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로



24장로(요한계시록 4:1-11)

사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24장로가 누구냐에 대한 해답은 그리 쉽게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명확한 답이 성경에 계시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계시의 흐름에 따라 성경적인 추리로서 해석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런 방법으로 해석한다 해도 역시 해석의 어려움이 따릅니다.

먼저 계 4장, 5장에는 하나님의 보좌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 보좌에는 하나님과 심판을 위임 맡으신 어린양, 그리고 네 생물과 24장로의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심판주의 명령에 의해 그 명령을 시행하는 천사들의 등장입니다.

이처럼 계시록의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 볼 때 구원 받은 성도들이 종말적인 하나님의 심판에 개입하는 경우는 예수님의 재림 시, 하늘군대로 아마겟돈에 내려오는 144000의 흰말 탄  순교성도들 외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24장로의 정체를 추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24란 수효는 구약적인 하나님의 백성들과 신약적인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전체적인 백성들을 통털어 나나낸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생명책에 녹명된 성도).
종말에 있을 심판은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이며 구원에 있어서도 최종적인 구원의 사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4장로들은 구원 받을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계되어 있을 것이며 하늘에서 이들의 구원의 사역을 주관하고 있는 영물들일 것입니다.
24장로들을 구원 받은 성도들의 대표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하늘에 올라가 있는 성도들은 그들의 구원이 완성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구원의 완성을 소망 중에 바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은 부활하여 신령한 몸으로 변하여 온전한 천국의 생활을 이루는 그 시기에 성취됩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하늘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그들을 위해 마련한 보좌에 앉아서 하나님의 종말적인 심판사역에 관여할 것이란 사실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늘의 상급 역시 백보좌 심판 시에 결정된다고 볼 수 있으므로 24장로들이 앉아 있는 보좌의 자리가 위대한 생애를 살아간 성도의 상급의 자리로 보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늘의 격이 높은 천사와 같은 신분의 영물 중에 속한 존재들이며 이들에 의해 교회가 주관되고 상급의 등급이 매겨지며 심판과 환난에서의 보호에 대한 모든 하나님의 섭리를 집행하고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 합당한 해석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계7:11-17).

물론 이들에게 장로란 이름이 부쳐진 이유는 모르지만 24장로들이 구원 받은 성도들의 모든 구원의 사역과 섭리를 집행하는 영물들이라면 그들에게 장로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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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에서 어린양께 경배하고 찬양하고 있는 24장로들은 대체 누구인가?(요한계시록 4:6~11)

- A.D.95~96년경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보았던 환상 속에서 천상에 있는 존재들에는 어떠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사도요한이 환상 중에 보았던 천상의 존재들은 크게 4종류로 나타나 있습니다.

1. 네 생물들
2. 24장로들
3. 천천만만의 천사들
4. 피조물
 
이들 중에서 네 생물들은 천사(스랍이나 그룹천사)와 비슷하지만 모든 창조물의 원형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얼굴은 4가지입니다. 이들은 모두 창조물의 원형으로서, 어떤 것은 길짐승(야수)의 우두머리로서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고, 또 어떤 것은 집짐승 중에서 가장 힘센 자는 송아지의 모습을 하고 있고 사람(인간)의 모습과 마지막으로 날아가는 독수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상에는 또한 24장로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24장로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들은 천사들일까요 아니면 사람들일까요?

천상에 있는 존재들 가운데 24장로들은 대체 누구일까요?

오늘날까지 신학자들 중에는 24장로들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하늘의 천사들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진짜 그럴까요? 우선, 그들의 모습을 잠깐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서 뒤쪽에서 좌우로 12개씩의 24개의 보좌 위에 앉아 있습니다. 둘째, 이들은 흰 세마포옷을 입고 있으며, 머리에는 금면류관(승리관)을 쓰고 있습니다(계4:4). 이들도 네 생물들이나 천사들처럼 하나님의 찬양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런데 천상의 존재들 가운데 맨 처음으로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께 경배드렸던 자들이 바로 이들입니다(계5:8,14). 이들이 드리고 있는 찬양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이들이 사용하는 노랫말의 주어는 네 생물들이나 혹은 천사들이 드리는 찬양의 주어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하나님 및 어린양을 제2인칭(당신)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네 생물들이나 천사들은 하나님 및 어린양을 제3인칭(그분)으로만 말합니다. 24장로들의 찬양의 예를 들어보면, 24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를 향하여 "당신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만물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계4:11)"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또한 계5:9~10에 보면, 이들은 어린양에게 "당신은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것의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일찍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찬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구약과 신약의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구원받은 성도들(사람들)의 대표자인 것입니다. 특히 이들의 숫자가 24인 것은, 이들이 구약의 12지파로 이루어진 구약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대표자들이기 때문이요, 신약의 12사도들로 이루어진 신약의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대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제자들이 누가 더 크냐 하는 논쟁에 같이 있었을 때에 예께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눅22:28~30). 직역해보면, "그런데 너희는 나의 시험들 안에서 나와 함께 계속 머물러 있는 채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게서 왕국을 내게 배정했던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배정한다. 이는 너희가 내 왕국안에 있는 내 식탁 위에서 먹고 있으며 마시고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너희가 [장차] 보좌들 위에 앉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을 심판하고 있으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사도들)은 시험 중에도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머물러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장차 [천국에서] 보좌들에 앉을 것이며, 예수님과 더불어 심판자로 참여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0:4에 보면, 정말 이들은 보좌들에 앉아있고, 이들에게 심판하는 권세들이 주어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24장로들 중의 적어도 12명의 사람들은 신약의 12사도들(참고로, 가룟유다 대신에 바울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나머지 12명은 구약의 12지파의 족장들이었던 야곱의 12아들이라는 것을 계7장의 인침사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인침받은 자의 숫자와 이름이 나오는데, 12지파의 족장들의 이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도로서는 르우벤, 유다, 요셉, 베냐민 등이 24보좌에 앉아 있을 것이고, 신약의 성도로서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빌립 등이 앉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거기에 앉아있는 것은 신구약의 구원받은 성도들을 대표하는 자들인 것이지, 이들이 천국에서 다른 이들보다 더 높다는 뜻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천상에 있는 24장로들은 구약의 구원받은 백성들을 대표하는 12지파의 족장들과 신약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을 대표하는 12제자들(가룟유다 대신에 바울로 추정)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보좌 뒤편에서 좀 떨어져서 양쪽으로 각각 12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그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 찬양하고 경배했습니다. 왜 그들은 어린양에게 엎드리며 찬양을 합니까? 이들 12사도들(정확히는 11사도들)은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만져보았으며, 함께 3년반의 공생애를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후에 보니 예수님은 무소부재하고 동시존재가 가능한 전능한 하나님이셨습니다. 특히 사도요한이 천상에 올라가 보 그곳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었고 거기에 어린양되신 예수께서 앉아계셨습니다. 사도요한은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이 처음에는 약간 흔들리는 모습도 있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들은 완전히 새롭게 되었고, 모두가 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순교를 하여 천국에 들어갔고, 천국의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12보좌에 지금도 앉아 심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끝까지 그리고 목숨을 바치면서도 주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핍박과 고난과 역경 중에도 이들은 항상 주님곁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천국에 들어와 24명의 장로들처럼 천국에서 제사장과 왕노릇을 하려면, 시험중일 지라도 주님을 떠나가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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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두 종류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는 지상의 교회
다른 하나는 천상의 교회
교회를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면 지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있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이루어가고 있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이미 완성된 나라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문제가 많고 불완전한 교회였습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반면 요한 계시록 4, 5장은 이미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곳은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완전한 성전입니다.
더 이상 문제가 없고, 아픔이 없고, 슬픔과 죽음이 없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에 열린문을 통하여 보좌에 앉으신 이를 보았습니다(4:2-3).
그리고 이십사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 제일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존재들이었습니다.

이십사 장로는 누구일까요?

요한 계시록의 풀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에게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있습니다.
하늘의 영적인 존재들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이십사 장로는 천사들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계시록 5:11에서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다고 하여 장로들과 천사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요하계시록 5:9~10에서는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노래하며 말하기를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우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으로 보건대 여기 이십사 장로는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서 뽑힌 대표자들입니다.
실은 하늘 성전에서 제사장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4에서 그들은 한결같이 [보좌]에 앉아 [흰 옷]을 입었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보좌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면류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찬양하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보좌와 면류관은 오직 주님에게 속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보좌와 면류관은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기도입니다.

계시록 2장 3장에 일곱 교회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보좌’, ‘흰 옷’, ‘면류관’ 이란 축복의 말씀을 봅니다. 
이러한 축복의 말씀은 천사들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24장로 입니까?

지상의 성소 봉사에 대제사장을 돕던 제사장들이 24반열로 나뉘어 반차를 따라 섬겼듯이 하늘 성소에서도 예수그리스도를 조력하는 24장로가 있어 찬송과 경배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여 승리의 상징인 면류관을 벗어 던지며 밤낮으로 찬송합니다.
이십사 장로는 왕과 제사장으로서 장차 세상을 심판할 성도를 대표하고 있으며 지금 하늘에서 진행 되고 있는 심판 자리에서 배심판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 이십사 보좌에 앉겠습니까?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있었을 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2:25-3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 ”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는 섬기기를 즐겨합니다.
아무런 대가도 누구의 칭찬도 바라지 않고 기쁨으로 섬깁니다. 

이십사 보좌에 앉을 자격의 사람은 “흰옷을 입고 다니리니”하십니다.

[계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 지금은 물질만능 황금숭배의 세상입니다. 이러한 물질제일주의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고 바르게 정직하게 서로를 사랑하며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과거에 없을 때에는 서로를 돌아보고 인정이 있고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풍요가 넘치는 지금 사람들의 마음은 강퍅해지고 돈 몇푼에 사람을 죽이고 빼앗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선거철이 되면 교회를 찾아갑니다. 정치가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적지 않지만 그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드러내지도 않고 기독교 정신에 따른 정치를 하지도 아니합니다. 정작 그들의 마음은 오직 권력을 차지하는 데 있습니다.

○ 많은 연예인, 체육인, 예술인들이 기독교인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통하여 자신의 구하는 것은 자신의 이름, 자신의 영광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사람,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십사 보좌에 앉을 장로의 반열에 들 자격의 사람은 “면류관을 얻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선 면류관은 주의 일에 수고한 사람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부자청년이 돌아가고 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시는 말씀입니다.

[마태 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벧전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면류관은 믿음의 싸움을 끝까지 마친 인내의 사람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계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이전에 우리는 늘 실수가 많은 존재, 죄와 유혹에 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덧입어 흰 옷을 입어 우리 모두는 구원에 합당한 천상의 귀한 존재, 사랑받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주를 위한 수고에 힘을 다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금관은 변치 않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견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믿음으로 승리한 자녀에게 주님이 예비하신 자리가 이십사 장로가 앉은 보좌의 자리입니다.
하늘의 이십사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이 있는 천사가 부러워하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온 이십사 장로들은 누구인가요?

요한계시록 4:4은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디에서도 이십사 장로들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교회를 대표할 가능성이 큽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천사일 확률은 극히 적습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천사가 다스리거나, 보좌에 앉은 경우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반복적으로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고 다스린다고 언급했습니다(요한계시록 2:26-27, 5:10, 20:4, 마태복음 19:28, 누가복음 22:30).

게다가, 여기서 “장로”로 번역된 헬라어는 천사를 언급하기 위해 사용된 적이 한 번도 없고, 특별히 교회를 다스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나이의 남성에게만 사용되었습니다.

장로라는 단어로 나이를 먹지 않는 천사를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십사 장로들의 옷차림 또한 그들이 남성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천사는 흰 색으로 나타나는 반면, 흰 옷은 구원의 순간에 우리에게 입혀지는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주로 믿는 자들과 관련하여 언급됩니다(요한계시록 3:5, 18, 19:8).

장로들이 쓴 금관 또한 이들이 천사가 아니라 남성임을 나타냅니다.
천사들에게는 면류관이 약속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성경에서 천사들이 왕관을 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관”으로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듯이 성공적으로 경주를 다 마치고 승리를 얻은 사람들이 쓰는 이긴 자의 면류관을 언급하는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10, 디모데후서 4:8, 야고보서 1:12).

어떤 사람들은 이십사 장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이 계시가 보여진 당시에 이스라엘 온 백성은 아직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장로들은 고난의 성인들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요한이 계시를 본 당시 그러한 성인들은 아직 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타당한 결론은 장로들이 구원의 찬양을 부르는 환희에 찬 교회를 대표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8-10).
이십사 장로들은 승리의 면류관을 썼으며, 구원자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거처에 다다랐습니다(요한복음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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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이 주신 "계시"입니다.

계시란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뜻하고, 이 계시는 비밀과는 구별이 됩니다.
비밀은 누구든지 그 사실을 알아내면 다 알 수 있겠지만 계시는 보거나 들어도 알 수 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의 "24 장로"의 해석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해석에서 모두가 흔쾌히 수긍하는 보편적 확정적 영적진리는 없고, 학자마다 그 주석이 다 다르며, 서로 누가 옳은지 온전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며 요한계시록의 "24 장로"에 대한 의미와 뜻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계시록은 요한에게 보여진 환상들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특성상 문자적, 사실적, 시간적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향한 계시록기록의 의미와 뜻을 가장 잘 이해하기위하여 개괄적인 해석 방법(Recapitulation)을 사용하여, 구약성경의 의미를 신약성경에서 더욱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밝히 나타내고 있는 계시의 말씀을, 복음적인 관점(그리스도의 렌즈)으로 접근하여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성막을 시내 산에 처음 세움(출애굽기 40:2)

모세가 성막을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은 후, 성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인간의 방법이 전혀 개입할 수 없는) 만들어진 거룩한 장막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 소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갔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그 성막을 관리하며(민 4장) 성막의 성결과 봉헌의 "직무"(출 40장)를 감당했습니다.

이 성막의 실체는 하늘에 있었으며(하늘의 참 성막, 히 8:1-2) 그때 그 구약의 성막(성전)은 단지 모형에 불과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지상교회와 천상교회로 구분되며, 머리되신 예수님과 그의 몸이 된 교회의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 부터 율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받기 보다는 신약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바와 같이 "천사"를 통하여 율법을 받았음을 말씀하고 있으며(행7:38, 갈 3:19) 이 율법을 받았던 것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통치하시는지를 보여주셨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자 그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다(롬 7:7-9).

신약이 구약을 더욱 분명하게 짝으로 해석을 해 주고 있으며, 복음의 실체로 이 세상에오신 성자 예수님도 구약을 인용하여 말씀을 선포하셨기에 무지한 "소수" 사람들의 "구약을 믿지 않는다"는 그러한 주장은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실체는 하늘에, 모형은 지상에

히브리서 8:1-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하늘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고 그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가 예수님이시며, 또 그곳을 주께서 세우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믿는 성도(교회)를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구약에서 천사를 통해 하늘의 실체를 보여 주신 것이며, 하늘의 모형 된 그 구약의 성막을 통해서 거룩한 관을 쓴(레8:7) 제사장들이 "제사(예배)의 직무"를 감당하게 됩니다. 그 성막에서 24명의 제사장들이 "이와 같은 직무에 따라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그의 아버지 아론을 도왔으니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규례더라" (대상24:19).

 

구약에서 천상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부분으로서, 왕상22:19-21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욥1:6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이 외에도 이사야6:1-3 의 천사들과, 이사야24:23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 "장로"는 천사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에서 하나님 보좌 주위에 나타나 있는 천사들의 무리 중에는 특별히 "24장로들" 이라 불리는 특별한 위치의 천사의 무리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정사와 권세를 주관하시며 사탄도 역시 하나님의 주관아래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천사들의 직무는 무엇인가?

 

그들은 하늘에서 하나님 얼굴을 보고 신적 완전성들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섭리와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두루 살피며, 하나님의 임재와 봉사의 축복을 받습니다(마 18:10, 계5:11,벧전1:12). 하나님의 섭리와 사건을 처리하시는 바 도구로 사용(창28:12, 단10:13),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도구로(히1:14, 행12:7, 시91:10-12), 하나님 원수들에 대한 심판을 수행(행12:23, 왕하19:35, 대상21:16), 그리고 마지막 심판 날의 맡은 바 책임(마13:30, 39, 24:3, 살전4:17)을 수행 할 것입니다. 성막(성전)의 제사장들이 직무를 감당하는 것처럼 천상의 천사들도 마찬가지로 그 "직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4장로는 구원받은 성도와 완전히 별개의 내용이다

계 11:16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 14: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성경을 살펴보면 24장로는 뚜렷이 성도들과 구별되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성경귀절에서 언급된 내용과 같이 "네 생물과 장로"들은 "새 노래"를 배울 수도 없습니다.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만약에 24장로들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대표(일반적인 해석)라면, 천사들은 휴거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과 함께 하였으므로 휴거 이후를 말하고 있는 이곳 성경과 또 다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24장로는 계시록 19:4을 마지막으로 계시록 20장의 "새 하늘과 새 땅" 이후에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게 됩니다.
그 이유는 마 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예수님의 12제자가 그 "일(직무)"을 맡게 됩니다.

결론(結論)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성막과 성전, 구약의 율법들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림자였으며(골 2:17),
예수님 자신이 성전(요 2:19)이었으며 계시의 "실체"였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주재(히브리서 2:10)시며, 완성자로서 사탄의 세력은 이미 "하늘에서 떨어져"(눅10:18) 약화되어 있지만,
이 세상에서는 "우는 사자"처럼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실체는 구약에서는 어떤 다른 방법이 아닌, 성막(성전)과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셨고,
때가 이르러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그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 구원의 강물은 오늘날 모든 신약 성도들에게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성령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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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4장을 보면 이십사 장로가 나온다.

우선 이십사 장로에 대해 이단들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살펴보겠다.

어떤 이단은 이십사 장로를 이십사 영으로서, 교회의 행정을 담당하는 24명의 장로라고 해석한다.
네 생물은 심판을 담당하는 무관(武官), 이십사 장로는 행정을 담당하는 문관(文官)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이단은 이십사 장로를 이렇게 해석한다.

“천국 처소 안에서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 영적인 서열이 있습니다.
그래서 연회나 행사가 있을 때도 서열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됩니다.
영적인 서열이 그만큼 앞선 사람이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 앉습니다.
하나님 보좌 좌우편에는 주님과 성령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각각 옆으로는 남자들 중 천국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엘리야, 에녹, 아브라함, 모세가 위치합니다.
그다음 서열이 옆으로 계속됩니다.
그다음 서열은 이십사 장로인데 모두 남자입니다.
여자의 서열은 남자의 서열과는 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중 서열이 앞선 분들이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 있게 됩니다.”

그들은 이십사 장로가 완전히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휴거되면 비로소 이십사 장로가 확정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단들은 이십사 장로를 중요하게 다루는 것일까.

그것은 교주의 말에 절대복종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신도들이 교주에게 온전히 충성을 맹세해야 더 높은 영적 서열에 오르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들 안에 이십사 장로가 있다고 하면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자기들 안에서만 성취된다는 억지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십사 장로에 대한 정통교회의 올바른 해석은 무엇일까.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계 4:4)

이십사 장로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이십사 장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성경이 말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지 않기 때문에 이십사 장로가 누구인가를 굳이 찾아내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바꿔봐야 할 것이다.
“이십사 장로들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이십사는 열둘 더하기 열둘이다.
신구약 성경에서 열둘은 완전수다.
앞의 열둘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열두 지파를 뜻한다.
뒤의 열둘은 신약시대 열두 사도를 의미한다.
야곱의 열두 아들의 자손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형성됐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을 통해 신약 교회가 만들어졌다.

둘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즉 성도이고, 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숫자 이십사는 신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 즉 교회를 상징한다.

이십사가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장로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장로 역시 교회를 의미한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 역시 교회의 장로였다.
쉽게 말해 교회의 대표자였다.

장로가 가진 상징성은 교회를 뜻하는 것이다.
이십사 장로들이 있는 곳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은 누가 들어갈 수 있을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교회가 들어간다. 요한이 본 천상에 있는 이십사 장로 환상은 영광과 안식을 누리게 될 교회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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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골라 당의 행위(요한계시록 2:6)


니골라 당의 행위(요한계시록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미워하는 것이 있다.
그것을 "니골라당의 행위"라고 하셨다.

니골라 당(the Nicolaitanes)이란?

니골라 당(the Nicolaitanes)은 성경에 두 번 언급된다.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한 번(계 2:6) 언급되고,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에 다시 한 번 언급된다.

에베소교회는 '니골라 당의 행위이고,
버가모 교회는니골라 당의 교훈이다. (계 2:15)

  • 사도행전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 요한계시록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 요한계시록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렇다면 도대체 니골라 당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놀랍게 니골라 당의 기원이 되는 니골라는 초대교회 최초 일곱 집사 중 한 명이다.
니골라가 언급된 사도행전 6장으로 가보자.

[사도행전 6:1-7]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성경은 니골라와 니골라 당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한다. 하지만 발람과 니골라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본다. 이것은 니골라 당의 특징 돈을 받고 예언하고 악한 지혜를 가르쳐준 발람의 교훈을 동일하게 따르고 있다는 뜻이다. 신약적 의미에서 발람의 교훈은 돈을 위해 복음을 변형시켜 팔아 먹는 모든 행위를 의미한다.

이필찬은 발람과 연관시켜 이렇게 말한다.

"곧, 과거에 발람이 거짓된 교훈으로 이스라엘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했던 것처럼 버가모 교회 공동체 안에 그와 같은 가르침이 있다는 것이다."[이필찰 <내가 속히 오리라>이레서원, 145]

초대교회 문헌에 의하면 니골라는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 이분법적 영혼을 주장하여 구원 받은 성도는 더이상 도덕적 순결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은 헬라철학 영향의 영향 아래 있는 고린도교회에서 깊이 스며있다. 그러나 계시록은 발람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 방탕이기 보다는 돈을 위해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마땅하다.

데이비드 E. 아우내는 요한계시록을 주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필자의 자의 대로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1) 니골라는 이방인이었다.
(2) 그는 안디옥 토박이였다.
(3) 그는 유대교 개종자였다.
(4) 일곱 집사 중 마지막 언급되것으로 보아 비교적 지위가 낮았을 것이다.
(5) 그는 역시 일곱 집사 중의 한 명이었던 스데반과 유사하게 성전과 율법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6) 사도행전 8:1에 언급된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예루살렘으로 도망갔을 것이다.(이부분은 오타갔다. 문맥상으로 '예루살렘으로'가 아니라 '예루살렘으로부터'이어야 한다.)
초대교부였던 이레니우스는 니골라 당이 가르치는 오류들에대한 응답으로 요한복음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역시 다른 교부었던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는 니골라 당의 이단 운동이 안디옥 니골라 추종자들의 오해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부도덕과 성적 방종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니골라를 변호하고 니골라의 동이가 순수했다고 생각한다.
[출처 WBC 요한계시록 1

니골라 당의 행위와 교훈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지만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반적인 흐름에 의하면 니골라는 복음이 자유를 강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는 어느 부분 오해할 소지를 많이 남겼다. 니골라의 가르침을 받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극단으로 몰아가서 헬라철학을 율법보다 더 우위에 두고 말았다. 즉 구원 받은 사람은 자유하기 때문에 더 이상 육신적 계명에 따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영과 육의 현저하 구분과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이에 대해 반그노시적 사상을 견제하기 위해 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해 말씀이 곧 육신임을 천명한 것이다.

우리는 두 구절을 생각할 때 두 구절은 의도가 약간 다르다.
하지만 중요한 핵심은 정확히 일치한다.
그것은 세속성이고 속물적 근성이다.
그들의 중심에는 존귀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탐욕과 욕망이 자리한다.
그들은 물질 숭배자들이며 방탕한 삶을 이끄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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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가모 교회의 신학이 된 나골라당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

 

제1세기의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나타났던 “니골라당의 행위”가 버가모 교회에 와서는 “니골라당의 교훈”(doctrine, 교리)으로 발전되고 체계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한 번 빠지면 벗어나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니골라당의 교리에서 벗어나려면, 세상을 포기하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버가모 교회 지도자와 신학자들은 태양신교 교리와 기독교 교리를 혼합시킨 교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니골라당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타협한 죄를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 버가모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더는 순종과 행위에 얽매지 않는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람들의 귀에 그런 철학적 주장은 매우 고상하게 들렸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초대 교회부터 3백 년 동안 걸어온 가난과 좁은 길 신앙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니골라당 교리는 크게 환영 받는 교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로마 황제의 눈치를 보면서 태양신교의 교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버가모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니골라당의 교리는 그들의 입지를 지켜주는 강력한 신학이 되었습니다. 니골라당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논리 때문에 수많은 성경의 진리가 변질되었고 태양신교의 행습이 기독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니골라당의 핵심 교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의무로부터 해방시켰다.”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사탄은 이런 니골라당의 교리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지금까지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거짓 구원론은 그 원조를 니골라당의 교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마음으로 순종할 때 얻게 되는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뜻합니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6~18, 22).

 

버가모 교회에서 발람의 죄에 빠진 지도자들은 돈과 세속과 권력을 탐하였고, 그런 모습을 본 사탄은 버가모 교회 속으로 니골라당의 교리를 깊숙이 밀어 넣을 수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타락의 길을 걸었고 영적으로 완전히 몰락하였습니다. 두려운 사실은, 현대 기독교회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속적 물결과 안일함과 권력이 현대 기독교회에 깊숙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그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유의 의미를 곡해시키는 니골라당의 주장이 마치 진리처럼 포장되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교인들이 불순종과 세속적인 삶 속에서도 “나는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호소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예수님) 네게(버가모 교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 2:16)

 

 예수께서는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아들인 버가모 교회에게 회개하라고 호소하셨습니다.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검(칼-말씀)으로 싸우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예수님이 보살피고 인도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과 싸우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받아들인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가 얼마나 악한 것이면 예수께서 직접 검을 들고 싸우겠다고 하셨을까요? 소수의 충성된 안디바는 목숨을 걸고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엄숙한 경고를 전했습니다. 버가모 시대에는 안디바가 예수께서 직접 붙잡으시고 사용하신 종들이었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발람의 죄에 빠진 교회 지도층을 따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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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 당은(Nicolaitan) 사람이 우선이라는 뜻으로 인권 위주의 가르침을 전했다.

사람을 우선시하면 교회가 부패하며,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한다.
세속주의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교회에서 하나님보다 사람을 우선시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미워하는 에베소 교회를 하나님께서 칭찬하신다.
‘너희 교회가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 보수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내가 정말 귀하게 생각한다.’
성경은 사람의 기준을 따르지 말라고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기준으로 끌어올린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나에게 와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또 세상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회개하라.’
회개하라는 것은 당장에 중단하라는 뜻이다. ‘이제는 세상과 타협하지 마라.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 마라.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마라. 그리고 회개하라.’
우리가 생각하는 회개는 보통 감정적인 후회, 혹은 어떤 행위적인 변화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회개는 뿌리의 변화를 말한다.
즉, 나를 나 되게 하고 내가 인정받아서 내 인생의 존재 이유를 찾고, 내가 끊임없이 물을 주어키웠던 그 뿌리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그동안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사랑받기 위해 계속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다 보니 허랑방탕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뿌리를 바꾸는 것은 그 사람들의 뿌리에서 하나님의 뿌리로 옮기는 것이다.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내 삶의 생명수의 원천을 깊이 파서 마시는 것이다.
나의 유일한 관심의 대상을 하나님의 목소리에 두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길로만 달려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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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골라당의 행위란 무엇인가?

십자가(十字架)의 도(道)
육체로 내려와서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이것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할 것이다.
죄 값을 단번에 해결하셨다(지불하셨다).

니골라 당´이라는 말은 성경에 2번 나옵니다(계 2:6, 2:14).
성경을 읽지 않는, 소위 일요일 교인들(Sunday Christian)들 중에서는 이 용어가 성경에 나오는지조차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니골라당 교리의 시작(the Nicolaitanes)

니골라 당은 두 곳, 곧 에베소 교회(계 2:6)와 버가모 교회에 주시는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계 2:14).

에베소 교회는 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 중의 첫 번째 교회로서 사실 사도바울이 소아시아에 개척한 교회입니다.
또한 일곱 교회들은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던 당시인 A.D. 92년-95년경 소아시아 지방에 실제로 존재하던 교회들로 영적으로는 교회가 시작한 오순절 성령강림 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교회가 휴거되기까지)의 교회역사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성령 충만한 일곱 집사를 택하지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이가 있는가 하면 이상한 교리를 만든 이가 있습니다.

특히 에베소 교회는 교회사에서 교회가 시작된 때로부터 A.D. 100년까지를 말하며,
버가모는 A.D. 325년-500년까지의 교회 기간을 말합니다.

'에베소' "처음 사랑"이란 뜻이며, 버가모 "많은 결혼"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니골라 당'이 언급된 두 성경구절을 자세히 비교하여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에베소 교회 기간에서는 단순히 "니골라 당의 행위“들이 "버가모 교회의 때에는 "니골라 당의 교리"로 바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시작이 완전한 악의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 당시(에베소 교회 기간)에는 "행위들"에 불과했던 것이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버가모 교회 기간) 교회가 정치권력과 결탁함으로써 "교리"라는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그 후 콘스탄틴 황제 이후 로마 카톨릭이 그 싹을 트면서 이 "성직 교리"를 자신들의 교리로 정착시켰고, 관료주의적인 성직계급이 체계화 되었습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당의 교훈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 발람의 교훈을 니골라당의 교훈과 연계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발람의 교훈이 신약에 와서 니골라당의 교훈과 일치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해 줍니다. 사단은 발람의 교훈으로 이스라엘을 저주받게 했던 것처럼 니골라당의 교훈으로 버가모 교회를 저주받도록 한 것입니다. 니골라당 이란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출된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니골라에 의해 창시된 교회 안의 한 파당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니골라는 새로운 교리를 세워 그 교리를 따르는 무리들과 한 당파를 형성했는데 초대 교회에서 이들을 가리켜 "니골라당"이란 이름으로 불러져 온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니골라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영혼과 육체를 분리해서 육체적 범죄는 구원에 영향이 없다는 교리를 내세웠던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영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육체로 범죄 해도 그 범죄로 인하여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이 같은 그의 새로운 교리는 아직 회개하지 못한 무리들이나 이방 종교의 생활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일부 버가모 교인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이 교리는 사단의 교활한 유혹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이단적 교리로써 말하자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음행 죄나 우상 숭배 죄를 범해도 그것이 그 사람을 구원에서 떨어트릴 수 없으며 이방인 중에 혹 음행이나 우상을 섬기는 일을 계속하고 있어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발람의 교훈처럼 하나님의 백성들로 범죄의 길로 이끄는 사단의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버가모 교회에 어느덧 니골라당의 이 같은 이단적 교리가 들어와 교인들을 유혹하였고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많이 생겨난 것입니다.

현시대적 교훈

현재도 이 사상과 똑같은 가르침으로 한국교회를 잠식해 가는 무리가 있습니다. 니골라당의 사상은 마치 현 구원파의 교리와 유사합니다(권신찬, 박옥수 계통...). 이들은 교묘히 정통교단인 듯한 간판을 붙이고 나와 외부에서는 분별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소위 믿는 그 순간(구원받은 시간)을 강조하며, 그 이후로는 어떠한 죄도 없이 의로운 상태에 들어갔으므로 올바른 믿음을 가진 인간이라면 더 이상 죄의식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며 또한 기도는 감사와 간구의 기도만 해야지, 회개의 기도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니 순진한 많은 양떼들이 미혹 받고 있습니다. 여하튼 주기도문을 하지 않고, 회개기도를 하지 않고, 죄의식을 느껴서는 안 되며, 방종하게 살아도 된다고 가르칩니다.

구원 받은 시점이 언제냐 등의 질문 등으로 교리전파를 하는 행위는 의심의 여지없이 100% 니골라당의 소행인 것입니다. 이 같은 교리가 악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교묘히 죄와 타협할 수 있는 편안한 통로를 갖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라는 것이 하나님의 바라심인데, 세상과 타협할 수 있는 길을 자유롭게 열어주게 되니 그 본질이 마귀의 사상인 것입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은 발람의 교훈과도 함께 상고해야할 중요한 대목입니다. 발람은 한두 푼 물질에 눈이 멀어 마귀의 하수인들을 따라간 자며, 이스라엘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자니 종말로 볼 때 음란, 탐심의 생활로 교회를 세속화시키며 교회의 외적 성장, 비대화에 치우치는 잘못된 종교지도자들 모두가 이 교훈을 받아야 할 대상이 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주.초 문제를 해결 못하여도 괜찮다는 식으로 가르치며 성찬식에 막걸리를 사용하며 기독인의 질서를 서서히 파괴하는 자유적 신학, 현시대는 많은 이들이 이 니골당의 교리에 빠질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였다면 그 고백 위에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하여 신앙의 열매가 맺어져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야 합니다. 시간이란 인간들만의 것이고 영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구애받지 않는 것을 알고 '사도신경'은 성경요약과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 속히 오실 주님께서 입에 날쌘 검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우리 이제 니골라당의 교리에서 벗어나 참된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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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골라

1.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했다가 다시 기독교로 개종한 자.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출된 일곱 집사 중 하나(행 6:5).
2. 기독교 초기의 교회들에 의해 니골라당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음.
3.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육신을 위한 기회로 삼음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잘못 오용하여 육신의 죄악을 조장하게 하였음(갈 5:13).
         

니골라당의 사상

1. 인간의 육신은 근본적으로 악하다.
2. 인간의 영혼은 육신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3. 인간의 구원에 육체는 중요치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육체가 짓는 죄는 정죄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4.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
         

현실적 결론

현재도 이 사상과 똒같은 가르침으로 한국교회를 잠식해 가는 무리가 있다. 니골라당의 사상은 마치 현 구원파의 교리와 유사하다(권신찬, 박옥수 계통...). 이들은 교묘히 정통교단인 듯한 간판을 붙이고 나와 외부에서는 분별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소위 믿는 그 순간(구원받은 시간)을 강조하며, 그 이후로는 어떠한 죄도 없이 의로운 상태에 들어갔으므로 올바른 믿음을 가진 인간이라면 더 이상 죄의식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며.. 또한 기도는 감사와 간구의 기도만 해야지, 회개의 기도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니 순진한 많은 양떼들이 미혹 받고 있다. 여하튼 주기도문을 하지 않고, 회개기도를 하지 않고, 죄의식을 느껴서는 안 되며, 구원 받은 시점이 언제냐 등의 질문 등으로 교리전파를 하는 행위는 의심의 여지 없이 100% 니골라당의 소행인 것이다. 이같은 교리가 악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교묘히 죄와 타협할 수 있는 편안한 통로를 갖게 한다는 데 있다.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라는 것이 하나님의 바라심인데, 세상과 타협할 수 있는 길을 자유롭게 열어주게 되니 그 본질이 마귀의 사상인 것이다.

니골라당의 교훈은 발람의 교훈과도 함께 상고해야할 중요한 대목이다. 발람은 한 두푼 물질에 눈이 멀어 마귀의 하수인들을 따라간 자며, 이스라엘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자니... 종말로 볼 때 음란, 탐심의 생활로 교회를 세속화시키며 교회의 외적 성장, 비대화에 치우치는 잘못된 종교지도자들 모두가 이 교훈을 받아야 할 대상이 된다.

계 2:6 "오직 네(에베소교회)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사랑은 원수 마귀도 어루만져 주는 것이 본질이 아니요,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않는 것(고전 13:6)이 본질임을 한 시라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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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구조(요한계시록 2:12-13) 라마나욧 공동체와 아둘람 공동체


영적 구조(요한계시록 2:12-13)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도시를 잡고 있는 영을 분별한 후에 도시에 나가 전도를 시작한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지역에서 영적 싸움에 이겨야 한다.
그래야 삶이 평안하다.

5병 2어의 기적을 행한 후에 배를 타고 가실 때 풍랑이 일어났다.
바다 위로 예수님이 걸어오셨다.

바람아 잔잔하라!
파도야 멈추어라!

거라사 지방을 잡고 있던 악령들이 갈릴리 바다를 뒤흔들었다.
군대귀신들린 자가 나타나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소서!
군대귀신들린 사람을 회복시켜주셨다.

우리 집안을 덮고 있는 악한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물러갈지어다!

다니엘을 붙잡고 있는 악한 영은 즉시 물러갈지어다!

바사국 군대가 막고 있을 때 / 바사 국군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 다니엘이 바사국에 머물고 있었다.
바사 국군 / 공중 권세를 잡은 자
땅의 바사와 공중 권세를 잡은 바사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오지 못한다.
미가엘을 내려보내어 통로를 만들어 주었다.
21일이 걸렸다.

라마나욧


라마나욧'은 생소한 용어다.
'라마'는 사무엘의 출생지이자 고향이다.
이곳에 사무엘의 관저가 있었고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벧엘·길갈·미스바 등지를 순회하였다.(삼상7:15~17)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곳에서 사무엘에게 그들의 왕을 선정해 달라고 요청했고,(삼상8:4~55)
이에 따라 첫 번째로 사울을 택해 기름부음을 준 곳이며,(삼상10:1)
이후 다윗을 택해 기름부음을 주었다.(삼상16:13) 

 
사무엘은 사울이 타락하자 결별하고 고향 '라마'로 돌아왔는데(삼상15:34~35)
이때 이곳에 '나욧'을 세워 후학들인 선지자들을 가르쳤다.

'나욧'은 거주지·거처·초원지대라는 뜻으로 지금의 '기숙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무엘은 말년에 사울이 타락하자 훗날을 기약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엘이 '라마'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동안, 하나님의 명에 따라 기름 부어 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미갈의 도움으로 도피한 곳도 '라마'였다.(삼상19:18)
사무엘은 사울의 행태를 고하는 다윗을 '나욧'으로 데리고 가서 말씀으로 교육했다.(삼상19:19)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다는 것을 안 사울은 세 번에 걸쳐 다윗을 잡아오라고 사람들을 보냈으나 그때마다 '라마나욧'에 온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예언하게 된다.(삼상19:21)

이때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거나 선지자적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황홀경 상태로 성령이 임한 현상이다.
이에 사울은 다윗을 잡으러 직접 가는데 그가 '라마나욧'에 도착하자 그에게도 성령이 임했고 사울은 사무엘 앞에서 예언하며 벌거벗고 종일 누워있게 되었다.

이는 성령이 임하여 사울의 죄와 수치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때 다윗은 피신하였다.
 
'라마나욧'은 선지자들을 가르친 말씀 공동체요, 교육기관이다.
또 말씀의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지성을 위해 성령의 은혜가 함께하고 역사하는 영성 훈련장이요, 성령 공동체였다.
아마도 다윗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며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라마나욧' 출신들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두란노서원'을 통해 2년 동안 후학들을 길러내고 그들이 흩어져 가정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순회 전도자가 되어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웠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성경 공부는 말씀을 지식적으로 공부할 뿐 아니라 성령의 조명과 은혜가 충만해야 한다.
오늘 나는 '라마나욧'을 다시 생각한다.

라마나욧이 무슨 뜻인가요?

라마(Ramah)는 사무엘의 고향으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두메산골입니다.
그리고 나욧(Naioth)은 작은 공동체를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사무엘이 고향인 ‘라마에 세운 공동체’라 하여 ‘라마-나욧’이라 일컫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한 일은 라마나욧 이라는 공동체를 세우고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의 질투를 피해 사무엘의 고향 라마로 피신한 다윗도 그 곳에서 함께 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다윗을 쫒아서 라마나욧으로 온 사울 조차도 하나님의 강한 임재 가운데 놓이게 되듯 라마 나욧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어떤 원수가 와도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바로 쓰러지며 예언을 하는 곳입니다.

어떤 적도 하나님의 영광 앞에 찬양하고 경배하게 되는 그런 거룩한 곳입니다.

그 때 라마나욧에 임했던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지금 라마나욧 캠프 통해 우리에게도 임하길 원합니다.

사무엘상 19:18-24

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라마나욧'은 지명과 장소가 합해진 단어입니다.
여기서 라마는 지명으로 사무엘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그와 함께 하면서 사역하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 사울과 결별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과 결별하기 전에 한 말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었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하나님께 불순종했던지, 성경은 그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삼상15:35).
아마도 이 말은 사람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욕이 아닐까 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이런 사울을 버릴 것이라고 선포하고 라마로 돌아간 것입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삼상19:18).

다윗은 사울의 딸이요 자신의 아내였던 미갈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생명을 보존한 후, 사무엘을 만나러 라마나욧으로 찾아 간 것입니다.
물론 사무엘에게 자신을 지켜줄 세상적 권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은 다만 사무엘이 하나님과 깊이 교류하는 참 선지자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를 라마로 이끈 것입니다.
이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그에게 나가는 자를 돌본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삼상19:18)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여기 살았다는 단어에 사무엘은 물론 선지생도들도 다윗을 환영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실 같은 장소에서 몸을 부딪기고 산다는 것은 환영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관계에선 쉽지 않습니다.
다윗은 당시 살아있는 권력 사울 왕의 눈에 난 자이니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반역죄가 되는 것이니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무엘은 물론 그의 제자들도, 인간적인 두려움을 이기고도 남을 정도로, 하나님의 신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라마나욧 이야기는 우리 교회의 역할과 관련해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라마나욧은 사단이 힘쓸 수 없는 곳이요, 죄인의 변화와 회복이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이는 라마나욧이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는 믿음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황혼 녁, 한 농부가 황소 한 마리를 끌고 황톳길을 걸어 귀가하는데, 소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뒤로 황토 먼지가 폭폭 일어났습니다.
그때 마침 붉은 석양 빛이 그 먼지 위에 내려앉자 황토 먼지가 금가루처럼 빛을 냈습니다.
한 사진 작가가 마침 그 장면을 보고 사진에 담아 “먼지도 아름답다!”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더러운 먼지도 빛을 입으니 아름다운 작품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티끌 같은 인생도 빛 되신 주님을 영접하면 밝게 빛을 내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변화되어 세상을 비추는 아름다운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한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여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 이런 공동체가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사무엘의 관저가 있었고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벧엘·길갈·미스바 등지를 순회하였다(삼상 7:15~17).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길갈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
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곳에서 사무엘에게 그들의 왕을 선정해 달라고 요청했고(삼상 8:4~55).

4-5 /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이에 따라 첫 번째로 사울을 택해 기름부음을 준 곳이며(삼상 10: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이후 다윗을 택해 기름부음을 주었다(삼상 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사무엘은 사울이 타락하자 결별하고 고향 '라마'로 돌아왔는데(삼상 15:34~35).

이에 사무엘라마로 가고 사울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사무엘
이 죽는 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이때 이곳에 '나욧'을 세워 후학들인 선지자들을 가르쳤다.
'나욧'은 거주지·거처·초원지대라는 뜻으로 지금의 '기숙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무엘은 말년에 사울이 타락하자 훗날을 기약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엘이 '라마'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동안, 하나님의 명에 따라 기름 부어 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미갈의 도움으로 도피한 곳도 '라마'였다(삼상 19: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사무엘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사무엘은 사울의 행태를 고하는 다윗을 '나욧'으로 데리고 가서 말씀으로 교육했다(삼상 19: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셨던 두 개의 공동체에 주목할 것을 요청하셨다.

그 하나는 선지자 사무엘이 이끌던 라마나욧의 공동체였고,
다른 하나는 반군 지도자 다윗이 이끌던 아둘람 굴의 공동체였다.

전자가 종교적 개혁의 진원지였다면, 후자는 정치적 개혁의 진원지였다.
이 둘은 부패한 종교권력과 교만한 정치권력에 맞서는 체제변혁의 중심이었다.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갱신을 위해서는 총체적 개혁의 진원지로서 기독 청년들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 경우 그 공동체는 라마나욧처럼 종교적 개혁의 진원지여야 하고, 아둘람 굴처럼 정치적 개혁의 진원지여야 한다.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2절)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다는 것을 안 사울은 세 번에 걸쳐 다윗을 잡아오라고 사람들을 보냈으나 그때마다 '라마나욧'에 온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예언하게 된다(삼상 19: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이때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거나 선지자적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황홀경 상태로 성령이 임한 현상이다.
이에 사울은 다윗을 잡으러 직접 가는데 그가 '라마나욧'에 도착하자 그에게도 성령이 임했고 사울은 사무엘 앞에서 예언하며 벌거벗고 종일 누워있게 되었다.
이는 성령이 임하여 사울의 죄와 수치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때 다윗은 피신하였다.

'라마나욧'은 선지자들을 가르친 말씀 공동체요, 교육기관이다.
또 말씀의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지성을 위해 성령의 은혜가 함께하고 역사하는 영성 훈련장이요, 성령 공동체였다.
아마도 다윗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며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라마나욧' 출신들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두란노서원'을 통해 2년 동안 후학들을 길러내고 그들이 흩어져 가정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순회 전도자가 되어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웠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성경 공부는 말씀을 지식적으로 공부할 뿐 아니라 성령의 조명과 은혜가 충만해야 한다. 오늘 나는 '라마나욧'을 다시 생각한다.


아둘람

사무엘상 22: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아둘람(dulam) / 피난처









만나와 흰돌


만나와 흰돌

요한계시록 2:17
귀있는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찌어다.이기는 그 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것이 있나니 받는자 밖에는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1.  성령께서 교회에게 말씀 하신다

교회는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얻은자들의 공동체이며 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거하시는 성도 개인의 육체이기도 하다. 
곧 교회는 성도에게 이 메시지를 가르쳐서 알게 하여야 할것을 말씀 하시는 것이 다음의 말씀인 '이기는 그에게는' 하시며 개인에게 말씀 하시는 것이다.

즉 구원을 입은 모든자 각 개인에게 말씀을 하신다 는 것이다.

2.  이기는 그에게 즉 이기는자에게는 감추었든 만나를 주시겠다

이기는 것은 두 가지의 승리가 있다.

사망의 권세에서 승리한 것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 승천 하심으로 믿는 모든자에게 값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의 이김이다.

성도가 새 생명의 삶 속에서 만나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단의 유혹과 싸워서 이기는 이김이 그 또 하나의 이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어서 이기게 하시겠다' 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 에게는 만나를 주시겠다' 고 하셨기 때문이다.

3. 만나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영의 양식

영적으로 승리한 성도는 이 만나를 먹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즉 성령의 소욕을 쫓아 행 할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소욕을 쫓아 행 할것인가?(갈 5:17)
아주 처절한 사단과의 피나는 영적인 싸움을 하다가 성령의 소욕을 쫓아 행하여서 승리 했을때 영적인 충만한 기쁨이 넘치며 배에서 생수의 강물이흐르는 것과 같은 느낌이나 또는 독수리가 날개 치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은 기쁨을 체험을 하여본 성도는 이 말씀이 곧 만나를 성도가 사단과의 싸움 에서 이길때 먹는것 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즉 광야에 내린 만나는 장차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서 구원 받은자들을 당신의 몸으로 즉 당신의 말씀으로 먹이실 새 생명의 양식인 말씀의 예표이며 감추인 만나는 즉 당신의 이름으로 승리하는당신의 자녀들에게 먹이실 영의 양식 즉 에덴 동산에 감추인 생명 나무의 과일을 감추인 만나 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계 2:7. 22:14) - 창세기 ‘생명 나무’ 에 대한 해설 참조
 
구원을 얻은 성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받았고 또 모든 원수의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다 받았으므로 성령님께서 함께 하는 성도는 곧 영적으로 잃어버린 에덴 동산을 회복한 것이며 언제든지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 생명 나무의 과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따 먹을수가 있는 것이다.

즉 생명 나무의 열매는 실제로 존재하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생명 나무의 열매는 영적인 열매이기 때문에 영혼의 구원을 받은자가 예수님과 동행하며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길때에 만 먹을수가 있는 과일 이다. 이 생명 나무의 과일을 먹을때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며 꿀 방울이 혀에 떨어져서 진짜 꿀이 혀에 녹아내려 온 몸으로 퍼져 나감으로 새 생명을 얻은 영혼이 힘이있고 몸도
강건하여 지는 것이다. 이때에 새 생명의 삶 속에서 병마도 물러가고 악한 세력도 떠나가는 것이다.이것이 곧 감주인 만나인 생명 나무의 열매를 예수님께로 부터 받아 먹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 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이 승리는 곧 하늘 나라에 기록이 되며 장차 천년 왕국에서 승리 한대로 다스리는 고을 권세를 받게된다.

3. 흰돌에 이름을 기록하여서 주시겠다

받는 사람만 안다고 말씀 하신 것에 대하여 알아 보자.
이 말씀을 이해를 하려면 먼저 흰돌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하겠다. 
창조 역사속의 비밀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하실때 짐승을 쪼개시게 하시고 그 쪼갠 고기 사이를 불로 지나가시면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하신다. 

이런 방식의 계약은 당시에 족장과 족장 사이에 불가침 조약등을 맺을때 짐승을 쪼개놓게 쪼갠 짐승의 앞에 칼을 꼽아 놓고 계약하는 인간들의 습관을 인용 하시면서 인간들이 쉽게 이해가 가게하기 위하여 하나님 께서 인간들의 풍습을 인용 하신 것이다.

흰 돌에 이름을 새기어서 주는 역사도 로마 시대의 경기 때에 승리자에게 흰 돌을 주는데(Zahn 이라고 부름) 그 흰 돌위에 승리자의 이름을 새기어서 주었다. 요즘의 우승컵 에다 이름을 새겨주는것의 유래라고 볼수있다.

즉 하나님께서 요한 사도를 통하여 말씀을 주실때 당시에 가장 알기 쉽게 기록하기 위하여서 당시에 인용하는 인간들의 관습이나 풍습을 따라 실행 하시고 기록을 하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본분의 내용도 당시는 구원을 받은 자들이 교회 공동 생활을 막 시작한 때이다.
즉 오순절이 시작이 되어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한 때이다.
그러므로 이 성령의 역사를 당시의 성도들이 쉽게 이해를 하게 하기 위하여서 당시의 경기에서 사용하는 이기는 자가 받는 상패를 이용하여서 요한 사도에게 기록을 하게 하신 것이다.
즉 성도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 했을때를 당시의 성도들이 알기쉽게 설명을 하신 것이다. 

흰돌위에 이름을 새기어서 이기는자에게 주시겠다는 것은 당시의 경기 때는 죽기 살기로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그 만큼 성도가 영적 싸움에서 사단에게 이기는 것은 경기에서 죽기 살기로 싸워서 이기는것 만큼 힘들고 또 값어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흰돌이라고 말씀하시는것은 곧 거룩하고 깨끗하여 흠이 없으신 반석이신 예수님을 말씀 하시는 것이니 그 거룩한 믿음의 반석위에 이름을 새겨서 주시겠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또한 성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새 생명 삶을 사는 가운데에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겼을때 영적으로 예수님께로 부터 받는다는것을 계시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말고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여 승리 한 자만 아는 것이니 받는자만 안다 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즉 영적으로 생명 나무의 과일인 숨겨진 만나를 먹는 당사자와 예수님 만 아신다 라는것이다.

흰돌에 쓰인 이름을 받는 것은 성도가 새 생명의 삶 속에서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 할 때마다 영적으로 받고 있는 것이다.
즉 성도가 사단과의 영적 싸움에서 이길 때마다 감추인 만나 즉 에덴동산의 감추인 생명 나무의 실과를 예수님과 함께 따 먹는 것이므로 영혼은 더욱 강건 하여지고 새 생명의 삶은 힘이 넘치는 것이다. 

또 이는 장차 도래할 천년 왕국때에 흰 돌을 받은 만큼 다스릴 권세를  받게 되고 생명 나무의 열매를 수확한 만큼 천년 왕국에 가지고 들어가서 계속 먹고 살게 되는 것이다.

단 지파가 빠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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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요한계시록 7장에서 열두 지파를 설명하면서 '단'지파가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변 :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인 맞은 자들인 십사만 사천을 지파 별로 나누어 소개 하는데, 특이한 것은 장자인 르우벤 지파부터 나오지 않고, 유다 지파부터 소개 되며, 단 지파가 빠져 있고, 에브라임 지파 대신에 요셉 지파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번째 질문인 장자 르우벤 지파 대신에 유다 지파가 맨 먼저 등장한 이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야곱의 육적인 장자는 르우벤이지만, 메시야 계보 중심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유다 지파를 맨 먼저 기록한 것은 더 올바른 순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민수기 2:3; 34:19
여호수아 21:4
역대상 12:23-37

등에서는 유다 지파를 맨 먼저 나열되었습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야를 중심으로 계보를 보는 것 입니다.

두번째 질문인 단 지파가 빠진 이유도 영적인 의미를 중심으로 살펴 볼 때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단 지파에 대해서는 창세기 49장에 이렇게 예언 되어 있습니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기서 '길의 뱀'이 의미하는 바는, 단 지파를 통해서 사단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뜻으로 해석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단 지파는 자기를 위하여 신상을 세우고 죄악을 행하였습니다(사사기 18: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그래서 단 지파는 저주를 받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 14만 4천명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후 3년 반 동안에 감람산으로 도망가는 무리 중에는 포함될 것입니다.

에스겔의 천년왕국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보면 단 지파도 새 땅을 분배 받는다고 되어있기 때문입니다(에스겔 48장).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단 지파를 뺀 이유는 단 지파 자체를 영원한 형벌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영적 계보, 즉 이스라엘의 온전한 구원을 의미하는 12지파 전체를 선포하기 위해서 11지파도 아니고, 13지파도 아닌, 12지파로 표기를 했어야 했고, 그에 따라 영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요셉을 한 지파의 족장으로 생각하고 에브라임 대신에 요셉을 넣었던 것입니다.  즉, 에브라임은 요셉의 후손으로 표기된 적이 있음을 볼 때(민수기 1:32-34) 에브라임 지파를 나타내는 또 다른 형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들을 12지파에 넣은 것은 요셉의 참된 섬김과 인내, 헌신이 그만큼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완전한 구원, 즉 12지파에 해당하는 신약의 12제자(사도), 그 제자(사도)들에 의해서 시작되는 교회의 완전성을 설명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 본문에서 단 지파가 빠진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 자료 출처 / 앤아버 소망교회 배헌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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