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아포칼립시스, ἀποκάλυψις )


계시(아포칼룹시스, ἀποκάλυψις )

요한계시록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해석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이비 이단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더 나아가 잘못된 종말론에 빠져 반사회적이고 비밀스러운 종파가 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에 나타난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에 현혹되어, ‘인 맞음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요한계시록을 학습하고 과거시험 보듯이 시험보는 신천지 교인들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요한계시록 말씀이 얼마나 그들을 세뇌하였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요한계시록이라는 책 제목은 계시록 1:1이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계시 혹은 묵시라는 말은 헬라어 ἀποκάλυψις (아포칼립시스)에서 온 말이다.

구약 헬라어 성경에는 명사 ἀποκάλυψις (아포칼립시스)는 전혀 나오지 않고, 다만 외경 집회서에 단 한 번 나온다.
하지만 동사 아포칼립토(ἀποκαλύπτω)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었다(창 8:13),
율법이 금하는 하체를 드러내다(성적 방종)를 지칭하는데 이 헬라어가 쓰였다(출 20:26; 레 18:6, 8, 9; 20:11; 신 27:20). 
언급하다(룻 4:4), 드러내다(삿 5:2), 나타나다(삼하 3:7)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일반적 뜻과 함께, 신적 계시나 현현에 대해서 히브리어 גלה(가라)의 번역어로서 아포칼립토(ἀποκαλύπτω)가 사용되었다(삼하 9:15).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시가 드러나다의 의미로서 이 단어는 ‘묵시록’ 장르에 속하는 다니엘서에 등장한다.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ἀπεκαλύφθη , revealed 부정과거 수동태),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라”(2:19)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ἀποκαλύπτω),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2:22).

다니엘서는 ἀποκαλύπτω(아포칼립토)라는 용어를 하나님의 신적이고 비밀스러운 계시행위에 적용하여 특별히 사용한다.
다니엘서 7장부터 나타나는 환상들은 신구약 중간시대에 있었던 헬라 왕조의 유대교 박해상황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말의 희망을 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은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신앙의 핍박 상황에서 역사의 종말을 계시록의 저자가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으로 전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묵시문학은 신구약 중간시대나 기독교 신앙 박해 시대에서 저자 미상의 책들로 많이 출현하였다.

요한계시록에서 동사 아포칼립토(ἀποκαλύπτω)는 한 번도 나오지 않고, 다만 명사 ἀποκάλυψις(아포칼립시스)가 1:1에 나타날 뿐이다.

환상과 관련된 계시(아포칼립시스)가 나오는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은 박해의 상황을 전제하고 있고, 특별히 순교자를 칭송하며, 신앙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한다.

순교자는 궁창의 별처럼 빛나고(단 12:3), 주님과 함께 천년 통치하는 첫째 부활의 참여자가 된다(계 20:6).

이 책들은 미래적 사건이나 종말의 때를 알리려는 의도가 담겨 있지 않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종말의 때, 혹은 메시아의 나라의 시기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분명한 거부와 부정을 강조하고 있다(눅 19:11; 행 1:7).

요한계시록을 ‘때와 시기’에 관한 책으로 해석하려 한다면,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인, 나팔, 대접의 환상 시리즈는 이미 선포된 예수의 종말 예언(막 13장)에 대한 반복과 강화일 뿐이며, 요한계시록의 요한은 ‘선지자 전승’에 속한 종으로서(계 22:9), 재앙과 종말, 회복과 구원에 대한 구약성경의 이야기와 선지서의 예언에 나오는 이미지와 상징을 사용하여, 자신이 처한 로마제국 상황에 적용하고 해석할 뿐이다.

때와 시기를 특정하는 시한부 종말론으로 해석할 수 없는 책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숫자는 결코 문자적 의미가 없고 상징적일 뿐이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신적 권위로 로마와 황제를 우상숭배하는 시대적 조류에 반응하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해 칭찬과 책망을 하고 있다.

밧모 섬에 유배당하여 주의 날에 교회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선지자 요한은(계1:10),  환상 가운데 보게 되는 하늘의 예배에 울려 퍼지는 승전가를 듣기도 하고 종말의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계시는 편지형식으로 교회에 전해지고, 애굽의 군사들이 홍해에 수장된 후에 모세가 승리의 노래를 부른 것처럼, 모세의 노래는 이제 어린 양 예수의 노래가 되고, 교회의 새 노래, 즉 승전가가 된다(계 15:3).

요한계시록은 결코 ‘때와 시기'에 대한 묵시가 아니다.
애굽과 바벨론처럼 로마제국도 하나님의 역사 앞에 무너지는 제국이 될 것이며, 종말은 땅을 망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되고, 성도들에게는 구원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는 책이다.
모든 사이비 이단의 요한계시록의 묵시해석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을 사용할 때(갈 1:12),
그 계시(ἀποκάλυψις )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칭한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를 이방에 전하도록 그에게 계시로 나타나셨다(ἀποκαλύπτω, 갈 1:16) 고 말한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고(롬 1:17), 믿음의 때를 계시한다(갈 3:23)고 선포한다.

계시라는 용어에서 그리스도의 다시 나타나심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라는 묵시적 종말을 이야기하지만(고전 1:7; 살후 1:7)바울에게서 계시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주려는 계시인 것이다.

‘때와 시기’에 대한 계시는 없다.
주님의 말씀처럼,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행 1:7). 
때와 시기의 묵시를 말하면 다 가짜인 것이다.



십사만 사천(144,000) / 게마트리아



십사만 사천
헤카톤 테쎄라콘타 테싸레스 키리아데스,
ἑκατὸν τεσσεράκοντα τέσσαρες χιλιάδες

신천지 교회의 핵심교리는 신천신지가 과천에 이루어졌다는 것,
신천지 신도는 육체가 순교자들의 영이 들어와서 육체영생을 하고 있다는 것,
십사만 사천 명이라는 구원받은 신천지 알곡교인들이 인침 받은 천국의 제사장이라는 교리이다.

신천지 교회의 존재와 교리들은 모두가 신약성경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1984년 3월 14일 ‘이긴 자’로 영생자가 된 교주 이만희는 과천에 천국을 창조했다고 주장하며, 역사의 기록을 다시 쓰면서 2020년은 신천기 37년이라고 말한다.

마치 북한이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기점으로 역사를 주체라는 연호로 계수하는 것처럼, 신천지를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에 근거한 종말론이 얼마나 많은 이단을 양성해 내는지, 미국의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한국 땅의 안상홍 증인회(하나님의 성회), 유재열의 증거장막성전, 이만희의 신천지 등 다양한 사이비이단들이 요한계시록의 아전인수격의 그릇된 해석으로 수많은 사람을 오도하고 세뇌하여 집단최면을 걸고, 기성교회를 숙주로 살아가는 바이러스가 되었다.

한국의 이단 교주들은 때로 왕관을 쓰고, 왕복을 입고(문선명 부부, 이만희 부부), 혹은 백마를 타면서(양도천, 안상홍), 자신들을 재림주라고 주장하기 위해,  요한계시록의 재림 메시아의 이미지로 덧입는다.

로마제국의 황제와 우상숭배를 받아들이도록 미혹하는 거짓 선생과 거짓 선지자(둘째 짐승, 계 13:11, 16:13; 19:20)의 유혹하는 거짓말로부터 교회와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예수의 묵시와 하늘의 환상을 기록한 선지자 요한(계 1:9; 22:9)의 요학계시록은, 오히려 교회 교인들을 미혹하고 세뇌하는 역기능을 하고 있다.

묵시문학(다니엘, 요한계시록)을 정경으로 포함시키는 정경화의 역사는 그것에 대한 경계와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신구약 중간시대에 쓰인 구약의 다니엘서는 선지서(느비임)로 분류되지 않고, 마지막 정경으로 포함된 후기 성문서(케투빔)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이 정경목록에 포함되기까지 교회 안에 논란의 역사가 있었다.
초기 교부들(저스틴 마터,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오리겐)은 계시록의 저자 요한을 사도 요한이라고 생각했기에 이 책을 성경의 일부로 간주했을 것이지만,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교회 안에서 계시록의 저자가 다른 요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증언한다.

기원 후 300년 경의 Gregory of Naziansus는 계시록 해석의 어려움과 오용성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정경에서 뺄 것을 주장하였다. 기원후 397년의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요한계시록에 관한 논란을 종식시키며, 정경목록에 포함시키지만, 요한계시록을 그리스 정교회와 시리아 정교회에서 여전히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문자적 역사적 해석을 해야 할 부분과, 문학적 신앙고백적 해석을 해야 할 부분과, 미래적 영적 해석을 해야 할 부분을 구분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단순히 미래주의적, 과거주의적, 역사주의적 해석 중 하나만을 일괄적으로 다 적용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박해 가운데 죽임 당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 위한 책이다.
여기에 과거의 예언과 교훈(에스겔, 다니엘, 스가랴 등)의 이미지를 은유와 배경으로 깔고, 현재의 역사적 혼란과 핍박을 암호화하며 로마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되심과 예수의 승리를 담대히 말한다. 미래적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영광과 승리 가운데 찬송과 예배하는 모습으로 하늘의 존재들과 땅의 교인들을 참여시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14만 4천 명의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문자적 해석에 근거하여, 구원받은 성도의 특정집단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 7:4에 처음 언급되는 십사만 사천(헤카톤 테쎄라콘타 테싸레스 키리아데스, ἑκατὸν τεσσεράκοντα τέσσαρες χιλιάδες = 144*1000s)은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이마에 인을 친 하나님의 종들을 말하고 있다.

이 이미지는 에스겔서 9장에서 예루살렘에 임할 재앙 가운데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백성들은 서기관이 이마에 표를 하도록 명령하시는 말씀에서 보인다(겔 9:6).

이것은 둘째 짐승(거짓 선지자)이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이마와 오른 손에 표를 받게 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계 13:16).
이 표는 첫째 짐승(로마황제)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666)를 뜻하는 표시이다. 
계시록 12-15장에서는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계 11:18)의 정체를 로마제국이라고 밝히면서, 인치심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의 하나님의 종들을  로마의 우상숭배자들에 맞서서 예수와 함께 영적 전쟁을 하는 divine warriors(신성한 군사들)로서 십사만 사천을 새롭게 이미지화한다(계 14:1).

이들의 입이 부르는 노래를 ‘새 노래’라고 하는데, 새 노래가 뜻하는 것은 ‘승전가’이다.
홍해를 건너고 애굽의 군사들이 수장이 된 후에 부른 모세의 승전노래는 이제 어린 양 예수의 승전가가 되었다(계 15:3)

계시록 7장이 말하는 십사만 사천을 문자적 해석으로 받아들이고 구원받는 사람의 숫자라고 받아들인다면, 같은 구절과 단락에 있는 열두 지파의 각각 만 이천 명도 문자 그대로 혈통적 유대인으로 해석해야 한다. 숫자는 문자적 해석을 하고, 구원받는 성도는 신천지 교인이라고 상징적으로 해석한다면, 한 구절이나 한 단락에서 조차도 해석의 일관성이 없는 엉터리 해석인 것이다. 계시록 14장에서 십사만 사천은 divine warriors로서, 음녀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순결한 교회이고, 어린 양 예수가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제자이며, 구원의 첫 열매가 된 하나님의 성도들이다(14:4). 이들은 시온산(영광과 승리의 산)에서 예수와 함께 출정 준비를 하며, 이마에는 어린 양과 아버지의 이름을 쓰고, 일곱 산(로마의 일곱 언덕)에 앉은 음녀(로마)와 짐승(황제)과 맞서 싸우는 영적 군사이다. 선지자 요한은 결국 ‘만왕의 왕 만주의 주, 그와 함께 있는 자들,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이 이긴다’ 고 선포한다(계 17:14). 계 22:7은 새 예루살렘 성 밖에 있게 될 자들로서 '우상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지어내는 자'가 있을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거짓(ψεῦδος, 프슈도스)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의 심판을 말한다. 이것은 소아시아의 7개의 역사적 교회들 가운데에서, 니골라당 교인들과 거짓 여선지자 이세벨이 음행(우상숭배)에 타협하게 하는 거짓말 하는 음행자들임을 염두에 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함으로 순교하고 환란을 당하는 진실한 자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 새 예루살렘 성인 것이다.  

신천지의 모략(거짓말)논리를 수단으로 하여 요한계시록이 금하는 우상(이만희)을 숭배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근거한 그들의 존재가 자기모순이다. 신천지의 주장과 달리, 십사만 사천명과 순교자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계시록 20장에 보이는 천년통치는  먼저 죽었지만 첫째 부활에 참여한 순교자들만이 누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스러운 통치이다. 이것은 고난 가운데 믿음을 지키며 죽음에 이르게 될 성도들을 위해 전하는 특별 메시지이다. 결코 14만 4천명과 상관이 없고, 영원한 천국의 전단계도 아니다.  순교자의 영광에 이르게 된 성도들은 이후에 천국에 오게 될 성도들의 선구자로서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왕노릇하다'의 일점일획 참조) 

신천지 교회는 2017년 8월에 6∼8개월에 걸쳐 요한계시록만을 공부한 사람들이 십사만 사천 명의 제사장이 되려는 ‘인맞음 시험’을 치루었다. 실내체육관에 열을 맞추어 시험치고 합격하여 십사만 사천 명 안에 포함된다는 혹세무민의 신천지는  물질과 세속주의 세균으로 병든 한국 교회가 만들어 낸  병리현상이다.



Multinational Assembly and 144,000

The vision in Chapter 5 shows us that there is a very good chance that the vision of the 144,000 in Revelation 7 and the vision of a great number of people that no one can count is referring to one and the same thing – God’s worshiping, victorious people of all nations including the physical people of Israel throughout all generations.

다국적 의회 및 144,000

5장의 환상은 요한계시록 7장의 144,000명의 환상과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환상이 하나의 동일한 것을 언급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세대에 걸쳐 이스라엘의 육적 백성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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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ter vision of all nations joining the Israelites in the worship of one true God is well attested in a wide variety of Jewish Biblical and extra-Biblical traditions. But more about this later; let us get back to the importance of the twelve tribes of Israel in Revelation so that we can see the very point of what is happening.

There are altogether 24 different lists of the twelve tribes spread throughout the Hebrew Scriptures (Gen. 29–30, 35, Gen. 35:22-26, Gen. 46:8-27, Gen. 49:1-27, Exod. 1:1-5, Num. 1:5-15, Num. 1:20-54, Num. 2:3-29, Num. 7:1-88, Num. 10:11-28, Num. 13:4-15, Num. 26:5-50, Num. 34:19-28, Deut. 27:12-13, Deut. 33:1-29, Josh. 13-19, Josh. 21:4-8, Judg. 5:12-18, 1 Chr. 2:1-2, 1 Chr. 2–7, 1 Chr. 12:24-38, 1 Chr. 27:16-22, Ezek. 48:1-29 and Ezek. 48:30-34). Just like in the Book of Revelation (Dan is missing there) some lists ocassionally have a tribe skipped or replaced (for more 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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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민족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후기의 비전은 다양한 유대인의 성서적 전통과 성서 외적 전통에서 잘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바로 그 요점을 볼 수 있도록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중요성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어 성경 전체에는 총 24개의 서로 다른 12지파의 목록이 있습니다(창 29~30, 35, 창 35:22~26, 창 46:8~27, 창 49:1~27, 출 10:1~27). 1:1-5, 민수기 1:5-15, 민수기 1:20-54, 민수기 2:3-29, 민수기 7:1-88, 민수기 10:11-28, 민수기 13: 4-15, 민 26:5-50, 민 34:19-28, 신명 27:12-13, 신명 33:1-29, 수 13-19, 수 21:4-8, 삿 5:12-18, 대상 2:1-2, 대상 2~7, 대상 12:24-38, 대상 27:16-22, 겔 48:1-29 및 겔 48:30-34). 요한계시록(Dan이 거기에 없음)과 마찬가지로 일부 목록에는 때때로 부족이 생략되거나 대체됩니다(자세한 내용을 보려면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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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마트리아





성경 속에서의 숫자의 비밀 (게마트리아)

은혜 2018. 11. 28. 8:46
55~70분

성경 속에서의 숫자의 비밀 (게마트리아) 

▶ 게마트리아란?

히브리어의 알파벳이 나타내는 숫자로써 그 단어가 지닌 뜻을 풀어 성서를 해석하는 이러한 방법을 게마트리아[Gematria]라고 한다.

유대교의 랍비들, 특히 중세의 카발라주의자들이 많이 사용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모두 22자인데, 처음 10자는 차례로 1부터 10까지의 수를 나타내고, 다음의 8자는 차례로 20부터 90까지의 10단위 숫자를 나타내며, 나머지 4자는 차례로 100부터 400까지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철자를 보고 숫자를 계산하여 뜻을 알아내는 방법입니다.

이를테면 ‘엘리에젤’(창세 15:2)은 아브라함의 종 318명을 가리킨다고 해석 합니다. (창세 14:14).

《요한의 계시록》 13장 18절에 짐승의 숫자는 666인데, 이 숫자는 ‘네로황제’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그 철자의 숫자를 합한 것과 같다.

▶ 숫자의 의미

1

2

3

4

5

6

7

8

9

10

-연합

-하나님의 나라

-동행, -사역

-언약

-성취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존재 의식

땅의 피조물의 존재

-고통

-순교

-환란

-노동

-벌

-죽음

-단식

-생명

-영원

-부활

-영원

-미완성

-불완전

-부족수

-땅의 만족수

-땅의 충만수

-하나님이 만족 하는 인내의 시간

▶ × (곱하기) : 충만, 번성

    ☞ 3 × 4 : 충만, 번성 ☞ 7 × 7 = 49 : 무한

    ☞ 12 × 12 =144 : 하늘과 땅을 합한 천국의 크기

    ☞ 12 × 1000 = 12,000 : 택한 백성의 수

    ☞ 12 × 12 × 1,000 = 144,000 : 택함 받은자의 수 (144 × 1,000 = 천국백성)

▶ + (더하기) : 존재

    ☞ 7 + 7 =14 : 언약의 성취 (예수님의 족보 14대, 14대, 14대)

    ☞ 3 + 4 -> 7 : 하늘과 땅의 존재, 전체, 전부

    ☞ 7 + 1 = 8 : 부활, 영원

    ☞ 12 + 12 = 24 : 성도들의 대표 (신․구약 대표)

*1 - 절대불가분의 기본적인 수로서 시작(창1;5), 하나님의 유일(신6:4;마19:17,23:8;갈3:20;약2:19), 신앙의 유일성(엡4:5,6) 같은 일을 나타내 보이는데, 특히 잘 쓰였다.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던 인간의 과시와 죄는 인간 언어의 단일성의 혼란을 초래했다(창11:1,6,7). 거기에,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딤전2:5;마23:8-10),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요10:30)의 임무는 이 상실된 단일성과 공동의 회복(요17:11,21-23;고전8:6)이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는데(엡2:14-16), 하나의 소망(희망)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한 지체, 한 마음, 거기에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그리고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고 만유의 한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이신 것이다(엡4:3-6).


*2 - 최소의 결합이라든가 분리, 결정의 수. 그것은 의거할 바 없어 고독한 남녀의 결혼에 의한 극복(창2:20-24;마19:4-6)이라든가 우애(전4:8-12)를 의미한다. 2는 증인 또는 증거에도 관계되는 수로서, 사실의 증거는 두 사람의 증인이 진실성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창21:27;신17:6;요8:17). 예수께서는 두 사람씩 파송시켜 협력시켰다(눅10:1;마21:1,14:13;마18:19,20). 그러나 누구도 두 주인에게 쓰일 수는 없다(마6:24). 두 길의 비유(마7:13,14)라든가 두 사람의 비유는(눅18:9-14), 최종 결정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3 - 완성과 완전함. 삼위일체의 하나님(마28:19). 3회 반복에 의한 강조(사6:3;렘7:4;겔21:27), 삼중의 축복(민6:24-26), 세 가지 중요한 것(고전13:13).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막은 앞뜰, 성소, 지성소로 되어 있고(출26:33,27:9),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사이의 기간은 3일이다(요2:19;마12:40). 한편 이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마귀의 예수에 대한 3회에 걸친 시험이 있다(마4:1-11). 계 13장의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짐승의 나타낼 때도 표범, 곰, 사자의 셋이 보여져 있고(계13:2),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가지고 있음이 말해져 있다(계13:2). 3과 1/2은 7의 반으로서 불완전 또는 유한을 보여준다.


*4 - 주로 땅의 수인데(사11:12;계7:1,20:8), 동.서.남.북을 상징하며(창2:10;단11:4;슥2:6;마24:31;막13:27) 창조된 세계의 총체를 말한다.


*5 -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수의 공통 의미는 은총이며 구속(Redemption)이다(출26:1-3;마25:2).


*6 - 완성을 뜻하는 7에서 하나가 모자라 불완전함을 의미한다. 성별 된 안식일 및 안식년 사이에 있어서 사람이 일하는 일수(출20:9,23:12)라든가, 연수(출23:10), 한가지로 천지창조 작업의 일수(창1:31;출10:11)는 6의 수이다.


*7 - 완전수로서, 완성과 하나님의 충만함을 의미한다. 7일간의 천지창조(창2:2,3), 안식일, 안식년, 회년(출20:11,21:2;레 25:8), 일곱 교회 기타(계1:11,12,16)에 모두 7이 씌어져 있다. 제자들이 예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오이까 에 대해, 예수께서는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고 대답해 주셨는데(마18:21), 이것은 회수(回數)의 문제라기보다, 7의 완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7은 하나님의 수로, 계시록을 통해 아주 분명히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일곱 영(계1:4), 일곱 별과 촛대와 교회(계1:20), 일곱 편지(계2-3장), 일곱인(계5:1), 어린양의 일곱 뿔과 눈(계5:6), 일곱 나팔(계8:2),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일곱 금대접(계15:7), 일곱 우레 (계10:3,4)등이 그러하다. 일곱 가지의 촛대(출25:37)는 조금의 어두운데도 없으신 빛으로서의 주의 상징이다(요일1:5). 그러나 악의 완전성도 7중(七重)으로 보여져 있다. 일곱 악한 귀신(마12:45), 용의 일곱 머리와 관(계12:37;계13:1,17:3)의 일곱 머리의 짐승들이다. 


*8 - 가끔 새로운 시작의 수로서 보여진다. 8명이 노아의 홍수 때 구원되고(창6:18;벧전3:20;벧후2:5), 그들에게서 새로운 인류가 났다(창10:1-).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됨을 보이는 할례는 생후 8일만에 실시되었다(창21:4;레 12:3;눅2:21). 이새의 여덟 째 아들 다윗은 하나님께 택함 받은 이스라엘 왕으로 되고(삼하16:10-13), 그 혈통에서 메시야가 났다(삼하7:12-).


*9 - 9는 3의 3곱이며, 그리고 구약성서에 단 7번만 나오고 있다. 구약성서의 9는  심판 ,  종국 ,  완성 을 의미한다(겔24:1).


*10 - 이스라엘에서 행해진 진법의 기초이다. 장막(출26:10,16,18,19,27:9-12)이라든가 성전(왕상6:3,16,17,20,23

26,7:23,24,38,43)의 척도라든가 수량에는 10 또는 그 배수가 빈번히 보여져 있다. 10일기간은 달(月)의 1/3에 해당되고, 종종 확실한 기간 혹은 대개 그 기간으로서 언급되고 있다(창24:55;민11:19;삼상25:38;느5:18;렘42:7;단1:12;계2:10). 첫 달의 열흘에 유월절 어린양이 택해지고(출12:3), 또, 속죄제가 행해졌다(레16:29). 하나님은 애굽에 대한 10 재앙을 통하여 그 백성을 노예예속에서 해방시키고(출7-12장), 십계명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자기의 요구와 뜻을(출 20:1-17,34:28;신4:13), 땅의 소산에 대해서는 10의 1인 11조를 요구하셨다(레27:30). 여기서는 구원의 성취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포괄적이고도 완전하신 요구가 20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거스리는 힘과의 관계에서도 10 이 보여져 있다. 다니엘서와 계시록에 나오는 각종의 짐승과 용은 힘의 표시로서 열 뿔을 가지고 있고, 부분적으로는 열 뿔은 열 명의 왕을 의미한다(단7:7,24;계24:3,13:1,17:3).


*12 - 1년의 달(대상27:1)이라든가 하루의 시간(요11:9)의 수로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특별하게 완전수이다. 야곱의 열두 아들(창35:22-26)에게서 12 지파가 생겨났다(출24:4,28:1;수4:8,9;왕상18:31;마19:28;약1:1).신약에서는 사도수가 이에 대응된다(마10:1-4;행1:14-26) . 12와 그것을 기수(基數)로 한 수는 계시록에 특히 빈번하다. 즉, 교회를 나타내는 여자의 관에는 12의 별이 있다(계12:1). 새 예루살렘의 묘사에는 12와 12000 과 144000 이 보여져 있다(계21:12-21). 12 x12000=144000은 이스라엘 여러 지파 중 인 맞은 자의 수이다(계7:4-8,14:1).


*24 - 제사장의 반렬(대상24장)과 레위인 음악반(대상25장)의 수이고, 24장로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경배하고 있다(계4:4,10).


*30 - 요셉이 바로 앞에 선 때의 나이의 수이다(창41:46-). 같은 나이의 때에 레위인의 성막 봉사의 임무가 시작되고(민4:3,23), 다윗은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삼하5:4). 예수께서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신 것도 30세쯤 되는 해이다(눅3:23). 30 일간 이스라엘 사람은 아론(민20:29)과 모세(신34:8)의 죽음을 슬퍼했다. 은 30, 즉 30 세겔이 목자로서의 선지자 스가랴의 보수였고(슥11:12,13), 또 배반자 가룟 유다의 보수였다(마26:15,27:3).신4:13


*40 - 연, 월, 일에 씌었다. 40년은 구세대가 멸해지고 새 세대가 자라나는 기간이다. 사사기에 거듭 보여져있는 이 연수는 이러한 의미로서 개수로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삿3:11,5:31,8:28, 또한 삿3:30에서는 기간이 2배). 하지만 광야 표박의 40년(민32:13;신2:7,8:2,4;수5:6) 및 다윗(삼하5:4,5), 솔로몬(왕상11:42), 요아스(왕하12:1)의 통치기간은 개수로 볼 것은 아니다. 40일이라는 일수가 노아 홍수 때에 있어서 몇 번이나 말해져 있다(창7:4,12,17,8:6). 이것과 같은 일수로 2차에 걸쳐 모세는 시내산에 있었고(출24:18,34:28),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땅을 정탐했다(민13:25,14:33,34). 그리고 엘리야는 오렙산을 향하여 40주 40야나 갔다(왕상19:8). 예수께서는 공격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셨다(마4:2;막1:13;눅4:1). 그리고 같은 기간에 걸쳐 부활의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제자들과 말했다(행1:3). 요나의 니느웨이 있어서의 설교에서는 40일이 속죄의 기한으로서 보여져 있다(욘3:4). 이상에 든 기간의 대부분은 준비와 시련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42 - 달수에 씌어져 마흔 두달 동안(계11:2)이 말해져 있고 이것은 3년 반으로서, 7년의 반, 즉 제한된 기간을 보여 주고 있다. 한 때(一年)와 두 때(二年)와 반 때(半年)(계12:14), 1260일(계11:3)도 같은 뜻이다. 악의 세력이 언제까지든 횡포를 자행할 수는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48 - 레위인, 제사장의 성읍의 수이다(민35:7;수21:41).


*70 - 70(7x10)은 충만, 완성의 수이다. 70인 장로가 주 앞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했다(출24:1,9-11). 동수의 사람은 모세를 돕기 위해 선별되었다(민11:16,17). 예수는 자기가 가시려고 하는 장소에 70명 제자를 먼저 보내셨다(눅10:1-). 이것은 예수의 복음이 전 인류에게 미칠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민족표(창10장)는 3명의 선조를 제외하면 70명을 계수 한 것이고, 야곱의 자손의 수에 대응한다(신32:8;창46:27,50:3;출1:5). 이스라엘이 귀속한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지배는 70년 후에 무너질 것과(렘25:11,12,20:10), 두로에 대한 심판의 기간도 같을 것이 말해져 있다(사23:15,17). 70주가 구원의 역사의 기간으로서 단 9:24-27에 말해져 있다.


*666 - 하나님께 거스리는 세속권력의 화신인 짐승의 수(계13:18)인데, 알파벳으로 나타낸 수의 합계인 듯하다. 이러한 표현법을 게마트리아(Gematria 히브리어 알파벳의 수치에 따라 성서의 말의 신비적 의미를 찾아내려는 일)라 하는데, 창 14:14의 아브람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인이란, 아브람함의 종 엘리에셀(15:2)의 알파벳 전부(히브리어는 전부)의 수를 합게한 것으로 상상된다. 666은 네로 황제(네론 카에사릉의 子音인 n=60, r=200, w=6, n=50, q=100, s=60, r=200으로 합계 666)를 가리키는 듯하고, 어떤 사본에는 616으로 되어 있는데, 그 경우도 네로 카엣사르로 불러 n=50을 빼면 설명이 된다. 다른 설도 있는데, 이러한 논점에서, 또는 계시록시대의 인물로서도 네로가 적합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계13:18).


*777 - 진정한 세상의 주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가 포함될 수 있다. 


*888 - 예수라는 이름  예수스, Ihsous'의 수치를 합계하면 888로 된다(I=10, h=8, s=200, o=70, u=400, s=200). 666이 악의 세력을 표상하는 것이라면,  주 예수의 이름은 888이고, 악마에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분임을 보여준다.


*1000 - 1000(=10X10X10)은 다수를 보이는 수로서(출20:6;삼하21:11;대하15:11;시84:10;전6:6;겔45:1,3,,47:3-5;단7:10;유1:14;계5:11),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1000과  가족 이 같은 뜻이었다(사6:15;민10:4). 1000은 또한 한 지파의 작은 부분이고, 군대의 단위였다(삼상8:12;대상13:1). 이 수는 예수께서 지상에 세우실 천년왕국에도 씌어져 있다(계20:1-6). 구약에 있어서 제일 큰 실수는, 다윗의 인구조사에 의해 보여진 장정 1,100,000명에 유대인 470,000 명(대상 21:5)이었다. 그러나 삼하 24:9에는 그 수가 각각 800,000과 500,000이었다. 여기에 가까운 수는 구스 사람 세라의 군사 1,000,000이다(대하14:9). 여호사밧의 군대(대하17:12-)는 5사단에 각 300,000, 그리고 280,000, 200,000, 200,000, 180,000이었다. 이스라엘 군대 수는 603,550(민2:32), 후에는 601,730(민26:51)이었다.


*1600 - 천 육백 스다디온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하나님의 백성이 거할 새 예루살렘 이외에는 전 세계에 미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 1600은 40의 제곱이다(계14:20).


*144,000 - 유대인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신자로서, 시온산에 서신 어린양에 의해 구속된 자이다(계14:1-). 144,000은 12의 제곱을 천 배한 수이다. 이 수를 이스라엘의 12 지파 순교한 성도들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를 보면 각 숫자의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숫자만으로 그 것들의 의미에 대해서 파악하곤 한다.
그런 숫자에 대한 하나하나의 의미에 대해서 봤으면 한다.
아래 내용이 히브리적인 숫자 해석인지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많은 부분 내가 알고 있는 그 숫자들의
의미들과 비숫하다.  

* 목차

A. 0 (영적인 수, 없음)

B. 1 (하나님의 수, 처음, 유일, 절대, 단일, 통일, 고독)

C. 2 (분리, 짝, 결합, 조화, 사랑, 증인, 분쟁)

D. 3 (하늘 수, 영적인 완전 수, 부활 수, 확정, 거룩, 삼각형)

E. 4 (땅의 완전수, 창조, 물질, 질서, 안정, 방향, 세상, 실용, 방어, 사각형)

F. 5 (결합, 은혜, 영적, 초월, 오감, 절반의 완성, 오각형)

G. 6 (땅의 완성수, 창조의 수, 구원의 수, 사람의 수, 불완전, 일하는 기간, 육각형)

H. 7 (완전수, 땅의 완전, 안식, 거룩, 성취, 언약, 예수님의 수, 완전한 구원 수, 인생의 수)

I. 8 (부활, 할례, 새 출발, 새 생명, 더 높은 차원, 하늘에서의 완전, 영적인 세계, 승리, 모든 방면)

J. 9 (신성, 불완전, 부족)

K. 10 (서열적인 완전 수, 명령, 행함, 기본 단위, 조직, 모든 존재, 충만)

L. 11 (부족한 조직의 수, 심판의 수, 긴박함, 말세)

M. 12 (통치 조직,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 12 지파, 12 사도, 전체적인 완전 수)

N. 13 (왕국, 통치)

O. 14 (완전한 기간)

P. 15 (영적인 성숙, 초막절, 연장된 기간)

Q. 18 (고난의 기간, 불행의 수)

R. 40 (고난 시험 연단 성장 준비 금식 통치 기간)

S. 70 (완벽한 통치의 수, 인생의 수)

T. 666 (짐승의 수, 사탄의 수, 악의 완전 수, 세상의 수)

U. 144,000 (완전한 무리의 총합, 하나님의 완벽한 백성의 수)

A. 0 (영적인 수, 없음)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은 수없이 많은 사람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논쟁은 언제나 핵심을 벗어나서 하고 있습니다. 
과학에 대한 것은 과학과 관련된 것으로 논쟁을 하여야 하듯이 하나님에 대한 논쟁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으로 논쟁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과학과 관련이 있는 것은 과학책에 있고 하나님과 관련있는 것은 성경책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안다는 것은 성경을 떠나서는 알 수 없습니다. 
곧 성경을 분석하므로 그 성경이 타당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성경에서 타당성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곧 성경은 비 과학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성경의 범위가 어디까지 미치는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과 있다고하는 자들의 논쟁을 보면 성경과 과학은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며 그 만드신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만물을 연구하는 것이 과학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연구하는 학문이 됩니다. 
곧 과학은 성경의 한 분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은 성경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속에서만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도 하나님은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과학이 말하는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니 그것은 일치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는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인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알파와 오메가라고말하고 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처음과 나중이여 시작과 끝이란 말이며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능력과 신성을 만물에서 찾을 수 있을까? 
만물을 연구하는 학문이 과학이었고 과학의 모든 법칙은 수학으로 표기됩니다. 
이것은 과학과 수학은 그 법칙이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수학의 법칙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수학의 법칙은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수학은 곧 물리학이란 말과 같이 수를 다스리는 수리학입니다. 
그러므로 수학이란 수를 다스리는 법칙입니다.

이 법칙에는 가감승제의 법칙이 있습니다. 
가감승제의 부호는 +, -, x,/(나누기)입니다. 
그러므로 가감승제와 수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능력은 다스리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감승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는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게 됩니다. 

먼저 능력의 모습에서 가감의 법칙에서 +와 -는 상대적인 성이며 수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가감의 법칙은 성리학적인 법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리학적인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이 성리학적인 능력은 수에 생명을 주듯이 생물을 창조하며 상대성 원리의 능력을 지닙니다. 

그러나 승제의 법칙은 성을 다스립니다. 곧 (+)x(-)=(-)가 됩니다. 여기에는 X에 의하여 +는 -로 변환된 것입니다. 
곧 승제의 법칙은 성력을 억제하며 변환시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을 변환 할 수 있는 승제의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승제의 능력은 성을 변환하는 것으로 가감의 법칙으로 볼 때는 이적이요 기적입니다.

이러한 이적과 기적은 성경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보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신성은 수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성은 상대적인 그러한 성은 아닙니다.

수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가감승제의 법칙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수가 있고 가감승제의 법칙으로 다스릴 수없는 성이 있습니다. 
곧 성을 붙일 수 있는 수가 있고 없는 수가 있습니다. 
성이 없는 수는 0 이며 성이 있는 수는 0 외의 모든 수입니다. 
성이있는 모든 수는 성이 없는 0 에서 상대적으로 무한대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무한대의 수도 쌍소멸하여 0 가 됩니다. 곧 0 는 알파와 오메가로 모든 수의 시작이여 끝입니다. 
그리고 모든 수는 0 에서 나와서 0 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신성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먼저 0와 수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수열은 0에서부터 무한대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무한대의 상대적인 수는 쌍소멸합니다. 

곧 상대적인 수는 0에서 나와서 0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0는 상대적인 수의 근원으로서의 알파이고 수의 소멸로서의 오메가입니다.

여기에서 상대적인 수가 0에서 나와서 0로 돌아간다는 것은 0안에는 상대적인 성과 수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물리학적으로 표현하면 에너지 질량의 보존의 법칙과 일치합니다. 
곧 성과 수가 합처져 0밖으로 나올 때는 상대적인 수이나 안에서는 다릅니다. 

곧 0안에서는 수는 수대로 성은 성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수는 절대수 곧 성이 없는 수가 됩니다. 
그러므로 0는 상대적인 수의 분기점이며 성과 수의 분기점입니다. 
따라서 0의 세계는 상대적인 창조 이전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0는 세상의 창조 이전의 모습이며 세상이 다시 그 상태로 회복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수리학적으로 볼 때 0안에는 수학의 모든 부호가 다 들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3)/(-3)x0=0으로 좌변의 모든 것은 우변의 0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창조의 재료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으로 알파와 오메가가 된 것입니다. 

1~9까지의 수에는 상대적인 성이 있으나 0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공의 상대성이 없는 영원을 상징하는 0으로서 영원성과 상통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0의 위치가 아니라 수의 위치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 있다는 말과 수학이 일치하니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확인하기 위하여 수학과 과학을 대조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3)은 성을 가진 수 입니다. 이것을 물리학에 적용하면 -전자에 해당합니다. 

전자는 광자와 전하가 결합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성은 전하요 수는 광자입니다. 
그러므로 전자는 가감의 법칙의 적용을 받게 됩니다. 

곧 전자의 상소멸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승제의 법칙은 원자의 구조에서 발견됩니다. 

원자는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자는 +핵의 주위를 회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의 법칙에 의하면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을 다스리는 또 다른 것이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에너지라 합니다. 
이 에너지의 법칙이 승제의 법칙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다음에서 다시 확인됩니다. 

핵외의 -전자에 결손이 생기면 핵내의 +전자가 핵외로 튀어나와 -전자가 됩니다. 
곧 성의 변환이 일어납니다. 
이상과 같은 것은 모두 가감승제의 법칙이 실제적으로 과학에 그대로 적용됨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수학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이 만물에 그대로 존재함을 알게 됩니다. 
곧 0 와 같은 존재가있는가 하면 수와 같은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피다고라스가 만물은 수라고 하였다면 0은 신으로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정말로 있는 것입니다.

* 출처 : 성경과 과학

B. 1 (하나님의 수, 처음, 유일, 절대, 단일, 통일, 고독)

1은 시간적으로는 0(현재)으로부터 정방향으로 시작을 의미하며, 공간적으로는 1차원 즉 점을 의미합니다.
디지털 세계의 기본이 되는 2진수에서 1은 0(없음)과 대비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방종교의 다신론과 달리 기독교에서 1은 유일한 창조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국가에서 왕이나 대통령이 한명이듯이 이 우주에서 진정한 왕 되신 통치자는 하나님 한분만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1 이 가진 의미로는 첫째, 처음, 으뜸, 왕, 유일, 우두머리, 절대, 존재, 통일, 연합, 외로움, 고립 등이 있습니다.
1은 홀로 있기 때문에 외롭고 고독해서 사랑의 대상체인 다른 1을 만들거나 파생해서 2를 만들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 홀로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아서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 이브를 만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님을 낳으셨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은 영문으로는 God이고 히브리어로는 엘(El)로 직역하면 신(神)에 해당합니다.'신'(神)이란 인간과 대비되는 권능을 가진 영적 존재를 의미합니다.천사나 사탄도 영적인 존재이지만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소유하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영적 존재와 구분짓기 위해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이라 칭하셨습니다.

시편 86/10 이는 주께서 위대하시며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심이니 주만이 홀로 하나님이시니이다.

이사야 37/16 오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만군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는 땅의 모든 왕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나이다.

이사야 44/8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그때부터 네게 말하여 밝히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느냐? 참으로 다른 신은 없나니 나는 다른 신을 알지 못하노라.

고전 8/4 그러므로 우상들에게 바친 희생물을 먹는 것에 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줄 아노라.

그래서 성경에 위대하고 경이로운 일을 행하시는 주만이 홀로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만군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모든 왕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자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증인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가짜 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마태 23/9 땅에 있는 자를 너희 아버지라 일컫지 말라. 이는 너희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라.

고전 8/6 우리에게 오직 한 분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분께로부터 났고 우리도 그분 안에 있으며 또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있고 우리도 그분을 통하여 있느니라.

고후 1/3 하나님을 송축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시라.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어떠한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

하나님(신)은 주로 창조자 소유자 권능자 주관자를 의미하지만 아버지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를 의미할 때도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한 분 아버지와 한 분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며, 만물이 그분으로부터 났고 그분 안에 있으며 그분을 통하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지위와 능력이 동등하시며 같은 본성(성품)을 소유하고 계시지만 아버지의 아들이십니다.

창세기 2/21~23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하나님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그 대신 살로 채우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제 이것은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세기 3/15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대감(敵對感)을 두리니 여자의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아담의 동반자로 주셨습니다. 
그녀가 남자로부터 취하여졌으므로 아담은 그녀를 남자로부터 나왔다는 의미에서 여자(Woman)라 칭하였습니다.
원래 하늘의 법칙은 남자(아버지)로부터 생명이 나오는 것이지만 땅의 법칙은 여자로부터 생명이 나오게 됩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은 여자의 씨(인간의 후손, 예수님)가 적그리스도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사탄)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십자가에서 상하게 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사야 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부터 너를 지은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모든 것을 지은 주니 곧 홀로 하늘들을 펼치고 친히 땅을 넓게 펼치며

예레미야 23/24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보지 못하도록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는 자가 누구냐? 주가 말하노라. 내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지 아니하느냐?

시편 139/8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오며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보소서,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모든 피조물을 홀로 지으신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지 못하도록 자신을 은밀히 숨길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 꼭대기에서부터 지옥 밑바닥까지 충만히 계십니다.
따라서 우주만물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주만물 속에 충만히 거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4/6 이스라엘의 왕인 주 곧 이스라엘의 구속자(救贖者)인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그분께로부터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께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분께 영원히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예수님)은 알파요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마지막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창조자요 지배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자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되시며, 모든 원인과 결과, 모든 목적과 수단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주만물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와 예수님을 통하여 있고 결국 예수님께로 돌아가 영광이 그분께 영원히 있게 됩니다.

하나님 뜻대로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크리스챤은 없습니다.
문제는 나의 믿음이 그대로 실행이 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진리와 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나지 아니하면 육신의 본능과 사탄의 주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 끊임 없는 욕심과 의심, 악하고 음란한 생각이나 언행 등은 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죄성은 내 의식에 있지 않고 육신의 본능과 관련해 나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재의식은 내 의식과 상관 없이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가 특정한 자극이 주어지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죄가 그치기 위해선 나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가 없어져야 그치게 됩니다.

평상시 착하던 사람도 빚에 몰리거나 죽음에 위협에 처하면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되고, 결국 자신이 살기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거나 사기행각을 벌이는 등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요즘 자신이 살자고 자기 가족 이름으로 보험을 들고 사고를 가장해 살해하거나 청부살인을 의뢰하는 경우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길을 가로막고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것도 삶에 대한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죄의 근원은 인간의 살고자 하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 속에 2명이 빠지면 허우적 대다가 결국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방을 물 속에 집어 넣게 됩니다.
따라서 살고자 하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치면 죄에 대한 욕망이 그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고 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라는 것으로 자신을 죽은 자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자에게는 살고 싶은 욕망이 없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습니다.

마태 26/37~39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때에 비로소 슬퍼하시며 몹시 괴로워하시더라. 그때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혼이 심히 슬퍼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멀리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누가 22/42~44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하늘로부터 한 천사가 그분께 나타나 그분을 강건하게 하더라. 그분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큰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살고 싶은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기도로 싸워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는 남과 분리하는 나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 없어지며,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참 생명만이 남게 됩니다.
사리사욕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뜻만 남으므로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희생하며 남을 위하고 섬기고 용서하는 구원의 열매인 사랑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5/18 이는 하늘들을 창조하신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친히 땅을 조성하고 만들고 견고하게 하였으되 땅을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거하도록 조성하였느니라. 나는 주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there is none else)

마태 19/17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오직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명령들을 지키라, 하시니

구원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그 믿음이 내 안에서 실현되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실제로 존재하시고, 다른 것은 일시적 가상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존재하시고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신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나의 존재와 나의 의를 십자가에서 끝내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의와 하나 되는 것이 이 시대에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C. 2 (분리, 짝, 결합, 조화, 사랑, 증인, 분쟁)

1이 남성수라면 1로부터 나온 2는 여성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이 홀수의 기원이라면 2는 짝수의 기원입니다.
홀수는 안정적이지만 균형이 맞지 않고, 짝수는 불안정하지만 균형이 맞습니다.
2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자연계에서 남성과 여성, 낮과 밤, 빛과 어두움, 높음과 낮음, 강함과 약함, 태양과 달 등으로 나타납니다.

신체에 짝을 이루는 곳으로는 눈, 귀, 콧구멍, 가슴, 팔, 다리, 신장, 폐 등이 있습니다.
반면 홀로 있는 기관으로는 코, 입, 뇌, 머리, 몸, 심장, 간, 위장, 방광, 생식기 등이 있습니다.
인체의 대부분의 기관은 1개 또는 2개이지 3개 이상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생물은 1과 2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구성되는데 1이 절대적(공격적)이라면 2는 상대적(방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선함과 악함, 성령과 육신, 의와 불의, 천사와 악마, 예수님과 사탄, 천국과 지옥 등이 대비되어 악에서 떠나 선을 지향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2명씩 역사하신 경우가 많은데 아담과 이브,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와 갈렙, 다윗과 솔로몬, 엘리야와 엘리사, 침례인 요한과 예수님, 바울과 바나바 등입니다.

이는 한명이면 외롭고 쓸쓸하지만 둘이면 서로 위로하고 도우며 한명이 넘어지면 다른 한명이 일으켜주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도 2명씩 정찰을 보내고 전투기도 2대씩 비행합니다.
2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는데 분리, 분쟁, 투쟁, 싸움, 전쟁, 불화, 이중성 등입니다.
따라서 2는 1보다 이상적이면서도 불안정하고 분쟁적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다시 1로 돌아가거나 3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1 → 2 → 1 → 3 → 4

위 도식은 자연계의 원리이자 영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은 절대적이지만 외롭고 쓸쓸하기 때문에 또다른 1을 파생해 사랑의 대상체로 만듭니다.
2는 1보다 이상적이고 서로 협력하지만 분쟁과 갈등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다시 합쳐져 1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랑으로 연합된 1은 또다른 1을 낳아 3을 만들어 안정적인 구도를 갖게 되며, 외부의 1을 받아들여 완성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2/24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결합하리니, 그들이 한 몸이 될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완벽한 아담을 창조했지만 홀로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아 남자인 아담으로부터 여자인 이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면 둘이 한 몸이 된다는 원리를 선포하셨으며, 한 몸이 된 부부는 다시 나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으로 하나 된 부부는 자식(생명)을 낳아 가정을 이루게 되며, 자식이 장성하면 며느리나 사위를 받아들여 완성을 보게 됩니다.

고전 6/17 그러나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마태 6/10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홀로 완전하시지만 사랑의 대상체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아내 내지는 지체가 되는데 예수님과 성도가 합쳐져 한 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미 하늘나라에서는 아버지로부터 아들 예수님이 나오시고,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 되셨으며,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성령님이
나오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고전 11/2 이는 내가 경건한 질투로 너희에게 질투를 느낌이라. 내가 너희를 한 남편에게 정혼시켰나니 이는 한 순결한  처녀로 너희를 그리스도께 바치려는 것이라.

따라서 땅에서 성도가 예수님과 하나 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이 만나 완성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목적은 영적으로 순결한 처녀로 성장하여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가정(아버지, 아들, 성령님)에 신부로 초대되어 혼인잔치를 치루고 영원히 완벽한 한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히브리서 8/5 이 제사장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본보기와 그림자라. 이것은 곧 모세가 성막을 만들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 권고 받은 바와 같으니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는 조심하여 산에서 네게 보여 준 양식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라, 하시기 때문이라.

이 땅에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본보기와 그림자입니다.
마치 아파트를 짓기 전에 미리 볼 수 있게 하는 모델 하우스와 같은 것입니다.
모델 하우스는 아파트 내부 구조와 비슷하지만 임시적인 곳이고,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며 자식을 낳아 키우고 결혼시키는 것은 모두 하늘에 있는 일들을 알기 위한 본보기일 뿐입니다.

따라서 모델 하우스 같은 육적인 세계에 계속 집착하고 머무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듯이 육적인 사람은 혼적으로 성장하고 혼적인 사람은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을 갖고 있어서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와 동물적 요소를 모두 갖춘 특이한 존재입니다.
이성에 따라 사는 인간과 본능에 따라 사는 동물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예수님을 통해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영생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31~32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신비가 크도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요한 15/26 그러나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위로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나에 관하여 증거하시리라.

요한 16/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니라. 이는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위로자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임이라. 그러나 내가 떠나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사랑은 둘이 하나 되는 것이며, 생명(성령)은 하나 된 둘이 파생하는 존재입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결혼해 하나 되고, 하나 된 남녀는 아이(생명)를 낳게 됩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와 예수님은 사랑으로 하나 되셨고, 하나 된 아버지와 예수님은 성령님을 파송하십니다.
둘이 하나 되기 위해선 자신의 희생이 필요하며, 서로가 자신을 비워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고전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 내느니라.

사랑이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한 감정으로, 남자는 사랑 하기를 원하고, 여자는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상대방을 열렬히 좋아하고, 같이 있고 싶어지며, 항상 생각나고, 자신을 희생하며 위하고 섬기게 되고, 잘못을 용서하며, 자신의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고, 상대방을 기쁘게 해 주면서 자신도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육적인 사랑이 영적으로도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그대로 재현되며, 사랑이 식으면 곧바로 분쟁과 다툼이 시작됩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

사랑은 점차 성장하게 되는데 사람이 어릴 때에는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하고, 젊을 때에는 남녀가 사랑을 서로 주고 받으며, 부모가 되면 자식에게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아 붓게 됩니다.
육신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고, 혼의 사랑은 중립적인 사랑이며, 영의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보여 주셨고, 구원 받은 성도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길 원하십니다.

* 둘과 관련된 성경구절

출애굽기 25/19 한 그룹은 이쪽 끝에 다른 그룹은 저쪽 끝에 만들어 긍휼의 자리 양 끝에 그룹들을 만들지니라.

출애굽기 34/1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두 개를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들에 있던 말들을 내가 그 판들 위에 쓰리니

레위기 5/7 만일 그가 어린양을 가져올 능력이 없거든 자기가 범한 범법으로 인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주께 가져오되 하나는 죄 헌물로 삼고 다른 하나는 번제 헌물로 삼아

신명기 17/6 죽일 자를 두 증인이나 세 증인의 입으로 죽일 것이요, 한 증인의 입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스카랴 4/3 그 등잔대 곁에 두 올리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잔의 오른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마가 6/7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기 시작하시며 부정한 영들을 제압하는 권능을 주시고

누가 10/1 이 일들 후에 또 주께서 다른 칠십 명도 세우사 친히 가시고자 하는 각 도시와 각 지역으로 둘씩 둘씩 앞서 보내시니라.

계시록 11/3~5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능을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대언하리라. 그들은 땅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나무요, 두 등잔대니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들의 원수들을 삼킬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런 식으로 죽임을 당하리라.

D. 3 (하늘 수, 영적인 완전 수, 부활 수, 확정, 거룩, 삼각형)

3은 1 다음의 최초의 홀수이자 2에서 1이 더해진 수입니다.
1은 점을 이루고, 2는 선분을 이룬다면 삼각형은 최초의 도형(면)을 이룹니다.
삼각형은 뒤틀릴 수 없는 완벽한 구조로 기계나 건축에서 많이 이용됩니다.
3은 완전함을 의미하는데 과거 현재 미래, 원인 과정 결과, 처음 중간 마지막 등을 표시할 수 있습니다.

요일 5/6~8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니라. 증거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성령은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시라.또 땅에서 증거하는 것도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요, 이 셋은 하나 안에서 일치하느니라.

성경에서 3은 하늘 수 또는 하늘에서 완전 수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이 세 분은 지위와 능력에 있어서 동등하시고 같은 본성을 소유하고 계시며 서로가 서로 안에 거함으로써 하나 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으로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식입니다.
하늘나라를 흉내내기를 좋아하는 사탄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방해 비슷한 이집트 바빌론 인도 그리스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출애굽기 25/31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들되 두들겨서 만들고 그 대와 가지들과 잔들과 둥근 꽃받침들과 꽃들을 하나로 만들고 여섯 가지가 등잔대 옆에서 나오게 하되 세 가지는 이쪽에서 나오게 하고 세 가지는 저쪽에서 나오게 하며 성막에 쓰이는 금등잔대는 금덩어리를 두들겨서 만드는데 여섯가지 중 세가지 씩 양쪽에서 나게 합니다.
성경에서 3은 이집트에서 흑암이 드리운 3일 기간,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보낸 3일, 예수님에게 경배하러 온 3명의 동방박사,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이전에 무덤 속에 계셨던 3일 등에서 나타납니다.
3은 어두움과 사망에서 벗어나 빛과 생명으로 인도되는 부활의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3 그 위에는 스랍들이 서 있는데 저마다 여섯 날개를 가졌더라. 그가 두 날개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자기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날며 그들이 서로 크게 외쳐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계시록 4/8 네 짐승이 저마다 자기 둘레에 여섯 날개를 가졌고 안쪽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전능자여,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이시라, 하고 3은 뭔가 확실히 결정짓는데 법정이나 의회에서 의사봉을 3번 두드리고, 가위바위보도 3번으로 결정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호위하는 스랍과 하나님을 호위하는 케루빔은 3번 거룩하다고 함으로써 거룩하심을 확정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 부인함으로써 변명의 여지가 없어졌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사랑하는지를 3번 물어보셨습니다.

예수님이 무덤 속에 3일 동안 계신 것은 죽음에 대한 확정 즉 장사됨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예수님의 죽으심만 중시하고 장사됨은 간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지 3일이 지나 부패된 시체는 다시 살아나지 않기 때문에 땅 속에 장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해 연합해 거듭났다고 자부하는 그리스도인이 다시 죄를 짓고 배교하며 세상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는 죽음에 연합함은 단번에 되지만 장사됨은 일정기간 동안 무덤 속에서 옛사람이 완전히 소멸되기까지 누워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색의 3원색은 빨강 노랑 파랑이고, 빛의 삼원색은 빨강 녹색 파랑입니다.
인간도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신과 인간과 동물(자연)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는 메시야인데 이스라엘의 왕과 대언자(선지자)와 대제사장 역할을 하셨습니다.

마태 27/38 그때에 그분과 함께 두 명의 강도가 십자가에 못박히니 하나는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왼편에 있더라.

마태 25/33 그리하여 양들은 그의 오른편에, 염소들은 그의 왼편에 세워 두고

스카랴 3/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對敵)하는 것을 그분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예수님과 함께 두명의 강도가 좌우에 못박혔는데 한명은 회개를 했고, 다른 한명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도 의인(양)은 예수님 오른편에 있을 것이고, 죄인(염소)은 예수님의 왼편에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심판자를 정점으로 의인은 그의 오른편에 죄인은 그의 왼편에 서게 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주 앞에 섰을 때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선 이유는 사탄의 위치가 주가 보시기에 왼쪽이기 때문입니다.

E. 4 (땅의 완전수, 창조, 물질, 질서, 안정, 방향, 세상, 실용, 방어, 사각형)

4는 하늘의 완전수 3에 1이 더해진 수로 땅의 완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4는 땅에서의 4방향인 동서남북을 의미하고, 시간적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을 나타냅니다.
1이 점, 2가 선, 3이 면을 나타낸다면 4는 입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4는 질서 정연한 것을 의미해서 도시를 바둑판 모양(사각형)으로 설계하고, 시도 4행시를 짓습니다.

성막과 성소도 사각형으로 짓고, 성막 문을 동쪽으로 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책상 걸상 장롱 침대 문 책 모니터 컴퓨터 등이 대부분 사각형을 바탕으로한 직육면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성을 쌓을 때에도 주로 사각형으로 짓고, 주로 각 방향에 1개씩 4개의 문을 만듭니다.
구원 받은 성도가 마지막 때 가게 될 새 예루살렘도 정육면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에덴에 흐르는 4개의 강이 나오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호위하는 4명의 케루빔과 세라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서술한 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가지의 복음서입니다.
성경에 땅의 사방, 제단의 사면, 온 세상을 의미할 때 4 방향을 이용합니다.
말세의 4 천사도 땅의 4 모퉁이에서 땅의 사방의 4 바람을 붙잡아 바람이 땅이나 바다에 불지 못하게 합니다.

* 4와 관련된 성경구절

창세기 2/10 강 하나가 에덴에서 나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개의 근원이 되었으니

레위기 1/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신명기 6/14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이사야 11/12 또 그분께서 민족들을 향하여 기(旗)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의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함께 모으시리니

마태 24/31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자기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의 네 바람으로부터 함께 모으리라.

계시록 4/6 왕좌 앞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왕좌 한가운데와 왕좌 둘레에 네 짐승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계시록 7/1 이것들 후에 내가 보니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사방의 네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어떤 나무에도 불지 못하게 하더라.

F. 5 (결합, 은혜, 영적, 초월, 오감, 절반의 완성, 오각형)

5는 2와 3을 더한 수이거나 4에 1이 더해진 수입니다.
2는 여성적인 수이고 3은 남성적인 수이므로 5는 결합 내지는 완전을 의미하는 수입니다.
또한 땅의 완성수 4에 1이 더해진 수이므로 초월 내지는 영적인 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직각 삼각형에서 밑변과 높이가 3과 4라면 빗변은 5가 됩니다.

성경에서 5는 모세오경 즉 구약을 의미하고 4는 사대복음 즉 신약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5는 은혜의 수로 많이 쓰이는데 누가복음 7장에는 500 데나리온과 50 데나리온 빚진자의 은혜로 탕감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5번째 7일인 오순절에 은혜로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절에 베데스다 연못에 다섯 주랑(柱廊, 여러 개의 기둥만 나란히 서 있고 벽이 없는 복도)이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5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이라 하여 음양으로부터 오행(木火土金水)이 나와 우주만물의 구성원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자연계에 5가지로 이루어진 요소로는 인간의 오감(시각, 후각, 미각, 청각, 촉각)이 있습니다.5는 우리 한 손의 다섯 손가락이나 한 발의 다섯 발가락으로 친숙하기도 합니다.
식물에 있어서 꽃은 대개 4개의 잎을 갖고 있고, 열매는 대개 5개의 씨방을 갖고 있습니다.
5는 완성수 10의 절반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절반의 완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 다섯과 관련된 성경구절

창세기 43/34 요셉이 자기 앞에서 음식을 취해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창세기 45/22 또 그들에게 다 각각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 개와 옷 다섯 벌을 주고 출애굽기 26/37 시팀나무로 그 현수막을 걸 기둥 다섯 개를 만들어 금으로 입히고 그 갈고리들도 금으로 만들며 또 그 기둥들에 쓰기 위해 밑받침 다섯 개를 놋으로 부어 만들지니라.

출애굽기 36/31 그가 또 시팀나무로 가로지르는 막대기들을 만들었으니 곧 성막의 이쪽 면의 널빤지들에 쓰기 위해 다섯 개요,성막의 저쪽 면의 널빤지들에 쓰기 위해 다섯 개요, 서쪽을 향한 성막 면들의 널빤지들에 쓰기 위해 다섯 개더라.

민수기 3/46~47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 난 자가 레위 사람보다 이백칠십삼 명이 더 많은즉 그들을 대속(代贖)하기 위하여 너는 그 머리 수대로 오 세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에 따라 취할지니 (일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민수기 7/17 화평 헌물의 희생물로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 년 된 어린양 다섯 마리라. 
이것은 아미나답의 아들 나손이 드린 헌물이었더라.

왕상 7/39 또 그가 물두멍 열 개를 놋으로 만들었는데 물두멍마다 사십 바스를 담게 하였으며 각 물두멍의 크기를 사 큐빗으로 하고 열 개의 받침대 위에 각각 물두멍을 한 개씩 놓으니라.또한 받침대 다섯 개는 그 집의 오른쪽에 두었고 다섯 개는 그 집의 왼쪽에 두었으며 그 집의 오른쪽에 동남쪽을 향하여 바다를 두었더라.

왕상 7/49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 앞 오른쪽과 왼쪽에 다섯 개씩 둘 순금 등잔대와 또 금으로 된 꽃과 등잔과 부집게며 대하 4/8 또 상 열 개를 만들어 성전 안에 두었으니 오른쪽에 다섯 개요, 왼쪽에 다섯 개며 또 금으로 대야 백 개를 만들었더라.

마태 14/19 무리에게 명령하사 잔디에 앉게 하시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취하사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축복하시고 나누어 자기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누가 7/41~42 그분께서 이르시되, 빚을 준 어떤 사람에게 빚진 사람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는데 그들이 전혀 갚을 것이 없으므로 빚 준 사람이 두 사람 다 너그러이 면제해 주었나니 그런즉 말해 보아라. 두 사람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하시니 누가 12/6 참새 다섯 마리가 이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중의 하나도 잊혀지는 일이 없느니라.

누가 12/52 이는 이제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하며 둘이 셋과 할 것임이니 요한 4/18 이는 네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니 그 점에서 네 말이 참되도다.

요한 5/2 예루살렘의 양(洋) 시장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연못이 있는데 거기에 주랑(柱廊) 다섯 개가 있고 고전 14/19 그러나 교회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만 마디 말을 하느니 차라리 이해하면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내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도 가르치리라.

계시록 9/5 또 그들을 죽이지는 말고 다섯 달 동안 고통만 받게 하라는 명령을 그것들에게 주시니 그것들이 주는 고통은 마치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주는 고통과 같더라.

G. 6 (땅의 완성수, 창조의 수, 구원의 수, 사람의 수, 불완전, 일하는 기간, 육각형)

6은 1+2+3의 값이자 1×2×3의 값이자 3×2의 값입니다.
6은 완성수로 하나님은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셨고, 6번째 날에 짐승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도형으로는 물과 탄소의 결정인 6각형이 있고, 정육면체도 6개의 면이 있습니다.
6은 시간의 표시 단위인 24시 60분 60초와 관련이 있고, 각도 표시 단위인 360도 60도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6번째 날인 금요일에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운명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이 신구약 총 66권이므로 6은 인간의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인 가나 혼인잔치에는 6개의 항아리가 나옵니다.
6은 일하는 수로 구약시대에 농사도 6년 동안 짓고 1년은 쉬며, 노예도 6년 동안 부리다가 7년째 해방시켜 줍니다.

* 여섯과 관련된 성경구절

창세기 30/20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께서 내게 좋은 지참금을 주셨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와 함께 거하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출애굽기 23/10~11 너는 여섯 해 동안 네 땅에 씨를 뿌려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으로 하여금 안식하게 하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 가운데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들이 남긴 것은 들의 짐승들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올리브원도 그와 같이 할지니라.

출애굽기 25/32 여섯 가지가 등잔대 옆에서 나오게 하되 세 가지는 이쪽에서 나오게 하고 세 가지는 저쪽에서 나오게 하며 민수기 7/3 그들이 주 앞에 드린 헌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니 통치자 두 명에 수레가 한 대씩이요, 각 사람에 소가 한 마리씩이라. 그들이 그것들을 장막 앞에 가져온지라.

민수기 35/13 너희가 줄 도시들 중에서 여섯 도시를 도피성으로 만들되 신명기 15/12 네 형제 곧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려서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그를 놓아주어 너를 떠나 자유롭게 가게 할 것이요,

여호수아 6/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도시를 에워싸고 도시 주위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할지니라.

룻기 3/17 또 룻이 말하기를 "그가 이 보리 여섯 되를 내게 주며 말하기를 '네 시어머니에게 빈손으로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더라.

역대상 20/6 또 가드에서 싸움이 있었는데 거기에 키 큰 자 하나가 있더니 그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모두 스물네 개로 손과 발마다 여섯 개씩 있더라. 그도 거인의 아들이었더라.

욥기 5/19 그분께서 여섯 가지 환난 중에서 너를 건지시며 참으로 일곱 가지 환난 중에서도 재앙이 결코 네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시고 에스겔 46/4 안식일에 통치자가 주께 드리는 번제 헌물은 흠 없는 어린양 여섯 마리와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라.

요한 2/6 거기에 유대인들의 정결하게 하는 관례(慣例)에 따라 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더라.

계시록 4/8 네 짐승이 저마다 자기 둘레에 여섯 날개를 가졌고 안쪽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전능자여,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이시라, 하고

H. 7 (완전수, 땅의 완전, 안식, 거룩, 성취, 언약, 예수님의 수, 완전한 구원 수, 인생의 수)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7은 3(하늘 수)와 4(땅 수)가 합쳐진 것으로 완전 수를 의미합니다.
7은 또한 6에 1이 더해진 수로 6일 동안 일하고 하루 쉼으로써 완전한 기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땅에 7로 이루어진 요소로는 음(도레미파솔라시), 색(빨주노초파남보), 주(일월화수목금토) 등입니다.
여성의 생리주기도 4×7=28일로 7의 배수이며, 7일 단위로 생체주기가 바뀝니다.

7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계시록에서는 7개의 별, 7 교회, 7 등잔, 7 영, 7 눈, 7 봉인, 7 나팔, 7 대접, 7 뿔 등이 나옵니다.
인류 역사 6000년 이후 말세가 되면 천년 동안 예수님이 이땅에서 통치하시므로 도합 7000년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7은 예수님 또는 구원과 많이 관련되므로 예수님의 수 또는 완전한 구원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7년째 이가 다시 나고, 14년에 사춘기가 시작되며, 21년에 성장을 멈추고, 평균수명이 70년이므로 7은 인생의 수입니다.

* 일곱과 관련된 성경구절

창세기 2/2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일을 마치시고 자신이 만든 모든 일을 떠나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세기 4/15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런 까닭에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배로 보복을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아무도 그를 찾아 죽이지 못하게 하시니라.

창세기 7/2~3 너는 모든 정결(淨潔)한 짐승 중에서 수컷과 그 암컷을 일곱 마리씩 취하고 또 정결하지 않은 짐승 중에서 수컷과그 암컷 두 마리를 취하며, 공중의 날짐승 중에서도 수컷과 암컷을 일곱 마리씩 취하여 씨가 온 지면에 살아 남게 하라.

창세기 21/30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는 네가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받을 것임이니 이로써 이것들이 내가 이 우물을 팠음에 대하여 내게 증거가 되리라, 하고

창세기 41/26 좋은 암소 일곱 마리는 일곱 해요, 또 좋은 이삭 일곱 개도 일곱 해니 이 꿈은 하나이니이다.

출애굽기 2/16 이제 미디안의 제사장에게 딸 일곱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자기 아버지의 양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출애굽기 12/15 너희는 칠 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그 첫째 날에 너희 집에서 누룩을 제거할지니 이는 누구든지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누룩 있는 빵을 먹는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임이라.

출애굽기 20/10 일곱째 날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거하는 나그네나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애굽기 21/2 네가 히브리 사람 종을 사면 그가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거저 나가 자유로운 몸이 될 것이며

출애굽기 23/11 일곱째 해에는 그 땅으로 하여금 안식하게 하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 가운데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들이 남긴 것은 들의 짐승들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올리브원도 그와 같이 할지니라.

출애굽기 24/16 주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덮더니 일곱째 날에 그분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애굽기 25/37 너는 그 등잔대의 등잔 일곱 개를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등잔들에 불을 붙여 그 맞은편으로 빛을 발하게 할지니라.

레위기 4/6 손가락을 그 피에 담그고 주 앞 곧 성소의 휘장 앞에서 그 피를 일곱 번 뿌릴 것이며

레위기 8/11 또 제단 위에 일곱 번 뿌리고 또 그 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그것들을 거룩히 구별하고 레위기 13/27 일곱째 날에 제사장이 그를 살펴보고 만일 병이 넓게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선언할지니 이것은 나병이니라.

레위기 14/51 백향목과 우슬초와 주홍색 실과 살아 있는 새를 가져다가 죽인 새의 피와 흐르는 물에 그것들을 담가 그 집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레위기 23/16 일곱번째 안식일 다음 날까지 오십 일을 세어 새 음식 헌물을 주께 드리되

레위기 23/27 또한 이 일곱째 달의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거룩한 집회라. 너희는 너희 혼을 괴롭게 하며 불로 예비하는 헌물을 주께 드리고 레위기 23/3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일곱째 달의 십오일은 장막절이니 주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지니라.

레위기 25/8 너는 일곱 안식년을 셀지니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일곱 안식년의 기간이 사십구 년이라.

레위기 26/18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면 너희 죄들로 인하여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벌하리라.

민수기 6/9 어떤 이가 갑자기 그 옆에서 죽어 거룩히 구분하여 드린 그의 머리를 더럽히거든 그는 자기를 정결하게 하는 날에 자기 머리를 밀되 일곱째 날에 밀 것이며 민수기 19/19 그 정결한 자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그 부정한 자들에게 뿌리고 일곱째 날에는 자기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목욕할지니 그리하면 저녁때에 정결하게 되리라.

민수기 28/11 너희의 달들이 시작되는 때에는 어린 수소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양 일곱 마리로 주께 번제 헌물을 드리되

민수기 31/24 너희는 일곱째 날에 옷을 빨고 정결하게 된 뒤에 진영에 들어올지니라.

신명기 7/1 주 네 하나님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소유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곧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등 너보다 크고 힘이 강한 일곱 족속을 내쫓으실 때에 신명기 15/1 너는 칠 년이 끝날 때마다 면제(免除)할지니

신명기 15/12 네 형제 곧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려서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그를 놓아주어 너를 떠나 자유롭게 가게 할 것이요,

신명기 16/3 그것과 아울러 누룩 있는 빵을 먹지 말고 칠 일 동안은 누룩 없는 빵 곧 고난의 빵을 그것과 아울러 먹을지니라. 이는 네가 이집트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로써 네 평생 동안 네가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을 항상 기억할 것이니라.

신명기 16/15 주 네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주 네 하나님을 위하여 엄숙한 명절을 지키라. 이는 주 네 하나님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의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임이니 그러므로 너는 반드시 기뻐할지니라.

신명기 28/7 네 원수들이 일어나서 너를 치려 하면 주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수아 6/4 일곱 명의 제사장은 일곱 개의 양뿔 나팔을 들고 언약궤 앞에서 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너희가 도시를 일곱 번 돌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여호수아 18/5 그들이 그 땅을 일곱 몫으로 나누되 유다는 남쪽으로 자기 지역 안에 거하고 요셉의 집은 북쪽으로 자기 지역 안에 거하니 사사기 16/7 삼손이 그녀에게 이르되, 말린 적이 없는 푸른 버드나무 가지 일곱 개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게 되어 다른 사람과 같게 되리라, 하니

룻기 4/15 이 아이는 네게 생명의 회복자가 되며 네 노년에 너를 봉양할 자가 되리니 이는 너를 사랑하며 네게 일곱 아들보다 더 나은 네 며느리가 이 아이를 낳았음이라, 하니라.

삼상 16/10 이새가 자기의 일곱 아들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삼하 12/18 일곱째 날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고하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보라,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 우리가 말하여도 왕이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거늘 아이가 죽은 것을 고하면 얼마나 자기 자신을 괴롭게 하리요? 하였음이라.

왕상 18/44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이르되, 보소서, 바다에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올라가서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준비하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왕하 4/35 이에 엘리사가 돌아서서 집안에서 이리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가 자기 몸을 펴서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하고 눈을 뜨므로 왕하 5/10 엘리사가 사자(使者)를 그에게 보내어 이르되, 가서 요르단 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그리하면 네 살이 다시 나와 네가 깨끗하리라, 하니라.

역대하 13/9 너희가 아론의 아들들 곧 주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쫓아내고 너희를 위하여 다른 땅의 민족들의 풍속을 따라 제사장들을 세우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린 수소 한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가지고 와서 자기 자신을 거룩히 구분하기만 하면 신들이 아닌 자들의 제사장이 될 수 있도다.

역대하 29/21 수소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와 어린양 일곱 마리와 숫염소 일곱 마리를 가져다가 왕국과 성소와 유다를 위하여 죄 헌물로 삼고 아론의 아들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주의 제단 위에 드리게 하니 에스라 3/1 이스라엘 자손이 여러 도시에 거하다가 일곱째 달이 이르매 백성이 한 사람같이 예루살렘에 함께 모이니

느헤미야 8/14 율법에 기록된 것을 찾은즉 주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명절에 초막(草幕)에 거할지니라 하였고

느헤미야 10/31 혹시 이 땅의 백성이 안식일에 제품이나 양식을 가져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그들에게서 사지 아니하겠고 또 일곱째 해를 안식년으로 삼고 모든 빚 징수하는 일을 삼가리라 하였고

에스더 1/10 일곱째 날에 왕의 마음이 포도주로 인하여 즐거워졌을 때에 아하수에로 왕이 자기 눈앞에서 섬기는 일곱 명의 시종장 곧 므후만과 비스다와 하르보나와 빅다와 아박다와 세달과 가르가스에게 명령하되 욥기 5/19 그분께서 여섯 가지 환난 중에서 너를 건지시며 참으로 일곱 가지 환난 중에서도 재앙이 결코 네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시고 욥기 42/13 또 그가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더라.

시편 12/6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단련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시편 79/12 오 주여, 또한 우리의 이웃들이 주를 모욕한 그 모욕을 그들의 품에 일곱 배나 갚으소서.

시편 119/164 주의 의로운 판단들로 인하여 내가 하루에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잠언 9/1 지혜가 자기 집을 짓고 자기의 일곱 기둥을 깎아 만들며 잠언 24/16 이는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사악한 자는 넘어져서 해악에 빠질 것임이니라.

잠언 26/25 그가 좋게 말할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의 마음 속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기 때문이니라.

전도서 11/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몫을 나누어 줄지니 이는 무슨 재앙이 땅 위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이사야 4/1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들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의 빵을 먹으며 우리의 옷을 입으리니 다만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하여 우리의 수치를 없애게 하라, 하리라.

이사야 30/26 또 주께서 자신의 백성의 터진 곳을 싸매시고 그들의 맞은 곳을 치유(治癒)하시는 날에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나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에스겔 40/22 그 창들과 둥근 천장들과 종려나무들의 치수는 동쪽을 바라보는 문의 치수와 같으며 그 문에 이르려면 일곱 계단을 올라가야 하고 그 계단들 앞에 그 둥근 천장들이 있으며

다니엘 3/19 이에 느부갓네살이 분노가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해 자기의 얼굴 모습을 바꾸더라. 그러므로  그가 명령하여 말하되 그 용광로를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라 하고 다니엘 4/16 또 그의 마음을 바꾸어 사람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게 하고 짐승의 마음을 그에게 주며 일곱 때가 그의 위로 지나가게 하라.

다니엘 9/25 그러므로 너는 알고 깨달을지니라.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나가는 때로부터 통치자 메시아에  이르기까지 일곱 주(weeks)와 육십이 주가 있을 것이요, 이 곤란한 때에 거리와 성벽이 다시 건축될 것이며

아모스 5/8 너희는 일곱 별과 오리온을 만드시고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며 낮을 밤으로 어둡게 하시고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그분을 찾을지니 그분의 이름은 주시니라.

미가 5/5 이 사람은 평강이 되리라. 그 앗시리아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 우리의 궁궐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명의 목자와 여덟 명의 우두머리를 일으켜 그를 치리니

스카랴 3/9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내가 여호수아 앞에 놓은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보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불법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스카랴 4/10 작은 일들의 날을 멸시한 자가 누구냐? 이는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과 그 일곱 눈이 함께 있음을 보고  기뻐할 것임이니 이 일곱 눈은 이리저리 온 땅을 두루 달리는 주의 눈이라, 하셨느니라.

마태 12/45 이에 가서 자기보다 더 사악한 다른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쁘게 되니라. 이 사악한 세대도 참으로 그와 같이 되리라.

마태 18/2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까지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가 16/9 이제 예수님께서 주(週)의 첫날에 일찍 일어나신 뒤에 전에 일곱 마귀를 내쫓아 주신 막달라 사람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시니

요한 4/52 이에 그가 낫기 시작한 시각을 물은즉 그들이 말하되, 어제 일곱 시에 열병이 떠났나이다, 하매

사도행전 6/3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는 너희 가운데서 정직하다는 평판이 있고 성령님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라.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히브리서 4/4 이는 그분께서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느 곳에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자신의 모든 일을 떠나 안식하셨느니라, 하셨으며

유다서 1/14 아담으로부터 일곱번째 사람인 에녹도 이들에 대하여 대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자신의 수만(數萬) 성도와 함께 오시나니

계시록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왕좌 앞에 계신 일곱 영과

계시록 1/13 이 일곱 등잔대의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으신 이가 발까지 내려온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계시는데

계시록 1/16 그분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있으며 그분의 입에서는 양날 달린 날카로운 검이 나오고 그분의 용모(容貌)는 해가 세차게 빛나는 것 같더라.

계시록 1/20 곧 네가 본바 내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과 일곱 금 등잔대의 신비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네가 보는 일곱 금 등잔대는 일곱 교회니라.

계시록 3/1 사데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은 자로다.

계시록 4/5 그 왕좌로부터 번개들과 천둥들과 음성들이 나오고 왕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타고 있으니 이것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계시록 5/1 또 내가 보매 왕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과 뒷면에 글이 적혀 있고 일곱 봉인(封印)으로 봉인되어 있더라.

계시록 5/6 내가 또 보니, 보라, 왕좌와 네 짐승의 한가운데와 장로들의 한가운데에 어린양께서 서 계시는데 전에 죽임을 당하신 것 같더라. 그분께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계시록 8/2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더니 그들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계시록 10/4 일곱 천둥이 음성을 내어 말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내게 이르기를, 일곱 천둥이 말한 것들을 봉인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계시록 10/7 일곱째 천사가 음성을 내는 날들 곧 그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 대언자들에게 밝히 드러내신 것같이 하나님의 신비가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계시록 12/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나타나니, 보라, 큰 붉은 용이 있는데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머리들 위에 일곱 왕관이 있더니

계시록 13/1 내가 바다의 모래 위에 서서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올라오는데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뿔들 위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 위에는 신성 모독하는 이름이 있더라.

계시록 15/7 네 짐승들 중의 하나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일곱 금 대접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계시록 17/3 영(靈) 안에서 나를 이끌어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한 여자가 주홍색 짐승 위에 탔는데 그 짐승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로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계시록 17/9 지혜 있는 생각이 여기에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그 여자가 앉아 있는 일곱 산이라.

계시록 17/10~11 또 일곱 왕이 있으니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으며 다른 하나는 아직 오지 아니하였으되 오면 반드시 
잠시동안 머물리라.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는 그 짐승은 여덟번째니 그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I. 8 (부활, 할례, 새 출발, 새 생명, 더 높은 차원, 하늘에서의 완전, 영적인 세계, 승리, 모든 방면)

8은 땅의 완전 수 7에 1이 더해져 이 세상을 초월한 하늘(영적인 세계)의 완전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7음계의 '도레미파솔라시'에서 한음이 더해지면 한 옥타브(차원)가 높은 새로운 도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8가지 성품이 필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첫째 날인 일요일(주일, 원래 일요일이 시작일임)에 부활하셔서 신약시대에 영적인 세계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해 주의 첫날인 일요일(8번째 날)에 모여 떡을 떼었습니다.
주일(일요일)은구약시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기억하기 위한 안식일(토요일)과는 다릅니다.

구약시대 율법에 의하면 아들이 태어나면 여덟째 날에 아이의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았는데 이는 육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7이 예수님의 수이고 천년왕국에 해당한다면 8은 하나님 아버지의 수이고 새하늘과 새땅과 새예루살렘에 해당합니다.
동양에서  팔방(八方)은 동·서·남·북의 사방(四方)에 북동·북서·남동·남서의 사우(四隅)을 더한 여덟 방위를 나타냅니다.
8이 가진 의미로는 부활, 할례, 새 출발, 새 생명, 더 높은 차원, 하늘에서의 완전, 영적인 세계, 승리, 모든 방면 등입니다.

* 여덟과 관련된 성경구절

창세기 17/12 너희 대대로 모든 사내아이는 집에서 태어난 자든지 또는 네 씨에서 난 자가 아니라 타국인에게서 돈으로 산 
자든지 다 난 지 팔 일이 되면 너희 가운데서 할례를 받을지니라.

출애굽기 22/29~30 너는 네 익은 과일과 네 즙의 처음 것 드리기를 더디 하지 말며 네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을 내게 줄지니라.네 소와 양도 그와 같이 하되 칠 일 동안은 그 어미와 함께 있게 하고 여덟째 날에 내게 줄지니라.

출애굽기 26/25 그것들은 널빤지 여덟 개와 은으로 만든 밑받침 열 여섯 개니 이 널빤지 밑에도 두 개의 밑받침이요, 저 널빤지 밑에도 두 개의 밑받침이니라.

레위기 12/3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包皮) 살을 베어 할례를 베풀 것이요,

레위기 14/10 여덟째 날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또 음식 헌물로 고운 밀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을 섞은 것과 기름 일 로그를 취할 것이요,

레위기 22/27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태어나거든 칠 일 동안 그 어미 밑에 있게 하라. 여덟째 날 이후에는 불로 예비하는 헌물로 주께 드리면 내가 받으리라.

역대하 7/8~9 또 그때에 솔로몬과 그와 함께한 온 이스라엘 곧 하맛 입구에서부터 이집트 강까지의 큰 회중이 칠 일 동안 명절을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그들이 엄숙한 집회를 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레 동안 제단을 봉헌하고 또 이레 동안 이 명절을 지켰음이더라.

느헤미야 8/18 또 에스라는 첫째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들은 칠 일 동안 명절을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대로 엄숙한 집회를 열었느니라.

에스겔 40/34 그 둥근 천장들은 바깥뜰을 향하였고 그 기둥들 위에 종려나무들이 이쪽 저쪽에 있으며 그 문으로 올라가는 데에는 여덟 계단이 있더라.

에스겔 40/41 그 문 옆으로 이쪽에 상 네 개가 있고 저쪽에 상 네 개가 있어 사람들이 그 여덟 개의 상 위에서 자기들의 희생물을 잡았더라.

마태 28/1 안식일이 끝나고 주(週)의 첫날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돌무덤을 보러 가매요한 20/26  여드레가 지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사 한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벧전 3/20 이 영들은 일찍이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곧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하던 자들이라. 방주 안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가 몇 안되니 곧 여덟 혼이라.

벧후 2/5 옛 세상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의 선포자인 여덟번째 사람 노아만 구원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 난해 구절

전도서 11/1~2 너는 네 빵을 물들 위에 던지라. 이는 여러 날 뒤에 네가 그것을 찾을 것임이니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몫을 나누어 줄지니 이는 무슨 재앙이 땅 위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계시록 17/15 또 그가 내게 이르되, 네가 본 물들 곧 음녀가 앉아 있는 물들은 백성들과 무리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니라.

마태 19/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寶貨)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거늘

누가 18/22 이때에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성경에서 물들은 사람들을 상징하는데 전도서에서 빵을 물들 위에 던지라는 것은 먹을 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의미입니다.그리하면 하늘에 보화가 쌓여 영원히 보상 받을 것이므로 나누어진 것들을 다시 찾을 것이란 말입니다.
일곱(땅의 완전 수)이나 여덟(하늘의 완전 수)에게 몫을 나누어주라는 것은 구원의 완성인 사랑(구제)과 생명(선교)에 재물을사용하라고 한 것으로 이같이 하면 개인적 재앙이나 말세의 대재앙으로부터 피하게 될 것입니다.

미가 5/5 이 사람은 평강이 되리라. 그 앗시리아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 우리의 궁궐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명의 목자와 여덟 명의 우두머리를 일으켜 그를 치리니
(And this man shall be the peace, when the Assyrian shall come into our land : and when he shall tread in our palaces,then shall we raise against him seven shepherds, and eight principal men.)

미가서 5장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는 이스라엘의 구원주 메시야 즉 예수님에 대한 장입니다.
그런데 앗시리아 사람이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궁궐들을 밟을 때에 우리가 일곱 명의 목자와 여덟 명의 우두머리를 일으켜 그를 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민족의 침입을 받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면 항상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민족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일곱의 완성은 목자이고, 여덟의 완성은 왕입니다.
목자와 왕은 모두 예수님의 역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선한 목자이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십니다.
이는 구원 받은 성도를 외부세력(사탄 환난 등)이 공격할 때 우리가 목자이자 왕이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삼상 16/10~12 이새가 자기의 일곱 아들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하니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하니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이는 그가 여기에 오기 전까지 우리가 앉지 아니할 것임이라, 하니 이에 그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이제 그는 혈색이 좋으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고 보기에 잘생겼더라. 주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니라.

삼상 17/12 이제 다윗은 베들레헴유다의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자의 아들이었더니 이새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으며 그는 사울 시대에 사람들 가운데 늙은 사람으로 통하였더라.

사울이 배역하고 나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왕을 찾기 위해 이새의 집을 방문해 그의 아들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였으나 하나님은 외모보다 마음을 보시기 때문에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양을 지키고 있던 막내를 데려왔는데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니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게 됩니다.
따라서 이새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일곱은 땅에 속한 사람이었고 한 명 다윗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계시록 12/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나타나니, 보라, 큰 붉은 용이 있는데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머리들 위에 일곱 왕관이 있더니

계시록 13/1 내가 바다의 모래 위에 서서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올라오는데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뿔들 위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 위에는 신성 모독하는 이름이 있더라.

계시록 17/11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는 그 짐승은 여덟번째니 그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6, 7, 8, 10 등이 완성 내지는 완전 수인데 이는 선의 완전 수이자 악의 완전 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말세의 용과 짐승의 외모에 일곱 머리, 열 뿔, 일곱 왕관, 열 왕관 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악의 결정체인 짐승(적그리스도)은 여덟 번째이자 일곱 중에 속한 자란 것은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의 악의 왕이란 뜻입니다.
말세가 되면 선한 알곡과 열매가 영글듯이 악의 세력도 절정에 달해 가시와 엉겅퀴와 쭉정이와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J. 9 (신성, 불완전, 부족)

9는 3의 제곱이자 10에서 1 부족한 수입니다.
따라서 9는 하늘 수 3이 두 번 곱해졌으므로 신성한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3시에 십자가에 달려 6시부터 날이 어두워지고 9시에 돌아가셨으니 3의 배수와 관련된 수를 기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10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었는데 1명만 돌아와 감사를 표시하고 나머지는 자기 길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9는 불완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 아홉과 관련된 성경구절

레위기 25/22 너희가 여덟째 해에는 씨를 뿌리려니와 묵은 열매를 먹을 것이며 아홉째 해 곧 그 열매들이 들어오기까지 묵은 열매를 먹으리라.

민수기 29/26 다섯째 날에는 수소 아홉 마리와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양 열네 마리를 드릴 것이며

민수기 34/13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것은 너희가 제비뽑아 상속할 땅이라. 주께서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라 명령하셨나니

마태 18/12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 두고 산 속에 들어가 길 잃은 그 양을 찾지 아니하겠느냐?

마태 27/45~46 이제 여섯 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 아홉 시까지 계속되더니 아홉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것은 곧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누가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사람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으로 인하여 더 기쁨이 있으리라.

누가 17/17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그 아홉 사람은 어디 있느냐?

사도행전 3/1 이제 아홉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성전으로 올라갈 때에

사도행전 10/3 하루는 아홉시쯤 되어 환상 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는 것을 분명히 보매

갈라디아서 5/22~24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그러한 것을 반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K. 10 (서열적인 완전 수, 명령, 행함, 기본 단위, 기본 조직, 모든 존재, 충만)

10은 1+2+3+4=10 이 된 수로 서열적(순서적)으로 완전을 의미하고, 우리가 사용하는 십진수의 기반이 됩니다.
인간은 10개의 손가락과 10개의 발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에 10을 단위로 셈하는 것이 친숙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10개의 명령인 10계명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할 때에도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을 둠으로써 10을 단위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 때도 열 드라크마, 십 므나 등 10을 단위로 사용하셨습니다.

* 10과 관련된 성경구절

창세기 18/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오 주여 노하지 마시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열 명을 찾으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하니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열 명으로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출애굽기 18/21 그대는 또 온 백성 중에서 능력이 있는 자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고 탐욕을 미워하는 자들을 예비하고 백성 위에 세워 천 명의 치리자와 백 명의 치리자와 쉰 명의 치리자와 열 명의 치리자로 삼아

출애굽기 26/1 너는 또한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아마 실과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로 짠 열 개의 앙장(仰帳)으로 만들며 정교한 솜씨로 만든 그룹들을 수놓아 앙장들을 만들지니

신명기 4/13 주께서 자신의 언약을 너희에게 밝히 보여 주시고 그것을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열 가지 명령이며 그분께서 두 돌판에 그것들을 친히 쓰셨느니라.

왕상 7/24 그 가장자리 밑에는 돌아가며 둥근 장식들이 있는데 일 큐빗마다 열 개씩 있어서 그 바다를 둘렀는데 이 둥근 장식들은 바다를 부어 만들 때에 두 줄로 부어 만든 것이더라.

왕상 7/27 또 그가 놋으로 받침대 열 개를 만들었으니 각 받침대의 길이가 사 큐빗이요, 넓이가 사 큐빗이요, 높이가 삼 큐빗이라.

왕상 7/38 또 그가 물두멍 열 개를 놋으로 만들었는데 물두멍마다 사십 바스를 담게 하였으며 각 물두멍의 크기를 사 큐빗으로 하고 열 개의 받침대 위에 각각 물두멍을 한 개씩 놓으니라.

역대하 4/7 또 그가 등잔대의 형태에 따라 금으로 등잔대 열 개를 만들어 성전 안에 두었으니 왼쪽에 다섯 개요, 오른쪽에 다섯 개며 대하 4/8 또 상 열 개를 만들어 성전 안에 두었으니 오른쪽에 다섯 개요, 왼쪽에 다섯 개며 또 금으로 대야 백 개를 만들었더라.

전도서 7/19 지혜가 지혜로운 자를 도시 안에 있는 열 명의 용사보다 더 강하게 하나니

누가 15/8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개가 있는데 한 개를 잃어버리면 등잔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17/12~13 그분께서 어떤 마을로 들어가시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을 만나 멀찍이 떨어져 서서 목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님이여,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거늘

누가 19/13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 십 므나를 건네주며 이르되, 내가 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L. 11 (부족한 조직의 수, 심판의 수, 긴박함, 말세)

11은 완벽한 조직의 수인 12에서 1이 부족한 수입니다.
따라서 유다가 배신해서 제자가 11명으로 줄었을 때 제비뽑기로 맛디아를 충원해 12명의 제자를 채웠습니다.
11은 또한 12시간을 완성으로 보았을 때 1시간 전으로 마지막 때, 말세, 긴박함 등을 의미합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보면 밤이 12시간이고 낮이 12시간이므로 11은 시대가 바뀌기 전 심판이 임박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 관련문서 : 신비의 숫자 11과 세계무역센터 폭파

* 11과 관련된 성경구절

창세기 32/22 그 밤에 그가 일어나 자기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여울을 건너더니

창세기 37/9 요셉이 또 다른 꿈을 꾸고 그 꿈을 자기 형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경의를 표하더이다, 하니라.

출애굽기 26/7 너는 염소털로 앙장(仰帳)들을 만들어 성막을 덮는 덮개가 되게 하되 열한 개의 앙장을 만들지니라.

민수기 29/20 셋째 날에는 수소 열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양 열네 마리를 드릴 것이며

마태 20/6 또 열한 시쯤에 나가 보니 놀고 서 있는 다른 자들이 있으므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온 종일 여기서 
놀고 서 있느냐? 하니

마태 28/16 그 뒤에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께서 정해 주신 산에 들어가

마가 16/14 그 뒤에 열한 제자가 음식 앞에 앉았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것과 마음이 
완악(頑惡)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일어난 뒤에 자기를 본 자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아니하였음이더라.

누가 24/33 그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한 자들이 다 같이 모여

사도행전 1/26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맛디아 위에 떨어지니라. 이에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계수되니라.

사도행전 2/14 ¶ 그러나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아,이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M. 12 (통치 조직,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 12 지파, 12 사도, 전체적인 완전 수)

12는 3(하늘 수)와 4(땅 수)가 곱해진 수로 전체적인 완전 수를 의미합니다.
12는 또한 완성 수 6이 두 번 더해진 수로 하나님의 통치 조직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에서는 이스라엘 12지파와 12진설병이 있었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12제자와 새예루살렘의 12문이 있습니다.
실생활에서 12는 1년을 나누는 12개월에 쓰이고, 하루의 시간은 낮 12시간과 밤 12시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12와 관련된 성경구절

창세기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자기 아버지의 첩 빌하와 함께 누우니 이스라엘이 이것을 들었더라. 이제 야곱의 아들이 열두 명이니

창세기 42/32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들들로 열두 형제인데 한 명은 없어지고 막내는 이 날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창세기 49/28  이들이 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였더라. 이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되 각 사람의 축복에 따라 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출애굽기 24/4 모세가 주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산 밑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출애굽기 28/21 이 보석들에 이스라엘 자손의 이름이 있게 하되 그들의 이름에 따라 열두 개의 이름이 도장을 새긴 것같이 있게 할지니 곧 각 보석에 열두 지파에 따라 각각의 이름이 있게 할지니라.

레위기 24/5~6 너는 고운 밀가루를 취하여 납작한 빵 열두 개를 굽되 빵마다 십분의 이 에바로 하여 주 앞의 순수한 상 위에 한 줄에 여섯 개씩 두 줄로 진열하고

민수기 7/3 그들이 주 앞에 드린 헌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니 통치자 두 명에 수레가 한 대씩이요, 각 사람에 소가 한 마리씩이라. 그들이 그것들을 장막 앞에 가져온지라.

민수기 7/84 이것은 제단에 기름을 바르던 날에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이 드린 제단의 봉헌물이라. 은 쟁반이 열두 개요, 은 대접이 열두 개요, 금 숟가락이 열두 개니

민수기 7/86 또 향을 가득 담은 금 숟가락이 열두 개니 성소의 세겔에 따라 각각 무게가 십 세겔이라. 그 숟가락들의 금이 모두 백이십 세겔이요,

민수기 7/87 또 번제 헌물로 수소가 열두 마리요, 숫양이 열두 마리요, 일 년 된 어린양이 열두 마리요, 또 그 음식 헌물이며 죄 헌물로 염소 새끼가 열두 마리이고

민수기 17/6 이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매 그들의 통치자들이 각각 자기 조상 집에 따라 막대기를 하나씩 취하여 
그에게 주었으니 모두 열두 개더라. 그 중에 아론의 막대기가 있더라.

여호수아 4/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수아가 명령한 대로 행하되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수대로 요르단 강 한가운데서 열두 개의 돌을 취하여 자기들이 머물 장소로 가져다가 거기에 두었더라.

삼하 2/15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속한 베냐민의 열두 명과 다윗의 신하 가운데 열두 명이 그 수대로 일어나서 나아가니

왕상 4/7  솔로몬이 또 온 이스라엘 위에 열두 관원을 두매 이들이 왕과 왕실을 위하여 음식물을 예비하되 각 사람이 일 년 중 자기가 맡은 달에 양식을 예비하였으니

왕상 7/25 이 바다를 열두 마리 소 위에 놓았으니 세 마리는 북쪽을 향하였고 세 마리는 서쪽을 향하였으며 세 마리는 남쪽을 향하였고 세 마리는 동쪽을 향하였더라. 이 소들 위에 바다를 놓았고 이 소들의 뒷부분은 다 안으로 향하게 하였더라.

왕상 10/20 또 사자 열두 마리가 있어 그 여섯 계단의 이쪽과 저쪽에 섰으니 어떤 왕국에도 이같이 만든 것이 없었더라.

왕상 19/19 이에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리 소들을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의 곁을 지나가며 겉옷을 그 위에 던졌더니

마태 9/20 보라,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血漏症)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그분 뒤로 와서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니

마태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 부정한 영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내쫓으며 온갖 질환과 온갖 질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태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령하기를 마치시고 그들의 도시들에서 가르치시며 선포하시려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마태 14/20 그들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가득 거두었으며

마태 19/2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물을 새롭게 하는 때 곧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의 왕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태 26/53 너는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당장이라도 열두 군단(軍團)이 넘는 천사들을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

마가 5/42 이에 소녀가 즉시 일어나서 걸으니 이는 그녀의 나이가 열두 살이기 때문이더라.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마가 6/7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기 시작하시며 부정한 영들을 제압하는 권능을 주시고

누가 2/42 그분께서 열두 살 되셨을 때에 그들이 이 명절의 관례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요한 11/9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낮에 열두 시간이 있지 아니하냐? 사람이 만일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고

계시록 12/1 하늘에 큰 이적(異蹟)이 나타나니 한 여자가 해로 옷 입고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 위에는 열두 별의 왕관이 있더라.

계시록 21/12~14 그 도시에는 크고 높은 성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그 문들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으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 있으며 그 도시의 성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거기에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들이 있더라.

계시록 21/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그 도시의 거리는 순금인데 투명한 유리 같더라.

계시록 22/2 그 도시의 거리 한가운데와 강의 양쪽에는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내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그 민족들을 치유(治癒)하기 위하여 있더라.

N. 13 (왕국, 통치)

13은 12에 1이 더해진 수입니다.
즉 이상적인 통치조직 12에 지도자 1이 더해져 완벽한 왕국 내지는 집단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 중 요셉지파는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따라 2지파로 나뉘어 이스라엘은 총 13개 지파가 있었습니다.
이 중 성막 봉사를 위해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 레위지파를 지도자로 삼아 12지파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예수님을 지도자로 삼아 12제자가 따랐으므로 총 13명이 됩니다.
13은 나쁘지 않은 수인데 프리메이슨이 13을 자신들이 독점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불길한 수라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상징하는 피라미드에서 선분(8)과 점(5) 또는 면(5)의 합은 13입니다.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은 13년 동안 자신의 집을 건축하여 완성하였습니다.

* 13과 관련된 성경구절

창세기 14/4 저들이 열두 해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열세째 해에 반역을 일으키매

창세기 17/25,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십삼 세에 자기 포피의 살에 할례를 받았더라.

민수기 29/13 너희는 번제 헌물 곧 불로 예비하는 희생물을 드려 주께 향기로운 냄새로 삼되 어린 수소 열세 마리와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어린양 열네 마리를 다 흠 없는 것으로 드릴 것이며

왕상 7/1 한편 솔로몬이 십삼 년 동안 자기 집을 건축하여 온 집을 완성하니라.

에스겔 40/11 또 그가 그 문 입구의 넓이를 측량하니 십 큐빗이며 그 문의 길이는 십삼 큐빗이며

O. 14 (완전한 기간)

14는 완전수 7이 두 번 더해진 수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딸 레아와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씩 총 14년을 봉사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첫째 달(4월) 14일 저녁에 양을 잡아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또한 유월절(14일)로부터 21일까지 7일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었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에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포로시대까지 14대이며, 바빌론 포로시대부터 예수님까지 14대입니다.

* 14와 관련된 성경구절

창세기 31/41 내가 외삼촌의 집에서 이와 같이 이십 년을 지냈으니 곧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을 또 외삼촌의 가축을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께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바꾸셨나이다.

창세기 46/22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아들들이니 모두 열네 혼이라.

출애굽기 12/6 같은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저녁때에 이스라엘 회중의 전체 집회에서 그 양을 잡고

출애굽기 12/18 첫째 달 곧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그 달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민수기 9/5 그들이 첫째 달 십사일 해 질 때에 시내 광야에서 유월절을 지키되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

민수기 29/13 너희는 번제 헌물 곧 불로 예비하는 희생물을 드려 주께 향기로운 냄새로 삼되 어린 수소 열세 마리와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어린양 열네 마리를 다 흠 없는 것으로 드릴 것이며

민수기 29/32 일곱째 날에는 수소 일곱 마리와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양 열네 마리를 드릴 것이며

왕상 8/65 그때에 솔로몬과 그와 함께한 온 이스라엘 곧 하맛 입구에서부터 이집트 강까지의 큰 회중이 이레와 이레 동안 곧 열나흘 동안 주 우리 하나님 앞에서 명절을 지키더니

에스겔 43/17 선반의 길이는 십사 큐빗이요, 네모 반듯한 네 면의 넓이는 십사 큐빗이고 그 턱은 반 큐빗이며 밑바닥은 일 큐빗이고 그 층계들은 동쪽을 바라보게 할지니라.

마태 1/17 그러므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세대요, 다윗부터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 열네 세대요,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세대라.

P. 15 (영적인 성숙, 초막절, 연장된 기간)

15는 영적인 수 5가 하늘의 완전 수 3만큼 곱해진 수입니다.
일곱째 달 15일부터 7일간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초막절로 나뭇가지로 초막을 짓고 7일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장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한 것임과 동시에 미래에 있을 7년 대환난을 예표합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이 걸려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이 그의 수명을 15년 연장해 주셨습니다.

* 15와 관련된 성경구절

민수기 29/12 일곱째 달 십오일에는 너희가 거룩한 집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이레 동안 주를 위하여 명절을 지킬 것이니라.

왕하 20/6, 내가 네 날들에 십오 년을 더하여 주며 또 내가 너와 이 도시를 아시리아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나와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도시를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이사야 38/5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말하기를, 주 곧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보라, 내가 네 날들에 십오 년을 더하여 주며

Q. 18 (고난의 기간, 불행의 수)

18은 불완전 수 9가 두 번 더해진 수로 좋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주로 이스라엘 민족이 이민족에게 지배당한 기간이거나 멸망당한 햇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실로암 망대에서 깔려 죽은 사람은 18명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고쳐준 여인도 18년 동안 악령에 들려 몸이 구부러진 여인이었습니다.

* 18과 관련된 성경구절

사사기 3/14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십팔 년 동안 섬기니라.

사사기 10/8 그들이 그 해에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히고 학대하였으며 또 십팔 년 동안 요르단 저편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거하는 온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였고

왕하 19/35 그 밤에 주의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사람들의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치매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보라, 그들이 다 죽어 송장이 되었더라.

예레미야 52/29 느부갓네살의 제십팔년에 그가 예루살렘에서 팔백삼십이 명을 포로로 사로잡아 갔으며

누가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었다고 생각하느냐?

누가 13/11 보라,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약(病弱)하게 하는 영에 붙잡혀 몸이 구부러지고 전혀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니

누가 13/16 그러면, 보라,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그 매인 것에서 풀어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R. 40 (고난, 시험, 연단, 성장, 준비, 금식, 통치 기간)

성경에 40은 한 인물이나 민족이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과 시험을 받고 연단을 받아 성장하는 기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았고,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마귀로부터 시험 받으셨습니다.
또한 모세가 40세에 사역을 시작했고,40년 동안 광야에서 연단 받고 80세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습니다.
다윗왕과 솔로몬왕이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듯이 40은 통치 기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 외에 홍수 심판 때 40일 동안 비가 내렸고, 모세가 율법을 받는데도 40일이 걸렸으며, 매도 40대까지만 때립니다.
구약시대는 4천년이고, 요나가 니느웨성에서 경고한 기간도 40일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 40과 관련된 수

창세기 7/4 이는 이제 이레 후에 내가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 위에 비가 오게 하여 내가 만든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멸할 것임이라.

창세기 25/2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로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아람의 시리아 사람 브두엘의 딸이요, 시리아 사람 라반의 누이더라.

창세기 50/3 야곱을 위하여 사십 일을 채웠으니 이는 향료를 넣는 데 이 같은 날수가 걸리기 때문이더라. 이집트 사람들이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해 애곡하니라.

출애굽기 16/35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땅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출애굽기 24/18 모세는 구름 가운데로 들어가서 산 위로 올랐으며 밤낮 사십 일을 산에 있었더라.

출애굽기 26/21 은으로 밑받침 마흔 개를 만들지니 곧 이 널빤지 밑에도 두 개의 밑받침을 만들고 저 널빤지 밑에도 두개의 밑받침을 만들지니라.

출애굽기 34/28 모세가 주와 함께 밤낮 사십 일을 거기 있으면서 빵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그분께서는 언약의 말씀들 곧 열 가지 명령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민수기 14/33~34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행음(行淫)을 짊어지고 너희 사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 수 곧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 년 동안 너희가 너희 불법들을 담당할지니 이로써 내가 약속을 깨뜨린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민수기 32/13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불같이 타올라 그분께서 그들로 하여금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셨으므로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한 그 세대가 결국 소멸되었느니라.

신명기 8/2 주 네 하나님께서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신 그 모든 길을 기억할지니 이것은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또 너희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 하는지 그렇지 아니한지 알고자 하심이라.

신명기 9/9 그때에 내가 돌판들 곧 주께서 너희와 맺으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 밤낮 사십 일을 산에 거하며 빵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신명기 25/3 마흔 대까지는 때리게 하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많은 매로 그보다 더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비천한 자로 여기는 것이 될까 염려하노라.

사사기 8/28 이와 같이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 시대에 사십 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

사사기 13/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시니라.

삼하 5/4 다윗이 삼십 세에 통치하기 시작하여 사십 년 동안 통치하였으되

왕상 2/11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치한 날들이 사십 년이라. 그가 헤브론에서 칠 년을 통치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을 통치하였더라.

왕상 7/38 또 그가 물두멍 열 개를 놋으로 만들었는데 물두멍마다 사십 바스를 담게 하였으며 각 물두멍의 크기를 사 큐빗으로 하고 열 개의 받침대 위에 각각 물두멍을 한 개씩 놓으니라.

왕상 11/42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온 이스라엘을 통치한 기간이 사십 년이라.

에스겔 29/12 내가 이집트 땅을 황폐한 나라들 한가운데서 황폐하게 하며 그녀의 도시들도 피폐하게 된 도시들 가운데서 사십 년 동안 황폐하게 하고 이집트 사람들을 민족들 가운데로 흩으며 여러 나라로 흩어 버리리라.

에스겔 41/2 문의 넓이는 십 큐빗이요, 문의 양쪽은 한 쪽이 오 큐빗이요, 다른 쪽도 오 큐빗이며 그가 그곳의 길이를 측량하니 사십 큐빗이요, 넓이가 이십 큐빗이며

에스겔 46/22 그 뜰의 네 구석에서 뜰들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 길이는 사십 큐빗이요, 넓이는 삼십 큐빗이라. 이 네 구석이 한 치수더라.

요나 3/4 비로소 요나가 그 도시로 들어가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라.

마가 1/13 그분께서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며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그분을 섬기더라.

누가 4/2 사십 일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날들에 그분께서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매 날들이 다 지난 뒤에 주리시니라.

사도행전 1/3 그분께서 수난을 받으신 뒤에 또한 자신이 살아 계심을 절대확실(絶代確實)한 많은 증거들로 그들에게 보여 주시고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것들을 말씀하시니라.

사도행전 7/30 사십 년이 지난 뒤에 주의 천사가 시내산 광야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거늘

사도행전 13/21 그 뒤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께서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 동안 주셨다가 히브리서 3/17 그러면 사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 누구로 인하여 근심하셨느냐? 범죄하여 그 사체(死體)가 광야에 쓰러진 자들이 아니냐?

S. 70 (완벽한 통치의 수, 인생의 수)

70은 완전 수 7과 서열적 완전 수 10이 곱해진 수입니다.
따라서 70은 완전한 조직 또는 완벽한 통치의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70명의 장로들을 세워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렸고, 예수님도 12제자 외에 70명을 세워 파송하셨습니다.
70은 또한 인간의 평균수명으로 인생의 수라고 할 수 있으며,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기간입니다.

* 70관 관련된 성경구절

출애굽기 1/5 이미 요셉이 이집트에 있었으므로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혼(魂)이 모두 일흔 혼이었더라.

출애굽기 24/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칠십 명이 올라가서

민수기 11/16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장로들 중에서 네가 백성의 장로와 그들을 다스리는 관원(官員)으로 알고 있는 자 칠십 명을 내게로 모으고 회중의 성막으로 데려와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민수기 11/25 주께서 구름 가운데 내려오사 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 위에 있는 영을 취해 칠십 명의 장로들에게도 주시니 그 영이 그들 위에 임한 때에 그들이 대언을 하고 멈추지 아니하였더라.

신명기 10/22 이집트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칠십 명이었으나 이제는 주 네 하나님께서 너를 하늘의 별들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역대하 29/32 회중이 가져온 번제 헌물의 수는 수소가 칠십 마리요, 숫양이 백 마리요, 어린양이 이백 마리니 이것들은 다 주께 번제 헌물로 드리는 것이며

역대하 36/21 이로써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주의 말씀이 성취되어 마침내 그 땅이 자기의 안식을 누렸으니 이는 그 땅이 황폐한 동안 안식을 지키고 칠십 년을 마쳤음이더라.

시편 90/10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 강건하면 팔십 년이라도 그 햇수의 위력은 수고와 슬픔뿐이니 이는 그 위력이 곧 끊어지매 우리가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니이다.

이사야 23/15 그 날에 두로가 한 왕의 날수에 따라 칠십 년 동안 잊혀질 것이요, 칠십 년이 끝난 뒤에 두로가 창녀같이 노래하리라.

예례미야 25/11 그리하여 이 온 땅이 폐허가 되고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빌론 왕을 섬기리라.

예례미야 25/12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빌론 왕과 그 민족과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그들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하되

예례미야 29/10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빌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고 너희를 향한 나의 선한 말을 이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에스겔 8/11 이스라엘의 집 장로들 가운데 칠십 명이 그것들 앞에 서 있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들의 한가운데 서 있고 그들이 저마다 자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짙은 구름 같은 향이 위로 올라가더라.

에스겔 41/12 이제 서쪽 끝의 분리된 곳 앞에 있는 건물은 너비가 칠십 큐빗이고 그 건물의 벽은 돌아가며 두께가 오 큐빗이고 길이가 구십 큐빗이더라.

다니엘 9/2 곧 그의 통치 제일년에 나 다니엘이 여러 책을 통하여 주의 말씀이 대언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사 알려 주신 그 햇수를 깨달았나니 곧 그분께서 예루살렘이 황폐한 가운데 칠십 년을 채우시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 9/24 주께서 네 백성과 네 거룩한 도시에게 칠십 이레를 정하셨나니 이것은 범죄가 그치고 죄들이 끝나며 불법에 대하여 화해를 이루고 영존하는 의를 가져오며 환상과 대언을 봉인하고 또 지극히 거룩하신 이에게 기름을 붓고자 함이라.

스가랴 1/12 이에 주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오 만군의 주여, 주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도시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주께서 그들에게 격노하신 지 이렇게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누가 10/1 이 일들 후에 또 주께서 다른 칠십 명도 세우사 친히 가시고자 하는 각 도시와 각 지역으로 둘씩 둘씩 앞서 보내시니라.

누가 10/17 칠십 명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마귀들도 우리에게 굴복하더이다, 하니

T. 666 (짐승의 수, 사탄의 수, 악의 완전 수, 세상의 수)

계시록 13/15~18 또 그가 짐승의 형상에게 생명을 주는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형상으로 말도 하게 하고, 그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죽이도록 하니라. 그가 모든 자, 즉 작은 자나 큰 자, 부자나 가난한 자, 자유자나 종이나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숫자를 지닌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거나 팔 수 없게 하더라. 지혜가 여기에 있으니 지각이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숫자를 헤아려 보라. 그것은 한 사람의 숫자이니, 
그의 숫자는 육백육십육이니라.

마지막 때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적그리스도)의 형상에게 경배하게 하고, 경배하지 않는 자는 죽입니다.또한 모든 사람에게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나 짐승의 이름이나 짐승 이름의 숫자를 지닌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물건을 사거나 팔 수 없게 합니다.
짐승의 숫자는 한 사람의 숫자인데 그의 숫자는 666입니다.

미래에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닥칠 문제이므로 666과 짐승의 표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수가 연달아 3번 있는 것은 그 숫자의 결정체이자 완성이란 뜻입니다.
6은 땅 짐승 인간 불완전 등을 상징하므로 666은 이 세상 구성요소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이 세상의 과학기술 문명은 절정에 달했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타락과 죄악도 절정에 달해 있습니다.

그럼 짐승의 표란 무엇일까요?
이 표는 현재 개발되어 가축이나 사람에게 삽입되고 있는 생체 칩(마이크로 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COMPUTER를 6을 기본단위로 알파벳순으로 더하면 18+90+78+96+126+120+30+108=666 입니다.
'mark of beast'(짐승의 표)도 6을 단위로 더하면 78+6+108+66+90+36+12+30+6+114+120=666 입니다.

6과 12는 미국 도량의 단위이기도 한데 다른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Bio-Implant(생체 칩)=666   Sorceries(마법) = 666   Necromancy(강신술)=666   Witchcraft(주술)=666   Lustful(음탕한)=666

Corrupt(부정한)=666         Insanity(광기)=666       Horrors(공포)=666   Treacheries(배반)=666   Slaughter(도살)=666

Calculation(계산)=666   Stubborn(완고한)=666   Illusion(환각)=666   Son of Sin(죄의 아들)=666   A Perdition(파멸)=666

Geneticist(유전학자)=666   Quarrels(싸움)=666   Kissinger(키신저)=666

6을 단위로 곱한 이유는 6이 바로 짐승(동물)의 수이기 때문입니다.
6은 여성 수(2)와 남성 수(3)이 곱해진 수입니다.
6은 6의 약수인 1,2,3을 더한 수이고, 물과 눈과 탄소의 결정이 육각형이므로 땅에서는 완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6번째 날에 짐승을 만드셨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6번째(원래 일요일이 시작일임) 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오전 9시(유대 시간 제삼시)에 못 박히셔서 오후 3시(유대 시간 제구시)에 운명하셨으니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6일동안 창조하시고 마지막 하루를 안식하셨습니다.
6이 땅의 완성수라고 한다면, 7(6+1(안식))은 땅의 완전수이고, 8(7+1(초월))은 하늘의 완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신·구약 합쳐서 66권입니다.
6과 6을 더하면 12지파나 12제자에서 사용된 12가 나옵니다.(황도12궁, 12달)
이를 놓고 볼 때 6은 원래 나쁜 수가 아니라 창조의 수, 사람(동물)의 수, 구원의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6과 66의 경우에는 좋은 의미로도 쓰이지만 666은 좀 다릅니다.

6행 6열의 마방진은 태양을 상징하는데, 각 선상의 수의 합은 111이고, 마방진의 모든 수를 더하면 666입니다.
마방진은 가로, 세로 nxn칸에 1부터 n의 제곱 까지의 자연수열을 한 번씩 써 넣어 행과, 열, 대각선의 각 방향의 합이  모두 같도록 만든 정방행렬을 말합니다. 
각 줄의 합은 수학적으로 풀어보면 n(n^2+1)/2 가 되어야 합니다.
마방진은 고대 중국과 우리나라, 서양에 모두 존재했습니다.

태양은 원래 하나님을 상징하는데(시편 84/11), 지상의 왕인 사탄은 자신을 태양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바빌론, 로마 등에서 최고의 신은 태양신이었고, 태양신은 사탄을 의미했습니다.
이집트의 호루스신과 바빌론의 샤마시 신, 그리스의 아폴로 신은 태양신으로 섬겨졌습니다.
따라서 666은 사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양을 상징하는 6×6 마방진으로 모든 수를 더하면 666입니다.

U. 144,000 (완전한 무리의 총합, 하나님의 완벽한 백성의 수)

계시록 7/4 또 내가 인 맞은 자의 수에 대하여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십사만 사천이더라.

계시록 14/1 또 내가 바라보니, 보라, 어린양께서 시온 산 위에 서 계시고 그분과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 안에는 그분의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더라.

계시록 14/3 그들이 왕좌 앞과 네 짐승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 같은 것을 부르니 땅에서 대속(代贖) 받은 십사만 사천 외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시록에 십사만 사천명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계시록 7장의 십사만 사천명은 마지막 때 예수님을 구원주로 시인하고 구원 받는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반면 계시록 14장의 십사만 사천명은 온전히 거듭나 대환난 이전에 하늘나라로 휴거돼 예수님과 혼인잔치를 치룰 성도들입니다. 십사만 사천명이 실제 숫자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영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 21/17 또 그가 그 도시의 성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큐빗이니 이것은 사람의 치수 곧 그 천사의 치수에 따른 것이라.

다니엘 7/10 불이 강같이 흘러 그분 앞에서 나오고 그분을 섬기는 자들은 천천(千千)이요, 그분 앞에 서 있는 자들은  만만(萬萬)이라. 그분께서 심판을 베푸시는데 책들이 펴져 있더라.

계시록 5/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왕좌와 짐승들과 장로들을 둘러싼 많은 천사들의 음성이 있으니 그들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44,000(십사만 사천)은 12×12×1,000의 값이 되는 수입니다.
12는 하나님의 통치 조직의 완전수인데 144는 12가 두 번 곱해졌으니 완전 중에 완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새예루살렘 성벽의 두께는 144 큐빗인 것입니다.
1,000은 충만한 수를 의미하므로 144에 1,000이 곱해졌다는 무수히 많은 완벽한(거룩한) 무리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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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설교할까?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설교할까?


신천지 예수교 증거 장막 성전(신천지, 이만희교주)의 문제는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진리를 왜곡했다는 점이다.
소위 “비유풀이”나 “자의적 시대 구분” 등만 강조하면서 신자들을 미혹했다.
교회와 목회자들은 신천지의 잘못된 교리를 반박하고 성도를 보호해야 하는 동시에 “빼앗긴 요한계시록”을 되찾아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러나 해석이 어렵고 천년왕국론 등은 네 가지 관점으로 나뉘어 있어 설교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광복 흰돌선교센터 대표, 이필찬 요한계시록연구소 소장, 정성욱 미국 덴버신학교 교수에게 요한계시록에 대해 물었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일까?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의 책”으로, “예수님 재림 직전의 대환난, 재림, 그리고 재림 이후의 천년왕국과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기록”이라며 “무섭고 두려운 내용이 아니라 주님과 주님의 교회가 반드시 승리할 것에 대한 확신과 위로, 용기를 주며 재림을 대망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했다.(정성욱)

“요한계시록은 전체 404절 278절이 구약의 인용이다.
또 예수님 십자가 구원을 염두에 둔 ‘어린 양’이란 표현만 31회 나온다.”며 “구약부터 신약의 십자가 신앙, 그리고 재림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을 통합적으로 보게 하고 구속사의 결론까지 보여준다.”고 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 교회가 직면할 대환난과 재림, 지옥 불못 심판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 구원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이필찬)

그럼에도 많은 성도는 요한계시록을 어렵다고 느낀다. 신자들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
예언의 말씀이므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며 “편지로서 발신자인 사도 요한과 수신자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관계 입장에서 읽어야 한다.”고 했다.
이필찬 소장은 요한계시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이며 ‘예언의 말씀’(1:3) ‘편지’(1:4)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요한계시록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로마서가 신학적 논설문이라면, 요한계시록은 미래 사건에 대한 그림책”이라며 “문제는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일반 신자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요한계시록은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이 아니라, 밝고 행복한 종말론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주님의 재림은 밝고 영광스러운 날이며 그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로 행복한 날”이라며 “특히 6장부터 18장까지의 기록은 대환난 시대에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과 심판의 기록이다.
교회는 철저히 보호를 받는다.
계시록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호하실 것이고, 끝내 승리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말했다.

목회자들이 요한계시록 설교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점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약속이다.
바벨론 제국으로 묘사되는 세상과 적그리스도는 철저히 심판을 받을 것이나,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부 된 교회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며 “신자들에게 이 약속을 신뢰하면서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환난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과거 한국교회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데 미온적이거나 금기시했던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장 칼뱅이 요한계시록을 주석으로 저술하지 않았다며 요한계시록 설교를 하지 않는 목회자들이 있다”며 “하지만 저명한 조직신학자 찰스 핫지와 성경신학자 게할더스 보스는 계시가 점진적으로 이해되고 열린다는 계시 이해의 점진성을 주장했다.
설교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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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교회가 겪어내야 할 일들을 그려 놓은 말씀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존재케 되는 교회가, 이 땅에서 겪어내야 할 일들을 그려 놓은 책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일들을 잘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이 땅에 고난을 겪고 있는 실존적, 가시적인 그 교회와, 천상의 완성된 교회를 동시에 이렇게 띄어 놓고 ‘봐라! 너희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위한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을 창조하시면서 가지고 계셨던, 창조의 목적이, 완전하게 회복되어지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죠?
계시록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면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계시록에는, 그 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주님의 영광의 빛이, 성을 비추죠? 성을 밝혀줍니다.

창세기에는, 교활한 사탄이 등장해서, 인간을 미혹(迷惑)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는, 그 사탄이 결박당한 체 불못에 던져집니다.

이렇게 완성이 되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창세기에서는, 인간이 낙원(樂園)을 상실하지만, 계시록에서는, 그 낙원이 회복(回復)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결별하게 되고, 계시록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혼인관계로 묶여 버립니다.
창세기에서는, 자연이 가시덤불을 내고, 엉겅퀴를 내어서, 인간을 해치죠?

그러나 계시록에서는, 자연이 사람을 부양하고, 이제 위로하게 된다고요.
창세기에서는 생명나무가, 천사의 보호를 받아서,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그런 나무가 되지만, 계시록에서는 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에덴동산 꼭대기에서 흐르던 그 강물이,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로 강으로 흐르죠?
또 에덴동산에서 만물을 통치하라고 위탁을 받았지만, 실패했던 그 인간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어떻게 합니까?
왕노릇을 하면서 만물을 통치하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완성이 되는 거예요.
영원히 변치 않는 다시는 타락할 수 없는, 진짜 낙원이, 계시록의 결론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없어진 게 뭐예요?

창세기에는 있고, 계시록에는 없는 것?
선악과만 없어요.
프로베이션 이즈 오버(Probation is over)
집행유예 - 시험은 끝이 났다!

​창세기가, 계시록으로 이렇게,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를,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성경이란 말이에요.
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과 인간을 만들었다가, 그들이 실패하니까, ‘어? 안 되네!’ 그리고 다른 방법 써봤다가, ‘안 되네!’ 또 다른 방법 썼다가, 이렇게 좌충우돌하면서 계시록까지 가신 것이 아니라, 계시록 21장 22장의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딱 목적하시고, 인간과 우주를 만드신 거예요.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를, 어떻게 의(義)의 흰옷을 입은, 이 천국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가를, 기록해 놓은 게 성경이라고요.
그러니까 계시록은, 그 성경의 결론 부분이에요.
절대로 무슨 부록도 아니고, 수수께끼도 아닌 것입니다.
계시록에 접근할 때 여러분은 우선, 수수께끼를 푸는 태도로 접근하시면 안 돼요.
열 뿔이 뭔지, 곰의 발이 뭔지,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이 뭔지, 이렇게 접근하지 마시고,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셔야 돼요.
그러니까 복음이라는 숲을 먼저 딱 보시고, 그 안에 있는 나무나 풀이나 벌래 이런 거를, 자세히 인제 살펴보자구요.

복음(福音)이라는 그림을 그리셔야 됩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우니라

읽고, 듣고, 기록한 것을, 지킬 수 있다고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이 계시록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복음이 계시되어져 있는 책이에요.
하나님은 성경을 쓸 때, 어떻게 해서든지, 그 하늘의 비밀을 밝히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기 위해서, 쓰신 것이지, 요렇게 감춰 두고서는, 약 올리려고 쓰신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계시록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내용들이에요. 

계시록은 친절하게, 성경자체에서 모든 내용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계시록 자체 안에서도 풀어주고 있고, 혹은 구약 안에서 다 풀어주고 있어요.
계시록에 404구절 중에, 거의 300구절 가까이가, 구약의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을 주의 깊게 공부하신 분들은, 계시록을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죠?

요한계시록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 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별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

일곱 금 촛대는 무엇입니까?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

요한계시록 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에서 왔느뇨


흰옷 입은 자들은 누구냐
14절을 보세요.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그 흰옷 입은 자들은)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흰옷 입은 자들은 교회라고 합니다.
아주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고요.

요한계시록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그래요. 큰 용이 뭘까요?)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예, 그 용은 마귀! 사단이란 말이에요.)

​계시록 21장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죠?
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어떻게 하늘에서 그렇게 내려와요?
그런데 그게 뭐냐고요? 그게 뭔지를 10절에서 뭐라고 그래요?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도, 어린양의 신부! 즉 교회다 그래요.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녹보석, 홍보석, 황옥, 백옥, 정금, 그런 보석으로 이루어졌다고 그렇게 나오잖아요?
그것을 하나님의 교회! 어린양의 신부를 나타내는 거예요.

​펠시 콜렌이란 사람이 천국을 갔다 와서, ‘천국은 이런 곳이다!’ 간증하고 다닌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무슨 천국에 갔더니, 거기에는 길이 황금이고, 벽은 다이아몬드고, 기둥은 뭐 옥보석이니 뭐니,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계시록이 무얼 이야기하는지 정말 모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보석으로 새 하늘과 새 땅!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교회인 여러분들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설명해놓은 것이지, 천국이 그렇게 생겼다는 게 아니라고요.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요한계시록을 강의 하셨던, 포울 트레스 목사님이 쓰신, ‘더 리터닝 킹(The Returning King)’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쓰여 있습니다.

포울 트레스 목사님이 교회에서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강의를 하셨는데, 12살짜리가 와서 이렇게 이야기 하더래요.
‘목사님! 나는 요한계시록이 무슨 이야기하는지 다 알아요.’ 그러더래요. ‘정말 다 알아?’ ‘예, 다 알아요.’ ‘그럼, 얘기를 해줄래?’ 그랬더니, 줄줄이 얘기를 해주더라는 거예요. ‘계시록은 이런 내용이죠?’ 예, 이렇게 12살짜리의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계시록을 읽으라는 거예요.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의 석사과정 학생들이, 학교 농구코트에서 농구를 하고 있었대요.
그랬더니 저편에서 그 수위아저씨가 계시록을 이렇게 읽고 있더래요.
그래서 잘난 체를 해볼량으로 가서, ‘아저씨! 그 내용이 뭔지 다 아십니까? 좀 도와드릴까요?’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다 알아요.’ 그러더래요. ‘무슨 얘기인데요?’ 그랬더니, ‘예, 예수님이 이긴대요.’ 네! 요한계시록은 그거예요. 예수님이 이긴대요. 그거 한 가지만 알고 가시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

​계시록은요, 지금 가시적으로는, 교회가 당하고 있는 것 같고,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이에 이기셨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는 절대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승리할 것이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교회는 반드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된다는, 복음이 적혀있는 책입니다.
절대 미래에 있을 어떤 일로, 혹은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으로 국한시켜서, 수수깨끼처럼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표면상으로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의 형식을 띄고 있어요.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그들이 쓰는 숫자에, 특정한 개념을 부여했었습니다.
특히 1부터 10까지의 숫자에 그런 특별한 개념을 부여했었는데, 칠(7)이라는 숫자는, 전체! 충만! 완전이라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소아시아의 다른 유명한 교회들이 많았는데도, 굳이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쓴 건, 그 일곱 교회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을 초월한 전체 교회! 여러분을 포함한 전체 교회에게 쓴 거라는 거예요.

​1장 11절 보시면, ‘너는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일곱 교회에게 보내라’
그러죠? 영어로 보면, 롸잇 온 어 스크롤(Write on a scroll) 그런다고요.
라윗 온 어 스크롤! 비블리온! 한 책에다 쓰라! 그런다고요.
한 두루마리에다가 쓰라! 그래요. 일곱 교회에게 보내려면, 일곱 두루마리에 써서 보내야 되잖아요?
그런데 한 두루마리에 써서, 회람(回覽)시키라! 그런다고요. 그것은, 단지 일곱 교회에게만 쓴 것이 아니라, 전체 교회에게, 이 요한계시록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요한계시록의 전편에 걸쳐서 일관된 흐름을 형성하는 주제는, 교회론(敎會論)입니다.

4장과 5장에 나오는, 24장로라든지, 7장에 나오는 14만 4천이라든지, 셀 수 없는 무리! 그리고 11장의 성전과 도시! 그리고 12장의 여인! 14장의 14만 4천! 15장의 승리자들! 그리고 19장의 어린양의 신부는, 모두 교회를 상징하는 말들이에요.
이렇게 교회가, 교회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 교회에게 일어날 일들을, 지금 계시록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당시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던 교회를 향해서, 로마인들이 알아볼 수 없는 그들만의 상징! 그들만의 소문! 구약의 언어! 이런 것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는 전투하는 교회로, 고난을 당하는 교회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승리한 교회로, 영적으로,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하늘에 존재하고 있다는 거! 그래서 그 하늘에서는 이미 왕노릇 하고 있고, 하나님은 반드시 실패 없이, 가시적으로도, 우리를 그렇게 완성하실 거라는 소망(所望)의 메시지를 교회에게 던진 거예요.

그러니까 4장과 5장에서 24장로가 나오죠? 그 24장로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보좌 둘레에 있는, 왕의 보좌에 앉아 있어요. 24장로는 교회라 그랬죠? 그 교회가 이미 하늘에, 하나님 보좌 주위에 있는, 왕의 보좌에 앉아 있다고요. 여러분이! 그렇게 가시적인 이지상의 교회와, 하늘의 교회를 딱 띄어가지고, ‘너희들! 이렇게 당하지만 염려하지 마라! 너희들은 이렇게 위대한 존재야!’라고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심어주는 책이 바로, 요한 계시록입니다.

그러니까 천상에서 교회를 이렇게 내려다보고,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나라로 완성되어져 가는지를 이렇게 한 눈에 볼 수 있게, 이야기형식으로 그려 놓은 것이, 요한 계시록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지금 고난당하고 있는, 지금 핍박당하고 세상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 이 시대의 교회에도, 동일한 메시지로 선포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핍박당하는 교회가 없는 거예요? 성경은 핍박당하는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책을 마련해 놓았는데, 왜 이 시대에는 핍박당하는 교회가 없는 것입니까? 오히려, 세상과 손을 잡고, 적당히 부화뇌동을 해서, 잘 먹고 잘살고 있어요.

자, 사단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계속해서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육체적인 핍박으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예레미야처럼, 빈 통나무 속에다 넣고, 톱으로 썰어서, 죽여 버리기도 했고, 베드로처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서 죽이기도 했구요. 기름에 튀겨 죽이고, 껍질을 벗겨서 죽이기도 했어요. 부모가 보는 앞에서, 아이들을 차례차례 한 명씩 죽여가기도 했구요. 또 엄마가 보는 앞에서, 갓난아기를 죽여서, 그 엄마의 목에도 걸었대요. 그리고 도시를 걸어 다니게 만들었다고 그러죠? 그렇게 육체적인 핍박을 가해서,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했다고요. 마귀의 세력은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교회가 실패했나요? 지금까지 이렇게 존재하잖아요? 여러분이!

사단은 그렇게 엄청난 세력으로 우리를 공격해 오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그거 보여주는 거예요. 계시록은요! 사단은 방법을 계속해서 바꿔가면서 교회를 공격합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핍박을 가해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겁을 주었다 하면, 그와 동시에 요즘에는, 이제 풍요와 번영과 쾌락도 막 줘요. 그래서 서구의 교회들이, 오락과, 레저와, 취미생활에 밀려서, 하나 둘씩 문을 닫습니다. 교회에 가는 시간 대신에, 그런 재미있는 것을 하게 해주는 거예요.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의 참 교회는, 그러한 핍박 속에서, 지금까지 실패하지 않았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하나님의 보호아래, 단 한 사람에 낙오자도 없이, 모두 승리의 면류관을 쓸 것입니다. 그것이 계시록입니다. ‘너희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라! 지금은 너희가 당하고 있는 것 같고, 지는 것 같지만, 아니다! 너희는 지금 이기고 있는 거고, 그 고난 뒤에 너희에게 올 저 영광스러운 천국을 기대하면서, 이겨라! 이겨라!’ 이거예요. 그래, 계시록을 떠올리실 때, 여러분 딴 게 생각 안 나면, 이걸 떠올리세요. ‘이겨라! 이겨라! 우리교회 이겨라!’ 이거만 떠올리시면 돼요. 계시록은 그거예요. 교회에게 ‘이겨라! 이겨라! 힘들겠지만 이겨라!’ 이렇게 용기와 격려를 주는 책입니다.

이 계시록은, 예수그리스도의 초림에서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인, 교회시대! 다른 말로, 종말의 때! 마지막 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계시록에는 교회시대에 기간을 가리키는, 1260일! 42개월! 한 때, 두때, 반 때, 3년 반의 기간이,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오죠? 우리가 다니엘서 9장, 70이레를 공부하면서, 왜 그 기간이 교회시대를 가리키는 것인가, 제가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계시록은 그렇게 교회시대를 묘사하고 있어요.

그러면 이 계시록은 언제 기록된 것일까요? 이 저작연대가, 계시록을 해석하는 아주 중요한 키가 되기 때문에, 계시록의 저작연대는 아주 중요합니다. 아! 이 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관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먼저, 과거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들은 이 계시록이, 성전이 파괴된 AD 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그렇게 주장을 합니다. 그러니까 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환란에 내용은, 네로시대에 핍박을 당했던 이스라엘과, AD 70년에 성전파괴를 비롯해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 계시록이다, 그래요.

그러니까 4장 이후부터 계속 환란이 나오죠? 재앙들이 나오죠? 그것은, 로마시대의 네로 황제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당했던 그 핍박을 이야기 하는 거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도, AD70년에 성전이 파괴된 그때를 이야기 하는 거라고,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과거주의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을 우리가 ‘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그러면 AD 70년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이 계시록이라면,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이 계시록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겠네요? 그러면 성경은, 어느 사람들에게는 적용이 되고, 어느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책입니까? 아니요. 성경은 예수께서 오신 그때부터, 다시 재림하실 그때까지의 존재하는 모든 교회에게,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서, 다 적용이 되는 게 성경이라고요. 그러니까 만약에, 이 과거주의 해석을 하는 사람들의 그 이론을 따르자면, 이 계시록은 다 찢어버려야죠.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책이니까! 그렇지 않단 말이에요.

계시록 2장 13절 보세요. 언제 기록된 것일까? 제가 한 번 근거 구절을 대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3)

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런다고요. 이 구절을 보면요, 이 계시록이 기록되었던 시기에, 핍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리고 거기에 보면, 사단의 위! 사단이 거하는 곳이라는 단어가 있어요. 자, 그걸 보면 신성숭배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죠? 우상숭배가 아니라, 황제를 신으로 여기는 시기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들은 어떻게 그 저작연대를 추론을 하냐면, 이 요한계시록의 저작시기를,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자신을 신격화했던, 도미티안황제 때, 그러니까 AD 95년으로 저희들은 저작연대를 봅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자기를, ‘신(神)! 또는 주(主)님이다!’ 이렇게 부르게 했어요. 그리고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핍박은 했지만, 자기를 신격화 하지는 않았다고요. 요한의 밧모섬 귀향시기를 보거나, 아니면 그의 나머지 안생을 모두 보게 되면, AD 95년이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과거주의자들이 요한계시록의 저작시기를 그렇게 보는 반면에, 미래주의적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들을 우리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라고 하죠? 이 미래주의적 관점으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계시록 2장 3장의 그 일곱 교회 이야기는, 교회시대를 가리킨다고 보지만, 4장부터 나오는 것은 모두, 그 7년 대환란(大患亂) 기간 동안의 일을 기록한 거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7년 대환란은 교회의 휴거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죠?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자들이 어떻게 주장한다고 그랬죠? 교회시대가 끝날 무렵에, 예수께서 공중 재림을 하시죠? 그리고 교회는 다 휴거가 된다고 그래요. 그리고는 7년 대환란이 있어요. 믿지 않는 자들과 이스라엘이 겪는 고난이죠? 그리고 7년 대환란 후에, 예수님이 지상재림을 하시고, 천년왕국이 있다고 믿잖아요? 이 교회시대까지를, 2장 3장의 그 일곱 교회의 내용이라고 이야기하고, 그 4장부터 나오는 그 환란과 재앙! 이런 것들은, 7년 대환란 기간 동안에 있는 일이다고 이야기 한다고요. 아직 오지 않는 언젠가 있을, 그 7년 대환란 기간 동안의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이 4장부터의 그 이야기는, 교회하고는 아무 상관없어요. 그죠? 왜냐면은 교회는 7년 대환란이 오기 전에 휴거할거니까! 그러면은 이 4장부터는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으니까, 우리는 그냥 안 읽어도 돼요? 이 4장부터는 또 다 찢어버릴까요, 그냥? 그렇지 않단 말이에요. 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의 언약이, 이 땅에서 이스라엘에게 다 이루어져야 된다고 믿어요. 그래서 그렇게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요한계시록 4장 이후부터는, 정말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단 말이에요. 그분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계시록의 모든 사건을 시간 순으로, 해석을 해요. 즉 연대기적으로 본다고요. 그런데 계시록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렇게 되면은 이 계시록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려요. 시간적으로 해석을 하면은! 계시록 6장 12절로 가보세요.

(요한계시록 6:12)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그러죠? 여섯 번째 인을 뗄 때, 인의 재앙 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천재지변이 일어납니다. 이 장면을, 신약의 어디서 보셨죠? 마태복음 24장 29절로 갑니다.

(마태복음 24:29-31)

29 그 날 환란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그래요. 최후의 심 판때, 예수님의 재림 때를, 예수님께서 지금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직접 설명해 주고 계시다고요. 제가 이 장면을, 요한이 지금 계시록 6장 12절에서,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인용해다 썼단 말이에요. 그럼 여섯째 인을 뗄 때는, 최후의 심판 때예요. 그럼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과 지옥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뒤에 나팔재앙과 대접재앙이 또 있잖아요? 시간 순으로, 연대기적으로, 이 계시록을 해석을 하면, 그렇게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고요. 계시록 8장 12절 보세요. 이미 해와 달과 별이 다 쏟아져 버렸어요.

(요한계시록 8:12)

12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침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해가 또 있어요. 별은 다 쏟아 졌는데, 별이 또 있어요. 자, 시간 순으로 해석을 하면, 이렇게 자꾸 헷갈린단 말이죠. 네 번째 나팔은, 여섯 번째 인 사건이 훨씬 뒤에 일이잖아요? 시간적으로 본다면! 그러니까 계시록은 시간 순으로 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사탄의 세력으로 상징되는 그 바벨론! 그 바벨론은 몇 번씩 망하죠? 시간 순으로 보면! 계시록 16장 19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16:19-20)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바벨론이 멸망했어요. 17장 16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17:16)

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

그래요. 이 음녀는 바벨론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중에 제가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바벨론이 또 망해요. 계시록 19장 2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19:2)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또 망해요. 바벨론이 망했다 살아났다, 망했다 살아났다, 이렇게 된다 말이에요. 연대기 적으로 보게 되면은! 시간 순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리고 시간 순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의 구원도, 계속 반복해서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자연계도 다시 계속 생겨요. 다 멸망해서 없어졌는데, 또 생겨요. 멸망해서 없어졌는데 또 생겨요. 계시록은 이렇게 시간적인 순서로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마겟돈 전쟁도 그래요. 계시록 19장 19절에, 아마겟돈 전쟁에 나오죠?

(요한계시록 19:19-21)

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에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이게 아마겟돈 전쟁이에요. 여기에서 마귀의 세력들이 불못에 던지우게 되죠? 쫄딱 망한다고요. 그런데 계시록 20장 7절에 보면, 또 전쟁이 있어요. 곡과 마곡의 전쟁이라는 전쟁이 있어요. 7절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20:7-10)

7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불과 유황 못에 또 던져져요. 자, 19장에서 다 죽었는데, 또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이야기는, 에스겔서에 나오는 곡과 마곡의 전쟁을 보면요, 한 이야기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어요.

요한이 그 최후의 심판 때에, 사탄과 그 무리가 심판을 당할 것을, 에스겔서를 인용해서, 반복해서 묘사하고 있는 거예요. 그 전쟁은요! 에스겔서 38장과 39장을 집에 가서 꼭 읽어 보세요. 에스겔서 38장과 39장을 보면, 곡과 마곡의 전쟁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 곡과 마곡을, 하나님께서 멸망을 시키는 장면이 나와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귀에 무리들을 어떻게 심판하실 것을, 일러주신다고요. 그 곡과 마곡의 심판에, 이런 구절이 한 구절 나오는데, 에스겔서 39장 17절로 갑니다.

(에스겔 39:17)

17 너 인자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는 각종 새와 들의 각종 짐승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모여 오라 내가 너희를 위한 잔치 곧 이스라엘 산 위에 예비한 큰 잔치로 너희는 사방에서 모여서 고기를 먹으며 피를 마실지어다

새들더러, ‘고기를 먹으며 피를 마실지어다.’ 그러죠? 곡과 마곡의 전쟁이에요. 그러면 조금 전에 읽었던, 19장 아마겟돈 전쟁을 보세요. 19장 21절.

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자, 이렇게 아마겟돈 전쟁과 곡과 마곡의 전쟁은, 에스겔서의 곡과 마곡의 전쟁을, 한 전쟁을, 반복해서 그냥 표현한 거예요. 이것이 묵시문학의 특징입니다. 계시록은 전체적으로 반복기법을 쓰고 있어요. 리캐피츌레이션(recapitulation)이라고 그러죠? 리캐피츌레이션! 그것은 어떤 것을 강조하기 위해 쓰는 문학적 기법이에요. 그러니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같은 사건인 거예요. 그것을 반복해서, 점진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심판을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미래주의적 해석은, 문제가 많이 있어요.
계시록을 상징주의적 관점으로 해석을 합니다.
물론 이 상징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그렇게 좋은 단어는 아닙니다.
헨드릭스는 그래서 상징주의(象徵主義)라는 말 대신에, 심볼릭 페러렐리즘(symbolic parallelism)이라는 말을 썼어요.

​왜냐면은? 계시록 전체를, 이 땅의 역사와는 아무 상관없는, 완전한 상징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은 어디까지 가는가 하면, 에덴동산도 상징일 뿐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냥 그런 상징적인 묘사들을 통해서, 우리가 받을 교훈만 받으면 된다는 식의 해석을 한 사람들이 있다고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렇게 해석을 하죠? 종종! 우리는 그런 상징주의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계시록을 상징적으로 본다고 하는데, 그 상징적으로 본다는 것은, 바다에서 용이 나온다든지, 뭐 그 용이 열 뿔이 달려있다든지 하는 것은, 상징이죠? 물론! 그게 열 뿔이 달린 게 나오지는 안는다고요. 그것은 상징이지만, 있지도 않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사건은, 교회시대 전체에, 실제로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거예요. 즉 계시록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이라든지, 곡과 마곡의 전쟁은, 상징적인 단어들로 표현이 되어 있지만, 있지도 않을 사건을 설화(說話)로 꾸며서, 교훈을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 전쟁은, 교회시대 내내, 교회가 겪어내야 할, 전체 전투를 종합해서, 표현을 해 놓은 게, 아마겟돈이요, 곡과 마곡의 전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마겟돈 전쟁은, 무슨 미래에 있을 중국과 아시아가 뭐 합해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한다. 이런 특정한 사건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시대 때부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가 마귀의 공격을 대적하여 싸우는 전체의 전쟁을 다 종합해서, 아마겟돈이다 곡과 마곡의 전쟁이라고 표현을 해 놓은 거예요.

그러면 앞으로 아마겟돈 전쟁은 없나요? 아니요, 있다니깐요. 성경이 이야기 하는 대로 점점 더 심한 공격과 고통이 우리에게 인제 닥칠 거예요. 그리고 최후의 엄청난 마귀의 발악이 있을 거라고요. 그 모든 것을 다 종합해서, 한 전쟁으로 표현을 한 거예요. 적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한 인물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게 무슨 교황이다, 히틀러다, 이건 아니란 말이에요. 요한1서 2장 18절 보십시오.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한은, 그 시대의 적그리스도가, 거짓선지자가 많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고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있어왔고, 앞으로 더욱 거세계 발악을 하는, 적그리스도가 나올 것입니다.
그 모두를 가리켜 적그리스도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반복적이며, 종합적인 계념을 가지고 읽으셔야 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은요, 반복적이며 종합적인 개념을 가지고, 그것들을 해석을 해야지, 그냥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 역사적인 일! 이런 것으로 해석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시대를 통해서 교회가 겪어 내야할 일들과,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보호하시며, 우리 교회는 어떻게 안전하게 그 승리의 나팔을 불며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함을 보여주는, 위로와 격려의 복음이 적혀있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것을 당시에 그들을 핍박하던, 로마를 빗대어서, 바벨론으로 표기를 해서, 당시의 정황! 사건! 신화 등을 동원해서, 구약성경의 언어를 사용해서, 이야기 식으로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것이, 요한계시록이에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發見)하는 거예요.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명확하게 발견하게 될 것이며, 승리자요, 왕 노릇하는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찬란한 천국을 확인하고, 그 나라만을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문화가 있고, 그곳은 자연계가 있고, 그곳은 슬픔이 없고, 그곳은 눈물이 없어요. 그곳은 아품도 없어요. 거기에는 거짓도 없고, 죄도 없어요. 너무나 완벽한 곳이에요.

​살아 있는 존재! ‘리빙 네페시’들이 서로 자기의 목숨을 끊어가며 상대방을 섬기는, 그런 사랑으로 사랑을 해주는 그런 곳! 그 천국(天國)이에요. 거기에서 여러분들이 왕 노릇을 하게 될 거라는 것을, 이제 확인하시는 거예요. 계시록은 그거예요. 거기에서는 자연도 우리에게 순종합니다. 자연이 우리를 거스리지 못해요.

고스톱을 치다가 아무리 돈을 잃어도, 은행 잔고가 바닥이 안나! 갑자기 눈이 바짝 바짝 하시는 분들이 있네요. (하하하) ‘거기서도 친단 말이야?’ 그러면서 제가 지금 무슨 말씀을 여러분께 해 드리려고 하는지 이해하시겠죠? 또 나가셔서, 또 ‘우리목사님이 천국 가서도 고스톱 친다더라.’ 이렇게 이야기 하시면, 제가 굉장히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거기서 그런 왕 노릇 하는 자들이에요. 정말 행복하게 살 거예요. 계시록을 통해, 그곳을 확인하고 소망하십시오. 그리고 기죽지 마세요.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지금 잠시 내가 멸시당한다고 해서, 지금 내가 잠시 가난하다고 해서, 지금 내가 잠시 못 배웠다고 해서, 기죽지 마세요. 여러분은 그러한 왕 노릇할 분들이에요. 오죽하면 우리 교회에, 공주클럽이 다 있겠어요? 김유실 집사님이 거기 대표라고 그러죠? 그분들은 복음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런 존재들이에요. 왕 노릇 할 존재들이에요. 기죽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늘 한 이야기 다 잊어버려도 괜찮아요.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이겨라! 이겨라! 우리 교회 이겨라!’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게, 그 이야기 해주고 싶은 거예요. 계시록을 통해서! ‘이겨라! 이겨라! 내 아들아 이겨라! 내 딸아!’ 그것만 알고 가시면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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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계시록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설명하는 성경 전체에 결론부분으로, 현재 고난(苦難)을 당하고 있는 지상적 관점의 교회에게, 가시적으로 아직 보이지 않는 승리의 모습인, 천상의 그 교회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위로와 격려를 해주고, 또 이 땅의 고난 받는 교회에게, 그 고난의 정체가 뭔지, 그 고난의 정체를 밝혀 줌으로서, 힘을 실어주는, 응원의 책이다! 이렇게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은, 반복적이고, 종합적이며, 상징적인 계념을 가지고 접근을 해야 하고, 시간적으로, 연대기적으로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죠? 오늘도 역시 서론 부분으로, 계시록의 전체적인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고요. 그리고 계시록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문학적 장르를 살펴봄으로 해서, 계시록을 어떤 관점으로 읽어야 하는지를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면 지루해지죠?

자,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백성 교회에게 주는 책입니다. 교회가 아닌 언약 밖의, 그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절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수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많은 경고(警告)와 책망(責望)과 회개(悔改)의 권고(勸告)도 역시 교회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는 동시에 경고와 책망과 회개의 권고를 동시에 하고 있는 거예요. 용기와 격려는 우리 꺼고, 책망과 경고는 세상 사람들 꺼다. 그게 아니라고요. 모두 다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자, 요한계시록에는 인(印)의 재앙(災殃)! 나팔 재앙! 대접 재앙을 통해서,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審判)하는 모습이 나오죠? 그 장면들은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경고와 책망과 회개의 권고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라!’ 그리고 이미 구원 얻은 자들에게는, ‘너희들 구원받은 자로서, 어떻게 그렇게 살수가 있냐? 차던지 덥던지 해라! 내가 문밖에서 이렇게 문을 두드리고 있지 않냐? 제발 문을 열어라!’ 이렇게 우리에게, 책망과 경고와 회개의 권고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닥치는 그런 자연재해라든지, 기근, 전쟁 같은 그런 예비적인 심판을 보면서, 우리 하나님의 교회들은, 최종적인 심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거고 두려운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해일의 피해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신, 그 자연의 법칙이 조금만 어긋나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재앙이 닥치는데, 언젠가 하나님이 이 우주의 질서와, 이 자연의 법칙을, 하나님이 붙들고 계신 이 자연의 법칙을, 다 노아 버리시는 날! 그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바다가 수천 년 동안 그 금을 넘어 오지 않고 있죠? 어떻게 이 지구가 그 태양을 동일한 속도와, 동일한 각도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속 자전과 공전을 계속 하고 있습니까? 어떤 거대한 손이,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법칙을 붙들고 있다는 것이죠. 그것을 어느 날 하나님이 탁 놓아 버리면, ‘야! 이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재앙이 닥치겠구나! 그게 종말(終末)이구나!’ 그래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시 한 번 전투하는 그 모습으로, 세상을 살 수 있겠금, 우리에게 그런 책망과, 회개의 경고를 하고 게신 것입니다. 계시록은 이렇게 우리에게 일어나는 전쟁과, 기근과, 자연재해의 이유까지도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 신자들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계시록 11장 13절을 보시면, 여섯 번째 나팔을 불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실 수 있습니다. 보세요. 13절.

(요한계시록 11:13)

13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의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그렇습니다. 인, 나팔, 대접 재앙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동시에 받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을 계기로, 돌아오더라는 거예요.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그럽니다.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또 쌍둥이 빌딩이 폭파됐을 때, 동서남아시아에 대 재앙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달리던 길을 멈추고, 인간과 인생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계기가 되더라는 것이죠? ‘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네. 어! 이렇게 살다가 정말 큰일 나겠구나!’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회개의 시간! 은혜의 시간이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떻습니까? 똑같이 여섯 번째 나팔을 불었을 때, 살아남은 자들인데, 어떠한 부류가 있는지 한 번 보세요. 계시록 9장 20절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9:20-21)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어떤 부류는 회개하고 돌아오는데, 어떤 부류는 끝까지 무당굿하고, 이런 곳으로 가는 부류도 있다는 거예요. 끝까지 회개치 않고, 악한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요한 계시록은, 교회 시대를 통해서, 이 땅에 쏟아 부으시는 그 재앙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책망과, 회개의 권고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비적 심판을 하고 계신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계시록 2장 3장을 보면, 일곱 교회에 대한 책망이 나오죠? 그 책망도 역시 우리 거라고요. 일곱 교회는, 전체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교회를 상징하는 거라 그랬죠? 다 우리 겁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사탄이 어떻게 세상을 미혹하고 있는가도, 자세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물론 일곱 교회에 이야기를 통해서, ‘아! 사탄이 교회를 이러이러한 모양으로 미혹을 하고, 밀 까부르듯이 까부르겠구나!’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야! 그런 상황이 닥칠 때, ‘야! 이건 사탄의 미혹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아라!’라고도 설명을 해주지만, 13장에 가보면, 더욱 더 아주 자세하게, 세상이, 이 세상권세 잡은 자가, 어떻게 우리를 미혹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계시록 13장 1절로 가겠습니다. 13장에 보면, 용과,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나오죠?

(요한계시록 13:1-3, 13-14)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예,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이다. 이런 거는 지금 신경 쓰지 말라 그랬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제가 나중에, 고 대목이 나올 때, 구약성경을 인용해서, 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머리가 일곱이라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힘! 권력을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그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그러죠?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곰의 발 같고, 사자의 입 같다. 그런다고요. 이것은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다니엘서 7장에, 바다에서 올라오는 네 짐승의 복합체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거기에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의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절)

3 그의 머리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거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그러죠? 뭐를 흉내 내고 있죠? 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죽게 되었던 것 같았다가, 살았다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있습니다. 13절부터 한 번 보겠습니다.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 부터 땅이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여러분!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어떤 게 생각납니까? 어떤 장면들이? 이 시대에 어떤 교회들에서 행해지는, 은사집회다, 성령집회다, 이런 게 떠오르지 않으세요? 자 이 13절부터의 내용은, 이 세상권세 잡은 자가, 성령을 그대로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용과,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과, 또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이렇게 정확하게 삼위일체를 흉내 내고 있어요. 용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권세를 줍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이적과 기사를 동원해서, 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 같은, 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섬기게 만들어 준다고요.

자, 이렇게 정확하게 세상은, 삼위일체를 흉내 내면서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 거짓 목사! 거짓 교회들을 세상에 많이 세워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끔 꾸미는 거예요. 거짓 가르침! 복이나 신비! 이런 것을 동원해서, 인간에 죄성을 충족시켜 주고, 이 세상만을 바라보게 만들어서, 평생 예배당 다니고, 평생 예수 믿게 만들고, 지옥가게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사탄도 머리가 있는데, 지금도 밤에 그냥 케찹 흘리면서 나타나서, ‘믿을래? 안 믿을래?’ 이렇게 미혹(迷惑)하겠습니까? 교회를 왜 무너뜨려요? 사탄도 머리가 있는데! 교회라는 간판에 붙인 거 많이 세워줘요. 그리고 거기를, 세속적인 오락장소나, 친목계나, 무당짓거리 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내서, 소위 부흥(復興)이라는 것을 일으켜 준다고요. 그래서 크게 만들어주죠? 그렇게 크게 만들어 주면, 사람들이 ‘어? 하나님이 없이 어떻게 저렇게 커질 수 가 있어?’ 그리고 그게 진짜인 줄 알고 간다 말이에요.

그런데 정말 그 말씀 앞에 바로서서, 올곧게, 세상과 싸우며, 분투(奮鬪)하며 나가는 그 하나님의 교회는, 그러한 교회들을 많이 이렇게 세워져서, 그 교회들을 화려하게 부흥시켜주면, 이 교회들은 당연히 힘을 잃게 되겠죠? 잔 맥아더 목사님이 쓰신 책에 보면, 사단은 이제 전략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너 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믿어? 죽여!’ 이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참 교회 옆에다가, 엄청나게 큰 화려한 교회들을 많이 세워준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이 하나님의 참 교회가, 사람들이 막 좇아가는, 저 화려한 교회들을 보면서, ‘혹시 저게 진짜 아닌가?’ 이렇게 힘이 빠지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죠?

보세요. 이 계시록에도, 이 세상 권세 잡은 자들은, 하나님 그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그대로 흉내를 내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그대로 흉내 내서 들어온다니깐요. 그렇다고 큰 교회가 다 가짜란 말은 아니에요. 그런데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난주에도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고, 끝까지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요. 어떻게 우리를 끌고 가실 것인지 계시록 12장 13절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2:13-17)

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러죠? 남자는 예수님이고, 여자는 교회라고 그랬습니다.)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받는다, 그러죠?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우리의 인생! 내지는 교회! 교회시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육을 받는다는 건 뭐예요?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지키시는가? 15절.)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그러죠? 성경에서 ‘물’하면, 뭐를 상징하죠? 생수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말씀이죠? 뱀이 뿜어내는 물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 조심하셔야 돼요. 여러분 지금 얼마나 우리가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까? 식당에 가도, 적어도 네, 다섯 개는 있죠? 말씀 테이프, CD들이! 그러나 뱀이 뿜어내는 거짓 물이 있다는 거예요. 거짓 말씀이 있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그 물에 떠내려 간다니깐요.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들은 어떻게 된다고요? 그 밑에 줄 보겠습니다.)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그러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거예요. 그 말씀들은 걸러 낼 수 있게끔, 만들어 주신다니깐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17절. 그러니까)

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하나님의 교회는, 아무리 미혹하려고 해도, 그런 기복이나 신비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끝까지 지키면서, 참 예수님을 증거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용이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이게 무시무시한 우리의 영적 전투의 현장이라고요. 용이 여러분을 공격하기 위해서 바다 위에 섰더라, 그래요. 그 무시무시한 용이! 그러니까 참 교회들에게 환란과 고통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용이 우리를 공격하려고 모래 위에 서있다고 그럽니다. 우리가 얼마나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교회를 미혹하는 세력을, 히브리 사람들이 완전수인 칠(7)과 삼(3)을 써서, 하나님을 나타내던 칠칠칠(777)과 비교해서, 비슷하게 흉내는 내는데 가짜인 육육육(666)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그게 계시록 13장의 이야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요한계시록만 잘 공부해 놓아도, 거짓 복음에 놀아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의 문학적 장르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왜 요한계시록의 장르를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가하면은, 책은 그 장르에 맞게 글을 그 장르에 맞게 읽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은 어려가지 문학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시(詩)가 있는가 하면, 역사서가 있고, 편지가 있는가 하면, 지혜 문서가 있고, 묵시문학도 있고, 그렇다고요. 그것을 각 장르에 맞게 읽어야 되죠? 그 소설을 읽을 때, 시처럼 읽으면 안 되죠? 시를 읽을 때 소설처럼 읽으면 안 되잖아요? 그죠? 시 같은 걸 읽을 때는, 뭔가 상징하는 것들을, 우리가 머릿속에 생각하면서 읽어야 하고, 소설은 그대로 읽어야 하고, 이런 차이가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장르를 한 번 살펴봄으로써, 계시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도움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계시록은 크게 세 가지 문학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첫 번째 묵시문학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구요.두 번째로 예언적인 요소가 들어있구요. 세 번째로 서간문 즉 편지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계시록 1장 1절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여기에서 계시(啓示)라고 번역이 된 ‘아포칼립시스’라는 이 단어는, 계시(啓示)! 즉 ‘감추어져있던 것을 드러내다, 알려주다’ 이런 뜻이 있는가 하면, 당시 고대사회에 유행하던, 묵시문학(默示文學)을 가리키던 말로도 쓰였어요. 그래서 학자들이, ‘아! 이것은 묵시문학을 가리키는 거다.’ 어떤 사람은, ‘아니다. 이건 계시다.’

이렇게 둘로 갈라져 있는데, 제 생각에는, 여러분들이 이것을 이해하실 때, 어차피 비밀을 드러내는 것을 계시라고 한다면, 이 묵시문학이라는 것은, 이 계시 안에 들어있는 하나의 장르에 불과한 거죠? 이 묵시를 써서 이 계시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 비밀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이 묵시를 사용한 것이다. 뭐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되겠어요. 그거는 뭐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계시록을 읽어보면요, 계시록이 당시 고대사회에 유행하던, 묵시문학적인 요소가, 많이 내포되어 있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어요. 그러면 묵시문학의 특징이 뭔지를 알아야 여러분이, 그 어떤 부분이 묵시문학의 내용인지를 알 거 아닙니까? 묵시문학의 특징은, ‘일정한 전개과정을 가진, 이야기 형태를 의미하는, 서사적인 골격을 가진, 초월성을 내포하는 거’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서사적인 골격이라는 것은, 내러티브 프레임 워크(narrative frame work)를 이야기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있다는 거예요. 서론! 본론! 결론! 이렇게! 계시록도 그렇게 서론! 본론! 결론인 서사적(敍事的)인 골격이 있구요. 그리고 이 계시록에는, 초월적(超越的)인 면이 있죠? 시간적인 초월이 있고, 공간적인 초월이 있어요.

공간적인 초월은 어떤 겁니까? 하늘에 교회가 있고, 이 땅에 가시적인 교회가 있어요. 이 땅에 가시적인 교회가 있는데, 그건 하늘에, 천상의 교회의 모습이, 계시록엔 등장한다고요. 시간적인 것은요? 우리는 마지막에, 그 종말에,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그 축복을, 지금 시간을 초월해서,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다고 그렇게 계시록은 설명을 한다고요.

이렇게 계시록에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초월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묵시문학의 특징이에요. 이야기의 형식을 띄면서,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있고, 서술적 프레임을 가지고, 초월적인 것을 가지고, 뭔가를 설명하는 것! 그러니까 여러분! ‘지옥의 묵시록’이라는 그 영화를 보시면, 그 베트남전이라는 전쟁을,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 악(惡)이라는 어떤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이 본 그런 환상(幻像)! 이 환상이 이야기 하는 것을 갔다가 표현하기 위해서, 상징 같은 것을, 자기가 갖고 있는 성경의 지식이나, 구약적인 내용이나, 당시의 설화나 소문 이런 것들! 당시 유대인들이 금방 이해할 수 있었던 그런 이야기의 내용들을 갖고, 이야기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런 부분들이 요한계시록에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 마치 애니메이션(animation)처럼 눈앞에서, 회화적인 묘사와, 화려한 상징으로, 강한 인상을 주며, 펼쳐 보이는 거예요. 그게 묵시문학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천사와, 짐승과, 숫자들을 만나게 되죠? 그리고 번개를 보고 뇌성(雷聲)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지진과 전투도 목격하죠? 계시록을 읽으면서! 그 보석이 등장하고, 한 여인이 무서운 용과 마주선 것도, 우린 보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흰말을 탄 사람을 보기도 하고, ‘할렐루야!’ 합창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이라는 것은, 그런 초월이나 상징을 통해서, 어떤 대 원칙을 설명하는 것이지, 그런 어떤 특정한 사건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은요, 뿔이 열 개가 나고, 머리가 일곱 개인 짐승을 본 것이 아니라, 그가 본 환상을, 자기가 갖고 있는 어떤 문학적인 자질과, 복음에 관한 성경적인 지식들로, 잘 그려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요한이 계시록을 쓸 때, 현상을 보고 바로 쓰고, 보고 바로 쓰고, 이런 것이 아니라, 요한은 그 환상을 다 보고, 오랫동안 연구하고 공부했다고요.

이 계시록을 읽어 보면, 아주 과학적인 구조와, 그런 치밀한 이야기 전개형식을 우리가 볼 수 있다고요. 그러므로 우리는 묵시 문학을 대할 때, 그 환상이 묘사하고 있는, 그림을 분해하고자 시도해서는 안돼요.. 그냥 그 전체의 환상을 큰 틀로 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만 들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음녀! 뭐 짐승! 인! 나팔! 대접! 이런 것들을, 퍼즐 맞추듯이 짜 맞추려고 시도하는 것! 그것은 시간 낭비에요. 그렇게 짜 맞추다 보면, 그 환상 전체가 주는 메시지를 놓치는 수가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드릴게요. 계시록 17장 1절로 가시면,

(요한계시록 17:1-5)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여기 여자! 이 음녀의 환상을 볼 때, 읽으실 때, 그 여자가 탄 붉은 빛 짐승은 뭐고, 그 짐승의 몸에 있는 이름이 뭐고, 일곱 머리는 뭐고 열 뿔은 뭐며, 그 여자가 자줏빛 옷과, 붉은 빛 옷을 입고 있다고 하는데, 그 옷은 뭐고, 금, 은, 보석, 진주, 금잔은 무엇인지, 그런 것을 파헤치려다가, 오히려 그 환상이 이야기하려는 메시지를 놓칠 수 가 있다는 거예요.

물론, 그런 것도 중요하죠. 그런 건 제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지만, 그렇지만 그런 묵시적 환상이 나올 때는, 먼저 그 전체가 가르치는 것을 보고, 그 다음에 분석을 하라는 거예요. 이 음녀의 환상은, 이 여자의 환상은, 5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바벨론! 즉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로마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와, 핍박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리고 현대 사람들에게는, 물질주의나, 쾌락주의로 잠입해있는, 마귀의 세력을 이야기 하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그 환상을 보면서 여러분이 그것을 캐치하셨으면, 일단은 넘어가세요. 그리고 전체적인 그림을 다 그린 다음에, 그 다음에 왜 이게 열 뿔이고, 자주 빛 옷이고, 금 은 보석의 잔을 들고 있는지, 그것은 사실 이차적인 문제라고요. 그러니까 너무 거기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묵시문학적 요소를 대할 때는 이렇게 여러분이 읽어 주시구요.

두 번째로 이 요한계시록은, 예언(豫言)의 말씀이라고 그러죠? 자, 3절 한 번 보세요.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그래요. 요한계시록을, 요한은 ‘예언의 말씀이다.’ 그런다고요. 그럼 우리가 예언하면, 쉽게 다가오는 의미가, 앞일을 미리 말하는 거죠. 그것을 우리는 예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미래의 일 뿐만 아니라, 이 교회시대 전체의 이야기라고 제가 지난주에 말씀 드렸죠? 그러면 여기에서 요한이 이야기 하고 있는, 이 예언의 말씀이라는 뜻이 뭘까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예언은, 단순히 앞의 일을 예견하는 것! 그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그 예언의 말씀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그들이 선포했던 수많은 그 예언의 말씀이, 항상 앞의 것만을 이야기 했나요? 그렇지 않다고요. 과거에 행하셨던 하나님의 사역을 해석해서,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현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지, 적용함으로써, 범죄 한 이스라엘을 각성(覺醒)시키는 과거적 예언도 있었어요.

그리고 미래에 관한 일이라 할지라도. 과거와 철저하게 관련되어서 전개되어질 것을. 이야기했다고요. 예를 들면. 이사야가 이사야서 40장에서 66장까지의 걸쳐서. 바벨론 포로 귀환을 예언하죠? 분명히 그것은 앞에 있는 일을 예언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이사야는 출에굽사건을 근거로 해서, 그거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과거의 것을 가지고, 앞의 것을 이야기 한다고요. 그리고 이사야서 65장에 나오는,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의 그 회복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거는 첫 창조하고 노아의 언약의 근거로, 기대되고 있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예견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해석해서, 현재에 우리에게 경험되어지고 있고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구속사건과, 하나님나라를 설명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요!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미 일어났던 출애굽 사건을 근거로 해서, 구속사건을 예언했던 것처럼, 요한은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근거로 해서, 현재의 경험되고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그 구속사건을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계시록을 예언의 말씀이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단순히 앞에 있는 일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예언에 대한 데피니션(definition)을 여러분이 잘못 갖고 계시면, ‘이게 예언의 말씀이다.’ 여기서부터 잘못 출발하는 거예요. ‘아, 그러면, 이것은 미래에 있을 일만 이야기 하는 건가 부다.’ 이렇게 생각하시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으로 말미암는 구속의 이야기와, 하나님나라에 대한 것만, 기록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예언의 말씀의 진의(眞意)인 것입니다.

근데 엉뚱한 예언을 찾아다닌 사람들이 있죠? 예배당 안에서도요. 마치 새해가 되면, 마치 사주팔자 들고, 점쟁이들을 찾아가서, 이 땅의 미래를 점치러 가는 사람들처럼 말이죠? 올해가 신유년(辛酉年)이죠? 닭의 해예요. 신자 진! 사육 축! 인오 술! 이런 게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삼합이거든요. 그래서 올해가 신유년이니까, 뱀띠, 소띠들이 아주 잘 될 거예요. 여러분들이 교회 안에서 쫓아다니는 이 예언이, 이런 종류 아니에요? 그죠?

사주팔자(四柱八字)가 뭔지 아세요? 사주(四柱)? 연(年)! 월(月)! 일(日)! 시(時)! 네 가지 기둥이다. 그래서 사주라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이런 10간(十干)과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이 12지(地) 이것을 막 조합해서, 갑진(甲辰). 갑술(甲戌). 기축(己丑), 기사(己巳) 이렇게, 연월일시를 두 자, 두 자, 두 자, 두 자로 만들어 놓아서 이것을 8자라 해서, 그래서 팔자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사주팔자라는 것은, 아!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난 연월일시는, 어떻게 못 바꾸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은 각기 자기가 가지고 갈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통계적으로 이렇게, ‘아! 이때 이렇게 태어난 사람은, 이러한 사주팔자를 갖고 있는 사람은, 이렇게 살더라. 이런 사주팔자를 갖고 있는 사람은 이렇게 살더라.’ 해서 통계로 만들어 놓은 게, 주역(周易)이고, 토정비결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예배당 안에서도 그런 걸 쫓아다니시냐구요? 그거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정말 예언한다고 하는 사람들 쫓아다니면서 받으려고 하는 예언이, ‘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거기서 영원히 살까요?’ 뭐 이런 거예요? 그거는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잖아요? 정말 예언을 한다고 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여러분들이 알고 싶은 건, 이 땅에서의 여러분들의 미래 아닙니까? 내년에, 올해에, 나는 어떻게 얼마만큼 복을 받으며, 어떤 것을 조심해야 될까? 그리고 그 예언을 한다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 그 예언한다는 사람들이 해주는 게, 대표적인 게, 그거 아니에요? ‘당신! 이러이러하지? 당신 성격 이러 이런 거지?’ 그건 자기가 더 잘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왜 감격해요? 거기에서!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처지! 상황! 이런 것은, 다 하나님이 나를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거기에 데리고 가게 만들기 위해서 허락하는, 그러한 감사한 일들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감수하겠다! 이게 그리스도인 아닙니까? 그런데 올해에, 내년에, 어떻게 될 거를 왜 여러분이 궁금해 하시냐고요? 아직까지도 그런 분들은, 하늘의 가치보다는, 이 땅의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닙니까? 가서 크게 얘기 해주세요. ‘너나 잘 살아라!’ 그런 사람들 한 번 보세요. 그 사람들 정말 잘 살던가요? ‘너나 잘 해!’ 가서 얘기 해주세요.

그리고 그 사람들한테 들었던 그 얘기가 다 맞아요? 그 사람보다 백배 더 자세하게 제가 얘기해드릴 수 있다니깐요. 연월일시만 갖고 오세요. 복채 안 받을 태니까! 그걸 예배당 안에서 원하시냐고요, 여러분? 그걸 예언의 말씀이라고 여러분 그렇게 알고 계시냐고요? 그 사람들 벌 받을 거예요. 여러분 확실히 알고 가셔야 돼요.

예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인가? 과거의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서 일으킨 사건이,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자세히 풀어서 해석해주는 것을, 예언의 말씀이다. 그러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은 그런 의미에서, ‘예언의 말씀이다.’라고 그러는 거예요. 단순히 앞에 일어날 어떤 일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시란 말이에요.

여러분! 예언 받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성경을 열심히 읽으세요. 예언의 말씀이라 그러잖아요? 이렇게 명확히 예언의 말씀이 있는데, 뭘 더 받으시겠다는 거예요? 뭘 더? 또 다른, 우리에게 예언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가 필요하다면, 이 성경은 완전하지 않다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 부족한 부분이 어떤 사람에게는 주어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안주어지면, 우린 큰일 난거 아니에요? 그 부족한 부분 못 받으면 어떡해요? 그 말도 안 돼! 조금만 생각해 보시면 아실 걸 어떻게? 그렇게 그런 데 쫓아다니냐구요? 여러분 주변에도, 뭐 ‘예언 받으러 가자!’ 어쩌구 저쩌구 그러면은, 저한테 데리고 오세요 그 사람들보다 백 배 더 정확하게 맞춰줄 수 있어요. 제가! 올해 일, 내년 일을! 그런 거 원하시는 거예요? 정말?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그런 것들 아닙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또 다른 문학적 특징은, 서신(書信)이라는 것이에요. 서신! 편지라는 것이죠? 서신이라는 것은, 무시간적인 상황에서 기록되지 않는 것입니다. 편지라는 것은 보통,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한된, 일차적인 독자인, 그 수신자의 상황을 고려해서 기록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서신이다. 편지다.’라는 것은, 그것을 받는 어떤 실제적인, 현실적인, 독자가 수신자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서머나교회에게, 에베소교회에게, 버가모교회에게, 두아디라교회에게, 이렇게 해 놓고, 엉뚱한 이야기 쓸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편지는 현실감이 있는 거예요. 실제적인 것이죠.

자, 첫 번째 요한계시록의 수신자(受信者)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였습니다. 그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이 일곱 교회는, 하나같이 문제점을 갖고 있었어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이 주어졌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영적 전투에 노출되어 있었고, 영적 전투에서 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고요. 그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 계시록이 주어졌다는 것을 아셔야 돼요. 그래서 일곱 교회에게 주어지는 편지의 마지막마다, 마치 후렴구처럼, ‘이기는 자에게는, 이기는 자에게는, 이기는 자에게는,’ 그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이렇게 일곱 교회에게 주어진 편지를 보면서, 당시 초대교회들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거고, 그 일곱 교회를 밀 까부르듯이 까부르려 했던 사탄의 세력이, 지금 이 편지의, 이 요한계시록의 동일한 수신자인, 이 시대를 비롯한 전체 하나님의 교회에, 동일한 세력으로 공격을 가할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편지라는 양식을 동원해서, 좀 더 현실적으로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은, 이 편지의 형식도 동원을 한 것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좀 더 효과적이고, 현실적으로 복음을 우리에게 체감케 해주기 위해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했던 것처럼, 선지적 전통에 입장에서, 예언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고,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를 통해서, 천상적인 실체를 보여주고, 현실을 정확하게 통찰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요. 서신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추상적인 대상과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구체적인 대상과 문제에, 현실적이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적인 요소와, 예언적인 요소와, 서신적인 요소가 함께 섞여서, 기록되어진 것입니다. 아시겠죠?

그러면 계시록의 구조를 간단하게, 우리가 나누어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의 구조를 나눈다는 것은, 학자들이 어떻게 하면은, 성경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할까를 고민해서 나누는 게 구조예요 그래서 학자마다 구조가 아주 다 틀립니다. 열 명 책을 보면, 열 명이 다 틀려요. 그래서 저도 참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그 설교의 수위를 어느 정도로 맞출까? 정말 많이 고민했는데….

왜냐하면 그 수위에 따라서, 구조도 달라져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자세하게 설명을 하려면, 구조를 아주 쪼개야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제가 공부해 보니까, 큰 그림을 놓치게 되고, 자칫 지루해질 그런 위험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결론을 내리기를, 여러분이 주석 없이 요한계시록을 읽으시면서, 하늘에 소망만을 바라보고 감격할 수 있는, 고정도까지만 가자! 고렇게 결론을 내렸어요. 그것도 물론 힘들죠? 그것도 물론 쉽지 않습니다마는! 그래서 저는 조금 간단하게 구조를 잡았습니다. 여러분이 싫증내지 않고, 아주 이해하기 쉽게, 그냥 뭉텅 뭉텅 이렇게 구조를 잡았어요.

여러분이 받으신 그 핸드아웃을 보시면, 여러, 정말 포트레스라든지, 보카미라든지, 이러한 계시록과 신약의 대가들이, 어떻게 계시록을 나누었는지, 그걸 나눠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좀 더 깊게 공부하실 분들은, 그것을 참고해서 공부하시면 되겠어요. 저는 조금 간단하게 구조를 잡았어요. 여러분이 싫증내지 않고, 이해하기 쉽게 그렇게, 계시록을 읽으실 수 있게요.

그래서 제가 중간에, 계시록 중간에 이렇게 들어가 있는 삽입들이 있거든요. 그 삽입들은, 다 그냥 커다란 덩어리에다 이렇게 묶어 버렸어요. 계시록에는 몇 가지 삽입들이 나오거든요. 그것까지 이렇게 쪼개 놓으면, 처음부터 머리가 너무 아파서, ‘아휴! 못하겠다!’ 뒤로 자빠지시는 분들이 계셔서, 그 삽입들은, 다 그냥 커다란 덩어리에다 그냥 묶었어요. 그 삽입들은 나중에 제가 본문에 들어가서 자세히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자, 여러분이 계시록의 큰 그림을 먼저, 쉽게 그리실 수 있는, 그런 구조를 저는 이렇게 나눴습니다. 먼저 계시록 1장 1절에서 8절까지를 서론으로 두었어요. 그것은 누구나 다 동일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장 6절에서 21절까지 마지막절까지를 결론으로 그렇게 봅니다. 그것은 다 똑 같은 거예요. 그런데 그 가운데 있는 본론! 그 서론과 결론 사이의 그 내용을, 일곱 부분으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가, 일곱 교회를 설명하는, 계시록 1장 9절부터 2장 3장까지를, 첫 번째 부분으로 나누었구요. 두 번째가 일곱 인을 설명하는, 4장부터 7장까지예요.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제가 4장과 5장도 그냥 일곱 인에다가 붙였어요. 그리고 그 7장에는 1절에서 17절까지 삽입이 들어가 있는데, 그런 것들이 일단 다 무시하세요. 그냥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이렇게 알고 계세요. 세 번째가, 일곱 나팔을 설명하는 8장에서 11절까지구요. 네 번째가, 요한계시록에 주제장이라 할 수 있는 12장부터 14장까지입니다.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거기에는 여자가 뭔지, 남자 아이가 뭔지, 용이 뭔지, 666이 뭔지, 144,000이 뭔지, 이런 것들이 나오는 거예요. 거기에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내용이, 요약되어서 나오는 부분이 바로, 12장에서 14장까지거든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은, 이 12장에서 14장까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카에즘’ 구조라 그래요. 카에즘 구조가 뭐냐면, 대칭구조거든요.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은, 우리는 시조 같은 거 할 때, 3 4 3 4 3 5 4 3 그렇게 하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런 글을 쓰는 형식이 있잖아요? 그것처럼 유대인들은, 그들이 글 쓰는 형식이 이런 대칭구조 카에즘 구조를 갖고 있다고요. 어떤 가운데 있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기부터 이렇게 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강조를 딱하고, 그다음에 또다시 그것을 이렇게 …. 그러니까 양쪽은, 가운데를 향해서 이렇게 수렴되어지는 구조를, 우리가 카이즘 구조라고, 대칭구조라고 그래요. 자, 그렇게 지금 12장에서 14장까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가 일곱 대접을 설명하는, 15장에서 16장까지예요. 그리고 여섯 번째가, 마지막 심판을 묘사하고 있는, 17장에서 21장 8절까지! 그리고 일곱 번째가, 영광스러운 천국성취를 보여주는 21장 9절에서 22장 5절까지의요. 그리고 인제 22장 6절부터는 결론으로! 그러니까 서론 결론만 딱 여러분이 아시고, 그 나머지 부분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그래서 일곱 부분은, 일곱 교회! 나팔! 인! 대접! 그리고 12장에서 14장까지의 그 주제! 천국의 모습! 이렇게! 그냥 머릿속에 그렇게 크게 덩어리로만 이렇게 알고 계세요. 그 덩어리를 갖고, 오늘 가셔서,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거예요. 계시록을요!

자 그렇게 서론과 결론사이의 본론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었고, 그 일곱 부분은 또 일곱 개로 나누어지죠?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뭐 이렇게 나눠진다고요. 그거는 한 번 자세히 본문에 들어가서 한 번 살펴보자고요, 그리고 그 일곱 개로 나눠진 그 부분은, 다 각기 교회시대를 나타내고 있어요. 일곱 인도, 교회시대 전체에 일어나는 일이고, 나팔도 마찬가지구요. 일곱 대접도 마찬가지에요. 12장부터 14장까지 내용도 결국 마찬가지예요. 전부 교회시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꼭 염두에 두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조금 더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실 거예요.

자,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여러 가지 문학 장르를 동원하고, 치밀한 구조로, 우리 교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그 사랑을 근거로 한 권고와, 책망이 기록되어진 책입니다. 왜요? 이기라고! 요한계시록 하면은 뭘 떠올리라 그랬습니까? 이겨라! 이겨라! 이거예요. 우리 교회 이겨라! 내 새끼들 이겨라! 그래서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해 놓은 거예요. 그리고 이기는 방법까지,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놓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계시록 12장 11절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2:11)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

그러죠? 저는 사탄이에요. 뭐로 이겼다고요?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 그리고 자기의 증거하는 말! 증거하는 말이 뭐예요? 믿는 자들이 증거하는 말! 복음이죠? 뭐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 분의 그 피와, 우리가 갖고 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 그것밖에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무기가 없다고요. 성경은 이렇게 명확하게 얘기 해주고 있어요. 무슨 여러분들의 신비나, 뭐 예언이나, 기적이나, 여러분의 분투하는 노력이나, 이런 것을 가지고 세상을 이길 수가 없어요. 정확하게 얘기해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과, 말씀 이외에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렇게 결론까지도 이야기 해줘요.

그러니까 여러분! 오늘 가셔서, 더 진지하게 머리 딱 묶고, 계시록 한 번 더 읽으세요. 아무쪼록 이 요한계시록! 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여러분과 제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고, 더욱 더 힘차게,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게 되는, 용기와 격려를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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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요한계시록 1:1-3)

요한계시록의 그 서론 부분인, 계시록 1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고 이렇게 시작을 하죠? ‘계시(啓示)’라는 것은 제가 말씀드린 대로 가려져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계시라 그러죠? 아포칼립시스! 우리가 성경을 계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추측할 수도 없는,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비밀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드러나는 책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을 계시(啓示)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2장 9절로 가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9-10)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아멘.

자, 이렇게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할 하늘의 일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시는 것을, 우리가 계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유일하게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오늘 확인하고 가셔야 됩니다. 성경은 계시고, 그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에 하신 일에 관해서만 기록되어져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복음(福音)이라고 부르죠?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힌트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다른 이야기는 없어요.

자, 제가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들이겠습니다. 가인과 아벨과 셋의 이야기 아시죠? 가인이 아벨을 때려죽이고,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셋을 주신단 말이에요. 우리는 가인과 아벨과 이 셋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자손의 그 계보(系譜)는, 무죄한 자의 흘린 피로 이어진다는,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셋의 이름이 무슨 뜻이라 그랬죠?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신 자!’ 예수 그리스도가 죽고, 우리가 태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통해서, 새롭게 회복될,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즉 이 남은 자들을 감싸 안으신 예수께서, 저주의 비를 맞고, 대신 방주가 죽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자들이 살아나는 것! 노아의 방주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한 사람이 복에 근원이 되어서, 그 복 받은 아브라함을 끌어 올렸더니, 그 후손들이 줄줄이 타고 올라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죠? 거기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하세요. 그거 아십니까? 여러분? 이 땅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해 냈더니, 그 안에 줄줄이 따라 올라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의 구원(救援)이라고요.

그게 그리스도와의 연합(聯合)이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가 되셨다는 의미가 그거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건져 냈더니, 몸 뚱아리가 따라 올라오는 거예요. 바로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니온 크라이스트(Union Christ)!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살펴볼 수 있는 거구요.

또 자기를 죽일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을 올라가는, 그 이삭을 통해서, 자신이 매달릴 나무를 지고 올라가는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죽어야 할 자가, 준비되어진 어린 양이 대신 죽음으로써, 살아나게 되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는 이삭의 삶을 통해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시죠? 아브라함이 내가 올 때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했다. 그러죠? 바로 아브라함이, 이 이삭의 장면에서, 예수님을 본거라 말이죠?

그리고 얍복 강가의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설명해주십니다. 하나님과 겨뤄서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그 이기적인 축복만을 받아내려고 하는, 그 불가능한 인간들을, 하나님은 죽여 버리고, 다시 살리는 방법을 통해서, 그들을 새롭게 만들어서 구원해 내시겠다는 십자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얍복 강가의 사건이에요.

히브리 사람에게 있어서 이 ‘환도뼈’라는 것은, 전인(全人)! 전 존재를 가리키는 거거든요? 이 환도뼈가 부러졌다는 것은, 죽었다는 거예요. 야곱이 죽었어요. 죽고 다시 살아니니까, 하나님이 이름을 바꿔주는데 뭐라고 주시죠? 승리(勝利)!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바꿔 주죠? 환도뼈가 부러져서 죽었으면, 그건 진 건데, 왜 승리자라는 이름을 주냐 말이에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승리를 이루어 내셨고, 그 승리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실, 십자가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거예요. 뭐 얍복 강가의 이 야곱의 이야기를 가지고서, 하나님께 죽자 사자 매달리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더라! 이거는 바보 같은 성경 해석입니다.

자, 요셉을 통해서, 또 우리는 무죄한 자가 고통을 받음으로써, 어떤 백성 전체가 구원을 받는, 그 예수를 우리는 읽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요. 또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가 어떤 것이며, 또 그로 말미암아 건져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되는지를, 보여주시는 거예요. 유월절 어린양들이 죽죠? 예수님이 죽으시는 거예요. 그 피가 인방과 문설주에 발려진, 그 집 아이들만 살아난다고요.

그리고 그들이 홍해를 건너죠? 홍해를 건넌다는 것은, 이제 애굽하고 완전히 작별하는 거예요. 죄에서 건져 내지는 것이죠? 그리고 그 광야의 40년의 삶을 살게 됩니다.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와, 생수와, 놋뱀 사건을 경험하죠? 그리고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습니다. 그리고 옛 사람이 다 죽고, 새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죠? 이것이 정확하게 예수님의 삶이라고요. 정확하게 예수님의 삶이고, 여러분의 삶이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은 이렇게 계속, 예수의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똑같이 그 이스라엘의 삶을 먼저 살죠? 당시에 에굽에서는 히브리 사내아이는 모두 죽여 버리라는 바로의 명령이 있었어요. 그런데 모세는 살아납니다. 그리고 마치 홍해를 건너듯이, 물에서 건져지죠? 모세는요! 그리고 광야에 40년의 기간을 모세도 살아요. 미리! 미디안 광야에 가서! 거기서는 뭘 하는 거죠? 모세가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모세를 시험하는 기간이에요. 40년이! 그 다음에, 그 기간을 거치고 난 다음에, 시내 산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죠? 바로 이것도 똑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 돌판을 받아서 내려오는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섬겨요. 그리고 ‘이가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낸 여호와다!’라고 이야기 하죠? 그러니까 모세가 돌판을 깨버린다고요. 그 돌판은 어떤 돌판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하셨고, 하나님이 쓰신 거예요. 그것은 ‘거룩’을 상징하는 거예요. 거룩한 것은 죄와 함께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죄가 보이니까, 이 거룩! 이 돌판은 깨져야 되는 거예요. 그것은 심판을 상징하는 거죠?

그리고 다시 올라가죠? 모세가 올라가서 어떻게 합니까? 모세더러 돌판을 준비하라고 그러고, 하나님이 쓰시죠?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합쳐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들을 가나안으로 끌고 가신다는, 예수를 이야기 하는 게, 바로 그 십계명 돌판이 깨지는 사건이에요. 모세의 성질이 더러워서 깬 거 아니에요. 여러분!

사사기에 또 사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셔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인지, 그런 바보 같은 사사들을 들어가지고 쓰신다고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사람들에 눈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약하고, 바보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그 구원을 이룩해 내신다는 것을, 사사기를 통해서 ‘예수’를 보여주는 거예요. 거기에서 그 용맹스러운 사사의 용기를 본받자 이게 아니라고요.

자, 그리고 엘리야를 통해서, 또 한 번 예수님을 보여주시죠?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850대 1의 전투를 마치고 난 다음에, 그 이세벨의 저주의 전갈을 받습니다. ‘너도 죽여버린다!’ 그러니까 로뎀나무 아래 가서, 머리를 박고 덜덜덜덜 떨면서, ‘나를 죽여주십시오!’ 그런다고요. ‘하나님! 나를 죽여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이 어떻게 합니까? 까마귀를 보내서, 떡과 물을 보낸다고요. 그리고 마치 홍해를 건너듯, 그릿 시내를 건너서, 광야 40일을 걸어서, 시내 산, 호렙 산으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난다고요. 그런데 이 엘리야가 그 광야 40일을 무슨 힘으로 걸었다 그래요? 떡과 물의 힘으로 걸었다 그러죠? 만나와 생수! 이렇게 구약 전체는 다 그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과, 동일하다고요. 예수님은 헤롯을 피해서, 애굽으로 피신하시죠? 그리고 그 호세아서의 예언을,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 그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애굽에서 나온다고요. 애굽에서 출애굽을 하시는 거예요. 새로운 출애굽이죠?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홍해를 건너시죠? 언제 예수님이 홍해를 건넜어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잖아요? 성경은 세례를 받는 것을, 홍해를 건넜다고 이야기해요. 고린도전서 10장 1절로 가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1-2)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홍해를 건너는 거예요. 지금!)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그러죠?)

그래서 홍해를 건넌 것을 우리는,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고요. 예수님이 그렇게 세례를 받으세요. 홍해를 건너신 거예요. 애굽에서 나와서!

그 다음에 어디로 가십니까? 광야로 가시죠? 광야에 가셔서 뭐하세요? 40일간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으시죠? 왜 금식을 하실까요? 왜 굶으시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뭐 했습니까? 40년 동안! ‘밥 줘! 물 줘!’ 이 얘기 밖에 안 했어요. 예수님은, ‘교회야! 이스라엘아! 너희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너희들이 원하는 밥, 떡, 물, 그걸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거야!’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금식을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시험을 받으시죠? 그 시험의 결론을 어떻게 내리시죠?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시험의 결론을 내리시잖아요?

예수님이 내리신 시험의 그 결론이 뭐였어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이, 이 광야를 살아가야 하는 목적과 이유였죠? 그것을 지금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삶을, 이스라엘이 실패한 삶을, 애굽에서부터 차례대로 완성해 나가고 계시는 거예요. 신명기 8장 보세요. 2절.

(신명기 8:2-3)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광야에서,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 이 목적을 위해서, 너희들을 광야를 이렇게 살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죠? ‘아냐! 나에게는 떡이 필요해! 떡 줘! 복 줘!’ 그랬다고요. 40년 동안! 그러다가 다 망했어요. 그 실패(失敗)를, 예수님께서 회복(回復)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이스라엘과 교회가 실패한 삶을, 예수님께서 회복시키시고, 지금 완성시키시고 계신 거예요. 그 이야기가 적혀있는 책이 성경이라고요. 그리고 요한계시록도, 그 내용이 적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가리켜서 생수라고 하시죠? 그리고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자신을 뭐라 그럽니까? ‘내가 떡이다!’ 그러죠 예! 보세요. 광야의 그 이스라엘의 삶! 떡! 만나! 놋뱀! 시내 산! 그것을 예수님이 직접 다 사신다고요. 시내산은 어디에서 볼 수 있어요? 예수님이 산에 오르셔서, 새로운 율법(律法)인 산상수훈을 이야기하시잖아요? 예수님은 계속 지금 이스라엘의 삶을 사시는 거예요. 놋뱀은? 예수님 자체가 놋뱀으로 달리셨죠? 십자가에다가!

보세요. 이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그분의 삶에 대해서 기록해 놓고 있는 거예요. 그 삶 자체가 복음이며, 그 삶 자체가 계시이고, 그것이 성경이라고요. ‘그 이야기가 계시록에도 적혀 있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는 말에 의미라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는 말은, 구약 전체에 걸쳐서 예언되고 계시된,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공포하고, 선포하고,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소유격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계시다!’라는 뜻이 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은!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엉뚱한 그런 수수께끼가 아니라, 예수에 대해서, 그분의 사역에 대해서만, 기록해 놓고 있는 책이니까, ‘딴 생각 하지 말아요.’ 그렇게 얘기하는 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고 요한이 문을 여는, 진의(眞意)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전체를 통해서, 그림자로 계시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셨죠? 그리고 구약에서 계시된 데로 그 삶을 직접 살아 내셨어요. 우리가 지금 확인한 것처럼!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히브리서 1장 1절.

(히브리서 1:1-2)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아들로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은, 이 성경 전체의 그림자로, 모형으로 이야기 해 놓은 그 이야기를, 지금 실체인 그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서, 바로 이 이야기였다고 이야기해주셨다는 거예요.

마지막! 거기서 ‘마지막’이라는 말은, 이 ‘에스카토스’라는 말은, 어떤 것의 끝이라는 얘기예요. 끝! 그래서 계시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살므로, 살아내심으로써 끝났다는 거예요. 그것을 적어 놓은 신약성경까지가,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의 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카토스’라는 말에서, ‘에스카톨로지(eschatology)’라는 종말론이라는 말이 나온 거죠? 그러니까 끝이에요. 계시는 인제 끝났어요. 구원에 관한, 우리에게 계시되야 될 구원에 관한 내용은, 이제 다 끝났어요 더 이상 없어요. 더 이상 어디셔널 인포메이션(additional information)은 우리에게 필요 없어요.

그런데 이 계시를 받는 다는 이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냐구요? 왜 그게 또 필요하냐구요? 이시대에는 더 이상 계시가 필요없어요. 마지막! 에스카토스! 하나님께서는 이제 마지막 때에,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그 계시를 완성해 놓았다! 이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뭔가 우리 구원에 더 필요한 게 있는데, 지금 우리는 모르고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그렇지 않죠? 우리는 다 알고 있어요. 성경에 이미 완성된 계시가, 적혀져 있는 거예요.

마지막이라는 건 뭐에요? ‘그 다음에 뭔가 다른 게 없다’는 게 마지막이잖아요? 그런데 이단들은 그 후에 꼭 뭐가 있어요. 예수님 이후에는 더 없어야 돼요. 그런데 그 이후에 박태선이 있고, 그 이후에 문선명이 있고, 그 이후에 마호멧이 있다니깐요. 잘못 가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이 계시의 마지막이에요. 그걸로 끝이에요. ‘그 완전한 계시! 그 홀로 충분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적혀 있는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구절에는,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기꺼이 버리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리고 그 예수의 관한 내용이 바로 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이라면, 우리에게 불리한 내용은 요만큼도 없겠다. 그 이야기예요. 이 요한계시록은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에게 공포를 주고, 우리에게 두려움에 떨게 하기 위해서 주신 책이 아니에요. 3절에 보면, ‘우리들에게 복주시기 위해서 이 계시록을 주셨다.’ 그러죠?

예! 계시록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야! 참 우리가 갈 그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가 받을 기업이, 이런 거구나!’ 라고 기뻐해야 되는 게, 요한계시록이에요. 그런데 계시록을 보고. ‘무섭다!’ 그래요. 여러분? 아직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무서운 거예요. 그 심판이 나에게 내려 올까봐! 아니에요. ‘세상은 그렇게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너희는 안전하게 내가 끝까지 데리고 가겠다.’는 게 계시록이란 말이에요. 두려우시면 안돼요. 계시록은 우리에게 복주시기 위한 책이에요.

자, 이렇게 요한계시록은, 오직 복음만이 적혀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볼 때, 다른 성경과 다르게 보죠? 다르게 보이잖아요? 언뜻 보면은! 구약을 비롯한 다른 책들이, 하늘의 것들을 원형으로 해서, 모형과 그림자로 이 땅에 것을 설명한 것이라면은, 요한계시록은, 진짜 하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걸 보여줌으로 해서, 이 땅에도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일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사도행전은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복귀하셨죠? 복귀하셔서, 그 하늘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나가고 계신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서,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어떻게 그 나라를 완성해 가고 계신지를, 사도의 삶과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설명해 놓은 게, 사도행전이라고요. 요한계시록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직접 기록을 해서, ‘그 일들이 바로 이 땅에서 너희들이 살아가는 그 삶에서, 이루어지는 그 일이야!’라고 관점을 다르게 설명해 주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나팔을 불죠? 이 땅에서는? 사도들이 나팔을 불죠? 어떻게요? ‘회개해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러니까 보는 관점이 틀리기 때문에, 어! 계시록은 뭔가 수수깨기이고, 이상한 우리가 알지 못한 그런 내용들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안 그래요. 하늘에서 내려다 본 복음이라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이해가 가시죠? 1절이 끝난 거예요.

그럼 2절을 한 번 보세요. 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 그 예수님이 주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증거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격으로 이렇게 나와요.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고 해 놓고, 그 내용이 무언지 2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2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에 본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 (그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 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인데, 그 계시의 내용을, 요한은 다 보았대는 거예요. 자기가 다 본 것! 그런데 그 본 것의 내용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라는 것이죠? 지금 제가 여태까지 말씀해드린 내용이 2절에 그대로 나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삶 자체가, 복음의 내용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좀 전에 살펴 본 것처럼, 그 예수님의 삶 자체가 복음의 내용인데, 그게 성경의 내용이고,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예수님의 삶은 누구의 삶을 살다 가신 것이죠? 광야에서의 교회의 삶을 살다 가셨죠? 그러면 그 예수님의 삶은, 여러분의 삶이기도 하다고요.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서는, 무슨 삶이 나와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삶이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을 어떻게 살다 가셨냐고요? 그 대대로 축복 받고, 복 받고, 만사형통하는 삶을 살다 가셨냐고요? 예수님이? 삼단 논법만 알아도,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거예요. 무슨 말만 열면, 축복이에요. 말만 열면! 설교가 어떻게? 그건 기독교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는 예수의 삶이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의 삶을 닮아 가야 하는데, 제가 성경에서 예를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시편 22편으로 갑니다. 시편 22편은 다윗의 시에요 다윗의 삶입니다. 1절부터 읽겠습니다.

(시편 22:1, 6-8, 15-19)

1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거 어디서 들어 보셨어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죠? 자, 이것은 다윗의 삶이에요. 헷갈리지 말고 들으세요.)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6절)

6 나는 벌래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예수님의 눈을 가리우고 따귀를 때리고, 누가 맞췄는지 알아봐라!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예수님을 멸시했죠? 예수님의 이야기예요. 다윗의 이야긴데, 예수님의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어요.)

7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삐죽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십자가 아래서 사람들이 한 이야기죠? 15절.)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갔고 내 혀가 이 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애워 쌓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십자가예요.)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님의 이야기예요.)

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편 31편 5절로 갑니다. 역시 다윗의 삶입니다.

(시편 31:5)

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의 이야기죠?)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시편 34편 18절로 갑니다.

(시편 34:18-20)

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요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았죠? 왜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이 많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이야기가, ‘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예요. 이렇게 다윗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삶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요. 시편 69편 21절로 갑니다.

(시편 69:21)

21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었사오니

그러죠? 예수께서, ‘내가 목마르다.’ 하셨을 때 쓸개즙이 담긴 신 포도주를 마시우게 하죠? 똑같이 예수님의 삶에서 나타나고 있어요. 분명 이 시편은 다윗의 이야기에요. 그런데 누구의 삶과 똑같습니까? 예수님의 삶과 똑 같아요. 예수님은 다윗의 삶을 살아내고 계시는 거예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 삶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냐고요? 시편에 나와요. 시편 22편 아까 우리가 읽었던 그 말 아래에 붙어 있는 내용인데, 27절.

(시편 22:27-28, 31)

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이 뭐예요?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31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나의 백성에게 전하며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 (‘이를 행하셨다’ 이 말은, ‘테탈레스타이, 다 이루었다!’예요.)

시편 22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하신 그 말로 끝내고 있어요. 다 이루었다! 테탈레스 타이! 라고 끝내고 있다고요. 성경이 이 다윗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이렇게 똑같이 기록해 놓은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나타내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은 교회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서도 그 예수의 삶이 나타내야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우리의 삶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재연되고 있는가? 그 복음에 내용이 우리의 삶으로 지금 살아내어지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 3절 보십시오.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그러죠? 듣고 읽을 뿐만이 아니라, 그 내용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는 거예요. 여기에서 왜 읽는 자는 단수이고,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은 복수인지 아세요? 그 당시에는 회당에서,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회당에다가 성경을 놓고, 또 예배를 드린 장소에다가 성경을 놓고, 한 사람이 읽어주고 설명을 해 줬다고요. 나머지는 듣고, 그것을 행한 거예요. 그래서 읽는 사람은 단수고, 듣는 자들과 행하는 자들은 복수인 거예요.

그런데 보세요. 복 있는 자들이면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야기 하는 거죠? 그 하나님의 백성들은 단순히 듣고 읽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기록된 내용을 지키는 자들이라는 거예요. 야고보서 1장 22절 보세요.

(야고보서 1:22)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소용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많이 알아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무리 서머나 교회에서, 많은 성경지식을 알았다고 해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그 내용이 안 나오면, 예수의 삶이 안 나오면, 꽝이에요. 가짜에요. 그거는!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한테, 나는 성경 이만큼 알아! 나는 이만큼 배웠어! 그걸 가지고 자랑하지 마세요. 그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된 자들이라니깐요.

이렇게 우리에게는 요구되는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과 의무라는 것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드리기 위해서 택한 단어지, 책임과 의무는, 당연히 우리의 삶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당연히 그 삶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예수님의 삶 속에는, 적극적인 순종이 있는가 하면, 수동적인 순종이 있어요. 수동적인 순종이 뭐냐면, 수동적인 순종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한 거예요. 그거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이신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수동적인 순종이라 그래요.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있을 수도 있어요. 예! 그 삶도 나타나야 되는데, 적극적인 순종을 하셨다고요. 뭐예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죽을 때까지 율법을 다 지키셨어요. 그 삶도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야 되는 거예요. 그 두 가지 순종의 삶이 우리의 삶에서 나타내야 되는 거예요.

만일 여러분들이, 배신당하고, 핍박받고, 환란가운데 처해있고, 사기를 당했고,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하나님을 원망할게 아니라, ‘와! 신기하게 정말 예수님의 삶이 어떻게 내 삶에 나타나고 있냐?’ 우리 기뻐하시라는 거예요. 어떻게 그 예수님의 삶이 그 내 삶에 이렇게 나타나고 있냐? 여러분 보고 돈 많이 벌지 말고, 가난하게 사시라는 거 아니에요. 고통 속에서 사시라는 게 아니에요. 열심히 일하세요. 열심히 공부하세요. 그래서 일등 하세요. 이왕이면! 그 돈도 많이 버세요 그거는 일반 은총이에요. 노력한 만큼 되는 거죠?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그렇게 된다는, 이 공식을 갖고, 기독교를 설명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기독교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어제 그제, 크리소스톰이라는 사람이 쓴 로마서 강해를 읽었거든요. 1,600년 전 사람이에요. 어거스틴보다 전 분이에요. 그분이 로마서 강해를 하셨는데 예수 믿으면, 병 낫고, 복 받고, 축복받고, 만사형통이라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어요. 뭐라고 이야기 하시냐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영생이 중요한 거야. 따른 데 신경 쓰지 말어! 네 몸을 죽여! 그래요. 그 천박한 황금의 옷은 좀 벗어 버려라? 그리고 영의 옷을 입어라! 이렇게 설명한다니깐요.

그 분 뿐만이 아니라, 어거스틴! 존 캘빈! 마틴 로이드 존스! 조지 휘필드! 이런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의 책을, 한 권씩만 읽어 보세요. 더도 말고 한 권씩만 읽어 보시고, 그분들이 한 설교를 열 편씩만 한 번 들어보세요. 그중에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살게 되고, 복 받고 병 낫고, 그렇게 되어야 된다. 아무 데나 손 얹으면 다 나아야 된다는 내용이, 한 줄이라도 있으면, 저한테 가져오시란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분들이 간 길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여태 그 웬수들은 어디서 무슨 책을 읽고, 뭘 듣고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기독교는 그거 아니에요. 우리는 예수를 믿는 거예요. 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향해서 지금 열심히 기도하고 계시면서. 응원하고 계신. 그 예수를 믿는 거예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오신 그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고요.

여러분! 영원한 생명이 달린 이야기 아닙니까? 영원한 생명을 걸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어떻게 이렇게 소문으로 신앙생활을 하냐고요? 평생 예수 믿고 지옥갈 수 있다니깐요. 정신 차리셔야 돼요! 지금 여러분의 삶에,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삶이 나타나고 계시다면은, 여러분은 잘 가고 계신 거예요. 잘 가고 계신 거예요.

1절 보세요. 1절에 보면, ‘그 계시의 일들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절에 보면,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반드시 속히 될 일! ‘엔탁케이’라고 이야기하죠? 반드시 속히 될 일!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악한 세력이 망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 일이에요. 반드시 속히 될 일은!

그런데 이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어질 때는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기록된 거잖아요? 그럼 이미 이루어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기록을 했을까요? 그것을 우리가 공부하기 위해서는, 다니엘서로 먼저 가봐야 됩니다. 다니엘서 2장 28절에 보시면,

(다니엘 2:28-29)

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29 왕이여 왕이 침상에 나아가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

그래요. 이 이야기는,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다니엘이 그 꿈을 해석해 주는 장면이죠?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서 신상을 봅니다. 머리는 금으로 되고, 팔과 가슴은, 은으로 되고, 뭐 철로 되고, 흙으로 되고, 한 이 신상을 보죠? 그런데 뜨인 돌이 그것을 박살을 내는 거예요. 여기서 뜨인 돌은, 붕 떠있는 돌이 아니라, 시온 산에서 삽으로 뜬 돌이라는 거예요. 그 삼위일체의 하나님에서 떨어져 나온 예수님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뜨인 돌이, 이 신상을 박살내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지막 때의 이야기죠? 남 유대는 BC 586년에 망했어요. 그런데 그 전에 이미, BC 605년에, ‘갈그미스 전투’라는 곳에서, 유대가 박살이 나고, 그때부터 유대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기 시작했어요. 그때 다니엘이 끌려갔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600년 전의 일이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여기서는 장차될 일 후일에 될 일이라고 기록을 하지요.

그런데 지금 요한계시록은, 그 일이 이미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어 졌잖아요? 본래 계시록에서도, ‘유대지파의 사자가 이기셨고’라고 과거로 이야기 한다고요. 그분이 교회시대의 역사인, 그 책의 인을 떼실 분으로 묘사하고 있고, 요한은 그 인을 떼는 거를 보았잖아요? 계시록 5장 5절에 보시면,

(요한계시록 5:5)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을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그래요. 그 책의 인이 어떤 인이죠? 그 책! 다니엘서 12장 1절로 갑니다.

(다니엘 12:1-4)

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란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란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환란(患亂)! 구원(救援)! 이건 마지막 때 이야기 하는 거예요.)

2 땅에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치리라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

이 봉함해 놓은 이 책이에요. 마지막 때에 관한, 마지막 때까지, 이 봉함이 풀려지면 안 될 그 책의 인(印)이란 말이에요. 그 책의 인이, 요한계시록에서 그때에서야 비로소, 떨어지게 된다고요. 이 인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은,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제 그 교회의 역사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 역사가 이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이미 이제 이루어진 거라고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미 승리하셨고,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가 탄생됐고, 또 그 교회의, 이 땅에서의 삶의 내용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져 가는 모습이 적힌, 그 책이 이미 떼어지는 것을 요한이 보았잖아요? 그러면 이미 이루어 진거 아닙니까?

요한이 어떤 방법으로도, 그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가 이루어지는지는 불가능 할 것 같다. 그래서 울고 있었다고요. 이 인은 떼어질 것 같지가 않아요. 그래서 막 울고 있었더니, 천사가 나타나서,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미 이기셨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책에 적힌 일들이 이제 공개되게 되었다.’라고 이야기를 한다고요. 다니엘서에서 그 신상이 뜨인 돌이신 예수님께 박살이 나듯이, 그 일은 인제 이루어 진거예요.

그런데 왜 아직도 요한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냐고요? 자, 여기서 또 우리는 ‘올레디 낫 옛(already not yet)! 이미, 아직’ 그 원리를 적용하는 거예요. 요한은 영적으로, 환상으로, 하나님나라를 보았죠? 그곳에서 요한은 이미,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교회 모습을 봤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거기서 본 거예요. 요한이요! 그리고 악의 세력이 불못에 던져진 것도 보았어요. 이미 승리를 하신 거예요. 분명히 그 일은 다니엘서의 예언대로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우리의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하나님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잖아요? 그죠? 분명히 영적으로 요한은 봤지만, 아직 가시적인 그 하나님나라는 오지 않았다고요. 그 일은 영적으로 이미 이루어 졌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가시적으로도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미 예수님이 시작을 해놓으셨기 때문에, 더 더욱이나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기록해 놓는 거예요.

요한은 아직 가시적으로 우리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께서 이미 시작해 놓으셨으므로, 그 일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이렇게 확신에 차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마찬가지예요. 베드로도 똑같은 그것을 본 사람이죠? 베드로전서 4장 7절에 보면,

(베드로전서 4:7)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럼으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가까웠다 그러죠? ‘앵기조, 가까웠다’라는 말이! ‘앵기조’라는 말은, 아주 가까운 일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베드로후서 3장 3절 보세요.

(베드로후서 3:3-10)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 하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전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마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리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말세에, 세상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야! 언제 비가 오냐? 비 온다며? 반드시 속히 된다며? 언제?’ 그런다고요? 그런데 비가 왔습니까? 안 왔습니까? ‘야! 백년이 지났는데도 안 오잖아! 바보 같은 놈! 산꼭대기에다가 배를 만들고 있냐?’ 120년 됐을 때, 비가 왔다고요. 마찬가지로, ‘야! 예수님이 반드시 속히 온다며? 언제 오냐?’ 이미 그 일은 시작됐다고요. 세상 사람들은 조롱하죠! 그러나 그날은 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그 소망의 메시지를 받으셔야 하는 거예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신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그 기간을 보는 게 아니라, ‘왜 200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안 오시냐?’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신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우리는 그 일을 보아야 되는 거라니깐요. 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반드시 일어날 거고, 이미 시작된 일은, 더더구나 확실하게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을 가리켜,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는 이 구절은, 시간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완성의, 필연성과 확실성에 강조를 둔 말입니다. 여러분!

네, 우리는 그 소망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매일 매일 돌아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정말 내 삶에 나오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준비해야 되는 거예요. 준비하는 거예요.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준비하는 거예요.

여러분! 톰 소여가 허클베리 핀의 뭘 부러워하죠? 쟤는 세수 하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고 깨우는 사람도 없고, 학교 가라고 때리는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까 톰 소여는 허클베리 핀을 부러워해요. 그런데 언제 허클베리 핀이, 톰 소여를 부러워하죠? 밤에 들어가서 잘 때! 톰 소여는 엄마가 잘 닦아주고, 옷 갈아 입혀주고, 따뜻한 방에서 재워줘요. 그런데 얘는 그 시궁창에서 놀던 그 모습 그대로 자야 되는 거예요. 이걸 부러워하시겠어요? 허클베리 핀의 삶을? 여러분의 삶이 지금, 조금 고난이 있고, 환란이 있고, 조금 예수를 믿으면서 하고 싶은 거 못한다는, 그런 불편함이 이걸 부러워하시겠어요? 허클베리 핀의 삶을? 내일 시험인데, 라면 세 개 끓여 먹고 퍼질러 자는 걔를, 우리는 복되다 그럽니까? 아침에 얼굴 탱탱 부어서, 시험도 못 보고, 그런 애를 복되다고 하냐구요? 지금 라면 먹고 잠잘 때는 편하죠? 하지만, 마지막은 반드시 속히 온다니깐요. 그때 어떡할 거냐 말이에요? 그때!

지금 계시록 1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은, 우리에게 그 이야기 해주는 거예요. 여러분! 조금 힘드셔도 힘내시고 끝까지 이겨내 보자고요. 그날은 반드시 속히 옵니다. 여러분!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1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는 그 구절을 통해서, 이 요한계시록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복음이 적혀있는 책이라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바로 복음이며, 우리에게도 그 예수님의 삶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때로는 견디기 힘들고 눈물이 날 때, 그때, 그 마지막 날은, 반드시, 속히 온다! 그 말로 위로를 받으시라는 거예요. 그것이 계시록 1절에서 3절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인 것입니다. 1절에서 3절까지 내용이 인제 클리어(clear)해졌죠? 다음주에는 4절부터 더 풍성한, 더 감동적인, 우리 하나님의 편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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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장 4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4-8)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새새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아멘.

언제 읽어도,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는 이런 묘사를 읽을 때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칩니다. 좋아서! 곧 오실 거! 반드시! 속히! 우리는 지난주에 3절까지 말씀을 살펴봤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여느 성경과 똑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啓示)이며, 그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라면, 우리에게 해(害) 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무서워 할 필요 없고, 두려워할 필요 없다! 3절의 말씀처럼, 그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복주시기 위한 말씀이지, 우리에게 겁을 주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시작된 그 하나님의 심판의 필연성(必然性)과, 확실성(確實性)과, 긴박성에 대해서도, 우리가 반드시 ‘속히’라는 단어를 공부하면서, 확인을 했죠?

오늘은 4절부터 공부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구조(構造)를 제가 나누어 드렸을 때, 1장 1절에서 8절까지를, 계시록 전체의 서론(序論)으로 이렇게 나누었죠? 그런데 사실 1절에서 3절까지 지난주에 공부한 1절에서 3절까지는, 요한이 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있으며, 요한계시록에 무엇을 기록하고 있는가를, 기록해 놓은 것이고, 진짜 이 편지의 서론은, 4절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전체가,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라고요. 그래서 4절부터 요한은, 편지의 서론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4절, 그리고 5절 상반부까지가, 편지의 인사말이에요. 우리말로 이렇게 변역을 해 놓으니까, 약간 끊어지는 부분이 어색하죠? 그래서 어떨 때는 성경의 장절이 오히려, 우리 성경의 이해를 방해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헬라원어로 보시면, 딱 끊겨 있어요.

5절 하반부부터 6절까지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7절 8절이, 요한계시록 전체의 주제(主題)가 되는 거예요. 다시 오시는 하나님!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 전체의, 주제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이렇게 기록하죠? 반드시, 속히, 오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전체의 주제입니다.

오늘은 인사말에 대해서, 그 앞의 4절과 5절 상반부까지의, 인사말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먼저 4절과 5절을 보시면요, 요한이 이 편지의 인사말을, 당시 사도들이 썼던 편지의 인사말과 동일한 형식으로 쓰고 있음을, 성경을 조금 깊이 보신 분들은, 금방 아실 수 있죠? 당시 사도들은, 일반적인 편지의 형식의 인사말처럼, ‘누가 누구에게 편지를 씁니다.’라고 그렇게 쓰면서, 거기에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구절을 추가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공부했던 에베소서를 한 번 보자고요. 에베소서에서 사도바울이 어떻게 인사말을 쓰는지 보시면, 아마 사도요한의 편지의 이 인사말이, 쉽게 공감이 가실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절로 가겠습니다.

(에베소서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서의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누가? 바울은! 누구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그런데 어떤 축언(祝言)을 붙이는지 보세요. 2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성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좆아 (‘아포’라는 뜻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는 뜻이거든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부터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렇게 인사하죠? 그러면 오늘 본문을 한 번 보세요. 스크린에 제가 띄워 드릴게요.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누가? 요한은! 누구에게? 일곱 교회에게! 어떤 추언을 붙입니까?)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누굽니까? 성부 하나님이요!)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일곱 영은, 제가 다음 주에 자세히 스가랴서를 들어서, 설명해드릴 텐데, 성령이에요.)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성부, 성자, 성령을 쓰고 있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역시 이 ‘말미암아’가 ‘아포, 프롬(from)’이라는 뜻이에요. 헬라어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

똑같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라고 축언(祝言)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짧은 설명을 붙이고 있어요. 그죠? 그냥 하나님 아버지! 성자 예수님! 성령님!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그 앞에 어떤 구약의 내용을 들어서, 간단하게 설명을 붙이고 있어요. 그 부분들을. 우리가 집중적으로 공부를 할 것입니다. 아주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에요!

먼저 우리가 칠(7)이란 개념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칠(7)이란 숫자가 많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이 칠(7)이란 개념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셔야, 일곱 나팔! 일곱 인! 일곱 대접! 일곱 뿔! 일곱 교회! 이런 것들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요한이 썼고 아시아에 일곱 교회에게 보내지는 것이죠? 당시 소아시아에 골로새교회라든지, 히에라 폴리스교회라든지 다른 교회가 많았어요. 더 유명한 교회도 많았는데, 왜 굳이 일곱 교회에게만, 이렇게 일곱 교회라고 숫자를 맞췄다 그랬죠? 제가! 당시 히브리 사람들이 숫자에다가 어떤 특정한 개념을 부여했는데, 그 일곱이라는 숫자는, 전체! 충만! 완전! 완성을 나타낸다 그랬죠? 그런 특별한 개념을 부여했다 그랬죠? 칠(7)이라는 숫자에다가!

그래서 요한이, 소아시아에 다른 유명한 교회들이 많았는데도, 굳이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쓴 것은, 그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그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을 초월한, 전체 교회에게 썼다는 뜻이라고, 제가 설명을 이미 해 드렸습니다. 각 교회에게 메시지를 전하죠? 그래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이렇게 각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메시지를 주고, 맨 마지막에 동일한 말로 끝을 맺어요. 어떻게 맺습니까? ‘이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렇게 끝을 낸다고요.

그러니까 이 편지 전체는, 어느 특정한 교회들에게 쓴 것이 아니라, 전체 교회! 여러분을 포함한 교회 시대를 살아가는, 전체 교회에게, 쓴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발신자는 성령님이고, 수신자는 교회인, 여러분인 것입니다. 이 칠(7)이라는 숫자의 개념은, 원래 창세기에서 나오죠? 하나님께서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 번째 날 안식하신 것에서, 완전수라는 개념이 나온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곱 번째 날에 안식을 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쉬다, 편안하게 거하다’라는 의미보다는, 창조가 완성이 되고, 하나님이 그 완성된, 창조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것을, 우리는 안식(安息)이다. 이런 개념으로 알고 계시면 되는 거예요. 그런 완성의 의미에서, 일곱 교회는, 전체로서의 완성된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곱 인이나, 일곱 나팔이나, 일곱 대접도, 그런 의미에서 심판의 완성과, 필연(必然)의 의미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를 갖다가 쓴 거예요. 그거는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에요.

지난번에, 어떤 청년이 저한테 가져다 준, 요즘 한인 타운에서 급속히 번지고 있다는, 요한계시록 강해가 있더라고요. 그걸 제가 보니까, 그분은 이 계시록을 완전히 잘못 보고 있더라고요. 그분은 지금 여섯 번째 대접이 쏟아졌다고 얘기해요. 그러면서 협박하더라고요. 인제 일곱 번째 대접이 곧 쏟아질 거라고! 그런데 굉장히 많은 분들이, 이 계시록을 그렇게 수수깨끼처럼 풀어 주면은, 그냥 거기에 쏙 빠져요. 계시록은 수수깨끼가 아니에요. 복음이에요. 전체가 다!

그건 심판의 필연성과, 현재성과, 당위성과, 긴박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한 가지 전체! 그 심판의 이야기를 칠(7)이라는, 그 완성(完成)! 완전한 수를 들어서, 일곱 개로 그냥 쪼개 놓은 거지, 시간적인 순서로, 첫 번째 인 떼어지고, 두 번째 인 떼어지고, 이게 아니란 말이에요. 하도 영화들을 많이 봐서, 뭐 오멘(Omen)! 이런 거를 봐서, 첫 번째 인 떼어지고, 두 번째 인 떼어지고 그런다고요. 전체의 이야기를, 이 일곱이란 숫자의 그 개념을 들어서, 일곱으로 그냥 나누는 것뿐이에요.

레위기 26장 18절 보시면,

(레위기 26:18)

18 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 배나 더 징치할 지라

그래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너희들 벌 받는다. 그런다고요. 그래도 안 지키면, 너희들 일곱 배나 벌 받는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런데 딱 일곱 배 벌 받는다는 얘기예요? 이게 아니죠? 칠(7)이라는 숫자는, 완전! 전체! 충만! 필연! 이런 뜻이라 그랬죠? 너희들에게 내려질 벌은, 아주 중한 것이며, 필연적인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그 벌이 일곱 배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해라!’ 그러죠? 그러면 490번까지 용서하고, 491번째는 가서 밟아도 되는 거예요? 아니죠? 끝없이 끝까지 용서해라는 거예요. 칠(7)이라는 숫자는요!

이제 칠(7)이라는, 일곱이라는 뜻이 무슨 뜻인지 잘 아셨죠? 그런 숫자들의 개념은, 거의 성경에서 빠져요. 육(6)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많이 싫어하는 것도, 이 칠(7)이라는 완전수에 모자라는 숫자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거고, 십삼(13)이라는 것도, 가룟 유다의 숫자거든요. 열두 제자 중에 아닌 가짜! 열세 번째 놈! 그래서 십삼(13)일의 금요일! 그러는 게, 나쁜 숫자로 우리가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 숫자에 들어있는 길흉(吉凶)의 개념들이, 거의 성경에서 나온 거라고요.

그럼, 이제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에 대해서는 공부를 했습니다. 발신자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요한이구요. 수신자는 전체 교회! 일곱 교회라 그랬습니다. 그럼 오늘의 결론인 그 축언(祝言)의 내용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그 축언의 내용을 보면, 사도 바울의 그 서신의 인사말처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으로부터 온, 은혜와 평강을 빌어주고 있죠?

그 은혜(恩惠)와 평강(平康)을 우리가 에베소서 공부할 때 자세히 공부했습니다. 은혜는 뭡니까? 값없이, 공짜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구원이죠? 평강은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평안한 마음의 상태! 그냥 아무 전쟁이 없고 평안한 상태가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는 속에서도 평안한,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내 마음속에 흔들리지 않는, 그 평안함! 그것을 ‘평강이다! 에이레네! 피스(peace)!’라고 이야기 한다 그랬죠?

그것은 삼위(三位)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 그럽니다. 이 구원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기능을 달리하셔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삼위의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헬라어로 보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이 성부 하나님 앞에, ‘아포’라는 전치사가 들어있어요. 프롬(from)! 그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와 평강!

그리고 그 ‘보좌 앞에 일곱 영’ 그 앞에도 또, ‘아포’라는 전치사가 있어요. 그 성령으로부터 온 은혜와 평강! 그리고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앞에도, ‘아포’라는 단어가 있다고요. 그러니까 요한이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전하는데, 그 은혜와 평강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이제 한 분, 한 분을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아포’라는 전치사 다음에는, 영어도 마찬가지지만, 소유격이 와야 되죠? 그런데 헬라어 성경을 보면, 이 ‘아포’ 다음에 주격이 와 있어요. 다! 요한은 왜 이렇게 문법적인 파격을 사용해서, 굳이 이 아포라는 단어 다음에, 하나님을 주격으로 썼을까요? 그것은요, 구약에 기록된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고유명사에 대해서, 요한이 침범하지 않으려는, 경외심을 갖고 쓴 거예요. 그리고 그 절대성과, 주권성을 강조하려는 의미에서,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가 개역 성경만 보면은, 그런 것에서 감동이 덜 하다고요. 헬라어 성경을 보는 사람, 그리고 이 편지를 그대로 받아서 들었던 유대인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어요. 왜 그런 단어를 썼는지! 조금 있다가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왜 이런 단어를 썼는데,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홉 살짜리가 계시록을 들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렀는지, 구약을 다 알고 있으면, 이런 단어들이 금방 우리에게 이해가 간다고요. 제가 그래서 구약을 들어서, 여러분들에게 계속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성부하나님을 표현하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유대인들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이 말을 딱 들었을 때, 어떤 떠오르는 구절들이 있었다고요. 구약의 내용들이 있었다 말이에요. 그 내용을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을 굳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이렇게 표현을 해 놓았는지, 우리가 이제 구약에 능통해 있었던, 초대 교회의 그 유대인의 입장이 되어서, 이 단어를 다시 보자고요. 그래야만 우리에게 똑같은 감동이 온다 말이죠? 여러분이 헬라어는 잘 모르시니까, 4절을 영어로 한 번 보겠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그 단어가, 그레이스 엔 피스 투 유 프롬 힘 그리고 후 이즈, 후 워즈, 후 이즈 투 컴(Grace and Peace to you from him who is, who was, who is to come) 후 이즈, 후 워즈, 후 이즈 투 컴(who is, who was, who is to come)! 이게 헬라어의 가장 근접하게 번역한 영어예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를, who is, who was, who is to come 이렇게 번역을 한다고요. 어디서 많이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구절을? 출애굽기 3장으로 가겠습니다. 14절.

(출애굽기 3:14)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갓 세드 투 모지즈 “아이 엠 후 아이 엠”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그런다 말이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에요. 모세가, ‘하나님!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 누가 보내서 왔냐?’ 그러면 내가 누가 보냈다고 이야기해야 됩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직접, 아이 엠 후 아이 엠(I am who I am)으로 이야기 하신다고요.

그런데 이 말은, 현재형으로도 쓰이지만, 미래형으로도 쓰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계시는 하나님! 그리고 앞으로도 계시는 하나님! 이런 뜻이거든요. ‘아이 엠 후 아이 엠’이라는 것이! 히브리어로도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그러죠 그 ‘여호와’라는 것이, 지난번에 우리가 공부했었죠? ‘하야 네페스 하야’ 거기에서 ‘하야’라는 게 비(be)동사거든요. 존재를 상징하는 거예요. 거기에서 나온 말이 ‘여호와’라고요.

유대인들은 많은 문서에서, 이 표현을 많이 썼어요. 즐겨 썼다고요. 그래서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이 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연상할 때 떠오르는 단어였어요.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들을 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그 하나님을 금방 연상할 수 있었던 거예요. ‘아! 그때 모세에게, ‘아이 엠 후 아이 엠(I am who I am)‘이라고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이구나!‘ 라고 유대인들은 금방 떠 올릴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하나님이, 지금도, 이제도, 우리에게 역사하신다면, 우리가 이렇게 낙망하고, 실망할 이유가 없겠구나!’라고 힘을 얻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단어 하나가지고도 그들은, ‘아! 그 하나님이 지금 나를 끌고 가신다면, 내 마음에 왜 평강이 사라지겠느냐?’ 그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요한은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면서, 일부러, 그런 하나님의 대한 묘사를 동원한 것입니다.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이사야서 41장 4절.

(이사야 41:4)

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나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에 귀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셔야, 여러분은 그리스도 인이에요. 아셨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역사를 결정하였느냐?’ 그러시는 거예요. ‘처음에도 나 주가 거기 있었고, 나중에도 나 주가 거기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서, ‘어제도 있었고, 나중에도 있는 분’으로 묘사를 하신다고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이사야서를 거의 외웠던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이 말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보시면, 이스라엘사람들이 이 말을 딱 들었을 때, ‘아!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라면 지금 나도 안전해!’라고 그렇게 느꼈을 텐데…. 어딜까요? 1절로 한 번 올라가겠습니다.

(이사야 41:1-3) (표준새번역)

1 "섬들아, 나의 앞에서 잠잠하여라. 백성들아, 송사를 가져 오너라. 가까이 와서 말하여 보아라. 와서 함께 판가름하여 보자.

2 누가 동방에서 한 정복자를 일으켰느냐? 누가 그를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하였느냐? 누가 민족들을 그에게 굴복하게 하였느냐? 누가 그를 왕들의 통치자로 만들었느냐? 그의 칼은 그들을 쳐서 티끌처럼 만들고, 그의 활은 그들을 흩어서 검불처럼 날리게 하였다.

3 그가 거침없이 질주하여 그들을 추격하니, 미처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다.

무슨 만화 영화 보는 것 같죠? ‘인크레더블(incredible)’에서 그 막내아들이 막 달리는 발이 땅에 안 닿잖아요? 여기 성경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런 거! 마치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다. 누가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였느냐? 누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였느냐? 태초부터 나 주가 거기 있었고, 끝 날에도 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태초부터 나 주가 거기 있었고, 끝 날에도 나 주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당신을 설명하시면서, 어떠한 구절 뒤에다가,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 놨냐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적의 손에서 건져 내셨는지를, 설명하신 다음에, ‘그가 바로 나다!’라고 이야기 하시면서, ‘나는 태초에도 있었고, 장차 올 이다.’라고 하나님이 설명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려움이 닥치고 핍박을 당하고 했던 그 이스라엘이, 그 이 구절을 딱 들었을 때, 아! 구약의 그런 내용! 그런 내용들을, 떠올리셨을 거라고요. 그러면 그 하나님이, 그렇게 이스라엘을 신실하게 구원해 내신 그 하나님이, 이제도 지금 내 삶을 이끌고 가신다면, ‘나는 안전해! 나는 평안해! 힘내야지!’ 그게 요한계시록이라니깐요 계시록이 기록된 목적이에요. 그것이!

한 군데만 더 보겠습니다. 이사야서 44장 6절.

(이사야 44:6)

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의 다른 신이 없느니라

요것도 역시 하나님이 당신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즉 어제도 있었고, 이제도 있으며, 장차 올 이! 내일에도 있을 그게, 바로 나다!’라고 이야기를 하신다고요. 어느 구절에 그게 붙어 있는지를 한 번 보시자구요 이사야서 44장 1절로 가겠습니다.

(이사야 44:1-5)

1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여수룬’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을 표현하는 시적인 표현이에요. 어려운 거 아닙니다.)

3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

5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그러시면서 그 밑에다가,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그러신다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요한이 편지를 딱 보냈을 때, 유대인들은 금방 이런 구절들을 딱 떠올린 거예요. ‘아! 그 하나님? 맞아 내가 잊고 있었구나! 그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궁극적인 참 복을 내리시는 그런 하나님인데, 내가 이렇게 절망하고, 이렇게 낙망하고 있을 수가 있겠는가? 아니야! 힘을 내야지!’

요한은 이렇게, 다른 신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는, 불변(不變)하시는 역사의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신 언약을, 한 번도 실패치 않으시고 이루어내셨고, 이루고 계시고, 이루어 가실 분이다.’라는 것을, 지금 요한이 묘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그렇게 절망과 슬픔 속에 있지 말고, 힘을 내라! 힘내라!’라는 거예요.

요한은 그렇게 하나님을 묘사하면서, 애굽! 가나안! 바벨론! 그 어떤 대적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추풍낙엽이었다. 어떤 대적도 하나님 백성들을 뺏어갈 수 없었다. 하물며 로마일까 보냐? 당시 사람들에게는요! 여러분들에게는요? 지금 너희들을 괴롭히고 있는, 그 마귀의 세력들은, 지금 위풍당당해 보이지만, 곧 지리멸렬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현실을 보면서, 실망하지 말고. 그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를 이끌어 가셨는지. 그걸 봐라! 그러니까 너희들이 지금 이 처한 현실이. 너희들이 낙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유가 있어서 허락해 놓으신 거니까. 낙망하지 말고. 그 하나님이 이루어 내신 그 약속들을 보면서. 힘을 내라는 거예요. 평안을 얻으라는 거예요.

자. 어제도 계셔서, 그렇게 이스라엘을 보호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끌어 가고 계시며. 장차 오셔서. 하나님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확신해서. 그 은혜로 말미암는 평강을 누리라고. 사도 요한은 편지의 시작을,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위해서, 역사를 경륜해 나가고 계시다는 것을. 너희들은 알라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을 보시면 수많은 군왕들이 일어났고,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지만, 역사는 아브라함! 야곱! 이삭을 중심으로 움직여 갔다니깐요. 하나님의 눈에는, 다른 인간들은 하나도 안 보였어요. 아브라함만 보였어요. 아브라함만 바라보고 가셨다고요. 하나님이요! 그러니까 이 역사의 주인공은, 여러분들이에요. 빌 클린턴? 무슨 왜 갑자가 지나간 대통령이 나오죠? 조지 부시! 빌 게이츠! 이런 사람들 부러워할 거 아무 것도 없어요. 여러분들이 이 역사의 주인공이고,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를 끌고 간신다니깐요.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히스토리(history)라고 하는 거예요. ‘후 이즈 후 워즈 후 이즈 투 컴(who is, who was, who is to come)’이라고 했던, 그 히즈 스토리(His Story)란 말이에요. 역사는요! 그분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거라고! 이 역사는요! 그러니까 힘을 내셔야죠. ‘아이고, 나 같은 게 무슨?’ 아니에요. 성경을 몰라서 그래요. 여러분의 신분을 너무 모르셔서 그래요. 여러분은? 그런 존재라니깐요.

자, 헬라어로 그 부분을 보면, 그 시제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더 명확하게, 요한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도 계시고’를 의미하는 그 ‘호 온’이라는 헬라어는, 헬라어 비(be)동사인 ‘에이미’의 현재분사예요. 제가 헬라어 현재분사는 어떤 뜻이 있다 그랬습니까? 진행형의 뜻이 있다 그랬죠? 계속되는 진행! 그러니까 ‘이제도 계시고’라고, 그들이 ‘호 온’하고 유대인들이 들었을 때는, 하나님의 그 영원성에 대해서 금방 느꼈다고요. 지금만 계시는 게 아니라, 앞으로 계속되는!

요한은 시제를 하나 쓰는 데도, 굉장히 주의를 기울인다니깐요. 현재분사를 썼다니깐요. 거기다가! 이제도 계시는! 지금도 계시지만 계속 존재하실, 그 ‘하나님의 영원성’을 표현한 거예요. 전에도 계시고는, ‘호 엔’이거든요 ‘에이미’ 동사의 미완료시제예요. 그들은 금방 알았겠죠?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이 미완료시제라는 것은, 전에도 계시고 있었으며, 그 계신 상태가 언제 끝나는지,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 이 미완료라는 것은, 과거에 어떤 시작된 것이, 끝과 결말이 언제인지 모르는 그 시제가, 미완료시제예요. 그러니까 ‘전에 계셨던 그 하나님이, 영원히 계실 그 하나님이다.’라고 표현을 해 놓은 거예요. 전에도 계신! 그 뜻으로! ‘호 엔’이란 뜻은요! 그러니까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증거하는 단어라고요.

세 번째로, ‘장차 오실 이’로 나타내는, ‘엘코메노스’는 ‘오다’는 단어인, ‘엘코마인’의 중간태! 현재분사에요. 그래서 정확한 뜻은, ‘지금도 오고 계신 이’라는 뜻이에요. ‘장차 오실 이’ 그러면, 뭔가 정지되어 있는 느낌이 들잖아요? 미래에 정지되어 있는! 그러니까 단순히 미래에만 계실 분! 그 뜻이 아니고, 헬라어는, 지금 오고 계신 분! 장차 우리가 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릴 복을 다 들고, 우리에게 오고 계신 분! 그런 역동적인 하나님을 표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런 배경을 알고, 다시, ‘어제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이 구절을 다시 보시면, 감동이 더 하겠죠?

이 요한이 얼마나 이 현재의 교회들! 이 계시록을 읽는, 당시, 당시, 당시의 현재의 교회들에게, 힘을 주려고 노력했냐면, 원래는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되야, 제대로 된 차례잖아요? 그런데 이 현제를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강조를 하기 위해서, ‘이제도 계시고’라고 현재를 맨 앞에다 놓는 거예요. ‘이제도 계신, 그 하나님이, 과거에도 계셨고, 미래에도 계실 분이다.’라고 설명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요한은요, 내용적으로나, 문법적으로나, 아주 치밀하게, 단어들을 선택해서,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고난과 고통과 환란을 이길 뿐 아니라, 그렇게 현재에도 역동적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그 온 역사를 주관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은, 반드시 실패치 않으시는 분이므로, 나중에 우리에게 약속된, 그 영광과 기쁨과 그 평강을, 우리는 지금 차용해서 미리 맛볼 수 있다고! ‘그러니까 너희들! 지금 그런 절망 속에서, 주저앉아 있지 말고, 좀 일어서서 그것들을 누려라! 거기에서 일어 설뿐만 아니라, 너희들에게 주어진, 이미 주어진 그것들을, 이제 좀 누려라!’라고 한 술 더 뜨는 거예요. ‘아니야! 너희들은 그렇게 핍박당하고 환란당하고, 그렇게 끝이 아니라, 어마 어마한 신분을 갖고 있고, 어마어마한 기업을, 너희들은 받을, 그런 존재들이라는 것을, 지금 누리라!’라고, 우리에게 더욱 더 큰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거예요. 우리가 나중에 누릴 것을 요한계시록 22장 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5)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치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그래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왕 노릇할 거래요. 우리는 왕노릇한대요. 그런데 지금도 왕노릇 한다고 그래요. 계시록 20장 6절로 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0:6)

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그러죠? 천년은 어떤 기간을 가리킨다, 그랬습니까? 교회시대예요.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그 교회인 여러분이, 이 교회시대 내내, 여러분의 인생 내내, 왕노릇하는 자라 그래요. 그건 아주 필연적인 거다. 그렇게 이야기 한다 그래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 왕노릇 하고 계십니까? 맨날 직장 상사한테 터지고, 이 눈치 보고, 저 눈치 보고, 거래처 사람들한테 욕이나 먹고, 부자들한테 아첨이나 하고, 이렇게 살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그게 무슨 왕이에요? 이게?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왕노릇 한다고 그런다고요.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왕이시죠? 어제도 왕이시고, 오늘도 왕이시고, 영원한 왕이세요. 예수님은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아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천사들이 그러잖아요?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이 땅을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느냐구요? 그런데 그 왕은 이 땅에 싸우러 오시지 않았어요. 그 왕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어요. 그분이 이 세상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위를 하고, 그 모든 순간에, 그분은 왕이셨어요. 그 모든 순간을, 단 한 번도,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잊어 본 적이 없으신 분이에요. 그분은 모든 권세와 능력을, 그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위해서 다 쓰셨다고요. 왕으로서의 권세를, 다 쓰셨다고요. 그분은 왕이셨어요.

그런데 세상에서는, 실패한 메시아로 보여주셨어요. 왕이신 그분이! 우리가 왕노릇 못 하고 있는 것은, 이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혼동하고 있어서 그래요. 여러분! 패도(覇道)라는 것은요 도전해서 빼앗는 것을 패도라 그래요. 승리하고 쟁취하고, 목적을 탈취해 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을, 패도라 그래요. 그래서 내 밑에다 놓고 밟는 거! 그걸 패도라 그래요 그거는 왕에서 나오는 왕도가 아니라, 그거는 패도라 그래요. 도전자에 삶에서 나오는 거라고요. 그것은요!

왕도(王道)라는 건 뭐예요? 패도가 지금 도전자가, 어떻게 해서든지 끌어 내려서 내 밑에다 두겠다는 게 패도라면, 왕도는요? 이미 그걸 다 소유하고 모든 게 다 내거예요. 그래서 그 가진 자기 것을 가지고 관용을 베풀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하는 게 왕이에요. 예수님이 살다 가신 왕은, 그 왕노릇이라니깐요. 여러분도 그 왕 노릇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왕도예요!

우리는 천국에 가서도 그 왕노릇 할 거예요. 무슨 천사들이 우리 심부름 잘 못하면, ‘이게 그냥!’ 주리를 막 틀고, 이게 왕 노릇 아니라니깐요. 우리는 문명과, 문화와, 자연이 있는 곳에서, 천사들을 부리면서 살 거예요. 왕노릇하면서! 어마어마한 것을 소유한 풍요를 갖고, 여러분은 왕노릇 할 거예요. 그런데 어떤 왕노릇이냐 하면은, 밑에 사람들을 밟고 부리는 왕노릇이 아니라, 아끼고, 위하고, 격려하고, 용서해주는 그런 왕 노릇을 할 거예요. 거기가 천국이에요! 그런 왕노릇을 이 땅에서도 하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왕이시라고요. 여러분은 그 왕노릇은 하고 계시잖아요?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그러세요? 그 왕노릇은 하고 계시잖아요? 그 왕노릇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17장 9절을 보시면.

(요한복음 17:9-13)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이 땅에서 살다간 그 모습 그대로, 저도 하나가 되어서, 그렇게 살다 오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삶에서는, 그게 나타나는 거예요. 왕이신 예수가 이 땅을 살아갔던 그 모습이, 나타났는 거예요. 무슨 뭐 고지론이다, 무슨론이다 해서, 부자가 되고, 명예가 높고 이렇게 올라가서, ‘하나님! 보셨죠? 이렇게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그런 성경은 없어요.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렇게 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기쁨이 있었다고요. 그 기쁨을 우리에게도 누리게 해주시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사시는 분들! 그렇게 사시는 분들! 여러분에게 기쁨이 있습니까? 없으십니까? 그 기쁨에 동참하게 만드시고 싶은 거예요. 천국에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바로 그 기쁨입니다. 그 기쁨!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셨다고요. 그러니까 우리도 그런 왕노릇을 해야지요. 지금! 그런 왕노릇을 해야지요.

여러분! 예수님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군사적으로, 너무나 보잘 것 없으신 분이었어요. 외모도 그랬어요. 수많은 군왕들이 엄청난 준마들을 타고 다닐 때, 나귀새끼를 따그닥 따그닥 타고 다녔어요. 남들이 밴츠타고 다닐 때, 티코 타고 다녔던 분이에요. 그런데 그분이 왕이셨다니깐요.

여러분! 이 땅에서 왕노릇 하는 것을. ‘나는 이만큼 가졌고. 이만큼 이루어 냈어!’라는 것으로 왕노릇하겠다고 하시면, 여러분들 잘못 생각하시는 거예요. 어떠한 상황!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처럼 살아내시면, 여러분은 왕이십니다. 그게 왕노릇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왕노릇이에요.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들 한 번 보세요. 그분들이 왕이라니깐요. 왜 안보세요? 꼴도 보기 싫어요? 허허 ‘저 웬수가 무슨 왕이야?’ 지금 그러시는 거예요? 옆 사람한테 말씀해주세요. ‘우리 진짜 왕노릇 합시다! 이제! 이제, 진짜 왕노릇 합시다!’ 네!! 여러분! 우리는 왕이에요. 왕 노릇을 당연히 해야 될 사람들이에요.

사도 요한은,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셨고, 장차 오실, 그 하나님을 믿는 너희들은, 이미 어마어마한 것을 약속 받았고,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나눠주고, 너희들은 아무리 많이 나누어도, 이게 동이 안 나는, 그러한 창고를 갖고 있는, 그러한 자들이야!’ 빌게이츠가 어딜 와서 명함을 내밀어요? 여러분은, 문화와 문명과 자연계가 있는 곳에서, 왕이 되실 분이라니깐요. 다! 그러니까 누리세요. 누리시라는 거예요. ‘슬픔에. 절망에. 좌절에 빠져계시지 말고.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 지금 너희들을 이끌고 있으니까. 이겨내라! 일어서라!’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니깐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하! 무서워!’ 이거는 뭐예요? 이거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왕노릇하는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계시록을 잘 공부하시면, 여러분은 힘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겨나갈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왕이니까! 왕이니까!

다음 시간에는요 우리 스가랴서를 들어서, 제가 일곱 영으로 부터 오는, 그 성령으로부터 오는, 그 은혜와 평강은 어떤 것인가? 제가 성경에서 좀 찾아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 그 다음 시간 계속 진행이 되어가면서, 여러분은 더 큰 힘을 얻으시게 될 겁니다. 하나님이 요한계시록을 우리에게 주신 그 목적이, 여러분에게도 이루어지게 될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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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4-8)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아멘.

지난주에 우리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전에도 계셔서, 그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셨던 그 하나님!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누릴 그 복을 가지고, 역동적으로, 우리에게 오고 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이제도, 지금도, 우리를 이끌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를 감격케 했습니다.

역동적으로 지금 오고 계신다는 것은, 이미 완성된 미래가 있다는 것이죠? 그 완성된 미래에서, 오시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미 완성된 미래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안전하고, 확실한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강(平康)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은 ‘보좌 앞에 일곱 영’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보좌 앞에 일곱 영으로부터, 우리에게 어떤 은혜(恩惠)와 평강(平康)이 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오늘 살펴보겠습니다. 분명 지난주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그 앞에 ‘아호’라는 전치사가 있다 그랬죠? 프럼(from)! 그리고 보좌 앞에 일곱 영! 그 앞에도 역시 ‘아포, 프럼(from)’이라는 전치사가 있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도, ‘아포’라는 전치사가 있다 그랬죠? 그러니까 오늘은, ‘보좌 앞에 일곱 영’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오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일곱 영은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 일곱 영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계속해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일곱이라는 숫자에, 전체! 충만! 완전! 완성이라는 특별한 계념을 부여한다고 했죠? 그래서 전체 교회를, 굳이 일곱 교회라고, 일곱이라는 숫자를 동원해서, 묘사를 하는 것이라고, 우리를 배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전체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에 뒤에 나오는, 일곱 영을, 홀로 온전하고, 완전하신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미루어 추측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앞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성부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오고, 또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우리는 금방 보좌 앞에 일곱 영은, 성령(聖靈)이라는 것을 미루어 추측을 할 수가 있죠?

그러니까 일단 일곱이라는 숫자는 덮어 두세요. 그러면 어떻게, 그 일곱 영이,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일곱 영은, 어떤 메시지를 갖고 있기에, 그들이 은혜와 평강을 금방 떠올리게 되었는지, 성경에서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시록 5장 6절로 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 5:6)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합니다. ‘일곱 영은, 일곱 눈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일곱 눈은 구약에 어디에서 보셨죠? 스가랴서 4장 2절로 가겠습니다.

(스가랴 4:2-10)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3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지금 스가랴가 환상을 보고 있는데, 일곱 촛대, 일곱 등잔이 있고, 그 옆에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람나무에서, 금 기름이 계속 흘러 나와서, 그 촛대를 밝히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가랴가 ‘이 환상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5절부터 보겠습니다.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스가랴가 ‘이 환상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니까, 천사가, 그 장면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라고 대답을 해 줍니다.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 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9 스룹바벨의 손이 이전에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시작이 미미하다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라는 뜻입니다. ‘일이 안 될 것 같으냐?’ 이런 뜻이죠?)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으로 보고 기뻐하리라

10절에 보시면, ‘이 일곱 눈은 온 세상을 두루 살피는 여호와의 눈이다.’라고 나오죠? 계시록 5장 6절에는 일곱 눈은 뭐라 그랬습니까? ‘온 세상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영이다.’라고 했죠? 그리고 스가랴서 4장 6절에 보면,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의 신이다.’라고 하죠? 그러니까 일곱 영은,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 전체교회를 일곱 교회라고 계시록은 묘사하고 있어요.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에게 보내진, 온전하신, 완전하신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곱 교회에게 보내지는 성령님을, ‘일곱 영이다.’라고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자, 이 이야기는 스가랴가 본 환상(幻像)입니다. 스가랴에는 총 일곱 개의 환상이 나오는데요, 그중 5번째 환상입니다. 이 스가랴서 4장은 아주 어려운 본문으로 알려져 있죠? 그래서 이 스가랴서 4장만 가지고도, 1년을 설교를 하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여러분들에게 아주 짧은 시간에, 제가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환상은 하늘의 성전(聖殿)! 즉 하나님나라를 묘사하고 있는 환상입니다. 천상에 하나님나라! 성전을 묘사하면서, 그 성전이 지어져 가는 모습을 묘사하기도 하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떻게 묘사되는고 하니, 순금 등대에 일곱 촛대가 있고, 그 양 옆으로 두 그루의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등대로, 감람나무에서 계속 금 기름이 흘러 들어, 그 촛대의 불이 꺼지지 않는 장면이에요. 이 장면을 여러분이 머리에 잘 떠올리고 계세요.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스가랴가 천사에게, 이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묻죠? 천사는, ‘그것은 이런 거야!’라고 설명해주지 않아요. 그러면서 ‘네가 보고 있는 그 모습은,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能)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전을 재건하는 스룹바벨의 이야기로 끌고 가죠? 그러니까 이 장면은, 성령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참 성전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쉬운 말로 하면, 참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참 교회의 모습!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배웠죠? 우리는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교회잖아요? 그렇게 성령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스가랴서 환상에서는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따라와 주세요.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이 나오는데, 스룹바벨은 누굽니까? 제가 새가족양육반에서는 설명을 해 드렸죠?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었죠? 그리고 BC 538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성전재건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돌려 보낼 때, 1차 포로귀환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사람이, 스룹바벨이에요. 성전을 재건하는 임무를 띠고, 이스라엘로 귀환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스룹바벨입니다.

여호와긴이라는 사람이 있죠? 바벨론 포로 때 잡혀간,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열왕기하가 여호야긴의 석방으로 끝이나죠? 바로 그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왕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성전을 재건을 하는 데, 엄청난 방해가 있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BC 520년경부터 사역을 시작했는데요, 당시에는 페르시아의 다리오가, 애굽의 충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군대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불똥이 또 자기들에게 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재건을 방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했죠? 그리고 앗수르가 혼합정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수르로 데리고 갔고, 앗수르 사람들과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땅에 심어 놓았죠? 그래서 피가 섞였습니다. 그래서 남 유대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서, ‘사마리아 인이다. 개만도 못한 사마리아 인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남유대가 포로귀환을 하고 성전을 재건한다고 하니까, 이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들도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이니까, 그 성전재건을 돕겠다하고 나셨다고요. 그랬더니 남유대에서, ‘너희 같은 더러운 자들은, 성전재건에 참여할 수 없다.’하고 거절을 했다고요. 그래서 이 북이스라엘 사람들! 사마리아 사람들이 열이 받아서, 그 성전재건을 오히려 방해를 했습니다. 성전 재건하는 현장에다가, 시체를 갖다 뿌려놓고 그랬다고요.

그리고 요한복음에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리심 산에다가 자기들 마음대로 성전을 지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짓는데, 벽돌이 모자라고, 또 땅에 문제가 있고 해서, 계속해서 이 성전재건이 지연되고 있을 때예요. 그래서 스가랴가 ‘정말 성전이 재건될 수 있을까? 이 성전이 정말 재건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고요. 그때에 스가랴에게, ‘스룹바벨이 재건을 시작한 성전은, 반드시 이루어진다.’하고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전은 결국 BC 516년에 완성이 되죠? 역사적으로도요!

자 이런 역사적 배경을 머릿속에 넣어두시고 같이 가시자구요? 성경에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오죠? 스가랴나 학개, 에스라, 느헤미야 다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성전 재건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성경이 그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나타나는 성전 재건이라는 것은, 옛 성전을 무너뜨리고 새 성전을 지으시는,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을 창조하시는, 즉 교회를 탄생시키는, 여러분의 구원의 모습!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성전을 무너뜨려라! 내가 사흘 안에 성전을 짓겠다!’ 그렇게 말씀하시죠? 바로 그 구원의 모습을, 새 창조의 모습을, 이 성전 재건의 모습에서 우리는, 읽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어떤 방해가 있어도, 우리의 구원은 완성되고야 만다는 것을, 읽어내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장면이에요. 오직 성령으로 될 것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그 일은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가, 스가랴서 4장의 다섯 번째 환상인, 일곱 촛대와 두 감람나무인 것입니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이 환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게 어떻게 은혜와 평강에 메시지가 되는지! 10절에서 분명 이 일곱 촛대를 가리켜,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이다.’라고 이야기하죠? 성령입니다. 그런데 계시록 1장 20절에서는, 일곱 촛대를 다르게 묘사를 하고 있어요. 계시록 1장 20절로 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20)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라고 이야기해요. 일곱 교회는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죠? 바로 여러분을 상징하는 것이, 일곱 촛대라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스가랴서에서는, 얼른 피상적으로 보면, 일곱 촛대는 성령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죠? 이렇게 성경에서 일곱 촛대는, 성령으로도 표현이 되고, 교회로도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와 성령은 어떤 연관이 있기에 이렇게 표현이 되고 있는 것이죠? 눈치 빠르신 분들은 금방 이해를 하실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완성하셨죠?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올라가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성령을 이 땅에 보내셨어요. 그래서 교회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교회인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 참 교회의 모습이죠? 성령이 오셔야, 교회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교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죠? 요한복음 15장 26절로 가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26)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탄생되는 것입니다. 지금 스가랴서의 환상은,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금 기름이 공급되고 있죠? 그 기름은, 성령님이시라고요. 그래서 그 금 기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탄생되고, 성령님으로 유지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오시므로 탄생이 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의 조명(照明)과 인도(引導)와 충만을 받아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묘시하는 것이죠? 그 교회가, 천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이 땅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거든요. 여러분은 이미 불이 붙은 교회라고요.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부어지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는 빛을 발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라고요.

교회라는 것은 이렇게, 성령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유지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촛대에 불이 붙어서, 그것이 촛대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불이 붙어야 비로소 촛대가 되는 것이죠? 교회와 성령은 불가분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곱 촛대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탄생이 되고 빛을 발하게 되는, 교회(敎會)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누누이 설명해드린, 그리스도와의 연합! 유니온 크라이스트(Union Christ)를 떠올리시면, 조금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그럼 성경에 등장하는 그 촛대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한 번 살펴보자구요. 출애굽기 25장 31절로 가겠습니다.

(출애굽기 25:31-40)

31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 밭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32 가지 여섯을 등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그 세 가지는 이편으로 나오고 그 세 가지는 저편으로 나오게 하며

33 이편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밭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편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밭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같게 할지며

34 등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에 잔 넷과 꽃 밭침과 꽃이 있게 하고

35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 한 꽃밭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 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 밭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고

36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하게 하여 전부를 정금으로 쳐 만들고

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38 그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지니

39 등대와 이 모든 기구를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40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

네, 이렇게 등대를 비롯한 성막 전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으로 데리고 가셔서, 모세에게 직접 보여주신, 하나님나라의 모형이라고요. 모세가 하늘나라를 보니까, 그 하늘나라에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어떤 빛을 발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촛대로 묘사를 해 놓은 것인데요, 성막에 놓일 촛대를 만드는데, 촛대를 정금으로 만들어요. 촛대를 정금으로 만들라는 것은, 당시 금은 빛을 상징하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촛대는 지성소 앞에 성소에 위치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보좌 앞이죠? 그렇게 만들어진 촛대에, 불을 밝혀서, 1년 365일 24시간 불이 꺼지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계십니다. 왜 그 촛대에 불이 꺼지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실까요? 레위기 24장 1절로 가겠습니다.

(레위기 24:1-4)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태우기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지며 (절대 꺼뜨리지 말라는 거예요. 감람을 찌어낸 순결한 기름으로 그 불을 밝히는 것이죠? 스가랴의 환상과 흡사합니다. 그죠?)

3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아론더러, 대 제사장인 아론더러, 항상 등잔불을 정리하라고 합니다. 불이 꺼지지 않게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4 그가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의 등잔들을 끊이지 않고 정리할지니라

그럽니다. 여기서도 감람유를 끊임없이 촛대에 부어서,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명령하시죠? 제사장들은 바로 그 일을 했던 거예요. 왜 성막에, 성전에, 제사장들이 그렇게 많아야 하느냐? 바로 이런 일들을 했다고요.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흘러서 불이 꺼지지 않는, 그 스가랴의 환상과 동일하죠?

그러나 그 옛 성전! 성막에는, 제사장들이 감람나무 기름을 부지런히 날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에서의 환상은, 감람나무에서 직접 금 기름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라고요. 옛 언약에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무엇을 해야 합니다. 그렇죠? 새 언약에서는,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있어요.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를 나타내는 거죠?

성막(聖幕)은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모형(模型)입니다. 그 성막 안에 촛대라는 것은, 그 하나님나라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고, 하나님 보좌 앞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서, 빛을 발하는 어떤 무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 무리가 교회(敎會)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교회는, 성령의 기름으로 빛을 발하고 있어요. 그 교회는 성령의 기름으로만,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성령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죠? 그래서 교회는, 일단 불이 붙여지면, 영원히 빛을 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꺼질 수가 없다는 것이죠! 당시 유대인들은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스가랴서의 일곱 촛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들이였으니까요! 그 일곱 촛대에 부어지는 성령을 상징하는 금 기름으로, 촛대에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그 스가랴의 환상을 떠올리면서, 천사가 설명을 해준, 그 환상의 의미를 되새겼을 것이라고요.

어떤 말입니까? 이는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이야기를 떠올렸을 거라고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본연의 삶을, 재확인했을 것입니다. ‘맞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는 교회다! 이렇게 소심하게, 불성실하게, 겁쟁이처럼 살 수는 없다!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야지!’라고 결단(決斷)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게 하시는, 교회라고요. 그런데 정말 여러분의 삶 속에,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삶이, 그 빛이, 비춰지고 있습니까? 그 삶이 나오고 있습니까?

그 불은, 이미 2000년 전 오순절 날에, 성령이 교회에 오심으로 켜졌다고요. 여러분의 심지에, 그 불이 붙어 있습니까? 빛이 나오고 있습니까? 아니라면, 여러분은 가짜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로 가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17-18)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서 ‘주의 영광을 보다’는 구절의 ‘보다’는, ‘카토티조마임’입니다. 이 말은, ‘반영하다, 반사하다, 거울에서처럼 보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카토티조마임’의 이 시제는, 현재형이거든요! 헬라의 현재형은 뭐라 그랬죠? 계속 진행되는 것을 표현하는, 진행형을 나타내는 거라 그랬죠? 우리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빛으로, 반사해 내는 촛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로 갑니다.

(마태복음 5:14-16)

14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내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여기서 ‘말’은 호스(horse)가 아니라, 한 말, 두 말, 이렇게 말(斗)을 재는 그 ‘말’이에요.)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래요. 너희는 빛을 발하면서 살아야 되는 존재다. 그 빛을 발하는 삶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어떻게 돌립니까?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오직 빛을 드러내는 여러분의 삶인 것입니다. 요한1서 1장 5절로 가겠습니다.

(요한1서 1:5-7)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래요. 빛 가운데서 행하면, 빛이신 하나님처럼 빛 가운데 행하면, 너희는 교회다! 아니면? 가짜라는 것이죠. 에베소서 5장 8절로 가겠습니다.

(에베소서 5:8-9)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이 되라!’가 아니에요, ‘빛이다!’라고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성경은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난 교회에게, 빛을 받은 자로서, 빛을 발하며 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빛을 발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하죠?

소요리 문답 1번! 우리 인생의 목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 교회가 이 땅에서 당연히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빛을 발하며 사는 거예요. 무엇이 빛을 발하는 삶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까? 여러분! 부자가 되어서, ‘야!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간증하고 다니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일까요? 그럼 예수를 믿지 않는 빌게이츠는, 지금 누구한테 영광을 돌리는 겁니까?

아니면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이, 우리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일까요? ‘예수를 잘 믿으니까, 저렇게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구나!’ 그러면 하버드와 MIT와 예일에 있는 수많은 불교신자들과, 무신론자들은,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빛을 발하는 교회의 삶은 뭐예요? 이 땅에 빛으로 오셔서, 빛의 삶을 살다가 가신 분이 계시잖아요? 그 삶을 좇아가면 되는 거예요. 그 삶을 닮아 가면 되는 거예요. 그 삶을 흉내 내면 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을 보세요.

(요한복음 8:12)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에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께서 직접 당신을 가리켜, ‘나는 세상에 빛이다!’ 그러신다고요. 그리고 ‘나를 따르는 자는, 절대 어두움에 행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세요. 요한복음 12장 46절로 가겠습니다.

(요한복음 12:46)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

그 빛이 왜 왔다고요? 우리를 빛으로 만들기 위해서! 빛을 비추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불을 붙여서, 빛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어두움에서 건져 내서 빛을 발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그 빛이 이 땅에 오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빛이셨다고요. 교회는 그 빛을 그대로 흉내 내어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살다 가셨나요? 부자로, 권세를 누리면서 ,떵떵거리며 살다가셨나요? 아니에요. 힘들고 어렵지만, 그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다 가셨다니깐요. 요한복음 14장 9절 보세요.

(요한복음 14:9)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죠? 그 말은, 시편에 나오는, ‘아멘! 아멘!’이라는 말입니다. ‘아멘’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보고 듣고, ‘옳습니다! 맞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아멘! 아멘!’하고 말씀을 시작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하늘에서 보신 것과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그대로, ‘아멘! 아멘!’ 하면서 살다 가셨다는 거예요. 살아내고 가셨다는 거예요. 우리도 똑같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입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증인(證人)들이라고요. 그것이 교회에 존재 목적이라고요.

교회는 이 땅에서 수천만 불짜리 건물 짓고, 사람들 모아서 대단한 일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면서,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진정한 부흥이라는 것은, 교회에 맴버들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지어져 가는 것을, 부흥이라고 하는 것이지, 사람들 많이 모으고, 건물 큰거 사는 게 부흥이 아니라고요. 참된 리바이벌(revival)은, 우리가, 이 처치 멤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빛을 발하는 그 하나님의 자녀로, 잘 지어져 가는 것을, ‘부흥이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박국서에서 배웠잖아요?

부흥(復興)이 뭐였습니까? ‘주여 수 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라는 그 부흥이 뭐였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에게 불필요하고 악한 것들은, 오셔서, 어서 오셔서, 완전히 박살내주옵소서!’ 그게 부흥 아니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어? 세상에 저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네! 아니, 저들은 뭔가 다른 나라 사람들 같다. 아니, 도대체 누구를 닮은 것일까? 저들이 믿는 하나님은, 누구기에 저들이 저렇게 사는 것일까?’라는 평가를 드러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의 증인으로, 빛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떻게 만사형통(萬事亨通)! 일사천리(一瀉千里)! 여유만만! 또 뭐 있어요? 화기애애! 그런 것만 있겠습니까? 여러분! 거기에는 핍박(逼迫)과, 고난(苦難)이 따르게 마련이라고요. 여러분! 제가 제일 강조하는 게 뭡니까? 설교 때마다, 가장 강조하는 게 뭐예요? 스피드입니까? 뭡니까?

우리는 이 땅에 눈 두고 사는 사람들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우리는 이 땅에다가 아방궁 짓고, 기둥박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것이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크게 부흥하고 번영을 누리면서 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 땅의 삶에다가 금칠을 하려고 하시냐구요?

이 요한계시록을 받아서 읽던, 초대 교회 사람들은,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힘겨운 핍박과 고난에 겁을 먹고 있었고, 자신감을 잃고 있었고, 자폭하고 싶을 만큼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고요. 그들이 요한 계시록을 받았습니다. 누군가가 앞에서 이 요한계시록을, 감격에 복받쳐, 읽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듣다가, 그 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으로 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감격한 거예요. 그들은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것은, 힘으로 눈으로 되는 게 아니라, 성령에 힘으로 되는 것을, 깨달았을 거라고요. ‘아! 우리는 이렇게 약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시겠구나! 그 스가랴서의, 일곱 촛대 옆에 있는 그 감람나무로부터, 금 기름이 계속해서 공급이 되어서, 그 촛대에 불이 꺼지지 않듯이, 우리는 이렇게 약하지만, 교회는 성령으로 탄생되고 성령으로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끌고 가시겠구나!’ 하고 평강을 얻었던 거예요. 안도의 숨을 쉬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평강(平康)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평강은, 아무 일 없는 그런 상태가 아니에요. 전쟁이 없는 그런 상태가 아니에요. 전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확신! 고통 속에서도 반짝이는, 어떤 소망! 공격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오고 있는데, 내 안에 흔들리지 않는 그 소망 때문에, 내가 기뻐하고, 내가 흔들릴 수 없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평강인 것입니다.

인터넷에, 군대에서 고참들의 횡포를 견대지 못하고, 자살을 한 어떤 병사의 기사 아래에, 이런 다른 이등병의 편지가 올려져 있었습니다. 똑 같은 상황에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살을 했고, 어떤 사람은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저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밥도 이제 먹을 만하고, 잠을 못자는 것도 이제 견딜 만합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게으르고, 저만 생각하며 살았는지, 절실히 느끼고 배웁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얼차려를 주고, 행패를 부리는 고참들을 보면서, 교회에서 배웠던 인간에 죄성(罪性)을 배웁니다. 그리고 결심해 봅니다.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그러나 자신이 없습니다. 저도 힘을 얻게 되면, 얼마든지 약자를 깔볼 수 있는 죄인이니까요. 힘에 벅찬 유격훈련을 받으면서, 제 몸이 얼마나 허약한지 깨달았습니다. 이 허약한 몸으로, 그동안 얼마나 객기를 부리며 살았었는지, 참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힘이 들지만, 배우는 보람이 있네요. 힘이 들어 무너져 버리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만 떠올립니다. 제가 그렇게 무너지면, 어머니가 실망하실 테니까요. 삶이 힘드니까, 어머니가 더욱 보고 싶습니다. 지금 저는 제대할 날만을 기다립니다. 제대할 때까지 많이 배우고, 바른 사람이 되어, 돌아가겠습니다. 제대하면 꼭 어머니께 효도하겠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어머니와 함께 할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이렇게 기쁩니다.

네 똑같은 상황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도저히 못 견디겠다 하고, 목숨을 끊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니야! 이 상황은 나에게 꼭 필요한 거니까 내가 여기서 많이 배우고 사람 되어서 나는 돌아갈 거야! 나는 여기서 뭔가 배우고 돌아가야 해!’ 하고 다른 반응을 보였다고요. 핍박이 끊어지지 않았어요. 공격이 끊어지지 않았어요. 고참들의 횡포가 끊어지지 않았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속에, 그에게는 소망이 있었다고요. 이제 나에게는 곧 제대할 날이 다가올 것이고, 제대를 하면 나를 두 팔 벌려 맞이해주실 그 어머니가 있다는 거예요. 그 어머니와, 영원해 행복하게 살 그날을 소망하면서, 지금 나는 뭔가 배워서, 어머니가 기뻐하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가겠다는 거예요. 그게 평강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교회를 이 땅에 던져 놓으신 것입니까?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거예요. 하늘나라에선 필요 없는, 그러한 악한 것들! 추한 것들! 다 잘라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과 경건을 연습하고 훈련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하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에게 훈련교관을 붙이신다고요. 말도 안 되는 억지! 분 냄! 짜증! 핍박! 횡포! 그런 것으로 우리를 괴롭히게 한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배우는 거예요. 거기서 인내와, 사랑과, 용서와, 온유를 배우는 것입니다. ‘어쩌다 내 삶에, 저런 웬수가 나타나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가?’로 가지 마시구요.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금 뭔가를 가르치고 계시는 구나!’로 가시란 말이에요.

이 자리에는 분명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하하) 그 분들은 기도하세요. 여러분은 지금 죽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들어서 썼던, 수많은 민족과 사람들을 보세요. 형체도 없이 사라졌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관심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기 위해서, 잠시 들어서 썼다가, 그들은 완전히 멸망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회개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유 없는 핍박과 고난을 받으시면, 기뻐하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지금 세심한 관심과, 세심한 배려로, 여러분을 만들고 계시는 거예요. 핍박을 당하시는 여러분!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자기 한 몸 편하기 위해, 남을 괴롭히는 사람들! 핍박을 가하고 있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죽으시면 안 됩니다.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삶 속에, 지금 견디기 힘들고,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그러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까? 그래서 도저히 더 이상은 못 갈 것 같은 좌절에 빠진 분들! 혹시 계십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은, 이미 성령님께서, 테이크 오버(take over)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사시는 이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시라고요. 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으로 데리고 가실까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그런 일을 허락하셨을까요?

이제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옥에 가면, 하나님도 지옥에 따라 오셔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지옥에 못 가요. 우리의 신분은 그렇게 안전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힘든 상황을 허락하셨다면, 지금 우리에게 닥친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들은, 다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데, 필요한 것들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걸 놓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걸 아는 우리가, 어찌 평안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보좌 앞에 일곱 영!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천국으로 향하고 있는, 순례자(巡禮者)들입니다. 나그네들입니다. 여러분! 그 분이 계속해서 우리를 조명하고 계시고, 힘을 주고 계시고,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응원하고 계시다고요. ‘이겨라! 이겨라! 이겨라! 내 새끼들아!’ 감람나무에서는 지금도 계속 금 기름이 흘러나오고 있다고요. 우리는 불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힘내십시오.

초대교회 사람들이, ‘성령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는 말만 듣고도, 그렇게 평강을 얻었다면, 여러분도 동일한 평강 안에 거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이 그 엄청난 방해에도, 기어코, 새 성전을 완성을 해 냈듯이, 하나님나라는 반드시, 속히, 완성이 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고 계신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힘내십시오! 다시 한 번 꼭 마음에 세기세요.

하나님은 완성된 하늘나라의 복을 가지고, 우리에게 역동적으로 오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과, 성령님으로 함께 하고 계시다고요. 두려워 마세요! 평강을 찾으십시오! 은혜와 평강! 그것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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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이라는, 편지의 서문(序文)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편지의 서문 중에서 인사말을, 지금 우리가 3주째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의 부분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앞서 1절 2절을 공부하면서 나누었던 것처럼, 이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공부할 부분이 아마,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에 요약이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하실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이 요한계시록을 썼던 당시는, 로마가 전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들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해서, 로마에 의한 세계평화를 외치고 있었죠? 요즘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그러죠? 미국에 의한 세계평화! 그래서 미국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라크를 공격하고, 뭐 북한에게 경고를 하고 그랬습니다. 이 팍스 로마나를 모방하고 있는 것이죠?

이 팍스 로마나! 이 로마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충분히 매력적인 거였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황제숭배만 따른다면, 더 없는 평화(平和)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 의해 세계가 평정되었기 때문에, 전쟁도 없었습니다. 예수만 믿지 않는다면, 박해를 받을 이유도 없었어요. 그러나 이게 정말 평화일까요? 여러분?

마치 이런 것과 같은 거죠? 뉴 올리온스나 라스베가스 같은 데 가면은, 좀도둑이 없다. 그래요 왜 그러냐면? 거기에는 마피아가 자체 치안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많아 와서 안전하게, 기분 좋게, 돈을 많이 읽고 가야 되는데, 좀도둑들이 기승을 부리면은 방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체 치안을 마피아가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정말 평화입니까? 여러분! 그것은 더 깊은 나락으로 우리를 빠져들게 하는 것이죠? 마치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로마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주는, 무사안일(無事安逸)과 평화(平和)와 안녕(安寧)이라는 그런 영적 생명력을 상실케 하는 사탄의 공격! 그 공격에도, 초대교회 사람들은 노출되어 있었고, 예수를 믿는 것으로 말미암아, 물리적으로 또 가해져오는, 가시적인 핍박에도 노출되어 있었어요. 이렇게 양쪽에 노출되어 있는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진짜 은혜가 무엇이고, 진짜 평강이 무엇인지를 확인시켜 주시려고 이렇게, 서문에서, 인사말에서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정말 평강(平康)은, 전쟁이 없고, 외부적인 적이 없고, 먹을 것 입을 것이 모자라지 않는, 그런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 그러한 편안한 상태가 평강이라면, 지금 너희들은 평강이 아니다. 그런데 평강을 지금 빌고 있다는 것은, 평강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이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해가 되어져서, 인제 그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수혜자가 된, 그것으로 말미암아, ‘아! 우리는 가야 할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구나!’라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평강을 얻게 되는, 그 평강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안에서, 로마로 상징된 그 사탄의 세력의 공격은, 이런 동일한 모습으로, 양쪽에 동일한 모습으로, 지금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고요. 이런 평안함! 무사안일! 안녕! 이런 것으로! 그래서 꼭 이런 상태에서도, 예수를 믿어야 되나? 내가 이렇게 돈 많고, 지금 부유하고, 집안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 예수를 왜 믿어? 이런 것으로! 또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시어머니한테, 때로는 자식한테, 며느리한테, 구박을 받는 뭐 이러한 가시적인 핍박의 모습으로 공격하고 있다고요. 우리를 실망시키고 좌절시키기 위해서!

그러니까 우리는, 이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아! 동일하게 지금 우리에게 이야기 하시는 것이구나!’라고, 우리는 계시록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는 거예요.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가 착하게, 선하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사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한다고요. 그거는 성경을 바르게 보는 방법이 아니에요. 성경은, 성경 안에서 우리가 교훈을 받으라고 성경을 주신 게 아니라, 그 성경 안에, 우리의 모습이 어느 지점에 들어가 있는가를, 발견하는 게 성경이라고요. 그래서 ‘아! 내가 바로 이런 존재인데, 아!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건져내셨구나!’라는 것을 발견하면, 우리의 삶이 변하는 것이지, 성경에서 착하게 사는 방법! 도덕적, 윤리적으로, 선하게 사는 방법을 찾아내서, 우리가 적용하는 거 아니라고요. 여러분 계시록을 읽으면서, 계시록 안에 들어 있는 여러분을, 발견하셔야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가, 3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충성된 증인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고, ‘그분은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 진짜 왕 중의 왕!’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자, 이 구절은, 요한이, 시편 89편을 인용한 거예요. 보겠습니다. 시편 89편 27절로 가겠습니다.

(시편 89:27, 37)

27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장자를 삼는다’는 말은, ‘먼저 나시고’란 말이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계시록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어요?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이렇게 표현했어요. 같은 말입니다. 37절 보시면,

37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 (‘확실한 증인’이라는 것은, ‘페이스풀 위트니스(faithful witness)’라는 거예요. 충성된 증인! 똑같은 말이에요.) 달 같이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 하셨도다 (셀라)

그랬습니다. 당시 이 편지를 받은 초대교회 신자들은, 바로 이 시편을 딱 떠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평강을 얻을 수 있었다는 얘긴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이 시편 89편에 쓰여 있기에, 그들은 이 내용만 듣고도 금방 평강을 얻을 수 있었을까? 시편 89편 19절부터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시편 89:19-26)

19 주께서 이상 중에 주의 성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돕는 힘을 능력 있는 자에게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한 자를 높였으되

20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

21 내 손이 저와 함께 하여 견고히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22 원수가 저에게서 강탈치 못하며 악한 자가 저를 곤고케 못하리로다

23 내가 저의 앞에서 그 대적을 박멸하며 저를 한하는 자를 치려니와

24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저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을 인하여 그 뿔이 높아지리로다

25 내가 또 그 손을 바다 위에 세우며 오른 손을 강들 위에 세우리니

26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다윗이, 왕권을 갖고, 기름부음 받은 왕이 되어서, 대적들을 물리치고, 다스리는 장면이 표현된 게 바로 이 시편 89편이란 말이에요. 유대인들이 지금도 오매불망 그리워하는, 그 화려했던 그 다윗의 왕국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바로 다윗의 언약으로 약속되었던 영원한 나라를, 완성하셨고,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거예요. 확인시켜주고, 강조시켜주기 위해서, 요한은, 시편 89편의 표현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의 언약이 뭐죠? 유대인들이 오늘날 까지도 오매불망! 그 언약이 오늘날까지도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다윗의 언약이 뭐냐고요? 사무엘하 7장 12절로 가겠습니다.

(사무엘하 7:12-16)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시는 말씀이지요?)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성전을 건축할 거란 말이에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네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그래요.)

한 왕이 나서, 그 나라를 영원히 다스린다는 그런 내용이에요. 이것이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셨어요. 이것을 ‘다윗의 언약’이라고도 하고 ‘나단의 신탁’이라고도 이야기한다고요.

일차적으로 이 이야기는, 솔로몬에 대한 이야기죠? 다윗의 아들 솔로몬 솔로몬이 성전을 제건하잖아요? 13절과 16절에 보시면,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라는 것을 우리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왕위가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라는 말씀이 있죠? 13절 16절에 보시면!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까? 솔로몬의 왕위가 정말 영원히 견고케 되었나요? 아니에요. 바로 그 솔로몬의 아들 대에 가서, 여로보암, 르호보함으로 나라가 둘로 갈라졌어요. 그리고 BC 722년에 북 이스라엘은 홀랑 망했어요. 앗수르한테! BC 586년에 남유대는 바벨론한테 홀랑 망했구요. 그리고 그 이후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없었어요.

1947년에, 그들이 시오니즘! ‘시온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을, 스위스에서 외치고, 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다시 만들었다고요. 그때까지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없었어요. 이 지구상에! 나라가 없었으니까 당연히 왕도 없죠? 그러면 하나님은 지금 무슨 약속을 하신 거예요? 여기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고 계시는 거예요.

지금 이 구절은 참 성전이신, 진짜 왕이신, 메시아가 오셔서, 승리를 하시고, 또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왕위에 올라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을 표현한, 메시아에 관한 언약인 것입니다. 세대주의자들! 디스펜세이션리즘(Dispensationalism)이라 그러죠? 이 세대주의자들도, 지금까지, 이 왕국이 이 땅에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이 ‘다윗의 천년왕국’을 지금도 기다리고 있죠? 그것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아에 관한 언약인 거예요.

바로 그 메시아가 오셨고, 그 왕국을 완성하셨고, 지금 다스리고 계시다는 뜻이에요. 이미 하나님이 일을 다 이루셨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너희는 잘 참고, 인내하고, 견뎌내라! 이미 완성된 그 나라에 너희는 속해 있지 않니? 그러니까 잘 참고, 이겨내라! 너희는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거야!’ 이렇게 우리를 격려하고, 응원을 해주는 구절이, 바로 오늘 읽었던 구절이라고요. 거기에서 우리는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에서, 계시록에서, 그리고 다른 여러 곳에서, 성경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된 증인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 그리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 이렇게 표현을 해 놓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과, 지위에 대해서 묘사를 해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의 예수그리스도의 삼(3)직(職)! 왕이며, 제사장이며, 선지자였던 그분의 3직에 대해서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충성된 증인’이라는 것은 뭣이죠? 증인! 증인이라는 것은 뭐예요? 증인은, 어떤 것을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이야기 하는 거죠? 성경에서 어떤 것을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이야기 하고 선포했던 자들을 뭐라고 합니까? 선지자라고 하잖아요? 그죠? 충성된 증인 선지자의 직위이구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 이것은 제사장이라고 그래요. 죽는 다는 것은 뭐예요? 자기가 자기를 제물로 드려서, 제사를 드린다는 이야기거든요. 아! 그거 제사장의 직분이죠? 그리고 그분은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다. 그래요. 임금들의 머리는, 그분이 진짜 왕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예수님은 왕이셨고, 제사장이었고,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제가 자세히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님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증인이 뭐예요? 조금 전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자죠? 그래서 제가 지난주에 설명해 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말은, 시편의 ‘아멘! 아멘!’이란 뜻이라 그랬죠?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만, 하나님이 시키신 것만, 얘기 한다는 거예요. ‘진실로, 진실로, 아멘! 아멘!’하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분은 증인이며, 선지자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죠? 신명기 18장 18절 보겠습니다.

(신명기 18:18)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 입에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이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예수님은 바로, 그 선지자셨어요. 내가 네 뒤에 한 선지자를 둘 거야! 그 선지자! 그게 바로 예수님이라고요. 예수님은 구약에 그 모든 선지자들로 상징되었던 그 선지자! 참 선지자였어요. 그리고는 완벽하게 그 역할을 다 해 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충성된 증인의 삶은, 그렇게 쉽지가 않았죠? 늘 반대하는 사람들과, 회유하는 사람들과, 노골적으로 야유를 하는 사람들과, 때리는 사람들과, 침 뱉는 사람들과, 배신하는 사람들과,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셨어요. 그리고는 수난을 받으셨고, 죽으셨습니다. 바로 그 증인의 삶을 살다 가셨어요.

그런대 보세요.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교회에게 당부하신, 아주 유명한 말씀이 있죠? 사도행전 1장 8절요.

(사도행전 1:8)

8 오직 성령이 너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들을, 똑같은 증인으로 부르고 계시잖아요? 너희들은 내 증인이라 그래요. 그 증인이 어떻게 살다 가셨어요? 수난받고, 고난받고, 죽으셨어요. 우리는 유니온크라이스트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죠? 우리도 그런 증인의 삶을 살아 내야 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예수님은 교회를 예수님과 똑같이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교회는, 예수님처럼,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았어요. 초대교회 사람들은요! 당시로는, 죽음까지도 불사해야 하는 그런 삶이었다고요. 지금하고는 비교가 안 되죠? 하나님은 당시 예수를 믿음으로 핍박을 받고 있고, 고난을 당하고 있던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충성된 증인들아! 충성된 증인들아! 너희가 충성된 증인으로서 지금 당하고 있는 그 고난을,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예수가, 다 겪고 갔단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지금 맞는 길을 가는 거야!’

사람들은 두려웠을 거예요. 아니, 예수를 믿는데, 왜 우리의 삶이 이렇게 고난과, 핍박으로 점철되는 거야? 그럴 때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수가, 충성된 증인이었던 예수가, 그 길을 미리 살다 가지 않았니? 너희들도 증인이잖아? 당연히 그 길을 너희들도 가야되는 거야! 너희들의 삶에 나타나는 그 고난과 핍박은, 당연한 것이란다.’ 이렇게 우리를 응원하고 계시는 거예요. 민수기 11장 29절 보세요.

(민수기 11:29)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성령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시죠?)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서,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곧 불평을 하기 시작했죠? 애굽의 부추와 마늘과 고기를 그리워했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어서, 각기 장막문 앞에서 울었다.’ 이렇게 성경이 표현을 하고 있어요. 얼마나 고기가 먹고 싶었으면, 장막문 앞에서 울었대요. 고기가 먹고 싶어서!

그러니까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가서 불평을 합니다. 뭐라 그러죠? ‘하나님! 내가 저 왼수들을 낳았습니까? 왜 저들이 나에게 이렇게 불평을 하게 만드십니까? 그리고 힘들어서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라 그래요? ‘모세야! 알았다. 내가 고기 먹여줄게!’ 그래요. 언제까지? ‘코에서 냄새가 날 때까지 먹여줄게!’ 그래요. 메추라기를 주시죠?

그리고는 모세의 짐을 덜어주시기 위해서, ‘70명의 장로를 세워라!’ 그러세요. 모세가 70명의 장로를 세워서, 성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죠? 거기에서 성령이 임하신다고요. 그러니까 그 70명의 장로들이 다 예언을 해요. 그런데 이 진중에 있던, 멜닷과 엘닷이라는 사람이, 거기에도 성령이 임해서, 그들이 예언을 해요. 그러니까 소년이 쪼르르 와서 고자질 한다고요. ‘어! 저들이 진중에서 성령을 받고 예언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그 옆에 있다가, 모세에게, ‘금하게 하소서!’ 그런다고요. 그때에 모세가 한 말이에요. 이 말이 ‘왜 금하게 하냐?’ 그래요. ‘왜 금하게 하냐?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시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들이 성령 받고 예언하는 거 시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그 신을, 성령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여러분들 포함한 교회예요.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일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장 오순절에! 교회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해서, 그들이 성령을 받고, 이제 뭐가 된 거예요. 선지자가 된 거예요. 모세의 예언처럼!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모두, 이 시대에 증인으로, 또한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러면 여러분! 그 선지자들이 어떻게 살다 갔습니까?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예레미야나, 호세아나, 그 수많은 선지자들이, 어떻게 살다 갔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하면서, 계속 수모당하고, 배척 받고, 배신당하고, 심지어는 통나무 안에 들어가서, 톱으로 켜서 죽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고, 기름에 튀겨 죽고, 이런 삶을 살았다고요.

여러분은 증인이고 선지자라면서요?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삶이 나타나야 될까요? 무사안일? 태평? 이런 것들이 여러분의 것일까요? 아니, 그 사탄이, 옛날에는 선지자들을 향해서 그렇게 공격을 했던 사탄이, 이제 회개하고 착해진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 당연히 그 삶이 나타나시는 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자연스러운 거예요! ‘하나님! 어떻게 똑같이 예수를 믿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평안한데, 나의 삶은 왜 이렇게 지지리도 복도 없습니까?’ ‘그게 맞는 길이다.’라고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성경은요!

하도 세상에 그 합리주의! 경영논리! 효율성! 이런 것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으면 당연히, 이 땅에서 복 받고, 축복받고, 만사형통! 무사안일! 이렇게 되어야 된다고 믿고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는 웬수들이 또 있구요. 그건 기독교 아니에요.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부분이 한 군데도 없어요.

사탄은 끈임없이 우리를 좌절시키고 실패시키고 절망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삶에, 염려와 탄식과 눈물로 공격을 해올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낙담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사업에 방해를 할 것이고, 때로는 건강을 해치기도 할 거예요. 때로는 자식이 속을 썩이기도 할 거예요. 때로는 남편이 속을 썩이고, 때로는 아내가 속을 썩이기도 할 거예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낙망시키고 좌절시켜서, ‘야! 예수를 믿었더니 어떻게, 삶이 더 고달파지냐?’ 이렇게 우리를 속일 거라고요. 그럴 때 여러분은, ‘드디어 내가 선지자의 삶 증인의 삶에 들어섰구나!’라고 기뻐하라는 거예요. 오히려 평안이 여기라는 거예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이야깁니다. 이 말을 듣고 더 좌절이 되시는 거 아니에요? 혹시? (ㅎㅎㅎ) 이게 성경이에요. 여러분!

그렇게 우리가 힘들 때, ‘이미 충성된 증인으로, 선지자로, 우리가 겪고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고통과 수난을 당하시고, 그 역할을 완전하게 수행해 내신, 그 예수를 바라보면서, 이기라는 거예요. 이까짓 거 이겨낼 수 있다! 예수님도 그 길을 미리 가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그분이 그 길을 가셨다! 그리고 미리 다 겪으시고 승리하신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다윗이 그 다윗의 왕국을 다스렸던 것처럼, 그 완성된 하늘나라! 우리! 하나님의 나라인 여러분들을, 지금 다스리고 계시다! 그러니까 힘내라!’ 이 이야기예요.

두 번째로, 그분은 죽으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죽으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다는 거예요. 자신이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을 보세요.

(히브리서 5:8-10)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분은 제사장이셨어요. 히브리서 6장 20절로 가겠습니다.

(히브리서 6:20)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그러죠?)

예수님은 당신이, 제사장이시면서 또, 제물로 드려지셨어요. 그렇게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시므로, 그 제사가, 완전한 것이었다는 것을 확증하셨다고요. 당시에는 제사를 드릴 때, 그 제물에 흠이 있거나, 아니면 제사의 절차가 조금만 잘못 되어도 제사장이 그냥 즉사했다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그냥 죽으신 것으로 끝났으면, 우리는 구원 못 받아요.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아! 그 제사가 완전한 것이었구나! 하나님이 기뻐하는 완전한 제사였구나!’라는 증거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동물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셨다.’라는 표현을 써요. 먼저 나셨다는 것은, 장남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아울러, 나중에 날 자들도 있다는 말이에요. 먼저 났다는 것은, 나중에 날자가 있다란 이야기잖아요? 바로 그분이 장자로, 맏아들로, 먼저 나셨다는 이야깁니다. 맏아들이며, 장자인 예수의 동생들이 있다는 거 아니에요? 바로 그것은 여러분과 저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 시편 89편 27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시편 89:27)

27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

그러죠? 예수님이 장자이세요. 로마서 8장 29절 보시면,

(로마서 8:29)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분이 맏아들이고, 우리는 많은 형제예요. 우리가 예수님의 형제! 아 닭살이 막 돋는 거 같아요. 예수님이 우리 형제라니요? 하나님이신 그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신 빛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형제라니요? 그분이 맏아들이고, 내가 동생이라니요? 그렇게 영광스러운 신분(身分)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요. 히브리서 1장 6절 보시면,

(히브리서 1:6)

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 (이제 그 맏아들이 오실 거예요.) 하나님이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 지어다 말씀하시며 (그러죠?)

그분은 살아나셔서, 그렇게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이 장자(長子)의 개념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출애굽기에서 나오죠?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지기 위해,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다고요. 강개입하수도구황깜장 주일학교 좋은데 나온 사람은 다 외워요. 이거! 아십니까? 강개입하수, 도구황깜장 마지막에 장남! 장자들을 다 죽이는 거 아니에요?

애굽의 장자들을 다 죽이는데,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른 그 집의 장자들은, 다 살아나는 거예요. 장자는 남자를 대표하는 거예요. 남자는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계수를 할 때, 항상 성인 남자만 셌죠? 남자가 잘나서 센 게 아니라, 성인 남자를 세면, 그가 데리고 있는 식솔은 대충 추측이 가능했어요. 그래서 남자를 센 거지, 남자가 뭐 잘나서 남자만 센 거 아니에요.

남자는? 가족의 대표예요. 그러면 장자라는 것은 남자의 대표고, 남자는 전체의 대표라면, 이 장자는 뭐의 대표예요? 전체를 대표하는 게 장자예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맏아들이라는,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전체인 우리를 대표하신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분이, 완전히 다 고난을 다 당해주셨고, 완전히 죄를 다 이기셨고, 승리하셨단 말이에요. 그것이 ‘먼저 나셨다’라는 말의 의미예요. 장자의 의미! 얼마나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갖다 주는, 그런 말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그렇게 맏아들이 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들이 된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개념은, 양자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기업으로 물려받고, 그 권세를 누리는 존재들을, 양자라 그래요. 우리가 생각하는 양자하고는 조금 달라요.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동일한 수준으로, 대접을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 보시면,

(로마서 8:17)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후사라는 건 뭐에요? 상속(相續)을 받을 자라는 것이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

공동상속자라는 거예요. 정확한 헬라어 번역은,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님의 공동상속자다.’라는 말이에요. 아니,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몸을 입고, 이제 동일한 것을 상속받은 자가 돼요. 이 신분을 정말 아십니까? 여러분? 이게 기독교라는 거예요. 로마서 8장 15절 보시면요,

(로마서 8:15)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다. 그래요. 에베소서 1장 5절 보시면,

(에베소서 1:5)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그래요. 딸들은? 섭섭해 하지 마세요. 히브리 사람들은, 그냥 자녀라는 표현을, 아들들이라고 쓴 거예요. )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어요. 그 맏아들을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맏아들은, 우리의 대표된 맏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세요. 이미 과거예요. 시제는! 그러면 우리의 대표가 그 길을 가서 그렇게 앉아 있다면, 우리는요? 우리의 신분은 너무 확실한 거죠? 우리의 갈 길은 너무나 정확하게 지금 결정이 되어 있는 거예요. 운명적으로!

당시 예수를 믿음으로 죽음에까지 내몰려서, 벌벌 떨고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 다시 확인을 했을 것입니다. ‘그 우리 교회의 삶을 대표로 미리 살다 가신, 맏아들! 우리의 큰형! 그 예수님이 우리의 고난을 받고 죽으셨지만, 우리처럼 이렇게 죽음 앞에 내 몰렸었지만, 그분은 다시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살아나셨다!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다! 그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기뻐했을 거라 말이에요. 그 기쁨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평강이 여러분의 평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제일 두려워 하는게 뭐죠? 죽음이에요! 뭐니 뭐니 다 이렇게 열거를 해도, 그것은 다 죽음 때문에 두려워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사망(死亡)을 이기셨어요. 우리는요?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당당하게 외칠 그리스도인이라고요. 그럼 여러분이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뭐가 또 두려우신 거예요? 지금 그 죽음을 두려워하니까, 다른 것들이 두려운 거예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닥친 문제들이 아니에요. 정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에 몸과 영혼을 전부 지옥에다 멸해서, 불태워 버릴 수 있는 하나님을 아느냐? 그걸 두려워하셔야 돼요 내가 모르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정작 우리가 두려워 야 할 것은, 나는 진짠가? 나는 진짜 하나님의 자녀가 맞나? 이걸 두려워 하셔야 하는데, 그거 자기 앞에 닥친 문제들! 그거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아니에요 여러분의 신분은 이렇게 정확하게 묘사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설명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가 마음속에 고민해야 할 것은, 내가 진짜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거 맞나? 그걸 고민하셔야 돼요. 죽자, 사자 죽을 때까지 예수 믿고 지옥가시면, 어떻게 할 거예요? 거기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요? 그걸 두려워하셔야죠.

그런데 그 예수님은 살아나셨을 뿐만 아니라,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다.’ 그래요. 이제 3번째 부분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시편 89편 2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시편 89:27)

27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그러죠?)

모든 왕들의 왕이라는 거예요. 그거는 진짜 왕이라는 거죠. 이분이! 스가랴서 9장 9절 보세요.

(스가랴 9:9)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분은 왕이세요. 새끼 나귀를 타고 다니셨지만, 왕이세요.)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서에 이미,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예언이 되어 있는 거죠? 당시 초대교회 사람들은, 로마 황제의 그 막강한 권세 앞에서, 벌벌벌벌 떨고 있었다고요. 그럼 막 죽여 버리니깐요. 그러나 사도요한은, 진짜 왕은, 너희의 영혼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천명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진짜 왕은, 예수 그리스도라고요.

여러분의 왕은 누구십니까? 돈이에요? 명예입니까? 자식입니까? 가정의 행복입니까? 여러분을 지금 다스리고 있는, 여러분의 온 생각을 다스리고 있는 게, 뭐냐구요? 진짜 예수님이세요? 우리의 삶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인이시며 왕은, 예수이셔야 하는 거예요. 예수가 아니니까, 다른 문제로 벌벌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성경은 지금, ‘아니야! 진짜 왕은 예수님이야!’ 그러는데, 이때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우리는 돈에 벌벌 떨고, 명예에 벌벌 떨고, 혹시 사람들이 나를 불행하다고 여기면 어떻게 할까? 거기에 벌벌 떤다니깐요. 다를 것 없어요. 이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셔야 하는 거예요.

이 초대교회 신자들은, ‘땅의 임금들의 머리되신 예수님!’이라는 이런 표현들을 대할 때, 금방 구약에 예언된 왕이신 메시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그분이 우리 편이라면, 그 왕 중의 왕이신 그분이 우리 편이라면, 우리는 결코 실패할 수 없다! 왕이신 그분이 우리를 지키고 계신데, 지금 우리에게 환란과 핍박이 닥치는 것은, 뭔가 지금 이유가 있을 거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다 합력해서 지금 선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일 것이다,’라고 평강을 얻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 왕들은 기껏해야 우리의 목숨 뺏어가는 거예요. 그렇지만 하나님은요? 목숨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지옥에 넣어서 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요.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느냐 말이에요? 마태복음 10장 28절 보십시오. 예수님이 직접 하시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0:28)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 (그런 세상 왕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지옥에서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그분이 왕이세요. 예수님이 왕이세요. 진짜 왕이세요. 그 분은, 육신의 몸으로도 진짜 왕이셨어요. ‘아니, 나사렛의 목수의 아들이 무슨 왕이에요?’ 아니요, 진짜 왕이셨어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족보가 나오죠?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 솔로몬! 요셉! 예수까지 내려와요. 누가복음은요?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데, 다윗! 솔로몬이 아니라, 솔로몬의 형인, 나단으로 내려와요. 그리고는 쭉 내려와서 헬리, 그리고 요셉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 둘은 이렇게 다른 족보를 이야기 하고 있어요.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고요. 원래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형 나단은, 법적으로 왕권을 받았어야 할 자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솔로몬을 왕으로 택하셨어요. 그러니까 법적인 왕통은, 원래 나단쪽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이 솔로몬 쪽을 택하셨다 말이에요. 그래서 실제적으로는, 이들이 왕이 되어 내려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마태복음의 족보를 자세히 보면, 거기에서 여고냐라는 인물이 나와요. 누가복음에는 없는 인물이에요. 이 여고냐가 누구냐 하면, 여호야긴이라는 왕이에요. 이 여호야긴은 제가 지난주에도 말씀 드렸지만,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을 시대에 그 왕이거든요. 열왕기하가 이 여호야긴의 석방으로 끝이나죠? 이 여호야긴이, 예레미아서를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그 후손은 절대 왕이 될 수가 없어요. 예레미야서 22장 30절 한 번 보세요.

(예레미야 22:30)

3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여호야긴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그래요.)

여호야긴의 핏줄을 따라서는 인제, 왕이 나올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왕통을 솔로몬 쪽으로 택하셨는데, 그 후손이 지금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어요. 이렇게 솔로몬 쪽 혈통은 저주를 받았고, 나단쪽 혈통은, 왕으로 다스릴 권한이 없어요. 하나님이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인 권한은 있지만! 자,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한 번 보시자구요.

이제 여호야긴의 핏줄로는 안 되죠? 그러나 이 왕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이 핏줄을 타고나지는 않았지만, 양자(養子)로 그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요셉의 친 아들이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양자로 요셉에게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실제적인 왕권을 이어 받는 거고, 나단 쪽에서는요? 법정인 왕권이 어디로 내려와요? 헬리가, 마리아의 아버지라고요. 누가복음에는, ‘요셉의 이상으로는 헬리다.’라고 나오지만, 그들의 족보에는 여자가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요셉이라고 나오는 것이지, 헬리는 마리아의 아버지라고요.

마태복음에 보면은,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이라고 나와 있죠? 이렇게 지금 이 나단 쪽으로는, 법적인 왕통을 끌어 내리셨고, 솔로몬 쪽에서는 실제적인 이 왕통을, 그런데 여호야긴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양자로 그 안에다가 갖다 넣으심으로 해서, 양쪽을 다 충족시킨 진짜 왕을 만드신 거예요. 목수의 집에서 태어났지만!

성경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요셉의 후손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그분이 다윗의 후손입니까? 이런 질문이 안 드셨어요?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됐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진짜 왕이셨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다 충족시킨 진짜 왕이셨다는 거예요.

세상 왕들이, 마귀의 세력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우리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고, 고난을 가하고 고통을 주면, 까짓 거 죽자고요. 죽으면 천국 간다면서요? 그걸 안 믿으니까 두려운 거 아니에요 이 세대가, 진짜 천국과 지옥을 믿냐고요? 까짓 거 죽이면 죽으면 될 거 아니에요? 더 좋은 곳이 있다면서요? 그게 확실하지 않으니까, 벌벌벌벌 떨고 있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말씀 나누고 교제 나누면서, 점점 명확하게 그 나라를 알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게 교회이지, 어떻게 서로 손 얹고 기도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그래서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정말 벽에 뭐 칠할 때까지 살게 해주세요!’ 이게 기독교 아니라고요. 기독교는 좀 더 고급한 거예요. 더 깊은 거예요. 여러분! 그들은 우리의 영혼까지 손댈 수는 없어요. 하나님은 영혼까지도 멸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왕이에요. 우리를 지키고 계세요. 우리를 다스리고 계세요. 확실한 거죠

여러분! 성경이 왜 이렇게 힘써서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까? 이 요한계시록 내용 전체가 우리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거예요. 왜 격려를 해야만 합니까? 뭔가 싸워서 이겨야 할 것들이 있다는 거 아닙니까? 격려를 한다는 것은! 그래서 계시록 내내 나오는 게.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 이겨랴!’ 그러지 않습니까? ‘이겨랴!’라는 것은, 이겨야 할 대상이 있다는 거 아니에요? 우리는 전투하는 자들이에요. 교회예요. 우리는요 멍하니 복이나 받는 자들이 아니라, 전투하는 자들이란 말이에요. 마귀의 세력과 전투해야 하고, 마귀의 세력에 젖어 있던 그 옛 사람과 전투해야 하고, 계속 싸우면서 이겨가야 되는, 전투인들이라고요. 우리는! 군사들이라고요.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우리가 안일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요, 그리스도의 삶에서 고난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서 죽이신 게,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이 땅에서, 전투를 하는 자들이에요.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우리에게 환란을 허락하심으로써, 우리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키우게 만들어 주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거예요. 이 땅은 훈련소라고요. 그게 바른 복음의 해석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 큰 형님이신 장자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대표가 되셔서, 이미 이기셨고, 이 땅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몸으로 살아내셔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고 가셨어요. 그분은 승리자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지금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자리로 반드시 갈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문제를 바라보지 마세요. 그 문제에 너무 몰두해서, 거기에 목숨 걸지 마세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란 책에 보면은, 이 순례자 크리스챤이 길을 가는데, 십자가까지 가는데, 맹수 두 마리가 사슬에 묶여서, 확 물으려 그래요. 이 맹수를 보고 두려워하면, 얘한테 물려요. 얘를 보고 두려워하면 얘한테 물려요. 그런데 이 순례자가 어떻게 갑니까? 앞에서 비치는 빛만 보고 걸어가요. 그랬더니 얘네들이 범접(犯接)을 못해요. 마귀의 공격은 그런 거예요.

여러분! 우리를 우리의 영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낙담시키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드는 거뿐이지, 우리를 건드릴 수가 없어요. 속지마세요. 여러분! 빛만 보고 십자가만 보고 가는 거예요. 문제를 바라보시면 안 돼요. 예수를 바라보셔야 돼요. 여러분의 궁극적인 그 승리를 바라보시라고요. 문제를 바라보면, 우리는 계속 물어 뜯겨요. 계속 물어 뜯겨요. 힘든 거 압니다. 그러니까 모이는 거예요.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함께! 서로 격려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나도 이렇게 살고 있어!’ ‘어! 그래 맞아. 두려운 게 아니구나! 나도 이겨야지!’ 모이는 거예요. 교회가 그냥 모여서 밥이나 먹고, 친목회나 하고, 그림공부나 하고, 이게 아니란 말이에요. 교회는 모이는 목적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큰 형님이신 장자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 같습니까? 뭉게구름 타고 오실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도 사람들이 그렇게 그려놔서, 뭉게구름 타고 탁 그렇게 오실 거 같은데…. 그분은, 전투하는 모습으로 오실 거예요. 폭풍에 구름을 타고 오실 거예요. 마귀의 세력과 이 세상에 관영한 이 죄를 심판하러, 전사의 모습으로 오실 거예요. 불말과 불병거를 이끌고 그들을 심판하러 오실 거예요. 그때에 여러분들은 어떤 모습으로 예수를 맞이하실 것입니까? 이 땅에서 예수의 전투에 참여해서, 온통 몸이 다 찢기고, 눈알이 빠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팔이 부러진, 이러한 전투인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될 거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품어 안아 주면서, ‘그래, 이 전투에서 네가 이렇게 싸워줬구나! 고맙다. 그러나 봐라!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심판하는지 봐라!’ 그게 종말이에요.

그런데 군복을 보니까 말끔해요. 깨끗해! 자기 군복 닦느라고 평생 전쟁에서 동료들이 막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는 버클 계속 닦고 이는 거예요. 군복 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은 영창 가는 거예요. 전쟁 끝나면! 군복이 군복다워지는 것은, 전투를 하면서 피가 묻고 찢기고 헤졌을 때, 그게 군복 아닙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싸워야 하는 전사들이 아닙니까? 여러분!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에, 그러한 전투가, 영적 전투가, 여러분의 삶에 막 닥칠 때, ‘왜 나의 삶에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가 아니라, ‘하나님! 드디어 내가 선지자로, 증인으로, 전투를 하게 되었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한번 이겨보겠습니다.’ 깨지죠? 다시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전사예요. 전투하는 자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보호하시고, 끝까지 안전하게 데리고 가셔야 할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 게하시의 눈에 보였던, 게하시의 눈에 보였던, 그 불말과 불병거를, 여러분도 보셔야 돼요.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그 문제! 고통! 고난! 눈물! 슬픔! 그 전에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안전하게 둘러싸고 있는, 하늘의 불말과 불경거가, 여러분을 딱 지키고 있는 모습을, 여러분은 보셔야 되는 거예요. 그게 교회예요. 지금 여러분의 옆에,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가 어디 범접을 하냐구? 마귀들 두들겨 패며, 지키고 있어요. 끝까지, 이 마지막 날까지, 여러분을 보호하며 지키며, 거룩하게 만들어 가기 위해서!

여러분! 하나님의 응원에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응원에 목소리를 들으셔야 돼요. ‘이겨랴, 내 아들아! 이겨랴, 내 딸아! 이제 알았니? 너희들은 증인으로, 선지자로, 왕으로 왕도를 펴며, 이 땅을 살아가는 거야! 이기면서 살아가는 거야! 알았냐? 이겨라, 내 딸아! 이겨라, 내 아들아! 이겨라, 은지야! 이겨라, 지은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여러분! 그게 기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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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장 5절하고 6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계시록 1장 5절에서 6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5-6)

5 …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아멘’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장차 오실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과 은혜! 그리고 보좌 앞에 일곱 영으로 표현된 성령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 그리고 충성된 증인으로 먼저 살다 가셨고, 또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하나님의 맏아들! 우리의 큰 형! 왕 중의 왕!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부터 오는 그 은혜와 평강을 이야기하면서, 감격을 이기지 못해서 오늘 읽었던 5절과 6절에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합니다. 오늘은 그 찬송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뿐만이 아니라, 사도들은 그들의 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을 전하면서, 언제나 감격에 복받쳐서 중간 중간에, 찬송을 하죠? 예 이야기를 하다가 본인이 그 기쁨과 감사를 참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바울을 한 번 보실까요? 에베소서 3장 20절로 가겠습니다.

(에베소서 3:20절)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아멘’으로 항상 마쳐요. 디모데전서 1장 17절 보시면,

(디모데전서 1:17)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유다서 1장 24절 보시면,

(유다서 1:24-25)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렇게 유다까지도, 사도들은 복음을 이야기 하다가 문득 문득,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고는 못 베긴다고요. 저도 사무실에서 성경 읽다가, 가끔 너무 복받쳐서, 의자에서 내려와서 바닥에 이렇게 무릎 굻고 한동안 앉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엉엉 울 때가 있어요. 감격스러워서 우는 게 아니라, 그 복음을 생각하고, 은혜를 생각할 때, 너무나 그 사랑이, 제가 받은 사랑이 너무 큰데, 나는 왜 이렇게 밖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까? 나는 왜 좀 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나는 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여전히 죄인의 모습으로 서있을까? 왜 나는 좀 더 하나님을 더 찬송하지 못할까? 그거 때문에, 심히 괴로워한다고요. 그래서 눈물을 참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러다가 다시 그 복음에 대해서 묵상을 하죠? 그리고는 이내 어떻게 저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 주셔서, 이렇게 구원해 주셨는지, 놀라고 또 놀랍니다. 그리고 어떻게 지금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지, 그게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또 울죠.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시면, ‘우리를 사랑하사’라는 구절이 있죠? 거기서 ‘아가파오’라는 말이 현재라고요. 헬라어의 현재는 어떤 것을 나타낸다 그랬죠? 현재진행! 우리를 사랑하사,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다. ‘호이에오’는 과거예요. 이미 삼아주셨어요. 그런데 그때에 끝난 게 아니라, 그 사랑은 지금도 계속, 현재진행형으로 나에게 오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격하는 거예요. 이 모양인데도, 그런데도, 아직도 사랑해주신다고 하니까, 너무나 감격스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앉아서 울다가 찬양하고, 그러는 거예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천부여 의지옵소서 손들고 옵니다. 4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난 알 수 없도다! 그렇게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복음을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생각을 한다면, 우리 입에서 어찌 찬송을 그치겠습니까? 어떨 때는 성경을 읽다가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의 것이 되었고, 내가 그곳에서 왕 노릇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꼬집어 볼 때도 있어요. 이게 진짜 꿈인지 생신지! 이게 믿어지니까, 이게 진짜 꿈이면 어떻게 하나?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 예수를 생각하시면서, 복음을 곱씹으면서, 얼마나 감격을 하세요?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시면서, 얼마나 감격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 이렇게 불가능한 모습을 갖고 있는 우리를 생각하면서, 그분 앞에서 정말 울어본 적 있으세요?

기독교는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은혜가, 그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여전히 죄인으로 서 있는 우리의 모습 때문에 울고, 그래서 우는 게 기독교지, ‘왜 하나님! 나에게 이 상황을 허락하셔서, 이렇게 힘들게 만드느냐? 그런 것으로 우는 게, 기독교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신자(信者)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지 못하는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늘 회개하고, 울어야 하는 자들이에요. 그것 때문에 울어야 하는 자들이에요. 사도 요한은, 이 요한계시록을 쓰면서, 얼마나 많은 감격스러운 찬송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무려 다섯 군데에서 복받치는 감격을 표한하죠? 그런데 그 감격이 점차적으로 점진적으로 커져요. 아 급기야 7장 12절에서는,

(요한계시록 7:12)

12 가로되 아멘 (아멘! 이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아멘’으로 시작해서 ‘아멘’으로 끝내는 거예요. 아멘! 아멘! 오늘 읽었던 본문 6절에서는 뭐라 그랬죠? 영광과 능력! 그런데요 복음을 계속 설명하면서 가다 보니까, 이제는 너무 감격스러워서,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단어를 다 갖다 붙이는 거예요. 그러고는 ‘아멘!’하고 도장 딱 찍는 거예요. ‘이게 내 진심이다!’라는 거예요. 그런 찬송이 우리에게도 있냐? 말입니다. 여러분?

그럼 우리는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구원받은 자들이에요. 우리 구원의 목적이 뭐예요? 구원에 목적! 하나님은 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려고요! 그 은혜와 그 사랑을 안 자! 그 하나님을 안 자들이,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자랑하고 찬양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신 일을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에,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그분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거! 그게 우리의 구원의 목적 아닙니까? 거기가 천국 아닙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구원받은 자의 입에서는, 당연히 찬송이 끊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보세요. 에베소서 1장.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구절들인데, 3절부터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1:3-14)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에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자, ‘찬송하리로다!’라고 시작하는 거예요.)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유가 나오죠?)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의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시기 위함인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를 많이 오해하고 있어요.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예요. 기독교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동원하는 종교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종교가 기독교가 아니라고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게 그게 기독교에요. 자존심 상하세요, 여러분? 하나님이 먼저라고요. 우리가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너무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겁이 없는 거예요. 그분을 섬기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을 찬송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목적이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받은 자들조차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겁이 없어요. 하나님을 모르니까요! 그분이 누군지 모르니까! 어줍지 않은 인본주의나, 휴머니즘이나, 인내천(人乃天)! 뭐 천인무간(天人無間) 사상! 이런 인간이 최고라는 사상이, 우리 안에 너무 깊이 뿌리 박혀 있어요. 그게 죄의 본질 아닙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고요. 이거 잊으시면 안 돼요. 하나님은 창조주(創造主)세요. 우리는 피조물(被造物)이에요.

드라마 보면서, ‘너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야!’ 그러면은 그거 보면서, ‘그렇지, 너는 학생이고, 저분은 선생이니까, 그러면 안 되지!’ 그러면서 성경이, ‘너는 피조물이고, 나는 창조주다!’ 그러면은, 역정을 낸다고요. 인간은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죄의 본질이라고요. 저만 생각하는 거! 자기가 최고예요. 자기가 우주(宇宙)의 중심에 있는 거예요. 그게 죄인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 내린 거 아니에요? 그런데 예배당 안에서, 그러한 죄가 버젓이, 신앙의 모습으로 둔갑해서 그냥 울고, 불고 …. 그건 기독교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거예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찬미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이유가 나오죠? 뭐라 그럽니까? 6절에 보면?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

삼으셨다. 그래요.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거예요. 착각하시면 안 돼요. 여러분! 따라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건 당연한 거예요. 자연스러운 거예요.

만일 여러분 중에, 여러분의 삶에 찬송이 나오지 않고, 여러분의 상황만 바라보면서,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상황 허락하셨는가?’ 늘 원망만 한다면, 아직 복음(福音)을 모르는 거예요. 그분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거예요. 이까짓 상황! 문제! 고난들은, 하나님의 그 엄청난 선물 앞에, 그 앞에, 딱 갖다 놓으면, 조적지혈이에요. 세 발의 피! 어디 그런 것들을 여기다 갖다 대요? 이것만 바라보면, 그건 그냥 녹아버리는 거예요. 그런 자들이 그리스도인인 거예요. 여러분!

군대 있을 때, 1년에 한 번씩, 천리 행군을 해요. 천리를! 400킬로예요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몇키로입니까? 잘 모르겠어요? 400킬로 안 돼요. 거기를 걸어가는 거예요. 30킬로 이상 되는 군장하고 총 매고, 천리를! 밥 먹고 자는 시간 이외에! 얼마나 힘들겠어요? 여러분! 그것도 제일 더울 때 골라서 가는데, 잠도 그냥 용인 자연농원 주차장! 거기에다가 쫙 사단 병력 풀어놓고, 담요 한 장 깔고, 담요 한 장 덮고, 그리고 또 ‘일어나!’ 그러면, 일어나면 또 걸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병 때, 이등병 때는, 그냥 걸어가면서 자요. 그래서 논두렁으로 막 걸어가요. 딴 애들 이리로 가는데, 걸어가면서 막 잔다니깐요. 그런데 제가 제대 2개월 남겨놓고, 천리행군이 딱 걸렸어요. 그런데 그때는 이제 이것만 끝나면 제대한다. 그러니까, 아! 너무 여유로웠어요. 누가 무겁다 그러면, 총도 매주고요! 물 먹고 싶다 그러면, 내 수통 다 주고요! 경치 인조이(enjoy)하면서 걸어갔다니깐요. 이거 끝나면 제대하니까, 하나도 안 힘들더라고요. 노래도 부르면서 갔어요. 저는! 말년 병장이니까, 아무도 뭐라 안 그래요. ‘오늘도 걷는 ~ 다마는 …’ 그냥 걷는 거예요. (하하하하)

예, 여러분은 그 제대를 남겨 놓은 구원받은 자들이라고요.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괴로울 때마다, 거기를 바라보세요. 그 은혜를 바라보세요. 그 여러분이 받으실, 유산을 바라보세요. 그러면은 이까짓 거 참을 수 있는 거예요. 이 찰나에 불과한 이 시간! 참을 수 있는 거예요. 여기를 안 바라보고 이걸 모르니까, 그렇게들 그냥 여기에 매달려서 울고, 불고하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기독교는 그거 아니에요. 우리 하나님 섬기는 거예요. 하나님 섬기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받기를 원하십니까?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찬양을 받기를 원하세요?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성경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이 하신 언약이 뭐죠?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네 아버지가 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정말 그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사랑을 알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서, ‘아버지 ~ ’ 이렇게 불러주는 거 그 한마디 듣고 싶어서,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를 경륜해 나가고 계시는 거예요. ‘아버지 ~ ’ 그게 찬송이라니깐요. ‘아버지 ~ 우리 아버지군요! 아버지 ~ ’ 그게 찬송이고, 찬미라고요. 그 이야기 듣고 싶어서, 그 사랑하는 아들에게, 사랑하는 딸에게, ‘아버지 ~ ’ 이 소리 듣고 싶으셔서, 우릴 구원해 내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구원의 목적은, 찬미하고 찬송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이 이 땅에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표현되어 있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설명되었죠?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서, 그 피를, 우리 죄의 대가로 삼으셨어요.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셨다고요. 5절 하반부를 보시면,

5 …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여기에서 ‘해방하시고’라는 말, ‘루오’는 ‘깨끗이 목욕시키다, 깨끗이 빨다’는 뜻이에요. 온통 죄로 더러워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인제 빨아주신 거예요. 하얗게! 하얗게! 우리를 위해서 그 피가 속전으로 치러진 거예요. 성경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5장 9절에 보세요.

(요한계시록 5:9)

9 새 노래로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러죠? 피로! 우리를 사셔야 돼요. 히브리서 9장 22절 보세요.

(히브리서 9:22)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서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가 흐르지 않으면, 우리 죄가 사(赦)해지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로만 우리는 건져 내어질 수 있다는 거예요. 히브리서 13장 12절 보세요.

(히브리서 13:12)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서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라

그래요. 하도 많이 들으셔서, 감동이 없으시죠? 영적 불감증에 걸리신 거예요. 그것이!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고 있어요. 너무 이쁘고 사랑하는 강아지예요. 그런데 강아지가 병이 들었어요. 그래서 수의사를 찾아갔어요. ‘이 강아지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랬더니, 이 수의사가 진단을 해보더니, ‘아!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송아지를 푹 삶아서, 강아지에게 먹이십시오.’ 강아지를 너무 사랑하니까, 집에서 키우는 송아지를 그냥, 잡아다가 삶아서 강아지에게 먹였어요. 그런데 안 나았어요.

그래서 또 다른 수의사를 찾아갔더니, ‘아! 이 병은 집에서 키우는, 커다란 준마(駿馬)! 말을 죽여서, 삶아서 먹여야지 돼요.’ 또 갔습니다. 고민 고민 하다가, 정말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죽여서, 삶아서, 강아지한테 먹였어요. 또 안 나았어요. 그래서 정말 용하다는 수의사를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그 수의사가, ‘아! 방법은 딱 한가지입니다. 당신 장남 있죠? 그 아들 죽여서 삶아서 먹이십시오. 그러면 났습니다.’

강아지가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자기 아들을 죽여서 삶아 먹이는 미친놈이 있을까요? 여러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단 말이에요. 개만도 못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난도질을 하신 거예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찬송을 안 하냐구요?

왜 제가 개만도 못하다고 이야기 하는 줄 아세요? 우리를! 제가 임장노님 집에 갔는데, 임장노님 집에 강아지 한 마리 있어요. ‘참 이쁘다’ 그랬더니, 장로님이 ‘사람보다 나아요.’ 그러더라고요. 그거 굉장히 성경적인 이야기예요. (하하) 제 귀에는 예사롭게 들리지 않더라고요. 사람은 일관성이 없다는 거예요. 화나면 언제든지 배반한다는 거예요. 강아지는? 언제나 주인이 가면, 꼬리 흔들고 반겨주는 거예요. 3절 보세요.

(이사야 1:3)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개만도 못한, 금수만도 못한 게 우리 인간이라는 거예요. 죄인들! 그런데 그 개만도 못한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아들을 죽여서 삶아서 먹인 거예요. 그게 말이 되냐구요? 그런데 거기에 우리가 감격하지 않는다 말이에요? 여러분?

오늘 본문 6절은, 그 예수 그리스도에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나라와, 제사장이 됐다, 그래요. 나라와 제사장을 원어로 보면, ‘바실레이안 히라이스! 바실레이안 히에라이스’입니다. 이 말은, ‘나라 곧 제사장’ 이런 뜻이에요. 나라와 제사장은 동격으로 올려놓는 거예요. 나라와 제사장이 아니라, 나라 곧 제사장! 이것은 출애굽기 19장 6절 말씀의 성취예요.

(출애굽기 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그래요.)

지금 모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우리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 그걸 다 지킬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내려오신 거예요. 그래서 죽으신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요 제사장이 된 거예요.

오늘 본문 6절에,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의 그 ‘삼으신, 포이에오’는 과거시제예요. 그 ‘포이에오’는 ‘창조하다’란 뜻이거든요.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거룩한 나라요 제사장으로, 재창조해 내셨다는 거예요. ‘너희가 나의 말을 잘 지키면, 나라와 제사장으로 만들 거다.’ 그랬는데, 이미 예수가 다 지키셨고,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다. 그러는 게, 오늘 본문이란 말이에요. 베드로전서 2장 9절 보세요. 똑같은 말이 나오죠?

(베드로전서 2:9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

그런다고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 같은 것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나라’라는 개념과, ‘제사장’이라는 개념이 같을 수가 있는가? 우리가 ‘나라’라는 개념을 영토의 개념으로 가지고 있어서,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나라’는 바로 우리 교회 자신을 가리키는 거예요.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예요.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죠?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구약에서 뭐라 불렀죠? 제사장이라고 불렀단 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은 나라요, 제사장이라는 거예요. 히브리서 10장 19절 보세요.

(히브리서 10:19)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이 누굽니까? 제사장들밖에 없잖아요? 나머지는 그 뜰 밖에 못 밟는다고요. 유일하게 제사장들만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이제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어요. 제사장이 되었다는 거예요. 하나님나라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제! 그 제사의 모습, 성막의 모습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축소해 놓은 거라 그랬잖아요? 제가! 바로 이 예배도 그 하나님 나라를 축소해 놓은 거예요. 똑같은 거라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제 영원한 성소! 그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 거예요.

여러분! 찬송이라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애 낳아 보신 분 알겠지만, 그렇게 보고만 있어도 좋죠? 막 자랑하고 싶죠? 그래서 애가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어쩌면 이렇게 코도 이쁘고, 어쩌면 이렇게 입도 이쁘고, 어떻게 이렇게 귀도 이쁘고, 옆에서 보기에는 진짜 못생겼는데, 자기 새끼는 그렇게 이쁜 거예요. 그걸 찬송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자랑하고 싶어서 못 견디는 거! 여러분! 그 찬송! 하고 계시냐 말이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좋으세요? 여러분!

그런데 성경은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요, 제사장이다. 그런다고요. 계시록 20장 4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20:4-6)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배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니 (1000년은 교회시대라 그랬어요.)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여러분들은!)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할 일이 있어요. 제사장은 뭐하는 사람들이라 그랬죠?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자들이잖아요?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우리는 제사장이라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삶으로, 제사를 드려야 되는 거예요. 로마서 12장 1절 보세요.

(로마서 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히브리서 13장 15절 보십시오.

(히브리서 13:15)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그러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을 제물로 드려서, 절대적은 순종(順從)을 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다고요. 그거처럼, 우리도 우리의 몸을,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우리의 몸을, 인생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고, 제사를 지내야 되는 자들이, 바로 유니온 크라이스트(Union Christ)!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라고요. 제사장된 우리의 모습이란 말이에요.

제물은 마땅히 죽어야 하는 거죠? 살아있으면서, 죽음을 방불(彷佛)하는 제물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냐구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그 산 제사의 삶을 살라고 한다 말이에요?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것은 나하고는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그렇게 생각들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아니에요. 우리의 삶이 그 삶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살아있는 채로 나의 몸을 찢어내는 제물의 삶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그 제사를 드리는 삶인지, 제물의 삶인지, 베드로전서 2장 9절로 가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9)

9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자, 그들의 삶은) 이것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하나님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포하다’는, ‘액상겔러’라는 말은, ‘발표하다, 크게 자랑하다’라는 말이에요. 우리가 제사장으로서 제사를 드리는 삶은, 첫 번째가, 하나님을 크게 자랑하는, 우리의 삶으로 자랑하는, 그런 삶을 사는 거예요. 10절.

10 여러분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그분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적인 욕정을 멀리 하십시오. (제사장의 삶이에요.)

12 여러분은 이방 사람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제사장의 삶이죠?) 그렇게 해야 그들이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을 하다가도 여러분의 바른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13 여러분은 주님을 위하여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순종하십시오. 주권자인 왕에게나

14 총독들에게나 그렇게 하십시오. 총독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게 하려고 왕이 보낸 이들입니다.

왜 제도와 법과 상위 권위에 순종해야 되는지,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반 은총으로, 이 악을 제어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해야 되는 거예요. 15절.

15 선을 행함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16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

17 모든 사람을 존경하며 신도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경하십시오. (그것이 제사장의 삶입니다.)

18 하인 여러분 가장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 만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리 하십시오.

19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21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여러분이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제사장의 삶은 이런 거야!’라고 예수님이 먼저 살다 가셨으니까, 여러분! 그 제사장의 삶을 사십시오. 여러분의 몸을, 여러분의 인생을, 재물로 드리십시오! 남을 위해 희생하십시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으십시오! 그게 제사장의 삶이에요.

어저께 이 안식교 목사님이 오셔서, 우리 찬양 팀 성가대 다 모여서 연습하려고 하는데, 저희들 3시부터 매주 토요일 주일 준비하거든요. 오더니 갑자기 토요일 날은 아예 범접을 하지 말래요. 오지를 말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자기들이 일 년에 한두 번씩 토요일 날 여기를 써야 되기 때문에, 아니, 세상에 일 년에 한 두 번씩 써야 되기 때문에, 우리보고 아예 토요일 날 오지 말라는 것이 말이 되냐고요? 그래서 제가 ‘계약하기 전에, 이 3시 이후에는 써도 된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그런 말 한 적 없대요. ‘설사 그런 말 했어도, 이제부터 내가 얘기하노니, 다음 주부터 쓰지 마십시오.’ 이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제가 더러워서 정말! 하나 사려다가 개뿔도 가진 게 없어서, 말았지만! 참는 거예요. 그래도 억지죠? 억울하죠?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강자가 약자 괴롭히는 거예요. 그건 도저히 못 참겠어요. 제가 목사로도 못 참겠어요. 그건! 그런데 직접 당하고 나니까, 아! 진짜 서럽더라고요. 우리가 무슨 바이러스입니까? 악성 바이러스예요? 범접도 하지 말라 그러게!

그래도 집에 가면서 찬송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다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마음대로 해라! 그래 마음대로 해라! 개는 짖어도 제대할 날은 온다! 우리는 찬송하는 거예요. 그게 제사를 드리는 삶인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기꺼이 그분을 섬기게 되면, 이까짓 찬라의 세상에서 받는 어려움! 고난은, 참아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땅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위해서 형제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밟지 않을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제사장의 삶이에요. 우리의 삶을 제사로 드리는 삶이에요.

자, 그렇게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제사장의 삶을 살다가, 그 제사장들이, 교회가 모이는 시간에 모여서, 진짜 하나님나라의 모형을 이 땅에 보여주는 것이, 예배예요.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하여,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을 자랑하며, 찬양하는, 하나님나라의 삶에 축소판이, 바로 교회가 모이는 예배라고요. 예배야말로 우리 제사장들이,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제사인 거예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삶이 결국은, 예배의 삶이었다는 것을 여러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계시록 22장 3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22:3)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러죠?)

천국에서, 그의 종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며, 이 ‘섬기며’라는 단어가 ‘라트리오’라는 말인데, ‘예배하다’는 뜻이에요. 거기서 우린 뭐한다고요? 예배하는 거예요. 예배하는 거! 예배를 다르게 생각하지 마세요. 히브리서 9장 14절 보세요.

(히브리서 9:14)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자들은요, 하나님을 예배한다니깐요. 똑같은 말이에요.? 라트리오! 예배하는 삶!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의 삶을 사는 것이고, 천국의 장자들의 총회가 모이는, 예배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해야 되는 거예요.

왜 제사장과 나라를 동격으로 이야기하는 줄 아세요? 여러분 교회는 개별적으로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창세전에 교회라는 무리로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모여야 되는 거예요. 모여야만 힘을 얻고, 모여야만 서로를 격려할 수 있고, 모여서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을 얻는 거예요. 가짜들 투성이라 모여도 별로 감동이 없어요. 그죠? 진짜 교회들은, 모이지 않으면 살수가 없어요.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그래서 모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뭐 하러 모여요? 우리 집에는 하나님 안 계세요? 거기도 하나님 계시죠? 거기서 헌금하고 예배드리면 되잖아요? 왜 모여요? 왜? 우리는 모여야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교회예요. 제사장이고 나라라고요. 그래서 나라를 ‘제사장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라’라는 것은 집합명사잖아요? 그런데 제사장과 나라를 동격으로 이렇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모여야 되는 거예요. 모일 때 우리는 힘을 얻는 거예요. 기쁜 거예요. 모여서 찬양을 하면은 그 하늘나라가 막 임하는 거예요. 이 땅에! 그래 ‘우리는 이렇게 모여서 하늘나라를 영원히 살 자들이구나!’를 깨닫는 게, 예배라고요.

그런데 이 예배를 귀찮아하고,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은 뭐에요? 가짜죠? 복음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이 예배에서, 여러분은 그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간다면, 여러분은 가짜입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나라에 가도 별반 감동 없어요. 왜냐하면 똑같거든요. 아십니까? 여러분 대단한 거 기대하지 마세요.

자 아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는 궁극적인 이유가, 뭐라 그랬죠? 우리들로부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감사와 기쁨이 담긴, ‘아버지!’ 소리 듣고 싶으셔서요. ‘아버지!’ 소리 듣고 싶으셔서! 그래서 우리를 건져 냈다고요. 우리가 하나님이 진짜 우리의 아버지라는 걸 아는 거!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거! 그것이 나라요. 제사장인 자들의 삶! 아닙니까?

그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과, 그렇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찬송하고, 아버지라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감격적인, 찬양을 하는 자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 천국 아니에요? 그것을 그대로 이 땅에다가 내려 꽂아놓은 게 예배란 말이에요. 그런데 예배를 하면서, 찬양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나의 사정을 아뢰면서, 그 천국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냥 멍하니 신기루처럼 다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지금 죽으면 안돼요. 천국 못갑니다. 여러분!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겠다는 거예요? 이 예배가 뭔지도 모르면서! 히브리서 12장 22절 보세요.

(히브리서 12:22-24)

22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온 산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천국의 모습을 그려 놓은 거죠?) 여러분은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축하 행사! 지금 수많은 천사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어요.)

23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우리라고요.)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께 나왔고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하는 그가 뿌리신 피 앞에 이르렀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늘나라의 모습이며, 구약의 성막! 성전에서 드려지던 제사의 모습이며, 여러분들이 드리는 이 예배의 모습이라고요. 이 모습이! 이 교회! 하나님나라는, 늘 개별적이지 않아요. 늘 집단적이라고요.

예배는 여러분이 은혜 받기 위해서 모이는 게 아니에요. 착각하지 마세요. 예배는 구원받은, 은혜 받은 자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게, 예배라고요. 그러니까 은혜 받은 자들은, 그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사모하게 되어 있죠? 왜 서비스(service)라고 하겠어요? 예배를? 그런데 여기 와서 뭔가 자기 문제를 해결 받고, 뭔가 위로를 받고, 사랑받고, 은혜 받고 싶어 하는 게, 그거 예배 아니라고요. 예배는? 은혜 받은 자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예요. 그래서 열린 예배! 무슨 예배! 이거는 꽝이에요. 예배 아니에요. 하나님의 교회가 모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게 예배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와서, 무슨 공연이나 보고, 드라마나 보고 하는 건, 예배 아니에요. ‘아이, 무슨 설교 말씀만 듣고 가면 됐지!’ 그건 뭔지 아세요? 내가 일주일 동안 이 땅을 어떻게 살 것인지, 교훈을 얻어서 나가겠다는 것인데, 그건 예배 아니에요. 역시 거기도 ‘나’라고요. 그거는! 역시 ‘나’예요. 그것도! 예배는 소중한 거예요. 하늘나라를 이 땅에다가 인투루전(intrusion)! 꽃아 내리는 거예요.

자, 세상에서 외롭게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목소리 높여서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높여드리며, 또 헌금을 해서, 자기 가진 소유를 또 나누고,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위용을 자랑하는 게, 예배란 말이에요.? 당연히 우리는 예배를 사모하게 되어 있어요. 모이는 것을 사모하게 되어 있다고요. 사도행전 2장 44절을 보세요.

(사도행전 2:44-47)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이 사람들은, 날마다 모였어요. 너무 좋아서! 자기 재산 다 내어 놓고, ‘필요하면 갖다 써!’ 그러고, 날마다 모였어요. 헤어지기 싫어서! 여러분! 가끔 우리가 수련회나 어디 올라가면, 막 내려가기 싫을 때 있죠? 그런 거! 그게 예배여야 된다고요.)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칭송을 받고, 주께서 그것을 본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러한 책임과 의무까지 있는 사람들이에요. 제사장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오심으로, 율법이 폐기된 것으로 착각을 한다고요. 율법은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되고 완성된 거예요.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진, 하나님나라로 지어져 가면서, 예수 안에서 그 율법들을, 완성시켜 나가는 자들이에요.

십일조가 예수 안에서 완성 되었죠?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헌금 안 하나요? 헌금 한다고요.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다 달라고 하는 거예요. 십일조만 달라는 게 아니라! 그 정신은, 그 헌금! 십일조의 정신과 원리는, 우리가 지금도 갖고 있어야 하는 거예요.

안식일이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죠? 그렇다고 우리가 예배 안 드려요? 부활하신 첫날인 주일을 목숨 걸고 지키는 거예요. 열심히 지키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동물제사는 인제 없어 졌어요. 예수를 설명했던 거니까! 그러나 그 정신! 제사의 정신! 뭡니까? 속죄! 십자가! 피! 희생! 이 정신은,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그대로 우리는, 완성시켜 나가야 되는 거예요. 우리의 삶으로, 속죄의 삶! 십자가의 삶! 그 피의 삶! 그 희생의 삶! 살아내는 거예요. 그리고 일주일에 몇 번씩 이렇게 교회가 모여서, 그 희생! 그 속죄! 그 피! 그것을 기념하면서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그게 예배라고요.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탄생한 장자들의 총회가, 형식을 갖춰서, 오늘도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것 그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거룩하게 구별된 어떤 무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을 배격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 세상에서 불려 나와서, 기쁘게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는 어떤 무리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는 하늘에서도, 지옥에 있는 자들과, 그렇게 구별되어져서 살 거라고요. 그 모습을 그대로 이 땅에서 보여주는 게, 예배란 말이에요.

그러한 예배에, 여러분이 늦장을 부릴 수 있습니까? 정말 그 예배를 안다면, 어떻게 우리가 예배시간에 전화가 왔다고, 전화를 받으러 나가요? 예배를 드리는, 그 제사를 드리는 중간에, 화장실을 가는 사람이, 그렇게 준비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맞냐구요?

아론이 제사장으로서 피를 뿌리러 성소에 들어가는데, 밖에서 누가 부른다고,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하나님!’ 그리고 나가서 이야기 하고 왔을까요? 아론이 피 뿌리러 성소에 들어갔다가, 오줌 마렵다고 화장실 갖다 왔을까요? 여러분?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미리 미리 준비했다고요. 왜냐하면 들어가면 죽으니까! 흠 있는 모습으로 들어가면 죽으니까! 하나님 앞에 서는 모습은 그렇게 진지해야 되는 거예요. 제가 하도 답답해서 그래요. 진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인지.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인지. 너무 답답해서 그래요.

어저께 이은주 집사님이 마라톤하면, 이게 막을 탠데 어떡해요? 걱정이 되는 거예요. 왜 걱정이 안돼요? 그게? 우리가 교회가 모이는데, 방해가 될 텐데! 걱정이 되니까 미리 전화하시는 거예요. 그런 열성과 진지함이 있어야지요. 다 끝나! 찬양도 다 끝나고, 슬그머니 들어와서 전화 오면 전화 다 받고, 화장실 가고 싶으면, 화장실 가고!

구약의 제사장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겸비한 마음으로 섰는지를 보셔야 돼요. 골프를 치러 가느라고 교회가 모이는 데를 안온다고요? 일이 좀 바쁘다고 교회를 안 온다고요? 비지니스 때문에 교회를 빼먹는다고요? 정말 하나님을 아는 분들은요, 교회가 모이는 스케줄에 맞춰서, 다른 6일의 스케줄을 맞춰요. 이 스케줄에 맞춰서, 나의 일요일을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게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이 어떻게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어떻게 나가서 하나님을 이야기 하냐구요? 그 사람들이 뭐라 그러겠어요? ‘야! 너도 바쁘면 가끔 안가잖아? 너도 네 몸을 즐겁게 하는 일이 그런 용무가 있으면은, 너도 언제든지 빼 먹잖아? 너 숙제가 있어도 교회 안가더라! 나는 너보다 더 바쁜 일이 있어! 그래서 못가!’ 그러면 어떻게 얘기 하실 거예요?

‘네 숙제 때문에, 네 비즈니스 때문에, 네가 제쳐놓을 수 있는, 하나님나라고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런 하나님 필요 없어!’ 그렇게 이야기하시면, 어떻게 얘기 하실 거냐고요? 거기다가! 제가 정말 궁금해서 한 번 여쭤보는 거예요. 정말 궁금해서 한 번 여쭤보는 건데, 정말 여러분은 그 문화와 문명과 자연이 이제 완전히 회복되고, 그 목숨을 끊어가면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죽여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그 수많은 교회가 모여서, 영원히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그렇게 영원히 살아가는 그 천국을, 정말 여러분은 소망하고 계십니까? 정말!

그 나라를 미리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여기 밖에 없는데, 이곳을 이렇게 소홀히 하냐고요? 찬송을 소홀히 하냐구요? 말씀을 소홀히 하세요? 여러분? ‘날 알아주지 않으면, 나 교회 안가!’ 제가 그런 사람들 전화해서 오라고 한 적이 있어요? 안 말려요. 그런 분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소홀히 여기고,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절대 잡지 않아요. 말씀 안 듣겠다고 안 오는 사람! 제가 전화해서 왜 안 오냐고 물어본 적 있습니까? 아니에요. 여러분! 기독교는 그렇게 값싼 거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는 선포하고 열심히 목숨 걸어 하나님 섬기면 되는 거예요.

파주에서 저희 교회의 테잎을 받으시는 어느 권사님이, 어제 전화하셔서, ‘목사님! 죽기 전에 복음이 뭔지 알고 가게 되어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제 목사님 테이프를 다 모았더니, 이만한 쇼핑백에 하나 가득이 됐대요. 자기가 테이프 하나당 15번씩 듣는대요, 왜냐하면 자기가 사랑하면 15명에게 복사를 해주기 때문에, 카세트 데크로 복사를 해주기 때문에, 꼬박 15번을 듣는대요. 일주일 내내!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시로 꺼내서 또 들으신다는 거예요. 이만한 쇼핑백에다가, 누가 다이아몬드를 한가득 갖고 와서, 나랑 바꾸자 그러면, 자기는 이 테이프랑 안 바꾸겠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말씀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시냐고요? 그런데 비즈니스 때문에, 숙제 때문에, 여러분의 용무 때문에, 교회가 모이는 시간을, 여러분이 그렇게 빼먹을 수 있냐고요? 제가 답답해서 그래요! 답답해서! 평생 예수 믿고 지옥 갈까봐 답답해서 그래요! 진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인지, 답답해서!

6절에 보면,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포이에오!’ 이 ‘포이에오’는 과거시제입니다. 이미 완성된 거예요. 우리는 인제 완성됐어요. 완성됐어요! 그런데 5절에, ‘우리를 사랑하사’ ‘아가파오’는 현재시제라고 했죠? 현재시제는 뭐라 그랬습니까? 진행형!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그 사랑! 왜냐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과, 영광과, 능력은, 세세토록 영원할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이렇게 시제를 쓰고 있는 거예요. 6절 보세요.

6 …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세세토록! 포에버 엔 에버 프럼 에이지 투 에이지(forever and ever from age to age) 영원히! 그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과 능력은 지속될 거예요. 지속될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이미 완성된 그 나라에 들어가 있어요. 그걸 갖고 계신 분들이 무얼 딴 데 눈을 파세요? 뭘 딴 데 눈을 파세요? 그까짓 거 좀 못가지면 어떻고? 그까짓 거 좀 해결 안 되면 어때요? 그걸 가지신 분들이! 그 영원한 그 사랑 안에 이미 들어가 계신 분들이!

축 처진 어께를 좀 올리십시오. 여러분! 힘을 내세요. 정작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게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왕이요! 나라요! 제사장이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맡겨진 환경! 우리에게 맡겨진 상황!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라면, 그 상황 안에서도, 열심히 그 하나님 섬기면서, 순종하면서, 제사장으로 살아내자구요. 제사장으로!

성경은 우리더러 제사장이라고 그러는데, 왜 우리는 여인의 뜰 이방인의 뜰만 밟고 가냐고요? 제사장! 성소에 들어가세요! 성소에! 하나님을 만나세요! 하나님을 느끼세요! 힘을 내십시오. 그리고 우리 열심히 모여서 사랑하면서, 격려하면서, 말씀을 나누면서, 하늘나라를 경험하며 살자고요.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살다보면 제대는 곧 옵니다. 아무리 똥개가 짖어도, 국방부시계는 돌아가듯이! 제대할 날은 곧 와요. 그 제대를 정말 기다리시는 여러분! 참 교회이신 여러분!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에게 어떠한 말씀을, 어떠한 권고를 하시는지, 제발 마음속에 꼭 새기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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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7-8)

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아멘.

지난주에 제가, 설교시간에 조금 흥분을 해서, 소리를 막 지르는 바람에, 어떤 분들이, 진짜 화장실 가고 싶으면, 어떡하냐고? 가셔야죠! 어떡해요? 허허허 괜히 그 참다가 시험 들지 마시고! 우리 김태식 간사님 같은 분은, 당뇨가 있으셔서 꼭 가야 되거든요. 그거 어떻게 참아요? 그럴 땐 가시라고요.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좀 더 진지해지자라는 것이지, 여러분들 막 무슨 일이 있어서 꼭 참고, 늦을 일이 있으면, 뭐 경천동지할 일이 있으면, 늦으셔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우리가 좀 더 진지해지자라는 그런 의미에서 제가 말씀 드린 겁니다.

오늘로서 요한계시록의 서론 부분을 마치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서론이 8절까지죠? 1장 1절에서 8절까지! 사도 요한은 이제 그에 편지 서론에서,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에 대 주제를, 수신자들에게 던집니다. 앞으로 전개될 편지내용의 요약(要約)이죠? 그 내용인 즉슨,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는 책이에요.

요한은 7절을 ‘볼지어다!’라고 시작하죠? ‘볼지어다’는 말이 헬라어로 ‘이두’라는 말이거든요. 이 이두는 단순히 ‘씨(see)’라는 개념의 단어가 아니에요. ‘지대한 관심을 갖고 유의하고 집중하며 깨달으라’라는 의미가 있는 말이, 바로 ‘이두’라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주위를 환기시키는 거예요. 이두! ‘볼지어다!’ 하면서! 자, 이제부터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텐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라! 그러는 거예요. 볼지어다! 이두!

그리고 7절을 어떻게 마치는가 하면, 한 번 보세요. ‘그러하리라 아멘.’ 그러죠? ‘그러하리라 아멘!’ 여기서 ‘그러하리라’ 라는 말은 헬라어로 ‘나이’라는 말이에요.? 이 ‘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멘’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그러니까 헬라어로 나이! 히브리어로 아멘! 같이 붙어 있어요. 아멘! 아멘!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요한이, 이 중간에 있는 내용이 얼마나 중요하면, ‘볼지어다!’라고 주의를 환기시킨 다음에, ‘아멘! 아멘!’하고 끝내는 거예요. 나이! 아멘! 그러니까 헬라어, 히브리어로, ‘아멘! 아멘!’하고 강조를 하는 거예요. 그때 당시 사람들은 금방 알아들었겠죠? 이 말을요! 진짜 그렇습니다!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얼마나 감격스럽고 벅차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우리가 금방 읽을 수 있죠? 계시록 전체의 주제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입니다. 계시록 전체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의 일과, 재림과, 재림 후에 천국! 그 이야기예요. 전부가 다!

요한은,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구름을 탄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죠? 그런데 원어로 보면은, 손오공처럼 이렇게 근두운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다니죠? 이렇게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 쓰인 말은 전부 ‘메타’라는 말이거든요 그 ‘메타’라는 말은, 이렇게 ‘뭘 올라타다’가 아니라, ‘함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름과 함께 오신다’라는 게 맞는 해석이죠.

우리가 애들 그림책이나, 무슨 애들 성경이나, 성화라고 불려지는 것들에서,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뭉게구름을 타고, 막 이렇게 오시는 것을 너무 많이 봐서, 이렇게 오해들을 하시는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구름과 함께 오신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성경에는, ‘구름’이라는 말이 다른 깊은 의미로 쓰일 데가 아주 많이 있어요. 먼저 ‘구름’하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죠? 어딥니까 구름? 구름기둥! 광야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이 이스라엘을 끌고 갔죠? 그 구름기둥 불기둥은, 여호와께서 그들과,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어요. 그러니까 바로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나는 게, 구름기둥이었거든요. 그리고 출애굽기 16장 보세요. 10절.

(출애굽기 16:10)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에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그러죠?)

여기서도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납니다. 역대하 5장 13절 보세요.

(역대하 5:13-14)

13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성전 안에 구름이 가득한 거예요.)

14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역시 여호와의 영광과, 구름을 같이 놓고 있어요.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고, 그 성전에 구름이 가득 차는데, 그 구름은 여호와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구름이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데, 영으로 임제하시는 모습을, 우리가 성경에서 구름이다 이렇게 표현한 데가 아주 많다고요. 그러니까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모습! 영광스러운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그 모습을 ‘구름이다.’라고 이렇게 표현을 한다고요.

신약에도 구름이 여러 군데 나오죠?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해같이 찬란한 몸으로 변하셨을 때에,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죠? 마태복음 17장 1절로 가겠습니다.

(마태복음 17:1-5)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그러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는 이 말씀이 어디에서 또 들렸죠?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장면이죠? 마태복음 3장 16절 보세요.

(마태복음 3:16-17)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 두 장면은 아주 흡사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똑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한 군데서는 구름이 싹 임해서 구름이 덮고, 한 군데서는 성령이 임해서 성령이 덮어요. 이렇게 성경에서는, 구름과, 성령과, 하나님의 영광을 아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묘사를 한다고요. 즉 구름은, 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게 맞습니다. 요한은 이 9절을요, 다니엘서 7장을 인용해서, 표현을 해 놓은 거예요. 다니엘서 7장 13절로 가겠습니다.

(다니엘 7:13-14)

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이 ‘인자 같은 이’라는 말은, 1장 13절에 나오죠? 계시록 1장 13절에! 이 말을 13절에 갖다 끌어 쓴 거예요. 그리고)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이 말을 7절에다 갖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죠?)

여기서도 구름을 타고 예수님이 오시는데, 여기는 구약이니까, 아람어로 쓰였어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쓰였거든요. 아람어 ‘임’이라는 말이, 역시 ‘함께’라는 말이에요. ‘구름과 함께 여호와께서 오신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런데 예수께서 구름과 함께 나타나셨는데, 그에게 영광과 권세와 나라가 주어지고 있죠? 자, 이 장면은, 다니엘이 환상을 보는 장면인데요. 인자 같은 이! 그 예수님께서, 지상의 모든 사역을 다 마치시고, 영광과 권세를 받으시는 장면이 바로, 다니엘서 7장에 요 장면이에요.

요한은 이 다니엘서를 인용함으로서, 이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는, 그 영광과 권세를 갖고 오실 것이라는 것을 천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초림 때는 마굿간에 오셨어요. 유대 땅에 아주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죠? 맥없이 뚜들겨 맞고, 십자가에서 죽은 모습으로 오셨어요. 그렇지만 이제 다시 오실 때, 그 재림 때는, 이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오신다는 거예요.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이고, 그 나라는, 영원히 폐하지 않는 나라! 그 영광과 권세를 갖고 오실 거라는 거예요. 인제! 그러니까 ‘너희들, 힘내라!’ 이런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예수님께서, 왜 구름과 함께, 이 성령과 함께, 오셔야 하는가? 거기에는 아주 깊은 뜻이 있어요. 그 의미는 이러합니다. 여러분! 육신의 몸을 입으신 예수께서, 예수님은 분명히 육신의 몸을 입고 계세요. 부활하신 그 날 안식 후 첫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이 깜짝 놀랐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러죠? ‘내가 영이냐? 아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다. 그런데 나는 살과 뼈가 있다. 만져봐라!’라고 하셨다고요. 예수님이 직접! 나는 살과 뼈가 있다고! 그런데 살과 뼈가 있으신 분이 어떻게 승천하시고, 어떻게 거기에서 영광과 권세를 받으셨죠? 성령! 성령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어서, 이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살과 뼈를 갖고 있으시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존재하게 되시는 거예요. 이제 살과 뼈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엄밀하게 말하면은, 무소 부재할 수가 없어요. 살과 뼈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께서 우리 안에 존재하시는 거라고요. 옴니프레전스(omnipresence)!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성령과는 이제 뗄래야 뗄 수 없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함께 계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오셔서, 변화산에서 변화되었던 그 영광스러운 몸! 그 찬란한 몸을, 우리에게, 똑같이 주시기 위해서, 인제는 가시적으로도, 우리에게 그 빛나는 영광된, 해와 같은 영광된 몸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변화시켜 주시기 위해서, 성령과 함께 오시는 거예요.

그 변화산상의 사건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재림의 프리뷰(preview)라고요. 분명히 마태복음 17장 1절에서, 엿새 후에 예수님께서 피터(Peter), 잔(John), 제임스(James)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서, 그 변화산의 이야기가 있죠? 바로 그 전절이 어디예요? 16장 28절이라고요. 거기서 뭐라 그러냐구요? 예수님이? ‘너희들이 죽기 전에, 인자가 왕권을 갖고 다시 오실 것을 볼 자가 있다.’ 그래요. 분명히! 그래놓고 17장 1절에 ‘엿새 후에’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엿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너희들! 분명히 내가 왕권을 갖고 오는 것을 볼 자가 있다.’고 그랬다고요. 그 이야기가 지금 여기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엿새 후에’ 이렇게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엿새 후에, 변화산상에 그 모세와 엘리야와 그 예수님이, 빛나는 그 모습을 입고, 구름가운데 거하시는 것은 바로, 그 재림의 프리뷰(preview)라고요. 예수님께서 왕권을 갖고 다시 오실 그 모습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프리뷰로! 변화산에서! 그 빛나는 몸을 우리에게 주실 거예요.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1장에서 뭐라고 그럽니까? 예수님의 재림(再臨)과 강림(降臨)에 대해서 이야기 한 다음에, ‘내가 이거 공교(工巧)히 만들어낸 이야기 아니다. 나는 본 거 이야기 하는 거야!’ 그러죠? 그러고서는 변화산 사건을 이야기 한다고요. 이 변화산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프리뷰라고요. 그 몸을 입고 오실 거예요. 왜요? 그 몸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바로 그 몸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성령과 함께, 구름과 함께 오신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고 아울러서, 예수께서 주의 날에 성령과 함께 오시는 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거예요. 심판하러! 성령이 오시면, 믿지 않는 자들 죄인들에게는, 심판입니다. 여러분! 그거 확실히 알아두셔야 돼요. 창세기 3장 8절로 가겠습니다.

(창세기 3:8)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그러죠?)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어요. 타락(墮落)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서늘한 날에 찾아오신다. 그래요 시원한 날에 찾아오신 걸까요? 개역성경에는 ‘날이 서늘할 때에’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욤 르와흐’라는 말이에요.? ‘욤’이라는 말은 ‘무슨, 무슨 날’이라는 뜻이거든요 ‘르와흐’는 뭐예요? 성령! ‘성령의 날에’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왜 오셨죠? 벌거벗고 창피해서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왜 오셨어요? 심판하러 오셨어요. 성령이 임하시면, 믿지 않는 죄인들에게는 심판이 임하는 거예요. 그 심판은 무시무시한 거예요.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믿는 자에게는 복(福)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詛呪)와 심판(審判)의 모습이에요.

여러분! 성령세례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성령세례는요, 믿지 않는 가짜들에게는, 죽음이요, 저주요, 심판이라고요. 제가 간혹 그런 분들 봅니다. 제가 보기엔 분명히 가짜예요. 분명히 가짠데, 성령세례 너무 좋아해서, 그냥 쓰러졌다 일어나고, 입에 거품 물고, 뭐 혀도 꼬이고, 그런 사람은 여러분! 제가 옆에서 보기에는 너무 불쌍해요. 너무 불쌍해! 성령세례는 그거 아니에요. 무시무시한 거예요. 믿지 않는 자들, 예수를 알지 못해,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거예요. 마태복음 3장 11절 보세요.

(마태복음 3:11-12)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에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것인데… 어떤 일이 있냐구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나머지는? 가짜는?)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태우러 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령이 임할 때 일어나는 일이에요. 예수께서 성령과 함께 오신다는 것은, 그런 무시무시한 심판을 행하러 오신다는 거예요. 출애굽기 12장 29절 보세요.

(출애굽기 12:29-30) (표준새번역)

29 한밤중에 주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들을 모두 치셨다. 임금 자리에 앉은 바로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감옥에 있는 포로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까지 모두 치시니,

30 바로와 그의 신하와 백성이 그날 한밤중에 모두 깨어 일어났다. 이집트에 큰 통곡소리가 났는데, 초상을 당하지 않은 집이 한 집도 없었다.

그러죠? 유월절에 일어났던 일이에요. 여러분 ‘십계(十誡)’나, ‘프린스 오브 이집트(Prince of Egypt)’ 이런 영화보시면, 죽음의 신이 구름처럼, 싹 몰고 가죠? 애굽 전체를! 그때에 인방과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발려있는 집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있어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가짜들은요? 다 죽어요. 통곡소리가 난다고요. 그게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일어날 일이에요. 그러한 모습으로 오신다고요. 성령은요!

우리가 받는 세례(洗禮)는? 바로 그 성령세례를 상징하는 거예요. 마땅히 죽어야 할 자가 죽고, 예수 안에 있는 새 피조물만 살아나는 거! 그게 세례거든요? 그러니까 마치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들어가면서, 에굽 쪽에서 보면 죽는 거죠? 그러나 가나안 쪽에서 보면, 새로운 사람들이 살아나오는 거예요. 그걸 세례라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우리가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나 보세요. 똑같은 세례를 받은 자들이 있어요. 이집트! 애굽사람들이요. 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살아올라왔어요? 못 살아올라왔어요! 그게 마지막 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함께 심판하러 오실 때, 그 모습이에요. 모세에게 속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았듯이, 예수에게 속하여 있는 자만 살아서 올라오는 거예요. 나머지는? 다 빠져 죽는 거예요. 그게 무시무시한, 재림의 날에 일어날 일입니다.

자, 그렇게 성령이 오시면, 예수 안에 있는 자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지옥의 불로 던져지는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지옥불은 무슨 불이라 그랬죠? 성령의 불이에요. 여러분! 지옥은 마귀가 다스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지옥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거예요. 여러분! 마귀는 거기서 같이 타는 거예요. 연료로! 그 불은 성령의 불이에요. 믿는 자가 성령의 불을 받으면, 너무나 감격스러운 거지만, 믿지 않는 자들이 성령의 불을 받으면, 타는 거예요.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정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우리 예배당 안에, 정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을 좀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어요. ‘지옥을 좀 보여주십시오! 그래서 무서워서라도, 하나님께로 좀 도망갈 수 있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 심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보시겠습니까? 계시록 6장 12절.

(요한계시록 6:12-17)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청담같이 검어지며 온 달이 피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종이축이 말린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제발! 너무, 너무 그 진노가 그 심판이 무서워서, 하나님의 그 진노가 너무 무서워서, 산과 바위에게, 내 위에 떨어져서, 나를 짓눌러 나를 가려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무서우면요? 계시록 16장 19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16:19-21)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음에

20 각 섬도 없어지고 각 산악도 간대 없더라

21 또 중수가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제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계시록 20장 9절로 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0:9-15)

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 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의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줌에 각 사람이 자기에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스바냐 1장 14절로 가겠습니다.

(스바냐 1:14-15)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란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이요.

(데살로니가전서 5:1-6)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고통이 이름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이렇게 무시무시한 날이 바로, 재림(再臨)의 날입니다. 여러분! 구름타고 가야금 울리면서, 예수님이 오실 거라고 상상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무시무시한 심판자로 오실 거예요. 우리에게는 따뜻한 형님이요, 맏아들이요, 친구요, 그런 모습으로 오실 거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심판자의 모습으로 올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예수를 믿는 자들을 우습게 여겼던 모든 자들은, ‘차라리 내 몸뚱아리에 바위야! 떨어져라! 산아! 좀 가려다오!’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계신 여러분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건져지신 것입니까? 어떻게 그러한 죄인의 자리에서 건져진 거예요? 그러한 진노의 자리에서 어떻게 건져지신 거예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거기에서 그 자리에서 건져지신 분들이, 뭐가 그렇게 힘든 게 많아요? 뭐가 그렇게 힘든 게 많아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함께 오시는 그날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날인지, 요한은 봤어요. 봤기 때문에, 계속해서 스가랴 12장 말씀을 인용해서, 7절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7-8)

7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래요.)

구름을 타고 그분이, 구름과 함께 오시는데, 각인의 눈이 그것을 볼 것이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것 때문에, 통곡을 할 날이 온다. 그래요. 스가랴서 12장으로 가서,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한 번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스가랴서 12장 10절로 가겠습니다.

(스가랴 12:10-14)

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자, ‘찌른바’ 여기서 하나 인용한 거예요.)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자, ‘애곡한다’ 똑같은 말이죠?)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그러죠?)

이렇게 모든 족속이 통곡을 하고 있는데, 그 모든 족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자들이다.’ 그러죠?입니다. 10절 보세요. 다시! 10절에 보시면, ‘그들이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통곡을 한다.’ 이렇게 나오죠? 그리고는 그 찌른 족속들이, 구체적으로 쭉 나오는 게, 지금 스가랴서 12장이에요.

그러면 그 찌른 자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물리적으로 찌른, 빌라도! 헤롯! 로마 병정! 바리새인! 고 사람들만 이야기 하는 게 아니죠? 지금 쭉 그 찌른 사람들의 족속! 그 이름이 나온다고요. 이 구절을 가지고서, 과거주의 해석을 하는 사람들하고, 후천년설 주의자들은, ‘봐라! 이거는 AD 70년 전에 계시록은 기록된 것이고, 이 마지막 심판 때 일은, AD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타이터스에 의해서, 이 성전이 파괴될 때 그때 이야기 해놓은 거야! 이미 고난이라는 것은 다 끝났어!’ 이렇게 해석을 한다고요. 문자적으로! 천만에요. 잘못본 거죠. 이 스가랴서를 그들은 간과(看過)하고 지나간 거예요.

지금 요한은, 스가랴서에서 그 단어들을 뽑아서 썼다고요. 그 ‘찌른 자들’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구세주를 부인한 자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속에 피를 우습게 여겼던 자들! 눈이 멀어서 참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에만 눈을 두고 살아가던 자들! 한마디로 구원받지 못한 모든 자들을 가리키기 위해서, 그 ‘찌른 자들’이란 말을 꺼내다 쓴 거예요. 스가랴서에서도 그런 의미로 쓴 거구요. 그때는 아직 예수님이 오시지도 않았는데, 뭘 예수님을 누가 찔러요? ‘찌른 자’라는 말은, 바로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자들이에요.

바로 이런 자들이죠? 요한2서 1장 7절로 가겠습니다.

(요한2서 1:7)

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들이요.)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그러죠? 베드로후서 3장 3절로 가겠습니다.)

(베드로후서 3:3-4) (표준새번역)

3 여러분이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면서 여러분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4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느냐 (‘어디 오냐? 오기는? 2천년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데, 진짜 오겠냐?’ 그런다 말이에요.) 조상들이 잠든 뒤로 만물은 처음 창조 때로 부터 그냥 그대로다”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 이런 자들이 통곡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거예요. 우리를 조롱하는 많은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통곡할 날이 올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멘! 아멘!’ 하면서, 그날의 도래를 확실하게 지금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아멘! 아멘! 나이, 아멘!’ 하면서! 그날은 분명히 온다. ‘조롱해 봐라! 분명히 그날은 온다!’ 그러는 거예요. 사도 요한은요!

예수님께서도 직접 이 스가랴서를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이야기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29절로 가겠습니다.

(마태복음 24:29-30)

29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날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요한계시록의 말씀과 스가랴와 다니엘의 말씀과 똑같은 말씀이죠? 예수님이 고렇게 이야기 하고 계시다고요. ‘분명히 그날은 온다! 너희들, 정신 똑바로 차려라!’ 그러는 거예요.

그때는, 예수님께서 재림할 때는,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를 할 수가 없는 때예요. 왜요? 예수님은 언제 오십니까? 144,000명이라고 상징이 된, 그 하나님의 백성들의 숫자가 다 차야,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이 딱 구원을 받으면, 그때 천국 문 딱 닫고, 예수님이 그때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에 무슨 회개를 해요? 회개할 사람은 이제 이미, 다 천국에 들어가 있고, 그 수가 딱 차면은, 그때 천국 문 닫고 예수님이 오시는 거예요. 성령과 함께! 그러니까 여기서 통곡하는 것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에요. 이를 가는 눈물이에요. 분해서! 후회의 눈물이에요. 억울해서! 그런 통곡의 눈물이 반드시 있다는 거예요. 그런 통곡이!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혹시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이 계시면, 빨리 예수 믿으셔야 됩니다. 여러분! 미루지 마시고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통곡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죽지도 않아요. 한 300년만 있다가 풀어준다면 한 번 해보겠어요. 저는! 이 땅에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어떤 기한이 있다면, 아니 만년 있다 풀어준다면, 기다리면 되잖아요? 어떻게든지! 그게 아니라, 영원이라고요. 영원! 거기에는 구대기가 득실거린다, 그러죠? 아주 처참한 곳이라는 표현이에요. 거기에서, 영원히 있어야 돼요.. 가석방도 없어요. 거기는요!

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말이에요? 이게 말이되나고요? 기독교인들이 거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살아간다 말이에요? 100프로 가짜예요. 그거는요 100프로 가짜예요. 이 시대의 목사나 기독교인들이, 그 지옥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 따위로 사는 거예요. 지옥이 있다는 걸 믿으면, 이렇게 못살아요. 아무도 안 믿는 거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지옥이 있다는 것을! 그 날은 분명히 옵니다. ‘나이, 아멘! 분명히 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예수 믿는 여러분! 여러분은, 안심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은 변화산에서의 우리 주님과 같은 새 몸을 입고, 그 때부터 이제 영원히,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고, 아픔도 없는 곳에서, 기쁨과 안식과 평안을 누리면서, 사시게 될 거예요. 그날은 반드시 속히 옵니다. 아니, 벌써 오고 있어요. 벌써 오고 있어요.

오늘 본문 보시면,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성령과 함께 오시리라!’ 거기서 ‘오시리라, 엘코마이’는 그 시제가 현재형이에요. 헬라어의 시제 현재형은 뭐라 그랬죠? 진행형! 오시고 계시다는 거예요. 오시고 계시다! 여러분! 천군 천사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십니까?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의 그 말발굽소리를 들으세요? 그 소리를 들으세요! 그래야 힘이나요! 그래야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세상의 공격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다시!

제가 군데 있을 때, 포천에 있는 어떤 부대에서 탈영병이 생겨서, 용인까지 넘어왔어요. 그 사람들이 무기고를 습격해서, 실탄하고 수류탄을 다 들고, 용인까지 산 능선을 타고 넘어온 거예요. 그런 정보를 받고, 저희 사단이 인제 그 일을 맡았는데, 설마 여기까지 왔겠느냐 해서, 한 여덟 명이서, 공포탄 15발씩 갖고 나갔어요. 하! 뭐 가다가 담배도 한 대씩 피우고, ‘뭐 있기 어딨냐?’ 막 이러면서! 그때는 은하수를 한 갑씩 줬거든요. 담배를! 그 비린 은하수를 나눠 피면서!

무덤 옆에 앉아서 인제 막 잡담하고 있는데, 그 산속에 빈 집에서 말이죠? 갑자기 총알이 날아오는데, 뭐 미처 손쓸 새도 없어요. 뭐 무덤 옆에 딱 숨어 있는데, 무전병이 이제 무전을 해야 되니까, 이 무전기 안테나가 한 2-3미터 되거든요. 그 안테나를 보고 쏘는 거예요. 얘네들이!

그런데 이 무전을 치려면 철모를 들어야 된다고요. 왜냐면? 귀에다가 갖다 되어야 되니까! 살짝 드는데, 여기에 딱 맞았어요. 무전병이! 그런데 M16은 6조 강선이라고 해서, 이게 안에서부터 돌아서 나온다고요. 총알이! 그래서 목표물에 맞으면, 안에서 회전해서, 이 안에가 다 박살이 나는 거예요. 맞자마자 얼른 저희들이 끌어당겼는데, 머리가 푹 주저앉았어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머리가 없어졌어요. 이 뼈가 다 부서져서!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공포탄 쏴 봐야 3미터도 안 나가는 거! 소리만 펑펑 나는 거!

그러니까 덜덜덜덜덜덜 떨고 있는데, 그 쪽은 수류탄도 갖고 있는데 어떡해요? 저 아래에서 이 총소리를 듣고 연대 병력이 인제 올라오는 거예요. 구보를 하면서, 실탄 다 들고! ‘사나이로 태어나서’ 이러면서! 아니, 그 많은 사람이 구보를 하면서 막 오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막 반갑던지 말이죠? 그 안도감! 그 감사함!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수많은 우리 전우들이 우리를 구하겠다고, 줄을 쫙 서가지고 군가를 부르면서 오는 거예요. 다 죽었죠. 걔네들! 포위해서 일제히 쐈는데, 나중에 들어가 보니까, 팔은 여기 떨어져 있고, 머리는 저기 떨어져 있고!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공격해 오지만, 그 하늘의 천군 천사!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을 하시러 오시는 그 날! 그들은 갈기갈기 찟겨질 거예요. 우리를 공격하는 세상이 마귀의 세력이 무시무시해요. 우리는 도저히 이길 수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 엘코마이! 오고계신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의 그 발자국 소리를 들으셔야 돼요. 그 소리를 들으세요! 여러분!

교회에 나와서 맨날 복이나 받고, 문제나 해결하려고 하고 그러니까, 이 하늘나라와는 조금도 상관없이 살고도 있으니까, 조금만 문제가 오면은, 그거에 매달려서 못 일어나는 거예요. 엘코마이! 구름을 타고, 구름과 함께, 성령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가 역동적으로 지금 오고계시다고요. 우리는 그 말발굽소리를 들으셔야 돼요. 그 천군 천사의 군가 소리를 들으셔야 돼요. ‘이겨라! 내가 지금 가고 있다 이겨랴!’ 예수님이 오시는 거예요. 계속 가요. ‘누가 내 아들을 건드려? 누가?’ 그러면서 오고 계시다니깐요. ‘누가? 내 동생들을 건드려?’ 이렇게 우리의 맏형이, 맏아들이, 오고 계시다고요. ‘꼼짝 마라!’ 그러고 오고 계시다니깐요.

예수 믿는다는 게 얼마나 여러분! 감격스러운 건지 모르시죠? 그게 재림(再臨)이에요.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뭉개구름타고 뭐 이러고 오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그 무시무시한 마지막을 보는 거예요. 우리는요 우리에게는 기대와 소망의 날이지만, 이 땅의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날이라는 거! 그래서 세상을 보고 우리는, 불쌍히 여겨주는 거예요. 이게 기독교예요. 이게요!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무슨 복들을 그렇게 바라시는 거예요? 예배당에 오셔서? 그 분이 자기를 가리켜,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그럽니다. 8절에 보면, 그분은 알파요, 오메가이십니다. 알파는 헬라어의 A죠? 오메가는 헬라어의 Z 지라고요. 그분이 처음과 끝! 시작과 나중! 이 모든 것은 그분으로 부터 말미암았고, 그분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분이 오셔서, 다 태워버릴 거예요. 그분이 오고계세요.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우리 편을 들어주기 위해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하고 오신다니깐요. 그 소리를 들으시냐 말이에요?

자, 여러분! 그분은, 우리의 생명의 시작부터, 나의 인생 전체를 주관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알파! 이미 일은 시작되었고, 오메가! 이 목적지를 향해 우리는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알파요, 오메가예요. 우리는 이 오메가! 목적지를 향해, 반드시 가게 되어 있어요. 그분이 나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고, 그분이 알파요, 오메가니까! ‘모든 역사는 내가 주관하고 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너는 분명히 오메가까지 갈 거야! 그런데 너에게 지금 내가 이런 상황을 허락하는 것은, 그 오메가까지 가는 데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너에게 준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거기다가 그분은 전능(全能)하신 분이에요. 직접 하나님이 말씀하세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전능한 자다!’ 그래요. 전능한 자다! 판타 크라토르! ‘모든 것을 통치하시며,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다.’ 이런 뜻이에요. 판타 크라토르! ‘나는 전능한 자다! 옴니포텐스(omnipotence)!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이고, 끝! 시작과 나중이고, 나는 전능한 거야! 옴니프레젼스(omnipresence)! 옴니포텐스(omnipotence)! 옴니션스(omniscience)! 나는 너희들의 삶에 지금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이 오메가로 데리고 가는 거야! 모든 역사는 내 손에 있어! 그런데 너희들이 왜 걱정하고 있냐? 분명히 너희들은 오메가 까지 갈 거야! 이게 목적이 아니라, 딴 데 한 눈 팔고 있으니까, 지금 힘든 거 아니냐?’ 이 얘기하시는 거예요.

이게 목적이면, 분명히 거기까지 갈 건데, 왜 낙심하시냐고요? 이게 목적이 아니니까, 천국과 지옥은 꿈에도 생각 안하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든지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거! 그걸 위해서 하나님을 동원하고 있으니까, 조그만 일만 있어도 힘들어 하는 거예요. 괴로워하는 거예요. 왜 나 안도와주냐고? 아니에요. 이 오메가로 가는 과정이에요. 그 길은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읽어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그 막강 도미티안 황제에게 핍박을 받고 있던 당시 신자들에게, 이 요한의 메시지는, 엄청난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도미티안! 너 지금 우리 이렇게 괴롭히는데, 너 이제 곧 예수께서 오신다! 너 인제 지옥 간다! 너 인제 심판 받는다!’ 여러분! 그 많은 징기스칸, 알렉산더, 광개토대왕, 무쏠리니, 히틀러, 다 어디 가있어요? 지금 지옥 가있어요. 그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낸 그 수많은 것들 중에 신발짝 하나라도 갖고 올라갔어요? 거기에? 발가벗고 타고 있어요. 지옥의 연료가 되어서! (하하하)

여러분! 신자로서 사는 게 힘드십니까? 우리는 곧 제대하게 될 겁니다. 이 땅에서 인제 곧 우리는 제대하게 될 거예요. 그날은 반드시 속히 올 거니까! 그때가 되면, 모두가 일어나서,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각 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우리는 모두 일어나서, 그 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치 연극이 끝나면, 그 연극 무대에서, 총 맞아 죽은 놈! 칼 맞아 죽은 놈! 또 그를 밟던 폭군! 막이 끝나면, 다 일어나서 관객들에게 인사하죠? 그날이 올 거예요. ‘산이, 바다가, 죽은 자들을 다 토해 낸다’고 그래요. 다 일어날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무덤이 열리고, 거기에서 죽은 자들이 막 나온 것처럼, 이제 각인의 눈이 그분을 볼 거예요.

그러고는 이제 분장을 다 지울 거예요. 우리에게는 지금 역할이 맡겨져 있어요. 가난한 역할! 못 배운 역할! 못 생긴 역할! 뚱뚱한 역할! 뭐 이런 역할들 막 맡겨져 있어요. 싫죠? 이제는 분장을 지울 날이 올 거예요. 그리고는 열심히 그 역할을 잘 해 낸 사람은, 애미상, 오스카상 시상식에 가기 위해서, 멋진 화려한 변화산상에서 입었던, 화려한 하얀 옷을 입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나, 하나, 우리를 안아주면서, ‘내 아들아! 잘했다! 야, 어떻게 그 작은 역할! 보잘 것 없는, 아무도 봐주지 않는 그 역할! 시체의 삶! 그거 어떻게, (하하하하)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해냈니? 고맙다!’ 네, 에미상! 그 여러분 그걸 바라보면서 가야지요?

여러분! 이 땅에서 여러분이 조금 못 배우고, 가난하고, 못생기고, 그런 역할 맡았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 없어요. 그게 다가 아니에요. 그거는 잠깐, 찰나에 불과한 인생! 연극이에요. 전부 황제 역할 하려고 그러고, 전부 무슨 훌륭한 역할만 하려고 그러면, 어떻게 해요? 그 역할은 곧 끝날 거예요. 곧 끝날 거예요. 이제 분장을 지우고, 그 앞에 서야할 날이 분명히 옵니다. 여러분! 그게 기독교예요. 이 땅에서 여러분! 트로피 받는 게 기독교 아니에요.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고, 이 땅에서 돈벼락 내려주는 게, 기독교 아니에요. 그런 하나님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그들은 다 가짭니다.

중부에, 어떤 교회에서 교회 헌금을 가지고, 땅굴을 파고, 거기다가 세계 3차 대전 준비를 한다고 비상식량을 쟁여놓고, 교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놨다 그래요. 다큐멘터리에 나왔다고요. 몇 년 전에! 교회는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에요. 빨리 모든 거 벗어놓고, 떠나려고 준비하는 게 교회죠. 이 땅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 오래 살려고, 땅굴 준비하고, 비상식량 준비하는 거, 교회 아니에요. 교회가, 이 지경까지 내려간 거예요. 지금! 교회가!

뭘 추구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오메가는 진짜 뭡니까? 여러분의 오메가? 여러분의 목적지는 정말 뭐예요? 남들에게 한 번 폼 잡고 큰 소리 한 번 쳐보는 거예요? 부자로 잘 살아 보는 것입니까? 우리의 오메가는 바로, 그 하늘나라에 있는 거예요. 이제는 이 더러운 사망의 몸 벗어버리고, 그 찬란한 새 몸 입는 거예요.

여러분! 지긋지긋하지 않으세요? 아니, 예수를 믿고도 어떻게 이렇게, 여전히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요? 저는 아주 죽겠어요. 지금 목산데, 여전히 안에선 욕심은? 득실득실 올라오고 있고, 여전히 저는 몸으로도 죄를 지어요. 사도 바울이,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 좀 꺼내다오!’ 이렇게 이야기 했을 정도로 우리는, 이 사망의 몸을 빨리 벗어버려야 돼요. 이제 새 몸을 받아야 돼요. 그날을 기다리는 거예요. 우리는요! 이 더러운 사망의 몸에다가, 분 바르고, 루즈 칠하는 게 아니에요.

이 사망의 몸이라는 말은, 고대 시대에, 어떤 사람이 누굴 죽이잖아요? 그럼 걔도 죽어야 되죠? 죽이기 전에, 하루 동안을, 자기가 죽인 시체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서, 꽁꽁 묶었어요. 그리고는 길거리를 데리고 다녔다고요. 24시간을! 얼마나 무섭겠어요? 자기가 죽인 시체가 눈을 부릅뜨고 자기를 이렇게 쳐다보고! 그게 사망의 몸이라고요.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꺼내다오!’ 우리는 죽는 날 그 몸에서 떨어지는 거예요. 그때까지는 계속 고민하면서, 싸우면서 가는 거예요. 무슨 세상이 대단하게 여러분을 괴롭힐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 자신 안에 있는 그 옛사람이 여러분을, 죽도록 괴롭힐 거예요. 거기에서 탈출하는 날이 죽는 날인데, 그걸 왜 무서워하시냐고요?

여러분의 오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십시오. 그분은 구름을 타고, 불말과 불병거를 몰고, 나이! 아멘! 반드시 확실하게 곧 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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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9)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아멘.

이제 8절까지 요한계시록의 서론이 끝나고, 요한은 본격적으로 인제,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2장부터 써 내려가게 됩니다. 그 전에, 1장 9절부터 20절가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요한은, 먼저 교회에게 자기의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 이렇게 자기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요한의 소개일 뿐만이 아니라, 바로 ‘성도란 누구인가?’를 표현하는 그런 말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들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형제’라는 말과,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9절에 있는 ‘예수의’라고 번역에 된, ‘엔 크리스토’라는 말은, ‘엔 크리스토’라는 말은 원래,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에요. 예수 안에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예수의 환란과 예수의 나라와,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는 자다! 이런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 안에서, 인 크리스토’ 하면은, 생각나는 교리가 있죠?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바울 신학의 백미이죠? 그리스도와의 연합! ‘유니온 크라이스트(Union Christ)’입니다.

여러분이 요 ‘유니온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잘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성경 전체를 절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이성적으로는, 상당히 공감하기가 힘든 부분이지만, 이 유니온 크라이스트를 여러분이 알고 계시지 못하고는, 복음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은, 이 유니온 크라이스트에 대해서 조금 공부를 하고, 그것으로 오늘 9절을 한 번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설명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만, 한 군데만 제가 찾아드리겠습니다. 로마서 6장 3절로 가겠습니다.

(로마서 6:3-5)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그러죠?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리스도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죽었고, 장사되었고, 다시 살리심을 받아서 부활을 했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면서, ‘세례(洗禮)’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세례에 대해서는 우리가 자세히 공부를 했죠? 잠깐 복습을 할까요?

아! 여러분은 지금부터 물을 뿌리거나, 물에 잠그는 그런 세례는 다 잊어버리세요.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는, 그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할례(割禮)가 구원의 조건입니까? 아니죠?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서, 먼저 ‘의롭게 여기심을 받았다.’ 그래요. 구원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 17장에서, ‘할례를 받아라!’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할례라는 것은, 구원 받은 자의 ‘싸인(sign) 표시’이지, 구원받는 자의 조건이 아니에요.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거 아니에요. 가톨릭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영세를 받아야,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 거 아니에요. 세례는, 성령 세례를 받은 자! 거듭난 자로서, 그것을 자기의 신앙을 세상에 공포하고 선포하는 것을, 우리가 ‘세례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고요. 그냥 성령 세례를 받은, 거듭난 자들의 상징적인 의식이며, 선포일 뿐이에요. 할례가 그냥 하나님 백성의 표시이듯이!

성경이 말하는 세례는, 다른 아주 깊은 의미가 있어요. 먼저 ‘물에 담그다’라고 그렇게 번역이 되는, 헬라어의 단어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밥토’라는 말이고, 하나는 ‘밥티조!’ 성경에 나오는 말이죠. 이게? ‘밥티조’라는 말이에요. 두 단어가 있다고요. 밥티조는 단순히 물에 담그는 행위가 아니라, 어떤 행위에 의해서, 어떤 수단에 의해서 일어나는 변화! 즉 어떤 방법을 가해서, 사물의 본질이나, 성격이 변하는 것을 뜻하는 게, ‘밥티조’예요.

예수께서 오시기 한 200년 전에, 기원전 2세기경에, 헬라 사람들이 피클을 만드는 방법을 써 놓은, 그러한 책이, 파피루스가 발견이 됐는데, 거기 뭐라고 써있냐 하면은, ‘피클을 만들 때, 오이를 더운물에 담갔다가, 식초 용액에 담가야 된다.’ 이런 말이 있어요. 뜨거운 물에다가 담갔다가가, ‘밥토’예요. 그러나 식초 용액에 담궈서, 이제는 피클이 본질과 그 성분이, 완전히 변해버리는 거를, 우리가 ‘밥티조’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헬라 사람이 이 피클 만드는 방법을 썼을 때, 뜨거운 물에 담근다는 것을, ‘밥토’라고 썼고, 식초 용액에 담그는 것을, ‘밥티조’라고 썼다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요걸 잘 연상을 하고 계세요. 여러분이 요 피클 만드는 방법만 머릿속에 갖고 계셔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뭔지, 금방 이해를 하시게 될 겁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세례! ‘밥티조’는 물에 담근다는 그런 의미보다는, 담가서 변화된다는 데에, 더 강조점이 있는 거예요. ‘밥티조’라는 것은! 세례라는 것은요!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 우리가 푹 잠겨서, 뭔가 새로운 존재로, 그 성분과 본질이 변화되어져 버린 것을, 우리가 ‘세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안에 잠겨서, 연합되어서, 그 성분이 변화된 것을, ‘세례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세례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렇게 같이 띄워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례와 ‘유니온 크라이스트(Union Christ)’를 좀 더 쉽게, 설명을 한 구절이 있죠? 고린도전서 10장 1절로 가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1-2)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받았다 그래요.)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래요. 유니온 크라이스트! 연합(聯合)과 세례(洗禮)를 같이 설명하고 있어요. 홍해를 건넌 것을 성경은, ‘이스라엘의 세례’로 이렇게 표현한다고요. 여기서도 우리는 세례가 단순히 물에 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발도 물에 안 젖었어요. 마른 땅처럼 건넜다 그러잖아요? 진짜 물에 젖은 사람들은, 애굽 사람들이죠?

지금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스라엘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 왕의 노예로 있다가, 애굽 왕의 노예로 있다가, 홍해에 빠져서, 그 애굽 왕의 종들인 이스라엘은 다 죽고, 뭔가 새로운 자들이, 탄생되어서 올라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새로운 자로, 탄생이 되어서 올라왔냐면, 이들이 완전히 바뀐 게 아니라, 여전히 불가능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인데, 하나님이 택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세’라는 그 종 안에 들어가서, 그 모세화 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이스라엘 백성을, 여전히 불가능하고 불순종하는데, 그들을 ‘모세’로 봐주시는 거예요. 그것을 세례라고 하는 거예요. 피클을 자꾸 떠올리시란 말이에요. 피클을!

이 홍해를 건너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을 상징하는, 하나의 상징일 뿐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 예수 안으로, 인 크리스토! 그 안에다가 던져 넣어버리신다고요.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불가능하고, 불순종하는 모습인데, 하나님은 인제 예수를 통해서만, 우리를 보신다고요. 그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언제 십자가에서 죽었어요? 언제 우리가 부활했습니까? 언제 우리가 율법을 지켰어요? 하나도 한 게 없어요. 여러분! 어제도 죄를 짓고, 오늘도 죄를 짓고, 우리는 내일도 죄를 지을 거예요. 그죠?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를 통해서만 보신다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이 모습들은, 지금 하나님의 눈에는 없는 것으로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코 정죄함이 없어요. 결코 정죄함이 없어요!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그것이 너무 감사해서, 삶이 조금씩 변화되어져 가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에요.

말이 안 되죠?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2000년 전에 예수께서 오셔서 하신, 그 모든 행위에 연합이 되어서, 그게 다 우리께 되냐 말이에요? 그런데 자기가 누구인지, 실감하고 자각을 한 사람은, 이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 방법밖에 없어요! 저도 어제 오늘, 저에 대해서 그냥 아주, 낱낱이 하나님이 벗겨서 보여 주셨어요. 도대체 얼굴을 들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그 위로가 그거예요. ‘나는 너를 보고 있지 않아! 원래 너는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나는 예수를 통해서 너를 볼 수밖에 없어!’ 그게 구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 안으로 숨지 않으면, 절대 가망이 없는 자들이에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시도하고 노력해서 된 게, 뭐가 있어요? 담배도 하나 못 끊어요. 우리는요! 우리의 힘과 노력은, 그렇게 연약한 거예요. 예수를 알아가는 게, 중요한 거예요. 우리는 개선하고 고쳐서 쓸 수 있는 종자들이 아니에요. 완전히 바꿔버려야 되는 거예요. 그게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라고요. 로마서 6장 8절 보세요.

(로마서 6:8-11)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언제 우리가 죽었고, 언제 우리가 살아났죠?)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음에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 크리스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

여길지어다! 하! 이런 데 밑줄을 그으셔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레컨(reckon)! 로기조마이!’ 그렇게 여겨주신다는 거예요. 우리는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잘난 척하면 안 돼요. 그러니까 여겨주신다는 거예요. 로기조마이! 레컨(reckon)! 우리가 다 한 걸로 여겨주신다는 거예요. 감당할 수가 없죠? 그 은혜를 어떻게 감당해요? 우리가? 도대체 나를 보면, 우리 자신을 보면, 이건 뭐 백번 죽어 마땅해요. 능지처참! 부관참시! 그 걸로도 부족해요.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허락하셔서, 그렇게 여겨주세요.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여겨주세요. 그게 기독교예요.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아무리 죄를 지어도, 지옥에 못 가세요. 그래 여러분 수요일날 수요 성경공부하고, 주일날 계시록 설교를, 같이 들으면서 오셔야 돼요. 제가 지금 의도적으로 이렇게 집을 짓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어느 하나만 빠뜨려도, 여러분이 제 말을 다 이해를 못하세요. 수요 성경공부를 다 들으신 분만 이해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27절 보세요.

(갈라디아서 3:27)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옷 입었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군복을 입으면, 나찌의 군복을 입으면, 그 사람은 나찌예요. 그죠? 우리가 예수의 옷을 입으면, 우리는 예수로 보여지는 거예요. 예수로! 그리스도로 우리는 옷을 입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옷만 보세요. 그 안에 시커멓고 더러운 우리를 보지 않으신다고요. 이게 신비(神祕)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말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도대체! 그래서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는 것이다’라는 거예요. 말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를 그렇게 만드시고 만다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몽땅! 옷을 입게 되는 거예요.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제가 설명을 해드리면, ‘접붙임’이라는 거 아십니까? 여러분? 접붙임! 어떤 나뭇가지를 꺾어서, 원 가지 나무에다가, 표피를 벗기고, 갖다가 끼워 넣는 거예요. 그러면 이 나무는 곧 이 원래의 이 커다란 이 나무! 그 나무와 생명을 같이 하게 돼요. 모든 생명의 현상을 같이 하게 돼요. 같이 바람에 흔들리게 되고, 같이 꽃을 피우고, 같은 열매를 맺어요. 그 나무가 죽으면, 얘도 죽어요. 가지도 죽어요. 접붙임을 당한 가지도! 살면 같이 사는 거예요. 나무가 땅에 묻히면요, 같이 묻히는 거예요. 한 인생이 되는 거예요. 한 일생이 되는 거예요. 로마서 11장 17절 보세요.

(로마서 11:17)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 감람나무인 내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자,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설명하는 것인데,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해를 좀 쉽게 해드리기 위해서, 인용을 한 거예요. 돌감람나무를 참감람나무에다가 갖다가 접붙임을 하면, 이 돌감람나무가 이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함께 공유하게 돼서, 애가 참감람나무가 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안에 접붙임을 딱 받게 되면, 그 안에 연합(聯合)하게 되면, 우리는 예수가 되는 거예요. 잘 이해하시고 가셔야지, 또 밖에 나가셔서, ‘우리 목사가 우리가 다 예수랜다.’ 그러면, 금방 이단 되는 거예요. 우리를 예수로 취급해 주신다니깐요. 예수로 여겨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구원 받는 거예요. 여전히 이 모양인데! 여전히 이 모양인데! 예수가 되시는 거예요. 여러분은! 예수! 그게 기독교예요. 그래서 기독(基督)! 크라이스트! 기독교예요.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보세요. 인 크라이스트(in Christ)! 인 크라이스트(in Christ)! 인 크라이스트(in Christ)! 인 크라이스트(in Christ)! 그냥 두 줄 걸러 한 번씩 나오죠?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그게 아니면, 우리는 도대체 감당할 수 없어요. 그냥 우리 자신을 보세요. 우리 자신을 보세요.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여러분!

자, 갈라디아서 2장 20절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여러분들이 지금 계속 죄 짓고, 실패하고, 그러는 모든 것들은, 여러분이 사시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그런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지 않아요. 그런 모습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육신의 모습이에요. 새로 태어난, 하나님과 관계있는 여러분의 영은, 이제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육신! 이 플레쉬(flesh)! 이 죽을 몸뚱아리를 같이 갖고 계시다고요. 그 몸은 죽을 거예요. 인제! 그 몸이 뭐냐면, 거듭나기 전에 그 옛 사람!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도록, 열심히 훈련되어지고 길들여진, 그러한 습관(習慣)! 경향(傾向)! 이것을 ‘죽을 몸! 옛사람’이라 그런다고요. 그게 아직 붙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계속 죄를 지어요. 그런데 이건 여러분께 아니에요.

이 신분(身分)을 여러분이 잘 알고 계셔야 돼요. 그래야, ‘아! 감사하다! 어떻게 내가 오늘도 이렇게 죄를 졌는데, 이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것은, 오직 내 안에서 사시는 예수의 삶만 보시는구나!’ 그러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거예요. 우리의 이 불가능한 실존을, 하나님은 이제 보지 않기로 결정하셨어요. ‘로기조마이’! 이 신분을 계속 확인하셔야 돼요. 이 신분을 확인하셔야, 여러분은 변화될 수 있어요.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그 책을 보면, 한국말로 아직 번역은 안 됐는데, 그 데이빗 브레이너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게 뭐냐면?

우리의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 예수가 여러분께 행하신 일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여러분을 바꿔갑니다. 그 신분을 확인하시지 않으면, 여러분은 절대 이 세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고 싶습니까?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당신들은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예요 그러나 사랑하신 예수를 아십시오. 그러면 그 사랑하신 예수가, 당신을 사랑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매일 매일 그 신분을 확인하십시오.

그런다고요. 이게 복음(福音)이라고요.

그 웨일즈의 왕이었던 윈저공 있죠? 1970 몇 년에 죽었죠? 그러니까 웨일즈에서 쫓겨났어요. 그래서 빠리에서 죽었다고요. 그 아버지가 윈저공한테 뭐라고 그랬냐하면, ‘윈저야!’ 그랬을까요? 모르겠어요. 하여튼, ‘아들아! 네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네가 누구인지 늘 생각해라! 네가 누구인지 늘 생각해라! 너는 왕이다! 지금 네가 쫓겨나 있어도, 너는, 네 신분은, 너는 왕이다!’ 그 사람의 회고록에 그 말이 적혀있는데,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같더라고요.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지금 네 모습에 실망하지 말어!’ 그 신분을 계속 확인하면, 우리는 그 신분에 맞게 살려고 노력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분을 확인하세요. 여러분! 신분을 확인하세요!

21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성령이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만지는 순간! 여러분은 오이가 식초 용액에 담겨서, 영원히 본질과 성분이, 피클로 변하듯이, 새 사람으로 바뀌어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은 새 사람이에요. 인제 새 사람!

이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에요. 연합이 되었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만 연합이 된 게 아니에요. 사람들은 고것만 자기 걸로 취하려고 한다고요. 예수님의 삶의 전 영역! 그 모든 삶에 여러분은 연합된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다 가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환란(患亂)의 삶을 살다 가셨어요. 배신(背信)과 따돌림과 조롱과 핍박을 당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 그 사도 요한도 예수님과 똑같은 환란을 당하고 있었어요. 포악하기로 이름난, 도미티안 황제에 의해서, 밧모섬에 가서, 그 연로한 나이에, 노인이었어요. 요한은요! 거기에서 광산에서 부역을 했다고요. 밧모섬에서! 고난이죠? 왜 그랬을까요? 왜요? 예수님 때문에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이 환란의 삶은 나에게 당연한 것이다!’라고, 지금 요한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너희 형제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환란에 동참하는 자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환란에 동참하고 있으면서, ‘이건 우리에게 당연한 거야!’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9절에서!

이 환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뜰립시스’라는 말이에요. 이 말은 억압 뭔가를 꼭 누르다 압제 이런 말이거든요 영어로는 ‘트리불레이션(tribulation),’ 라틴어로는 ‘트리불룸’이라는 말인데, 이게 ‘탈곡기’라는 말이에요. 탈곡기 아세요? 여러분? 막 이렇게 돌리면, 막 돌아가면서, 거기다가 이렇게 짚단을 딱 놓으면, 달달달달 돌아가면서, 알곡만 떨어지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 여러분은 그 탈곡기에 던져지는 사람들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여러분! 그 탈곡기에서 덜덜덜덜 돌아가면서 죽을 때까지 가야 된다니깐요. 그게 기독교예요.

누가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 병 다 낫고, 누가 부자 된다고 이야기 했습니까? 성경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어요? 그런 기독교는 없어요. 여러분! 그들은 다 가짜예요. 다 가짜예요! 여러분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모습이라고요. 거기에서 덜덜덜덜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 거예요. 탈곡기처럼! 예, 환란(患亂)이라는 것은 그런 거예요. 그만큼 환란당하고 계세요? 여러분?

그런데 그게 당연하다는 거예요. 당연한 거예요. 여러분은 당연히 예수의 환란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환란의 삶에도, 동참해야 된다니깐요. 요한복음 16장 33절 보세요.

(요한복음 16:33)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환란을 당할 지도 모르나’예요. 환란을 당하지만, 너희들은 평안해라 그러는 거예요. 환란을 당한다. 내가 거기서 건져줄게. 아니에요. 환란을 당한다. 그러나 평안해라! 왜? 저 소망을 보고. 평안해라! 그게 기독교예요.)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는 말은 뭐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도, 내 안에서 너희도, 나와 연합된 자기 때문에, 너희도 이길 거라는 거예요. 이길 거라는 것은, 너희들이 지금 당할, 뭔가가 있다는 거예요. 너희가 이겨야 할 만한, 뭔가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환란(患亂)이에요. 트리뷸레이션(tribulation)! 사도행전 14장 22절 보세요.

(사도행전 14:22)

22 …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위 머스트 고우 스루 매니 하드쉽스(We must go through many hardships)! ‘위 머스트(we must)’라 한다고요. 머스트(must)! 디모데후서 3장 11절 보세요.

(디모데후서 3:11-12)

11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핍박을 받으리라! 에브리원 후 원츠 투 리브 어 갓들리 라이프 인 크라이스트 지저스 윌 비 펄스큐티드(Everyone who wants to live a godly life in Christ Jesus will be persecuted)! 당연한 거라는 거예요. 당연한 거라는 거예요! 환란과 핍박이 없으면, 뭔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1장 5절

(고린도후서 1:5-9)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란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과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죽고 싶었다는 말이에요. 얼마나 괴로웠으면!)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다는 거예요. 계시록 2장 8절.

(요한계시록 2:8)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우리 서머나 교회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네 환란과 궁핍을 하나님이 지금 알고 계시다는 거예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너 그 환란과 핍박을 받으면서,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것을 허락하세요?’ 그렇게 짜증내고, 실망하고, 자포자기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부요(富饒)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축복(祝福)이라는 거예요. 그게)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그래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고난이 분명히 있다는 거예요.)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 (10일이라는 것은 완전수라 그랬죠? 딱 열흘이 아니라, 고난을 받을 만큼 받는다는 거예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너 이제, 죽도록 고생할 거다. 환란 속에 던져질 거다. 핍박받을 거다. 내가 구해줄게 그러시나요? ‘참아라!’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안 건져 주신다고요. 거기서 참아라! 그래요. 이유가 있다고요. 성경은, 예수 믿으면, 환란이 피해가고, 문제가 해결 되고, 병이 낫고, 그렇게 된다고 한 군데서도 이야기한 적 없어요.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고 이야기한 곳은, 한 군데도 없어요.

어떤 사람이, ‘예수 믿고 가난한 것도 죄다.’라고 얘기했다. 그러더라고요. 목사가! 천만에요. 그 사람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가짜예요. 그거는 버젓이 그런 사람들이, 몇 천 명 되는 큰 교회 목사로 설교하고 있다고요.

아니에요.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환란과 핍박으로 하나님이 던지신다, 그런다고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 왜 환란과 핍박에다가 던지실까요? 우리에게 유익이 있어서 그래요. 보세요. 로마서 5장 3절 보십시오.

(로마서 5:3)

3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을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러죠?)

3절에,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 그러죠? 그래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막 기쁘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환란이 오고, 핍박이 오고, 고난이 오는데, 막 즐거워하면, 그건 정신병자죠? 그거는 여기서, ‘즐거워하다’는 말은, ‘카오카오마이’라는 거예요. ‘자랑하다, 뽐내다’라는 뜻이에요. 환란이 왔는데, 어떤 무리는 그것을 자랑하더라는 거예요. 어떤 자들이에요? 무엇을 아는 자들이, 그 환란을 자랑하더라.

4절 보세요. 무엇을 앎이로다. 그러잖아요? 그 내용이 뭐냐 말이에요? 그 뭐를 알면, 우리가 그 환란을 자랑할 수 있다는 거예요. 뽐낼 수 있다는 거예요. ‘너 환란 있어? 없구나! 나는 있다!’ 이게 된다는 거예요. 그 환란이 인내를 이루고, 인내가 연단을 이루고,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것을 아는 자들은, 그것을 자랑한다는 거예요.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환란은 결국 소망을 이루는 길이다.’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 난 정말 그리스도인 맞구나!’ 하고 자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3절에서, ‘환란이 인내를 이룬다’ 그러죠? 여기에서 이 ‘인내(忍耐)’라는 말, ‘휘포모네’라는 말은, 단순히 ‘꾹 참는 거’ 아니에요. 그 환란이, 그냥 ‘꾹 참는 인내를 만든다.’ 이 말 아니라고요. 꾹 참는 인내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잘 해요. 환란이 없어도! 그거는 이를 악물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잘 참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여기서 말하는 ‘휘포모네’는, 단순히 그냥 꽉 참는 것이 아니라, 정절을 지키면서, 변치 않고, 어디에 굳게 서 있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환란이 옴에도 불구하고, 정절을 지키면서, 변치 않고 어디에 굳게 서 있는 모습을, ‘인내! 휘포모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이 환란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굳게 서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환란이! 그러니까 이 환란이 오면, 환란을 겪으면서, 막 힘들어하죠? ‘와! 진짜 못 참겠다!’ 때려 부수죠? 그러면서 ‘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있는 놈 아니구나!’ 깨닫는 거예요. 환란이 오면은, ‘이 세상에서 정말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구나!’라는 것을 또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 하나님! 정말 하나님 당신밖에 없군요.’라고 더욱 더 굳게,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거! 그것을 휘포모네! ‘인내를 이룬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고린도후서 1장 8절 9절에서 뭐라 그랬어요? 바울이 산 소망이 끊어지도록, 아주 죽고 싶을 정도로, 환란을 받은 이유가, 뭐라 그랬어요? ‘나를 의뢰하지 않고, 그분을 더 의뢰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환란을 허락하셨다.’라고 바울이 고백하잖아요? 예, 그 이야기예요. 그게 바로, ‘인내(忍耐)’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더 바라보게 만드는 거예요. 환란이! ‘환란이 인내를 이룬다’라는 말은, 그 뜻이라고요. 그냥 무조건 꽉 참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런 유익이 있단 말이에요. 우리에게!

그리고 신자의 환란은, 새로 거듭난, 자기 안에 공존하는 이 죽을 몸! 이 옛 몸을 자꾸 무력화시켜요. 자꾸 무장해제를 시킨다고요. 여러분이 지금 실감하고 체감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의 옛 몸뚱아리예요. 이 웬수 같은 몸뚱아리는, 어떻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따라와 주지를 않아요. 그런데 그 환란이, 무장해제 시켜준다고요.

어떻게 이 옛 몸뚱아리를 무장을 해제시켜 가냐면은, 제가 예전에 대학교 때, 고등학교 때까지 너무 열심히 공부를 하는 바람에, 대학교 들어가서, 들어가자마자 열심히 놀기 시작했죠. 그래서 매일 매일 돈 천원을 갖고, 나이트클럽에 갔다고요. 친구들하고! 그때는 천원 내면은, 콜라 한 병 째그만 거 주고, 마음대로 놀게 했어요. 그래서 아주 재미가 들려서, 제가 이래봬도 옛날에는 한 춤 했다고요.

그래서 그날도 그 재미를 좇아 나이트클럽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가 웅성웅성, 웅성 하는 거예요. 왜 그러나 하고 봤더니, 전파사 앞에 가서 봤더니, 북한에서 미그기 하나가 넘어왔어요. 그 민방위 훈련하는 아나운서가, ‘국민 여러분! 지금 북에서 미그기가 넘어왔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곧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 너무 가서 막 놀 생각에, 막 즐거웠던 제가, 다리의 힘이 쫙 풀리는 거예요. 가긴 어딜 가요? 빨리 집에 가야지! 그런데 진짜 걸음을 못 걷겠더라고요. 무서워서!

예, 우리가 너무 너무 좋아서, 너무 너무 익숙해서, 빠져 나오지 못했던 것들이, 이러한 어떤 환란이나, 이런 핍박이나, 이런 것을 통해서, 그것들이 자꾸 힘을 잃어 가는 거예요. 힘을 잃어가는 거예요.

월남 국수집에 가면은, 사리를 다섯 개씩 시켜먹는, 석진이가, 하린이 같은 애가, 환란이 오니까, 집이 어려워지니까, 밥을 안 먹더라니깐요. 밥맛이 없는 거예요. 그것처럼, 무력화시키는 거예요. 옛 몸뚱아리! 환란은 그런 역할을 한다고요.

주일날 매일 골프를 친다고, 이게 너무 재미있어서, 매일 골프 치느라고 교회를 못 오던 분이, 50에 낳은 아들이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이 골반 밑으로 두 개가 딱 잘렸어요. 그 다음부터 이 사람이 골프를 어딜 치러가요? 아무 것도 재미가 없더라는 거예요. 아무 것도!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내 아들이 저렇게 되고 나니까, 뭘 해도 재미가 없더라는 거예요. 환란이라는 것은, 핍박이라는 것은, 우리가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 옛 재미! 쾌락! 이런 것들을 자꾸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요.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닥친 환란으로, 여러분들이 끊어버린 것이, 유익이 분명히 있다니깐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냥 놔두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유익해요. 욥기 42장 5절 보세요.

(욥기 42:5)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뵙옵나이다

환란을 다 통과하고 나니까, 이제는 듣기만 했던 주님을, 눈으로 뵈옵게 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내! ‘휘포모네’란 뜻이에요. 더욱 더 정절을 잃지 않고, 거기에 굳게 서게 되는 게, 이 환란의 역할이라고요. 힘들지만 참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당연히 가야할 길이에요.

그리고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 그러죠?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 여기서 ‘연단’이란 말은, 단순히 ‘두들겨서 단단하게 만든다’가 연단이 아니에요. 연단이라는 말, ‘도키메’라는 이 말은, 어떤 목적에 부합하도록, 질이 검증된 것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어떤 목적에 부합하도록 질이 검증된 거!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철도를 만들 때, 이 철로에 쓰일 철은, 수십 톤의 하중에 견뎌야 돼요. 그죠? 그러니까 철로를 놓기 전에, 이 철을 미리 미리 검증하고 시험한다고요. 그래서 떨어지면? 안돼요. 검증됐을 때, 이 시험을 통과했을 때 철로로 쓰이는 거예요. 그걸 ‘도키메’라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환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휘포모네’에 서게 된다고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검증이 된다는 거예요. 그게 ‘연단을 낳는다’는 말이에요. 검증이 되는 자가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검증이 되면, 도키메! 검증이 되면, 우리는 소망을 더욱 더 붙들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환란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이루고,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말의 뜻이라고요. 그러니까 이 환란은 뭐예요? 유익(有益)이라고요. 우리에게! 야고보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죠? 1장 12절 보세요. 야고보서!

(야고보서 1:12)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말은, ‘페이라스모스, 역경(逆境), 환란(患亂)’이라는 뜻이에요. 시험을 참는 자는 뭐예요? 휘포모네!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뭐예요? 도키메! 연단이란 말이에요.)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이 환란은 당연히 거쳐 가야할 길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에, 예수를 믿고 환란이 없다면, 여러분은 다시 생각해 보셔야 돼요. 여러분은 그냥 하고 싶은 거 다하고, 그냥 재미있게 살다 가세요. 어차피 지옥 갈 거예요. 그 사람은요! ‘예수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만사형통합니다.’라는 것은, 이단 중에 이단(異端)이에요. 거기에 넘어가시면 안돼요. 여러분!

그러니까 환란은 우리의 소망을 굳게 붙들게 만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환란 하는 자들아! 기뻐하라! 하나님의 축복이다!’라고까지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렇게 얘기하는 데 들어보셨어요? 환란을 이야기 하는 종교는, 아무 데도 없어요. 기독교조차도, 이단들은 환란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참 기독교만 환란을 이야기해요. 예수 그리스도만 환란을 이야기한다고요.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 해줘서, 긁어모으려면, 이런 설교하면 안 되죠? ‘예수 믿으면 환란에 빠집니다!’ 그러는데 누가 오겠어요? 그런데 사실인 걸 어떻게 해요? 사실인 걸! 그거 모르고 가면, 죽을 때까지 예수 믿다가, 지옥 갈 걸! 어떻게 이 얘기를 안 하냐 말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환란이기 때문에, 환란을 말려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란이 왔을 때, 신자들아! 기뻐해라!’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신자들아! 기뻐해라! 즐거워해라!’ 이렇게 명령하시는 거예요. 야고보서 1장 2절 보세요.

(야고보서 1:2)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베드로전서 4장 12절.

(베드로전서 4:12)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페이라스모스! 불시험)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당연한 거라는 뜻이에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에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됐으니까)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 뒤에는 기쁨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의 삶에, 환란을 허락하신 거예요. 말려주지 않으세요. 빌립보서 4장 6절 보세요.

(빌립보서 4:6)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가 와요. 환란이 와서 염려가 와요. 그러면 기도와 간구를 하래요. 그러면 어떻게 하신다고요? ‘거기서 내가 건져줄게!’ 그러는지 한 번 보세요.)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를 하면, 내가 고쳐줄게! 건져줄게! 해결해 줄게!’가 아니라, ‘그 상황 안에서도 너희가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내가 생각을 지켜줄게!’ 그런다고요. 이게 기독교라고요. 그 상황 안에서도, 예수로 말미암아 평강을 유지하고 있는 게, 기독교예요. 문제가 해결되는 게 기독교 아녜요. 그것 때문에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죽은 거 아니에요. 여러분! 환란은 그렇게 우리에게 유익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아울러, 오늘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이 환란이 필연적(必然的)이냐? 왜 필연적이냐? 세상과 원수인 예수 그리스도에 증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마귀와 세상은, 당연히 우리를 공격하게 되어 있다. 그래요. 9절을 한 번 다시 읽어 보세요.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그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밧모라 하는 섬에 갇혔다

거기 귀향 간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예수의 증인으로 산 그 삶 때문에, 이 사람은 환란 속에 던져지게 된 거예요.

여러분은 이제 사탄의 나라에서 탈출해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간 분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딱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요. 그러니 사단이 자기의 옛 종을, 가만 놔두겠어요? 옛날에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 척척했던 그 종이, 뭔가 다른 길로 가려고 하는데, 가만 놔두겠냐고요? 사도 요한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나는 밧모라 하는 섬에 갇혀서, 이 환란을 당하고 있는데, 그건 당연한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계시록 20장 4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20:4)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

뭐 때문이에요?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그래요. 여러분 전부가 다! 언제 우리가 목 베임을 받았어요? 예수 믿으면 다 목 베임 받나요? 그만큼 힘들다는 거예요. 그만큼 힘들다는 거예요! 우리를 그래서 다 순교자(殉敎者)라고 그래요. 계시록 보면, 우리 예수 믿는 자를, 다 순교자라 그래요. 우리는 목 베임을 받은 자예요. 그만큼 힘들어요. 예수 믿는 거 쉽지 않아요. 누가 예수 믿는 거 쉽다 그래요? 쉽지 않아요. 어려워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證人)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목 베임을 받는 것과 같은, 고통(苦痛)에 던져지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에 유익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의 삶에, 유익한 것으로 바꾼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사탄 마귀도. 하나님의 그냥 수단일 뿐이에요. 뭘 위해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에요. 이 세상은 커스믹 트라블(cosmic trouble)이라고 하지만, 악(惡)과 선(善)의 대결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사탄을 이용해서, 우리를 지금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고 있는 것뿐이지! 얘는 죽었어요. 그 현실을 여러분이 자각하고 계셔야 되는 거예요.

어떠세요? 여러분! 이렇게 말씀드렸는데도, 여러분의 환란(患亂)이 두려우십니까? 환란을 당하고 있는 여러분이, 그렇게 못나 보이세요? 환란을 당하고 있는 내 형제들이, 그렇게 우습게 보입니까? 그들을 향해서, 손가락질을 할 수 있어요? 그들이 제대로 잘 가고 있는 거예요. 환란을 당하고 계신 여러분! 여러분이 잘 가고 계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환란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나라’에도 동참하고 있다 그래요. 하나님나라에도! 그죠? 하나님나라가 이미 임해서. 우리는 그 나라에 동참해 있는 자들이라는 뜻이에요. 6절을 공부할 때, 우리가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그랬죠? 거기서 쓰인 ‘포이에오’가 과거라 그랬어요.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있어요. 그리고 에베소서 말씀처럼, 나라로 지어져 가요. 그리고 우리는 지어질 거예요. 이 세 시제를 여러분은 늘 갖고 계셔야 돼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되었어요. 골로새서 1장 13절 보세요.

(골로새서 1:13)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과거예요. 나라로 옮기셨어요. 여러분은 인제 하나님의 나라로 가서, 그 하나님나라가 되었어요. 야고보서 2장 5절 보세요.

(야고보서 2:5)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유업으로 너희는 이미 받았다 그래요. 유업으로 이미 너희는 받았다! 우리는 이렇게 이미 하나님나라에 동참한 자들이 되었어요. 우리 자체가 이제 하나님나라가 된 거예요. 그 나라에 동참하는 자가 되었어요. 아노뗀! 위로부터 거듭난 자들! 이제는 이 세상과는 완전히 관계가 없어요.

아담의 후손으로 난 여러분은, 예수께서 아담의 후손으로 오셔서, 여러분을 품에 안고 죽어버렸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인 여러분은 없어졌어요. 인제 예씨 가문에서 하나가 나온 거예요. 여러분이 나오시는 거예요. ‘예’씨로 나오시는 거예요. 여러분이요! ‘메이드 인 헤븐(made in heaven)’이에요. 여러분들은 인제! 응 마대 제품이에요. 여러분은 위로부터 이제 나신 분들이에요. 이 세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 인제! 여러분이 짓는 그 죄도, 여러분과 관련이 없어요. 이 신분(身分)을 매일 매일 확인하세요. 그 나라에 이미 동참하신 분들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요, 그 하나님나라에, 동참한 자들에게, ‘환란과 참음’이 요구되고 있어요. 그죠? 그러면 이 구절만 봐도, 후천년설하고 전천년설주의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죠? 그들은 환란과 핍박이 없는, 천년왕국을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왕국에, 그 나라에 동참한 우리에게, 환란이 있다고 그런다고요. 참음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틀린 얘기잖아요? 그 천년왕국! 그 하나님나라에는, 이 가시적 이 땅에서 우리가 겪어내는, 살아내는, 그 하나님나라에는 환란이 있어요. 시험이 있어요. 원수가 있다니깐요. 시편 110편 1절 보세요.

(시편 110:1-2)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그래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는데, 원수 중에서, 우리를 다스린다니깐요. 환란이 없고, 핍박이 없다고 누가 그래요? 천만에요! 원수와 함께 우리는 공존(共存)해요. 그래서 괴로워요. 힘들다고요.

그래서 우리는 이 천년왕국! 그들이 이야기하는 천년왕국을, 이 ‘교회시대’라고 이야기하고, 세대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7년 대환란이 바로, 이 시기예요. 뭐 환란이 여러분에게 같이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은 또 왕이에요. 왕 노릇 하고 계시잖아요? 왕 노릇에 대해선 제가 설명해드렸잖아요? 예? 이 현실을 좀 잘 파악하고 계셔야 돼요.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그 하나님나라는, 가시적으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하나님나라를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라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도 아니고, 영토도 아니라, 그랬습니다. ‘누가 다스리느냐?’ 그 통치권! 주권(主權)이라 그랬어요. 이 땅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통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란 말이에요.

그러나 거기에 원수들, 대적들이 함께 공존을 해요. 그래서 그 통치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나라들에게는, 환란이 있어요. 그런데 그 환란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이 돼요.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는 것일 뿐이에요. 그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사는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나라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나 아직 가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나라를 우리는, 믿음으로, 인내하고, 참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이루어졌어요. 올레디 낫 옛(already not yet)! 여러분이 항상 머릿속에 두고 계세요. 이미 이루어졌어요. 그러나 이제 가시적으로 오는 그 날까지는, 우리에게 참음이 요구되고 있어요. 그래서 로마서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가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는 말은, 산모가 애를 낳을 때까지, 그 고통을 겪으면서 기다리는 것을, 바로 그 탄식(歎息)이라 그러거든요. 그런 힘든 어려움이 있다고요. 우리는! 그래서 그날을 기다리면서 가는 거예요. 그게 소망이잖아요?

아직 가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그 나라를 보면서,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인내하면서, 각인의 눈이 그 나라를 볼 수 있는, 바로 그날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이 구절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이에요.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聯合)이 되어서, 그 환란에 동참하고, 그 나라에 동참하며, 예수님의 참음에 동참해요. 그러나 예수님과만 연합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예수님을 머리로 연합이 되어 있고, 접붙임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끼리도 연합이 된 거예요. 이제는 한 영이 흐르고, 한 피가 흘러요.

그래서 사도 요한은 9절에서, ‘나는 너희의 형제다!’ 그러는 거예요. 형제(兄弟)라는 건 뭐예요? 피를 나눈 사람들을 ‘형제’라 그래요. ‘나는 너희의 형제다!’ 우리는 우리끼리도 이렇게 연합이 된 거예요. 한 아버지를 둔, 한 맏형을 둔, 피붙이라고요. 자, 로마서 8장 29절이요.

(로마서 8:29)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은 차남, 삼남, 차녀, 삼녀, 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맏아들이 예수님이고! 우리는 형제가 됐어요. 인제 여러분 우리가 형제예요. 우리가 가족이에요. 진짜 가족이에요. 진짜! 히브리서 2장 11절 보세요.

(히브리서 2:11-12)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누구죠? 예수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 (누구예요? 교회죠?) 다 하나에서 난지라 (다 하나에서 낳았대요. 우리보고!)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그러죠?)

교회는, 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형제들이에요. 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한 하나님! 이게 중요한 거예요. 하나에서 났다는 거!

이 시대의 교회를 보세요. 그런데! 그들이 정말 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나요? 정말 한 아버지를 섬기고 있는 형제들 맞아요? 교회들 한 번 보세요.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나, 가톨릭에서 부르는 하나님과, 제가 섬기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다른 분이에요. 아무리 공부해 봐도, 다른 아버지예요. 그건! 저는 그들과 한 형제 아니에요.

심지어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만들었다고,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존경하는, 그분이 만들어 놓은, ‘어찌 하나님이 아니 계시고야, 저렇게 큰 교회가 될 수 있느냐?’라고 사람들이 입에 침을 튀기면서, 칭찬하는, 그분이 섬기는 하나님과도, 저는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어요. 아무리 공부를 해봐도, 그분이 이야기하는 하나님하고, 우리 아버지하곤 달라요. 제가 아무리 양보를 하고, 공부를 해봐도, 달라요. 저는 그 분들하고는, 다른 곳에 갈 거예요. 확신해요! 우리 아버지가 아니에요! 저는 그 분들하고 형제 아니에요.

그리고 ‘어찌 예수에게만 구원이 있겠느냐?’ 그러면서, 불교, 원불교, 가톨릭이 모인 곳에 가서, 윤리 강연, 도덕 강연, 사회정화 이런 거 강연하고 다니는, 그 유명한 원효대사를 존경한다는, 그 목사님이 섬기는 아버지하고도, 우리 아버지는 달라요. 저는 그분하고 딴 곳에 갈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아니에요.

형제라는 것은, 한 아버지예요. 한 아버지! 어떻게 그렇게 다른 아버지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교리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한 교리! 바른 교리 아래에서, 바른 아버지! 바른 하나님을 믿고 가는 것이 형제예요.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한 신앙고백을 하는 거예요. 한 신앙고백! 한 아버지에 대한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인이에요. 우리의 신분이에요. 여러분!

요한이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는 이렇게 한 형제입니다. 한 핏줄이에요. 우리는 이 땅과, 이 세상과, 이 하나님의 나라가 오버랩 된, 이 공존하는 교회시대! 아주 특이한 교회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이 세상 가족들에게,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이 친구들에게, 최선을 다 하셔야 돼요. 직업에 최선을 다하셔야 돼요. 공부도 열심히 하셔야 돼요. 그렇지만 진짜 여러분의 가족은, 이제 영원히 함께 살 가족들은 여러분이에요. 이중에도 아닌 사람 있겠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러분의 형제예요. 진짜 형제예요. 그들이 그게 바로 교회(敎會)라고요. 고린도전서 12장 25절 보세요.

(고린도전서 12:25-26)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우리가 진짜 교회라면, 우리의 영이 한 영이 흐르기 때문에, 서로 알아볼 수 있어요. 아십니까? 우리는 한 영이 흐르기 때문에, 서로 알아볼 수 있어요. 그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하면서, 끝까지 같이 갈 수밖에 없다니깐요. 그게 교회예요.

여러분! 생명이 잉태되어서, 이 생명이 자라나야 되잖아요? 어디서 자라죠?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자라잖아요? 그 자궁에 역할을 하는 것이, 교회예요. 교회 안에서만 자랄 수 있어요. 여러분은요! 서로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주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해주면서, 또 시금석이 되어주면서, 이 교회 안에서 자랄 수 있다니깐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신분을 자각하지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자라날 수가 없어요. 교회 안에서, 교회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끼리, 부딪히면서 자라날 수 있어요. 그래서 교회가 모이는 게 중요한 거라니깐요 그래서 성경에서도, ‘모이기를 힘써라!’ 그러는 거예요. 모이기를 힘써라!

그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이 되어 있어요. 여러분의 신분도, 이제 운명적으로 결정이 되어져 있어요. 그렇지만 아직 갈 길은 멀어요. 그죠? 환란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참음이 요구되는 거예요. 잘 참으세요! 잘 참으세요! 그리고 서로 서로 모여서. 형제끼리 모여서. 자매끼리 모여서. 자라 가세요! 자라 가세요! 그러면 조금 조금 더 힘을 얻을 수 있어요. 마태복음 10장 22절 보세요.

(마태복음 10:22)

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나중까지 견뎌야 구원을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는, 당연히 견딜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형제들이 있기 때문에! 로마서 8장 24절을 보십쇼.

(로마서 8:24-25)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온통 이 교회라고 간판을 건 곳에서, 이 땅에 보이는 것을 소망으로 제시한다고요. ‘그게 무슨 소망이냐?’ 그러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게 소망이지, 그게 무슨 소망이냐?’ 다 뜯어 고쳐야 돼요. 다 뜯어 고쳐야 돼요. 얼마나들 잘못 배우고, 잘못 가르쳐 놨는지, 다 뜯어고쳐야 돼요. 완전히 다 무장해제하고, 바닥부터 다시 쌓아 올라가야 돼요. 30년, 40년, 예수 믿었다. 다 필요 없어요. 다 깨버리셔야 돼요. 얼마나 엉터리로 가르쳐 놨는지 말이에요. 기독교! 그런 기독교가 없어요!

기독교의 역사를 한 번 보세요. 한 번 공부해 보세요. 어디 그런 기독교가 있었어요? 잘못 갔던 기독교! 하나님이 깨신 거는 있어요. 그 이단들을 보면, 전부 그거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이렇게 내려오고 있다고요. 환란과 핍박을 견디면서, 소수로! 순 가짜들! 순 가짜들! 계시록 3장 10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3:10-11)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인내하라고 한 그 말을 네가 지켰은즉 이런 말이에요.)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그 마지막 심판 때를 면하게 해준다는 거예요. 그 참은 자들은요! 참은 자들은! 그러니까 뭔가 참을 게 지금 있다는 거예요. 인내해야 할 게 지금 있다는 거예요.)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여러분! 계시록의 주제(主題)가 뭐라 그랬죠? 그렇죠? ‘이겨라!’ 이럴 때 참 목사로서의 … 흐흐흐. ‘이겨라!’ 예수님이 이기신대요. 그분이 다시 오신대요. 왕으로 다시 오신대요. 이게 계시록의 주제예요. 왜 그렇게 강조를 해야 됐을까요? 왜 그렇게 강조를 해야 됐을까요? 그때 그렇게 종이가 부족했던 그때 당시에, 종이가 없어서, 성경을 한 권을 파피루스에 쓰면, 그게 집 한 채 값이었대요. 그렇게 귀한 종이에다가, 왜 이렇게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이겨라! 이겨랴! 이겨라!’ 써놨을까요? 뭔가 이겨야 할 게 있다는 거예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는요!

그걸 잘 참고 이기셔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셨다면서요? 그분이 잘 참아내셨어요. 우리는 그분처럼 참지 못하지만, 그분의, 그 환란에,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는, 그 영광스러운 사실을, 여러분에게 환란이 닥쳤을 때, 인지하시고, 자각하시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신 게 아니에요. 여러분을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지금 아주 세밀하게, 여러분의 삶에 간섭하고 있는 게, 여러분의 환란이에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계신, 교회인 여러분! 정말 그 나라 백성답게,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면서, 여러분 지금 살고 계세요? 나라에 동참했다면서요? 그 통치에 순종하느라고, 환란을 당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증인으로 사는 삶 때문에, 환란을 당하고 계세요? 그 환란을 당하면서, ‘아! 나는 그리스도인이구나! 진짜 그리스도인 맞구나!’ 그렇게 그 환란을 자랑하고 계십니까? 힘들지만 소망을 바라보면서 잘 참고 계세요? 정 힘들면, 옆 사람을 보세요. 잘 참아내고 있는, 그렇게 가물에 콩 나듯이 잘 참고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있잖아요? 그들을 보면서, 참으시란 말이에요. ‘저게 바른 길이다! 저들도 참고 있다!’ 힘을 얻으세요.

그리고 여러분도 환란 속에서, 다른 형제들에게, 사도 요한처럼 그렇게 외치세요. 오늘 우리가 읽었던 이 9절 말씀이, 바로 이 이야기에요. ‘나 김성수는, 여러분의 형제입니다.’ 사도요한이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은 나의 형제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환란과, 그분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참음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늘 은밀하게 교제하면서, 그분의 응원의 목소리를 듣고 있어요. ‘이겨라! 이겨라! 그 내 이야기를 좀 전해다오!’’ 저는 여러분과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게 바로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1장 9절의 말씀이에요. 여러분! 사도들을 대단히 여기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들이에요. 여러분도 동일한 고백을 하실 수 있어야 돼요. 여러분도 사도 요한과 동일한 고백을, 세상을 향해 던지십시오. 잘 참으세요! 잘 이겨내십시오! 제대할 날은 곧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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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언제 다시 오실까?


예수님은 언제 다시 오실까?


예수님은 정말로 악을 정복하고 승리의 주로 오실까?
왜 속히 오시지 않고 이 세상에 악이 횡행하고 핍박이 가중되도록 놔두실까?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러한 환경 속의 그리스도인에게 ‘하늘 문’의 열쇠를 제공한다.


요한계시록은 입체적인 사건을 평면으로 그린 그림이면서도 평면이 입체로 보이도록 문자와 상징을 융합해 메시지를 전한다. 인간이 파악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시공간적 표현 기법으로 묘사하기 위해 그림 언어 같은 묵시문학 형태를 사용한다. 비유하자면 예언이 말로 전해지는 것이라면 묵시는 그림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비밀스러운 책이 아니며, 어떤 면에서는 가장 쉬운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계 1:1)


여기서 ‘계시’는 ‘뚜껑을 열어서 보여 준다’는 의미인데 우리는 요한을 통해 하늘의 비밀을 문자로 접하는 은총을 누린다.

요한계시록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1. 계시와 환상(1~5장)
2. 환난과 전쟁(6~16장)
3. 심판과 구원(17~22장)

구분해 보면 그 지향점이 분명하다.
현재 상황과 앞으로 전개될 역사의 성격과 방향, 종국에 이르기 전 겪게 될 상황, 역사의 끝을 보여주는 구조다.


이 세 부분은 지상의 교회, 환난의 교회, 천상의 교회로 나눌 수 있다. 넓었다가 점점 좁아지는 ‘나선형 구조’같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집중돼 전개된다. 요한계시록은 특정한 지역이나 민족이 아닌, 우주적 대격변을 제시하면서 복음의 대상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한다. 복음이 지구촌 구석구석 전파돼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하면서, 마지막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로 귀결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신약성서 전체를 마무리한다.


요한계시록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영역을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표현과 전달 방법을 사용했다. 비유적 상징과 문자적 실체를 결합하는데 문자적 의미를 상징으로, 상징적 의미를 문자로 잘못 판단해 그릇된 해석을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이단들의 종말론은 주로 이러한 곡해에서 출발한다. 그중 ‘14만 4000’ 해석이 기승을 부리는데, 문자와 상징을 넘나들며 비뚤어진 해석으로 사람들을 미혹한다.


이 수는 셀 수 없이 ‘많으면서’도 구원받은 ‘제한된’(선택된) 사람들의 범위를 말한다. 선택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구약의 열두 지파(12)와 신약의 열두 지파(12), 그리고 무한대를 의미하는 숫자인 1000을 결합하면 14만 4000이다.


민족적 인종적 문화적 계층적 구별이나 장벽을 초월하는 구원의 개념을 그 속에 내포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제한된 범위’와 ‘그 범위 안의 수는 제한이 없다’는 두 가지 사실을 반영하는 표현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14만 4000’이라는 숫자 상징을 통해 박해 상황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변함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과 ‘변치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굳건한 믿음’을 동시에 강조하면서 승리를 보증한다.


요한계시록은 첩첩산중의 수많은 산봉우리가 안개 속에서 펼쳐지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여준다. 저 멀리 있는 어떤 산봉우리가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 그 시간적인 선후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 존재 자체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시간적 순서보다는 승리로 오시는 주님의 심판을 다양하게 강조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특징이다.


요한계시록은 또 일곱 인봉,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 여러 방법으로 악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주님의 모습을 반복해서 묘사한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일정한 목표 지점으로 역사를 이끄시며 모든 악을 물리치는 장면을 전개하면서 생활 속의 어떤 박해나 환난도 우리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확증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은 복음 전파의 최종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복음이 온 세계에 미치는 승리의 소식임을 일깨워 준다. 지구를 돌아 땅 끝까지 가면 결국 내가 서 있는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땅 끝까지 가는 사명(행 1:8)은 ‘지금 여기서’ 이루어진다. 확정된 미래를 보여주면서 그리스도인에게 힘을 주는 요한계시록은 우주적인 종말의 렌즈로 ‘지금 여기’에 있는 바로 ‘나’에게 초점을 맞춘다. 악은 패망하고 주님은 승리하신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이를 지향하는 공동체가 교회이며 이 소망을 실천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는 분명한 가르침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다양성과 통일성의 보고인 신약성경의 올레길을 완주했다. 굽이굽이 여러 갈래 길을 체험하면서 발견한 보물 같은 은혜와 만나고 나서 비로소 보이는 길! 바로 그 길이다. 역사로 표출된 구속사의 길, 한 개인의 삶 속에 피어난 길, 지금 우리의 길이며 승리의 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수의 의미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수의 의미



- 피타고라스와 피타고라스 학파
수를 말할 때 “게마트리아”를 이해해야 한다.
당시 알파벳이 수를 나타냈다. 이것을 게마트리아라고 한다.

3 1/2
다니엘 ; 종말에 있을 환난 기간
7의 1/2(절반)
한정된 기간이다(완전한 기간이 아니라는 의미)

7

완전 수
6은 완전함에 가깝지만 완전하지 못한 수, 악을 뜻한다.

666


144,000
7:4,

14:3

요한계시록에는 다양한 숫자가 등장한다.
요한계시록 8~9장에는 ‘삼분의 일’이 나온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계 9:15~18)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심판입니다. 그런데 인, 나팔, 대접 심판에 대한 말씀을 읽어보면 심판의 범위가 다릅니다. 인 심판은 4분의 1, 나팔 심판은 3분의 1, 그리고 대접 심판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심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종이 위에 이 내용을 그려본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 물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보입니다.” “심판으로 많은 사람이 죽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그린 그림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세요. 색칠한 부분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색칠한 부분이 아닌 나머지 부분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학생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교수님, 인 심판과 나팔 심판에는 기회가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한 학생을 칭찬해 줬다. “맞습니다. 인 심판과 나팔 심판에선 아직 4분의 3, 3분의 2라고 하는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은 요한계시록의 ‘삼분의 일’을 어떻게 해석할까. 언제나 그렇듯 신천지는 성경을 인용하면서 요한계시록이 신천지에 대한 말씀인 것처럼 해석한다.


교주 이만희는 신천지를 만들기 전 유재열이 이끄는 장막성전에서 활동했다. 신천지는 장막성전이 마귀와 사단에게 속한 목자들에게 속아서 배도했다고 말한다. 장막성전도 사이비 집단이었는데 배도를 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쨌든 그 결과 장막성전 지교회 3분의 1이 배도해 파괴됐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벌어진 이 사건을 요한계시록 나팔 심판, 삼분의 일 심판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왜 신천지는 이런 과도한 해석을 하는 걸까. 그들은 요한계시록이 신천지와 정통교회의 영적 전쟁을 비유로 말씀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 감추어진 예언의 실체가 자칭 약속의 목자인 이만희를 통해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장막성전의 배도’는 신천지가 세상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신도들에게 주입하려는 의도가 들어있다.


삼분의 일에 대한 바른 해석은 뭘까?

요한계시록에서 인 심판은 그 범위가 사 분의 일이었는데, 나팔 심판의 범위는 삼 분의 일이다. 심판의 범위가 확대됐다. 이는 우리에게 무얼 말해주는 걸까.


하나님의 심판은 종말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강해지고, 그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음악 기호로 말하면 크레센도, 즉 ‘점점 강하게’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종말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관망만 해서는 안 된다. 아직 구원의 기회가 있고,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할 사명이 있다. 우리는 심판과 기회라는 눈으로 요한계시록을 균형 있게 바라봐야 한다. 그때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의 해답을 찾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주제 : 예수님에 대한 경배와 찬양
- 신약 성경에서 “할렐루야” 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에서만 사용되었다(19장).

요한계시록 19:1, 3, 4, 6(4회)

* 요한계시록이란 어떤 책인가?
이원론과 결정론을 특징하는 비주류 문학 즉 묵시문학이라고 한다.

이원론 :
시간(현재와 미래, 악의 지배와 선의 지배)
공간(하늘과 땅, 악한 통치자,
행위자(하나님의 대리자와 악의 대리자)

결정론 :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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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배 총장의 신약성경 올레길

계시록의 우주적 종말은 복음의 최종 승리를 일깨워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3347&code=23111413&sid1=mco 

예수님은 언제 다시 오실까?
예수님은 정말로 악을 정복하고 승리의 주로 오실까?
왜 속히 오시지 않고 이 세상에 악이 횡행하고 핍박이 가중되도록 놔두실까?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러한 환경 속의 그리스도인에게 ‘하늘 문’의 열쇠를 제공한다.


요한계시록은 입체적인 사건을 평면으로 그린 그림이면서도 평면이 입체로 보이도록 문자와 상징을 융합해 메시지를 전한다. 인간이 파악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시공간적 표현 기법으로 묘사하기 위해 그림 언어 같은 묵시문학 형태를 사용한다. 비유하자면 예언이 말로 전해지는 것이라면 묵시는 그림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비밀스러운 책이 아니며, 어떤 면에서는 가장 쉬운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계 1:1)


여기서 ‘계시’는 ‘뚜껑을 열어서 보여 준다’는 의미인데 우리는 요한을 통해 하늘의 비밀을 문자로 접하는 은총을 누린다.

요한계시록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1. 계시와 환상(1~5장)
2. 환난과 전쟁(6~16장)
3. 심판과 구원(17~22장)

구분해 보면 그 지향점이 분명하다.
현재 상황과 앞으로 전개될 역사의 성격과 방향, 종국에 이르기 전 겪게 될 상황, 역사의 끝을 보여주는 구조다.


이 세 부분은 지상의 교회, 환난의 교회, 천상의 교회로 나눌 수 있다. 넓었다가 점점 좁아지는 ‘나선형 구조’같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집중돼 전개된다. 요한계시록은 특정한 지역이나 민족이 아닌, 우주적 대격변을 제시하면서 복음의 대상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한다. 복음이 지구촌 구석구석 전파돼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하면서, 마지막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로 귀결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신약성서 전체를 마무리한다.


요한계시록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영역을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표현과 전달 방법을 사용했다. 비유적 상징과 문자적 실체를 결합하는데 문자적 의미를 상징으로, 상징적 의미를 문자로 잘못 판단해 그릇된 해석을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이단들의 종말론은 주로 이러한 곡해에서 출발한다. 그중 ‘14만 4000’ 해석이 기승을 부리는데, 문자와 상징을 넘나들며 비뚤어진 해석으로 사람들을 미혹한다.


이 수는 셀 수 없이 ‘많으면서’도 구원받은 ‘제한된’(선택된) 사람들의 범위를 말한다. 선택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구약의 열두 지파(12)와 신약의 열두 지파(12), 그리고 무한대를 의미하는 숫자인 1000을 결합하면 14만 4000이다.


민족적 인종적 문화적 계층적 구별이나 장벽을 초월하는 구원의 개념을 그 속에 내포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제한된 범위’와 ‘그 범위 안의 수는 제한이 없다’는 두 가지 사실을 반영하는 표현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14만 4000’이라는 숫자 상징을 통해 박해 상황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변함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과 ‘변치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굳건한 믿음’을 동시에 강조하면서 승리를 보증한다.


요한계시록은 첩첩산중의 수많은 산봉우리가 안개 속에서 펼쳐지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여준다. 저 멀리 있는 어떤 산봉우리가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 그 시간적인 선후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 존재 자체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시간적 순서보다는 승리로 오시는 주님의 심판을 다양하게 강조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특징이다.


요한계시록은 또 일곱 인봉,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 여러 방법으로 악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주님의 모습을 반복해서 묘사한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일정한 목표 지점으로 역사를 이끄시며 모든 악을 물리치는 장면을 전개하면서 생활 속의 어떤 박해나 환난도 우리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확증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은 복음 전파의 최종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복음이 온 세계에 미치는 승리의 소식임을 일깨워 준다. 지구를 돌아 땅 끝까지 가면 결국 내가 서 있는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땅 끝까지 가는 사명(행 1:8)은 ‘지금 여기서’ 이루어진다. 확정된 미래를 보여주면서 그리스도인에게 힘을 주는 요한계시록은 우주적인 종말의 렌즈로 ‘지금 여기’에 있는 바로 ‘나’에게 초점을 맞춘다. 악은 패망하고 주님은 승리하신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이를 지향하는 공동체가 교회이며 이 소망을 실천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는 분명한 가르침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다양성과 통일성의 보고인 신약성경의 올레길을 완주했다. 굽이굽이 여러 갈래 길을 체험하면서 발견한 보물 같은 은혜와 만나고 나서 비로소 보이는 길! 바로 그 길이다. 역사로 표출된 구속사의 길, 한 개인의 삶 속에 피어난 길, 지금 우리의 길이며 승리의 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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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설교할까?

신천지 예수교 증거 장막 성전(신천지, 이만희교주)의 문제는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진리를 왜곡했다는 점이다. 소위 “비유풀이”나 “자의적 시대 구분” 등만 강조하면서 신자들을 미혹했다. 교회와 목회자들은 신천지의 잘못된 교리를 반박하고 성도를 보호해야 하는 동시에 “빼앗긴 요한계시록”을 되찾아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러나 해석이 어렵고 천년왕국론 등은 네 가지 관점으로 나뉘어 있어 설교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광복 흰돌선교센터 대표, 이필찬 요한계시록연구소 소장, 정성욱 미국 덴버신학교 교수에게 요한계시록에 대해 물었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일까?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의 책”으로, “예수님 재림 직전의 대환난, 재림, 그리고 재림 이후의 천년왕국과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기록”이라며 “무섭고 두려운 내용이 아니라 주님과 주님의 교회가 반드시 승리할 것에 대한 확신과 위로, 용기를 주며 재림을 대망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했다.(정성욱)


“요한계시록은 전체 404절 중 278절이 구약의 인용이다. 또 예수님 십자가 구원을 염두에 둔 ‘어린 양’이란 표현만 31회 나온다.”며 “구약부터 신약의 십자가 신앙, 그리고 재림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을 통합적으로 보게 하고 구속사의 결론까지 보여준다.”고 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 교회가 직면할 대환난과 재림, 지옥 불못 심판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 구원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이필찬)


그럼에도 많은 성도는 요한계시록을 어렵다고 느낀다. 신자들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 예언의 말씀이므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며 “편지로서 발신자인 사도 요한과 수신자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관계 입장에서 읽어야 한다.”고 했다. 이필찬 소장은 요한계시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이며 ‘예언의 말씀’(1:3) ‘편지’(1:4)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요한계시록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로마서가 신학적 논설문이라면, 요한계시록은 미래 사건에 대한 그림책”이라며 “문제는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일반 신자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요한계시록은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이 아니라, 밝고 행복한 종말론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주님의 재림은 밝고 영광스러운 날이며 그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로 행복한 날”이라며 “특히 6장부터 18장까지의 기록은 대환난 시대에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과 심판의 기록이다. 교회는 철저히 보호를 받는다. 계시록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호하실 것이고, 끝내 승리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말했다.


목회자들이 요한계시록 설교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점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약속이다. 바벨론 제국으로 묘사되는 세상과 적그리스도는 철저히 심판을 받을 것이나,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부 된 교회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며 “신자들에게 이 약속을 신뢰하면서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환난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과거 한국교회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데 미온적이거나 금기시했던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장 칼뱅이 요한계시록을 주석으로 저술하지 않았다며 요한계시록 설교를 하지 않는 목회자들이 있다”며 “하지만 저명한 조직신학자 찰스 핫지와 성경신학자 게할더스 보스는 계시가 점진적으로 이해되고 열린다는 계시 이해의 점진성을 주장했다. 설교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이필찬교수)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29052&code=23111211&sid1=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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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95년쯤 사도 요한이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이 계시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이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유의 깊게 봐야 하는 것은 ‘계시’와 ‘구름’이다. 사이비 교주들은 이를 자주 써먹는다.


계시는 한자로 ‘열다’ ‘가르치다’ ‘인도하다’는 뜻을 가진 "열 계(啓)"와 ‘보이다’ ‘가르치다’ ‘알리다’는 의미인 "보일 시(示)"를 쓴다. 그래서 계시는 ‘열어서 보여 준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이란 예수님께서 자신의 뜻을 성도들에게 열어서 보여주신 성경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가톨릭 성경은 요한계시록이라고 하지 않고 요한묵시록이라고 부른다. 묵시란 무엇일까. 묵시(默示)는 ‘은근히 보여주다’는 뜻이다. 은근히 보여주시는 말씀이 요한계시록이라는 말이다.

* 묵시(黙示) : 잠잠 할 묵(黙), 보일 시(示)
직접적(直接的)으로 말이나 행동(行動)을 드러내지 않고 은근(慇懃)히 자기(自己)의 의사(意思)를 나타내 보임.

요한계시록 1장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기록돼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부분의 이단이 구름을 비유라고 말한다. 어떤 이단은 구름을 ‘영’ 또는 ‘천사’라고 해석한다.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 안에 영으로 임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단은 구름이 육체를 비유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들은 초림 때 예수님이 구름으로 비유된 한 사람의 육체를 통해 이 땅에 오셨다고 주장한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수십 명의 ‘재림 예수들’이 하나님이 선택한 한 사람의 육체에 임했다고 가르친다. 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이다.


정통교회는 구름을 어떻게 해석할까. 요한계시록 1장 7절에는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말씀한다. 정통교회의 바른 해석은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단의 주장처럼 인간에 불과한 교주를 절대 지칭하지 않는다.


본문의 “구름을 타고”라는 말씀은 원어로 보면 ‘메타 톤 넵헬론’이다. ‘타고’로 번역된 ‘메타’는 ‘~과 함께’ 또는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요한계시록 1장 7절 “구름을 타고”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구름과 함께” 또는 “구름 가운데”라는 뜻이 된다.


정통교회는 ‘구름 타고 오심’을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이해한다.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있었고 하나님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 임재하셨다. 시내산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능력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또 다른 예가 다니엘서에 있다. 다니엘서 7장에도 구름이 등장한다. 다니엘은 환상 가운데 하늘 구름을 봤다. 다니엘은 세상의 구원자, 즉 메시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예언했다. 여기서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은 영광과 능력으로 임재하는 것을 상징한다. 비유로 인간을 뜻하는 게 절대 아니다.


이단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지엽단말적인 사실에 교리를 꿰맞춘다. 그래서 구름이 무엇을 비유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정통교회는 그렇지 않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에서 강조하는 것은 “구름”이 아니라 “그”다. 바로 예수님께서 영광과 능력으로 재림하심을 강조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 때 부활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영광과 능력 가운데 이 땅에 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영광과 능력으로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최후 승리를 확신하면서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해 나아가야 한다. 구름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말이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56611&code=23111413&sid1=m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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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개론

1. 서론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 1장
2. 일곱 교회 : 2∼3장
3.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 4∼5장
4. 일곱 인의 심판 : 6∼7장
5. 일곱 나팔의 심판 : 8∼9장
6. 열린 책과 두 증인 : 10∼11장
7. 영적 전투 : 12∼14장
8. 일곱 대접 심판 : 15∼16장
9. 큰 성 바벨론의 멸망 : 17∼20장
10.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완성과 결론 : 21∼22장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유기적으로 통일성 있게 해석하고 있다. 때문에 세대주의적이나 시한부 종말론적인 ‘불건전한 요한계시록 해석’에 이미 오염된 이들에게는 해독제로, 앞으로 이단적이거나 불건전한 요한계시록 해석으로 고통 받을 사람들에게는 ‘바른 요한계시록 해석의 백신’이 될 것으로 보인다.

평생아카데미는 요한계시록 강의 외에도 평생 공부하는 목회자를 위한 ‘평공목 독서클럽’,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20년 과정의 ‘예수대학’, 지역 목회자와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평생 아카데미’ 등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과 성경의 다양한 강의와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백금산 목사는 고려대 교육학과와 총신신대원(M.Div, Th.M)을 졸업하고 예수가족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으며, 부흥과개혁사를 통해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해 많은 영적 거인과 좋은 책을 한국교회에 소개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다음은 전편에 이은 백금산 목사와의 요한계시록 관련 인터뷰 내용.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종말론에 관심 일으켜

역사적 전천년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강조

후천년설, 세계 복음화 관심과 노력에 공헌해

무천년설, 영원한 천국과 균형잡힌 역사 관점

- 앞서 설명해 주신 네 가지 천년왕국설의 공헌은 무엇인가요.

“네 가지의 천년왕국설은 나름대로 기독교인의 역사관 형성에 있어 공헌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공헌

종말론 자체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입니다. 20세기에 성경적 종말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급증은 분명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공헌입니다.

둘째, 역사적 전천년설의 공헌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라기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셋째, 후천년설의 공헌

세계 복음화에 대한 관심과 노력입니다.

넷째, 무천년설의 공헌

영원한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강조와 역사에 대한 균형 잡힌 실제적 관점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천년왕국에 대해 어떻게 믿어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천년왕국설에 대한 견해는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 많은 차이를 가져옵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에 따라 우리의 미래관이 달라지고, 미래관의 차이는 오늘의 우리 삶에 큰 차이를 만듭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만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어떤 잘못된 해석도 결국, 잘못된 해석만큼 기독교인의 잘못된 생활을 초래하는 법입니다.

따라서 어떤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가 더 성경적인 바른 해석인지에 대해 비교 분석하고, 가장 최선의 견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자들의 중요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백금산 목사는 세대주의 벗어나 ‘무천년설’ 입장

후천년설과 전천년설, 천국의 일 너무 일찍 적용

재림 전 시대의 징조에 대한 잘못된 견해 심기도

후천년설은 너무 낙관적, 전천년설 너무 비관적

- 목사님은 이 학설들 중 어떤 입장을 취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천년왕국에 대한 제 견해는 ‘무천년설’입니다. 저는 무천년설을 제외한 후천년설과 전천년설의 공통된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후천년설과 전천년설은 영원한 천국에서 일어날 일들을 영원한 천국이 되기 전의 역사의 한 시점에 너무 일찍 적용해 버립니다.

후천년설은 예수님이 재림하기 전 역사의 특정 시점에 적용하며, 전천년설은 예수님이 재림하고 난 후에 적용합니다. 즉 후천년설과 전천년설 둘 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너무 앞당겨서 적용한다는 점에 동일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영원한 천국에서 일어날 일을 앞당겨 적용할 경우, 영원한 천국이 도래하기까지 이 세상에 공존하고 있는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에 대한 균형감각을 상실하여, 일반은총의 가치를 크게 약화시키게 됩니다.

둘째, 후천년설과 전천년설은 예수님의 재림 전 일어날 시대의 징조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게 만듭니다.

후천년설은 예수님이 재림하기까지의 미래에 대해 너무 낙관적 측면만을 강조합니다. 시대의 징조 중 성령의 부으심을 통한 세계 복음화에만 지나친 관심을 가지게 하고, 특히 신법주의적 후천년설의 경우 현재 있는 일반 국가들에 구약의 율법을 적용하려는 기독교 정복주의적 잘못된 ‘지배신학’을 가지게 만듭니다.

반대로 전천년설은 예수님이 재림하기까지의 미래에 대해 너무 비관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즉 시대의 징조 중 박해, 배교, 적그리스도의 등장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바른 자세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함께 있는 무천년설의 실제적인 관점이어야 합니다. 미래는 한편으로는 세계 복음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교회에 대한 박해와 교회의 배교, 적그리스도의 영이 동시에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런 실제적 관점은 성경적일 뿐 아니라, 성경적이기 때문에 현실적이며 실제 일어나고 있는 사실과도 부합합니다.”

예수님, 불신자가 영원히 형벌 받는 장소로 지옥 언급

지옥 형벌, 죄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지옥은 어둡고 불타는 곳… 몸과 영혼 모두 고통받아

-‘지옥이 과연 있느냐’, ‘선하신 하나님이 지옥을 미리 만들어 놓으신 것이냐’는 질문이 요즘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변증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최후의 심판 다음에 인류가 둘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구원받은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되고,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불 못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성경은 최후의 심판 이후 불신자가 불 못에 던져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지옥에 대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자세하게 이야기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불신자가 영원히 형벌을 받는 장소를 “지옥”이라 부르십니다(마 5:29-30, 23:15, 23:33; 막 9:45-47). 둘째, 예수님은 지옥을 ‘불’과 연관시켜 “지옥 불”, “꺼지지 않는 불”, “영원한 불”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셨습니다(마 5:22: 마18:8-9).

셋째, 예수님은 지옥을 “바깥 어두운 곳”이라 표현하시면서 지옥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 하셨습니다(마 8:11-12, 25:30). 넷째, 예수님은 죄인들이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 때는 세상 끝 날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3:40-42, 49-50).

다섯째, 예수님은 지옥을 몸과 영혼이 모두 고통 받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0:28). 여섯째, 예수님은 지옥에는 불신자만 아니라 마귀와 마귀의 부하인 타락한 천사들도 함께 던져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5:41). 일곱째, 예수님은 지옥의 고통은 영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막 9:43-49).

사도들의 가르침도 모두 지옥이 “불”과 “어둠”으로 상징되며, 지옥에서의 고통이 “영원하다”는 것에 강조점을 둡니다.

첫째, 지옥의 형벌은 죄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입니다(롬 2:5). 둘째, 지옥은 “맹렬한 불” 또는 “불 못”,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고 불립니다(히 10:27-31; 계 19:20; 계 20:10, 14-15, 21:8). 셋째, 지옥은 어두운 곳입니다(벧후 1:17; 유 13절). 넷째, 지옥의 고통은 영원합니다(살후 1:7-9; 유 7절, 계 14:9-11).

이처럼 예수님과 사도들이 말한 지옥의 특징에 대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묘사는 “불”과 “어둠”입니다. 지옥은 불타는 곳이며, 어두운 곳입니다. 여기서 이런 “불”과 “어둠”은 문자적이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문자적인 불과 문자적인 어둠으로 해석하면 모순과 혼란이 생깁니다. 지옥이 불인 동시에 어둠일 수는 없습니다. 불과 어둠은 불신자들이 영원히 받을 형벌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는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불과 어둠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지옥은 인간의 몸과 영혼 모두가 고통을 받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불이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자들의 외적인 고통, 육체에 대한 고통을 강조하는 측면이라면, 어둠은 내적인 고통, 영혼에 대한 고통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몸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와 마음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로서 “불”과 “어둠”이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이 말해 주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의 비참함은 참으로 말로 다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지옥에서 영원토록 의식적인 고통을 받는다고 하는 이런 전통적인 ‘지옥 교리’를 부인하는 기독교인도 오늘날 많습니다.

영원한 지옥에 대한 부인은 두 가지의 부류로 나타납니다. 첫째, 보편 구원론자들입니다. 보편 구원론자들은 하나님이 결국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사후에도 구원의 기회를 주어 결국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둘째, 소멸론자 또는 조건적 불멸론자들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신자는 영생을 누리지만(조건적 불멸론),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는 궁극적으로 존재가 없어진다(소멸론)고 생각합니다.

즉 불신자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소멸되는 것이 곧 불신자에 대한 형벌이라는 주장입니다.

불신자가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지옥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인은 지옥에 대한 성경의 계시,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지옥에 대한 성경 가르침에 대해

1.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 알고

2. 죗값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기억

3. 영원한 형벌 구해주신 하나님 감사하는 삶

-그렇다면 우리는 지옥에 대한 성경의 이런 가르침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하며,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기간이 몇십 년밖에 안 되는데,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는 기간이 영원하다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소멸설과 같은 이론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와 심판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죄의 크기는 죄를 짓는 기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대상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생 세금을 조금씩 떼먹은 죄를 지은 사람과, 한순간 왕을 살해하고 반역한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한순간 왕을 살해한 죄의 크기는 한평생 조금씩 세금을 떼먹은 죄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죄입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왕에 대한 반역죄는 가장 크고 무서운 형벌로 다스려집니다.

그런데 죄는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우주 만물의 왕이신 하나님의 왕 되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반란입니다. 존재와 지식과 능력과 거룩함과 공의와 선함과 진실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하나님을 반역한 죄에 대한 처벌은 하나님의 높으심과 위대하심에 비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한하고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우리 죗값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대속적인 죽음의 가치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대표해 인간 대신 죽는 것이 아니고는 다른 방법으로는 처리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 죗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자인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예수님이 나 대신, 우리를 대표해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가 받을 지옥의 고통을 ‘영원히 단번에’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십자가를 지신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크기는 우리가 건짐 받은 지옥의 영원한 형벌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지옥의 영원한 불, 영원한 어둠의 고통과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우주에서 가장 크고 엄청난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식어지는 것은 우리가 건짐 받은 지옥의 형벌과 고통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옥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징주의 기초로 종합적 해석방법 교육

연구와 설교 중간 지점에서 계시록 강의

쉽고 명쾌하게 전체 구조와 주제 선명히

-이번에 진행하시는 요한계시록 강의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이나 책이나 강의마다 요한계시록의 다양한 해석법에 기초한 각각의 특징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 요한계시록 강의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요한계시록의 해석법에 있어 상징주의를 기초로 과거주의, 미래주의, 역사주의 장점을 취하는 종합적 해석방법, 즉 구속사적 상징주의 해석 방법과 무천년설에 입각해 요한계시록을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와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유기적으로 통일성 있게 해석합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이 예언의 절정이자 성경의 결론이라는 관점에서, 요한계시록과 구약의 이사야서,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 같은 중요 예언서와 창세기, 출애굽기, 시편 등 구약 성경 전체와 신약 성경과의 유기적 연속성 속에서 해석해 갑니다.

둘째, 이번 요한계시록 강의는 학문적 요한계시록 주석이나 연구서들과 요한계시록 설교의 중간 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강의한다는 것입니다. 즉 요한계시록 전체 본문을 주제별이 아닌 장별, 단락별로 큰 그림을 그리면서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가에 중점을 둡니다.

셋째, 이번 요한계시록 강의는 무엇보다 이해하기 쉽고 명쾌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전체 구조와 주제를 선명하게 보여주며, 그동안 어렵고 무섭게 여겨졌던 요한계시록을 은혜롭고 감동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요한계시록 공부의 유익

1. 성경 전체적인 이해 잘하게 되고

2. 교회와 세상 바라보는 눈 열리고

3. 이단과 사이비 유혹 빠지지 않고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 신앙생활에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모든 목회자들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을 필수로 공부해야 할 중요한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큰 도움을 받습니다.

첫째, 요한계시록을 잘 알면 성경 전체를 잘 이해하게 됩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드라마입니다. 창세기는 성경의 구속 드라마의 서막이며, 요한계시록은 구속 드라마의 종막입니다. 창세기가 성경 전체의 서론이라면 요한계시록은 성경 전체의 결론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잘 알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를 얻게 됩니다.

둘째, 요한계시록을 잘 알면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열립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와 세상의 본질을 가장 분명하고, 가장 선명하게 제시해 줍니다. 세상의 역사 속에서 교회사가 지금처럼 전개되어 온 의미와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 줍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기독교인으로서 가져야 할 바른 역사관과 세계관의 안경을 제공해 줍니다.

셋째, 요한계시록을 잘 알면 이단과 사이비 집단의 미혹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교회사를 보면 이상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통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이 잘 가르쳐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단과 사이비 집단들이 요한계시록을 더 많이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하면 정통교회 많은 성도들은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알지 못하므로 미혹되기 쉽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아는 것은 자신의 바른 신앙을 위해, 또한 앞으로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단들이나 불건전 집단에 빠지지 않게 하는 중요한 보호막이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거나 가르친 경험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주신다면.

“요한계시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한지 30년 이상 되었습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인 1983년입니다. 당시 한국교회에서 종말론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요한계시록을 잘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중에 있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설서들을 많이 읽고 공부했습니다.

그러던 중 겨울방학 때 고향 교회 친구와 선후배들을 대상으로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까지 약 13시간 동안 앉은 자리에서 쉬지 않고 요한계시록 전체를 구절별로 강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요한계시록 이해는 당시 유행하던 세대주의적 해석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지금은 세대주의적 요한계시록 해석을 완전히 버렸지만, 당시 유행하던 세대주의적 해석은 제가 처음으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공부를 깊이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후 신대원에서 공부하며 체계적으로 성경과 신학을 배웠고, 개혁신학을 계속 개인적으로 공부함으로써 요한계시록에 대한 세대주의적 해석 외에 다른 해석법을 알게 되어, 성경 전체와 요한계시록을 보는 관점이 새롭게 형성되었습니다.

1994년부터 약 5년간 서울신학교에서 요한계시록을 강의한 적도 있고, 1998년 7월 호주 퍼스 지역 한인청년연합회 여름수련회에서 4박 5일 동안 하루 6시간 이상 요한계시록 전체를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에는 요한계시록 공부를 좀 더 대중화시키기 위해 <만화 요한계시록>을 발간했습니다.

이번 평생 아카데미를 통해 요한계시록을 다시 강의하는 이유는 <만화 요한계시록> 발간 이후 최근까지 발간된 요한계시록의 중요 주석과 연구서를 통해 그 내용을 보충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천지, 요한계시록 잘못 해석한 대표 사례

대부분 이단, 요한계시록 근거로 영해 시도

신약에서 ‘상징’ 가장 풍부, 해석 기초 필요

-한국에 유독 요한계시록을 잘못 해석한 이단들이 많은 이유를 어떻게 보는지요.

“이단의 등장이 한국교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단은 교회사 전체를 통해 모든 시대와 많은 장소에서 늘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 시대 동안 이단의 끊임없는 등장은 이미 예수님이 예고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단은 요한계시록만을 잘못 해석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 대한 불건전한 해석과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교리에 대한 잘못된 해석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교회에 가장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신천지 이단은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은 물론, 요한계시록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발생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한국교회에서 발생한 다른 대다수의 이단들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특정 부분들을 아전인수 격으로 잘못 해석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요?

이단들의 성경 해석은 기본적으로 성경의 역사적-문법적-신학적 해석의 기초가 전혀 없기도 하고, 성경을 대부분 아전인수 격으로 영해합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그렇게 영해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비옥한 성경의 밭인 요한계시록’에 두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상징이 가장 풍부하게 나오는데, 바른 해석의 기초 없이는 이런 상징들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성경을 잘 모르거나 성경 해석의 기초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단들의 마구잡이식 해석에 대해 바른 해석인지 틀린 해석인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성경이 되어 왔습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정통 기독교인들에게도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성경입니다.

요한계시록 해석, 예언 성취 일어나는 기준으로

1. 과거주의 해석, 모두 과거 일어난 일로 파악

2. 미래주의 해석, 재림 이후 일어날 일로 파악

3. 역사주의 해석, 재림 이전 일어날 일로 파악

4. 상징주의 해석, 선악 투쟁 상징 묘사로 파악

-요한계시록의 주요 해석법들을 소개해 주신다면.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법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으나, 가장 일반적으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가 언제 일어나는가’에 따라 네 가지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네 가지 해석방법은 과거주의, 미래주의, 역사주의, 상징주의 해석법입니다.

첫째, 과거주의 해석법은 요한계시록 예언이 전적으로 또는 주로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이나 주후 5세기 로마제국의 멸망을 통해 과거에 모두 일어났다고 보는 해석 방법입니다.

과거주의 해석법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당시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 상황과 로마 제국 상황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예언의 성취를 과거에 이미 다 이뤄진 것으로만 봄으로써, 요한계시록이 교회사 전체와 예수님의 재림과 이후 종말에 대한 이해를 약화시키는 단점이 있습니다.

둘째, 미래주의 해석법은 요한계시록 4-22장의 내용을 주로 미래, 즉 예수님의 재림과 재림 이후 일어날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미래주의 해석법은 역사적 전천년설적 미래주의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적 미래주의 해석에 따라 세부적 차이가 있지만, 요한계시록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종말에 대한 사건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려는 노력에 도움을 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일방적으로 미래의 종말론적 사건으로 한정함으로써, 요한계시록이 가지는 1세기 당시의 역사적 문맥이나 교회사 전체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키는 단점이 있습니다.

셋째, 역사주의 해석법은 요한계시록을 사도 요한 당시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의 교회사에서 연대기적으로 일어날 역사적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봅니다.

역사주의 해석법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교회사 전체 기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법을 주장하는 사람들마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교회사의 특정 사건과 일치시키는 데 있어서 제각기 다르며, 교회사의 성취된 사건으로 보는 사건들 또한 서구 교회 중심이라는 데 단점이 있습니다.

넷째, 상징주의 해석은 요한계시록을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하나님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 선과 악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책으로 봅니다.

상징주의 해석은 요한이 사용한 상징들을 과거나 미래의 특정 역사적 사건들과 동일시하지 않고 영적 원리를 분명히 말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과거주의나 역사주의나 미래주의 해석의 장점이 상징주의 해석의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네 가지 해석법은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많은 복음주의 요한계시록 해석자들은 네 가지 해석법 중 장점을 종합적으로 취하는 절충주의 해석 또는 종합적 해석법을 취합니다.

이런 종합적 해석법에도 과거주의와 미래주의 해석의 종합, 과거주의와 상징주의의 종합, 미래주의와 상징주의의 종합, 과거주의와 미래주의와 상징주의 종합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저는 이 가운데 상징주의를 가장 기본으로 하면서 1세기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중요시하는 과거주의와, 예수님의 재림과 재림 이후의 종말적 사건을 중요시하는 미래주의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 시대 전체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키는 역사주의의 장점을 모두 취하는 종합적 해석법을 견지합니다. 저와 같은 요한계시록 해석법을 ‘구속사적 상징주의 해석법’이라 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묵시와 예언과 편지 복합 장르

구약 성경, 요한계시록 상징 이해하는 열쇠

그리스-로마 역사·문화·종교 배경도 반영돼

-요한계시록에는 상징적인 단어들이 적지 않습니다. 평신도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글의 성격에 따라, 책의 성격에 따라 해석 방식은 달라집니다. 각 장르는 일반적인 해석 원리가 있는 동시에, 장르의 성격에 맞는 구체적 해석 원리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도입 부분을 통해 살펴보면, 한 종류의 장르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세 종류의 장르에 다 해당되는 매우 특이한 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요한계시록은 묵시(1:1), 예언(1:3, 22:6-7, 22:18-19), 편지(1:4-6)라는 복합 장르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묵시장르적 특성 때문에 요한계시록에는 많은 환상이 등장합니다. 일곱 별, 일곱 촛대,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어린양, 일곱 뿔과 일곱 눈, 두루마리 책, 향이 가득한 금 대접, 흰 옷을 입은 큰 무리,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십사만 사천 명,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 불 못 등 많은 상징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이런 상징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첫째,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이해하려면 구약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은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신약 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 구약을 많이 언급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들을 이해하려면, 기본적으로 구약 성경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 같은 예언서와 창세기, 출애굽기, 시편 등을 잘 알아야 합니다.

또한 구약 성경을 직접 인용하지 않더라도, 요한계시록에는 간접 인용, 즉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단어나 어구, 사건이나 인물, 주제에 대한 수많은 암시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구약 성경의 이런 암시가 얼마나 나오는가 하는 것은 195개, 226개, 278개, 394개, 455개, 493개, 635개, 1,000개 등, 적게는 2백여개에서 많게는 1천여개까지 학자마다 계산이 다양합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모든 장마다 거의 모든 구절마다 구약 성경이 흠뻑 배어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이해하려면 구약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구약 성경에 대한 지식을 깊고 넓게 가져야 합니다.

둘째, 요한계시록의 많은 상징은 1세기 당시의 그리스-로마 문화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잘 이해하려면 1세기 당시 로마제국의 역사적 배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천년왕국 견해 차이별로 종말 관련 학설 달라

1. 역사적 전천년설: 교회 환난 후 예수 재림, 이후 천년왕국

2.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7년 환난 후 예수 재림, 이후 천년왕국

3. 후천년설: 황금시대인 천년왕국 이후 예수 재림

4. 무천년설: 재림 전후 천년왕국 없어, 상징으로 이해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등 종말에 대한 학설이 다양한데, 각 학설의 장단점을 설명해 주신다면.

“종말론과 관련해 기독교인들 사이에 가장 큰 견해의 차이는 ‘천년왕국’에 있습니다. ‘천년왕국’이란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성도들과 더불어 천 년 동안 통치하는 나라 또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통치하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이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에 있어 역사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이라고 불리는 네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교회의 환난 이후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지상에 문자적인 천년왕국이 있다는 견해입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교회의 환난 이전 성도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이 있으며, 7년 뒤에 그리스도가 성도들과 함께 지상 재림을 하여 문자적으로 천 년 동안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견해입니다.

후천년설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황금 시대인 천년왕국의 끝에 재림하신다는 견해입니다. 후천년주의자에 따라 황금시대인 이 ‘천 년’의 기간을 문자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황금 시대 동안 기독교의 영향력은 세상의 평화와 공의와 경제적인 번영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황금시대가 도래합니다.

무천년설은 예수님의 재림 전이나 후에도 지상에 문자적인 천년왕국이 없다는 견해입니다. 즉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의 천 년을 상징으로 보며, 예수님의 초림(승천)과 재림 사이의 교회 시대의 전 기간에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어 하늘로 간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까지 천상에서 통치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어떤 학설이든 최후 심판, 영원한 지옥, 부활과 천국 공통점

천년왕국 이해 다르다 해서 서로 ‘이단’이라 비난해선 안돼

이런 네 가지 해석 방법에는 차이도 있지만, 기본적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천년왕국설을 믿든지, 궁극적으로 신자와 불신자가 모두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을 받고, 불신자는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고, 신자는 영원한 천국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적 종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육체적인 부활, 최후의 심판, 영원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사실들을 믿기 때문에, 천년왕국의 시기와 장소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해서 서로 이단으로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는 다르지만,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로 인정해야 합니다.”

RnR 미니스트리의 요한계시록 강좌 수강료는 첫 수강자 기준 10만원이며, 미니스트리에서 이미 1과목 이상 수강한 사람이나 신학생들의 경우 8만원으로 할인된다. 온라인 수강도 가능하다.

문의: 02-337-4645, www.rnrminist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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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Revelation)


1. 배경

저자는 본문 자체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다(계 1:4, 9, 22:8).
계시록은 교회가 로마에 의하여 박해를 받아 황제 숭배를 강요당하던 시기에 기록되었다.

계시록의 문체가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의 세 서신들의 것과 다른 것이 있지만 묵시 문학의 고유한 성격이나 계시가 환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죄수로 있던 요한의 환경 등을 고려해 볼 때 문체의 차이는 쉽게 이해된다.




2. 주제표

초점

서론

심판

영광

구분

일곱
교회

일곱

일곱 

나팔

일곱 

징조

일곱 

재앙

일곱 

멸망

새로운 것
일곱 가지

본문

1-3장

 4-6장

 7-9장

10-13장

14-16장

17-19장

 20-22장

주제

하늘의 환상심판관

땅의 환란
심판의 세 주기

오심
새 하늘 새 땅

장소

밧모섬

시간

A.D 95-96년경


2-1. 인의 순서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1

2

3

4

5

6

 

재앙의 종류

 

흰말

 

복음운동

 

붉은말       전쟁

 

검은말  

기근


청황색말

흉년과 온역


순교자의 무리


일월성신의

 변화

1

2

3

4

5

6

 

피석인 우박과

 

큰 불붙은

산을 

바다에

 

떨어진 별이

물샘에 덮힘

 

일월성신이 

침을 받음

 

황충의 

재앙

 

유브라데강의 

전쟁

1

2

3

4

5

6

7

 

독한 

종기

 

바다가 

피가 

 

물근원이 

피가 

 

짐승의 

보좌를 

 

태양의 

권세


아마겟돈전쟁


공기에 

대접을 

쏟음

 

 

 

4/1

 

 

3/1

3/1

3/1

 

 

3/1

 

 

 

 

 

 

 







역사적 배경표

교회

예루살렘 및
사마리아 복음화
(행 1-12장)

바울의 해외선교 시작

교회들이 에베소 주변에 설립
(행 18:23-20:38)

로마화재

예루살렘 멸망

박해기간

요한
밧모섬
유배 

A.D.

14-30

37-41

47-52

54-56

64

69-70

-79

-81

-95


한계시록 기록


















토,




파시안베스








 

요한 것을 제외한 모든
신약이 이 때 기록됨

 

요한에 의한 복음서신 기록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

정확한 이동 연대는
알려지지 않음

소아시아에서 새롭게 주재하며 사역함


3. 내용과 주요 사상

1장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

2, 3장은 지금 있는 일들

4-22장은 장차 될 일들을 예언한 것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계시의 중심이다(계 1:1).
계시록은 세상의 악한 음모가 계속 반복 되고 고조될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사단은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려는 주의 뜻에 대항하고 있다.

이 오랜 싸움은 영광스런 백보좌 앞에서 마지막 심판, 새 예루살렘의 도래, 영원한 시작으로 끝이 난다.

부활하시고 영광을 얻으신 주님은 땅위에 있는 교회들을 보살피신다(2, 3장).
주는 예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시며 죽임을 당하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어린양이시다(4, 5장).
장차 땅 위에 임할 칠년 대 환난의 심판도 어린 양의 진노의 표현이다(계 6:16-17).
그리고 주의 재림(계 19:11-21).
성도와 함께 천 년 간 통치 하실 일( 계 20장)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이 계속 이어진다(계 21-22장)

내용분해(대분류)
1. 머리말 1:1-8
2. 과거의 일 1:9-23
3. 현재의 일 각 교회에게 2:1-3:22
4. 미래의 일 4:1-22:5
5. 끝맺는 말 22:6-21

내용분해(소분류)
1. 그리스도의 계시 1:2
2. 기록 목적 1:4
3. 일곱 교회에 인사 1:9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계2:1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  계2:1    에베소 교회에  계2:8  서머나 교회에  계2:12 버가모 교회에  계2:18     두아디라 교회에  계3:1       사데 교회에  계3:7    빌라델비아 교회에  계3:14 라오디게아 교회에○계4:1     하늘 나라의 보좌○계5:1         인봉된 책을 취한 어린양  계5:1      두루마리와 어린 양  계5:7    어린양이 책을 취하다○계6:1      일곱 인의 재앙  계6:1        첫째 인(흰 말을 탄 정복자)  계6:3        둘째 인(전쟁의 적색 말)  계6:5      셋째 인(기근의 검은 말)  계6:7    넷째 인(사망의 청황색 말)  계6:9    다섯째 인(순교자들의 호소)(  계6:12  여섯째 인(어린양의 진노)○계7:1     인침받은 십사만 사천명○계8:1    일곱 번째 인(금 향로)  계8:7  첫째 나팔 재앙  계8:8        둘째 나팔 재앙  계8:10  셋째 나팔 재앙  계8:12       넷째 나팔 재앙  계9:1        다섯째 나팔 재앙  계9:13 여섯째 나팔 재앙○계10:1     천사의 작은 책○계11:1        두 증인○계11:15      일곱 번째 나팔 재앙○계12:1  영적 전쟁에 대한 이상  계12:1    해를 입은 여자  계12:7       하늘에의 전쟁  계12:13       땅 위의 전쟁○계13:1     사악한 짐승에 대한 이상  계13:1     바다에서 나온 짐승  계13:11       땅에서 나온 짐승○계14:1     핍박받는 성도들에 대한 이상  계14:1   어린양과 십사만 사천명  계14:6      세 천사들에 의한 대심판 예고  계14:14  추수 비유○계15:1     일곱 재앙을 준비하는 일곱 천사  계15:1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  계15:5       일곱 대접의 심판을 위한 준비○계16:1 일곱 대접의 재앙이 시작됨○계17:1 붉은 짐승을 탄 음녀가 받을 심판○계18:1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  계18:1       바벨론의 멸망이 선언됨  계18:9      베벨론에 대한 조가  계18:21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이 선언됨○계19:1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계19:1   하나님 찬양  계19:6  어린양의 혼인 잔치  계19:11  백마를 탄 분  계19:17 아마겟돈 전쟁○계20:1 천년 왕국과 최후 심판에 대한 이상  계20:1       천년 왕국   계20:7    곡과 마곡의 전쟁  계20:11    하나님의 보좌에 의한 최후의 심판○계21:1 새 하늘과 땅 새 예루살렘  계21:1    새 하늘과 새 땅  계21:9 새 예루살렘○계22:1  신실한 하나님의 계시  계22:1 생명의 물과 생명 나무  계22:6    예언의 신실성과 긴박성  계22:8      참된 경배의 대상  계22:21 모든 자들에게 축복 


1. 요한 계시록의 시대적인 배경

요한계시록은 요한 당시에 소아시아에 퍼져있던 일곱 교회에 보낸 회람 서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1세기를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레니우스는 요한계시록이 81-96년에 있었던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말기에 쓰여 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도미티안은 "황제숭배"를 이슈로 제기한 최초의 황제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을 가장 먼저 박해한 황제는 네로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로마 시의 화재범으로 몰아 사나운 짐승과 불에 태우고, 참수형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네로 뒤에도 몇 몇 황제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박해는 로마에 인접한 지역에서만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로마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사람들은 로마 공화정 말기와 로마 제국의 초기에 "로마의 정신"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가 세계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하고 이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로마의 정신"은 점차적으로 "황제의 인격"을 숭배하는 곳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로마 제국은 영국에서 유프라테스, 그리고 다뉴브 강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이 광대한 영토를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해서 "가이사 숭배 사상" 즉 "황제숭배 사상"을 이용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로마 제국에 속한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민족의 종교를 없애버리고 황제숭배를 절대 신앙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단지 로마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황제를 중심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당국은 1년에 한 번씩만 황제를 위해 소량의 향을 태우고 "가이사는 주님이다!" 라고 말만 하면 다른 종교를 갖는 것을 묵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제국에 속한 사람들은 이와 같은 황제 숭배 예식을 실시한 후에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 숭배가 아시아 지역에 파급되면서 유일신을 섬기는 교회와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만 주님이라고 고백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황제라 해도 인간을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되자 로마 당국은 그때부터 기독교인들을 불충한 백성으로 보게 되었으며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인들을 요주의 대상으로 지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황제들에게 조직적인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를 주라 부르기를 거부하다가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순교자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만 갔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가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로마 당국의 질풍과 같은 대 박해를 견디기는 어려운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교회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한 마음으로 주님께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들은 세속화와 사치와 타락에 빠져서 영적인 힘을 완전히 상실한 무능력한 교회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들은 한쪽으로는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세상과 거짓 종교와 타협하여 적당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점차적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고 영적, 윤리적으로 타락해갔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가던 1세기의 아시아 교회들에게 요한을 통해서 이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당시의 교회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붙들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모습을 통해서 세상의 박해가 아무리 강해도 그들이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박해 앞에서 방황하는 교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의 주관자이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황제로 인해 당황하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교회를 박해하는 황제의 배후에 사단이 조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모습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싸움이 영적인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서 결국 최후에 사단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도들에게 승리의 확신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을 향해서 세상이나 거짓 교훈에 타협하지 말고 계속해서 정결한 신앙을 지키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첫 사랑을 상실하고, 윤리적 영적으로 부패해 가던 당시의 교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였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 이러한 부패 요소들과 싸워 이길 것을 권면하셨던 것입니다.

2. 요한계시록의 해석 방법

  그러면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동안 요한 계시록을 해석해 온 방법을 나누어보면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과거주의 학파의 해석(The preter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첫 번째 방법은 요한 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요한이 살던 1세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과거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이 이미 요한이 살던 1세기에 다 성취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 계시의 말씀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말한 천사의 말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들은 이 예언들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기 때문에 요한이 살던 1세기에 모두 다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1세기 당시의 교회와 로마 당국과의 싸움에서 궁극적으로 교회가 승리할 것을 (상징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과거주의적 해석 방법은 당시 상황을 살펴볼 때에 매우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이미 과거에 다 성취된 것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내용을 1세기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해석하면 오늘을 사는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이란 말을 요한 당시로 국한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속히"라는 말은 "반드시"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 16:20, 눅 18:7-8 참조). 그러므로 이 말은 주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과거 1세기 뿐 아니라 모든 시대를 사는 성도들을 위해서도 요긴한 말씀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현재주의(역사주의) 학파의 해석(The historic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두 번째 방법은 계시록에 나오는 예언을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시작해서 재림할 때까지 일어나는 모든 사건으로 보는 방법입니다. 학자들은 이 방법을 '현재주의' 또는 '역사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사건들을 모두 다 현재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연결시키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종종 계시록의 내용을 억지로 역사 사건에 뜯어 맞추는 실수를 범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현재 역사 사건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재앙을 로마를 멸망시킨 야만족이나 모슬렘의 침입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천사가 요한에게 준 작은 책을 루터나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세력을 로마 카톨릭으로 보고, 짐승의 멸망을 로마 카톨릭의 멸망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계시록을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큰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억지로 현실에 적용시키다가 실수하게 되는 단점도 있습니다.

3) 미래주의 학파의 해석(The futur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세 번째 방법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역사의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학자들은 이 사람들이 계시록의 내용을 먼 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 견해를 '미래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초대교회-주님의 재림 때까지 있을 모든 교회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4장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역사의 마지막 때(주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7년 대 환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도 몇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책의 내용이 먼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라면 이 책은 요한 당시에 박해를 받던 성도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주님께서 당시 교회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들을 요한을 통해서 편지로 써주셨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당장 로마의 칼날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중동전쟁의 위협이나 E. C. 공동체의 출현 같은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요한 계시록의 내용이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은 다소 무리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상징주의 학파(영적 해석 학파)의 해석(The allegorical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네 번째 방법은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영적(상징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은 어느 시대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원리를 상징을 통해서  기록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 견해를 "영적인 해석"(또는 "상징주의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계시록에서 선(교회)과 악(사단)의 전쟁 속에서 선(교회)이 승리하는 보편적인 신앙의 원리들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원리는 보편적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단점은 사람들이 성경을 지나치게 자기 주관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5) 그러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종합적 해석)

우리는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네 가지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이러한 네 가지 해석 방법은 모두 다 그 나름대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방법들은 단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요한계시록을 해석해야 합니까? 우리는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방법의 장점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단점을 피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종합형" 또는 네 가지 방법의 "절충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다음의 사항들에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메시지가 요한 당시의 1세기의 교회들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그 내용이 요한이 살던 1세기의 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 지를 충분히 고려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는 그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교회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과거주의자들의 견해를 참고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메시지들이 1차적으로 1세기 교회를 위해 쓴 것이지만, 동시에 이 메시지는 모든 시대의 교회에도 적용되는 메시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1세기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내용을 해석할 때에 전시대를 걸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 그리고 복음과 거짓 종교사이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영적, 또는 상징주의의 견해도 참조하여 해석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한 가지 예언이 두 개 이상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이러한 예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그 당시에 이사야의 아내가 낳은 아들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예언은 처녀 마리아가 낳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이사야의 아들은 모형이었고, 마리아가 낳은 예수 그리스도는 원형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가지 예언이 두 가지 사건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묘사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도 시간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건을 한 사건 안에서 동시에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원근 통시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로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도 묵시적인 예언서이기 때문에 이러한 "원근통시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짐승이 나타나는데, 이 짐승은 당시 교회를 박해하던 로마의 황제, 또는 로마제국에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마지막에 나타날 최후의 적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가지 예언이 두 가지 이상의 사건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1세기의 사건인 동시에 현재와 미래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역시 현재주의나 미래주의의 견해도 참고하게 될 것입니다.


3. 묵시문학과 요한 계시록

 1)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학의 유사점

  우리가 계시록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 구약 중간기에 유행했던 묵시사상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계시록이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고 또 내용상으로도 그들과 흡사한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Revelation), 또는 '묵시'(Apocalypse)라는 말은 '감취었던 것이 드러난 것'(unveiling)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연극을 시작할 때에 막이 올려지면 그 뒤에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묵시'란 말은 주전 2세기와 주 후 1세기 사이에 씌여진 유대 종교 서적들에 붙여진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책들을 '묵시문서' 또는 단순히 '묵시'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묵시문학 속에는 강력한 이방민족들 사이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이 느껴야 했던 민족적인 위기의식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묵시문학은 소수 민족아 당해야만 하는 핍박과 착취에 대한 내용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묵시 문학은 억압받는 민족의 원한을 갚고 그들을 고통에서 구원해 줄 메시야에 대한 희망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주권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현재에는 악이 득세하고 의인들이 고난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개선될 것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항상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천재지변을 통해 역사에 개입하시고 악을 제거하실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의 결말은 항상 궁극적으로 선이 승리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됩니다. 이러한 묵시 문학은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의 통치를 받을 때마다 항상 주어졌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묵시문학을 통해서 계속되는 이방 세력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이 바로 이러한 묵시 문헌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책들을 통해서 이방 민족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는 자신의 백성이나 교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일시적으로 성도들과 교회가 악한 세력들에 의해 고난을 받으나, 결국에는 메시야를 통해 악한 세력들을 심판 받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마침내 악이 멸망하고 평화가 깃드는 영원한 세계가 임할 것이라는 소망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의 특징은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밧모섬에 있는 요한에게 전해주실 계시를 매우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전달해 주셨습니다. 계시록에는 행동과 직접적인 말씀과, 극적인 용어로 표현된 것과, 그리고 여러 가지 상징과 형상들을 통하여 전달된 계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그림이나 드라마, 그리고 영상 등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에 익숙해졌습니다. 이러한 그림이나 드라마, 또는 영상을 통한 상징들은 저자의 의도를 전달하는데 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록에서 바로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달해 주신 것도 이러한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계시록의 언어는 현대인들에게 더 익숙한 언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계시록을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들을 짐승이나 뿔 등과 같은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짐승들은 그 당시 통치자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요한이 이러한 상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의 통치자들의 멸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당시 교회의 독자들은 계시록에서 사용된 어휘나 상징에 익숙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시록에 나타난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와 멀리 떨어져서 태어난 우리들은 이 책에 사용된 상징이나 어휘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시록을 이해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 요한계시록과 묵시 문학의 차이점

  그러나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학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들이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주로 저자들의 이름을 숨기고 과거의 유명한 사람들(에녹이나 에스라와 같은)이 이름을 빌려서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사도 요한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사변적인데 관심이 있으며, 세상의 종말의 때와 징조와 최후의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호기심을 채우기보다는, 당시의 대 박해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요한은 종말의 시기에 관해서는 단순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22:20).  또한 요한계시록은 다른 묵시문헌들과는 달리 사변적인 일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읽거나 듣고, 이 예언에 응답하여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윤리적인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묵시문헌의 요소를 배려하면서도 묵시문헌과 동일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4. 저자 문제


그러면 요한 계시록을 쓴 저자는 누구일까요? 여러분은 "그거야 당연히 사도 요한이 아닙니까?" 라고 대답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요한이 계시록을 썼다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합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①. 요한 계시록은 너무나 많은 히브리적 표현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문법에 있어서도 요한복음이나 요한 서신과 그 내용이 많이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②. 사도 요한이 아닌 다른 요한이 본서를 썼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③. 나이가 80이 된 사도 요한이 이러한 계시를 받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서를 누가 기록했는가에 대한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가 전통적으로 계시록의 저자를 요한으로 간주한 이상, 결정적인 반대 증거가 없는 한 이 견해를 따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저자는 (계 1:1)에서 자신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소개했습니다(1:1, 4).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며(1:1), 예언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22:19). 그는 당시 성도들의 환난에 함께 참여한 자였으며(1:9), 예수를 믿는 신앙 때문에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었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를 받고 이 편지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1:9). 또한 그는 당시에 서 아시아의 도시들에 대해서도 익숙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도시들은 요한이 유배당했던 섬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도시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이 책의 저자로 가장 적합한 사람은 12사도 중 하나였던 사도 요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 외에도 요한복음과 세 편의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요한계시록 개요 

*요한계시록 주제 : 예수님의 재림

*요한계시록 중심 구절 :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2:20).

-------------------------------------------------------------가. 1-3장 7교회에 보낸 7편지들

나. 4-8:1 7가지의 인들

다. 8:2-11:19 7가지의 나팔들

라. 12-14:20 7가지의 상징적인 역사들

마. 15-16:21 7가지의 대접의 심판

바. 17:1-18:24 7가지의 바벨론의 심판 메세지

사. 19-22장 7가지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 들

-------------------------------------------------------------가. 7교회에 보낸 7편지들(1-3장)

0. 서론: 편지들의 출처(1:1-20)

1. 에베소 교회(2:1-7)

2. 서머나 교회(2:8-11)

3. 버가모 교회(2:12-17)

4. 두아디라 교회(2:18-29)

5. 사데 교회(3:1-6)

6. 빌라델피아 교회 (3:7-13)

7. 라오디게아 교회 (3:14-22) 

나. 7가지의 인들(4:1-8:1)

0. 서론: 인들의 근원(4:1-5:15)

1. 흰 말(6:1-2)

2. 붉은 말(6:3-4)

3. 검은 말(6:5-6)

4. 청황색 말(6:7-8)

5. 제단 아래 죽음 당한 영혼(6:9-11)

6. 우주적 대 혼돈(6:12-17)과 이스라엘의 인 맞은 자, 144,000(7:1-7)

7. 침묵(8:1) 

다. 7가지의 나팔들(8:2-11:19)

0. 서론: 재앙의 근원들(8:2-6)

1. 땅의 재앙(8:7)

2. 바다의 재앙(8:8-9)

3. 강의 재앙(8:10-11)

4. 하늘의 재앙(8:12)

5. 황충의 재앙(8:13; 9:1-12)

6. 동쪽에서 나타난 군대(9:13-21)-증인들(10:1-11:14)

7. 하나님의 통치(11:15-19) 


라. 7가지의 상징적인 역사들(12:1-14:20)

0. 서론: 두 세력의 나타남(12:1-6)

1. 용(12:7-12)

2. 여자(12:13-17)

3. 바다의 짐승(13:1-10)

4. 거짓 선지자(13:11-18)

5. 144,000(14:1-5)

6. 천사의 외침(14:6-11)

약속(14:12-13)

7. 추수(14:14-20) 

마. 7가지의 대접의 심판들(15-16장)

0. 서론: 재앙의 출처(15:1-16:1)

1. 땅의 재앙(16:2)

2. 바다의 재앙(16:3)

3. 강의 재앙(16:4-7)

4. 태양의 재앙(16:8-9)

5. 짐승의 보좌(16:10-11)

6. 동쪽의 군사(16:12-16)

7. 하나님의 통치: 도시의 심판(16:17-21) 

바. 7가지의 바벨론의 심판 메세지(17-18장)

0. 서론: 심판의 목적(17:1-6)

1. 천사의 해석(17:7-18)

2. 천사의 심판의 공포(18:1-3)

3. 하늘의 음성(18:4-8)

4. 땅의 왕들의 애통(18:9-10)

5. 땅의 상고들의 애통(18:11-17)

6. 땅의 선장들의 애통(18:18-19)

7. 천사의 마지막 심판의 공포(18:20-24) 

사. 7가지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19-22)

1. 마지막의 축하(19:1-10)-

2. 마지막의 전쟁(19:11-21)

3. 마지막의 악의 소멸(20:1-10)

4. 마지막 심판(20:11-15)

5. 마지막(새)하늘과 땅(21:1-8)

6. 마지막 도시(21:9-27)

7. 마지막 천국(22:1-5)

0 결론: 마지막의 격려(22:6-21) 





내용 요약 

1장 계시의 근원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는 요한이 증거한다(2). 말씀에 대한 약속(3)으로 일곱 교회에 주어지는데(4) 그의 영광을 찬양한다(5-6). 그는 재림하시며(7) 처음과 나중이시다(8). 요한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고" 1)말씀과 2)예수증거를 위해 밧모섬에 있다가(9) 주의 날에 큰 음성으로(10) 일곱 교회에 편지를 적는다(11). 일곱 촛대에(12) 인자같은 이가 금띠와(13), 흰 양털의 머리, 불꽃같은 눈(14), 단련한 주석같은 발, 물소리 같은 목소리(15), 오른손에 일곱별, 입에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해같이 빛나는 얼굴(16) 앞에 요한은 엎드린다(17). (이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신(18) 분(예수님)으로서 요한이 본 것을(19) 기록하시기 원하신다(20). 

2-3장 7교회에 대한 편지 7교회에 편지하여-

교회

칭 찬

책망 및 권면

약 속

1. 에베소 교회(2:1-7) 

수고와 인내, 악한 자를 용납지 않고, 거짓된 것을 드러 냄(2-3)

처음사랑을 버림(4)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짐(5-6)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이(1)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함(7)

2. 서머나 교회

(2:8-11)

환난과 궁핍(9)을 받았으나 실상은 부요한 자임

책망은 없음

환난속에서 죽도록 충성하기를 원하심(10)

처음과 나중이시고, 죽었다 살아나신 이(8)가 생명의 면류관(10)을 주심

3. 버가모 교회

(2:12-17)

내 이름을 굳게 잡고 죽임을 당하여도 믿음을 져버리지 않음(13)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킴(14-15)

회개 하라(16)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 신 이(12)가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17)을 주심

4. 두아디라 교회

(2:18-29)

사랑, 믿음, 섬김, 인내가 더 많아 짐(19)

이세벨을 용납, 행음(20-24).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25)

눈이 불꽃, 발이 주석같은 이(18)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철장, 새벽별

5. 사데 교회(3:1-6)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명이 있음(4)

살았다 하나 죽은 자(2)굳게하라, 회개하라(3-4)

일곱 영과 별을 가지신 이(1)가 흰 옷과 생명책(5)에 기록

6. 빌라델피아 교회

(3:7-13)

적은 능력으로도 말씀을 지키고 이름을 배반치 않음(8)

책망은 없음

시험의 때를 면케 하고 면류관을 ꢘ지 못하게 하라(10-11)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가(7) 성전의 기둥(12)이 되게 하심.

7. 라오디게아 교회

(3:14-22)

칭찬은 없음 

미지근함(15-16)과 영적 자만(착각)과 자랑(18).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19)

아멘, 충성되고 참된 증인, 창조의 근본이신 이

(14)가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심(21).

하여 칭찬과 또한 책망과 권면, 또한 약속의 말씀을 각각 주셨다. 

4:1-8::1 7가지의 인들 

4장 하늘의 보좌 광경; 하나님의 보좌(1-7), 네 생물의 찬양(8-9), 24장로의 찬양

(사도 요한은) 환상으로 올라 가(1) 하늘 보좌를 보니(2) 앉으신 이는 벽옥과 홍보석같다(3). 보좌에는 24장로들이 흰 옷과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고(4) 일곱 영이 계시다(5). 보좌 앞에는 네 생물이 있고(6)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같고, 여섯날개로 거룩을 찬송드린다(7-8). 그리고 장로들도 돌린다(9-11). 

5장 일곱인으로 봉한 책을 떼시는 예수님. ; 합당한 어린양(1-5), 책을 취하시는 분(6-8),

24장로 찬양(9-10), 천사들과 만물의 찬양(11-14)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이 있는데(1) 책을 펴고 인을 떼기 합당한 자가 없다(2-3). 이에 내가 우니(4), 장로 중에서 "다윗의 뿌리"가 떼시리라 한다(5). 인을 뗄 어린양이 책을 취하고(6-7) 금대접을(=성도들의 기도) 24장로가 (드린다)(8). 새노래를 천천 만만 천사가 부르고(9-11),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께, 1)능력, 2)부, 3)지혜, 4)힘, 5)존귀, 6)영광, 7)찬송을 드리고(12) 모든 만물도 찬송, 존귀, 영광, 능력을 돌리니(13) 네 생물은 아멘, 장로들은 경배한다(14). 

6-7장 7가지의 인

7가지 인

구절

나타난 현상

의 미

1. 첫째 인

1-2절

흰 말이 있고, 탄 자가 활을 가지고, 면류관을

받고 이기려 함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성도.

2. 둘째 인

3-4절

붉은 말이 허락을 받아 화평을 제하고, 죽이게 하고 큰 칼을 받는다

전쟁의 시작 (마24:7; 단 7:21)

3. 셋째 인

5-6절

검은 말이 있고, 탄 자가 저울을 가졌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보리 석되로다"

기근의 시작(렘 5:10,

참] 레 26:14-39)

4. 넷째 인

7-8절

청황색의 말과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따른다. 땅 사분의 일을 검, 흉년, 사망으로 죽인다

질병, 온역의 시작

(눅 21:10)

5. 다섯째

9-11절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신원을 간구하며, 흰 두루마기로 수가 차기 까지 기다리게 한다.

짐승이 주는 환난 시작과 성도들의 인내

6. 여섯째

12-17절

큰 지진.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고, 별이 떨어지고, 산과 섬이 옮기우고, 땅의 임금들은 숨고 어린양의 진노에 숨을 수 없다 한다.

주의 날의 심판 (마 24:29-30)

이 일 후에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간다(7장)

7. 일곱째

8:1

 

 

7장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 감

네 천사가 네 모퉁에 바람을 잡아 불지 못하게 하고(1), 외쳐(2) 하나님의 종을 인치기 까지 해하지 말라고 한다(3). 이 수는(4). 각 지파에 12000명씩 열 두 지파 총 144,000이다(5-8).-유다, 르우벤, 갓, 아셀, 납달리, 므낫세, 시므온, 레위,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베냐민. 셀 수 없는 큰 무리가(9) 외쳐 구원은 어린양에게 있다 한다(10). 모든 천사, 보좌 장로들, 네 생물도 경배하고(11) 영광돌린다(12). 이 흰 옷 입은 자는 누구인가(13)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로(14)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게 되며(15) 주리거나, 목마르거나, 해함 받지 않고(16),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여 눈물을 씻겨 주신다(17).

8:2-11:19 7가지의 나팔들 

8:2-5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았고(2) 다른 천사는 금 향로를 가지고 와(3) 하나님 앞으로 올라 간다(4). 향로를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 지진이 있다(5).

각 천사의 나팔

구절

나타난 현상과 특징들

1. 첫째 천사의 나팔

8:6-7

피썩인 우박, 불이 땅에 쏟아짐, 땅의 3분의 1이 타고 수목의 3분의 1도 탄다

2. 둘째 천사의 나팔

8:8-9

불 붙는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움. 바다의 3분의 1이 피가 됨. 바다에 생명 가진 3분의 1이 깨어 짐

3. 셋째 천사의 나팔

8:10-11

큰 별이 하늘에서 3분의 1이 떨어짐. 물들의 3분의 1이 쑥이 되고 사람이 죽음

4. 넷째 천사의 나팔

8:12-13

해, 달, 별 각 각 3분의 1이 어두워짐. 날의 3분의 1이 비침이 없고 밤도 그러함

5. 다섯째 천사의 나팔

9:1-11

땅에 떨어진 별하나가 무저갱 열쇠를 가짐(1) 무저갱을 여니 연기가 올라오고(2) 황충이 나옴(3) 인맞지 않은 사람만 해하고(4) 다섯달 동안 괴롭게 하심(5) 황충은-말같고, 금면류관 비슷한 것 쓰고,얼굴은 사람,머리는 여자 털,이는 사자, 철흉갑, 날개는 병거와 많은 말소리, 꼬리는 쏘는 살이 있음(7-10). 임금은 아바돈, 아볼루온이다(11). 첫째 화는 지난다(12).

6. 여섯째 천사의 나팔

9:13-21

금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고, 유브라데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13-14). 사람 3분의 1을 죽이기로 예비된 자(15). 마병수는 2억이다(16). 흉갑이 있고(17), 입에서 불, 연기, 유황이 나와 사람 3분의 1이 죽음(18). 이 재앙으로 죽지 않는 사람은 회개치 않거나 우상숭배함(20-21)

7. 일곱째 천사의 나팔

11:15-19

그리스도가 왕노릇하며(15), 24장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의 진노로 멸망시킬 때이다(17-18). 하늘의 성전이 열림

10장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의 사건

힘센 천사가(1) 펴인 책을 들고(2) 소리를 외치니 우리가 발하는 소리다(3-4). 바다와 땅을 밟고 선 천사는 외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룬다"(7)고 한다(5-7). 펴 놓인 책을 가지고(8) 먹어 보니 "입에는 꿀같이 나나 배에서는 쓰다"(9-10). 다시 예언하라고 하신다(11). 

11장 두 증인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를 척량하라 하신다(1) 성전 밖은 이방인에게 42달 짓밟히고(2) 두 증인이 1260일을 예언한다(3) 이는 주 앞에 두 감람나무와 촛대로(4) 해하려 하면 도리어 죽임을 당한다(5). 권세를 가지고 재앙으로 땅을 치며(6) 증거가 마칠 때 짐승이 무저갱에서 오라와 죽이니(7) 소돔 즉 애굽에 시체가 삼일 반 있고(8-9) 땅에 거하는 자들은 이를 인해 서로 좋아 하나(10) 다시 살아나서(11) 하늘로 올라 간다(12). 이 때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지진으로 7000명이 죽는다(14). 둘째 화는 지나간다(15). 

12장 용과 여자(=사단과 교회)

해를 입은 한 여자가 발아래 달이 있고,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쓰고(1), 해산하게 되고(2) 붉은 용은 머리 일곱이요 뿔이 열이며 일곱 면류관이 있다(3). 별 3분의 1을 땅에 던지고 여자의 아이를 삼키고자 하니(4) 아이는 만국을 다스릴 남자다(5). 여자는 도망하여 1260동안 숨는다(6). 하늘에 전쟁이 있어 미가엘과 그의 사자와 용과 그의 사자가 싸워(7) (용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어 쫓긴다(8-9). 하늘에 음성이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 자기 때가 얼마 못된 줄 알고 분내어 내려갔다"(10-12)고 한다. 용은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니(13)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숨어 양육받는다(14). 뱀이 물어 내어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되(15) 땅이 물을 삼키니(16) 여자는 분노하여 여자의 남은 자손(=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모래에 선다(17). 

13장 두 짐승들(적그리스도의 비밀)

뿔 열과 머리 일곱, 뿔에는 면류관과 머리에 "참람"된 이름이 있는 짐승이 나오는데(1) 표범 같고, 발은 곰, 입은 사자 같은데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준다.
(2) 머리 하나가 상처를 당하나 다시 낫고
(3)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고
(4) 42달 동한 일할 권세를 받고
(5) 짐승은 입을 벌려 하나님을 훼방하고
(6) 성도들과 싸워 이기며
(7)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한다
(8) 그러나 성도들은 인내와 믿음을 가진다
(10).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은 두 뿔로 용처럼 이야기 한다(11)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고
(12) 큰 이적을 행하고
(13)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든다
(14). 이 우상에게 경배치 않는 자는 다 죽이고
(15) 다 오른손과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6) 표없는 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짐승의 표다
(17). 이 수는 666이다(18). 

14장 곡식의 추수와 포도송이 추수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함께 144,000명이 있고(1) 하늘에서 물소리, 큰 뇌성 소리 같은 소리가 내 속에 거문고 소리로 들리며(2) 네 생물과 장로들은 새 노래를 부른다(3).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정절이 있는 여자로(4)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다(5). 천사가 여러 나라 족속과 방언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6)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그에게 영광돌림은 심판이 가까웠다. 그에게 경배하라"(7)고 말한다. 둘째 천사는 "바벨론 음행으로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가 무너졌다"(8)고 한다. 셋째 천사는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여 표를 받으면, 진노의 포도주을 마시고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아 쉼을 얻지 못한다"(9-11)고 한다. 성도들의 인내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 이다(12). 하늘에 음성이 나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13) 하시고 금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흰 구름 위에 앉으사, 예리한 낫을 가지고(14) 천사의 음성을 따라 곡식이 다 익어 낫을 휘둘러 거둔다(15-17). 또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이한 낫을 가진 자를 향하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하자 땅에 포도를 거두매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가 피가 나와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진다(18-20). 

15장 일곱 천사와 일곱 재앙의 금 대접.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마지막 재앙이다(1). 불이 섞인 유리 바다에 짐승과 그의 우상과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2) 노래를 부른다(3). "주의 길은 의롭고 참되시니 만국이 경배한다"고 한다(4-5). 하늘에 증거 장막 성전이 열리고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세마포와 가슴에 금띠를 띠고(6) 네 생물 중 하나가 진노의 금 대접 일곱을 천사에게 주고(7) 재앙을 마치기 까지 "성전에 들어 갈 자가 없다"고 한다(8).

16장 일곱 천사와 일곱 대접

일곱 

대접

성경구절

나타난 현상과 재앙

첫째 

16:2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에게 난다.

둘째 

16:3

바다가 죽은 자의 피같이 되고 바다 생물이 죽는다

셋째 

16:4-7

강과 물 근원이 피가 되고(4) 천사가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피를 마시게 함이 합당하다"(5-6).

심판하시는 이는 "참되고 의로우시도다"(7).

넷째 

16:8-9

해에 쏟으니 해가 불로 사람을 태우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회개하여 영광을 돌리지 않은 자들이다(8-9)

다섯째 

16:10-11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나라가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아파 자기 혀를 깨물고 종기로 인해 하나님을 훼방하고 회개치 않는다(10-11).

여섯째

16:12-16

유브라데 강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 동방의 왕의 길이 예비(12).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 입에서 나와(13)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전쟁을 위해 모은다(14).

히브리어로 세 영이 아마겟돈이라는 곳에 왕을 모은다(16).

일곱째

16:17-21

큰 음성이 나고 지진이 난다(17-18). 큰 성이 세 갈래로 나뉘고 무너져 큰 성 바벨론은 없어지고 사람들은 박재를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한다

17장 물위에 앉은 음녀

물위에 앉은 큰 음녀가 심판을 받음은(1) 땅의 임금과 거하는 자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함이다(2). 성령이 광야로 이끌다. 여자가 붉은 짐승을 타고 몸에는 참란된 이름과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3) 자주, 붉은 빛의 옷과 금, 보석, 진주로 꾸미고 금 잔과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4). 이마는 "비밀과 큰 바벨론,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기록되어 있다(5). 이 여자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를 취한다(6). 천사는 설명하여(7)이 여자는 무저갱에서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 한다(8).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며(9) 일곱 왕이며, 다섯은 망하였으나,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10). 이 짐승이 여덟째 왕이며(11), 열 뿔은 열 왕으로 짐승으로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에 받아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준다(12). 저희가 어린양과 싸우나(14)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이 이긴다. 음녀가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며(15)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망하게 한다(16). 말씀이 응하기 까지 짐승이 하나님 나라를 자기 뜻대로 한다(17). 여자는 땅의 임금을 다스리는 큰 성이다(18). 

18장 큰 성 바벨론의 멸망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와(1) "큰 성 바벨론은 무너졌다"고 한다(2).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고 상고들은 사치의 세력을 인해 치부하였다(3). 내 백성은 "거기서 나와 죄에 참예하지 말고 재앙을 받지 말라"(4).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고 불의를 기억하셔셔(5), 준 대로 행위대로 갚아 준다(6). 자신의 영화와 사치하여 "나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하나(7) 하루 동안에 재앙이 이르러 사망, 애통, 흉년으로 불이 살라 지고(8) 음행, 사치하던 왕들이 울고 안타까워한다(9-10). 땅의 상고들은 다시는 그 상품은 사지 않음으로 우는데(11) 이 것들은, 귀금속, 옷, 장식품, 고급향, 식품, 가축과 사람의 영혼들이다(12-13). 바벨론을 인하여 상고들은 울지만(14-19) 하늘의 성도, 사도, 선지자들은 신원하심으로 즐거워 한다(20). 바벨론은 바다에 던져 다시 보이지 않고 그 소리와 복술도 들리지 않는다(21-23). 죽음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성 중에 보였음이다(24).

19장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이 일 후에 허다한 무리의 음성이 나고(1)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그의 심판은 의로우신다"(2). 두 번째로 연기가 올라가고(3) 24장로와 네 생물이 경배하여(4) "하나님을 찬송하라"(5)라 한다. 큰 음성이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이 통치 하시며(6),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7) 아내는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성도의 행실"이다(8)라고 한다. 혼인 잔치에 청함 받은 자는 복이 있고(9),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신다(10). 백마를 탄 자는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며(11), 눈은 불꽃같고(12), 머리는 많은 면류관이 있고, 피 뿌린 옷은 입었는데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13). 하늘의 군대가 백마를 타고 따르며(14) 입에서 검이 나와 만국을 치며 철장으로 다스린다. 옷과 다리에 이름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다(16). 한 천사가 공중에 나와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고기를 먹으라" 하신다(17-18).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산 채로 유황 불붙는 못으로 던지운다(20)(19-21). 

20장 천년 왕국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와(1) 용(=옛 뱀, 마귀 사단)을 일천 년 동안 결박하고(2) 인봉하여 그 후에 잠시 놓인다(3). 앉은 자들은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다. 예수를 위해 순교한 자들과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표 받지 않는 자들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한다(4). 나머지 죽은 자들은 살지 못하니 첫째 부활이다(5). 첫째 부활에 천년동안 왕노릇하며(6), 천년 후 사단이 놓여(7) 땅의 사방 백성을 미혹하고 싸움을 붙여(8) 성도들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 불로 소멸하고(9)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에 던지운다(10). 흰 보좌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간데 없고(11) 죽은 자들이 그 보좌 앞에 서서 생명책대로 심판을 받는다(12).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13)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둘째 사망이다(14).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 운다(15). 

21장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땅과(1)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2). 하나님의 장막이 함께 있으매 "하나님과 백성은 함께 거한다"(3).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애통, 곡, 아픈 것은 사라진다(4).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생명수로 목마른 자에게 주신다(5-6). 이기는 자는 유업이 되나(7) 두려워 않고, 믿지 않고, 흉악한 자, 살인자, 행음자, 술객, 우상 숭배자, 거짓말 하는자는 불과 유황의 못에 참여한다(8). 일곱 대접을 담은 천사가 와 어린양 아내를 보여 주려고(9) 높은 성, 예루살렘이 보이니(10) 하나님의 영광과 벽옥같이 맑다(11). 성곽은 열 두문, 열 두 천사, 열 두지파의 이름이 있다(12). 동서남북 각 3문씩이고(13), 성은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초석에 있고(14), 말하는 자는 금 갈대를 가졌다(15). 성은 일만 이천 스다디온 장과 곽이다(16). 일백 사십 사 규빗이고(17), 성곽은 벽옥이며 정금으로 유리같다(18). 기초석은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홍마노, 홍보석, 황옥, 녹옥, 담황옥, 비취옥, 청옥, 자정(19-20)이며, 열 두문은 열 두 진주(21)다. 성안에는 성전이 없음은 전능하신 어린양이 성전이심이다(22). 해나 달이 비췸이 쓸데 없고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이 등이 되신다(23). 만국이 그 빛가운데 다니고(24) 문은 닫지 아니한다(25). 만국의 영광과 존귀로 들어오고(26), 속된 것이나 가증된 일,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들어오지 못한다(27). 







22장 생명수 강

생명수 강은 하나님 및 어린양의 보좌로 나서(1) 생명나무가 있고, 열 두 실과가 맺힌다(2). 저주가 없고, 보좌가 가운데 있어 그를 섬기고(3) 주 하나님이 영원히 왕노릇 하신다(4-5).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천사를 보내셨으니 말씀대로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6-7). 요한은 천사에게 경배하려 하자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한다(8-9). 예언의 말씀은 인봉하고(10), 불의한 자를 불의를 의로운 자는 의를 행하게 하라(11). 각 사람의 일한 대로 갚아 주시며(12) 시작과 나중이시며(13),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14). 개들과 술객, 행음자, 살인자, 우상 숭배자,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는 밖에 있다(15). 그리스도는 새벽별이시다(16).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여 목마른 자도 오라(17) 초대하시고 예언의 말씀에 추가나, 삭제를 하는 자는 참여함을 못 받는다(18-19). 진실로 예수는 속히 오시며(20) 은혜가 모든 자에게 있다(21). 

세상의 마지막 심판과 하나님의 새 창조

바벨론의 심판(17-18장)과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과 특히 천국이 소개(19-22장)되며 요한계시록은 마무리 된다. 

*요한 계시록을 이해하는 방법 중에 좋은 방법은 모든 7개의 구조로 크게 이해하고 각 7개의 단락으로 이해하면 쉽게된다. 

문제 1) 일곱교회에 주신 말씀을 현대교회에 적용시켜 보자?

힌트)각 교회의 당시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의 장점과 책망받은 것들을

공부해 보자 

문제 2) 요한계시록 전체적인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천국(4-22장까지 사건들)을 이해하여야 하겠는가? 예를 들어보자 



참고)1) 과거로만 해석하는 과거적 해석파, 2) 현재적인 것으로만 해석하는 현재적 해석파, 3) 미래적인 해석으로만 해석하는 미래적 해석파, 4)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영적인 상징으로만 해석하는 영적해석파등이 있다. 바른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주인 되심과(과거, 현재, 미래) 또한 그의 몸된 교회가 바벨론과 싸움에서 승리하여 영원한 천국에 동참하는 것이다(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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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수요기도회(2016-1-20) 계시록 자료 #.1


 요한계시록 전체 구조 도표

 

 

 

천상

나팔

 

삽입 설명

 

대접

 

삽입설명

천상

재림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곱 

 

인봉

 

 

 

 

인 

 

 


 

새 하

 


주제표

초점

서론

심판

영광

구분

일곱
교회

일곱

일곱 

나팔

일곱 

징조

일곱 

재앙

일곱 

멸망

새로운 것
일곱 가지

본문

1-3장

 4-6장

 7-9장

10-13장

14-16장

17-19장

 20-22장

주제

하늘의 환상심판관

땅의 환란
심판의 세 주기

오심
새 하늘 새 땅

장소

밧모섬

시간

A.D 95-96년경


내용과 주요 사상
- 이 책은 그리스도의 계시의 중심이다(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비교 /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계시의 내용은 속히 될 일과 장차 될 일을 동시에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에 속히 될 일과 장차 될 일을 정확하게 구분하며 읽어야만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다고 하겠다.

1장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

2, 3장 ; 지금 있는 일들

4-22장 ; 장차 될 일들을 예언

요한계시록에 대한 개론

요한계시록의 특징을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서신
둘째는 예언
셋째는 환상이라고 하겠습니다.

1. 서신(1:4-5, 22:21)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 캐논 무라토리(The Cannon Muratory)는 서간체로 쓰여 졌다.
- 찰스(Charles)

왜 서신이 필요한가?

방문 시에는 직접 설교를 통하여 가르칠 수 있었으나 방문 할 수 없는 경우 말씀을 전달하려고 서신을 이용하였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자신이 세웠던 교회들을 향하여 말씀을 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때마다 서신을 보냈다. 이때 서신은 읽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그대로 읽어주는 것으로 회중에게 전달되었다. 이것이 서신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보낸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은 편지와 같이 회중들에게 읽어주므로 그 내용이 그대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편지를 읽어준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려고 하므로 오히려 편지의 특징에서 벗어나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편지를 읽어야 할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교부시대가 시작되면서 읽고 해석하고 설교하므로 서신의 의미가 상실되었고 많은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2. 예언

①. 서신서이며 동시에 예언에 해당한다.
예언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을 받은 그대로 알려야 한다.

예를 들면 요나가 받은 예언은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는 말씀이었습니다(요나 1:2).
그러나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배표를 구하여 배에 올랐습니다(요나 1:3).
그러나 요나는 받은 예언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다시스로 떠났습니다. 예언을 외치지 못한 요나에게 닥쳐온 불행은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져졌고 다시 바다의 큰 물고기 뱃속에서부터 육지로 토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주어졌습니다. 요나가 받은 예언은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요나 3:4).

또 다른 예를 찾아본다면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예언은 불로 심판할 것이며 롯과 그의 가족들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는 해석을 하므로 그 자리에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②. 예언은 주로 익명으로 되었으나 계시록은 저자의 이름을 명확하게 소개한다.
③. 환상에 대한 예언(1:3, 22:7, 10, 18-19).
④. 예언의 말씀으로 잘 해석된 편지 형식으로 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회중에게 읽어주므로 가르침이 되는 말씀이었다.
⑤.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다(1:3).
유대인들이 믿지 않으므로 이방인 중심으로 구성된 교부 시대에 계시록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읽고 해석하고 설교를 하므로 마치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었다.

환상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환상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환상은 그림입니다. 그림 중에서도 정확하게 묘사하는 인물화 또는 정물화가 아니라 추상화에 속합니다. 추상화는 그림을 그린 사람이 아니면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추상화를 그린 사람의 의도와 설명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요한계시록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보여주신 계시라고 합니다.

잠언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 계시는 죄를 짓지 못하게 합니다.

에베소서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 계시는 통찰력을 제공합니다(하나님을 알게 한다).

3.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

①. 과거적 해석

1614년 예수회의 사제 알카이저(Alcazar)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개혁자들은 적그리스도가 교황일 것이라는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하였다. 이에 대하여 천주교회의 입장은 로마의 핍박으로 시작하여 콘스탄틴 황제 때 모두 성취되었다는 과거적 해석으로 대응하였다. 

②. 미래적 해석

1685년 예수회의 사제 프란시스 리베라(Fransis Rivera)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적그리스도가 교황이 아니라 과거적 사건이라고 천주교회가 해석하므로 개혁자들은 예언은 대부분 미래적 현상이 중심이기 때문에 잘못된 해석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교황이 아니라 미래에 나타날 어느 사람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개신교 학자 존 다비(John Darby)는 ‘장차 될 일’ 이란 구절을 근거로 미래적 해석원리로 삼았다(1:19). 이때부터 요한계시록의 해석 원리는 미래의 틀이 가장 좋은 해석의 원리라고 받아드렸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이란 해석이 소개되면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동조하여 스코필드(C Scofield)가 스코필드 성경에서 이 해석의 원리를 소개하면서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세대주의 해석 원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칠일 동안 하셨으므로 세상의 역사도 여기에 맞춰야 한다고 하여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되었다.

예를 들면 베드로후서 3장 8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하셨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에서 창조의 7일을 7천년으로 계산하여 여기에 모든 세상 역사를 맞추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2000년은 세상의 종말이 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유는 제임스 어셔 감독이 구약의 연대를 연구한 결과 4004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맞추므로 시한부 종말론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장림 사건(1992년 12월 28일 재림)이라고 하겠다.

대재앙을 당하지 않고 주님이 공중 재림할 때에 휴거한다는 매혹적인 해석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해석을 따르면 교회시대는 3장에서 끝나고 이 후에 성도들은 모두 휴거된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메시아닉 주이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의 예언에 따라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이때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③. 역사적 해석 - 문자적 해석

계시록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시까지의 역사에 대한 예언이라고 전제한다. 이 예언은 역사 속에서 일어날 교회에 대한 것과 함께 이방인을 심판하는 내용이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은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일어난다고 해석한다.
역사적 해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많은 충돌을 일으켰다.

일곱 인과 나팔과 대접은 순서대로 진행되어 일어난다고 한다. 

④. 상징적 해석 - 영적 측면을 강조하는 해석(무천년설)

왈부드(J Walvoord)는 상징적인 내용은 대부분 구체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징적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은 해석된 내용을 또다시 자기의 주관적인 해석을 한다.

예를 들면 천년왕국에서 역사적으로 천년은 없고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천년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을 따르면 신약시대 전체를 대환난 기간의 3년 반으로 계산하여 초림과 재림의 기간이 천년이라고 해석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이 제시한 것까지만 해석하고 성경에서 제시하지 않은 것은 억지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억지로 해석하려고 이것과  저것을 조합하여 맞추므로 더 혼란스럽고 이상한 교리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번 주간에 요한계시록을 읽어가며 ‘짐승’이란 단어를 잘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성경 전체에서 짐승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대략 249구절 입니다. 구약에서 201구절, 신약에서는 48구절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구절 수는 33구절입니다. 그만큼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이란 단어가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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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수요기도회(2016-1-27) 계시록 자료 #.2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받은 계시(환상)에 근거하여 기록한 예언서이며 동시에 서신서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을 회람서신이라고 합니다. 회람서신이란 일곱 교회에서 서신을 읽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편지를 읽을 때에 편지를 해석하지 않듯이 요한계시록은 읽기만 하면 이해가 가능하도록 편지를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들이 서로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편지를 읽기 보다는 해석하려고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으므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한편 예언이란 그 내용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예언을 해석하면 엉뚱한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계시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보여주신 것으로 그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짐승에 대한 이해

짐승

249구절

구약

201구절

신약

48구절

요한계시록

33구절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계시록 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요한계시록 17:11,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짐승은 여덟째 왕이라고 분명하게 해석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숫자의 의미

666 - 사람의 수
666에 대해서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과 암호라고 해석하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상징일 경우 이는 6이 100배, 10배, 1배 있는 것으로 완전한 불완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의 수, 세상적인 수, 마귀적인 수라 생각한다. 

암호일 경우 이를 한 인간의 암호로 보고 그 인간의 이름을 지칭하기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본다. 상징보다 암호가 본문의 맥락에 합당한 견해이다. 저자는 자신이 666을 한 인간의 수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66은 누구일까? 


1. 네로
2. 테이탄(헬라의 신화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거대한 신)

3. 로마(라틴)
4. 도미시안

네로를 포함한 모든 로마 황제들은 ‘카이사르’ 라고 하였다. 그래서 네로 황제를 의미하는 라틴어 “Nero Caesar”를 그리스어로 음역하면 “Nerōn Kaisar”가 된다. 이것을 다시 아람어로 음역하면 “נרון קסר”가 되는데, 이를 게마트리아 방식에 따라 숫자로 바꾸어 모두 더하면 그 값은 아래와 같이 666이 된다.

Resh(ר)

Samech (ס)

Qof(ק)

Noon(נ)

Vav(ו)

Resh(ר)

Noon(נ)

합계

200

60

100

50

6

200

50

666

무함마드

어떤 학자들은 그리스어 단어인 ‘Maometis’에서 짐승의 숫자가 발견된다고 주장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회칙 《Quia Maior》에서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를 계시록의 짐승과 동일시한 바 있었다. 라마의 주교 찰스 웜슬레이는 Maometis를 짐승의 숫자로 풀이한 대표적인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디미우스 지가베누스와 요안네스 조나라스게오르기오스 케드레노스 등의 그리스 역사학자들이 무함마드를 Maometis 또는 Moametis라고 불렀던 역사적 사실을 지적하면서[20][21] Maometis를 게마트리아 방식으로 아래와 같이 숫자로 풀이해보면 666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M

A

O

M

E

T

I

S

합계

40

1

70

40

5

300

10

200

666



마르틴 루터

루터파의 창시자로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도 이름이 666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종교개혁 시기에 프로테스탄트에서 교황과 로마 가톨릭교회를 원색적으로 비난하자 가톨릭 신학자 페트루스 본구스는 종교개혁의 주창자인 마르틴 루터의 이름이 짐승의 숫자인 666으로 산출된다면서 이를 루터가 바로 그리스도의 적임을 확증하는 증거로 내세웠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라틴어 문자에서 처음 아홉 문자는 1을 중복하고(1부터 9), 그다음 아홉 문자는 10을 중복하고(10부터 90), 나머지 네 문자는 100을 중복한다(100부터 400). 참고로 라틴어 문자는 영어 알파벳과는 달리 J가 I와 같고, U가 V와 같으며, W는 U의 곱 내지는 VV로 대신하며, Y도 없기 때문에 총 22개밖에 없다. 이 원칙에 따라 마르틴 루터의 라틴어 음역인 ‘Martin Lutera’의 문자들을 하나하나 숫자로 환산한 다음, 이를 모두 더하면 그 값은 666이 된다.

M

A

R

T

I

N

L

U

T

E

R

A

합계

30

1

80

100

9

40

20

200

100

5

80

1

666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좋은 선물 중의 하나는 ‘언어’이다. 인간만이 언어로 대화하고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 아프리카 오지나 남미정글에는 현대문명과는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있다. 남녀노소 모두 완전히 벗은 몸으로 사는 부족들도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도 자기들의 언어로서 훌륭하게 의사소통하는 것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적어도 6천 종류 이상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그런데 모든 언어는 표현 방법이 똑같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당신은 커피를 좋아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한국 사람은 커피를좋아하는 경우 ‘아니요’ 라고 대답한다. 부정(否定)으로 물었으니까 부정으로 대답하면 ‘긍정’이 되어서 커피를 좋아한다는 말이 된다. 대단히 논리적인 언어 사용법이다. 반면에 영어에서는 커피를 좋아한다면 yes라고 대답한다. No라고 대답하면 싫어한다는 뜻이 된다. 질문의 형태와는 관계없이 대답이 긍정이면 ‘예’이고, 그렇지않으면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언어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변하게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영어에‘게이(gay)’라는 말이 있다. ‘유쾌하다, 쾌활하다’는 뜻이다. 미국에 가서 ‘그는 쾌활한 사람이다’라는 뜻으로 ‘그는 게이이다’라고 말하면 의도치 않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오늘날 영어에서 ‘게이’는 동성연애자(특히 남성)를 의미한다. 또 ‘드러그(drug)’는 약이라는 뜻이다. 과거에는 약방을 drugstore라고 했다. 요즈음 미국에 가서 ‘드러그(약)를 어디서 살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가는 경찰서 신세를 질 수도 있다. 오늘날 ‘드러그’는 주로 마약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언어는 표현법이나 수사법에서도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그 커피는 맛이 있었고 그리고 (and) 뜨거웠다’는 표현이다. 우리는 그런 표현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냥 ‘맛있는 뜨거운 커피였다’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된 히브리어나 희랍어에서는 ‘그리고(and)’ 라는 접속사를 사용해서 한 가지 사실을 표현하는 어법을 많이 사용한다. 이런 어법을 ‘중언법(重言法, hendiadys)’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본다.


창세기 3:16에는 불순종한 여자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히브리 원문을 보면, “내가 ‘너의 임신과 너의 고통’을 더하리니…” 라고 되어있다. 임신과 고통이 별개의 두 가지가 아니라, 둘이 합해져서 하나의 뜻을 나타내는 중언법이 사용된 것이다. 그 뜻은 ‘임신(출산)하는 고통’이다.

사무엘이 죽었을 때 그를 장사하는 장면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온 이스라엘 사람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삼상 28:3). 원문을 보면 ‘라마에 그리고(and) 그의 고향에’ 장사했다고 쓰여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흔히 쓰는 ‘중언법’적 표현이지만 우리말로는 어색한 표현이다. 그래서 ‘그의 고향 라마’라고 옳게 번역한 것이다.

또 스바냐 1:16에는 ‘나팔과(and) 경고’라는 말씀이 있다. ‘나팔을 불어경고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서 중언법적 표현이 제대로번역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게마트리아(Gematria)

히브리어의 알파벳이 나타내는 숫자로써 그 단어가 지닌 뜻을 풀어 성서를 해석하는 이러한 방법을 게마트리아(Gematria)라고 한다. 유대교의 랍비들 특히 중세의 카발라주의자들이 많이 사용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모두 22자인데 처음 10자는 차례로 1부터 10까지의 수를 나타내고, 다음의 8자는 차례로 20부터 90까지의 10단위 숫자를 나타내며, 나머지 4자는 차례로 100부터 400까지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철자를 보고 숫자를 계산하여 뜻을 알아내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엘리에젤’(창 15:2)은 아브라함의 종 318명을 가리킨다고 해석 합니다(창 14:14).

요한의 계시록 13장 18절에 짐승의 숫자는 666인데, 이 숫자는 ‘네로황제’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그 철자의 숫자를 합한 것과 같다.

 




숫자의 의미

1

연합, 하나님의 나라

2

동행, 사역, 언약, 성취, 증인

3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존재 의식, 질적인 완전 수

4

땅의 피조물의 존재

5

고통, 순교, 환란

6

노동, 벌, 죽음

7

단식, 생명, 영원, 영적인 완전 수

8

부활, 영원

9

미완성, 불완전, 부족수

10

땅의 만족 수, 땅의 충만 수, 하나님이 만족 하는 인내의 시간, 서수적인 완전 수

12

완전통치의 상징 수


유대인의 수 개념에서 연대적 완전수는 3, 7, 10, 12를 곱한 수를 말합니다.
1년은 360일, 7년은 2,520일(3☓7☓10,☓12)

 

▶ (곱하기) : 충만, 번성

 ☞ 3×4=12(충만, 번성)
☞ 7×7=49(무한)

 ☞ 12×12=144(하늘과 땅을 합한 천국의 크기)

  ☞ 12×1000=12,000(택한 백성의 수)

  ☞ 12×12×1,000=144,000(택함 받은 자의 수) (144×1,000=천국백성)


▶ +(더하기) : 존재

  ☞ 7+7=14(언약의 성취, 예수님의 족보 14대, 14대, 14대)

  ☞ 3+4=7(하늘과 땅의 존재, 전체, 전부)

  ☞ 7+1=8(부활, 영원)

  ☞ 12 + 12 = 24 : 성도들의 대표 (신․구약 대표)

 


이들의 이름을 히브리음역으로나, 헬라어음역으로 표기한 후 수치로 대입하면 다 666이 된다. 이들 중에 테이탄설은 요한이 갑자기 헬라신화를 인용했다는 의아심을 불러일으킴으로 부적절하다고 보며, 로마설도 사람이 아니라 그는 국가이고 또 신약 어디에도 로마를 라틴이라고 표기한 곳이 없기 때문에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네로설이거나 도미티안설이다.
 

계시록이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시기에 기록되었다면 이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서론에서 보았던 것처럼 당시의 박해는 거국적 이었다기 보다는 아직까지는 지엽적인 것이었기에 네로의 박해시가 이닌가? 하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었다.

 

666(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이것이 상징인지 아니면 어떤 한 인간의 암호인지 논의가 되어왔다. 상징일 경우 이는 6이 100배, 10배, 1배 있는 것으로 완전한 불완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의 수, 세상적인 수, 마귀적인 수라 생각한다. 

암호일 경우 이를 한 인간의 암호로 보고 그 인간의 이름을 지칭하기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본다. 상징보다 암호가 본문의 맥락에 합당한 견해이다. 저자는 자신이 666을 한 인간의 수 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66은 누구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다.
a) 네로라는 설,
b) 테이탄(헬라의 신화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거대한 신)이라는 설,
c)로마설('라틴'이라는 말을 수치로 계산했을 경우),
d)도미시안 설 등이다.

이들의 이름을 히브리음역으로나, 헬라어음역으로 표기한 후 수치로 대입하면 다 666이 된다. 이들 중에 테이탄설은 요한이 갑자기 헬라신화를 인용했다는 의아심을 불러일으킴으로 부적절하다고 보며, 로마설도 사람이 아니라 그는 국가이고 또 신약 어디에도 로마를 라틴이라고 표기한 곳이 없기 때문에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네로설이거나 도미티안설이다.
 

계시록이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시기에 기록되었다면 이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서론에서 보았던 것처럼 당시의 박해는 거국적 이었다기 보다는 아직까지는 지엽적인 것이었기에 네로의 박해시가 이닌가? 하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었다.

하팍스레고메나(Hapaxlegomena)


‘짐승의 수’이면서 ‘사람의 수’인 ‘666’은 요한계시록 13장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단어이다. 즉 성경 안에 직접적으로 비교 가능한 본문이 없다. 솔로몬의 세입금 중수 ‘666’(대하 9:13; 왕상 10:14)이라는 구절이 있으나 이것은 ‘666 금 달란트’라 ‘인간의 수 666’과는 다른 개념이다. 이렇게 성경에 단 한번 등장하는 독특한 단어를 하팍스레고메나(Hapaxlegomena)라고 한다. 하팍스레고메나는 비교 가능 구절이 없는 관계로 해석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런 단어의 경우 단어 자체의 본 의미를 따져보고 이 구절과 관련된 앞뒤 문장의 전후 관계를 잘 분석하여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666도 단순히 666만을 따로 떼어 해석하면 위험하고 계시록 13장 전체의 맥락과 틀 안에서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 계시록 13장은 두 짐승에 관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바다에서 나온 첫 번째 짐승(1-10절)


첫 번째 짐승은 바다에서 나왔으며 그 짐승의 얼굴 모습은 뿔이 열이고 머리는 일곱을 가진 짐승이었다. 이들 짐승의 열 뿔에는 10개의 면류관이 있었으며 머리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있었다. 짐승의 전반적 생김새는 표범과 비슷하고 발은 곰의 발을 닮았으며 입은 사자의 입을 닮았다고 했다(1-2절).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첫 번째 짐승은 다음과 같은 10 가지 권세가 있었다(3-8절).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 짐승은 용으로부터 용의 능력과 왕좌와 큰 권세를 받았다(4절).
2. 짐승은 머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죽은 듯 하다가 살아났다(3절).
3. 온 세상 사람들이 놀라 그 짐승을 따랐으며 사람들은 그에게 권세를 준 용을 경배했다(4절).
4. 온 세상 사람들은 용뿐만 아니라 짐승도 경배하기 시작한다(4절).
5. 온 세상 사람들은 짐승을 경배할 뿐 아니라 찬양했다(4절).
6. 온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짐승과 같은 이가 없고 짐승과 맞서 싸울 존재도 없었다(5절).
7. 짐승은 교만한 말을 서슴지 않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장막과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는 말을 함부로 하였다(6절).
8. 짐승은 42달 활동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6절).
9.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허락되었고 온 세상 모든 민족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
10. 세상이 창조 된 이후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땅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그 짐승에게 경배할 것이다.

이와 같은 아주 구체적인 설명에 따라 첫 번째 짐승의 권세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짐승에 대한 이와 같은 우주적 권세와 경배는 어린 양에 대한 우주적 권세와 병행을 이룬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계 2:28; 3:21). 그리스도에 맞서는 이 같은 악령의 대응을 기독론적 패러디(Christological parody)라고 부른다.


짐승의 때에 대해 하나님은 몇 가지 경고를 하신다(9-10절).

1. 짐승의 때에 대해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야 한다.
2. 짐승의 때에 잡혀갈 사람은 잡혀가고 칼로 죽임을 당할 자들은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3. 짐승의 때에 성도들에게는 인내하는 믿음이 필요할 것이다.


땅에서 나온 두 번째 짐승(11-18절)


두 번째 짐승은 땅에서 올라왔다(11절). 두 번째 짐승은 새끼 양처럼 두 뿔을 가졌고 용처럼 말을 했다. 성경은 두 번째 짐승의 권세(활동)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12-15절).

1. 첫 번째 짐승이 지녔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처음(첫 번째) 짐승 앞에서 행사할 것이다.
2.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가 살아 난 첫 번째 짐승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
3. 큰 기적을 행하고 심지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할 것이다.
4. 첫 번째 짐승이 하던 기적을 그대로 행하고 땅에 사는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5. 첫 번째 짐승을 향한 우상 숭배를 노골화할 것이다.
6. 능력을 받아 첫 번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을 하게 하고 그 짐승의 우상에 경배치 않으면 다 죽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666)를 받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짐승이었다(16-18절). 빈부귀천, 남녀노소, 종이나 자유자나 예외 없이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할 것이고, 표는 강제적 매매의 수단이 될 것이고,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일 것이다. 성경은 이런 때일수록 지혜가 필요하니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 짐승의 숫자를 세어보라고 했다. 이 짐승의 수는 사람의 숫자로 666이다.


베리칩이 666인가?


베리칩은 좁쌀보다 약간 큰 작은 칩으로 팔이나 신체의 특정 부위에 주입하여 의학적 성과를 얻으려는 칩을 말한다. 근데 이것이 왜 앞에서 설명한 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666이라는 것일까? 요한계시록은 직역을 하면 잘 풀리지 않는 많은 상징이 있는 책이다. 벌콥(L. Berkhof)의 말대로 요한계시록은 결코 사도행전 식으로 해석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해석학의 기본이 필요하다. 계시록 13장도 그 상징의 내용을 잘 해석해야 한다. 베리칩이 “666”인가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짐승의 표가 등장하려면 반드시 먼저 짐승이 등장해야 함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대단히 상징적이기는 하나 분명 대단한 능력과 권세를 가진 바다에서 올라온 처음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이 등장해야 한다. 아직 요한계시록 13장의 구절과 일치하는 구체적 두 짐승은 세상에 나타나거나 등장한 적이 없다. 짐승의 표는 이 짐승이 나타난 후 짐승의 통치수단에 의해 만들어진 강제적 정책의 산물로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베리칩이 666과 일치하려면 이 정책의 주체가 되는 짐승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고 그 표가 강제적 매매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한때 666이 분명하다고 큰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었던 “컴퓨터 바코드 666 소동”은 매매 수단과 관련이라도 있었다. 물론 이 소동은 엉터리로 판명이 났다. 하지만 베리칩은 바코드 소동과 달리 강제적 매매 수단과는 관련이 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베리칩을 666이라 보는 것은 13장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동안 13장의 짐승에 비유되는 유사(類似) 짐승은 참 많았다. 로마 제국, 네로, 칼리굴라, 교황, 니므롯, 솔로몬, 느브갓네살(단 3:6) 등을 666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심지어 반 개신교측에서는 마르틴 루터나 개신교를 666으로 보는 주장까지 있었다. 이런 식으로 666을 보면 짐승 우상에게 경배치 않으면 모두 다 죽였다는 점에서 도미티안 황제, 일제식민지 시대의 강제적 신사참배제도, 김일성 우상화도 모두 666의 후보자들이 될 수 있다. 이들 모두는 두 짐승과 관련하여 해석할 때 유사성을 가지기는 하나 두 짐승의 “그림자” 정도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래서 요한은 666을 푸는 데는 지혜와 총명이 필요하다고 지속적으로 충고하고 있다(18절).


히브리어와 헬라어에는 우리말에는 없는 숫자값(numerical value)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게마트리아”(gematria)라고 한다. 하나님은 37, 예수님은 888(37☓3☓8), 짐승의 수는 666, 사단의 나라는 276과 관련된다. 이 게마트리아로 666을 푸는 방식이 있다. 게마트리아로 살펴보면 위에서 살펴 본 많은 인물이나 사건들이 666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게마트리아로 666을 풀 때에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13장 전체(전후) 문맥과 조화하고 일치하는 666인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전체 문맥 가운데 살펴보면 대부분의 “666” 후보들은 “666”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게마트리아가 신비한 도구이기는 하나 게마트리아를 절대적 성경 해석 방법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계시록 13장의 “666”이 출현하려면 반드시 이적과 능력을 가진 두 짐승의 등장이 먼저임을 기억해야 한다. “666”은 그 다음 나타나는 온 세상 사람들의 강제적 매매 수단과 관련된 표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13장의 내용과 일치하는 구체적 짐승의 출현도 아직 없었고 매매 수단이 아닌 일부 최첨단 의료용으로 알려진 베리칩이 계시록 13장이 말하는 666이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베리칩을 666이라 주장하는 분들이 베리칩을 받느냐 안 받느냐에 따라 구원 여부가 달려 있다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불안이나 공포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시는 의와 평강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베리칩 공포와 불안"에 떨다가 베리칩이 아닌 정말 666이 나타날 때는 그만 사단에게 속아버리는 참사가 벌어지지 않을 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베리칩을 구원여부의 기준으로 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세대주의적 극단적 종말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열심 있는 것은 좋으나 좌우 분간을 하지 못하고 신비주의적이고 극단적이고 긴급한 종말론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신자들의 열심을 이끌어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것은 신앙을 열심으로 착각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으며 하나님께 열심을 다한다는 착각 속에서 실은 마귀에게 이용당해 버리는 누(累)를 범할 수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한다. 마귀가 그리스도인들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것도 아니고 괜히 겁먹을 존재는 아니나, 모세의 시체에 대해 논쟁했을 때 천사장 미가엘도 마귀를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을 정도로 마귀는 그리 간단한 존재가 아니다. 바르게 깨닫고 열심을 다해야지 분별을 못하고 열심을 내다가는 사단에게 이용당하는 도구가 되기 십상인데 작금의 한국 교회에 이런 불안을 동반한 신비주의가 만연된 것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제자 베드로도 '사단'이라고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것처럼 사단의 꾀에 속지 말아야 한다(막 8:33).


베리칩이 "666"이 아니라는 성경적 증거


첫째, 666이전에 반드시 등장해야 할 계시록 13장에 나타난 두 짐승에 해당할만한 인물이나 사건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짐승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상징성을 가지는 지에 대해서는 지혜로운 검토와 해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베리칩이 666이라는 생뚱한 주장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


둘째, 두 짐승이 나타난 후 두 번째 짐승이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666)를 받게 하는데(16-18절) 베리칩을 666이라 할 경우 두 번째 짐승에 해당하는 실체가 불분명할 뿐더러 베리칩 소동은 13장이 묘사하고 있는 두 번째 짐승과 정황상 내용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셋째, 계시록 13장은 빈부귀천, 남녀노소, 종이나 자유자나 예외 없이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한다고 하였으나 그 비싼 베리칩을 식량도 부족한 북한이나 아프리카 같은 빈국의 노인이나 어린이들에게 무엇 때문에 어떻게 신체에 강제로 투여 한다는 것인지 베리칩은 이 구절과 전혀 맞지 않는다. 더구나 말기 암에 걸려 흙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는 환자에게 베리칩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같은 일은 권의주의적 세계 종교 통일이나 정치 통일이 가능해진 다음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세계 종교나 정치가 통일 된다는 것은 작금의 정황상 요원한 일일뿐이다.

넷째, 표는 강제적 매매의 수단이 된다고 하였으나 화폐가 있고 카드가 넘쳐나는 시대에 베리칩이 어떻게 모든 남녀노소, 모든 빈부귀천, 종교인들의 강제적 매매 수단과 관련 된다는 것인지 허황된 주장일 뿐이다.


다섯째,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라고 하였으나 베리칩은 짐승의 이름도 아니고 짐승의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가 아니다. 단지 바코드 소동과 유사할 뿐이다.

여섯째, 짐승이 출현하였을 때 지혜가 필요하니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 짐승의 숫자를 세어보라고 하였는데, 먼저 이 짐승은 (1)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가 살아 난 첫 번째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짐승이요 (2) 큰 기적을 행하고 심지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하는 짐승이요 (3) 첫 번째 짐승이 하던 기적을 그대로 행하고 땅에 사는 사람들을 속이는 짐승이요 (4) 첫 번째 짐승을 향한 우상 숭배를 노골화하는 짐승이요 (5) 능력을 받아 첫 번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을 하게하고 그 짐승의 우상에 경배치 않으면 다 죽이는 권세를 가진 짐승이다. 그런데 이런 두 번째 짐승은 첫 번째 짐승에 해당하는 짐승도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짐승 이후에나 나타나는 666을 베리칩으로 상정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이다.


일곱째, 짐승의 수는 사람의 숫자로 “666”이라 하였는데 베리칩이 사람의 숫자 "666"이라는 의미와 연관성이 없다.


여덟째, 성령의 은혜는 그리스도 믿음 안에서 주시는 영원한 구원과 참 평강이다. "베리칩"을 가지고 구원 상실과 신앙적 불안감과 긴박한 세대주의적 시한부종말론으로 사람들을 겁주고 인위적 열심을 이끌어내려는 것은 아주 비성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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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는 수학적 분석이 가능한 언어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22개가 있는데 각 알파벳마다 고유한 숫자 값이 있다. 즉 알파벳이 곧 숫자다. 히브리어뿐만 아니라 헬라어, 라틴어 등도 각 글자가 숫자값을 가지는데 이런 것을 알파뉴메릭 시스템(alphanumeric system)이라 한다.



  




진리는 본질적 진리(essential truth)와 비본질적 진리(non essential truth)로 구분합니다. 본질적 진리는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불변적 진리를 말합니다. 반면에 비본질적 진리는 어느 교단, 어느 교회에 다녔느냐 하는 것과 같은 가변적 진리를 말합니다.

본질적인 진리를 위해서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고, 비본질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서로 화합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짐승의 수(666)’와 같은 단어를 하팍스레고메나(Hapaxlegomena) 라고 합니다.

하팍스레고메나는 성경에 단 한번 사용된 단어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단어를 해석할 때는 항상 두 가지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문맥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둘째는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짐승의 수라고 알려진 것들은 ‘네로, 히틀러, EEC(EC, EU, 현재 27개국), 바코드’ 라고 하였고 최근에는 ‘베리칩(Veri Chip)’ 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666은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는 것’ 이라고 합니다(계 14:9, 11).

성경의 흐름은 구속사라고 하며, 구속사란 어린 양의 피와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친다면 베리칩이 예수 보다 더 월등하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가르침을 과연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행 16:31, 4:12,  요일 5:11-12, 요 8:32, 3:16, 5:24.)






○테무라(Temura) : 철자 재배열 방법


테무라는 ‘교환’이란 뜻으로, 야훼 같은 신비한 이름이나 히브리어, 그리스어 알파벳 문자를 보다 복잡한 법칙에 따른 철자를 상호 치환과 결합 등을 통해 그 상징적 의미를 읽어내는 신비수학. 


즉, 한글로 ‘공’ 글자를 뒤집으면 ‘운’ 이라는 글자가 나오는 것처럼 자모(字母)의 배열을 바꿈으로써 한 낱말을 다른 낱말로 바꾸고, 그 바꾼 말을 해석하는 방법을 말한다. 


한 예로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neo는 one(단 한명)이 세상을 구한다라는 뜻에서 철자를?재배열하여 작명되었고,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루브르 박물관장 소니에르는 죽으면서 사건의 단서를 남길 때 테무라 방법을 사용했다. 




한편 유대인들의 1년은 360일로, 7년은 2,520일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2,520이 수리적으로 4대 숫자(3, 7, 10, 12)를 곱한 수로 ‘연대적 완전수’라고 말한다. 즉 질적인 완전수 3과 영적인 완전수 7, 서수적인 완전수 10, 완전통치의 상징인 12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위대하며 기초가 되는 족장은 아브라함의 개명을 두고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세상의 수인 네 개의 문자로 되어 있던  아브람을 은혜의 수인 5수로 만들기 위해 하나의 글자를 삽입해 아브라함으로 개명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아브라함의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상징하게 한다고 말한다. 


TIP. 타르굼(targguma) 


“타르굼”은 번역, 해석이란 뜻으로, 히브리어 성경(구약성경)을 아람어로 의역 또는 알기 쉽게 말을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유대인 타르굼은 기원전 5세기경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인 아람어 밖에 모르는 바벨론 세대들을 교육하기 위해 작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내용이 느헤미야 8장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학사 에스라가 히브리어로 된 율법을 읽고 난 후, 레위인들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당시 일상 언어인 아람어로 번역해 설명하면서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타르굼으로는 온겔로스 타르굼, 차명 요르단 타르굼, 네오피티 타르굼 등이 있다. 수많은 타르굼 가운데 “온켈로스의 타르굼”은 다른 타르굼에 비해 다소 직역에 가깝지만, 유대교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번역본이다. 






온전한 수로서 절대를 상징(17:13, 17). 그러므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


1/2 - 불안정과 일시성을 상징(8장 1절의 반시는 긴장된 한 순간을 의미).


1/3 - 8:7-12, 9:11

1의 파열된 수로서 전체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특히 나팔 재앙의 피해면적이 부분임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어 있다(8:7-12, 9:11). 


1/4 - 6:8 

1의 파열된 수로 보다 적은 일부분을 가리킨다. 넷째 인의 피해면적이 나팔재앙의 피해면적보다 더 부분적임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6:8) 


2 -  9:12, 11:3,10, 12:14, 13:11, 19:20. 11:3, 4. 신 17:6, 19:15

실제 수이면서(9:12, 11:3,10, 12:14, 13:11, 19:20) 상징적인 수이다(11:3, 4). 증인의 완전함을 나타낸다. 2는 구약에서 증인의 숫자이다(신 17:6, 19:15) 예수께서 제자 파송 때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심, 변모 때에 모세와 엘리야의 나타남, 빈 무덤에서의 두 천사, 승천할 때의 두 천사 등은 이를 암시한다. 


3 -  6:6, 8:13. 9:18, 16:13,19, 21:13

수량을 나타내면서(6:6, 8:13) 하늘의 수 신적인 수를 암시한다(9:18, 16:13,19, 21:13). 삼위 하나님. 


3과 1/2 - 11:9, 11. 12:14,

요한계시록에서 '삼일 반'(11:9, 11) "한 때, 두 때, 반 때,"(12:14)로 나타나며 한이레의 절반 즉 완전의 파열, 불안정한 때, 짧은 기간을 말한다. 이는 다니엘서의 "두 이레의 절반"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기서는 "삼년 반"을 상징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제한된 환난기간을 상징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숫자가 요한계시록에서 문자적일 수 없음은 저자가 이를 42개월(11:2, 13:5), 1260일(11:3, 12:6)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42개월 혹은 1260일이 문자적일 수 없음은 저자가 이를 열흘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2:10) 


4 -

수량을 나타내면서도(4:6, 5:6, 6:1), 땅의 수, 가시적인 피조물을 상징하는데 쓰였다. 네 생물(4:6) 땅의 네 모퉁이, 땅의 사방의 바람(7:1), 네 천사(7:2), 네 뿔(9:13), 사방(20:8)등 


5 - 

문자적이면서(9:5, 17:10), 10의 절반으로 상징성이 있다. 세상 만수 10의 파열은 제한된 재앙의 기간을 나타낸다. 


6 -

신적인 완전수 일곱에 하나 부족한 수로서 불완전을 상징한다.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가 있다고 했는데(4:8) 이는 실제 모습을 가리키면서(사 6:2)동시에 피조물임을 가리킨다. 


7 -

문자적이면서(1:4, 5:1), 완전을 상징한다. 일곱 영(1:4), 일곱 등불(4:5), 일곱 뿔,일곱 눈(4:6), 일곱 무리(10:4), 일곱 머리(12:3), 일곱 면류관(12:3),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 7은 3+4, 즉 천지 합수로서 신적인 세계의 한 세트 혹은 한 싸이클 이다. 


8 - 

일곱을 한 '싸이클'로 볼 때, 여덟은 다음 사이클의 첫 수이므로, 이는 새로운 국면의 시작을 의미한다. 17:1절의 "여덟째 왕"은 문자적인 "여덟째 왕"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의 박해를 시작하는 왕임을 나타낸다. 


10 - 

세상의 만수로서, 세상에서는 10을 한 주기의 끝으로 본다. 제한된 완벽함을 상징한다. 열흘 동안의 환난(2:10), 열 뿔(12:3, 13:1, 17:7), 열 면류관(17:3), 열 왕(17:12) 등 


12 - 

천지 승수로서(3☓4=12) 완전수,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이다. 전체 혹은 완전함을 상징한다. 구약에서 12는 이스라엘의 12지파이고, 신약에서 12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숫자이다. 그리하여 본서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과 관계된 사실들과 관련되어 나온다. "열두 별"(12:1), 열두 문, 열두 천사(12:12), 열두 기초석, 열두 사도, 열두 사도 , 열두 이름(21:14), 열두 문, 열두 진주(21:21), 열두 실과(22:2). 


24 -

12+12로서, 구약과 신약을 통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나타내는 완전수이다. 이십사 보좌(4:4), 이십사 장로(4:10, 5:8, 11:16등) 


42 -

'삼일 반' 혹은 '한 때, 두 때, 반 때'를 개월 수로 나타낸 수이다. 묵시문학의 시간법은 1일을 1년으로 계산하고(민 14:34, 겔 4:6), 1월을 30일로 계산한다(창7:11-8:4). 그리하여 삼일 반은 3년 6개월, 즉 42개월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당하는 시간을 가리킨다. 


144 - 21:17 

12☓12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포용할 만한 크기를 나타내는 숫자이다. 21장 17절에서는 성도들의 성 즉 새 예루살렘 성곽의 높이가 144규빗 이라 했다. 완전을 상징하는 표시이다. 


666(13:18)
 

이것이 상징인지 아니면 어떤 한 인간의 암호인지 논의가 되어왔다. 상징일 경우 이는 6이 100배, 10배, 1배 있는 것으로 완전한 불완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의 수, 세상적인 수, 마귀적인 수라 생각한다. 

암호일 경우 이를 한 인간의 암호로 보고 그 인간의 이름을 지칭하기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본다. 상징보다 암호가 본문의 맥락에 합당한 견해이다. 저자는 자신이 666을 한 인간의 수 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66은 누구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다.
a) 네로라는 설,
b) 테이탄(헬라의 신화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거대한 신)이라는 설,
c)로마설('라틴'이라는 말을 수치로 계산했을 경우),
d)도미시안 설 등이다.

이들의 이름을 히브리음역으로나, 헬라어음역으로 표기한 후 수치로 대입하면 다 666이 된다. 이들 중에 테이탄설은 요한이 갑자기 헬라신화를 인용했다는 의아심을 불러일으킴으로 부적절하다고 보며, 로마설도 사람이 아니라 그는 국가이고 또 신약 어디에도 로마를 라틴이라고 표기한 곳이 없기 때문에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네로설이거나 도미티안설이다.
 

계시록이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시기에 기록되었다면 이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서론에서 보았던 것처럼 당시의 박해는 거국적 이었다기 보다는 아직까지는 지엽적인 것이었기에 네로의 박해시가 이닌가? 하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었다.

 





한국 신화에 나타난 바다의 의미

신화는 공간이 주요하게 기능하는 서사이다.
인물의 자질이나 능력, 행위의 방향과 결과 등이 모두 공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서사 전개 역시 철저히 공간적으로 형성되며, 주인공들의 공간 이동 과정에서 이야기의 핵심 가치와 이념이 형상화된다. 한국 신화에서 신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장 대표적인 세계는 하늘이다. 신성함의 출처이자 지상의 인간이 모방해야 할 대상인 하늘은 인간 존재의 수직 축 방향의 위쪽에 위치한다. 지상의 인간의 수평축 방향에 있는 바다 역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제공하는 신화적 공간이다. 이 바다세계를 하늘과 인간세계와의 관계처럼 단선적인 ‘성(聖): 속(俗)’의 대립체계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인간세계와 구별되는 신이 한 세계 내지 신물과 이인이 존재하는 세계로 볼 수 있다. <송당본풀이>나 <심청무가>에 나타나는 용궁을 통해 바다세계의 신이 성이 잘 드러난다. 또한 바다는 세계를 구획하는 경계공간이 되거나, 인간과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매개공간이 되기도 한다. <가락국신화>와 <삼성신화>에 등장하는 신성한 존재의 배우자들을 통해서 그 같은 바다의 의미가 확인된다. 마지막으로 바다는 죽음과 추방을 의미하기도 하며 동시에 재생과 부활의 상징적 공간이 되기도 한다. <탈해신화>나 <송당본풀이>, <칠성본풀이>, <심청무가>의 주인공들은 바다로 이동함으로써 기존의 삶이 부정되고 죽음을 맞지만 동시에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웃음소리가 나는 집에는
행복이 와서 들여다보고,  


고함소리가 나는 집에는
불행이 와서 들여다본다. 

받는 기쁨은 짧고
주는 기쁨은 길다.

늘 기쁘게 사는 사람은
주는 기쁨을 가진 사람이다. 


어떤 이는 가난과 싸우고
어떤 이는 재물과 싸운다.

가난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많으나
재물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적다.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넘어졌다 일어나 다시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느낌 없는 책 읽으나 마나,
깨달음 없는 종교 믿으나 마나,
진실 없는 친구 사귀나 마나,
자기희생 없는 사랑 하나마나.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잡는 이는
똑똑한 사람이고,
비뚤어진 마음 그대로 사는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누구나 다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성인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스스로 과욕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돈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낮이 즐겁고,
육체로 결혼한 사람은 밤이 즐겁다.
그러나 마음으로 결혼한 사람은 밤낮이 즐겁다.


먹이가 있는 곳에는
틀림없이 적이 있고,
여광이 있는 곳에는
틀림없이 상처가 있다.

남편의 사랑이 클수록
아내의 소망은 작아지고,
아내의 사랑이 클수록
남편의 번뇌는 작아진다.


부부는 쇠사슬에 함께 묶인 죄인이다.
때문에 발을 맞춰 걷지 않으면 안 된다.


3주 관찰,
3달 사랑,
3년 싸움,
30년 동안 서로 참는다.
그리고 그동안 태어난 아이들이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미인은 눈을 즐겁게 하고,
아내는 마음을 즐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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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나팔, 대접, 화에 대한 도표

일곱 인 사건

 

 

첫째 인

 

 

둘째 인

 

 

셋째 인

 

 

넷째 인

 

 

다섯째 인

 

 

여섯째 인

일곱 나팔

 

일곱째 인

첫째 나팔

 

 

둘째 나팔

 

 

셋째 나팔

 

 

넷째 나팔

 

 

다섯째 나팔(첫째 화)

 

 

여섯째 나팔(둘째 화)

일곱 대접

 

일곱째 나팔(셋째 화)

첫째 대접

 

 

둘째 대접

 

 

셋째 대접

 

 

넷째 대접

 

 

다섯째 대접

 

 

여섯째 대접

 

 

일곱째 대접



1장의 개요 

요한계시록 1장은 사도 요한이 ‘네가 본 것’을 기록한 계시록의 서론이다(1:19).
1장에서는 계시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과 그 계시를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준다. 이 계시가 참되고 진실하다는 근거는 계시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이 계시를 주신 이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데 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일에 두 가지 명심해야 할 일이 있다. 

하나는 요한계시록의 내용 전부가 주의 재림 시에 실현될 종말적인 사건의 계시이기 때문에 인류의 종말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사실과,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주님의 계시를 통해서 주 재림에 관한 계시를 모두 증거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시대이건 이 계시 외에 다른 계시를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라도 흔들리면 요한계시록의 올바른 연구나 해석은 헤어 나올 길 없는 깊은 함정에 빠지거나 미궁에서 맴돌 수밖에 없게 된다. 1992년을 전후하여 기승을 부렸던 ‘시한부 종말론’의 경우, 이 두 가지 모두를 무시 한데서 초래된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종말에 성경에 계시된 계시 외에도 기도하는 종들에게 더 완벽한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고 주장한다.  


인(印)의 역사는 요한계시록 6장에 등장한다.

인의 계시는 다른 계시처럼 독립적인 계시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종말 사건의 총론적 계시로 보여 주고 있다는데 특색이 있다. 이처럼 종말 사건의 총론적 계시가 6장에서 전개된다. 8장에서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이 7인의 사건이 7나팔로 전개되는 환난의 모습으로 보여 주신다. 

나팔의 역사는 환난의 역사이다.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8장에서 보여 주시고, 다섯째부터 일곱째까지는 9장과 16장에서 보여 주신다.


대접의 역사는 종말적인 최종적 심판으로 보여 주신다. 이 일곱 대접 심판은 일곱째 나팔 사건을 의미한다. 


화의 역사는 첫째부터 셋째까지 나온다. 화는 나팔과 연결 되어 나오는 계시인데 다섯째 나팔이 첫째 화, 여섯째 나팔이 둘째 화, 일곱째 나팔이 셋째 화가 된다. 이같은 서로간의 관계를 맥을 따라 이해한다면 요한계시록 해석에 크나 큰 도움이 된다. 



  




다니엘서는 바벨론으로부터 페르시아, 헬라와 로마 제국을 거쳐 현재의 세계 질서가 이루어지고 마침내는 지구의 종말이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세계 역사의 대 파노라마를 예언하였다.

신약 성경의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 출생 이후부터 세계사와 교회사에 나타난 선악의 대쟁투와 특별히 세계 역사의 마지막에 나타날 사건들을 정확하게 예언하였다. 

 다니엘서가 바벨론 시대부터 그리스도 재림까지의 세계 역사의 흥망성쇠와 마지막 때에 생길 일을 기록하고 그 예언을 마지막 때까지 인봉하고 간수하라(단 12:4)고 한 반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고 하였다.  



  뉴욕나사렛교회

요한계시록 강해 도표 자료(2016-3-30)

교회

현재명

지명의 뜻

그리스도

특징

에베소
Ephesus
2:1-7

셀주크
Selcuk

인내

오른 손에 일곱별을 쥐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임재

정통적인 교회

서머나
Smyrna

2:8-11

이즈미르
Izmir

몰약성

처음과 나중,
죽었다 다시 살아나신 분

가난하나
부요한 교회

버가모
Pergamun

2:12-17

베르가마
Bergama

높여졌다
혼인하는 곳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

우상 숭배한
교회

두아디라
Thyatira

2:18-29

아키사르
Akhisar

희생

하나님의 아들
눈은 불꽃, 발은 주석

악한
여선지자의 교회

사데
Sardis

3:1-6

살리히리
Salihlt

남은물건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자지신 분

살았다는 이름만 가진 교회

빌라델비아
Philadelphia

3:7-13

알라세히르
Alasehir

형제우애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

연약하지만
충성스러운 교회

라오디게아
Laodicea

3:14-22

라오디케아
Laodikya

의인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
아멘, 충성, 참된 증인

부요하나
가난한 교회

                





하나님은 지금도 신령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과 순종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기뻐하시며,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 형식적 예배보다 순종이 우선이다(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십니다(8(상))." 여기에서 말하는 악인은 악을 행하고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에 거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드리는 제사를 미워하십니다. 사랑과 순종이 없이 형식적인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며,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믿음이 없이 드린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선지자 사무엘도 사울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며,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순종이 없는 예배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배를 가증히 여기시며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직한 자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8(하))." 여기에서 '정직한 자의 기도'는 중심에서 나오는 순종과 헌신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형식적인 종교 예식보다 사랑과 순종이 낫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삼상 15:22; 사 1:11; 렘 6:20; 호 5:6; 암 5:22; 마 6:5,6).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진실한 사랑과 그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기뻐하시며,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며,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은 죄를 범하면 변명하지 않고 자기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를 받아주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정결하게 해주십니다.


적용질문: (창 4:3-7, 히 11:4)을 읽고 아벨의 제사가 열납되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되지 못한 이유를 말해보자. 우리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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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22

말세와 요한계시록

건전한 종말론적 신앙은 신자가 이 땅에 살면서 복음 전파와 그리스도의 형상 회복의 두 가지 소명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이다.

제3성전 건축설.

베리 칩(RFID) 소동.

블러드 문(Blood Moon. 피 빛 달) 현상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의 등장.

토라 뿌리 운동.

최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주요한 종말론적 현상들이다.

종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끊임이 없다. 미래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사람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좀 잠잠하다 싶으면 또 다시 새로운 종말론적 현상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달아오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열기가 식어간다.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의 긴장은 어느 때보다 팽팽하여 잠시도 숨 쉴 틈을 주지 않기 때문에 종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수시로 달아오르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는 냉전체계에서 벗어나서 문화충돌, 종교충돌, 인종충돌로 인해 갈등과 전쟁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세계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빈부 차이가 현저하여 전 세계 70억의 인구 중에 극빈층이 1/3을 점유하고 있다. 더군다나 라니냐와 엘 니뇨로 인한 기상이변으로 인해 홍수와 가뭄과 지진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현상은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마 24장 참조). 따라서 신자라면 우리가 사는 현세가 말세 그 중에서도 말세지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말세지말 이다, 말세가 가까웠다고 하면서 종말론적 현상들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지만 정작 말세를 당한 신자들이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안내는 드문 편이다.

기껏해야 일부 사교 단체에서 휴거의 날짜를 거짓 예언하여 추종자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요한계시록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악의 세력이 미치는 않는 어느 곳으로 피신하여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식량 등을 준비한다든가, 적그리스도가 아직 나타난 것도 아닌데 베리 칩을 받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메시아닉 쥬의 등장과 토라 뿌리 운동으로 인해 다시 한 번 교계에 조용한 파문이 일고 있다.

 

종말론에 대한 곱상치 않은 시선

그러나 종말론에 대한 대부분의 교인들의 시선은 곱상치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나름대로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 여태까지의 개인이나 우주의 종말에 관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열매가 좋지 않았다.

오래 전 한국에서는 다미회가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여 한 동안 교계를 시끄럽게 했고 미국에서도 심심찮게 종말론을 잘못 이해한 사이비 집단들이 집단 자살과 같은 끔찍한 일을 자행해왔고 수시로 시한부 종말론을 남발하여 ‘양 치기 소년과 늑대 이야기처럼’ 식상한 소재가 되어버려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말론에 대해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하기 쉽다.

둘째, 아직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얼마 전부터 데이빗 차라는 얼굴 없는 사람이 등장하여 수십 년 전에 유행했던 각종 설(說)과 ‘카더라(~라고 하더라) 내용’을 담은 도서들의 재탕을 출판하여 고전적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그는 특히 세계 정부와 666의 출현 및 프리메이슨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모 기독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고, 비록 거대한 음모가 있고, 이들이 주인 노릇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 때의 미혹에 더 이상 속지 말라는 것이 그의 말의 요지다. 음모론이든, 프리메이슨이든, 그들의 행동과 음모론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할 린지의 휴거를 통해 한국 교계에도 대중화하기 시작한 종말론(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핵심은 신자들이 재림 예수와 공중에서 만나는 휴거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영향으로 종말론에 대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을 마치 ‘휴거’(rapture)라는 절정을 향해 진행되는 한편의 파노라마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계 정부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지구상에 환란이 시작되기 전에 신자는 모두 공중으로 휴거 되어 예수님과 함께 ‘구름 극장’에서 편안히 앉아서 지상에서 벌어지는 소름 끼치는 7년 환난을 유유자적하게 관망하다가, 환난이 끝난 후 예수님과 함께 지상 재림하여 문자적으로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의할 때, 신자는 모두 휴거 될 것이므로 지상에서 일어나는 환난은 신자들과 상관이 없다는 잘못된 안도감을 주고 있다.

필자도 초기에는 할 린지의 휴거를 몇 번이나 읽어 보고 종말에 관한 영화도 보고 대부분이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이 지은 각종 도서나 차트를 보면서 종말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된 것이 너무나 기쁘고 동시에 소명감도 느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전파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신학교에 다니고 또한 성경을 자세히 읽고 묵상하면서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성경의 여러 부분과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따르는 많은 성령 운동가들도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한 ‘선교적 사명’은 강조하지만 신자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세워지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선교적 사명은 신자 각자가 그리스도의 형상 회복을 위한 전초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도 12제자들에게 단순한 전도가 아니라 전도한 후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지키게 하라는 ‘전도와 성화’의 포괄적인 명령을 내리셨다(마 28:18-20).

한국에는 선교 초기에 당시 미국에서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선교사들이 소개한 바람에 초기에는 교파를 가릴 것 없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C. I. 스코필드라는 평신도 변호사가 세대주의적 관점에서 스코필드 주석 성경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당시 정규 신학교 과정을 거치지 못한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의 교과서가 되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세대주의의 기적 중지론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종말론을 포함한 나머지 대부분의 세대주의 신학은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아직도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따르고 있다.


셋째, 한국 교회에서는 어느 틈엔가 천국 상급에 대한 설교나 가르침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신자는 다음의 구절들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늘 마음속으로 ‘내가 죽은 후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어떤 심판 이것은 구원 여부가 아닌 상급 심판을 받을까’를 염두에 두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0-15).

일부에서는 구원 자체가 ‘상급’이므로 ‘구체적 상급들’은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은 성경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물론 하나님이나 예수님 자체가 우리에게 가장 큰 상급이지만 ‘믿음의 행위’에 대한 상급은 사람마다 분명히 다르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고백만 하고 구원 받은 강도와 평생 예수를 위해서 살면서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과 천국 가는 신분은 동일하지만 상급은 전혀 다르다. 강도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지만 바울은 많은 상급을 받았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신자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신앙생활도 잘 하면서 성공도 하고 부요하게 살고 큰 사역도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자기 영광, 세상 영광에 빠져서 천국 상급을 까먹는 경우도 많다. 특히 큰 사역을 한 목회자들 중에서 세상에 살면서 사람 영광, 세상 영광을 너무 많이 받아서 상급을 다 까먹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도 많다.

왜 한국 교회에서 천국 상급에 대한 설교나 가르침이 사라졌을까?

교회의 세속화와 성령 운동의 잘못된 여파도 있다고 본다. ‘잘 살아보세’라는 경제 개발운동과 더불어 오순절 운동의 건강·축복 복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비판은 하면서도 너도 나도 따르게 되었다. 또한 성령 운동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already)을 강조하면서 눈에 보이는 ‘능력’과 ‘축복’을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not yet)인 ‘고난’과 ‘회개’는 물론 ‘천국 상급’에 대한 언급은 인기 없는 주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후자를 더 강조한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기 때문이다(고후 4:18).

마지막으로, 계시록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계시록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계시록의 해석이 너무나 다양하여 어떤 종말론이 확실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실로 한국은 ‘계시록 춘추전국 시대’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교계는 20세기 초에 한국에 건너 온 선교사들의 영향과 할 린지를 통해 대중화 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 환난 및 천년 왕국 이전 재림)을 주로 세대주의자들과 오순절 계통 교인들이 따르고,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 Pre-millennialism. 환난 후 및 천년 왕국 이전 재림)은 많은 장로교인들이 따르고 있다. 그러다가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출신들이 학계에 대거 등장하면서, 어거스틴 이래로 루터,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이 '문자적 천년왕국'을 부인하는 무천년설(Amillennialism)(또는 성령 강림을 통해 실현된 천년왕국설(Realized Millenialism)이라고 부르기도 함)이 보수 장로교의 대표적인 종말론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성령 운동의 대부인 피터 와그너는 한때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였는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도미니언’ (Dominion. 정복. 창 1:28이 말하는 문화명령의 실천)과 사회를 변혁하는 ‘7대 산(영역)’을 강조하면서 보수적 후천년설(Historic Post-millennialism)을 지지하는 쪽으로 바꾸어졌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진다고 가정하지만 후천년설은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지다가 마침내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고, 유대인이 회복되고, 유례 없는 영적 번영을 누리는 천년 왕국이 도래하며, 이후 잠시의 배교를 겪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주장한다.

후천년설은 원래 세상은 진보한다는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청교도인 존 오웬, 조나선 에드워즈 및 찰스 핫지와 같은 개혁주의자들이 주창해 왔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세대주의 신학과 함께 20세기 초기에 인기를 끌면서 미국을 휩쓸었고 한국도 그 영향을 받아서 지금도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종말론이 되고 있다.

참고로 골수 기적중지론자인 미국의 존 맥아더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이다. 그는 기적중지론을 주창하기 위해서는 개혁주의자 행세를 하다가 종말론에 대해서는 개혁주의의 언약 신학(Covenant Theology)과 대척점에 있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주창하고 있다.  대부분의 개혁주의자들이 역사적 전천년설이 아니면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것과 대조된다.

또한, 맥아더는 7년 환난 중에 베리칩을 받더라도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극성파들의 주장을 부인한다. 참고로, 한국의 대부분의 장로 교단은 존 맥아더와 동일한 견해를 제시한다.

‘정치는 싫지만 내가 투표를 하지 않으면 더 나쁜 사람에게 휘둘리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장로교 대국인 한국에서 장로교는 칼뱅이 요한계시록 주석을 쓰지 않아서인지 절대 다수인 장로교에서 종말론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인 시한부 종말론이나 극단적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휘둘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한부 종말론이나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활개를 칠 때마다, 미국의 출판계에서 대중적 차원의 세대주의적 관점의 종말론적 자료는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데 비해, 장로교적 관점은 ‘그런 것이 신학적으로 틀렸다’고 지적만 할 뿐 사람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대중적 출판물들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손 쉽게 접할 수 있는 도서나 세미나나 유튜브(YouTube)를 통한 자료를 통해 관심과 스릴을 제공하는 잘못되거나 극단적인 종말론에 평신도는 물론 목회자들도 쉽게 물드는 것이다.

더군다나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에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유사한 견해를 가진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기 시작하고, 김종철 감독의 다큐 물인 『제3성전』이 세대주의 전천년설과 유사한 종말론을 암시하면서 한국 교계에 다시 한번 종말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는 여느 개신교처럼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유대인으로서 주로 유대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만, 메시아닉 쥬의 구약적 율법의 회복에 호감을 가진 비 유대인들 중 한국 교인들도 동참하고 있다. (‘메시아닉 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필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종말론과 계시록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으며, 부족하나마 나름대로 이런 문헌과 저런 기록을 통해 종말론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으며, 건전한 종말론을 위해서는 종말에 대한 다양한 해석법을 공부하여 객관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계시록의 해석 관점 

종말론과 계시록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계시록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해야 한다. 계시록의 해석이 상당히 복잡한 것 같지만 해석의 몇 가지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면 생각했던 것보다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상징과 비유와 숫자가 많은 계시록의 특정한 개별 구절의 해석이 쉽다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한 구절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의 해석을 어렵게 보는 이유는, 계시록을 구성하는 전체적인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어떤 책이든 그 책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그 책의 기록 특징을 살펴봐야 한다. 계시록의 기록의 특성을 중심으로 한 일반적인 해석 원칙은 다음과 같다.


계시록은 예언서이다(계 1:3; 22:6, 18)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forth-telling)과 앞으로 이루어 질 일(fore-telling)을 기록한 것이다. 여느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예언서인 계시록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며 동시에 앞으로 될 일을 기록한 책이다.

 

계시록은 서신서이다

계시록은 신약 성경의 서신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서언, 본문, 결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계시록은 서신서이기 때문에, 교회 시대의 어느 특정한 한 세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 시대 전체를 위한 책이다.

따라서 계시록 4장 이후는 교회의 휴거 이후 이 땅에서 일어나는 7년 대환란을 묘사한다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계시록의 말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 이외의 6교회와 계시록 5-22장까지는 신자들과는 상관이 없는 내용이 되고 만다.

그 결과 기록 당시 로마 당국의 핍박을 받은 신자들, 일본의 전제주의나 공산주의 치하에서 신앙으로 인해 핍박 받은 한국의 신자들, 지금도 적 그리스도와 같은 지도자나 제도에 의해 고통 받는 북한의 신자들, 기독교를 노골적으로 대적하고 핍박하는 이슬람 국가의 신자들과 계시록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다만 앞으로 다가 올 ‘7년 환난’이라는 가상의 기간 동안 신자들이 핍박 받는 것에만 적용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이런 해석은 다음에 언급하는 미래 해석법의 전형적인 오류라고 하겠다.

 

계시록은 묵시 문학의 형태를 지닌다

묵시 문학이란 주전 200년에서 주후 100년 사이에 성행하던 유대인의 문학 형식이다. 묵시문학의 특징은 유명한 성경 인물의 실명을 사용하여, 세상의 종말을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묵시문학은 현재의 인간 역사(history)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강조하며, 두 개의 엄청난 초자연적인 세력―주로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을 기록하여, 악하고 불의한 현 세대와 의롭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내용들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마치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모처에 재림하신다는 식의 주장은 삼가 해야 한다. 계시록의 핵심은 비록 신자들이 현세에서는 사탄의 공격으로 고통을 받지만 종말에는 하나님이 악한 세대를 멸하시고 의롭고 영화로운 세대를 만드신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계시록은 예언서이자 서신서이며 묵시 문학의 형태를 취했다는 원칙을 고려할 때, 계시록은 핍박과 고통과 환란에 처한 신자들에게, 비록 잠시 악이 성행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승리하신다는 소망을 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로마 제국의 핍박을 받은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일제 치하에서 고통을 받은 한국의 신자들은 물론 지금도 도처에서 핍박과 환란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가장 위로와 소망을 주는 책이 계시록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이런 다양한 관점이 아니라 한 두 가지 관점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그 뜻이 왜곡되거나 과장될 공산이 크다고 하겠다.

 

계시록의 여러 가지 해석방법

 

계시록을 해석하는 전통적인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계시록에 대한 해석법이 다양하기 때문에 해석자가 이 네 가지 중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종말론에 대한 견해가 달라질 수 있다. 이는 마치 어떤 색깔의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는가에 따라 사물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미리 지적하지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나 이에서 파생되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절대 다수가 미래 해석법을 취하면서, 극단적이고 경직적 문자적 성경 해석에 의해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이분법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교회’와 ‘유대인’의 구원을 구분하지 않는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대체신학(Replacement theology)이라고 비판하는데, 교부들이나 개혁주의자들 중에서도 로마서9-11장에 근거하여 교회의 구원과 달리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계시록을 해석하는 대표적인 해석 방법은 다음과 같다.

과거 해석법

계시록의 내용이 초대교회 당시에 모두 이루어졌다는 해석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로 하는 주장이다.

이런 방법으로 해석하면,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의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의 핍박에서 구원된다는 소망을 주는 책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계시록 13장의 짐승은 로마제국으로, 로마 황제 숭배를 촉구하는 사교의 제사장을 거짓 선지자로 이해한다.

당시 연약한 교회는 로마제국의 위협으로 인해 박멸 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요한은 이런 위협에 처한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곧 구원하실 것이므로 끝까지 신앙을 지키라고 기록한 책으로 이해한다.

 

역사 해석법

계시록을 초대교회부터 대종말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시대 전체에 대한 기록으로 이해한다. 이는 종교개혁가들이 주로 한 주장인데 계시록의 해석을 유럽의 역사와 대비하여 해석한다. 이 해석의 주요 특징은, 천주교 가톨릭 교회는 짐승이고 교황은 거짓 선지자라고 해석한다.

 

이상주의 해석법

역사적인 해석법이 계시록의 기록과 구체적인 역사를 대비시켰다면, 이상주의 해석법은 계시록의 특정한 사건들을 상징적으로 이해하여 교회시대 전체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이라는 일반적 원칙에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핍박은 어느 한 특정한 시대나 한 사건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시대 전체에 걸쳐 교회를 핍박하는 적대적인 세력 전체를 상징한다. (예, 짐승은 로마 제국, 천주교, 히틀러의 3제국, 공산주의. 이슬람 국가 등).

 

미래 해석법

할 린지를 위시한 세대주의자들이나 오순절주의자들이 주로 하는 주장이다. 특히 세대주의 전천년주의자들은 계시록의 7교회는 초대교회(에베소교회)와 말세의 교회(라오디게아교회)를 시간 순서로 기록한 것이며, 4장 이후는 교회가 휴거된 이후 일어나는 7년 대환란을 기록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주장대로 한다면 계시록은 초대교회의 핍박 받은 신자들이나 일제 시대에 고통 받은 한국인 순교자들은 물론 지금도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국가에서 핍박을 받는 신자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책이 되고 만다. 계시록이 교회 시대의 신자들 전체를 대상으로 기록된 서신서라는 사실에 위배된다.

이 주장의 주요 특징은 ‘교회’와 ‘이스라엘’을 날카롭게 구분하여, 구약에 기록된 미래적인 예언은 교회와는 상관없는 이스라엘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여 이것이 천년왕국에서 문자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계시록 해석의 대원칙이 네(요한)가 본 것과 (과거)과 이제 있는 일과(요한의 현재) 장차 될 일(요한 이후의 장차) 임을 감안한다면, 계시록의 대부분을 대종말의 미래 사건으로만 해석하는 미래 해석법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종합 해석법

계시록은 과거 해석법, 역사 해석법, 이상주의 해석법 및 미래 해석법 전체의 종합적인 원칙 하에 해석되어야 한다. 계시록은 초대교회 신자들은 물론 교회시대―유럽은 물론 전세계의 교회―전체를 통해 모든 신자와 교회를 핍박하는 모든 세력들에게 적용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7 교회는 시간 순서가 아니라 교회 시대 전체를 대표하는 교회이다. 7 교회는 요한 당시에 실제로 존재한 교회이며, 오늘날의 교회 또한 7 교회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즉 오늘날의 교회 중에서도 에베소 교회, 사데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첫사랑과 뜨거움을 잃어버리고 신앙의 형식주의, 관념주의, 전통주의에 젖은 소위 말하는 '죽은 정통의 교회’가 있고, 또한 버가모나 두아디라교회와 같은 ‘이단성 있는 교회’도 있다. 예수님은 죽은 정통의 교회나 이단성 있는 교회를 똑같이 칭찬하시고 똑같이 책망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물론 빌라델비아 교회나 서머나 교회같이 칭만만 받는 교회도 있다.

 

시간 순서냐, 주제별 순서냐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시간 순서로 해석할 것인가, 동일한 사건의 반복으로 해석할 것인가?

 

*세상의 역사관과 기독교적 역사관

세상의 역사관은 순환론적이고 반복적인 역사관이지만 기독교의 역사관은 창조와 진행과 대종말을 향해 진행되는 일직선적 역사관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역사관에 반복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 만사가 대종말을 향해 일직선으로 진행되지만 대부분의 종말론적 사건들이 반복되면서 종말을 향해 진행된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질병과 핍박과 환란과 같은 종말론적 현상들은 예수님의 초림 이래로 지금까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꾸준하게 반복되면서 진행되어 왔고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세대주의적 천년설은 직선법 역사관을 강조하면서 이런 현상들이 마치 대종말의 때에만 일어나는 것처럼 주장한다.

미래 해석법은 계시록의 사건을 시간 순서에 따라 해석하기 때문에 계시록 4장 이후는 (휴거 당한) 신자들과는 상관이 없는 내용이 되고 만다. 계시록의 4장에서 20장까지는 이 땅에 남은 불신자들에게 임한 7년 대환난을 묘사한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록은 시간 순서가 아니라 동일한 사건의 반복을 기록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계시록은 전체적으로 7개의 동일한 사건의 반복을 기록한 책인데, 초기부분은 초대교회에 대한 기록이 많고 후반에 갈수록 대종말에 관한 기록이 많다. 이런 기록법을 "점진적 병행법"(Progressive Parallelism)이라고 한다.

즉 계시록의 1-3장, 4-7장, 8-11장, 12-14장, 15-16장, 17-19장, 20-22장은 모두 동일하게 초대교회와 종말의 사건을 기록하는데, 초기의 장들은 초대교회 시대의 사건을 보다 자세히 기록하고 후기의 장들은 종말의 사건을 보다 자세히 기록한다. 계시록의 큰 사건 하나 하나가, 비록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이 성행하여 신자들이 핍박과 고통을 받지만 종말에는 의인이 반드시 승리하고 악인은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계시록은 일부에서 말하듯 휴거에 동참한 신자들은, 불신자들이 지상에서 7년 동안 대환난의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예수님과 함께 구름 극장에 앉아 유유자적하는 신앙생활을 그린 것이 아니라, 교회 시대 전체를 통해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적대적인 세력의 핍박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절개를 버리지 않은 신자들이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는 소망과 위로의 책이요 찬양의 책이다. 신약에서 유독 계시록에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자주 기록된 이유이다(계 4:8-11; 5:9-14; 7:9-12; 11:16-18; 15:2-4; 19:1-8).


"할렐루야 구원과 능력과 영광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 .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는도다"(계 19:1, 6). *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23

요한계시록과 천년왕국

-재림 전 천년왕국이냐, 재림 후 천년왕국이냐-

종말론은 육신을 가진 성도들이 천국을 사모하는 것과 동시에 이 땅에 살면서 가장 관심을 가지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종말론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고 이단들이 가장 많이 오용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중에서도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대중적으로 가장 보편화된 종말론이다.

언제가 세상의 종말인가?

지난 글에서 이미 밝혔듯이 예수님이 초림하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 하신 후 모든 육체-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이래로  종말은 시작되었다. 성령을 부어주심은 종말론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행 2:17).

종말론적인 현상(들)인 전쟁과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과 핍박은 예수님의 초림 이래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로마 시대에 기독교를 가장 극심하게 핍박한 네로 황제(A.D. 54-68)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A.D. 8-96), 서기 79년 폼페이 시를 초토화한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 유럽 인구의 삼분지 일에 해당되는 2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흑사병(1347년 시작), 가히 아마겟돈 전쟁이나 곡과 마곡의 전쟁이라 할만한 제1,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그런데 극단적 종말론자들은 이런 사건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는다. 과거에 일어난 이런 재앙들에 대한 관심은 없고 마치 예수님의 재림 즈음에 일어나는 현상들만 종말론적 현상인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예수님은 종말에는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겠지만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고 말씀하셨다.

 

여러 가지 천년왕국설 

천년 왕국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다.

천년 왕국설은 계시록 20:1-6의 ‘천 년’을 문자적으로 보느냐 상징적으로 보느냐, 천년 왕국 이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느냐, 이후에 재림하시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로 갈라진다. 천년 왕국이란 현세와 내세 사이의 과도기적 세상으로 그리스도와 성도가 통치하는 이상적인 세상을 말한다(사 11:6-9, 65:18-25, 겔 37:24, 슥 8:12, 14:17-19, 암 9:13).

 

•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

후천년설은 세상이 진보하고, 개선되다가 마침내 지상 낙원이 된다는 주장이다.

-자유주의적 후천년설

예수는 하나님이나 우주의 주인이 아니라 ‘도덕적 모범’이며, 세상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가 쌓이면서 점점 좋아지다가 마침내 지상 낙원인 천년 왕국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또는 보수주의적 후천년설

영적 부흥과 세상의 진보로 인해 문자적 천년 왕국을 누리다가, 잠시 후 짧은 배교의 시기 즉 선악 간의 극심한 전쟁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그리스도의 재림, 성도의 부활, 최후의 백보좌 심판으로 세상의 역사는 마무리된다고 주장한다.

 

 

 

*종말 사건의 순서  

 (1) 선의 점진적 향상. 복음의 확산으로 인해 세상에는 악의 영향이 점차적으로 감소된다.

 (2) 천년 왕국. 복음의 세계 전파로 인류 대부분이 신자가 되는 이상적 사회를 이룬다.

 (3) 대배교와 대환난. 천년 왕국이 끝날 즈음에 결박되었던 사탄이 잠시 놓임을 받아서(계 20:3) 참 신자가 되지 못한 자들을 하수인 삼아 이 세상을 어지럽힌다. 이를 칠 년 아마겟돈 전쟁, 곡과 마곡의 전쟁으로 표현한다.

 (4) 예수님의 재림. 대환난의 절정기에 재림하신다.

 (5) 성도들의 대부활. 모든 성도들이 부활한다.

 (6) 대심판(백보좌 심판). 악인들에 대한 공의의 심판으로 영원한 형벌이 주어진다.

 (7) 새하늘과 새땅. 대심판 후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후천년설(後千年說) 평가

자유쥬의적 후천년설은 일반 역사와 조화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지나친 인본주의적 사고와 낙관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편 보수적 후천년설은 계몽주의와 이성주의와 과학주의가 팽배하던 시기에 많은 청교도들과 개혁주의자들(John Owen, Jonathan Edwards, Charles Hodge, Benjamin Warfield 등)이 영적 부흥과 사탄의 세력의 점진적 약화로 인한 낙관적인 미래를 꿈꾸면서 후천년설을 주창해왔다. 그러나 제1차 대전으로 인해 비관적 미래관이 팽배해지자 인기가 시들해졌다.

그런데 최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고, 일터 사역을 통한 ‘7대 산(영역)’의 정복을 통해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론을 지향하는 성령 운동의 대부인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이전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버리고 보수적 후천년주의자가 되었다.

 

•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그리스도가 재림 하신 후 문자적 천년 왕국이 실현되어 그리스도와 더불어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천년 동안 왕노릇 한다는 견해이다.

전천년설에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역사적 전천년설이 있다.

- 세대주의적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

세대주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7단계의 세대’로 구분하고 그 마지막에 천년 왕국을 둔다.

 

 

 

*종말 사건의 순서 

(1)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공중 재림은 모든 사람이 보는 지상 재림 이전에 성도들만을 위한 비밀스런 재림이다.

(2) 성도의 부활과 변화 및 휴거. 이미 죽은 성도는 부활하고, 살아서 재림을 맞은 성도는 순간적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에게로 들림을 받는다. 세대주의자들 중에서도 휴거에 대한 4가지 다른 견해가 있지만 환난 전 휴거설이 가장 대중적이다.

(3) 어린양의 혼인 잔치. 공중으로 휴거된 성도들과 그리스도가 함께 잔치를 벌인다. (2)(3)(4)는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4) 복음의 재전파와 이스라엘의 회심. 한편 지상에서는 휴거되지 못한 자들에 대한 복음 전파와 이스라엘의 대 회심이 일어난다.

(5) 대환난과 적그리스도의 출현. 7년 동안 지상에 대환란이 일어난다. 비교적 온건한 전3년 반의 환란기에는 복음 전파와 이스라엘의 대회심이, 극심한 후 3년 반의 대환난기에는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세계 정부의 출현으로 인한 대환난이 일어난다.

(6)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7년 대환난이 끝난후, 휴거되었던 성도들과 함께 지상으로 재림하신다. 이때 그리스도는 대환난 때 죽은 성도들을 부활시키고 아마겟돈 전쟁을 통해 적그리스도를 멸망시키고 사탄을 천년 동안 감금한다.

(7) 천년 왕국 건설. 성전 제사가 회복되지만 구원을 위한 제사가 아닌 기념을 위한 제사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환난 기간 중 회심한 유대인이 주체가 되어 천년 동안 다스린다.

(8) 사탄의 일시적 석방. 천년 왕국 마지막 즈음에 결박되었던 사탄이 잠시 풀려남으로써 혼란과 무질서가 있다.

(9) 곡과 마곡의 전쟁. 사탄의 사주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문자적 의미의 대전쟁이 일어난다.

(10) 사탄의 멸망. 사탄이 결국 불못에 던져지며 영원토록 이곳에 머문다.

(11) 악인의 부활과 대심판. 성도의 부활보다 천년 늦게 사망의 부활을 통해 지상에서 지은 범죄에 대해 심판 받는다.

  (12) 새하늘과 새땅. 악이 완전히 제거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리스도의의로 힘 입은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

 

*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평가         

상징과 암시가 많은 계시록을 단순하게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호기심은 충족시킬 수 있으나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만든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과 천년 왕국 사상은 원래 구약과 신약의 중간 시대에 유대교(Judaism)가 묵시적 문학을 통해 내세운 주장이다. 유대인들은 현세와 내세를 구분하면서, 내세는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어 이스라엘 국가가 재건되는 황금 시대를 누린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초대 교회의 많은 교부들도 유대교의 전천년설과 지상 왕국설(천년 왕국)을 수용했다(Justin Martyr, Irenaeus, Tertullian 등). 그러나 반(反) 유대주의가 심해지면서 어거스틴(Augustine)은 무천년설로 돌아섰다. 그러다가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다시 세대주의 신학과 결합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1830년대에 영국의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1)가 주창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평신도 변호사인 C.I. 스코필드(C.I. Scofield)가 『스코필드 주석성경』을 통해 대중화시킨 주장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흠집 투성이인 이 주장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20세기초에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성행하면서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때에 근본주의 신학과 함께 전천년설의 종말론을 가르치는 스코필드의 주석성경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가 되어 전 미국에 급속히 전파되기 시작했다.

근본주의 신학(Fundamentalism)이란 20세기초 유럽과 미국에서 급격하게 확산되어 가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기 위해, 보수 장로교, 침례교 및 기타 교파들이 1878-1897년에 걸쳐 개최된 미국의 나이아가라 성경 컨퍼런스(Niagara Bible Conference)에서 채택한 5가지 근본 교리 즉 성경의 무오류성,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 예수님의 육체 부활 및 그리스도의 재림에 기초한 신학을 말하며 이런 교리를 지지하는 사람을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s)라고 부른다.

또한 20세기 초에 오순절 운동이 시작되면서 정규 신학과정을 거치지 못한 오순절주의자들이 스코필드 주석성경을 통해 신학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세대주의의 기적중지론은 무시했지만 종말론은 물론 다른 신학은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군다나 1960년대의 중동 전쟁을 계기로 온 세상이 제3차 대전 발발의 두려움으로 인해 불안해하고 있을 때, 철저한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근거한 할 린지(Hal Linsey)의 The Late, Great Planet Earth와 『휴거』(Rapture)가 종교분야 서적으로는 드물게 New York Times의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천 만 부가 팔리면서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가장 인기있는 종말론이 되었다.

이후 휴거, 7년 환란, 666, 세계 정부를 통해 세상을 지배하는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강조하는 세대주의 종말론은 세상에서 종말론적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고개를 내밀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몇 년 전만 해도 팀 라헤이(Tim Lahaye)와 제리 젠킨스가 1995년부터 공동 저술한 ‘레프트 비하인드’(Left Behind. 휴거되지 못하고 남겨짐)는 12개의 제목으로 저술되었는데 누적 판매 수가 6500만부가 팔릴 정도로 또 다시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할 린지의 저서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세대주의적 천년설에 근거한 저술들이 어지간하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기 때문에, 많은 세대주의자들이 걸핏하면 종말론적 현상들-블러드 문, 베리 칩 등-관련 저서를 출판하여 돈 방석에 앉고 있다. 한때 미국에서 블러드 문(Blood moon)에 대한 저서들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자 여기저기서 재탕 삼탕의 책들이 출판되어 양식 있는 자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데이빗 차의 이런 류의 저서들이 꽤나 많이 팔린 것 같다. 이런 류의 책들은 마치 탐정 소설이나 엽기적 소설처럼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잘 팔리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종말론에 대한 건전한 성경적 지식을 갖고, 종말론적 삶을 살면서 자신의 삶이나 내면을 살피기 보다는 매스컴을 타는 각종 종말론적 현상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신의 내면 정화를 정당화하려는 성향이 다분한 것 같다.

그러나 필자도 수십 년 동안 종말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열풍을 관찰해 왔지만, 종말론적 현상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갖고 휴거의 시점을 연구해 본 들, 본인 자신의 삶의 변화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건전한 종말론은 종말론적 현상(들)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달란트 비유에서처럼(마 25:14-30) 이 땅에 사는 동안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핍박과 환란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이지(마 24:9-13), 센세이셔널한 종말론적 현상이나 시한부 종말론에 부화뇌동하여 정상적인 삶을 내팽개치고 교회에 모여 기도만 하거나 환란의 불똥이 튀지 않는 모처로 피신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건전한 종말론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면서(살후 3:6-15), 불신자를 전도하고 주님 만날 것을 사모하면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정결하게 단장하는 일에 매진하게 한다(살전 4:3-6; 5:23; 요일 3:2-3; 벧전 1:13-16 등).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치명적인 약점은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 내용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제이 아담스(Jay Adams)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사팔뜨기 눈을 하면 동일한 물체가 두 개로 보이듯,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을 단어가 다르면 개념도 다른 것처럼 해석하여, 이스라엘과 교회가 다르고, 여호와의 아내와(호 2:2) 어린양의 신부가(요 3:29; 계 19:6-8) 다르고, 여호와의 날과(사 13:6,9; 겔 13:5,30:3; 암 5:18,20 등) 그리스도의 날이(고전 1:8; 빌 1:10; 2:16) 다르고, 예수님의 공중 재림(마 24:31; 살전 4:17; 고전 1:7 등)과 지상 재림이 다르다는 희한한 해석을 하게 된다.

물론 성경은 문맥에 따라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을 병행해야 하지만 세대주의는 특히 구약 성경의 예언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은 신약의 ‘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모두 혈통적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한다. 그것도 예언의 시점에서 가까운 과거가 아니라 멀리 있는 대종말의 ‘천년 왕국’에만 해당되는 예언으로 해석한다.

그 결과 신약의 교회 시대는 구약의 예언과는 상관이 없는 (괄호 안의 시대)이므로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때에 교회가 휴거되고 난 후 혈통적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기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대로 하면 교회는 벌써 휴거 되었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휴거된 이후 7년 환난 기간 중에 유대인들이 본격적으로 회심하기 시작하는데, 교회가 휴거되기 전인 1960~1970년대부터 유대인들이 대거 회심하면서 메시아닉 쥬가 탄생된 것과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와 이스라엘에 대한 평행적 이분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일자 일부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교회 시대’에 ‘적용’되었거나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지만 천년 왕국 시대의 유대인을 통해서 완전히 성취된다는 점진적 세대주의(Progressive Dispensationalism) 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예언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14; 28-29).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분이 없어졌다.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5-16).


히 12장이 말하는 시온 산과 하늘의 예루살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확대된 개념이다.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3).


신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이다(엡 2:16; 롬 12:5; 고전 12:27; 엡 1:23).

 

*숫자의 ‘문자적 해석’의 결함 

세대주의는 성경의 숫자를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성경 시대 전체를 7천 년으로 간주하여 6000년은 이미 지났으므로 교회가 곧 휴거하고 지상에서 7년 환란이 끝난 후 문자적인 1000년 왕국이 도래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말하는 천년 왕국은 ‘부활하여 썩지 않는 몸을 가진 성도’와 구원은 받았지만 ‘자연적 육체를 가진 유대인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불완전한 세상을 다스리는데 유대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시한부 종말론이 극성을 부리는 이유는 성경의 숫자를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이 생각하는 시점과 꿰 맞추다 보니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지만 아직도 인터넷이나 유투브(You Tube)에 휴거 날짜를 제시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때와 시는 예수님도 모르신다는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있는 신자들에게 그 날은 도적같이 돌발적으로 불현듯 임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때는 모르지만 반드시 일어날 일로 기대하고 있었던 일로 받아들이게 된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4-6).  그러므로 성경의 숫자 해석에는 각별한 유의가 필요하다.

세대주의자들은 역사적 숫자와 묵시적 숫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문자적으로 해석하니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된 70년은 역사적 숫자, 문자적 숫자이지만 다니엘이 말하는 7이레, 62이레 및 한 때 두 때 반 때 즉 ‘3때 반’을 한 때를 일 년으로 가정하여 3년 반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계시록에 나오는 14만4000명도 문자적 숫자로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은 이단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해석이다.

 

미래에 대한 예언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많은 문제를 유발한다.

예를 들어, 1970년대에 각광을 받은 휴거의 저자인 할 린지는 당시 매스컴의 관심을 끌었던 유럽 연합(EU)이 성경이 말하는 열 뿔이며-현재 회원국은 10개 국이 아니라 28개 국이다- 회원국의 우두머리가 유대인인 적그리스도이며, 당시 미·소 냉전 상태가 곧 아마겟돈 전쟁의 전조이며, 이스라엘이 1948년에 독립한 후 ‘이 세대’-40년으로 해석-안에 주님이 오신다고 해석하여 1988년에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인기 있는 성경 교사인 해롤드 캠핑(Harold Camping)도 수시로 휴거 날짜를 예언했다가 무위가 되어 버린 사례가 빈번하지만 휴거 날짜에 대한 예언은 끊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모월모일 모처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왕복 항공 티켓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행동들인가?

이단과 사이비들만이 이런 오류투성이의 예언을 남발하는 것이 아니다. 할 린지, 해롤드 캠핑, 심지어는 척 스미스(Chuck Smith) 같은 보수적인 목회자들도 휴거 날짜를 잘못 예언하여 사람들을 혼란 속으로 빠뜨리고 있다. 성경의 숫자를 지나치게 경직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오류가 시정되지 않는 한 이런 소동은 과거는 물론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 or Classic Pre-millennialism)

세대주의 전천년설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환란 후에 재림하신다. 또한 세대주의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을 구분치 않고 두 가지 사건을 단회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때 휴거되어 그리스도를 환대한 후 곧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지상 재림하여 천년 동안 왕노릇한다.

 

 

 

*종말 사건의 순서 

(1) 대 배교, 대 환난.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졌을 때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성도에게 큰 어려움이 닥친다.

(2) 그리스도의 재림. 대환난의 절정에 지상 재림이 이루어진다.

(3) 죽은 성도의 부활. 죽은 후 천상에서 영혼의 상태로 있었던 성도들이 그리스도 공중 재림과 더불어 부활한다(계 20:5,6).

(4) 성도의 휴거. 부활한 성도와 변화된 성도들이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살전 4:16,17). (2)(3)(4)는 시차가 없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5) 사탄의 결박. 사탄이 그리스도에 의해 아마겟돈 전쟁에 패함으로 이렇게 된다(계 20:2,3).

(6) 천년 왕국. 죄의 근원이었던 사탄이 결박되고 이 땅에는 그리스도의 통치로 평화와 공의가 이루어진다.

(7) 곡과 마곡의 전쟁. 천년 왕국 마지막에 사탄이 잠시 풀려난 후, 곡과 마곡을 하수인 삼아 그리스도의 나라를 대적한다(계 20:8,9).

(8) 사탄의 멸망. 사탄은 다시 결박되며 영원한 유황불에 던져진다(계 20:2,3).

(9) 악인의 부활과 대심판. 심판을 위한 부활에 이어 영원한 고통 속에 처해진다.

(10) 새 하늘과 새 땅. 악인의 심판과는 반대로 구원받은 자는 영원한 고통 속에 처해진다.

 

*역사적 전천년설 평가  

세대주의와는 달리 성경을 일관되게 해석했다는 특성이 장점일수 있다. 일제의 고난 가운데서 한국의 신자들이 가장 위로를 받은 것도 천년 왕국에 대한 소망이었고 아직도 한국의 많은 장로교인이나 보수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부활한 몸으로 변한 천년 왕국 시기에도 여전히 악인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세대주의 전천년설과 마찬가지로 문자적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자들의 결정적 약점이다(J.A. Bengel, J.P, Lange, G. E. Ladd 등).  어떻게 해서 죄가 없는 상태에서 천년 왕국에서 지낸 성도의 후손들이 천년 왕국의 마지막에 사탄의 유혹을 받아 다시 죄인이 된다는 말인가? 계시록 20장의 ‘천 년’이란 단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이런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