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히 될 일 12 / 06 / 2023(수)


12-06-2023(수) 요한계시록 제2강

속히 될 일(요한계시록 1:1, 22:6)

속히(타코스. tachŏs)  τάχος, ους, τό  스트롱번호 5034


1. 속력.  2. 곧.  3. 오래지 않아
발음 [ tachŏs ]
어원  / 5036과 동일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명사] 속력, 빠름, 신속.
2. [부사] a. 곧, 속히, 당장에, 행 12:7, 22:18.
               b. 오래지 않아, 곧 얼마 안 있어, 눅 18:8, 행 25:4, 롬 16:20.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The angel said to me, "These words are trustworthy and true. The Lord, the God of the spirits of the prophets, sent his angel to show his servants the things that must soon take place."   

* 속히 될 일(What must soon take place) - 곧 일어날 일

속담에 ‘구슬이 세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를 하나로 연결해야만 바르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난 두 주일에 소개했던 설교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요한계시록은 오직 예수로만 읽어야 합니다.

프리즘(Prism)은 빛을 굴절 분산시키는 광학도구를 사용하여 햇빛을 통과시키면 프리즘을 통과한 햇빛은 무지개 색으로 분해되어 영롱하게 나타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들었던 성경에 관한 모든 단편적인 정보들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렌즈로 통과시켜 주님 오실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2015-03


 Prism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일까?

요한계시록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 계시서(啓示書)
계시란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계획이란 비밀을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 예언서(豫言書)
예언이란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주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편지의 말씀입니다. -  서신서(書信書)

편지는 직접 찾아가서 전할 수 없는 내용을 글로 적어 보낼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였고 예언하셨던 말씀을 글로 적어 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속히 될 일’이란 무엇일까?

요한계시록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는 먼저 요한계시록의 범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범위를 성경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 바람직한 성경의 교훈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2장 19절에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속히 될 일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속히”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과 성경에서 사용된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속히”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본문을 포함하여 8구절로 소개됩니다(1:1, 2:16, 3:11, 11:14, 22:6, 22:7, 22:12, 22:20).

1:1, 속히 될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16, 속히 임하여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3:11, 속히 임하리니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1:14, 속히 이르는도다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세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22:6, 속히 될 일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22:7, 속히 오리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22:12, 속히 오리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22:20, 속히 오리라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의 구조

1장 : 서론
2-3장 : 일곱교회를 향한 말씀
4-5장 : 하늘 보좌
6-16장 : 일곱 인, 일곱 나파르 일곱 대접
 12-14장 : 붉은 용,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땅에서 올라온 짐슴
17-18장 : 큰 음녀, 바벨론
19장 : 백마 탄 예수, 어린 양 혼인 잔치,  용의 세력에 대한 승리
20장 : 천년 동안 왕 노릇, 곡과 마곡의 잔쟁,  흰보좌 심판(백보좌 심판)
21-22장 : 새 하늘과 새 땅(신천지),  거룩한 성 예루살렘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모든 구절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 때문에 설교의 주제에 합당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속히 될 일’이란 22장 6절에서 “속히 되어질 일” 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어서 “속히 될 일” 이란 3장 11절, 22장 7절과 12절 그리고 20절에서 “속히 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될 일”은 “속히 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가 대략 기원 후 96년이라고 합니다.
2천 년 전에 속히 될 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속히 될 일 즉 주님의 재림이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시간(時間)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해서 시간 개념으로 해석하면 ‘빠르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속히 이루어질 일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당장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면 내 생전에 오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그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주님이 오실 것으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은 그들이 만났던 주님에 대한 증거를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복음서를 시작으로 신약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만일 주님이 제자들 생전에 오셨다면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실 주님이 오시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인위적인 방법이므로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6∼7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장소(場所)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한 해석을 시간적으로 해석하면 반드시 오실 장소에 대한 궁금증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어디에’ 오실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특별한 장소를 마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처럼 소개합니다.

예를 들면 과천, 피지 섬, 브라질, 계룡산과 같은 곳이 될 것이라며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인물(人物)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을 시간과 장소로 해석하면 그 다음에는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어느 특정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1992년 시한부종말론의 이장림,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지상낙원 피지 섬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사례(은혜로교회 신옥주), 두 증인 중 한 사람이라며 영원불멸의 교주(전도관 박태선),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므로 교인들은 전 재산을 정리해서 브라질에 마련한 4천만평의 땅으로 집단 이주하여 마지막 때를 준비하라는 교회도 있습니다.

영적(靈的)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이란 시간과 공간과 인물 중심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묵시문학의 특징인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시간 개념과 장소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속히’라는 말은 ‘확실히’ ‘틀림없이’ 라는 속뜻으로 ‘반드시 될 일’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속히” 라는 의미를 ‘문자적’으로 또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면 본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묵시문학의 특성을 전제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묵시문학에서 “속히” 라는 의미는 “확실히” 또는 “틀림없이” 라는 뜻으로 “속히 될 일”이란 “반드시 일어날 일”이란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속히 될 일’이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이므로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2천년이 지나도 오시지 않았기에 아마 오시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실현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전개 이야기)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느 해 중국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그녀가 살던 마을에 백인 선교사의 가족들이 우리 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신이 분노하여 가뭄이 계속 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점점 분노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삽, 곡괭이, 쇠스랑 등 농기구를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외국 출장 중이라 집에는 어머니와 어린 펄벅밖에 없어서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준비하고 케이크와 과일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을 초대한 것처럼 대문과 집안의 모든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어린 펄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도록 하시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잡았습니다.

얼마 뒤 농기구를 든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대문이 굳게 잠기고 집안은 깜깜할 것이라고 여기고 횃불을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문이 열려있어 마당으로 들어섰더니 모든 방문이 열려 있고 방마다 불이 환하게 켜진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또한 방마다 차와 케이크 그리고 과일이 차려진 것을 보고 어리둥절하여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멈칫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정중하게 마을 분들을 맞이하며 “어서 오십시오. 정말 잘 오셨습니다.
방으로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 잔씩 드시면서 말씀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더 어리둥절 하는데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이 횃불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차를 마시고 케이크와 과일을 먹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습니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조금이라도 도망칠 방법이 있었다면 도망치다가 잡혀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살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다른 골목에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인지라 모든 것을 각오하고 그런 용기를 내어 보았단다.”

그리고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이 말은 펄 벅 여사가 절망적인 순간에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속히 될 일속히 오리라는 약속으로 반드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속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급히(ταχύ) 사화하라 - 속히(ταχύ) 사화하라 

(현대인 성경) 타협하라
(공동번역) 화해하여라
(새번역) 화해하도록 하여라

‘사화하다’(유노온, 능동형)는 상처를 준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사화(사과)는 상처를 준 사람이 해야 하고, 화해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사화와 화해가 이루어진 것을 합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 빨리(ταχύ) - 속히(ταχύ) 

성도들이 속히 해야 할 일은 부활의 소식을 빨리 가서 알려야 합니다. 종말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부활의 소식을 빨리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적인 종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지라도 여전히 유대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함께 나누며 주님 오실 그 날을 함께 준비할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속히 될 일이란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라는 사건입니다. 주님이 속히 오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속히 오실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까?

20:15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21:27 -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야 합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이름은 등과 기름을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등과 기름을 예비하기 위해서 속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신앙생활의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다면 교회에 다닌다는 것뿐이지 신앙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부족한 것이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자랑하며 즐거워 할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요한계시록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사람들이 “속히 될 일”에 대한 주제를 현실 세계에서 나타는 현상과 징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징조와 현상은 잘 몰라도 등과 기름을 예비한 지혜로운 사람들만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비유의 가르침과 같이 “속히 될 일”을 말씀하신 감추어진 은혜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속히 될 일”이란 용어가 요한계시록에서 두 번 사용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1, 속히 될 일
22:6, 속히 되어질 일

속히 될 일 또는 속히 되어질 일은 무엇인가?

3:11,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7,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12,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20, 속히 오리라(I am coming soon.) 


속히 될 일은 속히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때는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를 기준으로 대략 2천

년 전의 예언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언한 내용이 아직도 성취되지 않았다면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정말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고 있을까요? 인간의 평균 수명이 80 또는 90이라고 한다면 속히 오실 것이란 예언을 믿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속히 오리라고 예언하셨을까요?

미래에 나타날 현상과 징조들을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짧은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속히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은 무엇일까요?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성경에 소개된 말씀을 찾아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학창 시절에 시험을 치룬 줄 압니다. 시험 일자가 발표되면 모든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합니다. 시험 일자가 중요합니까? 시험을 잘 치룰 수 있는 공부가 중요합니까? 시험이 목적이 아니라 시험을 통하여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속히 될 일은 반드시 오실 것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오실 주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삶이 중요합니다.

속히 오시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 하고 질문했을 때 부활의 주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주님의 때와 기한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는 성령을 받고 증인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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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속히 될 일

'반드시'
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이'는 예언적 필연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섭리대로 일이 확실히 성취될 것을 나타낸다(Loh-meyer).

'속히 될 일'은 하나님의 계시가 미래에 성취될 사건임을 암시한다(4:1; 22:6; 단 2:28, 29, 45, Johnson).

'속히'(엔 타케이)는 본서에 7회나 반복되어 사용되었다(1:1, 2:16; 3:11; 11:14; 22:7,12 ,20)
1. 시간적 성취의 관점으로 해석한다(Vincent, Hengstenbe-rg)
2. 종말론적 임박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계시의 성취의 진행과 확실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Alford, Johnson, Morris, Mounce).
* 반드시 될 일을 의미한다.

'엔 타케이'는 예기치 못한 때에 갑자기 성취되는 것을 나타낸다.
즉 '엔 타케이'는 인간의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측면에서의 시간적 개념으로(벧후3:8) 하나님의 갑작스런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계시의 성취와 그 확실성을 나타낸다.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본문은 계시의 전달 경로를 나타낸다.
1. 하나님
2. 예수 그리스도
3.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계시의 전달자이며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를 통해 자신의 종인 요한에게 전하셨으며, 그 종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전하였다.

여기서 세 번이나 언급되는 '그'(아우투)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본문의 주 동사인 '에세마넨'(지시하신 것이라')의 주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모든 계시의 근원이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 계시를 전달받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종들, 천사, 그리고 종 요한에게 전달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한편, '그 천사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 앙겔루 아우투'는 '그 천사를 통해'라는 의미로 천사의 매개적 역할을 나타내며(22:6, 16), '그 종 요한에게'의 헬라어 '토 둘로 아우투 요안네'는 수단이나 기구를 나타내는 여격이 사용되어 요한이 계시 전달의 인간적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나타낸다.

결국 본서의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기원하여 참됨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천사와 인간적 도구로 말미암아 수신자들에게 전달된다(Sweet, Moffatt, Ironside).


속히에 대한 키아즘 구조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1: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세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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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후서 4: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ταχεως  / 인간의 시간적 개념 <빨리>    

 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ταχει  / 하나님의 시간적 개념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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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한영 / 22장 404절 / 성경 1189장 31102절 / 구약 929장 23145절, 신약 260장 7957절

성경 1,189장 31,102절 / 구약 929장 23,145절, 신약 260장 7,95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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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 22장, 404절

요한계시록 개론

   1. 서론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 1장
   2. 일곱 교회 : 2∼3장
   3.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 4∼5장
   4. 일곱 인의 심판 : 6∼7장
   5. 일곱 나팔의 심판 : 8∼9장
   6. 열린 책과 두 증인 : 10∼11장
   7. 영적 전투 : 12∼14장
   8. 일곱 대접 심판 : 15∼16장
   9. 큰 성 바벨론의 멸망 : 17∼20장
 10.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완성과 결론 : 21∼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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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장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who testifies to everything he saw--that is,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of Jesus Christ.

3. 이 예언의 말씀읽는 자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the words of this prophecy, and blessed are those who hear it and take to heart what is written in it, because the time is near.








1. 계시록 4장: 하늘 문이 열리다. 천상의 보좌 광경과 스랍들과 24장로들을 소개하다.
2. 계시록 5장: 어린 양 예수님께서 7인봉한 책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인을 떼실 준비를 하다.
3. 계시록 6장: 일곱 인을 떼심 실행
4. 계시록 7장: 전 3년반에 특별한 활약을 할 14만 4천의 주의 종들에게 인을 치심
5. 계시록 8장: 일곱 나팔이 실행되다. 그 중 첫째 나팔에서 넷째 나팔까지 불려짐
6. 계시록 9장: 다섯 째, 여섯째 나팔이 불려짐( 세계 3차전쟁이 일어남)
7. 계시록 10장: 예수님의 공중강림 예고(계10:1), 일곱 째 나팔 준비예고(계10:7)
8. 계시록 11장: 전 3년반 동안의 성도들의 신앙자세 보여줌, 14만 4천의 주의 종들의 사역활동을 두 증인으로 나타냄(계11:1-10), 성도        들의 휴거(계11:11-14), 일곱째 나팔 불려짐(계11:15), 하늘 성전문이 열리고 성도들의 하늘보좌 앞으로 나갈 준비 끝
9. 계시록 12장(삽경):후 3년반이 시작될 상황을 설명, 하늘에서 전쟁이 있겠고, 하늘 권세 잡았던 사탄과 그 졸개들이 지구로 내쫓김,  
    이  일로 후 3년반이 시작됨, 후 3년반 지상에 남김음 받은 자들을 위한 예비처 보여줌
10.  계시록 13장(삽경): 후 3년반에 활약할 두 인물 등장, 첫째 짐승 적그리스도,   둘째 짐승 거짓 선지자
11.  계시록 14장(삽경): 공중휴거해서 천상에 올라온 14만 4천로 대표되는 성도들에 대한 언급, 지상에 있는 자들에 대한 세 천사들의 경고, 첫째 천사는 땅에 남은 성도들에게 신앙지조 강조
          둘째 천사는 큰 성 바벨론으로 묘사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
          셋째 천사는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우상에게 경배하지말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말라고 경고
12.  계시록 15장: 일곱대접 재앙 준비
13.  계시록 16장: 일곱대접 재앙 실시. 첫째재앙에서 일곱째 까지
                 여섯째 대접재앙은 지상군의 아마겟돈전쟁 준비(계16:12-16),
                 계시록 19:11-16과 연결되는데 이것은 천상 군대의 아마겟돈 전쟁 준비
                 일곱째 대접재앙은 아마겟돈 전쟁과 연결,  계19:17-21
14.  계시록 17장(삽경): 후 3년 반의 음녀 즉 종교통합청의 멸절,    후 3년 반에 일어날 적그리스도의 뿌리와 정체와 활동
15.  계시록 18장(삽경): 후 3년반의 기간에 주도할 정치 권력을 큰 성바벨론으로   묘사한 세력들에 대한 심판(계16:17-21의 일곱째 대접                            재앙과도 연결(계16:17-21)), 일곱째 대접 재앙의 결과는 아마겟돈 전쟁의 결과(계19:17-21)이기도 함
16.  계시록 19장: 휴거성도들이 하나님 보좌 앞에서 모두 재회(계19:1-10)
                     어린 양의 혼인잔치(계19:7-8) 후 3년 반 동안 계속
                     성도들에 대한 상급(계19:8)
                     천상에서의 아마겟돈 전쟁준비(계19:11-16)
                     우주전쟁 아마겟돈 전쟁실시, 지구군대와 천상군대의
                     대졀(계19:17-21)
      아마겟돈 전쟁은 여섯째 대접재앙과 연결, 여섯째 대접재앙은 지상군의     
      아마겟돈전쟁 준비(계16:12-16)
17.   계시록 20장: 사탄과 그 무리들이 잡혀 무저갱에 천년동안 갇힘(계20:1-3)
                      지상에 천년왕국 설립(계20:4-6)
                   천년왕국이 끝나고 사탄이 잠시 놓여나 세상을 다시 미혹 그 결과로 곡과 마곡전쟁이 일어남(계20:7-10) 사탄과                                          그 무리들이 불못에 갇힘
                   백보좌 심판: 이것은 불신자들의 심판부활과 심판을 받고 불못에 빠짐
18.  계시록 21장: 하늘에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지상으로 내려옴.
                     어린 양의 신부인 부활한 성도들
19. 새 하늘과 새 땅인 영원 세계로 들어감(계21:1-8)     새 예루살렘의 모습 묘사(계21:9-27)
20. 계시록 22장: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환경과 생활(계20:(계22:1-5)       하나님의 아들이 된 성도들이 온 우주를 통치함(계22:   
                             5)  요한계시록의 결론부분(계22:6-21)
       파루시아! 내가 속히 오리라(계22:20)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요한계시록 서론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선언하기 위함입니다. 이 부분은 요한계시록 전체에 스며 있지만 특히 1장에 서론적으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요한 서신과 요한계시록의 차이를 강조하는 분들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 요한계시록과 요한복음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장르상 서신인지 묵시적인지가 다를 뿐 너무 닮아 있습니다. 저는 요한 서신의 저자와 요한계시록의 저자를 동일시하는 보수적 관점을 지지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장은 책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소개한다. 이 책의 목적이다. 요한을 통해 요한이 본 것을 증언하는 것임을 말한다. 요한은 자신을 소개한다.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일곱 교회에 편지하도록 했다.

요한계시록 2장

2장에서는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보낸다.

요한계시록 3장

사데교회,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보낸다. 사데 교회는  행위가 없는 교회로 죽은 교회이다. 빌라델비아는 유일하게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 교회이다.

요한계시록 4장

4장은 일곱교회의 편지가 끝나고 하늘에 열린 문에서 하늘로 올라오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늘 보좌에서는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 주위에 앉아있고, 천사들이 찬양한다.

요한계시록 5장

하늘 보좌 환상이 이어진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안팎으로 글씨가 쓰여있고, 일곱인으로 인봉 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6장

드디어 두루마기의 인을 떼기 시작한다. 첫 번째부터 여섯째 인을 뗀다.

요한계시록 7장

십사만 사천 명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십사만 사천 명은 흰 옷을 입고 있었고,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했다.

요한계시록 8장

드디어 6장에서 여섯 번째 인을 떼고 나머지 한 개인 일곱 번째 인을 뗀다.(1절) 천사가 제단 곁에서 금향로를 받아 온다.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금 제단에 드려진다. 다시 일곱 개의 나팔 소리가 시작된다. 8장에는 네 번째 나팔까지 소개된다.

요한계시록 9장

9장에는 다섯번째 나팔과 여섯 번째 나팔을 분다. 다섯 번째 나팔을 불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다. 별은 천사나 영적인 존재이다. 곧이어 별을 향해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1절)고 소개한다. 무저갱의 사자인 아바돈, 아볼루온이 등장한다. 여섯 번째 나팔은 금 제단에서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온다.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가 놓임을 받고 사람의 삼분의 일을 죽인다.

요한계시록 10장

여섯째 나팔 이후 일곱째 나팔로 이어지지 않고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를 특징하는 무지개, 해 같은 얼굴, 불기둥 같은 발은 전형적인 인자의 모습이며 1장에 소개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이후 하늘에서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려할 때 천사가 가지고 있던 두루마기를 먹으라 말한다. 두루마기를 먹자 입에는 쓰나 배에는 쓰다.

요한계시록 11장

지팡이 같은 갈대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게 한다. 이 대 두 증인이 등장한다. 이들은 증언을 하다 죽임을 당하지만 죽었다고 살아나고, 다시 하늘로 승천한다. 그리고 일곱째 천사가를 마지막 나팔을 분다.

요한계시록 12장

일곱째 나팔이 불린 후 하늘의 성전이 열린다.(19:19) 하늘에서 다시 큰 이적이 보인다.(12:1)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보인다. 그녀의 발에는 달이 있다. 여자는 해산하여 아이를 낳을 할 때 부르짖는다. 이때 하늘에서 또 다른 이적이 보인다. 붉은 용이 등장한다. 그 용이 여인을 삼키려 한다.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나 용이 쫓겨난다.(7절) 큰 용은 '옛 뱀 곧 마귀'(9절)다.

요한계시록 13장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한 마리가 등장한다.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니다. 뿔은 힘과 권세를 상징한다. 절대권력을 말한다.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지가 가까스로 살아난다. 그 후 사람들이 그를 경배한다. 짐승을 경배하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 다른 짐승에 땅에서 올라온다. 큰 이적을 행한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이마에 표를 받게 한다. 이마는 신분을 드러내는 표시가 찍는 곳으로 요한계시록 안에서 사용된다. 이마에 무엇이 찍히느냐 그가 결정된다.

  • 요한계시록 9:4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요한계시록 14장

십사만 사천 명의 노래가 들려온다. 이들의 이마에 아버지의 이름이 있다. 어린 양이 서있는 시온 산은 시편 2절을 연상시킨다. 그는 하늘 아버지의 대리인이다.  세 천사의 말이 이어지고, 마지막 수확이 이루어진다. 구름 위의 인자(14절)는 다니엘서 이후 전해오는 인자의 다른 표현이다. 수확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곡식이고, 다른 하나는 포도주 수확이다. 포도주 수확은 하나님의 진노를 뜻한다. 즉 심판은 구원인 동시에 심판이다.

요한계시록 15장

하늘에서 다른 이적이 보인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지고 나온다. '마지막 재앙'(1절)이라 소개한다. 일곱 대접 재앙의 전조이다.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소개된다.(3-4절) 이후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5절) 열린다. 11:19에서는 하늘의 성전이었지만 이제는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린다고 표현한다. 

요한계시록 16장

일곱 대접 재앙이 한 장에 다 들어가 있다. 인이나 나팔 재앙에 비하며 짧고 간소하다. 소개되는 내용은 출애굽 때의 열 재앙과 많이 닮아 있다. 구원의 때가 이르렀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16장 후반부에서는 바벨론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받으며, 하늘에서 내리는 한 달란트나 되는 우박이 내린다.

요한계시록 17장

드디어 음녀의 이야기 등장한다. 음녀는 물 위에 앉아 있다. 땅의 임금들이 그와 음행했다. 그의 이마에 이름이 있다. 글은 '큰 바벨론,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5절)이라 적혀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17장이 당시 로마를 음녀 바벨론으로 표시고 있다고 확신한다. 짐승에 대한 경배는 곧 로마 황제 숭배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 18장

바벨론이 패망한다. 하늘에서 음성이 나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외친다.(4절) 바벨론 망해야 하는 수많은 이유들이 열거된다.

요한계시록 19장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기록된다. 4장의 보좌위의 찬양이 이어지는 인상을 받는다. 어린양의 아내가 입는 옷은 빛나고 깨끗한 세포포 옷이다.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8절) 곧 하늘이 열리고 백마를 탄 이가 나온다. 12절의 표현은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지막 부분 등장하는 소개문이 조합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0장

천년왕국이 소개된다. 천사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온다. 용을 잡아 천 년동안 결박한다. 당시의 언어로 천년은 로마의 통치 기간을 의미한다. 하지만 천년 동안 갇힌다는 표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다시 용이 풀려나지만 다시 천년이 차자 성도들을 핍박한다. 하지만 결국 하늘의 흰 보좌에 앉으신 이가 등장하고 모든 것이 결정된다. 성도들은 부활하고,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부활한다.

요한계시록 21장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한다. 그런데 새로운 세상은 하늘과 땅은 있지만 바다는 없다. 다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신혼집처럼 소개된다. 그때 보좌에서 음성이 들려온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이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3-4절)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그리스도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그리스도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기록입니다.
계시록의 핵심은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선언은 전 우주적인 선언이고, 역사적 생명적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은 세상의 윤리나 도덕 정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이단 세력들의 확장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새 언약의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마지막 때를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라고 먼저 밝히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통하여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다.
요한계시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관계성에서 이해된다.

교회의 그리스도

예수는 교회의 그리스도이시다(계 1:10-18). 

예수는 "인자같은 이"의 신분을 가지시고 (1:13).
그의 외모는 상징적으로 설명된다(1:13-16).
또 (1:17-18)을 보면 예수는 처음과 나중이시며(17),
산 자이시며(18), 전에 죽었으나 이제 영원히 살아계시면서 사망과 음부를 지배하신다(18).
이와 같은 예수의 모습은 일곱교회에서 다시 소개된다 (2-3장). 

에베소 - 일곱 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서머나 - 처음과 나중,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 

버가모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 

두아디라 - 눈이 불꽃같고 발이 빛난 주석같은 이 

사데 -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빌라델비아 -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라오디게아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천상(우주)의 그리스도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천상(우주)의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천상(우주)은 무지개에 둘러싸인 하나님의 보좌 (4:3) 우편에는 어린 양이 있고 그 앞에 일곱 영이 있으며 그곳으로 부터 생명의 강이 흐른다 (7:17; 22:1-2).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계신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이 들려있지만 이 봉인된 두루마리를 펼 자가 없다. 이때 유대지파, 다윗의 뿌리이신 어린 양 예수께서 이 책을 취하게 되자.네 생물과 24 장로와 많은 천사들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경배한다(5:1-13).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이 천상의 보좌를 중심으로 네 생물과 24장로, 그리고 14만4천의 성도(= 흰 옷을 입은 허다한 무리)와 천사들이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다 (7: 9-12; 14:1-5). 

예수께서는 또한 시온산에 서있는 승리의 그리스도이시다 14:1-3).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의 그리스도이시다(14:14-16). 그는 흰 구름에 앉으시고, 금면류관을 쓰시고,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추수를 거두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음녀 바벨론 (14:8; 16:19; 17:5; 18:10) 인 이 세상을을 심판하신다. 

전투하는 영계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세계에서 전투하시는 용사로서 묘사된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16:13)와 싸우신다.
이들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이라 하는 곳에 집결한다(16:16).
마지막 전쟁에서도 음녀 바벨론과 세 더러운 영과 온 왕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나지 큰 세력을 얻지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16:15) 이 대적들을 무찌르실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19:19-20:10). 

요한 계시록이 쓰여 질 당시는 AD 95년경으로 사도 요한은 죄수형에 처해져서 외딴 섬인 페트모스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로마의 11대 황제인 도미티안은 기독교인들을 대대적으로 핍박하면서 교회들은 큰 위기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갔고, 때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겪어야만 했고 순교의 길을 가야만 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함으로서 믿음이 연약해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격력하면서 참된 소망과 믿음을 갖도록 그래서 교회가 인내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주신 성경이 바로 요한 계시록입 것입니다.
그래서 1장 3절의 말씀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만왕의 왕으로서 온 세상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록을 통하여 만왕의 왕이신 영광스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의 축복이 더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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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하는가? 


이 질문이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하면 주님의 오심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로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을 그들의 메시야로 믿지 않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며 언제까지 주님을 영접하지 않을 것이며 언제가 되면 예수님을 그들의 메시야로 영접하게 될 것이며 그 때가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방인들을 일정기간 동안 구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남유다인들의 강퍅함과 우상숭배와 죄에서 돌이키지 않은 그 상태를 하나님의 인류구속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 6장에서 말씀하시는 이 말씀은 예수님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사야서 6장의 이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3:13, 14마가복음4:12, 누가복음 8:12요한복음 12:40절입니다.

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을 감기고, 귀를 막으며 마음을 둔하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셨는데도 메시야로 깨닫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도행전 28:26-28절에서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했습니다.

 

바울사도가 사도행전 28:26-28에서 이사야서 6장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로 귀머거리, 당달봉사로 만든 것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 했습니다. 또한 로마서 11: 7-13, ...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게 하신 것은 그들로 믿지 않게 하는 동안 이방인의 정한 숫자가 차기 까지 유대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11: 25-26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언제 돌아 올 것인가?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묻기를 언제까지 이스라엘백성들의 눈이 감기게 될 것인가하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사야서 6: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AD 70년에 유다가 로마군대에 예루살렘이 훼파되고 사람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 갈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훼파되면서 로마군대에 의해 이스라엘백성들은 나라에서 쫓겨나 수 천년 동안 지나는 동안에 이스라엘 땅은 황폐하고 집들은 사람이 없고 토지는 황폐하게 될 때까지 그들의 눈이 감기게 되리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쫓겨 났던 자들이 돌아와 1948년에 나라를 재건하고 이방인들에게 짓밟혔던 예루살렘이 다시 유대인들에게 돌아오고 들에 다시 곡식들이 자라고 집들이 다시 들어서게 되고 쫓겨났던 자들이 다시 돌아오고 주민이 다시 살게 될 때는 그들의 눈이 다시 밝혀 질 것이란 말씀입니다. 

이 성경말씀들이 오늘날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들이 죽였던 예수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였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그들의 메시야로 인정해 가고 있는 시기입니다.

이제 이사야서 6:10마태복음 13:14-16의 저주가 풀렸기 때문에 이스라엘백성들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 예수님이 그들의 메시야이심을 깨닫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사야 6: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마태복음 13:14-16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그러므로 우리 세대에 수 없이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대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라 했는데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 종족이 수년내로 종결될 것입니다.
지구 상에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는 지상명령이 성취 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전도 종족들은 복음을 잘 받아 들이는데 비해서 이미 복음을 받아 들인 지역에서의 복음사역은 거의 제로 상태입니다.
전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개척이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그리고 주님께서 오시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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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기록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기록입니다.

계시록의 핵심은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선언은 전 우주적인 선언이고, 역사적 생명적 선언입니다.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은 세상의 윤리나 도덕 정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사상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재림 신앙은 생명이 있기에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복음 증거 때문에 유배되어 있던 밧모 섬에서 본 환상을 기록한 계시록의 초반부입니다.
요한은 주의 날(일요일)에 성령에 감동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매우 엄중한 목소리로 요한이 보는 것을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써서 보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의 주인공을 알아보려고 뒤로 돌이켰고, 거기 일곱 금 촛대를 보았고, 촛대 사이로 부활하신 예수님 즉 이제 곧 재림하실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여기 ‘일곱 금 촛대’는 구약 스가랴서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반면에(슥 4:2), 본문에서는 수신자들인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나아가 전세계의 보편적인 모든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이 생생하게 묘사하는 재림 예수님의 모습에 관한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은 은혜와 사랑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촛대 사이에 계심(종말교회에 임재, 교회 사랑하심)

13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

요한이 일곱 금 촛대를 보았을 때 그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매우 의도적으로 자신이 발견한 이를 ‘인자 같은 이’(호모이운 휘온 안드로푸)라고 묘사했는데, 이 표현의 출처는 구약 다니엘 7:13절이 분명합니다. 
 
단 7: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요한은 다니엘서의 환상으로부터 ‘인자 같은 이’란 표현을 차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인자 같은 이’를 장차 오실 메시야를 가리키는 데 사용하고 있으나, 사도 요한은 이미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거쳐 승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1:18에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 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이분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합니다.

성도 여러분! 요한의 눈에 들어온 예수님의 모습은 ‘촛대 사이에’ 운행하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종말 교회에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촛대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장식용입니까? 고풍스런 자태를 뽐내면서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촛대 본연의 역할입니까? 아닙니다. 
 
촛대는 빛을 비추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그러느로 교회의 사명은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어떤 빛입니까?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입니다(요 8:12, 빌 2:15). 

성경은 본문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촛대 사이에 예수님이 거니신다는 것은 재림 예수께서 이처럼 귀한 사명을 가진 종말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건지시고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재림 예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고 중히 여기시는 교회는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행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자기피로 사신 교회’ 라고 했습니다. 재림 예수님은 이 귀한 교회를 붙들고 계시고 교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우리는 교회가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가슴으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또한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고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라고 말씀합니다.  
 
엡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고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제자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천국 열쇠를 주시며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며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주님의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받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곳을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오직 천국 열쇠를 쥐고 있는 교회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재림 예수님은 교회 촛대 가운데 서 계십니다. 자신의 피를 뿌려 세운 교회, 그 교회를 지키시며 키워오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 교회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주의 종들을 붙들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성도는 행복한 분입니다. 할렐루야!

발에 끌리는 옷을 착용하심(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권위와 위엄 상징)

13절=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

‘발에 끌리는 옷’은 ‘발에까지 치렁치렁 끌리는 긴 옷’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이곳에서만 사용되었는데, 구약의 여러 용법을 보면(출 28:4, 29:5, 겔 9:2, 단 10:5 등) 이것은 제사장들이 착용한 예복으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그의 권위와 위엄을 시사합니다. 

그 해의 대제사장은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만나러 지성소에 나아갑니다. 그가 만일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 즉시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의 모습은 예수께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 앞에 나갈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재림 예수님은 발에 끌리는 대제사장의 옷을 입고 계십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나같이 흉측한 죄인을 대속하여 주실 대제사장으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도저히 나아갈 수 없는 실패자이지만 주님이 대제사장 되어 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사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다는 사실은 특히 당시 극심한 박해 가운데 있던 성도들에게 더 큰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신앙의 위기에서 느끼는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겠습니까? 두려움과 고독이 아니겠습니까? 

죄인의 신분으로 유배된 요한에게 예수님이 보이셨듯이, 주님은 일곱 교회 곧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대제사장이란 사실입니다.  
 
위기의 상황이 와서 ‘나는 혼자다’라고 느낄 때도 성도 곁에는 대제사장이 계신다는 것이며 그 대제사장은 그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흑인 인권을 위해 목숨을 바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7년 11월 5일 에버니저 교회에서 전한 말씀을 되새기는 것은 의미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필요하다면 감옥에 갈 때도 있겠지만 그곳에서도 혼자가 아닙니다. 옳은 것을 위해서 분연히 일어서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고 비난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는 아닙니다 ··· 저는 번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천둥 소리도 들었습니다. 범법자들이 위세당당하게 걸어다니면서 제 영혼을 정복하려 들때마다 저는 계속해서 싸우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주님은 절대로, 절대로, 저를 혼자 남겨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그로부터 우리는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영혼의 지진이 일어납니다. 주님을 알게 될 때 산보다 높은 파도가 몰아치고 폭풍우와 같은 은혜와 감격이 여러분의 영혼을 휘감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심(권세를 가지신 메시야)


 
13절= “···가슴에 금띠를 띠고··· ”

촛대 사이에 있는 인자 같은 이는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이 묘사는 다니엘 10:5절과 연관된 듯 보입니다.
  
단 10:5=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가슴에 금띠를 띠었다는 것은 왕의 예복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권세를 가지신 메시야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초림 예수님은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셨지만, 재림 예수님은 가슴에 금띠를 띤 통치자로 오십니다. 

왕은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하며 먹이고, 적군과의 전투에 총책임자입니다. 이것은 재림 예수님이 새하늘과 새땅에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악한 마귀의 모든 세력을 심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 종말의 때 재림 예수님은 어떤 환난과 마귀의 미혹 가운데서도 가슴에 금띠를 띠고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왕으로 오실 예수님, 우리를 보호해 주실 예수님 생각만 하여도 심장이 뜁니다. 주님이 계신데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주님이 이제 왕으로 속히 오실텐데, 내가 어찌 주님을 배반하거나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십시오. 특히 계시록에서 재림 예수님의 왕적인 모습을 만나보십시오. 만왕의 왕이신 재림 예수님이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우리 곁으로 오십니다.  
 
그분에게 지금 여러분의 삶을 모두 맡겨보십시오. 그분만을 여러분의 유일한 구주요 주님으로 영접하십시오.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음(거룩한 승리자)

 
14절=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

본문 이하 16절에서는 요한의 눈에 비친 예수 그리스도의 인상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머리에 대한 묘사에 집중됩니다.  
 
여기 ‘그 머리와 털’이란 말은 ‘머리와 털’로 양분된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머리 곧 그의 털’이란 의미로서 다니엘 7:9절에서 인용한 표현입니다. 

거기서 다니엘은 옛적부터 계신 이의 머리털이 ‘깨끗한 양의 털 같고’ 옷은 ‘희기가 눈 같다‘ 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던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곧 그의 털‘을 묘사하는 데에 적용되었습니다. 이로써 요한은 자신이 목도한 승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이심을 드러냅니다. 

머리털이 흰 것은 상징적으로 지혜와 위엄을 의미하며(레 19:32),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결과 영원성 혹은 그의 영원하신 신성을 나타냅니다(사 1:18). 즉 재림 예수님은 거룩한 승리자로 우리 곁으로 오십니다. 다시는 눈물이 없고 다시는 곡하는 것이 없는 영원한 승리를 우리에게 안겨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죄와 싸우고 허물로 인하여 고통받고 살아 왔습니까? 그러나 주님 재림하시면 더 이상 죄악으로 인하여 고통받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의 성결로 우리의 죄악도 감추어지고 거룩한 몸으로 변하여질 것을 생각하면 그저 두 볼에 뜨거운 눈물만 흘러내릴 뿐입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밤낮 쉬지 않고 노래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계 4:8=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 

재림 예수님의 거룩은 단순히 악한 세상과 구별되는 차원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거룩은 세상의 어느 것도 비견할 수 없는 완전한 의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 성도들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시대에 성막과 거기에 사용되던 모든 기구들이 다른 물건과 뚜렷하게 구별되던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모든 세속적인 관습으로부터의 분리요 영원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은 거룩한 분리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상의 탐심과 욕정의 쓰레게 더미 속에서 딩굴고 있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우리는 속히 죄악의 동굴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성경은 거룩하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제 곧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흠도 티도 없는 순결한 모습으로 그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은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을 가진 우리는 행복한 자입니다!.

눈이 불꽃 같음(공의의 눈, 그리스도의 심판)


 
14절= “···그의 눈은 불꽃 같고”

요한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대한 묘사로부터 그의 눈에 대한 묘사로 옮겨 갑니다. 그의 눈은 ‘불꽃’ 같습니다. 이것은 다니엘 10:6을 반영한 것으로 그분의 전지성을 나타냅니다.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

불꽃 같은 주님의 눈은 모든 악을 꿰뚫어 아시는 날카로운 공의 눈을 상징하며 아울러 승리로 재림하실 그리스도의 심판을 보여줍니다. 불의에 대하여는 남김없이 심판하시고 구원받는 자들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보호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나타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재림 예수님은 악의 세력을 심판하실 그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주님은 지금 예배하러 나오신 여러분의 얼굴을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십니다. 예배드릴 때는 주님이 여러분의 얼굴 표정 하나까지도 살피신다고 생각하고 마음 자세 뿐 아니라 얼굴 표정을 갖추어야 합니다. 목사나 주위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보여야 합니다.  

예수 진리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일시적인 것이요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입니다. 사랑하는 남편도 떠나고 자식도 떠나고 친구도 떠나지만 예수님만은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 해 주십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주시는 예수님을 붙들고 승리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악의 권세를 이긴 자들입니다. 재림 예수님은 반드시 악을 그대로 두시지 않고 불꽃같은 눈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을 발견하는 보물 창고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사상을 가지고 예수님을 천 번 이야기 한다 해도 어떤 영적인 생명과 감동을 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본문의 의도가 파헤쳐질 때 생명이요 진리요 구속의 세계가 열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재림하실 예수님은 교회에 임재하시고 교회를 목숨처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금띠를 띠고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마귀와 적그리스도,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모든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아마겟돈의 승리자이십니다.
  
거룩한 승리자 예수님은 우리를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계시록은 말씀을 사모하는 모든 이들을 이 예수님을 소망하는 자리로 인도합니다. 계시록의 말씀은 구절구절이 재림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고, 본문의 의도를 찾는 자들로 하여금 재림 예수님을 사모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교회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붙듭시다. 우리는 죽더라도 교회에 나와 죽을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교회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떠나면 물을 떠난 물고기처럼 영혼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불 속에서 끄집어 낸 장작은 이내 불이 꺼져버리고 맙니다. 주님이 임재하시는 교회를 통하여 이 어두운 시대에 생명의 길로 인도함을 받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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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품격(The Person of Christ) :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동일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다음의 네 가지 방향으로 표현합니다.

1) 이름의 공유
계시록에는 하나님의 두 가지 선언들과 그리스도의 자기 선언들의 패턴이 있습니다.

• 하나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1:8).
• 그리스도: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17b-18).
• 하나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21:6).
• 그리스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22:13).

이를 좀 더 분석해 보면, 1:8의 하나님의 자기 선언이 신적 주권을 통하여 만물을 지배하는 권능을 진술하고 있는데 반해, 1:17-18의 그리스도의 자기 선언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얻게 된 사망과 음부에 대한 권세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라는 신적 명칭의 본질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 공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의 공유가 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 패턴으로 교차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종말론적 만물 완성 모두에 신적 행위자로서 그리스도를 포함시킬 뿐 아니라, 이름의 공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신 것을 매우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에서 “처음과 나중”이라는 명칭은 배타적인 유일신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사 44:6).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그리스도가 자기의 정체를 선언하는 데 이 명칭을 쓴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름의 공유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물의 유일한 근원이시고 목적이 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안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
계시록에서 예배의 중요성을 의식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예배드려져야 합니다. 19:10과 22:8-9에서 요한은 자기에게 계시를 전하는 천사에게 엎드려 절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강력하게 만류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해야 한다고 합니다. 천사는 예배의 대상이 아니며 단지 계시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계시의 근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22:16).

계시록 전체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명백히 하나님과 함께 예배를 받는 분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과 천천의 천사들과 온 세상이 예수를 예배합니다. 예수를 예배하는 것은 유일신적 예배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하나뿐인 하나님의 존재에 예수가 포함된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4장에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자로 인정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4:11). 5장에서는 어린 양, 즉 그리스도가 신적 보좌 위에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5:6, 7:17). 어린 양은 하늘에서 예배 무리의 중심이 되면서, 동시에 생물들과 장로들의 경배를 받고 있습니다(5:8). 그런 다음, 그 무리는 무수한 천사들이 참가하면서 확대되는데 그 예배의 형태(5:12)가 분명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과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4:11).

마지막으로 예배의 무리는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기까지 확대되면서 하나님과 어린양께 영광송을 부릅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보여 주는 장면에서 어린양의 예배(5:8-12)가 하나님과 어린양을 함께 예배하는 것으로(5:13) 이어지도록 구성되어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이러한 일련의 장면 묘사를 통해, 요한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함께 나누는 존재로서 나타내려 한 것은 명백합니다. 그리스도는 신적인 예배를 받으실 만합니다. 그에게 드리는 예배는 하나뿐인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cf. 빌 2:11).

3) 특이한 문법 사용
계시록에서 사용된 특이한 문법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같이 언급될 때 단수 동사(11:15) 또는 단수 대명사(22:3f, 6:17)가 쓰입니다. 요한은 그런 경우 절대로 복수 대명사를 주어로 사용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함께 지칭할 때에도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함께 언급할 때 단수 동사 및 단수 대명사를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한 분이심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요한의 이러한 문법 사용의 일관성은 그가 기독론의 유일신 사상과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연구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유일의 신적 존재에 포함함에 있어, 요한은 후대의 기독교 신학자들처럼 추상적인 개념들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헬라의 철학을 사용한다든지, 다른 유대 기독교인들처럼 하나님의 지혜의 개념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학적인 숙어는 매우 독특하게 달랐는데, 그는 묵시적인 신적 보좌, 예배의 이미지, 문법의 조심스러운 사용, 문학적인 연결과 구조 등을 통하여 철학자라기보다는 문학적 예술가로서 신학적 표현을 많이 한 것입니다.

4)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동일시
계시록에서 하나님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1:4, 4:8). 하나님께서 종말에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구원과 심판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오심”은 그의 창조에 대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예수의 오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오심의 소망과 경고가 계시록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1:7, 2:5,16, 3:3,11, 16:15, 22:7,12,20). “나는 오리라”는 그리스도의 선언이 총7회에 걸쳐 반복된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가 오실 때 하는 심판은 곧 하나님의 심판입니다(22:12, 사 40:10, 62:11).

만약 재림 때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심판이 신적 심판이라면, 계시록 신학의 중심 주제인 그의 희생적 죽음에 관해서도 같은 말이 쓰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이 하는 일이라면,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도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행위라고 보야야 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하늘의 보좌 가운데 있는 것”이 보일 때,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는 방법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 이”로서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고통당함으로써 정복하신 어린양으로서 이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거와 희생적 죽음은 사실 하나님의 악의 정복과 그의 왕국을 땅위에 구현하는 데 있어서 열쇠가 되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심판들 이상으로 하나님의 땅위의 통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증거와 희생을 계속 수행하고 있는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촛대 사이를 걸어 다니는, 1:13, 2:1)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인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스도와 교회의 메시아적 전쟁과 승리

1) 그리스도 이름 사용의 통계
(A) 예수: 우선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스도의 인성이 강조됩니다. 계시록에는 “에수”라고 하는 인간으로서의 이름이 14회 등장합니다. 그 중에 일곱 번은 “예수의 증거”(1:2, 12:17, 17:6, 19:10/2회, 20:4)와 관련된 구절에 나타납니다. 예수가 증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예수의 인성과 관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증거하셨고 또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도 이 증거를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 한편,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7회 나옵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의 헬라어로의 문자적 번역으로서, 이 말이 나올 때마다 예수께서 다윗 왕국의 메시아에 대한 유대적 희망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셈입니다.
(C) 어린양: 또한, “어린양”이라는 말이 28회(7x4) 나옵니다. 여기서 일곱은 완전수이며, 넷은 온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 중에서 일곱 번이 하나님과 어린양이 나란히 병행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5:13, 6:16, 7:10, 14:4, 21:22, 22:1,3). “4”는 요한계시록에서 “7”다음으로 가장 보편적이고 일관성있게 사용되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7”이 완전수인 것처럼, “4”는 온 세상을 뜻하는 숫자입니다(땅, 네 모퉁이, 네 구역-5:13, 7:1, 14:7, 20:8). 세 심판 시리즈 중 일곱 재앙들 가운데 처음 네 가지의 심판들은 이 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이 28회(7x4) 나타나는 것은 그의 승리 및 구속 사역이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이루어진 완전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만국의 열방을 4중적으로 표현하며 이것을 일곱 번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사역의 세 가지 중요한 모티브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역할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즉, 사탄의 지배 하에 있는 이 세상 나라를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로 바꾸는 것입니다(11:15). 이것은 구원 사역인 동시에 심판 사역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과 죽음으로 시작되었다가 그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의 연속적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는 결정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승리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성취한 승리는 결정적인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의 승리는 현재 그를 따르는 무리들(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계속되고 장차 있을 그의 재림때 완성될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재림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3단계(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 모두에 적용된 세 가지 중요한 상징적 주제들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메시아 전쟁, 출애굽, 증인들의 싸움입니다.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요한계시록에서 합성되어 나타나는 중요한 그림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3단계 모두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A) 메시아 전쟁-유다 지파의 시작
이것은 유대적 다윗 왕국의 메시아주의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적들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합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는 군사적인 정복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그의 승리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민족적 개념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는 여전히 악에 대한 승리인데, 영적인 영역에서뿐 아니라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세상의 권력들에 맞서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구현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구약의 핵심 본문은 시편 2편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와 그가 기름부은 자”를 대적하기 위해 공모하는 “민족들”과 “세상의 군왕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1-2절). 그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인데(7절), 하나님께서는 그를 거룩한 산 시온에 왕으로 세우시고(6절), 그곳에서 대적하는 열방들을 무찌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제왕적 메시아에게 열방을 유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8절), 철장으로 대적들을 깨뜨리게 하십니다(9절).

요한계시록에서는 열방에 대한 메시아의 승리를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이 빈번하게 나옵니다(2:18, 11:15, 12:5, 14:1, 16:14, 19:15). 또한 요한은 메시아의 승리를 함께 나눌 메시아의 군대에 관해서도 부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시 2편으로부터 “세상의 군왕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며 종국에 가서는 그리스도에 의해 정복될 정치적 권력을 지칭하는 표준적인 용어로 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투적인 메시아 사상을 위하여 요한계시록은 “정복”이라는 주요한 개념을 메시아(3:21, 5:5, 17:14)에게뿐 아니라 그의 백성들에게도 확대하여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전쟁 또는 싸움과 관련된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기게 하리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세 단계에 공히 사용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도 마지막 날이 이르기 전에 승리하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아 전쟁의 표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전체적인 과정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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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A. 기록자와 수신자
사도 요한(1:1, 4, 9, 22:8)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에게 보내는 회람 서신.

B. 기록 연대
A.D. 90-96년 경.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말기에 쓰여진 서신으로 이때는 이미 네로의 박해(A.D. 64년)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고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하였으며, A.D. 70년에 로마의 장군 디도(티투스)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고, 예루살렘 교회도 핍박을 받아서 요단 강 건너편 필라로 이전되었으며, 요한을 제외한 예수님의 직제자가 모두 순교 당한 후로서 도미티안 황제가 황제 숭배를 강요하여 기독교인들이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C. 주제,‘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찬가’
본서는 예언의 말씀을 기록한 책으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을 반대하는 사단의 시도(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가 반복되고 그 수위가 증가할 것이나 결국 악의 세력(로마 제국 등)이 진멸되고,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믿음을 지킨 성도(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신부로 불리움을 받은 성도)들은 구원받게 되며, 백보좌 심판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새 예루살렘)이 성취될 것을 선언하는, 위로와 소망으로 가득 찬 메시지.

D. 기록 목적
핍박을 받는 성도(교회)에게 모든 환란과 재앙이 지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인 하나님의 나라(새 예루살렘, 천상적 교회의 정체성)를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E. 특징
1) 기록자가 사도 요한임을 알려 주는 본서와 요한의 다른 성경과의 유사성.
(1) 로고스라는 용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킵니다(계 19:13, 요 1:1이하, 요일 1:1).
(2) 어린 양이란 용어를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합니다(계 5:6,12, 13:8, 21:22, 요 1:29).
(3) 그리스도께서 태초 이전에도 존재하신 분(요 1:1 이하)이라는 것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는 것은 동일한 사상적 흐름을 보여 줍니다(참고, 계 1:8, 17).
(4) 구원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것임을 강조합니다(계 7:14, 12:11, 21:6, 22:17, 요 1:29, 3:3, 5:24, 10:10-11).

2) 수신자가 교회 전체(모든 세대의 신자들)임을 가리키는 사실들
(1) 사도 요한 당시의 교회가 받은 환란은 모든 세대의 교회들이 당하고 이겨내야 할 환란의 예표이며(딤후 3:12), 환란의 절정은 그리스도 재림 직전에 있을 것입니다(마 24:29-31).
(2) 본서의 인 재앙, 나팔 재앙, 대접 재앙은 특정 기간에만 일어날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실현될 광범위한 사건들입니다.
(3) 본서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전체 교회를 대표하며,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은 모든 세대의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과 책망과 위로입니다.
(4) 본서는 시대를 초월하여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3)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22:18상)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 상징, 묵시문학, 서신, 예언서를 특성으로 하는 계시록은 문학적으로 읽어야 하며, 예언의 책으로서 미래적인 예언(豫言)으로서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선지자적 예언(預言)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이필찬,『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4) 계시록은 구약에 배경을 두고 있으므로 다니엘, 이사야, 예레미야, 스가랴, 요엘 등의 선지서를 잘 살펴보아야 하며, 계시록 404구절 중에 278구절이 구약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F. 요한계시록을 여는 Key Word
1) 요한계시록의 문자적 의미의 오용 방지
요한계시록은 초대 교회 시대에 핍박 받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성도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믿음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요한에 의하여 쓰인 편지입니다. 이러한 서간문의 특징에서 주는 사람과 받는 대상을 제하여 버리고 본문의 내용을 확대 해석하여 영적이나 사회적으로 적용해선 안 됩니다. 예를 들어, 7년 환란을 잘못 적용한다든지, 144,000이나 666의 숫자를 잘못 해석해서 오용해서는 안 되며, 짐승의 표를 받은 자도(19:20)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은 성도(7:4)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2) 요한 계시록의 숫자 이해
‘1’ 절대를 상징하고 분열되지 아니한 온전한 수로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심을 의미합니다.
‘3 1/2’ 삼 일 반, 한때 두때 반때와 같이 완전 수 일곱의 반을 의미할 경우에는 불완전과 짧은 기간을 나타내기도 하며, 42개월(11:2, 13:5), 1,260일(11:3, 12:6)과 동일시하여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이 세상에서의 삶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4’ 수량을 나타내는 땅의 수로서 네 생물(6:8, 7:11 등), 땅의 네 모퉁이(7:1) 등 가시적인 피조물을 상징합니다.
‘7’ 완전을 상징하는 수이며 일곱 교회(1:11, 1;20 등), 일곱 금 촛대(1:20, 2:1), 일곱 별(1:16, 1:20, 2:1, 3:1), 일곱 영(3:1, 4:5), 일곱 등불(4:5), 일곱 눈(5:6), 일곱 천사, 일곱 재앙, 일곱 인, 일곱 대접, 일곱 나팔 등, 7은 3+4. 즉 천지의 합수로 신적인 세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일곱 뿔(5:6)은 어린 양의 위용을 나타내고, 일곱 머리(12:3, 13:1, 17:3, 17:9), 일곱 산(17:9)과 일곱 면류관(12:3)은 사단의 왕으로서의 용을 나타내며 그 권세가 큰 것을 의미합니다.
‘10’ 세상의 만수로서 세상에서는 10을 한 주기의 끝으로 보며 제한된 완벽함을 상징합니다.
예, 열흘 동안의 환란(2:10), 열 뿔(12:3, 13:1, 17:12, 17:16), 열 왕(17:12), 열 면류관(13:1) 등.
‘12’ 천지의 승수로서(3X4)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숫자, 전체 혹은 완전함을 상징하고, 구약에서는 12지파,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12사도로 대별됩니다. 예, 여자가 쓴 열두 별의 면류관(12:1), 열두 문(21:12), 열두 천사(21:12), 열두 기초석(21:14), 열두 가지 실과(22:2).
‘24’ 24는 12의 배수로 완전수를 강조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 24 장로(5:8 등)
‘666’ 13:18에 한번만 나오는데 상징일 경우에는 인간의 수, 세상적인 수, 마귀적인 수이며, 암호일 경우에는 네로를 상징한다고 합니다(참고, 13:16-18).
‘1,260’ 3년 반 혹은 42개월을 날수로 계산한 것이며 교회의 증거 기간이 제한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144,000’ 12 X 12 X 1,000으로 구원 받은 자의 숫자가 많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능히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도 표시되었습니다(참고 7:1-17, 14:1-5).

3) 하나님의 언약입니다(계 21-22장, 언약을 지킨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을 주제로 흘러가는데, 이 언약의 결론 부분으로 이 세상의 종말 시대에 믿는 자들(교회)이 여러 환란을 당한 후에, 십사만 사천 명, 흰옷을 입은 사람들, 두 증인, 주 안에서 죽은 성도(복 있는 자), 어린 양의 신부들로 표현되고 믿음을 잃지 않은 자들에게 새 하늘, 새 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믿는 자들과 함께 계시며(21:3), 구체적으로 우리들이 거하게 되는 새 예루살렘의 정경(21:9-21)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21:22-27)이 펼쳐집니다. 또한 이들에게 생명의 근원인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22:1-5)가 보여지며 그곳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있을 것(계 22:3)입니다. 이는 믿는 자들을 위한 약속이며(계 22:6), 창세기 3:18에 표현된 훼손된 자연의 회복이고, 창세기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로 회복된, 백성이 회복된 땅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는, 창조시의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완성)에 대한 약속이며, 창 17:7과 계 21:7은 성경 전체의 수미쌍관으로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G. 요한 계시록의 해석 방법
1) 과거적 해석법 : 본서의 내용을 사도 요한 당시의 초대교회와 로마 정권과의 투쟁을 묘사한 것으로 보며, 이미 다 성취되었다고 보는 견해로 그리스도를 포함한 미래에 대한 예언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2) 미래적 해석법 : 네 본 것(1장), 이제 있는 일(2-3장), 장차 될 일(4-22장)로 나누어 대부분의 내용이 미래에 성취될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3) 상징적 해석법 : 고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화적 해석법에서 시작한 것으로 본서의 내용은 선악의 투쟁사이며 결국 선이 승리하는 영적 원리를 제시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4) 역사적 해석법 : 본서의 내용을 사도 요한의 시대로부터 세계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모든 역사의 축도로 보는 견해로서, 본서의 내용을 교회사에만 적용할 것인가, 또는 일반 역사에 까지 확대할 것인가에 따라 두 견해로 나뉘며, 본서의 내용을 연대기적으로 해석하려는 위험이 따릅니다.

상기의 해석들은 어느 것도 완전하게 만족스럽지 않은데, 이 책의 묵시적 환상들은 최후의 심판과 승리가 여러 번에 걸쳐서 극적으로 소개되므로, 연속적인 사건들을 순서에 따라 묘사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심판과 승리의 모든 역사를 그 환상 속에서 여러 번 요약한 것으로, 어린 양과 용 사이의 전투로 보는 것입니다.

참고, 김세윤 교수는 요한계시록을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복음의 선포 양식”으로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주후 90년에 도미티아누스(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계시록의 중심장인 4장과 5장에는 하나님께서 어좌에 등극해 계시고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예배하고, 이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좌에 함께 앉아 계시고(하나님 우편)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과 모든 천사들과 온 세상으로부터 예배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사자로서 새 이스라엘의 십이지파에서 12,000명씩 모은 144,000명의 군대 그리고 순교자들과 함께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 사탄의 삼위일체 군대와 싸워 결국 승리하여 하나님 나라(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를 완성한다는 복음 선포 양식을 사용합니다(『신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131-132쪽).

본 요한계시록은 김세윤 교수의『요한계시록』과 이필찬 교수의『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그리고 존 스토트 목사의 『그리스도의 십자가』469-478쪽, 요한계시록’을 참고했습니다.

내용 요약

1. 1:1-8, 머리말
1) 1:1-2,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 싹난 지팡이, 신약 성경의 책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가장 명확하고 힘있게 증거하는 책은 요한 계시록입니다. 이 책은 도미티안 황제(81-96년) 치하에서 조직적으로 행하여진 교회에 대한 박해와 황제 숭배의 관행이 극심해 가는 시기에 묵시적인 형식(환상)에 따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가시적인 세상의 무대에서의 영적 싸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1:1의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와 22:6의 “보여 주시려고”는 수미쌍관으로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려고 쓴 글이지 감추려고 쓴 글이 아닙니다.

2) 1:3, 복이 있는 자(참고, 14:13, 16:15, 19:9, 20:6, 22:7, 14)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3) 1:4-7,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 싹난 지팡이, 장차 오실 이는 성부 하나님, 일곱 영(슥 4:1-14)은 성령 하나님 그리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성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며 이 특징들이 서로 교차되어 예수님이 하나님되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일곱 영은 성령의 완전성을 말하며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참고, 하나님, 2:8 상, 예수님, 1:5, 1:17-18).

* 싹난 지팡이, 창세기가 모든 만물의 시작(근원)을 말한다면 계시록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종말(끝)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작이시고 끝이시며 예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종말에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구원과 심판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하나님의 오심’ 은 그의 창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예수의 오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오심의 소망과 경고가 계시록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1:7, 2:5, 16, 3:3, 11, 16:15, 22:7, 12, 20). 그리고 “나는 오리라”는 그리스도의 선언이 모두 7회에 걸쳐 반복된 것을 주목해 보십시요(2:5, 16, 16, 3:11, 16:15, 22:7, 12, 20).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있을 심판, 곧 하나님은 심판입니다(22:12, 사 40:10, 62:11). –김세윤,『신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245-246쪽-

2. 1:9-3:22, 예수 그리스도(1:9-20)과 일곱 교회(2-3장)에 대하여
1) 1:9-20, 부활, 승귀하신 예수님
(1) 1: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2) 1:13-16,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2:1 하)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2:18)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2:12)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 싹난 지팡이, 일곱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구약의 제사장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참고, 4:3).

(3)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싹난 지팡이, 일곱 교회의 사자는 목사나 교역자를 가리킵니다.
이 책은 부활하시고 영화되셔서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기 위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땅의 임금들의 머리(1:5), 처음이요 나중인 자, 산 자”(1:17-18) 등의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관할(사탄의 세력)에 있는 아시아 지방의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가 등장합니다.

2) 2:1-3:22, 교회에 말씀하심
(1) 2:1-7, 에베소 교회 - 첫 사랑을 버린 교회
예수님의 호칭 : 2:1,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의 칭찬 : 2:2-3,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예수님의 책망 :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예수님의 권면 : 2:5상,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예수님의 경고 : 2:5하,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예수님의 약속 : 2: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2) 2:8-11, 서머나 교회 - 궁핍하지만 부요한 교회
예수님의 호칭 : 2:8,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히 13:8).
예수님의 칭찬 : 2:9상,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예수님의 책망 : 없음.
예수님의 권면 :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예수님의 경고 : 없음.
예수님의 약속 : 2:10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영생의 부활).
2:11,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영벌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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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사망, 천년왕국 후에 악인들이 부활하여 영원한 불의 심판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계 20:10, 21:8). 이는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 즉 이 땅에서의 삶의 끝을 말하는 첫 번째 사망과 구별됩니다. 둘째 사망 때에는 무저갱에서 놓여 나온 사탄이 최후 발악을 하여 하나님께 대항한 후 영원한 불못으로 던지우게 될 것이며 거룩한 자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둘째 사망을 겪지 않게 됩니다(계 20:6). 요한계시록 20:14은 둘째 사망을 ‘불못’이라고 했는데 악의 세력의 종결을 의미하고, 이것을 랍비의 글들과 신약에서는 '영원한 형벌' 또는 '영원한 지옥'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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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12-17, 버가모 교회 - 이단을 용납한 교회
예수님의 호칭 : 2;12,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의 칭찬 : 2:13,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의 책망 : 2:14-15,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예수님의 권면 : 2:16상, 회개하라.
예수님의 경고 : 2:16하,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예수님의 약속 : 2;1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4) 2:18-29, 두아디라 교회, - 자칭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한 교회
예수님의 호칭 : 2;18,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예수님의 칭찬 ;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예수님의 책망 : 2:20,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예수님의 권면 : 2;25,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예수님의 경고 : 2:22-23, 27,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예수님의 약속 : 2;26, 28,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5) 3:1-6, 사데 교회 – 살았다 하나 죽은 교회
예수님의 호칭 : 3:1,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
예수님의 칭찬 :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예수님의 책망; 3: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예수님의 권면 : 3:2, 3,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예수님의 경고 : 3:3,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약속 :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3:7-18, 빌라델피아 교회 - 연약하나 말씀을 지킨 교회
예수님의 호칭 : 3:7,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추상적인 표현).
예수님의 칭찬 : 3:8, 10,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예수님의 책망 : 없음.
예수님의 권면 : 3;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예수님의 경고 : 없음.
예수님의 약속 :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

(7) 3:14-22, 라오디게아 교회 - 부요하지만 가난한 교회
예수님의 호칭 : 3:14,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추상적인 표현).
예수님의 칭찬 : 없음.
예수님의 책망 ; 3:15,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예수님의 권면 : 3:18,19,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예수님의 경고 : 3;16,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예수님의 약속 : 3:20, 21,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 싹난 지팡이, 구약과 신약에서 공히 사용된 아멘(3:14)은 ‘그렇게 되소서, 정말로 그렇습니다, 진실로’ 라고 번역되는 동의와 인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계 22:21).

일곱 교회에게 말씀하심, 소아시아 일곱 개의 교회들에게 예수님께서 약속으로 부탁하신 것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여 천상 교회 공동체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은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기간 동안에 지상의 교회들이 당면한 과제입니다(참고 12장, 영적 전투). 구체적으로 각 각의 편지는 “이기는 그”에 대한 약속으로 끝나는데 이는 땅 위의 교회들을 순회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좌정하여 사역하는 천상 사역으로 옮겨졌음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4장은 보좌가 중심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자와 어린 양으로 묘사됩니다.

3. 4:1-16:21, 재앙과 영적 전투
1) 4:1-5:13, 하늘의 성전 환상(성도들이 보게 될 천국의 모습을 먼저 제시합니다).

1-1) 4장, 하늘의 보좌
하나님과 이십사 장로 그리고 네 생물을 묘사하여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지고하신 존엄성과 하늘의 존재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음침한 사건들도 여전히 어린 양의 지배하에 일어나는 사건들이며 어린 양이 이미 통치하고 있으며 그의 완전한 나라가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11:15-18).

4:1,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4:2-3, 하늘의 보좌,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5, 하나님의 일곱 영(완전한 성령), 보좌 앞의 일곱 등불,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 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1:4-6 참고).

* 싹난 지팡이, 4절과 5절의 순서를 바꾸면, 먼저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되고 하나님 주위에 24 장로가 앉아 있으며 네 생물과 더불어 24장로가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습이 좀 더 쉽게 설명됩니다.

4:4, 이십사 보좌와 이십사 장로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4:10-11).
4:6-9,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네 생물 :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 싹난 지팡이, 이 동물의 형상들은 에스겔이 환상 중에 하나님의 네 가지 형상을 보았던 것(겔 1:10)을 근거로 하고,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길을 행진할 때 들었던 네 개의 깃발에서 연유하며, 세상 모든 민족의 대표성을 말합니다. 다른 해석으로는 스랍(사 6:2)이나 그룹(겔 1:5-25, 10:1-22)으로 24장로나 천사들처럼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하늘의 존재들로 봅니다.

4:10-11,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십사 장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1-2) 5장, 일곱 인으로 인봉한 책
십자가의 사건으로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 그리고 일곱 인의 재앙(6장)을 받지 않은 십사만 사천과 흰 옷을 입은 백성들(7장)과 죄에서 회복된 만물이(참고, 창 3:18) 어린 양을 찬양하며 복음의 승리를 노래하는 것을 미리 보여 줍니다.

(1) 5:1-7, 어린 양이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을 취함
5:1,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 인으로 봉한 책(겔 2:9-10).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슥 4:10).
5:7, 어린 양이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심.

* 싹난 지팡이, 책의 봉인이 떼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하나님 나라의 통치)이 펼쳐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책을 펼칠 수 없다는 것은 환란과 핍박을 받는 성도가 보호받을 수 없으며 악인들에 대한 심판도 없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전개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이 책을 취하여 봉인을 떼게 되며 모두들 어린 양을 찬양합니다(5:12).

(2) 5:8-14, 어린 양을 찬양함(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함)
5:9-10,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자기 희생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5:12, 네 생물, 이십사 장로, 많은 천사들이 찬양함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5:13, 모든 만물들이 찬양함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2) 6:1-7:17, 첫번째 전개될 일곱 인의 재앙과 환란
2-1) 6장, 어린 양이 떼는 일곱 인의 재앙
인 심판의 시리즈에서 처음 네 개와 나머지 세 개가 구별되는데, 처음 네 개는 5:8-14의 네 생물에 의하여 도입되고 있으며 각기 색깔이 다른 말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네 생물이 피조물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고 네 마리의 말은 슥1:8-11과 슥 6:1-8에서 기인합니다. 이 네 마리의 말은 하나님의 전령으로 열방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1) 6:1-2, 처음 인을 뗌
6:2,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 싹난 지팡이, 그 당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자들은 로마에 대항하는 파르티아인들로서 대단히 용감하고 위협적인 존재임을 비유한 것으로, 흰말은 열방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2) 6:3-4, 둘째 인을 뗌
6:4,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 싹난 지팡이, 붉은 말은 전쟁과 살육을 상징하며, 전쟁은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여졌습니다

(3) 6:5-6, 셋째 인을 뗌
6:5하-6,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 싹난 지팡이, 검은 말은 가난과 기근을 상징합니다.‘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는 평상시보다 여덟 배 비싼 가격이라고 하며 ‘감람유와 포도주를 해치 말라’고 한 것은 이러한 식용작물이 모자라므로 감람나무와 포도나무를 없애고 그곳에 밀 보리를 심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A.D. 92년 도미티안 황제가 곡식의 기경을 위하여 포도원의 반을 철거하도록 칙령을 내린 바가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을 심판의 심각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4) 6:7-8, 넷째 인을 뗌(참고, 사분의 일)
6: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 싹난 지팡이, 청황색 말은 사망을 가리키며, 검(전쟁)과 흉년과 사망(역병)에 의한 땅의 짐승들에 대한 죽음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언약적 저주의 결과를 의미하며, 이에 반대되는 개념은 사 11:6-9의 종말론적 축복으로 사람과 짐승 그리고 짐승과 짐승간의 화목한 상황을 말합니다.

(5) 6:9-11, 다섯째 인을 뗌
하나님의 공의와 주권을 위하여 순교자들을 죽인 자들을 처벌해 달라는 간구.
6:9하-11,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 싹난 지팡이, 다섯번째는 심판의 내용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성도들의 신원을 위한 간구이며,‘죽임 당한 수가 차기까지’라는 것은 마지막 시대의 종말론적 심판이 바로 쌓여진 순교자들의 신원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날 것을 의미합니다.

(6) 6:12-17, 여섯째 인을 뗌
진노의 큰 날이 임할 때에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이 이 땅에 가득 차게 됩니다.
6:12-17,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구원 받으리요) 하더라.

* 싹난 지팡이, 여섯째 심판의 영역은 땅과 우주로 확대되는데 큰 지진이 나고 해와 달과 별의 기능이 약화되는 것으로 이는 묵시적 심판의 표현(막 13:24-25, 나 24:29)이며,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우주적 질서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2-2) 7장,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삽입구, 첫번째 환란을 통과한 구원받은 백성)
7장은 첫째 재앙인 일곱 인의 재앙 중에 여섯째 인까지 뗀 후(6장), 일곱째인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광경으로(8-9장의 나팔의 재앙도 여섯째 나팔 후에 10장이 오는 같은 구조입니다). 이는 이제껏 재앙으로 멸망 당한 자들과 대조되는 구원받은 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 중생한 성도들은 용과 짐승(악의 세력)들과 영적 전투를 하게 되는데, 이 전투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표현됩니다. 여섯번째 인의 심판이 마무리되면서 이 싸움에서 이긴 성도들이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은 사람들(십사만 사천 명과 흰옷을 입은 무리)입니다.

(1) 7:1-8, 하나님의 백성,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계 14:1-5, 참고)
7:1-8, 땅의 네 모퉁이에 네 천사가 섰는데 그들은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가진 자들이라 그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진 다른 천사가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열두 지파에 각각 만이천 명씩을 십사만 사천 명이더라(참고로 단 지파는 빠져 있는데 그 이유는 특별히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 싹난 지팡이, 십사만 사천 명에 대한 해석(십사만 사천 명은 6:17 누가 능히 서리요,에 대한 대답입니다)
십사만 사천 명은 12지파의 12,000명씩 이스라엘 자손의 구약교회와 이방인의 교회를 포함하는 완전수(충만성)의 구원받은 성도를 의미하고 1,000은 구약시대의 군대 편재를 위한 한 부대의 최대 인원을 말합니다(참고, 숫자 풀이). 또한 이는 7:9-17의 수많은 무리(신약교회의 보편성)와 대비하여 구약교회의 특정성(선민으로서의 유대민족)을 말합니다.

(2) 7:9-17, 흰 옷을 입은 큰 무리
7:9-10,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7:11-12,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하더라).
7:13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7:14-17,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 싹난 지팡이, 흰옷을 입은 큰 무리,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9-14절)
이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성취로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백성이며(창 13:16, 15:5, 32:12) 승리한 자들로서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민족의 언어)으로 구성된 예수님의 피로 씻은 흰옷을 입은 셀 수 없는 무리(신약교회)들로서 하나님의 장막 안(지속적인 임재, 요 1:14)에서, 밤낮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15절), 세상의 광야에서 양육을 받은 진정한 출애굽을 성취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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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침을 받는다는 의미는
첫째, 봉한다는 의미로 내용물이 변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을 말한다.
둘째, 소유권을 말한다.
셋째, 그 내용이 진실하다는 것을 확증한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인을 치시고 구원하셔서 환난 중에 보호하시며 하나님의 자녀이심을 확증하십니다.
그리고,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19:20)는 반대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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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8:1-11:19, 두번째 전개될 일곱 나팔의 재앙과 환란
8-9장, 일곱 나팔의 재앙(일곱 인의 재앙과 일곱 나팔의 재앙은 자연계와 악인에게 심판이 집중됩니다)

3-1) 8:1-5, 일곱 나팔의 재앙의 전조
일곱 째 인을 떼실 때에,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았고, 다른 천사가 금향로(모든 성도들의 기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향연을 올립니다. 그리고 천사가 향로에 단위의 불을 담아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납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의 기도가 모아져서 하나님께 상달되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본격적인 나팔의 재앙이 시작됩니다.
8:2-3,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그 향은 성도들의 기도이더라.
8: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3-2) 8:6-9:21, 일곱 나팔의 재앙
8:6,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
(1) 8: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

(2) 8:8-9.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

(3) 8:10-11.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 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

(4) 8:12-13,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8:13).

* 싹난 지팡이, 이 같은 독수리의 외침은 처음 네 가지 나팔의 재앙보다 앞으로 남은 세 가지 나팔의 재앙이 더욱 가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5) 9:1-12,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9:1-3,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사단, 참고, 12:7-9)가 무저갱의 열쇠(지옥)를 받아서 저가 무저갱을 여니(참고, 20:3) 큰 화덕의 연기가 올라오고, 황충(참고, 9:7-11)이 전갈의 권세(지독한 고통을 주는 힘)를 가지고 나와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사람들을 해합니다.
9:4-6,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9:12,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첫째 화, 다섯째 나팔, 9:1-12 / 둘째 화, 여섯째 나팔, 9:13-21 / 셋째 화, 일곱째 나팔, 11:15-19)

(6) 9:13-21.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9: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9:16-19, 마병대의 환상(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인하여 사람이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합니다).
9:20-21, 여섯 번째 나팔로 인한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3-3) 10-11장, 천사와 두 증인(삽입구, 계시의 말씀과 교회)
여섯째 나팔이 끝나고 일곱째 나팔의 재앙 사이에 삽입된 내용(참고, 7:1-12)으로 10:1의 작은 책은 5:2의 책과 동일합니다. 이 책들이 인봉되어 열 수 없다는 것은 그 책이 열릴 때 밝혀질 구원 계획과 같은 신적 목적이나 비밀의 측면이 있음을 의미하고 요한이 그 책을 먹는 것(해석하고 깨닫게 되어)으로 연결되어 그 책(계시의 말씀)이 두 증인(세상의 모든 교회)에게 넘겨질 것을 의미합니다.

(1) 10:1-11, 천사
(1-1) 10:1-4, 힘센 다른 천사(참고, 5:2, 18:21)가 작은 책을 들고 외침.
4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고 하더라.

* 싹난 지팡이,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본서에 기록한 내용이 일부분에 지나지 않다는 것과 인봉한 부분에 대해서는 지나친 상상을 삼가고 신 29:29와 롬 11:33의 말씀을 깊이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신 29: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참고, 병행관계, 계 5:19 (겔 2:9-10), 계 10:9-10 (겔 3:1-3)

(1-2) 10:5-7, 일곱째 나팔의 재앙이 임할 때에 복음이 성취될 것을 천사가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함.
10:8-11, 요한이 천사의 손에 있었던 작은 책을 먹고 온 세상에 예언을 시작함(겔 3:1).

* 싹난 지팡이, 10:1-11에서 힘센 천사가 일곱째 나팔의 재앙까지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으며 그 전하는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을 말하고(2, 5절), 말씀을 받는 선지자와 사도의 사명감(11절)을 새롭게 하여 그 책(말씀)을 깊숙이 받아들이고 깨달으라는 의미의 환상을 보여 줍니다.

(2) 11:1-14, 성전 측량과 두 증인
11장은 10장과 함께 여섯 번째 나팔과 일곱 번째 나팔 심판 사이에 끼어 있는 계시로 이 세상의 교회는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2-1) 11:1-2, 지팡이 같은 갈대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영적인 해나 모든 재난으로 보호하여 주심), 성전 밖은 측량(보호)하지 말라고 하심(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 싹난 지팡이, 성전의 두 부분의 설명은 교회 공동체가 예언(말씀)의 사역을 감당할 때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지만 동시에 사단의 핍박으로 인한 고난이 주어질 것을 말합니다.

(2-2) 11:3-14, 두 증인
(2-2-1) 3-4절, 두 증인,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선지자와 부르심을 받은 성도, 교회 공동체)
나의 두 증인(슥 4:11-14)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 싹난 지팡이, 두 증인은 교회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둘이라는 숫자는 증거가 성립될 수 있는 최소한의 공동체 단위이며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전도하러 보내셨습니다(눅 10:10).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교회가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 존재할 것을 말합니다.

(2-2-2) 5-14절, 부활과 심판(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고 있음)
5절,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절,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절, 무저갱으로부터 오는 짐승과의 전쟁으로 두 증인(교회 공동체)이 죽음을 당함.
8-9절,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는 삼일 반 동안 방치됩니다.

* 싹난 지팡이, 저들의 시체가 삼일 반 동안을 장사 지내지 아니한 채로 있다(8-9절)는 말은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보다 더 심한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이나. 삼년 반 동안 왕적 제사장적인 사역을 감당하는 것으로 미루어(3-4절), 고난은 짧으나 영광은 길다는 것을 보여 주며, 이는 당시의 소아시아 교회에 가해졌던 박해와 고난에 대한 격려와 위로입니다.

11절,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부활하니).
12절,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13절,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의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14절,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여섯째 나팔 재앙이 지나갔다 함입니다.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일곱째 나팔 불 때에 환란이 연발될 것을 예고하여 성도들에게 깨어 연속적인 준비를 하라고 권고하는 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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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증인 이야기, 이 세상의 교회 공동체는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여야 하는가?
1. 배경
여섯 번째 나팔로 인한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며(9:20-21) 그리고 이러한 환경 하에서 고난을 당하는 교회 공동체를 말합니다.

2. 본론
1) 두 증인은 땅에 주님을 향하여 서 있는 두 촛대, 즉 교회 공동체를 의미합니다(11:1-6).
(1) 두 증인은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하게 하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2) 두 증인은 1,260일 동안 증거하는 삶을 통해 예언하게 하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3) 두 증인은 두 감람나무(슥 3-4장,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즉 기름부음을 받은 왕적이며 제사장적인 특성을 가집니다.
(4) 두 증인은 구약의 엘리야와 모세의 사역을 감당하므로 선지자적 특성을 가집니다.

2) 두 증인의 죽음(영적 전쟁에서 사단은 교회 공동체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습니다(7-9절).
두 증인이 증거를 다 마칠 때에(1,260일이 다 지나고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전쟁을 일으켜서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는 곳(예루살렘)에서 두 증인을 죽입니다. 그리고 저들의 시체는 큰 길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3)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9-12절)
모든 나라와 온 누리의 안 믿는 사람들은 두 증인을 장사 지내지 못하게 하지만 두 증인은 죽은 지 삼일 반 후에 부활하여 구름을 타고 승천합니다(예수님과 같은 방법).

4) 두 증인의 승천 후(13-15절)
(1) 세상 사람들은 회개하게 됩니다.
(2) 성의 십 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으로 죽은 사람은 칠천입니다(13절, 겔 39:9, 12,14, 완벽한 심판).
(3) 세상의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 것을 찬양합니다(14-15절).
(4) 믿는 자들을 대표하는 이십사 장로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며 일곱째 나팔의 재앙이 시작됩니다(16-19절). (이필찬 교수의 『요한 계시록 강의』두 증인 이야기)

참고, 계속되는 일곱 인의 재앙(사분의 일)과 일곱 대접의 재앙(삼분의 일)과는 대조적으로‘두 증인이 승천 후’에는 세상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므로 심판의 대상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성의 십분의 일).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는 말씀은 인치심을 받은 십사만 사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은 수이나 칠천이라는 의미는 7이라는 완전수에 1,000이라는 많은 수가 곱해져서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완벽한 심판을 나타냅니다(『싹난 지팡이 신약』3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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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1:15-19, 일곱 째 나팔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 - 천년 왕국과 새 하늘 과 새 땅, 21-22장)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리로다 하니(계 10:7, 하나님의 비밀, 『싹난 지팡이』사복음서 23쪽, 요한복음의 구원 참고).
11:16-17,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1:8, 4:8, ‘장차 오실 자’에서 바뀐 칭호)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1: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 싹난 지팡이, 일곱째 나팔을 불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나라가 되어 그리스도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라고 선포되며,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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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핵심은 십자가 복음"

“요한계시록 12장은 ‘하늘에서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그 주제는 ‘전투하는 교회’ 혹은 ‘영적인 전투의 판도를 읽자’이다. 그만큼 12장은 우리가 영적 전투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보여 준다. 지금 시대는 ‘영적으로 둔감한 시대’이다. 자본주의 때문에 물질주의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물질이 주는 편안함 때문에 물질을 추구하고 물질 중심의 사고 구조가 형성되면서 성경적 진리와 영적인 판도에 무관심해졌다. 12장은 영적으로 둔감해진 시대에 대한 성경의 답변이다”라고 강의를 시작했다.

이 박사는 “요한계시록의 중심 주제가 ‘교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어떻게 존재했으며, 지금 어떻게 존재하고 있고, 장차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시간적 순서로 나열한 재림 중심의 시나리오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그는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교회의 그림은 ‘승리하는 교회’와 ‘전투하는 교회’이며, 이 둘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이다. 그러나 두 모습에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다. 전투하는 교회는 현재의 모습이고, 승리하는 교회는 미래의 모습이다. 이 세상에 현존하는, 전투하는 교회의 본질은 승리하는 교회이다”라고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교회를 정의했다.

이 박사는 12장을 주해하면서 “12장 초반에는 두 가지 표적이 등장한다. 여기서 표적은 일어났거나 혹은 일어날 사건이나 사실을 이해하고 통찰력을 갖도록 도와 주는 지시자 역할을 한다. 1-2절에서 여인이 아들을 낳는 표적과 3절 이하에서 여인이 낳으려는 아들과 여인을 용이 쫓는 표적이 나온다. 두 표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표적에서 여인은 해를 입고, 달이 그 발 아래 있으며 열두 면류관을 쓰고 있다. 이 구절은 창세기 37장 9-10절을 그 배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인은 교회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해와 달과 별은 영광의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인은 영광스러운 교회를 가리킨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2절에 등장하는 아들은 ‘만국을 철장의 권세로 목자가 양을 치듯이 다스리실 것’(5절)이라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인이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구약의 교회(이스라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다는 뜻이다”라고 덧붙였다.

이 박사는 용에 대해 설명하면서 “용의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라는 표현은 다니엘서 7장 6-24절을 배경으로 한다. 다니엘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백성을 핍박하는 사단의 세력을 네 짐승으로 표현한다. 네 짐승의 머리를 합하면 일곱이며, 뿔이 열이다. 그러므로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용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 혹은 사단의 세력이다”라고 말했다.

5-6절에 대해서 이 박사는 “’아들이 보좌 앞으로 올라가자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여 1,260일을 있었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에 교회가 사단의 핍박을 피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양육의 처소에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출애굽 후의 광야 생활을 연상케 한다. 광야는 종말의 시대가 고난의 시대임을 암시한다. 성도들은 인생 광야에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다. 다니엘서 7장 25절과 다니엘서 12장 7절에 따르면, 1,260일은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기간을 뜻한다. 즉 종말 시대 전체를 뜻한다”라고 강조했다.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을 소개하는 7-12절에 대해 이 박사는 “다니엘서 10장 20-21절과 다니엘서 12장 1절에 따르면, 미가엘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사역을 대행하는 자로 메시야의 예표이다. 용과 그 사자들이 하늘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 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소하던 사단이 그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사단은 죄에 대한 권세를 상실하였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11절,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를 설명하면서 이 박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어린양의 피)와 복음(증거의 말씀)은 성도들이 사단의 세력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궁극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황제를 숭배하면, 즉 사단의 세력에 굴복한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생명을 걸고 순교하는 각오로 사단의 세력과 싸워야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된다. 그러므로 황제를 숭배하면, 즉 죄악에 굴복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예수님이 문 밖에서 두드린다’(계 3:20)는 말씀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메시지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미지근한 자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는 메시지가 주어졌다. 교회가 복음을 너무나 쉽고 편안한 내용으로 전하고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13-14절을 주해하면서 이 박사는 “ ‘땅으로 내어쫓긴 용이 여자를 핍박하고, 여자는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로 날아가 양육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사단이 교회를 핍박하지만, 교회가 하나님의 독수리 같은 구원의 능력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독수리같이 비상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15-17절에 대하여 이 박사는 “하늘에서 쭃겨난 용이 교회를 핍박하지만, 하나님은 교회를 철저하게 보호하신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요한계시록의 핵심 사상이다. 교회는 현재 땅에 있으면서 사단의 공격을 받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하고 하늘에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 가운데 있다. 마지막으로 17절은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세력 사이의 치열한 전쟁이 있을 것임을 예고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영적 전투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8주 과정이 너무 짧고 아쉽다. 12주 과정으로 늘렸으면 좋겠다. 6월에도 시카고에서 다시 강의를 해달라.” 는 등 아쉬움을 표했다.


다음은 이필찬 박사와의 인터뷰 요약이다.
-요한계시록연구소 사역은 언제 시작했는가?
2012년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대학을 그만두면서 시작했고,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요한계시록학교를 열게 된 계기는?
<요한 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성서유니온)를 출간한 후 한국교회의 현장을 접하게 되었고, 한국교회가 요한계시록에 대한 오해로 인해 열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자각 증세도 없이 심각한 열병을 앓고 있다는 점이 걱정스러웠다. 한편에서는 많은 거짓 선생들이 검증되지 않은 잘못된 내용이나 이미 잘못된 것으로 판명된 내용을 가르치면서 수많은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다.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인 성도들은 비뚜러진 세계관과 종말관을 지니게 되어 정상적인 영적 성장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연구소와 요한계시록학교를 준비하게 되었다.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때와 현재가 어떻게 다른가?
연구소 사역과 강연활 동을 하면서 나의 지평이 확대되었다. 수많은 지역 교회의 성도들을 만나면서 한국교회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게 되었다. 보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저서와 강연이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1999년 출간된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성서유니온)와 2006년에 출간된 <내가 속히 오리라>가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꾸준하게 읽히고 있다. 특히 <내가 속히 오리라>를 통해 요한계시록 설교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목회자들을 많이 만났다.

-‘신천지’나 이단적 종말론에 취약한 한국교회의 신학적 토양 덕분에 유명해진 것은 아닌가?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내 책이 요한계시록에 대한 새로운 시도이기 때문에 널리 알려진 것 같다. 잘못된 선입관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한편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재림에 대한 시나리오로 이해하고 있다. 나는 요한계시록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 승천을 모두 포괄하는 복음)을 중심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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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어떤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시나리오를 제공하는 책이 아니며, 문자적인 묘사에 압도당하기보다 그 속에서 메시지를 읽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상징들, 그림들을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것은 구약 체계에서 나오고, 근동의 신화에서 나오기도 하고, 헬라 신화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배경을 알아야 하고, 당시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 하며, 특히 요한 계시록 내의 구조적인 특징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Chapter 1. 역사적 배경

요한계시록은 주후 90년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황제 숭배 강요와 핍박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황화하여 선포한 것입니다. 계시록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선 계시록의 신학이 괸장히 상황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계시록에서 선포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역시 당시 로마 제국의 상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그 근저에는 로마 권력에 대한 비판의 정신이 깔려 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한편으로는 군사적인 정복으로 확립된 황제의 강력한 정치적 독재를, 또 한편으로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라는 Pax Romana(로마의 평화)를 통치 이데올로기의 두 기둥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두 상징들인 ‘짐승’과 ‘바벨론의 음녀’는 그러한 로마의 양면을 묘사합니다.

     1. Pax Romana의 유혹
계시록에는 음녀가 짐승을 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17:3). 왜냐하면 로마시의 번영과 영향력은 제국군대의 힘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음녀는 동시에 많은 물 위에 앉아 있으며 땅의 왕들과 음행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17:1,2). 이는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다스리되, 분봉왕들을 비롯한 지배계급의 협조를 받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제국내의 백성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제국의 이념에 의해 설득되었습니다.
즉 제국의 백성들이 로마의 통치에 잘 복종하면서 세금 잘 내고 법을 잘 지키고 살면, 로마는 강력한 힘으로 제국 백성들의 안녕을 지킬 것이고, 제국 내의 시민들에게 자유로운 무역을 통한 경제적 번영과 평화를 약속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가 제국의 백성들에게 강력하게 선전하였던 Pax Romana입니다. 마치 2차대전 당시 일본 제국이 대동아 공영권을 주창했던 것과 흡사합니다. 계시록은 이 팍스 로마나의 이념을 기만적인 환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2. 황제 숭배의 강요
요한계시록에서 짐승(로마 황제)은 거의 불사의 존재로 묘사됩니다. 짐승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서도 다시 회복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외칩니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며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13:4). 이는 구약의 모세의 노래에 나오는 하나님의 힘에 대한 송축을 빗댄 것으로(출 15:11), 로마가 무적의 힘을 가진 듯한 인상을 갖게 합니다. 당시 로마는 네로의 자살 이후 혼란스러운 네 황제의 시대를 거치면서 힘이 약화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플라비우스(Flavius) 왕조와 함께 제국의 권력은 붕괴 직전에서 회복되었습니다.
이 짐승이 하나님을 모독하며, 자기를 절대화하고,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종교적인 숭배와 충성을 요구합니다(13장). 요한이 계시록을 쓸 당시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주와 하나님’(dominus et deus)으로 부를 것을 강요하였으며, 그것으로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려 했습니다. 요한이 사역했던 아시아의 여러 곳에서도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들이 세워졌습니다. 황제 숭배는 종종 피지배자들의 자발적인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16장과 19장에서 거짓 선지자로 불리는 두 번째 짐승이자 땅의 짐승이 첫 번째 짐승인 바다 짐승의 형상을 세우고 그것에 예배를 강요함으로써 황제 숭배를 고무하는데, 이 두 번째 짐승은 아시아 지방 도시들의 지배자들로서 “제국 제사장” 노릇을 했던 자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황제를 ‘주’로 숭배하도록 하는 조치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과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사도적 복음의 깊고 절실한 상황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한은 로마 권력에 대해 철저한 선지자적 비판을 가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은 가장 강력한 정치적 항거의 문학입니다. 단지 로마가 기독교를 핍박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로마의 체제에서 스스로의 신앙적 정체성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전면적인 핍박은 아직 일어나고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순교들이 있었지만 핍박은 산발적이었고 지역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로마권력의 본질을 볼 때,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증거에 신실하다면, 로마의 신적 기만과 그들의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증거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충돌을 겪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에 항거하는 힘은 오직 한 분이신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나옵니다. 요한에게서 하나님께 대한 비전은 어느 무엇에도 비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속적인 권력 위에 계신 분입니다. 요한은 하나님과 하늘에 대한 환상에 비추어, 로마의 권력을 상대화시키고, 황제를 신격화하려는 로마의 기만을 폭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비추어 볼 때 로마의 압제와 착취는 정죄를 받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주권에 비추어 볼 때, 로마의 절대 권력 주장은 신성모독이며 그 독재적이고 불의한 통치도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Chapter 2. 책의 성격


1. 서신 형태로 보내진 묵시적 예언(1)
“계시록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의 저자는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책을 ‘계시’라고 합니다(1:1). ‘아포칼립시스’(apocalypsis)란 말은 ‘하늘에 감추어진 비밀’이란 말입니다. 비밀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말합니다. 바울도 이런 의미로 비밀이란 말을 쓰지요?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 11:25).
바울이 말한 비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곧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기까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악하게 된 것인데,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심판이 풀려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계획을 비밀이라고 합니다.

Chapter 2. 책의 성격

1. 서신 형태로 보내어진 묵시적 예언(2)
하늘에는 이 구원의 계획이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선지자나 묵시자에게 미리 보여 줍니다. ‘눈으로’, 혹은 ‘귀로’ 보여 줍니다. 그렇게 보여 준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그 계시가 앞으로 땅 위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앞으로 전개될 것을 미리 선포하는 것을 묵시, 곧 ‘아포칼립시스’라고 합니다.
두번째로, 저자는 이 책을 가리켜 ‘예언’이라고 합니다(1:3). 예언이라는 말은 공예배 때에 크게 읽혀지도록 교회에 주어지는 하나님 구원 계획의 계시이면서, 동시에 교회가 하나님의 이 구원 계획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 예언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습니까? 서신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발신자는 요한이고, 수신자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묵시적 예언 (apocalyptic prophecy)으로서, 로마 제국의 아시아 지방의 일곱 교회들에 보내진 순회서신의 형태로 기록된 책입니다.

2. 정교한 문학작품
요한계시록을 자세히 공부하면, 이 책이 놀라운 기술과 엄청난 정성으로 기록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아주 정교하게 조직된 문학 작품입니다. 요한이 엄청난 환상을 경험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가 경험한 것을 그대로 술술 풀기만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양의 구약 본문들에 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책 내에 무수한 상호참조 등의 문학적 장치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기가 받은 환상의 경험들을 오랜 기간 묵상하면서 구약성경의 예언의 틀과, 예수 전승과, 당시 로마 제국의 상황과, 당시 로마 제국 내의 아시아 교회들이 처한 문제들에 비추어 신중하게 해석하여 완전한 문학 작품을 창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들을 그대로 전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계시들의 의미들까지 함께 전달하기 위해 구약, 예수 전승, 사도적 케리그마, 로마 제국의 상황, 당시 교회들의 당면 문제들을 서로 연관시켜 해석하여 마침내 정교한 문학작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1) 풍부하고 다양한 이미지들
요한계시록에는 많은 이미지들이 사용되었으므로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로마 제국의 권력의 형상들과 이방종교의 화려한 형상들이 복합된 표상들에 대하여 기독교적인 반대표상들이 대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 문명을 의인화한 여신 로마의 상이 아시아의 여러 신전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로마라는 여신을 로마의 창녀 곧 바벨론의 음녀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구약의 이세벨과 같은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로마 제국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게 합니다.
로마라는 여신은 모든 백성들의 어머니로서 로마 제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풍요와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을 표방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로마 여신을 이세벨 같은 음녀의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실제로는 제국의 백성들을 속이고 착취하는 마녀라고 폭로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유발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비즐리 머레이라는 사람은 계시록의 이미지를 오늘날의 정치적인 만화에 비유하였습니다. 냉전 시대의 서양 신문들을 보면 러시아를 무지막지한 곰으로 표현하고, 미국은 바짝 마르고 링컨같이 생긴 엉클 샘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이 대영제국으로서 막강할 때에는 수사자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런 정치 풍자만화와 같이 로마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서는 로마를 기본적으로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하나는 무자비한 짐승이고 또 하나는 음녀입니다. 로마 제국의 양면을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모든 민족들을 제압해서 짓밟는 저항할 수 없는 막강한 정치적, 군사적 힘을 가진 존재로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에 복종해서 세금내고 법을 잘 지키면 지중해 공영권에서 자유롭게 이동하고 무역하면서 함께 번영을 누리게 된다는 팍스 로마나의 선전자로서의 모습입니다.

2) 이미지들의 해석: 문학적 장치, 구약과 고대 근동의 신화, 로마제국의 정치적 상황 등의 이해
우리가 계시록의 이미지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시록은 주도면밀한 문학적 구성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선 책 속에서 해석의 실마리들을 얻어야 합니다. 상호참조의 구조를 풀어내고, 평행들과 대조점들과 암시들을 면밀히 검토해야 합니다.
또 하나, 계시록의 이미지들을 풀어내려면 구약과 더불어 고대 근동의 신화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뱀 또는 용은 악의 근원으로서 리워야단의 신화 즉 카오스(Chaos)의 바다에서 나오는 사탄의 전형을 상징하는데, 이는 곧 창세기 3:14의 뱀이기도 하고 이사야 27:1의 리워야단이기도 합니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의 상황을 이해하고 풀어야 합니다.
한 예로, 9장과 16장에서 동쪽으로부터의 침략 사상이 나타납니다. 동쪽으로부터 침략군이 오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실제로 1세기 당시에 로마 제국이 파르티아 제국의 침략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파르티아 기병대가 로마 제국을 침략해서 잔인하게 파괴하리라는 두려움이 펴져 있었는데, 그 참략군의 선봉 장군이 누구냐 하면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올 짐승’입니다.
이는 곧 네로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네로는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네로가 다시 올 거라고 여겼습니다. ‘환생하는 네로’에 대한 신화입니다. 즉 네로가 환생해서 파르티아의 기병대를 몰고 로마 제국으로 와서 복수하고 파괴하리라는 두려움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요한은 그 신화를 사용해서 당시에 만연한 재앙과 불안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의 이미지들을 이해하려면 구약 및 근동의 신화 곧 사용된 이미지들의 뿌리를 알아야 하며, 로마 제국의 표상들,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황, 책 속의 복잡한 문학적 구조 등을 살핌으로써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1. 서신 형태로 보내어진 묵시적 예언(2)
하늘에는 이 구원의 계획이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선지자나 묵시자에게 미리 보여 줍니다. ‘눈으로’, 혹은 ‘귀로’ 보여 줍니다. 그렇게 보여 준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그 계시가 앞으로 땅 위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앞으로 전개될 것을 미리 선포하는 것을 묵시, 곧 ‘아포칼립시스’라고 합니다.
두번째로, 저자는 이 책을 가리켜 ‘예언’이라고 합니다(1:3). 예언이라는 말은 공예배 때에 크게 읽혀지도록 교회에 주어지는 하나님 구원 계획의 계시이면서, 동시에 교회가 하나님의 이 구원 계획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 예언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습니까? 서신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발신자는 요한이고, 수신자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묵시적 예언 (apocalyptic prophecy)으로서, 로마 제국의 아시아 지방의 일곱 교회들에 보내진 순회서신의 형태로 기록된 책입니다.

2. 정교한 문학작품
요한계시록을 자세히 공부하면, 이 책이 놀라운 기술과 엄청난 정성으로 기록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아주 정교하게 조직된 문학 작품입니다. 요한이 엄청난 환상을 경험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가 경험한 것을 그대로 술술 풀기만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양의 구약 본문들에 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책 내에 무수한 상호참조 등의 문학적 장치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기가 받은 환상의 경험들을 오랜 기간 묵상하면서 구약성경의 예언의 틀과, 예수 전승과, 당시 로마 제국의 상황과, 당시 로마 제국 내의 아시아 교회들이 처한 문제들에 비추어 신중하게 해석하여 완전한 문학 작품을 창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들을 그대로 전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계시들의 의미들까지 함께 전달하기 위해 구약, 예수 전승, 사도적 케리그마, 로마 제국의 상황, 당시 교회들의 당면 문제들을 서로 연관시켜 해석하여 마침내 정교한 문학작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1) 풍부하고 다양한 이미지들
요한계시록에는 많은 이미지들이 사용되었으므로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로마 제국의 권력의 형상들과 이방종교의 화려한 형상들이 복합된 표상들에 대하여 기독교적인 반대표상들이 대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 문명을 의인화한 여신 로마의 상이 아시아의 여러 신전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로마라는 여신을 로마의 창녀 곧 바벨론의 음녀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구약의 이세벨과 같은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로마 제국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게 합니다.
로마라는 여신은 모든 백성들의 어머니로서 로마 제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풍요와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을 표방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로마 여신을 이세벨 같은 음녀의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실제로는 제국의 백성들을 속이고 착취하는 마녀라고 폭로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유발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비즐리 머레이라는 사람은 계시록의 이미지를 오늘날의 정치적인 만화에 비유하였습니다. 냉전 시대의 서양 신문들을 보면 러시아를 무지막지한 곰으로 표현하고, 미국은 바짝 마르고 링컨같이 생긴 엉클 샘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이 대영제국으로서 막강할 때에는 수사자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런 정치 풍자만화와 같이 로마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서는 로마를 기본적으로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하나는 무자비한 짐승이고 또 하나는 음녀입니다. 로마 제국의 양면을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모든 민족들을 제압해서 짓밟는 저항할 수 없는 막강한 정치적, 군사적 힘을 가진 존재로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에 복종해서 세금내고 법을 잘 지키면 지중해 공영권에서 자유롭게 이동하고 무역하면서 함께 번영을 누리게 된다는 팍스 로마나의 선전자로서의 모습입니다.

2) 이미지들의 해석: 문학적 장치, 구약과 고대 근동의 신화, 로마제국의 정치적 상황 등의 이해
우리가 계시록의 이미지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시록은 주도면밀한 문학적 구성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선 책 속에서 해석의 실마리들을 얻어야 합니다. 상호참조의 구조를 풀어내고, 평행들과 대조점들과 암시들을 면밀히 검토해야 합니다.
또 하나, 계시록의 이미지들을 풀어내려면 구약과 더불어 고대 근동의 신화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뱀 또는 용은 악의 근원으로서 리워야단의 신화 즉 카오스(Chaos)의 바다에서 나오는 사탄의 전형을 상징하는데, 이는 곧 창세기 3:14의 뱀이기도 하고 이사야 27:1의 리워야단이기도 합니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의 상황을 이해하고 풀어야 합니다.
한 예로, 9장과 16장에서 동쪽으로부터의 침략 사상이 나타납니다. 동쪽으로부터 침략군이 오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실제로 1세기 당시에 로마 제국이 파르티아 제국의 침략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파르티아 기병대가 로마 제국을 침략해서 잔인하게 파괴하리라는 두려움이 펴져 있었는데, 그 참략군의 선봉 장군이 누구냐 하면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올 짐승’입니다.
이는 곧 네로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네로는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네로가 다시 올 거라고 여겼습니다. ‘환생하는 네로’에 대한 신화입니다. 즉 네로가 환생해서 파르티아의 기병대를 몰고 로마 제국으로 와서 복수하고 파괴하리라는 두려움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요한은 그 신화를 사용해서 당시에 만연한 재앙과 불안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의 이미지들을 이해하려면 구약 및 근동의 신화 곧 사용된 이미지들의 뿌리를 알아야 하며, 로마 제국의 표상들,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황, 책 속의 복잡한 문학적 구조 등을 살핌으로써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3) 피해야 할 실수 두 가지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실수를 피해야 합니다. 첫째로, 계시록의 이미지들을 시공을 초월한 상징들로서 이해하려는 시도를 피해야 합니다. 계시록의 이미지들은 당시 일곱 교회가 처한 상황성에 합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당시의 상황성 속에서 이미지들을 해석해야지, 시간 및 공간과 관계없는 초월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됩니다. 1세기 말 당시의 원래 독자들의 사회, 정치,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는 그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지나치게 문자적인 해석을 시도해서도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의 예언들을 너무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마치 그것이 실제의 역사 속에서 일어날 구체적인 사건의 그림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컨대,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재앙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심판이 역사 속에서 그런 순서대로 일어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과 이미지 속에서 전달하려는 신학적인 의미를 헤아려야지, 역사 속에서 그런 순서대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Chapter 3. 구조상의 특징들

1. 서론(1-3장)
요한계시록은 1-3장까지가 서론이고, 그 중에서 2-3장은 일곱 교회들에 보내는 각기 짤막한 편지들입니다. 계시록 전체가 하나의 편지인데, 그 안에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들이 있습니다. 간략하지만 분명한 메시지들입니다. 그 메시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시 일곱 교회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들입니다. 일곱 교회들에 보내는 일곱 메시지들은 사도가 갖고 있던 각 지방의 상세한 지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도 요한이 그 지역에서 사역하던 사람이었으며, 일곱 교회들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일곱 메시지들은 그 자체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각 메시지가 나머지 4-22장까지 내용의 서론 역할을 합니다. 각 메시지를 끝내는 부분에서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이 포함된 것을 주목하십시오. 책의 뒷부분에서 이기는 자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무엇에 대해 이기는지가 밝혀집니다.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의 형태는 이 책의 절정 부분에서, 곧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들에 주어진 “이기라”는 명령은 책 중심부에 묘사된 종말의 전쟁을 싸우라는 명령이며, 그럼으로써 책의 마지막에 있는 종말의 영광에 이르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결국 일곱의 메시지는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일곱의 다른 서론들입니다. 비록 넓은 관점에서는 일곱 교회가 로마 제국의 독재라는 공통의 상황을 공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계시록은 일곱 개의 다른 관점에서 읽혀져야 합니다. 요한은 일곱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악에 대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싸움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종말론적 목적에 각 지역 교회의 문제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며, 그리하여 그 문제들이 그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2. 기본장(4-5장)
4-5장이 중심장 혹은 기본장입니다. 4장에서 요한은 하늘로 들림받아 하늘에서 하나님의 어전회의를 봅니다. 거기에서 온 세상을 대표한 네 생물들과 이십 사 장로들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숫자로서 넷은 온 세상, 즉 족속과 방언과 민족과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일곱은 충만을 의미하며, 열둘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네 생물과 이십사(12x2) 장로들은 온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예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장에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좌에 등극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모습으로 등극해 있습니까?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등극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사탄의 통치로부터 속량하시는 방법이 죽임당한 어린양의 방법이란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제를 통해 사랑의 방법으로 그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대표하는 네 생물들과,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이십 사 장로들과, 천천의 천사들이 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4-5장은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이는 앞으로 지상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성취되도록 결정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바로 그것을 계시받아서 선포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하나님의 “비밀”이 일곱 겹으로 봉인된 책 속에 쓰여 있습니다.
6-16장까지는 그 책의 봉인들을 뗄 때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인봉들을 뗌, 나팔 붐, 대접들을 쏟아 부음 등 세 개의 시리즈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3. 심판/재앙의 세 시리즈들
요한계시록을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요한계시록을 읽고 제일 인상에 남는 것이 뭐냐고 물으면, 무시무시한 세 개의 심판 시리즈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중심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는 단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경고의 차원입니다. 당시 로마의 선전 이데올로기인 팍스 로마나의 달콤한 술에 도취되어 황제를 숭배하고 살면, 그것은 곧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거짓 삼위일체의 통치를 따르는 것으로서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처음에 여섯 개의 인봉들을 떼는 부분이 6:1-17까지입니다. 각 인을 뗄 때마다 재앙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일곱째를 떼야 하는데, 일곱째 인을 떼는 것은 8:1-3 사이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7장이 삽입장으로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삽입장인 7장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유다의 사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새 하나님의 백성 열두 지파로부터, 각 지파에서 12,000명씩 총 144,000명의 군대를 동원해서 메시아 전쟁을 한다는 것입니다.
용과 짐승과 땅 짐승(거짓 선지자)과의 메시아 전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12지파는 교회이며, 144,000은 군대인데, 동시에 순교자가 될 숙명으로 인침을 받습니다. 순교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 전쟁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중세 시대의 십자군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슬람식의 성전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 전쟁의 내용은 복음 선포입니다. 죽임당한 어린 양의 투쟁을 계승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용어로 말하면 “예수의 증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신 증거입니다. 예수가 무엇을 증거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하심입니다.
지금 사탄의 거짓 삼위일체 통치는 성부와 예수와 성령의 삼위일체의 패러디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허위를 폭로하고 참 하나님과 참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거룩한 전쟁의 내용입니다. 메시아의 군대가 수행하는 싸움입니다. 그리하여 그들 역시 예수와 마찬가지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좌 앞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들이 보좌 앞에서 “우리의 피를 신원해 달라”고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동료의 수가 찰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일곱째 인봉이 떼어졌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곱 개의 나팔을 부는 또 하나의 심판들이 벌어집니다. 여기에서도 꼭 같은 구조입니다. 일곱 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8:1-9:13까지 하나에서 여섯째까지 나팔을 불 때마다 대재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일곱 인봉을 뗌으로 인해서는 땅의 1/4이 멸망하고, 일곱 나팔 붐을 인해서는 땅의 1/3이 멸망합니다. 그런데 일곱째 나팔이 불어져야 하는데, 일곱째 나팔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11:15에 가서야 비로소 일곱째 나팔이 불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10:1-11:13까지가 삽입장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 부분의 구조를 보면 7장의 삽입장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교회가 거룩한 전쟁을 하고, 순교를 당하고,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경고의 심판과 교회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 예수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개치 않은 자들에게는 일곱 번째 나팔이 불려집니다. 그들에게는 일곱 대접이 쏟아 부어지는 심판이 거행됩니다. 여기에서는 보다시피 삽입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됩니까? 일곱 대접이 쏟아 부어지는 재앙만이 있을 뿐입니다.

4. Program statement(11장)
그런데 이 삽입장 중에서 11장은 요한계시록의 본론 전체에 대한 program이 제시된 장입니다. 11장이 요한계시록 전체의, 그러니까 본론의 내용을 설명하는 program statement입니다. 여기서 11:1-3절은 교회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언을 통한 짐승과의 전쟁, 곧 성전(The Holy War)입니다. 그 성전의 과정이 12-14장에 걸쳐 전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승리합니다. 역설적으로, 죽임을 당함으로써 승리를 얻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임 당함으로 승리했듯이, 성전을 수행하는 교회의 군대도 순교의 죽임을 당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 승리가 15장에 전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승리한 순교자들이 하늘나라의 유리 바다 앞에서 출애굽한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모세의 노래를 했듯이 하나님을 칭송하는 노래를 합니다. 순교자들이 짐승과의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승리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온 세상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소수 7천을 제외하고는 온 세상이 회개합니다. 이 7천은 온 세상의, 온 인류의 1/10이라는 것입니다. 이 7천에게는 일곱째 나팔이 불려집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도 이들은 끝내 듣지 않았으므로, 이들에게는 일곱째 나팔이 불려집니다.
그렇게 일곱째 나팔을 부는 것이 16장에서 일곱 대접들을 쏟아 붓는 재앙으로 전개되고, 그것이 17-18장에서 바벨론의 멸망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그 7천을 제외하고는 다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가 완성됩니다. 그것이 19-22장에서 전개됩니다.
이상에서 벌써 여러 차례 암시를 했지만, 이런 숫자들은 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 땅의 1/3이 멸망하고, 1/4이 멸망했는데, 어떻게 나중에는 1/10만 멸망한다는 것입니까? 이런 것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구약의 엘리야 이야기를 뒤집은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하나님께 신실했던 오직 7천의 수만이 남겨지고 구원을 받습니다. 나머지는 다 바알에게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종말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세계, 온 인류가 사탄에게 가버리고 7천의 수만이 구원받는다면 하나님이 지는 것 아닙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그것을 뒤집고 있습니다. 아주 소수만이, 7천의 수만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역하므로 멸망을 당하고, 그 외에 온 세상은 회개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자세히 읽으면 얼마나 긍정적인 책인지 모릅니다. 7천이란 숫자는 충만한 숫자 일곱에, 많은 수를 상징하는 천이라는 숫자가 겸해 있으니 아주 많은 수를 나타냅니다. 그래도 전체에 비하면 1/10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 교회는 근본주의적이고 문자적인 해석의 분위기가 만연된 가운데, 전혀 신학적인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계시록의 해석이 왜곡되어 왔습니다. 산속에 가서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이 출현하기도 하고, 특히 미국의 근본주의 세대주의자들의 종말론 영향을 받은 자들이 예수께서 재림하여 순교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통치하다가 종말의 7년 환난이 어떻고 하는 식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어떤 사건들이 드러날 것이라고 하는 시나리오를 제공하는 책이 아니며, 문자적인 묘사에 압도당하기보다 그 속에서 메시지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상징들, 그림들을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것은 구약 체계에서 나오고, 근동의 신화에서 나오기도 하고, 헬라 신화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배경을 알아야 하고, 당시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 하며, 특히 요한계시록 내의 구조적인 특징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1. 신론

1) 특유의 신적 명칭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에 관한 특유의 명칭을 사용합니다. “알파와 오메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전능자 주 하나님,” “보좌에 앉으신 이”와 같은 하나님에 관한 특유의 명칭을 도입하여, 이 중에서 두 번째 것이 다섯 번 언급되었으며, 나머지 세 개의 명칭들은 각각 일곱 번씩 언급되고 있습니다.
7이란 완전수, 충만의 수를 의미합니다. 이 책 전체에는 일곱 개의 축복들이 또한 언급되어 있기도 한데(1:3, 14:13, 16:15, 19:9, 20:6, 22:7, 22:14), 이것이 신실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복의 충만을 가리키듯이, 일곱 번에 걸쳐 언급된 하나님의 명칭은 신적 존재의 충만함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이 책에는 요한의 신학적 의미가 주도면밀하게 문학적 구조 속에 녹아있으며, 이로써 묵시의 이해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맞물려서 확장되도록 만들어 줍니다.

(1) 알파와 오메가(1:7, 1:17, 21:6, 22:13): ‘시작과 나중,’ ‘처음과 끝’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처음과 나중”이란 이사야에서 따온 말입니다(44:6, 48:12). 이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말하는데, 특히 바벨론의 우상과 대적하여 논쟁적으로 사용된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계시록에서는, 당시 로마의 우상숭배에 대항해서 하나님만이 참된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나타내려는 칭호입니다.
(2)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1:8, 4:8, 11:17, 15:3, 16:7): 이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의 해석입니다. 여기서 세 번째 단어인 “장차 오실 이”는 be동사의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분사형인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도래를 단순히 미래에 있을 사건으로 본 것이 아니라, 환상 속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도래가 현재적으로도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3) 전능하신 주 하나님(1:8, 4:8, 11:17, 15:3, 16:7, 19:6, 21:22): 구약의 ‘만군의 여호와’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는 대적할 수 없는 분, 만물보다 뛰어난 힘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의 주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4) 보좌에 앉으신 이(4:9, 5:1,7,13, 6:16, 7:15, 21:5): ‘보좌’는 계시록의 중심적인 상징 중 하나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와 더불어 예배의 이미지가 통합된 것입니다. 예배와 통치의 이미지가 통합된 것은 구약과 유대 묵시주의 전통에 따른 것이면서, 또 한편으로 계시록의 상황과도 상통합니다. 로마 제국은 그 막강한 권력을 황제숭배라고 하는 종교적인 형태로 시위하였습니다. 로마의 신적 통치의 찬탈은 짐승에 대한 세상적인 숭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13:4, 8, 12). 그러나 요한 계시록은 하나님을 보좌에서 예배받으시고 통치하시는 분으로 제시함으로써, 로마의 권력과 황제 숭배를 하늘보좌의 패러디일 뿐임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2) 심판하는 하나님의 거룩성
계시록 전체는 주기도의 세 간청의 성취의 비전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4장에서 네 생물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6:3에서의 환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이사야가 본 환상에서 빠진 것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도다”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왜 이것이 빠져 있을까요? 지금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땅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땅 위에서 지금 로마 황제가 하나님 노륵하면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해하고,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찬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땅 위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세 간청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입니다.
계시록에서 4장을 그 기독론적 연속인 5장과 더불어 계시록 본론의 기본장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6장 이후의 인봉들과 나팔들과 대접들의 세 연속적인 재앙의 시리즈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한 자에게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인봉들과 나팔들의 재앙은 회개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경고적 성격의 두 연속적인 심판의 시리즈들이며, 대접들의 재앙은 마지막 최후의 징벌을 보여 줍니다. 단, 여기에서 고도로 조직화된 심판과 재앙의 묘사는 신학적인 중요성 때문이며, 묘사된 재앙의 순서 그대로 역사 속에서 진행된다는 문자적인 예상들은 아닙니다.

3) 하나님의 주권과 초월
성경적 신관에 대해서 최근에 두 가지 비평이 있는데,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첫째,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미지가 인간 사회에서 전제적인 권력 구조와 지배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전제 군주들이 하나님을 빙자해서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목사들이 하나님을 빙자하여, 즉 하나님과 자신을 은연 중 동일시함으로써 독선에 빠지고 교회 내에서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절대적인 통치자시라는 것은 실상 세상의 모든 통치를 상대화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 독재정치를 합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법화시킵니다.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표현하는 언어들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의 초월성을 표현하는 보좌의 이미지, 알파와 오메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고 장차 오실 이, 예배의 환상 등은 절대 권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며, 그럼으로써 인간의 모든 권력을 상대적인 것에 불과함을 보여 줍니다.
둘째, 추월적인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의 이미지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존재인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과 함께 있지 않으며 그들의 삶에 관계하고 있지 않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초월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우리 삶에 들어와 함께 하시는 내재적인 하나님을 인식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1960년대에 폴 틸리히(Paul Tillich)같은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너무 초월해 계시는 분으로 그리기보다 우리와 함께 아래에 내재해 계시는 분으로 그리자는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초월하시기에, 진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공간적으로 제약을 받으시는 분이라면 어디에나 계실 수가 없습니다. 무소부재하실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초월해 계시기에, 모두에게 언제나 가까이 계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종말의 완성 때에 인간들과 영원히 함께 거하시는 비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21, 22장). 어떤 의미에서 현재는 하나님이 땅 위에 ‘안 계시는’ 것 같으며 사탄이 하나님처럼 거짓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에 진정으로 임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을 통해서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세상을 구원하시며, 특히 성령은 진리를 위한 교회의 희생적 증거 안에 임재하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4) 창조자 하나님
하나님을 창조자로 이해하는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말론의 발전에 본질적인 요인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초월적인 만물의 근원이시라면, 또한 미래에 자신의 피조물을 위한 아주 새로운 가능성의 근원이 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뒤틀리고 썩어진 만물을 종말에 바로잡을 수 있다는 소망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근본적인 신앙에서 나옵니다. 그분이 무에서 유를 만드신 분이시기에, 또한 죽음에서 생명을 일으키신 분이기에, 새로운 창조 역시 가능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하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입니다(롬 4:17). 결국, 종말에 하나님이 죄와 죽음을 다 몰아내고 온 세상에 생명을 풍성하게 하리라는 소망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가능한 것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한 형태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부활신앙은 창조주에 대한 신앙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사탄에게 완전히 넘겨줄 수가 없습니다. 죄와 죽음이 창조세계를 완전히 석권하도록 내버려두실 수가 없습니다. 비록 사탄이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망가뜨려 놓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힘으로, 생명의 힘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뒤집어 놓으십니다. 그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은 창조주에 대한 믿음의 종말론적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본래 창조신앙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1) 새 창조와 창조 회복
요한계시록에서는 구약과 유대 묵시문학에 나타난 “새 창조” 및 “창조 회복”의 사상이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이 둘은 결국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 강조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세상과 오는 세상의 불연속성을 강조하고자 할 때, 즉 이 세상의 타락의 심각성을 강조하고자 할 때에는 종말의 구원 세상을 새창조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지금의 세상을 불에 태워버리고 지금 세상과 질적으로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 회복이라고 할 때는 언제입니까? 설령 사탄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탈해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우주를 사탄이 카오스로 완전히 뒤집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능력의 손으로 세상을 꽉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이만큼의 질서가 있고, 이만큼의 진리와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사의 연속성을 강조하고자 할 때에는, 종말의 구원의 상태를 칭조 회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탄의 영향 아래 죄와 죽음으로 물들고 타락한 부분을 깨끗이 소재하고 소생시키고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창조의 갱신입니다.
(2) 창조주의 신실함
요한계시록은 창조주로서 하나님에 대해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측면은, 피조물에 대한 그분의 신실하심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에 대해 끝까지 신실하신 분입니다. 비록 피로물이 사탄의 속임수에 빠져 죄를 짓고 죽음에 처해도,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끝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구해내시려는 분입니다. 만일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새 창조에 대한 가능성을 을으킨다면, 그의 피조물에 대한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는 새 창조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해 줍니다.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신실하심은 창세기 홍수 이야기의 신학적 주제입니다. 죄가 관영하여 세상을 다 멸해야 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노아를 비롯하여 모든 생물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창 9:11-17). 그 노아 언약의 암시가 계시록 4:3에 나옵니다. 홍수 때에 땅이 어떻게 멸망했는지 주목하십시오. 창조 시에 홍수의 물들, 즉 원시적 혼돈의 물들이 제어되어 한 곳에 갖혀 있었습니다(창 1:2, 7:11).
그것은 창조를 취소할 수 있는 무(nothingness)의 힘을 상징하는데, 창조된 우주를 혼돈으로 되돌리려고 위협하는 파괴적인 잠재력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 혼돈의 물들은 짐승이 일어나는 바다입니다(13:1).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짐승이 제거되며(19:20),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 망하며(20:10, 14), 그리고 바다가 다시 보이지 않습니다(21:1). 곧 파괴적인 안의 근원과 창조를 혼든으로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마침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새창조에서는,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를 어떠한 파괴적 악의 세력으로부터도 침범당하지 않게 영원히 안전하게 만드십니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노아의 언약에 신실하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피조물에 대한 신실하심에 있어서 자신의 피조물들을 파멸의 물로부터 보호하시겠다는 노야연약의 성취를 넘어 첫 창조보다 더 완벽한 새창조를 이룬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품격(The Person of Christ):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동일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다음의 네 가지 방향으로 표현합니다.

1) 이름의 공유
계시록에는 하나님의 두 가지 선언들과 그리스도의 자기 선언들의 패턴이 있습니다.

• 하나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1:8).
• 그리스도: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17b-18).
• 하나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21:6).
• 그리스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22:13).

이를 좀 더 분석해 보면, 1:8의 하나님의 자기 선언이 신적 주권을 통하여 만물을 지배하는 권능을 진술하고 있는데 반해, 1:17-18의 그리스도의 자기 선언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얻게 된 사망과 음부에 대한 권세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라는 신적 명칭의 본질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 공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의 공유가 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 패턴으로 교차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종말론적 만물 완성 모두에 신적 행위자로서 그리스도를 포함시킬 뿐 아니라, 이름의 공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신 것을 매우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에서 “처음과 나중”이라는 명칭은 배타적인 유일신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사 44:6).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그리스도가 자기의 정체를 선언하는 데 이 명칭을 쓴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름의 공유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물의 유일한 근원이시고 목적이 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안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
계시록에서 예배의 중요성을 의식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예배드려져야 합니다. 19:10과 22:8-9에서 요한은 자기에게 계시를 전하는 천사에게 엎드려 절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강력하게 만류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해야 한다고 합니다. 천사는 예배의 대상이 아니며 단지 계시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계시의 근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22:16).

계시록 전체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명백히 하나님과 함께 예배를 받는 분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과 천천의 천사들과 온 세상이 예수를 예배합니다. 예수를 예배하는 것은 유일신적 예배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하나뿐인 하나님의 존재에 예수가 포함된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4장에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자로 인정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4:11). 5장에서는 어린 양, 즉 그리스도가 신적 보좌 위에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5:6, 7:17). 어린 양은 하늘에서 예배 무리의 중심이 되면서, 동시에 생물들과 장로들의 경배를 받고 있습니다(5:8). 그런 다음, 그 무리는 무수한 천사들이 참가하면서 확대되는데 그 예배의 형태(5:12)가 분명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과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4:11).

마지막으로 예배의 무리는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기까지 확대되면서 하나님과 어린양께 영광송을 부릅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보여 주는 장면에서 어린양의 예배(5:8-12)가 하나님과 어린양을 함께 예배하는 것으로(5:13) 이어지도록 구성되어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이러한 일련의 장면 묘사를 통해, 요한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함께 나누는 존재로서 나타내려 한 것은 명백합니다. 그리스도는 신적인 예배를 받으실 만합니다. 그에게 드리는 예배는 하나뿐인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cf. 빌 2:11).

3) 특이한 문법 사용
계시록에서 사용된 특이한 문법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같이 언급될 때 단수 동사(11:15) 또는 단수 대명사(22:3f, 6:17)가 쓰입니다. 요한은 그런 경우 절대로 복수 대명사를 주어로 사용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함께 지칭할 때에도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함께 언급할 때 단수 동사 및 단수 대명사를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한 분이심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요한의 이러한 문법 사용의 일관성은 그가 기독론의 유일신 사상과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연구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유일의 신적 존재에 포함함에 있어, 요한은 후대의 기독교 신학자들처럼 추상적인 개념들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헬라의 철학을 사용한다든지, 다른 유대 기독교인들처럼 하나님의 지혜의 개념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학적인 숙어는 매우 독특하게 달랐는데, 그는 묵시적인 신적 보좌, 예배의 이미지, 문법의 조심스러운 사용, 문학적인 연결과 구조 등을 통하여 철학자라기보다는 문학적 예술가로서 신학적 표현을 많이 한 것입니다.

4)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동일시
계시록에서 하나님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1:4, 4:8). 하나님께서 종말에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구원과 심판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오심”은 그의 창조에 대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예수의 오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오심의 소망과 경고가 계시록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1:7, 2:5,16, 3:3,11, 16:15, 22:7,12,20). “나는 오리라”는 그리스도의 선언이 총7회에 걸쳐 반복된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가 오실 때 하는 심판은 곧 하나님의 심판입니다(22:12, 사 40:10, 62:11).

만약 재림 때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심판이 신적 심판이라면, 계시록 신학의 중심 주제인 그의 희생적 죽음에 관해서도 같은 말이 쓰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이 하는 일이라면,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도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행위라고 보야야 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하늘의 보좌 가운데 있는 것”이 보일 때,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는 방법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 이”로서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고통당함으로써 정복하신 어린양으로서 이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거와 희생적 죽음은 사실 하나님의 악의 정복과 그의 왕국을 땅위에 구현하는 데 있어서 열쇠가 되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심판들 이상으로 하나님의 땅위의 통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증거와 희생을 계속 수행하고 있는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촛대 사이를 걸어 다니는, 1:13, 2:1)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인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스도와 교회의 메시아적 전쟁과 승리

1) 그리스도 이름 사용의 통계
(A) 예수: 우선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스도의 인성이 강조됩니다. 계시록에는 “에수”라고 하는 인간으로서의 이름이 14회 등장합니다. 그 중에 일곱 번은 “예수의 증거”(1:2, 12:17, 17:6, 19:10/2회, 20:4)와 관련된 구절에 나타납니다. 예수가 증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예수의 인성과 관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증거하셨고 또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도 이 증거를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 한편,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7회 나옵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의 헬라어로의 문자적 번역으로서, 이 말이 나올 때마다 예수께서 다윗 왕국의 메시아에 대한 유대적 희망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셈입니다.
(C) 어린양: 또한, “어린양”이라는 말이 28회(7x4) 나옵니다. 여기서 일곱은 완전수이며, 넷은 온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 중에서 일곱 번이 하나님과 어린양이 나란히 병행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5:13, 6:16, 7:10, 14:4, 21:22, 22:1,3). “4”는 요한계시록에서 “7”다음으로 가장 보편적이고 일관성있게 사용되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7”이 완전수인 것처럼, “4”는 온 세상을 뜻하는 숫자입니다(땅, 네 모퉁이, 네 구역-5:13, 7:1, 14:7, 20:8). 세 심판 시리즈 중 일곱 재앙들 가운데 처음 네 가지의 심판들은 이 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이 28회(7x4) 나타나는 것은 그의 승리 및 구속 사역이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이루어진 완전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만국의 열방을 4중적으로 표현하며 이것을 일곱 번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사역의 세 가지 중요한 모티브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역할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즉, 사탄의 지배 하에 있는 이 세상 나라를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로 바꾸는 것입니다(11:15). 이것은 구원 사역인 동시에 심판 사역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과 죽음으로 시작되었다가 그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의 연속적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는 결정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승리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성취한 승리는 결정적인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의 승리는 현재 그를 따르는 무리들(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계속되고 장차 있을 그의 재림때 완성될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재림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3단계(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 모두에 적용된 세 가지 중요한 상징적 주제들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메시아 전쟁, 출애굽, 증인들의 싸움입니다.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요한계시록에서 합성되어 나타나는 중요한 그림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3단계 모두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A) 메시아 전쟁-유다 지파의 시작
이것은 유대적 다윗 왕국의 메시아주의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적들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합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는 군사적인 정복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그의 승리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민족적 개념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는 여전히 악에 대한 승리인데, 영적인 영역에서뿐 아니라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세상의 권력들에 맞서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구현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구약의 핵심 본문은 시편 2편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와 그가 기름부은 자”를 대적하기 위해 공모하는 “민족들”과 “세상의 군왕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1-2절). 그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인데(7절), 하나님께서는 그를 거룩한 산 시온에 왕으로 세우시고(6절), 그곳에서 대적하는 열방들을 무찌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제왕적 메시아에게 열방을 유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8절), 철장으로 대적들을 깨뜨리게 하십니다(9절).

요한계시록에서는 열방에 대한 메시아의 승리를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이 빈번하게 나옵니다(2:18, 11:15, 12:5, 14:1, 16:14, 19:15). 또한 요한은 메시아의 승리를 함께 나눌 메시아의 군대에 관해서도 부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시 2편으로부터 “세상의 군왕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며 종국에 가서는 그리스도에 의해 정복될 정치적 권력을 지칭하는 표준적인 용어로 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투적인 메시아 사상을 위하여 요한계시록은 “정복”이라는 주요한 개념을 메시아(3:21, 5:5, 17:14)에게뿐 아니라 그의 백성들에게도 확대하여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전쟁 또는 싸움과 관련된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기게 하리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세 단계에 공히 사용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도 마지막 날이 이르기 전에 승리하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아 전쟁의 표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전체적인 과정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품격(The Person of Christ):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동일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다음의 네 가지 방향으로 표현합니다.

1) 이름의 공유
계시록에는 하나님의 두 가지 선언들과 그리스도의 자기 선언들의 패턴이 있습니다.

• 하나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1:8).
• 그리스도: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17b-18).
• 하나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21:6).
• 그리스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22:13).

이를 좀 더 분석해 보면, 1:8의 하나님의 자기 선언이 신적 주권을 통하여 만물을 지배하는 권능을 진술하고 있는데 반해, 1:17-18의 그리스도의 자기 선언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얻게 된 사망과 음부에 대한 권세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라는 신적 명칭의 본질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 공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의 공유가 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 패턴으로 교차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종말론적 만물 완성 모두에 신적 행위자로서 그리스도를 포함시킬 뿐 아니라, 이름의 공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신 것을 매우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에서 “처음과 나중”이라는 명칭은 배타적인 유일신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사 44:6).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그리스도가 자기의 정체를 선언하는 데 이 명칭을 쓴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름의 공유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물의 유일한 근원이시고 목적이 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안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
계시록에서 예배의 중요성을 의식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예배드려져야 합니다. 19:10과 22:8-9에서 요한은 자기에게 계시를 전하는 천사에게 엎드려 절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강력하게 만류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해야 한다고 합니다. 천사는 예배의 대상이 아니며 단지 계시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계시의 근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22:16).

계시록 전체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명백히 하나님과 함께 예배를 받는 분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과 천천의 천사들과 온 세상이 예수를 예배합니다. 예수를 예배하는 것은 유일신적 예배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하나뿐인 하나님의 존재에 예수가 포함된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4장에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자로 인정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4:11). 5장에서는 어린 양, 즉 그리스도가 신적 보좌 위에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5:6, 7:17). 어린 양은 하늘에서 예배 무리의 중심이 되면서, 동시에 생물들과 장로들의 경배를 받고 있습니다(5:8). 그런 다음, 그 무리는 무수한 천사들이 참가하면서 확대되는데 그 예배의 형태(5:12)가 분명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과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4:11).

마지막으로 예배의 무리는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기까지 확대되면서 하나님과 어린양께 영광송을 부릅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보여 주는 장면에서 어린양의 예배(5:8-12)가 하나님과 어린양을 함께 예배하는 것으로(5:13) 이어지도록 구성되어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이러한 일련의 장면 묘사를 통해, 요한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함께 나누는 존재로서 나타내려 한 것은 명백합니다. 그리스도는 신적인 예배를 받으실 만합니다. 그에게 드리는 예배는 하나뿐인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cf. 빌 2:11).

3) 특이한 문법 사용
계시록에서 사용된 특이한 문법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같이 언급될 때 단수 동사(11:15) 또는 단수 대명사(22:3f, 6:17)가 쓰입니다. 요한은 그런 경우 절대로 복수 대명사를 주어로 사용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함께 지칭할 때에도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함께 언급할 때 단수 동사 및 단수 대명사를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한 분이심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요한의 이러한 문법 사용의 일관성은 그가 기독론의 유일신 사상과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연구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유일의 신적 존재에 포함함에 있어, 요한은 후대의 기독교 신학자들처럼 추상적인 개념들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헬라의 철학을 사용한다든지, 다른 유대 기독교인들처럼 하나님의 지혜의 개념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학적인 숙어는 매우 독특하게 달랐는데, 그는 묵시적인 신적 보좌, 예배의 이미지, 문법의 조심스러운 사용, 문학적인 연결과 구조 등을 통하여 철학자라기보다는 문학적 예술가로서 신학적 표현을 많이 한 것입니다.

4)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동일시
계시록에서 하나님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1:4, 4:8). 하나님께서 종말에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구원과 심판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오심”은 그의 창조에 대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예수의 오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오심의 소망과 경고가 계시록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1:7, 2:5,16, 3:3,11, 16:15, 22:7,12,20). “나는 오리라”는 그리스도의 선언이 총7회에 걸쳐 반복된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가 오실 때 하는 심판은 곧 하나님의 심판입니다(22:12, 사 40:10, 62:11).

만약 재림 때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심판이 신적 심판이라면, 계시록 신학의 중심 주제인 그의 희생적 죽음에 관해서도 같은 말이 쓰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이 하는 일이라면,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도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행위라고 보야야 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하늘의 보좌 가운데 있는 것”이 보일 때,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는 방법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 이”로서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고통당함으로써 정복하신 어린양으로서 이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거와 희생적 죽음은 사실 하나님의 악의 정복과 그의 왕국을 땅위에 구현하는 데 있어서 열쇠가 되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심판들 이상으로 하나님의 땅위의 통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증거와 희생을 계속 수행하고 있는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촛대 사이를 걸어 다니는, 1:13, 2:1)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인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사역 : 그리스도와 교회의 메시아적 전쟁과 승리

1) 그리스도 이름 사용의 통계

(A) 예수 :

우선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스도의 인성이 강조됩니다.
계시록에는 “에수”라고 하는 인간으로서의 이름이 14회 등장합니다.
그 중에 일곱 번은 “예수의 증거”(1:2, 12:17, 17:6, 19:10/2회, 20:4)와 관련된 구절에 나타납니다.
예수가 증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의 인성과 관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증거하셨고 또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도 이 증거를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7회 나옵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의 헬라어로의 문자적 번역으로서, 이 말이 나올 때마다 예수께서 다윗 왕국의 메시아에 대한 유대적 희망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셈입니다.

(C) 어린양 :

“어린양”이라는 말이 28회(7x4) 나옵니다.
여기서 일곱은 완전수이며, 넷은 온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 중에서 일곱 번이 하나님과 어린양이 나란히 병행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5:13, 6:16, 7:10, 14:4, 21:22, 22:1,3).

“4”는 요한계시록에서 “7”다음으로 가장 보편적이고 일관성있게 사용되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7”이 완전수인 것처럼, “4”는 온 세상을 뜻하는 숫자입니다(땅, 네 모퉁이, 네 구역 - 5:13, 7:1, 14:7, 20:8).

세 심판 시리즈 중 일곱 재앙들 가운데 처음 네 가지의 심판들은 이 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이 28회(7x4) 나타나는 것은 그의 승리 및 구속 사역이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이루어진 완전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만국의 열방을 4중적으로 표현하며 이것을 일곱 번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사역의 세 가지 중요한 모티브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역할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즉, 사탄의 지배 하에 있는 이 세상 나라를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로 바꾸는 것입니다(11:15).
이것은 구원 사역인 동시에 심판 사역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과 죽음으로 시작되었다가 그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의 연속적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는 결정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승리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성취한 승리는 결정적인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의 승리는 현재 그를 따르는 무리들(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계속되고 장차 있을 그의 재림때 완성될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재림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3단계(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 모두에 적용된 세 가지 중요한 상징적 주제들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메시아 전쟁, 출애굽, 증인들의 싸움입니다.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요한계시록에서 합성되어 나타나는 중요한 그림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3단계 모두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A) 메시아 전쟁 - 유다 지파의 시작

이것은 유대적 다윗 왕국의 메시아주의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적들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합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는 군사적인 정복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그의 승리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민족적 개념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는 여전히 악에 대한 승리인데, 영적인 영역에서뿐 아니라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세상의 권력들에 맞서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구현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구약의 핵심 본문은 시편 2편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와 그가 기름부은 자”를 대적하기 위해 공모하는 “민족들”과 “세상의 군왕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1-2절). 그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인데(7절), 하나님께서는 그를 거룩한 산 시온에 왕으로 세우시고(6절), 그곳에서 대적하는 열방들을 무찌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제왕적 메시아에게 열방을 유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8절), 철장으로 대적들을 깨뜨리게 하십니다(9절).

요한계시록에서는 열방에 대한 메시아의 승리를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이 빈번하게 나옵니다(2:18, 11:15, 12:5, 14:1, 16:14, 19:15). 또한 요한은 메시아의 승리를 함께 나눌 메시아의 군대에 관해서도 부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시 2편으로부터 “세상의 군왕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며 종국에 가서는 그리스도에 의해 정복될 정치적 권력을 지칭하는 표준적인 용어로 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투적인 메시아 사상을 위하여 요한계시록은 “정복”이라는 주요한 개념을 메시아(3:21, 5:5, 17:14)에게뿐 아니라 그의 백성들에게도 확대하여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전쟁 또는 싸움과 관련된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기게 하리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세 단계에 공히 사용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도 마지막 날이 이르기 전에 승리하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아 전쟁의 표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전체적인 과정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2) 종말적 출애굽 - 죽임 당한 유월절 양

유대교의 묵시 전통은 하나님의 종말적 개입을 ‘종말적 출애굽’이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약 성서의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이러한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기는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많이 발전되었습니다. 이 사상 체계에 있어서 중심 표상은 바로 예수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어린 양은 그의 피로 백성들을 속량하여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이 되게 하셨습니다(5:6, 9). 이것은 시내산 언약을 연상시킵니다(출 19:5). 시내산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언약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종말의 구원을 제2의 출애굽으로 생각할 때, 그 구도에서 유월절 양의 역할은 별로 다루지 않습니다. 생략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유월절 양에는 원래 제사의 성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하거나(요 1:29, 36)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을 ‘유월절 양’이라 할 때는, 이사야 53:7의 양과 이미지가 겹쳐집니다. 그 양은 어떤 양입니까? 자기 목숨을 대속의 제사로 내어 주는 양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은 어조나 사고방식이 많이 다르고, 특히 종말론에 있어서 요한복음은 현재적 종말론이 강하고 요한계시록은 미래적 종말론의 성격이 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상당히 발견되기도 합니다. 가령 요한복음과 요한 계시록에서만 예수를 로고스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유월절 양과 이사야에서의 종의 예언을 합성해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원래 유월절 양은 죄를 씻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장자를 죽이지 않고 지나갔다(pass over)는 차원에서 구원의 표상이지, 죄를 씻어서 구원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요한복음과 계시록에서는 예수를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유월절 양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결국,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예수께서 속죄의 제사로서 자기를 드린 유월절 양이 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제사장 나라(출 19:5-6)로 속량해 내는 출애굽의 구원을 종말론적으로 이루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계시록 15:2-4의 노래는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여기서 누가 부르고 있습니까? 짐승을 이긴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고 있습니다. 마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닷가에서 찬송했듯이 짐승을 이긴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리 바닷가에서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모세의 첫 출애굽과 그리스도의 구원을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종말론적인 출애굽인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3) 증인 : 복음은 선포

그러면, 짐승을 이긴 하나님의 백성들, 순교당한 144,000명 양을 따르는 무리들은 어떤 싸움을 합니까? 양과 똑같은 종류의 싸움을 합니다. 메시아 전쟁의 내용은 곧 증거의 싸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증거로 인해 죽임을 당하였으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을 속량하고 승리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교회도 똑같이 예수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사탄의 세력과 거룩한 전쟁을 합니다. 그들은 성전의 전사들입니다.
증인들에게는 순교가 요구됩니다. 예수 자신이 이 땅에 사실 때 하나님께 대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성되고 참된 증인’(3:14)이셨듯이, 충성된 예수의 증인은 박해의 위험에 처하게 되고 순교를 당할 수 있습니다(2:13, 11:7, 12:17). 예수의 증거 사역은 이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증인들이며(17:6), 또한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의 증거는 그들 자신의 증거와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의 증거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증거는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과 짐승 숭배자들의 악행을 드러냅니다. 누가 과연 참 신인가 하는 문제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증거의 주제로 다루어지며, 또한 그 증거가 짐승과 짐승 숭배자들에게 심판을 내리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의 세 번째 단계인 재림 때에 이르면 그의 증거가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요 12:48).

천년 왕국의 메시지

1. 본문의 묘사

먼저 19:11-21을 읽어보십시오. 그리스도 사역의 세 가지 중요한 모티브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메시아 전쟁의 모티브를 볼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하늘로부터 백마를 타고 신적 전사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하늘의 군대로서 그와 함께 내려옵니다. 여기에서 증거의 모티브를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메시아의 이름은 ‘신실함과 진실함(Faithful and True)’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 그는 피에 빤 옷을 입었습니다. 죽임당한 출애굽 어린 양의 모티브입니다. 그의 입에서는 예리한 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가 포도주 틀을 밟습니다.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들에 대해서 총체적인 심판을 수행합니다. 짐승이 잡히고, 짐승을 숭배하도록 미혹하던 거짓 선지자(요한 당시의 상황에서는 황제 숭배를 권장하며 제국의 이념을 선전하던 로마의 지방 분봉왕들)도 함께 잡힙니다. 그리고 이들이 유황불 못에 던져집니다.
그런 후 20장에서는 짐승 및 거짓 선지자와 더불어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악의 원조 사탄 마귀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 제시됩니다. 20:1-3을 보면, 마귀는 두 단계로 처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무저갱에 천 년 동안 감금시킵니다.
그 다음에 순교자들이 부활하여 보좌들에 앉아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통치합니다(20:4-6). 그리고 천 년이 지나고 나면, 마귀가 풀려 나와 곡과 마곡의 군대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쟁을 벌입니다(20:7-10). 그러나 마귀 역시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이미 던져졌던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20:10).
여기서 보이는 광경을 정리해 봅시다. 19:11-21에서, 짐승과 짐승을 따르던 자들을 모두 심판했습니다. 끝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모두 멸망당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마귀의 삼위일체 중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19:20). 그리고 모든 악의 시원인 마귀는 천 년 동안 감금되었다가, 천 년 후 풀려나서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싸움을 시도해 보았으나 결국 실패하고 역시 유황 불 못에 던져졌다는 것이 제시되고 있습니다(20:7-10).

2. 신학적 메시지

일부 유대 묵시 문학에는, 최후의 심판과 새로운 창조 이전에 메시아가 천 년 동안 통치한다는 사상이 있습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천년 왕국이라는 이 사상을 도입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비록 그 사상을 도입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 사상을 다른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19:11-21의 장면과 20장의 장면은 무엇을 대조하여 보여 줍니까?
전자가 심판의 부정적인 양상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심판의 긍정적인 양상을 보여 줍니다.
요한은 천년 왕국의 사상을 악의 세력의 철저한 파멸과 대비하여,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통치한 사탄의 세력과 그를 추종한 자들은 심판을 받아 다 멸망하고, 그들에 의해 핍박받고 순교까지 당한 하나님의 백성은 부활되어 메시아의 영광된 통치에 참예하게 됩니다-“천 년’간이나, 즉 오랜 세월 동안이나 지금의 사탄의 세력이 통치하는 기간, 즉 그 통치하에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당한 기간보다 훨씬 긴 세월 동안이나!-이 메시지가 “천년 왕국” 그림의 첫째 뜻입니다.

마귀는 천 년 후에 풀려나 다시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싸움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합니다(20:7-10).
이것이 보여 주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왕국 안에서 순교자들의 승리를 마귀가 결코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여기 “천년 왕국” 그림의 둘째 뜻입니다.

첫 창조 때에는 바다에서 나온 용 마귀가 온 세상을 덮치고 인간을 미혹하여 자신의 통치 아래 두는 데 성공하였으나, 새 창조 때에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새 창조는 첫 창조보다 더욱 완벽한 것으로서, 다시는 사탄에 의해 미혹되고 정복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무저갱에서 풀려난 마귀가 다시 한 번 이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을 정복하려 하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스스로 최후의 파멸을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말의 구원의 세상(새 창조)은 마귀의 위협이 더 이상 없는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20:14에 사탄/마귀의 삼위일체와 함께 “죽음”과 “하데스” 자체까지도 불못에 던져져 없어진다고 말할 뿐 아니라, 21:1에서는 새 창조에는 모든 악의 시원인 용의 파멸과 함께 용이 나오는 “바다”도 없어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천년 왕국의 신학적 요점은 하나님의 새 창조(구원)의 완벽함과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의 영원한 승리를 강조하는 것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천년 왕국의 이미지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즉 미래 세계사에 실존하는 특정한 시기를 예언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계시록이 답하지 않는 수많은 문제들에 봉착하게 됩니다.

‘부활한 성도들은 누구를 다스릴 것인가?
그들은 하늘에서 다스리는 것인가, 아니면 땅에서 다스리는 것인가?
부활의 종말론적인 삶이 어떻게 갱신되지 않은 지상에서 가능할 수 있을까?
사탄마귀의 삼위일체를 따랐던 무리들이 최후의 심판으로 다 멸망된 상황에서 천년 왕국이 끝날 무렵 사탄이 미혹할 곡과 마곡 족속들은 어디서 나오는 누구들인가? 등.’

천년 왕국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모순에 빠지고 맙니다.

앞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의 예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 심판의 시리즈들은 역사 속에서 순서대로 발생할 일들을 예고한 시간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헛된 것을 숭배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적 메시지일 뿐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이해보다, 그 속에서 신학적인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년 왕국의 이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자적으로 이해하려하지 말고 그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신학적 메시지를 얻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른 하나님의 백성(순교자들)의 최종적인 승리, 첫 창조보다 나은 새 창조의 완벽함. 이 두 가지가 요한이 천년 왕국의 그림을 통해 보여 주고자 했던 신학적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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밈메누(mimmenu)



창세기 2-3장에는 일곱 차례 ‘밈메누(mimmenu)’라는 전치사가 등장한다. ‘밈메누’는 ‘민(min)’이라는 전치사에 인칭대명사 접미형어미가 결합되어 있는 단어다.
히브리어 전치사는 인칭대명사 접미어와 결합하면서 형태변화를 일으킨다.

그런데, 민(from)이라는 전치사는 1인칭공성복수(our)와 결합할 때에도 '밈메누'가 되고 3인칭 남성 단수(his)와 결합할 때에도 '밈메누'가 된다. 창세기 2장17절에 '밈메누'가 2회 등장하고 3장(3, 4, 11, 17, 22절)에는 5회 등장한다. 문법적으로만 보면 '밈메누'는 '우리로 부터' 혹은 '그로부터, 그것으로 부터'라고 새겨도 된다. 다만, 문맥에서 그것이 1인칭 공성복수로 새길 것인지, 혹은 3인칭 남성단수로 쓰였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창세기 2-3장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경우는 3장 22절의 경우다.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로 번역된 것이 과연 타당한가하는 문제 제기다.
나머지 여섯 번의 사례에서 보듯, 문맥에서 지시하는 것은 '밈메누'는 '그것(나무)으로 부터' 이다.
22절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선악을 아는 일에 그것으로부터 하나가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선악을 아는 일에 선악을 아는 나무로부터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다.
즉, 선악 나무로부터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이며, 조금 의역을 하면 선악의 나무 중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같은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적지 않다.
번역과 해석의 치명적인 실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성경 왜곡의 뿌리는 깊고 깊다.
뱀의 신관이 거기서 등장한다.
즉, 하나님은 선악의 하나님이라는 신관이 등장하고, 이에 동조하여, 번역하는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은 선악의 하나님이라는 신관을 설정해놓고 성서를 읽고 있다.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중 하나'라고 하므로 치명적인 곡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거기서 각종 이설신학이 난무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추측성 신학이 무수히 생성된다.
  
성경을 번역하면서도 번역에 이 같은 신학적 관점이 반영된다.
신관이 뱀의 입에서 나오는 것에 의지하고 있고 그것이 번역에도 철저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말이다. 뱀은 하나님이 선악의 하나님이라고 이미 규정하고 있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속에는 하나님은 선악의 신이라는 전제가 담겨 있다.
즉, 그렇게 규정하고 있는 신에 대한 뱀의 신관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뱀의 말이다.
이것은 신에 대한 뱀이 규정한 뱀의 신론(神論) 이다.
뱀의 신론에 온 인류, 성서를 읽는 수많은 사람이 현혹되어 있다.
한 걸음도 뱀이 규정한 신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수는 유대 교리의 전통에 목매어 있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일컬어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하므로 뱀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한다. 교조주의는 뱀의 속성이다. 교리는 뱀의 이빨이다. 단순한 교조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선한 것은 상을 주시고, 악한 것은 벌을 주신다는 것에 뿌리를 두고 신개념을 확장해간다. 그리고 ‘선’이라고 하는 것은 저마다 다르다.

종교마다 자기의 교리에 충실한 것을 ‘선’이라고 하고 그에 반하는 것을 ‘악’으로 규정한다. 기독교는 예수 믿는 것만이 ‘선’이고 그에 반하는 것은 지옥을 예약한 자로 규정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 3:22)

창세기 2-3장의 6번의 사례는 창세기 3장 22절이 잘못 번역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오역의 역사는 깊다. 그것은 70인 역에서부터 번역의 오류를 일으키고 있다. 물론 단순한 문법으로만 말한다면 '우리 중 하나'로 번역한다 해도 틀린 것은 아닐 테지만, 이곳은 문맥을 섬세히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다. 이것은 도리어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그것(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 3:22)

성서는 사람을 나무로 비유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 중에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었으니 당연히 자기가 갖고 있는(따먹은) 지식에 견주어 선악을 판별할 테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 따라 옳고 그름을 좇아 살게 된다.
선악의 열매를 맺게 되는 선악의 나무 중 하나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인생의 귀결이며 성서는 이 같은 인생의 존재적 한계를 드러내주는 책이라 하겠다.
동시에 이를 극복하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이다.

신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른다는 것은, 신의 이름을 헛되이 부른다는 말에 다름 아니며, 뱀의 신관에 서서, 즉 선악을 아는 하나님으로 부르는 동안 그것은 신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일 따름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한다
















고정관념(固定觀念, a fixed idea)과 요한계시록



고정관념(固定觀念, a fixed idea)

고정관념의 사전적 의미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마음속에 굳어 있어 변하지 않는 생각.
둘째, 어떤 사람이나 집단의 마음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어서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어떠한 상황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생각.
셋째, 표제 음악에서 어떤 고정된 관념을 나타내는 선율.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 12. 11~1869. 3. 8)는 프랑스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베를리오즈는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작곡가로 유명합니다.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작곡가로 그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고정관념을 깨트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베를리오즈의 작품 ‘환상교향곡’은 그의 대표작입니다.
베를리오즈는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그가 본 악기라고는 작은 피리 한 개가 전부였습니다.
온 마을에 피아노 한 대가 없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17세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한 후 다양한 악기를 접할 수 있게 됐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작곡을 시작했고 좋은 작품을 쓰면서 점점 유명해졌습니다.
성공하고 큰 집도 장만한 베를리오즈는 피아노를 샀습니다.
그러나 그 피아노는 간단한 화음을 확인하는 정도로만 사용됐을 뿐입니다.

제자들이 베를리오즈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피아노를 배우지 않고 작곡가가 될 수 있었습니까?
우리가 아는 작곡가 가운데 피아노를 전혀 못 치는 분은 선생님뿐입니다.”

“나는 피아노를 안 배우면 작곡을 못 한다는 것을 몰랐네.
나는 파리에 와서 처음 피아노를 봤으니 그런 말을 들어본 적조차 없었지!”

때로는 불가능에 대한 지식이 고정관념을 만들고 존재하는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대다수의 교인들은 요한계시록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읽을 수 없고 더구나 해석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고정관념(固定觀念, a fixed idea) 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하셨을 때 어렵기 때문에 아무나 읽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별한 계시를 받은 몇몇 교주들에게만 읽고 해석하도록 계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요한계시록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인하여 잘못된 해석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요한계시록 1:3).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요한계시록 22:7).

* 09-14-2019 아침 묵상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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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固定觀念, a fixed idea)을 깨트리자!

요한계시록에 대한 고정관념은 읽어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읽어도 알 수 없도록 계시하셨을까요?
물론 대답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계시록을 읽지도 못했고 심지어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면서도 교회의 오랜 전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 깊숙이 자리를 잡고 말았습니다.

고정관념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알려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이 정기 건강 검진을 마치고 그 결과를 확인하려고 담당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담당 의사 책상 위에 자신의 정기 검진 결과를 알려주는 진단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얼핏 살펴보니 진단서에 “소부암” 이라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소부암” 이란 단어를 본 순간 “내가 암에 걸렸구나! 암이 너무 심각해 의사가 내게 아무 말도 못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 사람은 절망하고 낙심하여 사람도 만나지 않고 마음을 정리한 후 은둔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몇 달이 지나자 얼굴이 초췌해지더니 몸이 급격히 쇠약해져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려진 사실은 “소부암”이란 암의 일종이 아니라 담당 의사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암에 걸리면 반드시 죽는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정확한 내용도 모르면서 비극적인 결과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종교개혁자 칼빈(칼뱅)도 주석을 하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가 오랫동안 교회 안에 거룩한 전통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정말 개혁자 칼빈(칼뱅)이 요한계시록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주석을 할 수 없었을까요?

칼빈(칼뱅)이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요한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너무 많이 소개되어 교회마다 혼란을 겪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환경에 칼빈(칼뱅)은 또 다른 해석을 제시하므로 더 어지럽고 혼돈케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서를 발표하지 않았다는 것이 최근 요한계시록을 연구한 학자들의 결론입니다.

진실이 감추어진 이야기가 잘못 전달되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읽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복(福)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을 복(福)이란 개념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복(福)은 영생(永生)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복은 영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성경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구약의 예언은 “오실 메시아”라고 합니다. 신약의 예언은 “오신 메시아”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다시 오실 메시아”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목적은 심판(審判)이 아니라 구원(救援)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이란 영생의 자리로 완전히 옮겨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도적같이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이 언제 어디에 오실는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날과 그 시와 그 장소에 대해서 계시를 받았다는 거짓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고 오직 성경에 계시한 말씀대로 믿고 성경대로 주님을 기다리며 이 세상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며 증거 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당당하게 일어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09-16-2019 아침 묵상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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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의 말씀 #.1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요한계시록 1:3)

예언이란 한자어는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맡기는 예언(預言)
둘째는 미리 아는 예언(豫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미리 알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궁금증을 알려주는 것을 “예언(豫言)” 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예언자(豫言者)” 라고 합니다.

반면에 “예언(預言)”이란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예언자(預言者)” 라고 합니다. 또는 선지자(先知者)라고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헬라어 성경에서 살펴보면 “예언(豫言)” 이란 의미 보다는 오히려 “예언(預言)”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의 말씀이란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 대한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지금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로마 정부로부터 핍박과 심지어 순교의 현장으로 끌려갈 수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말씀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바르게 소통하며 진리에 대한 내용을 더 강렬하게 믿고 따르게 하는 깨우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밧모 섬에 갇혀 언제 순교의 현장으로 끌려 나갈지 알 수 없었던 사도 요한에게 진리의 말씀을 계시(啓示)하여 보여주고 들려주므로 현재의 고통스런 상황을 믿음으로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인내를 갖게 하는 소망의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을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로 함께 읽어가며 중요한 말씀을 함께 암송해 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예언(προφητείας) ; προφητεία(prophéteia, 4394).
prophecy, prophecy, prophesying.
the gift of communicating and enforcing revealed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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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을 깨트리는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제주도에 가면 세계적으로 아름답기로 유명한 정원인 ‘분재예술원’이 있습니다. 분재한 나무는 보통 나무보다 3∼4배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그 비결은 분갈이에 있습니다. 2년에 한 번씩 분갈이를 하면서 뿌리를 잘라주면 나무는 자기 몸의 진액을

짜내어 또 뿌리를 내립니다.
그 뿌리가 분 안에 가득 채워지는데 2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또 인정사정 보지 않고 뿌리를 잘라줍니다. 이 뿌리를 ‘고정관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2년 정도 반복된 생활을 하면 고정관념의 틀 속에 갇힌다고 합니다. 고정관념 속에 빠져들면 새로운 것을 보거나 듣기가 어렵습니다. 고정관념은 자기 발전을 위하여 반드시 넘어야 할 벽과 같습니다. 고정관념의 틀을 깨트리는 사람만이 미래의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복(福)이란 주제로 읽어보려고 합니다.
복(福)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두 개의 문자로 구분합니다.
“볼 시(示)”와 “부요할 부(富)” 라고 하겠습니다.
복(福)이란 한자를 분석한 의미는 “부(富)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부(富)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강조하는 부(富)는 “영생(永生)”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최고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영원하지 못한 것은 부(富)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영원한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뿐입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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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전 주석 장쩌민이 30분을 머물려고 그곳에 왔다가 1시간 30분 동안 머물며 “성범영원장의 분재 철학”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 중국 고위 관리들을 그곳에 보냈습니다. 일본 총리를 지낸 나카소네가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탈무드에 소개된 또 다른 예를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이 강에서 낚시로 큰 고기를 잡으면 버리고 작은 고기가 잡히면 바구니에 넣고 있었습니다. 낚시꾼을 지켜보던 행인이 “작은 고기를 잡으면 놓아주고 큰 고기를 잡아 가는데 당신은 왜 반대로 하십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낚시꾼은  “우리 집 프라이팬이 작아 큰 물고기를 구울 수 없어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큰 물고기를 잘라서 프라이팬에 넣으면 됩니다. 그런데 작은 프라이팬에는 반드시 작은 물고기만 사용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고정된 생각은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을 괴롭히는 고정관념은 착각(錯覺), 편견(偏見), 선입견(先入見), 고집(固執), 아집(我執), 흑백논리(黑白論理), 습관(習慣), 전통(傳統)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적 사고에 사로잡혀 삶의 질을 떨어트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유명한 화가 피카소가 어느 날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옆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피카소에게 “당신의 그림은 너무 난해하여 알아볼 수가 없소. 실제를 너무 왜곡하는 것이 아닌가요?” 라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피카소는 “그러면 실제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지요?” 피카소에게 질문했던 사람이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며 “이것이 실제 제 아내의 모습이요” 라고 말하자 피카소가 그 사진을 받아 이리저리 살피더니 “당신 부인은 끔찍하게 작군요, 게다가 납작 하구요! 이 사진은 종이지 실제 당신 부인이 아니잖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일반인들은 외면만 보려했지만 피카소는 사람이나 사물의 외면과 내면을 함께 보고 표현하랴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시작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할머니 발명가’로 알려진 모기업 대표 이씨는 일흔을 넘긴 팔십을 바라보심에도 “견사염색 방법”, “다시마차및 제조방법”을 특허 받았다는 기사가 났었다. 요즘은 “다시마 레몬과자”, “다시마 초코렛과자”, “다시마 엿” 등 여러 식품 아이디어 특허 진행중이시란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하고 4남매를 홀로 키우며 사셨다. 우연히 비단실로 일본옷을 하청받아 짜는 일을 시작하고부터 수백개 아이디어 발명품을 고안해 냈다. ‘어떻게 그런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느냐’란 질문에 ‘지속해서 모든 일에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고정관념 틀을 깨는 사고법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고정관념을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은 무수하다.


첫째, 다양한 정보를 체험하라!

먼저 폭 넓은 지식 혹은 정보를 얻는 것이다. 독서이든 여행이든 많은 직 간접 경험을 쌓아야 한다. 요즘은 많은 지식과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다. 책은 물론 만화책도 돌려가며 읽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배추는 파랗고, 무는 길고 하얗고, 고추는 익으면 빨간 것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배추, 무, 고추, 쌀, 콩 등은 그 모양, 크기, 색, 맛도 다양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서양인은 ‘사랑하는 자식은 여행을 시키라’, 우리 조상들은 ‘말이 나면 제주도로 자식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 하지 않았을까?


둘째 사고와 사고법을 전환하라!

그것이 창조적이든 역 사고 혹은 유연한 사고든 말이다. ‘왜’ 혹은 ‘그러면 타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이 맞을까? 이대로 좋은가?’ 등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셋째 시각에 변화를 주라!

다양한 각도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역 시각을 가져 보는 것이다. 낚시대에 연을 매어 날리는 그림을 보았다. 사람에 따라 “이상한 사람 혹은 기발한 발상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넷째 유사한 것을 따라 시도해 보라!
수영에는 자유영, 배영, 평영, 접영이 있다. 살펴보면 동물들이 물속에서 움직이는 방법을 흉내 낸 것이다. 흉내 내다 보면 새 착상을 얻을 수 있다.

다섯째, 또 다른 새로움에 도전하라!

제19회 멕시코 세계 올림픽 육상대회에서 미국 선수 ‘딕 포스버리’는 높이 뛰기에서 최초로 배면뛰기를 시도하여 정면뛰기 2m의 벽을 훌쩍넘어 2.38m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했었다. 그때까지 정면뛰기가 정석이었지만 그 후 배면뛰기가 정석이 되었다. 새로운 도전이 육상계의 한계를 넘어섰던 것이다. 이 외에 믿음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등이 있다. 더 이상 여군, 여경, 남스타일리스트, 남간호원이란 말이 어색하지가 않다. 고체잉크, 휘는 휴대폰이 나왔다. ‘남자는 강하다. 여자는 약하다’ ’가벼운 것은 약하고 무거운 것은 강하다’란 통념이 못된다. 옛 중국 사마광이 소년 시절 한 아이가 큰 물독에 빠져 익사할 직전이었다. 어른들도 올라가기 힘든 큰 독이라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이때 사마광이 큰 돌을 가져다가 항아리 밑 부분을 깨서 아이는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누가 큰 독을 기어올라 들어갈 것이냐를 생각할 때 사마광은 독을 깰 생각을 했다. 깨고 벗어나려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잘못된 고정관념은 자타를 망하게 한다.

“목이 곧은 자를 향해 회개하고 고침을 받으라” 하나님은 명하신다. 빗나간 고정관념의 아집과 고집을 벗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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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그곳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털끝만큼도 상상하지 못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
이야기만 듣고 신문 기사만 읽어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
너희가 직접 그 안에 들어가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어.”- 네티바 벤예후다(Netiva Ben-Yehuda)

중세 전쟁사를 전공한 유발 하라리는 전쟁을 통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어떻게 변하는지 추적하여 ‘극한의 경험’을 썼다.
“피를 뒤집어쓰고 사지를 늘어뜨린 채 이미 죽음이 목을 조여 오는 듯 쉰 목소리로 살려 달라 외치는 형체를 바라볼 때 비현실적인 느낌이 나를 옥죄었다.” 1914년 일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에른스트 윙거(Ernst Junger)는 고백했다. 전쟁은 인간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고, 인간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며, 세상에 대한 이해도 변화시킨다(Harari, 41/555).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J.R.R. Tolkien)도 1차 세계대전을 참전하였다. 수많은 젊은이가 무의미하게 목숨을 d잃고 가장 친한 친구들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는 전장에서 얻은 전염병으로 18개월 동안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다. 그는 고백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 얼마나 암울한 공포에 뒤덮여 있으며 얼마나 슬픔에 빠져 있는지.”(고명섭, 207)

1세기 교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쟁의 경험은 아니겠지만, 그와 버금갈 정도로 끔찍한 경험들을 하였다. 로마 검투사의 칼날에 살점이 찢겨나가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 형틀에 묶여서 갈고리 채찍으로 수도 없이 맞아 뼈가 허옇게 노출된 사람, 십자가에 매달려 일주일 내내 신음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 그들은 현대인이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그들은 어떻게 신앙을 지켰을까? 유발 하라리는 ‘극한의 경험’이 종교적 계시 경험과 맞닿아 있다고 하였다. 최악의 상황에서 사람은 현실을 뛰어넘는 신비한 경험을 하고, 평생 그것이 가슴에 남아 때로는 트라우마로 고생하고, 때로는 현실을 초월하는 경건을 배운다.

톨킨은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인간의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고명섭, 208). 이러한 경험과 생각에서 톨킨은 판타지 문학에 빠져들었다. 반면 현대인은 실용주의자이다. 계산적이고 합리적이며 예측 가능한 것을 좋아한다. 복음주의자들 역시 실용주의의 함정에 빠져들어, 성경에서 이론(교리)을 도출하여 ‘해야 한다’든지 ‘필요가 있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이야기를 경멸하고 신학과 교리를 설명하는 가르침만 추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고 생명을 바쳐 헌신하게 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은 위대한 이야기꾼이다. 최고의 설득을 쓴 카민 갤로(Carmine Gallo)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최고의 방법은 ‘이야기’라고 하였다. 그는 스티브 잡스가 존 스컬리(John Scully)에게 했던 말로 책을 시작한다. 스컬리는 37살 나이에 펩시콜라의 사장이 되었다. 8년이 지나고, '마케팅의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스컬리는 최고로 촉망받는 CEO가 되었다. 그때, 26살 청년 스티브 잡스는 45살 대기업 회장에게 신생기업 애플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스컬리는 당연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는 실망하지 않았다. 1983년 3월 마침내 스티브 잡스는 스컬리를 설득하였다. 스티브 잡스의 메시지는 간단하지만 힘이 있었다. “남은 평생 설탕물을 팔 건가요. 아니면 저와 함께 세상을 바꿀 건가요?”

오늘날 설교자들의 문제 중 하나는 뻔한 이야기를 뻔한 방법으로 전한다. 어느 교회를 가도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아무런 감동 없이 전한다. 대개 교인들은 졸거나 딴생각하기 일쑤이다. 그나마 귀를 기울여 듣는 성도들도 다음 주가 되면 지난주 설교를 다 잊어버린다. 말씀을 실천하는 교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신학교에서는 감동과 열정을 쏙 빼버린 이론(신학과 교리)만 열심히 가르친다. 마치 회사에서 세일즈맨에게 물건 사용설명서만 열심히 외우게 한 뒤, 물건을 팔라고 내보내는 것과 같다. 그 물건을 사용할 때 누릴 수 있는 행복(설령 그것이 가짜일지라도)을 열성적으로 전달해도 살둥말둥한데 말이다. 이런 회사와 신학교는 매우 유사하다. 신학교는 차갑게 식어버린 교리나 죽어있는 신학만 가르친다. 영혼을 살리는 말씀의 능력, 감동, 흥분, 기쁨은 가르치지 못한다. 그러니 목회 현장의 설교는 언제나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하다. 그렇게 기독교는 점점 죽어가고 있다.

성경은 다양한 이야기 모음집이다. 시, 잠언, 사랑 노래, 역사 이야기, 편지, 묵시 문학 등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중에도 묵시 문학인 요한계시록은 이야기 중의 최고다. 처음 요한계시록을 읽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현대 유행하는 판타지 문학을 생각하면,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해리 포터’ 등은 상상의 세계를 묘사하지만, 누구도 어렵다고 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초대교회의 판타지 문학과 같다.

판타지 문학이나 묵시 문학은 현실 도피적 성향이 있다. 끔찍한 전쟁 경험이나 박해 경험은 현실 세상에 환멸을 느끼게 만든다. 1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경험을 통해 판타지 문학에 심취했던 톨킨은 기독교 신앙 자체가 “도피가 영혼에 유익하다”는 믿음에 근거한 모험 인지도 모른다고 하였다(Yancey, 154).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은 도피를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옥 밖의 자유로운 세상을 그린다고 해서 죄수를 경멸해야 하는가(Yancey, 153)? 얀시는 되묻는다. 톨킨은 ‘판타지라는 도피적인 매체를 이용하여 현실을 넘어선 영혼의 여정을 자연스럽게 그려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성경의 묵시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 보자.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의 부패와 쇠락을 보고 괴로웠다. 어떻게 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잠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깨울 수 있을까? 시스템을 바꾸고, 성전 관리와 경영을 잘하면 될까? 성전(교회)을 고치고, 개혁하고, 갱신하고, 재구성하기 위하여 계획과 전략을 짜면 될까? 온갖 인간의 방법과 생각을 동원했지만, 아무런 소망이 없었다.

그러다 포로로 끌려간 후 (성전이 아니라) 그발 강가에서 놀라운 환상(해답)을 본다. 그는 아주 기괴하게 생긴 네 생물의 형상을 본다. 그 형상은 밧모 섬에 있던 요한이 보았던 형상과 비슷하다. 네 생물은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의 형상이었다(계 4:7, 겔 1:10) 그 후 에스겔은 마른 뼈들만 가득한 골짜기로 간다(겔 37:1-14). 뼈들만 가득한 그곳은 끔찍한 장소다.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한 곳이지만, 에스겔은 환상 속에서 놀라운 희망을 발견한다(Roxburgh, 90-91).

에스겔이나 요한이 보았던 환상은 톨킨이나 C.S. 루이스의 판타지 문학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감동적이고 흥미 있다. 불행한 사실은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서 감동과 흥분과 열정을 잘 발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도 요한은 절망의 환경 속에서 끔찍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환상의 이야기로 이끈다. 그리고 말한다. 세상이 아무리 절망적이고, 끔찍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나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묵시 이야기에서 초대 교인들이 느꼈을 감동과 흥분을 맛보게 된다.

비록 지금 교회의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천상 보좌에 앉아 왕 노릇 할 것이라는 놀라운 환상을 듣는 초대교인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묵시로 전달하는 사도 요한의 뛰는 가슴을 상상해 본다. 나는 점점 소망을 잃어가는 현대 교인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묵시 문학이 가지는 복음과 희망과 영감을 발견하고 맛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배경락 목사는 기독교 인문학 연구소 강연자로, '곧게 난 길은 하나도 없더라' '성경 속 왕조실록' 등의 저자이다.
그는 일상의 여백 속에 담아내는 묵상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인문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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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미래의 사건



성경에 나타나 있는 미래의 사건들

몇 년 전에 고대 마야인이 예언했다는 ‘지구 최후의 날’(2012년 12월 21일)을 앞두고 전 세계가 들썩거린 적이 있었다. 당시 그날의 종말론은 고대 마야 문명의 달력과 성경의 요한계시록,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뒤섞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날인 12월 21일에 지구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과거에 일반인들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아주 정확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그의 예언의 98%는 잘못된 것이며, 나머지 2%도 실상 억지로 끼워 맞춘 해석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인류 최후의 날이 1999년 7월이라고 예언했지만, 실상 그때에도 별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국내외를 막론하고 각종 예언 관련 서적과 온갖 예언가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하여 왔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도 상기한 것과 다를 바 없이 전혀 믿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와 같이 엉터리 예언가들인 인간들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한다.

성경에는 수많은 예언들이 나타나 있는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적인 증거 중의 하나는 예언들의 성취에 있으며, 이러한 성취가 하나님의 전지(全知)에 대한 증거이다. 다시 말하면 전지하신 하나님만이 미래의 사건에 대해 정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언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바톤 페인(Barton Payne)의 성경예언대백과사전에 의하면, 구약성경에는 1239개, 신약성경에는 578개 도합 1817개의 예언이 있다. 이 가운데 68%의 예언은 과거에 이미 성취되었다. 예컨대, 구약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예언들의 약 300가지가 그분 자신에 의해 성취되었다. 또 예수님의 예언대로 A.D. 70년에는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려졌다(막 13:2).

그리고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멸망했다가, 마지막 때인 예수님의 재림 전에 다시 한 국가로서 회복된다는 놀라운 예언들이 있다(예레미야 31장, 에스겔 37장). 이스라엘은 그 예언대로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여, 약 1800년 동안 땅과 나라가 없이 전 세계에 흩어져 떠돌다가 1948년 5월에 나라를 되찾고 독립 국가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며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예언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들이 모두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졌듯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들도 모두 다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세상에 인류의 미래의 장면을 확실하게 나타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밖에 없다.

그럼 여기서는 미래에 펼쳐질 중요한 사건들을 성경에 나타나 있는 순서대로, 즉 예수님의 공중 재림, 그리스도의 심판대, 7년 환난기, 어린 양의 혼인잔치, 예수님의 지상재림, 천년왕국, 백보좌 심판,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과 영원 미래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성도들을 위해 오시는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휴거)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과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서 남아있는 우리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려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이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성도들을 맞이하러 오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던 교회의 성도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때까지 살아있는 성도들도 공중으로 이끌려 올라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흔히 ‘휴거’라고 부른다. 그때 모든 성도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할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 15:51).

2. 그리스도의 심판대

고린도후서 5장에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고 했다.

여기 그리스도의 심판대란, 교회시대에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과 휴거 이후에 있을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심판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 심판은 교회가 휴거된 후에 바로 시작될 것인데,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려내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보상을 받든지 받지 못하든지 하는 성격의 심판이다.

이 심판은 성도들의 도덕적인 선악을 판단하는 심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행위가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가려내기 위한 심판이다. 이 심판은 불로써 행해지는데 성도 각자가 행한 일이 불에 타지 않고 남으면 보상을 받고, 불에 타 없어지면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4~15).

3. 7년 환난기

마태복음 24장에 “그때에 큰 환난이 있으리니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때까지 그런 환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마 24:21)”고 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직접 예언하신 말씀인데, 구원받은 성도들이 휴거된 이후에는 이 땅에 큰 환난의 시기가 있으며, 그때 이 세상에 남은 자들은 큰 고통과 슬픔을 겪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를 불신했던 유대인들은 모두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크고 악한 통치자가 나타나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경배할 것을 강요할 것이다.

이러한 환난기의 주된 목적은 첫째로,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유대인들이 이러한 극심한 환난을 통해 자신들의 불신앙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리실 천년왕국의 백성이 될 준비를 하게 된다. 둘째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열방들을 심판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을 불신한 이방인들과 열방들을 심판하고,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한 자들만이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4. 어린 양의 혼인잔치(요한계시록 19:7)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어린 양의 혼인잔치’란, 7년 환난기가 끝나고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직전에 하늘에서 펼쳐지는 혼인예식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혼인예식을 갖는 것을 말한다. 이때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일반적으로 구약시대의 성도들과 대환난기 때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받은 성도들의 무리인 교회가 우주적인 축하 속에서 혼인 잔치가 열린다. 교회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사모하던 교회가 이렇게 완전한 연합과 일치와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혼인 예식이 끝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 위에 신부와 함께 오셔서 천년왕국을 세우시고 다스릴 것이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계 20:4).

5.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요한계시록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재림하실 때는, 많은 천군과 함께 백마를 타고 심판하러 오신다. 이러한 심판은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에게 시행되는데, 그것은 천년왕국에 들어갈 백성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골로새서 3장에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 3:4)”고 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7년 환난기가 끝날 무렵에, 만왕의 왕으로서 구원받은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지상에 재림하신다. 이때 그분은 적그리스도를 포함한 그의 원수들을 멸하시고, 또 신실한 유대인들을 박해한 열방의 이방 민족들을 심판하신다. 그리고 사탄은 천 년 동안 무저갱 속에 갇힌다.

6. 그리스도께서 성도들과 함께 다스릴 천년왕국(요한계시록 20:6)

그들(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분과 함께 통치하리로다.

7년 환난기를 거치고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때의 심판이 끝나면,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만왕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여 성도들과 더불어 지상에서 천 년 동안 통치하시는데, 이 기간을 ‘천년왕국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사탄은 결박당하여 무저갱에 갇혀있게 된다. 이 시대는 인류에게 평화와 행복의 시대가 될 것이다. 또 대자연은 완전히 변화를 받아 사막에는 장미와 같은 꽃이 피고, 사자는 어린 양과 함께 뛰놀며, 사람들은 장수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기간은 대번영의 시대가 될 것이다.

한편, 천년왕국의 끝에 사탄은 잠시 풀려나 천하만국을 미혹하여 최후의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천년왕국시대에 출생한 인간들도 죄의 성품과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그들 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하여, 잠시 풀려난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 사탄과 함께 최후의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반란자들을 심판하고 사탄은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계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7. 크고 흰 보좌의 심판(백보좌 심판)(요한계시록 20:11-12)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는데 그분의 얼굴로부터 땅과 하늘이 사라졌고 그들을 위한 처소도 보이지 아니하니라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으며 또 다른 책도 펴져 있는데 곧 생명책이라.

요한복음 5장에는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 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예수님)에게 맡기셨다(요 5:22)”고 했다. 그러므로 크고 흰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가리킨다. 헬라어 원어성경(데오스, 하나님)과 흠정역 영어성경(God, 하나님), 그리고 흠정역 번역 한글성경들은 모두다 ‘하나님’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변개시킨 성경들(천주교 계통의 성경들과 한글성경들)은 모두다 ‘보좌(the throne)’로 기록하여, 예수님(성자 하나님)이 심판주 이심을 가리고 있다.

인류 역사상 구원받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크고 흰 보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반드시 심판을 받도록 되어있다. 이것이 바로 ‘크고 흰 보좌의 심판’인 것이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인 새 예루살렘 도시가 세워지기 전에 행해지는 최후의 심판이 될 것이다. 이 심판의 크고 흰 보좌 앞에는 각 사람의 행위를 기록한 책들이 놓여 있는데, 각 사람은 자기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고 지옥 불못(게헨나)에 던져질 것이다(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8. 새 하늘과 새 땅(요한계시록 21:1)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니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고 바다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사탄 마귀로 인하여 죄악으로 가득찼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정화시킬 목적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시고, 또 만물을 새롭게 하는 과정에서(계 21:5),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왕국의 공간이 될 것이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9. 새 예루살렘과 영원 미래(요한계시록 21:2)

나 요한이 보니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같이 예비한 채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더라.

요한복음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처소가 바로 새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이 도시는 네모반듯하며 그 크기는 길이와 폭과 높이가 각각 만 이천 스다디온(약 2,400km)이라고 합니다(계 21: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새 예루살렘 도시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자리를 잡고 난 다음 새 땅에 영원히 정착하려고 내려오는 것이다. 그 내려오는 것이 마치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예비 되었다고 말씀했다(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여기서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신부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새 땅에 정착할 새 예루살렘 도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무궁토록 거하게 될 것이다(계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이 도시에서의 삶이 인류 역사의 최후의 목적지이며, 또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신 영원 미래를 향한 것이다.

지금까지 성경에 나타나 있는 미래의 중대한 사건들, 즉 예수님의 공중 재림, 그리스도의 심판대, 7년 환난기, 어린 양의 혼인잔치, 예수님의 지상 재림, 천년왕국, 백보좌 심판,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과 영원 미래 등에 대해 여러 사항들을 살펴보았다.

성도들이 믿음과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미래에 다가올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서 누리게 될 소망을 성경을 통해 올바로 알고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미래에 일어날 중요한 사건들을 성경을 통해 올바로 이해하고 복된 소망과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려야 한다(딛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미래의 사건들에 대해 잘 모르거나 혹은 그릇되게 이해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성경적으로 올바른 지식을 갖고 알려주어야 한다.

권영문 / 전 경성대 교직원, 현 기독교 칼럼니스트 / (한국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문제점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