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의 그 서론 부분인, 계시록 1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고 이렇게 시작을 하죠? ‘계시(啓示)’라는 것은 제가 말씀드린 대로 가려져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계시라 그러죠? 아포칼립시스! 우리가 성경을 계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추측할 수도 없는,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비밀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드러나는 책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을 계시(啓示)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2장 9절로 가겠습니다.
자, 이렇게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할 하늘의 일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시는 것을, 우리가 계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유일하게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오늘 확인하고 가셔야 됩니다. 성경은 계시고, 그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에 하신 일에 관해서만 기록되어져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복음(福音)이라고 부르죠?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힌트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다른 이야기는 없어요.
자, 제가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들이겠습니다. 가인과 아벨과 셋의 이야기 아시죠? 가인이 아벨을 때려죽이고,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셋을 주신단 말이에요. 우리는 가인과 아벨과 이 셋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자손의 그 계보(系譜)는, 무죄한 자의 흘린 피로 이어진다는,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셋의 이름이 무슨 뜻이라 그랬죠?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신 자!’ 예수 그리스도가 죽고, 우리가 태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통해서, 새롭게 회복될,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즉 이 남은 자들을 감싸 안으신 예수께서, 저주의 비를 맞고, 대신 방주가 죽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자들이 살아나는 것! 노아의 방주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한 사람이 복에 근원이 되어서, 그 복 받은 아브라함을 끌어 올렸더니, 그 후손들이 줄줄이 타고 올라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죠? 거기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하세요. 그거 아십니까? 여러분? 이 땅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해 냈더니, 그 안에 줄줄이 따라 올라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의 구원(救援)이라고요.
그게 그리스도와의 연합(聯合)이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가 되셨다는 의미가 그거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건져 냈더니, 몸 뚱아리가 따라 올라오는 거예요. 바로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니온 크라이스트(Union Christ)!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살펴볼 수 있는 거구요.
또 자기를 죽일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을 올라가는, 그 이삭을 통해서, 자신이 매달릴 나무를 지고 올라가는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죽어야 할 자가, 준비되어진 어린 양이 대신 죽음으로써, 살아나게 되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는 이삭의 삶을 통해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시죠? 아브라함이 내가 올 때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했다. 그러죠? 바로 아브라함이, 이 이삭의 장면에서, 예수님을 본거라 말이죠?
그리고 얍복 강가의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설명해주십니다. 하나님과 겨뤄서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그 이기적인 축복만을 받아내려고 하는, 그 불가능한 인간들을, 하나님은 죽여 버리고, 다시 살리는 방법을 통해서, 그들을 새롭게 만들어서 구원해 내시겠다는 십자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얍복 강가의 사건이에요.
히브리 사람에게 있어서 이 ‘환도뼈’라는 것은, 전인(全人)! 전 존재를 가리키는 거거든요? 이 환도뼈가 부러졌다는 것은, 죽었다는 거예요. 야곱이 죽었어요. 죽고 다시 살아니니까, 하나님이 이름을 바꿔주는데 뭐라고 주시죠? 승리(勝利)!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바꿔 주죠? 환도뼈가 부러져서 죽었으면, 그건 진 건데, 왜 승리자라는 이름을 주냐 말이에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승리를 이루어 내셨고, 그 승리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실, 십자가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거예요. 뭐 얍복 강가의 이 야곱의 이야기를 가지고서, 하나님께 죽자 사자 매달리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더라! 이거는 바보 같은 성경 해석입니다.
자, 요셉을 통해서, 또 우리는 무죄한 자가 고통을 받음으로써, 어떤 백성 전체가 구원을 받는, 그 예수를 우리는 읽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요. 또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가 어떤 것이며, 또 그로 말미암아 건져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되는지를, 보여주시는 거예요. 유월절 어린양들이 죽죠? 예수님이 죽으시는 거예요. 그 피가 인방과 문설주에 발려진, 그 집 아이들만 살아난다고요.
그리고 그들이 홍해를 건너죠? 홍해를 건넌다는 것은, 이제 애굽하고 완전히 작별하는 거예요. 죄에서 건져 내지는 것이죠? 그리고 그 광야의 40년의 삶을 살게 됩니다.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와, 생수와, 놋뱀 사건을 경험하죠? 그리고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습니다. 그리고 옛 사람이 다 죽고, 새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죠? 이것이 정확하게 예수님의 삶이라고요. 정확하게 예수님의 삶이고, 여러분의 삶이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은 이렇게 계속, 예수의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똑같이 그 이스라엘의 삶을 먼저 살죠? 당시에 에굽에서는 히브리 사내아이는 모두 죽여 버리라는 바로의 명령이 있었어요. 그런데 모세는 살아납니다. 그리고 마치 홍해를 건너듯이, 물에서 건져지죠? 모세는요! 그리고 광야에 40년의 기간을 모세도 살아요. 미리! 미디안 광야에 가서! 거기서는 뭘 하는 거죠? 모세가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모세를 시험하는 기간이에요. 40년이! 그 다음에, 그 기간을 거치고 난 다음에, 시내 산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죠? 바로 이것도 똑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 돌판을 받아서 내려오는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섬겨요. 그리고 ‘이가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낸 여호와다!’라고 이야기 하죠? 그러니까 모세가 돌판을 깨버린다고요. 그 돌판은 어떤 돌판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하셨고, 하나님이 쓰신 거예요. 그것은 ‘거룩’을 상징하는 거예요. 거룩한 것은 죄와 함께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죄가 보이니까, 이 거룩! 이 돌판은 깨져야 되는 거예요. 그것은 심판을 상징하는 거죠?
그리고 다시 올라가죠? 모세가 올라가서 어떻게 합니까? 모세더러 돌판을 준비하라고 그러고, 하나님이 쓰시죠?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합쳐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들을 가나안으로 끌고 가신다는, 예수를 이야기 하는 게, 바로 그 십계명 돌판이 깨지는 사건이에요. 모세의 성질이 더러워서 깬 거 아니에요. 여러분!
사사기에 또 사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셔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인지, 그런 바보 같은 사사들을 들어가지고 쓰신다고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사람들에 눈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약하고, 바보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그 구원을 이룩해 내신다는 것을, 사사기를 통해서 ‘예수’를 보여주는 거예요. 거기에서 그 용맹스러운 사사의 용기를 본받자 이게 아니라고요.
자, 그리고 엘리야를 통해서, 또 한 번 예수님을 보여주시죠?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850대 1의 전투를 마치고 난 다음에, 그 이세벨의 저주의 전갈을 받습니다. ‘너도 죽여버린다!’ 그러니까 로뎀나무 아래 가서, 머리를 박고 덜덜덜덜 떨면서, ‘나를 죽여주십시오!’ 그런다고요. ‘하나님! 나를 죽여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이 어떻게 합니까? 까마귀를 보내서, 떡과 물을 보낸다고요. 그리고 마치 홍해를 건너듯, 그릿 시내를 건너서, 광야 40일을 걸어서, 시내 산, 호렙 산으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난다고요. 그런데 이 엘리야가 그 광야 40일을 무슨 힘으로 걸었다 그래요? 떡과 물의 힘으로 걸었다 그러죠? 만나와 생수! 이렇게 구약 전체는 다 그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과, 동일하다고요. 예수님은 헤롯을 피해서, 애굽으로 피신하시죠? 그리고 그 호세아서의 예언을,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 그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애굽에서 나온다고요. 애굽에서 출애굽을 하시는 거예요. 새로운 출애굽이죠?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홍해를 건너시죠? 언제 예수님이 홍해를 건넜어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잖아요? 성경은 세례를 받는 것을, 홍해를 건넜다고 이야기해요. 고린도전서 10장 1절로 가겠습니다.
그래서 홍해를 건넌 것을 우리는,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고요. 예수님이 그렇게 세례를 받으세요. 홍해를 건너신 거예요. 애굽에서 나와서!
그 다음에 어디로 가십니까? 광야로 가시죠? 광야에 가셔서 뭐하세요? 40일간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으시죠? 왜 금식을 하실까요? 왜 굶으시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뭐 했습니까? 40년 동안! ‘밥 줘! 물 줘!’ 이 얘기 밖에 안 했어요. 예수님은, ‘교회야! 이스라엘아! 너희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너희들이 원하는 밥, 떡, 물, 그걸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거야!’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금식을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시험을 받으시죠? 그 시험의 결론을 어떻게 내리시죠?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시험의 결론을 내리시잖아요?
예수님이 내리신 시험의 그 결론이 뭐였어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이, 이 광야를 살아가야 하는 목적과 이유였죠? 그것을 지금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삶을, 이스라엘이 실패한 삶을, 애굽에서부터 차례대로 완성해 나가고 계시는 거예요. 신명기 8장 보세요. 2절.
자 이 목적을 위해서, 너희들을 광야를 이렇게 살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죠? ‘아냐! 나에게는 떡이 필요해! 떡 줘! 복 줘!’ 그랬다고요. 40년 동안! 그러다가 다 망했어요. 그 실패(失敗)를, 예수님께서 회복(回復)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이스라엘과 교회가 실패한 삶을, 예수님께서 회복시키시고, 지금 완성시키시고 계신 거예요. 그 이야기가 적혀있는 책이 성경이라고요. 그리고 요한계시록도, 그 내용이 적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가리켜서 생수라고 하시죠? 그리고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자신을 뭐라 그럽니까? ‘내가 떡이다!’ 그러죠 예! 보세요. 광야의 그 이스라엘의 삶! 떡! 만나! 놋뱀! 시내 산! 그것을 예수님이 직접 다 사신다고요. 시내산은 어디에서 볼 수 있어요? 예수님이 산에 오르셔서, 새로운 율법(律法)인 산상수훈을 이야기하시잖아요? 예수님은 계속 지금 이스라엘의 삶을 사시는 거예요. 놋뱀은? 예수님 자체가 놋뱀으로 달리셨죠? 십자가에다가!
보세요. 이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그분의 삶에 대해서 기록해 놓고 있는 거예요. 그 삶 자체가 복음이며, 그 삶 자체가 계시이고, 그것이 성경이라고요. ‘그 이야기가 계시록에도 적혀 있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는 말에 의미라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는 말은, 구약 전체에 걸쳐서 예언되고 계시된,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공포하고, 선포하고,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소유격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계시다!’라는 뜻이 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은!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엉뚱한 그런 수수께끼가 아니라, 예수에 대해서, 그분의 사역에 대해서만, 기록해 놓고 있는 책이니까, ‘딴 생각 하지 말아요.’ 그렇게 얘기하는 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고 요한이 문을 여는, 진의(眞意)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전체를 통해서, 그림자로 계시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셨죠? 그리고 구약에서 계시된 데로 그 삶을 직접 살아 내셨어요. 우리가 지금 확인한 것처럼!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히브리서 1장 1절.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아들로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은, 이 성경 전체의 그림자로, 모형으로 이야기 해 놓은 그 이야기를, 지금 실체인 그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서, 바로 이 이야기였다고 이야기해주셨다는 거예요.
마지막! 거기서 ‘마지막’이라는 말은, 이 ‘에스카토스’라는 말은, 어떤 것의 끝이라는 얘기예요. 끝! 그래서 계시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살므로, 살아내심으로써 끝났다는 거예요. 그것을 적어 놓은 신약성경까지가,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의 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카토스’라는 말에서, ‘에스카톨로지(eschatology)’라는 종말론이라는 말이 나온 거죠? 그러니까 끝이에요. 계시는 인제 끝났어요. 구원에 관한, 우리에게 계시되야 될 구원에 관한 내용은, 이제 다 끝났어요 더 이상 없어요. 더 이상 어디셔널 인포메이션(additional information)은 우리에게 필요 없어요.
그런데 이 계시를 받는 다는 이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냐구요? 왜 그게 또 필요하냐구요? 이시대에는 더 이상 계시가 필요없어요. 마지막! 에스카토스! 하나님께서는 이제 마지막 때에,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그 계시를 완성해 놓았다! 이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뭔가 우리 구원에 더 필요한 게 있는데, 지금 우리는 모르고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그렇지 않죠? 우리는 다 알고 있어요. 성경에 이미 완성된 계시가, 적혀져 있는 거예요.
마지막이라는 건 뭐에요? ‘그 다음에 뭔가 다른 게 없다’는 게 마지막이잖아요? 그런데 이단들은 그 후에 꼭 뭐가 있어요. 예수님 이후에는 더 없어야 돼요. 그런데 그 이후에 박태선이 있고, 그 이후에 문선명이 있고, 그 이후에 마호멧이 있다니깐요. 잘못 가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이 계시의 마지막이에요. 그걸로 끝이에요. ‘그 완전한 계시! 그 홀로 충분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적혀 있는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구절에는,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기꺼이 버리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리고 그 예수의 관한 내용이 바로 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이라면, 우리에게 불리한 내용은 요만큼도 없겠다. 그 이야기예요. 이 요한계시록은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에게 공포를 주고, 우리에게 두려움에 떨게 하기 위해서 주신 책이 아니에요. 3절에 보면, ‘우리들에게 복주시기 위해서 이 계시록을 주셨다.’ 그러죠?
예! 계시록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야! 참 우리가 갈 그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가 받을 기업이, 이런 거구나!’ 라고 기뻐해야 되는 게, 요한계시록이에요. 그런데 계시록을 보고. ‘무섭다!’ 그래요. 여러분? 아직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무서운 거예요. 그 심판이 나에게 내려 올까봐! 아니에요. ‘세상은 그렇게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너희는 안전하게 내가 끝까지 데리고 가겠다.’는 게 계시록이란 말이에요. 두려우시면 안돼요. 계시록은 우리에게 복주시기 위한 책이에요.
자, 이렇게 요한계시록은, 오직 복음만이 적혀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볼 때, 다른 성경과 다르게 보죠? 다르게 보이잖아요? 언뜻 보면은! 구약을 비롯한 다른 책들이, 하늘의 것들을 원형으로 해서, 모형과 그림자로 이 땅에 것을 설명한 것이라면은, 요한계시록은, 진짜 하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걸 보여줌으로 해서, 이 땅에도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일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사도행전은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복귀하셨죠? 복귀하셔서, 그 하늘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나가고 계신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서,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어떻게 그 나라를 완성해 가고 계신지를, 사도의 삶과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설명해 놓은 게, 사도행전이라고요. 요한계시록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직접 기록을 해서, ‘그 일들이 바로 이 땅에서 너희들이 살아가는 그 삶에서, 이루어지는 그 일이야!’라고 관점을 다르게 설명해 주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나팔을 불죠? 이 땅에서는? 사도들이 나팔을 불죠? 어떻게요? ‘회개해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러니까 보는 관점이 틀리기 때문에, 어! 계시록은 뭔가 수수깨기이고, 이상한 우리가 알지 못한 그런 내용들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안 그래요. 하늘에서 내려다 본 복음이라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이해가 가시죠? 1절이 끝난 거예요.
그럼 2절을 한 번 보세요. 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 그 예수님이 주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증거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격으로 이렇게 나와요.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고 해 놓고, 그 내용이 무언지 2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2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 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인데, 그 계시의 내용을, 요한은 다 보았대는 거예요. 자기가 다 본 것! 그런데 그 본 것의 내용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라는 것이죠? 지금 제가 여태까지 말씀해드린 내용이 2절에 그대로 나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삶 자체가, 복음의 내용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좀 전에 살펴 본 것처럼, 그 예수님의 삶 자체가 복음의 내용인데, 그게 성경의 내용이고,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예수님의 삶은 누구의 삶을 살다 가신 것이죠? 광야에서의 교회의 삶을 살다 가셨죠? 그러면 그 예수님의 삶은, 여러분의 삶이기도 하다고요.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서는, 무슨 삶이 나와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삶이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을 어떻게 살다 가셨냐고요? 그 대대로 축복 받고, 복 받고, 만사형통하는 삶을 살다 가셨냐고요? 예수님이? 삼단 논법만 알아도,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거예요. 무슨 말만 열면, 축복이에요. 말만 열면! 설교가 어떻게? 그건 기독교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는 예수의 삶이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의 삶을 닮아 가야 하는데, 제가 성경에서 예를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시편 22편으로 갑니다. 시편 22편은 다윗의 시에요 다윗의 삶입니다. 1절부터 읽겠습니다.
시편 31편 5절로 갑니다. 역시 다윗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았죠? 왜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이 많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이야기가, ‘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예요. 이렇게 다윗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삶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요. 시편 69편 21절로 갑니다.
그러죠? 예수께서, ‘내가 목마르다.’ 하셨을 때 쓸개즙이 담긴 신 포도주를 마시우게 하죠? 똑같이 예수님의 삶에서 나타나고 있어요. 분명 이 시편은 다윗의 이야기에요. 그런데 누구의 삶과 똑같습니까? 예수님의 삶과 똑 같아요. 예수님은 다윗의 삶을 살아내고 계시는 거예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 삶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냐고요? 시편에 나와요. 시편 22편 아까 우리가 읽었던 그 말 아래에 붙어 있는 내용인데, 27절.
시편 22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하신 그 말로 끝내고 있어요. 다 이루었다! 테탈레스 타이! 라고 끝내고 있다고요. 성경이 이 다윗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이렇게 똑같이 기록해 놓은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나타내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은 교회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서도 그 예수의 삶이 나타내야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우리의 삶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재연되고 있는가? 그 복음에 내용이 우리의 삶으로 지금 살아내어지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 3절 보십시오.
그러죠? 듣고 읽을 뿐만이 아니라, 그 내용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는 거예요. 여기에서 왜 읽는 자는 단수이고,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은 복수인지 아세요? 그 당시에는 회당에서,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회당에다가 성경을 놓고, 또 예배를 드린 장소에다가 성경을 놓고, 한 사람이 읽어주고 설명을 해 줬다고요. 나머지는 듣고, 그것을 행한 거예요. 그래서 읽는 사람은 단수고, 듣는 자들과 행하는 자들은 복수인 거예요.
그런데 보세요. 복 있는 자들이면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야기 하는 거죠? 그 하나님의 백성들은 단순히 듣고 읽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기록된 내용을 지키는 자들이라는 거예요. 야고보서 1장 22절 보세요.
아무리 많이 들어도 소용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많이 알아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무리 서머나 교회에서, 많은 성경지식을 알았다고 해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그 내용이 안 나오면, 예수의 삶이 안 나오면, 꽝이에요. 가짜에요. 그거는!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한테, 나는 성경 이만큼 알아! 나는 이만큼 배웠어! 그걸 가지고 자랑하지 마세요. 그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된 자들이라니깐요.
이렇게 우리에게는 요구되는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과 의무라는 것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드리기 위해서 택한 단어지, 책임과 의무는, 당연히 우리의 삶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당연히 그 삶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예수님의 삶 속에는, 적극적인 순종이 있는가 하면, 수동적인 순종이 있어요. 수동적인 순종이 뭐냐면, 수동적인 순종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한 거예요. 그거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이신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수동적인 순종이라 그래요.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있을 수도 있어요. 예! 그 삶도 나타나야 되는데, 적극적인 순종을 하셨다고요. 뭐예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죽을 때까지 율법을 다 지키셨어요. 그 삶도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야 되는 거예요. 그 두 가지 순종의 삶이 우리의 삶에서 나타내야 되는 거예요.
만일 여러분들이, 배신당하고, 핍박받고, 환란가운데 처해있고, 사기를 당했고,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하나님을 원망할게 아니라, ‘와! 신기하게 정말 예수님의 삶이 어떻게 내 삶에 나타나고 있냐?’ 우리 기뻐하시라는 거예요. 어떻게 그 예수님의 삶이 그 내 삶에 이렇게 나타나고 있냐? 여러분 보고 돈 많이 벌지 말고, 가난하게 사시라는 거 아니에요. 고통 속에서 사시라는 게 아니에요. 열심히 일하세요. 열심히 공부하세요. 그래서 일등 하세요. 이왕이면! 그 돈도 많이 버세요 그거는 일반 은총이에요. 노력한 만큼 되는 거죠?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그렇게 된다는, 이 공식을 갖고, 기독교를 설명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기독교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어제 그제, 크리소스톰이라는 사람이 쓴 로마서 강해를 읽었거든요. 1,600년 전 사람이에요. 어거스틴보다 전 분이에요. 그분이 로마서 강해를 하셨는데 예수 믿으면, 병 낫고, 복 받고, 축복받고, 만사형통이라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어요. 뭐라고 이야기 하시냐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영생이 중요한 거야. 따른 데 신경 쓰지 말어! 네 몸을 죽여! 그래요. 그 천박한 황금의 옷은 좀 벗어 버려라? 그리고 영의 옷을 입어라! 이렇게 설명한다니깐요.
그 분 뿐만이 아니라, 어거스틴! 존 캘빈! 마틴 로이드 존스! 조지 휘필드! 이런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의 책을, 한 권씩만 읽어 보세요. 더도 말고 한 권씩만 읽어 보시고, 그분들이 한 설교를 열 편씩만 한 번 들어보세요. 그중에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살게 되고, 복 받고 병 낫고, 그렇게 되어야 된다. 아무 데나 손 얹으면 다 나아야 된다는 내용이, 한 줄이라도 있으면, 저한테 가져오시란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분들이 간 길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여태 그 웬수들은 어디서 무슨 책을 읽고, 뭘 듣고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기독교는 그거 아니에요. 우리는 예수를 믿는 거예요. 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향해서 지금 열심히 기도하고 계시면서. 응원하고 계신. 그 예수를 믿는 거예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오신 그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고요.
여러분! 영원한 생명이 달린 이야기 아닙니까? 영원한 생명을 걸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어떻게 이렇게 소문으로 신앙생활을 하냐고요? 평생 예수 믿고 지옥갈 수 있다니깐요. 정신 차리셔야 돼요! 지금 여러분의 삶에,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삶이 나타나고 계시다면은, 여러분은 잘 가고 계신 거예요. 잘 가고 계신 거예요.
1절 보세요. 1절에 보면, ‘그 계시의 일들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반드시 속히 될 일! ‘엔탁케이’라고 이야기하죠? 반드시 속히 될 일!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악한 세력이 망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 일이에요. 반드시 속히 될 일은!
그런데 이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어질 때는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기록된 거잖아요? 그럼 이미 이루어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기록을 했을까요? 그것을 우리가 공부하기 위해서는, 다니엘서로 먼저 가봐야 됩니다. 다니엘서 2장 28절에 보시면,
그래요. 이 이야기는,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다니엘이 그 꿈을 해석해 주는 장면이죠?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서 신상을 봅니다. 머리는 금으로 되고, 팔과 가슴은, 은으로 되고, 뭐 철로 되고, 흙으로 되고, 한 이 신상을 보죠? 그런데 뜨인 돌이 그것을 박살을 내는 거예요. 여기서 뜨인 돌은, 붕 떠있는 돌이 아니라, 시온 산에서 삽으로 뜬 돌이라는 거예요. 그 삼위일체의 하나님에서 떨어져 나온 예수님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뜨인 돌이, 이 신상을 박살내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지막 때의 이야기죠? 남 유대는 BC 586년에 망했어요. 그런데 그 전에 이미, BC 605년에, ‘갈그미스 전투’라는 곳에서, 유대가 박살이 나고, 그때부터 유대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기 시작했어요. 그때 다니엘이 끌려갔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600년 전의 일이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여기서는 장차될 일 후일에 될 일이라고 기록을 하지요.
그런데 지금 요한계시록은, 그 일이 이미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어 졌잖아요? 본래 계시록에서도, ‘유대지파의 사자가 이기셨고’라고 과거로 이야기 한다고요. 그분이 교회시대의 역사인, 그 책의 인을 떼실 분으로 묘사하고 있고, 요한은 그 인을 떼는 거를 보았잖아요? 계시록 5장 5절에 보시면,
그래요. 그 책의 인이 어떤 인이죠? 그 책! 다니엘서 12장 1절로 갑니다.
이 봉함해 놓은 이 책이에요. 마지막 때에 관한, 마지막 때까지, 이 봉함이 풀려지면 안 될 그 책의 인(印)이란 말이에요. 그 책의 인이, 요한계시록에서 그때에서야 비로소, 떨어지게 된다고요. 이 인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은,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제 그 교회의 역사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 역사가 이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이미 이제 이루어진 거라고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미 승리하셨고,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가 탄생됐고, 또 그 교회의, 이 땅에서의 삶의 내용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져 가는 모습이 적힌, 그 책이 이미 떼어지는 것을 요한이 보았잖아요? 그러면 이미 이루어 진거 아닙니까?
요한이 어떤 방법으로도, 그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가 이루어지는지는 불가능 할 것 같다. 그래서 울고 있었다고요. 이 인은 떼어질 것 같지가 않아요. 그래서 막 울고 있었더니, 천사가 나타나서,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미 이기셨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책에 적힌 일들이 이제 공개되게 되었다.’라고 이야기를 한다고요. 다니엘서에서 그 신상이 뜨인 돌이신 예수님께 박살이 나듯이, 그 일은 인제 이루어 진거예요.
그런데 왜 아직도 요한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냐고요? 자, 여기서 또 우리는 ‘올레디 낫 옛(already not yet)! 이미, 아직’ 그 원리를 적용하는 거예요. 요한은 영적으로, 환상으로, 하나님나라를 보았죠? 그곳에서 요한은 이미,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교회 모습을 봤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거기서 본 거예요. 요한이요! 그리고 악의 세력이 불못에 던져진 것도 보았어요. 이미 승리를 하신 거예요. 분명히 그 일은 다니엘서의 예언대로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우리의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하나님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잖아요? 그죠? 분명히 영적으로 요한은 봤지만, 아직 가시적인 그 하나님나라는 오지 않았다고요. 그 일은 영적으로 이미 이루어 졌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가시적으로도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미 예수님이 시작을 해놓으셨기 때문에, 더 더욱이나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기록해 놓는 거예요.
요한은 아직 가시적으로 우리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께서 이미 시작해 놓으셨으므로, 그 일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이렇게 확신에 차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마찬가지예요. 베드로도 똑같은 그것을 본 사람이죠? 베드로전서 4장 7절에 보면,
가까웠다 그러죠? ‘앵기조, 가까웠다’라는 말이! ‘앵기조’라는 말은, 아주 가까운 일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베드로후서 3장 3절 보세요.
말세에, 세상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야! 언제 비가 오냐? 비 온다며? 반드시 속히 된다며? 언제?’ 그런다고요? 그런데 비가 왔습니까? 안 왔습니까? ‘야! 백년이 지났는데도 안 오잖아! 바보 같은 놈! 산꼭대기에다가 배를 만들고 있냐?’ 120년 됐을 때, 비가 왔다고요. 마찬가지로, ‘야! 예수님이 반드시 속히 온다며? 언제 오냐?’ 이미 그 일은 시작됐다고요. 세상 사람들은 조롱하죠! 그러나 그날은 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그 소망의 메시지를 받으셔야 하는 거예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신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그 기간을 보는 게 아니라, ‘왜 200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안 오시냐?’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신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우리는 그 일을 보아야 되는 거라니깐요. 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반드시 일어날 거고, 이미 시작된 일은, 더더구나 확실하게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을 가리켜,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는 이 구절은, 시간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완성의, 필연성과 확실성에 강조를 둔 말입니다. 여러분!
네, 우리는 그 소망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매일 매일 돌아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정말 내 삶에 나오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준비해야 되는 거예요. 준비하는 거예요.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준비하는 거예요.
여러분! 톰 소여가 허클베리 핀의 뭘 부러워하죠? 쟤는 세수 하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고 깨우는 사람도 없고, 학교 가라고 때리는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까 톰 소여는 허클베리 핀을 부러워해요. 그런데 언제 허클베리 핀이, 톰 소여를 부러워하죠? 밤에 들어가서 잘 때! 톰 소여는 엄마가 잘 닦아주고, 옷 갈아 입혀주고, 따뜻한 방에서 재워줘요. 그런데 얘는 그 시궁창에서 놀던 그 모습 그대로 자야 되는 거예요. 이걸 부러워하시겠어요? 허클베리 핀의 삶을? 여러분의 삶이 지금, 조금 고난이 있고, 환란이 있고, 조금 예수를 믿으면서 하고 싶은 거 못한다는, 그런 불편함이 이걸 부러워하시겠어요? 허클베리 핀의 삶을? 내일 시험인데, 라면 세 개 끓여 먹고 퍼질러 자는 걔를, 우리는 복되다 그럽니까? 아침에 얼굴 탱탱 부어서, 시험도 못 보고, 그런 애를 복되다고 하냐구요? 지금 라면 먹고 잠잘 때는 편하죠? 하지만, 마지막은 반드시 속히 온다니깐요. 그때 어떡할 거냐 말이에요? 그때!
지금 계시록 1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은, 우리에게 그 이야기 해주는 거예요. 여러분! 조금 힘드셔도 힘내시고 끝까지 이겨내 보자고요. 그날은 반드시 속히 옵니다. 여러분!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1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는 그 구절을 통해서, 이 요한계시록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복음이 적혀있는 책이라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바로 복음이며, 우리에게도 그 예수님의 삶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때로는 견디기 힘들고 눈물이 날 때, 그때, 그 마지막 날은, 반드시, 속히 온다! 그 말로 위로를 받으시라는 거예요. 그것이 계시록 1절에서 3절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인 것입니다. 1절에서 3절까지 내용이 인제 클리어(clear)해졌죠? 다음주에는 4절부터 더 풍성한, 더 감동적인, 우리 하나님의 편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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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장 4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4-8)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새새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아멘.
언제 읽어도,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는 이런 묘사를 읽을 때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칩니다. 좋아서! 곧 오실 거! 반드시! 속히! 우리는 지난주에 3절까지 말씀을 살펴봤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여느 성경과 똑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啓示)이며, 그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라면, 우리에게 해(害) 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무서워 할 필요 없고, 두려워할 필요 없다! 3절의 말씀처럼, 그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복주시기 위한 말씀이지, 우리에게 겁을 주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시작된 그 하나님의 심판의 필연성(必然性)과, 확실성(確實性)과, 긴박성에 대해서도, 우리가 반드시 ‘속히’라는 단어를 공부하면서, 확인을 했죠?
오늘은 4절부터 공부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구조(構造)를 제가 나누어 드렸을 때, 1장 1절에서 8절까지를, 계시록 전체의 서론(序論)으로 이렇게 나누었죠? 그런데 사실 1절에서 3절까지 지난주에 공부한 1절에서 3절까지는, 요한이 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있으며, 요한계시록에 무엇을 기록하고 있는가를, 기록해 놓은 것이고, 진짜 이 편지의 서론은, 4절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전체가,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라고요. 그래서 4절부터 요한은, 편지의 서론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4절, 그리고 5절 상반부까지가, 편지의 인사말이에요. 우리말로 이렇게 변역을 해 놓으니까, 약간 끊어지는 부분이 어색하죠? 그래서 어떨 때는 성경의 장절이 오히려, 우리 성경의 이해를 방해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헬라원어로 보시면, 딱 끊겨 있어요.
5절 하반부부터 6절까지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7절 8절이, 요한계시록 전체의 주제(主題)가 되는 거예요. 다시 오시는 하나님!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 전체의, 주제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이렇게 기록하죠? 반드시, 속히, 오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전체의 주제입니다.
오늘은 인사말에 대해서, 그 앞의 4절과 5절 상반부까지의, 인사말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먼저 4절과 5절을 보시면요, 요한이 이 편지의 인사말을, 당시 사도들이 썼던 편지의 인사말과 동일한 형식으로 쓰고 있음을, 성경을 조금 깊이 보신 분들은, 금방 아실 수 있죠? 당시 사도들은, 일반적인 편지의 형식의 인사말처럼, ‘누가 누구에게 편지를 씁니다.’라고 그렇게 쓰면서, 거기에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구절을 추가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공부했던 에베소서를 한 번 보자고요. 에베소서에서 사도바울이 어떻게 인사말을 쓰는지 보시면, 아마 사도요한의 편지의 이 인사말이, 쉽게 공감이 가실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절로 가겠습니다.
(에베소서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서의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누가? 바울은! 누구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그런데 어떤 축언(祝言)을 붙이는지 보세요. 2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성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좆아 (‘아포’라는 뜻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는 뜻이거든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부터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렇게 인사하죠? 그러면 오늘 본문을 한 번 보세요. 스크린에 제가 띄워 드릴게요.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누가? 요한은! 누구에게? 일곱 교회에게! 어떤 추언을 붙입니까?)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누굽니까? 성부 하나님이요!)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일곱 영은, 제가 다음 주에 자세히 스가랴서를 들어서, 설명해드릴 텐데, 성령이에요.)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성부, 성자, 성령을 쓰고 있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역시 이 ‘말미암아’가 ‘아포, 프롬(from)’이라는 뜻이에요. 헬라어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
똑같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라고 축언(祝言)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짧은 설명을 붙이고 있어요. 그죠? 그냥 하나님 아버지! 성자 예수님! 성령님!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그 앞에 어떤 구약의 내용을 들어서, 간단하게 설명을 붙이고 있어요. 그 부분들을. 우리가 집중적으로 공부를 할 것입니다. 아주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에요!
먼저 우리가 칠(7)이란 개념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칠(7)이란 숫자가 많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이 칠(7)이란 개념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셔야, 일곱 나팔! 일곱 인! 일곱 대접! 일곱 뿔! 일곱 교회! 이런 것들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요한이 썼고 아시아에 일곱 교회에게 보내지는 것이죠? 당시 소아시아에 골로새교회라든지, 히에라 폴리스교회라든지 다른 교회가 많았어요. 더 유명한 교회도 많았는데, 왜 굳이 일곱 교회에게만, 이렇게 일곱 교회라고 숫자를 맞췄다 그랬죠? 제가! 당시 히브리 사람들이 숫자에다가 어떤 특정한 개념을 부여했는데, 그 일곱이라는 숫자는, 전체! 충만! 완전! 완성을 나타낸다 그랬죠? 그런 특별한 개념을 부여했다 그랬죠? 칠(7)이라는 숫자에다가!
그래서 요한이, 소아시아에 다른 유명한 교회들이 많았는데도, 굳이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쓴 것은, 그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그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을 초월한, 전체 교회에게 썼다는 뜻이라고, 제가 설명을 이미 해 드렸습니다. 각 교회에게 메시지를 전하죠? 그래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이렇게 각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메시지를 주고, 맨 마지막에 동일한 말로 끝을 맺어요. 어떻게 맺습니까? ‘이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렇게 끝을 낸다고요.
그러니까 이 편지 전체는, 어느 특정한 교회들에게 쓴 것이 아니라, 전체 교회! 여러분을 포함한 교회 시대를 살아가는, 전체 교회에게, 쓴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발신자는 성령님이고, 수신자는 교회인, 여러분인 것입니다. 이 칠(7)이라는 숫자의 개념은, 원래 창세기에서 나오죠? 하나님께서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 번째 날 안식하신 것에서, 완전수라는 개념이 나온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곱 번째 날에 안식을 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쉬다, 편안하게 거하다’라는 의미보다는, 창조가 완성이 되고, 하나님이 그 완성된, 창조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것을, 우리는 안식(安息)이다. 이런 개념으로 알고 계시면 되는 거예요. 그런 완성의 의미에서, 일곱 교회는, 전체로서의 완성된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곱 인이나, 일곱 나팔이나, 일곱 대접도, 그런 의미에서 심판의 완성과, 필연(必然)의 의미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를 갖다가 쓴 거예요. 그거는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에요.
지난번에, 어떤 청년이 저한테 가져다 준, 요즘 한인 타운에서 급속히 번지고 있다는, 요한계시록 강해가 있더라고요. 그걸 제가 보니까, 그분은 이 계시록을 완전히 잘못 보고 있더라고요. 그분은 지금 여섯 번째 대접이 쏟아졌다고 얘기해요. 그러면서 협박하더라고요. 인제 일곱 번째 대접이 곧 쏟아질 거라고! 그런데 굉장히 많은 분들이, 이 계시록을 그렇게 수수깨끼처럼 풀어 주면은, 그냥 거기에 쏙 빠져요. 계시록은 수수깨끼가 아니에요. 복음이에요. 전체가 다!
그건 심판의 필연성과, 현재성과, 당위성과, 긴박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한 가지 전체! 그 심판의 이야기를 칠(7)이라는, 그 완성(完成)! 완전한 수를 들어서, 일곱 개로 그냥 쪼개 놓은 거지, 시간적인 순서로, 첫 번째 인 떼어지고, 두 번째 인 떼어지고, 이게 아니란 말이에요. 하도 영화들을 많이 봐서, 뭐 오멘(Omen)! 이런 거를 봐서, 첫 번째 인 떼어지고, 두 번째 인 떼어지고 그런다고요. 전체의 이야기를, 이 일곱이란 숫자의 그 개념을 들어서, 일곱으로 그냥 나누는 것뿐이에요.
레위기 26장 18절 보시면,
(레위기 26:18)
18 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 배나 더 징치할 지라
그래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너희들 벌 받는다. 그런다고요. 그래도 안 지키면, 너희들 일곱 배나 벌 받는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런데 딱 일곱 배 벌 받는다는 얘기예요? 이게 아니죠? 칠(7)이라는 숫자는, 완전! 전체! 충만! 필연! 이런 뜻이라 그랬죠? 너희들에게 내려질 벌은, 아주 중한 것이며, 필연적인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그 벌이 일곱 배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해라!’ 그러죠? 그러면 490번까지 용서하고, 491번째는 가서 밟아도 되는 거예요? 아니죠? 끝없이 끝까지 용서해라는 거예요. 칠(7)이라는 숫자는요!
이제 칠(7)이라는, 일곱이라는 뜻이 무슨 뜻인지 잘 아셨죠? 그런 숫자들의 개념은, 거의 성경에서 빠져요. 육(6)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많이 싫어하는 것도, 이 칠(7)이라는 완전수에 모자라는 숫자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거고, 십삼(13)이라는 것도, 가룟 유다의 숫자거든요. 열두 제자 중에 아닌 가짜! 열세 번째 놈! 그래서 십삼(13)일의 금요일! 그러는 게, 나쁜 숫자로 우리가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 숫자에 들어있는 길흉(吉凶)의 개념들이, 거의 성경에서 나온 거라고요.
그럼, 이제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에 대해서는 공부를 했습니다. 발신자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요한이구요. 수신자는 전체 교회! 일곱 교회라 그랬습니다. 그럼 오늘의 결론인 그 축언(祝言)의 내용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그 축언의 내용을 보면, 사도 바울의 그 서신의 인사말처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으로부터 온, 은혜와 평강을 빌어주고 있죠?
그 은혜(恩惠)와 평강(平康)을 우리가 에베소서 공부할 때 자세히 공부했습니다. 은혜는 뭡니까? 값없이, 공짜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구원이죠? 평강은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평안한 마음의 상태! 그냥 아무 전쟁이 없고 평안한 상태가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는 속에서도 평안한,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내 마음속에 흔들리지 않는, 그 평안함! 그것을 ‘평강이다! 에이레네! 피스(peace)!’라고 이야기 한다 그랬죠?
그것은 삼위(三位)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 그럽니다. 이 구원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기능을 달리하셔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삼위의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헬라어로 보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이 성부 하나님 앞에, ‘아포’라는 전치사가 들어있어요. 프롬(from)! 그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와 평강!
그리고 그 ‘보좌 앞에 일곱 영’ 그 앞에도 또, ‘아포’라는 전치사가 있어요. 그 성령으로부터 온 은혜와 평강! 그리고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앞에도, ‘아포’라는 단어가 있다고요. 그러니까 요한이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전하는데, 그 은혜와 평강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이제 한 분, 한 분을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아포’라는 전치사 다음에는, 영어도 마찬가지지만, 소유격이 와야 되죠? 그런데 헬라어 성경을 보면, 이 ‘아포’ 다음에 주격이 와 있어요. 다! 요한은 왜 이렇게 문법적인 파격을 사용해서, 굳이 이 아포라는 단어 다음에, 하나님을 주격으로 썼을까요? 그것은요, 구약에 기록된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고유명사에 대해서, 요한이 침범하지 않으려는, 경외심을 갖고 쓴 거예요. 그리고 그 절대성과, 주권성을 강조하려는 의미에서,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가 개역 성경만 보면은, 그런 것에서 감동이 덜 하다고요. 헬라어 성경을 보는 사람, 그리고 이 편지를 그대로 받아서 들었던 유대인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어요. 왜 그런 단어를 썼는지! 조금 있다가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왜 이런 단어를 썼는데,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홉 살짜리가 계시록을 들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렀는지, 구약을 다 알고 있으면, 이런 단어들이 금방 우리에게 이해가 간다고요. 제가 그래서 구약을 들어서, 여러분들에게 계속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성부하나님을 표현하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유대인들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이 말을 딱 들었을 때, 어떤 떠오르는 구절들이 있었다고요. 구약의 내용들이 있었다 말이에요. 그 내용을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을 굳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이렇게 표현을 해 놓았는지, 우리가 이제 구약에 능통해 있었던, 초대 교회의 그 유대인의 입장이 되어서, 이 단어를 다시 보자고요. 그래야만 우리에게 똑같은 감동이 온다 말이죠? 여러분이 헬라어는 잘 모르시니까, 4절을 영어로 한 번 보겠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그 단어가, 그레이스 엔 피스 투 유 프롬 힘 그리고 후 이즈, 후 워즈, 후 이즈 투 컴(Grace and Peace to you from him who is, who was, who is to come) 후 이즈, 후 워즈, 후 이즈 투 컴(who is, who was, who is to come)! 이게 헬라어의 가장 근접하게 번역한 영어예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를, who is, who was, who is to come 이렇게 번역을 한다고요. 어디서 많이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구절을? 출애굽기 3장으로 가겠습니다. 14절.
(출애굽기 3:14)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갓 세드 투 모지즈 “아이 엠 후 아이 엠”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그런다 말이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에요. 모세가, ‘하나님!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 누가 보내서 왔냐?’ 그러면 내가 누가 보냈다고 이야기해야 됩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직접, 아이 엠 후 아이 엠(I am who I am)으로 이야기 하신다고요.
그런데 이 말은, 현재형으로도 쓰이지만, 미래형으로도 쓰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계시는 하나님! 그리고 앞으로도 계시는 하나님! 이런 뜻이거든요. ‘아이 엠 후 아이 엠’이라는 것이! 히브리어로도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그러죠 그 ‘여호와’라는 것이, 지난번에 우리가 공부했었죠? ‘하야 네페스 하야’ 거기에서 ‘하야’라는 게 비(be)동사거든요. 존재를 상징하는 거예요. 거기에서 나온 말이 ‘여호와’라고요.
유대인들은 많은 문서에서, 이 표현을 많이 썼어요. 즐겨 썼다고요. 그래서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이 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연상할 때 떠오르는 단어였어요.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들을 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그 하나님을 금방 연상할 수 있었던 거예요. ‘아! 그때 모세에게, ‘아이 엠 후 아이 엠(I am who I am)‘이라고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이구나!‘ 라고 유대인들은 금방 떠 올릴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하나님이, 지금도, 이제도, 우리에게 역사하신다면, 우리가 이렇게 낙망하고, 실망할 이유가 없겠구나!’라고 힘을 얻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단어 하나가지고도 그들은, ‘아! 그 하나님이 지금 나를 끌고 가신다면, 내 마음에 왜 평강이 사라지겠느냐?’ 그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요한은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면서, 일부러, 그런 하나님의 대한 묘사를 동원한 것입니다.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이사야서 41장 4절.
(이사야 41:4)
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나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에 귀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셔야, 여러분은 그리스도 인이에요. 아셨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역사를 결정하였느냐?’ 그러시는 거예요. ‘처음에도 나 주가 거기 있었고, 나중에도 나 주가 거기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서, ‘어제도 있었고, 나중에도 있는 분’으로 묘사를 하신다고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이사야서를 거의 외웠던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이 말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보시면, 이스라엘사람들이 이 말을 딱 들었을 때, ‘아!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라면 지금 나도 안전해!’라고 그렇게 느꼈을 텐데…. 어딜까요? 1절로 한 번 올라가겠습니다.
(이사야 41:1-3) (표준새번역)
1 "섬들아, 나의 앞에서 잠잠하여라. 백성들아, 송사를 가져 오너라. 가까이 와서 말하여 보아라. 와서 함께 판가름하여 보자.
2 누가 동방에서 한 정복자를 일으켰느냐? 누가 그를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하였느냐? 누가 민족들을 그에게 굴복하게 하였느냐? 누가 그를 왕들의 통치자로 만들었느냐? 그의 칼은 그들을 쳐서 티끌처럼 만들고, 그의 활은 그들을 흩어서 검불처럼 날리게 하였다.
3 그가 거침없이 질주하여 그들을 추격하니, 미처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다.
무슨 만화 영화 보는 것 같죠? ‘인크레더블(incredible)’에서 그 막내아들이 막 달리는 발이 땅에 안 닿잖아요? 여기 성경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런 거! 마치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다. 누가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였느냐? 누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였느냐? 태초부터 나 주가 거기 있었고, 끝 날에도 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태초부터 나 주가 거기 있었고, 끝 날에도 나 주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당신을 설명하시면서, 어떠한 구절 뒤에다가,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 놨냐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적의 손에서 건져 내셨는지를, 설명하신 다음에, ‘그가 바로 나다!’라고 이야기 하시면서, ‘나는 태초에도 있었고, 장차 올 이다.’라고 하나님이 설명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려움이 닥치고 핍박을 당하고 했던 그 이스라엘이, 그 이 구절을 딱 들었을 때, 아! 구약의 그런 내용! 그런 내용들을, 떠올리셨을 거라고요. 그러면 그 하나님이, 그렇게 이스라엘을 신실하게 구원해 내신 그 하나님이, 이제도 지금 내 삶을 이끌고 가신다면, ‘나는 안전해! 나는 평안해! 힘내야지!’ 그게 요한계시록이라니깐요 계시록이 기록된 목적이에요. 그것이!
한 군데만 더 보겠습니다. 이사야서 44장 6절.
(이사야 44:6)
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의 다른 신이 없느니라
요것도 역시 하나님이 당신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즉 어제도 있었고, 이제도 있으며, 장차 올 이! 내일에도 있을 그게, 바로 나다!’라고 이야기를 하신다고요. 어느 구절에 그게 붙어 있는지를 한 번 보시자구요 이사야서 44장 1절로 가겠습니다.
(이사야 44:1-5)
1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여수룬’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을 표현하는 시적인 표현이에요. 어려운 거 아닙니다.)
3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
5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그러시면서 그 밑에다가,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그러신다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요한이 편지를 딱 보냈을 때, 유대인들은 금방 이런 구절들을 딱 떠올린 거예요. ‘아! 그 하나님? 맞아 내가 잊고 있었구나! 그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궁극적인 참 복을 내리시는 그런 하나님인데, 내가 이렇게 절망하고, 이렇게 낙망하고 있을 수가 있겠는가? 아니야! 힘을 내야지!’
요한은 이렇게, 다른 신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는, 불변(不變)하시는 역사의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신 언약을, 한 번도 실패치 않으시고 이루어내셨고, 이루고 계시고, 이루어 가실 분이다.’라는 것을, 지금 요한이 묘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그렇게 절망과 슬픔 속에 있지 말고, 힘을 내라! 힘내라!’라는 거예요.
요한은 그렇게 하나님을 묘사하면서, 애굽! 가나안! 바벨론! 그 어떤 대적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추풍낙엽이었다. 어떤 대적도 하나님 백성들을 뺏어갈 수 없었다. 하물며 로마일까 보냐? 당시 사람들에게는요! 여러분들에게는요? 지금 너희들을 괴롭히고 있는, 그 마귀의 세력들은, 지금 위풍당당해 보이지만, 곧 지리멸렬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현실을 보면서, 실망하지 말고. 그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를 이끌어 가셨는지. 그걸 봐라! 그러니까 너희들이 지금 이 처한 현실이. 너희들이 낙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유가 있어서 허락해 놓으신 거니까. 낙망하지 말고. 그 하나님이 이루어 내신 그 약속들을 보면서. 힘을 내라는 거예요. 평안을 얻으라는 거예요.
자. 어제도 계셔서, 그렇게 이스라엘을 보호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끌어 가고 계시며. 장차 오셔서. 하나님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확신해서. 그 은혜로 말미암는 평강을 누리라고. 사도 요한은 편지의 시작을,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위해서, 역사를 경륜해 나가고 계시다는 것을. 너희들은 알라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을 보시면 수많은 군왕들이 일어났고,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지만, 역사는 아브라함! 야곱! 이삭을 중심으로 움직여 갔다니깐요. 하나님의 눈에는, 다른 인간들은 하나도 안 보였어요. 아브라함만 보였어요. 아브라함만 바라보고 가셨다고요. 하나님이요! 그러니까 이 역사의 주인공은, 여러분들이에요. 빌 클린턴? 무슨 왜 갑자가 지나간 대통령이 나오죠? 조지 부시! 빌 게이츠! 이런 사람들 부러워할 거 아무 것도 없어요. 여러분들이 이 역사의 주인공이고,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를 끌고 간신다니깐요.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히스토리(history)라고 하는 거예요. ‘후 이즈 후 워즈 후 이즈 투 컴(who is, who was, who is to come)’이라고 했던, 그 히즈 스토리(His Story)란 말이에요. 역사는요! 그분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거라고! 이 역사는요! 그러니까 힘을 내셔야죠. ‘아이고, 나 같은 게 무슨?’ 아니에요. 성경을 몰라서 그래요. 여러분의 신분을 너무 모르셔서 그래요. 여러분은? 그런 존재라니깐요.
자, 헬라어로 그 부분을 보면, 그 시제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더 명확하게, 요한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도 계시고’를 의미하는 그 ‘호 온’이라는 헬라어는, 헬라어 비(be)동사인 ‘에이미’의 현재분사예요. 제가 헬라어 현재분사는 어떤 뜻이 있다 그랬습니까? 진행형의 뜻이 있다 그랬죠? 계속되는 진행! 그러니까 ‘이제도 계시고’라고, 그들이 ‘호 온’하고 유대인들이 들었을 때는, 하나님의 그 영원성에 대해서 금방 느꼈다고요. 지금만 계시는 게 아니라, 앞으로 계속되는!
요한은 시제를 하나 쓰는 데도, 굉장히 주의를 기울인다니깐요. 현재분사를 썼다니깐요. 거기다가! 이제도 계시는! 지금도 계시지만 계속 존재하실, 그 ‘하나님의 영원성’을 표현한 거예요. 전에도 계시고는, ‘호 엔’이거든요 ‘에이미’ 동사의 미완료시제예요. 그들은 금방 알았겠죠?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이 미완료시제라는 것은, 전에도 계시고 있었으며, 그 계신 상태가 언제 끝나는지,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 이 미완료라는 것은, 과거에 어떤 시작된 것이, 끝과 결말이 언제인지 모르는 그 시제가, 미완료시제예요. 그러니까 ‘전에 계셨던 그 하나님이, 영원히 계실 그 하나님이다.’라고 표현을 해 놓은 거예요. 전에도 계신! 그 뜻으로! ‘호 엔’이란 뜻은요! 그러니까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증거하는 단어라고요.
세 번째로, ‘장차 오실 이’로 나타내는, ‘엘코메노스’는 ‘오다’는 단어인, ‘엘코마인’의 중간태! 현재분사에요. 그래서 정확한 뜻은, ‘지금도 오고 계신 이’라는 뜻이에요. ‘장차 오실 이’ 그러면, 뭔가 정지되어 있는 느낌이 들잖아요? 미래에 정지되어 있는! 그러니까 단순히 미래에만 계실 분! 그 뜻이 아니고, 헬라어는, 지금 오고 계신 분! 장차 우리가 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릴 복을 다 들고, 우리에게 오고 계신 분! 그런 역동적인 하나님을 표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런 배경을 알고, 다시, ‘어제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이 구절을 다시 보시면, 감동이 더 하겠죠?
이 요한이 얼마나 이 현재의 교회들! 이 계시록을 읽는, 당시, 당시, 당시의 현재의 교회들에게, 힘을 주려고 노력했냐면, 원래는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되야, 제대로 된 차례잖아요? 그런데 이 현제를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강조를 하기 위해서, ‘이제도 계시고’라고 현재를 맨 앞에다 놓는 거예요. ‘이제도 계신, 그 하나님이, 과거에도 계셨고, 미래에도 계실 분이다.’라고 설명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요한은요, 내용적으로나, 문법적으로나, 아주 치밀하게, 단어들을 선택해서,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고난과 고통과 환란을 이길 뿐 아니라, 그렇게 현재에도 역동적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그 온 역사를 주관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은, 반드시 실패치 않으시는 분이므로, 나중에 우리에게 약속된, 그 영광과 기쁨과 그 평강을, 우리는 지금 차용해서 미리 맛볼 수 있다고! ‘그러니까 너희들! 지금 그런 절망 속에서, 주저앉아 있지 말고, 좀 일어서서 그것들을 누려라! 거기에서 일어 설뿐만 아니라, 너희들에게 주어진, 이미 주어진 그것들을, 이제 좀 누려라!’라고 한 술 더 뜨는 거예요. ‘아니야! 너희들은 그렇게 핍박당하고 환란당하고, 그렇게 끝이 아니라, 어마 어마한 신분을 갖고 있고, 어마어마한 기업을, 너희들은 받을, 그런 존재들이라는 것을, 지금 누리라!’라고, 우리에게 더욱 더 큰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거예요. 우리가 나중에 누릴 것을 요한계시록 22장 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5)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치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그래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왕 노릇할 거래요. 우리는 왕노릇한대요. 그런데 지금도 왕노릇 한다고 그래요. 계시록 20장 6절로 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0:6)
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그러죠? 천년은 어떤 기간을 가리킨다, 그랬습니까? 교회시대예요.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그 교회인 여러분이, 이 교회시대 내내, 여러분의 인생 내내, 왕노릇하는 자라 그래요. 그건 아주 필연적인 거다. 그렇게 이야기 한다 그래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 왕노릇 하고 계십니까? 맨날 직장 상사한테 터지고, 이 눈치 보고, 저 눈치 보고, 거래처 사람들한테 욕이나 먹고, 부자들한테 아첨이나 하고, 이렇게 살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그게 무슨 왕이에요? 이게?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왕노릇 한다고 그런다고요.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왕이시죠? 어제도 왕이시고, 오늘도 왕이시고, 영원한 왕이세요. 예수님은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아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천사들이 그러잖아요?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이 땅을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느냐구요? 그런데 그 왕은 이 땅에 싸우러 오시지 않았어요. 그 왕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어요. 그분이 이 세상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위를 하고, 그 모든 순간에, 그분은 왕이셨어요. 그 모든 순간을, 단 한 번도,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잊어 본 적이 없으신 분이에요. 그분은 모든 권세와 능력을, 그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위해서 다 쓰셨다고요. 왕으로서의 권세를, 다 쓰셨다고요. 그분은 왕이셨어요.
그런데 세상에서는, 실패한 메시아로 보여주셨어요. 왕이신 그분이! 우리가 왕노릇 못 하고 있는 것은, 이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혼동하고 있어서 그래요. 여러분! 패도(覇道)라는 것은요 도전해서 빼앗는 것을 패도라 그래요. 승리하고 쟁취하고, 목적을 탈취해 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을, 패도라 그래요. 그래서 내 밑에다 놓고 밟는 거! 그걸 패도라 그래요 그거는 왕에서 나오는 왕도가 아니라, 그거는 패도라 그래요. 도전자에 삶에서 나오는 거라고요. 그것은요!
왕도(王道)라는 건 뭐예요? 패도가 지금 도전자가, 어떻게 해서든지 끌어 내려서 내 밑에다 두겠다는 게 패도라면, 왕도는요? 이미 그걸 다 소유하고 모든 게 다 내거예요. 그래서 그 가진 자기 것을 가지고 관용을 베풀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하는 게 왕이에요. 예수님이 살다 가신 왕은, 그 왕노릇이라니깐요. 여러분도 그 왕 노릇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왕도예요!
우리는 천국에 가서도 그 왕노릇 할 거예요. 무슨 천사들이 우리 심부름 잘 못하면, ‘이게 그냥!’ 주리를 막 틀고, 이게 왕 노릇 아니라니깐요. 우리는 문명과, 문화와, 자연이 있는 곳에서, 천사들을 부리면서 살 거예요. 왕노릇하면서! 어마어마한 것을 소유한 풍요를 갖고, 여러분은 왕노릇 할 거예요. 그런데 어떤 왕노릇이냐 하면은, 밑에 사람들을 밟고 부리는 왕노릇이 아니라, 아끼고, 위하고, 격려하고, 용서해주는 그런 왕 노릇을 할 거예요. 거기가 천국이에요! 그런 왕노릇을 이 땅에서도 하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왕이시라고요. 여러분은 그 왕노릇은 하고 계시잖아요?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그러세요? 그 왕노릇은 하고 계시잖아요? 그 왕노릇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17장 9절을 보시면.
(요한복음 17:9-13)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이 땅에서 살다간 그 모습 그대로, 저도 하나가 되어서, 그렇게 살다 오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삶에서는, 그게 나타나는 거예요. 왕이신 예수가 이 땅을 살아갔던 그 모습이, 나타났는 거예요. 무슨 뭐 고지론이다, 무슨론이다 해서, 부자가 되고, 명예가 높고 이렇게 올라가서, ‘하나님! 보셨죠? 이렇게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그런 성경은 없어요.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렇게 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기쁨이 있었다고요. 그 기쁨을 우리에게도 누리게 해주시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사시는 분들! 그렇게 사시는 분들! 여러분에게 기쁨이 있습니까? 없으십니까? 그 기쁨에 동참하게 만드시고 싶은 거예요. 천국에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바로 그 기쁨입니다. 그 기쁨!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셨다고요. 그러니까 우리도 그런 왕노릇을 해야지요. 지금! 그런 왕노릇을 해야지요.
여러분! 예수님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군사적으로, 너무나 보잘 것 없으신 분이었어요. 외모도 그랬어요. 수많은 군왕들이 엄청난 준마들을 타고 다닐 때, 나귀새끼를 따그닥 따그닥 타고 다녔어요. 남들이 밴츠타고 다닐 때, 티코 타고 다녔던 분이에요. 그런데 그분이 왕이셨다니깐요.
여러분! 이 땅에서 왕노릇 하는 것을. ‘나는 이만큼 가졌고. 이만큼 이루어 냈어!’라는 것으로 왕노릇하겠다고 하시면, 여러분들 잘못 생각하시는 거예요. 어떠한 상황!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처럼 살아내시면, 여러분은 왕이십니다. 그게 왕노릇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왕노릇이에요.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들 한 번 보세요. 그분들이 왕이라니깐요. 왜 안보세요? 꼴도 보기 싫어요? 허허 ‘저 웬수가 무슨 왕이야?’ 지금 그러시는 거예요? 옆 사람한테 말씀해주세요. ‘우리 진짜 왕노릇 합시다! 이제! 이제, 진짜 왕노릇 합시다!’ 네!! 여러분! 우리는 왕이에요. 왕 노릇을 당연히 해야 될 사람들이에요.
사도 요한은,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셨고, 장차 오실, 그 하나님을 믿는 너희들은, 이미 어마어마한 것을 약속 받았고,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나눠주고, 너희들은 아무리 많이 나누어도, 이게 동이 안 나는, 그러한 창고를 갖고 있는, 그러한 자들이야!’ 빌게이츠가 어딜 와서 명함을 내밀어요? 여러분은, 문화와 문명과 자연계가 있는 곳에서, 왕이 되실 분이라니깐요. 다! 그러니까 누리세요. 누리시라는 거예요. ‘슬픔에. 절망에. 좌절에 빠져계시지 말고.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 지금 너희들을 이끌고 있으니까. 이겨내라! 일어서라!’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니깐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하! 무서워!’ 이거는 뭐예요? 이거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왕노릇하는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계시록을 잘 공부하시면, 여러분은 힘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겨나갈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왕이니까! 왕이니까!
다음 시간에는요 우리 스가랴서를 들어서, 제가 일곱 영으로 부터 오는, 그 성령으로부터 오는, 그 은혜와 평강은 어떤 것인가? 제가 성경에서 좀 찾아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 그 다음 시간 계속 진행이 되어가면서, 여러분은 더 큰 힘을 얻으시게 될 겁니다. 하나님이 요한계시록을 우리에게 주신 그 목적이, 여러분에게도 이루어지게 될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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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4-8)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아멘.
지난주에 우리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전에도 계셔서, 그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셨던 그 하나님!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누릴 그 복을 가지고, 역동적으로, 우리에게 오고 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이제도, 지금도, 우리를 이끌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를 감격케 했습니다.
역동적으로 지금 오고 계신다는 것은, 이미 완성된 미래가 있다는 것이죠? 그 완성된 미래에서, 오시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미 완성된 미래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안전하고, 확실한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강(平康)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은 ‘보좌 앞에 일곱 영’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보좌 앞에 일곱 영으로부터, 우리에게 어떤 은혜(恩惠)와 평강(平康)이 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오늘 살펴보겠습니다. 분명 지난주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그 앞에 ‘아호’라는 전치사가 있다 그랬죠? 프럼(from)! 그리고 보좌 앞에 일곱 영! 그 앞에도 역시 ‘아포, 프럼(from)’이라는 전치사가 있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도, ‘아포’라는 전치사가 있다 그랬죠? 그러니까 오늘은, ‘보좌 앞에 일곱 영’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오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일곱 영은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 일곱 영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계속해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일곱이라는 숫자에, 전체! 충만! 완전! 완성이라는 특별한 계념을 부여한다고 했죠? 그래서 전체 교회를, 굳이 일곱 교회라고, 일곱이라는 숫자를 동원해서, 묘사를 하는 것이라고, 우리를 배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전체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에 뒤에 나오는, 일곱 영을, 홀로 온전하고, 완전하신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미루어 추측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앞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성부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오고, 또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우리는 금방 보좌 앞에 일곱 영은, 성령(聖靈)이라는 것을 미루어 추측을 할 수가 있죠?
그러니까 일단 일곱이라는 숫자는 덮어 두세요. 그러면 어떻게, 그 일곱 영이,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일곱 영은, 어떤 메시지를 갖고 있기에, 그들이 은혜와 평강을 금방 떠올리게 되었는지, 성경에서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시록 5장 6절로 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 5:6)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합니다. ‘일곱 영은, 일곱 눈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일곱 눈은 구약에 어디에서 보셨죠? 스가랴서 4장 2절로 가겠습니다.
(스가랴 4:2-10)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3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지금 스가랴가 환상을 보고 있는데, 일곱 촛대, 일곱 등잔이 있고, 그 옆에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람나무에서, 금 기름이 계속 흘러 나와서, 그 촛대를 밝히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가랴가 ‘이 환상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5절부터 보겠습니다.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스가랴가 ‘이 환상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니까, 천사가, 그 장면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라고 대답을 해 줍니다.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 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9 스룹바벨의 손이 이전에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시작이 미미하다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라는 뜻입니다. ‘일이 안 될 것 같으냐?’ 이런 뜻이죠?)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으로 보고 기뻐하리라
10절에 보시면, ‘이 일곱 눈은 온 세상을 두루 살피는 여호와의 눈이다.’라고 나오죠? 계시록 5장 6절에는 일곱 눈은 뭐라 그랬습니까? ‘온 세상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영이다.’라고 했죠? 그리고 스가랴서 4장 6절에 보면,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의 신이다.’라고 하죠? 그러니까 일곱 영은,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 전체교회를 일곱 교회라고 계시록은 묘사하고 있어요.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에게 보내진, 온전하신, 완전하신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곱 교회에게 보내지는 성령님을, ‘일곱 영이다.’라고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자, 이 이야기는 스가랴가 본 환상(幻像)입니다. 스가랴에는 총 일곱 개의 환상이 나오는데요, 그중 5번째 환상입니다. 이 스가랴서 4장은 아주 어려운 본문으로 알려져 있죠? 그래서 이 스가랴서 4장만 가지고도, 1년을 설교를 하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여러분들에게 아주 짧은 시간에, 제가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환상은 하늘의 성전(聖殿)! 즉 하나님나라를 묘사하고 있는 환상입니다. 천상에 하나님나라! 성전을 묘사하면서, 그 성전이 지어져 가는 모습을 묘사하기도 하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떻게 묘사되는고 하니, 순금 등대에 일곱 촛대가 있고, 그 양 옆으로 두 그루의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등대로, 감람나무에서 계속 금 기름이 흘러 들어, 그 촛대의 불이 꺼지지 않는 장면이에요. 이 장면을 여러분이 머리에 잘 떠올리고 계세요.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스가랴가 천사에게, 이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묻죠? 천사는, ‘그것은 이런 거야!’라고 설명해주지 않아요. 그러면서 ‘네가 보고 있는 그 모습은,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能)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전을 재건하는 스룹바벨의 이야기로 끌고 가죠? 그러니까 이 장면은, 성령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참 성전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쉬운 말로 하면, 참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참 교회의 모습!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배웠죠? 우리는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교회잖아요? 그렇게 성령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스가랴서 환상에서는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따라와 주세요.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이 나오는데, 스룹바벨은 누굽니까? 제가 새가족양육반에서는 설명을 해 드렸죠?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었죠? 그리고 BC 538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성전재건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돌려 보낼 때, 1차 포로귀환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사람이, 스룹바벨이에요. 성전을 재건하는 임무를 띠고, 이스라엘로 귀환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스룹바벨입니다.
여호와긴이라는 사람이 있죠? 바벨론 포로 때 잡혀간,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열왕기하가 여호야긴의 석방으로 끝이나죠? 바로 그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왕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성전을 재건을 하는 데, 엄청난 방해가 있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BC 520년경부터 사역을 시작했는데요, 당시에는 페르시아의 다리오가, 애굽의 충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군대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불똥이 또 자기들에게 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재건을 방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했죠? 그리고 앗수르가 혼합정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수르로 데리고 갔고, 앗수르 사람들과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땅에 심어 놓았죠? 그래서 피가 섞였습니다. 그래서 남 유대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서, ‘사마리아 인이다. 개만도 못한 사마리아 인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남유대가 포로귀환을 하고 성전을 재건한다고 하니까, 이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들도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이니까, 그 성전재건을 돕겠다하고 나셨다고요. 그랬더니 남유대에서, ‘너희 같은 더러운 자들은, 성전재건에 참여할 수 없다.’하고 거절을 했다고요. 그래서 이 북이스라엘 사람들! 사마리아 사람들이 열이 받아서, 그 성전재건을 오히려 방해를 했습니다. 성전 재건하는 현장에다가, 시체를 갖다 뿌려놓고 그랬다고요.
그리고 요한복음에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리심 산에다가 자기들 마음대로 성전을 지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짓는데, 벽돌이 모자라고, 또 땅에 문제가 있고 해서, 계속해서 이 성전재건이 지연되고 있을 때예요. 그래서 스가랴가 ‘정말 성전이 재건될 수 있을까? 이 성전이 정말 재건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고요. 그때에 스가랴에게, ‘스룹바벨이 재건을 시작한 성전은, 반드시 이루어진다.’하고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전은 결국 BC 516년에 완성이 되죠? 역사적으로도요!
자 이런 역사적 배경을 머릿속에 넣어두시고 같이 가시자구요? 성경에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오죠? 스가랴나 학개, 에스라, 느헤미야 다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성전 재건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성경이 그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나타나는 성전 재건이라는 것은, 옛 성전을 무너뜨리고 새 성전을 지으시는,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을 창조하시는, 즉 교회를 탄생시키는, 여러분의 구원의 모습!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성전을 무너뜨려라! 내가 사흘 안에 성전을 짓겠다!’ 그렇게 말씀하시죠? 바로 그 구원의 모습을, 새 창조의 모습을, 이 성전 재건의 모습에서 우리는, 읽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어떤 방해가 있어도, 우리의 구원은 완성되고야 만다는 것을, 읽어내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장면이에요. 오직 성령으로 될 것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그 일은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가, 스가랴서 4장의 다섯 번째 환상인, 일곱 촛대와 두 감람나무인 것입니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이 환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게 어떻게 은혜와 평강에 메시지가 되는지! 10절에서 분명 이 일곱 촛대를 가리켜,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이다.’라고 이야기하죠? 성령입니다. 그런데 계시록 1장 20절에서는, 일곱 촛대를 다르게 묘사를 하고 있어요. 계시록 1장 20절로 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20)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라고 이야기해요. 일곱 교회는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죠? 바로 여러분을 상징하는 것이, 일곱 촛대라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스가랴서에서는, 얼른 피상적으로 보면, 일곱 촛대는 성령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죠? 이렇게 성경에서 일곱 촛대는, 성령으로도 표현이 되고, 교회로도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와 성령은 어떤 연관이 있기에 이렇게 표현이 되고 있는 것이죠? 눈치 빠르신 분들은 금방 이해를 하실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완성하셨죠?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올라가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성령을 이 땅에 보내셨어요. 그래서 교회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교회인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 참 교회의 모습이죠? 성령이 오셔야, 교회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교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죠? 요한복음 15장 26절로 가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26)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탄생되는 것입니다. 지금 스가랴서의 환상은,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금 기름이 공급되고 있죠? 그 기름은, 성령님이시라고요. 그래서 그 금 기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탄생되고, 성령님으로 유지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오시므로 탄생이 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의 조명(照明)과 인도(引導)와 충만을 받아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묘시하는 것이죠? 그 교회가, 천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이 땅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거든요. 여러분은 이미 불이 붙은 교회라고요.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부어지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는 빛을 발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라고요.
교회라는 것은 이렇게, 성령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유지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촛대에 불이 붙어서, 그것이 촛대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불이 붙어야 비로소 촛대가 되는 것이죠? 교회와 성령은 불가분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곱 촛대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탄생이 되고 빛을 발하게 되는, 교회(敎會)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누누이 설명해드린, 그리스도와의 연합! 유니온 크라이스트(Union Christ)를 떠올리시면, 조금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그럼 성경에 등장하는 그 촛대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한 번 살펴보자구요. 출애굽기 25장 31절로 가겠습니다.
(출애굽기 25:31-40)
31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 밭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32 가지 여섯을 등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그 세 가지는 이편으로 나오고 그 세 가지는 저편으로 나오게 하며
33 이편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밭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편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밭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같게 할지며
34 등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에 잔 넷과 꽃 밭침과 꽃이 있게 하고
35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 한 꽃밭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 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 밭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고
36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하게 하여 전부를 정금으로 쳐 만들고
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38 그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지니
39 등대와 이 모든 기구를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40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
네, 이렇게 등대를 비롯한 성막 전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으로 데리고 가셔서, 모세에게 직접 보여주신, 하나님나라의 모형이라고요. 모세가 하늘나라를 보니까, 그 하늘나라에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어떤 빛을 발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촛대로 묘사를 해 놓은 것인데요, 성막에 놓일 촛대를 만드는데, 촛대를 정금으로 만들어요. 촛대를 정금으로 만들라는 것은, 당시 금은 빛을 상징하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촛대는 지성소 앞에 성소에 위치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보좌 앞이죠? 그렇게 만들어진 촛대에, 불을 밝혀서, 1년 365일 24시간 불이 꺼지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계십니다. 왜 그 촛대에 불이 꺼지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실까요? 레위기 24장 1절로 가겠습니다.
(레위기 24:1-4)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태우기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지며 (절대 꺼뜨리지 말라는 거예요. 감람을 찌어낸 순결한 기름으로 그 불을 밝히는 것이죠? 스가랴의 환상과 흡사합니다. 그죠?)
3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아론더러, 대 제사장인 아론더러, 항상 등잔불을 정리하라고 합니다. 불이 꺼지지 않게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4 그가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의 등잔들을 끊이지 않고 정리할지니라
그럽니다. 여기서도 감람유를 끊임없이 촛대에 부어서,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명령하시죠? 제사장들은 바로 그 일을 했던 거예요. 왜 성막에, 성전에, 제사장들이 그렇게 많아야 하느냐? 바로 이런 일들을 했다고요.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흘러서 불이 꺼지지 않는, 그 스가랴의 환상과 동일하죠?
그러나 그 옛 성전! 성막에는, 제사장들이 감람나무 기름을 부지런히 날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에서의 환상은, 감람나무에서 직접 금 기름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라고요. 옛 언약에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무엇을 해야 합니다. 그렇죠? 새 언약에서는,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있어요.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를 나타내는 거죠?
성막(聖幕)은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모형(模型)입니다. 그 성막 안에 촛대라는 것은, 그 하나님나라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고, 하나님 보좌 앞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서, 빛을 발하는 어떤 무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 무리가 교회(敎會)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교회는, 성령의 기름으로 빛을 발하고 있어요. 그 교회는 성령의 기름으로만,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성령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죠? 그래서 교회는, 일단 불이 붙여지면, 영원히 빛을 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꺼질 수가 없다는 것이죠! 당시 유대인들은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스가랴서의 일곱 촛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들이였으니까요! 그 일곱 촛대에 부어지는 성령을 상징하는 금 기름으로, 촛대에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그 스가랴의 환상을 떠올리면서, 천사가 설명을 해준, 그 환상의 의미를 되새겼을 것이라고요.
어떤 말입니까? 이는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이야기를 떠올렸을 거라고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본연의 삶을, 재확인했을 것입니다. ‘맞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는 교회다! 이렇게 소심하게, 불성실하게, 겁쟁이처럼 살 수는 없다!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야지!’라고 결단(決斷)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게 하시는, 교회라고요. 그런데 정말 여러분의 삶 속에,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삶이, 그 빛이, 비춰지고 있습니까? 그 삶이 나오고 있습니까?
그 불은, 이미 2000년 전 오순절 날에, 성령이 교회에 오심으로 켜졌다고요. 여러분의 심지에, 그 불이 붙어 있습니까? 빛이 나오고 있습니까? 아니라면, 여러분은 가짜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로 가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17-18)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서 ‘주의 영광을 보다’는 구절의 ‘보다’는, ‘카토티조마임’입니다. 이 말은, ‘반영하다, 반사하다, 거울에서처럼 보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카토티조마임’의 이 시제는, 현재형이거든요! 헬라의 현재형은 뭐라 그랬죠? 계속 진행되는 것을 표현하는, 진행형을 나타내는 거라 그랬죠? 우리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빛으로, 반사해 내는 촛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로 갑니다.
(마태복음 5:14-16)
14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내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여기서 ‘말’은 호스(horse)가 아니라, 한 말, 두 말, 이렇게 말(斗)을 재는 그 ‘말’이에요.)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래요. 너희는 빛을 발하면서 살아야 되는 존재다. 그 빛을 발하는 삶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어떻게 돌립니까?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오직 빛을 드러내는 여러분의 삶인 것입니다. 요한1서 1장 5절로 가겠습니다.
(요한1서 1:5-7)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래요. 빛 가운데서 행하면, 빛이신 하나님처럼 빛 가운데 행하면, 너희는 교회다! 아니면? 가짜라는 것이죠. 에베소서 5장 8절로 가겠습니다.
(에베소서 5:8-9)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이 되라!’가 아니에요, ‘빛이다!’라고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성경은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난 교회에게, 빛을 받은 자로서, 빛을 발하며 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빛을 발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하죠?
소요리 문답 1번! 우리 인생의 목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 교회가 이 땅에서 당연히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빛을 발하며 사는 거예요. 무엇이 빛을 발하는 삶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까? 여러분! 부자가 되어서, ‘야!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간증하고 다니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일까요? 그럼 예수를 믿지 않는 빌게이츠는, 지금 누구한테 영광을 돌리는 겁니까?
아니면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이, 우리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일까요? ‘예수를 잘 믿으니까, 저렇게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구나!’ 그러면 하버드와 MIT와 예일에 있는 수많은 불교신자들과, 무신론자들은,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빛을 발하는 교회의 삶은 뭐예요? 이 땅에 빛으로 오셔서, 빛의 삶을 살다가 가신 분이 계시잖아요? 그 삶을 좇아가면 되는 거예요. 그 삶을 닮아 가면 되는 거예요. 그 삶을 흉내 내면 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을 보세요.
(요한복음 8:12)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에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께서 직접 당신을 가리켜, ‘나는 세상에 빛이다!’ 그러신다고요. 그리고 ‘나를 따르는 자는, 절대 어두움에 행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세요. 요한복음 12장 46절로 가겠습니다.
(요한복음 12:46)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
그 빛이 왜 왔다고요? 우리를 빛으로 만들기 위해서! 빛을 비추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불을 붙여서, 빛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어두움에서 건져 내서 빛을 발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그 빛이 이 땅에 오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빛이셨다고요. 교회는 그 빛을 그대로 흉내 내어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살다 가셨나요? 부자로, 권세를 누리면서 ,떵떵거리며 살다가셨나요? 아니에요. 힘들고 어렵지만, 그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다 가셨다니깐요. 요한복음 14장 9절 보세요.
(요한복음 14:9)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죠? 그 말은, 시편에 나오는, ‘아멘! 아멘!’이라는 말입니다. ‘아멘’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보고 듣고, ‘옳습니다! 맞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아멘! 아멘!’하고 말씀을 시작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하늘에서 보신 것과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그대로, ‘아멘! 아멘!’ 하면서 살다 가셨다는 거예요. 살아내고 가셨다는 거예요. 우리도 똑같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입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증인(證人)들이라고요. 그것이 교회에 존재 목적이라고요.
교회는 이 땅에서 수천만 불짜리 건물 짓고, 사람들 모아서 대단한 일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면서,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진정한 부흥이라는 것은, 교회에 맴버들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지어져 가는 것을, 부흥이라고 하는 것이지, 사람들 많이 모으고, 건물 큰거 사는 게 부흥이 아니라고요. 참된 리바이벌(revival)은, 우리가, 이 처치 멤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빛을 발하는 그 하나님의 자녀로, 잘 지어져 가는 것을, ‘부흥이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박국서에서 배웠잖아요?
부흥(復興)이 뭐였습니까? ‘주여 수 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라는 그 부흥이 뭐였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에게 불필요하고 악한 것들은, 오셔서, 어서 오셔서, 완전히 박살내주옵소서!’ 그게 부흥 아니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어? 세상에 저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네! 아니, 저들은 뭔가 다른 나라 사람들 같다. 아니, 도대체 누구를 닮은 것일까? 저들이 믿는 하나님은, 누구기에 저들이 저렇게 사는 것일까?’라는 평가를 드러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의 증인으로, 빛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떻게 만사형통(萬事亨通)! 일사천리(一瀉千里)! 여유만만! 또 뭐 있어요? 화기애애! 그런 것만 있겠습니까? 여러분! 거기에는 핍박(逼迫)과, 고난(苦難)이 따르게 마련이라고요. 여러분! 제가 제일 강조하는 게 뭡니까? 설교 때마다, 가장 강조하는 게 뭐예요? 스피드입니까? 뭡니까?
우리는 이 땅에 눈 두고 사는 사람들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우리는 이 땅에다가 아방궁 짓고, 기둥박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것이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크게 부흥하고 번영을 누리면서 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 땅의 삶에다가 금칠을 하려고 하시냐구요?
이 요한계시록을 받아서 읽던, 초대 교회 사람들은,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힘겨운 핍박과 고난에 겁을 먹고 있었고, 자신감을 잃고 있었고, 자폭하고 싶을 만큼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고요. 그들이 요한 계시록을 받았습니다. 누군가가 앞에서 이 요한계시록을, 감격에 복받쳐, 읽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듣다가, 그 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으로 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감격한 거예요. 그들은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것은, 힘으로 눈으로 되는 게 아니라, 성령에 힘으로 되는 것을, 깨달았을 거라고요. ‘아! 우리는 이렇게 약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시겠구나! 그 스가랴서의, 일곱 촛대 옆에 있는 그 감람나무로부터, 금 기름이 계속해서 공급이 되어서, 그 촛대에 불이 꺼지지 않듯이, 우리는 이렇게 약하지만, 교회는 성령으로 탄생되고 성령으로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끌고 가시겠구나!’ 하고 평강을 얻었던 거예요. 안도의 숨을 쉬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평강(平康)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평강은, 아무 일 없는 그런 상태가 아니에요. 전쟁이 없는 그런 상태가 아니에요. 전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확신! 고통 속에서도 반짝이는, 어떤 소망! 공격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오고 있는데, 내 안에 흔들리지 않는 그 소망 때문에, 내가 기뻐하고, 내가 흔들릴 수 없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평강인 것입니다.
인터넷에, 군대에서 고참들의 횡포를 견대지 못하고, 자살을 한 어떤 병사의 기사 아래에, 이런 다른 이등병의 편지가 올려져 있었습니다. 똑 같은 상황에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살을 했고, 어떤 사람은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저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밥도 이제 먹을 만하고, 잠을 못자는 것도 이제 견딜 만합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게으르고, 저만 생각하며 살았는지, 절실히 느끼고 배웁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얼차려를 주고, 행패를 부리는 고참들을 보면서, 교회에서 배웠던 인간에 죄성(罪性)을 배웁니다. 그리고 결심해 봅니다.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그러나 자신이 없습니다. 저도 힘을 얻게 되면, 얼마든지 약자를 깔볼 수 있는 죄인이니까요. 힘에 벅찬 유격훈련을 받으면서, 제 몸이 얼마나 허약한지 깨달았습니다. 이 허약한 몸으로, 그동안 얼마나 객기를 부리며 살았었는지, 참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힘이 들지만, 배우는 보람이 있네요. 힘이 들어 무너져 버리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만 떠올립니다. 제가 그렇게 무너지면, 어머니가 실망하실 테니까요. 삶이 힘드니까, 어머니가 더욱 보고 싶습니다. 지금 저는 제대할 날만을 기다립니다. 제대할 때까지 많이 배우고, 바른 사람이 되어, 돌아가겠습니다. 제대하면 꼭 어머니께 효도하겠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어머니와 함께 할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이렇게 기쁩니다.
네 똑같은 상황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도저히 못 견디겠다 하고, 목숨을 끊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니야! 이 상황은 나에게 꼭 필요한 거니까 내가 여기서 많이 배우고 사람 되어서 나는 돌아갈 거야! 나는 여기서 뭔가 배우고 돌아가야 해!’ 하고 다른 반응을 보였다고요. 핍박이 끊어지지 않았어요. 공격이 끊어지지 않았어요. 고참들의 횡포가 끊어지지 않았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속에, 그에게는 소망이 있었다고요. 이제 나에게는 곧 제대할 날이 다가올 것이고, 제대를 하면 나를 두 팔 벌려 맞이해주실 그 어머니가 있다는 거예요. 그 어머니와, 영원해 행복하게 살 그날을 소망하면서, 지금 나는 뭔가 배워서, 어머니가 기뻐하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가겠다는 거예요. 그게 평강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교회를 이 땅에 던져 놓으신 것입니까?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거예요. 하늘나라에선 필요 없는, 그러한 악한 것들! 추한 것들! 다 잘라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과 경건을 연습하고 훈련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하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에게 훈련교관을 붙이신다고요. 말도 안 되는 억지! 분 냄! 짜증! 핍박! 횡포! 그런 것으로 우리를 괴롭히게 한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배우는 거예요. 거기서 인내와, 사랑과, 용서와, 온유를 배우는 것입니다. ‘어쩌다 내 삶에, 저런 웬수가 나타나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가?’로 가지 마시구요.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금 뭔가를 가르치고 계시는 구나!’로 가시란 말이에요.
이 자리에는 분명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하하) 그 분들은 기도하세요. 여러분은 지금 죽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들어서 썼던, 수많은 민족과 사람들을 보세요. 형체도 없이 사라졌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관심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기 위해서, 잠시 들어서 썼다가, 그들은 완전히 멸망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회개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유 없는 핍박과 고난을 받으시면, 기뻐하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지금 세심한 관심과, 세심한 배려로, 여러분을 만들고 계시는 거예요. 핍박을 당하시는 여러분!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자기 한 몸 편하기 위해, 남을 괴롭히는 사람들! 핍박을 가하고 있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죽으시면 안 됩니다.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삶 속에, 지금 견디기 힘들고,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그러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까? 그래서 도저히 더 이상은 못 갈 것 같은 좌절에 빠진 분들! 혹시 계십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은, 이미 성령님께서, 테이크 오버(take over)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사시는 이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시라고요. 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으로 데리고 가실까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그런 일을 허락하셨을까요?
이제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옥에 가면, 하나님도 지옥에 따라 오셔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지옥에 못 가요. 우리의 신분은 그렇게 안전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힘든 상황을 허락하셨다면, 지금 우리에게 닥친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들은, 다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데, 필요한 것들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걸 놓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걸 아는 우리가, 어찌 평안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보좌 앞에 일곱 영!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천국으로 향하고 있는, 순례자(巡禮者)들입니다. 나그네들입니다. 여러분! 그 분이 계속해서 우리를 조명하고 계시고, 힘을 주고 계시고,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응원하고 계시다고요. ‘이겨라! 이겨라! 이겨라! 내 새끼들아!’ 감람나무에서는 지금도 계속 금 기름이 흘러나오고 있다고요. 우리는 불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힘내십시오.
초대교회 사람들이, ‘성령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는 말만 듣고도, 그렇게 평강을 얻었다면, 여러분도 동일한 평강 안에 거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이 그 엄청난 방해에도, 기어코, 새 성전을 완성을 해 냈듯이, 하나님나라는 반드시, 속히, 완성이 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고 계신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힘내십시오! 다시 한 번 꼭 마음에 세기세요.
하나님은 완성된 하늘나라의 복을 가지고, 우리에게 역동적으로 오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과, 성령님으로 함께 하고 계시다고요. 두려워 마세요! 평강을 찾으십시오! 은혜와 평강! 그것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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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이라는, 편지의 서문(序文)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편지의 서문 중에서 인사말을, 지금 우리가 3주째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의 부분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앞서 1절 2절을 공부하면서 나누었던 것처럼, 이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공부할 부분이 아마,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에 요약이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하실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이 요한계시록을 썼던 당시는, 로마가 전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들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해서, 로마에 의한 세계평화를 외치고 있었죠? 요즘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그러죠? 미국에 의한 세계평화! 그래서 미국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라크를 공격하고, 뭐 북한에게 경고를 하고 그랬습니다. 이 팍스 로마나를 모방하고 있는 것이죠?
이 팍스 로마나! 이 로마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충분히 매력적인 거였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황제숭배만 따른다면, 더 없는 평화(平和)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 의해 세계가 평정되었기 때문에, 전쟁도 없었습니다. 예수만 믿지 않는다면, 박해를 받을 이유도 없었어요. 그러나 이게 정말 평화일까요? 여러분?
마치 이런 것과 같은 거죠? 뉴 올리온스나 라스베가스 같은 데 가면은, 좀도둑이 없다. 그래요 왜 그러냐면? 거기에는 마피아가 자체 치안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많아 와서 안전하게, 기분 좋게, 돈을 많이 읽고 가야 되는데, 좀도둑들이 기승을 부리면은 방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체 치안을 마피아가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정말 평화입니까? 여러분! 그것은 더 깊은 나락으로 우리를 빠져들게 하는 것이죠? 마치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로마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주는, 무사안일(無事安逸)과 평화(平和)와 안녕(安寧)이라는 그런 영적 생명력을 상실케 하는 사탄의 공격! 그 공격에도, 초대교회 사람들은 노출되어 있었고, 예수를 믿는 것으로 말미암아, 물리적으로 또 가해져오는, 가시적인 핍박에도 노출되어 있었어요. 이렇게 양쪽에 노출되어 있는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진짜 은혜가 무엇이고, 진짜 평강이 무엇인지를 확인시켜 주시려고 이렇게, 서문에서, 인사말에서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정말 평강(平康)은, 전쟁이 없고, 외부적인 적이 없고, 먹을 것 입을 것이 모자라지 않는, 그런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 그러한 편안한 상태가 평강이라면, 지금 너희들은 평강이 아니다. 그런데 평강을 지금 빌고 있다는 것은, 평강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이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해가 되어져서, 인제 그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수혜자가 된, 그것으로 말미암아, ‘아! 우리는 가야 할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구나!’라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평강을 얻게 되는, 그 평강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안에서, 로마로 상징된 그 사탄의 세력의 공격은, 이런 동일한 모습으로, 양쪽에 동일한 모습으로, 지금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고요. 이런 평안함! 무사안일! 안녕! 이런 것으로! 그래서 꼭 이런 상태에서도, 예수를 믿어야 되나? 내가 이렇게 돈 많고, 지금 부유하고, 집안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 예수를 왜 믿어? 이런 것으로! 또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시어머니한테, 때로는 자식한테, 며느리한테, 구박을 받는 뭐 이러한 가시적인 핍박의 모습으로 공격하고 있다고요. 우리를 실망시키고 좌절시키기 위해서!
그러니까 우리는, 이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아! 동일하게 지금 우리에게 이야기 하시는 것이구나!’라고, 우리는 계시록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는 거예요.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가 착하게, 선하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사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한다고요. 그거는 성경을 바르게 보는 방법이 아니에요. 성경은, 성경 안에서 우리가 교훈을 받으라고 성경을 주신 게 아니라, 그 성경 안에, 우리의 모습이 어느 지점에 들어가 있는가를, 발견하는 게 성경이라고요. 그래서 ‘아! 내가 바로 이런 존재인데, 아!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건져내셨구나!’라는 것을 발견하면, 우리의 삶이 변하는 것이지, 성경에서 착하게 사는 방법! 도덕적, 윤리적으로, 선하게 사는 방법을 찾아내서, 우리가 적용하는 거 아니라고요. 여러분 계시록을 읽으면서, 계시록 안에 들어 있는 여러분을, 발견하셔야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가, 3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충성된 증인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고, ‘그분은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 진짜 왕 중의 왕!’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자, 이 구절은, 요한이, 시편 89편을 인용한 거예요. 보겠습니다. 시편 89편 27절로 가겠습니다.
(시편 89:27, 37)
27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장자를 삼는다’는 말은, ‘먼저 나시고’란 말이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계시록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어요?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이렇게 표현했어요. 같은 말입니다. 37절 보시면,
37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 (‘확실한 증인’이라는 것은, ‘페이스풀 위트니스(faithful witness)’라는 거예요. 충성된 증인! 똑같은 말이에요.) 달 같이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 하셨도다 (셀라)
그랬습니다. 당시 이 편지를 받은 초대교회 신자들은, 바로 이 시편을 딱 떠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평강을 얻을 수 있었다는 얘긴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이 시편 89편에 쓰여 있기에, 그들은 이 내용만 듣고도 금방 평강을 얻을 수 있었을까? 시편 89편 19절부터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시편 89:19-26)
19 주께서 이상 중에 주의 성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돕는 힘을 능력 있는 자에게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한 자를 높였으되
20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
21 내 손이 저와 함께 하여 견고히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22 원수가 저에게서 강탈치 못하며 악한 자가 저를 곤고케 못하리로다
23 내가 저의 앞에서 그 대적을 박멸하며 저를 한하는 자를 치려니와
24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저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을 인하여 그 뿔이 높아지리로다
25 내가 또 그 손을 바다 위에 세우며 오른 손을 강들 위에 세우리니
26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다윗이, 왕권을 갖고, 기름부음 받은 왕이 되어서, 대적들을 물리치고, 다스리는 장면이 표현된 게 바로 이 시편 89편이란 말이에요. 유대인들이 지금도 오매불망 그리워하는, 그 화려했던 그 다윗의 왕국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바로 다윗의 언약으로 약속되었던 영원한 나라를, 완성하셨고,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거예요. 확인시켜주고, 강조시켜주기 위해서, 요한은, 시편 89편의 표현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의 언약이 뭐죠? 유대인들이 오늘날 까지도 오매불망! 그 언약이 오늘날까지도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다윗의 언약이 뭐냐고요? 사무엘하 7장 12절로 가겠습니다.
(사무엘하 7:12-16)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시는 말씀이지요?)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성전을 건축할 거란 말이에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네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그래요.)
한 왕이 나서, 그 나라를 영원히 다스린다는 그런 내용이에요. 이것이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셨어요. 이것을 ‘다윗의 언약’이라고도 하고 ‘나단의 신탁’이라고도 이야기한다고요.
일차적으로 이 이야기는, 솔로몬에 대한 이야기죠? 다윗의 아들 솔로몬 솔로몬이 성전을 제건하잖아요? 13절과 16절에 보시면,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라는 것을 우리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왕위가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라는 말씀이 있죠? 13절 16절에 보시면!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까? 솔로몬의 왕위가 정말 영원히 견고케 되었나요? 아니에요. 바로 그 솔로몬의 아들 대에 가서, 여로보암, 르호보함으로 나라가 둘로 갈라졌어요. 그리고 BC 722년에 북 이스라엘은 홀랑 망했어요. 앗수르한테! BC 586년에 남유대는 바벨론한테 홀랑 망했구요. 그리고 그 이후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없었어요.
1947년에, 그들이 시오니즘! ‘시온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을, 스위스에서 외치고, 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다시 만들었다고요. 그때까지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없었어요. 이 지구상에! 나라가 없었으니까 당연히 왕도 없죠? 그러면 하나님은 지금 무슨 약속을 하신 거예요? 여기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고 계시는 거예요.
지금 이 구절은 참 성전이신, 진짜 왕이신, 메시아가 오셔서, 승리를 하시고, 또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왕위에 올라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을 표현한, 메시아에 관한 언약인 것입니다. 세대주의자들! 디스펜세이션리즘(Dispensationalism)이라 그러죠? 이 세대주의자들도, 지금까지, 이 왕국이 이 땅에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이 ‘다윗의 천년왕국’을 지금도 기다리고 있죠? 그것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아에 관한 언약인 거예요.
바로 그 메시아가 오셨고, 그 왕국을 완성하셨고, 지금 다스리고 계시다는 뜻이에요. 이미 하나님이 일을 다 이루셨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너희는 잘 참고, 인내하고, 견뎌내라! 이미 완성된 그 나라에 너희는 속해 있지 않니? 그러니까 잘 참고, 이겨내라! 너희는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거야!’ 이렇게 우리를 격려하고, 응원을 해주는 구절이, 바로 오늘 읽었던 구절이라고요. 거기에서 우리는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에서, 계시록에서, 그리고 다른 여러 곳에서, 성경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된 증인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 그리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 이렇게 표현을 해 놓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과, 지위에 대해서 묘사를 해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의 예수그리스도의 삼(3)직(職)! 왕이며, 제사장이며, 선지자였던 그분의 3직에 대해서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충성된 증인’이라는 것은 뭣이죠? 증인! 증인이라는 것은 뭐예요? 증인은, 어떤 것을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이야기 하는 거죠? 성경에서 어떤 것을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이야기 하고 선포했던 자들을 뭐라고 합니까? 선지자라고 하잖아요? 그죠? 충성된 증인 선지자의 직위이구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 이것은 제사장이라고 그래요. 죽는 다는 것은 뭐예요? 자기가 자기를 제물로 드려서, 제사를 드린다는 이야기거든요. 아! 그거 제사장의 직분이죠? 그리고 그분은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다. 그래요. 임금들의 머리는, 그분이 진짜 왕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예수님은 왕이셨고, 제사장이었고,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제가 자세히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님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증인이 뭐예요? 조금 전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자죠? 그래서 제가 지난주에 설명해 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말은, 시편의 ‘아멘! 아멘!’이란 뜻이라 그랬죠?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만, 하나님이 시키신 것만, 얘기 한다는 거예요. ‘진실로, 진실로, 아멘! 아멘!’하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분은 증인이며, 선지자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죠? 신명기 18장 18절 보겠습니다.
(신명기 18:18)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 입에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이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예수님은 바로, 그 선지자셨어요. 내가 네 뒤에 한 선지자를 둘 거야! 그 선지자! 그게 바로 예수님이라고요. 예수님은 구약에 그 모든 선지자들로 상징되었던 그 선지자! 참 선지자였어요. 그리고는 완벽하게 그 역할을 다 해 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충성된 증인의 삶은, 그렇게 쉽지가 않았죠? 늘 반대하는 사람들과, 회유하는 사람들과, 노골적으로 야유를 하는 사람들과, 때리는 사람들과, 침 뱉는 사람들과, 배신하는 사람들과,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셨어요. 그리고는 수난을 받으셨고, 죽으셨습니다. 바로 그 증인의 삶을 살다 가셨어요.
그런대 보세요.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교회에게 당부하신, 아주 유명한 말씀이 있죠? 사도행전 1장 8절요.
(사도행전 1:8)
8 오직 성령이 너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들을, 똑같은 증인으로 부르고 계시잖아요? 너희들은 내 증인이라 그래요. 그 증인이 어떻게 살다 가셨어요? 수난받고, 고난받고, 죽으셨어요. 우리는 유니온크라이스트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죠? 우리도 그런 증인의 삶을 살아 내야 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예수님은 교회를 예수님과 똑같이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교회는, 예수님처럼,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았어요. 초대교회 사람들은요! 당시로는, 죽음까지도 불사해야 하는 그런 삶이었다고요. 지금하고는 비교가 안 되죠? 하나님은 당시 예수를 믿음으로 핍박을 받고 있고, 고난을 당하고 있던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충성된 증인들아! 충성된 증인들아! 너희가 충성된 증인으로서 지금 당하고 있는 그 고난을,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예수가, 다 겪고 갔단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지금 맞는 길을 가는 거야!’
사람들은 두려웠을 거예요. 아니, 예수를 믿는데, 왜 우리의 삶이 이렇게 고난과, 핍박으로 점철되는 거야? 그럴 때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수가, 충성된 증인이었던 예수가, 그 길을 미리 살다 가지 않았니? 너희들도 증인이잖아? 당연히 그 길을 너희들도 가야되는 거야! 너희들의 삶에 나타나는 그 고난과 핍박은, 당연한 것이란다.’ 이렇게 우리를 응원하고 계시는 거예요. 민수기 11장 29절 보세요.
(민수기 11:29)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성령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시죠?)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서,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곧 불평을 하기 시작했죠? 애굽의 부추와 마늘과 고기를 그리워했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어서, 각기 장막문 앞에서 울었다.’ 이렇게 성경이 표현을 하고 있어요. 얼마나 고기가 먹고 싶었으면, 장막문 앞에서 울었대요. 고기가 먹고 싶어서!
그러니까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가서 불평을 합니다. 뭐라 그러죠? ‘하나님! 내가 저 왼수들을 낳았습니까? 왜 저들이 나에게 이렇게 불평을 하게 만드십니까? 그리고 힘들어서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라 그래요? ‘모세야! 알았다. 내가 고기 먹여줄게!’ 그래요. 언제까지? ‘코에서 냄새가 날 때까지 먹여줄게!’ 그래요. 메추라기를 주시죠?
그리고는 모세의 짐을 덜어주시기 위해서, ‘70명의 장로를 세워라!’ 그러세요. 모세가 70명의 장로를 세워서, 성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죠? 거기에서 성령이 임하신다고요. 그러니까 그 70명의 장로들이 다 예언을 해요. 그런데 이 진중에 있던, 멜닷과 엘닷이라는 사람이, 거기에도 성령이 임해서, 그들이 예언을 해요. 그러니까 소년이 쪼르르 와서 고자질 한다고요. ‘어! 저들이 진중에서 성령을 받고 예언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그 옆에 있다가, 모세에게, ‘금하게 하소서!’ 그런다고요. 그때에 모세가 한 말이에요. 이 말이 ‘왜 금하게 하냐?’ 그래요. ‘왜 금하게 하냐?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시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들이 성령 받고 예언하는 거 시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그 신을, 성령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여러분들 포함한 교회예요.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일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장 오순절에! 교회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해서, 그들이 성령을 받고, 이제 뭐가 된 거예요. 선지자가 된 거예요. 모세의 예언처럼!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모두, 이 시대에 증인으로, 또한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러면 여러분! 그 선지자들이 어떻게 살다 갔습니까?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예레미야나, 호세아나, 그 수많은 선지자들이, 어떻게 살다 갔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하면서, 계속 수모당하고, 배척 받고, 배신당하고, 심지어는 통나무 안에 들어가서, 톱으로 켜서 죽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고, 기름에 튀겨 죽고, 이런 삶을 살았다고요.
여러분은 증인이고 선지자라면서요?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삶이 나타나야 될까요? 무사안일? 태평? 이런 것들이 여러분의 것일까요? 아니, 그 사탄이, 옛날에는 선지자들을 향해서 그렇게 공격을 했던 사탄이, 이제 회개하고 착해진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 당연히 그 삶이 나타나시는 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자연스러운 거예요! ‘하나님! 어떻게 똑같이 예수를 믿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평안한데, 나의 삶은 왜 이렇게 지지리도 복도 없습니까?’ ‘그게 맞는 길이다.’라고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성경은요!
하도 세상에 그 합리주의! 경영논리! 효율성! 이런 것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으면 당연히, 이 땅에서 복 받고, 축복받고, 만사형통! 무사안일! 이렇게 되어야 된다고 믿고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는 웬수들이 또 있구요. 그건 기독교 아니에요.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부분이 한 군데도 없어요.
사탄은 끈임없이 우리를 좌절시키고 실패시키고 절망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삶에, 염려와 탄식과 눈물로 공격을 해올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낙담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사업에 방해를 할 것이고, 때로는 건강을 해치기도 할 거예요. 때로는 자식이 속을 썩이기도 할 거예요. 때로는 남편이 속을 썩이고, 때로는 아내가 속을 썩이기도 할 거예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낙망시키고 좌절시켜서, ‘야! 예수를 믿었더니 어떻게, 삶이 더 고달파지냐?’ 이렇게 우리를 속일 거라고요. 그럴 때 여러분은, ‘드디어 내가 선지자의 삶 증인의 삶에 들어섰구나!’라고 기뻐하라는 거예요. 오히려 평안이 여기라는 거예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이야깁니다. 이 말을 듣고 더 좌절이 되시는 거 아니에요? 혹시? (ㅎㅎㅎ) 이게 성경이에요. 여러분!
그렇게 우리가 힘들 때, ‘이미 충성된 증인으로, 선지자로, 우리가 겪고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고통과 수난을 당하시고, 그 역할을 완전하게 수행해 내신, 그 예수를 바라보면서, 이기라는 거예요. 이까짓 거 이겨낼 수 있다! 예수님도 그 길을 미리 가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그분이 그 길을 가셨다! 그리고 미리 다 겪으시고 승리하신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다윗이 그 다윗의 왕국을 다스렸던 것처럼, 그 완성된 하늘나라! 우리! 하나님의 나라인 여러분들을, 지금 다스리고 계시다! 그러니까 힘내라!’ 이 이야기예요.
두 번째로, 그분은 죽으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죽으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다는 거예요. 자신이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을 보세요.
(히브리서 5:8-10)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분은 제사장이셨어요. 히브리서 6장 20절로 가겠습니다.
(히브리서 6:20)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그러죠?)
예수님은 당신이, 제사장이시면서 또, 제물로 드려지셨어요. 그렇게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시므로, 그 제사가, 완전한 것이었다는 것을 확증하셨다고요. 당시에는 제사를 드릴 때, 그 제물에 흠이 있거나, 아니면 제사의 절차가 조금만 잘못 되어도 제사장이 그냥 즉사했다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그냥 죽으신 것으로 끝났으면, 우리는 구원 못 받아요.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아! 그 제사가 완전한 것이었구나! 하나님이 기뻐하는 완전한 제사였구나!’라는 증거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동물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셨다.’라는 표현을 써요. 먼저 나셨다는 것은, 장남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아울러, 나중에 날 자들도 있다는 말이에요. 먼저 났다는 것은, 나중에 날자가 있다란 이야기잖아요? 바로 그분이 장자로, 맏아들로, 먼저 나셨다는 이야깁니다. 맏아들이며, 장자인 예수의 동생들이 있다는 거 아니에요? 바로 그것은 여러분과 저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 시편 89편 27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시편 89:27)
27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
그러죠? 예수님이 장자이세요. 로마서 8장 29절 보시면,
(로마서 8:29)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분이 맏아들이고, 우리는 많은 형제예요. 우리가 예수님의 형제! 아 닭살이 막 돋는 거 같아요. 예수님이 우리 형제라니요? 하나님이신 그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신 빛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형제라니요? 그분이 맏아들이고, 내가 동생이라니요? 그렇게 영광스러운 신분(身分)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요. 히브리서 1장 6절 보시면,
(히브리서 1:6)
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 (이제 그 맏아들이 오실 거예요.) 하나님이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 지어다 말씀하시며 (그러죠?)
그분은 살아나셔서, 그렇게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이 장자(長子)의 개념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출애굽기에서 나오죠?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지기 위해,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다고요. 강개입하수도구황깜장 주일학교 좋은데 나온 사람은 다 외워요. 이거! 아십니까? 강개입하수, 도구황깜장 마지막에 장남! 장자들을 다 죽이는 거 아니에요?
애굽의 장자들을 다 죽이는데,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른 그 집의 장자들은, 다 살아나는 거예요. 장자는 남자를 대표하는 거예요. 남자는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계수를 할 때, 항상 성인 남자만 셌죠? 남자가 잘나서 센 게 아니라, 성인 남자를 세면, 그가 데리고 있는 식솔은 대충 추측이 가능했어요. 그래서 남자를 센 거지, 남자가 뭐 잘나서 남자만 센 거 아니에요.
남자는? 가족의 대표예요. 그러면 장자라는 것은 남자의 대표고, 남자는 전체의 대표라면, 이 장자는 뭐의 대표예요? 전체를 대표하는 게 장자예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맏아들이라는,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전체인 우리를 대표하신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분이, 완전히 다 고난을 다 당해주셨고, 완전히 죄를 다 이기셨고, 승리하셨단 말이에요. 그것이 ‘먼저 나셨다’라는 말의 의미예요. 장자의 의미! 얼마나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갖다 주는, 그런 말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그렇게 맏아들이 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들이 된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개념은, 양자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기업으로 물려받고, 그 권세를 누리는 존재들을, 양자라 그래요. 우리가 생각하는 양자하고는 조금 달라요.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동일한 수준으로, 대접을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 보시면,
(로마서 8:17)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후사라는 건 뭐에요? 상속(相續)을 받을 자라는 것이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
공동상속자라는 거예요. 정확한 헬라어 번역은,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님의 공동상속자다.’라는 말이에요. 아니,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몸을 입고, 이제 동일한 것을 상속받은 자가 돼요. 이 신분을 정말 아십니까? 여러분? 이게 기독교라는 거예요. 로마서 8장 15절 보시면요,
(로마서 8:15)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다. 그래요. 에베소서 1장 5절 보시면,
(에베소서 1:5)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그래요. 딸들은? 섭섭해 하지 마세요. 히브리 사람들은, 그냥 자녀라는 표현을, 아들들이라고 쓴 거예요. )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어요. 그 맏아들을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맏아들은, 우리의 대표된 맏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세요. 이미 과거예요. 시제는! 그러면 우리의 대표가 그 길을 가서 그렇게 앉아 있다면, 우리는요? 우리의 신분은 너무 확실한 거죠? 우리의 갈 길은 너무나 정확하게 지금 결정이 되어 있는 거예요. 운명적으로!
당시 예수를 믿음으로 죽음에까지 내몰려서, 벌벌 떨고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 다시 확인을 했을 것입니다. ‘그 우리 교회의 삶을 대표로 미리 살다 가신, 맏아들! 우리의 큰형! 그 예수님이 우리의 고난을 받고 죽으셨지만, 우리처럼 이렇게 죽음 앞에 내 몰렸었지만, 그분은 다시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살아나셨다!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다! 그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기뻐했을 거라 말이에요. 그 기쁨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평강이 여러분의 평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제일 두려워 하는게 뭐죠? 죽음이에요! 뭐니 뭐니 다 이렇게 열거를 해도, 그것은 다 죽음 때문에 두려워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사망(死亡)을 이기셨어요. 우리는요?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당당하게 외칠 그리스도인이라고요. 그럼 여러분이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뭐가 또 두려우신 거예요? 지금 그 죽음을 두려워하니까, 다른 것들이 두려운 거예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닥친 문제들이 아니에요. 정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에 몸과 영혼을 전부 지옥에다 멸해서, 불태워 버릴 수 있는 하나님을 아느냐? 그걸 두려워하셔야 돼요 내가 모르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정작 우리가 두려워 야 할 것은, 나는 진짠가? 나는 진짜 하나님의 자녀가 맞나? 이걸 두려워 하셔야 하는데, 그거 자기 앞에 닥친 문제들! 그거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아니에요 여러분의 신분은 이렇게 정확하게 묘사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설명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가 마음속에 고민해야 할 것은, 내가 진짜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거 맞나? 그걸 고민하셔야 돼요. 죽자, 사자 죽을 때까지 예수 믿고 지옥가시면, 어떻게 할 거예요? 거기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요? 그걸 두려워하셔야죠.
그런데 그 예수님은 살아나셨을 뿐만 아니라,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다.’ 그래요. 이제 3번째 부분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시편 89편 2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시편 89:27)
27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그러죠?)
모든 왕들의 왕이라는 거예요. 그거는 진짜 왕이라는 거죠. 이분이! 스가랴서 9장 9절 보세요.
(스가랴 9:9)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분은 왕이세요. 새끼 나귀를 타고 다니셨지만, 왕이세요.)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서에 이미,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예언이 되어 있는 거죠? 당시 초대교회 사람들은, 로마 황제의 그 막강한 권세 앞에서, 벌벌벌벌 떨고 있었다고요. 그럼 막 죽여 버리니깐요. 그러나 사도요한은, 진짜 왕은, 너희의 영혼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천명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진짜 왕은, 예수 그리스도라고요.
여러분의 왕은 누구십니까? 돈이에요? 명예입니까? 자식입니까? 가정의 행복입니까? 여러분을 지금 다스리고 있는, 여러분의 온 생각을 다스리고 있는 게, 뭐냐구요? 진짜 예수님이세요? 우리의 삶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인이시며 왕은, 예수이셔야 하는 거예요. 예수가 아니니까, 다른 문제로 벌벌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성경은 지금, ‘아니야! 진짜 왕은 예수님이야!’ 그러는데, 이때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우리는 돈에 벌벌 떨고, 명예에 벌벌 떨고, 혹시 사람들이 나를 불행하다고 여기면 어떻게 할까? 거기에 벌벌 떤다니깐요. 다를 것 없어요. 이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셔야 하는 거예요.
이 초대교회 신자들은, ‘땅의 임금들의 머리되신 예수님!’이라는 이런 표현들을 대할 때, 금방 구약에 예언된 왕이신 메시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그분이 우리 편이라면, 그 왕 중의 왕이신 그분이 우리 편이라면, 우리는 결코 실패할 수 없다! 왕이신 그분이 우리를 지키고 계신데, 지금 우리에게 환란과 핍박이 닥치는 것은, 뭔가 지금 이유가 있을 거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다 합력해서 지금 선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일 것이다,’라고 평강을 얻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 왕들은 기껏해야 우리의 목숨 뺏어가는 거예요. 그렇지만 하나님은요? 목숨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지옥에 넣어서 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요.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느냐 말이에요? 마태복음 10장 28절 보십시오. 예수님이 직접 하시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0:28)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 (그런 세상 왕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지옥에서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그분이 왕이세요. 예수님이 왕이세요. 진짜 왕이세요. 그 분은, 육신의 몸으로도 진짜 왕이셨어요. ‘아니, 나사렛의 목수의 아들이 무슨 왕이에요?’ 아니요, 진짜 왕이셨어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족보가 나오죠?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 솔로몬! 요셉! 예수까지 내려와요. 누가복음은요?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데, 다윗! 솔로몬이 아니라, 솔로몬의 형인, 나단으로 내려와요. 그리고는 쭉 내려와서 헬리, 그리고 요셉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 둘은 이렇게 다른 족보를 이야기 하고 있어요.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고요. 원래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형 나단은, 법적으로 왕권을 받았어야 할 자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솔로몬을 왕으로 택하셨어요. 그러니까 법적인 왕통은, 원래 나단쪽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이 솔로몬 쪽을 택하셨다 말이에요. 그래서 실제적으로는, 이들이 왕이 되어 내려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마태복음의 족보를 자세히 보면, 거기에서 여고냐라는 인물이 나와요. 누가복음에는 없는 인물이에요. 이 여고냐가 누구냐 하면, 여호야긴이라는 왕이에요. 이 여호야긴은 제가 지난주에도 말씀 드렸지만,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을 시대에 그 왕이거든요. 열왕기하가 이 여호야긴의 석방으로 끝이나죠? 이 여호야긴이, 예레미아서를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그 후손은 절대 왕이 될 수가 없어요. 예레미야서 22장 30절 한 번 보세요.
(예레미야 22:30)
3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여호야긴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그래요.)
여호야긴의 핏줄을 따라서는 인제, 왕이 나올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왕통을 솔로몬 쪽으로 택하셨는데, 그 후손이 지금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어요. 이렇게 솔로몬 쪽 혈통은 저주를 받았고, 나단쪽 혈통은, 왕으로 다스릴 권한이 없어요. 하나님이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인 권한은 있지만! 자,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한 번 보시자구요.
이제 여호야긴의 핏줄로는 안 되죠? 그러나 이 왕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이 핏줄을 타고나지는 않았지만, 양자(養子)로 그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요셉의 친 아들이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양자로 요셉에게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실제적인 왕권을 이어 받는 거고, 나단 쪽에서는요? 법정인 왕권이 어디로 내려와요? 헬리가, 마리아의 아버지라고요. 누가복음에는, ‘요셉의 이상으로는 헬리다.’라고 나오지만, 그들의 족보에는 여자가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요셉이라고 나오는 것이지, 헬리는 마리아의 아버지라고요.
마태복음에 보면은,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이라고 나와 있죠? 이렇게 지금 이 나단 쪽으로는, 법적인 왕통을 끌어 내리셨고, 솔로몬 쪽에서는 실제적인 이 왕통을, 그런데 여호야긴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양자로 그 안에다가 갖다 넣으심으로 해서, 양쪽을 다 충족시킨 진짜 왕을 만드신 거예요. 목수의 집에서 태어났지만!
성경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요셉의 후손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그분이 다윗의 후손입니까? 이런 질문이 안 드셨어요?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됐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진짜 왕이셨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다 충족시킨 진짜 왕이셨다는 거예요.
세상 왕들이, 마귀의 세력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우리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고, 고난을 가하고 고통을 주면, 까짓 거 죽자고요. 죽으면 천국 간다면서요? 그걸 안 믿으니까 두려운 거 아니에요 이 세대가, 진짜 천국과 지옥을 믿냐고요? 까짓 거 죽이면 죽으면 될 거 아니에요? 더 좋은 곳이 있다면서요? 그게 확실하지 않으니까, 벌벌벌벌 떨고 있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말씀 나누고 교제 나누면서, 점점 명확하게 그 나라를 알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게 교회이지, 어떻게 서로 손 얹고 기도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그래서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정말 벽에 뭐 칠할 때까지 살게 해주세요!’ 이게 기독교 아니라고요. 기독교는 좀 더 고급한 거예요. 더 깊은 거예요. 여러분! 그들은 우리의 영혼까지 손댈 수는 없어요. 하나님은 영혼까지도 멸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왕이에요. 우리를 지키고 계세요. 우리를 다스리고 계세요. 확실한 거죠
여러분! 성경이 왜 이렇게 힘써서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까? 이 요한계시록 내용 전체가 우리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거예요. 왜 격려를 해야만 합니까? 뭔가 싸워서 이겨야 할 것들이 있다는 거 아닙니까? 격려를 한다는 것은! 그래서 계시록 내내 나오는 게.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 이겨랴!’ 그러지 않습니까? ‘이겨랴!’라는 것은, 이겨야 할 대상이 있다는 거 아니에요? 우리는 전투하는 자들이에요. 교회예요. 우리는요 멍하니 복이나 받는 자들이 아니라, 전투하는 자들이란 말이에요. 마귀의 세력과 전투해야 하고, 마귀의 세력에 젖어 있던 그 옛 사람과 전투해야 하고, 계속 싸우면서 이겨가야 되는, 전투인들이라고요. 우리는! 군사들이라고요.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우리가 안일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요, 그리스도의 삶에서 고난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서 죽이신 게,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이 땅에서, 전투를 하는 자들이에요.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우리에게 환란을 허락하심으로써, 우리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키우게 만들어 주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거예요. 이 땅은 훈련소라고요. 그게 바른 복음의 해석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 큰 형님이신 장자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대표가 되셔서, 이미 이기셨고, 이 땅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몸으로 살아내셔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고 가셨어요. 그분은 승리자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지금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자리로 반드시 갈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문제를 바라보지 마세요. 그 문제에 너무 몰두해서, 거기에 목숨 걸지 마세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란 책에 보면은, 이 순례자 크리스챤이 길을 가는데, 십자가까지 가는데, 맹수 두 마리가 사슬에 묶여서, 확 물으려 그래요. 이 맹수를 보고 두려워하면, 얘한테 물려요. 얘를 보고 두려워하면 얘한테 물려요. 그런데 이 순례자가 어떻게 갑니까? 앞에서 비치는 빛만 보고 걸어가요. 그랬더니 얘네들이 범접(犯接)을 못해요. 마귀의 공격은 그런 거예요.
여러분! 우리를 우리의 영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낙담시키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드는 거뿐이지, 우리를 건드릴 수가 없어요. 속지마세요. 여러분! 빛만 보고 십자가만 보고 가는 거예요. 문제를 바라보시면 안 돼요. 예수를 바라보셔야 돼요. 여러분의 궁극적인 그 승리를 바라보시라고요. 문제를 바라보면, 우리는 계속 물어 뜯겨요. 계속 물어 뜯겨요. 힘든 거 압니다. 그러니까 모이는 거예요.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함께! 서로 격려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나도 이렇게 살고 있어!’ ‘어! 그래 맞아. 두려운 게 아니구나! 나도 이겨야지!’ 모이는 거예요. 교회가 그냥 모여서 밥이나 먹고, 친목회나 하고, 그림공부나 하고, 이게 아니란 말이에요. 교회는 모이는 목적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큰 형님이신 장자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 같습니까? 뭉게구름 타고 오실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도 사람들이 그렇게 그려놔서, 뭉게구름 타고 탁 그렇게 오실 거 같은데…. 그분은, 전투하는 모습으로 오실 거예요. 폭풍에 구름을 타고 오실 거예요. 마귀의 세력과 이 세상에 관영한 이 죄를 심판하러, 전사의 모습으로 오실 거예요. 불말과 불병거를 이끌고 그들을 심판하러 오실 거예요. 그때에 여러분들은 어떤 모습으로 예수를 맞이하실 것입니까? 이 땅에서 예수의 전투에 참여해서, 온통 몸이 다 찢기고, 눈알이 빠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팔이 부러진, 이러한 전투인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될 거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품어 안아 주면서, ‘그래, 이 전투에서 네가 이렇게 싸워줬구나! 고맙다. 그러나 봐라!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심판하는지 봐라!’ 그게 종말이에요.
그런데 군복을 보니까 말끔해요. 깨끗해! 자기 군복 닦느라고 평생 전쟁에서 동료들이 막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는 버클 계속 닦고 이는 거예요. 군복 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은 영창 가는 거예요. 전쟁 끝나면! 군복이 군복다워지는 것은, 전투를 하면서 피가 묻고 찢기고 헤졌을 때, 그게 군복 아닙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싸워야 하는 전사들이 아닙니까? 여러분!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에, 그러한 전투가, 영적 전투가, 여러분의 삶에 막 닥칠 때, ‘왜 나의 삶에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가 아니라, ‘하나님! 드디어 내가 선지자로, 증인으로, 전투를 하게 되었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한번 이겨보겠습니다.’ 깨지죠? 다시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전사예요. 전투하는 자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보호하시고, 끝까지 안전하게 데리고 가셔야 할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 게하시의 눈에 보였던, 게하시의 눈에 보였던, 그 불말과 불병거를, 여러분도 보셔야 돼요.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그 문제! 고통! 고난! 눈물! 슬픔! 그 전에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안전하게 둘러싸고 있는, 하늘의 불말과 불경거가, 여러분을 딱 지키고 있는 모습을, 여러분은 보셔야 되는 거예요. 그게 교회예요. 지금 여러분의 옆에,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가 어디 범접을 하냐구? 마귀들 두들겨 패며, 지키고 있어요. 끝까지, 이 마지막 날까지, 여러분을 보호하며 지키며, 거룩하게 만들어 가기 위해서!
여러분! 하나님의 응원에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응원에 목소리를 들으셔야 돼요. ‘이겨랴, 내 아들아! 이겨랴, 내 딸아! 이제 알았니? 너희들은 증인으로, 선지자로, 왕으로 왕도를 펴며, 이 땅을 살아가는 거야! 이기면서 살아가는 거야! 알았냐? 이겨라, 내 딸아! 이겨라, 내 아들아! 이겨라, 은지야! 이겨라, 지은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여러분! 그게 기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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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장 5절하고 6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계시록 1장 5절에서 6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5-6)
5 …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아멘’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장차 오실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과 은혜! 그리고 보좌 앞에 일곱 영으로 표현된 성령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 그리고 충성된 증인으로 먼저 살다 가셨고, 또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하나님의 맏아들! 우리의 큰 형! 왕 중의 왕!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부터 오는 그 은혜와 평강을 이야기하면서, 감격을 이기지 못해서 오늘 읽었던 5절과 6절에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합니다. 오늘은 그 찬송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뿐만이 아니라, 사도들은 그들의 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을 전하면서, 언제나 감격에 복받쳐서 중간 중간에, 찬송을 하죠? 예 이야기를 하다가 본인이 그 기쁨과 감사를 참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바울을 한 번 보실까요? 에베소서 3장 20절로 가겠습니다.
(에베소서 3:20절)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아멘’으로 항상 마쳐요. 디모데전서 1장 17절 보시면,
(디모데전서 1:17)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유다서 1장 24절 보시면,
(유다서 1:24-25)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렇게 유다까지도, 사도들은 복음을 이야기 하다가 문득 문득,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고는 못 베긴다고요. 저도 사무실에서 성경 읽다가, 가끔 너무 복받쳐서, 의자에서 내려와서 바닥에 이렇게 무릎 굻고 한동안 앉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엉엉 울 때가 있어요. 감격스러워서 우는 게 아니라, 그 복음을 생각하고, 은혜를 생각할 때, 너무나 그 사랑이, 제가 받은 사랑이 너무 큰데, 나는 왜 이렇게 밖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까? 나는 왜 좀 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나는 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여전히 죄인의 모습으로 서있을까? 왜 나는 좀 더 하나님을 더 찬송하지 못할까? 그거 때문에, 심히 괴로워한다고요. 그래서 눈물을 참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러다가 다시 그 복음에 대해서 묵상을 하죠? 그리고는 이내 어떻게 저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 주셔서, 이렇게 구원해 주셨는지, 놀라고 또 놀랍니다. 그리고 어떻게 지금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지, 그게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또 울죠.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시면, ‘우리를 사랑하사’라는 구절이 있죠? 거기서 ‘아가파오’라는 말이 현재라고요. 헬라어의 현재는 어떤 것을 나타낸다 그랬죠? 현재진행! 우리를 사랑하사,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다. ‘호이에오’는 과거예요. 이미 삼아주셨어요. 그런데 그때에 끝난 게 아니라, 그 사랑은 지금도 계속, 현재진행형으로 나에게 오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격하는 거예요. 이 모양인데도, 그런데도, 아직도 사랑해주신다고 하니까, 너무나 감격스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앉아서 울다가 찬양하고, 그러는 거예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천부여 의지옵소서 손들고 옵니다. 4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난 알 수 없도다! 그렇게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복음을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생각을 한다면, 우리 입에서 어찌 찬송을 그치겠습니까? 어떨 때는 성경을 읽다가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의 것이 되었고, 내가 그곳에서 왕 노릇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꼬집어 볼 때도 있어요. 이게 진짜 꿈인지 생신지! 이게 믿어지니까, 이게 진짜 꿈이면 어떻게 하나?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 예수를 생각하시면서, 복음을 곱씹으면서, 얼마나 감격을 하세요?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시면서, 얼마나 감격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 이렇게 불가능한 모습을 갖고 있는 우리를 생각하면서, 그분 앞에서 정말 울어본 적 있으세요?
기독교는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은혜가, 그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여전히 죄인으로 서 있는 우리의 모습 때문에 울고, 그래서 우는 게 기독교지, ‘왜 하나님! 나에게 이 상황을 허락하셔서, 이렇게 힘들게 만드느냐? 그런 것으로 우는 게, 기독교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신자(信者)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지 못하는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늘 회개하고, 울어야 하는 자들이에요. 그것 때문에 울어야 하는 자들이에요. 사도 요한은, 이 요한계시록을 쓰면서, 얼마나 많은 감격스러운 찬송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무려 다섯 군데에서 복받치는 감격을 표한하죠? 그런데 그 감격이 점차적으로 점진적으로 커져요. 아 급기야 7장 12절에서는,
(요한계시록 7:12)
12 가로되 아멘 (아멘! 이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아멘’으로 시작해서 ‘아멘’으로 끝내는 거예요. 아멘! 아멘! 오늘 읽었던 본문 6절에서는 뭐라 그랬죠? 영광과 능력! 그런데요 복음을 계속 설명하면서 가다 보니까, 이제는 너무 감격스러워서,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단어를 다 갖다 붙이는 거예요. 그러고는 ‘아멘!’하고 도장 딱 찍는 거예요. ‘이게 내 진심이다!’라는 거예요. 그런 찬송이 우리에게도 있냐? 말입니다. 여러분?
그럼 우리는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구원받은 자들이에요. 우리 구원의 목적이 뭐예요? 구원에 목적! 하나님은 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려고요! 그 은혜와 그 사랑을 안 자! 그 하나님을 안 자들이,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자랑하고 찬양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신 일을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에,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그분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거! 그게 우리의 구원의 목적 아닙니까? 거기가 천국 아닙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구원받은 자의 입에서는, 당연히 찬송이 끊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보세요. 에베소서 1장.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구절들인데, 3절부터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1:3-14)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에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자, ‘찬송하리로다!’라고 시작하는 거예요.)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유가 나오죠?)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의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시기 위함인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를 많이 오해하고 있어요.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예요. 기독교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동원하는 종교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종교가 기독교가 아니라고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게 그게 기독교에요. 자존심 상하세요, 여러분? 하나님이 먼저라고요. 우리가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너무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겁이 없는 거예요. 그분을 섬기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을 찬송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목적이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받은 자들조차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겁이 없어요. 하나님을 모르니까요! 그분이 누군지 모르니까! 어줍지 않은 인본주의나, 휴머니즘이나, 인내천(人乃天)! 뭐 천인무간(天人無間) 사상! 이런 인간이 최고라는 사상이, 우리 안에 너무 깊이 뿌리 박혀 있어요. 그게 죄의 본질 아닙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고요. 이거 잊으시면 안 돼요. 하나님은 창조주(創造主)세요. 우리는 피조물(被造物)이에요.
드라마 보면서, ‘너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야!’ 그러면은 그거 보면서, ‘그렇지, 너는 학생이고, 저분은 선생이니까, 그러면 안 되지!’ 그러면서 성경이, ‘너는 피조물이고, 나는 창조주다!’ 그러면은, 역정을 낸다고요. 인간은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죄의 본질이라고요. 저만 생각하는 거! 자기가 최고예요. 자기가 우주(宇宙)의 중심에 있는 거예요. 그게 죄인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 내린 거 아니에요? 그런데 예배당 안에서, 그러한 죄가 버젓이, 신앙의 모습으로 둔갑해서 그냥 울고, 불고 …. 그건 기독교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거예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찬미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이유가 나오죠? 뭐라 그럽니까? 6절에 보면?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
삼으셨다. 그래요.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거예요. 착각하시면 안 돼요. 여러분! 따라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건 당연한 거예요. 자연스러운 거예요.
만일 여러분 중에, 여러분의 삶에 찬송이 나오지 않고, 여러분의 상황만 바라보면서,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상황 허락하셨는가?’ 늘 원망만 한다면, 아직 복음(福音)을 모르는 거예요. 그분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거예요. 이까짓 상황! 문제! 고난들은, 하나님의 그 엄청난 선물 앞에, 그 앞에, 딱 갖다 놓으면, 조적지혈이에요. 세 발의 피! 어디 그런 것들을 여기다 갖다 대요? 이것만 바라보면, 그건 그냥 녹아버리는 거예요. 그런 자들이 그리스도인인 거예요. 여러분!
군대 있을 때, 1년에 한 번씩, 천리 행군을 해요. 천리를! 400킬로예요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몇키로입니까? 잘 모르겠어요? 400킬로 안 돼요. 거기를 걸어가는 거예요. 30킬로 이상 되는 군장하고 총 매고, 천리를! 밥 먹고 자는 시간 이외에! 얼마나 힘들겠어요? 여러분! 그것도 제일 더울 때 골라서 가는데, 잠도 그냥 용인 자연농원 주차장! 거기에다가 쫙 사단 병력 풀어놓고, 담요 한 장 깔고, 담요 한 장 덮고, 그리고 또 ‘일어나!’ 그러면, 일어나면 또 걸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병 때, 이등병 때는, 그냥 걸어가면서 자요. 그래서 논두렁으로 막 걸어가요. 딴 애들 이리로 가는데, 걸어가면서 막 잔다니깐요. 그런데 제가 제대 2개월 남겨놓고, 천리행군이 딱 걸렸어요. 그런데 그때는 이제 이것만 끝나면 제대한다. 그러니까, 아! 너무 여유로웠어요. 누가 무겁다 그러면, 총도 매주고요! 물 먹고 싶다 그러면, 내 수통 다 주고요! 경치 인조이(enjoy)하면서 걸어갔다니깐요. 이거 끝나면 제대하니까, 하나도 안 힘들더라고요. 노래도 부르면서 갔어요. 저는! 말년 병장이니까, 아무도 뭐라 안 그래요. ‘오늘도 걷는 ~ 다마는 …’ 그냥 걷는 거예요. (하하하하)
예, 여러분은 그 제대를 남겨 놓은 구원받은 자들이라고요.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괴로울 때마다, 거기를 바라보세요. 그 은혜를 바라보세요. 그 여러분이 받으실, 유산을 바라보세요. 그러면은 이까짓 거 참을 수 있는 거예요. 이 찰나에 불과한 이 시간! 참을 수 있는 거예요. 여기를 안 바라보고 이걸 모르니까, 그렇게들 그냥 여기에 매달려서 울고, 불고하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기독교는 그거 아니에요. 우리 하나님 섬기는 거예요. 하나님 섬기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받기를 원하십니까?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찬양을 받기를 원하세요?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성경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이 하신 언약이 뭐죠?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네 아버지가 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정말 그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사랑을 알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서, ‘아버지 ~ ’ 이렇게 불러주는 거 그 한마디 듣고 싶어서,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를 경륜해 나가고 계시는 거예요. ‘아버지 ~ ’ 그게 찬송이라니깐요. ‘아버지 ~ 우리 아버지군요! 아버지 ~ ’ 그게 찬송이고, 찬미라고요. 그 이야기 듣고 싶어서, 그 사랑하는 아들에게, 사랑하는 딸에게, ‘아버지 ~ ’ 이 소리 듣고 싶으셔서, 우릴 구원해 내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구원의 목적은, 찬미하고 찬송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이 이 땅에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표현되어 있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설명되었죠?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서, 그 피를, 우리 죄의 대가로 삼으셨어요.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셨다고요. 5절 하반부를 보시면,
5 …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여기에서 ‘해방하시고’라는 말, ‘루오’는 ‘깨끗이 목욕시키다, 깨끗이 빨다’는 뜻이에요. 온통 죄로 더러워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인제 빨아주신 거예요. 하얗게! 하얗게! 우리를 위해서 그 피가 속전으로 치러진 거예요. 성경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5장 9절에 보세요.
(요한계시록 5:9)
9 새 노래로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러죠? 피로! 우리를 사셔야 돼요. 히브리서 9장 22절 보세요.
(히브리서 9:22)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서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가 흐르지 않으면, 우리 죄가 사(赦)해지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로만 우리는 건져 내어질 수 있다는 거예요. 히브리서 13장 12절 보세요.
(히브리서 13:12)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서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라
그래요. 하도 많이 들으셔서, 감동이 없으시죠? 영적 불감증에 걸리신 거예요. 그것이!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고 있어요. 너무 이쁘고 사랑하는 강아지예요. 그런데 강아지가 병이 들었어요. 그래서 수의사를 찾아갔어요. ‘이 강아지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랬더니, 이 수의사가 진단을 해보더니, ‘아!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송아지를 푹 삶아서, 강아지에게 먹이십시오.’ 강아지를 너무 사랑하니까, 집에서 키우는 송아지를 그냥, 잡아다가 삶아서 강아지에게 먹였어요. 그런데 안 나았어요.
그래서 또 다른 수의사를 찾아갔더니, ‘아! 이 병은 집에서 키우는, 커다란 준마(駿馬)! 말을 죽여서, 삶아서 먹여야지 돼요.’ 또 갔습니다. 고민 고민 하다가, 정말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죽여서, 삶아서, 강아지한테 먹였어요. 또 안 나았어요. 그래서 정말 용하다는 수의사를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그 수의사가, ‘아! 방법은 딱 한가지입니다. 당신 장남 있죠? 그 아들 죽여서 삶아서 먹이십시오. 그러면 났습니다.’
강아지가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자기 아들을 죽여서 삶아 먹이는 미친놈이 있을까요? 여러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단 말이에요. 개만도 못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난도질을 하신 거예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찬송을 안 하냐구요?
왜 제가 개만도 못하다고 이야기 하는 줄 아세요? 우리를! 제가 임장노님 집에 갔는데, 임장노님 집에 강아지 한 마리 있어요. ‘참 이쁘다’ 그랬더니, 장로님이 ‘사람보다 나아요.’ 그러더라고요. 그거 굉장히 성경적인 이야기예요. (하하) 제 귀에는 예사롭게 들리지 않더라고요. 사람은 일관성이 없다는 거예요. 화나면 언제든지 배반한다는 거예요. 강아지는? 언제나 주인이 가면, 꼬리 흔들고 반겨주는 거예요. 3절 보세요.
(이사야 1:3)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개만도 못한, 금수만도 못한 게 우리 인간이라는 거예요. 죄인들! 그런데 그 개만도 못한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아들을 죽여서 삶아서 먹인 거예요. 그게 말이 되냐구요? 그런데 거기에 우리가 감격하지 않는다 말이에요? 여러분?
오늘 본문 6절은, 그 예수 그리스도에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나라와, 제사장이 됐다, 그래요. 나라와 제사장을 원어로 보면, ‘바실레이안 히라이스! 바실레이안 히에라이스’입니다. 이 말은, ‘나라 곧 제사장’ 이런 뜻이에요. 나라와 제사장은 동격으로 올려놓는 거예요. 나라와 제사장이 아니라, 나라 곧 제사장! 이것은 출애굽기 19장 6절 말씀의 성취예요.
(출애굽기 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그래요.)
지금 모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우리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 그걸 다 지킬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내려오신 거예요. 그래서 죽으신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요 제사장이 된 거예요.
오늘 본문 6절에,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의 그 ‘삼으신, 포이에오’는 과거시제예요. 그 ‘포이에오’는 ‘창조하다’란 뜻이거든요.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거룩한 나라요 제사장으로, 재창조해 내셨다는 거예요. ‘너희가 나의 말을 잘 지키면, 나라와 제사장으로 만들 거다.’ 그랬는데, 이미 예수가 다 지키셨고,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다. 그러는 게, 오늘 본문이란 말이에요. 베드로전서 2장 9절 보세요. 똑같은 말이 나오죠?
(베드로전서 2:9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
그런다고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 같은 것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나라’라는 개념과, ‘제사장’이라는 개념이 같을 수가 있는가? 우리가 ‘나라’라는 개념을 영토의 개념으로 가지고 있어서,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나라’는 바로 우리 교회 자신을 가리키는 거예요.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예요.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죠?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구약에서 뭐라 불렀죠? 제사장이라고 불렀단 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은 나라요, 제사장이라는 거예요. 히브리서 10장 19절 보세요.
(히브리서 10:19)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이 누굽니까? 제사장들밖에 없잖아요? 나머지는 그 뜰 밖에 못 밟는다고요. 유일하게 제사장들만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이제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어요. 제사장이 되었다는 거예요. 하나님나라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제! 그 제사의 모습, 성막의 모습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축소해 놓은 거라 그랬잖아요? 제가! 바로 이 예배도 그 하나님 나라를 축소해 놓은 거예요. 똑같은 거라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제 영원한 성소! 그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 거예요.
여러분! 찬송이라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애 낳아 보신 분 알겠지만, 그렇게 보고만 있어도 좋죠? 막 자랑하고 싶죠? 그래서 애가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어쩌면 이렇게 코도 이쁘고, 어쩌면 이렇게 입도 이쁘고, 어떻게 이렇게 귀도 이쁘고, 옆에서 보기에는 진짜 못생겼는데, 자기 새끼는 그렇게 이쁜 거예요. 그걸 찬송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자랑하고 싶어서 못 견디는 거! 여러분! 그 찬송! 하고 계시냐 말이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좋으세요? 여러분!
그런데 성경은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요, 제사장이다. 그런다고요. 계시록 20장 4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20:4-6)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배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니 (1000년은 교회시대라 그랬어요.)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여러분들은!)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할 일이 있어요. 제사장은 뭐하는 사람들이라 그랬죠?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자들이잖아요?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우리는 제사장이라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삶으로, 제사를 드려야 되는 거예요. 로마서 12장 1절 보세요.
(로마서 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히브리서 13장 15절 보십시오.
(히브리서 13:15)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그러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을 제물로 드려서, 절대적은 순종(順從)을 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다고요. 그거처럼, 우리도 우리의 몸을,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우리의 몸을, 인생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고, 제사를 지내야 되는 자들이, 바로 유니온 크라이스트(Union Christ)!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라고요. 제사장된 우리의 모습이란 말이에요.
제물은 마땅히 죽어야 하는 거죠? 살아있으면서, 죽음을 방불(彷佛)하는 제물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냐구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그 산 제사의 삶을 살라고 한다 말이에요?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것은 나하고는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그렇게 생각들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아니에요. 우리의 삶이 그 삶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살아있는 채로 나의 몸을 찢어내는 제물의 삶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그 제사를 드리는 삶인지, 제물의 삶인지, 베드로전서 2장 9절로 가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9)
9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자, 그들의 삶은) 이것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하나님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포하다’는, ‘액상겔러’라는 말은, ‘발표하다, 크게 자랑하다’라는 말이에요. 우리가 제사장으로서 제사를 드리는 삶은, 첫 번째가, 하나님을 크게 자랑하는, 우리의 삶으로 자랑하는, 그런 삶을 사는 거예요. 10절.
10 여러분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그분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적인 욕정을 멀리 하십시오. (제사장의 삶이에요.)
12 여러분은 이방 사람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제사장의 삶이죠?) 그렇게 해야 그들이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을 하다가도 여러분의 바른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13 여러분은 주님을 위하여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순종하십시오. 주권자인 왕에게나
14 총독들에게나 그렇게 하십시오. 총독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게 하려고 왕이 보낸 이들입니다.
왜 제도와 법과 상위 권위에 순종해야 되는지,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반 은총으로, 이 악을 제어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해야 되는 거예요. 15절.
15 선을 행함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16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
17 모든 사람을 존경하며 신도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경하십시오. (그것이 제사장의 삶입니다.)
18 하인 여러분 가장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 만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리 하십시오.
19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21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여러분이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제사장의 삶은 이런 거야!’라고 예수님이 먼저 살다 가셨으니까, 여러분! 그 제사장의 삶을 사십시오. 여러분의 몸을, 여러분의 인생을, 재물로 드리십시오! 남을 위해 희생하십시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으십시오! 그게 제사장의 삶이에요.
어저께 이 안식교 목사님이 오셔서, 우리 찬양 팀 성가대 다 모여서 연습하려고 하는데, 저희들 3시부터 매주 토요일 주일 준비하거든요. 오더니 갑자기 토요일 날은 아예 범접을 하지 말래요. 오지를 말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자기들이 일 년에 한두 번씩 토요일 날 여기를 써야 되기 때문에, 아니, 세상에 일 년에 한 두 번씩 써야 되기 때문에, 우리보고 아예 토요일 날 오지 말라는 것이 말이 되냐고요? 그래서 제가 ‘계약하기 전에, 이 3시 이후에는 써도 된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그런 말 한 적 없대요. ‘설사 그런 말 했어도, 이제부터 내가 얘기하노니, 다음 주부터 쓰지 마십시오.’ 이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제가 더러워서 정말! 하나 사려다가 개뿔도 가진 게 없어서, 말았지만! 참는 거예요. 그래도 억지죠? 억울하죠?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강자가 약자 괴롭히는 거예요. 그건 도저히 못 참겠어요. 제가 목사로도 못 참겠어요. 그건! 그런데 직접 당하고 나니까, 아! 진짜 서럽더라고요. 우리가 무슨 바이러스입니까? 악성 바이러스예요? 범접도 하지 말라 그러게!
그래도 집에 가면서 찬송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다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마음대로 해라! 그래 마음대로 해라! 개는 짖어도 제대할 날은 온다! 우리는 찬송하는 거예요. 그게 제사를 드리는 삶인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기꺼이 그분을 섬기게 되면, 이까짓 찬라의 세상에서 받는 어려움! 고난은, 참아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땅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위해서 형제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밟지 않을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제사장의 삶이에요. 우리의 삶을 제사로 드리는 삶이에요.
자, 그렇게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제사장의 삶을 살다가, 그 제사장들이, 교회가 모이는 시간에 모여서, 진짜 하나님나라의 모형을 이 땅에 보여주는 것이, 예배예요.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하여,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을 자랑하며, 찬양하는, 하나님나라의 삶에 축소판이, 바로 교회가 모이는 예배라고요. 예배야말로 우리 제사장들이,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제사인 거예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삶이 결국은, 예배의 삶이었다는 것을 여러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계시록 22장 3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22:3)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러죠?)
천국에서, 그의 종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며, 이 ‘섬기며’라는 단어가 ‘라트리오’라는 말인데, ‘예배하다’는 뜻이에요. 거기서 우린 뭐한다고요? 예배하는 거예요. 예배하는 거! 예배를 다르게 생각하지 마세요. 히브리서 9장 14절 보세요.
(히브리서 9:14)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자들은요, 하나님을 예배한다니깐요. 똑같은 말이에요.? 라트리오! 예배하는 삶!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의 삶을 사는 것이고, 천국의 장자들의 총회가 모이는, 예배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해야 되는 거예요.
왜 제사장과 나라를 동격으로 이야기하는 줄 아세요? 여러분 교회는 개별적으로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창세전에 교회라는 무리로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모여야 되는 거예요. 모여야만 힘을 얻고, 모여야만 서로를 격려할 수 있고, 모여서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을 얻는 거예요. 가짜들 투성이라 모여도 별로 감동이 없어요. 그죠? 진짜 교회들은, 모이지 않으면 살수가 없어요.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그래서 모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뭐 하러 모여요? 우리 집에는 하나님 안 계세요? 거기도 하나님 계시죠? 거기서 헌금하고 예배드리면 되잖아요? 왜 모여요? 왜? 우리는 모여야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교회예요. 제사장이고 나라라고요. 그래서 나라를 ‘제사장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라’라는 것은 집합명사잖아요? 그런데 제사장과 나라를 동격으로 이렇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모여야 되는 거예요. 모일 때 우리는 힘을 얻는 거예요. 기쁜 거예요. 모여서 찬양을 하면은 그 하늘나라가 막 임하는 거예요. 이 땅에! 그래 ‘우리는 이렇게 모여서 하늘나라를 영원히 살 자들이구나!’를 깨닫는 게, 예배라고요.
그런데 이 예배를 귀찮아하고,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은 뭐에요? 가짜죠? 복음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이 예배에서, 여러분은 그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간다면, 여러분은 가짜입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나라에 가도 별반 감동 없어요. 왜냐하면 똑같거든요. 아십니까? 여러분 대단한 거 기대하지 마세요.
자 아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는 궁극적인 이유가, 뭐라 그랬죠? 우리들로부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감사와 기쁨이 담긴, ‘아버지!’ 소리 듣고 싶으셔서요. ‘아버지!’ 소리 듣고 싶으셔서! 그래서 우리를 건져 냈다고요. 우리가 하나님이 진짜 우리의 아버지라는 걸 아는 거!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거! 그것이 나라요. 제사장인 자들의 삶! 아닙니까?
그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과, 그렇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찬송하고, 아버지라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감격적인, 찬양을 하는 자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 천국 아니에요? 그것을 그대로 이 땅에다가 내려 꽂아놓은 게 예배란 말이에요. 그런데 예배를 하면서, 찬양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나의 사정을 아뢰면서, 그 천국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냥 멍하니 신기루처럼 다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지금 죽으면 안돼요. 천국 못갑니다. 여러분!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겠다는 거예요? 이 예배가 뭔지도 모르면서! 히브리서 12장 22절 보세요.
(히브리서 12:22-24)
22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온 산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천국의 모습을 그려 놓은 거죠?) 여러분은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축하 행사! 지금 수많은 천사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어요.)
23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우리라고요.)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께 나왔고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하는 그가 뿌리신 피 앞에 이르렀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늘나라의 모습이며, 구약의 성막! 성전에서 드려지던 제사의 모습이며, 여러분들이 드리는 이 예배의 모습이라고요. 이 모습이! 이 교회! 하나님나라는, 늘 개별적이지 않아요. 늘 집단적이라고요.
예배는 여러분이 은혜 받기 위해서 모이는 게 아니에요. 착각하지 마세요. 예배는 구원받은, 은혜 받은 자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게, 예배라고요. 그러니까 은혜 받은 자들은, 그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사모하게 되어 있죠? 왜 서비스(service)라고 하겠어요? 예배를? 그런데 여기 와서 뭔가 자기 문제를 해결 받고, 뭔가 위로를 받고, 사랑받고, 은혜 받고 싶어 하는 게, 그거 예배 아니라고요. 예배는? 은혜 받은 자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예요. 그래서 열린 예배! 무슨 예배! 이거는 꽝이에요. 예배 아니에요. 하나님의 교회가 모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게 예배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와서, 무슨 공연이나 보고, 드라마나 보고 하는 건, 예배 아니에요. ‘아이, 무슨 설교 말씀만 듣고 가면 됐지!’ 그건 뭔지 아세요? 내가 일주일 동안 이 땅을 어떻게 살 것인지, 교훈을 얻어서 나가겠다는 것인데, 그건 예배 아니에요. 역시 거기도 ‘나’라고요. 그거는! 역시 ‘나’예요. 그것도! 예배는 소중한 거예요. 하늘나라를 이 땅에다가 인투루전(intrusion)! 꽃아 내리는 거예요.
자, 세상에서 외롭게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목소리 높여서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높여드리며, 또 헌금을 해서, 자기 가진 소유를 또 나누고,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위용을 자랑하는 게, 예배란 말이에요.? 당연히 우리는 예배를 사모하게 되어 있어요. 모이는 것을 사모하게 되어 있다고요. 사도행전 2장 44절을 보세요.
(사도행전 2:44-47)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이 사람들은, 날마다 모였어요. 너무 좋아서! 자기 재산 다 내어 놓고, ‘필요하면 갖다 써!’ 그러고, 날마다 모였어요. 헤어지기 싫어서! 여러분! 가끔 우리가 수련회나 어디 올라가면, 막 내려가기 싫을 때 있죠? 그런 거! 그게 예배여야 된다고요.)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칭송을 받고, 주께서 그것을 본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러한 책임과 의무까지 있는 사람들이에요. 제사장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오심으로, 율법이 폐기된 것으로 착각을 한다고요. 율법은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되고 완성된 거예요.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진, 하나님나라로 지어져 가면서, 예수 안에서 그 율법들을, 완성시켜 나가는 자들이에요.
십일조가 예수 안에서 완성 되었죠?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헌금 안 하나요? 헌금 한다고요.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다 달라고 하는 거예요. 십일조만 달라는 게 아니라! 그 정신은, 그 헌금! 십일조의 정신과 원리는, 우리가 지금도 갖고 있어야 하는 거예요.
안식일이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죠? 그렇다고 우리가 예배 안 드려요? 부활하신 첫날인 주일을 목숨 걸고 지키는 거예요. 열심히 지키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동물제사는 인제 없어 졌어요. 예수를 설명했던 거니까! 그러나 그 정신! 제사의 정신! 뭡니까? 속죄! 십자가! 피! 희생! 이 정신은,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그대로 우리는, 완성시켜 나가야 되는 거예요. 우리의 삶으로, 속죄의 삶! 십자가의 삶! 그 피의 삶! 그 희생의 삶! 살아내는 거예요. 그리고 일주일에 몇 번씩 이렇게 교회가 모여서, 그 희생! 그 속죄! 그 피! 그것을 기념하면서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그게 예배라고요.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탄생한 장자들의 총회가, 형식을 갖춰서, 오늘도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것 그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거룩하게 구별된 어떤 무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을 배격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 세상에서 불려 나와서, 기쁘게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는 어떤 무리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는 하늘에서도, 지옥에 있는 자들과, 그렇게 구별되어져서 살 거라고요. 그 모습을 그대로 이 땅에서 보여주는 게, 예배란 말이에요.
그러한 예배에, 여러분이 늦장을 부릴 수 있습니까? 정말 그 예배를 안다면, 어떻게 우리가 예배시간에 전화가 왔다고, 전화를 받으러 나가요? 예배를 드리는, 그 제사를 드리는 중간에, 화장실을 가는 사람이, 그렇게 준비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맞냐구요?
아론이 제사장으로서 피를 뿌리러 성소에 들어가는데, 밖에서 누가 부른다고,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하나님!’ 그리고 나가서 이야기 하고 왔을까요? 아론이 피 뿌리러 성소에 들어갔다가, 오줌 마렵다고 화장실 갖다 왔을까요? 여러분?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미리 미리 준비했다고요. 왜냐하면 들어가면 죽으니까! 흠 있는 모습으로 들어가면 죽으니까! 하나님 앞에 서는 모습은 그렇게 진지해야 되는 거예요. 제가 하도 답답해서 그래요. 진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인지.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인지. 너무 답답해서 그래요.
어저께 이은주 집사님이 마라톤하면, 이게 막을 탠데 어떡해요? 걱정이 되는 거예요. 왜 걱정이 안돼요? 그게? 우리가 교회가 모이는데, 방해가 될 텐데! 걱정이 되니까 미리 전화하시는 거예요. 그런 열성과 진지함이 있어야지요. 다 끝나! 찬양도 다 끝나고, 슬그머니 들어와서 전화 오면 전화 다 받고, 화장실 가고 싶으면, 화장실 가고!
구약의 제사장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겸비한 마음으로 섰는지를 보셔야 돼요. 골프를 치러 가느라고 교회가 모이는 데를 안온다고요? 일이 좀 바쁘다고 교회를 안 온다고요? 비지니스 때문에 교회를 빼먹는다고요? 정말 하나님을 아는 분들은요, 교회가 모이는 스케줄에 맞춰서, 다른 6일의 스케줄을 맞춰요. 이 스케줄에 맞춰서, 나의 일요일을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게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이 어떻게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어떻게 나가서 하나님을 이야기 하냐구요? 그 사람들이 뭐라 그러겠어요? ‘야! 너도 바쁘면 가끔 안가잖아? 너도 네 몸을 즐겁게 하는 일이 그런 용무가 있으면은, 너도 언제든지 빼 먹잖아? 너 숙제가 있어도 교회 안가더라! 나는 너보다 더 바쁜 일이 있어! 그래서 못가!’ 그러면 어떻게 얘기 하실 거예요?
‘네 숙제 때문에, 네 비즈니스 때문에, 네가 제쳐놓을 수 있는, 하나님나라고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런 하나님 필요 없어!’ 그렇게 이야기하시면, 어떻게 얘기 하실 거냐고요? 거기다가! 제가 정말 궁금해서 한 번 여쭤보는 거예요. 정말 궁금해서 한 번 여쭤보는 건데, 정말 여러분은 그 문화와 문명과 자연이 이제 완전히 회복되고, 그 목숨을 끊어가면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죽여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그 수많은 교회가 모여서, 영원히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그렇게 영원히 살아가는 그 천국을, 정말 여러분은 소망하고 계십니까? 정말!
그 나라를 미리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여기 밖에 없는데, 이곳을 이렇게 소홀히 하냐고요? 찬송을 소홀히 하냐구요? 말씀을 소홀히 하세요? 여러분? ‘날 알아주지 않으면, 나 교회 안가!’ 제가 그런 사람들 전화해서 오라고 한 적이 있어요? 안 말려요. 그런 분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소홀히 여기고,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절대 잡지 않아요. 말씀 안 듣겠다고 안 오는 사람! 제가 전화해서 왜 안 오냐고 물어본 적 있습니까? 아니에요. 여러분! 기독교는 그렇게 값싼 거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는 선포하고 열심히 목숨 걸어 하나님 섬기면 되는 거예요.
파주에서 저희 교회의 테잎을 받으시는 어느 권사님이, 어제 전화하셔서, ‘목사님! 죽기 전에 복음이 뭔지 알고 가게 되어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제 목사님 테이프를 다 모았더니, 이만한 쇼핑백에 하나 가득이 됐대요. 자기가 테이프 하나당 15번씩 듣는대요, 왜냐하면 자기가 사랑하면 15명에게 복사를 해주기 때문에, 카세트 데크로 복사를 해주기 때문에, 꼬박 15번을 듣는대요. 일주일 내내!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시로 꺼내서 또 들으신다는 거예요. 이만한 쇼핑백에다가, 누가 다이아몬드를 한가득 갖고 와서, 나랑 바꾸자 그러면, 자기는 이 테이프랑 안 바꾸겠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말씀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시냐고요? 그런데 비즈니스 때문에, 숙제 때문에, 여러분의 용무 때문에, 교회가 모이는 시간을, 여러분이 그렇게 빼먹을 수 있냐고요? 제가 답답해서 그래요! 답답해서! 평생 예수 믿고 지옥 갈까봐 답답해서 그래요! 진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인지, 답답해서!
6절에 보면,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포이에오!’ 이 ‘포이에오’는 과거시제입니다. 이미 완성된 거예요. 우리는 인제 완성됐어요. 완성됐어요! 그런데 5절에, ‘우리를 사랑하사’ ‘아가파오’는 현재시제라고 했죠? 현재시제는 뭐라 그랬습니까? 진행형!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그 사랑! 왜냐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과, 영광과, 능력은, 세세토록 영원할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이렇게 시제를 쓰고 있는 거예요. 6절 보세요.
6 …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세세토록! 포에버 엔 에버 프럼 에이지 투 에이지(forever and ever from age to age) 영원히! 그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과 능력은 지속될 거예요. 지속될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이미 완성된 그 나라에 들어가 있어요. 그걸 갖고 계신 분들이 무얼 딴 데 눈을 파세요? 뭘 딴 데 눈을 파세요? 그까짓 거 좀 못가지면 어떻고? 그까짓 거 좀 해결 안 되면 어때요? 그걸 가지신 분들이! 그 영원한 그 사랑 안에 이미 들어가 계신 분들이!
축 처진 어께를 좀 올리십시오. 여러분! 힘을 내세요. 정작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게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왕이요! 나라요! 제사장이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맡겨진 환경! 우리에게 맡겨진 상황!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라면, 그 상황 안에서도, 열심히 그 하나님 섬기면서, 순종하면서, 제사장으로 살아내자구요. 제사장으로!
성경은 우리더러 제사장이라고 그러는데, 왜 우리는 여인의 뜰 이방인의 뜰만 밟고 가냐고요? 제사장! 성소에 들어가세요! 성소에! 하나님을 만나세요! 하나님을 느끼세요! 힘을 내십시오. 그리고 우리 열심히 모여서 사랑하면서, 격려하면서, 말씀을 나누면서, 하늘나라를 경험하며 살자고요.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살다보면 제대는 곧 옵니다. 아무리 똥개가 짖어도, 국방부시계는 돌아가듯이! 제대할 날은 곧 와요. 그 제대를 정말 기다리시는 여러분! 참 교회이신 여러분!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에게 어떠한 말씀을, 어떠한 권고를 하시는지, 제발 마음속에 꼭 새기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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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7-8)
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아멘.
지난주에 제가, 설교시간에 조금 흥분을 해서, 소리를 막 지르는 바람에, 어떤 분들이, 진짜 화장실 가고 싶으면, 어떡하냐고? 가셔야죠! 어떡해요? 허허허 괜히 그 참다가 시험 들지 마시고! 우리 김태식 간사님 같은 분은, 당뇨가 있으셔서 꼭 가야 되거든요. 그거 어떻게 참아요? 그럴 땐 가시라고요.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좀 더 진지해지자라는 것이지, 여러분들 막 무슨 일이 있어서 꼭 참고, 늦을 일이 있으면, 뭐 경천동지할 일이 있으면, 늦으셔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우리가 좀 더 진지해지자라는 그런 의미에서 제가 말씀 드린 겁니다.
오늘로서 요한계시록의 서론 부분을 마치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서론이 8절까지죠? 1장 1절에서 8절까지! 사도 요한은 이제 그에 편지 서론에서,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에 대 주제를, 수신자들에게 던집니다. 앞으로 전개될 편지내용의 요약(要約)이죠? 그 내용인 즉슨,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는 책이에요.
요한은 7절을 ‘볼지어다!’라고 시작하죠? ‘볼지어다’는 말이 헬라어로 ‘이두’라는 말이거든요. 이 이두는 단순히 ‘씨(see)’라는 개념의 단어가 아니에요. ‘지대한 관심을 갖고 유의하고 집중하며 깨달으라’라는 의미가 있는 말이, 바로 ‘이두’라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주위를 환기시키는 거예요. 이두! ‘볼지어다!’ 하면서! 자, 이제부터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텐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라! 그러는 거예요. 볼지어다! 이두!
그리고 7절을 어떻게 마치는가 하면, 한 번 보세요. ‘그러하리라 아멘.’ 그러죠? ‘그러하리라 아멘!’ 여기서 ‘그러하리라’ 라는 말은 헬라어로 ‘나이’라는 말이에요.? 이 ‘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멘’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그러니까 헬라어로 나이! 히브리어로 아멘! 같이 붙어 있어요. 아멘! 아멘!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요한이, 이 중간에 있는 내용이 얼마나 중요하면, ‘볼지어다!’라고 주의를 환기시킨 다음에, ‘아멘! 아멘!’하고 끝내는 거예요. 나이! 아멘! 그러니까 헬라어, 히브리어로, ‘아멘! 아멘!’하고 강조를 하는 거예요. 그때 당시 사람들은 금방 알아들었겠죠? 이 말을요! 진짜 그렇습니다!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얼마나 감격스럽고 벅차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우리가 금방 읽을 수 있죠? 계시록 전체의 주제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입니다. 계시록 전체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의 일과, 재림과, 재림 후에 천국! 그 이야기예요. 전부가 다!
요한은,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구름을 탄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죠? 그런데 원어로 보면은, 손오공처럼 이렇게 근두운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다니죠? 이렇게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 쓰인 말은 전부 ‘메타’라는 말이거든요 그 ‘메타’라는 말은, 이렇게 ‘뭘 올라타다’가 아니라, ‘함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름과 함께 오신다’라는 게 맞는 해석이죠.
우리가 애들 그림책이나, 무슨 애들 성경이나, 성화라고 불려지는 것들에서,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뭉게구름을 타고, 막 이렇게 오시는 것을 너무 많이 봐서, 이렇게 오해들을 하시는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구름과 함께 오신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성경에는, ‘구름’이라는 말이 다른 깊은 의미로 쓰일 데가 아주 많이 있어요. 먼저 ‘구름’하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죠? 어딥니까 구름? 구름기둥! 광야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이 이스라엘을 끌고 갔죠? 그 구름기둥 불기둥은, 여호와께서 그들과,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어요. 그러니까 바로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나는 게, 구름기둥이었거든요. 그리고 출애굽기 16장 보세요. 10절.
(출애굽기 16:10)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에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그러죠?)
여기서도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납니다. 역대하 5장 13절 보세요.
(역대하 5:13-14)
13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성전 안에 구름이 가득한 거예요.)
14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역시 여호와의 영광과, 구름을 같이 놓고 있어요.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고, 그 성전에 구름이 가득 차는데, 그 구름은 여호와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구름이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데, 영으로 임제하시는 모습을, 우리가 성경에서 구름이다 이렇게 표현한 데가 아주 많다고요. 그러니까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모습! 영광스러운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그 모습을 ‘구름이다.’라고 이렇게 표현을 한다고요.
신약에도 구름이 여러 군데 나오죠?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해같이 찬란한 몸으로 변하셨을 때에,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죠? 마태복음 17장 1절로 가겠습니다.
(마태복음 17:1-5)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그러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는 이 말씀이 어디에서 또 들렸죠?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장면이죠? 마태복음 3장 16절 보세요.
(마태복음 3:16-17)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 두 장면은 아주 흡사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똑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한 군데서는 구름이 싹 임해서 구름이 덮고, 한 군데서는 성령이 임해서 성령이 덮어요. 이렇게 성경에서는, 구름과, 성령과, 하나님의 영광을 아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묘사를 한다고요. 즉 구름은, 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게 맞습니다. 요한은 이 9절을요, 다니엘서 7장을 인용해서, 표현을 해 놓은 거예요. 다니엘서 7장 13절로 가겠습니다.
(다니엘 7:13-14)
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이 ‘인자 같은 이’라는 말은, 1장 13절에 나오죠? 계시록 1장 13절에! 이 말을 13절에 갖다 끌어 쓴 거예요. 그리고)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이 말을 7절에다 갖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죠?)
여기서도 구름을 타고 예수님이 오시는데, 여기는 구약이니까, 아람어로 쓰였어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쓰였거든요. 아람어 ‘임’이라는 말이, 역시 ‘함께’라는 말이에요. ‘구름과 함께 여호와께서 오신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런데 예수께서 구름과 함께 나타나셨는데, 그에게 영광과 권세와 나라가 주어지고 있죠? 자, 이 장면은, 다니엘이 환상을 보는 장면인데요. 인자 같은 이! 그 예수님께서, 지상의 모든 사역을 다 마치시고, 영광과 권세를 받으시는 장면이 바로, 다니엘서 7장에 요 장면이에요.
요한은 이 다니엘서를 인용함으로서, 이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는, 그 영광과 권세를 갖고 오실 것이라는 것을 천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초림 때는 마굿간에 오셨어요. 유대 땅에 아주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죠? 맥없이 뚜들겨 맞고, 십자가에서 죽은 모습으로 오셨어요. 그렇지만 이제 다시 오실 때, 그 재림 때는, 이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오신다는 거예요.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이고, 그 나라는, 영원히 폐하지 않는 나라! 그 영광과 권세를 갖고 오실 거라는 거예요. 인제! 그러니까 ‘너희들, 힘내라!’ 이런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예수님께서, 왜 구름과 함께, 이 성령과 함께, 오셔야 하는가? 거기에는 아주 깊은 뜻이 있어요. 그 의미는 이러합니다. 여러분! 육신의 몸을 입으신 예수께서, 예수님은 분명히 육신의 몸을 입고 계세요. 부활하신 그 날 안식 후 첫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이 깜짝 놀랐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러죠? ‘내가 영이냐? 아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다. 그런데 나는 살과 뼈가 있다. 만져봐라!’라고 하셨다고요. 예수님이 직접! 나는 살과 뼈가 있다고! 그런데 살과 뼈가 있으신 분이 어떻게 승천하시고, 어떻게 거기에서 영광과 권세를 받으셨죠? 성령! 성령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어서, 이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살과 뼈를 갖고 있으시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존재하게 되시는 거예요. 이제 살과 뼈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엄밀하게 말하면은, 무소 부재할 수가 없어요. 살과 뼈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께서 우리 안에 존재하시는 거라고요. 옴니프레전스(omnipresence)!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성령과는 이제 뗄래야 뗄 수 없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함께 계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오셔서, 변화산에서 변화되었던 그 영광스러운 몸! 그 찬란한 몸을, 우리에게, 똑같이 주시기 위해서, 인제는 가시적으로도, 우리에게 그 빛나는 영광된, 해와 같은 영광된 몸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변화시켜 주시기 위해서, 성령과 함께 오시는 거예요.
그 변화산상의 사건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재림의 프리뷰(preview)라고요. 분명히 마태복음 17장 1절에서, 엿새 후에 예수님께서 피터(Peter), 잔(John), 제임스(James)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서, 그 변화산의 이야기가 있죠? 바로 그 전절이 어디예요? 16장 28절이라고요. 거기서 뭐라 그러냐구요? 예수님이? ‘너희들이 죽기 전에, 인자가 왕권을 갖고 다시 오실 것을 볼 자가 있다.’ 그래요. 분명히! 그래놓고 17장 1절에 ‘엿새 후에’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엿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너희들! 분명히 내가 왕권을 갖고 오는 것을 볼 자가 있다.’고 그랬다고요. 그 이야기가 지금 여기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엿새 후에’ 이렇게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엿새 후에, 변화산상에 그 모세와 엘리야와 그 예수님이, 빛나는 그 모습을 입고, 구름가운데 거하시는 것은 바로, 그 재림의 프리뷰(preview)라고요. 예수님께서 왕권을 갖고 다시 오실 그 모습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프리뷰로! 변화산에서! 그 빛나는 몸을 우리에게 주실 거예요.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1장에서 뭐라고 그럽니까? 예수님의 재림(再臨)과 강림(降臨)에 대해서 이야기 한 다음에, ‘내가 이거 공교(工巧)히 만들어낸 이야기 아니다. 나는 본 거 이야기 하는 거야!’ 그러죠? 그러고서는 변화산 사건을 이야기 한다고요. 이 변화산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프리뷰라고요. 그 몸을 입고 오실 거예요. 왜요? 그 몸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바로 그 몸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성령과 함께, 구름과 함께 오신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고 아울러서, 예수께서 주의 날에 성령과 함께 오시는 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거예요. 심판하러! 성령이 오시면, 믿지 않는 자들 죄인들에게는, 심판입니다. 여러분! 그거 확실히 알아두셔야 돼요. 창세기 3장 8절로 가겠습니다.
(창세기 3:8)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그러죠?)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어요. 타락(墮落)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서늘한 날에 찾아오신다. 그래요 시원한 날에 찾아오신 걸까요? 개역성경에는 ‘날이 서늘할 때에’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욤 르와흐’라는 말이에요.? ‘욤’이라는 말은 ‘무슨, 무슨 날’이라는 뜻이거든요 ‘르와흐’는 뭐예요? 성령! ‘성령의 날에’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왜 오셨죠? 벌거벗고 창피해서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왜 오셨어요? 심판하러 오셨어요. 성령이 임하시면, 믿지 않는 죄인들에게는 심판이 임하는 거예요. 그 심판은 무시무시한 거예요.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믿는 자에게는 복(福)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詛呪)와 심판(審判)의 모습이에요.
여러분! 성령세례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성령세례는요, 믿지 않는 가짜들에게는, 죽음이요, 저주요, 심판이라고요. 제가 간혹 그런 분들 봅니다. 제가 보기엔 분명히 가짜예요. 분명히 가짠데, 성령세례 너무 좋아해서, 그냥 쓰러졌다 일어나고, 입에 거품 물고, 뭐 혀도 꼬이고, 그런 사람은 여러분! 제가 옆에서 보기에는 너무 불쌍해요. 너무 불쌍해! 성령세례는 그거 아니에요. 무시무시한 거예요. 믿지 않는 자들, 예수를 알지 못해,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거예요. 마태복음 3장 11절 보세요.
(마태복음 3:11-12)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에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것인데… 어떤 일이 있냐구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나머지는? 가짜는?)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태우러 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령이 임할 때 일어나는 일이에요. 예수께서 성령과 함께 오신다는 것은, 그런 무시무시한 심판을 행하러 오신다는 거예요. 출애굽기 12장 29절 보세요.
(출애굽기 12:29-30) (표준새번역)
29 한밤중에 주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들을 모두 치셨다. 임금 자리에 앉은 바로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감옥에 있는 포로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까지 모두 치시니,
30 바로와 그의 신하와 백성이 그날 한밤중에 모두 깨어 일어났다. 이집트에 큰 통곡소리가 났는데, 초상을 당하지 않은 집이 한 집도 없었다.
그러죠? 유월절에 일어났던 일이에요. 여러분 ‘십계(十誡)’나, ‘프린스 오브 이집트(Prince of Egypt)’ 이런 영화보시면, 죽음의 신이 구름처럼, 싹 몰고 가죠? 애굽 전체를! 그때에 인방과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발려있는 집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있어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가짜들은요? 다 죽어요. 통곡소리가 난다고요. 그게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일어날 일이에요. 그러한 모습으로 오신다고요. 성령은요!
우리가 받는 세례(洗禮)는? 바로 그 성령세례를 상징하는 거예요. 마땅히 죽어야 할 자가 죽고, 예수 안에 있는 새 피조물만 살아나는 거! 그게 세례거든요? 그러니까 마치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들어가면서, 에굽 쪽에서 보면 죽는 거죠? 그러나 가나안 쪽에서 보면, 새로운 사람들이 살아나오는 거예요. 그걸 세례라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우리가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나 보세요. 똑같은 세례를 받은 자들이 있어요. 이집트! 애굽사람들이요. 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살아올라왔어요? 못 살아올라왔어요! 그게 마지막 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함께 심판하러 오실 때, 그 모습이에요. 모세에게 속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았듯이, 예수에게 속하여 있는 자만 살아서 올라오는 거예요. 나머지는? 다 빠져 죽는 거예요. 그게 무시무시한, 재림의 날에 일어날 일입니다.
자, 그렇게 성령이 오시면, 예수 안에 있는 자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지옥의 불로 던져지는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지옥불은 무슨 불이라 그랬죠? 성령의 불이에요. 여러분! 지옥은 마귀가 다스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지옥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거예요. 여러분! 마귀는 거기서 같이 타는 거예요. 연료로! 그 불은 성령의 불이에요. 믿는 자가 성령의 불을 받으면, 너무나 감격스러운 거지만, 믿지 않는 자들이 성령의 불을 받으면, 타는 거예요.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정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우리 예배당 안에, 정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을 좀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어요. ‘지옥을 좀 보여주십시오! 그래서 무서워서라도, 하나님께로 좀 도망갈 수 있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 심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보시겠습니까? 계시록 6장 12절.
(요한계시록 6:12-17)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청담같이 검어지며 온 달이 피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종이축이 말린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제발! 너무, 너무 그 진노가 그 심판이 무서워서, 하나님의 그 진노가 너무 무서워서, 산과 바위에게, 내 위에 떨어져서, 나를 짓눌러 나를 가려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무서우면요? 계시록 16장 19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16:19-21)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음에
20 각 섬도 없어지고 각 산악도 간대 없더라
21 또 중수가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제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계시록 20장 9절로 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0:9-15)
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 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의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줌에 각 사람이 자기에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스바냐 1장 14절로 가겠습니다.
(스바냐 1:14-15)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란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이요.
(데살로니가전서 5:1-6)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고통이 이름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이렇게 무시무시한 날이 바로, 재림(再臨)의 날입니다. 여러분! 구름타고 가야금 울리면서, 예수님이 오실 거라고 상상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무시무시한 심판자로 오실 거예요. 우리에게는 따뜻한 형님이요, 맏아들이요, 친구요, 그런 모습으로 오실 거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심판자의 모습으로 올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예수를 믿는 자들을 우습게 여겼던 모든 자들은, ‘차라리 내 몸뚱아리에 바위야! 떨어져라! 산아! 좀 가려다오!’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계신 여러분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건져지신 것입니까? 어떻게 그러한 죄인의 자리에서 건져진 거예요? 그러한 진노의 자리에서 어떻게 건져지신 거예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거기에서 그 자리에서 건져지신 분들이, 뭐가 그렇게 힘든 게 많아요? 뭐가 그렇게 힘든 게 많아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함께 오시는 그날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날인지, 요한은 봤어요. 봤기 때문에, 계속해서 스가랴 12장 말씀을 인용해서, 7절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7-8)
7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래요.)
구름을 타고 그분이, 구름과 함께 오시는데, 각인의 눈이 그것을 볼 것이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것 때문에, 통곡을 할 날이 온다. 그래요. 스가랴서 12장으로 가서,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한 번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스가랴서 12장 10절로 가겠습니다.
(스가랴 12:10-14)
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자, ‘찌른바’ 여기서 하나 인용한 거예요.)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자, ‘애곡한다’ 똑같은 말이죠?)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그러죠?)
이렇게 모든 족속이 통곡을 하고 있는데, 그 모든 족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자들이다.’ 그러죠?입니다. 10절 보세요. 다시! 10절에 보시면, ‘그들이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통곡을 한다.’ 이렇게 나오죠? 그리고는 그 찌른 족속들이, 구체적으로 쭉 나오는 게, 지금 스가랴서 12장이에요.
그러면 그 찌른 자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물리적으로 찌른, 빌라도! 헤롯! 로마 병정! 바리새인! 고 사람들만 이야기 하는 게 아니죠? 지금 쭉 그 찌른 사람들의 족속! 그 이름이 나온다고요. 이 구절을 가지고서, 과거주의 해석을 하는 사람들하고, 후천년설 주의자들은, ‘봐라! 이거는 AD 70년 전에 계시록은 기록된 것이고, 이 마지막 심판 때 일은, AD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타이터스에 의해서, 이 성전이 파괴될 때 그때 이야기 해놓은 거야! 이미 고난이라는 것은 다 끝났어!’ 이렇게 해석을 한다고요. 문자적으로! 천만에요. 잘못본 거죠. 이 스가랴서를 그들은 간과(看過)하고 지나간 거예요.
지금 요한은, 스가랴서에서 그 단어들을 뽑아서 썼다고요. 그 ‘찌른 자들’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구세주를 부인한 자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속에 피를 우습게 여겼던 자들! 눈이 멀어서 참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에만 눈을 두고 살아가던 자들! 한마디로 구원받지 못한 모든 자들을 가리키기 위해서, 그 ‘찌른 자들’이란 말을 꺼내다 쓴 거예요. 스가랴서에서도 그런 의미로 쓴 거구요. 그때는 아직 예수님이 오시지도 않았는데, 뭘 예수님을 누가 찔러요? ‘찌른 자’라는 말은, 바로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자들이에요.
바로 이런 자들이죠? 요한2서 1장 7절로 가겠습니다.
(요한2서 1:7)
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들이요.)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그러죠? 베드로후서 3장 3절로 가겠습니다.)
(베드로후서 3:3-4) (표준새번역)
3 여러분이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면서 여러분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4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느냐 (‘어디 오냐? 오기는? 2천년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데, 진짜 오겠냐?’ 그런다 말이에요.) 조상들이 잠든 뒤로 만물은 처음 창조 때로 부터 그냥 그대로다”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 이런 자들이 통곡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거예요. 우리를 조롱하는 많은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통곡할 날이 올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멘! 아멘!’ 하면서, 그날의 도래를 확실하게 지금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아멘! 아멘! 나이, 아멘!’ 하면서! 그날은 분명히 온다. ‘조롱해 봐라! 분명히 그날은 온다!’ 그러는 거예요. 사도 요한은요!
예수님께서도 직접 이 스가랴서를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이야기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29절로 가겠습니다.
(마태복음 24:29-30)
29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날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요한계시록의 말씀과 스가랴와 다니엘의 말씀과 똑같은 말씀이죠? 예수님이 고렇게 이야기 하고 계시다고요. ‘분명히 그날은 온다! 너희들, 정신 똑바로 차려라!’ 그러는 거예요.
그때는, 예수님께서 재림할 때는,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를 할 수가 없는 때예요. 왜요? 예수님은 언제 오십니까? 144,000명이라고 상징이 된, 그 하나님의 백성들의 숫자가 다 차야,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이 딱 구원을 받으면, 그때 천국 문 딱 닫고, 예수님이 그때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에 무슨 회개를 해요? 회개할 사람은 이제 이미, 다 천국에 들어가 있고, 그 수가 딱 차면은, 그때 천국 문 닫고 예수님이 오시는 거예요. 성령과 함께! 그러니까 여기서 통곡하는 것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에요. 이를 가는 눈물이에요. 분해서! 후회의 눈물이에요. 억울해서! 그런 통곡의 눈물이 반드시 있다는 거예요. 그런 통곡이!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혹시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이 계시면, 빨리 예수 믿으셔야 됩니다. 여러분! 미루지 마시고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통곡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죽지도 않아요. 한 300년만 있다가 풀어준다면 한 번 해보겠어요. 저는! 이 땅에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어떤 기한이 있다면, 아니 만년 있다 풀어준다면, 기다리면 되잖아요? 어떻게든지! 그게 아니라, 영원이라고요. 영원! 거기에는 구대기가 득실거린다, 그러죠? 아주 처참한 곳이라는 표현이에요. 거기에서, 영원히 있어야 돼요.. 가석방도 없어요. 거기는요!
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말이에요? 이게 말이되나고요? 기독교인들이 거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살아간다 말이에요? 100프로 가짜예요. 그거는요 100프로 가짜예요. 이 시대의 목사나 기독교인들이, 그 지옥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 따위로 사는 거예요. 지옥이 있다는 걸 믿으면, 이렇게 못살아요. 아무도 안 믿는 거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지옥이 있다는 것을! 그 날은 분명히 옵니다. ‘나이, 아멘! 분명히 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예수 믿는 여러분! 여러분은, 안심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은 변화산에서의 우리 주님과 같은 새 몸을 입고, 그 때부터 이제 영원히,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고, 아픔도 없는 곳에서, 기쁨과 안식과 평안을 누리면서, 사시게 될 거예요. 그날은 반드시 속히 옵니다. 아니, 벌써 오고 있어요. 벌써 오고 있어요.
오늘 본문 보시면,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성령과 함께 오시리라!’ 거기서 ‘오시리라, 엘코마이’는 그 시제가 현재형이에요. 헬라어의 시제 현재형은 뭐라 그랬죠? 진행형! 오시고 계시다는 거예요. 오시고 계시다! 여러분! 천군 천사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십니까?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의 그 말발굽소리를 들으세요? 그 소리를 들으세요! 그래야 힘이나요! 그래야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세상의 공격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다시!
제가 군데 있을 때, 포천에 있는 어떤 부대에서 탈영병이 생겨서, 용인까지 넘어왔어요. 그 사람들이 무기고를 습격해서, 실탄하고 수류탄을 다 들고, 용인까지 산 능선을 타고 넘어온 거예요. 그런 정보를 받고, 저희 사단이 인제 그 일을 맡았는데, 설마 여기까지 왔겠느냐 해서, 한 여덟 명이서, 공포탄 15발씩 갖고 나갔어요. 하! 뭐 가다가 담배도 한 대씩 피우고, ‘뭐 있기 어딨냐?’ 막 이러면서! 그때는 은하수를 한 갑씩 줬거든요. 담배를! 그 비린 은하수를 나눠 피면서!
무덤 옆에 앉아서 인제 막 잡담하고 있는데, 그 산속에 빈 집에서 말이죠? 갑자기 총알이 날아오는데, 뭐 미처 손쓸 새도 없어요. 뭐 무덤 옆에 딱 숨어 있는데, 무전병이 이제 무전을 해야 되니까, 이 무전기 안테나가 한 2-3미터 되거든요. 그 안테나를 보고 쏘는 거예요. 얘네들이!
그런데 이 무전을 치려면 철모를 들어야 된다고요. 왜냐면? 귀에다가 갖다 되어야 되니까! 살짝 드는데, 여기에 딱 맞았어요. 무전병이! 그런데 M16은 6조 강선이라고 해서, 이게 안에서부터 돌아서 나온다고요. 총알이! 그래서 목표물에 맞으면, 안에서 회전해서, 이 안에가 다 박살이 나는 거예요. 맞자마자 얼른 저희들이 끌어당겼는데, 머리가 푹 주저앉았어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머리가 없어졌어요. 이 뼈가 다 부서져서!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공포탄 쏴 봐야 3미터도 안 나가는 거! 소리만 펑펑 나는 거!
그러니까 덜덜덜덜덜덜 떨고 있는데, 그 쪽은 수류탄도 갖고 있는데 어떡해요? 저 아래에서 이 총소리를 듣고 연대 병력이 인제 올라오는 거예요. 구보를 하면서, 실탄 다 들고! ‘사나이로 태어나서’ 이러면서! 아니, 그 많은 사람이 구보를 하면서 막 오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막 반갑던지 말이죠? 그 안도감! 그 감사함!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수많은 우리 전우들이 우리를 구하겠다고, 줄을 쫙 서가지고 군가를 부르면서 오는 거예요. 다 죽었죠. 걔네들! 포위해서 일제히 쐈는데, 나중에 들어가 보니까, 팔은 여기 떨어져 있고, 머리는 저기 떨어져 있고!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공격해 오지만, 그 하늘의 천군 천사!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을 하시러 오시는 그 날! 그들은 갈기갈기 찟겨질 거예요. 우리를 공격하는 세상이 마귀의 세력이 무시무시해요. 우리는 도저히 이길 수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 엘코마이! 오고계신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의 그 발자국 소리를 들으셔야 돼요. 그 소리를 들으세요! 여러분!
교회에 나와서 맨날 복이나 받고, 문제나 해결하려고 하고 그러니까, 이 하늘나라와는 조금도 상관없이 살고도 있으니까, 조금만 문제가 오면은, 그거에 매달려서 못 일어나는 거예요. 엘코마이! 구름을 타고, 구름과 함께, 성령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가 역동적으로 지금 오고계시다고요. 우리는 그 말발굽소리를 들으셔야 돼요. 그 천군 천사의 군가 소리를 들으셔야 돼요. ‘이겨라! 내가 지금 가고 있다 이겨랴!’ 예수님이 오시는 거예요. 계속 가요. ‘누가 내 아들을 건드려? 누가?’ 그러면서 오고 계시다니깐요. ‘누가? 내 동생들을 건드려?’ 이렇게 우리의 맏형이, 맏아들이, 오고 계시다고요. ‘꼼짝 마라!’ 그러고 오고 계시다니깐요.
예수 믿는다는 게 얼마나 여러분! 감격스러운 건지 모르시죠? 그게 재림(再臨)이에요.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뭉개구름타고 뭐 이러고 오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그 무시무시한 마지막을 보는 거예요. 우리는요 우리에게는 기대와 소망의 날이지만, 이 땅의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날이라는 거! 그래서 세상을 보고 우리는, 불쌍히 여겨주는 거예요. 이게 기독교예요. 이게요!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무슨 복들을 그렇게 바라시는 거예요? 예배당에 오셔서? 그 분이 자기를 가리켜,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그럽니다. 8절에 보면, 그분은 알파요, 오메가이십니다. 알파는 헬라어의 A죠? 오메가는 헬라어의 Z 지라고요. 그분이 처음과 끝! 시작과 나중! 이 모든 것은 그분으로 부터 말미암았고, 그분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분이 오셔서, 다 태워버릴 거예요. 그분이 오고계세요.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우리 편을 들어주기 위해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하고 오신다니깐요. 그 소리를 들으시냐 말이에요?
자, 여러분! 그분은, 우리의 생명의 시작부터, 나의 인생 전체를 주관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알파! 이미 일은 시작되었고, 오메가! 이 목적지를 향해 우리는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알파요, 오메가예요. 우리는 이 오메가! 목적지를 향해, 반드시 가게 되어 있어요. 그분이 나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고, 그분이 알파요, 오메가니까! ‘모든 역사는 내가 주관하고 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너는 분명히 오메가까지 갈 거야! 그런데 너에게 지금 내가 이런 상황을 허락하는 것은, 그 오메가까지 가는 데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너에게 준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거기다가 그분은 전능(全能)하신 분이에요. 직접 하나님이 말씀하세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전능한 자다!’ 그래요. 전능한 자다! 판타 크라토르! ‘모든 것을 통치하시며,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다.’ 이런 뜻이에요. 판타 크라토르! ‘나는 전능한 자다! 옴니포텐스(omnipotence)!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이고, 끝! 시작과 나중이고, 나는 전능한 거야! 옴니프레젼스(omnipresence)! 옴니포텐스(omnipotence)! 옴니션스(omniscience)! 나는 너희들의 삶에 지금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이 오메가로 데리고 가는 거야! 모든 역사는 내 손에 있어! 그런데 너희들이 왜 걱정하고 있냐? 분명히 너희들은 오메가 까지 갈 거야! 이게 목적이 아니라, 딴 데 한 눈 팔고 있으니까, 지금 힘든 거 아니냐?’ 이 얘기하시는 거예요.
이게 목적이면, 분명히 거기까지 갈 건데, 왜 낙심하시냐고요? 이게 목적이 아니니까, 천국과 지옥은 꿈에도 생각 안하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든지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거! 그걸 위해서 하나님을 동원하고 있으니까, 조그만 일만 있어도 힘들어 하는 거예요. 괴로워하는 거예요. 왜 나 안도와주냐고? 아니에요. 이 오메가로 가는 과정이에요. 그 길은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읽어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그 막강 도미티안 황제에게 핍박을 받고 있던 당시 신자들에게, 이 요한의 메시지는, 엄청난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도미티안! 너 지금 우리 이렇게 괴롭히는데, 너 이제 곧 예수께서 오신다! 너 인제 지옥 간다! 너 인제 심판 받는다!’ 여러분! 그 많은 징기스칸, 알렉산더, 광개토대왕, 무쏠리니, 히틀러, 다 어디 가있어요? 지금 지옥 가있어요. 그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낸 그 수많은 것들 중에 신발짝 하나라도 갖고 올라갔어요? 거기에? 발가벗고 타고 있어요. 지옥의 연료가 되어서! (하하하)
여러분! 신자로서 사는 게 힘드십니까? 우리는 곧 제대하게 될 겁니다. 이 땅에서 인제 곧 우리는 제대하게 될 거예요. 그날은 반드시 속히 올 거니까! 그때가 되면, 모두가 일어나서,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각 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우리는 모두 일어나서, 그 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치 연극이 끝나면, 그 연극 무대에서, 총 맞아 죽은 놈! 칼 맞아 죽은 놈! 또 그를 밟던 폭군! 막이 끝나면, 다 일어나서 관객들에게 인사하죠? 그날이 올 거예요. ‘산이, 바다가, 죽은 자들을 다 토해 낸다’고 그래요. 다 일어날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무덤이 열리고, 거기에서 죽은 자들이 막 나온 것처럼, 이제 각인의 눈이 그분을 볼 거예요.
그러고는 이제 분장을 다 지울 거예요. 우리에게는 지금 역할이 맡겨져 있어요. 가난한 역할! 못 배운 역할! 못 생긴 역할! 뚱뚱한 역할! 뭐 이런 역할들 막 맡겨져 있어요. 싫죠? 이제는 분장을 지울 날이 올 거예요. 그리고는 열심히 그 역할을 잘 해 낸 사람은, 애미상, 오스카상 시상식에 가기 위해서, 멋진 화려한 변화산상에서 입었던, 화려한 하얀 옷을 입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나, 하나, 우리를 안아주면서, ‘내 아들아! 잘했다! 야, 어떻게 그 작은 역할! 보잘 것 없는, 아무도 봐주지 않는 그 역할! 시체의 삶! 그거 어떻게, (하하하하)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해냈니? 고맙다!’ 네, 에미상! 그 여러분 그걸 바라보면서 가야지요?
여러분! 이 땅에서 여러분이 조금 못 배우고, 가난하고, 못생기고, 그런 역할 맡았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 없어요. 그게 다가 아니에요. 그거는 잠깐, 찰나에 불과한 인생! 연극이에요. 전부 황제 역할 하려고 그러고, 전부 무슨 훌륭한 역할만 하려고 그러면, 어떻게 해요? 그 역할은 곧 끝날 거예요. 곧 끝날 거예요. 이제 분장을 지우고, 그 앞에 서야할 날이 분명히 옵니다. 여러분! 그게 기독교예요. 이 땅에서 여러분! 트로피 받는 게 기독교 아니에요.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고, 이 땅에서 돈벼락 내려주는 게, 기독교 아니에요. 그런 하나님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그들은 다 가짭니다.
중부에, 어떤 교회에서 교회 헌금을 가지고, 땅굴을 파고, 거기다가 세계 3차 대전 준비를 한다고 비상식량을 쟁여놓고, 교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놨다 그래요. 다큐멘터리에 나왔다고요. 몇 년 전에! 교회는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에요. 빨리 모든 거 벗어놓고, 떠나려고 준비하는 게 교회죠. 이 땅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 오래 살려고, 땅굴 준비하고, 비상식량 준비하는 거, 교회 아니에요. 교회가, 이 지경까지 내려간 거예요. 지금! 교회가!
뭘 추구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오메가는 진짜 뭡니까? 여러분의 오메가? 여러분의 목적지는 정말 뭐예요? 남들에게 한 번 폼 잡고 큰 소리 한 번 쳐보는 거예요? 부자로 잘 살아 보는 것입니까? 우리의 오메가는 바로, 그 하늘나라에 있는 거예요. 이제는 이 더러운 사망의 몸 벗어버리고, 그 찬란한 새 몸 입는 거예요.
여러분! 지긋지긋하지 않으세요? 아니, 예수를 믿고도 어떻게 이렇게, 여전히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요? 저는 아주 죽겠어요. 지금 목산데, 여전히 안에선 욕심은? 득실득실 올라오고 있고, 여전히 저는 몸으로도 죄를 지어요. 사도 바울이,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 좀 꺼내다오!’ 이렇게 이야기 했을 정도로 우리는, 이 사망의 몸을 빨리 벗어버려야 돼요. 이제 새 몸을 받아야 돼요. 그날을 기다리는 거예요. 우리는요! 이 더러운 사망의 몸에다가, 분 바르고, 루즈 칠하는 게 아니에요.
이 사망의 몸이라는 말은, 고대 시대에, 어떤 사람이 누굴 죽이잖아요? 그럼 걔도 죽어야 되죠? 죽이기 전에, 하루 동안을, 자기가 죽인 시체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서, 꽁꽁 묶었어요. 그리고는 길거리를 데리고 다녔다고요. 24시간을! 얼마나 무섭겠어요? 자기가 죽인 시체가 눈을 부릅뜨고 자기를 이렇게 쳐다보고! 그게 사망의 몸이라고요.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꺼내다오!’ 우리는 죽는 날 그 몸에서 떨어지는 거예요. 그때까지는 계속 고민하면서, 싸우면서 가는 거예요. 무슨 세상이 대단하게 여러분을 괴롭힐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 자신 안에 있는 그 옛사람이 여러분을, 죽도록 괴롭힐 거예요. 거기에서 탈출하는 날이 죽는 날인데, 그걸 왜 무서워하시냐고요?
여러분의 오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십시오. 그분은 구름을 타고, 불말과 불병거를 몰고, 나이! 아멘! 반드시 확실하게 곧 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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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9)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아멘.
이제 8절까지 요한계시록의 서론이 끝나고, 요한은 본격적으로 인제,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2장부터 써 내려가게 됩니다. 그 전에, 1장 9절부터 20절가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요한은, 먼저 교회에게 자기의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 이렇게 자기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요한의 소개일 뿐만이 아니라, 바로 ‘성도란 누구인가?’를 표현하는 그런 말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들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형제’라는 말과,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9절에 있는 ‘예수의’라고 번역에 된, ‘엔 크리스토’라는 말은, ‘엔 크리스토’라는 말은 원래,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에요. 예수 안에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예수의 환란과 예수의 나라와,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는 자다! 이런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 안에서, 인 크리스토’ 하면은, 생각나는 교리가 있죠?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바울 신학의 백미이죠? 그리스도와의 연합! ‘유니온 크라이스트(Union Christ)’입니다.
여러분이 요 ‘유니온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잘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성경 전체를 절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이성적으로는, 상당히 공감하기가 힘든 부분이지만, 이 유니온 크라이스트를 여러분이 알고 계시지 못하고는, 복음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은, 이 유니온 크라이스트에 대해서 조금 공부를 하고, 그것으로 오늘 9절을 한 번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설명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만, 한 군데만 제가 찾아드리겠습니다. 로마서 6장 3절로 가겠습니다.
(로마서 6:3-5)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그러죠?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리스도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죽었고, 장사되었고, 다시 살리심을 받아서 부활을 했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면서, ‘세례(洗禮)’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세례에 대해서는 우리가 자세히 공부를 했죠? 잠깐 복습을 할까요?
아! 여러분은 지금부터 물을 뿌리거나, 물에 잠그는 그런 세례는 다 잊어버리세요.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는, 그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할례(割禮)가 구원의 조건입니까? 아니죠?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서, 먼저 ‘의롭게 여기심을 받았다.’ 그래요. 구원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 17장에서, ‘할례를 받아라!’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할례라는 것은, 구원 받은 자의 ‘싸인(sign) 표시’이지, 구원받는 자의 조건이 아니에요.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거 아니에요. 가톨릭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영세를 받아야,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 거 아니에요. 세례는, 성령 세례를 받은 자! 거듭난 자로서, 그것을 자기의 신앙을 세상에 공포하고 선포하는 것을, 우리가 ‘세례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고요. 그냥 성령 세례를 받은, 거듭난 자들의 상징적인 의식이며, 선포일 뿐이에요. 할례가 그냥 하나님 백성의 표시이듯이!
성경이 말하는 세례는, 다른 아주 깊은 의미가 있어요. 먼저 ‘물에 담그다’라고 그렇게 번역이 되는, 헬라어의 단어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밥토’라는 말이고, 하나는 ‘밥티조!’ 성경에 나오는 말이죠. 이게? ‘밥티조’라는 말이에요. 두 단어가 있다고요. 밥티조는 단순히 물에 담그는 행위가 아니라, 어떤 행위에 의해서, 어떤 수단에 의해서 일어나는 변화! 즉 어떤 방법을 가해서, 사물의 본질이나, 성격이 변하는 것을 뜻하는 게, ‘밥티조’예요.
예수께서 오시기 한 200년 전에, 기원전 2세기경에, 헬라 사람들이 피클을 만드는 방법을 써 놓은, 그러한 책이, 파피루스가 발견이 됐는데, 거기 뭐라고 써있냐 하면은, ‘피클을 만들 때, 오이를 더운물에 담갔다가, 식초 용액에 담가야 된다.’ 이런 말이 있어요. 뜨거운 물에다가 담갔다가가, ‘밥토’예요. 그러나 식초 용액에 담궈서, 이제는 피클이 본질과 그 성분이, 완전히 변해버리는 거를, 우리가 ‘밥티조’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헬라 사람이 이 피클 만드는 방법을 썼을 때, 뜨거운 물에 담근다는 것을, ‘밥토’라고 썼고, 식초 용액에 담그는 것을, ‘밥티조’라고 썼다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요걸 잘 연상을 하고 계세요. 여러분이 요 피클 만드는 방법만 머릿속에 갖고 계셔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뭔지, 금방 이해를 하시게 될 겁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세례! ‘밥티조’는 물에 담근다는 그런 의미보다는, 담가서 변화된다는 데에, 더 강조점이 있는 거예요. ‘밥티조’라는 것은! 세례라는 것은요!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 우리가 푹 잠겨서, 뭔가 새로운 존재로, 그 성분과 본질이 변화되어져 버린 것을, 우리가 ‘세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안에 잠겨서, 연합되어서, 그 성분이 변화된 것을, ‘세례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세례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렇게 같이 띄워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례와 ‘유니온 크라이스트(Union Christ)’를 좀 더 쉽게, 설명을 한 구절이 있죠? 고린도전서 10장 1절로 가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1-2)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받았다 그래요.)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래요. 유니온 크라이스트! 연합(聯合)과 세례(洗禮)를 같이 설명하고 있어요. 홍해를 건넌 것을 성경은, ‘이스라엘의 세례’로 이렇게 표현한다고요. 여기서도 우리는 세례가 단순히 물에 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발도 물에 안 젖었어요. 마른 땅처럼 건넜다 그러잖아요? 진짜 물에 젖은 사람들은, 애굽 사람들이죠?
지금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스라엘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 왕의 노예로 있다가, 애굽 왕의 노예로 있다가, 홍해에 빠져서, 그 애굽 왕의 종들인 이스라엘은 다 죽고, 뭔가 새로운 자들이, 탄생되어서 올라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새로운 자로, 탄생이 되어서 올라왔냐면, 이들이 완전히 바뀐 게 아니라, 여전히 불가능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인데, 하나님이 택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세’라는 그 종 안에 들어가서, 그 모세화 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이스라엘 백성을, 여전히 불가능하고 불순종하는데, 그들을 ‘모세’로 봐주시는 거예요. 그것을 세례라고 하는 거예요. 피클을 자꾸 떠올리시란 말이에요. 피클을!
이 홍해를 건너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을 상징하는, 하나의 상징일 뿐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 예수 안으로, 인 크리스토! 그 안에다가 던져 넣어버리신다고요.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불가능하고, 불순종하는 모습인데, 하나님은 인제 예수를 통해서만, 우리를 보신다고요. 그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언제 십자가에서 죽었어요? 언제 우리가 부활했습니까? 언제 우리가 율법을 지켰어요? 하나도 한 게 없어요. 여러분! 어제도 죄를 짓고, 오늘도 죄를 짓고, 우리는 내일도 죄를 지을 거예요. 그죠?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를 통해서만 보신다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이 모습들은, 지금 하나님의 눈에는 없는 것으로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코 정죄함이 없어요. 결코 정죄함이 없어요!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그것이 너무 감사해서, 삶이 조금씩 변화되어져 가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에요.
말이 안 되죠?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2000년 전에 예수께서 오셔서 하신, 그 모든 행위에 연합이 되어서, 그게 다 우리께 되냐 말이에요? 그런데 자기가 누구인지, 실감하고 자각을 한 사람은, 이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 방법밖에 없어요! 저도 어제 오늘, 저에 대해서 그냥 아주, 낱낱이 하나님이 벗겨서 보여 주셨어요. 도대체 얼굴을 들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그 위로가 그거예요. ‘나는 너를 보고 있지 않아! 원래 너는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나는 예수를 통해서 너를 볼 수밖에 없어!’ 그게 구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 안으로 숨지 않으면, 절대 가망이 없는 자들이에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시도하고 노력해서 된 게, 뭐가 있어요? 담배도 하나 못 끊어요. 우리는요! 우리의 힘과 노력은, 그렇게 연약한 거예요. 예수를 알아가는 게, 중요한 거예요. 우리는 개선하고 고쳐서 쓸 수 있는 종자들이 아니에요. 완전히 바꿔버려야 되는 거예요. 그게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라고요. 로마서 6장 8절 보세요.
(로마서 6:8-11)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언제 우리가 죽었고, 언제 우리가 살아났죠?)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음에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 크리스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
여길지어다! 하! 이런 데 밑줄을 그으셔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레컨(reckon)! 로기조마이!’ 그렇게 여겨주신다는 거예요. 우리는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잘난 척하면 안 돼요. 그러니까 여겨주신다는 거예요. 로기조마이! 레컨(reckon)! 우리가 다 한 걸로 여겨주신다는 거예요. 감당할 수가 없죠? 그 은혜를 어떻게 감당해요? 우리가? 도대체 나를 보면, 우리 자신을 보면, 이건 뭐 백번 죽어 마땅해요. 능지처참! 부관참시! 그 걸로도 부족해요.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허락하셔서, 그렇게 여겨주세요.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여겨주세요. 그게 기독교예요.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아무리 죄를 지어도, 지옥에 못 가세요. 그래 여러분 수요일날 수요 성경공부하고, 주일날 계시록 설교를, 같이 들으면서 오셔야 돼요. 제가 지금 의도적으로 이렇게 집을 짓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어느 하나만 빠뜨려도, 여러분이 제 말을 다 이해를 못하세요. 수요 성경공부를 다 들으신 분만 이해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27절 보세요.
(갈라디아서 3:27)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옷 입었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군복을 입으면, 나찌의 군복을 입으면, 그 사람은 나찌예요. 그죠? 우리가 예수의 옷을 입으면, 우리는 예수로 보여지는 거예요. 예수로! 그리스도로 우리는 옷을 입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옷만 보세요. 그 안에 시커멓고 더러운 우리를 보지 않으신다고요. 이게 신비(神祕)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말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도대체! 그래서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는 것이다’라는 거예요. 말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를 그렇게 만드시고 만다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몽땅! 옷을 입게 되는 거예요.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제가 설명을 해드리면, ‘접붙임’이라는 거 아십니까? 여러분? 접붙임! 어떤 나뭇가지를 꺾어서, 원 가지 나무에다가, 표피를 벗기고, 갖다가 끼워 넣는 거예요. 그러면 이 나무는 곧 이 원래의 이 커다란 이 나무! 그 나무와 생명을 같이 하게 돼요. 모든 생명의 현상을 같이 하게 돼요. 같이 바람에 흔들리게 되고, 같이 꽃을 피우고, 같은 열매를 맺어요. 그 나무가 죽으면, 얘도 죽어요. 가지도 죽어요. 접붙임을 당한 가지도! 살면 같이 사는 거예요. 나무가 땅에 묻히면요, 같이 묻히는 거예요. 한 인생이 되는 거예요. 한 일생이 되는 거예요. 로마서 11장 17절 보세요.
(로마서 11:17)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 감람나무인 내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자,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설명하는 것인데,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해를 좀 쉽게 해드리기 위해서, 인용을 한 거예요. 돌감람나무를 참감람나무에다가 갖다가 접붙임을 하면, 이 돌감람나무가 이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함께 공유하게 돼서, 애가 참감람나무가 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안에 접붙임을 딱 받게 되면, 그 안에 연합(聯合)하게 되면, 우리는 예수가 되는 거예요. 잘 이해하시고 가셔야지, 또 밖에 나가셔서, ‘우리 목사가 우리가 다 예수랜다.’ 그러면, 금방 이단 되는 거예요. 우리를 예수로 취급해 주신다니깐요. 예수로 여겨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구원 받는 거예요. 여전히 이 모양인데! 여전히 이 모양인데! 예수가 되시는 거예요. 여러분은! 예수! 그게 기독교예요. 그래서 기독(基督)! 크라이스트! 기독교예요.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보세요. 인 크라이스트(in Christ)! 인 크라이스트(in Christ)! 인 크라이스트(in Christ)! 인 크라이스트(in Christ)! 그냥 두 줄 걸러 한 번씩 나오죠?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그게 아니면, 우리는 도대체 감당할 수 없어요. 그냥 우리 자신을 보세요. 우리 자신을 보세요.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여러분!
자, 갈라디아서 2장 20절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여러분들이 지금 계속 죄 짓고, 실패하고, 그러는 모든 것들은, 여러분이 사시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그런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지 않아요. 그런 모습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육신의 모습이에요. 새로 태어난, 하나님과 관계있는 여러분의 영은, 이제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육신! 이 플레쉬(flesh)! 이 죽을 몸뚱아리를 같이 갖고 계시다고요. 그 몸은 죽을 거예요. 인제! 그 몸이 뭐냐면, 거듭나기 전에 그 옛 사람!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도록, 열심히 훈련되어지고 길들여진, 그러한 습관(習慣)! 경향(傾向)! 이것을 ‘죽을 몸! 옛사람’이라 그런다고요. 그게 아직 붙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계속 죄를 지어요. 그런데 이건 여러분께 아니에요.
이 신분(身分)을 여러분이 잘 알고 계셔야 돼요. 그래야, ‘아! 감사하다! 어떻게 내가 오늘도 이렇게 죄를 졌는데, 이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것은, 오직 내 안에서 사시는 예수의 삶만 보시는구나!’ 그러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거예요. 우리의 이 불가능한 실존을, 하나님은 이제 보지 않기로 결정하셨어요. ‘로기조마이’! 이 신분을 계속 확인하셔야 돼요. 이 신분을 확인하셔야, 여러분은 변화될 수 있어요.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그 책을 보면, 한국말로 아직 번역은 안 됐는데, 그 데이빗 브레이너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게 뭐냐면?
우리의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 예수가 여러분께 행하신 일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여러분을 바꿔갑니다. 그 신분을 확인하시지 않으면, 여러분은 절대 이 세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고 싶습니까?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당신들은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예요 그러나 사랑하신 예수를 아십시오. 그러면 그 사랑하신 예수가, 당신을 사랑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매일 매일 그 신분을 확인하십시오.
그런다고요. 이게 복음(福音)이라고요.
그 웨일즈의 왕이었던 윈저공 있죠? 1970 몇 년에 죽었죠? 그러니까 웨일즈에서 쫓겨났어요. 그래서 빠리에서 죽었다고요. 그 아버지가 윈저공한테 뭐라고 그랬냐하면, ‘윈저야!’ 그랬을까요? 모르겠어요. 하여튼, ‘아들아! 네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네가 누구인지 늘 생각해라! 네가 누구인지 늘 생각해라! 너는 왕이다! 지금 네가 쫓겨나 있어도, 너는, 네 신분은, 너는 왕이다!’ 그 사람의 회고록에 그 말이 적혀있는데,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같더라고요.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지금 네 모습에 실망하지 말어!’ 그 신분을 계속 확인하면, 우리는 그 신분에 맞게 살려고 노력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분을 확인하세요. 여러분! 신분을 확인하세요!
21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성령이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만지는 순간! 여러분은 오이가 식초 용액에 담겨서, 영원히 본질과 성분이, 피클로 변하듯이, 새 사람으로 바뀌어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은 새 사람이에요. 인제 새 사람!
이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에요. 연합이 되었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만 연합이 된 게 아니에요. 사람들은 고것만 자기 걸로 취하려고 한다고요. 예수님의 삶의 전 영역! 그 모든 삶에 여러분은 연합된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다 가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환란(患亂)의 삶을 살다 가셨어요. 배신(背信)과 따돌림과 조롱과 핍박을 당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 그 사도 요한도 예수님과 똑같은 환란을 당하고 있었어요. 포악하기로 이름난, 도미티안 황제에 의해서, 밧모섬에 가서, 그 연로한 나이에, 노인이었어요. 요한은요! 거기에서 광산에서 부역을 했다고요. 밧모섬에서! 고난이죠? 왜 그랬을까요? 왜요? 예수님 때문에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이 환란의 삶은 나에게 당연한 것이다!’라고, 지금 요한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너희 형제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환란에 동참하는 자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환란에 동참하고 있으면서, ‘이건 우리에게 당연한 거야!’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9절에서!
이 환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뜰립시스’라는 말이에요. 이 말은 억압 뭔가를 꼭 누르다 압제 이런 말이거든요 영어로는 ‘트리불레이션(tribulation),’ 라틴어로는 ‘트리불룸’이라는 말인데, 이게 ‘탈곡기’라는 말이에요. 탈곡기 아세요? 여러분? 막 이렇게 돌리면, 막 돌아가면서, 거기다가 이렇게 짚단을 딱 놓으면, 달달달달 돌아가면서, 알곡만 떨어지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 여러분은 그 탈곡기에 던져지는 사람들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여러분! 그 탈곡기에서 덜덜덜덜 돌아가면서 죽을 때까지 가야 된다니깐요. 그게 기독교예요.
누가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 병 다 낫고, 누가 부자 된다고 이야기 했습니까? 성경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어요? 그런 기독교는 없어요. 여러분! 그들은 다 가짜예요. 다 가짜예요! 여러분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모습이라고요. 거기에서 덜덜덜덜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 거예요. 탈곡기처럼! 예, 환란(患亂)이라는 것은 그런 거예요. 그만큼 환란당하고 계세요? 여러분?
그런데 그게 당연하다는 거예요. 당연한 거예요. 여러분은 당연히 예수의 환란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환란의 삶에도, 동참해야 된다니깐요. 요한복음 16장 33절 보세요.
(요한복음 16:33)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환란을 당할 지도 모르나’예요. 환란을 당하지만, 너희들은 평안해라 그러는 거예요. 환란을 당한다. 내가 거기서 건져줄게. 아니에요. 환란을 당한다. 그러나 평안해라! 왜? 저 소망을 보고. 평안해라! 그게 기독교예요.)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는 말은 뭐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도, 내 안에서 너희도, 나와 연합된 자기 때문에, 너희도 이길 거라는 거예요. 이길 거라는 것은, 너희들이 지금 당할, 뭔가가 있다는 거예요. 너희가 이겨야 할 만한, 뭔가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환란(患亂)이에요. 트리뷸레이션(tribulation)! 사도행전 14장 22절 보세요.
(사도행전 14:22)
22 …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위 머스트 고우 스루 매니 하드쉽스(We must go through many hardships)! ‘위 머스트(we must)’라 한다고요. 머스트(must)! 디모데후서 3장 11절 보세요.
(디모데후서 3:11-12)
11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핍박을 받으리라! 에브리원 후 원츠 투 리브 어 갓들리 라이프 인 크라이스트 지저스 윌 비 펄스큐티드(Everyone who wants to live a godly life in Christ Jesus will be persecuted)! 당연한 거라는 거예요. 당연한 거라는 거예요! 환란과 핍박이 없으면, 뭔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1장 5절
(고린도후서 1:5-9)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란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과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죽고 싶었다는 말이에요. 얼마나 괴로웠으면!)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다는 거예요. 계시록 2장 8절.
(요한계시록 2:8)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우리 서머나 교회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네 환란과 궁핍을 하나님이 지금 알고 계시다는 거예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너 그 환란과 핍박을 받으면서,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것을 허락하세요?’ 그렇게 짜증내고, 실망하고, 자포자기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부요(富饒)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축복(祝福)이라는 거예요. 그게)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그래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고난이 분명히 있다는 거예요.)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 (10일이라는 것은 완전수라 그랬죠? 딱 열흘이 아니라, 고난을 받을 만큼 받는다는 거예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너 이제, 죽도록 고생할 거다. 환란 속에 던져질 거다. 핍박받을 거다. 내가 구해줄게 그러시나요? ‘참아라!’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안 건져 주신다고요. 거기서 참아라! 그래요. 이유가 있다고요. 성경은, 예수 믿으면, 환란이 피해가고, 문제가 해결 되고, 병이 낫고, 그렇게 된다고 한 군데서도 이야기한 적 없어요.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고 이야기한 곳은, 한 군데도 없어요.
어떤 사람이, ‘예수 믿고 가난한 것도 죄다.’라고 얘기했다. 그러더라고요. 목사가! 천만에요. 그 사람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가짜예요. 그거는 버젓이 그런 사람들이, 몇 천 명 되는 큰 교회 목사로 설교하고 있다고요.
아니에요.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환란과 핍박으로 하나님이 던지신다, 그런다고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 왜 환란과 핍박에다가 던지실까요? 우리에게 유익이 있어서 그래요. 보세요. 로마서 5장 3절 보십시오.
(로마서 5:3)
3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을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러죠?)
3절에,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 그러죠? 그래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막 기쁘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환란이 오고, 핍박이 오고, 고난이 오는데, 막 즐거워하면, 그건 정신병자죠? 그거는 여기서, ‘즐거워하다’는 말은, ‘카오카오마이’라는 거예요. ‘자랑하다, 뽐내다’라는 뜻이에요. 환란이 왔는데, 어떤 무리는 그것을 자랑하더라는 거예요. 어떤 자들이에요? 무엇을 아는 자들이, 그 환란을 자랑하더라.
4절 보세요. 무엇을 앎이로다. 그러잖아요? 그 내용이 뭐냐 말이에요? 그 뭐를 알면, 우리가 그 환란을 자랑할 수 있다는 거예요. 뽐낼 수 있다는 거예요. ‘너 환란 있어? 없구나! 나는 있다!’ 이게 된다는 거예요. 그 환란이 인내를 이루고, 인내가 연단을 이루고,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것을 아는 자들은, 그것을 자랑한다는 거예요.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환란은 결국 소망을 이루는 길이다.’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 난 정말 그리스도인 맞구나!’ 하고 자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3절에서, ‘환란이 인내를 이룬다’ 그러죠? 여기에서 이 ‘인내(忍耐)’라는 말, ‘휘포모네’라는 말은, 단순히 ‘꾹 참는 거’ 아니에요. 그 환란이, 그냥 ‘꾹 참는 인내를 만든다.’ 이 말 아니라고요. 꾹 참는 인내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잘 해요. 환란이 없어도! 그거는 이를 악물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잘 참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여기서 말하는 ‘휘포모네’는, 단순히 그냥 꽉 참는 것이 아니라, 정절을 지키면서, 변치 않고, 어디에 굳게 서 있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환란이 옴에도 불구하고, 정절을 지키면서, 변치 않고 어디에 굳게 서 있는 모습을, ‘인내! 휘포모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이 환란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굳게 서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환란이! 그러니까 이 환란이 오면, 환란을 겪으면서, 막 힘들어하죠? ‘와! 진짜 못 참겠다!’ 때려 부수죠? 그러면서 ‘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있는 놈 아니구나!’ 깨닫는 거예요. 환란이 오면은, ‘이 세상에서 정말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구나!’라는 것을 또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 하나님! 정말 하나님 당신밖에 없군요.’라고 더욱 더 굳게,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거! 그것을 휘포모네! ‘인내를 이룬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고린도후서 1장 8절 9절에서 뭐라 그랬어요? 바울이 산 소망이 끊어지도록, 아주 죽고 싶을 정도로, 환란을 받은 이유가, 뭐라 그랬어요? ‘나를 의뢰하지 않고, 그분을 더 의뢰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환란을 허락하셨다.’라고 바울이 고백하잖아요? 예, 그 이야기예요. 그게 바로, ‘인내(忍耐)’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더 바라보게 만드는 거예요. 환란이! ‘환란이 인내를 이룬다’라는 말은, 그 뜻이라고요. 그냥 무조건 꽉 참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런 유익이 있단 말이에요. 우리에게!
그리고 신자의 환란은, 새로 거듭난, 자기 안에 공존하는 이 죽을 몸! 이 옛 몸을 자꾸 무력화시켜요. 자꾸 무장해제를 시킨다고요. 여러분이 지금 실감하고 체감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의 옛 몸뚱아리예요. 이 웬수 같은 몸뚱아리는, 어떻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따라와 주지를 않아요. 그런데 그 환란이, 무장해제 시켜준다고요.
어떻게 이 옛 몸뚱아리를 무장을 해제시켜 가냐면은, 제가 예전에 대학교 때, 고등학교 때까지 너무 열심히 공부를 하는 바람에, 대학교 들어가서, 들어가자마자 열심히 놀기 시작했죠. 그래서 매일 매일 돈 천원을 갖고, 나이트클럽에 갔다고요. 친구들하고! 그때는 천원 내면은, 콜라 한 병 째그만 거 주고, 마음대로 놀게 했어요. 그래서 아주 재미가 들려서, 제가 이래봬도 옛날에는 한 춤 했다고요.
그래서 그날도 그 재미를 좇아 나이트클럽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가 웅성웅성, 웅성 하는 거예요. 왜 그러나 하고 봤더니, 전파사 앞에 가서 봤더니, 북한에서 미그기 하나가 넘어왔어요. 그 민방위 훈련하는 아나운서가, ‘국민 여러분! 지금 북에서 미그기가 넘어왔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곧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 너무 가서 막 놀 생각에, 막 즐거웠던 제가, 다리의 힘이 쫙 풀리는 거예요. 가긴 어딜 가요? 빨리 집에 가야지! 그런데 진짜 걸음을 못 걷겠더라고요. 무서워서!
예, 우리가 너무 너무 좋아서, 너무 너무 익숙해서, 빠져 나오지 못했던 것들이, 이러한 어떤 환란이나, 이런 핍박이나, 이런 것을 통해서, 그것들이 자꾸 힘을 잃어 가는 거예요. 힘을 잃어가는 거예요.
월남 국수집에 가면은, 사리를 다섯 개씩 시켜먹는, 석진이가, 하린이 같은 애가, 환란이 오니까, 집이 어려워지니까, 밥을 안 먹더라니깐요. 밥맛이 없는 거예요. 그것처럼, 무력화시키는 거예요. 옛 몸뚱아리! 환란은 그런 역할을 한다고요.
주일날 매일 골프를 친다고, 이게 너무 재미있어서, 매일 골프 치느라고 교회를 못 오던 분이, 50에 낳은 아들이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이 골반 밑으로 두 개가 딱 잘렸어요. 그 다음부터 이 사람이 골프를 어딜 치러가요? 아무 것도 재미가 없더라는 거예요. 아무 것도!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내 아들이 저렇게 되고 나니까, 뭘 해도 재미가 없더라는 거예요. 환란이라는 것은, 핍박이라는 것은, 우리가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 옛 재미! 쾌락! 이런 것들을 자꾸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요.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닥친 환란으로, 여러분들이 끊어버린 것이, 유익이 분명히 있다니깐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냥 놔두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유익해요. 욥기 42장 5절 보세요.
(욥기 42:5)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뵙옵나이다
환란을 다 통과하고 나니까, 이제는 듣기만 했던 주님을, 눈으로 뵈옵게 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내! ‘휘포모네’란 뜻이에요. 더욱 더 정절을 잃지 않고, 거기에 굳게 서게 되는 게, 이 환란의 역할이라고요. 힘들지만 참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당연히 가야할 길이에요.
그리고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 그러죠?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 여기서 ‘연단’이란 말은, 단순히 ‘두들겨서 단단하게 만든다’가 연단이 아니에요. 연단이라는 말, ‘도키메’라는 이 말은, 어떤 목적에 부합하도록, 질이 검증된 것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어떤 목적에 부합하도록 질이 검증된 거!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철도를 만들 때, 이 철로에 쓰일 철은, 수십 톤의 하중에 견뎌야 돼요. 그죠? 그러니까 철로를 놓기 전에, 이 철을 미리 미리 검증하고 시험한다고요. 그래서 떨어지면? 안돼요. 검증됐을 때, 이 시험을 통과했을 때 철로로 쓰이는 거예요. 그걸 ‘도키메’라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환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휘포모네’에 서게 된다고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검증이 된다는 거예요. 그게 ‘연단을 낳는다’는 말이에요. 검증이 되는 자가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검증이 되면, 도키메! 검증이 되면, 우리는 소망을 더욱 더 붙들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환란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이루고,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말의 뜻이라고요. 그러니까 이 환란은 뭐예요? 유익(有益)이라고요. 우리에게! 야고보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죠? 1장 12절 보세요. 야고보서!
(야고보서 1:12)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말은, ‘페이라스모스, 역경(逆境), 환란(患亂)’이라는 뜻이에요. 시험을 참는 자는 뭐예요? 휘포모네!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뭐예요? 도키메! 연단이란 말이에요.)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이 환란은 당연히 거쳐 가야할 길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에, 예수를 믿고 환란이 없다면, 여러분은 다시 생각해 보셔야 돼요. 여러분은 그냥 하고 싶은 거 다하고, 그냥 재미있게 살다 가세요. 어차피 지옥 갈 거예요. 그 사람은요! ‘예수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만사형통합니다.’라는 것은, 이단 중에 이단(異端)이에요. 거기에 넘어가시면 안돼요. 여러분!
그러니까 환란은 우리의 소망을 굳게 붙들게 만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환란 하는 자들아! 기뻐하라! 하나님의 축복이다!’라고까지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렇게 얘기하는 데 들어보셨어요? 환란을 이야기 하는 종교는, 아무 데도 없어요. 기독교조차도, 이단들은 환란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참 기독교만 환란을 이야기해요. 예수 그리스도만 환란을 이야기한다고요.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 해줘서, 긁어모으려면, 이런 설교하면 안 되죠? ‘예수 믿으면 환란에 빠집니다!’ 그러는데 누가 오겠어요? 그런데 사실인 걸 어떻게 해요? 사실인 걸! 그거 모르고 가면, 죽을 때까지 예수 믿다가, 지옥 갈 걸! 어떻게 이 얘기를 안 하냐 말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환란이기 때문에, 환란을 말려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란이 왔을 때, 신자들아! 기뻐해라!’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신자들아! 기뻐해라! 즐거워해라!’ 이렇게 명령하시는 거예요. 야고보서 1장 2절 보세요.
(야고보서 1:2)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베드로전서 4장 12절.
(베드로전서 4:12)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페이라스모스! 불시험)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당연한 거라는 뜻이에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에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됐으니까)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 뒤에는 기쁨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의 삶에, 환란을 허락하신 거예요. 말려주지 않으세요. 빌립보서 4장 6절 보세요.
(빌립보서 4:6)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가 와요. 환란이 와서 염려가 와요. 그러면 기도와 간구를 하래요. 그러면 어떻게 하신다고요? ‘거기서 내가 건져줄게!’ 그러는지 한 번 보세요.)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를 하면, 내가 고쳐줄게! 건져줄게! 해결해 줄게!’가 아니라, ‘그 상황 안에서도 너희가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내가 생각을 지켜줄게!’ 그런다고요. 이게 기독교라고요. 그 상황 안에서도, 예수로 말미암아 평강을 유지하고 있는 게, 기독교예요. 문제가 해결되는 게 기독교 아녜요. 그것 때문에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죽은 거 아니에요. 여러분! 환란은 그렇게 우리에게 유익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아울러, 오늘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이 환란이 필연적(必然的)이냐? 왜 필연적이냐? 세상과 원수인 예수 그리스도에 증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마귀와 세상은, 당연히 우리를 공격하게 되어 있다. 그래요. 9절을 한 번 다시 읽어 보세요.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그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밧모라 하는 섬에 갇혔다
거기 귀향 간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예수의 증인으로 산 그 삶 때문에, 이 사람은 환란 속에 던져지게 된 거예요.
여러분은 이제 사탄의 나라에서 탈출해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간 분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딱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요. 그러니 사단이 자기의 옛 종을, 가만 놔두겠어요? 옛날에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 척척했던 그 종이, 뭔가 다른 길로 가려고 하는데, 가만 놔두겠냐고요? 사도 요한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나는 밧모라 하는 섬에 갇혀서, 이 환란을 당하고 있는데, 그건 당연한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계시록 20장 4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20:4)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
뭐 때문이에요?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그래요. 여러분 전부가 다! 언제 우리가 목 베임을 받았어요? 예수 믿으면 다 목 베임 받나요? 그만큼 힘들다는 거예요. 그만큼 힘들다는 거예요! 우리를 그래서 다 순교자(殉敎者)라고 그래요. 계시록 보면, 우리 예수 믿는 자를, 다 순교자라 그래요. 우리는 목 베임을 받은 자예요. 그만큼 힘들어요. 예수 믿는 거 쉽지 않아요. 누가 예수 믿는 거 쉽다 그래요? 쉽지 않아요. 어려워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證人)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목 베임을 받는 것과 같은, 고통(苦痛)에 던져지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에 유익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의 삶에, 유익한 것으로 바꾼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사탄 마귀도. 하나님의 그냥 수단일 뿐이에요. 뭘 위해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에요. 이 세상은 커스믹 트라블(cosmic trouble)이라고 하지만, 악(惡)과 선(善)의 대결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사탄을 이용해서, 우리를 지금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고 있는 것뿐이지! 얘는 죽었어요. 그 현실을 여러분이 자각하고 계셔야 되는 거예요.
어떠세요? 여러분! 이렇게 말씀드렸는데도, 여러분의 환란(患亂)이 두려우십니까? 환란을 당하고 있는 여러분이, 그렇게 못나 보이세요? 환란을 당하고 있는 내 형제들이, 그렇게 우습게 보입니까? 그들을 향해서, 손가락질을 할 수 있어요? 그들이 제대로 잘 가고 있는 거예요. 환란을 당하고 계신 여러분! 여러분이 잘 가고 계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환란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나라’에도 동참하고 있다 그래요. 하나님나라에도! 그죠? 하나님나라가 이미 임해서. 우리는 그 나라에 동참해 있는 자들이라는 뜻이에요. 6절을 공부할 때, 우리가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그랬죠? 거기서 쓰인 ‘포이에오’가 과거라 그랬어요.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있어요. 그리고 에베소서 말씀처럼, 나라로 지어져 가요. 그리고 우리는 지어질 거예요. 이 세 시제를 여러분은 늘 갖고 계셔야 돼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되었어요. 골로새서 1장 13절 보세요.
(골로새서 1:13)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과거예요. 나라로 옮기셨어요. 여러분은 인제 하나님의 나라로 가서, 그 하나님나라가 되었어요. 야고보서 2장 5절 보세요.
(야고보서 2:5)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유업으로 너희는 이미 받았다 그래요. 유업으로 이미 너희는 받았다! 우리는 이렇게 이미 하나님나라에 동참한 자들이 되었어요. 우리 자체가 이제 하나님나라가 된 거예요. 그 나라에 동참하는 자가 되었어요. 아노뗀! 위로부터 거듭난 자들! 이제는 이 세상과는 완전히 관계가 없어요.
아담의 후손으로 난 여러분은, 예수께서 아담의 후손으로 오셔서, 여러분을 품에 안고 죽어버렸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인 여러분은 없어졌어요. 인제 예씨 가문에서 하나가 나온 거예요. 여러분이 나오시는 거예요. ‘예’씨로 나오시는 거예요. 여러분이요! ‘메이드 인 헤븐(made in heaven)’이에요. 여러분들은 인제! 응 마대 제품이에요. 여러분은 위로부터 이제 나신 분들이에요. 이 세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 인제! 여러분이 짓는 그 죄도, 여러분과 관련이 없어요. 이 신분(身分)을 매일 매일 확인하세요. 그 나라에 이미 동참하신 분들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요, 그 하나님나라에, 동참한 자들에게, ‘환란과 참음’이 요구되고 있어요. 그죠? 그러면 이 구절만 봐도, 후천년설하고 전천년설주의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죠? 그들은 환란과 핍박이 없는, 천년왕국을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왕국에, 그 나라에 동참한 우리에게, 환란이 있다고 그런다고요. 참음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틀린 얘기잖아요? 그 천년왕국! 그 하나님나라에는, 이 가시적 이 땅에서 우리가 겪어내는, 살아내는, 그 하나님나라에는 환란이 있어요. 시험이 있어요. 원수가 있다니깐요. 시편 110편 1절 보세요.
(시편 110:1-2)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그래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는데, 원수 중에서, 우리를 다스린다니깐요. 환란이 없고, 핍박이 없다고 누가 그래요? 천만에요! 원수와 함께 우리는 공존(共存)해요. 그래서 괴로워요. 힘들다고요.
그래서 우리는 이 천년왕국! 그들이 이야기하는 천년왕국을, 이 ‘교회시대’라고 이야기하고, 세대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7년 대환란이 바로, 이 시기예요. 뭐 환란이 여러분에게 같이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은 또 왕이에요. 왕 노릇 하고 계시잖아요? 왕 노릇에 대해선 제가 설명해드렸잖아요? 예? 이 현실을 좀 잘 파악하고 계셔야 돼요.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그 하나님나라는, 가시적으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하나님나라를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라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도 아니고, 영토도 아니라, 그랬습니다. ‘누가 다스리느냐?’ 그 통치권! 주권(主權)이라 그랬어요. 이 땅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통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란 말이에요.
그러나 거기에 원수들, 대적들이 함께 공존을 해요. 그래서 그 통치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나라들에게는, 환란이 있어요. 그런데 그 환란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이 돼요.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는 것일 뿐이에요. 그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사는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나라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나 아직 가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나라를 우리는, 믿음으로, 인내하고, 참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이루어졌어요. 올레디 낫 옛(already not yet)! 여러분이 항상 머릿속에 두고 계세요. 이미 이루어졌어요. 그러나 이제 가시적으로 오는 그 날까지는, 우리에게 참음이 요구되고 있어요. 그래서 로마서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가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는 말은, 산모가 애를 낳을 때까지, 그 고통을 겪으면서 기다리는 것을, 바로 그 탄식(歎息)이라 그러거든요. 그런 힘든 어려움이 있다고요. 우리는! 그래서 그날을 기다리면서 가는 거예요. 그게 소망이잖아요?
아직 가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그 나라를 보면서,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인내하면서, 각인의 눈이 그 나라를 볼 수 있는, 바로 그날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이 구절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이에요.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聯合)이 되어서, 그 환란에 동참하고, 그 나라에 동참하며, 예수님의 참음에 동참해요. 그러나 예수님과만 연합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예수님을 머리로 연합이 되어 있고, 접붙임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끼리도 연합이 된 거예요. 이제는 한 영이 흐르고, 한 피가 흘러요.
그래서 사도 요한은 9절에서, ‘나는 너희의 형제다!’ 그러는 거예요. 형제(兄弟)라는 건 뭐예요? 피를 나눈 사람들을 ‘형제’라 그래요. ‘나는 너희의 형제다!’ 우리는 우리끼리도 이렇게 연합이 된 거예요. 한 아버지를 둔, 한 맏형을 둔, 피붙이라고요. 자, 로마서 8장 29절이요.
(로마서 8:29)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은 차남, 삼남, 차녀, 삼녀, 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맏아들이 예수님이고! 우리는 형제가 됐어요. 인제 여러분 우리가 형제예요. 우리가 가족이에요. 진짜 가족이에요. 진짜! 히브리서 2장 11절 보세요.
(히브리서 2:11-12)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누구죠? 예수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 (누구예요? 교회죠?) 다 하나에서 난지라 (다 하나에서 낳았대요. 우리보고!)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그러죠?)
교회는, 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형제들이에요. 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한 하나님! 이게 중요한 거예요. 하나에서 났다는 거!
이 시대의 교회를 보세요. 그런데! 그들이 정말 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나요? 정말 한 아버지를 섬기고 있는 형제들 맞아요? 교회들 한 번 보세요.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나, 가톨릭에서 부르는 하나님과, 제가 섬기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다른 분이에요. 아무리 공부해 봐도, 다른 아버지예요. 그건! 저는 그들과 한 형제 아니에요.
심지어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만들었다고,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존경하는, 그분이 만들어 놓은, ‘어찌 하나님이 아니 계시고야, 저렇게 큰 교회가 될 수 있느냐?’라고 사람들이 입에 침을 튀기면서, 칭찬하는, 그분이 섬기는 하나님과도, 저는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어요. 아무리 공부를 해봐도, 그분이 이야기하는 하나님하고, 우리 아버지하곤 달라요. 제가 아무리 양보를 하고, 공부를 해봐도, 달라요. 저는 그 분들하고는, 다른 곳에 갈 거예요. 확신해요! 우리 아버지가 아니에요! 저는 그 분들하고 형제 아니에요.
그리고 ‘어찌 예수에게만 구원이 있겠느냐?’ 그러면서, 불교, 원불교, 가톨릭이 모인 곳에 가서, 윤리 강연, 도덕 강연, 사회정화 이런 거 강연하고 다니는, 그 유명한 원효대사를 존경한다는, 그 목사님이 섬기는 아버지하고도, 우리 아버지는 달라요. 저는 그분하고 딴 곳에 갈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아니에요.
형제라는 것은, 한 아버지예요. 한 아버지! 어떻게 그렇게 다른 아버지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교리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한 교리! 바른 교리 아래에서, 바른 아버지! 바른 하나님을 믿고 가는 것이 형제예요.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한 신앙고백을 하는 거예요. 한 신앙고백! 한 아버지에 대한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인이에요. 우리의 신분이에요. 여러분!
요한이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는 이렇게 한 형제입니다. 한 핏줄이에요. 우리는 이 땅과, 이 세상과, 이 하나님의 나라가 오버랩 된, 이 공존하는 교회시대! 아주 특이한 교회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이 세상 가족들에게,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이 친구들에게, 최선을 다 하셔야 돼요. 직업에 최선을 다하셔야 돼요. 공부도 열심히 하셔야 돼요. 그렇지만 진짜 여러분의 가족은, 이제 영원히 함께 살 가족들은 여러분이에요. 이중에도 아닌 사람 있겠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러분의 형제예요. 진짜 형제예요. 그들이 그게 바로 교회(敎會)라고요. 고린도전서 12장 25절 보세요.
(고린도전서 12:25-26)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우리가 진짜 교회라면, 우리의 영이 한 영이 흐르기 때문에, 서로 알아볼 수 있어요. 아십니까? 우리는 한 영이 흐르기 때문에, 서로 알아볼 수 있어요. 그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하면서, 끝까지 같이 갈 수밖에 없다니깐요. 그게 교회예요.
여러분! 생명이 잉태되어서, 이 생명이 자라나야 되잖아요? 어디서 자라죠?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자라잖아요? 그 자궁에 역할을 하는 것이, 교회예요. 교회 안에서만 자랄 수 있어요. 여러분은요! 서로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주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해주면서, 또 시금석이 되어주면서, 이 교회 안에서 자랄 수 있다니깐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신분을 자각하지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자라날 수가 없어요. 교회 안에서, 교회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끼리, 부딪히면서 자라날 수 있어요. 그래서 교회가 모이는 게 중요한 거라니깐요 그래서 성경에서도, ‘모이기를 힘써라!’ 그러는 거예요. 모이기를 힘써라!
그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이 되어 있어요. 여러분의 신분도, 이제 운명적으로 결정이 되어져 있어요. 그렇지만 아직 갈 길은 멀어요. 그죠? 환란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참음이 요구되는 거예요. 잘 참으세요! 잘 참으세요! 그리고 서로 서로 모여서. 형제끼리 모여서. 자매끼리 모여서. 자라 가세요! 자라 가세요! 그러면 조금 조금 더 힘을 얻을 수 있어요. 마태복음 10장 22절 보세요.
(마태복음 10:22)
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나중까지 견뎌야 구원을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는, 당연히 견딜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형제들이 있기 때문에! 로마서 8장 24절을 보십쇼.
(로마서 8:24-25)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온통 이 교회라고 간판을 건 곳에서, 이 땅에 보이는 것을 소망으로 제시한다고요. ‘그게 무슨 소망이냐?’ 그러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게 소망이지, 그게 무슨 소망이냐?’ 다 뜯어 고쳐야 돼요. 다 뜯어 고쳐야 돼요. 얼마나들 잘못 배우고, 잘못 가르쳐 놨는지, 다 뜯어고쳐야 돼요. 완전히 다 무장해제하고, 바닥부터 다시 쌓아 올라가야 돼요. 30년, 40년, 예수 믿었다. 다 필요 없어요. 다 깨버리셔야 돼요. 얼마나 엉터리로 가르쳐 놨는지 말이에요. 기독교! 그런 기독교가 없어요!
기독교의 역사를 한 번 보세요. 한 번 공부해 보세요. 어디 그런 기독교가 있었어요? 잘못 갔던 기독교! 하나님이 깨신 거는 있어요. 그 이단들을 보면, 전부 그거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이렇게 내려오고 있다고요. 환란과 핍박을 견디면서, 소수로! 순 가짜들! 순 가짜들! 계시록 3장 10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3:10-11)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인내하라고 한 그 말을 네가 지켰은즉 이런 말이에요.)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그 마지막 심판 때를 면하게 해준다는 거예요. 그 참은 자들은요! 참은 자들은! 그러니까 뭔가 참을 게 지금 있다는 거예요. 인내해야 할 게 지금 있다는 거예요.)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여러분! 계시록의 주제(主題)가 뭐라 그랬죠? 그렇죠? ‘이겨라!’ 이럴 때 참 목사로서의 … 흐흐흐. ‘이겨라!’ 예수님이 이기신대요. 그분이 다시 오신대요. 왕으로 다시 오신대요. 이게 계시록의 주제예요. 왜 그렇게 강조를 해야 됐을까요? 왜 그렇게 강조를 해야 됐을까요? 그때 그렇게 종이가 부족했던 그때 당시에, 종이가 없어서, 성경을 한 권을 파피루스에 쓰면, 그게 집 한 채 값이었대요. 그렇게 귀한 종이에다가, 왜 이렇게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이겨라! 이겨랴! 이겨라!’ 써놨을까요? 뭔가 이겨야 할 게 있다는 거예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는요!
그걸 잘 참고 이기셔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셨다면서요? 그분이 잘 참아내셨어요. 우리는 그분처럼 참지 못하지만, 그분의, 그 환란에,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는, 그 영광스러운 사실을, 여러분에게 환란이 닥쳤을 때, 인지하시고, 자각하시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신 게 아니에요. 여러분을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지금 아주 세밀하게, 여러분의 삶에 간섭하고 있는 게, 여러분의 환란이에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계신, 교회인 여러분! 정말 그 나라 백성답게,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면서, 여러분 지금 살고 계세요? 나라에 동참했다면서요? 그 통치에 순종하느라고, 환란을 당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증인으로 사는 삶 때문에, 환란을 당하고 계세요? 그 환란을 당하면서, ‘아! 나는 그리스도인이구나! 진짜 그리스도인 맞구나!’ 그렇게 그 환란을 자랑하고 계십니까? 힘들지만 소망을 바라보면서 잘 참고 계세요? 정 힘들면, 옆 사람을 보세요. 잘 참아내고 있는, 그렇게 가물에 콩 나듯이 잘 참고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있잖아요? 그들을 보면서, 참으시란 말이에요. ‘저게 바른 길이다! 저들도 참고 있다!’ 힘을 얻으세요.
그리고 여러분도 환란 속에서, 다른 형제들에게, 사도 요한처럼 그렇게 외치세요. 오늘 우리가 읽었던 이 9절 말씀이, 바로 이 이야기에요. ‘나 김성수는, 여러분의 형제입니다.’ 사도요한이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은 나의 형제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환란과, 그분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참음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늘 은밀하게 교제하면서, 그분의 응원의 목소리를 듣고 있어요. ‘이겨라! 이겨라! 그 내 이야기를 좀 전해다오!’’ 저는 여러분과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게 바로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1장 9절의 말씀이에요. 여러분! 사도들을 대단히 여기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들이에요. 여러분도 동일한 고백을 하실 수 있어야 돼요. 여러분도 사도 요한과 동일한 고백을, 세상을 향해 던지십시오. 잘 참으세요! 잘 이겨내십시오! 제대할 날은 곧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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