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골라 당의 행위(요한계시록 2:6)


니골라 당의 행위(요한계시록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미워하는 것이 있다.
그것을 "니골라당의 행위"라고 하셨다.

니골라 당(the Nicolaitanes)이란?

니골라 당(the Nicolaitanes)은 성경에 두 번 언급된다.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한 번(계 2:6) 언급되고,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에 다시 한 번 언급된다.

에베소교회는 '니골라 당의 행위이고,
버가모 교회는니골라 당의 교훈이다. (계 2:15)

  • 사도행전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 요한계시록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 요한계시록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렇다면 도대체 니골라 당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놀랍게 니골라 당의 기원이 되는 니골라는 초대교회 최초 일곱 집사 중 한 명이다.
니골라가 언급된 사도행전 6장으로 가보자.

[사도행전 6:1-7]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성경은 니골라와 니골라 당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한다. 하지만 발람과 니골라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본다. 이것은 니골라 당의 특징 돈을 받고 예언하고 악한 지혜를 가르쳐준 발람의 교훈을 동일하게 따르고 있다는 뜻이다. 신약적 의미에서 발람의 교훈은 돈을 위해 복음을 변형시켜 팔아 먹는 모든 행위를 의미한다.

이필찬은 발람과 연관시켜 이렇게 말한다.

"곧, 과거에 발람이 거짓된 교훈으로 이스라엘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했던 것처럼 버가모 교회 공동체 안에 그와 같은 가르침이 있다는 것이다."[이필찰 <내가 속히 오리라>이레서원, 145]

초대교회 문헌에 의하면 니골라는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 이분법적 영혼을 주장하여 구원 받은 성도는 더이상 도덕적 순결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은 헬라철학 영향의 영향 아래 있는 고린도교회에서 깊이 스며있다. 그러나 계시록은 발람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 방탕이기 보다는 돈을 위해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마땅하다.

데이비드 E. 아우내는 요한계시록을 주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필자의 자의 대로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1) 니골라는 이방인이었다.
(2) 그는 안디옥 토박이였다.
(3) 그는 유대교 개종자였다.
(4) 일곱 집사 중 마지막 언급되것으로 보아 비교적 지위가 낮았을 것이다.
(5) 그는 역시 일곱 집사 중의 한 명이었던 스데반과 유사하게 성전과 율법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6) 사도행전 8:1에 언급된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예루살렘으로 도망갔을 것이다.(이부분은 오타갔다. 문맥상으로 '예루살렘으로'가 아니라 '예루살렘으로부터'이어야 한다.)
초대교부였던 이레니우스는 니골라 당이 가르치는 오류들에대한 응답으로 요한복음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역시 다른 교부었던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는 니골라 당의 이단 운동이 안디옥 니골라 추종자들의 오해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부도덕과 성적 방종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니골라를 변호하고 니골라의 동이가 순수했다고 생각한다.
[출처 WBC 요한계시록 1

니골라 당의 행위와 교훈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지만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반적인 흐름에 의하면 니골라는 복음이 자유를 강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는 어느 부분 오해할 소지를 많이 남겼다. 니골라의 가르침을 받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극단으로 몰아가서 헬라철학을 율법보다 더 우위에 두고 말았다. 즉 구원 받은 사람은 자유하기 때문에 더 이상 육신적 계명에 따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영과 육의 현저하 구분과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이에 대해 반그노시적 사상을 견제하기 위해 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해 말씀이 곧 육신임을 천명한 것이다.

우리는 두 구절을 생각할 때 두 구절은 의도가 약간 다르다.
하지만 중요한 핵심은 정확히 일치한다.
그것은 세속성이고 속물적 근성이다.
그들의 중심에는 존귀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탐욕과 욕망이 자리한다.
그들은 물질 숭배자들이며 방탕한 삶을 이끄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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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가모 교회의 신학이 된 나골라당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

 

제1세기의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나타났던 “니골라당의 행위”가 버가모 교회에 와서는 “니골라당의 교훈”(doctrine, 교리)으로 발전되고 체계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한 번 빠지면 벗어나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니골라당의 교리에서 벗어나려면, 세상을 포기하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버가모 교회 지도자와 신학자들은 태양신교 교리와 기독교 교리를 혼합시킨 교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니골라당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타협한 죄를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 버가모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더는 순종과 행위에 얽매지 않는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람들의 귀에 그런 철학적 주장은 매우 고상하게 들렸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초대 교회부터 3백 년 동안 걸어온 가난과 좁은 길 신앙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니골라당 교리는 크게 환영 받는 교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로마 황제의 눈치를 보면서 태양신교의 교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버가모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니골라당의 교리는 그들의 입지를 지켜주는 강력한 신학이 되었습니다. 니골라당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논리 때문에 수많은 성경의 진리가 변질되었고 태양신교의 행습이 기독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니골라당의 핵심 교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의무로부터 해방시켰다.”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사탄은 이런 니골라당의 교리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지금까지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거짓 구원론은 그 원조를 니골라당의 교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마음으로 순종할 때 얻게 되는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뜻합니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6~18, 22).

 

버가모 교회에서 발람의 죄에 빠진 지도자들은 돈과 세속과 권력을 탐하였고, 그런 모습을 본 사탄은 버가모 교회 속으로 니골라당의 교리를 깊숙이 밀어 넣을 수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타락의 길을 걸었고 영적으로 완전히 몰락하였습니다. 두려운 사실은, 현대 기독교회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속적 물결과 안일함과 권력이 현대 기독교회에 깊숙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그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유의 의미를 곡해시키는 니골라당의 주장이 마치 진리처럼 포장되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교인들이 불순종과 세속적인 삶 속에서도 “나는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호소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예수님) 네게(버가모 교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 2:16)

 

 예수께서는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아들인 버가모 교회에게 회개하라고 호소하셨습니다.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검(칼-말씀)으로 싸우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예수님이 보살피고 인도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과 싸우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받아들인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가 얼마나 악한 것이면 예수께서 직접 검을 들고 싸우겠다고 하셨을까요? 소수의 충성된 안디바는 목숨을 걸고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엄숙한 경고를 전했습니다. 버가모 시대에는 안디바가 예수께서 직접 붙잡으시고 사용하신 종들이었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발람의 죄에 빠진 교회 지도층을 따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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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 당은(Nicolaitan) 사람이 우선이라는 뜻으로 인권 위주의 가르침을 전했다.

사람을 우선시하면 교회가 부패하며,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한다.
세속주의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교회에서 하나님보다 사람을 우선시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미워하는 에베소 교회를 하나님께서 칭찬하신다.
‘너희 교회가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 보수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내가 정말 귀하게 생각한다.’
성경은 사람의 기준을 따르지 말라고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기준으로 끌어올린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나에게 와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또 세상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회개하라.’
회개하라는 것은 당장에 중단하라는 뜻이다. ‘이제는 세상과 타협하지 마라.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 마라.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마라. 그리고 회개하라.’
우리가 생각하는 회개는 보통 감정적인 후회, 혹은 어떤 행위적인 변화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회개는 뿌리의 변화를 말한다.
즉, 나를 나 되게 하고 내가 인정받아서 내 인생의 존재 이유를 찾고, 내가 끊임없이 물을 주어키웠던 그 뿌리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그동안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사랑받기 위해 계속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다 보니 허랑방탕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뿌리를 바꾸는 것은 그 사람들의 뿌리에서 하나님의 뿌리로 옮기는 것이다.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내 삶의 생명수의 원천을 깊이 파서 마시는 것이다.
나의 유일한 관심의 대상을 하나님의 목소리에 두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길로만 달려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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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골라당의 행위란 무엇인가?

십자가(十字架)의 도(道)
육체로 내려와서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이것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할 것이다.
죄 값을 단번에 해결하셨다(지불하셨다).

니골라 당´이라는 말은 성경에 2번 나옵니다(계 2:6, 2:14).
성경을 읽지 않는, 소위 일요일 교인들(Sunday Christian)들 중에서는 이 용어가 성경에 나오는지조차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니골라당 교리의 시작(the Nicolaitanes)

니골라 당은 두 곳, 곧 에베소 교회(계 2:6)와 버가모 교회에 주시는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계 2:14).

에베소 교회는 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 중의 첫 번째 교회로서 사실 사도바울이 소아시아에 개척한 교회입니다.
또한 일곱 교회들은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던 당시인 A.D. 92년-95년경 소아시아 지방에 실제로 존재하던 교회들로 영적으로는 교회가 시작한 오순절 성령강림 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교회가 휴거되기까지)의 교회역사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성령 충만한 일곱 집사를 택하지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이가 있는가 하면 이상한 교리를 만든 이가 있습니다.

특히 에베소 교회는 교회사에서 교회가 시작된 때로부터 A.D. 100년까지를 말하며,
버가모는 A.D. 325년-500년까지의 교회 기간을 말합니다.

'에베소' "처음 사랑"이란 뜻이며, 버가모 "많은 결혼"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니골라 당'이 언급된 두 성경구절을 자세히 비교하여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에베소 교회 기간에서는 단순히 "니골라 당의 행위“들이 "버가모 교회의 때에는 "니골라 당의 교리"로 바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시작이 완전한 악의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 당시(에베소 교회 기간)에는 "행위들"에 불과했던 것이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버가모 교회 기간) 교회가 정치권력과 결탁함으로써 "교리"라는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그 후 콘스탄틴 황제 이후 로마 카톨릭이 그 싹을 트면서 이 "성직 교리"를 자신들의 교리로 정착시켰고, 관료주의적인 성직계급이 체계화 되었습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당의 교훈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 발람의 교훈을 니골라당의 교훈과 연계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발람의 교훈이 신약에 와서 니골라당의 교훈과 일치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해 줍니다. 사단은 발람의 교훈으로 이스라엘을 저주받게 했던 것처럼 니골라당의 교훈으로 버가모 교회를 저주받도록 한 것입니다. 니골라당 이란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출된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니골라에 의해 창시된 교회 안의 한 파당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니골라는 새로운 교리를 세워 그 교리를 따르는 무리들과 한 당파를 형성했는데 초대 교회에서 이들을 가리켜 "니골라당"이란 이름으로 불러져 온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니골라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영혼과 육체를 분리해서 육체적 범죄는 구원에 영향이 없다는 교리를 내세웠던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영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육체로 범죄 해도 그 범죄로 인하여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이 같은 그의 새로운 교리는 아직 회개하지 못한 무리들이나 이방 종교의 생활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일부 버가모 교인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이 교리는 사단의 교활한 유혹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이단적 교리로써 말하자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음행 죄나 우상 숭배 죄를 범해도 그것이 그 사람을 구원에서 떨어트릴 수 없으며 이방인 중에 혹 음행이나 우상을 섬기는 일을 계속하고 있어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발람의 교훈처럼 하나님의 백성들로 범죄의 길로 이끄는 사단의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버가모 교회에 어느덧 니골라당의 이 같은 이단적 교리가 들어와 교인들을 유혹하였고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많이 생겨난 것입니다.

현시대적 교훈

현재도 이 사상과 똑같은 가르침으로 한국교회를 잠식해 가는 무리가 있습니다. 니골라당의 사상은 마치 현 구원파의 교리와 유사합니다(권신찬, 박옥수 계통...). 이들은 교묘히 정통교단인 듯한 간판을 붙이고 나와 외부에서는 분별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소위 믿는 그 순간(구원받은 시간)을 강조하며, 그 이후로는 어떠한 죄도 없이 의로운 상태에 들어갔으므로 올바른 믿음을 가진 인간이라면 더 이상 죄의식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며 또한 기도는 감사와 간구의 기도만 해야지, 회개의 기도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니 순진한 많은 양떼들이 미혹 받고 있습니다. 여하튼 주기도문을 하지 않고, 회개기도를 하지 않고, 죄의식을 느껴서는 안 되며, 방종하게 살아도 된다고 가르칩니다.

구원 받은 시점이 언제냐 등의 질문 등으로 교리전파를 하는 행위는 의심의 여지없이 100% 니골라당의 소행인 것입니다. 이 같은 교리가 악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교묘히 죄와 타협할 수 있는 편안한 통로를 갖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라는 것이 하나님의 바라심인데, 세상과 타협할 수 있는 길을 자유롭게 열어주게 되니 그 본질이 마귀의 사상인 것입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은 발람의 교훈과도 함께 상고해야할 중요한 대목입니다. 발람은 한두 푼 물질에 눈이 멀어 마귀의 하수인들을 따라간 자며, 이스라엘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자니 종말로 볼 때 음란, 탐심의 생활로 교회를 세속화시키며 교회의 외적 성장, 비대화에 치우치는 잘못된 종교지도자들 모두가 이 교훈을 받아야 할 대상이 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주.초 문제를 해결 못하여도 괜찮다는 식으로 가르치며 성찬식에 막걸리를 사용하며 기독인의 질서를 서서히 파괴하는 자유적 신학, 현시대는 많은 이들이 이 니골당의 교리에 빠질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였다면 그 고백 위에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하여 신앙의 열매가 맺어져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야 합니다. 시간이란 인간들만의 것이고 영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구애받지 않는 것을 알고 '사도신경'은 성경요약과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 속히 오실 주님께서 입에 날쌘 검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우리 이제 니골라당의 교리에서 벗어나 참된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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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골라

1.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했다가 다시 기독교로 개종한 자.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출된 일곱 집사 중 하나(행 6:5).
2. 기독교 초기의 교회들에 의해 니골라당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음.
3.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육신을 위한 기회로 삼음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잘못 오용하여 육신의 죄악을 조장하게 하였음(갈 5:13).
         

니골라당의 사상

1. 인간의 육신은 근본적으로 악하다.
2. 인간의 영혼은 육신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3. 인간의 구원에 육체는 중요치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육체가 짓는 죄는 정죄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4.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
         

현실적 결론

현재도 이 사상과 똒같은 가르침으로 한국교회를 잠식해 가는 무리가 있다. 니골라당의 사상은 마치 현 구원파의 교리와 유사하다(권신찬, 박옥수 계통...). 이들은 교묘히 정통교단인 듯한 간판을 붙이고 나와 외부에서는 분별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소위 믿는 그 순간(구원받은 시간)을 강조하며, 그 이후로는 어떠한 죄도 없이 의로운 상태에 들어갔으므로 올바른 믿음을 가진 인간이라면 더 이상 죄의식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며.. 또한 기도는 감사와 간구의 기도만 해야지, 회개의 기도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니 순진한 많은 양떼들이 미혹 받고 있다. 여하튼 주기도문을 하지 않고, 회개기도를 하지 않고, 죄의식을 느껴서는 안 되며, 구원 받은 시점이 언제냐 등의 질문 등으로 교리전파를 하는 행위는 의심의 여지 없이 100% 니골라당의 소행인 것이다. 이같은 교리가 악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교묘히 죄와 타협할 수 있는 편안한 통로를 갖게 한다는 데 있다.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라는 것이 하나님의 바라심인데, 세상과 타협할 수 있는 길을 자유롭게 열어주게 되니 그 본질이 마귀의 사상인 것이다.

니골라당의 교훈은 발람의 교훈과도 함께 상고해야할 중요한 대목이다. 발람은 한 두푼 물질에 눈이 멀어 마귀의 하수인들을 따라간 자며, 이스라엘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자니... 종말로 볼 때 음란, 탐심의 생활로 교회를 세속화시키며 교회의 외적 성장, 비대화에 치우치는 잘못된 종교지도자들 모두가 이 교훈을 받아야 할 대상이 된다.

계 2:6 "오직 네(에베소교회)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사랑은 원수 마귀도 어루만져 주는 것이 본질이 아니요,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않는 것(고전 13:6)이 본질임을 한 시라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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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구조(요한계시록 2:12-13) 라마나욧 공동체와 아둘람 공동체


영적 구조(요한계시록 2:12-13)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도시를 잡고 있는 영을 분별한 후에 도시에 나가 전도를 시작한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지역에서 영적 싸움에 이겨야 한다.
그래야 삶이 평안하다.

5병 2어의 기적을 행한 후에 배를 타고 가실 때 풍랑이 일어났다.
바다 위로 예수님이 걸어오셨다.

바람아 잔잔하라!
파도야 멈추어라!

거라사 지방을 잡고 있던 악령들이 갈릴리 바다를 뒤흔들었다.
군대귀신들린 자가 나타나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소서!
군대귀신들린 사람을 회복시켜주셨다.

우리 집안을 덮고 있는 악한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물러갈지어다!

다니엘을 붙잡고 있는 악한 영은 즉시 물러갈지어다!

바사국 군대가 막고 있을 때 / 바사 국군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 다니엘이 바사국에 머물고 있었다.
바사 국군 / 공중 권세를 잡은 자
땅의 바사와 공중 권세를 잡은 바사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오지 못한다.
미가엘을 내려보내어 통로를 만들어 주었다.
21일이 걸렸다.

라마나욧


라마나욧'은 생소한 용어다.
'라마'는 사무엘의 출생지이자 고향이다.
이곳에 사무엘의 관저가 있었고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벧엘·길갈·미스바 등지를 순회하였다.(삼상7:15~17)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곳에서 사무엘에게 그들의 왕을 선정해 달라고 요청했고,(삼상8:4~55)
이에 따라 첫 번째로 사울을 택해 기름부음을 준 곳이며,(삼상10:1)
이후 다윗을 택해 기름부음을 주었다.(삼상16:13) 

 
사무엘은 사울이 타락하자 결별하고 고향 '라마'로 돌아왔는데(삼상15:34~35)
이때 이곳에 '나욧'을 세워 후학들인 선지자들을 가르쳤다.

'나욧'은 거주지·거처·초원지대라는 뜻으로 지금의 '기숙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무엘은 말년에 사울이 타락하자 훗날을 기약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엘이 '라마'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동안, 하나님의 명에 따라 기름 부어 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미갈의 도움으로 도피한 곳도 '라마'였다.(삼상19:18)
사무엘은 사울의 행태를 고하는 다윗을 '나욧'으로 데리고 가서 말씀으로 교육했다.(삼상19:19)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다는 것을 안 사울은 세 번에 걸쳐 다윗을 잡아오라고 사람들을 보냈으나 그때마다 '라마나욧'에 온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예언하게 된다.(삼상19:21)

이때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거나 선지자적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황홀경 상태로 성령이 임한 현상이다.
이에 사울은 다윗을 잡으러 직접 가는데 그가 '라마나욧'에 도착하자 그에게도 성령이 임했고 사울은 사무엘 앞에서 예언하며 벌거벗고 종일 누워있게 되었다.

이는 성령이 임하여 사울의 죄와 수치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때 다윗은 피신하였다.
 
'라마나욧'은 선지자들을 가르친 말씀 공동체요, 교육기관이다.
또 말씀의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지성을 위해 성령의 은혜가 함께하고 역사하는 영성 훈련장이요, 성령 공동체였다.
아마도 다윗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며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라마나욧' 출신들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두란노서원'을 통해 2년 동안 후학들을 길러내고 그들이 흩어져 가정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순회 전도자가 되어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웠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성경 공부는 말씀을 지식적으로 공부할 뿐 아니라 성령의 조명과 은혜가 충만해야 한다.
오늘 나는 '라마나욧'을 다시 생각한다.

라마나욧이 무슨 뜻인가요?

라마(Ramah)는 사무엘의 고향으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두메산골입니다.
그리고 나욧(Naioth)은 작은 공동체를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사무엘이 고향인 ‘라마에 세운 공동체’라 하여 ‘라마-나욧’이라 일컫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한 일은 라마나욧 이라는 공동체를 세우고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의 질투를 피해 사무엘의 고향 라마로 피신한 다윗도 그 곳에서 함께 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다윗을 쫒아서 라마나욧으로 온 사울 조차도 하나님의 강한 임재 가운데 놓이게 되듯 라마 나욧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어떤 원수가 와도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바로 쓰러지며 예언을 하는 곳입니다.

어떤 적도 하나님의 영광 앞에 찬양하고 경배하게 되는 그런 거룩한 곳입니다.

그 때 라마나욧에 임했던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지금 라마나욧 캠프 통해 우리에게도 임하길 원합니다.

사무엘상 19:18-24

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라마나욧'은 지명과 장소가 합해진 단어입니다.
여기서 라마는 지명으로 사무엘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그와 함께 하면서 사역하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 사울과 결별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과 결별하기 전에 한 말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었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하나님께 불순종했던지, 성경은 그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삼상15:35).
아마도 이 말은 사람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욕이 아닐까 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이런 사울을 버릴 것이라고 선포하고 라마로 돌아간 것입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삼상19:18).

다윗은 사울의 딸이요 자신의 아내였던 미갈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생명을 보존한 후, 사무엘을 만나러 라마나욧으로 찾아 간 것입니다.
물론 사무엘에게 자신을 지켜줄 세상적 권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은 다만 사무엘이 하나님과 깊이 교류하는 참 선지자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를 라마로 이끈 것입니다.
이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그에게 나가는 자를 돌본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삼상19:18)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여기 살았다는 단어에 사무엘은 물론 선지생도들도 다윗을 환영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실 같은 장소에서 몸을 부딪기고 산다는 것은 환영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관계에선 쉽지 않습니다.
다윗은 당시 살아있는 권력 사울 왕의 눈에 난 자이니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반역죄가 되는 것이니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무엘은 물론 그의 제자들도, 인간적인 두려움을 이기고도 남을 정도로, 하나님의 신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라마나욧 이야기는 우리 교회의 역할과 관련해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라마나욧은 사단이 힘쓸 수 없는 곳이요, 죄인의 변화와 회복이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이는 라마나욧이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는 믿음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황혼 녁, 한 농부가 황소 한 마리를 끌고 황톳길을 걸어 귀가하는데, 소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뒤로 황토 먼지가 폭폭 일어났습니다.
그때 마침 붉은 석양 빛이 그 먼지 위에 내려앉자 황토 먼지가 금가루처럼 빛을 냈습니다.
한 사진 작가가 마침 그 장면을 보고 사진에 담아 “먼지도 아름답다!”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더러운 먼지도 빛을 입으니 아름다운 작품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티끌 같은 인생도 빛 되신 주님을 영접하면 밝게 빛을 내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변화되어 세상을 비추는 아름다운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한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여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 이런 공동체가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사무엘의 관저가 있었고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벧엘·길갈·미스바 등지를 순회하였다(삼상 7:15~17).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길갈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
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곳에서 사무엘에게 그들의 왕을 선정해 달라고 요청했고(삼상 8:4~55).

4-5 /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이에 따라 첫 번째로 사울을 택해 기름부음을 준 곳이며(삼상 10: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이후 다윗을 택해 기름부음을 주었다(삼상 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사무엘은 사울이 타락하자 결별하고 고향 '라마'로 돌아왔는데(삼상 15:34~35).

이에 사무엘라마로 가고 사울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사무엘
이 죽는 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이때 이곳에 '나욧'을 세워 후학들인 선지자들을 가르쳤다.
'나욧'은 거주지·거처·초원지대라는 뜻으로 지금의 '기숙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무엘은 말년에 사울이 타락하자 훗날을 기약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엘이 '라마'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동안, 하나님의 명에 따라 기름 부어 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미갈의 도움으로 도피한 곳도 '라마'였다(삼상 19: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사무엘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사무엘은 사울의 행태를 고하는 다윗을 '나욧'으로 데리고 가서 말씀으로 교육했다(삼상 19: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셨던 두 개의 공동체에 주목할 것을 요청하셨다.

그 하나는 선지자 사무엘이 이끌던 라마나욧의 공동체였고,
다른 하나는 반군 지도자 다윗이 이끌던 아둘람 굴의 공동체였다.

전자가 종교적 개혁의 진원지였다면, 후자는 정치적 개혁의 진원지였다.
이 둘은 부패한 종교권력과 교만한 정치권력에 맞서는 체제변혁의 중심이었다.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갱신을 위해서는 총체적 개혁의 진원지로서 기독 청년들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 경우 그 공동체는 라마나욧처럼 종교적 개혁의 진원지여야 하고, 아둘람 굴처럼 정치적 개혁의 진원지여야 한다.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2절)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다는 것을 안 사울은 세 번에 걸쳐 다윗을 잡아오라고 사람들을 보냈으나 그때마다 '라마나욧'에 온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예언하게 된다(삼상 19: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이때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거나 선지자적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황홀경 상태로 성령이 임한 현상이다.
이에 사울은 다윗을 잡으러 직접 가는데 그가 '라마나욧'에 도착하자 그에게도 성령이 임했고 사울은 사무엘 앞에서 예언하며 벌거벗고 종일 누워있게 되었다.
이는 성령이 임하여 사울의 죄와 수치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때 다윗은 피신하였다.

'라마나욧'은 선지자들을 가르친 말씀 공동체요, 교육기관이다.
또 말씀의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지성을 위해 성령의 은혜가 함께하고 역사하는 영성 훈련장이요, 성령 공동체였다.
아마도 다윗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며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라마나욧' 출신들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두란노서원'을 통해 2년 동안 후학들을 길러내고 그들이 흩어져 가정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순회 전도자가 되어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웠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성경 공부는 말씀을 지식적으로 공부할 뿐 아니라 성령의 조명과 은혜가 충만해야 한다. 오늘 나는 '라마나욧'을 다시 생각한다.


아둘람

사무엘상 22: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아둘람(dulam) / 피난처









만나와 흰돌


만나와 흰돌

요한계시록 2:17
귀있는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찌어다.이기는 그 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것이 있나니 받는자 밖에는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1.  성령께서 교회에게 말씀 하신다

교회는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얻은자들의 공동체이며 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거하시는 성도 개인의 육체이기도 하다. 
곧 교회는 성도에게 이 메시지를 가르쳐서 알게 하여야 할것을 말씀 하시는 것이 다음의 말씀인 '이기는 그에게는' 하시며 개인에게 말씀 하시는 것이다.

즉 구원을 입은 모든자 각 개인에게 말씀을 하신다 는 것이다.

2.  이기는 그에게 즉 이기는자에게는 감추었든 만나를 주시겠다

이기는 것은 두 가지의 승리가 있다.

사망의 권세에서 승리한 것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 승천 하심으로 믿는 모든자에게 값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의 이김이다.

성도가 새 생명의 삶 속에서 만나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단의 유혹과 싸워서 이기는 이김이 그 또 하나의 이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어서 이기게 하시겠다' 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 에게는 만나를 주시겠다' 고 하셨기 때문이다.

3. 만나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영의 양식

영적으로 승리한 성도는 이 만나를 먹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즉 성령의 소욕을 쫓아 행 할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소욕을 쫓아 행 할것인가?(갈 5:17)
아주 처절한 사단과의 피나는 영적인 싸움을 하다가 성령의 소욕을 쫓아 행하여서 승리 했을때 영적인 충만한 기쁨이 넘치며 배에서 생수의 강물이흐르는 것과 같은 느낌이나 또는 독수리가 날개 치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은 기쁨을 체험을 하여본 성도는 이 말씀이 곧 만나를 성도가 사단과의 싸움 에서 이길때 먹는것 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즉 광야에 내린 만나는 장차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서 구원 받은자들을 당신의 몸으로 즉 당신의 말씀으로 먹이실 새 생명의 양식인 말씀의 예표이며 감추인 만나는 즉 당신의 이름으로 승리하는당신의 자녀들에게 먹이실 영의 양식 즉 에덴 동산에 감추인 생명 나무의 과일을 감추인 만나 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계 2:7. 22:14) - 창세기 ‘생명 나무’ 에 대한 해설 참조
 
구원을 얻은 성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받았고 또 모든 원수의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다 받았으므로 성령님께서 함께 하는 성도는 곧 영적으로 잃어버린 에덴 동산을 회복한 것이며 언제든지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 생명 나무의 과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따 먹을수가 있는 것이다.

즉 생명 나무의 열매는 실제로 존재하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생명 나무의 열매는 영적인 열매이기 때문에 영혼의 구원을 받은자가 예수님과 동행하며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길때에 만 먹을수가 있는 과일 이다. 이 생명 나무의 과일을 먹을때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며 꿀 방울이 혀에 떨어져서 진짜 꿀이 혀에 녹아내려 온 몸으로 퍼져 나감으로 새 생명을 얻은 영혼이 힘이있고 몸도
강건하여 지는 것이다. 이때에 새 생명의 삶 속에서 병마도 물러가고 악한 세력도 떠나가는 것이다.이것이 곧 감주인 만나인 생명 나무의 열매를 예수님께로 부터 받아 먹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 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이 승리는 곧 하늘 나라에 기록이 되며 장차 천년 왕국에서 승리 한대로 다스리는 고을 권세를 받게된다.

3. 흰돌에 이름을 기록하여서 주시겠다

받는 사람만 안다고 말씀 하신 것에 대하여 알아 보자.
이 말씀을 이해를 하려면 먼저 흰돌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하겠다. 
창조 역사속의 비밀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하실때 짐승을 쪼개시게 하시고 그 쪼갠 고기 사이를 불로 지나가시면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하신다. 

이런 방식의 계약은 당시에 족장과 족장 사이에 불가침 조약등을 맺을때 짐승을 쪼개놓게 쪼갠 짐승의 앞에 칼을 꼽아 놓고 계약하는 인간들의 습관을 인용 하시면서 인간들이 쉽게 이해가 가게하기 위하여 하나님 께서 인간들의 풍습을 인용 하신 것이다.

흰 돌에 이름을 새기어서 주는 역사도 로마 시대의 경기 때에 승리자에게 흰 돌을 주는데(Zahn 이라고 부름) 그 흰 돌위에 승리자의 이름을 새기어서 주었다. 요즘의 우승컵 에다 이름을 새겨주는것의 유래라고 볼수있다.

즉 하나님께서 요한 사도를 통하여 말씀을 주실때 당시에 가장 알기 쉽게 기록하기 위하여서 당시에 인용하는 인간들의 관습이나 풍습을 따라 실행 하시고 기록을 하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본분의 내용도 당시는 구원을 받은 자들이 교회 공동 생활을 막 시작한 때이다.
즉 오순절이 시작이 되어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한 때이다.
그러므로 이 성령의 역사를 당시의 성도들이 쉽게 이해를 하게 하기 위하여서 당시의 경기에서 사용하는 이기는 자가 받는 상패를 이용하여서 요한 사도에게 기록을 하게 하신 것이다.
즉 성도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 했을때를 당시의 성도들이 알기쉽게 설명을 하신 것이다. 

흰돌위에 이름을 새기어서 이기는자에게 주시겠다는 것은 당시의 경기 때는 죽기 살기로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그 만큼 성도가 영적 싸움에서 사단에게 이기는 것은 경기에서 죽기 살기로 싸워서 이기는것 만큼 힘들고 또 값어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흰돌이라고 말씀하시는것은 곧 거룩하고 깨끗하여 흠이 없으신 반석이신 예수님을 말씀 하시는 것이니 그 거룩한 믿음의 반석위에 이름을 새겨서 주시겠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또한 성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새 생명 삶을 사는 가운데에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겼을때 영적으로 예수님께로 부터 받는다는것을 계시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말고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여 승리 한 자만 아는 것이니 받는자만 안다 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즉 영적으로 생명 나무의 과일인 숨겨진 만나를 먹는 당사자와 예수님 만 아신다 라는것이다.

흰돌에 쓰인 이름을 받는 것은 성도가 새 생명의 삶 속에서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 할 때마다 영적으로 받고 있는 것이다.
즉 성도가 사단과의 영적 싸움에서 이길 때마다 감추인 만나 즉 에덴동산의 감추인 생명 나무의 실과를 예수님과 함께 따 먹는 것이므로 영혼은 더욱 강건 하여지고 새 생명의 삶은 힘이 넘치는 것이다. 

또 이는 장차 도래할 천년 왕국때에 흰 돌을 받은 만큼 다스릴 권세를  받게 되고 생명 나무의 열매를 수확한 만큼 천년 왕국에 가지고 들어가서 계속 먹고 살게 되는 것이다.

단 지파가 빠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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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요한계시록 7장에서 열두 지파를 설명하면서 '단'지파가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변 :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인 맞은 자들인 십사만 사천을 지파 별로 나누어 소개 하는데, 특이한 것은 장자인 르우벤 지파부터 나오지 않고, 유다 지파부터 소개 되며, 단 지파가 빠져 있고, 에브라임 지파 대신에 요셉 지파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번째 질문인 장자 르우벤 지파 대신에 유다 지파가 맨 먼저 등장한 이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야곱의 육적인 장자는 르우벤이지만, 메시야 계보 중심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유다 지파를 맨 먼저 기록한 것은 더 올바른 순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민수기 2:3; 34:19
여호수아 21:4
역대상 12:23-37

등에서는 유다 지파를 맨 먼저 나열되었습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야를 중심으로 계보를 보는 것 입니다.

두번째 질문인 단 지파가 빠진 이유도 영적인 의미를 중심으로 살펴 볼 때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단 지파에 대해서는 창세기 49장에 이렇게 예언 되어 있습니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기서 '길의 뱀'이 의미하는 바는, 단 지파를 통해서 사단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뜻으로 해석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단 지파는 자기를 위하여 신상을 세우고 죄악을 행하였습니다(사사기 18: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그래서 단 지파는 저주를 받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 14만 4천명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후 3년 반 동안에 감람산으로 도망가는 무리 중에는 포함될 것입니다.

에스겔의 천년왕국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보면 단 지파도 새 땅을 분배 받는다고 되어있기 때문입니다(에스겔 48장).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단 지파를 뺀 이유는 단 지파 자체를 영원한 형벌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영적 계보, 즉 이스라엘의 온전한 구원을 의미하는 12지파 전체를 선포하기 위해서 11지파도 아니고, 13지파도 아닌, 12지파로 표기를 했어야 했고, 그에 따라 영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요셉을 한 지파의 족장으로 생각하고 에브라임 대신에 요셉을 넣었던 것입니다.  즉, 에브라임은 요셉의 후손으로 표기된 적이 있음을 볼 때(민수기 1:32-34) 에브라임 지파를 나타내는 또 다른 형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들을 12지파에 넣은 것은 요셉의 참된 섬김과 인내, 헌신이 그만큼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완전한 구원, 즉 12지파에 해당하는 신약의 12제자(사도), 그 제자(사도)들에 의해서 시작되는 교회의 완전성을 설명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 본문에서 단 지파가 빠진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 자료 출처 / 앤아버 소망교회 배헌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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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증인(요한계시록 11:3)


두 증인(요한계시록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두 증인은 "엘리야"와 "에녹" 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던 인물은 엘리야와 에녹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은 죽어야 하늘로 올라갈 수 있지만 살아서 올라갔던 사람이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엘리야와 에녹이 다시 내려와서 순교 당하므로 계시록의 예언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두 증인을 "엘리야" "에녹" 이라고 분명하게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나 후대 신학자들은 "모세" "엘리야"라고 해석합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17장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대화할 때 등장했던 인물이 "모세"와 "엘리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변화산 사건에 등장한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상징하는 율법서를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서를 대표하는 엘리야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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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두 달, 1260일, 한 때 두 때 반 때에 대한 성경의 기록 / 7구절

1. 다니엘 7:25 / 한 때, 두 때, 반 때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2. 다니엘 12:7 / 한 때, 두 때, 반 때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3. 요한계시록 11:2 / 마흔두 달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4. 요한계시록 11:3 / 일천이백육십 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5. 요한계시록 12: 6 / 일천이백육십 일

여자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6. 요한계시록 12:14 / 한 때, 두 때, 반 때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7. 요한계시록 13: 5 / 마흔두 달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 한 때는 한 해를 의미 : 12달 × 30일 = 360일

* 두 때는 두 해를 의미 : 24달 × 30일 = 720일

* 반 때는 반 년을 의미 : 6달 × 30일 = 180일
42달 : 1260일




누가 무식한 이치로 사람을 혼동케 하느냐?

욥기 38:2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욥기 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 머리가 일곱 개
요한계시록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요한계시록 17: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적 그리스도의 나라(미래의 나라)
                                                                        후 3년 반에 나타날 나라

* 신천지에서 데려간 교인들 : 30만명
   전도관,
  

다니엘

짐승이란 구약에 나타난 제국을 짐승이라고 한다.

머리는 금이요 바벨론이요 사자요 느부갓네살
가슴은 은이요 메대 파사요 곰이요 고레스
배는 놋이요 헬라요 표범이요 알렉산더
두 다리는 동로마요 철이요 큰짐승

다섯은 무엇인가?
다섯은 제국을 말한다.
짐승 = 제국
애급,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 다섯은 망하였다.
하나는 지금 있다 / 로마
마지막 짐승은 일곱째인데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기간은 잠간 동안 왕 노릇한다.
마지막 짐승으로 적그리스도의 나라라고 한다.


바벨론       - 금 

메대 파사  - 은

헬라          - 놋

로마          - 철



두 증인 : 모세와 엘리야

초대교회 교부 문서에서 / 두 증인 - 에녹, 엘리야
이후에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선악과 사건 이후에 모든 인간은 다 죽어야 한다.
예수도 죽지 않았다.
에녹 엘리야는 살아 있는 모습으로 승천
후 3년 반 시대에 다시 내려와서 죽어야 두 증인이 죽어야 한다.

에녹과 엘리야는 후 3년 반에 내려와서 순교 당할 것이다.

1장 / 밧모섬에서 서론 배경
2-3장 / 교회

 칭찬, 책망, 권면, 약속(천년 왕국)
4장 / 하늘에서 본 환상

 5장 - 보좌로부터 만물이 나타났다.
          보좌로부터 섭리가 이루어진다.
 * 욥기 / 종들의 죽음, 자녀들의 죽음,  - 사탄의 청구에 의하여
   천상회의가 열렸다. 하나님의 아들들(천사장) + 사탄(쫓겨나기 전에) 타락 전 루시엘 - 타락 후 루시퍼
   단계별로 지상에서 이루어진다.
   지상의 역사가 하늘 보좌에서 이미 설계되었고 설계된 대로 진행된다(칼빈주의, 예정)
   계시록 5장에서 각본이 짜여 졌다.
   앞으로도 각본대로 진행될 것이다.

   37장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천사장(하나님의 아들들)
   두루 다니다 왔다(베드로전서
   천사 위의 천사 (루시엘) 50가지의 명칭 타락 후 -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사탄 / 복을 주었기 때문에 잘 섬긴다.
   하나님 / 잘 섬겼기 때문에 복을 주신다.

   6장 - 인
   흰말, 붉은말, 검은말, 청황색말

   144,000은 유대인의 수라고 한다.
   12지파가 현재 팔레스타인에 모두 모였다.

전 3년 반은 큰 환난을 없다. 다만 재앙이 임할 뿐이다.  
후 3년 반은 음녀가 등장한다(바티칸, 거대한 음녀)

양처럼 생긴 짐승이 말은 용처럼 한다.
두 짐승은 WCC, 카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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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은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11:3-4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구약의 배경을 적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계시 속의 다른 많은 상징들과 마찬가지로 11장의 두 증인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위의 본문이 나온 구약의 배경은 스가랴 4장으로, 선지자가 꼭대기에 주발과 일곱 등잔이 있는 순금등대를 보았는데 일곱 관이 주발에서부터 등잔으로 연결돼 있다.

두 감람나무가 등대의 좌우에 서 있는데, 이 나무들이 중앙의 주발에 기름을 공급하고 다시 주발에서 일곱 등잔으로 기름이 공급된다.


스가랴에 나온 등대 :

스가랴의 이상은 요한계시록 11장에 몇 가지 방법으로 조정되어 사용되었다.

스가랴 4:2에는 등대가 하나 있는 대신 요한계시록 11:4에는 두 개가 있고, 두 등대와 두 감람나무는 모두 두 증인을 나타낸다.
스가랴 4장에서 선지자는 수행하는 천사에게 두 감람나무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물었고, 천사는 “기름 발린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라고 대답했다(14절).

“기름 발린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기름의 아들들”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 곧 특별한 기능을 위해 성별된 자들을 의미한다.

이 특별한 기능이 무엇인지는, 선지자가 등대와 두 감람나무가 누구를 나타내는지 물었을 때 천사가 준 첫 번째 대답(4절)에 비추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6절)는 말을 들었다.

다시 말하면, 두 감람나무에서 나오는 기름에 의하여 빛을 발하는 등대는 인간의 힘이나 능력에 반대되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을 통해 위탁 받은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의 종들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은 그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인간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곧 선지자의 계시를 통해 그에게 전달된 능력 곧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능력에 의지하였다.

요한계시록의 두 증인은 구약과 신약임 :

스가랴의 이상에는 하나의 등대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냈다. 그러나 요한이 이상을 받은 시대에는 두 개의 등대가 나타난다. 등대가 하나가 아니고 둘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등대는 기름을 공급하는 두 감람나무와 동일하게 여겨지므로 이 둘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이런 흥미 있는 특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푸는 열쇠는 상당 부분 넓은 문맥 곧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두 증인에 관한 요한의 신학과 연관돼 있다. 요한은 신명기 19:15에 표현된 성경적 원칙을 따르고 있다.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이 원칙은 바울(고후 13:1; 딤전 5:19; 히 10:28)뿐 아니라 예수님(마 18:16)에 의해서도 적용되었다. 요한계시록 전반을 통하여 요한이 인용하는 두 증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이다. 이 두 증인은 요한이 받은 계시의 내용으로 요한계시록 1:2에 처음 나온다. 1:9에서 요한이 “형제요 예수의[예수 안에 있는]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서 밧모 섬에 있게 된 것
이 두 증인 때문이었다고 진술하는데, 이는 이 두 증인이 예수와 관계된 것이므로 그가 이 둘을 위해 기꺼이 환란을 당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전달된 계시를 나타내고, 예수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비추어 구약의 계시를 보충하고 확실하게 밝히는 예수님 및 신약의 사도와 선지자들을 나타낸다. 진리를 증거하는 이 두 증인은 요한계시록 11장에서 하나의 단위로 함께 나온다. 이들이 죽임을 당한 것을 말할 때(8절), 본문이 9절 하단에서 헬라어로 복수인 “시체들”로 되돌아가기 전에 8절과 9절 상단에서 단수인 “시체”를 사용했는데, 이는 이 두 증인이 하나의 단위로 여겨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두 증인의 활동:

한 쪽 증인의 모든 특징은 다른 쪽 증인과 같고, 한쪽 증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다른 쪽 증인에게도 일어난다. 이들은 베옷을 입고 1,260일 동안 예언한 선지자(11:3, 6, 10)로, 여기서 베옷은 어둠(계 6:12; 사 50:3), 애통과 슬픔(겔 27:31; 욜 1:8, 13), 곤란과 책벌과 능욕(왕하 19:1, 2), 겸비와 회개(대하 21:16, 17; 마 11:21) 등을 상징한다. 앞 절(11:2)과의 시간상의 평행은 같은 시기 동안에 거룩한 성이 짓밟힌 것에 대한 애곡과 슬픔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게다가, 이 두 증인이 빛을 내는 기능을 가진 두 등대이므로(참조 시 119:130; 요 1:9), 베옷은 베옷으로 가리는 것처럼 빛을 어둡게 하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 그들이 예언한 것에 대한 반응 곧 그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들이 죽은 것을 기뻐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베옷은 그들의 기별이 거절당함으로써 곤란과 책벌과 능욕을 겪고 있었음을 나타낼 수 있다. 이런 묘사는 예언의 말씀이 효과적이고 힘 있게 전파되지 못한 때를 말하고 있다. 이는 흔히 종교암흑시대 곧 1,260일 또는 42달이라는 예언적 기간으로 대표되는 시기의 특징이었다(계 11:2, 3; 참조 12:6, 14; 13:5; 단 7:25; 12!
:7).[1]


두 증인을 이해함:

요한계시록 11:5∼8에 주어진 단서들을 살펴보면 두 증인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누구든지 두 증인에게 해를 끼치려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대적들을 삼킨다고 5절은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선지자 엘리야를 가리킨다고 보지만, 예레미야 5:14을 언급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 그들의 입에서 대적들을 삼키는 불처럼 나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과 평행을 이루는 요한계시록의 상징에서 예수님이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는데(1:16), 그분이 그 검으로 만국을 칠 것이다(19:15, 21). 이 검은 하나님의 말씀(히 4:2), 곧 그분의 입에 있는 예수의 증거(계 19:13에서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림)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입에 있는 이 검 곧 말씀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두 증인의 권세:

요한계시록 11:6은 두 증인이 구약 선지자들 중에 가장 큰 자인 모세 및 엘리야와 같은 권세를 가진 것으로 묘사한다. 이들도 엘리야처럼 하늘을 막아 자신들이 예언하는 동안에 비가 내리지 않도록 하는 권세가 있으며, 모세처럼 강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그들이 원할 때면 언제든지 온갖 재앙으로 땅을 칠 수 있는 권세가 있다. 이런 상징적 언어의 사용은 이 두 증인이 실제 모세나 엘리야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이 고대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과 같은 권세를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들이 베옷을 입고 예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권세가 약함을 비추는 말은 전혀 없다. 외적 환경이 이 예언의 말씀의 성격이나 권위를 바꾸지 못했다.


두 증인의 죽음:

요한계시록 11:7에 의하면, 두 증인이 그들의 증거를 마쳤을 때, 다시 말해서 그들이 예언한 1,260년 기간이 다해갈 때 무저갱으로부터 나온 짐승(참조 17:8)이 그들을 공격하여 짓밟고 죽였다. 5절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놀라운 사건이다. 왜냐하면 5절은 두 증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그들의 입에서 나온 불로 죽임을 당할 것(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받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운명은 요한계시록 20:7∼15이 계속하여 말하는 대로 두 증인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에게 닥칠 일이다. 사단과 모든 악인들은 흰 보좌 앞 심판대에 선 후에 불 못에서 태워질 것이다.

1일=1년 원칙에 따르면,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해 큰 성의 거리에 놓여 있던 기간인 3일 반(계 11:9)은 3년 반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7절의 짐승이 특히 반종교적 편견을 가졌다는 점에서 프랑스 제1 공화국 정부(1792∼1804년)를 나타낸다고 이해하는 재림교인들은 무신론이 극에 달했던 프랑스 혁명 역사 중에서 짧은 기간 동안에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본다. 이 기간은 파리에서 종교를 폐지하라는 법령이 발령된 1793년 11월 10일부터 프랑스 정부가 종교행위에 대한 금령을 해제한 것으로 여겨지는 1797년 6월 17일까지로 산정될 수 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7권, 803).

요한계시록 11:8은 상징적으로 소돔과 애굽으로 불린 큰 성 곧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곳의 거리에 두 증인의 시체(헬라어로 단수)가 놓여 있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에는 두 개의 성 곧 큰 성과 거룩한 성이 있다. 큰 성은 큰 음녀라고 묘사돼 있고, 거룩한 성은 어린 양의 신부라 불린다. 앞의 성은 보통 바벨론이라 불리고, 뒤의 성은 새 예루살렘이라 불린다. 요한계시록의 여기서 처음으로 언급되는 큰 성은 상징적으로 소돔과 애굽으로 불린다. 소돔은 번영, 방종, 오만방자, 사악, 부도덕, 영적 무관심, 불친절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겔 16:49, 50; 벧후 2:6∼8; 유 7절). 애굽은 우월감, 오만방자, 압제, 하늘의 하나님을 거절함, 바로를 포함한 많은 피조물 숭배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출 5:2; 렘 43:12, 13; 46:8, 25; 겔 20:7; 23:3, 8, 27; 29:3; 30:13; 32:12; 욜 3:19; 미 6:4). 큰 성은 하나님께 반역을 자행하고 그분의 증인들을 압제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하고 멸시를 당한다.


두 증인의 부활 :

본문은 큰 성이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계 11:8)이라고 말함으로써 두 증인이 살아 있을 때처럼 죽을 때도 저들의 주님을 따른다고 말한다.

두 증인이 충성되고 진실한 증인이신 저들의 주님의 발자국을 따른 다른 길들을 언급하는 나머지 구절에서 이런 사실이 강화된다.
그들은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세상에 의해 멸시를 당한다(계 11:9, 10).
그들은 3일 반 후에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받는데, 세상은 놀라서 구경한다(11절).
그들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대적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된다(12절).
그들의 부활 후에 큰 지진이 뒤따르므로 대적들이 놀라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13절).
역사적으로 말해서, 두 증인의 죽음 및 부활은 프랑스 대혁명 때 무신론이 극에 달하고 종교가 폐지되었을 때(1793년 11월 10일),
그리고 3년 반 후에(1797년 6월 17일) 프랑스 정부가 종교 행위에 대한 금령을 해제하고 19세기 초 여러 나라에서 성서공회가 설립되었을 때 성취되었다.


결론 :

두 증인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예수의 증거 곧 구약과 신약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성령을 통하여 남겨두신 증인들이다.
이들은 마치 예수님처럼 곧은 증거로 인해 죽임을 당하지만, 부활하여 구름을 타고 승천함으로써 그들의 대적 앞에서 영광스럽게 된 그분의 발자국을 따른 선지자들로 묘사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요한과 그의 형제들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증인이 된 자들은 모두 예수의 경험 곧 부활, 승천 그리고 대적들 앞에서 받는 영광뿐 아니라 증거로 인하여 당하는 순교의 경험에도 동참할 각오를 해야 함을 뜻한다(계 1:2, 9; 6:9; 12:11, 17; 14:12; 17:6; 19:10; 20:4;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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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다 모아도 인구가 얼마되지 않지만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은 각 분야에서 뛰어나며 노벨상을 휩쓸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노벨 경제학상의 65%, 물리학상 의 32%, 의학상의 23%, 화학상의 11% 그리고 문학상의 7%는 유대인들에게 수여되었다.

유대인들은 무서운 고난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뛰어난 사람들을 배출하는가 하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연구 과제가 되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그렇게 탁월한 것은 그들의 종교적 가정교육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중 에서도 유대인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는 것이 그들을 그렇게 뛰어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대인 어머니는 아이들의 침대에서 성경을 읽어주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것이 아이들로 하여금 큰 꿈을 갖게 하고 건실한 삶을 살게 하며 언어에도 남다른 능력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야말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요한계시록 11장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 백성을 핍박하는 세력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을 예언하고 있다.

1. 천사는 요한에게 무엇을 측량하라고 하였는가?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계 11:1).

천사가 성전을 측량하라고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었다고 하였다.
요단강 계곡에서 자라는 이스라엘의 갈대는 길고 똑바로 크기 때문에 길이를 재는 자로 쓰기에 알맞았다.
천사는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고 하였다.
600여년 전에 에스겔도 이상 속에서 어떤 사람이 성전의 각 부분을 측량하는 것을 보았다(겔 40:3~43:12). 이 측량은 대속죄일에 있었다. 그리고 세 가지 것을 측량하였는데, 바로 성전(겔 40:3~43:12)과 제단(겔 43:13~17)과 사람들(겔 44:1~48:35)이었다. 요한계시록 11장 1~2절의 장면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에스겔의 이상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에스겔의 이상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1장 1~2절이 예루살렘 성전을 자세히 살피라는 말 씀은 물론 아니다. 요한이 계시를 볼 당시에는 예루살렘의 성전 건물은 이미 파괴되어(A.`D. 70)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2. 얼마나 오랫동안 이방인들은 거룩한 성을 짓밟을 것인가?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2).

요한은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는 말을 들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전 밖 마당은 성전의 구조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뜰이었다. 이방인들은 여기까지밖에 들어갈 수 없었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심판하지도 말고 혹은 인치지도 말고 그냥 두라는 말씀이 된다.

재림 전 심판은 구원 얻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 이방인들은 원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곳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성전 뜰에 있는 이방인들이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참된 이스라엘은 되지 못하여 이교의 습관을 그대로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바로 그들이 마흔두 달 동안이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 즉 하나님의 신실한 성도들을 박해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렇다면 성전 마당에 거하면서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이나 짓밟을 존재는 도대체 누구일 것인가?

우선 성경 예언에서 마흔두 달이 어떤 기간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흔두 달, 1260일, 한 때 두 때 반 때에 대한 일곱 번의 성경상 기록

1. 다니엘서 7장 25절 :한 때, 두 때, 반 때

2. 다니엘서 12장 7절 :한 때, 두 때, 반 때

3. 요한계시록 11장 2절 :마흔두 달

4. 요한계시록 11장 3절 :일천이백육십 일

5. 요한계시록 12장 6절 :일천이백육십 일

6. 요한계시록 12장 14절 :한 때, 두 때, 반 때

7. 요한계시록 13장 5절 :마흔두 달

 

* 한 때는 한 해를 의미 :12달 × 30일 = 360일

* 두 때는 두 해를 의미 :24달 × 30일 = 720일

* 반 때는 반 년을 의미 : 6달 × 30일 = 180일

42달 = 1260일

요한계시록은 마흔두 달과 일천이백 육십 일과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표현을 모두 다 사용하여 그것이 같은 기간을 말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기간은 거룩한 성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교회가 심각하게 고통을 당하는 기간으로 성경에 자주 나오므로 실제적인 1260일, 즉 삼 년 반의 기간일 리는 없다. 기원 후 2000년의 역사에서 겨우 삼년 반을 가지고 성경이 그렇게 비중있게 다룰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예언적인 기간으로 계산하여야 한다. 성경에서 예언상 하루는 일 년(민 14:34`;`겔 4:6)으로 계산하므로 마흔두 달 즉 일천이백육십 일은 1260년이 된다.

그렇다면 126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성도들을 괴롭히며 짓밟은 존재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우리는 몇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이 존재는 한 사람일 리가 없다. 한 사람이 그렇게 긴 기간 동안 성도를 핍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존재는 분명히 역사에 등장하 는 세력이어야 한다. 1260년이란 기간은 긴 기간이기 때문에 숨어서 그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셋째로, 성전 밖 마당에 있으면서 그 일을 하였으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종교적인 세력일 것이고 그렇게 긴 기간동안 핍박을 할 수 있었으니 정치적인 권력도 가진 존재일 것이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 세력을 역사에서 찾아낼 수 있다. 1260년(A.D. 538~1798)동안이나 계속된 중세의 긴 암흑시대 동안 누가 세상의 권력보다 더 강한 힘을 행사하며 성도들을 파문하고 종교 재판에 회부하고 화형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는가? 그것은 중세 로마 교황권의 부정적인 측면이었다. 요한 바오로2세도 로마 교황권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죄한 일이 있다. 오죽하면 역사가들이 그 시대를 암흑시대라고 부르겠는가? 1260년동안 성도들을 짓밟을 이 세력의 정체와 성격에 대하여는 요한계시 록 13장에 자세히 다시 언급되기 때문에 13장에서 다시 연구하기로 한다.

3. 두 증인은 무엇이며 그들은 1260년 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계 11:3-4). 

성도들이 1260년 동안 시달림을 받을 때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한 두 증인은 누구일까?
본문은 두 증인이 이 땅에서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두 촛대라고 밝혔다.

두 감람나무와 촛대는 구약 성경 스가랴 4장에 나오는 장면이다.

스가랴가 두 감람나무의 뜻을 묻자 천사는“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라고 알려준다.
두 증인은 사람들이 아님이 분명하다.
1260년의 긴 기간 동안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1260일을 1260년 동안 성도들이 박해를 당한 기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한 두 증인은 사람일 리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1260년을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굵은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슬픔과 회개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1260년의 박해 기간 동안 성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세상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회개를 호소해 온 어떤 것일 것이다.

두 증인은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했는데 감람나무와 촛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둘 다 불을 밝히는 것이다.
감람나무는 불을 밝히는 기름을 대주는 원천이 되고 촛대는 그 기름으로 불을 밝힌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1260년의 암흑 기간 동안에 감람나무와 촛대처럼 계속해서 불을 밝히는 기름을 대주는 동시에 또 불을 밝혀 빛을 비추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어두움을 밝혀주는 등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이“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 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성경은 어두운 중세의 박해시절 그 어두움을 비추는 등이요 빛이었던 것이다.

두 증인이라고 한 것이 신구약 성경을 잘 상징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노래했으며 예수께서는“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요 5:39)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 말씀, 즉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다.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중세의 암흑 시대 동안 성경 말씀은 그들과 함께 슬퍼했으며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증인이었으며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 다음 절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4. 두 증인을 해하려 하는 자는 어떻게 되는가? 또 그들에게는 어떤 권세가 있었는가?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계 11:5~6).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한다 는 것과“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한다는 표현은 엘리야의 기사들을 연상시킨다.

엘리야가 기도한즉 이스라엘에 삼 년 반 동안이나 비가오지 않았으며(약 5:17), 엘리야를 죽이려 하던 군사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그들을 소멸하였다(왕하 1:10). 물이 변하여 피가 되게 한다는 것은 모세가 나일강물이 피가 되게 했던 애굽의 재앙을 생각나게 한다. 실제로 모세와 엘리야는 증인으로서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말씀을 나눈 일도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모세나 엘리야를 감람나무나 촛대로 부른 일은 없다. 또 그들은 사람이기 때문에 1260년의 긴 기간 동안 증인이 될 수도 없었다. 비가 오지 않거나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이 임한 것은 그들이 모세나 엘리야 같은“사람”을 거절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믿음의 조상들은 구약의 증인에 포함되며 신약의 모든 성도들은 신약의 증인들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신구약 성경이 해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재앙을 내린 일 이 있었는가? 요한계시록 22장 18절은“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 여 호와는 그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소멸하는 불이시”(신 4:24)다.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해하려 하는 시도는 실패하였고 재앙을 가져왔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불순종하면 재앙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편리한 대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5. 두 증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계 11:7~10). 

하나님의 말씀이 1260년의 증거를 마칠때 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 즉 사단의 세력이 성경을 핍박하여 죽은 것처럼 만들 것이다. 성경이 그렇게 박해를 당한 장소를 큰 성이라 했다. 그것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과 반대되는 개념이며 바벨론 성이다(계 18:2).
그 당시에 실제적인 바벨론이나 베벨론으로 불리던 로마는 이미 없었으므로 큰 성은 바벨론처럼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한 나라 나 집단을 의미할 것이다.

이곳은 또한 영적인 소돔 혹은 애굽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소돔은 타락의 온상을 대표하는 이름이며 애굽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인하는 무신론을 대 표한다. 이런 곳이야말로 예수께서 영적으로 못 박히신 곳이다.

그렇다면 1260년의 박해 시대가 1798년에 끝나니, 그 기간이 끝나갈 무렵에 성경에 나올 만큼 대대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성경을 핍박한 세 력이 역사상에 있었는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할 만큼 교회와 신앙을 미워하고 박해한 세력과 시대가 있었는가? 분명히 있었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 부분을 역사적으로 혹은 실제의 사실로 해석하기를 주저하지만 상징적으 로만 해석할 경우 사흘 반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이 문제가 된다.

프랑스 혁명은 불과 몇년 동안 계속된 사건에 불과하지만 세계사적으로 교회사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뚜렷한 영향을 남겼다.

그러므로 성경 예언이 이 사건을 취급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은 외관상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일어난 무산 계급의 혁명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무신론 사상을 유포시키고 공산주의를 태동하게 한 기틀을 마련해 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중국의 수십억 인구를 공산주의와 무신론의 틀 속에 가두어서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큰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프랑스는 종교 개혁을 거부하고 부패와 타락이 극도에 달했다. 성직자들은 귀족 계급이 되어 온갖 사치와 향락를 누렸으며 일반 백성들은 압제에 눌려 신음하고 하루 먹을 빵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1789년 7월 14일 분노한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혁명은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동안 왕과 교회에 억눌렸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새로운 달력을 만들어 종교적인 제일들을 모두 없애버렸으며 일주일을 10일 제도로 만들어 예배일도 철폐하였다. 분노한 시민들은 교회를 더럽히고 성직자들을 모독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혁명 기간에 약 5,000명의 성직자들이 처형을 당했다.

11월 10일에는 이성의 여신을 상징하는 젊은 여인이 선택되어 노틀담 사원에서 경배를 받았다. 프랑스 혁명 의회는 1793년 11월 26일 성경과 종교 행사 금지령을 공식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는 예언이 슬프게도 성취되었다.

그러나 주일 제도가 철폐되고 성경 읽는 것이 금지되며 하나님 대신 이성의 여신이 받들어지자 프랑스는 최악의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 들어갔다. 범 죄는 증가하고 국민들의 건강은 땅에 떨어졌고 사회는 공포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할 수 없이 프랑스는 삼 년 반 후인 1797년 7월 17일 성경 및 종교행사 금지령을 폐지하였다.

 

6. 삼일 반이 지난 후 어떤 기적이 일어났는가?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계 11:11~12).

프랑스 혁명 정부는 성경을 금지한 후에 급속도로 사회가 혼란에 빠 지자 할 수 없이 삼 년 반 만에 그 조치를 철회하였다. 그리고 죽은 것처럼 보였던 두 증인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1798년 2월 15일 프랑스 군인들이 로마의 시스티네(Sistine Chapel) 성당에 난입하여 교황을 유배 보내고 교황이 그곳에서 죽자 538년부터 1260년 동안이나 계속되던 교황의 세력은 드디어 약화되고 성경은 생기를 얻은 것처럼 보급되고 읽혀지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제지업과 인쇄술이 발달하여 성경을 비싸지 않게 출판하게 되었고 1804년에 영국성서공회, 1816년에는 미국 성서공회가 설립되어 성경을 대량으로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전 세계에 파견되었다. 실로 19세기는 위대한 선교의 시대였다.

성경은 오늘날도 베스트셀러 중의 베스트셀러이다. 신구약 성경은 매년 수백 개의 언어로 출판되며 쪽 복음 성경은 1,0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보급되고 있다. 대한성서공회의 발표에 의하면 한국의 성서공회는 우리나라에서 2005년 1년 동안에 170만 권의 성경을 발행하였고 1,678,259부의 성경을 77개 언어로 제작하여 85개국에 보내고 있다. 실로 엄청난 성경의 부활이다.

 

7. 두 증인을 죽이려했던 곳과 사람들은 어떤 피해를 당했는가?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계 11:13).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직접 생기를 얻어 부활했지만 성경을 박해한 프랑스는 커다란 영적 지진을 경험하였다. 그들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주를 잃고 피폐해졌으며 엄청난 무너짐을 경험하였다.

성 십분의 일이란 유럽 열(十) 나라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프랑스를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죽은 사람이 칠 천이라는 것은 아마도 혁명 기간 동안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상징적 수라고 생각된다.

이런 격변을 겪고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과 말씀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 벌어지는 참담한 결과들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하나 님을 두려워하고 영광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8. 세 번째 화, 즉 일곱째 나팔을 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계 11:14~18).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셋째 화가 시작되 기 전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나서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과 그리스도께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실 것을 찬송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셋째 화가 이 세상 역사의 끝임을 알게 된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 앞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의 찬양이 시작된다.

그들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최고의 존경을 드린다. 하나님은“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하나님,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는 분”이시다. 늘 함께 나왔던“장차 오실 이”라는 구절이 여기에는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아 일곱째 나팔은 분명히 마지막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은 또한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와 마지막 심판의 때에 있을 일 을 요약하여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이방들이 분노할 것이다. 복음을 거절하며 살아온 그들은 그들에게 내리는 심판과 재앙이 성도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핍박하며 죽이려 할 것이다. 전세계적인 분노와 핍박이 성도들에게 쏟아질 것이다.

그 때 드디어 주의 분노가 이 땅에 내릴 것이다. 오래 참으셨던 은혜의 시기는 끝날 것이다. 이 땅에 내릴 주의 분노는 일곱 재앙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계15~16장).  그 때는 죽은 자들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심판의 때를 가 리키는 말씀이다. 재림하신 후 천 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다시 이 땅에 내려온다(계 21장). 그 때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다부활하여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이다(계 20:7~15).

그 때에 그의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실 것이다. 이제 아름답게 재창조된 이 땅과 새 예루살렘 성이 그들의 거처가 된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온 그들에게는 무궁한 기쁨과 영생이 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이 때는 또한“땅을 망 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 이다. 악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저항을 시도하지만 마침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그들을 소멸하게 된다. 마침내 모든 죄악의 역사는 완전히 끝난다. 우주에는 다시 사랑과 기쁨만이 가득 차게 된다.

 

9. 하늘 성전의 모습은 어떠하였는가?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9).

모든 구원의 역사가 마치는 이 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며 언약궤가 보이고 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들어 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며 살아왔다. 심지어 자칭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십계명을 등한히 여겼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넷째 계명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 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거룩한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하나의 계명을 어기면 모두 범한 것과 같다는 것(약 2:10)을 그들은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그 모든 불순종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은혜의 시기는 끝나고 이 세상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은 이 세상에 임할 엄숙한 재앙과 심판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감사하는 것은 성전이나 계명이나 심지어는 심판까지도 그 근본 정신은 사랑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명상할 문제   

오늘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 하나님이 계신 것이 분명한 것처럼, 이 죄악 세상의 역사가 끝나고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도 확실하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아무리 박해를 당하고 거절을 당해도 언제나 승리한다. 그것은 역사가 증거한다.
그러나 그 성경 말씀을 거절하는 세력이나 개인은 마침내 구원의 길에서 떠나게 된다. 그 운명의 날, 우리가 어느 편에 서 있을 것인지 오늘 결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우리의 생명은 언제 끝날지 모르며 세상의 마지막도 “생각지 않은 때”(마 24:44)에 청천벽력처럼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공부하신 내용에 대한 문제를 풀어 보시겠습니까?

1. 마흔 두달을 짓밟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1260년 동안 성도를 핍박할 것이다
삼년 반 동안 핍박할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 핍박할 것이다

2. 두 증인은 누구인가?

두 선지자
다니엘과 요한계시록
구약과 신약

3. 무저갱에서 올라와 두 증인을 죽인 세력은 무엇인가?

공산주의의 세력
프랑스 혁명세력
이슬람의 세력

4. 두 증인의 시체를 사흘 반 동안 목도 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성경이 삼 년 동안 금지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이 짧은 시간 동안 핍박을 받았다는 말이다
성경이 석 달 동안 금지 되었다는 말이다

5. 두 증인을 죽이려 했던 곳과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진처럼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세세토록 왕 노릇하였다
그름을 타고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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