 해변을 찾았던 사람들이 인도양 쓰나미 사건으로 23만 명이 순식간에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11살 된 소녀 "틸리 스미스"가 100명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틸리 스미스"가 100여명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2주일 전 학교에서 지리 시간에 받은 교육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틸리 스미스가 받은 교육은 "바닷물이 맥주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즉시 높은 곳으로 대피하라는" 교육이었습니다.

바닷물이 끓어오르는 현상을 "조충현상(Cross Swell)"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바다 밑의 지층이 지진으로 갈라지면서 그 틈으로 바닷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다 수면은 수평을 맞추려고 바닷물이 흔들리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개혁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치 마지막 시대에 어느 특별한 사람만이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 들을 수 없었던 요한계시록에 대한 신비한 해석을 가르치는 잘못된 교리와 교회에 미혹된 성도들이 교회를 떠났고 심지어 시한부종말론에 심취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방법은 "복(福)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왜 복으로 요한계시록을 읽어야 합니까? 성경에서 강조하는 복은 영생(永生)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복(福)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볼 시(示)' 자와 '부요할 부(富)' 자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한자의 복(福)이란 부(富)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복(福)에 대한 관점이 세상 사람들과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복(福)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이 일곱 번 소개됩니다. 그 말씀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 복(福)에 대한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1장 3절에서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22장 7절에서도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키는" 것은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1:3, 지키는(τηροῦντες) 5083 keeping
22:7, 지키는(τηρῶν) 5083 keeping
* τηρέω. 5083. téreó, to watch over, to guard 

예언의 말씀은 번역은 같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1:3, 예언의 말씀 -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22:7, 이 책의 예언의 말씀 -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τοῦ βιβλίου


1장에서 예언의 말씀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로 받은 예언의 말씀을 말합니다. 반면에 22장에 예언의 말씀은 좁은 의미로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 즉 “요한계시록이란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 이라고 한다면 넓은 의미로는 “성경 전체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 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전체의 예언이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은 ‘오실 메시아’
신약의 예언은 ‘오신 메시아’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다시 오실 메시아’ 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이란 한자는 “예언(預言)”과 “예언(豫言)”입니다.

“예언(預言)”이란 “말씀을 맡은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맡은 사람을 “예언자(預言者)” 라고 부릅니다.

“예언(豫言)”이란 “미리 아는 것”을 말합니다. 미리 아는 사람을 “선지자(先知者)” 라고 부릅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말씀을 맡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말씀을 맡았습니까?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속히”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에 8번 소개됩니다(1:1, 2:16, 3:11, 11:14, 22:6, 7, 12, 20). 그런데 22장에서 4번 사용되었습니다.

1:3, 속히(τάχει) 
22:7, 속히(ταχύ) 
* 속히(ταχύ) 5035. tachu, quickly   

“속히” 라는 단어를 “빠르게” 라는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2천 년 전부터 오신다고 하셨는데 아직까지도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속히” 라는 단어는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반드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속히” 라는 단어의 의미는 “반드시” “틀림없이” “꼭”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의미

성경을 해석할 때 좁은 범위에서 찾는 것보다는 넓은 범위에서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성경 전체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예언의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에서 예언의 말씀은 “오실 메시아”
신약에서 예언의 말씀은 “오신 메시아”
요한계시록에서 예언의 말씀은 “다시 오실 메시아” 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예언의 말씀의 핵심은 “복음(福音)”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어떻게 예언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을까?

첫째, 순종하는 것(신명기 30: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초월해야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후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요셉은 정혼의 약속을 소리 소문 없이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의 사자가 꿈속에 나타나서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마태복음 1:20).

그 순간 요셉은 인간의 경험과 생각과 방법을 모두 버렸습니다. 이런 자세가 곧 순종하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가감(加減) 없이 지키는 것(요한계시록 22:18∼19)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가감(加減)이란 한자의 의미는 “더할 가(加)”와 “뻴 감(減)”으로 “더하거나 빼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의 말씀 즉 요한계시록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어느 것 하나라도 더하거나 제하는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유투브(youtube)에 십일조를 바치면 지옥에 간다는 내용이 자주 소개됩니다.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계명이므로 은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어느 것 하나 더하거나 제하면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4: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加減)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12:3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加減)하지 말찌니라.

마태복음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스무고개라는 게임에서 19개는 모두 정확하게 맞추었는데 마지막 한 개를 맞추지 못했다면 그것은 전부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는 내용이 어렵다 보니 추측으로 대충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일지라도 그 결론은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에 대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예수의 복음입니다. 계시록을 예수의 복음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역사적 종말론을 소홀히 해서도 방종의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셋째, 말씀을 묵상하는 것(시편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히브리어로 ‘묵상(黙想)’ ‘정신을 모아 잠잠히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모아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대해서 잠잠히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편 119:148,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으로 말씀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셔서 반드시 깨닫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요한이서 1: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최고의 덕목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낳아 기르는 부모님이 가장 기쁠 때는 자식이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하나님만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길을 따라 다 같이 승리합시다!

첫째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
둘째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
셋째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 정리한다면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자!” 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승리하셔서 약속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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헥사코시오이헥세콘타헥사 포비아’ - 666 공포증

헥사코시오이헥세콘타헥사 포비아’ - 666 공포증

발음조차 쉽지 않은 이 단어는 ‘악마의 숫자’라 불리는 666의 그리스어 표현에 공포를 뜻하는 영어 단어 포비아를 합친 것이다.
우리말로 풀면 ‘666 공포증’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이 숫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논란의 대상이 됐다.
신학계에선 초대교회를 핍박한 로마의 네로 황제를 상징하는 걸로 해석됐지만, 대중에겐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공포의 숫자로 인식된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을 떠나며 구입한 로스앤젤레스 집 주소에 666이 들어가자 아예 번지수를 바꿨을 정도였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또 다른 숫자 14만 4000은 어떤가.
이 숫자만큼의 사람이 말세에 구원받는다는 내용은 우리 사회를 미혹해 온 여러 이단·사이비 단체의 핵심 레퍼토리다.
사도 요한이 1세기 그리스도인을 위해 기록한 계시록이 어쩌다 현대 기독교인에게 공포와 미혹의 대명사가 된 걸까.

암호문 아닌 통찰력 담긴 작품

계시록은 요한이 그리스의 밧모섬(파트모스섬)에서 유배 중 소아시아 지역 7개 교회에 쓴 편지이자 묵시(默示)다.
그가 계시록을 집필하던 당시는 초대교회를 향한 로마제국의 압제가 극에 달할 때였다.
모진 박해에 직면한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계시한 메시지를 전하며 희망을 품고 믿음을 지킬 것을 당부하는 것이 계시록의 주요 골자다.

요한이 환상을 보는 형식으로 하나님 계시가 전달되기 때문에 계시록 본문에는 기괴하고 난해한 표현이 적잖이 나온다.
선과 악의 대립과 최후 심판 현장에 등장하는 붉은 용, 태양을 둘러 걸친 여자, 생명책과 새 예루살렘 등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한국교회 역할에 관해 다룬 책 ‘어떻게 믿을 것인가’(이와우)에서 계시록 내 비유와 상징이 가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계시록 내용이 로마 정권에 알려지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큰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상징적인 문학 표현을 쓰고 있다. …
(하지만) 이는 당시 그리스도인의 인내와 희망과 이뤄질 하늘나라에 대한 신념을 굳혀줬다.
문맥 하나하나는 이해할 수 없어도 그 주류를 만드는 정신은 기독교의 승리와 더불어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향한 희망과 신앙을 강렬하게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김형석 교수는 비유와 상징이 빼곡한 계시록을 “단테의 ‘신곡’이나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읽는 자세로 읽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고 말한다.

영성신학자 유진 피터슨 목사 역시 ‘요한계시록, 현실을 새롭게 하는 상상력’(IVP)에서 계시록을 ‘초대교회 시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시’로 칭한다.

피터슨 목사는 “우리는 계시록을 해독이 필요한 암호문으로 보는 게 아니라 상상 속에서 풍부한 의미와 통찰력을 담은 은유의 책, 참으로 경이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봐야 한다”며 “사도 요한은 시인의 언어를 구사하되 오래된 진리가 신선하게 와 닿도록 참신한 방식으로 (계시록을) 표현했다”고 평했다.

이어 “계시록은 독자로 하여금 천사와 짐승이 벌이는 천상의 전투, 섬뜩한 징벌과 영광스러운 구원, 변화무쌍한 환상과 우주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가득한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풍부한 상상력의 보고”라며 “그 속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은 목적을 새롭게 깨닫고 그분을 더없이 경배하게 만드는 요소가 스며들어 있다”고 했다.

잘못된 해석이 미혹의 원흉

요한계시록은 암호문이 아닌 풍부한 상상과 통찰력이 담긴 책으로 이해할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복음서와는 달리 남다른 매력이 있는 계시록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특징 탓에 잘못 해석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 오류가 계시록의 상징적 언어를 문자적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단이 자의적 성경 해석을 합리화하기 위해 주로 쓰는 수법이기도 하다.
비근한 예가 앞서 언급한 14만 4000이다.

최승락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는 24일 국민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이 수는 수리적으로 접근하기보단 그리스도와 함께 최후에 승리하는, 구원받은 이들의 총수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며 “이걸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하면 ‘구원받은 사람이 13만 9999명이면, 14만 4001명이면 어떻게 되느냐’란 식의 질문도 나올 수 있다”고 했다.

본문에 등장하지 않는 허구적 개념을 끌고 와 계시록을 해석하는 문제 역시 심각하다.
말세에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심판할 때 구원받은 이들이 공중에 들려진다는 뜻의 ‘휴거’는 기독교의 최후 심판과 관련해 흔히 논해지곤 한다.

이 때문에 계시록과 연결지어 인식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실상 휴거는 계시록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티머시 빌 미국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 교수는 그의 책 ‘계시록과 만나다’(비아)에서 “계시록에는 휴거라는 말은 물론, 적그리스도란 말 역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본래 적그리스도의 개념은 요한서신(요한1· 2서)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이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한 말이지만, 계시록에서 언급한 짐승(계 13:11~18)이 적그리스도로 해석되면서 같은 개념으로 잘못 알려졌다는 것이다.

종말론과 언급되는 ‘7년 대환란’ 역시 계시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평신도를 위한 계시록 해설서 ‘요한계시록은 쑥떡이다’(쿰란출판사)를 쓴 오종윤 군산 대은교회 목사는 “7년 대환란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지만 적지 않은 이들의 머릿속엔 이 표현이 계시록에 언급돼 있다고 각인돼 있다”며 “잘못된 계시록 해석이 널리 퍼지면 그 토양 위에 이단이 생기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구약 성경 위주로 해석해야

전문가들은 계시록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선 ‘교회의 도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해석의 중심에 놓고’ ‘신구약 성경 위주로’ 읽을 것을 조언한다.

‘평신도를 위한 쉬운 요한계시록’ ‘스토리 요한계시록’(브니엘) 등을 펴낸 양형주 대전도안교회 목사는 “계시록의 상징과 비유는 혼자 읽고 깨우치기보단 교회의 성경해석 전통을 따르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양 목사는 “이단은 교주 개인의 경험을 계시록에 끼워 맞춘 뒤, 자기네 단체만이 ‘이 시대의 천년왕국이자 시대의 방주’란 결론을 내린다”며 “이들의 미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주요 이단이 제시하는 계시록 해석 문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역사 - 교훈 - 예언 - 성취’를 큰 틀로 한 이단의 성경해석과 비유풀이는 처음엔 정통교회 해석과 유사하지만 결국엔 교주를 위시한 이단 교리가 가미된다. 양 목사는 “이단의 성경해석 문법을 간파하는 것은 신학생도 쉽지 않은 만큼 교회의 안내를 받아 계시록을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오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해석의 주축에 놓고 계시록을 해석한다면 이단의 마수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 봤다. 그는 “계시록에서 제일 결정적인 가르침은 ‘어린 양’ 즉 예수 그리스도를 거쳐야만 최종 승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라며 “계시록에서는 오직 예수만 두루마리 봉인을 풀 수 있다고 나오는데 이단은 교주도 예수처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정통과 이단의 결정적 차이”라고 말했다.

‘계시록의 숨겨진 실상을 밝혀준다’는 이유로 신구약 성경 외의 개념을 끌어와 해석한다면 이단일 가능성이 높다.

김상훈 총신대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는 “계시록은 은닉되거나 특정인만 들을 수 있는 숨겨진 책이 아니”라며 “상징과 비유가 적잖게 나오지만 찬찬히 읽다 보면 그 뜻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계시록에 등장한 용이 마귀라고 본문(계 20:2)에 설명된 것이 단적인 예”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자적 해석을 넘어 상징적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라도 계시록 본문과 신약을 돌아보면 해석의 힌트가 나와 있다”며 “계시록이 어렵다는 인식을 버리고 성경 본문 위주로 읽으려는 노력을 성도들이 기울인다면 이단의 미혹에도 쉽게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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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바라크(ברך)"에 대한 묵상


그리스어/헬라어에서 "복"이란 단어는 'εὐλογία(유로기아)'인데, εὐ (좋은) + λογία(말/말하다)의 합성어로 "상대에게 좋은 말을 하다"라는 뜻으로, 현대 영어의 eulogy(고인에 대한 추모사)가 이 단어에서 왔습니다.

라틴어 'benedicere(베네디케레)' 역시 bene (좋은) + dicere (말하다)의 합성어로 그 뜻은 그리스어와 동일합니다. 예배 시 '축도'를 뜻하는 benediction이 이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영어 'bless'는 이와는 달리 blood(피)와 연관된 단어입니다. 축복이란, 사람 혹은 사물에 동물의 피를 뿌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동물의 피를 뿌려서 악귀를 축출하는 고대 게르만족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출애굽 사건과 연관 짓기에는 좀 거리가 멉니다.

한자의 "福"에 대해서는 아주 여러 설명들이 있습니다만, 그 중 많은 동의를 얻고 있는 해석을 하나 들자면, 지붕 아래 먹을 것이 있고 밭이 있고 걸칠 의복이 있다는, 즉 의식주 문제에 걱정이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합니다(한자에 대해서는 제가 전혀 전문가가 아니기에 제가 잘못 알고 있다면 너그러이 양해 바랍니다). 

"복"에 대한 고대인들의 개념들을 정리해 보면, 

1) 덕담 같은 좋은 말을 해주거나 듣는 것

2) 재앙 등 나쁜 것으로부터의 보호

3) 먹고 사는 것에 걱정이 없는 상태

과연 "복을 주다/축복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ברך(바라크) 는 이 중에 어떤 뜻과 가장 가까울까요?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ברך(바라크)의 기본적인 뜻은 "무릎을 꿇다(kneel down)"입니다. 시편 95편 6절의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에서 "무릎을 꿇자"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의 "복"은 이 "무릎을 꿇다"라는 기본적인 뜻에서 파생된 것으로, "복을 주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적 표현은 "상대방을 무릎 꿇은 상태로 만들다(문법적으로는 피엘 동사의 factitive 용법)"라는 뜻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장면을 상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히브리어의 축복이 다른 언어들의 축복과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축복을 하는 사람의 행위("좋은 말을 하다" 혹은 "피를 뿌리다")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복을 받는 자의 자세를 묘사하고 있는 점.

둘째, 복을 받는 자가 과연 무엇을 받을 것인지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좋은 말/덕담이나 피 뿌림, 기본 의식주 등과는 달리)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흥미롭게도,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는 우리의 자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까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리하여 히브리어의 ברך(바라크)를 한자로 옮기자면, "복 福"자가 아니라 "엎드릴 伏"자에 더 가깝습니다.


부 (πλοῦτος 플루토스)에 대하여

헬라어 πλοῦτος(플루토스)는 물질적 의미로 ‘재물’ 혹은 ‘부’(wealth)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마 13:22; 마 4:19; 눅 8:14; 딤전 6:17; 약 5:2; 계 18:17), 은유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로는 ‘풍요’ 혹은 ‘부요함’(richness)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후 8:2; 롬 2:4, 9:23, 11:12; 엡 1:18; 골 1:27). 한 어원에서 나온 것으로 ‘부요한’ 혹은 ‘부자’라는 의미의 πλούσιος (플루시오스), ‘부요하다’라는 동사로서 πλουτέω(플루테오)가 있다. 이 단어들의 어원은 인도유럽어의 뿌리가 되는 pel-에서 나와 ‘채우다’의 뜻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그래서 재물, 부의 의미는 ‘채움’(fullness)의 뜻을 가지고 있다.

   고전 헬라어 시대에는 ‘부’의 개념이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부의 가치는 고귀함(nobility)을 갖춘 것이기에 운(fortune)과 덕목(virtue)을 함께 갖춘 상태를 말했다. 그래서 이것을 주는 것은 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Homer의 Iliad 24.525-533). 더 나아가서 부의 가치는 부를 사용하는 개인의 태도와 행동에 따라 평가를 받았다. 헬라 도시국가에서 개인의 부는 사회적 질서와 도시의 번영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wealth)는 미덕(virtue)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지나친 부보다는 적절한 부를 추구해야 할 것을 말했다. 플라톤은 물질적 부보다는 지혜, 덕목, 문화라는 영적인 부를 강조했다. 견유학파(Cynics)의 디오게네스는 헬라인들이 생각하는 고귀함의 덕목이 되는 부, 명예, 기쁨, 생명의 가치를 부정하며 오직 가난(페니아 πενία)이 영혼의 교육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였다.  

   마가복음 10:23에서 예수는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고 선포하였다. 이 선포는 유대교의 신실한 청년이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을 요청 받았으나, 재물 때문에 근심하며 집으로 돌아간 일이 있은 후에(막 10:17-22),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이 사람이 관리였고, 큰 부자(플루시오스πλούσιος )라고 언급한다(18:23). 복음서의 전통에서 돈이라는 재물(크레마χρῆμα)에 대해서, 유대교의 청년의 경우처럼 완전한 포기와 함께 주님의 제자가 되는 사명을 부여 받거나 혹은 자발적 포기도 있지만, 일반적 ‘부’(플루토스πλοῦτος)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당대의 스토아 철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즉 πλοῦτος(플루토스)는 유익과 불이익이 있다는 것이다. 불이익은 재물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다(막 10:24). 하지만 부의 욕심을 넘어서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로 유익이 될 수도 있다(막 10:27). 

당대의 스토아 철학파는 부나 가난 자체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건강이나 명예처럼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코 본질적 악이나 선이 될 수 없고, 관리와 사용의 문제이다. 그것을 가지고 신실함 곧 타락하지 않음(아디아프소리아 ἀδιαφθορία )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자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의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막 10:25에서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플루시오스πλούσιος )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고 말씀하였고, 재물의 가치를 하나님의 복으로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재물의 과도한 욕심과 그 재물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부자는 결국 고전 헬라 시대나 당대의 스토아 철학자들에게도 ‘미덕’(virtue)이 되지 못하였다. 가장 그레코로만 문화를 잘 알고 있는 복음서 저자 누가는 이 부자(플루시오스πλούσιος )의 문제를 자신의 특별자료에서 다룬다.  마가복음 4장의 ‘씨뿌리는 비유’를 누가복음 8장에서 자료로 사용하며, 가시떨기에 떨어진 말씀의 씨가 열매 맺지 못하는 땅을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해석한다(8:14). 내세를 준비하지 않고 이 세상에만 관심을 가지고 재물을 모으고 향락에 빠져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의 전형으로서 누가는 ‘부자’의 존재를 비유에서 등장시킨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두개의 비유가 나오는 데, ‘부자와 불의한 청지기’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이다. 부자 주인의 재물을 허비한 불의한 청지기가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탕감해 준 사실은 사실 도덕적으로 불의한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주인은 청지기가 지혜 있게 일을 한 것으로 오히려 칭찬한다.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은 주로 청지기가 한 일을 부각시키지만, 사실 부자는 적어도 유대인으로서 빚진 자에게 긍휼의 율법을 실천하지 않던 부자였고, 청지기는 부자 주인을 대신하여 율법의 의무를 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다음 비유는 날마다 향락 속에 살면서 좋은 옷과 음식을 즐기면서도 대문 앞에 죽어가는 거지 나사로에 대한 어떤 긍휼도 베풀지 않는 부자의 이야기이다. 둘 다 죽어서 내세에 가게 되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상속자처럼 품에 안겨 있고, 부자는 지옥의 고통 속에 살아간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를 가진 세상의 다섯 형제들의 존재는 부자가 유대인인 것을 드러낸다. 부와 재물에 대한 잘못된 사용이 내세를 결정할 것임을 보여주는 비유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청지기를 통해 탕감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굶어 죽게 한 부자가 대조되고 있다.

   누가는 12:16에서 한 부자(πλούσιος )의 이야기를 하였다. 이 부자는 자기 밭의 소출을 넉넉히 저장하고자 옛 창고를 헐고 새 창고를 지어 거기에 여러 해 먹고도 남을 양식을 준비하려 하였다. 이생에만 관심을 가지고 향락과 평안에 대한 미래의 계획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임을 말하며,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라”(플루테오 πλουτέω,12:21)고 주님이 말씀한다. 부의 가치는 스토아 철학자들의 생각처럼 본질적으로 선도 악도 아니다. 다만 자신에게 이익이 될 수도 있고, 불이익이 될 수도 있다. 재물에 대한 과도한 욕심이 아니라, 적절한 부와 이익이 되도록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가는 이 그레코로만적인 부의 가치를 말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재물의 사용을 강조하였다. 그것이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사는 제자도이다. 

누가가 말하는 제자도의 시대적 실천은 내세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16:9). 말씀에 열매 맺지 못하는 부자는 이 세상의 염려, 재물의 탐심, 향락의 기운에 인생과 재물을 허비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미덕으로 여기고, 재물의 탐심을 버려야 하는 것이 제자의 삶이다. 그런 삶을 결단한 것이 부자였던 세리장 삭개오였다(눅 19:2). 누가복음은 돈을 좋아하는 부자 바리새인을 특별히 언급한다(16:14). 이들과 대조되는 사람들이 세리와 죄인이다. 두 그룹은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대조되는 인물들이지만, 삭개오는 부자이며 세리이며 죄인이었다. 삭개오의 회개와 회개의 실천으로 보여주는 재물의 나눔이 부와 재물 주제의 결론이며, 예수와 제자들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 이야기 절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길을 보여주었다. 누가복음의 제자도, 사도행전의 이상적 교회는 시대가 요청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재물의 나눔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묵상

"일용할 양식"에 대한 헬라어는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이다.  앞의 아르톤ἄρτον은 "빵"이다.  신약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던 음식이다. 여기서 빵은 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법으로 사용되어, "양식" 일반 혹은 더 나아가 "물질" 일반을 의미한다. 

“일용할”로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단어 “에피우시온"ἐπιούσιον은 주의 기도에 사용된 전체 헬라어 중에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이 단어를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는 성경에 이 단어가 오직 주기도문에만 나오기 때문이고, 성경 밖에서도 그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잘 안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에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렵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상당히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신 셈이다. 이렇게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테니, 더 세심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에피우시온”이 무슨 뜻인지를 밝히기 위한 많은 학문적 연구가 있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문제가 되었으니 긴 논란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 안에 용례가 없으니, 성경 밖 문서나 비문을 다 뒤져서 이 단어가 사용된 흔적이 있으면 그것에 근거해서 뜻을 찾아내려 하였는데, 노력에 비하여 결실이 적다. 이 단어가 쓰여있는 비문이 그리스의 어느 섬(Rhodes)에서 새로 발견되었을 때 거기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쏟았고, 이 단어가 쓰여있는 파피루스가 런던의 어느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되었을 때에도 학계가 들썩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 뜻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주기도문이 “일용할”이라고 에피우시온을 번역했는데, 그건 기본적으로 에피우시온의 뜻을 “오늘”이라고 본 것이다. 영어로 daily bread라고 번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새로운 발견을 반영하면 에피우시온은 "다음"이라는 뜻이 된다. 에피우시온에 "날"을 뜻하는 헤메라가 붙여써진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는데, 문맥에서 볼 때 "다음 날 곧 내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발견을 주의기도 해석에 적용하면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은 "다음 먹을 빵"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의역하면 "생존에 필요한, 삶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빵이 된다. 

에피우시온ἐπιούσιον이라는 단어 자체에 집중한 해석 역시 이런 해석과 궤를 같이 한다. 에피우시온은 "에피"라는 전치사와 "우시온"이라는 명사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에피ἐπί는 "~위에"를 뜻하는 전치사로 영어의 on이나 upon에 해당한다. "우시온"이 나온 "우시아"οὐσία는 그리스 철학은 물론 삼위일체 교리에도 사용된 단어인데 그 기본 의미는 "존재"being, existence이다. 그러므로 에피우시온은 "존재를 떠받치는"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고, 이는 에피우시온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맥이 통한다. 

이런 이해를 고려한다면, 주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 하신 "일용할 양식"이 하루 먹을 양식이 아닌 것으로 조심스레 해석할 수 있다. "일용할 양식"은 문학적 표현으로 참 좋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단지 하루치 양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떠받치는 물질",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물질 전반"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라 하셨다. 

내게는 어디까지가 "일용할 양식"일까? 물어보고 묵상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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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계시록 또는 묵시록이라고 하는 요한 계시록을 육의 관점과 영의 관점에 따라 보고 읽고 해석하느냐에 두려움과 공포심 그리고 사랑과 평강의 길로 나뉜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어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으로 기록한 것 보다는 거짓 에고(분리됨)를 몰아내고 참 진리 안에서 참 에고 즉 통합된 에고(하나됨)가 무한한 사랑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형상과 글"의 저자인 김창호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새 창조의 계시이다.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종말에 관한 책이 아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요한계시록을 세상의 종말을 말하고 있는 책으로 읽고 있다면 그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신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들 안에 이루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예언이다. 요한계시록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종말을 말하고 있는 정서가 아니라 그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는지를 계시하고 있다.

계시란 무엇인가. 감추인 것을 열어 보임이다. 요한계시록은 우리 모두에게 감춰있던 영과 생명의 실상을 열어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그 열린 책은 도리어 닫힌 책이 되어 있다. 이는 사람들이 욕심의 눈으로 그 책을 읽으며, 들으며,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이 영과 생명을 지향하지 아니하고 육과 생존을 지향하고 있으면 계시는 점(占)이 되고 만다. 오늘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요한계시록은 종말론(에스카톨로지) 이란 이름으로 읽고 있는 이들이 많거니와 이런 일은 요한계시록을 점서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종말론은 생명을 사망으로 바꾸고 있다. 그런즉 영성은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에 달렸다. 한 율법사가 예수께 묻기를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셨다. 우리의 성경 읽기의 알파는 성경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느냐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오메가는 그 기록을 어떻게 읽고, 듣고, 말하며, 마음에 새기며 자신의 실존이 되게 하느냐 인 것이다. 우리의 성경읽기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 온전한 짝을 이루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느냐를 아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곤혹스럽게 한다.

이는 요한계시록이 징조로 계시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징조로 보여 진 새 창조의 복음이다. 그런즉 징조와 새 창조가 요한계시록을 읽는 알파와 오메가다.







10 / 13 / 2021(수)
12 / 13 / 2023(수)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복(福)이란 한자를 파자(破字)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복 복(福) = 보일 시(示) + 부자 부(富)
복이란 한자의 의미는 "복을 어떻게 보느냐?" 또는 "복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하겠습니다.

부자 부(富) / 부유할 부(富) = 갓머리부(宀) + 한 일(一) + 입 구(口) + 밭 전(田)

부(富)의 의미 : 1. 넉넉하다. 2. 많다. 3. 가득하다
갓머리부(宀) : 움집 면(宀)

움집에 밭(田)에서 나오는 작은 것(一)이 입(口)으로 들어가는 것이 있다.
요사이는 먹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걱정을 합니다.

예전에는 겨울철에 김장을 담글 때 보통 배추 150-200포기 무 100개 정도를 담가야만 겨울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오직 김치 하나뿐이었지만 지금보다는 행복했습니다.
오늘의 시대와 비교하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성경에서 강조하는 복은 무엇일까요?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성경을 거대한 두 개의 산맥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구약이라는 산맥
다른 하나는 신약이라는 산맥

산맥에는 수 많은 산들이 있고 그 산에는 또 나무들이 있습니다.
구약이란 산맥에는 39개의 산이 있습니다.
신약이란 산맥에는 27개의 산이 있습니다.
신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이란 산은 마치 삼림(森林)과 같습니다.
삼림에는 수 많는 나무(목)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666. 14만 4천. 인. 나팔. 대접. 적그리스도, .......

다양한 나무들 중에 "복"이란 나무를 중심으로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첫째, 말씀의 복(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the words of this prophecy, and blessed are those who hear it and take to heart what is written in it, because the time is near.

읽는자, 듣는 자, 지키는 자 :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복을 받습니다.

신명기 17:18-19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예) 요사야 왕(16대)
(예) 여호사밧 왕(4대)
(예) 이승만대통령 -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 선서를 하였다.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Behold, I am coming soon! Blessed is he who keeps the words of the prophecy in this book.



둘째, 신앙의 복(요한계시록 14:13)

-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Blessed are the dead who die in the Lord from now on.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Then I heard a voice from heaven say, "Write: Blessed are the dead who die in the Lord from now on." "Yes," says the Spirit, "they will rest from their labor, for their deeds will follow them."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예) 어리석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

(예) 미국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가문을 5대에 걸쳐서 조사한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의 영적, 지적 수준이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를 주제로 한 연구였는데 뉴욕시 교육위원회는 조나단 에드워즈 가문의 비교 대상으로 마커스 슐츠의 가문을 선정했다.

마커스 슐츠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동시대 사람으로서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지역에 살았을 뿐만 아니라 같은 수준의 경제력을 가졌고 같은 수의 가족이 있었다.

그런데 큰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후손에게 영적으로 <성경>을 지표로 삼고 지적으로 인문고전 독서에 힘쓰는 전통을 물려주었던 반면에 마커스 슐츠는 <성경>에 무관심하고 인문고전 독서에 문외한인 전통을 물려주었다는 점이었다.

뉴욕시 교육위원회는 두 가문의 후손을 5대에 걸쳐서 면밀하게 추적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후손은 896명이었다.
여기서 부통령 1명, 상원의원 4명, 대학총장 12명, 대학교수 65명, 의사 60명, 목사 100명, 군인 75명, 저술가 85명, 법조인 130명, 공무원 80명이 배출되었다.

한편, 마커스 슐츠의 후손은 1062명이었다.
여기서 전과자 96명, 알코올 중독자 58명, 창녀 65명, 빈민 286명, 평생 막노동으로 연명한 사람들 460명. 참고로 미국 정부는 마커스 슐츠의 후손들을 위해 1억 5000만 달러가 넘는 국가 보조금을 지출해야 했다.

(예) 순교자 윌터 밀른

1558년 에든버러에서 화형을 당한 월터 밀른은, 마지막 심문 때에 자신의 신념을 철회할 것인지에 대한 최후 통첩 아래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를 구속하신 고마운 구속주로부터 받은 저 천상의 원리 중 단 한 조항이라도 버리느니 차라리 만 개의 목숨을 버리는 편을 택하겠소" / 존 폭스, <순교자 열전(Foxe's Book of Martyers)>, 274.

그는 그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목숨보다도 성경의 교리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적이 확실하면 아군도 확실해 진다.
적의 교리를 알면 아군의 교리에 확신과 자신을 하게 된다.
그래서 목숨을 아끼지 않을 수 있다.
... 그런데 우리는 확실한 적이 누구인지 참으로 모호한 시대를 살아간다.
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많은 나머지 적을 식별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달콤한 혀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우매하여 적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래서 심지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망각한다. 순교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담대히 순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적들의 교리도 모르고, 우리의 교리도 모르고... 기쁨과 감격으로 주를 위해 죽을 수 없는 가련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밀른은 82살의 나이에 화형대에 올라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비록 나는 비참한 죄인이지만 내가 오늘 고난을 받는 이유는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변호하기 위함이오. 그리고 나는 자비롭게 나를 불러주셔서 내 목숨으로 진리를 보증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오. ..."

(예) 복권 당첨자들의 삶

벼락을 맞는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한번쯤 맞길 바라는 벼락이 있죠. 돈벼락. 특히 복권 당첨입니다. 과학적 통계에 따르면 사람이 벼락에 맞을 확률은 70만 분의 1인데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814만분의 1이랍니다. 이 어마어마한 확률을 뚫고 돈방석에 앉은 사람들은 그 뒤에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And They lived happily ever!)'가 됐을까요. [알고보면 쓸모있는 신기한 세계뉴스] 가 파헤친 여덟번째 이야기는 '1등 복권 당첨 후의 빛과 그림자'입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파워볼 복권 추첨에서 1등에 당첨된 개인 역대 최고 금액인 7억5870만 달러(약 8548억 원)를 타게 된 메이비스 웨인치크. [사진 CNN 캡처]

━ 복권 한방에 오바마보다 더 부자로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미국은 개기일식만큼이나 흔치 않은 파워볼 1등 당첨 소식으로 들썩였습니다. 미국식 로또라 할 파워볼은 1부터 69까지 숫자가 적힌 공 가운데 5개의 공을 뽑고 1∼26의 숫자가 적힌 파워볼 26개 가운데 한 개를 뽑아 6개의 숫자를 모두 맞히면 1등에 당첨됩니다. 당첨 확률은 무려 2억9220만분의 1로 한 사람이 8번 연속 벼락에 맞는 것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바로 이 ‘8번 연속 벼락 맞는 확률’을 뚫은 행운의 주인공은 매사추세츠 주 치코피의 한 메디컬센터에서 일하는 53세 여성 메이비스 웨인치크입니다. 웨인치크가 단돈 2달러(약 2250원)에 산 파워볼 복권으로 거머쥐게 된 1등 당첨액은 무려 7억5870만 달러(약 8548억 원). 21주간 당첨자가 나오지 않아 쌓인 금액이라 한 사람이 받는 액수로는 역대 최고입니다. 지난해 1월 최고 16억 달러(약 1조8112억 원) 당첨금이 나오긴 했지만 당시엔 당첨자 세명이 나눠가졌더랬습니다.

8538억원이란 숫자가 실감이 안 나면 이렇게 이해해봅시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 액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잘 나가는 맏딸 이방카 트럼프와 사위 재러드 쿠슈너 부부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들리는 말로 최순실씨가 독일에 은닉한 재산이 8000억원대 규모라고 하던데, 웨인치크는 한방에 이를 넘어섰네요.

'금수저'이자 사업가로 잘 나가는 이방카 트럼프(오른쪽)와 남편 재러드 쿠슈너. [사진 이방카 인스타그램]

물론 웨인치크가 실제 받는 돈은 여기 못 미칩니다. 파워볼 1등 당첨자는 세금을 제외한 당첨금을 일시불로 받거나 연금형식으로 29년간 받을 수 있습니다. 웨인치크는 세금 약 40%를 뗀 4억8000만 달러(5400억원)를 일시불로 받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것만 받아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나 배우 브래드 피트보다 더 부자가 된다는군요.

웨인치크는 당첨 하루 만에 매사추세츠 복권위원회 회견장에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당장 하고 싶은 일은 휴식”이라며 “그들(직장동료)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직장인이라면 한번씩 꿈꾸는 통쾌한 장면 아닙니까. “이번 달 제 월급으로 여러분 회식하세요” 이런 ‘핵멋짐 발언’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겠지요.

━ 사기·이혼·마약 중독…살해 후 암매장도
하지만 돈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듯 행운의 복권 주인공들은 종종 불행한 뒷얘기를 남기곤 합니다. 사기·이혼·마약 중독은 흔한(?) 편이고 강도 상해를 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살해되기도 하지요.

시카고 출신의 자영업자 우루즈 칸은 취미가 파워볼 복권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2012년 6월 습관처럼 긁은 복권은 그에게 100만 달러(약 11억원)를 안겨주었습니다. 당첨금을 일시불로 찾아온 지 한달 만에 그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부검 결과는 청산가리 중독. 경찰 수사에도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고 그의 재산은 아내와 딸이 나눠가졌습니다.

파워볼 복권

복권 당첨 후에 ‘친하게 지내자’며 접근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플로리다주에서 청소 잡역 등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던 에이브러햄 셰익스피어는 2006년 1700만 달러(약 191억원)짜리 파워볼에 당첨됐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이 돈을 3년 간 흥청망청 거의 다 써버렸습니다. 이 즈음 그에게 접근한 여성 도리스 무어는 자서전을 쓰자고 꼬드긴 뒤 셰익스피어에게 남아있던 현금 130만 달러와 집을 자신의 명의로 돌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음날 그는 가슴에 두차례 총격을 당하고 집 앞마당에 암매장 됐습니다. 무어는 매장한 자리에 콘크리트까지 덮어 완전 범죄를 꾀했지만 2012년 1급 살인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88년 펜실베이니아주에서 1620만 달러(약 182억원) 복권에 당첨됐다가 유산을 노린 형제의 살해 음모 등 갖은 음해에 시달린 끝에 재산을 모두 날린 윌리엄 포스트란 사람도 있습니다. 1997년 텍사스주에서 3100만 달러(약 349억원) 복권으로 횡재한 빌리 하렐은 가족·교회·친구 등에게 선심쓰듯 돈을 뿌리다가 2년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2001년 남편과 함께 1100만 달러(약 124억원) 당첨금을 탄 빅토리아 젤은 마약과 술에 취해 운전하다 행인을 치어 숨지게 해 교도소에 수감됐습니다. 1985년과 86년 두 차례에 걸쳐 총 540만 달러(약 61억원)에 당첨됐던 뉴저지주 이블린 애덤스는 도박으로 모두 날리고 집도 없이 트레일러에 사는 신세가 됐습니다.

2002년 3억1500만달러 복권에 당첨된 잭 휘태커(가운데)가 아내 주웰(오른쪽), 손녀 브랜디 브래그와 함께 NBC-TV의 '투데이 쇼'에 출연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이제라도 그 복권 찢어버리고 싶다"

그리고 잭 휘태커가 있습니다.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잘 나가는 건설사 회장이었던 그는 2002년 당시 최고 금액이었던 3억1500만 달러(약 3550억원)짜리 파워볼에 당첨됐지만 4년 뒤 파산을 선언했습니다. 그 4년 사이 휘태커는 이혼 당하고 그의 외손녀와 딸은 마약 남용으로 차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트립 클럽에 앉아있다가 차에 둔 54만5000달러를 털리는 등 수차례 강도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파산 후 세간의 관심에서 사라졌던 그는 지난해 12월 다시 언론에 등장합니다. 부엌에서 시작된 화재로 거의 유일한 재산이었던 집 한채마저 타버렸다는 뉴스였습니다. 휘태커는 일찍이 언론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손녀가 죽은 것도 돈 때문이었어요. 전처는 ‘차라리 그 복권을 찢어버렸어야 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내 생각도 같아요. 그럴 수만 있다면 찢어버리고 싶네요.”

지난해 12월 부엌에서 시작된 화재로 불타버린 잭 휘태커의 집. 휘태커는 2012년 파워볼 복권에 당첨됐다 4년 만에 파산을 선언하면서 '돈벼락'이 낳은 비극의 인물로 회자된다. [사진 데일리메일 캡처]

━ 돈이 나를 바꾸기 전에 준비할 것들

5400억원대 돈방석에 앉은 웨인치크의 행운도 이런 비극으로 끝나게 될까요. 꼭 그렇진 않겠지요. 캐나다의 피터 더숍이란 사람이 귀감이 될지도 모릅니다.

부동산 중개인이었던 더숍은 2007년 복권 당첨으로 약 36억원을 수령할 수 있게 됐지만 1년 가까이 이를 찾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에게만 당첨 사실을 알렸을 뿐 여자친구에게도 비밀로 했습니다. 더숍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듯 월세 집에 살면서 하던 일을 하다가 수령 유효기간을 3주 남기고서야 비로소 당첨금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랬느냐고 묻자 그는 답했습니다. "갑작스럽게 거금이 굴러들어오면 일상이 변할 테니까 그에 대해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죠."

오늘 로또를 사기 전 다시금 위에서 읽은 행운과 불행의 주인공들을 떠올려보시지요. 당첨돼서 현명하게 살 수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이지만 꽝이 돼도 슬퍼하지 맙시다. 어쩌면 우린 인생이 꽝나는 벼락을 피한 건지 모르니까요.

■ 알쓸팁- 복권 당첨 뒤 행동요령
「 파워볼이든 로또든 상상 못할 거액에 당첨된다면, 아래 행동 수칙을 잊지 말자. 8500억원짜리 1등 파워볼 당첨자가 가려지기 전, 미국 내 여러 미디어와 인터넷 전문가들이 해준 충고다. (한국 실정에 맞춰 활용하는 건 각자 몫이다)
1. 변호사를 고용하라 복권 당첨액을 수령하기 전에 먼저 변호사를 만나라. 친하고 잘 아는 변호사 필요 없다. 대형 로펌의 가장 실력 있는 변호사를 선임하라. 당첨금 수령은 그 뒤의 일이다.
2. 가급적 신원을 노출시키지 말라 가장 좋은 건 당첨된 사실을 여기저기 알리지 않는 것이다. TV 등 언론은 피하는 게 좋다. 만약 신상이 털렸다면 일단 전화번호를 바꾸고 이사도 고려해보라.
3. 한번에 다 받을지 연금식으로 받을지 정하라 일각에선 안전을 고려해 연금식으로 받길 권하지만 세금 등 여러 사안을 따져보길 바란다. 당첨자 대부분은 한번에 받는 걸 선호한다.
4. 노(No)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라 놀라울 정도로 여기저기서 연락이 온다. 가족과 친지는 물론, 각종 기부단체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유치원 친구까지 모두 애처로운 사연이 있다. 다 들어줄 건가?
5. 가족에게 나눠줄 액수를 미리 정하라 20%든 30%든 딱 정해라. 절대 현금으로 주거나 집이나 차로 사주지 마라. 그들을 위한 자산운용에 금액을 맡기고 수년에 걸쳐 지급되도록 하라.
6. 절반 정도는 장기투자에 집어넣어라 미국 장기 재무부증권(5년이나 10년짜리)이나 주요 7개국(G7) 장기증권 같은 안전자산에 투자하라. 미국이 망하지 않는 한 알거지가 될 일 없다.
7. 남은 돈은 폼나게 써라 복권을 왜 샀는가. 자, 이제 근사한 집도 사고 차도 바꾸자. 친구들에게 한턱 낼 수도 있다. 다만 잊지 말라. 친구와 돈은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다. 당신의 돈에 열광하는 이들은 당신의 친구가 아니다. 」


90억원 복권당첨자의 비참한 말로
...머스웨이건씨는 갑작스럽게 거액을 손에 쥐었지만 무분별한 소비생활과 잇단 사업 실패, 술과 마약으로 인해 범죄의 길로 접어든 후, 당청금을 모두 탕진한 이후에는 농장에서 일을 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지난 10월 2일 자신의 부모 집 차고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654억 로또 당첨 美부부의 비극적인 최후       
...남편과 함께 5년전 잭팟을 터트린 버지니아 멧칼프 메리다(51)라는 여성은 당첨뒤 이혼하고 오하이오강이 내려다 보이는 저택에서 지내다 지난 23일 숨진 채 발견됐다. 메리다는 숨진 뒤 수일이 지나서야 아들에 의해 발견됐으며 정확한 사인을 찾기 위해 경찰이 부검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자신은 종이 박스에 주름내는 당시의 일을 그만두고 집을 한 채 살 계획이며, 지게차 기사였던 남편도 호주로 가서 새 삶을 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편 멧칼프는 호주 이민 꿈을 실현하기도 전인 지난 2003년 45살의 나이로 삶을 마쳤다...

로또복권 당첨이 갈라놓은 우정       
...25일 현지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이 식당의 종업원 9명은 이틀전 복권공사 사무실에 당첨금을 찾으러 갔으나 상금은 지급받을 수 없었다. 2명의 다른 종업원이 직전에 나타나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의를 제기한 맥퀼런(25)과 바이스가버(19)라는 종업원은 자신들도 매주 2달러씩 복권 구입비용을 분담해왔는데 동료들이 자신들을 당첨금 분담에서 제외시키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맥퀼런은 "그들 대부분은 어릴 적부터 친구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흥분했다...

'9억' 탕진 복권당첨자, 절도행각 벌이다 덜미       
...복권에 당첨돼 벼락부자가 된 독일의 한 남성이 재산을 모두 탕진한 뒤 절도행각을 벌이다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고 14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지난 1997년 복권에 당첨되면서 일확천금을 거머쥔 이 남성은 지난 2003년 재산을 모두 탕진한 후 최근까지 총 60여차례의 절도행각을 벌여 온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 조사결과 이 남성은 복권에 당첨된 직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것으로 알려졌으며지난 2003년 가을까지 76만 유로(약 9억 3,000만원)에 달하는 당첨금을 모두 써버린 것으로 밝혀졌다...

복권 때문에 갈라선 어머니와 아들
미국 뉴저지주에 사는 마이클 클린지비엘씨는 97년 복권에 당첨된 뒤 어머니와의 연이 끊어졌다. 당첨 직후 “복권을 사는 데 매달 20달러씩을 보탠 만큼 당첨금 220만달러 중 내 몫을 달라”는 어머니와의 분쟁이 소송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2년 뒤인 99년 아들이 어머니에게 50만달러를 지급하기로 한 합의로 소송은 끝났지만 수년 동안 대화 한마디도 없을 정도로 모자관계는 완전히 금이 가버렸다. (조선일보 2003년 4월 기사)

복권 당첨으로 살해 협박 받고 살다
90년대 초 4530만달러의 복권에 당첨됐던 톰 티히(미 캘리포니아주)씨 가족은 당첨 직후부터 가까운 쇼핑센터에 나갈 때도 경호원을 대동하고 있다. 신원이 알려지면서 얼굴도 모르는 친척과, 돈 때문에 절망에 빠진 낯모르는 사람들이 줄지어 집을 찾아왔고, “돈을 주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전화도 수시로 걸려왔기 때문이다. 티히씨는 이후 무기를 소지한 채 생활하고 있고, 배달돼 오는 우편물도 폭발물이 있는지 일일이 검사하고 있다. (조선일보 2003년 4월 기사)

복권으로 백만장자된 목수, 운둔형 외톨이로 죽다
작년 1월에는 영국 버밍엄시에서 복권으로 백만장자가 된 필 키천(58)씨가 자택 소파에서 숨진 채 발견된 일도 있었다. 99년 목수일을 하다 180만파운드의 복권에 당첨된 그는 당첨 이후 거의 집밖에 나오지 않은 채 술에 탐닉해온 알콜중독자로, 기관지성 폐렴으로 홀로 숨져간 사실이 영국경찰에 의해 밝혀졌다. (조선일보 2003년 4월 기사)

영적 안전 불감증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이 38도 선을 넘어 남한으로 남침하였다.
이 일로 인해 전국토의 절반 이상이 초토화가 되었고, 남북의 동포들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군인들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렸다.
이제까지 총도 한 번 본 적이 없었던 13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소년들이 학도병으로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어 희생되어야 했다.
가히 한민족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북한 남침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수도 서울이 쉽게 함락되지만 않았어도 이처럼 비극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울이 이토록 빨리 함락된 이유가 무엇인 줄 아는가?
안전불감증 때문이었다.

1950년 여름, 남쪽은 어느 때보다 여유롭고 고요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누구도 고요한 날들 속에서 전쟁이 시작되리라 상상하지 못했기에 북한군의 공격부대들이 38도 선 상에 전투배치된 것을 인지하지 못하였고, 6월 23일 자정을 기점으로 한국군은 그동안 발령해 온 비상경계령을 해제하였다.

다음 날인 6월 24일은 토요일이자 농번기 즈음이었다.
상급기관은 장병들로 하여금 외박과 모내기 휴가를 실시했고, 이에 우리 군은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피해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큰 위협이 바로 코앞에까지 이르렀으리라고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다.
 
안전 불감증의 무서움이 바로 이것이다.
평소에는 아무 일 없다가도 막상 사고가 일어나면 너무도 큰 피해와 큰 상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현장 가운데에서 큰 사고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고가 일어나면 큰 피해와 상처가 발생한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나에게 언제든지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안전 불감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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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링컨의 두 아들이 도너츠를 가지고 싸우고 있었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큰 일이 일어난 줄 알고 링컨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링컨은 대답했다.

"제가 도너츠를 세 개 사왔는데 서로 많이 먹겠다고 싸우는 중입니다.
그런데 걱정마세요, 부인. 제가 하나를 먹어 치우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Episode #2.

링컨의 아내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낭비와 사치가 과했다.
어느날, 링컨의 아내가 생선가게 주인에게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생선 가게 주인 역시 막무가내 부인 때문에 적잖게 당황했다. 
링컨은 당황해하는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인께서는 15분 동안 고통받으셨겠지만,
 나는 저 여자와 15년을 함께 살고 있소. 
 그러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구려."

Episode #3.

링컨이 상원의원에 입후보 했을 때,
그의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더글라스와 논쟁하게 되었다.
더글라스는 링컨의 약점을 잡아 비방하기 시작했다.

"링컨은 전에 그가 운영하던 상점에서 술을 판매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상원의원이 될 수 있습니까?"

링컨은 대답했다.

"더글라스 후보가 말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저의 최대고객은 더글라스 후보였습니다.
저는 이미 그 가게를 떠났지만,
더글라스 후보는 지금까지 그 가게의 충실한 고객으로 남아 있습니다."

더글라스가 다시 반격한다.

"링컨은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두 얼굴의 이중인격자 입니다."

링컨은 대답했다.

"제가 두 얼굴의 소유자라면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 왜 못 생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습니까?"



정의

삶에서 누리는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행운.

개설

복이 ‘운수’나 ‘행운’과 관련된 것으로 풀이되고 있는 것은 복이 인간의 힘을 초월한 천운(天運)에 의해서 저절로 돌아가는 기수(氣數)주 01)로 이해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 복은 ‘아주 좋다’거나 ‘오붓하다’는 말에서 풍기고 있는 것처럼 필요한 것이 허실(虛失) 없이 두루 넉넉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복이란 한자는 원래 ‘시(示)’와 ‘복(畐)’의 회의문자(會意文字)이다.
‘시’는 하늘[天]이 사람에게 내려서 나타낸다는 신의(神意)의 상형문자이고,
‘복’은 복부가 불러 오른 단지의 상형문자라 한다.
‘복’의 한자 어원도 역시 복의 뜻이 가지는 두 함축, 곧 사람의 힘을 초월한 운수라는 뜻과 오붓하고 넉넉하다는 뜻의 함축을 풀이해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아주 좋은 운수’가 무엇이며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는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혹은 사회나 문화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풀이가 나올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다만 복이란 사람의 삶에 관련된 선악·행복·불행의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고대에는 장수를 누림(壽), 가멸함(富), 건강하고 마음 편안함(康寧), 심성의 후덕함(攸好德), 임종을 성취함(考終命)을 다섯 가지 복(五福)으로 보았다(書經 洪範九疇).

그런가 하면 장수함(壽)·가멸함(富)·귀함(貴)을 복이라 이르기도 하였다(韓非子).

한편 우리나라의 속설에는 아내를 잘 만나는 것도 복이요, 이가 튼튼한 것도 복이라 일컫고 있다. 이처럼 복의 개념은 그 외연적(外延的) 의미도 일정하지가 않고 내포적(內包的) 의미도 분명하지만은 않으나, 한국사람들은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복을 빌면서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비록 한국사람들이 실제로 복을 받으며 태어나서 복을 누리며 살고 간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복을 비는 가운데 태어나서 복을 비는 마음속에서 자라나 복을 비는 뭇 상징 속에 둘러싸여 복을 빌며 살다가 다시 복을 비는 마음속에서 죽어간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복은 한국인의 삶을 그 밑바닥에서 움직이고 있는 가장 끈질기고 가장 보편적인 동기이다.
그런데 복은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의식에 너무나도 밀착되어 있음으로 해서 거리를 두고 대상화해서 인식하기는 어려웠고, 지금까지 별로 인식하려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언제나 더불어 있기 때문에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복을 비는 마음이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해서 되돌아보면 우리들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에, 그리고 우리들의 가까운 의식주 생활에 얼마나 많이 복을 비는 말과 그를 조형화한 상징들이 산재하고 있는지 쉽게 깨닫게 된다.

말의 쓰임새

낱말로서의 복은 ‘복이 있다.’, ‘복이 찾아온다.’, ‘복이 달아난다.’의 경우처럼 주어로서도 쓰인다. 하지만 그보다는 ‘복을 받는다.’, ‘복을 누린다.’, ‘복을 타고난다.’, ‘복을 심는다.’, ‘복을 기른다.’, ‘복을 아낀다.’ 등 목적어로서 쓰이는 경우가 더욱 흔하게 눈에 띈다. 그밖에도 복은 ‘복스럽게 생겼다.’, ‘복이 많게 보이더라.’ 등과 같은 수식 형용구로도 쓰이고 있다.
복이란 글자가 들어간 한자의 숙어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보기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복지(福祉)·복조(福祚)·복락(福樂)·복력(福力)주 02)·복분(福分)주 03)·복상(福相)주 04)·복수(福數)·복운(福運)·복수(福手)·복인(福人)·복승(福僧)·복장(福將) 등이다. 이상은 복자가 머리에 오는 경우이다.
그 다음 복자가 나중에 오는 숙어들의 보기를 들면 먼저 복을 동사의 목적어로 삼은 기복(祈福)·초복(招福)·발복(發福)·축복(祝福)·석복(惜福)·음복(飮福) 등이 있고, 다시 복을 수식 형용하는 다복(多福)··만복(萬福)·소복(小福)·박복(薄福)·지복(至福)·청복(淸福) 등의 숙어도 있다.
그밖에도 복과 같이 붙어 다니는 개념으로서 두자가 흔히 같이 쓰이고 있는 수복(壽福)·복록(福祿)·복덕(福德)·화복(禍福) 등의 복합어도 있다.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복이란 말의 실용 예를 들어보면 신년 정초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하는 인사말, 그리고 편지를 끝맺을 때 ‘댁내에 큰복이 내리시기를 축원합니다.’라고 하는 경구 등이 가장 흔히 눈에 띄는 보기들이다.
그밖에도 좋은 일을 하면 ‘복이 돌아온다.’고 말하고, 궂은 일을 하면 ‘복이 달아난다.’라고 말한다. 생김새가 좋은 사람을 보면 ‘복스럽게 생겼다.’, ‘복이 있어 보인다.’라고 말하고, 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을 보면 ‘복 없게 생겼다.’라고도 말한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개화기 이후에도 복음(福音)·복지(福地)와 같은 번역어들을 만들어내고 있고 복지사회(福祉社會)와 같은 개념도 널리 쓰이고 있다. 일반 서민생활에서는 복덕방(福德房) 출입이 잦은 ‘복부인’이란 말이 1970년대 이후 유행하더니, 1980년대에는 주택복권·올림픽복첨(福籤)주 05) 등의 말이 일상용어 속에 새로 자리잡고 있다.

의식주 생활과 복의 상징

복의 조형적인 상징은 복자 및 복과 관련된 길상문자(吉詳文字)와 함께 한국인의 전통적인 의식주 생활의 여러 군데에서 숱하게 눈에 띈다.
먼저 의생활과 관련된 것부터 살펴보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 맨 먼저 그를 싸주는 강보(襁褓)에 흔히 수놓은 글자가 복자이고 갓난아이의 베갯모(베개의 양쪽 마구리의 꾸임새)에도 복자를 수놓은 것을 자주 본다.
일반사회에서도 아이들의 돌옷, 부녀자의 한복에는 복자를 수놓거나 복자무늬의 옷감이 이용되었고, 궁중에서는 왕비나 비·빈의 원삼(圓衫), 공주의 활옷[花衣], 당의(唐衣) 등에 역시 복자 무늬를 수놓거나 복자 무늬가 든 감을 쓰곤 하였다.
비단 갓난아이의 강보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염집의 침구에는 요·이불·베개에 두루 복자 무늬가 든 감이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베갯모의 수 글자에는 복자와 복에 관련된 길상문자가 많이 눈에 띈다.
오복을 기원하는 의생활에서의 조형적 상징은 특히 전통사회의 안방에서의 부인네들 살림살이 주변에 널리 깔려 있다. 반짇고리·바늘겨레·자[尺] 등 바느질과 관련된 물건에도 복자가 자리잡고 있고, 특히 장신구에 있어서는 복자나 복을 상징하는 박쥐[蝙蝠(편복):의 한자어가 복과 같은 소리를 낸 데서 유래]는 가장 흔히 쓰이는 장식 주제가 되었다.
부인의 관모류에는 화관(花冠)이나 족두리 혹은 전모(氈帽)에 복자와 복과 관련된 길상문자를 수놓기도 하고 붓으로 적기도 하였다. 궁중에서나 반가(班家)에서 길사(吉事)가 있을 때 옷을 정장한 부녀들이 옷고름·안고름·허리띠 등에 매단 노리개류에는 복과 관련된 수(壽)·부(富)·귀(貴)의 세 글자를 엷은 구리판에서 오려내어 술(絲線) 세 줄에 달고 그 위를 매듭으로 장식한 문자삼작(文字三作),노리개가 있다.
또 오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도금(鍍金)한 박쥐를 아래위의 매듭 사이에 꿴 편복삼작(蝙蝠三作) 노리개가 있다. 그밖에도 복주머니가 있고 복자가 그려진 신발이 있으며, 복자무늬의 감으로 지은 여러 갈래 여러 가지의 옷가지들이 퍼지고 있었다.
식생활에 있어서는 음식류·식기류 등에 다같이 복과 관련된 상징조형이 널리 사용되었다.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한중록」을 보면 궁중에서도 왕세자가 “……두 살에 글자를 배워서 육십 여자를 쓰시고, 세살에 다식(茶食)을 드시매 수(壽)자·복(福)자 박은 것을 골라 잡수시고……”라는 기록이 눈에 띈다.
그러한 다식을 만들기 위해서 복자·수자를 새긴 다식판(茶食板)이 남아 있고 복떡·복희병(福喜餠)을 만들기 위해서 복자와 희자를 새긴 떡살 또한 널리 퍼져 있었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민속에서 김쌈을 먹는데 이것을 복쌈이라고 한다. 복날에는 들깻잎으로 쌈을 해서 먹는데 그것도 복쌈이라고 일컫는다.
정월 초하룻날에는 쌀을 씻는 조리를 새벽에 파는데, 그것을 사면 한해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에서 복조리(福笊籬)라고 일컫는다. 복자나 복과 관련된 길상문양을 그리거나 새긴 식기류로는 찬합·주발대접·수저·수저집·소반·번상·전골상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사람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도 복스럽게 먹는다고 칭찬하는가 하면 복이 달아나겠다고 꾸짖기도 한다. 제사를 마치고 제관이 제사에 쓴 술이나 제물을 먹는 것은 음복(飮福)한다고 말한다.
주생활에 있어서는 장롱·반닫이·삼층장·문갑의 가구류, 창문·벽걸이 등의 장식물에 복자와 복을 상징하는 길상문양 등이 자주 등장한다.
집터를 고를 때도 지덕(地德)이 좋은 복지(福地)를 찾기 위해 풍수지리설을 따르는 것은 복을 많이 누릴 수 있는 복가(福家)를 짓고자 하는 바람에서이다. 그뿐만 아니라 집을 옮길 때에는 다시 방위(方位)를 따지고 이사 날짜를 택일하는 것 역시 복가를 찾는 마음의 표현이다.
한편 방안 장식용으로 그려진 민화(民畫)는 관가의 것이건 민가의 것이건 그 중심적인 화제(畫題)가 복을 비는 표상들이다. 십장생도(十長生圖)의 그림이나 길상문자를 채색, 변형해서 회화화한 병풍 등이 보기이다.
여염집의 기둥이나 대문에 입춘대길(立春大吉)을 비는 춘방(春榜)주 06)에서 흔히 보게 되는 것이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는 복자가 든 글귀이다.

이름 짓기와 복

복을 비는 마음은 한국인이 지은 여러 이름에도 나타난다. 사람에 대한 작명(作名)으로는 복동(福童)·만복(萬福)·수복(壽福)·복수(福壽)·현복(賢福)·복실(福實)·복녀(福女)·복희(福姬)·복란(福蘭)·복순(福順) 등이 복자가 이름 속에 든 흔히 보는 이름이다.
복바위·아들바위(三神바위)·복고개·복고치(福高峙)·복샘[福泉]·장수샘[長壽泉] 등은 자연물에 붙인 기복의 명칭이다. 그밖에도 동리이름·가게이름·암자이름 등에 역시 복자가 든 이름을 숱하게 보게 된다.

문학작품에 나타난 복

문학작품에서는 궁중문학이나 서민문학에 복이란 말이 많이 등장한다. 한글창제 후 처음으로 나라에서 편찬하여 우리말 노래를 실은 『용비어천가』는 그 제1장이 “해동 육룡이 ᄂᆞᄅᆞ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라는 말로 시작된다.
조선조의 궁정기사 작품인 「한중록」을 보면 혜경궁 홍씨가 처음 궐내에 들어가 인원왕후(仁元王后)를 뵐 때 왕후는 “아름답고 극진하니 나라의 복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한편 세자빈으로 책빈된 홍씨의 친정 부친은 “……백면 서생이 일조에 왕실에 척련(戚聯)주 07)하게 되니, 이것은 복의 징조가 아니라 화의 기틀이 될까 한다.”고 오히려 복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궁중에 들어가면……말씀을 더욱 삼가서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라고 타이르고 있다.
광해군시대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나인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계축일기(癸丑日記)」에 “……다행히 그 난에서 벗어나셔서 복이 있으신가 보더라.”,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어진 일을 하여도 복을 못 얻을까 두려워하는 법인데 하물며 사특한 일을 하여 어찌 복이 올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는 등의 대목이 보인다.
숙종시대의 민비폐비사건(閔妃廢妃事件)을 서술한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에도 “국모는 만민의 복이라……”, “두분 대비께서 극진히 애중하게 여기시어 국가의 복이라 축수하시고……” 등의 복이란 말의 어용(語用)이 눈에 띈다. 궁궐 안에서도 복을 비는 마음은 여느 여염집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벼슬이 대제학·판서에 이르렀던 조선조 숙종대의 양반 문인 김만중(金萬重)이 쓴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에도 “한림상공은 오복이 구비한 상이요…”, “이러므로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하는 따위의 복에 관련된 구절이 눈에 띈다.
서민문학의 경우 가령 판소리 「심청전」을 보면 심봉사가 “다만 독녀 딸이라도 오복을 점지하여……”하며 딸의 복을 비는가 하면, 딸 심청은 삼신상을 차려놓고 “소녀 아비 허물일랑 이 몸으로 대신하고 저의 아비 눈을 밝게 하여 천생연분 짝을 만나 오복을 갖게 주어……”하며 아비의 복을 비는 대목 등 도처에서 복이란 말의 실용 예를 볼 수 있다.
나아가서 서민문학의 작품들에는 막연하게 추상적인 복을 비는 경우보다는 복의 구체적인 내용을 일일이 들어 빌고 있는 표현이 많아서 한국적인 복의 개념의 외연과 내포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된다.
그러한 고전 문학작품의 내용을 보면 대부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마음속으로 희구하고 있는 복의 표상은 중국의 『서경』이나 『한비자』에서 거론되고 있는 ‘오복’의 복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복이란 그처럼 어려운 한문 전적을 들추어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비는 것이 아니다. ‘유호덕(攸好德)’이나 ‘고종명(考終命)’과 같은 어려운 문자 속은 못 알아보는 사람들이나 ‘수’·‘복’·‘강녕’과 같은 한자조차 못 읽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무릇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다 같이 빌고 있는 것이 복이다.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의 구별 없이 설날의 새해 인사말로 나누는 복, 사사로운 편지 사연을 끝맺으면서 흔히 마지막의 경구로 비는 복 등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복의 한국적인 의미함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일상적인 서민생활의 문맥에서 희구하고 있는 기복내용을 서민문학작품의 경험적인 실용 예에서 추출, 범주화해보는 것이 지름길이 된다.
여기에는 우리 나라 어문학의 유산 가운데서도 가장 평민적인 민중예술이라 할 수 있는 판소리 사설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복을 비는 축원문 내용이 복의 표상을 들추어 내주는 구체적인 자료가 된다. 가령 「심청전」을 보면 심봉사가 첫국밥을 지어 삼신상에 올려놓고 다음과 같이 딸의 복을 빌고 있다.
“……다만 독녀 딸이라도 오복을 점지하여 동방삭의 명을 주고 석숭(큰부자)의 복을 내려, 대순증자 효행이며 반희의 재질이며 수복을 고로 태여 외 붇듯 가지 붇듯 잔병 없이 잘 자라나 일취월장시킵소서.” 한편 심청이는 “……소녀 아비 허물일랑 이 몸으로 대신하고 아비 눈을 밝게 하여 천생연분 짝을 만나 오복을 갖게 주어 수복 다남자를 점지하여 주옵소서……”라고 축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축원에 이어 주인공이 온갖 고초를 겪다가 마침내는 복을 누리게 되는 해피엔딩의 줄거리를 가지는 판소리 작품에서는 그러한 복의 명세를 나열해놓고 있어 역시 복의 표상을 밝혀주고 있다.
예컨대 「춘향전」의 경우를 보면 “……이때 이판(吏判)·호판(戶判)·좌우영상 다 지내고 퇴사 후 정렬부인과 더불어 백년동락할 새 정렬부인에게 삼남이녀를 두었으니 개개히 총명하여 그 부친을 압두(壓頭)주 08)하고 계계승승하여 직거일품(職居一品)으로 만세유전하더라……”고 끝을 맺고 있다.
한편 「흥부전」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흥부 내외는 부귀다남(富貴多男)하여 향수(享受)를 팔십하고 자손이 번성하여 개개 옥수경지(玉樹瓊枝)주 09) 같아서 자산이 대대로 풍족하니 그 뒤 사람들이 흥부의 어진 덕을 칭송하여 그 이름 백세에 민멸(泯滅)치 아니하더라.”
위의 몇 가지 보기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에서 희구한 복의 구체적인 표상은 수(동방삭의 명, 백년동락, 향수를 팔십하고), 그를 위한 강녕(수복을 고로 태여 외 붇듯, 가지 붇듯 잔병 없이), 귀(이판·호판·좌우영상 다 지내고, 직거일품으로), 그에 따른 공명(그 이름 백세에), 자식복(수복 다남자를 점지하여, 삼남이녀를 두었으니 개개히 총명하여, 내외는 부귀다남하여) 등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를 더욱 크게 묶어서 분류하면 수·부·귀·다남의 네 범주가 전통적인 복의 표상임을 알 수 있다.

수의 복

우선 오래 산다는 것을 복으로 여긴다.
수는 그 자체가 삶의 성취요 큰 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는 나이가 회갑이 되면 수연(壽筵)이라 하여 오랜 삶을 축하하는 큰 잔치를 베풀어왔다.
그를 위해 오랜 삶을 축하하는 말(壽詞), 오랜 삶을 축하하는 술(壽酒), 오랜 삶을 축하하는 시(壽宴詩)가 있었다.

예를 들면 “만수산 만수봉에 만수정(井)이 있더이다
그 물로 빚은 술을 만수주라 하더이다
진실로 이 잔 곧 잡으시면 만수무강하오리다.” 하는 따위이다.

물론 수를 누린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에서 오래도록 산다는 것이다.
장수를 비는 마음은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기원한다거나 저승에서 ‘무한’한 삶을 누린다는 생각과는 다르다.
수라고 하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현세적인 개념, 상대적인 시간의 개념이요,
그것을 초월한 ‘영원’이나 ‘무한’의 개념 같은 것과는 상관이 없다.

한국적인 복의 세목 가운데서 수가 첫째로 꼽힌다는 것은 수를 위해서는 여느 다른 것들은 희생이 되어도 감내할 수 있다고 하는 속담들에서 드러난다.

가령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거꾸로 매달아도 사는 세상이 낫다.’는 따위이다.

무슨 일이 있건 어떤 꼴을 당하건, 땡감을 따먹을 만큼 가난해서 ‘부’를 못해도, 혹은 개똥이나 말똥에 굴러넘어질 만큼 천해서 ‘귀’를 못해도, 그저 오래오래 이 세상에 살아 ‘수’만 하면 된다는 현세긍정주의가 이들 속담에는 표백되고 있다.
‘이승’이나 ‘이 세상’이란 말은 결국 목숨을 지녀 누리는 세계, 생명의 세계라는 말이다. 따라서 수의 개념에는 현세긍정주의와 함께 자명한 이치로 생명긍정주의가 전제되고 있다.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느니, ‘죽은 석숭(石崇)이 산 개만 못하다.’느니, 혹은 ‘소여(小輿)·대여(大輿)에 죽어가는 것이 헌 옷 입고 볕에 앉았는 것만 못하다.’는 한국의 속담들은 바로 그러한 생명지상주의를 통속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보기들이다.
이러한 현세긍정주의·생명지상주의의 입장에서 보는 죽음은 가해자요, 삶은 피해자이다. 죽음은 재해처럼 덮치고, 삶은 죽음을 ‘당한다’고 느낀다.
그뿐만 아니라 ‘시간’조차 목숨의 수를 깎아먹는 것이기 때문에 ‘무정세월’이라 느끼고, 그래서 ‘허송세월’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사람을 뒤쫓고 있는 강박감이 한국인의 사생관과 시간관의 바탕에는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의 복

수를 비는 마음이 그처럼 죽음에 쫓기고 있는 목숨이 죽음으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져서 오래오래 이승의 삶을 누리려는 소망에서 나온 것이라면 부를 비는 마음도 일차적으로는 가난으로부터 되도록 멀리 벗어나서 푸짐하게 이승의 삶을 누려보자는 소망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생과 사, 수와 요(夭)가 짝이 되는 것처럼, 부는 빈(貧)과 짝이 된다. 수복을 비는 배경에는 유아사망률이 높고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40세도 넘지 못했던 전통사회의 흔한 단명·요절(夭折)이 있었던 것처럼 부복을 비는 배경에도 역시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전통사회의 보편적인 빈곤현상이 깔려 있었다.
박지원(朴趾源)의 소설 「허생전(許生傳)」을 보면 서울의 가난한 선비가 돈 1만금을 빌려서 전국의 과일을 매점해 두었다가 열배 값을 받고 되판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 작품에서 주인공 허생이 “겨우 1만금으로서 나라가 기울었으니 그 얕고 깊음을 알 수 있구나(以萬金傾之, 知國淺深矣).” 하고 넋두리하고 있는 것처럼, 지난 세기말까지 전통사회의 개인생활이나 국가경제는 빈곤하였던 것이다.
서민문학인 판소리의 사설에는 그러한 가난에 대한 한(恨)이 도처에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흥부전」에서 흥부의 아내는 “지빈무(至貧無)주 10)의 이내 형세, 금옥 같은 애중자식 헐벗기고 굶주리니 그 아니 가련한가, 세상에 주린 사람 뉘라서 구원하며……이 세상에 답답한 일 가난밖에 또 있는가.” 하고 넋두리하고 있다.
부의 복을 빈다는 것은 우선 이처럼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소극적인 동기에서 나온 소망이다. ‘가진 돈이 없으면 망건 꼴이 나쁘다.’고 느꼈고, ‘돈이 없으면 적막강산이요, 돈이 있으면 금수강산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가난을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고 했던 것이요,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부를 소망했던 것이다.
부를 비는 마음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일차적 소극적 동기에서부터 보다 더 많은 재물을 추구하려는 이차적·적극적 동기로 발전한다. 현실적으로 보다 더 많은 재물을 바라는 마음은 가난한 사람에게나 부자에게 있어서나 매한가지(마찬가지)이다.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처지가 바뀌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싶어하는 탐(貪)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 나라 고전문학에서의 부의 정형화(定型化)된 묘사에는 모든 것을 선별 없이 다 갖추어대는 일종의 망라주의·나열주의의 표현이 흔히 눈에 띈다.
가령 「옹고집전」을 보면 석숭(石崇)의 부자와 도주공(陶朱公)의 성세를 부러워하지 않을 정도의 주인공이 누리는 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의 마당 꾸밈새를 이렇게 적고 있다. “앞뜰에 노적이요 뒤뜰에 잠옥이라, 울 밑에 벌통 놓고 오동심어 정자삼고, 송백심어 차면하고 사랑앞에 연못 파고, 연못 위에 석가산을 무어놓고, 석가산 위에 일간 초당을 지었으되 네 귀에 풍경이라…….”
또 「춘향전」의 춘향어미가 이도령을 사위로 맞아들일 것을 생각하고 주효를 차려내오는 장면에는 다음과 같은 장광설이 이어진다. “주효를 차릴 적에 안주 등을 볼짝시면 굄새도 정결하고 대양판 가리찜, 소양판 제육찜, 풀풀뛰는 숭어찜, 포도동 나는 메추리탕에 동래 울산 대전복. 대모장도 드는 칼로 맹상군의 눈썹 채로 어스비슥 오려놓고, 염통산적 양볶이와 춘치자명 생치다리, 적벽대접 분원기에 냉면조차 비벼놓고, 생밤·찐밤·잔송이며 호도·대추·석류·유자·준시·앵두·탕기 같은 청술레를 칫수 있게 괴었는데, 술병치레 볼짝시면 티끌 없는 백옥병과 벽해수상 산호병과 엽락금정 오동병과 목이 긴 황생병·자라병·당화병·쇄금병·소상동정 죽절병. 그 가운데 천은 알안자·적동자·쇄금자를 차례로 놓았는데 구비함도 갖을시고……” 가장 좋은 것을 빠짐 없이 두루 망라한다는 이러한 부에 대한 소망은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을 나타내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의 물질주의는 수의 현세주의와 함께 한국적인 현실주의의 두 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의 소망이 추구하는 무선별의 망라주의는 물질적인 대상에만 국한되지 않고 때로는 그를 넘어 정신적·신앙적인 차원의 세계에까지 번져가기도 한다. 「심청전」을 보면 심봉사 아내가 일점 혈육 없음을 개탄하고 온갖 재물과 정성을 들여 공들이는 사설이 펼쳐진다.
“명산 대천 신령당, 고묘 총사 석왕사에 석불보살 미륵님전 노구마지 당 짓기라 칠성불공 나한불공 백일산제 제석불공 가사시주 연등시주 창호시주 신중 마치다리 적선 길닦기와 집에 들어 있는 날도 성주, 조왕 터주 제신 가까스로 다지 내니 공든 탑이 무너지며 힘든 나무 부러지랴.”
이렇게 공을 들여 늦게 본 딸이 자라나 이번에는 공양미 삼백 석을 불전에 시주하면 아버지가 눈을 뜨리라는 말을 듣고 그 공양미를 마련하게 해달라고 다음과 같이 빈다. “상천일월 성진이며 하지 후토 성왕 사방지신, 제천제물 석가여래 팔금강보살 소소감응 하옵소소…….” 불교의 갖가지 불공이며 시주가 무교(巫敎)의 여러 귀신·잡신 섬기기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나열되고 있다.
이러한 축원내용은 거기에서 현세적인 삶을 위한 무교와 불교의 융화를 보기도 하고, 혹은 모든 외래의 고등종교를 기복 종교화하는 우리 나라의 무속적인 기층문화를 보기도 하는 등 풀이가 가능하다.
그와 함께 그러한 다신론적 내지 범신론적 축원내용은 좋은 것은 두루 갖추고자 하는 한국적인 부의 추구가 물질적인 대상에서 신앙적인 대상으로 전위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귀의 복

한국인의 복에 관한 표상 가운데서 특히 한국적인 특색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이 귀의 개념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은 자기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식과 자손들을 위해서 귀하게 되기를 바란다.
‘귀골로 생겼다.’, ‘귀격으로 생겼다.’, ‘귀태가 있다.’는 말은 그래서 누구에게나 듣기 좋은, 귀에 솔깃한 찬사가 된다.
상대방을 높이는 데에 가장 흔히 쓰이는 손쉬운 표현도 귀자를 얹히는 일이다. 상대방이 개인인 경우에는 귀공·귀관·귀체, 집안인 경우에는 귀댁·귀문, 회사나 학교인 경우에는 귀사·귀교, 나라인 경우에는 귀국·귀방이라 하는 따위이다. 사람이나 사람들의 모임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나온 부품도 역시 귀자를 붙여 높임을 받는다.
가령 남의 글을 귀간·귀서·귀찰·귀한·귀함이라 하는 것이 그 보기이다. 사람과는 관계없는 물건도 소중한 것은 귀중품이고 쇠붙이도 비싼 것은 귀금속이라고 일컫는다. 무릇 높은 것, 높여야 하는 것, 드문 것, 흔하지 않은 것, 공경받는 것, 공경해야 하는 것이 ‘귀’이다. 또한, 고귀한 것, 희귀한 것, 존귀한 것이 ‘귀’이다.
그 점에서는 귀란 비록 그에 이르는 길이 쉽지는 않으나, 그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보편적인 가치개념이다. 사람도 누구나 노력을 하거나 학식을 쌓고 덕망을 쌓으면, 남의 공경을 받고 높임을 받는 고귀한 인격, 존귀한 인격이 될 수가 있다.
이처럼 보편적·개방적인 가치개념으로서의 ‘귀’가 한국인 복의 표상에 있어서는 높은 지위, 높은 벼슬, 곧 관작(官爵)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국의 고전문학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왕조사회의 독자들에게 대리체험과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우상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그러한 우상화를 위하여 거의 정형화되고 있는 서술의 하나가 계계승승 높은 벼슬을 하였다는 ‘명문거족출신형’이다.
조선시대의 가정소설을 보면 「창선감의록」·「사씨남정기」를 비롯해서 「숙향전」·「옥단춘전」·「양산백전」·「박씨전」·「홍계월전」 등이 모두 등장인물의 벼슬치레에 관한 서술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본다.
심지어 조선조 일대의 기인(奇人)이요 반항아요, 반역죄로 처형된 허균(許筠)이 쓴 소설로 금서가 되었던 「홍길동전」조차도 주인공의 우상화를 위한 위와 같은 정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화설 조선국 세종조 시절에 한 재상이 있으니 성은 홍이요 명은 모이라, 대대 명문거족으로 소년등과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매 물망이 조야(朝野)주 11)에 으뜸이오……” 이처럼 한국의 전통사회에서는 ‘귀’가 높은 벼슬로 이해되고 있었으며, 높은 벼슬을 했다는 것은 사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가치기준으로 일반적인 승인을 얻고 있었던것이다.
이러한 귀의 개념은 전통사회의 일반적인 가치관 형성에도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수나 부의 개념과는 달리 귀는 여러 가지 주관적인 해석이 가능한 가치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수를 하는 데에는 오래 사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부를 하는 데에도 많은 재산을 모으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귀를 하기 위해 관작을 차지한다는 것은 여러 가능성 가운데의 하나에 불과하다. 예나 지금이나, 또는 여기서나 저기서나 오래 사는 것을 수라 하지 않을 수 없고, 돈이 많은 것을 부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는 달리, 때에 따라 곳에 따라 혹은 사람에 따라 벼슬을 하는 것을 귀로 보지 않을 수는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이지함(李之菡)과 같이 “귀하기는 벼슬하지 않는 것보다 더 귀함이 없다(貴莫貴於不爵).”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본시 다양한 가치관의 전개 가능성을 안고 있는 귀의 개념이 기복의 구체적인 표상에 있어서는 높은 벼슬을 하는 것으로만 일방적으로 이해되어왔다. 그것은 사람을 그가 차지한, 또는 차지하지 못한 벼슬에 따라 높혀 보고 낮추어 보는 인간관을 낳을 수 있다.
그래서 관작의 고하, 또는 관작의 유무가 사람을 평가하는 배타적인 기준이 되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또 사람이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바랄 것인가 하는 뜻을 세우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입신’이다, ‘청운의 뜻’이다 하는 말은 모두 벼슬을 해서 이름을 떨쳐보겠다는 뜻이다.
그 점에서 그것은 출세주의 인생관을 궤도화하여 놓고 있다고도 풀이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사회조직·사회질서·사회생활의 여러 구석에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의식을 심어 놓기도 하였다. 그 반면에 관작을 하는 것을 귀로 보는 가치관은 한국사회의 높은 향학열·교육열을 낳게 한 중요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전통사회에 있어서 관작을 하려면 공부를 해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등용문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를 보면 정월 초하루에는 ‘올해는 꼭 과거에 합격하시오.’, ‘부디 승진을 하시오.’ 하는 인사말이 덕담이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수가 내 목숨의 복이요, 부가 내 권속의 복이라고 한다면 귀는 내 가문의 복이다. 귀를 하겠다는 첫 번째 동기는 그 점에서는 나라를 위해서라기보다도 가문을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의 족보는 이러한 가문의식의 가시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나’를 축으로 하는 동심원의 세계가 내 목숨의 복을 비는 ‘수’, 내 권속의 복을 비는 ‘부’, 내 집안의 복을 비는 ‘귀’로 확대되면서 다시 다음 대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자손의 번성함을 비는 다남자의 기원으로 연결된다.

다남자의 복

수·부·귀에 이어 다남자를 빌게 됨으로써 복의 표상은 당대의 복에서 차대(次代)의 복으로 새로운 차원을 열게 된다. 다남자의 기복을 통해서 복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는 시간의 차원으로 진입해 들어간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의 양성 가운데서 오직 한쪽의 성, 남성만을 선호하는 이 다남자의 희구는 바로 그럼으로 해서 역설적으로 한국인의 복의 성립과 완성, 복의 운영과 수성을 위해서 비로소 여성을 끌어들이고, 여성들의 참여와 역할에 큰 비중을 주게 된다.
수는 처음부터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당자만의 복이기 때문에 젖혀놓고 본다면 가족집단의 공동체적인 복으로서의 부와 귀는 전통사회에 있어서는 다같이 남성들의 역할에 그 성취가 책임지워지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 남자아이를 낳아야 된다는 득남의 복은 일차적으로 여성들의 역할에 그 성취의 책임이 전가되어 왔다.
전통사회에서 시집을 가고서도 아이를 못 낳는 여성, 아이는 낳아도 아들을 못 낳는 여성의 설움과 아픔은 「춘향전」이나 「심청전」 등의 판소리문학에 다음과 같이 표백되고 있다.
“……무삼 죄가 진중하여 일점혈육이 없었으니 육친무족(六親無族) 우리 신세 선영향화 뉘라 하며 사후 감장 어이하리……”는 퇴기 월매가 성가라는 양반과 더불어 세월을 보내되 사십이 가까워 오도록 한 점의 핏줄을 보지 못하여 수심에 빠져서 하는 넋두리이다.
“옛 글에 있는 말씀 불효삼천에 무후위대(無後爲大)라 하였으니 자식 두고 싶은 마음 뉘 없사오니까, 소첩의 죄가 응당 내침 즉 하오나……”는 자식이 없어 억울한 한을 품은 심봉사 앞에서 곽씨부인이 하는 넋두리이다.
부부 사이에 자식이 없다는 것은 이렇듯 진중한 죄요 억울한 한이요, 불효삼천에 무후위대라 여겨졌던 것이다. 이처럼 다남자의 복을 빌던 전통가정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이를 낳는 것이지 부부간의 애정이 아니었다. 더욱이 옛날의 혼인이 당사자들끼리의 선택에 의한 연애관계의 결실이 아니다.
당사자들의 의사와는 아랑곳없이 부모들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중매혼인 경우, 며느리를 고르는 시부모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아들을 낳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모보다는 아들을 왕성하게 낳을 수 있는 ‘자왕상(子旺相)’이 며느리를 고를 때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이능화(李能和)의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를 보면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 하여 지아비가 아내를 내칠 수 있는 일곱 가지 조목을 들고 있다. 첫째는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음(不順舅姑), 둘째는 아들 못 낳음(無子), 셋째는 음함(淫行), 넷째는 투기함(嫉妬), 다섯째는 나쁜 질병가짐(惡疾), 여섯째는 말많음(口舌), 일곱째는 도둑질함(盜竊)이다.
여자가 시집가서 아이를 낳지 못하면 내침을 당하는 것이 칠거지악 중 두 번째 조목이었기 때문에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아내의 절실한 소망이 아닐 수 없었다.
민속에서는 돌부처 코를 떼어 가루를 내어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미신이 있어 아낙네들은 석불이나 마애불을 찾아가 그 돌 코를 깎아 돌가루를 먹기도 하였다. 코를 남성의 성기로 유감(類感)한 데서 나온 이 절실한 기자(祈子) 풍습은 오늘날 도처에서 발견되는 무비(無鼻) 석불의 유래로 알려지고 있다.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 전통사회에서는 여자의 궁극적인 소임이요 소망이었다는 것은, 위로는 군왕의 비빈(妃嬪)에서부터 밑으로는 여염집의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였다.
「한중록」을 보면 혜경궁 홍씨가 왕자를 낳자 영조는 크게 기뻐해서 “네 몸에서 이런 경사가 있으니 나라에 대한 공이 측량 없다.”라고 치하를 하고 있다.
‘효자는 백행지 원이라’ 백가지 행복의 근원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아들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 여자에 있어서는 ‘평생의 큰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아들을 바라는 마음, 이른바 후사를 잇겠다는 사속관념(嗣續觀念)은 동양에서는 매우 오래된 것이고 또한 보편적인 문화현상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특히 조상을 공경하고 분향하며 제사지내는 일을 높이 친 유교의 근본 숭상제도에 의해서 더욱 강화되었다. 가문의식·족보제도가 아들을 바라는 다남자의 복을 더욱 부추기게 했던 것이다. 분석적으로 본다면 복에 관한 한국인의 전통적인 표상은 수·부·귀·다남자의 네 범주로 갈라진 듯이 보이나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복의 네 눈이 하나의 그물 속에 서로 꼬리를 물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데에 복의 구조가 가지는 제합성이 있다. 수를 위해서는 부가, 부를 위해서는 귀가, 그리고 다시 귀를 위해서는 다남자가 전제된다는 점에서 수·부·귀다남자는 동심원(同心圓)의 원환(圓環)의 수레바퀴를 돌고 또 돌리고 있었다.
혹은 수·부·귀·다남자라고 하는 술어적인 표현을 주어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자아·가족·가문·후사로 바꾸어 본다면 거기에는 ‘나’라고 하는 동심원의 축(軸)을 중심으로 해서 ‘집’이라고 하는 수레바퀴가 나의 아들로 해서 집의 대(代)를 잇는 궤도를 달려가는 원환의 순환구조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복의 구심적인 핵이 ‘나’라고 한다면 그의 원심적인 궤도는 ‘집’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화복천정과 복인복과

전통적인 한국인의 삶을 그 밑바탕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본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복으로 보아왔느냐 하는 복의 내포적·외연적 의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어떻게’ 복을 누리게 된다고 믿어왔는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심층적인 행동 동기나 한국문화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복이란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어용을 살펴보면 ‘어떻게’를 들추어주는 시사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복을 빈다.’라고 말한다. 기복·축복·초복(招福) 등의 한자숙어도 같은 뜻이다. ‘발복(發福)한다.’는 말도 있는데 이는 ‘운이 틔어 복이 닥친다.’는 뜻이다.
앞에 든 말투는 사람이 기도나 축원을 함으로써 복을 불러들인다는 것이요, 뒤의 말투는 복이 스스로 때가 되어 찾아온다는 뜻이다.
전자에 있어선 복은 사람의 행위에 타동되는 목적어가 되고 있고, 후자에 있어선 복이 스스로 자동하는 주어가 되고 있다. 한쪽에는 ‘인위’에 의해서 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기대가 함의되었다고 한다면, 다른 한쪽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한 ‘운명’에 의해서 복은 ‘주어지는 것’이라는 해석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말에서 복에 관련된 여러 어용의 실례를 보면 복을 어떻게 누리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이해주는 위와 같은 인위론과 운명론이 다 같이 무성함을 알 수 있다. 먼저 운명론적인 어용의 실례부터 살펴본다.
복이란 사람의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나타난다는 뜻의 한자숙어로는 복분(福分)주 03)·복상(福相)주 04)·복수(福數)·복운(福運)·복수(福手) 등이 있다.
복이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뒤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다복하게 혹은 박복하게 타고난다고 믿는 이러한 운명론의 또 다른 표현이 우리말의 팔자타령이다.
팔자(八字)는 사람이 출생한 연·월·일·시에 해당하는 간지(干支)의 여덟 글자로, 바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의 이 간지팔자가 그 사람의 복·화·생·사를 결정한다는 생각이다.
‘부모가 반 팔자’, ‘팔자도망은 독 안에 들어도 못한다.’는 속담은 모든 것을 팔자소관으로 돌린다는 팔자타령이다. ‘쪽박을 쓰고 벼락을 피해’, ‘뒤로 오는 호랑이는 속여도 앞으로 오는 팔자는 못 속인다.’라는 속담은 팔자도망을 꾀하는 사람에 대해서 다시 그의 불가함을 재강조하는 팔자타령이다. 고전문학작품 가운데에는 복의 운명론을 주장하는 구절들이 많이 눈에 띈다.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에 보면 “사람이 세상에 나매 수요장단과 화복길흉은 천정(天定)한 수니……” 또는 “매사가 다 천정(天定)이요 인력으로 못하니……” 등의 대목이 보인다. 이른바 화복천정설(禍福天定說)을 가르치는 말귀이다.
「인현왕후전」에도 “화와 복이 하늘의 뜻에 달려 있으니……” 또는 “예로부터 홍안박복과 성인의 궁액(窮厄)주 12)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터인즉……” 등의 대목이 눈에 띈다.
서민문학에서는 「흥부전」의 “애고 답답 설움이야, 이 노릇을 어찌할꼬, 어떤 사람 팔자 좋아……부귀공명 누리면서……” 하는 흥부의 신세타령이 화복천정설의 직설적인 표현이다.
복에 관련된 어용이나 구문(構文)에는 복의 운명론만이 아니라 인위론을 시사해주는 실례도 많이 있다. 예컨대 ‘복선화음(福善禍淫)’이라는 말은 착한 사람에게는 복이, 궂은 사람에게는 화가 돌아간다는 말이다.
착한 사람이 된다,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은 인위의 영역이라고 본다면, 운명과 의지의 관계는 제로·섬의 관계가 아니라 ‘인사(人事)’가 어느 정도 ‘천명(天命)’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예상이 여기에 표백되어 있다.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고 하는 속담도 하늘이 복을 내리는 성사에 사람의 모사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복의 표상에 있어 일반적인 특징은 복이 설혹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고 할 경우에도 그러한 하늘의 뜻이 맹목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다. 복을 주고 화를 주는 것이 눈이 어두운 운명의 자의(恣意), 무동기의 또는 무상(無償)의 조화(造化)가 아니라는 믿음이다.
한국적인 복 사상의 밑바탕에는 아무런 까닭도 없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복을 받는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복인복과(福因福果)’라는 말이 그러한 믿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에서 ‘복인’은 좋은 일, 착한 일을 가리킨다. 좋은 일이 원인이 되어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이 복인복과이다.
아마도 이것은 복 사상에 미친 불교의 영향이라 추측된다. 이처럼 화복을 맹목적인 하늘의 무동기·무상의 소여(所與)주 13)가 아니라 인위의 행실에 대한 인과응보로 보려 했던 믿음은 복의 절대적인 운명론의 지배에서 벗어나 삶에 대한 윤리적·실천적 동기 부여에 길을 터놓은 것으로 풀이된다.
복이 있고 없음이 비록 팔자소관이요 천정의 운수라고는 하나, 착한 일을 되풀이해서 복인을 쌓게 되면 언젠가는 복과가 돌아와서 이른바 ‘팔자고침’을 기대해볼 수 있다는 이러한 생각은 사나운 운수를 어려운 일로 대신해서 면제받는다는 이른바 ‘팔자땜’이란 말에도 표백되고 있다. 복전(福田)·팔복전(八福田)이란 개념도 복인복과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복전’은 불(佛)·법(法)·승(僧)의 삼보와 부모를 공양하고 빈자를 불쌍히 여기는 선행의 결과로 복덕이 생긴다는 뜻에서 그 복인이 되는 삼보·부모·빈자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팔복전’도 역시 불가에서 나온 말로 복을 심는 팔인(八因)이 있는 밭, 곧 불전(佛田)·성인전(聖人田)·승전(僧田)·화상전(和尙田)·아자리전(阿闍梨田)·부전(父田)·모전(母田)·병전(病田)의 여덟 가지 밭을 가리키는 말이다.
복인을 복전이라고 표현한 것은 부처를 공양하면 밭에서 먹을 것을 거두어들이듯 복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다. 복을 밭에서 거두어들인다는 이러한 생각은 옛글에 있어 복을 곡식처럼 ‘심는다’, ‘기른다’는 표현, 또는 곡식처럼 ‘아낀다’는 표현을 낳고 있다.
「한중록」에는 “아이를 부디 잘 기르되 의복을 검소히 하는 것이 복을 아끼는 도리라.”, “검박을 숭상함은 재물을 아낌이 아니라 복을 기르는 도리오이다.”하는 말투들이 보인다. 화복은 이렇게 보면 한갓 팔자의 소관이 아니라 복을 심고 기르고 쌓고 아끼는 사람의 행실, 사람의 성품에 무관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행실, 어떠한 성품이 복과를 가져다주리라고 기대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복을 ‘어떻게’ 누리게 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답을 주는 열쇠가 될 것이다. 고전문학에서 이에 관련된 구체적인 예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자고로 후복(後福)할 사람은 초년고생을 겪게 되는 법이라.”, “모친께서는 첫 복록을 일가 친척에 골고루 나누어주고 집에는 한 되의 쌀도 남겨두지 않으셨으매……”, “아름답고 극진하니 나라의 복이라.”,
“말씀을 더욱 삼가서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 “검박(儉朴)주 14)하는 것이 복을 아끼는 도리라.”, “이것은 왕비로서 드문 일이니 저희들 평생 조심하고 부지런함을 힘입어서 길이 복을 누릴 듯이 기특하게 여겼더라.”, “이것이 모두 당신의 본질이 지극히 착하시기 때문에 자손이 대신하여 복을 누리는 줄 알고 또한 심중에 위로 받고 기뻐하더라.”(이상 한중록).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어진 일을 하여도 복을 못 얻을까 두려워하는 법인데 하물며 사특한 일을 하여 어찌 복이 올까 믿을 수 있겠습니까.”(계축일기). “원컨대, 세 자매는 자녀를 교훈하여 덕을 쌓고 복을 심어 후손까지 영화가 미치게 하소서.”(인현왕후전). “한림 상공은 오복이 구비한 상이요, 겸하여 유씨 대대로 적덕이 많사오니……”, “이러므로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앙화(殃禍)주 15)를 받는 법이로다.”(이상 사씨남정기).
이상의 몇 가지 예를 보더라도 이미 복을 누리게 될, 또는 앞으로 복을 누리게 되리라 기대되는 사람의 성품과 행실이 정형화되어 밝혀지고 있다. 우선 ‘후복’·‘초년고생’이라고 하는 개념에는 찰나주의·순간주의적인 향락에서 벗어나서 복과라고 하는 복인의 보상을 뒤로 미룬다는 금욕적·자기절제적 동기가 함의되어 있다.
그리고 이처럼 ‘미래’로 유예된 내지는 연기된 보상을 위해서 ‘현재’에 요구되고 있는 것이 ‘아름답고 극진함’이요, ‘삼감’이요, ‘검박’이요, ‘조심하고 부지런함’이요, ‘참함과 어진 일’이요, ‘덕을 쌓는 것’ 곧 적선(積善)·적덕(積德)이다. 이 역시 금욕적·자기절제적인 덕목이다.

현대사회와 복

복은 전근대적인 농경문화시대에 있어서 한국인의 삶을 동기지운 행복관이다.
그 바탕에 깔린 근본사상은
‘수’의 생명지상주의·현세긍정주의,
‘부’의 물질주의·현실주의,
‘귀’의 출세주의·입신양명주의,
‘다남자’의 가문주의·대가족주의 등이다.

절대적인 빈곤에 묻혀 있던 전통사회에서 이러한 복 사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편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던 요(夭)·빈(貧)·천(賤)·무후사(無後嗣)의 처지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탈출동기에서 잉태된 것으로 여겨진다.

보다 더 오래 살고,
보다 큰 재산을 모으고,
보다 높은 벼슬을 하고,
보다 많은 아들을 가지고자 하는 복의 추구는 ‘양(量)’의 선을 추구하는 물량주의의 윤리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 단순히 팔자소관이 아니고 적덕·적선의 복인을 쌓은 결과라고 본 데서 복 사상의 도덕적·실천적 계기가 있다. 산업화를 이룩함으로써 절대빈곤의 늪에서 벗어나고, 민주화를 이룩해서 모든 사람의 평등한 권리가 인정되는 현대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복의 개념에는 시대에 맞지 않는 요인도 드러난다.
‘귀’의 개념 속에 함축된 관존민비의 사상과 ‘다남자’의 개념 속에 함축된 남존여비의 사상 등이 그것이다. 거기다가 소아사망률이 격감하고 오히려 ‘인구폭발’의 우려가 현실적인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는 다남자의 복이란 하나의 시대착오적인 행복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단순히 오래 사는 것과 그저 많은 재산을 모으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수’와 ‘부’의 행복관도 자칫하면 향락주의나 금전만능주의로 전락할 소지가 있다.
그에 덧붙여 수·부·귀·다남자가 모두 내 목숨의 복, 내 권속의 복, 내 가문의 복, 내 후사의 복이라는 점에서 복 사상의 바탕에는 개인주의·가족주의·자아중심주의의 일면이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도 있다.
거기에는 나(私)를 초월하는 공(公)의 지평이 열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복 사상은 자칫하면 나라보다 집안이나 나를 우선하는 지사무공(至私無公)의 이기주의로 타락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수·부·귀·다남자의 복사상이 가지는 긍정적인 가치는 생명지상주의·인간주의·현실주의·성취주의·가족주의 등의 덕목이라 생각된다.
근대화과정에서 한국경제가 이룩한 고도성장의 문화적인 요인으로서 흔히 유교의 전통이 거론되고도 있으나, 그러한 해석은 유교의 전통이 더욱 강력하게 살아 있던 조선조 전통사회에서의 경제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경제가 이룩한 고도성장의 요인은 유교적인 구속에서부터도 해방된 복의 추구에서 찾는 것이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복 사상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기여한 가장 큰 실천적 기능은 생명의 절대긍정, 현실의 절대긍정에 바탕을 둔 ‘생존의 윤리’와 ‘살아남기(survival) 위한 윤리’에 있다고 풀이될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문화와 한국역사에 뿌리를 내린 ‘평화주의’에 상통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복(福))]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일곱 가지의 복



1. 말씀의 복(1:3) -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에게 약속된 축복

때가 가깝기 때문에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된 복.

예를 들면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비가 올 것을 대비하여 우산과 우비를 준비하여 외출 시 비가 올지라도 비를 피할 수 있는 것이 일기예보를 듣고 지킨 것이라고 하겠다.

마찬가지로 때가 가깝다는 예언을 듣고 때에 맞는 믿음의 길을 걷는 성도들은 예언의 약속을 깨닫게 될 것이다.

2. 신앙의 복(14:13) - 세상에서 주를 믿었던 성도에게 약속된 축복

세상에 살면서 주와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선택했던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날 때 예언된 약속을 누릴 수 있는 복이라고 하겠다. 생전에는 귀로 듣기만 했던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품에 안긴다는 것이 죽는 순간 그 은총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깨닫게 될 것이다.


3. 행실의 복(16:15) - 예수를 믿는 올바른 행실에 대한 약속된 축복

벌거벗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에서 입는 의복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서는 날 드러날 지난날의 모든 행실을 의미한다. 마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그들이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가렸던 것처럼 예수를 믿은 후에는 믿는 자의 도리와 행실을 가져야 한다.


4. 잔치의 초대장을 받은 복(19:9) - 하나님께 초대받은 손님의 축복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 입은 자가 복이 있다.


5.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의 복(20:6) 


6, 22:7,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


7.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복이 있다.

7복의 의미

1. 말씀의 복 -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축복

2. 신앙의 복 -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친구였던 자들이 누리는 하늘의 축복

3. 신부의 복 - 언제나 옷을 입고 있는 자(준비되어 있는 자)

             - 즉시 출발가능한 자 순례자의 준비

4. 천국 잔치의 복 - 하나님께 초대받은 손님의 축복

5. 영생의 복 - 죽음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자들의 축복

6. 말씀의 복 -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현명한 자들의 축복

7. 행실의 복 -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지키는 자의 축복







요한계시록은 구원받을 사람에 주신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신 것!

1. 요한계시록을 천국을 찾아가는 나침반으로 소개하는 이단들(신천지)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에 구원을 주는 곳을 안내해 주는 나침반인가? 신천지는 요한계시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국을 가려면 천국이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 천국을 가려면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천국이 시작하는 시대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요한계시록에 예언을 기록해 주신 목적은 마지막 시대인 것을 알게 하고, 천국이 어디인가를 알려주고 천국을 찾을 수 있게 하고자 주신 것이다."

신천지는 천국 그리고 구원이 마지막 때 생존해 있는 사람들만의 몫이라고 하고 있다. 마지막 이 되기까지 있었던 모든 시대의 성도 중에는 구원받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 중에 성취된 천국(신천지)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곳이 천국인지 아닌지 알려주는 이정표라고 하는 것이다. 신천지를 비롯하여,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이, 마지막 때 그리고 어느 곳에서 이뤄지는 곳이라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하는 소리이다. 과연 그러한가? 

2. 요한계시록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예언이 포함된 요한계시록에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을 받는 사람들이 대표성을 지닌 일곱교회로 표기되어 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말씀’과 ‘증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심각한 박해와 핍박 아래 있었고, 이러한 고난은 자연스럽게 갈등을 낳게 하였다. 갈등이라는 것은 외면적으로 신앙을 계속하여야 하는가? 신앙을 포기하여야 할까? 이런 갈등이었다.

고난 중에 신앙 자체에 대해 갈등한다고 하여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된다. 구원받은 사람도 심한 고난에 빠지면 신앙의 길과 관련하여 갈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단지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러한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이기고 결국에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으로 받게 된다.

이렇게 갈등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약속에 대한 확증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들고 사는 신앙인들에 필요한 것은, 이미 주신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주신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이러한 까닭에, 환난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성도에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신앙의 열심을 가지고 있으니 눈물을 닦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이라는 것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증이 필요하고, 이것을 위해 주신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3. 요한계시록은 구원받을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종말론적으로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으로 해석하는 신천지를 비롯하여 다수의 이단은 요한계시록을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을 사람들에게 주신 것으로 해석을 한다. 이것 자체가 해석의 오류이다. 요한계시록 어디에 구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말씀이 어디 있는가?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에게 천국을 찾을 수 있도록 이정표로 주셨다는 말씀이 어디 있는가? 이러한 해석은, 자신들이야말로 구원을 주는 유일한 곳이라 속여야만 하는 사람, 단체에 꼭 필요한 방도이다. 그러므로 유사 이단 단체 대부분이 요한계시록을 구원받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으로 적용한다. 

4. 결론 

요한계시록은 구원받을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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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히 될 일 12 / 06 / 2023(수)


12-06-2023(수) 요한계시록 제2강

속히 될 일(요한계시록 1:1, 22:6)

속히(타코스. tachŏs)  τάχος, ους, τό  스트롱번호 5034


1. 속력.  2. 곧.  3. 오래지 않아
발음 [ tachŏs ]
어원  / 5036과 동일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명사] 속력, 빠름, 신속.
2. [부사] a. 곧, 속히, 당장에, 행 12:7, 22:18.
               b. 오래지 않아, 곧 얼마 안 있어, 눅 18:8, 행 25:4, 롬 16:20.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The angel said to me, "These words are trustworthy and true. The Lord, the God of the spirits of the prophets, sent his angel to show his servants the things that must soon take place."   

* 속히 될 일(What must soon take place) - 곧 일어날 일

속담에 ‘구슬이 세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를 하나로 연결해야만 바르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난 두 주일에 소개했던 설교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요한계시록은 오직 예수로만 읽어야 합니다.

프리즘(Prism)은 빛을 굴절 분산시키는 광학도구를 사용하여 햇빛을 통과시키면 프리즘을 통과한 햇빛은 무지개 색으로 분해되어 영롱하게 나타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들었던 성경에 관한 모든 단편적인 정보들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렌즈로 통과시켜 주님 오실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2015-03


 Prism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일까?

요한계시록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 계시서(啓示書)
계시란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계획이란 비밀을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 예언서(豫言書)
예언이란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주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편지의 말씀입니다. -  서신서(書信書)

편지는 직접 찾아가서 전할 수 없는 내용을 글로 적어 보낼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였고 예언하셨던 말씀을 글로 적어 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속히 될 일’이란 무엇일까?

요한계시록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는 먼저 요한계시록의 범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범위를 성경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 바람직한 성경의 교훈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2장 19절에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속히 될 일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속히”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과 성경에서 사용된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속히”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본문을 포함하여 8구절로 소개됩니다(1:1, 2:16, 3:11, 11:14, 22:6, 22:7, 22:12, 22:20).

1:1, 속히 될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16, 속히 임하여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3:11, 속히 임하리니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1:14, 속히 이르는도다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세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22:6, 속히 될 일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22:7, 속히 오리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22:12, 속히 오리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22:20, 속히 오리라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의 구조

1장 : 서론
2-3장 : 일곱교회를 향한 말씀
4-5장 : 하늘 보좌
6-16장 : 일곱 인, 일곱 나파르 일곱 대접
 12-14장 : 붉은 용,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땅에서 올라온 짐슴
17-18장 : 큰 음녀, 바벨론
19장 : 백마 탄 예수, 어린 양 혼인 잔치,  용의 세력에 대한 승리
20장 : 천년 동안 왕 노릇, 곡과 마곡의 잔쟁,  흰보좌 심판(백보좌 심판)
21-22장 : 새 하늘과 새 땅(신천지),  거룩한 성 예루살렘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모든 구절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 때문에 설교의 주제에 합당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속히 될 일’이란 22장 6절에서 “속히 되어질 일” 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어서 “속히 될 일” 이란 3장 11절, 22장 7절과 12절 그리고 20절에서 “속히 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될 일”은 “속히 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가 대략 기원 후 96년이라고 합니다.
2천 년 전에 속히 될 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속히 될 일 즉 주님의 재림이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시간(時間)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해서 시간 개념으로 해석하면 ‘빠르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속히 이루어질 일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당장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면 내 생전에 오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그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주님이 오실 것으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은 그들이 만났던 주님에 대한 증거를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복음서를 시작으로 신약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만일 주님이 제자들 생전에 오셨다면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실 주님이 오시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인위적인 방법이므로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6∼7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장소(場所)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한 해석을 시간적으로 해석하면 반드시 오실 장소에 대한 궁금증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어디에’ 오실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특별한 장소를 마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처럼 소개합니다.

예를 들면 과천, 피지 섬, 브라질, 계룡산과 같은 곳이 될 것이라며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인물(人物)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을 시간과 장소로 해석하면 그 다음에는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어느 특정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1992년 시한부종말론의 이장림,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지상낙원 피지 섬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사례(은혜로교회 신옥주), 두 증인 중 한 사람이라며 영원불멸의 교주(전도관 박태선),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므로 교인들은 전 재산을 정리해서 브라질에 마련한 4천만평의 땅으로 집단 이주하여 마지막 때를 준비하라는 교회도 있습니다.

영적(靈的)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이란 시간과 공간과 인물 중심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묵시문학의 특징인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시간 개념과 장소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속히’라는 말은 ‘확실히’ ‘틀림없이’ 라는 속뜻으로 ‘반드시 될 일’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속히” 라는 의미를 ‘문자적’으로 또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면 본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묵시문학의 특성을 전제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묵시문학에서 “속히” 라는 의미는 “확실히” 또는 “틀림없이” 라는 뜻으로 “속히 될 일”이란 “반드시 일어날 일”이란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속히 될 일’이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이므로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2천년이 지나도 오시지 않았기에 아마 오시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실현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전개 이야기)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느 해 중국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그녀가 살던 마을에 백인 선교사의 가족들이 우리 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신이 분노하여 가뭄이 계속 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점점 분노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삽, 곡괭이, 쇠스랑 등 농기구를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외국 출장 중이라 집에는 어머니와 어린 펄벅밖에 없어서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준비하고 케이크와 과일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을 초대한 것처럼 대문과 집안의 모든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어린 펄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도록 하시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잡았습니다.

얼마 뒤 농기구를 든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대문이 굳게 잠기고 집안은 깜깜할 것이라고 여기고 횃불을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문이 열려있어 마당으로 들어섰더니 모든 방문이 열려 있고 방마다 불이 환하게 켜진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또한 방마다 차와 케이크 그리고 과일이 차려진 것을 보고 어리둥절하여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멈칫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정중하게 마을 분들을 맞이하며 “어서 오십시오. 정말 잘 오셨습니다.
방으로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 잔씩 드시면서 말씀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더 어리둥절 하는데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이 횃불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차를 마시고 케이크와 과일을 먹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습니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조금이라도 도망칠 방법이 있었다면 도망치다가 잡혀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살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다른 골목에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인지라 모든 것을 각오하고 그런 용기를 내어 보았단다.”

그리고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이 말은 펄 벅 여사가 절망적인 순간에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속히 될 일속히 오리라는 약속으로 반드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속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급히(ταχύ) 사화하라 - 속히(ταχύ) 사화하라 

(현대인 성경) 타협하라
(공동번역) 화해하여라
(새번역) 화해하도록 하여라

‘사화하다’(유노온, 능동형)는 상처를 준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사화(사과)는 상처를 준 사람이 해야 하고, 화해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사화와 화해가 이루어진 것을 합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 빨리(ταχύ) - 속히(ταχύ) 

성도들이 속히 해야 할 일은 부활의 소식을 빨리 가서 알려야 합니다. 종말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부활의 소식을 빨리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적인 종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지라도 여전히 유대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함께 나누며 주님 오실 그 날을 함께 준비할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속히 될 일이란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라는 사건입니다. 주님이 속히 오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속히 오실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까?

20:15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21:27 -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야 합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이름은 등과 기름을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등과 기름을 예비하기 위해서 속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신앙생활의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다면 교회에 다닌다는 것뿐이지 신앙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부족한 것이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자랑하며 즐거워 할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요한계시록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사람들이 “속히 될 일”에 대한 주제를 현실 세계에서 나타는 현상과 징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징조와 현상은 잘 몰라도 등과 기름을 예비한 지혜로운 사람들만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비유의 가르침과 같이 “속히 될 일”을 말씀하신 감추어진 은혜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속히 될 일”이란 용어가 요한계시록에서 두 번 사용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1, 속히 될 일
22:6, 속히 되어질 일

속히 될 일 또는 속히 되어질 일은 무엇인가?

3:11,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7,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12,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20, 속히 오리라(I am coming soon.) 


속히 될 일은 속히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때는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를 기준으로 대략 2천

년 전의 예언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언한 내용이 아직도 성취되지 않았다면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정말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고 있을까요? 인간의 평균 수명이 80 또는 90이라고 한다면 속히 오실 것이란 예언을 믿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속히 오리라고 예언하셨을까요?

미래에 나타날 현상과 징조들을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짧은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속히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은 무엇일까요?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성경에 소개된 말씀을 찾아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학창 시절에 시험을 치룬 줄 압니다. 시험 일자가 발표되면 모든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합니다. 시험 일자가 중요합니까? 시험을 잘 치룰 수 있는 공부가 중요합니까? 시험이 목적이 아니라 시험을 통하여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속히 될 일은 반드시 오실 것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오실 주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삶이 중요합니다.

속히 오시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 하고 질문했을 때 부활의 주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주님의 때와 기한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는 성령을 받고 증인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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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속히 될 일

'반드시'
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이'는 예언적 필연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섭리대로 일이 확실히 성취될 것을 나타낸다(Loh-meyer).

'속히 될 일'은 하나님의 계시가 미래에 성취될 사건임을 암시한다(4:1; 22:6; 단 2:28, 29, 45, Johnson).

'속히'(엔 타케이)는 본서에 7회나 반복되어 사용되었다(1:1, 2:16; 3:11; 11:14; 22:7,12 ,20)
1. 시간적 성취의 관점으로 해석한다(Vincent, Hengstenbe-rg)
2. 종말론적 임박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계시의 성취의 진행과 확실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Alford, Johnson, Morris, Mounce).
* 반드시 될 일을 의미한다.

'엔 타케이'는 예기치 못한 때에 갑자기 성취되는 것을 나타낸다.
즉 '엔 타케이'는 인간의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측면에서의 시간적 개념으로(벧후3:8) 하나님의 갑작스런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계시의 성취와 그 확실성을 나타낸다.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본문은 계시의 전달 경로를 나타낸다.
1. 하나님
2. 예수 그리스도
3.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계시의 전달자이며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를 통해 자신의 종인 요한에게 전하셨으며, 그 종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전하였다.

여기서 세 번이나 언급되는 '그'(아우투)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본문의 주 동사인 '에세마넨'(지시하신 것이라')의 주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모든 계시의 근원이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 계시를 전달받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종들, 천사, 그리고 종 요한에게 전달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한편, '그 천사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 앙겔루 아우투'는 '그 천사를 통해'라는 의미로 천사의 매개적 역할을 나타내며(22:6, 16), '그 종 요한에게'의 헬라어 '토 둘로 아우투 요안네'는 수단이나 기구를 나타내는 여격이 사용되어 요한이 계시 전달의 인간적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나타낸다.

결국 본서의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기원하여 참됨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천사와 인간적 도구로 말미암아 수신자들에게 전달된다(Sweet, Moffatt, Ironside).


속히에 대한 키아즘 구조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1: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세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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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후서 4: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ταχεως  / 인간의 시간적 개념 <빨리>    

 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ταχει  / 하나님의 시간적 개념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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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한영 / 22장 404절 / 성경 1189장 31102절 / 구약 929장 23145절, 신약 260장 7957절

성경 1,189장 31,102절 / 구약 929장 23,145절, 신약 260장 7,95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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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 22장, 404절

요한계시록 개론

   1. 서론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 1장
   2. 일곱 교회 : 2∼3장
   3.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 4∼5장
   4. 일곱 인의 심판 : 6∼7장
   5. 일곱 나팔의 심판 : 8∼9장
   6. 열린 책과 두 증인 : 10∼11장
   7. 영적 전투 : 12∼14장
   8. 일곱 대접 심판 : 15∼16장
   9. 큰 성 바벨론의 멸망 : 17∼20장
 10.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완성과 결론 : 21∼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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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장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who testifies to everything he saw--that is,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of Jesus Christ.

3. 이 예언의 말씀읽는 자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the words of this prophecy, and blessed are those who hear it and take to heart what is written in it, because the time is near.








1. 계시록 4장: 하늘 문이 열리다. 천상의 보좌 광경과 스랍들과 24장로들을 소개하다.
2. 계시록 5장: 어린 양 예수님께서 7인봉한 책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인을 떼실 준비를 하다.
3. 계시록 6장: 일곱 인을 떼심 실행
4. 계시록 7장: 전 3년반에 특별한 활약을 할 14만 4천의 주의 종들에게 인을 치심
5. 계시록 8장: 일곱 나팔이 실행되다. 그 중 첫째 나팔에서 넷째 나팔까지 불려짐
6. 계시록 9장: 다섯 째, 여섯째 나팔이 불려짐( 세계 3차전쟁이 일어남)
7. 계시록 10장: 예수님의 공중강림 예고(계10:1), 일곱 째 나팔 준비예고(계10:7)
8. 계시록 11장: 전 3년반 동안의 성도들의 신앙자세 보여줌, 14만 4천의 주의 종들의 사역활동을 두 증인으로 나타냄(계11:1-10), 성도        들의 휴거(계11:11-14), 일곱째 나팔 불려짐(계11:15), 하늘 성전문이 열리고 성도들의 하늘보좌 앞으로 나갈 준비 끝
9. 계시록 12장(삽경):후 3년반이 시작될 상황을 설명, 하늘에서 전쟁이 있겠고, 하늘 권세 잡았던 사탄과 그 졸개들이 지구로 내쫓김,  
    이  일로 후 3년반이 시작됨, 후 3년반 지상에 남김음 받은 자들을 위한 예비처 보여줌
10.  계시록 13장(삽경): 후 3년반에 활약할 두 인물 등장, 첫째 짐승 적그리스도,   둘째 짐승 거짓 선지자
11.  계시록 14장(삽경): 공중휴거해서 천상에 올라온 14만 4천로 대표되는 성도들에 대한 언급, 지상에 있는 자들에 대한 세 천사들의 경고, 첫째 천사는 땅에 남은 성도들에게 신앙지조 강조
          둘째 천사는 큰 성 바벨론으로 묘사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
          셋째 천사는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우상에게 경배하지말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말라고 경고
12.  계시록 15장: 일곱대접 재앙 준비
13.  계시록 16장: 일곱대접 재앙 실시. 첫째재앙에서 일곱째 까지
                 여섯째 대접재앙은 지상군의 아마겟돈전쟁 준비(계16:12-16),
                 계시록 19:11-16과 연결되는데 이것은 천상 군대의 아마겟돈 전쟁 준비
                 일곱째 대접재앙은 아마겟돈 전쟁과 연결,  계19:17-21
14.  계시록 17장(삽경): 후 3년 반의 음녀 즉 종교통합청의 멸절,    후 3년 반에 일어날 적그리스도의 뿌리와 정체와 활동
15.  계시록 18장(삽경): 후 3년반의 기간에 주도할 정치 권력을 큰 성바벨론으로   묘사한 세력들에 대한 심판(계16:17-21의 일곱째 대접                            재앙과도 연결(계16:17-21)), 일곱째 대접 재앙의 결과는 아마겟돈 전쟁의 결과(계19:17-21)이기도 함
16.  계시록 19장: 휴거성도들이 하나님 보좌 앞에서 모두 재회(계19:1-10)
                     어린 양의 혼인잔치(계19:7-8) 후 3년 반 동안 계속
                     성도들에 대한 상급(계19:8)
                     천상에서의 아마겟돈 전쟁준비(계19:11-16)
                     우주전쟁 아마겟돈 전쟁실시, 지구군대와 천상군대의
                     대졀(계19:17-21)
      아마겟돈 전쟁은 여섯째 대접재앙과 연결, 여섯째 대접재앙은 지상군의     
      아마겟돈전쟁 준비(계16:12-16)
17.   계시록 20장: 사탄과 그 무리들이 잡혀 무저갱에 천년동안 갇힘(계20:1-3)
                      지상에 천년왕국 설립(계20:4-6)
                   천년왕국이 끝나고 사탄이 잠시 놓여나 세상을 다시 미혹 그 결과로 곡과 마곡전쟁이 일어남(계20:7-10) 사탄과                                          그 무리들이 불못에 갇힘
                   백보좌 심판: 이것은 불신자들의 심판부활과 심판을 받고 불못에 빠짐
18.  계시록 21장: 하늘에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지상으로 내려옴.
                     어린 양의 신부인 부활한 성도들
19. 새 하늘과 새 땅인 영원 세계로 들어감(계21:1-8)     새 예루살렘의 모습 묘사(계21:9-27)
20. 계시록 22장: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환경과 생활(계20:(계22:1-5)       하나님의 아들이 된 성도들이 온 우주를 통치함(계22:   
                             5)  요한계시록의 결론부분(계22:6-21)
       파루시아! 내가 속히 오리라(계22:20)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요한계시록 서론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선언하기 위함입니다. 이 부분은 요한계시록 전체에 스며 있지만 특히 1장에 서론적으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요한 서신과 요한계시록의 차이를 강조하는 분들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 요한계시록과 요한복음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장르상 서신인지 묵시적인지가 다를 뿐 너무 닮아 있습니다. 저는 요한 서신의 저자와 요한계시록의 저자를 동일시하는 보수적 관점을 지지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장은 책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소개한다. 이 책의 목적이다. 요한을 통해 요한이 본 것을 증언하는 것임을 말한다. 요한은 자신을 소개한다.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일곱 교회에 편지하도록 했다.

요한계시록 2장

2장에서는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보낸다.

요한계시록 3장

사데교회,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보낸다. 사데 교회는  행위가 없는 교회로 죽은 교회이다. 빌라델비아는 유일하게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 교회이다.

요한계시록 4장

4장은 일곱교회의 편지가 끝나고 하늘에 열린 문에서 하늘로 올라오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늘 보좌에서는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 주위에 앉아있고, 천사들이 찬양한다.

요한계시록 5장

하늘 보좌 환상이 이어진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안팎으로 글씨가 쓰여있고, 일곱인으로 인봉 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6장

드디어 두루마기의 인을 떼기 시작한다. 첫 번째부터 여섯째 인을 뗀다.

요한계시록 7장

십사만 사천 명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십사만 사천 명은 흰 옷을 입고 있었고,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했다.

요한계시록 8장

드디어 6장에서 여섯 번째 인을 떼고 나머지 한 개인 일곱 번째 인을 뗀다.(1절) 천사가 제단 곁에서 금향로를 받아 온다.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금 제단에 드려진다. 다시 일곱 개의 나팔 소리가 시작된다. 8장에는 네 번째 나팔까지 소개된다.

요한계시록 9장

9장에는 다섯번째 나팔과 여섯 번째 나팔을 분다. 다섯 번째 나팔을 불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다. 별은 천사나 영적인 존재이다. 곧이어 별을 향해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1절)고 소개한다. 무저갱의 사자인 아바돈, 아볼루온이 등장한다. 여섯 번째 나팔은 금 제단에서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온다.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가 놓임을 받고 사람의 삼분의 일을 죽인다.

요한계시록 10장

여섯째 나팔 이후 일곱째 나팔로 이어지지 않고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를 특징하는 무지개, 해 같은 얼굴, 불기둥 같은 발은 전형적인 인자의 모습이며 1장에 소개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이후 하늘에서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려할 때 천사가 가지고 있던 두루마기를 먹으라 말한다. 두루마기를 먹자 입에는 쓰나 배에는 쓰다.

요한계시록 11장

지팡이 같은 갈대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게 한다. 이 대 두 증인이 등장한다. 이들은 증언을 하다 죽임을 당하지만 죽었다고 살아나고, 다시 하늘로 승천한다. 그리고 일곱째 천사가를 마지막 나팔을 분다.

요한계시록 12장

일곱째 나팔이 불린 후 하늘의 성전이 열린다.(19:19) 하늘에서 다시 큰 이적이 보인다.(12:1)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보인다. 그녀의 발에는 달이 있다. 여자는 해산하여 아이를 낳을 할 때 부르짖는다. 이때 하늘에서 또 다른 이적이 보인다. 붉은 용이 등장한다. 그 용이 여인을 삼키려 한다.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나 용이 쫓겨난다.(7절) 큰 용은 '옛 뱀 곧 마귀'(9절)다.

요한계시록 13장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한 마리가 등장한다.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니다. 뿔은 힘과 권세를 상징한다. 절대권력을 말한다.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지가 가까스로 살아난다. 그 후 사람들이 그를 경배한다. 짐승을 경배하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 다른 짐승에 땅에서 올라온다. 큰 이적을 행한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이마에 표를 받게 한다. 이마는 신분을 드러내는 표시가 찍는 곳으로 요한계시록 안에서 사용된다. 이마에 무엇이 찍히느냐 그가 결정된다.

  • 요한계시록 9:4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요한계시록 14장

십사만 사천 명의 노래가 들려온다. 이들의 이마에 아버지의 이름이 있다. 어린 양이 서있는 시온 산은 시편 2절을 연상시킨다. 그는 하늘 아버지의 대리인이다.  세 천사의 말이 이어지고, 마지막 수확이 이루어진다. 구름 위의 인자(14절)는 다니엘서 이후 전해오는 인자의 다른 표현이다. 수확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곡식이고, 다른 하나는 포도주 수확이다. 포도주 수확은 하나님의 진노를 뜻한다. 즉 심판은 구원인 동시에 심판이다.

요한계시록 15장

하늘에서 다른 이적이 보인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지고 나온다. '마지막 재앙'(1절)이라 소개한다. 일곱 대접 재앙의 전조이다.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소개된다.(3-4절) 이후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5절) 열린다. 11:19에서는 하늘의 성전이었지만 이제는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린다고 표현한다. 

요한계시록 16장

일곱 대접 재앙이 한 장에 다 들어가 있다. 인이나 나팔 재앙에 비하며 짧고 간소하다. 소개되는 내용은 출애굽 때의 열 재앙과 많이 닮아 있다. 구원의 때가 이르렀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16장 후반부에서는 바벨론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받으며, 하늘에서 내리는 한 달란트나 되는 우박이 내린다.

요한계시록 17장

드디어 음녀의 이야기 등장한다. 음녀는 물 위에 앉아 있다. 땅의 임금들이 그와 음행했다. 그의 이마에 이름이 있다. 글은 '큰 바벨론,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5절)이라 적혀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17장이 당시 로마를 음녀 바벨론으로 표시고 있다고 확신한다. 짐승에 대한 경배는 곧 로마 황제 숭배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 18장

바벨론이 패망한다. 하늘에서 음성이 나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외친다.(4절) 바벨론 망해야 하는 수많은 이유들이 열거된다.

요한계시록 19장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기록된다. 4장의 보좌위의 찬양이 이어지는 인상을 받는다. 어린양의 아내가 입는 옷은 빛나고 깨끗한 세포포 옷이다.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8절) 곧 하늘이 열리고 백마를 탄 이가 나온다. 12절의 표현은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지막 부분 등장하는 소개문이 조합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0장

천년왕국이 소개된다. 천사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온다. 용을 잡아 천 년동안 결박한다. 당시의 언어로 천년은 로마의 통치 기간을 의미한다. 하지만 천년 동안 갇힌다는 표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다시 용이 풀려나지만 다시 천년이 차자 성도들을 핍박한다. 하지만 결국 하늘의 흰 보좌에 앉으신 이가 등장하고 모든 것이 결정된다. 성도들은 부활하고,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부활한다.

요한계시록 21장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한다. 그런데 새로운 세상은 하늘과 땅은 있지만 바다는 없다. 다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신혼집처럼 소개된다. 그때 보좌에서 음성이 들려온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이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3-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