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



새 예루살렘의 정체’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논쟁의 핵심은 과연 새 예루살렘이 마지막에 나아가게 될 천국을 그리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신부’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종말에 누릴 축복을 그리고 있는가에 있다.

‘계시록’의 의미인 ‘밝혀진 또는 열린’ 등의 개념과 대조적으로 아직도 요한계시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고 감춰진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런 익숙지 않음이 때로 불안한 세상에 편승해 ‘연약한 자들’을 유혹하는 이단의 잘못된 해석에 희생 제물이 되기도 한다. 때로 지나친 문자주의적 해석에 근거한 나머지 중동 지역의 국지전을 ‘아마겟돈 전쟁’으로 예견하는 정도까지 이르러 결과적으로 종말론에 대한 회의를 낳게 만들기도 한다.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이해도 이런 안개 속에 싸여 있는 듯한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 보인다. 새 예루살렘은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마지막 환상에 속하는 부분(21:1~22:5)이다. 사람들은 「내가 본 천국」 등의 책이 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이해는 본문의 가르침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 부정확한 성경 해석이 근거 없는 ‘믿음’으로 이끌며 그 믿음이 확산될 경우에 매우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올바른 성경 해석에 근거한 믿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해석과 함께 그 안에 담겨 있는 가르침이 현대 교회를 향해 주는 메시지를 논하기 전에, 이 부분이 안고 있는 두 가지 이슈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첫째, 마지막 때에 주어지는 ‘새로운 세상’의 정체에 관한 질문이다. 요점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속성이 ‘갱신된 세상’(renewed world)인가 아니면 ‘새롭게 창조된 세상’(replaced world)인지에 관한 논쟁이다. 현재 세상과 연결하는 견해는 연속성(continuity)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다른 견해는 비연속성(discontinuity)에 무게를 두고 있다.

둘째, ‘새 예루살렘의 정체’에 관한 것으로 논쟁의 핵심은 과연 새 예루살렘이 천국을 그리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신부’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종말에 누릴 축복을 그리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더해 어느 한 쪽으로 치중하기보다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에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21:1~22:5)

이 부분을 해석하기 위해 ‘문맥’의 중요성과 함께 비유적 또는 상징적 표현의 당위성을 이해해야 한다. 문맥에 대해선 근접한 문맥과 넓은 문맥을 모두 염두에 둬야 한다. 먼저 근접한 문맥으로, 17장 1절에서 22장 5절까지 소위 ‘두 도시’(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의 이야기로 알려진 부분을 살펴봐야 한다. 다음에 넓은 문맥으로, 요한계시록의 시작에서 이 부분에 이르기까지의 전개와 나아가 구약과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 발전해 온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을 고려해야 한다.

비유적 또는 상징적 표현의 당위성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과 연관해 생각할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의 내용은 ‘초월적 현실’(transcendental reality)을 다루고 있다. 특히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모든 것들의 완성이라는 면에서, 또 초월성이라는 면에서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 초월적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비유와 상징적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마치 문명의 이기에 관한 경험이 전혀 없는 정글 속사람들에게 전자 오븐이나 휴대전화기를 설명하려고 한다면, 그들이 갖고 있는 언어와 경험의 경계가 표현의 한계를 결정하게 되듯이 말이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21장 18절과 21절에 나오는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든가, ‘더 이상 바다가 없는 가운데(21:1) 존재하는 샘’(21:6)이라든가, ‘강’(22:1) 등은 상징적 또는 비유적 해석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저자 요한은 이 책의 독자들에게 친숙한 상징과 모델들을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에서 찾고 있으며 그것을 기초로 자신만의 요소들을 더해 자신이 본 초월적인 현실을 전하고 있다.

(1) 새 창조(21:1~8)

먼저 이 단락이 속한 문맥에 관해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단락은 음녀 바벨론의 멸망(17:1~19:10)과 신부로 표현된 새 예루살렘의 축복(21:9~22:5) 사이에 놓여 있는 ‘종말의 종말’을 구성하는 연속의 사건들(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아마겟돈 전쟁, 천년왕국, 마지막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19:11~21:9)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부분을 통해 악의 세력의 철저한 제거 과정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이 거하는 땅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늘이 서로 연결돼 둘이 하나가 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에 더해 21장 9절부터 시작되는 새 예루살렘에 관한 두 가지 커다란 요소를 소개함으로써 동시에 새로운 단락(21:9~22:5)의 서론 부분 역할도 감당하고 있다.

본문에서 중요한 점은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분명하게 보여준 악을 철저히 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더해 더 이상 악이 거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질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새 창조’에 관한 약속(사 65:17~18)의 성취일 뿐 아니라,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롬 8:21)되는 순간이다. 특별히 저자 요한은 21장 1절에서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표현을 더함으로써 짐승이 나온 곳(13:1)이고 죽은 사람들의 장소(20:13)이며 세상의 우상 숭배적 상업 활동의 무대(18:10~19)일 뿐 아니라, 세 부분으로 나눠진 옛 세상의 일부(8:8~9, 14:7)의 부재를 통해 악의 부재와 그 악이 편만했던 옛 세상의 지나감을 강조한다.

저자는 새로운 세상을 언급한 후 초점을 새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있다. 마치 새 예루살렘이 새로운 세상의 축소판(microcosm)인 양 새 예루살렘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묘사한다. 구약의 약속인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사 2:1~5, 18:7)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세상을 다스리신다(사 24:23). 또 에덴동산과 같은 곳(겔 36:35)이고 백성들과 함께 영원히 거할 곳(겔 37:26~27)이며, 생명의 물이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올 것(슥 14:8) 등 선지서 속의 시온과 예루살렘에 관한 수많은 기대와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새 예루살렘을 보면 어떤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으며, 어떤 축복을 누릴 것인지 소망할 수 있게 만든다. 
새 예루살렘은 두 가지 커다란 특징으로 소개되고 있다. 3절에서 말씀하듯,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과 4절에서 말씀하듯, 세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전혀 다른 현실을 그려주고 있다. 이 두 가지에 대해 다음 단락(9~27)이 3절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고, 그 다음 단락(22:1~5)이 4절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1~5)

새로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새롭게 된다(5절). 그렇다고 모든 것들이 현재 세상과 연속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입을 ‘영광의 몸’(빌 3:21)은 현재 우리의 몸과 다르지만, 둘 사이에 연속성이 배제되지 않은 새로움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참고 눅 24:39, 롬 8:11).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처소인 새로운 세상의 ‘새로움’은 위의 경우와 조금 다르다. 다시 말해, ‘이미 새로워진 하나님의 백성’(고후 5:17)과 ‘새 하늘과 새 땅’ 간의 ‘새로움’에 차이가 있다.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이 함께 거할 곳이기에 옛 세상과의 연속성을 배제해 버린다.

그곳은 특별하기에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고 현재의 삶에 근거해 결정된다. 요한계시록에서 반복해 말하고 있듯이, 오직 세상의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힘이나 스스로의 의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12장 11절 등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이긴 자들’이 들어간다. 요한계시록이 교회를 향해 씌어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말씀에서 담고 있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8절에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목록이 나온다. 여기에는 세상의 유혹과 핍박에 이기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그런 행동을 하거나 거짓 교리를 전하는 이단들이 포함된다. 2~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의 문제들과 연결해 생각할 때 이해가 된다. 열매를 찾아볼 수 없는 자,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며 따르는 자, 세상과 타협함으로써 세상과 구분 되지 않는 자 등 간단히 말해 ‘알맹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들을 향해 경고하고있는 것이다.

(2) 지성소로서 새 예루살렘(21:9~27)

새 예루살렘이 2절의 ‘신부와 같이’라는 직유적 표현에서 9절의 ‘신부’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바뀐다. 하지만 여기에 근거해 새 예루살렘이 신부이고 신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의 정체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 특히 15장 2절(‘유리 바다 같은 것’에서 ‘유리 바다’로)이나 21장 11절(‘벽옥같이’)과 18절(‘벽옥’)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의미의 변화를 감지할 수 없는 예들은 위의 결론을 지지하고 있다.

결국 문법적으로 다른 두 표현일지라도 기능면에서 차이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차이를 단순히 저자 요한의 스타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저자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며 새 예루살렘의 두 주인공인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고 있다는 근거는 다음에서 볼 수 있듯이,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 자체에 있다.

새 예루살렘이 지성소라는 사실을 전개해 나가는데 있어서 저자 요한은 세 가지 요소에 초점을 맞춰 외부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듯이 소개하고 있다. 먼저 11~14절에서 외부적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 후 16~17절에서 외적인 구조에 관해 표현하고, 마지막으로 새 예루살렘의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요소에 대해 22~23절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구성 요소들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 묘사의 특징을 들자면, 열둘이라는 숫자의 만연함이라고 할 수 있다. 열두 문과 열두 지파의 이름(12절), 성벽의 열두 기초석 및 그들에 기록된 열두 사도들의 이름 (14절), 열두 진주문(21절) 등을 포함해 성벽의 가로 세로 길이가 12,000(=12x103) 스다이온에, 성벽의 두께는 144(=12x12) 규빗이라고 말하고 있다. 열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숫자다. 새 예루살렘의 묘사에서 열둘이라는 숫자의 강조는 그곳에 들어가는 새로운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정체에 관해 구약의 공동체와 신약의 공동체를 모두 언급하기보다 예수님의 피로써 구원 받은(예 1:5, 5:9, 7:14), 그리고 그분의 피로써 사탄을 이긴(12:11) 사람들을 언급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시 말해, 사도들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영적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다.

구조를 논하며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가로 세로 높이가 동일한 정육면체 모양의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의 모델(왕상 6:20, 대하 3:8)을 근거로 해서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있다. 독특한 점이 있다면, 거대한 크기(한 면이 2,400㎞인 정육면체)에 비해 성벽의 두께는 상대적으로 초라한 144큐빗(약 65m)으로 표현돼 있다는 것이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숫자들을 보며 숫자 자체에 문자적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오히려 그 숫자에 포함된 하나님 백성들의 상징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나아가 규모의 거대함에 더해 정육면체 형태의 지성소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결국 마지막 세상의 모습으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과 영원히 거할 지성소 중의 지성소로 묘사되고 있다.

예루살렘 성의 아름다움은 다양한 보석을 통해 특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곳의 길은 이 땅의 금의 모습이 아니라 ‘유리 같은 정금’이며, 성벽과 기초석과 문은 온갖 보석으로 치장이 돼 있다. 물론 보석의 일부(벽옥, 홍보석, 녹보석)는 하늘의 보좌를 논하며(4:3) 등장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와 있는 다른 보석들은 헬라어에서 실제로 어떤 보석을 의도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열된 보석들과 동일한 리스트를 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결국 보석들에 관한 결론을 외부에서 찾기보다 책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특별히 음녀 바벨론을 논하며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다’(17:4. cf. 18:4)는 표현과 의도된 대조를 놓쳐선 안 된다. 스스로 온갖 악행과 불의로 얻은 것들로 치장한 음녀 바벨론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한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새 예루살렘의 대조를 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적 특성을 언급함에서 새 예루살렘은 ‘성전’이 없는 성이라고 말하고 있다(22절). 물론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예루살렘 성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성전의 부재를 의미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은 성과 성전의 구분을 없애 버린, 성 자체가 성전이며 지성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표현을 쓰고 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새 예루살렘에서 ‘성전’이라는 것이다(22절). 마치 ‘새 예루살렘’이 단순히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를 나타내고 있듯이, ‘성전’도 단순히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백성들의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상호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믿는 사람들의 모든 소망함의 성취된 모습을 그리고 있다.

(3) 새로운 에덴으로서 새 예루살렘(22:1~5)

바로 앞 단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표현된 새 예루살렘을 그리고 있다면, 이 단락에선 그들이 거하는 장소에 초점을 맞춘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새 예루살렘의 중심이 보좌이며 그와 함께 언급된 생명나무의 존재다. 보좌의 중심됨은 4장에 그려진 하늘의 성전을 통해 이미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새 예루살렘의 중심에도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그런데 그 보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것만이 아니라 어린양의 것이며(3절),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원천이며(1절), 다시는 저주가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3절).

연이어 보여주는 것은 정원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닌 파라다이스의 모습을 지닌 새 예루살렘이다. 그 정원에선 다른 나무보다 생명나무가 중심이 되고 그곳에 거하는 거민 들이라면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나 소성함을 얻으며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에덴의 회복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곳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는 이 세상과 달리(출 33:20), 하나님의 얼굴을 목도하며 살게 된다. 또 하나님께서 에덴을 지으시고 의도하셨던 뜻을 온전히 이루며 살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을 온전히 섬기며(3절) 그곳에서 다스리게 된다(5절). 물론 여기서 무엇을 다스릴지에 관해서는 말해 주고 있지 않는다. 새 예루살렘을 논하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요한계시록 저자의 의도를 고려해 볼 때, 이런 생략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창세기에 기록된 처음 창조의 세상을 볼 때, 새롭게 창조될 세상에서 다스릴 대상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는 일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만드시고 명령하시며 기대하신 일이었다. 이런 다스림은 천년 왕국(어떤 견해를 갖고 있든지 상관없이) 동안의 통치(20:6)와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통치’라는 특성을 갖는다(5절). 다시 말해 단순히 에덴의 회복을 뛰어넘는 것이며, 나아가 에덴에서의 원래 목적(예배)이 이뤄지는 곳임과 동시에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다스림을 통해 온전히 제사장과 왕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현대 교회를 향해 새 예루살렘이 주는 메시지

새 예루살렘의 도래는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그 순간을 가르치고 고대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온전히 성취되는 순간일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바람과 소망의 온전한 완성이기도 하다.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변화된’ 백성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것이며, 다시 얻은 에덴동산이 아닌 그 이상의 파라다이스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예배하며 허락하신 것을 영원히 다스리는 역할을 감당하며 살게 된다. 현재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 나라에 국한된 성전이, 마지막 때에는 지성소로 그리고 파라다이스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이런 가르침이 현대 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자.

현대 사회를 논하며 사회를 주관하고 있는 두 개의 정신 사조로 흔히 물질주의(materialism)와 자아도취(narcissism)를 지목한다. 교회조차 알게 모르게 이런 사조에 밀려 표류하고 있는 것이 현대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지적이기도 하다. 만약 그들의 평가가 사실이라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 그 중에서도 새 예루살렘에 관한 가르침이 주는 메시지는 매우 명료하다.

첫째, 물질주의의 위험과 함께 물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물질주의와 연결돼 있는 것이 물량주의이고 물량주의와 연결돼 있는 것이 외적 성장주의이며, 성장주의와 연결돼 있는 것이 세상적 개념의 성공제일주의이다. 이런 것들을 향한 새 예루살렘이 주는 메시지는 세상에서의 가치가 천국에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의 연속성을 가지는 ‘사람’인가를 묻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체가 다음 세상과의 연속성이 없는 ‘물질’인가의 근본적 질문을 하며 평가하도록 만들고 있다.

현재의 시각으로 아무리 가치가 있는 것일지라도 궁극적으로 모두 없어질 것이며, 또한 그곳에 절대 갖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추구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 16:9)는 가르침을 주신다. 물질이 아니라 사람의 소중함을 강조하시는 메시지다. 「내가 본 천국」에서 주장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상의 온갖 보화를 통해 묘사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써 나타나는 영광의 결과이지, 결코 천국의 모습과 동일시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외적인 아름다움이 천국을 사모하는 이유가 된다면, 물질주의에 젖은 우리의 모습을 방증(傍證)하는 것이 분명하며 이에 더욱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둘째, 자아도취의 위험함을 깨닫도록 요구하고 있다. 자아도취와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있다. 주기도문을 보아도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 정체성이 정해지는 개인임을 기억해야 한다. 새 예루살렘의 묘사를 보며 다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뿐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온전한 교제의 완성된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개인 종교가 아니라 공동체 종교이며,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믿는 사람들 모두 함께 새 예루살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의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는 말씀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공동체로서 교회를 바라봐야 한다. 이런 관계는 단순히 교회 안에서 성도들간의 관계에 국한된 것일 뿐 아니라 교회와 교회 간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사이에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 하나됨의 목적이 전도와 선교에 있음(요 17:21, 23)을 말씀하신다. 따라서 협력하며 동역하는 모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도들 간에 또는 지역 교회들 간에 존재하는 갈등과 반목은 온전한 교제가 이뤄지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통해 회복을 향한 노력으로 변화돼야 한다.

셋째, 천국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은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본다고 한다. 「내가 본 천국」과 같은 책에서 ‘신비로운 경험’에 근거해 주장하는 천국의 모습을 들어 보면, 천국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며 그것에 근거한 바른 믿음을 갖고 살아갈 때 제대로 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 이 땅에서 가치 있는 것들로 가득한 곳이 천국이라기보다, 세상의 가치로선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곳이 새 예루살렘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온전히 회복된 에덴 이상의 지성소적 파라다이스로 인간의 모든 필요와 소망이 채워지는 곳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온전히 성취되는 곳임을 기억해야 한다.

넷째, 진정한 예배의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히 하고 있다. 에베소서 2장 21~22절을 보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교회가 이미 성전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교회와 새 예루살렘간의 연속성은 가장 강하게 나타나 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예배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 축복이기에 현재의 예배를 하나님 중심으로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현대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 중심의 틀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누가 예배의 중심이 돼야 하는지에 대해 돌아보며 예배를 통해 마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으로의 초대 및 만남이 이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교회에서 신앙 훈련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교인이 아니라 ‘이기는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로서 삶을 살 수 있는 이기는 자들로 만들기 위해 부단한 훈련과 점검을 해야 한다. 특히 ‘성도들의 옳은 행실’(19:8) 등을 강조하는 요한계시록을 염두에 두고 한국 교회를 향한 외부에서 들려오는 최근의 비판적 평가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 음녀 바벨론의 특성들로 만연된 세상에 둘러싸여 많은 도전과 시험 속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이끌리며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을 향한 도전이 새 예루살렘이 주는 메시지이다. 

오직 행함있는 믿음으로

어느 곳에 있더라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우리의 사는 모습 속에 드러나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통해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한 시대다. 새 예루살렘이 현대 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리 모두를 향해 이기는 사람들이 될 것을 도전하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는 말씀을 순간마다 기억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기는 자들’의 대열에 설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의 모든 것은 새롭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것이 현재 세상과의 연속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몸과는 다르나 연속성이 배제되지 않은 새로움을 얻을 것이 분명하다. 

‘성전’은 단순히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의 백성들의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존재로 나타나 있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믿는 이들의 모든 소망함의 성취된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이기는 자들, 곧 그리스도의 참 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사진은 초대교회의 하나인 사데교회의 유적과 어느 지하교회의 입구 모습.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또 다른 성경 속의 말씀을 통해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한 시대이다. 새 예루살렘이 우리 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리 모두를 향해 이기는 자들이 될 것을 도전하고 있다.

두 증인(요한계시록 11:3)


두 증인(요한계시록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두 증인은 "엘리야"와 "에녹" 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던 인물은 엘리야와 에녹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은 죽어야 하늘로 올라갈 수 있지만 살아서 올라갔던 사람이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엘리야와 에녹이 다시 내려와서 순교 당하므로 계시록의 예언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두 증인을 "엘리야" "에녹" 이라고 분명하게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나 후대 신학자들은 "모세" "엘리야"라고 해석합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17장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대화할 때 등장했던 인물이 "모세"와 "엘리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변화산 사건에 등장한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상징하는 율법서를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서를 대표하는 엘리야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흔두 달, 1260일, 한 때 두 때 반 때에 대한 성경의 기록 / 7구절

1. 다니엘 7:25 / 한 때, 두 때, 반 때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2. 다니엘 12:7 / 한 때, 두 때, 반 때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3. 요한계시록 11:2 / 마흔두 달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4. 요한계시록 11:3 / 일천이백육십 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5. 요한계시록 12: 6 / 일천이백육십 일

여자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6. 요한계시록 12:14 / 한 때, 두 때, 반 때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7. 요한계시록 13: 5 / 마흔두 달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 한 때는 한 해를 의미 : 12달 × 30일 = 360일

* 두 때는 두 해를 의미 : 24달 × 30일 = 720일

* 반 때는 반 년을 의미 : 6달 × 30일 = 180일
42달 : 1260일




누가 무식한 이치로 사람을 혼동케 하느냐?

욥기 38:2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욥기 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 머리가 일곱 개
요한계시록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요한계시록 17: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적 그리스도의 나라(미래의 나라)
                                                                        후 3년 반에 나타날 나라

* 신천지에서 데려간 교인들 : 30만명
   전도관,
  

다니엘

짐승이란 구약에 나타난 제국을 짐승이라고 한다.

머리는 금이요 바벨론이요 사자요 느부갓네살
가슴은 은이요 메대 파사요 곰이요 고레스
배는 놋이요 헬라요 표범이요 알렉산더
두 다리는 동로마요 철이요 큰짐승

다섯은 무엇인가?
다섯은 제국을 말한다.
짐승 = 제국
애급,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 다섯은 망하였다.
하나는 지금 있다 / 로마
마지막 짐승은 일곱째인데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기간은 잠간 동안 왕 노릇한다.
마지막 짐승으로 적그리스도의 나라라고 한다.


바벨론       - 금 

메대 파사  - 은

헬라          - 놋

로마          - 철



두 증인 : 모세와 엘리야

초대교회 교부 문서에서 / 두 증인 - 에녹, 엘리야
이후에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선악과 사건 이후에 모든 인간은 다 죽어야 한다.
예수도 죽지 않았다.
에녹 엘리야는 살아 있는 모습으로 승천
후 3년 반 시대에 다시 내려와서 죽어야 두 증인이 죽어야 한다.

에녹과 엘리야는 후 3년 반에 내려와서 순교 당할 것이다.

1장 / 밧모섬에서 서론 배경
2-3장 / 교회

 칭찬, 책망, 권면, 약속(천년 왕국)
4장 / 하늘에서 본 환상

 5장 - 보좌로부터 만물이 나타났다.
          보좌로부터 섭리가 이루어진다.
 * 욥기 / 종들의 죽음, 자녀들의 죽음,  - 사탄의 청구에 의하여
   천상회의가 열렸다. 하나님의 아들들(천사장) + 사탄(쫓겨나기 전에) 타락 전 루시엘 - 타락 후 루시퍼
   단계별로 지상에서 이루어진다.
   지상의 역사가 하늘 보좌에서 이미 설계되었고 설계된 대로 진행된다(칼빈주의, 예정)
   계시록 5장에서 각본이 짜여 졌다.
   앞으로도 각본대로 진행될 것이다.

   37장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천사장(하나님의 아들들)
   두루 다니다 왔다(베드로전서
   천사 위의 천사 (루시엘) 50가지의 명칭 타락 후 -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사탄 / 복을 주었기 때문에 잘 섬긴다.
   하나님 / 잘 섬겼기 때문에 복을 주신다.

   6장 - 인
   흰말, 붉은말, 검은말, 청황색말

   144,000은 유대인의 수라고 한다.
   12지파가 현재 팔레스타인에 모두 모였다.

전 3년 반은 큰 환난을 없다. 다만 재앙이 임할 뿐이다.  
후 3년 반은 음녀가 등장한다(바티칸, 거대한 음녀)

양처럼 생긴 짐승이 말은 용처럼 한다.
두 짐승은 WCC, 카톨릭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은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11:3-4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구약의 배경을 적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계시 속의 다른 많은 상징들과 마찬가지로 11장의 두 증인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위의 본문이 나온 구약의 배경은 스가랴 4장으로, 선지자가 꼭대기에 주발과 일곱 등잔이 있는 순금등대를 보았는데 일곱 관이 주발에서부터 등잔으로 연결돼 있다.

두 감람나무가 등대의 좌우에 서 있는데, 이 나무들이 중앙의 주발에 기름을 공급하고 다시 주발에서 일곱 등잔으로 기름이 공급된다.


스가랴에 나온 등대 :

스가랴의 이상은 요한계시록 11장에 몇 가지 방법으로 조정되어 사용되었다.

스가랴 4:2에는 등대가 하나 있는 대신 요한계시록 11:4에는 두 개가 있고, 두 등대와 두 감람나무는 모두 두 증인을 나타낸다.
스가랴 4장에서 선지자는 수행하는 천사에게 두 감람나무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물었고, 천사는 “기름 발린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라고 대답했다(14절).

“기름 발린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기름의 아들들”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 곧 특별한 기능을 위해 성별된 자들을 의미한다.

이 특별한 기능이 무엇인지는, 선지자가 등대와 두 감람나무가 누구를 나타내는지 물었을 때 천사가 준 첫 번째 대답(4절)에 비추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6절)는 말을 들었다.

다시 말하면, 두 감람나무에서 나오는 기름에 의하여 빛을 발하는 등대는 인간의 힘이나 능력에 반대되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을 통해 위탁 받은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의 종들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은 그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인간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곧 선지자의 계시를 통해 그에게 전달된 능력 곧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능력에 의지하였다.

요한계시록의 두 증인은 구약과 신약임 :

스가랴의 이상에는 하나의 등대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냈다. 그러나 요한이 이상을 받은 시대에는 두 개의 등대가 나타난다. 등대가 하나가 아니고 둘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등대는 기름을 공급하는 두 감람나무와 동일하게 여겨지므로 이 둘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이런 흥미 있는 특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푸는 열쇠는 상당 부분 넓은 문맥 곧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두 증인에 관한 요한의 신학과 연관돼 있다. 요한은 신명기 19:15에 표현된 성경적 원칙을 따르고 있다.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이 원칙은 바울(고후 13:1; 딤전 5:19; 히 10:28)뿐 아니라 예수님(마 18:16)에 의해서도 적용되었다. 요한계시록 전반을 통하여 요한이 인용하는 두 증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이다. 이 두 증인은 요한이 받은 계시의 내용으로 요한계시록 1:2에 처음 나온다. 1:9에서 요한이 “형제요 예수의[예수 안에 있는]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서 밧모 섬에 있게 된 것
이 두 증인 때문이었다고 진술하는데, 이는 이 두 증인이 예수와 관계된 것이므로 그가 이 둘을 위해 기꺼이 환란을 당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전달된 계시를 나타내고, 예수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비추어 구약의 계시를 보충하고 확실하게 밝히는 예수님 및 신약의 사도와 선지자들을 나타낸다. 진리를 증거하는 이 두 증인은 요한계시록 11장에서 하나의 단위로 함께 나온다. 이들이 죽임을 당한 것을 말할 때(8절), 본문이 9절 하단에서 헬라어로 복수인 “시체들”로 되돌아가기 전에 8절과 9절 상단에서 단수인 “시체”를 사용했는데, 이는 이 두 증인이 하나의 단위로 여겨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두 증인의 활동:

한 쪽 증인의 모든 특징은 다른 쪽 증인과 같고, 한쪽 증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다른 쪽 증인에게도 일어난다. 이들은 베옷을 입고 1,260일 동안 예언한 선지자(11:3, 6, 10)로, 여기서 베옷은 어둠(계 6:12; 사 50:3), 애통과 슬픔(겔 27:31; 욜 1:8, 13), 곤란과 책벌과 능욕(왕하 19:1, 2), 겸비와 회개(대하 21:16, 17; 마 11:21) 등을 상징한다. 앞 절(11:2)과의 시간상의 평행은 같은 시기 동안에 거룩한 성이 짓밟힌 것에 대한 애곡과 슬픔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게다가, 이 두 증인이 빛을 내는 기능을 가진 두 등대이므로(참조 시 119:130; 요 1:9), 베옷은 베옷으로 가리는 것처럼 빛을 어둡게 하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 그들이 예언한 것에 대한 반응 곧 그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들이 죽은 것을 기뻐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베옷은 그들의 기별이 거절당함으로써 곤란과 책벌과 능욕을 겪고 있었음을 나타낼 수 있다. 이런 묘사는 예언의 말씀이 효과적이고 힘 있게 전파되지 못한 때를 말하고 있다. 이는 흔히 종교암흑시대 곧 1,260일 또는 42달이라는 예언적 기간으로 대표되는 시기의 특징이었다(계 11:2, 3; 참조 12:6, 14; 13:5; 단 7:25; 12!
:7).[1]


두 증인을 이해함:

요한계시록 11:5∼8에 주어진 단서들을 살펴보면 두 증인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누구든지 두 증인에게 해를 끼치려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대적들을 삼킨다고 5절은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선지자 엘리야를 가리킨다고 보지만, 예레미야 5:14을 언급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 그들의 입에서 대적들을 삼키는 불처럼 나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과 평행을 이루는 요한계시록의 상징에서 예수님이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는데(1:16), 그분이 그 검으로 만국을 칠 것이다(19:15, 21). 이 검은 하나님의 말씀(히 4:2), 곧 그분의 입에 있는 예수의 증거(계 19:13에서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림)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입에 있는 이 검 곧 말씀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두 증인의 권세:

요한계시록 11:6은 두 증인이 구약 선지자들 중에 가장 큰 자인 모세 및 엘리야와 같은 권세를 가진 것으로 묘사한다. 이들도 엘리야처럼 하늘을 막아 자신들이 예언하는 동안에 비가 내리지 않도록 하는 권세가 있으며, 모세처럼 강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그들이 원할 때면 언제든지 온갖 재앙으로 땅을 칠 수 있는 권세가 있다. 이런 상징적 언어의 사용은 이 두 증인이 실제 모세나 엘리야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이 고대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과 같은 권세를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들이 베옷을 입고 예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권세가 약함을 비추는 말은 전혀 없다. 외적 환경이 이 예언의 말씀의 성격이나 권위를 바꾸지 못했다.


두 증인의 죽음:

요한계시록 11:7에 의하면, 두 증인이 그들의 증거를 마쳤을 때, 다시 말해서 그들이 예언한 1,260년 기간이 다해갈 때 무저갱으로부터 나온 짐승(참조 17:8)이 그들을 공격하여 짓밟고 죽였다. 5절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놀라운 사건이다. 왜냐하면 5절은 두 증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그들의 입에서 나온 불로 죽임을 당할 것(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받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운명은 요한계시록 20:7∼15이 계속하여 말하는 대로 두 증인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에게 닥칠 일이다. 사단과 모든 악인들은 흰 보좌 앞 심판대에 선 후에 불 못에서 태워질 것이다.

1일=1년 원칙에 따르면,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해 큰 성의 거리에 놓여 있던 기간인 3일 반(계 11:9)은 3년 반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7절의 짐승이 특히 반종교적 편견을 가졌다는 점에서 프랑스 제1 공화국 정부(1792∼1804년)를 나타낸다고 이해하는 재림교인들은 무신론이 극에 달했던 프랑스 혁명 역사 중에서 짧은 기간 동안에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본다. 이 기간은 파리에서 종교를 폐지하라는 법령이 발령된 1793년 11월 10일부터 프랑스 정부가 종교행위에 대한 금령을 해제한 것으로 여겨지는 1797년 6월 17일까지로 산정될 수 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7권, 803).

요한계시록 11:8은 상징적으로 소돔과 애굽으로 불린 큰 성 곧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곳의 거리에 두 증인의 시체(헬라어로 단수)가 놓여 있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에는 두 개의 성 곧 큰 성과 거룩한 성이 있다. 큰 성은 큰 음녀라고 묘사돼 있고, 거룩한 성은 어린 양의 신부라 불린다. 앞의 성은 보통 바벨론이라 불리고, 뒤의 성은 새 예루살렘이라 불린다. 요한계시록의 여기서 처음으로 언급되는 큰 성은 상징적으로 소돔과 애굽으로 불린다. 소돔은 번영, 방종, 오만방자, 사악, 부도덕, 영적 무관심, 불친절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겔 16:49, 50; 벧후 2:6∼8; 유 7절). 애굽은 우월감, 오만방자, 압제, 하늘의 하나님을 거절함, 바로를 포함한 많은 피조물 숭배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출 5:2; 렘 43:12, 13; 46:8, 25; 겔 20:7; 23:3, 8, 27; 29:3; 30:13; 32:12; 욜 3:19; 미 6:4). 큰 성은 하나님께 반역을 자행하고 그분의 증인들을 압제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하고 멸시를 당한다.


두 증인의 부활 :

본문은 큰 성이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계 11:8)이라고 말함으로써 두 증인이 살아 있을 때처럼 죽을 때도 저들의 주님을 따른다고 말한다.

두 증인이 충성되고 진실한 증인이신 저들의 주님의 발자국을 따른 다른 길들을 언급하는 나머지 구절에서 이런 사실이 강화된다.
그들은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세상에 의해 멸시를 당한다(계 11:9, 10).
그들은 3일 반 후에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받는데, 세상은 놀라서 구경한다(11절).
그들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대적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된다(12절).
그들의 부활 후에 큰 지진이 뒤따르므로 대적들이 놀라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13절).
역사적으로 말해서, 두 증인의 죽음 및 부활은 프랑스 대혁명 때 무신론이 극에 달하고 종교가 폐지되었을 때(1793년 11월 10일),
그리고 3년 반 후에(1797년 6월 17일) 프랑스 정부가 종교 행위에 대한 금령을 해제하고 19세기 초 여러 나라에서 성서공회가 설립되었을 때 성취되었다.


결론 :

두 증인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예수의 증거 곧 구약과 신약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성령을 통하여 남겨두신 증인들이다.
이들은 마치 예수님처럼 곧은 증거로 인해 죽임을 당하지만, 부활하여 구름을 타고 승천함으로써 그들의 대적 앞에서 영광스럽게 된 그분의 발자국을 따른 선지자들로 묘사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요한과 그의 형제들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증인이 된 자들은 모두 예수의 경험 곧 부활, 승천 그리고 대적들 앞에서 받는 영광뿐 아니라 증거로 인하여 당하는 순교의 경험에도 동참할 각오를 해야 함을 뜻한다(계 1:2, 9; 6:9; 12:11, 17; 14:12; 17:6; 19:10; 20:4; 22: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유대인들은 다 모아도 인구가 얼마되지 않지만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은 각 분야에서 뛰어나며 노벨상을 휩쓸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노벨 경제학상의 65%, 물리학상 의 32%, 의학상의 23%, 화학상의 11% 그리고 문학상의 7%는 유대인들에게 수여되었다.

유대인들은 무서운 고난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뛰어난 사람들을 배출하는가 하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연구 과제가 되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그렇게 탁월한 것은 그들의 종교적 가정교육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중 에서도 유대인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는 것이 그들을 그렇게 뛰어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대인 어머니는 아이들의 침대에서 성경을 읽어주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것이 아이들로 하여금 큰 꿈을 갖게 하고 건실한 삶을 살게 하며 언어에도 남다른 능력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야말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요한계시록 11장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 백성을 핍박하는 세력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을 예언하고 있다.

1. 천사는 요한에게 무엇을 측량하라고 하였는가?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계 11:1).

천사가 성전을 측량하라고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었다고 하였다.
요단강 계곡에서 자라는 이스라엘의 갈대는 길고 똑바로 크기 때문에 길이를 재는 자로 쓰기에 알맞았다.
천사는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고 하였다.
600여년 전에 에스겔도 이상 속에서 어떤 사람이 성전의 각 부분을 측량하는 것을 보았다(겔 40:3~43:12). 이 측량은 대속죄일에 있었다. 그리고 세 가지 것을 측량하였는데, 바로 성전(겔 40:3~43:12)과 제단(겔 43:13~17)과 사람들(겔 44:1~48:35)이었다. 요한계시록 11장 1~2절의 장면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에스겔의 이상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에스겔의 이상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1장 1~2절이 예루살렘 성전을 자세히 살피라는 말 씀은 물론 아니다. 요한이 계시를 볼 당시에는 예루살렘의 성전 건물은 이미 파괴되어(A.`D. 70)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2. 얼마나 오랫동안 이방인들은 거룩한 성을 짓밟을 것인가?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2).

요한은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는 말을 들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전 밖 마당은 성전의 구조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뜰이었다. 이방인들은 여기까지밖에 들어갈 수 없었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심판하지도 말고 혹은 인치지도 말고 그냥 두라는 말씀이 된다.

재림 전 심판은 구원 얻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 이방인들은 원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곳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성전 뜰에 있는 이방인들이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참된 이스라엘은 되지 못하여 이교의 습관을 그대로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바로 그들이 마흔두 달 동안이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 즉 하나님의 신실한 성도들을 박해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렇다면 성전 마당에 거하면서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이나 짓밟을 존재는 도대체 누구일 것인가?

우선 성경 예언에서 마흔두 달이 어떤 기간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흔두 달, 1260일, 한 때 두 때 반 때에 대한 일곱 번의 성경상 기록

1. 다니엘서 7장 25절 :한 때, 두 때, 반 때

2. 다니엘서 12장 7절 :한 때, 두 때, 반 때

3. 요한계시록 11장 2절 :마흔두 달

4. 요한계시록 11장 3절 :일천이백육십 일

5. 요한계시록 12장 6절 :일천이백육십 일

6. 요한계시록 12장 14절 :한 때, 두 때, 반 때

7. 요한계시록 13장 5절 :마흔두 달

 

* 한 때는 한 해를 의미 :12달 × 30일 = 360일

* 두 때는 두 해를 의미 :24달 × 30일 = 720일

* 반 때는 반 년을 의미 : 6달 × 30일 = 180일

42달 = 1260일

요한계시록은 마흔두 달과 일천이백 육십 일과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표현을 모두 다 사용하여 그것이 같은 기간을 말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기간은 거룩한 성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교회가 심각하게 고통을 당하는 기간으로 성경에 자주 나오므로 실제적인 1260일, 즉 삼 년 반의 기간일 리는 없다. 기원 후 2000년의 역사에서 겨우 삼년 반을 가지고 성경이 그렇게 비중있게 다룰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예언적인 기간으로 계산하여야 한다. 성경에서 예언상 하루는 일 년(민 14:34`;`겔 4:6)으로 계산하므로 마흔두 달 즉 일천이백육십 일은 1260년이 된다.

그렇다면 126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성도들을 괴롭히며 짓밟은 존재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우리는 몇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이 존재는 한 사람일 리가 없다. 한 사람이 그렇게 긴 기간 동안 성도를 핍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존재는 분명히 역사에 등장하 는 세력이어야 한다. 1260년이란 기간은 긴 기간이기 때문에 숨어서 그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셋째로, 성전 밖 마당에 있으면서 그 일을 하였으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종교적인 세력일 것이고 그렇게 긴 기간동안 핍박을 할 수 있었으니 정치적인 권력도 가진 존재일 것이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 세력을 역사에서 찾아낼 수 있다. 1260년(A.D. 538~1798)동안이나 계속된 중세의 긴 암흑시대 동안 누가 세상의 권력보다 더 강한 힘을 행사하며 성도들을 파문하고 종교 재판에 회부하고 화형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는가? 그것은 중세 로마 교황권의 부정적인 측면이었다. 요한 바오로2세도 로마 교황권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죄한 일이 있다. 오죽하면 역사가들이 그 시대를 암흑시대라고 부르겠는가? 1260년동안 성도들을 짓밟을 이 세력의 정체와 성격에 대하여는 요한계시 록 13장에 자세히 다시 언급되기 때문에 13장에서 다시 연구하기로 한다.

3. 두 증인은 무엇이며 그들은 1260년 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계 11:3-4). 

성도들이 1260년 동안 시달림을 받을 때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한 두 증인은 누구일까?
본문은 두 증인이 이 땅에서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두 촛대라고 밝혔다.

두 감람나무와 촛대는 구약 성경 스가랴 4장에 나오는 장면이다.

스가랴가 두 감람나무의 뜻을 묻자 천사는“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라고 알려준다.
두 증인은 사람들이 아님이 분명하다.
1260년의 긴 기간 동안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1260일을 1260년 동안 성도들이 박해를 당한 기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한 두 증인은 사람일 리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1260년을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굵은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슬픔과 회개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1260년의 박해 기간 동안 성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세상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회개를 호소해 온 어떤 것일 것이다.

두 증인은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했는데 감람나무와 촛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둘 다 불을 밝히는 것이다.
감람나무는 불을 밝히는 기름을 대주는 원천이 되고 촛대는 그 기름으로 불을 밝힌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1260년의 암흑 기간 동안에 감람나무와 촛대처럼 계속해서 불을 밝히는 기름을 대주는 동시에 또 불을 밝혀 빛을 비추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어두움을 밝혀주는 등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이“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 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성경은 어두운 중세의 박해시절 그 어두움을 비추는 등이요 빛이었던 것이다.

두 증인이라고 한 것이 신구약 성경을 잘 상징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노래했으며 예수께서는“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요 5:39)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 말씀, 즉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다.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중세의 암흑 시대 동안 성경 말씀은 그들과 함께 슬퍼했으며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증인이었으며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 다음 절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4. 두 증인을 해하려 하는 자는 어떻게 되는가? 또 그들에게는 어떤 권세가 있었는가?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계 11:5~6).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한다 는 것과“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한다는 표현은 엘리야의 기사들을 연상시킨다.

엘리야가 기도한즉 이스라엘에 삼 년 반 동안이나 비가오지 않았으며(약 5:17), 엘리야를 죽이려 하던 군사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그들을 소멸하였다(왕하 1:10). 물이 변하여 피가 되게 한다는 것은 모세가 나일강물이 피가 되게 했던 애굽의 재앙을 생각나게 한다. 실제로 모세와 엘리야는 증인으로서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말씀을 나눈 일도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모세나 엘리야를 감람나무나 촛대로 부른 일은 없다. 또 그들은 사람이기 때문에 1260년의 긴 기간 동안 증인이 될 수도 없었다. 비가 오지 않거나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이 임한 것은 그들이 모세나 엘리야 같은“사람”을 거절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믿음의 조상들은 구약의 증인에 포함되며 신약의 모든 성도들은 신약의 증인들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신구약 성경이 해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재앙을 내린 일 이 있었는가? 요한계시록 22장 18절은“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 여 호와는 그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소멸하는 불이시”(신 4:24)다.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해하려 하는 시도는 실패하였고 재앙을 가져왔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불순종하면 재앙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편리한 대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5. 두 증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계 11:7~10). 

하나님의 말씀이 1260년의 증거를 마칠때 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 즉 사단의 세력이 성경을 핍박하여 죽은 것처럼 만들 것이다. 성경이 그렇게 박해를 당한 장소를 큰 성이라 했다. 그것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과 반대되는 개념이며 바벨론 성이다(계 18:2).
그 당시에 실제적인 바벨론이나 베벨론으로 불리던 로마는 이미 없었으므로 큰 성은 바벨론처럼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한 나라 나 집단을 의미할 것이다.

이곳은 또한 영적인 소돔 혹은 애굽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소돔은 타락의 온상을 대표하는 이름이며 애굽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인하는 무신론을 대 표한다. 이런 곳이야말로 예수께서 영적으로 못 박히신 곳이다.

그렇다면 1260년의 박해 시대가 1798년에 끝나니, 그 기간이 끝나갈 무렵에 성경에 나올 만큼 대대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성경을 핍박한 세 력이 역사상에 있었는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할 만큼 교회와 신앙을 미워하고 박해한 세력과 시대가 있었는가? 분명히 있었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 부분을 역사적으로 혹은 실제의 사실로 해석하기를 주저하지만 상징적으 로만 해석할 경우 사흘 반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이 문제가 된다.

프랑스 혁명은 불과 몇년 동안 계속된 사건에 불과하지만 세계사적으로 교회사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뚜렷한 영향을 남겼다.

그러므로 성경 예언이 이 사건을 취급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은 외관상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일어난 무산 계급의 혁명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무신론 사상을 유포시키고 공산주의를 태동하게 한 기틀을 마련해 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중국의 수십억 인구를 공산주의와 무신론의 틀 속에 가두어서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큰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프랑스는 종교 개혁을 거부하고 부패와 타락이 극도에 달했다. 성직자들은 귀족 계급이 되어 온갖 사치와 향락를 누렸으며 일반 백성들은 압제에 눌려 신음하고 하루 먹을 빵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1789년 7월 14일 분노한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혁명은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동안 왕과 교회에 억눌렸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새로운 달력을 만들어 종교적인 제일들을 모두 없애버렸으며 일주일을 10일 제도로 만들어 예배일도 철폐하였다. 분노한 시민들은 교회를 더럽히고 성직자들을 모독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혁명 기간에 약 5,000명의 성직자들이 처형을 당했다.

11월 10일에는 이성의 여신을 상징하는 젊은 여인이 선택되어 노틀담 사원에서 경배를 받았다. 프랑스 혁명 의회는 1793년 11월 26일 성경과 종교 행사 금지령을 공식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는 예언이 슬프게도 성취되었다.

그러나 주일 제도가 철폐되고 성경 읽는 것이 금지되며 하나님 대신 이성의 여신이 받들어지자 프랑스는 최악의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 들어갔다. 범 죄는 증가하고 국민들의 건강은 땅에 떨어졌고 사회는 공포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할 수 없이 프랑스는 삼 년 반 후인 1797년 7월 17일 성경 및 종교행사 금지령을 폐지하였다.

 

6. 삼일 반이 지난 후 어떤 기적이 일어났는가?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계 11:11~12).

프랑스 혁명 정부는 성경을 금지한 후에 급속도로 사회가 혼란에 빠 지자 할 수 없이 삼 년 반 만에 그 조치를 철회하였다. 그리고 죽은 것처럼 보였던 두 증인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1798년 2월 15일 프랑스 군인들이 로마의 시스티네(Sistine Chapel) 성당에 난입하여 교황을 유배 보내고 교황이 그곳에서 죽자 538년부터 1260년 동안이나 계속되던 교황의 세력은 드디어 약화되고 성경은 생기를 얻은 것처럼 보급되고 읽혀지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제지업과 인쇄술이 발달하여 성경을 비싸지 않게 출판하게 되었고 1804년에 영국성서공회, 1816년에는 미국 성서공회가 설립되어 성경을 대량으로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전 세계에 파견되었다. 실로 19세기는 위대한 선교의 시대였다.

성경은 오늘날도 베스트셀러 중의 베스트셀러이다. 신구약 성경은 매년 수백 개의 언어로 출판되며 쪽 복음 성경은 1,0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보급되고 있다. 대한성서공회의 발표에 의하면 한국의 성서공회는 우리나라에서 2005년 1년 동안에 170만 권의 성경을 발행하였고 1,678,259부의 성경을 77개 언어로 제작하여 85개국에 보내고 있다. 실로 엄청난 성경의 부활이다.

 

7. 두 증인을 죽이려했던 곳과 사람들은 어떤 피해를 당했는가?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계 11:13).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직접 생기를 얻어 부활했지만 성경을 박해한 프랑스는 커다란 영적 지진을 경험하였다. 그들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주를 잃고 피폐해졌으며 엄청난 무너짐을 경험하였다.

성 십분의 일이란 유럽 열(十) 나라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프랑스를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죽은 사람이 칠 천이라는 것은 아마도 혁명 기간 동안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상징적 수라고 생각된다.

이런 격변을 겪고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과 말씀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 벌어지는 참담한 결과들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하나 님을 두려워하고 영광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8. 세 번째 화, 즉 일곱째 나팔을 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계 11:14~18).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셋째 화가 시작되 기 전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나서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과 그리스도께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실 것을 찬송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셋째 화가 이 세상 역사의 끝임을 알게 된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 앞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의 찬양이 시작된다.

그들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최고의 존경을 드린다. 하나님은“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하나님,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는 분”이시다. 늘 함께 나왔던“장차 오실 이”라는 구절이 여기에는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아 일곱째 나팔은 분명히 마지막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은 또한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와 마지막 심판의 때에 있을 일 을 요약하여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이방들이 분노할 것이다. 복음을 거절하며 살아온 그들은 그들에게 내리는 심판과 재앙이 성도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핍박하며 죽이려 할 것이다. 전세계적인 분노와 핍박이 성도들에게 쏟아질 것이다.

그 때 드디어 주의 분노가 이 땅에 내릴 것이다. 오래 참으셨던 은혜의 시기는 끝날 것이다. 이 땅에 내릴 주의 분노는 일곱 재앙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계15~16장).  그 때는 죽은 자들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심판의 때를 가 리키는 말씀이다. 재림하신 후 천 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다시 이 땅에 내려온다(계 21장). 그 때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다부활하여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이다(계 20:7~15).

그 때에 그의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실 것이다. 이제 아름답게 재창조된 이 땅과 새 예루살렘 성이 그들의 거처가 된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온 그들에게는 무궁한 기쁨과 영생이 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이 때는 또한“땅을 망 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 이다. 악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저항을 시도하지만 마침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그들을 소멸하게 된다. 마침내 모든 죄악의 역사는 완전히 끝난다. 우주에는 다시 사랑과 기쁨만이 가득 차게 된다.

 

9. 하늘 성전의 모습은 어떠하였는가?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9).

모든 구원의 역사가 마치는 이 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며 언약궤가 보이고 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들어 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며 살아왔다. 심지어 자칭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십계명을 등한히 여겼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넷째 계명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 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거룩한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하나의 계명을 어기면 모두 범한 것과 같다는 것(약 2:10)을 그들은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그 모든 불순종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은혜의 시기는 끝나고 이 세상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은 이 세상에 임할 엄숙한 재앙과 심판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감사하는 것은 성전이나 계명이나 심지어는 심판까지도 그 근본 정신은 사랑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명상할 문제   

오늘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 하나님이 계신 것이 분명한 것처럼, 이 죄악 세상의 역사가 끝나고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도 확실하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아무리 박해를 당하고 거절을 당해도 언제나 승리한다. 그것은 역사가 증거한다.
그러나 그 성경 말씀을 거절하는 세력이나 개인은 마침내 구원의 길에서 떠나게 된다. 그 운명의 날, 우리가 어느 편에 서 있을 것인지 오늘 결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우리의 생명은 언제 끝날지 모르며 세상의 마지막도 “생각지 않은 때”(마 24:44)에 청천벽력처럼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공부하신 내용에 대한 문제를 풀어 보시겠습니까?

1. 마흔 두달을 짓밟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1260년 동안 성도를 핍박할 것이다
삼년 반 동안 핍박할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 핍박할 것이다

2. 두 증인은 누구인가?

두 선지자
다니엘과 요한계시록
구약과 신약

3. 무저갱에서 올라와 두 증인을 죽인 세력은 무엇인가?

공산주의의 세력
프랑스 혁명세력
이슬람의 세력

4. 두 증인의 시체를 사흘 반 동안 목도 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성경이 삼 년 동안 금지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이 짧은 시간 동안 핍박을 받았다는 말이다
성경이 석 달 동안 금지 되었다는 말이다

5. 두 증인을 죽이려 했던 곳과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진처럼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세세토록 왕 노릇하였다
그름을 타고 올라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한계시록 1장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요한계시록에 대한 "선입견(先入見, Prejudice)"과 "오해(誤解, Misunderstanding)"를 버려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Victory of Jesus Christ)"를 말씀한다.
요한계시록은 "신비주의(神秘主義
, Mysticism)"와 "신비(神秘, Mystery)"를 구분해야 한다.

신비주의는 알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거나 또는 어떤 사람의 해석에 의지하여 믿으려는 것
이와 같은 자세가 이단들을 일으켰다.

요한복음 16:12-13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의 성령이 오셨는가?
아니면 아직 오시지 않았는가?
진리의 성령은 이미 오셨다.
1. 예수 그리스도
2. 오순절 성령 강림



신비는 알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것을 믿고 나가는 것
이와 같은 자세는 계시를 통하여 깨닫게 하신다.


요한계시록 1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

17. 내가 볼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 자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일곱 금 촛대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례 / 1992년 10월 28일
다미선교회의 공중 재림의 사건

언제(시기)에 촛점을 맞추면 현실을 부정하게 된다.

사례 / 서울 시내 버스에 666번 버스가 운행되고 있었다.
어느 교인이 목적지만을 생각하고 버스에 올라탔을 때 마침 그 버스의 번호가 666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교인은 운전기에게 버스를 세워달라고 강요하므로 버스 안의 승객들이 놀랐다고 한다.
계시록에 사용된 상징적인 용어가 영적으로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사례 / 뉴욕에서 롱아일랜드로 가다보면 건물 번호가 666이라고 크게 적힌 것을 볼 수 있다.
미국인들은 어느 누구도 그 수에 대해서 신비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유독 한국인들 특히 계시록을 좋아하는 특정한 교인들에게는 마치 그 건물이 악마의 빌딩처럼 생각한다.

요한계시록의 세 가지 촛점

1. 종말
2.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
3. 새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


계시(아포칼립시스, ἀποκάλυψις )

아포 : 벗긴다
칼립시스 : 감춘 것

다니엘 2: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다니엘 2: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요한계시록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해석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이비 이단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더 나아가 잘못된 종말론에 빠져 반사회적이고 비밀스러운 종파가 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요한계시록 7장14장에 나타난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에 현혹되어, ‘인 맞음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요한계시록을 학습하고 과거시험 보듯이 시험보는 신천지 교인들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요한계시록 말씀이 얼마나 그들을 세뇌하였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요한계시록이라는 책 제목은 계시록 1:1이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계시 혹은 묵시라는 말은 헬라어 ἀποκάλυψις (아포칼립시스)에서 온 말이다.

구약 헬라어 성경에는 명사 ἀποκάλυψις (아포칼립시스)는 전혀 나오지 않고, 다만 외경 집회서에 단 한 번 나온다.
하지만 동사 아포칼립토(ἀποκαλύπτω)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었다(창 8:13)
율법이 금하는 하체를 드러내다(성적 방종)를 지칭하는데 이 헬라어가 쓰였다(출 20:26; 레 18:6, 8, 9; 20:11; 신 27:20). 
언급하다(룻 4:4), 드러내다(삿 5:2), 나타나다(삼하 3:7)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일반적 뜻과 함께, 신적 계시나 현현에 대해서 히브리어 גלה(가라)의 번역어로서 아포칼립토(ἀποκαλύπτω)가 사용되었다(삼하 9:15).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시가 드러나다의 의미로서 이 단어는 ‘묵시록’ 장르에 속하는 다니엘서에 등장한다.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ἀπεκαλύφθη , revealed 부정과거 수동태),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라”(2:19)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ἀποκαλύπτω),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2:22).

다니엘서는 ἀποκαλύπτω(아포칼립토)라는 용어를 하나님의 신적이고 비밀스러운 계시행위에 적용하여 특별히 사용한다.

다니엘서 7장부터 나타나는 환상들은 신구약 중간시대에 있었던 헬라 왕조의 유대교 박해상황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말의 희망을 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은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신앙의 핍박 상황에서 역사의 종말을 계시록의 저자가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으로 전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묵시문학은 신구약 중간시대나 기독교 신앙 박해 시대에서 저자 미상의 책들로 많이 출현하였다.

요한계시록에서 동사 아포칼립토(ἀποκαλύπτω)는 한 번도 나오지 않고, 다만 명사 ἀποκάλυψις(아포칼립시스)가 1:1에 나타날 뿐이다.

환상과 관련된 계시(아포칼립시스)가 나오는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은 박해의 상황을 전제하고 있고, 특별히 순교자를 칭송하며, 신앙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한다.

순교자는 궁창의 별처럼 빛나고(단 12:3), 주님과 함께 천년 통치하는 첫째 부활의 참여자가 된다(계 20:6).

이 책들은 미래적 사건이나 종말의 때를 알리려는 의도가 담겨 있지 않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종말의 때, 혹은 메시아의 나라의 시기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분명한 거부와 부정을 강조하고 있다(눅 19:11; 행 1:7).

요한계시록을 ‘때와 시기’에 관한 책으로 해석하려 한다면,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인, 나팔, 대접의 환상 시리즈는 이미 선포된 예수의 종말 예언(막 13장)에 대한 반복과 강화일 뿐이며, 요한계시록의 요한은 ‘선지자 전승’에 속한 종으로서(계 22:9), 재앙과 종말, 회복과 구원에 대한 구약성경의 이야기와 선지서의 예언에 나오는 이미지와 상징을 사용하여, 자신이 처한 로마제국 상황에 적용하고 해석할 뿐이다.

때와 시기를 특정하는 시한부 종말론으로 해석할 수 없는 책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숫자는 결코 문자적 의미가 없고 상징적일 뿐이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신적 권위로 로마와 황제를 우상숭배하는 시대적 조류에 반응하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해 칭찬과 책망을 하고 있다.

밧모 섬에 유배당하여 주의 날에 교회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선지자 요한은(계1:10),  환상 가운데 보게 되는 하늘의 예배에 울려 퍼지는 승전가를 듣기도 하고 종말의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계시는 편지형식으로 교회에 전해지고, 애굽의 군사들이 홍해에 수장된 후에 모세가 승리의 노래를 부른 것처럼, 모세의 노래는 이제 어린 양 예수의 노래가 되고, 교회의 새 노래, 즉 승전가가 된다(계 15:3).

요한계시록은 결코 ‘때와 시기'에 대한 묵시가 아니다.
애굽과 바벨론처럼 로마제국도 하나님의 역사 앞에 무너지는 제국이 될 것이며, 종말은 땅을 망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되고, 성도들에게는 구원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는 책이다.
모든 사이비 이단의 요한계시록의 묵시해석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을 사용할 때(갈 1:12),
그 계시(ἀποκάλυψις )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칭한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를 이방에 전하도록 그에게 계시로 나타나셨다(ἀποκαλύπτω, 갈 1:16) 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고(롬 1:17), 믿음의 때를 계시한다(갈 3:23)고 선포한다.

계시라는 용어에서 그리스도의 다시 나타나심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라는 묵시적 종말을 이야기하지만(고전 1:7; 살후 1:7),
바울에게서 계시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주려는 계시인 것이다.
‘때와 시기’에 대한 계시는 없다.
주님의 말씀처럼,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행 1:7). 
때와 시기의 묵시를 말하면 다 가짜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기독인의 느낌

1. 잘 알 수 없는 내용이다
2. 설교자들의 설교 본문으로 부분적으로만 인용한다
3. 이해가 잘못 되었다

칼빈 : 주석을 집필하지 않았다.
칼빈이 마치 계시록을 이해하지 못하여 주석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유는 계시록에 대한 설교와 해석이 너무 다양하므로 칼빈까지 가담하여 더 어렵게 하지 않으려고 의도하였다.

요한계시록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기록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너무 많은 설교와 해석들 때문에 혼란을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의 특징

1. 계시의 책 - 묵시의 책

2. 예언의 책 - 미래의 책

하나님의 심판과 승리를 미리 보여주므로 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가 된다.
반면에 믿는 자들에게는 오늘의 고통과 핍박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격려한다.

3. 환상의 책 - 그림의 책

왜 그림으로 말씀을 주셨을까?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환희를 언어와 글자로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보여주셨다.

(예) 뉴욕이 얼마나 큰가?
       맨하튼에서부터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뉴욕주에 해당한다.

(예) 서울 / 5톤 트럭으로 쓰레기가 2000대 분량으로 쏟아지는 도시

(예) 로마 제국에게 메시지의 의미를 감추려는 의도


묵시문학이란?
다메섹 도상에서 본 환상은 묵시문학에서 소개된 것
구약의 묵시문학 / 다니엘, 에스겔, 스가랴 등
예언의 책으로 이사야 예레미야 소선지서 등

계시와 예언의 차이

계시는 종말에 나타나는 것(종말 징조)
예언은 종말에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어떻게 전개 될 것인가를 말씀한다(과정).


종말이란?

십자가 사건에서부터 다시 오시는 날까지의 전체의 시간

역사의 끝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겠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누구있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만이 종말의 시간을 바르게 이해 할 수 있다.
안식교와 유대교의 경우 2천 년 전의 십자가 사건의 죽음은 예수가 아니다.
기독교의 경우 이미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다시 오실 예수(재림)

다니엘 8:1
다니엘에게 처음에 나타난 이상 후 벨사살왕 삼년에 다시 이상이 나타나니라.


다니엘 11:45
그가 장막 궁전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베풀 것이나 그의 끝이 이르리니 도와줄 자가 없으리라.

다니엘 12: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요한계시록 5:5-6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이더라.

* 어린 양이란 죽임을 당한 어린 양 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을 가리킨다.



성경의 첫번째 책은 창세기(Genesis)
마지막 책은 요한계시록(Revelation)
성경의 정경화 작업에서 이렇게 순서를 배열한 까닭은 무엇일까?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처음과 마지막 순서인 이유

창세기는 창조의 시작과 믿음의 역사의 시작에 대해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역사와 믿음의 역사의 시작을 연결지어 가르쳐 줍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 66권 중 가장 마지막에 배열했는데, 그 이유는 세상과 역사의 종말에 대해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핵심주제

 

요한계시록역사의 종말 후에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이 도래할 것과 주님과 함께 왕노릇 할 저 천국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음도 알려 줍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초림)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는데, 마지막 때에 심판주로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시면(재림)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예수님의 재림사건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기에 앞서,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마음은 첫째, 요한계시록은 난해한 구절이 많아서 이해하기에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난해성) 둘째, 요한계시록은 내용이 매우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복잡성) 셋째,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인 요소가 많아서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상징성)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공부해야 하는 이유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에 대해 잘 알고 싶어하는 갈망이 있으나, 해석에 있어 조심스러운 부분들이 있으므로, 대부분의 교회들은 요한계시록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이단들요한계시록 연구에 몰두하여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들은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문자적으로 단순하게 자기들의 입맛대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단에 미혹 당하지 않으려면 진리의 내용을 제대로 정확하게 배워야만 합니다. 

 

 

A(알파)와 Ω(오메가)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역사에는 시작(A)과 끝(Ω)이 있다는 것입니다.

 

A(알파)는 영어 알파벳의 맨 첫 글자인 A(에이)에 해당하는 헬라어이고, Ω(오메가)는 영어 알파벳의 맨 끝 글자인 Z(제트)에 해당하는 헬라어입니다. 'A(알파)와 Ω(오메가)'라는 것은 '처음과 나중'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함으로써 A(알파)와 Ω(오메가)이신 하나님역사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진 출처 : 두산백과)

 

사도 요한의 저서들

 

예수님의 12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요한(요한은 자신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표현함)이 기록한 성경은 요한복음, 요한 1서, 요한 2서, 요한 3서, 요한계시록 등 모두 5권입니다.

 

요한복음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관하여 쓴 책이고, 요한 1,2,3서는 '사랑'에 관하여 쓴 책이며, 요한계시록은 종말과 주의 재림 및 천국에 대한 '소망'에 관하여 쓴 책입니다. 

 

사도 요한이 인생을 오랫동안 살면서 깨달은 결론은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형제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요한 1,2,3서의 주제이자, 성경 전체의 주제인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요한이 인생 말년에 밧모섬에 있을 때 하나님이 요한에게 보여 주신 계시에 관해 기록한 책입니다. (9절)

 

요한이 밧모섬에 있었다는 것은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왜 밧모섬에 유배되어야 했을까?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

 

예수님의 사후,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던 초대교회시대는 역사적으로 1C(1세기)에 해당되는 시기로, 로마의 10대 황제가 전 세계를 지배할 때입니다. 

 

즉, 초대교회시대이던 1세기는 교회가 환난과 박해를 심하게 당하던 로마시대였던 것입니다.  

 

그 중 특히, 네로 황제도미티안 황제에 의해 기독교는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므로, 로마의 황제숭배사상에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를 가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것은 기독교를 가장 심하게 박해했던 도미티안 황제때의 일입니다.

 

로마 황제의 박해가 심하다 보니, 요한은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것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에서 '짐승'로마 황제를 가리키지만, 로마 황제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계시의 의미와 내용

 

'계시(啓示)'란 '가려졌던 것을 열어서 보여 준다'는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이라 함은 하나님이 요한에게 계시로 보여 주신 것을 요한이 기록했다 하여 붙여진 제목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천주교에서는 Apocalypse of St. John이라 하고, 개신교에서는 Revelation of St. John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에 따라 요한이 기록한 계시의 내용은 요한이 본 것(과거), 지금 있는 것(현재), 장차 될 일(미래)입니다. (19절)

 

즉, 요한계시록에는 미래(종말)에 관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가 뒤죽박죽 뒤섞여 있기 때문에 내용이 복잡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알면, 쉽게 분간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

 

요한계시록의 1장서론 부분이며, 2~3장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며, 4~22장 장래의 일(대환난과 주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과거의 일(사건)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1C 당시 로마로부터 박해를 당하던 모습입니다. 

 

당시 밧모섬 주변에 있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오늘날의 터키 지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지도)

 

그런데, 놀랍게도 1세기때의 일곱 교회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장래의 일이란 현재 환난과 박해를 당하는 것처럼, 장차 주님의 재림때에도 큰 환난과 박해가 있을 것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4~18장에는 마지막 때 일어날 세 가지 대환난(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에 관한 내용이 나오고, 19~22장에는 장차 다시 오실 예수님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재림 이전교회에 큰 환난이 있을 것이며, 그 환난점점 강도가 심해질 것이지만(4~18장),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면, 새 하늘과 새 땅완전한 승리와 더불어 주실 것이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9~22장)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 가운데 예수님이 오심을 고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개요

 

 요한계시록의 저자 : 사도 요한

 요한계시록의 기록시기 : 로마시대(로마 황제에게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1세기경)

 요한계시록의 기록장소 : 밧모섬

요한계시록(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수신인 :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과 로마 황제로부터 환난과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인들

 

 

요한계시록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방법 

 

과거주의적 해석 : 1세기때 일곱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므로, 과거적인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래주의적 해석 : 장차 종말과 주님의 재림때 일어날 일이므로, 미래적인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역사주의적 해석 : 과거 초대교회때부터 미래의 종말의 때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서 이해해야 하므로, 역사적인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상주의적 해석 : 상징적, 신비적, 영적인 내용이므로, 이상적인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메시지)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요한계시록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 (요한계시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 (영생복락새 하늘과 새 땅(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비록, 환난이 있더라도 바로 믿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으므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자신감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영적 싸움에 대한 결단을 해야 한다. (악한 마귀가 환난과 어려움을 주지만, 영적 싸움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믿음의 전신갑주(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 무장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하나님의 성도들이 마귀.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반드시 착용해야 할 거룩한 의복으로서 진리의 허리띠, 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베소서 6:11~17 참고)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공부함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천국에 대한 소망예수님을 통한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영적으로 무장하여 오늘도 믿음생활을 잘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고대하며...

 


요한계시록을 천주교에서는 '요한묵시록(Apocalypse of St. Joh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계시와 묵시의 차이는 무엇일까?

 

 

계시(啓示)와 묵시(默示)의 차이

 

'계시(啓示)'와 '묵시(默示)'같은 어원에서 나온 단어들입니다.  두 단어의 어원은 '아포칼립시스(apocalypsis)' 라는 헬라어로서,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파생된 영어단어인 '아포칼립스(apocaypse)'의 뜻은 계시(계시록), 묵시(묵시록)입니다.

 

계시묵시 모두 '감춰진 것을 열어서 보여 주는 것'이라는 의미는 같습니다.  그러나, 두 단어의 쓰임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계시감춰져 있던 하나님의 비밀한 뜻성령을 통해 열어 보여 준 이고, 묵시종말, 대환난 격변기장차 나타날 일들에 대해 예언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하나님이 요한에게 계시로 보여 주신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묵시문학이란?

 

박해와 환난, 심판과 종말 등 대격변기에 나타날 일들에 대해 꿈과 환상으로 본 것을 쓴 문학 쟝르를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묵시문학' 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일반적인 묵시문학과는 구별되는 '성경적 묵시문학'입니다.

 

말라기 이후 약 400년간의 암흑기에 유대민족에게는 유대 묵시문학 유행했습니다. 

 

누군가 영웅이 출현하여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된 암흑시대 속히 종결짓기 바라는 집단심리가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은 새 시대새 인물열망하는 격변기의 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시문학의 특징은 종말과 심판, 대재앙 등에 관하여 강렬하고 충격적인 이미지로 묘사하며 상징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므로, 내용이 난해하고 복잡해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요한계시록 속에 나타난 상징성 복잡성난해성묵시문학의 요소입니다. 

 

이러한 요소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내용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내용이 복잡하고 어렵다 보니, 요한계시록은 읽기에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쉽게 접근하는 방법은 먼저 핵심주제를 파악한 후, 어려운 부분은 나중에 읽도록 빼 두고, 전체적인 큰 덩어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핵심주제

 

요한계시록의 전체 내용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박해대환난, 대재앙이 있지만, 그 후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재림이 있으며, 예수님의 승리와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면 우리들은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며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한 소망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고 (마라나타) 영적 싸움에 대한 결의를 함으로써 현실 속의 모든 환난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오해와 사이비, 이단들의 악용

 

요한계시록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두려워합니다.  장차 다가올 종말때 대재앙과 대환난과 심판의 모습이 무섭게 묘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환난과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소망을 주기 위해 쓰여진 글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고 나면, 소망을 갖게 되고 믿음이 더 좋아지고 든든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므로, 비록 대환난이 오더라도 예수님이 다시 세상에 오신 이후 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때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이비와 이단은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구원의 확신을 흔들리게 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도록 요한계시록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또, 사이비와 이단 자기 입장에서단편적으로 치우쳐 성경을 (특히 요한계시록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는 한쪽 관점에 치우치지 말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통합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을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일곱 교회에 주신 메시지는 과거 1세기 때의 일곱 교회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객관적으로 성경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도표를 활용하여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 좋습니다.

 

위의 도표에서와 같이 요한계시록의 구조크게 4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 요한계시록의 구조 (복습)

 

1. 서론 (1장)

 

1) 시제 : 과거 (요한이 본 것)

 

2) 내용 : 계시를 주시는 예수님

 

3) 핵심주제 : ♥천국에 대한 소망, 승리에 대한 확신, 환난의 극복과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 대한 결의

 

2.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2~3장)

 

1) 시제 : 현재 (지금 있는 일)

 

2) 내용 :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3) 핵심주제 : 일곱 교회의 장.단점 분석이상적인 교회상 제시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에 적용)

 

3. 말세의 대환난 (4~18장)복잡하고 어려운 부분

 

1) 시제 : 미래 (장차 될 일)

 

2) 내용 :

① 하늘의 심판 보좌 (4장)

일곱 인 재앙 (5장~8장 4절)ㅡ 3대 재앙 (주요계시)

일곱 나팔 재앙 (8장 5절~11장)ㅡ3대 재앙 (주요계시)

④ 대심판 예고 (12~14장) 

 일곱 대접 재앙 (15~18장)ㅡ3대 재앙 (주요계시)

 

3대 7중 재앙

 

3대 재앙이란? 일곱 인 재앙, 일곱 나팔 재앙, 일곱 대접 재앙

 

3대 7중 재앙이란? 3대 재앙각각 7단계를 거쳐 나타나는데, 점점 재앙의 강도가 세진다.

 

★ 주요계시삽입계시

 

주요계시 : 3대 재앙 (일곱 인 재앙, 일곱 나팔 재앙, 일곱 대접 재앙)

 

삽입계시 : 3대 재앙에 각각 3개씩 삽입되는 계시

 

여섯 인과 일곱 인 사이 (7장) 

여섯 나팔과 일곱 나팔 사이 (10장~11장 13절)

나팔 후 대접 사이 (12~14장)

 

삽입계시들 때문에 요한계시록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다. 

㉯ 그러나, 삽입계시는 핵심이 아니므로, 집착할 필요는 없다. 

㉰ ♥이단들은 복잡하고 난해한 삽입계시집중공략하고 자기 맘대로 해석하여 사람들을 미혹한다. 

(예를 들어, 14만 4천과 12뿔에 대한 억지의미 부여 등...)

 

③ 핵심주제 :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일어나는 사건들

 

4. 종말 (19~22장)

 

① 시제 : 미래 (장차 될 일)

 

② 내용 : ♥재림과 대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승리와 영광 중 왕노릇 

 

③ 핵심주제 : 새 하늘과 새 땅

 

 

요한계시록에 쉽게 접근하는 방법

 

♥먼저, 1~3장을 읽고 19~22장을 읽은 후, 맨 마지막에 4~18장을 읽는다.

 

1~3장은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한 서론 부분과 일곱 교회의 모습에 관한 내용이다.

 

② 19~22장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영원한 저 천국(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③ 4~18장대환난에 관한 부분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이다.

(특히,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삽입계시매우 복잡하지만, 핵심은 아니므로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요한계시록의 대주제는 환난이 있더라도 주님이 오셔서 승리를 주시므로, 잘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약 한달간 계속되는 요한계시록 강해를 통해 요한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버리고, 제대로 잘 배워서 소망 가운데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종말을 잘 준비하며 살아가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천국 도래에 대한 소망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며, 환난과 핍박이 와도 인내하고 영적 싸움에서 이기기를 결단하게 하는 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우리가 교회생활(믿음생활)을 잘 하면 마지막에 주님이 천국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심판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게 되는데, 이 때 대환난의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한 마디로 교회와 천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소망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이고, 교회는 현실 속에서 이루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영원한 저 천국을 사모하면서 부족한 모습일지라도 이 땅의 교회에서 천국을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그리스도의 명령》

 

1. 복이 있는 자가 되어라.

2. 예수님을 바로 알라. 

3. 사명을 알라. (사명에 충실하라.)

 


그리스도의 명령 

 

예수님이 사도 요한에게 명령하신 말씀은 곧 우리들에게도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세 가지로 살펴 보도록 합니다.

 

1. 복이 있는 자가 되어라. (1~3)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1)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2)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3) " 

 

예수님밧모섬에 갇혀 있던 사도 요한에게 장차 일어날 일들계시로 보여 주시고, " 본 것을 글로 기록하라. " 고 명령하셨습니다. (계시의 주체는 예수님이심) (1절)

 

그래서, 예수님이 보여 주시고 말씀하신 계시들을 요한이 글로 기록한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은 주님이 말씀하신 것들과 보여 주신 것들그대로 기록(말씀하신 것, 본 것만 기록)하였습니다. (2절)

 

(만일,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쓰고, 보여 주시지 않은 것을 쓴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명령하신 것은 곧, 우리들에게도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 행하는 자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3절)

 

신앙생활은 머리로만(생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체험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땐 육신의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 신령한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신령한 것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영안이 열리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야 바르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 이야기는 아무개가 들어야 할 소리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들어야 할 소리'임을 깨닫게 됨.)

 

따라서, ♥열린 눈, 듣는 귀, 깨닫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읽을 땐 열린 눈, 들을 귀, 깨닫는 마음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열린 것이 중요합니다.  열리지 않고 닫힌 사람에게는 아무리 보여 주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눈과 귀와 마음이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로마서 10:17)

 

성경말씀을 읽을 때 성령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자랍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듣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내게 주시는 음성으로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복이 있는 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눈), 듣고(귀), 지켜야(행동) 합니다.

 

 

2. 예수님을 바로 알라.  (4~18)

 

"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4)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5) "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4절)

 

4절과 5절은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인삿말에 해당됩니다. 

 

요한은 성부, 성자, 성령(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안부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예수님)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미래에도 계시는 분이십니다.

 

'일곱 영'(4절)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일곱(7)은 완전수를 뜻합니다.)

 

'충성된 증인'(5절)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셨다'는 것은 '으뜸', '큰 자'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온 땅의 왕보다 뛰어나신 주권을 가지신 '주권자'라는 뜻입니다.  (시편 89편 27절골로새서 1장 18절을 참고)

 

"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 (시편 89:27)

"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천하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 (골로새서 1:18)

 

" ...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5)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6)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7) "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 제사장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6절)

 

주님이 재림하실 땐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우리가 다 알게) 오실 것입니다. (7절) 

 

그러므로, 사이비와 이단의 교주들처럼 우리가 모르게 오는 재림주라면 모두 가짜입니다. 

 

"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 (8)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과거, 현재, 미래의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8절)

 

"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9),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10)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1) "

 

사도 요한이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아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어느 날, 예수님이 요한에게 성령을 통해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9~10절) 

 

예수님은 요한에게 지금 보는 것을 글로 써서 일곱 교회에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1절)

 

◆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들 :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12),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13),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14),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15),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6) " 

 

요한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몸을 돌이켰다' (12절)는 의미 속에 영적인 교훈이 숨어 있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쪽에서만 보면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눈 앞의 세상만 보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돌아서야(회개해야)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신령하고 복된 것을 볼 수 있도록, 돌이킬 줄 아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요한은 환상을 통해 만나 본 예수님의 모습을 마치 그림을 그려내듯 자세하게 묘사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12~16절)

 

요한은 환상 중에 본 예수님의 모습을 상징적인 표현법을 사용하여 강렬한 이미지로 묘사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이므로, 묵시문학의 표현기법인 상징적 표현과 강렬한 회화적 묘사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은 객관적으로 정형화된 모습이라기 보다는 요한의 주관적인 시각에 의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이나 환상 중에, 혹은 기도 중에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는 있지만, 보여지는 예수님의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본 예수님의 모습을 객관화시켜서 고정적인 이미지로 만들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나는 특별한 체험은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일곱 금 촛대'(12절)는 교회를 뜻하고, '일곱 별'(16절)은 주의 사자를 뜻합니다.

 

"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17),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8) "

 

요한은 환상 중에 예수님을 뵙고 두려워서 마치 죽은 자처럼 엎드러졌습니다. (17절)

 

두려워하는 요한에게 예수님은 "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며,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 말씀하셨습니다. (18절) 

 

♥주님은 사도 요한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영원히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비하(卑下)와 승귀(昇貴)의 예수님

 

예수님은 높고 높은 하나님이 성육신 하셔서 이 세상에 오신 분으로, 초라한 마굿간에서 탄생하시고, 고난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것을 ♥'비하(卑下)' 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으며,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종말때 심판주로 다시 오실 땐 (재림) 높고 높은 영광의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을 ♥'승귀(昇貴)'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요한에게 자신에 대해 보여 주시고 설명하시면서 요한을 격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라고...

 

♥예수님을 바로 믿으려면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광 중에 오실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영광스러운 모습의 주님영광과 권세로써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타파하러 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18절)

 

그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왕노릇 하며 살아가게 된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님을 믿으면 우리도 사망.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코로나 19의 위협도 주님의 권세로써 이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할렐루야~!!!

 

 

3. 사명을 알라. (19~20) ㅡ 사명에 충실하라.

 

" 그러므로 네가 본 것지금 있는 일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19)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20) " 

 

'네가 본 것'은 바로 1장에서 주님이 보여 주신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 환상(과거의 일)을 뜻하고,

 

'지금 있는 일' 2~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들의 모습(현재의 일ㅡ그 당시 관점에서)을 뜻하며,

 

'장차 될 일' 4~22장에 기록된 대환난과 주님의 재림과 심판, 종말과 신천신지의 도래 사건(미래의 일)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사도 요한에게 이것들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9~20절) (요한계시록의 탄생 경위)

 

'일곱 금 촛대' '일곱 교회'를 뜻합니다.  (12절, 20절)

 

단지 7개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를 뜻하는 것입니다. (숫자 '7'완전수를 의미합니다.)

 

'일곱 별의 비밀'(20절)에 대해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일곱 별''일곱 교회의 주의 사자' 를 뜻합니다.  (16절, 20절)

 

우리는 일반적으로 '주의 사자'를 '목회자'로만 알고 있지만, '주님께서 쓰시는 주의 일꾼'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입니다.  즉, ♥주의 사자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참되게 헌신하는 사람, '사명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는 일곱 별의 참된 주의 사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들 각자 각자가 ♥하나님이 나를 '주의 사자'로 세우셨다는 '사명감'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섬기는 교회의 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한마음 성도들은 한마음 교회의 빛나는 별이 되어야 합니다. 

 

귀한 일곱 별 중의 한 사람, 사명자로서 별과 같이 빛나는 참된 일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하신 명령대로...

 

열린 눈, 들을 귀, 깨닫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실천하는 복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도록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명을 바로 알아일곱 별, 일곱 주의 사자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의 부족함을 채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나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도록 수고하는 귀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한계시록 1장은 요한계시록의 서론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6-21절은 계시록의 결론입니다. 서론과 결론의 내용을 보면 비슷한 내용이 많습니다. 이 장에서 계시록 1장을 다루고 다음 장에는 계시록의 결론을 다루려고 합니다.

첫째로 요한계시록의 상징성에 대한 문제

많은 목사님들이나 성도들이 계시록에 대해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계시록은 이해하기에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모르면 어렵습니다, 그러나 알면 계시록도 이해하기 쉽습니다. 또 계시록은 추상적이고 상징적이라서 어렵다는 것입니다.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것이 많기는 하지만 추상이나 상징성도 이해가 가능합니다. 계시록 1:1에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라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계시록을 기록할 때에 구약의 선지서나 신약의 서신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본 것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2절에서도 자기의 본 것( 1, 11절)을 '다 증거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무엇을 보았다고 합니까? 그것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 비추어서 생각해 볼 때에 요한계시록은 1세기 사람인 사도요한이 21세기 문명을 환상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문명이라 하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과학, 역사, 기후, 전쟁을 총망라해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1세기 사람이 21세기 문명을 보았는데 그것을 책에 글로 기록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1세기 문명 안에 사는 사람이 21세기 문명을 보고 어떻게 그것을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21세기 문명을 보았지만 1세기 사람이니까 1세기 식으로 기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사도요한이 21세기 문명 기기인 기차를 보았다고 합시다. 이것을 기술해야 합니다. 기차는 빨리 달립니다. 그 당시에 빨리 달리는 것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빨리 달리는 기차가 철로 만들어졌고 철길을 따라 움직이는 21세기 문명을 보고 1세기 식으로 기록하기를, 철마가 철길 위로 달린다고 기술했습니다. 그렇게 기록된 요한계시록을 21세기의 성도들이 볼 때에 추상적이다 상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에 추상적이라고 생각되거던 이것이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좋은 예를 소개하겠습니다. 이사야 60:8에, '저 구름같이 비둘기들이 그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것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비행기를 타고 이스라엘 땅으로 오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700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가 환상으로 비행기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하늘을 나는 것은 구름과 새들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구름 사이로 날아오는 사람들을 27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어떻게 묘사해야 했겠습니까? 저 구름 같이 저 비둘기들이 그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것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냐라고 묘사했던 것입니다. 이 구절을 비행기가 없었던 150년 전에 살았던 성도들이 볼 때에 이 구절은 추상적이다, 상징적이다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것이 비행기를 타고 본토로 돌아 오는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했구나하고 디코딩(DECODING)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차가 생기기 전인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살았던 성도들이 이 계시록을 볼 때에 기차에 대한 계시록의 진술인 철마가 철길을 달린다는 말이 추상적이요 상징적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철마가 철길을 달린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21세기의 우리 성도들은 그것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기차를 1세기 식으로 그렇게 표현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기차를 보고 또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이해는 점진적인 것입니다. 2천년 전의 성도들이 계시록을 30퍼센트 이해했다면 6세기의 사람들은 40퍼센트, 150년 전의 성도들은 이 계시록을 60퍼센트 정도 이해할 수 있으며 오늘날의 성도들은 90퍼센트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안 풀리는 부분이 조금 남았습니다. 예를 들면 계시록 10:4말씀에서 일곱 우레가 발할 때에 요한이 그것을 기록하려고 했을 때에 주님이 그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요한계시록 주석가들이나 목사님들이 3-17세기에 요한계시록을 주석한 책을 참조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책들은 그 세기까지 밝혀진 정도로만 참조하셔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요한계시록의 저자와 계시록을 주신 목적

 ‘1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2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1절에 보면 원 저자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알리시려고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성부하나님이 성자 하나님께 드리고 성자하나님은 천사에게 주어 환상으로 사도요한에게 전달하고 사도 요한은 자기가 본 것을 기록하여 주의 종들에게와 성도들에게 전달하신 것입니다. 이 요한계시록은 원 저자 네분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너무나 중요하고 중요한 책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 이 책을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들과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라 했습니다. 여기 읽는 자들이란 유대인 회당에 가면 인도자가 두루마리 책을 읽고 그 구절을 해석해 줍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지도자가 읽고 설명하는 것을 귀로 듣습니다. 여기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란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말하며 듣는 자들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읽고 듣는 자들이 읽고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언의 말씀대로 행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복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 여기에 예언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는데 이 예언의 말씀을 어떻게 지켜 행합니까?
그것은 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면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운 줄을 깨닫고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거듭나고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성경과 기도로 경건한 생활을 하며 죽기까지 믿음을 지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될 때에 이 사람은 행복자인 것입니다.

4. 이 요한계시록은 묵시록을 편지로 보낸 것입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 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9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10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이 계시록을 그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7 교회들에게 편지 형태로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소아시아 지역에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7 교회에만 편지를 쓴 것은 이 7교회들이 그 당시 전 교회들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하나님께서 칠일 동안 창조하셨다는 그 일곱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절대적 완성을 상징하는 완전 수요 전체를 나타내는 수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이 서신은 지역과 시대를 초월한 모든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곱교회는 1세기 교회에도 해당되고 21세기의 교회에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 일곱 교회는 일곱 패턴의 교회들입니다. 그 당시는 물론 이거니와 교회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 이런 일곱 성격의 교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에베소 같은 첫 사랑을 잃은 교회, 서머나와 같은 박해받는 교회, 필라델피아 같은 전도, 선교하는 교회, 라오디게아 같은 세속적이요 재물에 눈이 멀은 타락한 말세 교회 등등입니다.

셋째로 계시록을 주신 주님의 모습

‘12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7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18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9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 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1. 구름타고 오시는 주님
그 당시 교회들은 로마정부에 의해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을 때입니다. 이 계시록이 성도들이 세상에서는 핍박을 당하나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죽기까지 신앙을 지키도록 권면과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 재림의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라 아멘'했습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박해와 죽임을 당하나 구름타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 하고 다 부활하게 될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여기서 구름 타고 오시는 주님을 

'각인의 눈이 그를 본다'고 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초림하실 때는 소수의 사람들이 탄생을 목격했지만 주님이 공중강림하실 때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했습니다. 이 구절이 이해가 안됩니다. 이 말씀은 스가랴서 12:10의 내용과 같습니다. '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했습니다. 

2.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해 통곡하리니'했습니다.
스가랴서 12:12이하에서도 유대인들과 세상 사람들이 회개의 통곡을 하는 것을 봅니다. 계시록 1:7에서도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그를 인하여 통곡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공중강림하실 때에 구름타고 오셔서 성도들의 몸을 부활시키시고 살아 있는 자들을 순식간에 변화시켜 하늘로 데려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신들은 들림 받지 못한 데 대해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 중에 불신자들은 자신들이 당할 심판을 생각하고 통곡할 것이요 들림받지 못하고 남은 신자들은 들림받지 못했음을 통곡할 것이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그 때야 회개하며 통곡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한 로마 병사가(요19:34)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를 찌른자들'로 복수로 표현되었습니다. 계시록 1:7과 스가랴서 12:10에서 그를 찌를 자들도 보리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을 찌른 자들이 어찌 재림의 주님을 본다고 할 수 있느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찌른 자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 것을 깨닫고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는 그 병사로 하여금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도록한 배후 세력인 로마 관원들과 유대 관원들까지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더 나아가 주의 제자들을 박해하던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현재의 모든 유대인들도 역시 주를 찌른 자들에 포함됩니다. 또한 주님께서 모든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사 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로마 병정에게 옆구리를 찔렸다면 주님의 찔림은 우리 모든 인간들의 죄악을 위한 것이므로 광범위하게는 우리 자신들도 그 찌른 자에 포함됩니다.

셋째로 사도요한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

사도요한은 교회 전승에 의하면 로마의 제 10대 황제 (AD 81- AD 95)인 도미티아누스가 사도요한을 끓는 기름가마에 넣어 죽이려고 했지만 사도 요한이 죽지 않자 밧모섬으로 귀양을 보냈는데 그 때가 거의 100살 가까운 나이였다고 합니다. 주후 95년에 11대 황제인 넬바가 황제가 되면서 풀려 났었는데 밧모섬의 유배는 AD95- AD 96년의 약 1년 사이의 기간이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어느 주일날에 성령에 감동되었는데 주님께서 요한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나팔소리 같이 큰 음성이 뒤에서 들렸는데 그 주님을 보기 위해 뒤를 돌아 봤습니다.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시는 주님을 목격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장차 될 일을 보여 주시면서 그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교회에 보내라고 합니다. 사도요한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런 모습이 아니라 천상에 계시는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1. 그 주님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차림은 대제사장의 옷 차림과 같습니다(출28:4, 8, 레위기 16:4). 또한 왕의 차림과도 같습니다(사6:1). 이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의 대제사장과 왕으로서 존귀와 위엄을 지니고 계신 분임을 묘사합니다. 사도요한은 환상 중에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대제사장이시요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단10:5,6).
2. 또한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같으며(단 7:9))했습니다.  양털 같고 눈과 같은 흰 머리털은 영생, 지혜, 성결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흰 머리는 노인을 상징하는데 노인은 지내온 인생의 긴 연륜 만큼이나 지혜와 경험을 축적하고 있으며, 희다는 것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시고 지혜로우시며 성결하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니엘 7:9에, '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했습니다. 책들이 펴 놓였더라’는 말씀은 계시록 20:12의 말씀과 같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3. 또한 '눈은 불꽃같고'  다니엘서 10:6에서 언급된 메시야에 대한 묘사인 '그눈은 횃불같고' 라는 말을 반영한 것입니다. 여기서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과 인간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통찰력과 냉엄한 공의를 나타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의 불꽃 같이 밝은 그리스도의 눈 앞에서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으며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지 않아 죄악의 더러움으로 얼룩진 자들은 모두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다니엘 10:4-6, '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 가에 있었는데 5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 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4. 또한 '주님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서 10:6에 의거한 표현입니다. 발은 몸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인데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견고하여 장차 그 원수를 짓밟을 때에 영광된 승리를 성취할 것임을 보여 줍니다. 장차 심판의 주로 오시는 주님의 발은 세상을 딛고 원수를 심판하실 영광과 권능의 발인 것입니다.
5. 또한 '그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같다'고 했습니다.  에스겔서 43:2에 의하면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음성을 표현할 때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 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많은 물은 거대한 홍수가 엄습할 때 나는 소리로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권능과 위엄을 나타냅니다. 주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다는 것은 주님의 권능이 불가항력이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의 주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에서 주님의 호령이 이와같을 것입니다.

6. 또한 오른 손에는 일곱 별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오른 손은 능력과 힘을 상징합니다 (출 15:6, 시 45:4, 겔21:22) . 그러므로 주님의 오른 손은 주님의 절대적인 권능를 징합니다. 일곱 별은 교회의 사자들 곧 우주적 교회를 지키는 하늘의 천사들을 지칭합니다. 주님은 천사 들을 세워 자신의 교회를 지키고 그 천사들은 주님의 권능의 오른 손 안에 온전히 사로잡혀 그 오른 손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사자(앙겔로서)는 일반적으로 천사를 의미하나 때로 인간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눅7:27, 9:52).그래서 혹자는 본문의 사자가 요한이 일곱교회에 본서를 전달하기 위해 보낸 사자이거나 혹은 아니면 당시 그곳 교회의 감독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에서는 이것이 인간을 지칭하는 예가 없으며, 본서에서도 67회 사용되고 있으나 모두 하늘의 천사들을 지칭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에 본문의 사자는 교회를 지키는 하늘의 천사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7. 또한 주님의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은 신약과 구약성경에 자주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살아 운동력이 있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계시록 19:15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계시록 19:21의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했습니다.
8. 또한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7:2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이것은 하나님 영광 되고 거룩하며 진실되고 사랑이 넘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9. 또한 주님은 처음이요 나중이며, 전에는 죽었지만 이제 세세토록살아 계시며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부는 헬라어로는 하데스요, 히브리어로는 스올이라 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는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의 구별 없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가는 곳으로 묘사되었습니다(왕상 2:2, 9, 욥 3:13, 30:23, 시 89:48, 사14:9, 겔 32:28) 그러나 이러한 음부개념은 점차 발전하여 불신자의 영이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중간기 처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음부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낙원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영혼들이 몸의 부활을 하기 전까지 거하는 사후의 중간기 처소를 의미합니다. 구약시대는 누가복음 16장의 죽어 음부에 간 홍포부자가 눈을 들어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홍포부자는 뜨거운 불속에서 고통을 받았고 구원받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앉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음부에 내려 가셔서 선한 자들의 처소를 음부에서 낙원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사망은 죽은 자의 몸이 묻히는 장소를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10:28말씀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했습니다. 세상 권력자들이 성도들의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죽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몸을 죽이는 세상 권력자들을 무서워하여 박해 때문에 신앙을 변질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믿음에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믿음은 양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몸은 언젠가 죽게  되어 있습니다.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세상의 권력자보다 더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몸도 멸하시고 영혼도 멸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나중에 성도들을 죽였던 세상 권력자들과 사탄과 그 무리들을 지옥에 멸하시기 위해 지옥문을 여는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우리 구주가 아니라 우주적 교회 공동체의 머리로서 무한한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만유를 다스리시며 종국에는 자기 백성의 집합체인 교회가 승리하도록 역사하시는 전능자시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사도요한에게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인간 세상에서 박해받고 순교하는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시며 영광과 권능을 가지신 분으로서 때가 되면 성도들을 박해하던 모든 자들을 심판하실 것을 보여 주심으로 박해와 핍박에도 굴하지 말고 끝가지 인내하며 죽기까지 승리하도록 그 당시 성도들을 격려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 박해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상 사탄은 끊임 없이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여 왔는데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은 나그넷 길인데 나그네 길을 행할 때에 몰아 닥치는 환난과 핍박과 박해에도 참고 인내하여 세상을 심판하려 오실 주님을 바라보고 신뢰하여 죽기까지 충성할 것을 우리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더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도 승리한 초대교회 신앙선배들을 생각하며 우리의 승리를 온전하게 보증하시는 전능자이시며, 구주되시고 심판주되시는 주님을 신뢰하면서 마지막까지 승리하기를 원하셔서 주님의 이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원어 / 영어 분석 1(계1:1-10)

요한계시록은 묵시로 주어진 계시임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한 자의적인 해석으로 수많은 이단의 병폐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22:7)”라는 말씀처럼 이 책을 사모하고 가까이해야 하는 주의 성도들에게는 금기의 말씀이 돼 버렸습니다.
성경의 결말이 담긴 요한계시록을 분석하는 이 작업이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 복이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1장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본절에 “계시”로 번역한 헬라어 '아포칼룹시스(apŏkalüp- sis. ἀποκάλυψις)'
'apokalupsis(아파칼룹시스)’는 신약에 총 18번 나오는데 ‘덮여 있는 것을 벗겨내 보여주다’란 뜻입니다.

이 단어는 주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쓰이기에 누가복음 2장 32절의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에서 ‘비추는’은 ‘계시’로 번역했어야 합니다.

즉, 누가복음 2장 32절은 “이방을 위한(eis) 계시(apokalupsis)의 빛이며(kai) 당신의(sou)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이 단어가 쓰인 18개의 구절을 모두 읽어보기 원하는 분들은 단어를 누르면 됩니다. https://biblehub.com/greek/602.htm).

602. apokalupsis
Strong's Concordance
apokalupsis: an uncovering
Original Word: ἀποκάλυψις, εως, ἡ
Part of Speech: Noun, Feminine
Transliteration: apokalupsis
Phonetic Spelling: (ap-ok-al'-oop-sis)
Definition: an uncovering
Usage: an unveiling, uncovering, revealing, revelation.
HELPS Word-studies

Cognate: 602 apokálypsis – properly, uncovering (unveiling). See 601 (apokalyptō).

602 /apokálypsis ("revelation, unveiling") is principally used of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the Word), especially a particular (spiritual) manifestation of Christ (His will) previously unknown to the extent (because "veiled, covered").

NAS Exhaustive Concordance
Word Origin
from apokaluptó
Definition
an uncovering
NASB Translation
revealed (1), revealing (1), revelation (14), revelations (2).

Thayer's Greek Lexicon
STRONGS NT 602: ἀποκάλυψις

ἀποκάλυψις, ἀποκαλύψεως, ἡ (ἀποκαλύπτω, which see), an uncovering;

1. properly, a laying bare, making naked (1 Samuel 20:30).

2. tropically, in N. T. and ecclesiastical language (see end), a. a disclosure of truth, instruction, concerning divine things before unknown — especially those relating to the Christian salvation — given to the soul by God himself, or by the ascended Christ, especially through the operation of the Holy Spirit (1 Corinthians 2:10), and so to be distinguished from other methods of instruction; hence, κατά ἀποκάλυψιν γνωρίζεσθαι, Ephesians 3:3. πνεῦμα ἀποκαλύψεως, a spirit received from God disclosing what and how great are the benefits of salvation, Ephesians 1:17, cf. Ephesians 1:18. with the genitive of the object, τοῦ μυστηρίου, Romans 16:25. with the genitive of the subjunctive,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2 Corinthians 12:1 (revelations by ecstasies and visions, (so 2 Corinthians 12:7)); Galatians 1:12; Revelation 1:1 (revelation of future things relating to the consummation of the divine kingdom); κατ' ἀποκάλυψιν, Galatians 2:2; λαλήσω ... ἐν ἀποκαλύψει, to speak on the ground of (others, in the form of) a revelation, agreeably to a revelation received, 1 Corinthians 14:6; equivalent to ἀποκεκαλυμμενον, in the phrase ἀποκάλυψιν ἔχειν, 1 Corinthians 14:26.

b. equivalent to τό ἀποκαλύπτεσθαι as used of events by which things or states or persons hitherto withdrawn from view are made visible to all, manifestation, appearance, cf. ἀποκαλύπτω, 2, d. and e.: φῶς εἰς ἀποκάλυψιν ἐθνῶν, a light to appear to the Gentiles (others render 'a light for a revelation (of divine truth) to the Gentiles,' and so refer the use to a. above), Luke 2:32; ἀποκαλύψεως δικαιοκρισίας Θεοῦ, Romans 2:5; τῶν υἱῶν τοῦ Θεοῦ, the event in which it will appear who and what the sons of God are, by the glory received from God at the last day, Romans 8:19; τῆς δόξης τοῦ Χριστοῦ, of the glory clothed with which he will return from heaven, 1 Peter 4:13; of this return itself the phrase is used, ἀποκαλύψει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2 Thessalonians 1:7; 1 Corinthians 1:7; 1 Peter 1:7, 13. (Among Greek writings, Plutarch uses the word once, Cat. maj. c. 20, of the denudation of the body (also in Paul. Aemil. 14 α. ὑδάτων; in Quomodo adul. ab amic. 32 α. ἁμαρτίας; cf. Sir. 11:27 Sir. 22:22 etc. See Trench, § xciv. and references under the word ἀποκαλύπτω, at the end).)

Strong's Exhaustive Concordance
appearing, coming, manifestation, revelation.

From apokalupto; disclosure -- appearing, coming, lighten, manifestation, be revealed, revelation.

see GREEK apokalupto

Forms and Transliterations
αποκαλύψει αποκαλυψεις αποκαλύψεις ἀποκαλύψεις αποκαλυψεων αποκαλύψεων ἀποκαλύψεων αποκαλυψεως αποκαλύψεως ἀποκαλύψεως αποκαλυψιν αποκάλυψιν ἀποκάλυψιν ΑΠΟΚΑΛΥΨΙΣ αποκάλυψις ἀποκάλυψις apokalupseis apokalupseon apokalupseōn apokalupseos apokalupseōs apokalupsin APOKALUPsIS apokalypseis apokalýpseis apokalypseon apokalypseōn apokalýpseon apokalýpseōn apokalypseos apokalypseōs apokalýpseos apokalýpseōs apokalypsin apokálypsin APOKALYPSIS
Links
Interlinear GreekInterlinear HebrewStrong's NumbersEnglishman's Greek ConcordanceEnglishman's Hebrew ConcordanceParallel Texts
Englishman's Concordance
Luke 2:32 N-AFS
GRK: φῶς εἰς ἀποκάλυψιν ἐθνῶν καὶ
NAS: A LIGHT OF REVELATION TO THE GENTILES,
KJV: A light to lighten the Gentiles, and
INT: a light for revelation of [the] Gentiles and

Romans 2:5 N-GFS
GRK: ὀργῆς καὶ ἀποκαλύψεως δικαιοκρισίας τοῦ
NAS: of wrath and revelation of the righteous judgment
KJV: and revelation of the righteous judgment
INT: of wrath and revelation of righteous judgement

Romans 8:19 N-AFS
GRK: κτίσεως τὴν ἀποκάλυψιν τῶν υἱῶν
NAS: waits eagerly for the revealing of the sons
KJV: waiteth for the manifestation of the sons
INT: creation the revelation of the sons

Romans 16:25 N-AFS
GRK: Χριστοῦ κατὰ ἀποκάλυψιν μυστηρίου χρόνοις
NAS: according to the revelation of the mystery
KJV: according to the revelation of the mystery,
INT: Christ according to a revelation of [the] mystery in times

1 Corinthians 1:7 N-AFS
GRK: ἀπεκδεχομένους τὴν ἀποκάλυψιν τοῦ κυρίου
NAS: awaiting eagerly the revelation of our Lord
KJV: waiting for the coming of our
INT: awaiting the revelation of the Lord

1 Corinthians 14:6 N-DFS
GRK: ἢ ἐν ἀποκαλύψει ἢ ἐν
NAS: by way of revelation or
KJV: either by revelation, or by
INT: either in revelation or in

1 Corinthians 14:26 N-AFS
GRK: διδαχὴν ἔχει ἀποκάλυψιν ἔχει γλῶσσαν
NAS: has a revelation, has
KJV: hath a revelation, hath
INT: a teaching has a revelation has a tongue

2 Corinthians 12:1 N-AFP
GRK: ὀπτασίας καὶ ἀποκαλύψεις Κυρίου
NAS: on to visions and revelations of the Lord.
KJV: visions and revelations of the Lord.
INT: visions and revelations of [the] Lord

2 Corinthians 12:7 N-GFP
GRK: ὑπερβολῇ τῶν ἀποκαλύψεων διὸ ἵνα
NAS: Because of the surpassing greatness of the revelations, for this reason,
KJV: through the abundance of the revelations, there was given
INT: surpassingness of the revelations therefore that

Galatians 1:12 N-GFS
GRK: ἀλλὰ δι' ἀποκαλύψ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NAS: it, but [I received it] through a revelation of Jesus
KJV: by the revelation of Jesus
INT: but by a revelation of Jesus Christ

Galatians 2:2 N-AFS
GRK: δὲ κατὰ ἀποκάλυψιν καὶ ἀνεθέμην
NAS: It was because of a revelation that I went
KJV: by revelation, and
INT: moreover according to revelation and laid before

Ephesians 1:17 N-GFS
GRK: σοφίας καὶ ἀποκαλύψεως ἐν ἐπιγνώσει
NAS: of wisdom and of revelation in the knowledge
KJV: and revelation in
INT: of wisdom and revelation in [the] knowledge

Ephesians 3:3 N-AFS
GRK: ὅτι κατὰ ἀποκάλυψιν ἐγνωρίσθη μοι
NAS: that by revelation there was made known
KJV: by revelation he made known
INT: that by revelation he made known to me

2 Thessalonians 1:7 N-DFS
GRK: ἐν τῇ ἀποκαλύψει τοῦ κυρίου
NAS: Jesus will be revealed from heaven
KJV: Jesus shall be revealed from
INT: at the revelation of the Lord

1 Peter 1:7 N-DFS
GRK: τιμὴν ἐν ἀποκαλύψει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NAS: and honor at the revelation of Jesus
KJV: at the appearing of Jesus
INT: honor in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1 Peter 1:13 N-DFS
GRK: χάριν ἐν ἀποκαλύψει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NAS: to be brought to you at the revelation of Jesus
KJV: at the revelation of Jesus
INT: grace at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1 Peter 4:13 N-DFS
GRK: ἐν τῇ ἀποκαλύψει τῆς δόξης
NAS: that also at the revelation of His glory
KJV: glory shall be revealed, ye may be glad
INT: in the revelation of the glory

Revelation 1:1 N-NFS
GRK: ΑΠΟΚΑΛΥΨΙΣ ΙΗΣΟΥ ΧΡΙΣΤΟΥ
NAS: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KJV: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INT: Revelation of Jesus Christ

Strong's Greek 602
18 Occurrences


ἀποκαλύψει — 5 Occ.
ἀποκαλύψεις — 1 Occ.
ἀποκαλύψεων — 1 Occ.
ἀποκαλύψεως — 3 Occ.
ἀποκάλυψιν — 7 Occ.
ΑΠΟΚΑΛΥΨΙΣ — 1 Occ.

이 단어는 ‘벗겨내다, 드러내다, 계시하다’란 뜻의 ‘apokaluptó(아파칼룹토)’란 헬라어 어원에서 나왔으며 이 어원은 신약에 총 26번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The revelaltion of Jesus Christ)”란 표현은 본절을 포함해서 킹제임스 영어성경에 총 3번 나옵니다(부활 및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3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3이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부활, 영적 완전함, 혹은 어떤 것의 완성’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수 3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3은 7과 함께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하나님의 완전수이며 4개의(3, 7, 10, 12) 완전수 중 가장 첫 번째 숫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독립적인 3분이시며 한 분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오직 그분께만 있는 3가지 특성이 있는데, ‘전능’, ‘전지’, ‘무소 부재(편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걸 하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모든 걸 아시며, 또 모든 곳에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빚어진 우리도 영과 혼과 육, 3부분으로 만들어져 있으며(영혼육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생각, 말, 행동이란 3가지 영역으로 일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도 삼차원인데, 공간이 만들어지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숫자가 3이기도 합니다. 지구를 비추는 태양도 3가지 특성이 있는데, 햇빛은 ‘빨강, 초록, 파랑’의 원색이며, “빛, 에너지, 파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연도 ‘동물, 식물, 광물’로 나뉘며 물체는 ‘고체, 액체, 기체’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시간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뉘며 완성되는데, 주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과거) 이제도 계시고(현재) 장차 오실 이(미래)”시기에(계1:8, 4:8) 영원히 계십니다.

3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중요한 숫자 중 하나이며 따라서 자주 등장하기에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약속의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이 가져왔던 3가지 산물인 포도와 무화과, 그리고 석류(민 13:23)는 하나님 약속의 풍성함과 완전함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3개월간 모세를 숨겨 키우고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후 3개월간 침례 요한의 엄마인 엘리사벳과 지내다 돌아옵니다. 신명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신 3가지 직분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형제들 가운데서 택하사 일으키실 왕(신 17:15), 제사장(신18:3-5), 그리고 선지자(신18:15)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도피성을 둘 것을 명령하시는데,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동쪽 땅에 3개의 도피성을 구별해서 지정했고(신 4:41-43),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 땅을 3구역으로 나눠 3개의 도피성을 구별해서 두라고 명령했습니다(신19:2-3). 그리고 혹시 여호와께서 너희의 지경을 넓혀 말씀하신 땅을 다 주실 경우, 3개의 도피성을 더 구별하라고(신19:8-9) 했기에, 도피성의 수는 최대 9개(3+3+3, 3X3)입니다. 다니엘은 하루 3번씩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으며(단 6:10), 3번의 7일(21일)을 슬퍼하며 금식했습니다(단 10:2). 이사야서 6장 3절에서 스랍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3번에 걸쳐 찬양하고 요한계시록에서 4 생물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3번 외치며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주 하나님께 올립니다(계 4:8-9).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셨던 예수님은 ‘금, 몰약, 유향’ 3가지의 선물을 받으셨으며, 12살이 되셨을 때 부모가 예루살렘에서 3일간 잃어버리지만, 성전에서 다시 찾습니다(눅 2:46).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단에 시험받으실 때도 3단계로 받으셨는데, 돌을 떡으로 만들라, 성에서 뛰어내리라, 내게 절하고 세상 왕국들을 받으라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가운데 3번에 걸쳐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십니다. 첫 번째는 요단강에서 침례(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였고(마 3:17; 막 1:11; 눅 3:22), 두 번째는 변화산에서 3명의 제자 앞에서 변용하셨을 때였고(마 17:15; 막 9:7; 눅 9:35), 세 번째는 십자가 선상에서였습니다(요 12:28). 그런데 이런 기록이 성경에 총 7번 나온다는 사실을 이번에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처럼 3과 7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번번이 발견하게 되는데, 여호와의 7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7절기는 ‘유교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칠칠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초막절)’인데 크게는 ‘무교절, 오순절(칠칠절), 장막절(초막절)’ 3절기로 묶기도 합니다. 봄절기인 ‘유교절, 무교절, 초실절’이 무교절을 지키는 일주일 안팎으로 오기 때문이고, 가을절기인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이 대략 3주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일 년에 3번 여호와를 뵈러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올라올 것을 명령하십니다(출 23:14-17; 신 16:16).

창조 셋째 날 하나님은 땅을 물 위로 올라오게(드러나게) 하시는데(창 1:9), 이것은 주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공생애 기간 죽음에서 3명의 사람을 부활시키신(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나사로)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십니다(요 14:6). 예수님은 표적을 찾는 바리새인들에게 요나의 표적 즉,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영어로는 3 days and 3 nights:낮 세 번과 밤 세 번) 땅속에 있을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3번 기도하신 후 빌라도에게 넘겨져 재판받으셨고 제3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막 15:25) 온 땅에 총 3시간의(제6시에서 9시까지) 어둠이 임합니다(막 15:33-34).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3개의 언어로(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명칭이 적혔었는데, 이는 십자가의 속죄가 모든 나라, 백성, 방언을 위한 것임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요 19:20). 예수님 좌우에 2명의 죄인이 십자가에 박혔었기에 골고다 언덕엔 3개의 십자가가 있었고(요 19:18), 주님은 장사한 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고전 15:4). 이런 주님에 대해 땅에서 증거하는 3가지는 “영과 물과 피”이며(요일 5:8) 주님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기’를 3번에 걸쳐 기도하십니다(요 17:11-23). 이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3가지 덕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어떤 것의 ‘완성, 성취, 완벽, 완전’을 의미하는 3의 역할은 성경 곳곳에 드러나는 진리입니다. 베드로가 인간의 연약함과 허황함을 예수님을 3번 부인하는 것으로 성취했다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당부를 3번 하심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회복시키십니다. 3년 동안 열매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실패를 보여주셨고(눅 13:7)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는 환상을 3번 보여주는 것으로 이방인 구원을 향한 완벽한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죄의 유혹과 시험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3단계로 오며 멸망은 ‘가인의 길, 발람의 어그러진 길, 고라의 패역(유 1:11)’ 3길을 따라 완성됩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모방하는 자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삼위일체를 흉내내어 용, 짐승, 거짓 선지자로 등장합니다(계 13장). 요한계시록에는 다섯 번째 나팔에서 시작해서 일곱 번째 나팔로 마치는 3개의 화가 나오는데(계8:13; 9:12; 11:14), 이 3구절에 ‘화’란 단어가 7번 나오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의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 연기, 유황” 3 재앙으로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습니다(계9:15-18). 또한 개구리 같은 3 더러운 영이 용, 짐승,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데 그들은 귀신의 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해 사람들을 모읍니다(계16:13-14). 이에 맞춰 하나님의 3천사도 3가지 촉구와 경고를 합니다(계14:6-16). 첫 번째 천사는 땅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촉구하고 두 번째는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며 세 번째 천사는 짐승의 표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바벨론은 “사망, 애통함, 흉년” 3가지의 재앙으로 멸망하는데(계18:8) 다니엘서에서는 ‘세고(메네), 달아보고(데겔), 나뉘어(베레스)’ 멸망당합니다(단 5:26-28). 요한계시록 18장 9절에서 17절까지 바벨론의 멸망을 애통해하는 3부류의 사람들(땅의 왕들, 땅의 상인들, 바다의 선원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6으로(숫자 6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눠 적혀있습니다(9절:왕들, 11절:상인들, 17절: 모든 선장, 선객들, 선원들,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

다시 말하지만 어떤 것의 완성을 의미하는 3은 거룩하게 분리된 성경의 인물들 속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진리입니다. 노아와 3 아들(창 6:10), 욥의 3 딸(욥 1:2, 42:13)과 3 친구(욥 2:11)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3과 7의 관계를 볼 수 있는 게 욥에겐 7 아들이 있었기에 자녀가 총 10이 됩니다(충만을 뜻하는 완전수 1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욥은 특이하게도 하나님의 완전수 3, 7, 10이 자녀의 수에도 다 들어가 있어 얼마나 충만한 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사람인지가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3명의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마 22:32). 이스라엘은 세상(에굽)과 거룩히 구분되기 위해 광야로 3일 길을 가서 하나님께 제사(예배) 드립니다(출 5:3). 하나님은 사무엘을 3번에 걸쳐 부르시는(삼상 3:8) 것으로 그를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느부가넷살 왕에 의해 7배나 뜨겁게 만든 풀무불에 던져진 3 사람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입니다(단 3:19, 23). 에스겔서에 나오는 3명의 의인은 노아, 다니엘, 욥(겔 14:14)입니다.

‘하나님의 친구(벗)’로 3번(대하 20:7; 사 41:8; 약 2:23) 일컬음 받는 아브라함의 삶에도 3이란 숫자가 자주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맞이했던 3명의 손님(창 18:2), 그들을 섬기기 위해 사라가 준비한 3스아의 고운 가루(창 18:6), 그리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모리아산까지 갔던 3일의 길이 그렇습니다(창 22:3). 또한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언약을 맺을 때 준비한 5가지의 헌물은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숫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였습니다(은혜의 수 5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준비한 헌물이 5와 3의 숫자로 이뤄졌듯이, 모세의 성막은 숫자 5와 깊은 연관이 있었고 성전은 숫자 3입니다. 모세의 성막이나 성전 모두 ‘지성소, 성소, 성막뜰’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솔로몬의 성전은 3층의 방들로 둘러싸여 있었고(왕상 6:6), 에스겔의 성전은 3면이 30개의 3층 방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겔 41:5-6). 노아의 방주도 3층이었으며(창 6:16) 사도 바울은 삼천층에 올라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봤습니다(고후 12:1-2). 솔로몬의 성전에서 놋을 부어 만든 바다는 둘레가 30 규빗이었고 12마리의 소가 받치고 있었는데 북서남동으로 3마리씩 놓여있었습니다(왕상 7:23, 25). 이처럼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새 예루살렘은 정사각형인데 각 면에 3개의 문이 있어 총 12문이 있습니다(계21:13).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3명의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첫 번째는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 과부의 외아들이 살아납니다(왕상 17:9-24). 엘리야는 죽은 아이의 몸에 자기 몸을 3번 펴서 엎드려 살려냅니다. 3은 부활의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에녹처럼 하늘로 옮기시는데, 그의 승천을 본 사람들이 혹시 땅 어딘가에 그가 떨어진 것은 아닌지 3일을 찾은 후에 포기합니다(왕하 2:17). 두 번째는 엘리사에 의해 수넴 여인의 아이가 살아납니다. 이때 엘리사는 아이의 입에 자기 입을, 아이의 눈에 자기 눈을, 그리고 아이의 손에 자기 손을 얹고 아이 몸에 엎드립니다. 이렇게 3단계를 걸쳐 살아난 아이는 7번 재채기를 하고 눈을 뜹니다. 여기서도 3과 7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왕하 4:34-35). 세 번째는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졌던 시신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 회생해서 일어났던 경우입니다(왕하 13:21).

이렇게 부활의 사건은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 3번,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 3번 일어나는데, 제7번째 부활인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령의 완전한 부활’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키고 영원히 살게 하는 능력의 부활입니다. 그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일컫는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성경에 3번(행 11:26, 26:28; 벧전 4:16) 나오며 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도 3일 반 만에 부활합니다(계 11:11). 그리고 신약은 3의 3배수(3X3X3)인 27권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나머지 두 구절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8-13)”

베드로전서 1장 13절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로 번역된 부분이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en apokalypsei Iēsou Christou)”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쓰인 3구절을 살펴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복된 소식’이며 ‘구원’이며 ‘은혜’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증거’로 번역한 ‘marturia(마르투리아)’는 ‘증언, 증거, 증인’의 뜻을 모두 담고 있는 단어인데 영어로는 ‘testimony(테스티모니)’입니다. 본절의 ‘testimony of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증언)’은 요한계시록에서만 3번 등장합니다(계1:2, 9, 12:17). 그리고 “testimony of Jesus(예수의 증언/증거)”란 표현이 두번 나오는데, 이 표현까지 합치면 총 5번이 됩니다(계1:2, 9, 12:17; 계19:10(2)). 요한계시록 19장 10절을 읽어보면 “예수의 증거/증언”이 무엇인지가 명확히 정의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증거)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증거)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예수의 증거는 다름 아닌 예언의 영입니다. “예언의 영(spirit of prophecy)”은 유일하게 요한계시록 19장 10절에서 1번 나옵니다.

본절 번역에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하면 마치 요한이 ‘다 본 것’처럼 느껴집니다. 원어로는 ‘자기가 본만큼(hosa eiden) 증언했다’입니다. 어감이 확실히 다릅니다. 요한조차도 다 보았고 다 아는 게 아니라, 그가 본 것만큼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본절의 의미는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의 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증언)를 내가 본 것만큼 다 증언(증거)하였노라“란 것입니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이란 번역의 직역은 ‘그 안에 기록된 것’입니다.

‘복이 있나니’에서 ‘복’은 ‘makarios(마카리오스)’인데 신약에 놀랍게도 총 50번 나옵니다(성령과 완전한 속량 및 자유를 뜻하는 5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복되다, 행복하다’란 의미의 ‘makarios(마카리오스)’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걸 의미하기에 ‘복’과 ‘믿음’은 연결선상에 있습니다(롬 4:5-7, 14:22-23; 계 14:12, 13). 글자를 누르면 50개구절을 모두 볼 수 있는데 다 한번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복과 기쁨으로 쓰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본절의 ‘때’는 ‘kairos(카이로스)’, 즉 ‘시간, 계절’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영어로는 ‘time’입니다. ‘적합한 시기, 적절한 때, 기회, 시간’을 의미하며 신약에 총 86번 등장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미리 정해진 때’를 의미하는데 본절에 ‘때가 가까움이라’는 표현이 ‘마지막 때, 말세, 주님의 재림’을 말할 거라고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생각이 아닌 성경의 정의를 알기 위해 성경에서 ‘때가(kairos) 가깝다(engys)’란 표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신약에 총 5번(은혜와 율법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왔습니다. 이 5개의 구절을 읽다 보면, 내 말이 아닌 성경이 말씀하시는 ‘때가 가깝다’를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첫 구절은 마태복음 21장 34절입니다.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이 구절은 예수님이 드신 비유에 나오는 구절인데, 한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다가 열매 거둘 때가 가까워서 그 열매를 받으려고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그렇기에 때가 가깝다는 것은 결실 즉, 열매를 하나님께 보여줘야 할 때를 말합니다.

두 번째 구절은 누가복음 21장 8절입니다.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이 구절로 우리는 미혹하는 자들이 많을 때,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그리할 때 때가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내가 예수다” “내가 하나님이다”라는 사람들이 대거 등장했던 때가 또 있었을까 싶습니다.

세 번째 구절은 로마서 13장 11절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때가 가깝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가깝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러니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거나 음란하거나 호색하거나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자!’고 촉구합니다. 왜요? 구원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나를 영원히 속량하신 주님을 만나 영원토록 함께 거할 날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넷째 구절은 본절이고 다섯째 구절은 요한계시록 22:10절입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은 ‘때가 가깝다’는 말로 1장을 열고 ‘때가 가깝다’는 말로 22장을 닫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1-13)”

즉 성경이 정의하는 “때가 가깝다”는 것은 ‘결산과 구원과 자신이 행한 대로 보상받을 때가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미혹하는 무리가 많을 때이며 불의하고 더러운 자들과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들이 극명하게 나뉘는 때입니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를 풀어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들은 영원한 속량과 자유의 행복을 누리리니 결산과 구원과 자신이 행한 대로 보상받을 때가 가까움이라“.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아시아’란 단어는 성경에 총 18번 나옵니다. 1절의 ‘apokalupsis(아파칼룹시스)’도 18번 나온 것을 볼 때 숫자 18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곧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곱 교회’에서 ‘일곱’은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숫자 중 하나입니다. 이런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집회, 회중’을 뜻하는 헬라어 ‘ekklésia(에클레이시아)’를 번역한 것입니다. 의미는 ‘called out from’ 즉, 어떤 것이나 어떤 곳에서 불러내다, 또는 분리해내다란 뜻입니다. 또 ‘called out to’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어떤 것을 하도록, 혹은 어떤 곳으로 불러내다, 또는 분리해냈다란 뜻입니다. 이 ‘ekklésia(에클레이시아)’란 단어를 영어는 ‘church’라고 번역하는데, ‘church’는 ‘주께 속한’이란 의미의 헬라어 ‘kyriakos(큐리아코스)’에서 온 것입니다.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 성경에서 그 단어를 찾아보는 작업을 자주 하기에 예전에 ‘church’를 영어킹제임스에서 찾아봤을 때 총 111구절 나온다는 걸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church’는 신약에서만 나오는 단어이지만 그렇다고 신약 성도들만 ‘교회’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은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둘을 나누기만 하고, 그 나눠진 것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는 뿌리는 보지 못한다면 온전한 하나님의 증거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기에 결코 유익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다루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증거합니까? 아벨의 때부터 내려오는 믿음의 선진들을 열거하다가 11장을 다음 40절의 내용으로 마무리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음이니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성되지(완전하게 되지) 않도록 하려 하심이라(직역)” 그러니까 창세 이후 하나님을 향한 찬란한 믿음으로 살다 간 성도들을 신약의 성도들이 없이는 완성되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은혜를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도 대부분 이방인으로 구성될 신약의 교회에 대해 로마서 11장 11절에서 31절까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구절들을 모두 가져오면 너무 길어서 개역개정으로 요약하지만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구원이 이방인에게 흐르게 함이라. 참감람나무 가지 얼마가 꺾여서 돌감람나무인 너희들이 접붙여져서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은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너희가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고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이스라엘도 믿지 아니하는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으며 돌감람나무인 너희들도 접붙임을 받았는데 하물며 원가지인 사람들이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시리라.”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이 분리되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분리되어, 성경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나뉜 후에 다시 각 나라 족속 방언으로 번역되어 구약의 ‘회중’은 신약의 ‘교회(church)’가 아니라고 주장할 사람들이 있을 것도 미리 아셨습니다.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남겨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행 7:37-38)” 이집트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시킨 이스라엘 회중을 헬라어로 쓰면 도로 ‘ekklésia(에클레이시아)’입니다. 따라서 영어로 번역하면 ‘church’ 즉 교회가 됩니다.

본절에서 요한은 그 당시에 존재했던 교회 중에서 특별히 일곱 교회에 편지하는데, “일곱 교회”란 표현은 3구절에 걸쳐 4번 나옵니다(계 1:4, 11, 20(2)).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란 표현도 계시록에서만 나오는데 딱 3번 등장합니다(계 1:4, 8, 4:8). 본절외 두 개의 관련 구절들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Lord God Almighty)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계 4:8)

따라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Lord God Almighty’ 즉, 전능하신 주 하나님(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절에 나오는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은 아마도 성령이지 않을까 유추할 수 있지만, 이번엔 성경이 정의하는 ‘일곱 영’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일단 “일곱 영”이란 표현은 성경 전체에서 요한계시록에서만 본절을 포함해 4번 나옵니다(4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한 다른 구절들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 4:5)”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6)”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해 보면 첫째, “일곱 영”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습니다(계1:4). 둘째,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계3:1). 셋째,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은 “일곱 등불”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일곱 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일곱 눈”입니다(계5:6). 특히 이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일곱 영’이란 표현이 왜 세상 및 창조물을 뜻하는 4번 성경에 등장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도 적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떠한 정교한 프로그램으로도 흉내낼 수 없는 숫자나 단어나 그 뜻에서 정확하게 떨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다 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와 번역의 오류에서 오는 것일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얻은 정보를 갖고 한 단계 더 들어가게 되면, 요한계시록 4장 5절에서 ‘일곱 영’을 뜻하는 ‘일곱 등불’은 또 무엇인가입니다. 성경에서 ‘등불’을 찾게 되면 총 44구절에 걸쳐 50번 나옵니다(창 15:17; 출 25:37(2), 27:20, 30:7, 30:8, 35:14, 37:23, 39:37(2), 40:4, 40:25; 레 24:2; 24:4; 민 4:9; 8:2(2); 8:3; 삿 7:16; 7:20; 삼상 3:3; 삼후 22:29; 왕상 7:49; 왕상 15:4; 대상 28:15(3); 대하 4:20; 대하 4:21; 대하 13:11; 대하 29:7; 욥 12:5, 41:19; 시 119:105, 132:17; 잠 6:23; 13:9; 20:20; 사 62:1; 겔 1:13; 단 10:6; 슥4:2; 마 25:1, 3, 4, 7, 8; 계 4:5; 8:10). 이 또한 놀라운 것이 50은 은혜와 온전한 속량 및 자유의 완전 수이며 성령의 법을 뜻하기 때문입니다(숫자 50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수년 전에 ‘등불’의 바른 의미를 알고자 성경에서 ‘lamp’가 들어간 44구절을 모두 찾아 읽었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린 결론은 ‘등불’은 하나님의 계명 및 언약 즉 성령의 법을 뜻한다는 거였습니다. 몇 구절을 예로 든다면 등불은 창 15:17에 처음 나오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반으로 찢긴 헌물의 사체들 사이로 등불과 화로가 지나가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시 119:105절에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라는 다윗의 고백이 나오며 잠언 6:23절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명령으로 번역된 단어가 영어로는 ‘commandment’ 즉, 계명입니다(이 발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란 표현입니다. 즉, 켜진 등불이란 빛을 발하고 있는 등불이란 의미이기에 잠언 6장 23절에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와 함께 보아야 하며 50이란 수와 곁들여 구약의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약, 즉 ‘성령의 법’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5장 6절에서 나오는 “일곱 눈”은 무엇인가입니다. “일곱 눈”이란 표현은 신약에 한 번, 구약에 한 번, 딱 두 번 등장합니다(증언, 증인 및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6)”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슥 3:9)”

따라서 이 “일곱 눈”은 어린 양에게 있으며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에 있는 것으로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할 것입니다. 구약의 “여호수아”란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의미로 신약의 헬라어로 표기된 “예수”와 같습니다.

그리고 숫자 7은 성령의 수이면서 안식과 영적 완전함 및 완성을 의미합니다(숫자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관련 구절들이 갖는 2와 7과 50의 특성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의 의미를 풀어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하나님의 일곱 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땅에 증인으로 보내심을 받은 성령으로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는 완전한 속량의 보증이십니다.”

따라서 본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전능의 주 하나님(Lord God Almighty)과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성령,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땅에 증인으로 보내심을 받고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실 완전한 속량의 보혜사와“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4절에 대한 분석을 부지런히 마친 후 5절을 읽다가 4절에서 분석했던 ‘일곱 영’에 대한 내용이 5절에 단편적으로 담겨 있음을 발견할 때(증인,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과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격려를 얻습니다. 본절의 ‘해방’은 영어로는 ‘풀려나다’를 뜻하는 ‘release’인데 같은 단어가 희년에(50년) 종들이 풀려나 자유의 몸으로 고향에 돌아갈 때도 쓰입니다.

본절에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란 표현의 ‘먼저 나시고’는 ‘prototokos(프로토토코스)’입니다. 히브리서 원어 연구에서도 몇 번 다뤘었는데 영어로는 ‘first-born’인 이 단어는 ‘처음 난 것’ 즉 ‘장자, 맏이 또는 맏배’인 ‘첫째’를 뜻합니다. 이 ‘prototokos(프로토토코스)’는 성경에 총 8번 나오는데 8은 새로운 시작, 거듭남, 새 창조, 재생 및 부활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8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본절을 원어 중심으로 직역하면 “죽은 자들의 첫째이자(장자, 맏이) 충성된 증인이시며 땅의 왕들의 으뜸(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다“입니다. 본절에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란 부분은 원어에는 없습니다.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본절에 ‘나라와 제사장’으로 된 부분엔 접속사가 없습니다. 그냥 ‘제사장 나라’ 또는 ‘제사장의 나라’란 의미로 직역하면 ‘제사장(hiereis) 왕국(basileian)으로 삼으셨다’입니다(a kingdom priests). 즉, 제사장들로 이루어진 왕국이란 말입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 본절을 포함해서 총 3번 나옵니다(부활 및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3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두 구절은 다음과 같은데 개역개정 구절에서 해당 부분의 직역을 괄호처리합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제사장 왕국:kingdom of priests)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6)”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제사장 왕국:kingdom priests)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10)”

그렇기 때문에 4절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성경은 이집트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시켰던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라고 하신 것입니다(행 7:37-38). 또한 성경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 2:9)”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왕 같은 제사장들(basileion hierateuma)’은 ‘제사장 신분의 왕족’이란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인물을 들자면 모세와 다윗일 것입니다. 성경이 “여수룬의 왕(신 33:5)”으로 표현하고 있는 모세는 제사장 직분을 감당했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는 헌물 중에서도 특별히 ‘가슴살’을 취했습니다(출 29:22-25; 레 7:29-34; 8:29; 9:21; 10:14-15). 다윗도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베로 만든 에봇을 입고 언약궤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올 때 언약궤를 맨 레위인들 사이에서 노래하며 춤 췄습니다(대상 15:27).

따라서 본절을 직역한 후 의미를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곧 그의 아버지에게 제사장 왕국으로 만드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대대로 있을지어다 아멘“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표현은 직역하면 ‘구름과 함께(meta) 오시나니’라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 주님이 구름을 타고(구름과 함께) 오실 것이란 약속은 성경 전체에 총 7번 나옵니다. ‘인자’라는 표현까지 들어가 있는 구절은 5번이고 본절과 살전 4:17절 처럼 ‘인자’라는 표현은 없지만 주님이 구름과 함께 오시는 것에 대한 내용까지 합치면 7번이 됩니다(단 7:13; 마 24:30, 26:64; 막 13:26, 14:62; 살전 4:17; 계1:7). 구약인 다니엘서 7장 13절에 나오는 ‘구름을 타고’란 표현 역시 히브리어로 ‘구름과 함께(עִם:with)’입니다.

‘구름’이란 표현은 성경에 많이 나올 것 같지만 49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신 4:11; 삿 5:4; 삼하 22:12, 23:4; 왕상 18:45; 욥 20:6, 22:14, 26:8, 35:5, 36:28, 36:29, 36:32; 37:16, 37:21, 38:34, 38:37; 시 18:11, 18:12, 36:5, 57:10, 68:34, 77:17, 78:23, 97:2, 104:3, 108:4, 147:8; 잠 3:20, 8:28, 25:14; 전 11:3, 11:4, 12:2; 사 5:6, 14:14; 렘 4:13; 단 7:13; 욜 2:2; 나 1:3; 습 1:15; 슥 10:1; 마 24:30, 26:64; 막 13:26, 14:62; 살전 4:17; 벧후 2:17; 유 1:12; 계 1:7). 그리고 ‘7×7=49’란 숫자가 나타내듯이 거의 모든 구절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증거하는 주요 역할을 합니다.

구절 몇 개만 들어서 구름의 역할을 설명하면 첫째, 하나님의 힘은 구름 안에 있습니다(시 68:34 Ascribe ye strength unto God: his excellency is over Israel, and his strength is in the clouds). 둘째, 하나님은 구름을 명하셔서 하늘의 문들을 여십니다(시 78:23 Though he had commanded the clouds from above, and opened the doors of heaven). 셋째, 하나님은 구름으로 병거(전차) 삼으시고 바람의 날개 위로 다니시는(걸으시는) 분입니다(시 104:3 Who layeth the beams of his chambers in the waters: who maketh the clouds his chariot: who walketh upon the wings of the wind). 다섯째, 하나님은 회오리바람으로 올라오시며 구름을 병거(전차) 삼으십니다(렘 4:13 구절의 영어 번역은 마치 회오리바람이 전차인 거처럼 오역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원어를 살펴 보고 또 시편 104편 3절을 보면 바람을 통해 이동하시며 구름을 전차로[병거로] 삼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 역시 회오리바람과 함께 병거를(전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점을 기억하면 될 것 같습니다(왕하 2:1, 11). 나훔의 구절을 보더라도 하나님은 바람으로 길을 내시고 구름을 발밑에 두십니다(나 1:3 The Lord is slow to anger, and great in power, and will not at all acquit the wicked: the Lord hath his way in the whirlwind and in the storm, and the clouds are the dust of his feet).

본절에서 ‘찌른’으로 번역된 ‘ekkenteó(에켄테오)’는 두 번 등장하는데 본절과 요한복음 19장 37절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인용한 구절에 쓰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요 19:36-37).” 이 예언은 스가랴 12장 10절 말씀에서 온 것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이를 각 사람의 눈이 보게 될 것인데, 십자가에서 예수를 옆구리에 찔림 당하게 했던 자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라보고 독자를 위해 애통하듯, 장자를 위해 통곡하듯 할 것이며 땅에 있는 모든 족속도 심판의 증인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애곡하게 될 것‘이란 의미입니다.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알파와 오메가’란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만 총 4번 나옵니다(계1:8; 1:11, 21:6, 22:13). 그리고 원어에는 ‘시작과 끝(archē kai telos)’이란 표현도 있는데 개역개정엔 빠져 있습니다. 이 “시작과 끝(계1:8, 21:6, 22:13)” 그리고 “전에도 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 올”이란 표현도 요한계시록에서만 각각 3번 나옵니다(계 1:4, 8, 4:8).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란 표현도 계시록에서만 나오는데 딱 3번 등장합니다(계 1:4, 8, 4:8). 본절외 두 개의 관련 구절들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Lord God Almighty)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계 4:8)

따라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Lord God Almighty’ 즉, 전능하신 주 하나님(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전능한 자’란 표현은 히브리어로는 ‘שַׁדַּי(샤다이)’이고 헬라어로는 ‘pantokratór(판토크레토어)’입니다. 영어로는 주로 ‘Almighty’로 번역했는데 구약에 48번 신약에 10번 쓰여서 총 58번 나옵니다(해당 구절들을 모두 읽기 원하시는 분들은 글자를 누르면 모든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Almighty”는 창세기 17장 1절에 처음 등장하는데 99세의 노인인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약속하시며 할례의 언약을 주셨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만나 주십니다. ‘Almighty’가 등장하는 구절들을 살펴보면 축복과 번성의 약속으로 만나주실 때도 있고 심판과 진멸의 권능으로 나타나실 때도 있습니다. 욥기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데 31번이나 나옵니다.

따라서 본절은 “주 하나님이(여호와 하나님)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시작과 끝)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요) 전능한 자라”란 의미입니다. 즉, 구절에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란 의미가 증인을 의마하는 두 번 겹쳐 나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라고 되어 있는데, 직역은 ‘예수 안에서(en Iēsou) 환난과 왕국과 인내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본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특히 말씀의 단수형은 성경에 총 49번 나옵니다. 늘 경험하지만 늘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입니다. 이 글을 쓰며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을 영어 킹제임스성경에서 찾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처럼 49(7×7)번 등장하는 것을 발견했으니 말입니다. 두 번의 7이 상징하듯이, 성령의 완전함을 뜻하는 7의 증인, 7의 증거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쓰인 곳은 삼상 9장 27절로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너에게 보여주겠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구약에 4번 나오는데 주로 예언의 말씀이 선지자들에게 임했을 때 쓰였습니다(삼상 9:27; 왕상 12:22; 대상 17:3; 잠 30:5). 이에 비해 신약에 45번 나오는 “word of God”은 하나님의 예언 및 구약의 말씀으로도 쓰이지만 대부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쓰입니다(막 7:13; 눅 3:2, 4:4, 5:1, 8:11, 21, 11:28; 요 10:35; 행 4:31; 6:2, 7, 8:14, 11:1, 12:24, 13:5, 7, 44, 46; 17:13; 18:11; 19:20; 롬 9:6; 10:17; 고전 14:36; 고후 2:17, 4:2; 엡 6:17; 골 1:25; 살전 2:13(2); 딤전 4:5; 딤후 2:9; 딛 2:5; 히 4:12, 6:5, 11:3, 13:7; 벧전 1:23; 벧후 3:5; 요일 2:14; 계 1:2, 9; 6:9; 19:13; 20:4).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는 직역하면 “예수의 증언”입니다.

따라서 본절을 직역하고 의미에 맞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의 형제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환난과 왕국과 인내에 동참하는 자인 나 요한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복음과 예수님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주의 날’이란 표현은 성경 전체에 29구절에 걸쳐 총 31번 나옵니다. 나오는 구절들을 모두 읽어보면 26번 나오는 구약에는 모두 엄중한 심판의 날이며 원수들에게 복수하시는 진노의 날입니다(사 2:12, 13:6, 9, 34:8; 렘 46:10; 애 2:22; 겔 13:5, 30:3; 욜1:15, 2:1, 11, 31, 3:14; 암 5:18(2), 20; 옵 1:15; 습 1:7, 8, 14(2), 18, 2:2, 3, 14:1, 말 4:5). 그런데 5번 나오는 신약은 도리어 주를 믿는 성도들의 구원의 날이니 은혜의 숫자 5에 걸맞은 소식입니다(행 2:20; 고전 5:5; 고후 1:14; 살전 5:2; 벧후 3:10).

또한 ‘원수들에게 보복하시는 진노의 날’을 뜻하는 ‘주의 날’이 성경에 총 31번 나온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수아 12장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해서 쳐죽인 왕들의 이름이 일일이 열거되는데 그 숫자가 정확히 31명이기 때문입니다(수 12:24). 이런 그치지 않는 놀라움과 경이로움이 제겐 성경 연구를 지속하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미리 알아서 적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서 배워서도 아니고 성경 안에서 단어들을 찾고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들이기에 더욱 생생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오늘 숫자 31의 의미는 ‘원수 갚음’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성령에 감동되어’는 의역이고 직역은 ‘영 안에 있었다(egenomēn en Pneumati)’입니다.

‘나팔’은 히브리어로 ‘שׁוֹפָר(쇼파)’ 또는 ‘יוֹבֵל(요벨)’인데 숫양의 뿔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9장 13절에 처음 쓰이며 성경 전체에 103구절에 걸쳐 총 115번(구약에 104, 신약에 11) 나옵니다.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 말고 민수기 10장 8절에 처음 등장하는 제사장들만 불 수 있는 은으로 된 나팔은 히브리어로 ‘חֲצֹצְרָה(캇소쳐로)’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이 두 종류의 나팔이 구별되지만 영어든 한국어든 번역본엔 모두 구분 없이 ‘나팔(trumpet)’로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 차이와 조명에 대해 적겠습니다.

신약에 쓰인 ‘나팔’은 헬라어로 ‘salpizó(샐피드조)’이며 11번 나옵니다(나눔과 심판을 의미하는 11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신약에 쓰인 나팔의 용도는 구약과는 조금 다릅니다. 나중에 ‘양각 나팔’과 ‘은 나팔’의 차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적을 때 이 부분도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신약에 나온 나팔의 용도만 적겠습니다. 신약에서 나팔은 속된 사람들에 의해 공지사항이나 선전용으로 쓰였습니다(마 6:2). 그 외에는 모두 하나님의 음성과 심판의 신호로 나옵니다(마 24:31; 고전 14:8, 15:52; 살전 4:16; 히 12:19; 계 1:10, 4:1, 8:2, 6, 13; 9:14)

따라서 10절의 의미는 “주의 날에 나는 영안에 있었는데 내 뒤에서 나는 나팔처럼 큰 심판의 소리,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노라“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음성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11절에 나오는데, 11절부터 20절까지는 다음 편에 적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원어/영어 분석 2(계1:11-20)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본절은 원어에는 있는데 번역하지 않고 뺀 주요 단어가 여럿 있습니다. 먼저, 요한계시록에서만 총 4번 나오는 ‘알파와 오메가’란 표현입니다(계1:8; 1:11, 21:6, 22:13). 또한 ‘그 처음과 그 마지막(ho prōtos kai ho eschatos)’이란 표현도 빠져 있습니다. 이 표현은 8절에 ‘알파와 오메가’와 같이 나왔던 ‘시작과 끝(archē kai telos)’이란 표현과는 또 다릅니다. ‘시작과 끝(the beginning and the ending)’은 계시록에서만 총 3번 나오며(계1:8, 21:6, 22:13), ‘그 처음과 그 마지막(the first and the last)’이란 표현은 계시록에서만 4번 나옵니다(본절, 계 1:17, 2:8, 22:13). 영어로는 정관사 ‘the’가 ‘시작과 끝’, ‘처음과 마지막’이란 표현에 모두 붙지만 헬라어로는 ‘시작과 끝’엔 붙지 않고 ‘처음과 마지막’에만 붙습니다.

이번에 요한계시록을 쓰며 성경에 ‘처음과 마지막’이란 표현이 몇 번 나오는지 찾아보았더니 총 16번이었습니다. 구약에 12번 나왔고 신약엔 정관사가 붙은 ‘그 처음과 그 마지막’이 계시록에만 4번 나옵니다. 구약에 12번 등장하는 ‘처음과 마지막’이란 표현은 모두 왕(9번) 또는 하나님 자신을(3번) 수식한 단어였습니다(대상 29:29; 대하 9:29, 12:15, 16:11, 20:34, 25:26, 26:22, 28:26, 35:27; 사 41:4, 44:6, 48:12). 참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이란 표현이 구약에서는 ‘왕 또는 하나님’에게만 쓰였는데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뜻하는 12번 등장하기 때문입니다(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쓰였는데, 세상 및 창조물을 뜻하는 4번 등장하니 말입니다(4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알다시피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한줄기 강은 넷으로 나뉘어 온 땅을 적시며 생물이 번성할 수 있는 물을 공급해 주었습니다(창 2:10).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4 복음서로 나뉘어 영혼육을 살리는 성령의 생수로 이 세상 가운데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가 지어졌고(히 1:2) 그분은 모든 만물을 붙들고(이끄시고) 계시며(히 1:3),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되 하늘과 땅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모든 권세와 만물이 다 그를 위해 창조됐다고 증거합니다(골 1:16).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하시는데 흥미롭게도 16은 통상 ‘사랑’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6에 대해 자세히 쓸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연구해서 나름 그 뜻을 적어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하나님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의미하는 것처럼 제겐 여겨집니다. 이번에 하나님과 왕에게만 쓰이는 ‘처음과 마지막’이란 표현이 성경에 총 16번 나온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일컫는 명칭을 성경에서 모두 찾으면 16개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명칭들을 모두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엘로힘(창 2:4-25)”, “아도나이 여호와(창 15:2, 8)”, “여호와 이레(창 22:8-14)”, “여호와 라파(출 15:26)”, “여호와 닛시(출 17:15)”, “여호와 엘로헤카(출 20:2, 5, 7)”, “여호와 메카디쉬켐(출 31:13; 레 20:8, 21:8)”, “여호와 샬롬(삿 6:24)”, “여호와 치키뉴(렘 23:6)”, “여호와 싸바오스(삼상 1:3 이후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엔 245번 나옴)”, “여호와 삼마(겔 48:35)”, “여호와 엘리온(시 7:17, 47:2, 97:9)”, “여호와 로히(시 23:1)”, “여호와 호시뉴(시 95:6)”, “여호와 엘로히뉴(시 99:5, 8, 9)”, “여호와 엘로하이(슥 14:5)”

본절에 빠져 있는 세 번째 단어는 ‘천사 혹은 메신저’를 뜻하는 ‘aggelos(앵겔로스)’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 총 176번이나 나오는데 대부분 ‘하나님의 메신저인 천사’를 뜻합니다. ‘두루마리’로 번역한 ‘biblion(비블리온)’은 파피루스 종이로 둘둘 말린 책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총 34번 쓰였는데 마태복음 19장 7절과 마가복음 10장 4절에서 모세가 너희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주라고 했던 부분과 요한계시록 6장 14절에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려 떠나갔다는 부분에 쓰인 것 외에는 ‘책’으로 번역됐습니다. 요한은 이 책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명령을 받는데, 이 일곱 교회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입니다.

‘에베소’는 성경에 총 17번 등장합니다(부활 승리를 의미하는 숫자 17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의 정확한 의미에 대한 견해는 갈리는데 ‘바람직하다, 호감이 가다, 갖고 싶을 만하다’를 의미하는 ‘desirable’이라고도 하고 ‘허용되다’를 의미하는 ‘permitted’라고도 합니다. ‘서머나’는 요한계시록에 두 번 등장하며 뜻은 “몰약”입니다(증인 및 증거를 의미하는 2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몰약(myrrh)”이란 단어도 전체 성경에 16번 나오는데 나오는 구절들을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이 깊은 단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버가모’ 역시 요한계시록에서만 두 번 등장하는데 ‘결혼으로 하나 되다’란 의미입니다. ‘두아디라’는 성경에 4번 등장하는데 ‘희생 헌물’이란 뜻이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바울 일행을 맞아들였던 자색 옷감 장사였던 루디아가 두아디라 출신입니다(행 16:14). ‘사데’도 요한계시록에서만 3번 등장하는데 공교롭게도 이름의 의미도 3가지 견해로 나뉩니다. ‘기쁨의 왕’, ‘남겨진(머무는) 것’, ‘탈출하는 자들’이란 견해입니다. ‘빌아델비아’는 요한계시록에서만 2번 등장하며 이름의 의미는 ‘형제 사랑’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성경에 6번 등장하며 의미는 ‘사람들이 통치하다, 사람들이 심판하다’란 의미입니다(인간의 수 6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본절에 빠져 있는 단어들이 여럿 있어서 넣고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그 처음과 그 마지막이라. 네가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필라델피아와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라는 말씀이라“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여기 나오는 “촛대”는 구약의 ‘등잔대’와 같은 단어입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으로는 “candlestick”, 다른 영어버전으로는 “lampstand”라고 하는데 성경 전체에 총 43구절에 걸쳐 53번 등장합니다(출 25:31(2), 25:32(2), 25:33, 25:34, 25:35, 26:35, 30:27, 31:8, 35:14, 37:17(2), 37:18(2), 37:19, 37:20, 39:37, 40:4, 40:24; 레 24:4; 민 3:31, 4:9, 8:2, 8:3, 8:4(2); 왕상 7:49; 왕후 4:10; 대상 28:15(5); 대하 4:7, 4:20, 13:11; 렘 52:19; 단 5:5; 슥 4:2, 4:11; 마 5:15; 막 4:21; 눅 8:16; 눅 11:33; 히 9:2; 계1:12, 1:13, 1:20(2), 2:1, 2:5, 11:4). 모세의 성막에는 7가지의 등불로 뻗어나가는 등잔대가 한 개였습니다(출 25장). 그랬다가 솔로몬의 성전에서는 왼쪽에 5개 오른쪽에 5개 모두 10개의 등잔대가(왕상 7:49) 등장합니다(하나님의 완전수 10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등잔대마다 7가지의 등불이 있었으니 70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완전수 7과 7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게 요한계시록에 와서는 일곱 교회를 뜻하는 일곱 등잔대로 처음 등장하는 것입니다(계1:20). 일곱 가지로 뻗어나가는 등잔대가 일곱이 있으니 49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알다시피 49란 수는 희년으로 이어지는 50과 깊은 연관이 있는 7번의 안식년을 뜻하는 안식의 완전수이기도 합니다(50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곱 촛대(등잔대)’란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만 4구절에 걸쳐 5번(은혜의 수 5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등장합니다(계1:12, 1:13, 1:20(2), 2:1).

그러니까 요한은 “등 뒤에서 자신에게 말하는 음성을 보려고 몸을 돌이켰는데, 돌이키자 하나님께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교회인 7등잔대를 본 것“입니다.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 사이에’로 번역했지만 직역은 ‘그 촛대들(등잔대들) 가운데(mesō)’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인 일곱 등잔대가 둘러서 있는 그 중심에 인자 같은 분이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출 3:2). 여호와는 시온과 예루살렘 한가운데 계시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로서 그들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고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는 분입니다(습 3:17). 주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마 18:20) 분명히 말씀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은 거룩함을 입은 형제요 자녀들인 교회의 중심에서(가운데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며 찬송하시는 분이십니다(히 2:10-13).

“인자 같은 이”란 표현은 다니엘서에 2번 요한계시록에 2번 총 4번 나옵니다(단 7:13, 10:16; 본절, 계 14:14). 모든 관련 구절을 읽어보면, 하나님이시면서도 우릴 위해 성육신하셨으며 죄와 사망을 멸하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심판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본절 외에 관련 구절을 모두 가져오면 다음과 같으니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이제 내가 마지막 날에 네 백성이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이는 이 환상이 오랜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그가 이런 말로 내게 이를 때에 내가 곧 얼굴을 땅에 향하고 말문이 막혔더니 인자와 같은 이가 있어 내 입술을 만진지라 내가 곧 입을 열어 내 앞에 서 있는 자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주여 이 환상으로 말미암아 근심이 내게 더하므로 내가 힘이 없어졌나이다(단 10:14-16)”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계 14:14-16)”

‘발에 끌리는 옷’은 의역이고, ‘발까지 내려온 긴 옷’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옷은 성경에 왕이나(왕상 22장) 대제사장들이(출 28장) 입었던 ‘robe’을 뜻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왕이며 대제사장이신 분이십니다(히 5장-7장; 딤전 6:15; 계17:14, 19:16).

‘가슴에 금띠를 띠고’에서 ‘띠’로 번역된 ‘zóné(조네이)’는 ‘허리띠’ 즉 ‘belt’를 의미하며 신약에 총 8번 나옵니다(8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허리띠는 우리의 옷을 단정히 잡아주고 성실히 일할 수 있도록 동여매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왕으로 오실 우리 주님은 공의와 성실로 허리를 동여매는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신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1-5)”

따라서 13절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교회 가운데 계시더라. 이제 우리의 왕이요 대제사장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가슴을 공의와 성실의 순수함(금)으로 동이셨더라“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란 표현은 다니엘서 7장 9절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입니다.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9:9-10, 13-14)”

‘그의 눈은 불꽃 같고’에서 ‘불꽃’은 헬라어로 ‘phlox(플록스)’인데 신약에 총 7번 나옵니다. 관련 구절들을 모두 읽어보면 이 불은 다름 아닌 심판의 불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눅 16:24; 행 7:30; 살후 1:8; 히 1:7; 계1:14, 2:18, 19:12). 때문에 관련구절 중 하나인 사도행전 7장 30절에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이란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에굽에게 정하신 준비기간이 다 되었을 때 에굽을 영원한 불못에 멸하시려고 모세에게 심판의 주로 나타나셨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4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본절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13절에 나오는 ‘인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성자 하나님에 대한 것인데, 14절에서 만나게 되는 그분에 대한 묘사를 다니엘서에 비춰보면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3분의 독립적인 분이면서도 한 분인 하나님을 언젠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알듯이 내가 그분을 아는 날이 곧 오기를 소망해 봅니다(고전 13:12).

따라서 본절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곧 성부 하나님이시며 성자 하나님이시니 심판의 주시라”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본절의 ‘풀무불’은 ‘kaminos(카미노스)’인데 ‘용광로(furnace) 혹은 가마(kiln)’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 본절을 제외한 신약에 4번 쓰인 구절들을 모두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13:41-42)”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 13:49-50)”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계 9:1-2)”

요한계시록 9장 2절에 ‘화덕’으로 번역한 단어가 도로 ‘kaminos(카미노스)’입니다. 이 단어가 쓰인 모든 구절을 읽어보면, ‘풀무불’은 다름 아닌 심판의 불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본절에 ‘단련한’으로 번역한 헬라어 ‘pepyrōmenēs(페피로메니스)’는 ‘불타는, 빛나는, 정제된’이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주석’으로 번역된 광물이 무엇인지 찾아보니 영어로는 ‘tin’이었습니다. ‘chalkolibanon(칼콜리바논)’이 어쩌다가 ‘tin’에 해당하는 한국말로 번역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영어로는 ‘brass, copper, bronze’ 등으로 쓰이는데, 특히 ‘chalkolibanon(칼콜리바논)’은 ‘광택이 나는 놋쇠(fine brass) 또는 구리(fine bronze)’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예전에 성경에 나오는 광물의 뜻을 알고 싶어서 각 광물에 대한 구절을 모두 뽑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내린 결론은 ‘놋쇠(brass)’는 ‘죄의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때 얻었던 금, 은, 놋쇠, 철 등에 대한 조명도 관련 구절들과 함께 적어보겠습니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에서 ‘많은 물’이란 표현은 성경에 14번 나옵니다(민 24:7; 삼하 22:17; 시 18:16, 29:3, 93:4; 아 8:7; 사 17:13; 렘 51:13; 겔 19:10, 43:2; 계1:15, 14:2, 17:1, 19:6). 관련 구절들을 모두 읽어보면, ‘많은 물’이란 ‘여러 나라(many nations)’를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음성은 많은 나라들의 소리와 같았다’란 의미는 마치 오순절 때 성령이 강림하자 제자들이 15나라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행 2:9-11).

따라서 본절은 “그의 발은 죄를 심판하는 불이며 그의 음성은 여러 나라의 말소리와 같으니“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15절은 주님께서 발로 용(뱀), 즉 마귀와 원수들을 짓밟으시며 심판하실 채비로 오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시 91:13; 사 63:3). 특히 여기 나오는 주님의 놋쇠 발은 솔로몬의 성전에 있던 두 개의 놋기둥(야긴과 보아스)에 상응합니다(왕상 7:13-21). 솔로몬의 성전은 다름 아닌 주님과 부활한 성도들의 몸에 대한 그림자로 주신 것입니다. 이 조명에 대한 매우 유익한 외부 자료는 링크를 걸어놓았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하나님의 ‘오른손’은 구원을 이루시는 능력의 손, 권능의 손을 의미하며 원수를 쳐부수는 승리와 공의의 손이기도 합니다(출 15:6, 15:12; 시 16:11, 17:7, 18:35, 20:6, 21:8, 44:3, 45:4, 60:5, 98:1, 108:6; 사 41:10, 48:13, 62:8).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사자)”라고 20절에 이미 그 의미가 해석되어 있습니다. “좌우에 날선 검”이란 의미는 칼의 양면이 날카롭다는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칼은 칼등이 있고 칼날이 있지만 양면이 다 날이 선 칼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내 입에서 나가는 순간, 내게도 향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설교할 때나 말씀을 묵상할 때 남에게 주는 말씀으로 생각하며 준비할 수 있겠지만 그 말씀은 나를 먼저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는 걸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distomos(디스토모스)’란 단어는 신약에 총 3번 나오는데(부활 및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3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본절에 나오는 구절을 제외한 나머지 구절들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계 2:12)”

즉,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란 의미는 ‘그의 입에서 활력이 있고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말씀이 나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절에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는 직역 하면 ‘해가 힘있게 빛나는 것 같더라’입니다. “해처럼 빛난다”는 표현은 성경에 총 3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마 13:43, 17:2; 본절). 그런데 특히 마태복음 13장 43절에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말씀의 전 구절인 13장 41-42절은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는 내용입니다. 이 구절은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하신 후 그 부분을 설명해 주신 구절인데 공교롭게 본절에 나오는 내용과 그 전 구절인 15절에 나온 내용과 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비교표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말라기 4장 1-3절을 통해서도 요한계시록 1장 13-16절에 대한 조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4:1-3)” 즉, 이 구절들에서도 용광로 불과 해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1장 13-16절의 묵시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완전하게(7) 된 교회의 천사들(의로운 성도들)과 함께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세상의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때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발가벗겨진 것처럼 만물이 그의 눈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며 악인들은 심판의 불에 지푸라기처럼 탈 것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공의로운 해로 나타나 치유하실 것이며 의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또한 이들이 주님과 함께 악인들을 밟을 것이니 악인들은 이들 발바닥 밑에 재와 같을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7 교회의 천사’ 혹은 ‘7 교회의 사자’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완전해진 성도들을 의미하는가?’는 다음 구절에도 조명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계 22:8-9)” 여기서 “함께 된 종“은 헬라어로 ‘sundoulos(순둘로스)’이며 ‘동료 종들(fellowservants)’이란 뜻으로 신약에 총 10번 나옵니다(마 18:28, 18:29, 18:31, 18:33, 24:49, 골 1:7, 4:7; 계 5:11, 19:10, 22:9). 사도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종’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구약에서도 모세 및 선지자들을 ‘여호와의 종’으로 표현합니다. 즉, 요한에게 이 모든 걸 보여주던 7천사 중 한 명은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책의)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같은 동료 종일 뿐이니 내게 경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한 것입니다.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죽은 자처럼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지는 것은 하나님의 두려운 임재와 영광과 능력 앞에 나타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다니엘도 하나님과 주님을 환상 가운데 뵈었을 때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단 9:15-19). 에스겔도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과 그룹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을 목격하게 됐을 때 번번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겔 1:28, 3:23, 43:3, 44:4).

저는 천국 간증 같은 건 듣지 않습니다. 성경에 이미 다 기록되어 있는데, 또 다른 간증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12월에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날 거니까 회개해야 한다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는 한 여자가 있는데 그 사람의 기도 안 차는 천국 간증을 한 번 들어보라며 누가 보내줘서 5분 정도 듣고 만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간증을 한 것인데, 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들으며 ‘아멘 아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 여성은 자기가 주님을 만나 와인을 마시며 러브샷을 하고 함께 춤을 췄다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주님이 잠수함 같은 걸 타고 자기한테 바닷속 영적 세계를 보여줬다면서 그걸 자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에서 더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듣지 않았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길 하는 여자와, 또 그런 얘기를 믿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선지자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미혹되는 사람들이 안타까웠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었다면 결코 미혹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처음엔 이 여성이 꾸며낸 얘기, 즉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더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라 정말 ‘광명(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고후 11:14)’에게 이끌려 바닷속 환영까지 보고 온 것이구나 싶어지자 섬뜩했습니다. 성경은 사단을 물속에 있는 용(시 74:13, 사 27:1, 겔 29:3)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어 성경으로 이 구절들을 찾아보니 다행히 시편과 이사야는 ‘용’으로 제대로 번역했는데, 에스겔 29장 3절은 ‘악어’라고 해놓았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도 같은 ‘용’입니다. 이러한 구절들을 처음 읽었을 때 한국 민속 설화에 나오는 바닷속 용궁에 있는 용왕에 대한 얘기가 떠올라 신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할 것(마 24:24)”이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심판하러 오신 주님 앞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마 7:22)”라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한 주님의 반응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2)”입니다. 7장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많은 은사나 이적을 행하는 능력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교만하게 하여 더 죄만 짓게 할 뿐입니다(이 부분에 대한 더 자세한 조명은 ‘유리하는 별들‘이란 글에 적어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엔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이 분명하고도 간단명료하게 적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순종을 못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열매를 통해 그들을 알 것”이라고 하시면서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7장, 12장). 성경에 나오는 열매는 성령의 9가지 열매입니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열매는 오직 말씀과 기도로 나의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자기 부인하며 날마다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는 내 안에 사는 신앙의 몸부림과 순종 없이는 맺어지지 않습니다. 지금은, 드러나는 은사 때문에 자기도 속고 남도 속이며 “나는 주께 속한 자다” 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주님은 열매 맺지 못한 나무는 모두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마 7:19; 눅 3:9). 마지막 시대에 온 세상을 시험하러 오는(계 3:10) 미혹으로부터 나를 지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마음으로 읽어 영적인 감각을 단련시켜(히 5:14) 분별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본절의 다른 부분들은(오른손, 그 처음과 그 마지막) 이미 앞에서 설명했기에 넘어갑니다.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살아 있는 자’란 표현은 ‘ho Zōn(The Living One)’입니다. 성경에 ‘살아계신 하나님(The Living God)’이란 표현이 몇 번 나오나 찾아봤더니 총 30번이었는데 구약에 15번 신약에 15번 나온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30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세세토록’은 ‘aiōnas(아히오나스) tōn(톤) aiōnōn(아히오논)’으로 ‘이 시공간의 시공간’ 즉 ‘세세대대(ages to ages, the ages of the ages)’란 의미입니다. 전에도 썼지만 이 시공간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천 년간 통치하시는 기간이 끝난 후에는 모두 사라지고 영원 세계로 가게 될 것입니다(계 20-22장). ‘음부’로 번역한 ‘hadés(헤이디스)’는 총 10번 나옵니다(완전수 1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관련 구절들을 모두 읽어보면 ‘hadés(헤이디스)’는 죽은자들의 혼이 있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마 11:23, 16:18; 눅 10:15, 16:23; 행 2:27, 2:31; 본절, 계 6:8, 20:13, 20:14). 영어로는 ‘hadés(헤이디스)’와 똑같이 ‘hell’로 번역했지만 ‘geenna(게헨나)’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 12번 나오는데(마 5:22, 5:29, 5:30, 10:28, 18:9, 23:15, 23:33; 막 9:43, 9:45, 9:47; 눅 12:5; 약 3:6) 모두 읽어보면, 특별히 악인들이 던져지는 마지막 심판의 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역시 영어로는 ‘hell’로 번역했지만 ‘tartaroó(타르타루)’란 곳이 있는데, 여긴 타락한 천사들이 심판의 때까지 갇혀있는 어둠의 장소를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벧후 2:4).

따라서 이 3가지 장소를 모두 종합해 보면 ‘hadés(하데스)’란 곳이 심판의 때까지 사람들의 혼이 있는 장소라면(성도들은 예외), ‘tartaroó(타르타루)’는 심판의 때까지 타락한 천사들이 갇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천년 왕국이 끝난 후에 있을 백보좌 심판에서 모든 죽은자들이 다시 일어나 심판을 받게 될 것인데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 그리고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 및 사망과 지옥까지(hadés:하데스) 모두 불과 유황 못(불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모든 불법이 멸하여지는 이 ‘불못’이 바로 ‘게헨나’라고 생각합니다(계 20:9-15). 이 조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천국과 지옥(무저갱, 음부, 게헨나)의 차이:영혼은 불멸인가?“란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제목을 누르면 바로 연결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분이십니다. 성경 전체에서 열쇠는 8번 밖에(새로운 시작 및 새 창조를 뜻하는 8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오지 않습니다(삿 3:25; 사 22:22; 마 16:19; 눅 11:52; 계 1:18, 3:7, 9:1, 20:1). 그중 본절에 대한 관련 구절들만 몇 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 22:22)”

이 구절은 이사야 22장 20-25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통치에 대한 예언 중에 있습니다. 이 예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요한계시록 3장 7절에서 내가 그 예언의 성취임을 밝히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7-8)”

다윗의 열쇠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는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능히 닫을 사람이 없는 열린 문을 두셨을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16장에 말씀하신 것처럼 천국의 열쇠까지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8-19절)”

그렇기에 ‘죽은 자들의 혼’이 심판받는 날까지 있어야 하는 ‘음부(hadés:하데스)’의 권세는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며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혼은 ‘음부(hadés:하데스)’에 있는 게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도 약속하셨던 것처럼 ‘paradeisos(파라디소스)’즉, ‘하나님의 동산’인 ‘paradise(파라다이스)’에 있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3번 나오는데 바울도 혹은 그가 말했던 것처럼 그가 아는 어떤 사람도 영안에서 방문했던 곳이기도 합니다(눅 23:43; 고후 12:4; 계 2:7).

주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로 요한계시록 9장과 20장에서 ‘무저갱’을 열고 또 닫으시는데(계 9:1-11; 계 20:1-3) 이 ‘무저갱’은 도로 타락한 천사들을 가둔 ‘tartaroó(타르타루)’가 아닐까 합니다. 이 무저갱을 열자 마치 ‘kaminos(카미노스:풀무불, 심판의 불)’와 같은 연기가 그 구덩이에서 솟아 올라오는데 주님은 이 무저갱을 열어 갇혀있던 온갖 영적 존재들을 내보내시고(계 9장), 계시록 20장에서는 옛 뱀, 마귀, 사탄이라 불리는 용을 잡아 천 년 동안 그곳에 결박하십니다. 하지만 이 마귀는 천년이 찼을 때 옥에서 풀려나와 다시 반역을 꾀하게 되고 결국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불못에 던져지게 됩니다(계 20:7-10).

따라서 본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죽임을 당했지만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해 영원히 사는 자라 내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으니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말 그대로 “네가 본 것들과(본 일들과) 지금 있는 것들과(지금 있는 일들과) 이후에 있게 될 것들을(이후에 있을 일들을) 적으라“고 하십니다.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20절은 일곱 별의 의미가 무엇이고 일곱 금 촛대가 무엇인지를 풀어주신 구절입니다. 특별히 ‘일곱 별의 비밀’, 즉 ‘일곱 교회의 천사들의(개역개정에 ‘사자’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와 영어로는 ‘angel’입니다) 비밀’이라고 하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천사의 몸으로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될 것이 곧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주님이 직접 부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두개인들에게도 말씀하신 부분이기도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와서는 7형제가 모두 자식 없이 죽는 바람에 그 형제들과 모두 결혼했던 여자가 있다면 부활 후에는 7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고 묻습니다. 이들의 황당한 질문에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29-30절)”

바울 역시 부활의 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것이 ‘비밀’임을 밝힙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47-53)”

본절에 ‘비밀’로 쓰인 헬라어 ‘mustérion(무스테이리온)’은 영어로는 ‘mystery(미스테리)’입니다. 신약에 총 28번 나오는데(28은 4×7 즉, 세상과 하늘의 곱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쓰인 구절들을 일일이 읽어보면 하나님의 왕국, 부활의 몸 및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구절을 읽어보는 것도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마 13:11; 막 4:11; 눅 8:10; 롬 11:25, 16:25; 고전 2:1, 2:7, 4:1, 13:2, 14:2, 15:51; 엡 1:9, 3:3, 3:4, 3:9, 5:32, 6:19; 골 1:26, 1:27, 2:2, 4:3, 살후 2:7; 딤전 3:9, 3:16; 계 1:20).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며(엡 5:25-33) 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몸이기도 한(엡 4:15-16; 엡 5:23) 이 ‘미스테리’는 비유가 아닌 실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가 남편과 아내 관계이면서도 부부이기에 한 몸이 되는 것을 에베소서 5장 23-33절까지 설명하면서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삼위일체의 하나님만큼 현재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래야 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미스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네가 본 것은 공의로 교회와 함께 원수를 쳐부수며 승리로 구원을 이룰 내 능력의 손에 있는 완전하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의로운 성도)에 대한 비밀이라”





















요한계시록 13장(짐승 두 마리)



요한계시록 13장(짐승 두 마리)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5. 또 짐승이 큰 말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

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육백 육십 륙이니라.





많은 사람들이 교황이 적그리스도일 것이라고 말했지만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 다. 왜냐하면 단지 적그리스도는 정치 수장이기에 종교 쪽에서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짓선지자만 종교 쪽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의 책 [요한계시록의 증언]에서 적그리스도는 세계 경제를 총괄하는 쪽에서 나올 것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를 계시록 13장을 중심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부활의 신비와 그 영광, 출판 예정)을 준비하면서 계시록 17장을 유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계시록 17장은 음녀의 멸망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해서 음녀, 종교통합청의 멸망에 대해서만 신경을 썼는데 그 속에 적그리스도의 정체에 대한 비밀을 자세히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계시록 17장의 음녀에 대한 큰 퍼즐 속에 숨겨 진 적그리스도의 비밀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 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7천사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계17:1-7)

첫째로 음녀, 전 세계 종교통합청  계시록 17:1-6, 15
구약성경에서 ‘음녀’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두고 사용된 표현입니다. 우상숭배 행위를 음행이라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세상과 친구된 자들을 간음한 여인, 하나 님과 원수 된 자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음녀’를 배교자, 진리에서 떠난 자들, 세상권력 과 결탁한 종교, 세속화된 종교를 음녀라고 했습니다.  음녀의 정체를 알려면 신세계 질서의 세 계종교 통합을 이해해야 합니다. 신세계질서 구축의 4대 핵심목표 중 하나가 종교통합입니다. 인류역사에서 많은 전쟁들이 종교갈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세계 질서를 이루기 위해서는 종 교간 갈등을 해소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전세계 종교통합은 신세계 질서를 위한 필수적인 것입니다.

1994년에 인도 델리에서 세계단일 종교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모임에 10만여 명의 영적 지도자들이 제 7회 세계종교회의라는 이름 아래 모였습니다. 여기에 52개 국의 기독교, 정교 회, 가톨릭, 모슬렘, 불교, 힌두교, 유대교 등 종교 지도자들이 참석해서 ‘하나님 아래 한 가족’ 이라 는 모토 아래 모두가 서명했습니다. 종교연합 계획의 궁극적 목표는 사람들을 단일종교의 우산 아래 끌어 모아 단일정치체제 하에 들어 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세계 종교통합을 이루려면 전 세계에서 단일 종교집단으로 가장 큰 로마가톨릭이 주도할 것이 요, 그 다음으로 개신교의 세계교회 협의회(WCC)와 세계 복음 연맹(WEA)일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2015년 12월 통계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가톨릭 신자 수는 약 12억 8천 5백만 명 으로 세계 인구의 17.7% 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WCC는 110개국349개 교단, 5억 8천만 명이 가입되었습니다.  1991년 7차 켄버라 총회에서는 로마가톨릭,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유대교 외에도 점술가, 심령술사, 마술사, 무당 등을 포함하여 세계 15개 종교의 지도자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리하여 대규모 종교혼합 집회를 갖고 세계 종교 통합과 단일성을 외쳤습니다. 2011년 6월 28 일에 세계복음연맹(WEA)과 세계교회 협의회(WCC)와 교황청이 스위스 제네 바의 WCC본부에서 공동의 선교문서인 ‘다종교 세계에서의 기독교 증거’라는 문서를 발간했 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진영과 로마 가톨릭이 공동으로 집필하고 채택된 문서입니다. 이것은 다종교 세계 속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적 의무를 밝히고 있습니다.

신세계 질서 구축을 목표로 하는 세계 종교통합을 위해서는 로마가톨릭이 이런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강력한 체제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 조직은 로마가톨릭과 교황권을 조종하고 있는 예수회 입니다. 또한 예수회가 주축인 일루미나티가 있습니다. 종교통합청을 이해하려면 로마가톨릭의 예수회를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예수회는 익나티우스 로욜라가 창설자인데 1534년 몽마르뜨의 노틀담 사원에서 조직되었습니 다.  1540년 로마 교황 바오로 3세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예수회는 1517년 종교개혁과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교황의 권위가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결성된 단체입니다. 예수회는 1546년 트렌트종교회의에 참석해 교묘한 책략과 논법으로 중세의 부패된 가톨릭을 개혁하자는 반대파 들의 모든 요구를 물리치는 일을 열성적으로 완수함으로써 교황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 됩니다. 반대파들의 요구조건은 사제들의 결혼포기, 각국의 자국어 예배, 교리의 모호성과 교황의 무오 설 그리고 교황제도의 개선들이었습니다. 예수회는 교황의 세계지배의 선봉부대입니다. 1574년에 피오5세는 칙서를 내려 후일 어떤 교황이 예수회의 권한을 축소한다 하더라도 예수 회의 권리를 회복할 수 있도록 예수회 총재에게 권한을 부여 했습니다.

이것은 가톨릭 내의 ‘이단’에 강력하게 대응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교회 내의 거센 반발로부터 보호할 수호자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회는 교황권을 보호하는 시위대 혹은 내시의 역할 인 것입니다. 교황들은 교회적으로나 세속적으로 중세기에 누리던 절대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를 예수회에 팔아버린 꼴이 되었습니다. 예수회는 교황의 절대권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며 교황체제는 예수회에 의존하게 됩니다. 세상을 지배하려는 교황의 목적에 예수회 회원은 정예 요원으로 선발되며 교황의 전위부대로서 사회 일선에서 활동하는 저명인사들의 포섭에 주력했 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며33,000여 명의 예수회 공식회원이 세계 도처에서 활동 중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교황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자들입니다.

예수회는 16세기부터 18세기 말 교황권이 몰락하기까지 가톨릭으로 개종을 거부했다는 이 유로 수천만 명의 개신교도들을 온갖 잔인한 고문과 화형으로 학살했었습니다. 예수회는 모든 악을 조장하며 뿌리 깊은 부도덕성을 궤변으로 신앙적인 것으로 합리화합니다.  무엇이든지 지 배하며 어디든 침투해서 무형적 정부형태를 이루었습니다. 로마가톨릭은 과거 역사에도 그랬 지만 세속권력에 대한 교회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그들의 비밀군대인 예수회를 앞세워 세계를 지배하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회 총재인 베르쯔신부는 ‘국가는 교회 아래 있다. 그러 므로 세속적 권위는 교회권위 아래 예속되어 복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티칸의 명령 에 절대 복종하는 명령수행자이자 자문역까지 도맡았던 신정 정치 투사들의 비타협적인 교리입 니다. 때문에 오늘날 ‘검은 교황(예수회의 총재)과 흰 교황(공식적인 교황)간의 미미한 차이로 그 구분이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바티칸이 어떤 정책을 언급하면 그것은 예수회의 방침으로 이 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회는 두 가지 최종목표가 있습니다.  그 첫째 목표는 세계정치 권력의 장악이며, 둘 째 목표는 세계종교의 통합입니다. 현재 예수회 소속 신부들이 프리메이슨의 빌더버그 그룹 종 교 통합연구의 핵심구성원으로 되었습니다. 이들은 국제연합, 나토, 세계의 국제은행들, 대 기 업, 비밀결사들, 프리메이슨의 여러 조직들, 수많은 세계 협의체들, 사이비 종파 등의 다양한 여 러 조직들을 온전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예수회가 조종하고 있는 바티칸은 1929년 이래 바티 칸 시라고 하는 소 주권국을 만들어서 국가로서 승인을 받았으며, 국가의 우두머리인 교황과 내 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비밀은행 중의 하나인 바티칸 중앙은행을 운영하고 있 습니다.

예수회는 가톨릭의 모든 활동과 전략과 교리를 조정하는 배후세력입니다. 예수회는 세계 127 개국을 11개 구역으로 편성하고 91개 지역들을 통치하면서 각 지역 대표신부(수장)와 각 나라 수장을 두고 있는 오늘날 세계 최고 권력기구로서 존재합니다. 바티칸의 대형 지하문서 창고와 세계적 정보 네트워크 등을 갖추고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예수회는 현재 프리메이슨 조 직인 일루미나티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계시록 17장의 음녀를 살펴 보겠습니다. 이 음녀는 먼저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1절)라 했습니다. 계17:5에서 큰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들과 무리들과 열 국과 방언들’이라 했습니다. 종교통합이 전 세계적인 것을 보여 주며 이 음녀가 '물위에 앉아 있 고’ 했으므로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2절에서 땅의 임금들도 음녀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했습니다. 음행은 하나님을 저 버리고 떠난 행위를 말합니다. 3절에서 이 음녀가 붉은 빛 짐승을 탔다고 했습니다. 짐승은 적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짐승을 탔다’는 말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종교통합 청이 적그리스도의 권력을 빌어 세계적으로 권세를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종교통합청의 권세가 적그리스도 위에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16절에서 열 뿔과 짐승이 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기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사른다고 했습니다. 미워하고 망하게 하고 벌거벗기고 살을 먹고 불로 사른다는 말에서 이들이 음녀에 대해서 얼마나 증오했었나를 알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이 음녀는 자주 빛과 붉 은 빛 옷을 입는다고 한 것은 자주 빛, 붉은 빛 옷은 황제들이 입는 옷입니다. 금과 보석과 진주 로 꾸민 것은 온갖 사치와 화려한 삶을 누리고 있으며, 그 손에 든 금잔은 온갖 음행의 더러운 것들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5절에 그 이름이 비밀이라 한 것은 음침함과 음모로 가득찼다는 말입니다. 큰 바벨론이란 말에서 바벨론은 우상종교의 발생지인데 모든 우상종교의 근원이며 어미라는 의미입니다. 전세계 종교 통합청이 우상종교를 포괄하는 최고 종교기구라는 표현입 니다. 

6절에 이 음녀 즉 종교통합청의 역할이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했다고 합니다. 과거 로마가톨릭 제국 당시에 교황은 예수회를 앞세워 수천만의 예수의 증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앞으로 종교통합청은 성도들을 학살하는 주범이 될 것입니다. 6절 하반절에서 사도 요한은 환 상 속에서 이 음녀를 보고 놀랐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 천사가 사도요한에 게 왜 놀라느냐 하면서 이 음녀의 비밀과 음녀가 타고 있는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붉은 빛 짐승에 대한 비밀을 밝혀 주겠다고 합니다. 붉은 빛 짐승은 적그리스도입니다. 7절에서 음녀와 일곱 머리와 열 뿔과 짐승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이 음녀가 짐 승을 타고 있습니다. 이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습니다. 이제부터 붉은 빛 짐승인 적그리스도의 비밀을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둘째로 첫째 짐승, 적그리스도   계시록 17:7-11
‘7천사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8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9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10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 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11전에 있었다가 지 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계시록 13장에는 두 짐승들이 등장합니다. 첫째 짐승은 적그리스도를 말하며 바다에서 나온 다고 했습니다. 바다란 물로 구성되었습니다. 물은 계시록 17:15에서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 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온 세계를 지배하는 자란 뜻입니다. 그는 열 뿔과 일곱 머 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계17:9에서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했 습니다. 그냥 일곱 산이 아니라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짐승인 적그리스도 는 이 여자(음녀, 종교통합청)와 관계가 있고 또 일곱 산과 관계가 있습니다. 먼저 일곱 산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옛 로마제국의 수도가 현재 이탈리아 나라의 수도인 로마 시였습니다. 이 로마 시는 7개 언덕으 로 구성되었습니다. 옛 로마제국은 이 일곱 언덕에서 그 당시 세계를 통치했습니다. 또한 일곱 산은 옛 로마 가톨릭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옛 로마 가톨릭제국 역시 천 여 년 동안 이 일곱 산을 가진 로마 시가 이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현재 로마가톨릭도 로마 시에 바티칸 시국(市國)을 가 지고 있습니다.  일곱 머리는 첫째 짐승의 머리들이요 여자 즉 음녀가 앉은 일곱 산이라 했으므 로 첫째 짐승은 로마 가톨릭과 관계가 있습니다. 첫째 짐승 즉 적그리스도는 일곱 산 출신 즉 로 마 가톨릭 출신임을 암시합니다  

가톨릭은 2천 년 동안의 전 세계적 조직력과 정보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수장은 교황입니다. 한 사람이 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때 천여 년 동안 로마 가톨릭제국을 명실상부 지배했던 경험을 가진 조직입니다. 그러므로 전 세계 종교 통합청의 우두머리는 당연히 가톨릭 의 수장인 교황일 것입니다. 가톨릭은 바티칸이라는 나라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계 13장의 첫째 짐승이 일곱 머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 일곱 머리는 계17장에 의하면 음녀(종교 통합청)가 앉은 일곱 산이라 했으니 첫째 짐승은 가톨릭 교황이라는 암시입니다.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 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 했습니다.

일곱 산 일뿐 아니라  또 일곱 왕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여기 일곱 왕은 일곱 제국을 형성한 왕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일곱 제국이 무엇이겠습니까? 일곱 제국 중에 네 제 국은 다니엘서 7장에 나옵니다. 바벨론 제국과 바벨론 제국의 표상인 느부갓네살 왕, 메대 바 사 제국과 고레스 왕, 헬라 제국과 알렉산더 왕이었습니다. 이 세 제국은 왕조를 이루었으며 왕권을 세습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입니다. 로마제국은 처음에는 원로원이 통치하는 공화 국이었으나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부터 원로원에서 선출하는 형식의  일 인이 통치하는 황제국 이었습니다. 다니엘 7장에 의하면 첫째 제국 바벨론은 BC 605- BC 538, 둘째 제국 메데바사 는 BC 538– BC 333 , 셋째 제국 헬라는BC 333-BC 63, 넷째 제국 로마제국은 BC 63 –AD 476 입니다. 

1. 다섯째 제국

계17:10에,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했는데 유럽역사에서 다섯째 제국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로마가 망한 후 유럽 대륙에는 민족국가들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제국 이 강했을 때는 변방을 지켰으므로 그 지역에 평안을 유지하였는데 로마라는 벽이 무너짐으로 게르만족, 반달족, 훈족 등의 외부의 침략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로마제국 시절 AD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얼마 후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이 때 기독교는 전 유럽과 아프리카와 소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런 때에 이족들의 침 입으로 로마 시가 위협을 당하게 됩니다.  ‘교황’이라는 호칭은 5세기 중엽부터 사용했으며 11 세기 동서방 교회 대분열 이후,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오직 로마 주교에게만 국한되었습니다. 

교황직의 위신이 높아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교황 레오 1세 때였습니다. 452년 훈족이 로 마를 침공하였으나 서로마 황제는 그들의 침략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에 실망한 로마 시민들은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레오 1세는 용감하게 로마 시외로 나가 훈족의 지도자인 아틸라와 만나 담판함으로써 그들을 평화롭게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로마는 멸망할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455년에는 가이세리크가 이끈 반달족이 로마를 공격하였을 때에 레오 1세는 이번에도 용감하게 가이세리크와 회담 하였습니다. 비록 그는 반달족의 로마 시내 입성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최소한 무분별한 약탈과 살육으로부터 로마 시민들을 구해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 시민들은 교황을 그들의 유일한 보호자로 바라보게 되었고, 교황들 또한 로마 시민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 쓰고 로마를 침공하려는 야만족들과의 정치적 협상에 나섰습니다. 대외적으로 교황은 사실상 로마 시의 수호자가 되었고, 레오 1세는 훗날 ‘대교황’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한편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야만족들은 가톨릭 신자가 되거나 아리우스파가 되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 국왕은 본래 아리우스파였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교황과 동맹 관계를 맺은 최초의 야만족 군주였습니다. 이후 서고트족을 비롯한 다른 야만족들 역시 차츰 가톨릭교회로 개종하였습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교황은 권력의 중심으로 급부상하면서 지속적으로 교회 영역을 초월하는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오 1세에 이어 두 번째 대교황 칭호를 부여받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교회 행정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습니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 의원을 지냈던 집안 출신이었던 그레고리오 1 세는 고대 로마인의 전형적인 통치 방식인 엄격한 규율과 판결을 통해 문제들을 해결하였습니 다.  교황 스테파노 2세는 콘스탄티누스 5세 황제 대신 프랑크족에게 자신의 토지를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프랑크 국왕 피핀 3세는 랑고바르드족을 진압하고 이탈리아 땅의 일부 를 교황에게 기증하였습니다. 이로써 교황은 중세부터 근대에 걸쳐 교회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 안에 있는 마르케, 움브리아, 라치오 지방으로 이루어진 광활한 영토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이 영토를 교황령이라고 불렀습니다. 

AD 538년 교황의 적대 세력인 아리우스파의 동고트를 정복함으로 교황권이 세계 지배에 들 어 가 중세시대 로마교회와 교황은 무소불위의 권한으로 세상에 군림합니다. 그리고 AD 800 년에 는 교황 레오 3세가 카롤루스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주어 그를 서방 제국의 황제로 임명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AD 962년 오토 1세가 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면서 되풀이되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서방에서는 교황으로부터 직접 황제의 관을 받아 써야만 비로소 황제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자리잡았습니다. 교황 의 권한은 특히 십자군 전쟁 때에 이르러서는 정점에 다다랐습니다. 또한 교황 인노센스 3세는 영국 존 왕 을 굴복시켰으며 독일의 오토4세를 퇴위시키기도 하는 등 교황의 권력은 세속 군주의 그것을 능가했습니다.  

로마 가톨릭제국은 천여 년 동안 세계를 다스렸습니다. 1500년대에 이르러 종교개혁과 산업 혁 명으로 인해 각 민족이 자신의 언어로 성경을 읽게 되면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가톨릭에 의해 속 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교황의 권위가 점점 축소됩니다. 옛날에 성경을 몰랐을 때는 사제 들 의 공갈 협박을 두려워했지만 이젠 교황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이 일어 나 면서 각 민족국가들의 경제력이 향상되면서 국민국가들의 왕들의 권력이 강화됩니다. 이제까지 는 교황의 명령에 절대 순종해야만 했던 각국의 왕들의 권세가 교황을 능가하게 됩니다. 그러나 왕들은 각 국민들이 종교적, 정신적으로 교황을 받들고 있기 때문에 교황의 눈치를 봐 야만 했습 니다.  교황에게 고개 숙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이 성경을 보게 되면서 교황과 가톨릭의 거짓에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 시점에서 신교의 영향력이 강해진 독일이나 영국 등의 왕들이 더 이상 교황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황권의 절정과 몰락: 역대 교황은 꾸준히 세속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해왔습니다. 대  그레고리 1세로 불리는 교황은 6세기 말, ‘보편적 총대주교’임을 주장하는 콘스탄티노플 주교에 대해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강조했습니다. 로마 주교의 명칭은 ‘베드로의 계승자’에서 베드로의 대리자(그레고리 7세), 더 나아가 ‘하나님의 대리자’(인노센스 4세)까지 발전했습니다. 교황권이 황제권에 대해 우위를 점한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1077년 1월 벌어진 ‘카노  사의 굴욕’ 사건입니다. 성직자 서임권을 둘러싸고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 7세와 대립하였습니다. 그레고리 7세는 황제를 파문에 처함으로써 신하들이 황제에게 등을 돌리      게 만들었고, 이에 당황한 황제는 교황이 잠시 머물고 있던 카노사 성으로 달려가 참회 복장을 입고 맨발로 3일간 성 앞에서 파문의 철회를 간청하였습니다. 교황이 파문조치를 철회하자 하인리히 4세는 정적들을 제거한 후 반격에 나섰습니다. 그는 대립교황을 세워 그레고리 7세를 몰아냈  으나 이로써 교황권이 황제권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얼마 후 우르반 2세는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에서 해방하라”고 황제와 제후들에게 호소하며 십자군을 제창했습니다. 오른쪽 어깨 위에 십자 표식을 달고 출정하는 군인들은 모든 죄를 용서 받는다는 교황의 특명이 내려졌습니다. 이후 200년 가량 이어진 십자군 원정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교황이 서 유럽의 진정한 수장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노센스 3세에 이르면 교황이 마음대로 황제를 옹립, 파문하고 왕들을 중재하는 수준에 이릅니다.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는  말이 나돌았듯이 교황권이 절정에 오른 때였습니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교황권이 세속의 권력 보다 우위에 있다는 칙서를 반포하고 “모든 인간은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상황은 역전되어 교황권은 세속의 권력에 밀리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에 의해 1303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이단 혐의로 고발당한 채 쫓겨나 사망하고 1305 년에 프랑스인 출신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자 교황청은 필리프 4세의 뜻에 따라 아비뇽으로 옮겨집니다. 교황권이 프랑스 국왕에게 종속 당한 이 때를 사가(史家)들은 ‘아비뇽 유수’라고 부릅니다. 그레고리 11세 사후에는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교황이 선출되어 카톨릭 교회의 분열과 교황권 몰락이 가속화 되었습니다. 

콘스탄츠공의회를 통해 카톨릭 교회의 분열은 일단 극복되었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를 맞아 사치와 화려함을 구가하던 교황권에 종교개혁이라는 치명타가 가해집니다. 1517년 독일의 종교 개혁을 시작한 루터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며 가톨릭 교회의 체제와 비리를 비난했고, 이어서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에 성공했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교황청이 트리엔트공 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교리를 재정비하며, 종교재판소를 두고 개신교도들에 대한 학살까지 자행하며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종교 전쟁을 벌이는 등 분투했지만 어느덧 유럽의 절반이 개신교 세력으로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신성 불가침으로 보이던 교황 좌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루이 16세와 그 왕비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후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1798년 로마를 침공하여  로마 공화국을 세웠습니다. 교황 피우스 6세는 교황령을 잃고 퇴위되어 프랑스 그르노블로 이 송되었다가 다시 발랑스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1799). 이로써 교황권은 완전히 몰락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어서 교황에 선출된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의 초청을 받아 대관식에 참석하지만 축복기도를 했을 뿐, 예전처럼 황제에게 관을 씌워줄 수는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직접 황제의 관을 쓰고 황후에게도 자신이 관을 씌워주었습니다. 나폴레옹 실각 후에도  교황의 재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1860년 이탈리아가 통일될 때, 교황령의 대부분이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습니다. 

2. 여섯째 제국, 교황권의 부흥과 현재   계시록 17:8-10

‘8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 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못 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9이제는 지혜로운 이해력이 필요하다. 일곱 머리는 그 여자가 타고 앉은 일곱 언덕 이며 또 일곱 왕을 가리키기도 한다. 10그 중의 다섯은 이미 넘어졌고 여섯 째는 아직 살아 있으며 마지막 하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 왕이 나타 나더라도 잠시 동안밖에는 살지 못할 것이다.’(공동번역 계 17:9-10).

8절에서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올’ 혹은 하반절 에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 17:10에서는 ‘하나는 있고’라고도 했습니다. 8절에서는 ‘없다’고 하고 10 절에서 는 ‘하나는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8절의 ‘없다’가10절의 ‘하나는 있고’ 가 되는 데 이것이 여섯째 제국입니다. 그래서8절에서 ‘장차 무저갱에서 나올’ 제국이 7째 제국입니다. 8절에서는 여섯째 제국을 ‘없다’라고 하여 여섯째 제국을 무시하고 뛰 어넘어 ‘장차 무저갱에서 나올’ 일곱 번째 제국을 언급한 것은 여섯번 째 제국은 제 국이라 하기에는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제국이라 하면 한 강대국이 여러 나라를 다스린다는 개념이 있는데 이제까지의 다섯 제국들은 명실상부 제국다운 제 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섯번째 제국은 제국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여섯 번째 제국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이탈리아는 1860년 본토와 양 시칠리아의 통일로 뒤늦게 민족국가 궤도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천여 년 동안 유럽을 호령하던 바티칸 권력은 민족주의의 발호 속에 바티칸 언덕의 옹색한 동네 하나로 위축됐습니다. 신생 이탈리아가 1870년  9월 로마까지 수도로 접수하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 제국은 로마에서 사실상 소멸했습니다. 국제사회와 이탈리아의 신앙인들은 영적 세계의 가시적 추락을 충격 속에 주시했고, 이탈리아 국가 권력도 교황의 영향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로마 문제’라 불리던 그 불편한 상황을 국가파시스트 당의 당수 무솔리니가 타개한 것이었습니다. 

무솔리니는 1922년 쿠데타로 집권해 우익 연정을 구성했지만 당내에선 소수파였습니다. 검은 셔츠단 으로 상징되는 무력으로 공산당과 사회당, 자유당의 반 파시스트 운동을 진압하며 경찰국가 체제를 구 축해가던 그에게는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습니다. 비오 11세에게 손을 내민 배경이 그러했습니다. 둘은 대리인을 내세워 20년대 중반부터 협상을 시작, 5년여 만에 합의에 이르렀습니다. 이탈리아 왕국과 바티칸 교황청이 1929년 2월11일 라테란 조약을 체결하고 6월7일 비준 했습니다. 전문과 27개 항으로 구성된 라테란 조약의 핵심은 바티칸을 중심으로 일정 영토와 국민, 주권을 지닌 독립국가 바티칸 시국의 보장이었습니다. 기존 교황령 및 교회재산에 대한 보상으로 왕국은 교황청에 현금 7억5,000만 리라와 1억 상당의 국가채권을 지불했습니다. 무솔리니는 라테란 조약으로 파시 스트 권력의 국내 지지기반을 확보했고, 국제 정치무대에서도 박수를 받았습니다. 교황청은 그 돈을 바티칸시국 경제 재건과 바티칸 은행(IOR) 설립의 종자돈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로써 1870년 교황령을 모두 잃고 왕국에 사실상 강제 합병 당한 교황청이 비로소 독립, 오늘의 바티칸 시국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것이 여섯번째 제국입니다.

2차대전 초 삐걱거리긴 했지만 교황청과 파시스트들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했습니다. 그 시기 구축된 교황청의 관료주의 시스템은, 물론 바티칸의 안녕에는 도움이 됐겠지만, 국제 사회에 미쳐온 교황의 영 향력을 왜소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황청이 오늘의 위상을 회복한 것은 냉전기 강경 반공주의자였던 요 한 바오로 2세 치세(1978~2005)였습니다. 과거와 달리 세계 평화를 호소하고 종교간의 연합을 촉 구 하는 교황에 대하여 세계는 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계 각국을 순방 하며 도착하는 곳마다 입을 맞추고 많은 군중을 모았습니다. 그는 또한 각국 정치가, 종교 지도자들과 기꺼이 손을 잡고 우정과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비단 가톨릭 교도뿐 아니라 공산 주 의자 정치가도, 불교 지도자도 그와 반갑게 손을 잡았습니다. 그가 95차례, 128개 국에 달하는 해외 순방에 나선 거리를 환산하면 지구를 30바퀴 가량 돈 셈입니다. 12억 가톨릭 인구의 수장 으로서 교황이 가지는 종교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론이 없지만, 교황의 정치성에 대해 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세속권을 완전히 잃은 교황은 이제 종교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교황 피우스 9 세 가 소집하여 1869년 개회된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이듬해에 “교황이 사도좌에서 발언할 때 교황은 베드로에게 약속하는 무류성을 행사한다(즉, 교황은 절대 오류가 없다는 뜻)”는 교황 무류성 교리를 의결함으로써 교황 절대주의를 내세웠습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보급은 교황을 대중적인 스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방송매체를 통해 교 황은 세계의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고 전파는 교황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세계로 보냈습니다. 발달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교황 바오로 6세는 세계 각국을 순방하고 1965년에는 유엔 총 회에서 연설하기도 하였습니다. 1978년 선출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거 어느 교황보다 도 더욱 열심히 해외 순방에 나서며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세계에 보냈습니다. 그는 역대 어느 교 황보다 정치적이고 대중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9·11 테러 이후 교황은 “가 톨릭 교회는 진정한 이슬람을 존경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지난 1990년대 말부터 한국에 ‘부처 님 오신 날’ 마다 축하 메시지를 보내온 교황이 이번에는 이슬람권 끌어안기에 나선 것입니다.

3.  일곱 번째 제국 

‘10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 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11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 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교황은 중세 시대의 그런 제국적 권세를 가지지 못하였으나 전 세계적 종교적 조직의 종교수장 인 교황으로서 전 세계적인 인정을 다시 회복합니다. 가톨릭에는 검은 교황과 흰 교황이 있습 니다. 검은 교황은 예수회 수장을 말합니다.  예수회는 고대 나라에서 왕을 보호하기 위한 내시 와 같은 위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회가 교황이 될 수 없습니다.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예수 회가 가톨릭을 점거하고 교황이 되었다는 것은 교황권을 보호해야 할 자가 교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교황권을 찬탈한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라틴어: Franciscus PP., 이탈리아어: Papa Francesco 1936년 12월 17일 ~ 현재)가 제266대 교황(재위: 2013년 3월 13일 ~현재 ) 교황이 된 것입니다.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스페인어: Jorge Mario Bergoglio)입 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 소속입니다. 왕권을 찬탈했다는 것은 왕조가 바뀐 것입니다. 예수회 소속의 교황권의 계속은 일곱째 제국이 형성된 것입니다.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은 83세 (20 19년) 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후에 나타나는 교황 중에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입니다.

계17장에서 일곱째 나라를 두고 11절에서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했습니다.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적그리스도가 암살 (계 13:3, 14, 15)된 상태를 말할 것입니다. 계13:3에서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에 서 이것을 그의 ‘머리 중에 하나’라고 표현한 것은 제 일곱째 제국 중의 적그리스도가 암살 당하 게 될 것을 말합니다. 이 일곱째 제국에서 죽었던 적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기는 하는데 여덟 째 라고 합니다.  같은 사람이 살아나면 일곱째라고 해야 하는데 왜 여덟째라고 합니까? 이상합니 다. 살아난 적그리스도가 가짜라는 것을 암시하지 않습니까?  

몸과 영은 본래 것 인데 뇌를 이식한 상태의 그런 상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본래 제 생각은 살 아난 이 적그리스도는 그의 인공지능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19:20에서 아마겟 돈 전쟁에서 사로잡힌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가 산채로 불못에 던지운다고 했으므로 적그리 스도가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못은 부활해서 영혼육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만약에 적그리스도가 인공지능, 인조인간이라면 기계인데 기계는 불속에 들어가면 완 전 소멸됩니다. 소멸되면 불못이 소용이 없습니다. 불못은 불신자가 부활해서 영혼육으로 들어 가 영원히 고통을 받는 곳입니다.

그리고 8절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 라와 멸망으로 들어갈자니 …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 고 놀랍게 여기리라.’에서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고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 올 짐승이란 적그리스도가 암살 당한 후 죽었다가 무저갱으로 갔다가 다시 살아난 상 태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요 적그리스도는 죽을 때 낙원으로 갔다가 살아 돌아 오는 것이 아니고 무저갱(사단이 머무는 곳)으로 갔다가 돌아올 것을 말합니다.

4. 적그리스도는 어떤 자인가

계시록 13:1에서 그는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했습니다. 계시록 13:2에서 짐 승(적그리스도, 세계 단일 대통령)에 대한 묘사에서 그는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 입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 표범과 곰과 사자는 다니엘서 7장의 큰 짐승들을 말 합니다. 첫째는 사자요 둘째는 곰이요 셋째는 표범입니다. 넷째는 무섭고 놀랍고 극히 강하다 고 만 했지 특별히 어떤 짐승이라고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사자는 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을 암시 하며 곰은 메데 파사의 왕 고레스를, 표범은 알렉산더를 암시합니다. 그런데 이 적그리스도가 인 류역사상에 영웅 중의 영웅들의 능력과 기질을 한 몸에 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 자연적 인간의 영역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계시록 13:2에 의하면 용이 그의 권세와 능력과 보좌를 적그리스도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초인간적 경지를 넘어 신의 경  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그랬기에 인간역사에서 영웅 호걸들이 그렇게 시도했던 세계 통일국가 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권력을 장악하는가

요한계시록의 증언 상권(필자 저서)의 일곱 인을 떼심에서 여섯째 인을 떼심 (P187-203)에서 소행성들이 지구와 충돌하게 됩니다.

‘12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13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15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16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요한계시록 6:12-17)

이 말씀의 내용에 의하면 하늘의 별들이 대풍에 흔들려 무화과나무의 설익은 열매 가 떨어지는 것 같이 지구에 떨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이 별들은 소행성들과 혜성 들을 말합니다. 현재 과학적으로 이 소행성들이 언제 지구를 덮칠지 모른다고 합니 다. 만약 지름이 50km 혹은 100km의 소행성과 혜성들이 지구에 떨어지게 되면 그 충격으로 인해 온 지구 상으로 지진과 화산 폭발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환태평양 화산고리에서 지금도 계속 필리핀, 인도네시아, 멕시코, 칠 레, 켈리포니아의 여러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진과 화산폭발이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면 수백, 수천만 명의 사람이 죽게 될 것이며 수많은 도시들이 파 괴 되고 산업이 파멸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또한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을 것입 니다. 이 화산재가 육 개월 혹은 일년, 2년 동안 하늘을 가린다면 지구상의 모든 지역 의 농산물들이 죽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로 지구 전역에 대 기근이 일어나게 될 것이요, 기근으로 인해 굶주린 인민 들이 각 지역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되고 정부들은 국가재정이 고갈되었으므로 이 폭동을 진압할 여력이 없습니다. 경찰이나 군인들도 굶주리고 있는 대상이기 때문 입니다. 정부의 치안부재는 국가파탄을 불러 옵니다. 

지구인들이 공황상태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마치 5세기 때에 서로마제국이 멸망 할 때와 흡사할 것입니다. 훈족, 반달족, 게르만 등의 야만족들이 로마 시를 침략했 을 때에 로마시민들은 의지할 때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로마 시민들은 당시 교황이었 던 레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레오 1세는 용감하게 로마 시외로 나가 훈족 의 지도자인 아틸라와 만나 담판함으로써 그들을 평화롭게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로 마는 멸망할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455년에는 가이세리크가 이끈 반달 족이 로마를 공격하였을 때에 레오 1세는 이번에도 용감하게 가이세리크와 회담하였습니다. 비록 그는 반 달족의 로마 시내 입성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최소한 무분별한 약탈과 살육으로부터 로마 시 민들을 구해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 시민들은 교황을 그들의 유일한 보호자로 바라보게 되었고, 교황들 또한 로마 시민들을 위해 위험을 무릎 쓰고 로마를 침공하려는 야만족들과의 정치적 협상에 나섰습니다. 대외적으로 교황은 사실상 로마 시의 수호자가 되었고, 레오 1세는 훗날 ‘대교황’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와 같이 전 지구적으로 재난과 기근과 폭동과 불안, 공포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들을 구해줄 메시야가 나타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한편 이런 때가 오기를 호시 탐탐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하던 신세계 질서를 구축하던 예수회와 일루미나티의 최 고 수장인 교황이 전면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세계를 구원할 메시야가 나타나기 를 고대하던 자들 앞에 나타난 교황을 전 세계 신민들이 그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인 그는 텔레비전과 유투브와 스마트폰에 나타나 지구인들을 위로하고 안심시켜 이 지구적인 대환난이 곧 해결될 것이라 천명할 것입니다. 이렇게 적그리 스도가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유엔군이 전 세계 정부들을 접수하면서 세계 단일 대통령이 등장합니다. 단일 세계정부가 수립되고 전 세계 국가들은 총통체제로 재 편됩니다. 그러면서 7년 환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둘째 짐승, 거짓 선지자     계시록 13:11-18

계시록 13장에서 거짓 선지자가 등장하지만 계시록 17장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이 말 은 거짓 선지자는 종교통합청 출신이지만 가톨릭출신이 아니라는 암시일 것입니다. 그는 개신 교 출신일 것입니다. 계시록 13:1에서 적그리스도는 바다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바다는 많은 물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계17:15에서 여자가 앉은 물들은 백성들과 무리들과 열국과 방언들이 라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단수로 표현되었지만 영어성경에서는 복수인 물들, 백성들, 무 리들, 방언들, 나라들로 표현되었습니다. 

계시록13:11에서 거짓선지자는 땅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바다와 상대되는 땅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땅은 바다에 비해 삼분의 일에 해당됩니다. 로마가톨릭 출신 적그리스도에 비해 그 권 세가 삼분의 일에 해당된다는 암시일 것입니다. 이 거짓 선지자는 계13:11에서 뿔이 두 개라고 했습니다. 종교통합청의 구성에서 숫자적으로는 개신교의 WCC, WEA가 가톨릭보다 많지만 조 직력과 정치력에서는 로마가톨릭에 비해 아주 미미합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종교 통합청 소 속에서 나오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 출신이요 거짓 선지자도 종교 통합청 소속의  WCC와 WEA 의 두 뿔을 가진 개신교 출신일 것입니다. 권력에는 암투와 세력다툼이 필연적 입니다. 적그리 스도 측과 거짓 선지자 측의 권력 암투가 치열할 것입니다. 계시록13:3, 12, 14에서 적그리스 도가 거짓선지자 측에 의해 암살을 당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거짓 선지자가 종교통합청(음녀)의 출신인데 음녀인 종교통합청이 멸망 (계 17:16)했는데 어찌 거짓 선지자는 제거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계시록 19:20 에서 아마겟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종교통합청을 박멸한 주체는 거짓선지자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종교통합청 내의 로마 가톨릭계가 개신교 계에게 권 력 다툼에서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13:12-18에서 암살당하였다가 살아 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실권을 상실하게 되고 권력에서 뒤로 물러서게 되고 그 동안 적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가톨릭계가 몰락하게 됩니다. 이 후로 종교 통합청이 행사하 던 정보와 세계 인민 통제를 거짓 선지자에 의해 666짐승표 감시 시스템으로 대체하게 됩니다.

넷째 열 왕의 정체      계시록 17:12-18

‘12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 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13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 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4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 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15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 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16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 로 아주 사르리라 17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 지 하심이라 18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계시록13:1과 계시록17: 3, 7에서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계 시록17:9에서 짐승의 일곱 머리를 설명할 때에 일곱 머리는 일곱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9 절에서의 일곱 머리가 일곱 왕이라는 말은 제국을 의미하며 계13:1, 17:3, 7그리고 12의 열 뿔 은 왕들을 말합니다. 여기 12절에서의 열 뿔은 열 왕인데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 열 뿔이 계시록13:14, 15에서 적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인공지능으로서 형식적으로는 짐 승의 인공지능이지만 적그리스도가 죽었다가 살아나기는 하지만 권력을 잃어버린 상태이기에 권력을 잡은 거짓선지자의 지휘를 받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이 열 뿔 즉 열 왕인 인공지능들이 전 세계의 열 나 라들을 통치하는 총통들이요 이 열 뿔이 거짓 선지자의 종용으로 가톨릭계 음녀, 종교통합청을 멸살하는 장면이 15절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섯째 다니엘서 9:27의 다니엘의 70이레 예언과 계시록과의 관계

‘27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 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 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단9:27).’

이 말씀에서 ‘그가’의 그는 적그리스도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언약 을 맺는다’에서 많은 사람은 이스라엘백성을 말합니다. 마지막 ‘한 이레’는 7년 환난의 때를 말합니다. 이 한 이레가 전 3년반과 후 3년반으로 구성되 었음을 봅니다.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7년 우호조약을 맺었으나 ‘그 이 레의 절반’ 즉 후 3년반에 접어들면서 정책이 완전히 바뀝니다. 전 3년반 동안은 우호 친선적이었으나 후 3년반에 들어서면서 강경정책으로 선회합 니다. 전 3년반에는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백성들의 염원인 성전을 건축하 게 하고 하나님께 제사와 예물을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후 3년반에는 왜 조약을 깨뜨립니까? 본래는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맺었는데 왜 그 절 반에서 조약을 깨뜨립니까? 이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요한계시록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계시록의 7년 환난은 전 3년반과 후 3년 반으로 구별됩니다. 전 3년반은 일곱 재앙을 알리는 일곱 나팔이 불려 집니다. 이 나팔재앙은 천재지변과 환경적 재앙과 환난과 핍박과 박해를 통 해 교회와 성도들로 하여금 주님의 임박한 강림을 알리기 위한 예고요 경고 요 경계를 알리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예고인 것 입니다. 민수기 10:1-10말씀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성막을 준비한 후에 가 나안을 향한 행군이 시작되는 무렵에 하나님께서 나팔을 부는 법도를 말씀하 십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2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 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3나팔 두 개 를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문 앞에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요 4하나만 불 때에는 이스라엘의 천부장 된 지휘관들이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며 5너희가 그것을 크게 불 때에는 동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며 6두 번째로 크게 불 때에는 남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라 떠나려 할 때에는 나팔소리를 크게 불 것이며 7또 회중을 모을 때에도 나팔을 불 것이나 소리를 크게 내 지 말며 8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지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 원한 율례니라 9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 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 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민10:1-10).’

첫 번째 나팔이 불려질 때에 백성들이 성막 앞으로 나오고 둘째 번 나팔이 불려질 때에 천부장 지휘관들이 모세 앞에 나오고 크게 불 때에 동편진영의 군대가 행군을 시작하라는 지시였던 것입니다. 백성을 모으고 나팔이 불려질 때에 어떻게 행동하라는 표식이요 명령이요 지시인 것입니다. 또 전쟁이 일 어 났다는 경고요 경계요 소집을 나타냅니다. 이 일곱 재앙을 알리는 일곱 나팔은 주님의 강림이 가까웠다는 알림인 것입니다. 들림 받을 준비하라는 경고의 나팔인 것입니다. 이 나팔재앙은 하나님의 긍휼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후 3년반은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대접들이 쏟아지는 때입니다. 이 재앙들 은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진노의 심판재앙들인 것입니다. 전 3년반의 마지 막 일곱 번째 나팔재앙이 불려지면서 성도들의 공중휴거가 있은 그 후입니다. 지상에 남은 자들은 나팔경고를 무시하고 회개하지 않은 자들인 남겨둠을 당 한 자들입니다. 이 대접재앙들은 회개하라는 경고의 재앙이 아니라 회개하 지 않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 없는 진노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 중 에도 하나님은 땅에 남겨둠을 당한 자들 중에 때 늦게나마 회개하는 자들을 개별적으로 구별하여 불러 피난처로 대피시킨 후에 땅에 일곱 대접재앙들을 퍼붓습니다.

이 때가 다니엘서 9:27의 이레 절반에 적그리스도가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 는 때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이 때가 계시록 13장에서 적그리스도가 암살되 었다가 다시 살아난 때입니다. 전 3년반이 지나고 후 3년반이 시작되는 때 입니다. 전 3년반과 후 3년반이 교체되는 시발점이 적그리스도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는 때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회복하는 기 간이 있을 것인데 이 기간 동안에 그의 측근들이 숙청당하고 적그리스도가 살아나기는 하지만 권력을 상실한 때입니다. 그를 암살한 주모자인 거짓선지 자와 그 측근들이 권세를 잡게 되고 적그리스도를 앞세워 후 3년반의 기간 에 접어듭니다.

그리고 권력장악과 완전 통제를 확보하기 위해 666짐승표 제도를 실시하고 적그리스도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신격화하고 모든 백성들로 그에게 경배하 게 합니다. 마치 태평양전쟁 때에 일본군부가 권세를 잡고 허수아비 일본왕 을 신격화하여 사람들로 그를 신으로 숭배하도록 하고 군부는 그를 앞세워 권세를 휘둘렀던 때와 같은 것입니다. 다니엘 9:27에 제사와 예물을 폐하고 적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인공지능이 성전에 앉아 자신이 하나님이라 자신 에게 경배하라 합니다. 

다니엘11:31, ‘31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 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 다니엘 12:11, ‘11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 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에서 제사와 예물을 폐한다고 했으며 ‘멸 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적그리스도의 우상인 인공지능인 ‘멸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25에서 예수님이 이 구절들을 인용하시기를,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했습니다. 

‘15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 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 더라 16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13:15-18).’

적그리스도가 죽었다가 살아나기는 했지만 거짓선지자가에게 권력을 잃고 뒤로 물러나고 거짓선지자가 적그리스도의 권세를 물러 받고 적그리스도의 형상의 인공지능을 만들어 그것을 신격화시키고 사람들로 그 우상에게 경배 하게 합니다. 그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들은 몇이든지 다 죽입니다. 그리고 거짓선지자는 지구 전 인민으로 666표를 받게 하고 그 표가 없는 자들을 매매를 못하게 합니다. 그 표를 받지 않으면 음식물을 살 수도 없고 팔 수도 없습니다. 표를 받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 금 표를 받게 해서 완전한 감시통제 시스템을 구축하여 철권 독제 정치를 감행하게 됩니다. 

한편 하나님은 이런 불의한 후 3년 반의 세대에 진노의 심판을 내리는 것이 일곱 대접재앙인 것입니다. 일곱 번째 대접재앙이 끝나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재림과 함께 아마겟돈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적그리스도 와 거짓선지자가 산채로 불 못에 들어가고 사탄은 천년 동안 무저갱에 임시 로 갇힙니다, 이 지구 상에 천년왕국이 전개됩니다. 사탄은 천 년이 지난 후 에 곡과 마곡전쟁을 일으키고 그 결과로 잡혀 불 못에 영원히 갇힙니다. 그 런 후에 성삼위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데리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 어가 함께 영원히 사십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 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2내가 본 짐승 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 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4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 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계시록 13:1-4)

첫째로 세계 단일 대통령은 순수 인간이었다(계 13:1-11)

먼저 계시록 13장의 배경을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용이 등장합니다. 용은 계시록 12장에서 공중에 우주전쟁이 있었는데 미가엘과 그 군대에 밀려 지구로 쫓겨 왔습니다. 용은 옛뱀 즉 사단, 마귀라고 했습니다(계12:9, 20:2). 계시록에서 사단, 마귀를 용이라고 하니 성도들이 용을 우리가 그림으로 보고 중국사람들이 형상화하는 그런 짐승인줄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용은 사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단은 본래 천상의 영적 존재인 하나님의 그룹(에스겔 28:14)이었습니다. 에스겔 1:5-14과 10:14, 21-22에서 묘사한 모습에 의하면 대체로 사람의 형상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으며 날개 아래에는 사람의 손이 있습니다. 날개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네 얼굴들은 사람의 얼굴, 사자의 얼굴, 독수리의 얼굴, 소의 얼굴이라 했으며 발은 송아지 발바닥 같다고 했습니다. 계시록 12:3에서 용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다고 했습니다.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계시록 13:1에 등장하는 두번째 존재는 첫째 짐승이라 했습니다. 이 첫째 짐승은 적그리스도 인 사람을 상징합니다. 왜 사람을 짐승으로 표현했는가 하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욕망을 위하여 사단의 하수인이 되어 세상을 망하게 하고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이 살륙하기 때문입 니다. 시편 49:20에 사람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했습니다. 첫 째 짐승 적그리스도는 7년 환난 동안에 전 세계를 통일한 단일 대통령입니다. 짐승이 아닙니 다. 그런데 머리가 일곱이라고 한 것은 얼굴이 일곱 개라는 뜻입니다. 얼굴은 사람이 자신을 나타내는 수단입니다. 한 얼굴이 감정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분노한 얼굴, 웃는 얼굴, 비굴한 얼굴, 사랑스런 얼굴, 인자한 얼굴, 잔인한 얼굴을 가질 때마다 다른 얼굴로 다른 사람같이 느껴집니다. 죄를 지어 숨어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안경을 쓴다든지 코 수염을 붙인다든지 모자를 덮어 쓴다든지 얼굴을 가립 니다.

7은 완전 수입니다. 일곱 얼굴이란 자신을 나타내는 일이 능수능란 하다는 것입니다. 권모 술수가 능한 정치가입니다. 전 세계를 통치하는 자로서 일곱 얼굴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위치에 있다는 것은 암살의 표적이 됩니다. 고대 왕이나 황제들이 그랬고 고대 한국의 여러 왕조들의 왕들이 그랬습니다. 항상 암살 당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장하 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뿔은 권력, 권세를 나타냅니다. 10도 완전수입니다. 10뿔을 가졌다 는 것은 전 세계의 단일 대통령으로서 무소불위의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라는 표현입니다. 전 세계를 통일해서 지배하는 한 사람 적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17장에서 짐승에 대한 묘사에서도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 니엘서에서 네 짐승들을 말할 때에 이 짐승은 제국을 말하기도 하고 제국을 형성한 대표적인 인물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바벨론제국은 느부갓네살, 메데바사는 고레스, 헬라는 알렉산더와 같습니다. 계시록 13장에서 첫째 짐승에 대한 묘사는 짐승 개인을 묘사한 것이요 계시록 17 장에서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은 제국 전체를 나타냅니다.

계13:11에는 두번째 짐승이 등장합니다. 둘째 짐승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7년 환난 동안에 권력 서열 제이인자 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정치적으로, 거짓선지자는 세계 종교를 통합해서 최고 종교지도자의 위치입니다. 사람들의 정신과 영혼을 지배하는 위치입 니다. 고대 왕들은 자신들이 정치와 종교의 수장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몸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지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신으로 섬기라고 백성들에게 강요했던 것입니 다. 애굽의 바로가 그랬고, 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로마제국의 황제들이 자신을 신의 반열 에 놓고 백성들로 경배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이 둘째 짐승은 어린 양같이 행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낸다는 것입니다. 뿔이 두 개라는 것은 권력이 뿔이 열개인 적그리스도만 못하지만 큰 권세를 가진다는 뜻이요 용같이 말한다는 것은 자신이 신의 흉내를 낸다는 뜻입니다. 

계시록 13:2에서 짐승(적그리스도, 세계 단일 대통령)에 대한 묘사에서 그는 표범과 비슷하 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 입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 표범과 곰과 사자는 다니엘 서 7장의 큰 짐승들을 말합니다. 첫째는 사자요 둘째는 곰이요 셋째는 표범입니다. 넷째는 무섭고 놀랍고 극히 강하다고만 했지 특별히 어떤 짐승이라고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사자는 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을 암시하며 곰은 메데 파사의 왕 고레스를, 표범은 알렉산더를 암 시합니다. 그런데 이 적그리스도가 인류역사상에 영웅 중의 영웅들의 능력과 기질을 한 몸에 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 자연적 인간의 영역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계시록 13:2에 의하면 용이 그의 권세와 능력과 보좌를 적그리스도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초인간적 경지를 넘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그랬기에 인간역사에서 영웅 호걸들이 그렇게 시도했던 세계 통일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그리스도는 언제까지나 순수 인간이었습니다. 그도 죽게 되었습니다. 인간으로서 암살당해 죽습니다(계13:3, 12, 14). 계13:14에서는 칼에 죽었다고 합니다. 칼에 죽었다는 말은 1세기식 표현이고 21세기식 표현으로는 총에 맞아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가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총이라 말할 수는 없는고로 그 당시 문명의 암살무기인 칼 로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칼에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총이든지 칼에 의해 서든지 최 측근의 인물에 의해 암살 당했을 것입니다. 이 최 측근의 인물이 누구이 겠습니까? 최 측근이라면 제 이인자인 거짓 선지자일 것입니다. 그 위치는 적그리스도를 죽 이고도 자기만 알 수 있을 그런 위치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암살자가 거짓선지자일 것이라는 암시가 계시록 13:11-18에서 보여 주고 있 습니다. 계시록 13:1-11절까지의 행동의 주체는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12절부터의 통 치의 주체가 거짓선지자로 바뀝니다. 적그리스도를 앞세우긴 하지만 실제 행동은 거짓선지자 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계시록 13장의 전체의 주체가 적그리스도에서 거짓선 지자로 바뀝니다. 12절에서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에서 ‘저가’ 는 거짓선지자를 말하는데 먼저 나온 짐승은 적그리스도인데 적그리스도의 권세를 그 (적그 리스도) 앞에서 행한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도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속이며’에서 여기 ‘짐승’도 적그리스도인데 적 그리스도 앞에서 ‘받은 바 이적’ 을 행한다는 것은 적그리스도가 가진 능력을 자신이 가로채서 그것을 적그리스도 앞에서 행 사한다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권력을 상실하고 거짓선지자 뒤로 물러난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마치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 인양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15절 에서 ‘저기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준다’에서도 주체가 거짓선지자요 16절 이하에서 사람들에게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표를 받게 하는 것도 거짓선지자인 것을 보여 줍니다. 계13장의 문장의 주어가 1-11절까지의 적그리스도에서 12절부터는 거짓선지자로 교체되었습니다.

둘째로 살아난 적그리스도와 그의 인공지능(AI) (계시록 13:12-18)

죽었다가 살아난 적그리스도는 권력행사 면에서 암살 당하기 전과 같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후의 모습은 권력을 완전히 상실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살아난 적그리스도는 그의 인공지능이다
만약 적그리스도를 암살한 인물이 최측근인 거짓선지자라면 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것같이 사람들을 속여야 합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의 뇌를 복사해서 적그리스도의 본래 형상을 만들어 그 속에 적그리스도의 뇌를 심어 적그리스도가 살아 난 것 같이 가짜 적그리스도를 만들어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계시록 19:20에서 아마겟돈전쟁이 끝나면서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가 산채로 불못에 들어 간다는 말씀을 보면서 '산채'로 라고 했으므로 적그리스도가 인간이겠다 고 판단했습니다. 인공지능은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2. 살아난 적그리스도는 살아나기는 했지만 실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회복하는 과정이 상당히 길었을 것입니다. 그런 동안에 그를 돕던 최측근들이 정적들에의해 축출당하게 되고 자신만 남게 됩니다. 대통령으로서 지위는 가졌지만 권력은 없습니다. 마치 대통령중심제에서 총리 중심제로 체제가 바뀐 것입니다. 과거 고려왕국 시대에 무신정권 하에서의 왕권과 같은 것이요, 일본의 막부정권 때의 일본왕과 같은 경우일 것 입니다. 왕은 존재 하지만 왕권은 잃어버린 상태일 것입니다.

12절에서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에서 먼저 나온 짐승은 적그리 스도인데 12절에서의 '먼저 나온 짐승'은 권세를 잃어버린 적그리스도인데  이것 앞에서 거짓선 지자가 적그리스도의 모든 권세를 행사한다 는 것입니다.   12절 하반절에는 가짜 적그리스도 임을 속이고 숨기기 위해서 적그리스도의 우상을 만들라고 합니다. ‘우상’은 1세기식 표현이고 21세기는 인공 지능, 인조인간을 말합니다.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에서 세계 인민들에게 단일 대통령에게 경배하라고 하는 것은 겉으로는 대통령을 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속임수 수단인 것입니다.

13절, ‘13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는 이적 같은 것은 이제 현대 과학으로 얼마 든지 조작할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속이며 땅에 거하는 자들 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이라 했는데 여기 ‘앞에서’란 짐승에게서  받은 바 이적을 짐승 앞 에서 행한다는 말도 됩니다.
‘짐승 앞에서’의 이 짐승은 가짜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 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려는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암살시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입니 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아예 암살시도를 차단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우상 인 인조인간, 인공지능을 분별할 수 없게 했습니다. 동시에 자신이 만든 가짜 적그리스도가 탄로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며 그래서 자신의 권력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적그리스 도가 살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어야 자신의 권력도 유지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적그리스 도의 우상을 통치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 입니다. 적그리스도 형상을 가진 인공지능들을 각 나라 민족에게 배치하여 전 세계를 통 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인공지능이 전 세계를 통치하 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15절,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여기 ‘그’는 거짓선지자입니다. 그가 권세를 받았다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권세를 받아 자신이 전세계를 통치합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우상에게 생기를 준다는 것은 인공지능을 만들어 말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그 인공지능에게 경배하게 합니 다. 정치수단과 종교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를 신격화한 것인데 실제로는 인공지능 즉 인조인간을 신으로 섬기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신으로 섬기지 않으면 몇이든지 만명이나 십만이나 백만이나 다 죽일 것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되어 이 세상이 비인간, 네피림, 인공지능에 의해 통치될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 비인간인 네피림이 세상을 지배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셨고 창세기 19장에서도 네피림이 소돔과 고모라를 장악했을 때도 심판 하셨듯이 앞으로 이 세상도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 세상의 심판이 아주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16- 17절, ‘16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여기에서 ‘그’도 거짓선지자입니다. 거짓선지자가 666표 시스템을 도입하여 전 세계 인민을 통제하여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계시록 13:11후로는 거짓선지자가 적그리스도를 앞세워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계시록 13장의 때가 우리 삶에 어디까지 왔나?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 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또 그리스도 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로마서 8:9-11).

사단은 인간역사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제하려는 공작을 시도해왔습니다. 창 세기 11장의 바벨탑사건에서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을 지우려고 인간중심의 인본 주의를 선동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마음에는 사단이 점거합니다.이제 과학기술 로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합니다.지금 세상은 종교통합 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하나가 됩니다. 기독교도, 가톨릭도, 불교와 이슬람교가 통합될 시기에 놓였습니다. 그 일을 가톨릭주도로 WCC가 행하고 있으며 WEA도 점점 세속화되어 왔습니다. 종교 통합 속에는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통합종교에는 AI가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보이지 않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 없던 무능한 신이 아니라 똑똑하고 응답해주는 신이 생겼습니다. 무신론자들이나 불신자들에게는 AI를 신으로 모신 다면 그것과 이것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 동성애를 옹호하거나 좌파운동에 가담한 목사나 교회 속에는 하나님 의 영이 계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동성애는 죄 라고 규정하는데 그것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교회는 성령이 있어야 하며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AI가 설교를 엄청나게 잘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을 것입니다. 초 대형교회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데이터를 통합 수집할 수 있습니다. 성경 한 구절, 한 구절, 단어 하나, 하나를 외우고 있으며, 히브리어원어 풀이도 하고 헬라어 원문도 줄줄 외우고 적용하며 주석이란 주석은 달달 외우고 역대 수 많은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참조, 통합할 수 있으며, 외국어 성경도 통달한 엄청난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영이 없습니다. 그리고 AI가 목사가 될 수 있다거나 AI목사를 인정하는 목사나 신도들 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습니다.

오늘날 수 많은 교회, 수 많은 신도들이 교회에 수 십년 다니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의 종교집단이요 종교 모임일 뿐입니다.철학 종교인 불교나 유교는 오히려 해박한 AI스님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일본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AI스님이 불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 있는 교회나 생명 있는 목사나 거듭난 성도들은 앞으로 사회의 적이 되고 핍박과 박해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1. AI가 신이 되다
윤석만의 인간혁명이란 인터넷 글에서, ‘예수는 걷지 못하거나 앞을 못 보는 장 애인, 또 말을 못하는 이들의 병을 고쳤습니다. 그러고는 배고픈 이들을 위해 일곱 개의 빵과 물 고기를 꺼내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4000명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도 남을 만큼 음식이 풍성해졌습니다 (마태복음 15:30~38). 이처럼 예수는 사람들 앞 에서 기적을 행합니다.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죠.  
 
 영화 ‘트랜센던스’는 신이 된 인공지능(AI)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슈퍼컴퓨터를 개발 한 천재 과학자 윌(조니 뎁 役)은 테러 단체의 공격으로 뇌사 상태에 빠집니다. 그를 사 랑한 연인이자 동료 에블린은 윌의 뇌를 양자컴퓨터로 스캔해 AI로 재탄생시킵니다. 윌과 똑같은 기억과 생각, 감정을 갖게 된 AI는 인터넷에 스스로를 연결해 진화를 시작 합니다.
 
 얼마 후 AI 윌은 인간의 모든 지식을 뛰어넘어 그 동안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기술들을 만들어 냅니다. 설 수조차 없던 사람을 걷게 만들고,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합니다. 오염으로 폐허가 된 자연을 회복시키며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그를 찾아와 추종하고 맹신합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 AI 윌이 신적인 존재 로 승화된 것입니다’.

사단은 창세기 6장에서 네피림을 이용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을 지배하려 했으나 노아 홍수로 실패한 후 창세기 11장에서는 바벨탑을 건축하여 인간세상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배 제하고 신본주의 대신에 인본주의를 시도하려 했으나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바벨 탑 도모를 흩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도시문명을 형성하고 과학을 발달시켜 세계 사람들 간의 불통이던 언어를 콤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언어 통일하고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버 리고 과학으로 인한 인공지능을 내세워 자신을 참 신으로 섬기도록 시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세대가 그런 세대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손 아래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추게 되면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믿고 따르는 일이 일 어날까? 실리콘밸리의 유명 엔지니어가 인공지능(AI)을 경배하는 종교단체를 설립했습니다.

미국의 IT매체 <와이어드>(Wired)는 구글 출신의 엔지니어 앤서니 레반도브스키 (37·Anthony Levandowski)가 ‘미래의 길’(Way of the Future)이라는 이름의 교회를 설립했 다고 보도 했습니다.

<와이어드>에 따르면 레반도브스키가 캘리포니아 주정부와 국세청(IRS)에 제출한 문서에는 그가 이 교회의 ‘사제(Dean)’ 겸 대표(CEO)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는 이 문서에서 교회의 목 적을 “인공지능에 기반해 신격의 실현을 개발하고 촉진함으로써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 다” 라고 밝혔습니다. 이 교회는 애초 그가 구글에 재직하고 있던 2015년 9월에 설립됐으나,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다가 이번에 종교단체에 부여되는 면세 자격을 당국에 요청 하면서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그는 인공지능이 지구행성을 더 잘 돌볼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 어를 통해 개발한 AI를 신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여 예배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습니다. 그 러면서 "앞으로 창조되어지는 인공지능(AI)은 인간보다 수십억 배는 똑똑한 지능을 가진 존 재다. 신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부르겠냐"면서 "컴퓨터가 인간보다 훨씬 더 똑똑해질 수 있는 것은 '공상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 아닌 현실이다.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존재는 첨단 기술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 AI가 정치 지도자가 되다
[세계 미래 보고서 2055, 2017년 판]에 의하면 정치로봇으로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대체될 것이라 했습 니다. 인간은 수 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매우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해주는 인공지능 이 있다면 굉장히 편리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들은 정 치인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초 연결사회가 되면서 권력에 눈이 먼 정치인들의 거짓말, 우민 정책, 당파적 경쟁과 편견과 당파싸움을 TV를 통해서 봅니다. 그런 이유로 정치인에 대한 존 경심은 사라진 지 오래이고 정치인이 최고 혐오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혐오직업을 대 체하려는 노력이 인공지능 기술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로바마(Robama, 로봇 과 오바마의 합성어)라는 의사결정 시스템의 초기 단계가 인공일반지능 협회장 벤 고르첼 박사 연구팀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산더미 같은 자료를 비교 분석 검토하고 그 중 필요한 쟁점을 고려해 가장 합리적인 의 사 결정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빅 데이터로 인해 인간이 읽고 파악하기에는 너무 나 엄청난 양의 정보가 너무 빠른 속도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중요한 결정에 대한 정보파악, 증거분석, 대조, 요약하고 다른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추론의 근거를 만들 수 있기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처럼 주요한 의사결정권자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귀중한 정보를 구성, 수집, 보고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정부나 국회를 대체할 수 있는 의사결정 프로세스 지 원 프로그램이 바로 로바마 AI프로그램입니다. 이 로바마 프로그램이 아직 완성단계가 아니 므로 이 응용프로그램이 진화하고 성숙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유럽인 4명 중 한 명은 사람 정치인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자신들의 국가를 운영에 대해 중요 한 결정을 내려 줄 것을 원한다고 합니다. 영국과 독일에서는 그 비율이 훨씬 더 높다고 합니 다. 세명 중 한 명 꼴입니다. 네델란드에서는 국민 43%가 AI가 국가정책을 결정하기를 바란 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 AI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도록 인간들의 심리를 준비하게 하는 것입니다.

3. AI가 목사가 되다
BRAD TV 김종철감독에 의하면 미국 플로리다 크리스토퍼 베넥 목사가 데일리 쇼라는 프로 그램에 출연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됐다면 우리 인간도 자율성을 가진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AI가 지구의 모든 정보를 즉각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 다면 꽤 훌륭한 설교도 쓸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빌리 그래함이나 마틴 루터 킹의 어조 와 언변과 테레사 수녀의 긍휼을 가진 목사가 될 수 있지 않겠는냐고 했습니다. 베넥목사는 인터뷰에서 로봇 설교자는 당연히 평화와 정의를 위해 일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로봇은 이용 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바탕으로 자율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초고도의 능력을 가진 자에게 설교를 듣고 목회적 돌봄을 받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로봇은 또한 아무리 선한 인간이라도 가질 수 있는 격한 감정과 정신적 한계를 전혀 갖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류는 우리를 본질적으로 새로운 거룩한 길로 인도하는 존재를 소망한다고 했습니다. 인류의 과학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종교지도자들을 이런 현상을 수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AI)의 등장과 우리보다 더 지적인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2017년에 독일에서 5개국어로 설교하는 로봇목사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독일의 IT회사인 ‘씨넷’회사가 개발한 ‘Bless You To’라는 로봇은 그 가슴에 있는 Touch Screen을 통해서 남성 또는 여성 목소리를 선택해서 5개국어로 설교할 뿐만 아니라 두팔을 들어 올려 신도들 에게 축도할 때에 두 손바닥에서 밝은 빛이 나오기도 한답니다. 미국의 한 목사는 AI의 목회 적 돌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기도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개입하시는 때가 언제인가?

요한계시록 22:20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속히 오리라’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4:33에서 주님은 ‘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라고  했습니다.  ‘문 앞’은 공간 즉 거리적 개념입니다.
요한계시록 22:20에서 속히 오리라 하신 그 ‘속히’가 2천년이 지나오면서 죽었던 무화과 나무가 되살아 나고 이스 라엘백성들이 고토로 귀환하고 예루살렘이 다시 회복되고, 동성애가 온 세상에 충만하여 세상을 썩게하고 AI 가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이 오고 있는 것을 보거든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줄 알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34에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세대’란 앞으로 일어날 종말의 사건들( 즉 죽었던 무화과나무가 살아나는 것과 전 세계로 흩어졌던 이스라엘백성들이 고토로 돌아오는 것들)을 직접 경험하고 지켜보았으며 , 누가복음 17:26, 28의 말씀에 '인자의 임하는 때는 노아 홍수 때와 소돔 고모라의 때와 같으리라' 하신 말씀과 같이 지금 동성애와 21세기의 네피림인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보는 이 세대가 지나 가기 전에 주님께서 지상재림하실 것이라 했습니다. 결국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는 말씀은, 1948년 이스라엘의 회복과 전 세계에 흩어졌던 이스라엘백성들이 고토 귀환을 지켜 본 세대가 다 사라지기 전에(아마도 지금 교회의 장로, 권사님들의 세대일 것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종말의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큰 음녀에게 내릴 심판)


요한계시록 17장(큰 음녀에게 내릴 심판)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11.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13.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16.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18. 또 네가 본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곱 짐승을 이기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은 같은 문맥으로 이어진다.
요한계시록의 중심은 17장이며 13장에서 맥을 찾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13장(짐승 두 마리)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5. 또 짐승이 큰 말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

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육백 육십 륙이니라.


짐승은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17:7-10

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짐승은 왕
망한 다섯 나라

1. 애급 - 바로
2. 앗수르 - 산헤립
3. 바벨론 - 느부갓네살
4. 페르시아 - 고레스
5. 헬라 - 알렉산더
6. 로마 - 가이사
7. 적그리스도가 제국을 만든다.
    열 뿔 - 열 왕

여섯 개의 제국은 모두 지나갔다.
마지막 남은 제국은 적그리스도가 세운 나라가 될 것이다.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발단된 문화 문명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생명공학과 아이티를 이용할 것이다.

짐승의 나라는 7년 /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를 통제한다.
생명공학(바이오), 아이티

전 3년 반 -
후 3년 반 - 

이런 나라가 임하기 전에 전 세계를 복음화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이런 일을 감당할 사명의 나라가 어느 나라인가?
자유대한민국이 이런 사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자유대한민국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마지막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해결하신다.
요한계시록 19:11-21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17. 또 내가 보니 한 천사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21. 그 나머지는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마지막 나라는 메시아의 나라로 이긴 자의 나라가 된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4번째 짐승 / 페르시아(바사) - 고레스

로마를 복음으로 이겼다.

로마서 8:33-37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이 보좌를 만들고 하나님 보좌를 모방한다.
세 가지 방법으로 훼방하여 복음을 대적한다.

1. 종교(宗敎)
2. 정치(政治)
3. 문화(文化)
   - 예를 들면 설날과 같은 명절을 개혁해야 한다.

여섯번째 짐승이 현재는 있으나 지금은 죽었다.
복음이 번성했던 나라가 지금은 기독교 신앙이 타락하였다.


왜 이스라엘이 페르시아에 포로가 되었나?
솔로몬 이후에 분열된 것이 원인이 되어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분열되면 하나님은 망하게 한다.
북 이스라엘 - 앗수르 살만에셀
남 유다 - 바벨론 느부갓네살

왜 한국교회가 정치권의 훼방을 받는가?
교회가 분열하여  무너지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는 그대로 지켜보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는 반드시 징계하여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